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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임문화 비평 평론 웹진 | 게임제너레이션 GG

    게임문화담론을 선도하는 게임문화웹진 게임제너레이션은 게임문화재단이 만들고 (주)크래프톤이 후원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게임비평과 주제탐구를 통해 오늘날의 게임문화담론을 진단하고 비평합니다. GameGeneration, a Korean game criticism webzine, is a magazine that seeks to be lighter than a journal and heavier than a popular magazine. GameGeneration, which explores the social context of contemporary digital games from a critical perspective, is published bimonthly and has an English-language page for overseas readers. [논문세미나] <에이지 오브 원더스 4>의 다양성 이면에 있는 위계적 구조 서도원 26. 8. 10. 이러한 논의는 게임의 특성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을 남긴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설령 게임의 내용이 아무리 진보적인 가치를 담으려 해도 게임 메커니즘이 보수적 가치를 재생산한다면 사실상 게임은 대안우파적 속성을 내재한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으로 연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More SNS에서 게임제너레이션의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세요. 게임제너레이션 메일 구독하기 새로운 업데이트와 뉴스를 등록하신 메일로 보내드립니다. Enter your email here Sign Up Thanks for submitting!

  • 게임문화 비평 평론 웹진 | 게임제너레이션 GG

    게임문화담론을 선도하는 게임문화웹진 게임제너레이션은 게임문화재단이 만들고 (주)크래프톤이 후원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게임비평과 주제탐구를 통해 오늘날의 게임문화담론을 진단하고 비평합니다. GG vol. 31 기억 디지털게임은 기억을 어떻게 게임의 규칙으로 가져오는가? 그렇게 구성된 게임으로서의 기억은 어떻게 기기에 기억되는가? 제5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자 발표 이경혁 제5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에는 총 123편의 응모작이 접수되었습니다. 최종 심사를 거쳐 3편의 작품을 이번 공모전의 당선자로 선정해 아래와 같이 공지합니다. [editor's View] 기록 너머의 기억이 게임과 감응하는 과정에 대하여 이경혁 작은 메모리에 기록되는 수치화된 세이브 데이터부터 플레이어가 게임을 마치고 난 후에 갖는 감정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기억이라는 이름의 넓은 호수 표면을 탐색합니다. 때로 어떤 필자는 표면의 작은 물결에 이끌려 잠수해 들어가기도 할 것입니다. 기록 너머의 기억에 대해 게임이 할 수 있는 많은 말들에 귀기울여 주십시오. 제5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안내 이경혁 게임제너레이션은 한국 디지털게임 비평의 활성화와 신진작가 발굴을 위해 매년 게임비평공모전을 진행해 오고 있으며, 2026년의 공모전을 다음과 같이 진행하고자 합니다. 관심있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겠습니다. 편집장이 답하는 제5회 게임비평공모전 Q&A 이경혁 ***응모를 고민하는 분들이 자주 묻는, 혹은 묻고 싶었을 질문들에 편집장이 직접 답합니다*** 게임 경험의 외재화 역사와 기억의 재전유 양상 이정엽 디지털 게임은 처음 등장 당시 며칠을 두고 길게 플레이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1970년대에 등장한 아케이드 게임은 짧은 시간 동안 동전 투입이 여러 번 반복되어야 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었기에 게임 플레이 역시 짧고 직관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미덕이었다. 반면 가정용 컴퓨터와 콘솔 게임은 아케이드와는 다른 조건 위에 있었다. 아케이드 기판은 개별 게임에 특화된 전용 하드웨어를 쓸 수 있어서 그래픽과 사운드가 훌륭했던 반면, 가정용 컴퓨터와 콘솔은 범용성을 추구해야 했기 때문에 물리적인 표현력에서 오랫동안 아케이드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데이터화된 기억은 무슨 꿈을 꾸는가?- 사이버펑크를 통해 본 게임에서의 기억 이지용 사이버네틱스(1948)의 저자인 노버트 위너(Nobert Wienner)는 그의 저서를 통해 인간의 두뇌와 기계가 질료적으로만 차이를 보일 뿐 구조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가설을 토대로 인간 뇌의 신경계의 작용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이 그대로 기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토대로 1980년대 미국에서는 인간의 두뇌와 기계가 적극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를 상상의 기반으로 하는 ‘사이버펑크(Cyberpunk)’ 장르가 유행했다. 기억을 구성하는 다양한 방법 : 게임에서 기억을 다루는 이유 - When The Past Was Around 장민지 이별은 사랑이 지나간 자리다. 어떤 이는 이별 후 그 사랑의 기억을 영원히 지우고 싶어 하지만, 어떤 이는 기억 속에서 그 사랑이 어땠는지를 끊임없이 되짚는다. 신기하게도 그 기억들은 언제나 정서와 함께 남는다. 그래서 명확하지 않고,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 어쩌면 모든 기억은 '데이터화되지 않았기에' 살아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감정과 기억이 늘 함께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기억은 데이터가 아니고, 명확하지 않으며, 감정과 함께이기에 비로소 추억이 된다. 죽음이라는 기억, 죽음이라는 기록 : 『리턴 오브 디 오브라 딘』 이선인 회중시계의 이름은 플레이어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령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기억하라(memento mortem). 그리고 기억하기 위해, 죽음이라는 개념을 상상하라. ‘기록’될 죽음 위에서 죽음의 ‘기억’을 상기하라. 그러므로 결국, 죽음의 장면(mortem)이 아닌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게임 속의 일지: 대리하는 기억, 보충하는 기억, 통치하는 기억 최건 나는 망설임 없이, 하지만 큰 기대도 없이, J키를 누른다. 일지. 저널. 혹은 퀘스트 로그 등등. 퀘스트와 이야기 전개를 중심으로 삼는 게임들에는 하나같이 일지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일지에는 내가 잊은 모험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어느 마을에서 누구를 만났고, 무슨 이야기를 들었으며, 어떤 부탁을 수락했는지. 그리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적혀 있다. 『관을 가진 신의 손』,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 감추는 기억 이미몽 『프린세스 메이커』를 플레이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경험이 있다. 시간을 들여서 정성껏 딸을 키웠는데, 마지막에 도착한 엔딩이 기대와 전혀 다른 것이었던 경험이다. 게임자체에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어느 수치가 모자랐는지, 어느 계절의 일정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무심코 고른 선택지 하나가 모든 것을 갈랐는지에 대해 게임은 침묵한다. 김갑환에서 도깨비까지 : 게임 속 한국의 코드는 누가 써왔는가 홍성갑 이 태도를 고민함에 있어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게임이 주로 미국과 일본 위주로 개발-발전해 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게임 속의 한국이란, 한국 자신이 만들지 않은 이상은 대부분이 미국과 일본의 시선이게 마련이다. 또 하나는 시간적인 변천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의 경우, 거리가 먼 한국에 대한 정보가 적거나 고증의 필요성이 적었던 것이 2010년대 이전이다.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아: 편안한(cozy)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박이선 고백하자면 나는 싸우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이미 충분히 긴장하며 사는데, 게임에서까지 쫓기고 싸우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게임들에 자꾸 손이 간다. 그리고 이런 게임은 생각보다 많다. 어질러진 물건을 정리하고, 이삿짐을 풀고, 농사를 짓고, 물약을 만들어 팔고, 산을 오르고, 택배를 배달한다. 비슷한 결의 게임들이 하나의 흐름을 이룬 지는 꽤 오래됐고, 우리는 이런 게임들을 흔히 ‘힐링 게임’이라고 불러왔다. 코스믹 호러에 떨어진 인터페이스 웜뱃 <에일리언 2>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테크 덕후인 제임스 카메론의 ‘진심’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을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단적인 예로, 첫 시퀀스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캐릭터는 인간도 에일리언도 안드로이드도 아니다. 리플리가 잠들어 있는 우주선 문을 레이저로 깔끔하게 절삭한 뒤에 재빨리 퇴장하는 산업용 로봇 A와 곧바로 이어서 우주선 내부를 스캔하는 산업용 로봇 B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당신의 기억을 <언패킹>: 정리 게임이 기억을 다루는 방법 박유진 기억은 세부 사항이 완전히 보존된 텍스트의 형태가 아닌 부분적인 이미지의 집합으로 우리에게 떠오른다. 이때 사물은 기억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자신과 관련된 이미지를 무분별하게 소환한다. 기억으로 남을 이들, 기억으로 살아갈 이들 박해인 어릴 적, 할머니는 나에게 어느 겨울 숲에서 곰을 만나 사망한 친척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소 잔인한 이야기라 자세히 서술하진 않겠지만, 할머니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고, 나는 그의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지만, 그 역시 나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그는 곰에 의해 죽은 사람으로 한 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나에 의해 기억되고 있다 묘를 파헤치면 주검이 나올까 –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의 로어 김규리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가 몰두하는 대상은 <다크소울> 시리즈의 로어를 관통하는 그윈과 그 친인척들로 엮인 주요 서사로부터 거리가 멀고, 다른 항목과 접점을 만들어 내기에도 희박해보인다. Hawkshaw는 굴하지 않고 꾸준히 <다크소울 1>로 되돌아가, 끝이 명시적으로 선언된 세계 안에서 여백을 ‘착즙’해내고 있다. : 기억에 접근하는 인터페이스 정찬미 궁극적으로 본작은 바로 이런 물질적 감각의 복원을 통해, 작중 주인공이 끝내 현재로 불러들이기를 거부했던 기억마저 플레이어의 수행 속에서 다시금 호출하도록 강제한다. 모든 내막이 종합되는 에피소드 4(“The Last Session”)가 밝히듯 주인공에게 인터페이스는 스스로의 끔찍한 과오—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를 회피하고 봉합하기 위한 심리적 방어막이었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역설적으로 그 방어막을 끈질기게 통과해 기억(진실)을 다시 구성하게 만드는 유력한 수행인이 된다. [논문세미나] 옛날 전쟁 비디오게임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려주는 것 : <환경을 위한 역설적 투쟁으로서 레트로 폭력> 김지수 최근 우리는 게임의 문제를 기후/환경 문제와 연결짓는 담론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게임장비와 콘솔에 물질적 자원이 투입될수록 전자폐기물(E-waste) 문제가 더 많이 발생하고, 게이머의 플레이 시간이 늘어날수록 탄소배출량이 늘어난다는 기사들이 적잖이 나오고 있다. 이제 게임 플레이는 거의 환경오염의 문제와 불가분이 되었고, 게임회사 또한 게임을 개발한다면 필연적으로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고려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다. [논문세미나] <에이지 오브 원더스 4>의 다양성 이면에 있는 위계적 구조 서도원 이러한 논의는 게임의 특성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을 남긴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설령 게임의 내용이 아무리 진보적인 가치를 담으려 해도 게임 메커니즘이 보수적 가치를 재생산한다면 사실상 게임은 대안우파적 속성을 내재한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으로 연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SNS에서 게임제너레이션의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세요. 게임제너레이션 메일 구독하기 새로운 업데이트와 뉴스를 등록하신 메일로 보내드립니다. Enter your email here Sign Up Thanks for submitting!

  • 「테라 닐」: 안전한 절멸의 행성으로부터

    「테라 닐」 역시 시작시에는 건설을 위해 마련된 빈 공간을 보인다. 하지만 그 공간은 자연의 존재감 조차도 희박하다. 이 모든 공간은 ‘오염된 불모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플레이어는 이 장소를 자원화해 부강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 자체를 자연의 공간으로 되돌릴 책임을 부여받는다. 즉 이 빈 공간에 올려놓는 모든 ‘건물’들은 그 자체가 자본적 축적을 위함이 아닌, 이 빈공간에 자연의 가능성을 심어놓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플레이어는 각 스테이지가 요청하는 정도의 ‘자연 회복’을 달성해야만 한다. < Back 「테라 닐」: 안전한 절멸의 행성으로부터 27 GG Vol. 25. 12. 10.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문명적 통치를 다룬다. 그 시조인 맥시스의 「심시티」를 시작으로 유비 소프트「ANNO」시리즈, 프론티어 디벨롭먼트의 「주 플래닛」이나 「플래닛 코스터」를 시작할 때 플레이어를 반겨주는 것은 너른 자연의 공간이다. 플레이어에게는 이러한 ‘자연적 풍경’을 깎아내고 변형시키고 자원화할 수 있는 어떠한 특권이 주어진다. 이 관계를 역산해보자. 이 게임들에서 ‘자연의 풍경’이란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공간, 생동하지 않는 세계로 규정된다. 「심시티」를 켜고 비어있는 세계를 가만히 둔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한히 시간을 보내보자. 화면에 수놓아진 자연적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조차 없을 것이다. 이 공간들은 생동하지 않는 세계로 해석되는 게 아니다. 애초에부터 생동하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오직 플레이어에 의해 문명적 발전이 이루어지도록 제공된 공간일 뿐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자신의 저서 『Modest_Witness@Second_Millennium』에서 맥시스의 ‘심 시리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기 있는 맥시스사의 게임 「심앤트」, 「심어스」, 「심시티」, 「심시티 2000」 그리고 「심라이프」는 모두 컴퓨터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에 기반한 지도 제작 게임이다. 이 게임들에서는, 생명 그 자체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도 제작이 곧 세계 제작이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사이버 공간화의 데카르트적 격자 관습 안에서, 이 게임들은 사용자들이 탐험, 창조, 발견, 상상, 개입의 서사 속에서 자신을 과학자로 여기도록 부추긴다. 데이터 기록 실천, 실험 프로토콜, 세계 설계를 배우는 것은 이 테크노사이언스 영역에서 정상적 주체가 되는 과정의 매끄러운 일부다. 지도 제작 실천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목적을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형성하는 투영법projections을 배우는 것이다. 각 투영법은 특정한 종류의 관점perspective을 생산하고 함축한다.” [1] 그런 의미에서 프리 라이브스의 「테라 닐」은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역 건설게임’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운 이 게임은 ‘발전하기 위한 건설’이라는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다. 「테라 닐」의 목적은 자연의 재생에 있다. 「테라 닐」 역시 시작시에는 건설을 위해 마련된 빈 공간을 보인다. 하지만 그 공간은 자연의 존재감 조차도 희박하다. 이 모든 공간은 ‘오염된 불모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플레이어는 이 장소를 자원화해 부강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 자체를 자연의 공간으로 되돌릴 책임을 부여받는다. 즉 이 빈 공간에 올려놓는 모든 ‘건물’들은 그 자체가 자본적 축적을 위함이 아닌, 이 빈공간에 자연의 가능성을 심어놓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플레이어는 각 스테이지가 요청하는 정도의 ‘자연 회복’을 달성해야만 한다. 여기에 ‘역 건설게임’을 완성시키는 또 다른 메커니즘이 있다. 플레이어는 모든 스테이지에서 자연을 완전히 되살린 뒤, 자신의 모든 건설물을 파괴하고 이 공간을 떠나야 한다. 이를 통해 완전히 인간으로부터 유리되어있는, 스스로 생동하는 자연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플레이어는 마지막의 철수 공정을 마친 뒤 원한다면 얼마든지 재생된 세계를 관람할 수도 있다. 「테라 닐」에 최초로 제공되는 빈 땅은 「심시티」 또는 본 장르의 다른 게임들에서 보이는 빈 땅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에 가깝다. 「심시티」의 그곳은 자연인 척 모사되었을 뿐 진짜 의미에서의 자연은 아닌 공간이다. 그것은 생명의 형태를 패러디한 공간이며, 동시에 문명의 통치가 ‘필요한’ 그저 사멸되어 있는는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 「테라 닐」의 빈 공간은 본래부터 멸망의 음울함을 가진 공간이다. 「테라 닐」이라는 제목조차 제국주의 시절 원주민의 땅을 ‘주인 없는 땅’이라 명명할 때 사용한 단어 ‘Terra Nullius’를 떠오르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게임의 역학에 있어 양 공간의 기능과 목적은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테라 닐」은 그 죽음의 이미지를 전면화함으로서 장르적 기능을 역행해 재생이라는 목적을 도출해낸다. 「테라 닐」은 ‘역 건설’이라는 게임적 메커닉을 통해 기존의 건설 시뮬레이션들이 가지고 있던 (해러웨이가 정의한) ‘지도그리기’의 역학을 무참히 드러내버린다. 「테라 닐」의 빈 땅 그런 의미에서, 「테라 닐」은 일종의 생태주의 게임이다. 그리고 「테라 닐」이 생태주의 게임인 이유는 기존의 건설 경영 게임들이 가진 반 생태주의적 특성 때문이다. 「테라 닐」의 혁신성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들이 가진 ‘지도 그리기’의 역학, 문명에 의한 자연 통치의 보편화에 저항할 때 기능한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관점을 바꿀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가 진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건설 시뮬레이션’의 기초적인 메커닉이라는 점이다. 그곳이 오염된 땅이라는 전제가 있다고 한들 플레이어는 올바른 방식으로 건물을 세우고, 그를 통해 포인트를 모으고, 그 포인트를 소모해 다시금 건물을 세워 나가는 방식으로 ‘빈 땅’을 (건물이 아닌 식물로) 채워나간다. 리뷰 등에서 종종 지적되고 있듯, 「테라 닐」에는 수상한 미스터리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플레이어가 재생해야하는 이 세계의 문제가 ‘왜’ 일어났는지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건물을 짓기 위한 (게임 내에서는 녹색의 나뭇잎으로 표현되는) 포인트의 정체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미묘한 미스터리는 이 게임에서의 문명과 자연 사이에 설명되지 않는 공백이 도사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세계는 복원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이 세계는 과연 어떤 연유로 이렇게 파괴된 것일까? 핵전쟁이 있었을까? 극심한 환경오염의 결과인가?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인가? 아니면 운석 충돌에 의한 예상치 못한 파멸인가? 이 조건의 공백은 플레이어의 행위가 올라설 지지대를 치워버린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는 자연을 ‘재생’하라는 미션을 건내고 있을 뿐이다. 즉 플레이어가 지금 수행하는 수복이 실패에 대한 책임의 행위인지, 세계의 재건이라는 극복의 의지인지 모호하게 굴고 있는 셈이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재생의 기술을 가진 플레이어와 재생을 필요로 하는 땅이라는 이분화된 관계 뿐이다. 말하자면 이 조건이 지워지는 순간, 플레이어에게는 일정한 ‘선한 의지’만이 주어진다. 책임에 대해 설명하지 않기에 그 행위 전체가 자연의 수복이라는 고귀함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플레이어에게 ‘위대한 일’을 위해 남겨져 있는 이 공간이 바로 「테라 닐」의 비어있는 땅이다. 이 조건은 에코모더니즘의 비전과 연결된다. 2015년 에코모더니즘 선언문An Ecomodernism Manifesto과 함께 발족한 이 사조는 기술 발전을 통해 자연을 보호하고 인간의 더 나은 삶Well-being을 증진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환경 철학이다. 에코 모더니스트들은 인류세Anthropocene의 한계를 인정하며 지금의 세계를 ‘좋은 또는 위대한 인류세’로 만들겠다는 기치를 내건다. 이 사조는 다양한 방면에서의 비판을 겪었다. 특히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이들이 인류세를 ‘퇴보의 상징이 아니라 극복을 통해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게 해주는 전환’으로 받아들이며 ‘흥분과 기쁨의 기색을 보이며 환영하고 있다’ [2] 고 강하게 비판한다. 「테라 닐」이 ‘땅’을 다루는 태도 역시 이러한 비판의 도마 위에 있다. 땅의 탄생 조건을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는 이 게임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좋은 또는 위대한 재생’에만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와 동시에 게임에 작동하는 모든 기술적 토대는 자연에 과시적으로 작동한다. 어떻게보면 「테라 닐」의 ‘땅’은 자연적으로 재생할 수 없다는 음울한 자연성을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심시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생하지 못하는 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자본을 증가시키는 것이든, 자연을 재생시키는 것이든 ‘빈 땅’으로 규정된 장소들은 스스로 생장하지 못하는 한계지어진 곳이다. 오직 기술만이 변화를 작동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테라 닐」은 기존의 건설 시뮬레이션과 공명한다. 녹색의 자원으로부터 한편 이 게임이 다루는 기술은 상당히 고도의 기술이다. 모두 말라버린 지상에 충분할만치 지하수를 공급할 수 있는 펌프를 시작으로, 주변의 온도와 습도를 극적으로 변동시킬 수 있는 장비, 그에 더해 이러한 기술을 작동시킬 수 있는 고효율의 발전기가 사용된다. 하지만 게임은 이러한 고능한 장비를 ‘어떠한 자원을 통해’ 설치하는지 역시 설명하려들지 않는다. 각 건물의 설치는 게임 내에서 획득하는 ‘녹색의 포인트’를 통해 설치할 수 있는데, 이 포인트는 자연의 회복 정도에 따라 일정량 확보되는 구조다. 게임이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는 이 두 개념의 관계, 즉 ‘자연의 회복’과 ‘기술의 설치’는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지 않는다. 애초에 이 관계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과연 자연으로부터 무엇인가 채취하지 않고서 이러한 기술을 작동시킬 수 있는가? 플레이어는 기술을 통해 자연을 ‘재생시키는 국면’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대체 이 기술은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가? 도저히 설명해줄 수 없는 이 관계는 「ANNO 1800」에 대한 반복된 비판과 연결되는 구석이 있다. 해상로를 통한 자원의 보충을 기반으로 하는 「ANNO 1800」은 역사적으로 존재했을 원주민과 착취 노동의 조건을 은근슬쩍 지워버린다. 이 게임에는 그저 일용직 노동자인 호날레로jornalero와 전문 노동자인 오브레로obrero라는 자발적인 존재들이 묘사될 뿐이다. 즉 플레이어에게 있어 어떠한 자원적 획득은 그 채집의 노동과 ‘마찰 없는 관계’로 정리되어 있다. 《PC Gamers》의 사무엘 호티Samuel Horti는 ‘어떤 식으로 보더라도 식민지화를 노예제, 잔혹함, 폭력, 질병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3] 라며 이러한 구조를 강하게 비판한다. 결국 이 끊어진 관계를 통해 플레이어는 자원의 운용에 어떠한 심적 불편함도 겪지 않고 자연스럽게 발전으로 이행하게 된다. 「테라 닐」의 조건도 마찬가지다. 고도의 기술 그리고 설치와 운용이라는 고도의 코스트를 요하는 작업들이 어떠한 물적 조건 하에 이루어지는지 제거됨으로서, 이 게임은 혹여나 기술이 가지고 있을지 모를 자연 착취의 가능성을 은폐한다. 물론 이것을 밸런스의 개념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기술이라는 문명의 투입은 자연의 재생 정도와 일정량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제한다면 이 관계는 포인트의 ‘소모’가 아니라 지도 위에 세워진 건물의 ‘점유도’와 대비되는 자연의 회복 ‘정도’로 묘사되는 것이 더 알맞았을지도 모른다. 즉 이 메커니즘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다. 「테라 닐」의 메커닉은 매우 알기 쉬운 건설 시뮬레이션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는데, 특히 일정한 건설을 통한 ‘수익’과 그 자본의 ‘소비’를 통한 성장 모델은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어찌보면 「테라 닐」은 건설 시뮬레이션에 애초부터 내재되어 있는 착취적 모델을 통해 그 자체를 비판하려는 모순된 그림을 그리는 셈이다. ‘자본의 획득과 소비’라는 관계가 근간이 되어있는 한 비판이라는 목적에는 완전히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떠한 스킨을 사용하고 있다 한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모델로 삼고 있다면, 그저 현 인류의 보편적 사유에 동참하고 있을 뿐이다. 분재화된 자연으로 「테라 닐」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자연은 무엇인가. 어쩌면 이 게임의 가장 흥미로운 메커닉인 철거 국면에 그 답이 있다. 각 스테이지의 말미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건설물들을 해체하고 그 땅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한다. 해체에도 포인트가 소모되기 때문에 건설의 과정에서부터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를 미리 설계해 둘 필요가 있다. 아슬아슬하게 포인트를 소모해 철거 국면을 끝낸 뒤 모선과 함께 날아오를 때의 쾌감이 「테라 닐」의 핵심적인 재미다. 환경 조성에 의한 보너스 포인트의 목록들 하지만 이 때 남겨진 땅은 해러웨이적으로 ‘지도화된’ 땅이다. 플레이어는 이 아름다운 땅을 만들기 위해 땅 전체의 온도, 습도, 방사능의 양 등의 수치를 안정적으로 조절해야 한다. 각 스테이지마다 제시되는 ‘일정한 정도의 환경 조건’을 달성하면 대량의 포인트를 보상으로 받는다. 특정한 환경의 조성은 동물들의 복귀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지나치게 기적같은 상황은 전적으로 수치적 관리에 대한 일종의 보상체계다. ‘동물의 귀환’이라는 상당히 복잡하고 섬세한 생태적인 결과가 그저 (광의의) 경제적 결과로서 부여되는 것이다. 솔직해지자. 이 동물들은 「심시티」에서 RCI의 밸런스를 명확히 했을 때 보상으로 받는 인구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즉 플레이어가 ‘떠나고 난 뒤’ 남겨진 아름다운 땅은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기술적 관리에 의한 보상물이다. 재생을 거친 인간의 ‘철수’는 이 보상을 더 아름답게 남기기 위한 극단의 분리주의적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윌리엄 크로넌William Cronon의 관점을 따라가보자. 크로넌은 『The trouble with Wilderness : or Getting back to the wrong nature』에서 야생wilderness라는 개념이 19세기 낭만주의에 의해 발명된 문화적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논한다. 이것이 발명품이라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이 ‘야생’이 전적으로 문명 내부에서의 이상화를 위해 자연-문명이라는 이원화를 이용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크로넌이 보는 발명된 야생이란 문명이 바라보는 ‘숭고하고 신성한 사원’이자 ‘강인한 개척자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근간이 된다. 야생을 ‘인간이 거주하지 않는 곳’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이 거주하는 곳’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이 은폐된다. 그리고 인간과 끝없이 분리된 이상적 공간인 자연은 오히려 인간이 점유한 곳으로부터 점차 밀려난다는 것이다. [4] 도대체 「테라 닐」에서 재생을 주도하는 인간이 거주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 곳에 자연은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가? 재생된 자연에서 인간이 떠나야 함을 당위로 만든다면, 지금 인간의 세계에는 완전히 자연과 격리되어 있는가? 「테라 닐」의 마지막 미스터리는 크로넌이 설명하는 불안의 위계를 담지한다. 「테라 닐」의 인류가 바라보는 자연이란 스펙터클의 대상으로서 잔존하는 거대화한 분재나 다름없는 것 아닐까? 「테라 닐」의 플레이를 끝내고 나면 그런 의문에 봉착한다. 왜 이 게임의 인류는 재생된 자연과 하나되어 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 자연의 재생이 가능한 기술을 갖추고 있음에도 자연과의 격리를 선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쩌면 「테라 닐」의 인류가 거주하는 곳은 게임의 배경이 되는 행성에서 까마득히 먼 또 다른 행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곳에는 억류된 오염과 방사능과 오물이 득시글거리고 있을지 누가 아는가. 재생의 기술이 보여주는 모순의 빈 공간에는 이렇듯 분리된 불안의 상상력이 가득 차오른다. 크로넌은 이러한 분리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는다. “우리의 과제는 인간과 비인간, 비자연과 자연, 타락과 비타락이 세상을 이해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개념적 지도로 기능하는 양극적 도덕 저울에 따라 사물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자연적이면서도 문화적인 풍경의 전체 연속체를 포용해야 한다. 그 안에서 도시, 교외, 전원, 야생은 각각 고유한 적절한 위치를 가지며, 우리는 불필요하게 다른 것들을 폄하하지 않으면서 그 각각을 찬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멀리 사는 이국적인 타자만큼이나 내면의 타자와 옆집의 타자를 존중해야 한다. 이는 다른 자연적 사물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교훈이다. 특히 우리는 도시에서 야생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집"이라는 단어 안에 어떻게든 포함될 수 있는 공통의 중간 지점을 발견해야 한다. 결국 집은 우리가 생계를 꾸리는 곳이다. 그곳은 우리가 책임을 지는 장소이며, 그 안에 있는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지속시키려 노력하는 장소다.” [5] 역 건설이라는 메커닉은 결국 그 땅으로부터 떠나는 결과로 연결된다. 플레이어가 「테라 닐」의 각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볼 수 있는 마지막 이미지는 재생된 자연을 향유할 수 있는 신적인 관점의 감상 모드다. 나무가 우거지고, 비가 내리고, 바다에 산호가 가득한 이 풍요는 인간의 관점으로는 결코 향유할 수 없다. 감상 모드를 끝내고 나서면 사라지는 이 환영과도 같은 이미지에는 실제로 플레이어를 위한 자리는 없다. 잠시나마라도 이 안에서 나무를 베고, 물을 긷고, 낚시를 하는 체험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게임을 모두 끝내면 모든 동물과 식물의 샘플을 실은 우주선이 우주를 향해 솟구치는 감격스러운 광경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플레이어를 이끌어온 환경 재생 매뉴얼이 그 우주선의 내부에 안치된다. 이는 환경의 재생을 끝내고 ‘그들만의 삶’을 인정하며 또 다른 재생의 세계를 찾아나서는 아름다운 광경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구의 샘플들을 통해 어떠한 환경을 ‘테라포밍’하기 위한 준비처럼도 보일 수 있다. 「테라 닐」의 플레이 플로우가 그 모든 과정을 증명한다. 우주선이 ‘지구의 것’을 가지고 날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상상해보자. 인류는 지구를 두고 다른 행성으로 이주했으며, 지금 가지고 날아가는 모든 샘플과 자료는 그들의 행성을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또 다른 행성을 ‘지구화Terraforming’하려한다는 상상은 끊어낼 수 없다. 수복이 끝난 행성은 홀로 놔둔 채, 인간은 우주로 나아간다. 아니면 조금 더 급진적으로 나가보자. 혹시 「테라 닐」의 우주에는 인류가 없는 것 아닐까? 이 세계를 재생하려는 의지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 다른 차원, 다른 의식에 의해 발현되는 것 아닐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테라 닐」의 세계 내에는 그 어떤 인간의 흔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 훼손의 업을 가진 인간에 대한 징벌적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런 환경이 제공하는 것은 우리는 절대 가지지 못할 ‘안전한 절멸’의 경험이다. 모니터 바깥의 인간, 그러니까 재생 주체로서의 플레이어는 세계 내부와 무관하게 현전하며 행성을 관리한다. 비어있는 공간에서 절멸의 아픔을 낭만적으로 느끼는 이 주체에게 있어, 최종적으로 제시되는 행성은 그저 잘 가꿔진 분재의 일종일 뿐이다. 그렇다면 샘플을 가지고 떠나는 우주선의 아름다운 상승은 우주 전체가 분재화될 씨앗 운반자로 기능하는 것이다. 안전한 절멸의 경험은 결국 무한한 ‘테라 눌리우스Terra Nullius’가 펼쳐진 가능성의 우주를 꿈꾸게 한다. [1] Donna Harraway(1997), 『Modest_Witness@Second_Millennium』, Routledge [2] 클라이브 해밀튼 지음, 정서진 옮김, 『인류세』, 이상북스(2018) [3] Samuel Horti(2019), 「What Anno 1800 gets wrong, and right, about colonialism and the Industrial Revolution」, PC Gamers [4] William Cronon(1995), 『Uncommon Ground: Rethinking the Human Place in Nature』 [5] William Cronon(1995), 앞의 책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editor's view] 댓글로 사람이 죽는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심 어스>라는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특정 생물군을 지능을 가진 사회적 군집체로 진화시킬 수 있는데, 이들이 기술발전만 급격하게 이루고 철학과 윤리 발전이 늦어지면 결국 핵전쟁으로 멸망하는 경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전쟁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사회에서 댓글로 사람이 죽는 시대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 Back [editor's view] 댓글로 사람이 죽는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14 GG Vol. 23. 10. 10. 댓글로 사람이 죽는 시대입니다. 90년대 초반, PC통신이 미래의 희망으로 여겨졌던 시대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까요? 직접민주주의가 기술을 딛고 마침내 가능해졌다는 장밋빛 환상, 영화 <접속>으로 대표되는, 선의를 가진 익명의 사람들이 서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이버스페이스의 도래. 당시의 희망을 함께 나눴던 저로서도 오늘날 구축된 사이버상의 커뮤니케이션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부정적인 측면들을 품고 있습니다. 몇몇 미디어들은 특히 게임 안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좀더 문제적으로 바라봅니다. 멀티플레이 게임이 제시하는 상황 자체가 공격적이고, 그렇기에 커뮤니케이션 또한 더욱 공격적이라고요. 그러나 저는 이 주장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른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멀티플레이 게임과 채팅은 사실상 같은 기술적 뿌리를 가지고 있고, 역으로 채팅과 댓글이 있는 모든 곳은 공격적입니다. (GG가 댓글 기능을 구현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14호에서 우리는 인게임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로 대주제를 설명하고자 했지만, 이 용어는 다소 부적절합니다. 채팅, 이모티콘, 감정표현, 보이스챗은 규칙에 의한 상호작용인 디지털게임에서 규칙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하게 규칙 하에 이루어지는 게임에 영향을 주고, 게임의 승패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인도 아니고 인이 아닌 것도 아닌 이 애매함은 때로는 가상의 공간에서 벌이는 매직 서클 안에서의 게임이라는 개념을 현실과 강하게 연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문제적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은 게임이라기보다 오늘날의 랜덤 매칭 멀티플레이가 만드는 익명성에서 기인합니다. 우리는 익명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때 가져야 할 에티켓을 만드는 일에서 그만 시기를 놓쳐버린 것은 아닐까요? 기술발전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과거보다 더 나은 삶이 기술에 의해 제시된다고는 하지만, 단지 기술만으로 우리의 미래는 아름답게 채색되기 어렵습니다. <심 어스>라는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특정 생물군을 지능을 가진 사회적 군집체로 진화시킬 수 있는데, 이들이 기술발전만 급격하게 이루고 철학과 윤리 발전이 늦어지면 결국 핵전쟁으로 멸망하는 경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전쟁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사회에서 댓글로 사람이 죽는 시대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게임 안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시대가 아닐까 합니다. 이번호도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게임 속의 일지: 대리하는 기억, 보충하는 기억, 통치하는 기억

    나는 망설임 없이, 하지만 큰 기대도 없이, J키를 누른다. 일지. 저널. 혹은 퀘스트 로그 등등. 퀘스트와 이야기 전개를 중심으로 삼는 게임들에는 하나같이 일지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일지에는 내가 잊은 모험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어느 마을에서 누구를 만났고, 무슨 이야기를 들었으며, 어떤 부탁을 수락했는지. 그리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적혀 있다. < Back 게임 속의 일지: 대리하는 기억, 보충하는 기억, 통치하는 기억 31 GG Vol. 26. 8. 10. 내가 왜 폐허에 와 있었지 폭풍 같은 한 학기 강의가 모두 끝났다. 바쁜 만큼 학기 중에는 연구에 할애하는 시간도 줄어든다. 바쁠 때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 가장 먼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은 슬프다. 정규학기와 계절학기가 진행되는 동안, 게임을 켜지 못했다. 내 캐릭터와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반년 만에 <발더스 게이트 3>을 켰다. ‘내가 왜 폐허에 와 있었지?’ 그리고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모니터 속 내 캐릭터가 어째서 폐허가 된 마을에 와 있는지 몰랐다. * <발더스 게이트 3> 2막의 무대가 되는 라이스윈 마을 폐허의 일러스트 인지 기능 장애는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렇다기엔 이미 오랜 시간 같은 일을 겪어 왔다. 방대한 퀘스트, 서사, 세계를 구현한 롤플레잉을 좋아하는 게이머들은 종종 이런 일을 겪곤 한다. 광활한 게임 속 세계에서 어디를 방문했고 어디는 아직 방문하지 않았는지, 수많은 퀘스트 중 무엇을 해결했고 무엇이 진행 중인지, 다음으로 무엇을 하려 했는지, 캐릭터를 어떻게 성장시키려 했는지, 동료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 인벤토리를 가득 채운 잡동사니들을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했는지. 나는 마치 기억을 잃은 채 폐허 한복판에서 갓 깨어난 것처럼 멍하니 화면만 바라본다. 텅 빈 응시는 화면 우상단에 멈춘다. ‘일지 [J]’ 나는 망설임 없이, 하지만 큰 기대도 없이, J키를 누른다. 일지. 저널. 혹은 퀘스트 로그 등등. 퀘스트와 이야기 전개를 중심으로 삼는 게임들에는 하나같이 일지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일지에는 내가 잊은 모험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어느 마을에서 누구를 만났고, 무슨 이야기를 들었으며, 어떤 부탁을 수락했는지. 그리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적혀 있다. * <발더스 게이트 3>의 퀘스트 일지 “우리는 라파엘의 오랜 적을 상대해야 한다.” 기억이 돌아온 것 같지는 않다. 라파엘이 정확히 누구였는지, 오랜 적은 또 누군지, 그리고 내가 왜 이 일을 맡겠다고 했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그런데도 나는 일지에 따라 캐릭터를 ‘영묘’로 이동시킨다. 일지가 그러라고 하니까. 오토의 수첩은 기억하고 있었다 철학자 앤디 클라크(Andy Clark)와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는 그들의 논문 「확장된 마음(The Extended Mind)」에서 오토라는 인물을 제시한다. 오토는 알츠하이머병 때문에 새로운 정보를 생물학적 기억에 안정적으로 보존하지 못한다. 그래서 필요한 정보를 수첩에 기록하고, 무언가를 알아야 할 때마다 그것을 펼쳐본다. 오토가 과거 일터의 동료를 떠올려야 한다고 해보자. 그는 그 동료를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대신 수첩을 확인한다. 클라크와 차머스의 주장은 ‘수첩이 기억에 도움이 된다.’라는 것이 아니다. 수첩의 정보가 오토의 사고와 행동에 안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인지 과정 바깥에 놓인 우연한 도구가 아니라 그 과정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 즉 인지 과정이 두개골 안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음은 더 넓게 퍼져있다. 사물은 물론이거니와 신체에까지. *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는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은 자신의 신체를 수첩으로 사용한다. 게임의 일지는 클라크 및 차머스가 말하는 확장된 마음에 부합하는 유력한 사례다. 플레이어는 NPC가 한 말을 모두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할 필요도 없다. 필요할 때 로그를 펼치면 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대화를 대체하는 그 기록을 대체로 의심하지 않으며, 그 신뢰를 바탕으로 탐험하고,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수집한다. 몇 달 동안 게임을 하지 않았더라도, 일지라는 확장된 기억, 확장된 마음을 통해 플레이어는 자신의 행위를 다시 조직한다. 하지만 오토의 수첩과 게임의 일지 사이에는 작아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클라크와 차머스가 확장된 마음을 논할 때 명시적으로는 다루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저자성이다. 오토의 수첩의 저자는 오토 자신이다. 반면, 게임의 일지는 다르다. 게임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기억시키기로 한 것이 적혀 있다. 물론 일지의 내용이 플레이어의 행위를 완전히 배신할 수는 없다. 게임 시스템은 플레이어가 했던 행위에 부합하는 내용을 일지에 기재한다. 내가 직접 적지 않아도, 내 행위에 부합하는 내용을 게임 시스템이 대신 적어준다면, 저자성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록을 넘어서는 일지의 기억 그럼에도 저자성은 유의미한 차이를 형성한다. 저자성의 문제는, 일지가 ‘사실을 기록’하여 플레이어의 기억을 대신하는 것을 넘어 플레이어의 마음이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지까지 규정한다는 데서 발생한다. ‘북쪽 숲으로 가라.’ ‘탈주한 노예를 되찾아 올 것.’ ‘고블린으로부터 마을을 방어하라.’ ‘라파엘의 오랜 적을 상대해야 한다.’ 게임의 일지는 선을 넘는다. 이래라저래라 명령한다. 일지의 기억은 그저 과거의 사실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들은 대개 전망 기억(prospective memory)이다. 즉, 미래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도를 기억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반년 만에 돌아온 플레이어가 행위를 이어가게 한다. 이런 점에서 일지의 핵심은 사건을 기록하는 것 이상이다. 벌어진 사건을 넘어 의도와 전망까지 건드린다. * <발더스 게이트>의 일지는 플레이어의 감정, 판단 등을 대신 기술한다. 게임의 일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느끼지도 않은 감정을 대신 기술하거나, 하지도 않은 판단을 대신 내리기도 한다. “내 목숨을 노린 시도야 우스웠지만 , 이보다 더한 위협이 뒤따를 것 같아 두렵다 .” 1998년에 출시된 <발더스 게이트>의 일지는 플레이어를 대신해 위와 같이 말한다. 내 목숨을 노린 시도는 ‘우습게’ 여겨졌으며, 반면 이보다 더한 위협은 ‘두려움’을 일으켰다. 일지가 대신 써준 정서는 게임의 서사에 지극히 부합한다. 그럴 수 있다. 일지가 기술한 대로 느낀 플레이어도 전 세계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다만 나의 경우엔 아니었다. <발더스 게이트>를 수십 회 플레이한 당사자로서, 단 한 번도 그런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다. 새벽에 몰래 게임을 하다 징치(懲治)를 당할까 봐 두려웠다면 모를까. 저자성의 차원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이 이곳이다. 당연히 오토는 할 일에 관한 전망 기억을 수첩에 적을 수 있다. 일주일 뒤에 할 일, 특정 인물을 만났을 때 할 말 등, 미래를 향한 의도와 전망은 명령의 형식으로 수첩에 기재된다. 감정과 판단도 충분히 가능하다. 행복했던 기억과 그때의 감정을 잊지 않고 그것이 다음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 오토는 자신의 감정을 수첩에 적을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수첩에 담긴 명령, 감정, 판단의 ‘열람자’는 ‘저자’와 일치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여전히 ‘의식 내용으로서의 사실’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그것은 자기지배의 일환이다. 그에 비하여 일지의 저자는 플레이어가 아니다. 게임 시스템이 플레이어의 행위에 부합하는 내용을 대신 기록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의식에 없던 내용을 기술해 나갈 때, 그때 비로소 오토의 수첩과의 차이가 발생한다. 자기지배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하는 기록, 보충하는 기록 나의 감정, 판단, 의도에 대한 기록이 자기지배의 일환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원본적 의식에 없던 것을 개발자가 텍스트를 통해 보충한 결과인 상황, 그것이 바로 게임의 일지다. 그 지점에서 나타나는 것은 ‘대리보충(supplément)’이자 타의에 의한 통치다. 왜냐하면 그 순간 게임의 일지는 그저 외장 저장장치이기를 그만두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의 의도, 감정, 판단을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하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지는 플레이어의 마음을 확장할 뿐 아니라, 그 마음을 통치한다. 물론 플레이어의 행위 역시 일지를 통치한다. 플레이어의 행위에 따라 서로 다른 텍스트가 일지에 기록된다. 일견하기에 기준은 플레이어의 행위처럼 보인다. 순수한 반영론자들은, 일지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의 기억을 대신하는 보조물일 뿐이고, 완전한 기억을 지닌 플레이어에게는 애초에 필요하지 않았을 무엇이며, 살아 있는 의식의 초라한 사본이자 미메시스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진짜배기는 언제나 플레이어의 생생한 의식이고, 일지는 그 의식이 부재할 때 빈자리를 잠시 메우는 외적 도구에 불과하다. 원본이 있고, 그것의 열화판이 있다. 살아 있는 말이 있고, 그것을 뒤늦게 받아 적은 기록이 있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문제 삼은 것이 바로 이 일방적, 위계적 관계다. 서구 형이상학은 오랫동안 문자를 말의 부차적 기호로, 살아 있는 현전(現前)에 덧붙은 파생물이자 위험한 잉여로 다루어 왔다. 말은 정신에 가깝고, 문자는 그 말을 베낀 사본이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 구도를 ‘대리보충’이라는 한 단어의 이중성으로 무너뜨린다. 대리보충은 더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대신하는 것이다. 대리보충은 한편으로 이미 충만한 것에 덧붙는 잉여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원본의 선행하는 결핍을 대신 메우는 대체물이다. 이 두 기능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실이 폭로하는 것은, 대리보충이 채우는 그 원본이 처음부터 완전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핍은 나중에 벌어진 사고가 아니라 애초의 조건이었다. 게임의 일지가 정확히 그러하다. 반년 만에 폐허에서 눈을 떴을 때, 일지의 기록이 수행하는 것은 반년 전의 내 의식에 대한 정확한 재현이 아니다. “라파엘의 오랜 적을 상대해야 한다.”라는 기록은 나의 굳은 의지를 받아 적은 것이 아니다. 그런 굳건한 마음 같은 것은 없었다. 그것은 일지가 만들어낸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복종한다. 내 캐릭터의 목숨을 노린 시도에 대한 조소와 불안 같은 것은 없었다. 그것은 일지가 만들어낸다. 그리고 나는 그 감정선에 따라 이후의 서사를 대한다. 일지는 플레이어의 의식의 열화판이 아니라, 애초에 플레이어의 의식이라는 원본에 비어 있던 자리를 채워주는 대리보충이자, 플레이어에 대한 통치다. * <발더스 게이트 3> 서사의 핵심인 일리시드(illithid) 종족은 정신 조종을 통해 다른 존재의 의식에 명령, 감정, 판단을 주입할 수 있다. 대리보충은 보조물로 시작하지만 끝내 원본의 지위를 찬탈하고 지배적 위치에 선다. 섬겨야 할 주인이 처음부터 없었으므로, 대리보충은 아무도 섬기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 주인이 된다. 물론 또 다시 후속하는 대리보충에 의해 제위를 선양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오토의 수첩이 타율적 통치로 전화하지 않는 것은, 열람자와 저자가 모두 오토 자신이어서 결핍의 자리에 여전히 자기지배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임 시스템에 저자의 자리를 넘겨준 일지는, 마음을 확장하는 동시에 확장된 그 마음을 통치한다. 확장과 통치는 대리보충이라는 하나의 운동이 지닌 두 얼굴이다. ‘내가 왜 폐허에 와 있었지?’ 반년 전의 내 의식에 현현했던 판단, 의도, 감정이 누락된 자리. 그 자리에 일지가 들어선다. 나는 J키를 누르고, 일지가 말하는 대로 영묘로 향한다. 내가 그리로 가는 것은 그리로 가려던 기억이나 의도가 내게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일지에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이다. 폐허에서 깨어난 플레이어는 도구를 손에 쥔 주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읽는 텍스트에 의해 비로소 세워지는 자다. 그에게는 일지 바깥이 없다.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에게 기록이 전부였던 것처럼. Tags: 퀘스트 로그, 발더스 게이트 3, 확장된 마음, 대리보충, 자크 데리다, RPG, 게임과 철학, Baldur's Gate 3, Extended Mind Theory, Quest Log, Jacques Derrida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철학연구자) 최건 철학연구자로서의 정체성과 게임애호가 및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강의, 강연, 연구, 저술, 번역 활동에 임해왔으며, 현재는 인하대 등에서 학생들과 사유를 공유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 [Editor's View] AAA의 반대편을 향한 탐색

    이를 테면 B급 게임이라고 불리는 게임들이 그러합니다. 특유의 감성을 아예 하나의 코드로 삼아 발전하는 B급 장르는 영화나 만화 등에서의 감성을 이어가며 게임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얹지만, 이른바 ‘똥겜’으로 불리는 그룹들 또한 존재합니다. 그저 못 만들었다고만 평가하기에는 그곳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 Back 05 GG Vol. 22.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아: 편안한(cozy)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고백하자면 나는 싸우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이미 충분히 긴장하며 사는데, 게임에서까지 쫓기고 싸우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게임들에 자꾸 손이 간다. 그리고 이런 게임은 생각보다 많다. 어질러진 물건을 정리하고, 이삿짐을 풀고, 농사를 짓고, 물약을 만들어 팔고, 산을 오르고, 택배를 배달한다. 비슷한 결의 게임들이 하나의 흐름을 이룬 지는 꽤 오래됐고, 우리는 이런 게임들을 흔히 ‘힐링 게임’이라고 불러왔다. < Back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아: 편안한(cozy)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31 GG Vol. 26. 8. 10. @pixabay JerzyGórecki 아침 출근 전에 집 한 채를 청소하고 나왔다.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져 아침 식사를 마치고도 삼십 분이 남은 날이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버려진 별장 한 채를 청소하기로 했다. 그곳은 눈 내리는 설산 한가운데의 숲속 산장이었다. 거실에서는 벽난로가 뭉근하게 타오르고 있었고, 창밖으로는 온통 눈 덮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겨울 스포츠를 즐길 때 사용하는 숙소인 듯했다. 집주인이 보내온 의뢰서에는 야외에 쌓인 눈을 치우고 실내를 청소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여유가 된다면 오래된 계단을 손보고,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위해 장식을 구매해서 집안을 꾸며달라는 부탁도 덧붙여져 있었다. 걸레를 들고 별장 안을 돌아다녔다. 창문이 많은 집이라 유리를 닦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다는 작업까지 마친 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집을 바라봤다.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별것 아닌 일인데도 마음은 뿌듯했다. 집주인은 넉넉한 사례금을 지급했고, 그사이 도전과제 하나가 달성됐다. 이제 노트북을 닫고 출근할 시간이다. <하우스 플리퍼 House Flipper>와 함께한 나쁘지 않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이상하게도 현실에서는 별로 즐겁지 않은 청소가 게임에서는 꽤나 편안하게 느껴진다. * <하우스 플리퍼>에서 플레이어는 집을 수리하고, 청소하고, 꾸며서 수익을 얻는 업자가 된다. 의뢰는 끊이지 않고 들어오지만 느리게 작업한다고 아무도 타박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1인 사업자다. 힐링 또는 코지(cozy)라는 표현 <하우스 플리퍼>는 방치된 집을 청소하고 수리해 돈을 버는 게임이다. 적이 쫓아오지 않고, 청소에 제한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의뢰인이 원하는 가구를 제대로 배치하지 못하면 돈을 조금 덜 벌 수 있을 뿐, 실패라고 부를 만한 상황도 거의 없다. 갈등이나 긴장, 승패 같은 전통적인 게임의 요소 대신에 걸레질과 페인트칠 같은 단순한 노동이 게임의 주된 활동이 된다. 고백하자면 나는 싸우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이미 충분히 긴장하며 사는데, 게임에서까지 쫓기고 싸우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게임들에 자꾸 손이 간다. 그리고 이런 게임은 생각보다 많다. 어질러진 물건을 정리하고, 이삿짐을 풀고, 농사를 짓고, 물약을 만들어 팔고, 산을 오르고, 택배를 배달한다. 비슷한 결의 게임들이 하나의 흐름을 이룬 지는 꽤 오래됐고, 우리는 이런 게임들을 흔히 ‘힐링 게임’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힐링이라는 단어를 오래 들여다보면 이상한 구석이 생긴다. 힐링(healing)은 치유를 뜻하고, 치유는 대개 상처나 고통을 전제로 한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플레이어는 회복이 필요한 사람이 되고 게임은 그 사람을 치료하는 일종의 처방전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힘든 날에만 이런 게임을 플레이했던 건 아니다. 별일 없이 평범한 날에도 집을 정리정돈하고, 농장을 돌보고, 자연과 함께하는 일은 여전히 즐거웠다. 영어권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힐링’ 대신 ‘코지(cozy)’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코지는 아늑함이나 포근함, 친숙함처럼 서로 겹쳐 있는 여러 감각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코지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 쓰기보다, 그 핵심에 위치한 감각인 ‘편안함’이라 부르려 한다. 그렇다면 게임에서의 편안함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일까? 파스텔톤의 색을 사용하고 음악을 잔잔하게 만들면 되는 것일까? 적이 등장하지 않으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플레이어가 아무것도 잃지 않는 상황이면 되는 것일까?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과 연구자들도 이 막연한 분위기를 그저 ‘편안하다’고 부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도대체 무엇이 그런 감정을 만들어내는지를 설명해보려 했다. 확실한 건, 그저 예쁘고 귀여운 게임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편안함에는 조건이 있다 편안함의 정체를 파고드는 여정은 게임 디자이너들로부터 시작되었다. 2017년, 8명의 게임 디자이너는 정기 워크숍에 모여 게임에서 편안함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설계할 수 있는지를 논의했다. 이들이 제시하는 편안함의 조건은 세 단어로 요약된다. 안전함(safety), 풍요로움(abundance), 부드러움(softness). 안전함: 위험이 도사리지 않고, 실수해도 잃을 것이 없는 상태. 풍요로움: 결핍이나 다급함이 없는 상태. 부드러움: 느린 템포, 따뜻한 색채, 잔잔한 청각적 요소로 안전과 풍요를 전달하는 감각. 편안함은 이 세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질 때 구현될 수 있고, 디지털 공간에서 실현된 상상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편안함의 환상’이기도 하다. 게임 디자이너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의 욕구가 계층을 이룬다는 오래된 심리학 이론을 빌려온다.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고 안정감을 확보해야 비로소 타자와의 관계나 자아실현 같은 상위의 욕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편안한 게임은, 하위 욕구가 기본값으로 충족된 세계다. 굶지 않아도 되고, 쫓기지 않아도 되고, 무언가를 잃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서는 플레이어가 당장 생존과 관계없는 일에 마음을 쓸 수 있다. 집을 꾸미거나, 물건을 모으거나, 누군가와 친밀감을 쌓거나, 아무 목적 없이 풍경을 바라보는 일 같은 것들이다. 단, 여기서 핵심적인 전제 조건이 하나 더 붙는다. 모든 활동은 오직 플레이어의 '자발성'에 기반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발성이 결여된 강요는 편안함을 깨뜨린다. 편안함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그래픽도 음악도 아닌 자발성이다. 특히 정리정돈을 소재로 한 게임들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청소라는 행위가 편안해서’가 아니라, 손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마음까지 다급해질 필요는 없으며, 활동의 총량(끝)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이들은 분석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우스 플리퍼>에서 청소가 편안했던 이유도 어느 정도는 설명된다. 현실의 청소는 피로하다. 무엇을 버릴지 결정해야 하고, 어디에 치울지 생각해야 하며, 오늘 안에 끝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청소가 힘든 이유는 몸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계속해서 선택,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질러진 물건의 질서를 찾아주는 <어 리틀 투 더 레프트 A Little to the Left>나, 손님이 재촉하지 않는 물약 상점의 연금술사 게임 <포션 크래프트 Potion Craft> 역시 마찬가지다. 실패에 대한 패널티를 없애거나 재촉하지 않음으로써,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천천히 가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어 리틀 투 더 레프트>, <언패킹>, <이지 딜리버리 co.>, <어 쇼트 하이크. 이들은 힐링 또는 코지(편안한) 게임으로 언급되고 있다. 같은 편안함, 세 가지 쓰임 흥미롭게도, 편안한 게임이라고 해서 반드시 편안한 스토리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2020년 게임 연구자들은 편안한 미학이 게임 안에서 사용되는 방식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첫 번째 경우 ‘일치형’ 편안함은, 게임의 겉모습과 플레이 경험이 일치하는 경우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편안한 게임들이 이에 속한다. <어 쇼트 하이크 A Short Hike>는 주인공이 휴가를 떠난 섬에서 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여정을 보여지만, 서둘러 도착할 필요가 전혀 없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도 되고, 낚시를 해도 되고, 동전을 줍다가 다른 길로 새도 된다. 게임의 화면이 보여주는 세계와 플레이어에게 요구하는 행동이 모두 같은 방향, 즉 서두르지 않고 머물러도 된다는 쪽으로 동시에 향하는 유형이다. 두 번째 경우 ‘불일치형’ 편안함은, 겉으로는 편안해 보이지만 그 안에 슬픔이나 상실처럼 무거운 이야기를 담는 경우다. 편안함을 겉에 한 겹 감싸는 것이다. <댓 드래곤 캔서 That Dragon, Cancer>는 부드럽고 따뜻한 색채 속에서, 가족 상실의 슬픔을 전달한다. 무거운 이야기를 직접 마주하게 만드는 대신 익숙하고 편안한 세계 안에 놓아두는 것이다. <언패킹 Unpacking>도 비슷하게, 이삿짐을 풀어 물건을 제자리에 정리해놓는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게임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의 이별, 성장 등 삶의 굴곡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경우 ’상황형’ 편안함은 게임 전체는 긴장되어 있지만 특정한 순간이나 장소에서만 편안함을 제공하는 경우다. 편안함을 장르라고 부르는 일이 더욱 어려워진다. <다크 소울 Dark Souls>이나 <돈 스타브 Don’t Starve>의 모닥불을 예로 들 수 있다. 게임 전반이 긴장감을 주지만, 모닥불 앞만큼은 전투와 위험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편안한 장소가 된다. 상황적으로 등장하는 편안함의 유형이다. 결국 편안함은 게임 장르라기보다 게임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재료에 가까워 보인다. 어떤 게임에서는 세계 전체를 구성하고, 어떤 게임에서는 무거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표면이 되고, 또 어떤 게임에서는 긴장된 상황 사이에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장소가 된다. 같은 감각이 게임마다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편안함이 게임 안에 들어 있는 것이라면, 같은 게임을 하는 사람이 모두 편안함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결국, 편안함은 플레이어가 만드는 것 질문에 대한 답은 최근 연구에서 나온다. 편안함이 게임 안에 이미 장착되어 있다기보다, 플레이어가 느끼는 주관적 감각이라는 사실이다. 2026년 연구에 따르면 편안함의 바탕에는 친숙함과 예측 가능성이 존재한다. 게임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고, 그 행동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상할 수 있으며, 게임 속 공간에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익숙해질수록 플레이어는 그 세계를 더욱 편안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우리가 집에서 느끼는 편안함과 비교한다. 집이 편안한 것은 어두운 밤에도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알고 불을 켜는 스위치가 어디 있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알기 때문이다. 많은 편안한 게임들은 게임에서만 작동하는 별개의 행동양식을 알려주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직관적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한다. 어떤 장소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되고, 게임이 어떤 방식으로 나에게 반응하는지도 예상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긴장하며 돌아다니던 공간이 어느 순간에는 익숙한 동선이 된다. 게임 세계가 더 이상 낯선 장소가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장소로 바뀌는 순간, 그곳에서도 일종의 ‘집 같은 느낌’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흥미롭게도 공포 게임도 누군가에게는 편안할 수 있다. 처음 플레이했을 때는 어디서 괴물이 튀어나올지 몰랐던 게임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적의 위치와 패턴을 모두 알게 될 수 있다. 어느 문을 열면 무엇이 나오는지 알고, 어느 복도에서 적을 만나게 되는지 알고, 도망쳐야 할 곳과 숨어야 할 곳도 알고 있다면 처음의 공포는 조금씩 다른 감각으로 바뀐다. 반대의 사례도 있다. <데이브 더 다이버 Dave the Diver>는 바다를 탐험하며 물고기를 잡는 편안한 게임으로 자주 꼽히지만, 평소에 낚시에서 잔인성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조금도 편안하지 않은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게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휴양지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사냥터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편안함은 게임 안에 이미 들어 있는 속성이라기보다, 게임이 만들어놓은 조건과 플레이어의 경험이 만나는 곳에서 생겨나는 것에 가깝다. * <포션 크래프트>에서 플레이어는 물약 상점의 주인이 되어 손님에게 물약을 제조하고 판매한다. 안전한 공간으로의 도피일까? 사람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은 다르다. 누군가는 긴장을 통해 푼다. 강렬한 전투나 타격의 쾌감을 느끼고, 두뇌 싸움에서 승리하는 기쁨, 어제보다 강해진 캐릭터가 주는 성장을 실감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반면 누군가는 긴장이 제거된 저스트레스 공간으로 떠난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고, 아무것도 잃지 않는 공간에서 하루 종일 곤두선 신경을 내려놓는 것이다. 같은 스트레스 앞에서 정반대의 처방이다. 오랫동안 게임 산업의 주류 언어는 승리, 경쟁, 도전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편안한 게임을 개발하는 사람들은 이 주류 문법에 질문을 던진다. 그런 점에서 편안한 게임의 부상은 주류 문화에 대한 일종의 대안적 실천이라 볼 수 있다. 게임 연구자 스컬리 블레이커(Rainforest Scully-Blaker)는 이러한 실천을 “급진적 느림“(Radical Slowness)이라고 이름 지으며, 발전, 자본축적, 소비 등의 자본주의적 루프와 호흡에 반대하는 저항하는 행위로서 플레이어의 명상, 휴식, 망설임 수행을 짚어내기도 했다. 누군가는 편안하고 평화로운 세계로 떠나는 플레이어를 향해 '현실 도피'라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스트레스가 과잉인 현대 사회에서 위협이 제거된 세계로 들어가 불안을 잠재우는 행위로서의 게임하기로 보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도피라는 말의 부정적 어감을 다르게 생각하여, 폭풍우 치는 날 처마 밑으로 피신하는 일은 하나의 실천일 뿐, 긍정적이라거나 부정적이라는 가치 판단을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을까. 그러니 편안한 게임을 현실 도피라고 부르는 것이 틀렸다고 할 필요는 없고, 반대로 무조건 좋은 것으로 포장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잠시 현실을 벗어나는 일이 언제나 현실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때로는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잠깐 다른 곳에 머무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참고 자료 Group Report: Coziness in Games: An Exploration of Safety, Softness, and Satisfied Needs(2017) Towards the aesthetics of cozy video games(2020) Coziness in Games: Second Homes, Audiences, and Esthetics(2026) Tags: 코지 게임, 힐링 게임, 하우스 플리퍼, 어 쇼트 하이크, 포션 크래프트, 게임 디자인, Cozy Games, House Flipper, A Short Hike, Wholesome Game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이선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메타버스, 호흡을 고르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메타버스가 오고 있다”고 발언했다. 에픽게임즈 CEO 팀 스위니도 10억 달러 규모 투자를 유치하고 메타버스를 핵심 비전으로 언급했다. 마크 저커버그는 "향후 5년 후에 페이스북을 메타버스 회사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펄어비스와 텐센트도 메타버스를 주요 아젠다로 언급했고, 지난 NDC에서도 넥슨 김대훤 부사장이 “더이상 게임 회사, 게임 산업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 제안했다. 다분히 메타버스를 의식한 발언이다. < Back 01 GG Vol. 21.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Worked for eight years as a reporter at ThisIsGame. Now handles external relations at a subculture startup. Loves editors and the power of cheat codes.

  • 비평공모전 4년을 거쳐 온 편집장의 회고

    그렇게 시작한 게임비평공모전을 네 번째 거쳐오는 동안 나에게도 적지 않은 경험이 쌓였고, 어쩌면 게임비평을 보는 시각도 바뀌었을 듯 싶다. 이 글은 어찌 됐건 2020년대 이후 꾸준하게 게임비평의 새로운 자원을 발굴하고자 뛰어 왔던 한 개인의 회고록일 것이지만, 그 경험은 단지 개인 혼자 되새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될 것이라 생각해 지면 한 켠을 빌어 이야기를 새겨두고자 한다. < Back 비평공모전 4년을 거쳐 온 편집장의 회고 26 GG Vol. 25. 10. 10. 크래프톤, 게임문화재단과 게임비평잡지를 창간하면서 반드시 함께 하겠다고 넣은 아이템이 게임비평공모전이었다. 게임비평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보다, 비평임을 자처하는 글들을 뭉쳐 가면서 천천히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그 과정이 있어야만 편집장이 가진 특정한 비평에의 고집이 좀더 다양한 지평에 선 비평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게임비평공모전을 네 번째 거쳐오는 동안 나에게도 적지 않은 경험이 쌓였고, 어쩌면 게임비평을 보는 시각도 바뀌었을 듯 싶다. 이 글은 어찌 됐건 2020년대 이후 꾸준하게 게임비평의 새로운 자원을 발굴하고자 뛰어 왔던 한 개인의 회고록일 것이지만, 그 경험은 단지 개인 혼자 되새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될 것이라 생각해 지면 한 켠을 빌어 이야기를 새겨두고자 한다. 모든 종류의 사고와 글쓰기에 뛰어들기 시작한 AI에 대한 고민 4회 공모전 응모작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트렌드가 AI의 개입이었다. 절반은 의심이고 절반은 확신이다. 응모작들은 예년에 비해 기초적인 글쓰기의 기술적 측면에서 큰 폭의 질적 향상을 이루었다. ‘글을 못 썼다’라는 이유로 예심을 통과하지 못하는 사례가 크게 줄었다는 측면에서 확실히 오늘날의 글쓰기, 특히 공모전과 같이 심사가 곁들여지는 형식의 글쓰기에는 AI의 강한 개입이 나타난다. 나는 글쓰기에 있어 도구로서의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원론적 입장은 아니다. 두 가지 이유로부터인데, 첫 번째는 더 나은 정보와 전달력을 위해 향상된 효율의 도구를 활용하는 것에는 오히려 적극적일 필요도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설령 인공지능과의 협업에 의한 글쓰기를 반대하더라도 이를 공모전과 같은 심사 체계에서 완벽하게 필터링할 방법도 없다는 점이다. 다만 말그대로 심사가 이뤄지는 공모전이기에 이는 단순히 합격 – 불합격의 문제를 떠나 애초에 이 공모전을 시작했던 이유까지를 거슬러 되짚어야 할 순간을 만들어낸다. 게임비평웹진에서 개최하는 공모전의 목적은 당연하게도 신진 필자 발굴과 육성이다. 그런데 이는 단지 주최측의 목적일 뿐, 응모자 입장에서도 반드시 ‘내가 게임비평을 쓰겠어!’라는 동일한 목적을 지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그저 상금과 스펙을 위해, 누군가는 연습삼아 참가할 수 있는 것이고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AI가 개입할 경우 주최측의 고민은 조금 더 깊어진다. 우리가 찾는 것은 게임에 대한 비평적 관심을 꾸준하게 가져갈 수 있는 필자이지만, 그 꾸준한 관심과 통찰을 AI라는 도구를 통해 충분히 가장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고 시상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반드시 해당 필자를 지속적으로 게임비평 담론을 생산해내는 사람이라고 짚어내기는 어려워진다. 이런 고민은 비단 게임비평 뿐 아니라 아마도 다른 모든 류의 글쓰기 공모전에서 공통적으로 떠안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GG 공모전은 적어도 GG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계속 지속될 예정인데, 앞으로 모든 심사에서 AI가 던진 이 새로운 고민인 지속가능한 게임비평 필자의 발굴이라는 고민은 더욱 심사를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한 응모자 집단 4년째 비평공모전을 이어 오면서 확인한 또 하나의 변화는 헛스윙이 줄어들고 있다는 흐름이다. 1회 공모전에서는 상당수의 응모작이 GG의 정체성과 잘 맞지 않거나, 혹은 아예 게임비평과 무관한 글들이었다. 이를테면 가장 많이 나온 주제는 “게임을 마약으로 치부하는 한국사회”, “확률도박이나 만드는 한국게임”, “페미가 게임을 망친다” 였다. 이런 주제들은 주최자의 기운을 빼곤 한다. 애초에 GG가 뭐하는 곳인지 글 하나도 보지 않고 응모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4회째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주제의 응모가 거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나름 길다면 긴 역사에 탑승해 흘러온 결과일 것이다. 적어도 게임제너레이션이라는 웹진이 어떤 글을 쓰고 있고, 어디를 지향하는지를 더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음을 어느 정도 짐작케 해 주는 변화로 보인다. 일반적인 리뷰가 아니라 비평이라는 관점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비평웹진의 독자 수는 아무래도 대중적이기는 어려우며, 이런 경우 독자층은 상당부분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 혹은 의지를 가진 집단과 겹치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GG는 과거보다는 좀더 올라간 인지도를 갖게 되었고, GG의 방향에 맞춰 글을 쓰거나, 혹은 GG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아예 응모를 피하는 흐름이 나타난 것이 이번 4회 공모전의 결과다. 아직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수준의 게임비평의 문제를 넘어 모든 종류의 비평 자체가 과거보다 허약한 대중성으로 인해 사그라드는 추세 속에서 이러한 흐름이 나타난다는 것은 나름 긍정적인 신호다. 아직 사회적으로 다수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러한 흐름에 공감하고 게임비평의 필요성에 동의하며 같은 방향을 지향하고자 하는 일련의 그룹이 존재하고, 그 존재감이 다소 뭉툭하지만 하나의 덩어리로 만져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지난 4년의 작업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당장의 게임비평이 활성화되고, 대중문화 담론에서 갑작스럽게 높은 비중을 차지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지금 당장 비평의 필요성을 말하는 입장에서 추구해야 할 과제는 큰 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불씨 하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 나가는 일이다. 언젠가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왔을 때, 지금 살려낸 불씨 하나로 비로소 유의미한 불을 지펴낼 수 있는 불지킴이로서의 역할이 비평 전반이 죽어가는 시대에 비평을 생각하는 이들이 첫 손으로 꼽아야 할 일일 것이다. 과도한 무거움 언제가 될 지 모를 시기를 위해 비평의 불씨를 살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현재까지의 게임제너레이션과 게임비평공모전에 남는 다소간의 아쉬움은 필요보다 과하게 무겁다는 점에 있다. 이는 좀더 엄밀하게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냥 무겁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보다 과하게’에 방점을 찍은 무거움이다. 나는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설명하는 데 있어 간혹 불필요하게 두꺼운 학술의 옷을 걸치려 하는 일련의 글쓰기 습관을 경계하곤 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이 학술의 옷이라는 건 말그대로 옷처럼 대중 앞에 설 때 쉽게 발가벗기 어려운 일종의 습관이 함께 따라붙는다. 비평이라는 글쓰기가 상당부분 학술적 글쓰기가 일반적인 학계를 통해 학습되는 문제도 있고, 애초에 ‘진지하게 글쓰기’라는 방식에 묻은 스타일 자체가 그러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비평이 꼭 학술적이어야 할까?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GG와 공모전의 글들은 학술적인 글이라기보다는 학술적인 스타일의 글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대중성과 학술성의 가운데를 자임한다고 늘 이야기하는 웹진이지만 막상 거기 실리는 글들의 논지에 대한 근거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학자의 주장을 각주로 다는 것으로 갈음하곤 한다. 특정한 게임이 우리에게 주는 일련의 메시지와 감정들을 재해석하고 설명하는 데 반드시 다른 ‘학자’의 주장이 동반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저 손쉽게 남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일종의 잘 갖춰진 우상을 등 뒤에 두고 자신의 해석을 풀어가는 것은 아닐지 경계해야 한다. 필요 이상으로 무거운 글의 문제는 앞서 이야기한 ‘불씨를 살리는’ 일과 맞닿는다. 정작 게임비평의 확산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대중적으로 퍼져나가기 어려운 그들만의 리그 같은 글들만이 쌓여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에 필요한 일을 해 나갈 수 있을까? 그것이 정말 적절한 순간을 위해 대비해 온 결과가 맞을까? 이론과 근거를 쌓아나가는 일은 솔직히 말하면 GG같은 웹진이 할 일이 아니라, 별도의 재정과 인력을 굴리며 그런 일을 하도록 사회적으로 자리매겨진 ‘학계’가 해야 할 일이다. GG는 아카데미가 아니며, 아카데미어야 할 이유도 없고, 아니 더 나아가 아카데미가 되어서도 안 된다. 모든 비평은 결국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아주 단순하고 과감하게 요약하자면 결국 모든 비평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지금 세상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이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며, 더 나은 세상으로 나갈 방안을 찾아낸 뒤 이를 세상 모두에게 알리며 공감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비평은 때로는 텍스트를, 때로는 수용자를, 때로는 씬 전반을 주목하지만, 그 주목의 대상이 무엇이건간에 원론적 의미에서의 목적인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속성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디지털게임에 대한 비평도 같은 맥락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게임이라는 매체가 등장하고 나름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과정을 겪으며 인간과 사회는 게임을 통해 소통하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몇몇 사례들을 통해 게임이 인간을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변화시킨 과정을 목격했고, 반대로 인간이 게임을 새롭게 만들며 더 나은 세계, 혹은 더 어두운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 또한 동시에 목격했다. 게임비평의 근본적 목적이라면 이 변화가 보다 인간과 사회 전반을 위한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방향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을 것이다. 고작 게임 비평 가지고 무슨 거창한 이야기냐고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본래 모든 비평의 목적은 그리로 향하는 법이다. GG가 지향한다고 늘 말하는, 학술성과 대중성 사이라는 지향은 사실 이 근본적인 목적을 향하는 일종의 방법론이다. 깊은 성찰을 요하면서도 그 결과가 단지 소수의 그룹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모두에게 향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를 모두 갖춘 통찰이 게임, 그리고 게임을 넘은 세상 전반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GG 창간의 목적이었고, 아마도 이런 입장에 공감하는 많은 필진들의 목적과도 유사할 것이며, 이런 작업들과 함께 나아가는 비평공모전의 지향과도 총론의 입장에서는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년에 열릴 제 5회 공모전에서도 이런 지향이 좀더 많은 동지들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Editor's View] 생존본능에서 장르에 이르기까지의 공포

    공포는 흔히 생존본능에서 만들어졌다고들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험한 것들을 피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위험을 보고 무서움을 느낍니다. 덕분에 살아남아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킨 인류는 실존하는 위험으로부터 무서움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분리해내기에 이르렀고, 많은 예술을 통해 분리된 감정은 호러라는 장르를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 Back 19 GG Vol. 24.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제4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개최 안내

    게임제너레이션은 한국 디지털게임 비평의 활성화와 신진작가 발굴을 위해 매년 게임비평공모전을 진행해 오고 있으며, 2025년의 공모전을 다음과 같이 진행하고자 합니다. 관심있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겠습니다. < Back 25 GG Vol. 25. 7. 3.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오래된 코옵에 관한 소고

    맥락의 큰 단절이라 할만한 흐름은 스마트폰, SNS, 유튜브 시대에 이르러 왔다. 이 시기 인터넷은 초연결의 시대에 도달한 후 마치 압력이 가득한 풍선이 뻥 터지는 것처럼 되었다. 원심력이 강화되면서 개별화, 파편화, 탈맥락화가 인터넷 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 Back 28 GG Vol. 26.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Kim is known for his activities as a critical expert on current affairs in various press media. But he is also an active gamer who never let go of games. Some of his publications includes 『a cynical society』, 『Otaku Loved Lenin』, as well as a co-author of 『Now, Here, Far-Rightism』, 『right-wing discontent』, 『Twitter, that 140-character egalitarianism』. His latest publication is 『Democracy where you vote because you don't like that 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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