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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란으로 664개 검색됨

  • 제1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안내

    게임문화웹진 ‘게임제너레이션’은 디지털게임의 문화적 접근 폭을 넓히고 게임문화를 선도적이고 실천적으로 이끌어갈 새로운 필자의 발굴을 위해 아래와 같이 게임비평공모전을 개최하고자 합니다. 게임과 게임문화를 사랑하고 연구하는 많은 분들의 참가를 부탁드립니다. < Back 제1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안내 06 GG Vol. 22. 6. 10. 게임문화웹진 ‘게임제너레이션’은 디지털게임의 문화적 접근 폭을 넓히고 게임문화를 선도적이고 실천적으로 이끌어갈 새로운 필자의 발굴을 위해 아래와 같이 게임비평공모전을 개최하고자 합니다. 게임과 게임문화를 사랑하고 연구하는 많은 분들의 참가를 부탁드립니다. - 아 래 – 1. 공모명: 제1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2. 공모 주제: 디지털게임에 대한 비평(자유주제) 3. 공모기간 및 접수마감: 2022. 07. 08.(금) 23:59까지 email 도착분에 한함 4. 공모형식 및 참여방법: - 형식: hwp, doc, odt 형식 중 택일하여 제출. 제목, 저자명 포함. - 분량: 한글 4,000자 ~ 8,000자 내외. 이미지삽입 5개 이하. - 제출방법: 공모전 전용 email을 통해 제출( ggcriticcomp@gmail.com ) 5. 시상내역 최우수상(1명): 상금 100만원(세전), GG 7호 게재 우수상(3명): 상금 50만원(세전), GG 7호 게재 장려상(5명): 상금 30만원(세전). GG 7호 게재 * 수상자는 응모한 메일을 통해 심사완료후 개별 통보합니다. 6. 일정 2022. 07. 08(금) 접수마감 (23:59까지 도착분 기준) 2022. 07. 29(금) 심사완료 및 결과통지 2022. 08. 10(수) GG 7호 수상작 게재 2022. 08. (미정) 시상식 7. 기타 유의사항 - 공모전 참가는 1인 1개 글에 한하며, 중복응모는 불가합니다. - 응모는 블로그 등 개인매체를 포함한 타 매체에 공개되지 않은 작품이어야 하며, 중복게재 및 표절이 밝혀질 경우 수상이 취소될 수 있습니다. - 수상작 선정 후 개인정보 취득을 위해 당선자분들께 개별 연락이 진행되며, 이 과정에서 연락이 되지 않을 경우 당선이 취소될 수 있습니다. - 관련한 문의사항은 공모전 공식 메일계정( ggcriticcomp@gmail.com )을 통해 문의해 주십시오. 게임의 문화적 의미를 탐구하는 많은 여러분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코스믹 호러의 게임적 변용

    이토 준지풍의 그림체와 크툴루 세계관이 결합된 <공포의 세계>의 장점 역시 동일하다. 그로테스크하고 이질적으로 변화한 마을 구성원들을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소름 돋는 경험이야말로 등대에 강림할 고대신보다 공포스러운 일이다. 내가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확신은 일상의 궤도에서 이상 징후와 균열을 발견할 때 불안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 Back 코스믹 호러의 게임적 변용 19 GG Vol. 24. 8. 10.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의 감정은 공포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것이 바로 미지에 대한 공포이다. - H.P. 러브크래프트, 󰡔공포 문학의 매혹󰡕 중 코스믹 호러(cosmic horror)라는 특수한 조건에서만 실현 가능한 장르를 게임을 통해 재현하는 일은 그 목적이 플레이어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라면 성공하기 쉽지 않다. 코스믹 호러는 단어 그대로 인간의 사유와 이성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거대한 존재를 마주쳤을 때 경험하게 되는 우주적 공포를 의미한다. 오랜 기간을 통해 축적해 온 문명을 포함한 인간적 가치가 통용되지 않는 불가해한 공포를 목도하는 상황과 그에 대한 매혹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대변하는 특징이다. 그리고 러브크래프트적 세계관은 그가 활동했던 시대보다는 오히려 지금에 와서 적극적으로 향유되고 차용하고 있다. “거기서 크툰을?”이라는 밈으로 기억하는 이가 적지 않을 <하스스톤>의 고대신의 저주 덱만 하더라도 러브크래프트 세계관의 고대신 중 하나인 크툴루 이미지를 빌려온 대표적인 사례다. 크툰(C'Thun)이라는 이름조차 크툴루(Cthulhu)를 연상케 하는 의도적인 작명이다. 게임을 비롯한 서브 컬쳐에서 크툴루가 코스믹 호러를 대표하는 표상이자 오마쥬로 손쉽게 활용되는 이유는 러브크래프트의 작업물 중 드물게 크툴루 만이 소설에서 비교적 뚜렷하게 외양이 묘사되어 있고 작가의 스케치도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시각화할 수 있는 뚜렷한 이미지가 존재한다는 점은 공포를 야기하는 데는 장애물로 작용하기도 한다. 러브크래프트 세계관의 크리쳐를 충실하게 재현하고자 했던 나 <콜 오브 크툴루>와 같은 게임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요인 중 하나는 시각적 재현을 통해서는 공포를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그래픽 해상도나 디자인, 크리쳐의 거대함을 체감할 수 있는 상대적 크기의 구현에 대한 문제만은 아니다. 오히려 분명하게 가시화된 것일수록 공포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러브크래프트는 기이한 이야기가 예술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정밀하게 사건을 묘사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분위기의 조성을 제안한 바 있다. 코스믹 호러를 경험하게 되는 소설적 사건은 그 자체가 비현실적이며 허구적인 것이기에 정밀한 묘사를 통해 리얼리티를 획득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인간의 기분을 명확하게 상징화하는 것이야말로 묘사보다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영역이다. 공포, 그것도 특정한 맥락의 사건을 통해 야기되는 감정의 결을 상징화하는 작업은 시각을 중점적으로 매개하는 매체가 좀처럼 도전하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다.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모호함, 불분명함에서 오는 상상이 야기하는 불안감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공포 영화는 본질적으로 시각 중심적 매체라는 영화의 장점 일부를 포기하고 카메라의 시야를 제한하고 대상을 어둡고 흐릿한 배경을 통해 부각하는 전략을 취한다. 아울러 관객이 사건을 목도하는 전후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동시에 감상의 가이드라인으로써 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게임은 플레이어의 행위성을 사건 전개의 중심축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영화와 같은 시각 매체 감상자가 경험하는 무력감, 일방향적인 위치에서 수행되는 관음에서 비롯된 공포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은 쉽지 않다. 글의 마중물로 활용한 인용문과 같이 공포는 대상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서 기원하는 감정이다. 그리고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속에서 앎으로 포섭할 수 없는 존재를 목도한 이들은 필연적으로 광기에 사로잡힌다. 다만 서술자는 광인으로 대변되는 낯선 타자를 목격할 때 경악하거나, 서서히 잠식되는 광기로 인해 미지의 대상에 매혹되며 변화하는 자신의 내면을 진술하는가로 나뉠 뿐이다. 최소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서 이 둘은 선행과 후행의 문제일 뿐 어느 쪽을 배제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소설 <벽 속의 쥐>의 모티브를 공유하고 있는 <다키스트 던전>은 고대신의 유적을 저택에 은닉하고 있는 전대 가주의 편지로 시작된다. 지하의 유적을 탐사하며 결국 고대신의 제물로 후손을 끌어들인 선조의 목적을 저지하더라도 탐사대의 파멸은 불가피하다. 광기에 잠식된 이들은 결코 이전과 동일한 내면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키스트 던전>은 후손의 자살을 암시하는 장면과 새로운 희생양이 될 또 다른 후손을 초대하는 편지로 끝을 맺는다. 이와 같은 서사는 한낱 인간으로서는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대한 악의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하는 러브크래프트적 세계관을 잘 보여줬다. 그러나 그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다키스트 던전>이 광기를 하나의 변수이자 수치화할 수 있는 요소로 디자인한 게임이라는 점이다. 공포가 대응할 수 없는 미지에서 창출되는 감정이라면 공포 게임의 행위성은 그를 위배하는 방식으로, 달리 말하면 미지를 해소하고 장악하는 방식으로 디자인된다. 이 모순적인 결합방식을 시도한 결과물 중 눈여겨볼 만한 대표적인 게임은 크툴루 세계관을 기반으로 추리와 코스믹 호러의 공존을 시도한 <셜록 홈즈: 디 어웨이큰드>이다. 추리는 과학을 포함한 근대적 지식을 동원해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을 지향하는 행위다. 이 경우 만약 이성이 미지를 해체하는 유용하고 적확한 도구라면 해소될 수 있는 공포는 하나의 소재로 활용될 뿐이다. 그러나 <셜록 홈즈: 디 어웨이큰드>의 서사는 이성과 공포의 대결에서 공포에 손을 들어줬다. 홈즈는 어머니를 파멸로 이끈 광기가 자신에게도 유전될 것을 염려하면서도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괴이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광기에 접근한다. 그리고 광기에 매혹된 자신이 근대적 이성으로 무장한 이전의 ‘나’는 같은 인간일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성은 미지의 사건을 해결하기에 충분한 도구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질서와 법칙으로 무장한 자신의 세계가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불안한 외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홈즈는 이전과는 다른 내면을 가진 인간이 된다. 심지어 고대신을 소환하고자 하는 이교도의 제의를 저지한 후일담에서 짐작할 수 있듯 홈즈의 정신은 그의 정체성이 붕괴되었던 상황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것은 게임을 통해 재현된 캐릭터의 내면일 뿐이며 플레이어의 영역에서 꼼꼼하게 단서를 모아가며 추리하는 플레이 경험은 이 게임이 ‘호러’ ‘어드벤처’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전자의 수식어가 약소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차라리 행위성을 제한하는 동시에 특정 행위성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광기를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 <다키스트 던전>이 광기를 활용하는 방식이 바로 그런 형태다. 플레이어는 지속적으로 특정 확률로 이상상태를 겪는 캐릭터들을 컨트롤하며 자신의 의지를 온전히 관철할 수 없는 세계를 인식한다. 물론 이것은 공포를 직접적으로 창출하기보다는 긴장감을 통해 몰입감을 고조시키는 효과이기는 하다. 그러나 공포를 해소하는 어드벤처식 게임 장르를 대신해 제안할 수 있는 하나의 예시로 고려될 수는 있을 것이다. <드렛지> 역시 광기를 게임적 요소로 활용한다. <드렛지>는 확률의 결과물만 보여주는 <다키스트 던전>보다 광기에 노출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재현한다. 게임 초반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새롭게 마을에 정착하고자 하는 낚시꾼의 일과 사이에는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이질감이 불거져 나온다. 심해에서 건져 올린 것 같은 기괴한 생김새의 어종, 이방인인 주인공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응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의미심장한 대사, 낮과는 전혀 다른 위협이 도사린 밤바다의 풍경은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러나 정작 크툴루의 오마쥬인 것이 분명한 고대신은 게임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매우 짧게 모습을 드러낸다. 구체적으로 재현되면 될수록, 즉 대상을 명확하게 인지할수록 공포와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측면에서 이와 같은 전략은 유의미하다. 오히려 <드렛지>는 미지의 존재가 응시하는 시선을 화면 상단이나 심해의 충혈된 눈으로 표현하거나 광기에 잠식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점차 붉게 번져가는 파라미터 등의 인터페이스로 재현한다. 불분명하고 암시적인 분위기가 캐릭터의 불안을 야기하고 공포라는 감정을 창출하는 것이다. 광인은 타자의 모습으로 재현되기 쉽다. 그러나 <드렛지>는 분열된 자아를 통해 이성의 영역에서는 확신할 수 없는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투신하는 인간의 모습과 미지에 공포를 느끼는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줬다. 희생된 아내를 부활시키기 위한 수집가의 광기는 설사 그것이 고대신을 소환해 마을이 소멸하는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멈추지 않는다. 다섯 가지의 물건을 모아달라는 의뢰를 수락한 어부는 결국 이것이 스스로 초래한 비극의 후일담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광기는 자신의 다른 얼굴이었던 셈이다. 코스믹 호러는 이제까지 믿어왔던 판단 능력에 대한 의심이자 철학의 붕괴, 신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공포다. 정상성, 실재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공포는 지극히 인간적인 발명이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토대, 근거가 전면적으로 붕괴될 지도 모른다는 상상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매력적인 발상이 게임에 이식되는 과정에서 플레이가 경험하는 공포란 오히려 사소한 사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이토 준지풍의 그림체와 크툴루 세계관이 결합된 <공포의 세계>의 장점 역시 동일하다. 그로테스크하고 이질적으로 변화한 마을 구성원들을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소름 돋는 경험이야말로 등대에 강림할 고대신보다 공포스러운 일이다. 내가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확신은 일상의 궤도에서 이상 징후와 균열을 발견할 때 불안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성균관대학교 강사) 홍현영 패미콤을 화목한 가족 구성원의 필수품으로 광고한 덕분에 게임의 세계에 입문했다. <저스트댄서> 꾸준러. 『81년생 마리오』, 『게임의 이론』, 『미디어와 젠더』 등을 함께 썼다.

  • 인게임 커뮤니케이션과 현실의 가치: 의 사례

    정확히 똑같은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이러한 돌봄의 위기는 유사한 형태로 게임 공간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인터뷰에 참여했던 여성 게이머들 대다수가 여성 게이머에 대한 편견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지원가 역할을 기피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 Back 인게임 커뮤니케이션과 현실의 가치: 의 사례 14 GG Vol. 23. 10. 10. Staying with the Trolls 나의 책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와 관련한 여러 반응 중에 다음과 같은 의견이 있었다. 온라인 게임에서 상대방에게 욕설을 하는 것은 ‘현실에서 벗어나 일탈적인 행동을 하는 게임문화의 일환’이며, 그 과정에서 여성 비하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저 ‘상대의 특징 중 하나를 짚어내는 것’일 뿐이다. 더욱이 게임에서는 여성만 욕을 먹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같은 비하적인 용어나 욕설이 여성 차별의식의 발로라고 말할 수 없지 않느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를 지칭하여 멸칭으로 부른다면 그것이 어떻게 차별이 아니라 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나는 상대방에게 욕설을 함으로써 일탈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발상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 왜냐하면 멀티플레이 게임의 텍스트/보이스 채팅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욕설은 여성들을 현실의 고민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이 처한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다짜고짜 욕을 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과연 소통하면서 하나의 팀을 이룰 수 있을지를 회의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고민한다. “나 그냥 이 게임(헬조선)에서 탈주하면 안 될까?” 그렇다고 게임과 소수자를 주제로 다루면서 여성을 차별받는 피해자로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물론 여성 게이머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입은 피해나 상처들을 꺼내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문제적인 게임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를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 이 문제를 회피하고 게임에서 계속 탈주해봤자 내 경쟁전 실력등급만 점점 떨어질 뿐이니까! 차별의 논리들 내가 석사논문을 위해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트롤들에게도 나름의 논리가 있다는 점이었다. 트롤들은 당신을 욕하는 것이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여성성을 내세워 다른 팀원들의 기여에 무임승차하려는 여왕벌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터뷰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 역시 이와 유사한 논리를 경험했다고 이야기한다. 게임 <오버워치>의 예를 들어보자. 이 게임에서 여성 플레이어들은 “지원가,” “서포터,” 혹은 “힐러”라고 일컬어지는 게임 내 직군을 맡기를 강요당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여성 게이머들은 그러한 지원가 역할을 기피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의 중심에는 트롤들의 논리가 구조화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은 전제와 가치판단들이 중층적으로 엮여 있다. 우선, <오버워치> 게임 커뮤니티에서 공격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공격군에 비해 서포터 역할은 수동적이고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여성 게이머들은 “서포터를 해야 한다,” 혹은 “여성이기 때문에 서포터가 아닌 다른 역할은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압력을 받는다. 하지만 설령 여성이 그러한 압력에 못 이겨 서포터 역할을 한다고 해도 또 다른 편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서포터라는 역할 자체가 수동적이고, 팀에 기여하는 것이 별로 없는 직업군이기 때문에 여성 게이머는 여전히 다른 팀원들의 성과에 업혀가는 무임 승차자, 민폐녀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게임공간과 현실은 별개가 아니다 정치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남자를 보조하는 인력으로 취급받거나, 혹은 남성이 바깥일을 할 수 있도록 청소와 빨래를 하고 밥을 짓고 육아를 하는 “돌봄 노동”을 강요당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일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이지만, 경제적인 이득을 직접 창출해내지는 않기에 하찮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지점에서 프레이저가 결국 가장 지적하고 싶은 문제가 시작된다.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이러한 돌봄 노동을 거부하기 시작하면서 “돌봄의 위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며 사회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프레이저의 진단이었다. 정확히 똑같은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이러한 돌봄의 위기는 유사한 형태로 게임 공간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인터뷰에 참여했던 여성 게이머들 대다수가 여성 게이머에 대한 편견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지원가 역할을 기피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버워치>의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지원가를 플레이하는 유저가 부족해 게임 매칭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불평하는 유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지원가를 플레이하는 여성 게이머들을 모욕하지 않음으로써 해결 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치료, 돌봄, 유지와 보수 같은 가치들이 지금의 사회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처럼, 그런 의식이 게임 커뮤니티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원가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게임의 밸런스가 붕괴하여 서포터가 아닌 유저들도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게임과 같은 온라인 스페이스는 현실 사회와 분리된 일탈의 공간이라기보다, 이처럼 현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사회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공간에서 나타난 돌봄의 위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출처: 디씨인사이드 One hour One Life 는 제이슨 로허(Jason Roher)가 제작한 온라인 멀티플레이어 서바이벌 게임이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플레이어의 캐릭터는 1시간 동안만 살아가는데, 1분이 지날 때마다 나이를 먹고 60분이 지나 60살이 되는 순간 사망한다. 6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 살아있을 수 있지만, 그 시간 내에 필요한 아이템을 만들어 내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플레이어 캐릭터는 최대한 생존하면서 다음 세대를 위해 마을을 일구어 문명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게임을 하게 된다. 이 게임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게임을 시작한 직후인 초반 3분이다.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어는 아기로서 엄마인 다른 여성 캐릭터의 곁에 스폰(spawn)된다. 이 아기는 3살이 되기 전, 즉 현실 시간으로 3분이 지나기 전까지 걸어 다니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를 낳은 엄마 역할인 다른 플레이어가 젖을 주지 않으면 굶어죽는다. 채팅 역시 알파벳 한 글자 밖에 칠 수 없기에, 배고픔 상태가 될 때 마다 밥(Food)을 달라는 뜻의 "F"를 쳐서 엄마와 소통해야 한다. 새로운 아기들이 태어나면 엄마들은 그들을 모닥불과 곰 깔개가 깔린 따뜻한 방으로 데려와 옷을 입히고, 음식이 들어있는 가방을 등에 매준다. 이 곳 아기방에는 여자들이 상주하며 서로의 아기를 번갈아 안아주며 공동육아를 하기도 한다. (남자 캐릭터는 아기에게 옷을 입혀줄 수는 있지만 젖을 줄 수는 없다.) 이 모든 과정에서 텍스트 채팅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너는 [이름]이야”라고 말함으로써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줄 수 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처음에는 알파벳 한 글자 밖에 말할 수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입력할 수 있는 글자가 늘어난다. 스크린샷 출처: https://saveorquit.com/2018/12/27/review-one-hour-one-life/) 에서는 남을 돌보는 행위가 재미의 핵심이 된다. 이 게임에서 느낄 수 있는 성취감은 6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다음 세대를 위해 내가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에 따라 달려있기 때문이다. 가령, 스웨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토끼 뼈를 구워 만든 바늘, 양털으로 만든 실 등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누군가 사냥을 해야 하고, 농사를 지어야 하고, 양 목장을 관리해야 한다. 사냥을 하려면 누군가가 활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농사를 지으려고 해도 누군가 우물에서 물을 떠오고 비료를 만들어 놓았어야 한다. 양을 가둘 울타리가 있어야 하고 철을 캐와 가위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노력해 스웨터를 만들더라도, 재화 시스템이나 창고가 없기 때문에 플레이어 캐릭터들은 죽기 전에 옷을 다 벗어서 다음에 태어날 아기들에게 넘겨주고 갈 수밖에 없다. 필요한 아이템을 만들기 위한 과정은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에서 그 아이템을 본 적이 있는지, 혹은 만들어 줄 수 있는지를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아야 게임을 진행하기 용이하다.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이야기하며 서로를 돕는다. 가령, 이 게임의 플레이어로서 나는 파이를 굽거나, 스웨터를 만들거나, 비료를 만드는 법은 알지만, 삽을 만들고 바늘을 만드는 법은 모른다. 일을 하다가 삽이 부러지면 나는 대장장이 일을 하고 있는 다른 플레이어에게 삽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 우정을 쌓고, 다른 캐릭터가 노인이 되어 죽기 전에는 서로 “사랑한다(ILY)”고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남아 있는 문제들 의 사회 속에서 생산성과 돌봄은 서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행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생존과 마을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많은 플레이어들은 다른 사람들의 역할을 폄하하지 않는다. 서로를 존중하며 남이 불쾌할 만한 말을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실제 우리 사회도 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협업과 돌봄을 바탕으로 작동한다. 아이를 낳고 먹이고, 청소와 요리를 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집을 수리하는 일들은 우리의 생활과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결과적으로 사회를 지탱케 하는 일들이다. 다만 우리 사회는 그것을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졌지만, 이 게임에서는 그것을 가장 원시적이고 간단한 형태로 가시화 시켜놓았을 뿐이다. 이 글은 멀티 플레이어 게임 <오버워치>에서 여성 차별적인 채팅들이 현실에서의 돌봄에 대한 가치 폄하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게임 채팅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차별적 언사들은 반향실(혹은 에코 챔버) 효과를 통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강화되는 측면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현실의 구조와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여성을 혐오하고 육아와 돌봄을 폄하하면 신규 유저가 점점 줄어드는 게임처럼 우리 현실도 태어나는 자 없는 죽음만이 가득한 땅이 될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와 같이 돌봄의 가치를 재정의 하는 게임이 혹시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게임이 불합리한 현실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현실을 바꾸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까? Tags: 원아워원라이프, 여성게이머, 상호작용, 프레이저, 오버워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김지윤 연세대학교에서 언론홍보영상학과 인류학을 공부하고,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했다. 부족한 실력으로 게임을 하다가 게임의 신체적 퍼포먼스에 관심을 갖게 되어 게임 연구를 시작했다. 여성 게이머의 게임 플레이 경험을 분석한 석사학위 논문을 써서 2020년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우수 학위논문상을 받았다. 현재 미국 시카고대학 영화·미디어학과 (Cinema and Media Studies) 박사 과정에서 게임문화를 전공하고 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Pawel Grabarczyk

    Pawel Grabarczyk is an associate professor at the IT University of Copenhagen, Denmark, and an associate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Lodz, Poland. He is a philosopher by training and works on the boundaries between philosophy and game studies. His research deals primarily with game ontology, ethics of microtransactions, virtual reality, and the history of games. He is currently working on a platform studies book on Atari 8-bit computers. Pawel Grabarczyk Pawel Grabarczyk Pawel Grabarczyk is an associate professor at the IT University of Copenhagen, Denmark, and an associate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Lodz, Poland. He is a philosopher by training and works on the boundaries between philosophy and game studies. His research deals primarily with game ontology, ethics of microtransactions, virtual reality, and the history of games. He is currently working on a platform studies book on Atari 8-bit computers. Read More 버튼 읽기 Randomness is a double-edged sword. The opposite reception of randomness in AAA and indie game sectors It seems fascinating that the same mathematical phenomenon could become the foundation of the most acclaimed and the most despised design principles of modern gaming. As I will argue in this article, this is precisely what happened to randomness.

  • Lost Ark and the Impression of Korean Games from the Western Perspective

    Lost Ark and the Impression of Korean Games from the Western Perspective On February 11th, 2022 after three days of early access, Lost Ark officially released in the west to over one million players. Produced by Smilegate, a Korean developer, and distributed in the west by Amazon Game Studios, the release of Lost Ark is an opportunity to consider the impression that Korean games have made among western audiences. Despite several successful Korean games launching in the West over the last 20 years, the idea of a ‘Korean game’ hasn’t really taken hold in the public consciousness of western players in the same way Japanese games have dominated the gaming landscape. Through a combination of Lost Ark’s management, the engagement of high-profile content creators, and the role of the Korean Lost Ark community in helping the game succeed among the western playerbase, Lost Ark is in a unique position to configure western player expectations about what a Korean game can be. < Back Lost Ark and the Impression of Korean Games from the Western Perspective 05 GG Vol. 22. 4. 10. * You can see the Korean version of this article in: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2&match=id:117 Lost Ark and the Impression of Korean Games from the Western Perspective On February 11th, 2022 after three days of early access, Lost Ark officially released in the west to over one million players. Produced by Smilegate, a Korean developer, and distributed in the west by Amazon Game Studios, the release of Lost Ark is an opportunity to consider the impression that Korean games have made among western audiences. Despite several successful Korean games launching in the West over the last 20 years, the idea of a ‘Korean game’ hasn’t really taken hold in the public consciousness of western players in the same way Japanese games have dominated the gaming landscape. Through a combination of Lost Ark’s management, the engagement of high-profile content creators, and the role of the Korean Lost Ark community in helping the game succeed among the western playerbase, Lost Ark is in a unique position to configure western player expectations about what a Korean game can be. To all the Korean games we loved before Lost Ark is far from the first Korean game to make an impact among western players. Since the early 2000s, there have been several Korean MMOs that resonated with a relatively small number of dedicated players. Ragnarok Online (Gravity Interactive, 2003), MapleStory (Wizet, 2003), the Lineage series (NCSoft, 1998, 2003), and more recently games like Blade and Soul (NCSoft, 2012) and Black Desert Online (Pearl Abyss, 2014) have defined Korean games for dedicated players engaged with this segment of the MMO landscape. A substantial number of these Korean games, for better or worse, live in the shadow of World of Warcraft, the perennial market leader in the western MMO market. From the perspective of a former World of Warcraft player, the release of Lost Ark is reminiscent of another Korean MMO release, 2009’s Aion (NCSoft). WoW frequently has content draughts - or the periods in between patches and expansions where players become fatigued by completing the same content. In search of something new, they gravitate to new games, oftentimes new MMOs, to fill their time. These new games, often labeled ‘WoW Killers’ by players, have strong launches as upon release the games are full of promise for a tired MMO player base: familiar yet fresh systems, improved graphics, new locales, new classes to try and new monsters to defeat. In the lead-up to release, players work themselves into a frenzy of hope believing that this new game will be the one that they can dedicate another few years of their lives to playing. Aion was one such game, but as the story so often goes, it had a short-lived moment of glory upon its release, and as WoW released new content players migrated back to their familiar home in the wake of another failed ‘WoW Killer’. It would be easy to think that Lost Ark’s situation is more of the same, and while it has lost over 50% of the 1.3 million players it launched with according to steamcharts, it has crucially survived the release of an important content patch for World of Warcraft’s latest expansion that would have otherwise doomed other competitive MMOs. At this point, Lost Ark is set up to sink or swim on the back of its own management, both by Smilegate and Amazon Game Studios. Lost Ark has the opportunity to succeed or fail on its own merits and is presently positioned to represent Korean games beyond what prior Korean MMOs have been able to do. The only other Korean game with this much potential to shape the west’s understanding of Korean games was PlayerUnknown’s Battlegrounds (PUBG Studios, 2017). Peaking at just over 3 million players after its release and consistently floating above 400,000 thousand players since this time according to steam charts, PUBG was a successful Korean title and a pivotal moment for the last few years of gaming. Along with H1Z1 (Daybreak Company, 2015), PUBG launched us into the battle royale era. However, for all its monetary success and its impact on the industry, PUBG’s legacy as one of the progenitors of the battle royale genre overshadowed its status as a Korean game. In his work, The Rhetoric of the Image, French philosopher Roland Barthes coined the term ‘Italianicity’ to explain how certain signs - the colors of the Italian flag, particular Italian words and names, and a combination of ingredients (tomato, mushroom, pepper) - combine to express the idea of Italian culture.1) While these images are built on cultural stereotypes, they are easily legible from the outside as something that represents Italy, regardless of how Italian those images might actually be. Bringing it back to games, the ‘Koreanicity’ of Korean games, if there is such a thing, has been established primarily through early Korean MMOs, although I would argue even those games haven’t left a strong impression within western gamer culture beyond their niche. PUBG, for all its success, has no obvious tropes of Korean games or clear design quirks of South Korean game development that are clearly legible to the average player. What’s more, the grassroots spread of the game didn’t rely upon marketing the game as a Korean product. The result is an incredibly successful and impactful game with unprecedented reach for a Korean title that didn’t become a representation of Korean games in the West, largely because it was not clearly perceptible as a Korean game except to the most engaged players. Lost Ark, in contrast to PUBG, is set up to represent Korean games to a large western audience. The game launched in Korea in 2019, and has had players across the globe using VPNs to play the game before it was released in their own regions. In anticipation of the NA and EU release of the game, several Youtubers and live streamers produced content breaking down aspects of the Lost Ark metagame in other regions. One such Youtuber, Kanon, produced videos where he is actively translating from Korean to English for a high-level Korean player to establish a tier list for the NA/EU audience.2) Even before many NA/EU players were able to play the game, the game had been clearly established as a Korean game to those most eager for the game’s release. Upon Lost Ark’s launch, there was a substantial demand for the game’s original Korean voiceover pack which was included as free downloadable content with the game’s launch, which indicates that a non-negligible amount of NA/EU players want to play Lost Ark as an authentically Korean game, and also signposts the game’s Korean origins for those who might still have been unaware. At the time of this article, well over a month into the game’s NA/EU life, there are frequent comments on the official forums, the subreddit, and in-game chat that compare the content roll-out strategy of the NA/EU version of the game to what has happened, and what continues to happen on the Korean servers. Whatever else happens, Lost Ark has clearly established itself as a Korean game. The most exciting thing about Lost Ark’s trajectory towards reaching the Western audience as a distinctly Korean product is that it has the ability to set the tone for what a Korean game can be to many players unfamiliar with Korean games. The authors of this article have progressed fairly deep into Lost Ark, with one of the authors having reached the current available endgame on the game’s North American servers. Through that journey, we’ve experienced some extremely satisfying and responsive combat against a variety of compelling bosses. The world of Lost Ark is guilty of being a generic fantasy world, but at the same time aspects of it are also strange and unplaceable compared to other games in the MMO genre. One incredible scene in the Dwarf-inhabited continent of Yorn sees NPCs forge a sword in a non-sequitur broadway musical sequence. The game is full of these odd divergences in tone that somehow manage to work in the context of the game. There is also an unplaceable cuteness to many of the creatures that inhabit this world. From our perspective as players it is difficult to know how many of these features of the game are representative of traits across Korean games, and how many of them are unique to the game that Smilegate and Tripod Studio have produced. That said, there is a tendency among players unfamiliar with Korean games at large to read the elements of the game that we cannot readily associate with more familiar content, to conditions or trends of Korean development rather than of Smilegate and Tripod Studio. These qualities of Lost Ark are becoming holistically representative of Korean design whether or not they actually are, which further develops the idea of ‘Koreanicity’ among western players. While Lost Ark is contributing to a developing ‘Koreanicity,’ it has not escaped prior notions of ‘Koreanicity’ that sprung out of earlier MMOs. In the western discourse about Korean games, there is a tendency to view them as grindy: excessively repetitive experiences that require you to do the same tasks day after day for minor rewards or character power increases. Unfortunately for Lost Ark, one of the most visible systems among the most die-hard players is the ‘honing’ system - a system through which you upgrade your weapons and armor by collecting an array of materials. Early on you are guaranteed to succeed in your upgrades and gathering material is fairly simple, but as you progress through the game you require an increasing number of materials and you start to have low chances of success in upgrading a piece of equipment. This coincides with a second element of the game, which is the ability to put real money into the game to purchase some of these materials. For many players this makes Lost Ark a ‘pay to win’ (p2w) game, which is typically an extremely negative trait for a game to have among western gamers, as many believe it undermines the integrity of the game experience, allowing unfair advantages that undercut individual time investment or player skill. It is not uncommon to see discussions about the pay to win nature of Lost Ark in videos, on the forums, and in the game itself. Many advocates or critiques of the game deploy, or suppress, the pay to win rhetoric to convince their fans to try out or stay away from the game. The pay to win aspect of the game is at the center of what has been the most recent breaking point for Lost Ark. With the release of the March update, a new endgame boss was released, and many players felt pressured to spend real money to progress through the end game, while other players felt as though the gap was insurmountable and began to lose interest. The design choices going forward regarding how to manage this situation will be pivotal for leaving a strong impression on western players about Korean games. It is not just about the form and content of the games, but about how developers support and communicate with players. This facet of Lost Ark is complex because Smilegate and Amazon Game Studio are both responsible for the game, but are leaving different impressions on players. * Players debate pay to win aspects of Lost Ark - Author Screenshot. Prior to the release of Lost Ark the game’s director, Gold River, gave an official interview regarding the release of the game and it was received exceptionally well by the community.3) In contrast, Amazon Game Studio has taken a lot of the blame for the shortcomings of the game, particularly issues with the EU server that caused players to have to wait through excessive queue times to even play the game. In all of this, there is a bigger question about who is making decisions about what is happening around the game, and so far Smilegate is able to avoid much of the criticism for the game, with Amazon Game Studios being the punching bag for disgruntled players. However, in responding to these problems, it is AGS that is the constant voice between players and those who manage the game. One Redditor remarked that Gold River was ‘this game’s Yoshi P’ a reference to Final Fantasy XIV director Naoki Yoshida who frequently addresses the concerns of the Final Fantasy XIV community and has a kind of celebrity status among the players. Equally, a western game industry figure akin to Yoshi P is Jeff Kaplan during his tenure as game director for Overwatch. He too generated a celebrity status within the Overwatch community, conversing with players on forums and through developer update videos on YouTube. The power of the auteur cannot be diminished in how a cultural product will be publicly perceived. When thinking about the public consciousness of Korean games, Gold River can play a key role in shaping how players view not just Lost Ark, but Korean games in general. Pragmatic Players in a Daunting Genre It is worth noting that beyond the “Koreanicity” and elements of extensive grind or pay-to-win in Lost Ark is that of relative access to a typically daunting genre for new players. The release of a new MMO will always spark a flux of populace movement from other MMOs in the west, whether it is produced by a western or non-western studio. Part of the appeal around Lost Ark for one of the authors was that it allowed access at the ground level of an MMO. Not only this, but it offered extensive onboarding and tutorials to guide players new to the game (and perhaps the genre as a whole) into the world of Arkesia. However, this doesn’t mean Lost Ark offers a simplistic MMO experience either past a certain point in gameplay. Simply put, being able to join an MMO at its launch, compared to trying to join a long-established MMO such as World of Warcraft and its decade worth of content, lore, changes, and dedicated player base, makes Lost Ark so appealing to anyone new to the genre. Lost Ark provided an opportunity for those completely new players interested in playing an MMO the ability to do so. What comes with that, as mentioned prior, is also a lack of historical design knowledge and experience in what makes an MMO distinctly Korean. So… What’s Next? The challenge ahead is for Smilegate and Amazon Game Studios to instill confidence in increasingly apprehensive players that they are heard by both entities managing the game. There is a real possibility that, if the future of the game is handled poorly, that Lost Ark as a high-profile Korean release, could reaffirm the most insidious aspects that western players have come to associate with Korean games. Despite all of its charm and the level of polish on its gameplay, if Lost Ark fails to engage a Western audience over the long term and loses players because of the grindy and pay to win elements of the game, it will increasingly solidify those characteristics among western players. Even if Lost Ark maintains its current player count, these elements are still present as an integral part of the game, but some of the other, more unique aspects of Lost Ark as an experience may receive increased visibility. It’s not enough, however, to change the overall perspective on Korean games. As this article has shown, there are very few Korean games that make it to the west, and so the western perception of Korean games and their ‘Koreanicity’ are built on very few points of contact. Lost Ark could be a good point for reinvigorating western interest in Korean games, but it can only change or enhance the perception of western players so much. Ultimately, western players need more high profile Korean games, whether they look like the Korean MMOs of the past, PUBG, Lost Ark, or something altogether new. Western players seem willing to take a chance on something unexpected and “new” in the Western market, even with their pre-existing conceptualisation of what such a game might entail in terms of play. Undoubtedly, there is a plethora of western gameplay and design stereotypes and expectations but whether these actually permeate into the Korean market, an idea of “Westernicity” if you will, is unclear. What we can see here is an asymmetrical cultural exchange of sorts. Western players have an inherently stereotypical view of Korean games, gaming culture, and gamers - not always exported from Korea itself (see: D.Va in Overwatch). They have a limited experience with Korean games which leave them unable to fully engage in a larger discourse and comparison between the two markets. Even with tangential comparisons with the Japanese game market, it stands as such a behemoth alone that dwarfs the Korean market with such strongly established norms and discourse. In this conclusion, the authors find themselves wanting more Korean games to launch and disrupt the western market, to reinvigorate the perception of Korean games beyond what has been established among players up until now. 1) Barthes, Roland and Stephen Heath. Image, Music, Text. New York: Hill and Wang, 1977. 2) Youtube Video “LOST ARK EXPOSED - PVE Interview with KR’s BEST (Jiudau) (accessed March 28th, 2022) https://www.youtube.com/watch?v=_8_kHtaXy8o&t=2919s 3) Reddit Thread, “The Man the Myth, the Legend GOLD RIVER (Accessed March 22nd, 2022) https://www.reddit.com/r/lostarkgame/comments/sn80q4/the_man_the_myth_the_legend_gold_river/ Works cited: Barthes, Roland and Stephen Heath. Image, Music, Text. New York: Hill and Wang, 1977.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Marc Lajeunesse Marc is a PhD candidate in Concordia University's department of communication studies in Montreal, Canada. Marc’s research focuses on toxicity in online games. He is driven to understand toxic phenomena in order to help create more positive conditions within games with the ultimate hope that we can produce more equitable and joyful play experiences for more people. He has published on the Steam marketplace and DOTA 2, and is a co-author of the upcoming Microstreaming on Twitch (under contract with MIT Press). (Game Researcher) Cortney Blamey Courtney is a Communication PhD student and game designer at Concordia University, Montreal, Canada. Her doctoral research concentrates on the process of meaning-making in games tackling serious themes and exploring this relationship between player and designer in her own critical game design process. Her previous research unpacked Blizzard’s approach to community moderation in Overwatch by investigating both developer and community inputs on forums. She is a member of the mLab, a space dedicated to developing innovative methods for studying games and game players and TAG (Technoculture Arts and Games).

  • The challenges of subscription-based gaming in Europe

    The last 15 years have witnessed major changes in the way we design and consume games made possible by better and faster internet connections, and new (mobile) technologies. Where computer games were once bought as physical copies in a retail shop, and then required the player to spend hours in front of the family computer or gaming console of the living room, games can now be played everywhere and at any time. But this has not only changed how we consume games, but also how games are designed and put to market. A range of very different new business models and monetization schemes have emerged such as games-as-service, microtransactions, cloud-gaming, in-game advertising along with collectibles and NFT´s and so forth.   < Back The challenges of subscription-based gaming in Europe 09 GG Vol. 22. 12. 10. ***이 글의 한글번역본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2&match=id:175 The last 15 years have witnessed major changes in the way we design and consume games made possible by better and faster internet connections, and new (mobile) technologies. Where computer games were once bought as physical copies in a retail shop, and then required the player to spend hours in front of the family computer or gaming console of the living room, games can now be played everywhere and at any time. But this has not only changed how we consume games, but also how games are designed and put to market. A range of very different new business models and monetization schemes have emerged such as games-as-service, microtransactions, cloud-gaming, in-game advertising along with collectibles and NFT´s and so forth. These major disruptions have not come unnoticed by players. However, to get an idea of how this have impacted players it is first necessary to understand the broader cultural context in which games are played. Since games are a global phenomenon, this obviously differs between different regions of the world. In this article, I will discuss games culture from a European perspective. Gaming culture and identity in Europe Historically, what characterizes the European game market was the popularization of the personal computer and a thriving scene for amateur game making and bootlegging. Playing games was – and still is – not just a pastime it is a serious culture and a lifestyle. More recently this gaming lifestyle have typically involved buying very expensive gaming hardware and spending hours upon hours in front of the computer. This also meant that for a long time, gaming was considered a sub-culture for the dedicated few and being a “member” of this subculture was signified through the technical specs of one’s gaming equipment along with the achievements made. Games have been described as a meritocracy, meaning that it is a site where players´ status is dependent on how well they play. In this context, playing well means working hard, rather than being lucky. It is also important to understand that this meritocracy extends beyond the virtual environment of games but seeps through the entire gaming ecology. This is not trivial. It means that the virtue of one’s very identity as a gamer is defined through hard earned objects and achievements that becomes extensions of oneself. This of course in part changed with the introduction of casual games on gaming platforms such as the Nintendo Wii and games developed for mobile devices. It is well-known that casual games made gaming way more accessible to a broader range of people and challenged the norms of the hardcore “sub-culture” segment of gamers. Still, the distinction between the “real”, hardcore gamers, and those casual players who will only occasionally dedicate a few hours or even minutes to play, persist. The point here is, that where casual play is an activity, hardcore gaming becomes an identity. How cloud-gaming challenge gamer identity Recently there have been much talk about how new business models ruins gaming. How is this so? One possible answer is that they challenge the construction of the gamer identity described above. One of the most significant recent developments that cannot be neglected is cloud-based gaming and remote play services. The failure of Google Stadia provides an illustrative example of how cloud gaming challenges the existing practices and values of gamers. Even before Google Stadia was initially launched it was received as “Netflix for games”. Stadia carried a double promise to game developers as well as players. For developers, it promised them instant access to a potentially very large audience, along with extensive economic support for the development of future titles. For players, Stadia promised an abundance of games, including new, major releases, in addition to an extensive back catalogue of older titles, which could be played at any time and on any device. All of this for a fixed monthly rate. Of course, as we know, Stadia did not deliver on these ambitious promises, and the reason is well-known: a lack of exclusive blockbuster games to attract players to the service, that developers had to port their games to get them on Stadia in the first place, and that players therefore needed to buy games they already owned in order to play them on the service. And that Google entered the gaming industry as an outsider and without credibility in the games industry as well as among players. However, underlying these reasons might be a more substantial problem: that Stadia challenged the very construction of the gamer identity. Stadia´s promise to make games accessible at any time and on platform basically made the need for expensive dedicated gaming hardware obsolete. This all sounds good but remember that ownership of expensive gaming hardware was a defining trait of the hardcore gamer. Stadia therefore did not only offer access to an abundance of games, but also to an abundance of less dedicated players, and by doing this, it also flattened the established hierarchies within game culture. Another important aspect related to hard-earned achievements, which I earlier described as extensions of the gamer identity. Also in this regard, Stadia had problems. As players no longer owned a copy of the gaming software, but subscribed to a service that gave them aces to it, they also feared to lose their sense of ownership of the hard work they put into the games along with the successes and achievements it had earned them, Finally, the fact that Google came to disrupt and conquer the market as an outsider also made them suspect, not least to European gamers where amateur game-making has been such a significant aspect of the early days of game making. Where other stakeholders in the industry was maybe often considered as “home-grown” in gaming culture, Google was seen as this big corporation, who wanted to take over a cherished culture, just to earn money. A threat to the virtous player Stadia was of course only one of a range of emerging subscription services for games, and other services, most notably Xbox Game Pass. Even though Xbox Game Pass have been a bigger success worldwide, as well as in Europe, there are still plenty of gamers who remain critical of Game Pass. Again, I believe this has to do with a lack of ownership, and with the lowering of the threshold to the “subculture” of hardcore gaming. But is also part of a more general resent of the new forms of gaming and monetization that supposedly ruins proper game culture. The arrival of casual games, and particularly those played on Facebook or other social media, was often framed at best as substandard and at worse as not actual games. Likewise, the lack of up-front payment in freemium games were seen as something that polluted the game entirely, since all design decisions where now motivated by the aim to make people spend money, rather than by making great games. On the other hand, the microtransactions of these games, was – and still is to some extend – considered a mild form of cheating, where the more honorable way of getting access to good in-game resources is still often believed to be through skill and hard work, and therefore only something attractive to inferior players. In short cloud-gaming, along with other recent developments in game monetization is considered a threat to the virtuous player. The future of cloud gaming in Europe While Stadia failed, and Xbox Game Pass, although successful, is still, by many dedicated gamers, looked upon with mild skepticism, there is no doubt there is a future market for these kinds of services in Europe. First, because the hardcore gamer today is a minority on the market. Gaming is very widespread in Europe among all ages and all walks of life. Recent surveys suggest that close to half of the population between 6-60 plays games today. Even though many of these probably play freemium games on mobile devices, and that a subscription to a cloud-based service might therefore not seem so attractive at this point, subscription-based gaming might not be so far-fetched. On the game development side, reservations may be even fewer. The European game industry is, save from a few big players like Rockstar North, and a range of mid-sized companies such as CD Project Red, and IO Interactive, the European game industry is characterized by many Indie Studios. For them, the challenges outlined above, may be considered quite minimal. Therefore, the real challenge when it comes to the European market may come from a completely different front, namely the strict regulation of the tech industries, especially when it comes to the handling of personal data.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Ida Jørgensen Holds a PhD in game studies from the IT University of Copenhagen, Denmark where her research revolved around gender representation, game culture and games as media. Today she works as a postdoctoral researcher at the University of Southern Denmark. (Game Researcher) Bora Na I'm a game researcher. I've been playing games for a long time, but I happened to take a game class at Yonsei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fter graduation, I sometimes do research or writing activities focusing on game history and culture. I participated in , , and so on.

  • 우크라이나 사태의 de jure와 de facto

    러시아 안에서 차르가 된 푸틴은 그렇게 러시아 바깥까지 제패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디 그런 장면은 역사 다큐멘터리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만 보면 좋겠다. 현실에서는 진짜로 사람이 죽고 다치기 때문이다. < Back 우크라이나 사태의 de jure와 de facto 06 GG Vol. 22. 6. 10. 역사가 매력적인 게임 소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시드 마이어의 〈문명〉,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의 〈토탈 워〉, 지금은 엑스박스 게임 스튜디오가 배급하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모두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빚을 진 게임이다. 코에이의 에리카와 요이치(가명 시부사와 코우)는 〈삼국지〉, 〈대항해시대〉, 〈신장의 야망〉 등 동서의 역사를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었다. 동명의 전략 시뮬레이션으로 대표되는 '대전략'(Grand Strategy) 부류의 게임들은 보다 넓은 시점에서 역사 속 국가들을 조망한다. 이런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주로 유라시아 대륙, 또는 아메리카까지 포함한 '전 지구' 위에서 한 국가를 선택하여 플레이한다. 플레이어는 그 나라를 경영하며 내정을 살피고 다른 국가들과 외교적, 군사적인 행동을 펼쳐나가며 특정한 목표를 이뤄나가게 된다. 2020년 출시된 〈크루세이더 킹즈 3〉는 대전략 장르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게임은 전략 시뮬레이션 전통의 국가 경영, 내정, 건설, 전쟁 등의 기능이 충실하게 반영된 가운데, 가문의 계보를 이어가는 재미도 준다. 플레이어가 선택한 가문의 '막장 드라마' 급의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최근 종영한 사극 〈태종 이방원〉의 캐치프레이즈에서 표현을 빌려오자면, 〈크루세이더 킹즈 3〉는 국(國)과 가(家)가 두루 담겨있는 게임이다. 이렇게 오늘날 〈크루세이더 킹즈 3〉의 스팀 평가는 '매우 긍정적', 메타크리틱 점수 91점을 기록하며 선전 중이다. 이번 글에서는 〈크루세이더 킹즈 3〉와 우리 현실 세계에서 발생 중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1000여년 전 중세 봉건사회와 오늘날을 일 대 일로 비교하는 것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예를 들어 2022년에는 국가지도자의 2세끼리 결혼을 시키지 않으며, 만에 하나 결혼을 한다고 해서 동맹이 형성되지는 않으며, 지도자의 자리도 (북한이나 가봉 같은 나라들을 빼고는) 세습되지 않는다. 게임 전문지에서 일하는 기자로서 게임을 현실에 빗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필자 개인의 지정학에 대한 이해 또한 부박한 수준이다. 하지만 주로 논하려는 〈크루세이더 킹즈 3〉가 어떻게 국경이 만들어지고, 유지되며, 뒤바뀌는지(국경을 ‘되찾기’ 위한 액션에 나서는지) 잘 풀어낸 게임이므로 조심스럽게 글을 써보려 한다. 두 개의 권역이 충돌할 때 전쟁은 시작된다 〈크루세이더 킹즈〉(이하 크킹) 시리즈에서는 역사적으로 아일랜드가 게임 학습의 ‘스타팅 포인트’로 제시된다. 〈크킹 3〉에서도 마찬가지. 플레이어는 랭커스터, 얼스터에서 활동하던 공작들을 복속시키고 아일랜드 왕국을 선포한다. 그 다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대치 중인 브리튼 섬으로 넘어가 접수가 완료되면, 플레이어는 브리튼 제국의 황제에 오르게 된다. 정복전쟁이 완료된 후에는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이 플레이어를 기다리고 있다. 아일랜드에서 게임을 시작한다고 가정했을 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물리력으로 아일랜드 다른 지역 공작들을 자기 밑으로 끌어들이기는 쉽지 않다. 전쟁에는 언제나 명분이 필요하며, 그 명분을 만들어나가는 활동이 〈크킹3〉 플레이에서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한다. 명분을 충족하기 위한 일차적인 조건으로는 ‘권역의 불일치’가 있다. 〈크킹3〉에는 규범 권역(de jure)과 실질 권역(de facto)이 있다. 규범 권역이란, 어떤 공작에게 이 지역부터 이 지역까지, 어떤 왕에겐 이 공국들을 아우른다는 일종의 관습적 권역이다. 신조어 ‘국룰’이 실제로 ‘국가의 룰’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통용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처럼 ‘jure’를 이해하면 될 듯하다. 그러나 게임 속 유럽에서 국경은 칼로 딱 자르듯이 나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공작의 나라(공국)이 내 공국 영토를 침범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실제 지도 위에 그어진 지역을 실질 권역이라고 부른다. 규범 권역과 실질 권역이 일치하지 않을 때, 플레이어는 전쟁의 명분을 얻게 된다. 이 권역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사실상 〈크킹3〉의 플레이가 불가능하다. 왜 나의 봉토에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인지, 왜 내 땅을 침범하고 있는지 같은 것들이 전쟁의 일차적인 명분이 된다. 해당 국가가 다른 종교를 채택했다면, ‘성전’을 벌일 수 있다. 중세 사회에서 성전이야말로 전쟁을 선포할 가장 좋은 구실이며, 바티칸의 교황은 틈만 나면 근동(Near East) 사회에 십자군을 보내려 든다. 게임의 권역들은 만고불변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게 되고, 이 변화는 플레이어의 유불리에 작용하게 된다. ‘이 규범 권역은 우리 왕국의 것’이라고 유럽 국가들 사이에 널리 인정받을 수 있고, 플레이어의 폭정으로 인해 봉토를 받은 공작들이 독립을 선언한다면 결과적으로 규범 권역은 줄어든다. 그러나 게임을 하면서 규범 권역이 바뀌는 것을 보려면, 브리튼 왕국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작령을 지배하는 것으로 이해되려면 100여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의 제(諸) 세력들은 호시탐탐 플레이어가 빼앗아간 고토(古土)를 수복하려 들 것이다. 이때, 플레이어에게는 여러 옵션이 있다. 교황의 든든한 지지를 뒤에 업고 적들을 이단으로 꾀어내던가, 일부 프랑스 공작들을 자신의 말을 잘 듣도록 만들던가, 규범 권역으로 돌아가 집안 살림이나 잘 신경쓰거나, 공국이 감히 설칠 수 없도록 더 강력한 제국을 선포하거나… 그리고 〈크킹3〉가 어려운 까닭은 그 작전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후계자가 갑자기 죽어버리거나, 왕이 며느리로부터 대시를 받거나, 합스부르크에 시집보내려던 딸이 매독에 걸리면 전략 수정이 불가피하다. ‘국’에 지나치게 신경쓴 나머지 ‘가’에 소홀하게 되면, 플레이어가 선택할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크킹3〉의 규범 권역과 실질 권역은, 실제 역사가 보여준 모습을 훌륭하게 게임으로 빚어냈다. 역사에서도 규범 권역과 실질 권역이 불일치할 때 전쟁은 벌어졌다.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은 마땅히 되찾아야 할 땅이었으나,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대대로 뿌리내리고 살던 터전이었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알라의 뜻을 받아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자신들이 이끌어야 하는 땅이라고 주장하며 성전을 선포한 조직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ISIS다. 전쟁은 어떻게 끝나는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규범 권역과 실질 권역 이야기로 풀어볼 수 있다. 이러고 싶지 않지만, 악마의 변호인이 되어보자는 심산으로 러시아의 입장에서 두 권역 이야기를 해보자. ―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규범 권역을 침범하고 있다. 우리는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인들의 자치를 보장해주었으며, 오랜 기간 물적·인적 교류를 맺어왔다. 그런데 ‘키예프’ 루스 한 뿌리였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어 금지 법안을 발의하는 등 우크라이나 내 인구 17% 비중을 차지하는 러시아인들을 박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실질 권역과 국경을 그대로 유지한 채 역내 안보에 위협이 되는 국제 기구에 가입하려 들고 있다. 우선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탄압 선봉엔 ‘네오나치’ 세력들이 있으므로, 이들을 축출하기 위한 ‘일부 군사작전’을 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아마도 우크라이나는 이렇게 답변할 것이다. 물론 다음과 같이 쓴다고 해서 필자가 ‘천사의 변호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규범, 실질 권역을 모두 침범하고 있다. 1991년 우크라이나는 공식적으로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 독립했으며, 별개의 주권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역내 평화를 위해 가지고 있던 핵탄두를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소련으로 보내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유럽이고자 하는 욕망이 크고, (근시일 내 불가능하겠지만) 그를 위한 조약 기구에도 합류하고 싶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인은 차별받지 않고 공존하고 있으며 독립을 선포한 두 곳의 공화국 역시 모두 러시아의 공작에 의한 것이다. 무엇보다 현재 러시아군은 ‘키이우’를 비롯한 전국에 포격과 비인도적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므로 방어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양측이 서로 평행선에 가까운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그 조율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크킹3〉에서는 전쟁을 끝내는 4가지 조건이 있다. ― (a) 승전은 전쟁에서 상대를 압도한 것이 확인될 때 플레이어가 자신이 내건 명분이 맞다며 ‘요구압박’을 하고, 열세에 놓인 상대방이 이를 승인하면서 이루어진다. 게임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b-1) 무조건 평화는 상대방에게 지금까지의 전쟁을 ‘없었던 일로 하지 않을래’라고 묻는 것으로 개전의 명분에 따라서 다른 조건의 협상을 벌이게 된다. 주로 전쟁 중에 나라에 변고가 생겼을 때 사용하는 커맨드다. (b-2) 기독교 국가로 플레이하는 경우, 전쟁이 끝나기 전에 교황이 성전을 선포해도 전쟁은 없었던 일이 된다. (b)의 결과는, 개전 이전 상태(Status Quo Ante Bellum)다. (c) 패전은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상대방이 이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하고, 플레이어는 그 사실을 무조건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플레이어는 잘못된 전쟁을 선포했음을 인정하는 배당금을 상대에게 보내야 하며 휘하의 신하들은 왕을 불신하게 된다. (b-2)를 빼고 보자면, (a), (b), (c)를 단순히 승무패로 나눌 수 있을 듯하며 현실에서 벌어지는 충돌의 결과 또한 승무패로 분류할 만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러시아로부터 군대를 모두 물려내고 나토를 가입하고, 푸틴으로부터 배상금까지 얻어낸다면 (a), 러시아와 협상 테이블에서 어디까지가 ‘개전 이전 상태’인지를 합의한다면 (b), 나라의 운명을 러시아에게로 맡기기로 한다면 (c)가 될 것이다. 동맹은 동맹국의 전쟁에 참가하는 것이 의무이며, 〈크킹3〉에서도 마찬가지다. 전쟁 중인 동맹국에 파병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으면 플레이어의 위신이 훼손될 수 있다. 게임에서 선전을 포고할 때 쓰이는 자원이 바로 위신이므로, 한동안 전쟁 명분을 잃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날 현실에서도 국제사회에서 동맹은 매우 중요한데, 벨라루스 또한 러시아와 함께 ‘군사작전’에 나섰다. 두 나라가 동맹을 맺고 있는지 주종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갈릴 듯하다. 반면에 미국과 유럽은 우크라이나가 동맹국이 아니기 때문에 무기를 보내고 경제제재를 가하지만, 직접적인 액션은 취하지 않고 있다. 이런 와중에 나토의 또다른 핵심 축인 독일은 패전 이후 처음으로 재무장을 선언했다. 새로운 국경을 만들겠다는 욕망은 게임에서나 〈크킹3〉으로 현대 사회의 국가 관계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결정적 이유는 제국주의와 냉전이 세계지도에 한 일을 중세 배경 게임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플레이하고 싶다면 같은 개발사(패러독스 인터랙티브)의 〈빅토리아〉를 찾으면 된다.) 아프리카의 ‘자로 잰 듯한’ 국경은 실제로 자로 잰 것이며, 이후 숱한 아프리카의 민족 분쟁이 그 줄긋기의 영향을 받았다. 아프리카의 숱한 민족분쟁에 관해서 〈르몽드 세계사〉는 “아프리카는 종족 자체가 사회를 구성하고 나아가 국가를 만들기도 한다 (중략) 중앙집권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식 모델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한다. 태국의 라마 5세는 ‘국가의 지도’를 편찬해 국민성을 만들려고 했지만, 국가의 가장자리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국가에 행정력이 전파되기 전까지 국가가 뭔지 관심이 없었다. 태국 정부는 냉전 시대에서야 산악지대를 넘나드는 공산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해 주민들을 명부에 등록했다. 국경은 산맥과 강줄기에 따라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통치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원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러시아는 제국 때나 소련 때나 지금에나 부동항을 면한 흑해 연안의 도시들을 노리고 있다. 푸틴의 도박은 수많은 명분들로 포장되어있지만, 어찌 보면 본질은 러시아식 부동항 공략의 재현이다. 더 멀리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국경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러시아 안에서 차르가 된 푸틴은 그렇게 러시아 바깥까지 제패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디 그런 장면은 역사 다큐멘터리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만 보면 좋겠다. 현실에서는 진짜로 사람이 죽고 다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부, 「르몽드 세계사」, 권지현 옮김, 휴머니스트, 2008 통차이 위니짜꾼 , 「지도에서 태어난 태국 – 국가의 지리체 역사」, 이상국 옮김, 진인진, 2019 CK3 Wiki, “Titles”, (2022-05-27) Steam, “Crusader Kings III”, (2022-05-27) Wikipedia, "Grand strategy wargame", (2022-05-27)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김재석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 동시대 JRPG의 얼굴들 – 야쿠자, 왕자, 그리고 이방인

    <33원정대>는 두 현실 사이에 중재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둘 중 하나의 편을 택해야 하며, 선택은 곧 다른 하나의 세계와 가능성을 돌이킬 수 없이 폐기하는 행위로 기능한다. 각자에게 할당된 엔딩 이후 캔버스 속 세계의 운명은 정리되어 치워지고, 주인공들에게서 이전의 모험을 반복하거나 지속할 동기나 가능성은 사라진다. < Back 동시대 JRPG의 얼굴들 – 야쿠자, 왕자, 그리고 이방인 25 GG Vol. 25. 8. 10. 파이널 판타지 XV의 개발 총괄 하지메 타바타와 샌드폴 인터랙티브의 게임 <클레르 옵스퀴르 : 33원정대(이하 33원정대)>의 감독 기욤 브로체의 대담에서, 타바타는 <33원정대>를 "일본인의 입맛에 맞춘 프랑스 식사"로 비유한다. 기욤 브로체 역시 <33원정대>가 JRPG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그에 고유한 "느낌"을 전달하고자 했음을 여러 번 밝힌다. JRPG가 일본 롤플레잉 게임(Japanese Role-playing Game)의 약어임을 떠올리면, 프랑스 JRPG란 표현은 형용모순처럼 들리기도 한다. [1] 하지만 JRPG는 공간적이고 지리적인 분화를 암시하면서도 한 세대의 유년기 게임 경험을 함축하는 장르로서 종종 호소력을 갖기 때문에 반드시 일본에서 생산될 필요는 없다고 자주 주장된다. J.D 맬린딘의 「카트리지 속의 유령: 향수와 JRPG 장르의 구축」은 게임 커뮤니티의 담화를 분석하며, "JRPG라는 이름의 “일본” 요소는 단순한 지리적 표시가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적 환경 속에서 정체성과 기억이 어떻게 협상되는지를 보여주는 요소로 기능"함을 보인다 [2 ]고 지적했다. 게임 유저들이 콘솔 기기로부터 PC로 게임 기기가 옮겨가는 기술적 전환을 경험하며, 사후적으로 콘솔 중심의 RPG 게임, 주로 일본 발의 시리즈가 주류를 이뤘던 시대의 게임을 JRPG로 프레이밍했다. 그리고 이러한 프레이밍과 협상, 항목화의 절차를 추동하는 정서적 축은 노스탤지어다. "이전에 나왔던 게임과 같은 느낌을 선사해야 한다"거나, "JRPG를 플레이하게 되면, 즉각적으로 그것이 JRPG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발화에 J.D 맬린딘은 주목한다. JRPG가 기술적으로 지체되고, 과거를 반복하고, 특정 세대의 향수에 호소하는 죽은 장르란 비판 역시 그것이 노스탤지어에 기대어 있다는 암묵적인 합의에서 출발하지 않던가? 동시에 저자는 플레이어들이 오로지 새롭고 참신한 감정을 얻기 위해서만 게임을 한다는 전제를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으로 의심하며 어쩌면 "같은 느낌"을 반복하는 것, 과거의 게임에서 느꼈다고 생각한 감정을 다시 얻기 위해 JRPG를 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제언한다. JRPG라는 장르명을 사용하는 게임 커뮤니티 언중의 담화를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카트리지 속의 유령: 향수와 JRPG 장르의 구축」은 이 반복되는 "같은 느낌"을 구성하는 반복의 구조를 깊이 다루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는 '왕도'라 일컬어지는 일직선적인 내러티브, 홀로 나아가기 보다 동료 및 파티와의 우정을 쌓아가며 강해지는 주인공, 각자 역할이 분할된 3-4인 파티 단위의 턴제 전투, 시네마틱 컷신의 삽입을 흔히 그 "느낌"의 근거로 떠올릴 수 있다. 위의 대담에서 <폴아웃> 같은 영미권의 고전 RPG와 비교하며, 기욤 브로체는 일상성을 함축한 대화, 진지함과의 적절한 거리, 마치 연속적인 컷신처럼 구성되는 턴제 전투를 JRPG의 특징으로 꼽기도 한다. 반복되어야 할 "같은 느낌"이란 일관성을 배제하고 이야기될 수 없을 터, 이 일관성을 영이의 『게임 코러스』는 ‘일관된 목소리,’ ‘믿을 수 있는 목소리’임을 약속하며 디오니소스적 근원과의 합일로 초대하는 UI의 역할과 연결한다. [3] 특징적인 UI의 반복적 배치는 일관성의 경험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과거의 순간과 우연적으로 결부되어 버리며 어떠한 시간적인 반복의 느낌을 자아낸다. 물론 어떤 장르가 되었든 그 애호가들에게는 향수로 가득한 반복과 재확인의 열망이 있을 터다. JRPG는 그 일관성의 약속이 더 강력한 구속력을, 자주 퇴행적이고 관습적이란 오명을 쓰는 그러한 구속력을 띄고 나타나는 듯 보인다. 2. 위의 논의를 바탕으로, 나는 <33원정대>를 비롯한 최근의 JRPG, 혹은 JRPG의 영향을 받은 게임들이 JRPG 특유의 "느낌"을 반복하려는 주인공들을 등장시키고 있음에 주목하려 한다. 마치 플레이어블 캐릭터(PC) 혹은 주인공이 JRPG 플레이어가 지닌 노스탤지어를 공유하거나 이해하는 양, 그들의 이야기는 게임적 환상의 반복 혹은 연장을 향한 소망으로 얼룩져 있곤 한다. JRPG를 재생산하고 반복하려는 소망을 품은 캐릭터를 내세움으로써, 한 게임이 여전히 JRPG가 되어야 할 필연성이 부연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용과 같이 7의 스팀 소개 이미지 가령 가장 노골적인 예시로, <용과 같이 7>의 주인공 이치반을 살펴보자. 본래 실시간 격투 게임의 동사들을 더 많이 빌려 오던 <용과 같이> 시리즈는 <용과 같이 7>에서 JRPG의 특징으로 꼽히곤 하는 턴제 전투로 전환하며 매너리즘을 쇄신하려 시도한다. <용과 같이 7>의 주인공 이치반은 타인의 죗값을 대신 치르러 십 수년의 청춘을 감방에서 보내며 세속 사회와 오랜 세월 단절된 인물이다. 장래 희망이 용사였다고 천진난만하게 밝히는 그는 어릴 적 플레이했던 <드래곤 퀘스트>의 세계관에 여전히 몰두해 있다. 아니, 몰두하기를 넘어서 이치반의 세계는 곧 전 야쿠자와 한구레와 양아치들이 몬스터 대신 들끓는 요코하마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한 드래곤 퀘스트와 다름이 없다. 실시간 격투 위주의 샌드박스 게임이었던 용과 같이 시리즈가 턴제 RPG로 전환하는 개연성은 주인공 이치반의 시대 착오적인 환상을 경유하여 설명된다. 커뮤니티 기능과 소위 '레벨업 노가다'를 가능케 하는 던전, 캐릭터의 '직업'을 결정하는 시스템이 새로이 시리즈에 출현한다. 이치반과 친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으로는 도적, 마법사, 검사 대신 노숙자, 프리터, 캬바걸, 호스트가 있다. 명랑 만화의 주인공처럼 지칠 줄 모르는 이치반은 거의 미치광이에 가까운 낙관과 의협심을 유지하며, 밑바닥 출신 동료들로 이뤄진 파티와 우정을 뽐내는 필살기를 써가며 용사의 역경을 돌파해 간다. 폭도법으로 몰락하고 변이한 야쿠자 세계와 동시대 일본의 도시 생태는 그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게임적인 구조, JRPG의 장르적인 느낌으로써 여과되고, 재해석된다. 한편 <메타포: 리판타지오>의 주인공은 애초부터 모험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소망에서 출발한 존재다. 왕의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핍박 받는 소수종족으로서 무력하게 숨어 지내야 했던 왕자는 어떠한 종족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그린 서적을 탐독하곤 했다. 그러한 세계를 정말로 만들기 위해 동료들과 힘을 합치는 모험, 그 모험을 능히 해낼 수 있는 강인함에 대한 소망이 투사되어 만들어진 왕자의 분신이 곧 <메타포>의 주인공이다. 왕자의 분신이면서 꿈 속의 존재인 그는 익명의 인물로 출발하지만, 유토피아를 현실로 번안하려는 용사의 여정을 따라가 온갖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그들의 연대 속에서 되고 싶었던 존재가 되고 만다. 최종 보스는 특이하게도 우리가 익히 아는 현대 일본이 진짜 현실 세계이며 그들의 판타지 세계는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주인공이 최종 보스의 설득에 넘어가 버리면 평소의 ‘FANTASY IS DEAD’란 게임 오버 메시지의 변주로 ‘FANTASY IS ONLY FICTION’이란 문구가 뜬다. 게임 오버 메시지를 통해 <메타포>는 환상을 "단지 픽션"에 머물지 않게 하는 어떤 힘을 믿어야 함을 역설한다. 여기서 장르는 기능적 UI로 설명되고 규명될 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타인과 연결되는 방법론적 틀을 제시한다. 최근의 성공적인 JRPG 풍 타이틀이 내세우는 주인공들은 ‘이’ 현실이 가능한 현실의 전부라는 식의 현실주의와 대립각을 세우고, 현실주의를 타파하는 연대로 향해 가는 과정에서 JRPG의 서사 구조를 긍정적인 자기 설명의 형태로 사용한다. 삶과 예술의 영역을 가리지 않는 정동적 기대의 공간으로 규정되는 로렌 벌렌트의 '장르' 개념을 빌리자면, 허구적 인물에게 있어 JRPG의 세계관이 현실을 견딜 만하게 해주는 하나의 장르로 출현하는 것이다. 3. <33원정대> 1막의 파티원들 <33원정대>의 접근법은 위의 게임들과 엇나가게 포개어진다는 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33원정대> 역시 애착을 투여한 환상을 반복하려는 소망이 캐릭터의 내러티브의 차원에서 표현한다. 그런데 위의 두 게임과 달리, <33원정대>에선 그 소망이 명명백백히 식별되는 원톱 주인공에게 덧씌워진 소망이 아니다. <33원정대>에서 플레이어가 조작하게 되는 '아바타'와 주인공의 일치와 불일치, 교체와 혼선이 이뤄지는 기제를 먼저 짚고자 한다. 메인 플레이 내에서, 플레이어는 아무 파티원이나 골라잡아 파티의 대표자로 조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야영지와 같이 휴식과 일상적 대화가 이뤄지는 장소에선 하나의 캐릭터, 1막, 2막, 3막의 주인공으로 대두되는 캐릭터만을 활용하여 대화해야 한다. JRPG의 문법에서 주인공은 플레이어에 의해 조작되고 움직일 수 있는 아바타로의 속성만이 아니라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인연의 중심 축으로서 성격을 띈다. 더불어, 성별화된 각본을 따르는 장르에 익숙한 기대에 따라서, 우리는 '히로인들'과의 관계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는 구스타브가 주인공이라고 쉬이 짐작한다. 주인공으로서 구스타브는 사랑하는 옛 연인을 고마주로 잃고 인생의 마지막 해인 33살을 맞아 33원정대에 합류한다. 수평선 너머에 웅크린 마녀 페인트리스는 매년 인류의 수명을 줄여서 쓰고, 그 수명을 넘긴 인간은 소멸하게 만든다. 이 소멸이 곧 '고마주'고, 고마주를 앞둔 사람들을 모아 원정대를 매해 꾸려왔으나 페인트리스의 토벌은 이뤄지지 않는다. 노인도 중년도 단 한 명도 눈에 띄지 않는 역전된 고령화 도시 뤼미에르에서 인류는 느릿느릿 다가오는 멸망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수긍에 저항하려 한 33원정대는 페인트리스의 영역에 상륙하자마자 수수께끼의 노인과 괴물들에 의해 거진 몰살당한다. 그렇지만 그와 누이처럼 자란 마엘과 남아 있는 생존자 루네, 시엘이 구스타브와 다시 여정을 함께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페인트리스에게 차근차근 다가선다. 구스타브는 그 자신의 유약함을 떨쳐 내고 세계를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구스타브는 다시금 원정대의 길을 막아선 노인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당한다. 마엘 역시 죽게 되기 전에 낯선 남자가 막아선다. 어떤 논리로 그게 가능한지는 몰라도, 베르소는 구스타브의 인벤토리에 있던 아이템과 경험치까지 계승한다. 고마주가 시작되고 최초에 보내진 원정대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신원을 밝힌 베르소는 그를 포함한 옛 원정대원 중 일부가 마녀로부터 불멸을 얻었음을 밝힌다. 불멸을 고집하는 이들은 원정대로서 본분을 잊고 페인트리스를 지키려 한다. 그 자신은 이기적인 불멸에 회의를 느껴서 마녀를 토벌하려는 원정대원들에게 여러 번 협력해왔다. 적어도 베르소의 주장은 그러하다. 말그대로 플레이어 앞에 튀어나온 이방인인 베르소가 죽은 구스타브를 대신해 2막의 주인공 자리를 꿰찬다. 다만 시네마틱 컷신 상에서 중심에 놓이는 종류의 주인공은 2막의 베르소도 살해당한 1막의 구스타브도 아니다. 시네마틱 컷신은 플레이어의 조작을 배제한 채로, 급변하는 상황을 보여주거나 일방적인 내러티브의 강제력이 작동해야 하는 순간에 곧잘 끼어드는 게임적 장치다. 컷신이 초점을 맞추는 드라마는 원정대의 막내 마엘의 것이다. 고향인 뤼미에르에서 마음 둘 곳을 찾을 수 없어 어린 나이에 원정대에 합류한 마엘은 마녀와 괴물들의 땅에 와서 어떤 친숙함을 감지한다. 그 친숙함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고 한편으로 겁에 질리게 한다. 마엘과 분신처럼 닮아 있으나 얼굴 반쪽이 일그러진 소녀가 원한에 찬 유령처럼 그녀 주변을 떠돈다. 가족과 같던 구스타브 마저 잃은 상황에서, 마엘은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세계를 멸망으로 몰고 가는 저주와 그녀가 관련되어 있다는 불길한 암시를 읽는다. 한편 베르소는 수수께끼와 불안으로 가득 찬 컷신 중심에 놓인 마엘을 곁눈질하며 침묵하는 얼굴로 나타난다. 베르소를 조작해야 하는 플레이어조차 그가 마엘에 대한 모종의 계획을 품고 진실을 감추며 술수를 부리는 모략가임을 짐작할 뿐, 어떤 꿍꿍이를 품었는지 실마리를 짚어낼 수 없다. 진실에 근접해 있으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를 택하는 인물을 조작하는 건 플레이어와 플레이어블 캐릭터 사이의 동일시를 원하는 쪽에선 곤혹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이야기의 중추는 마엘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읽히니 혼란은 배가된다. 뻐꾸기 새끼처럼 원정대에 비집고 들어온 베르소는 여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들과 관계를 쌓는 과정이 JRPG 상에서 '인연', '커뮤니티', '코옵'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온 시스템을 통해서 시작되고, 플레이어는 장르의 문법에 따라 관계망의 중심에 자리한 베르소를 새로운 주인공으로 어색하게, 또 간신히 식별할 수 있게 된다. 인연 레벨을 올리는 과정에서, 베르소는 구스타브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마엘에게 그 대신 오빠 노릇을 해주려 들고, 시엘과 르네같은 성인 여성들과는 친구가 되어가는 단계인지 연인 이전 단계인지 모호한 대화를 나눈다. 시네마틱 컷신과 메인 플레이, 인연 레벨 세 가지 차원 상의 플레이는 밀도가 다르기 때문인지 헛도는 태엽 바퀴처럼 영 맞아떨어지지 않는 인상을 준다. 티격태격하거나 추궁하거나 농담하는 식의 평범한 대화의 일상성 마저도 한편으로 가장된 것으로서,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게 다가온다. 원정대는 여러 모로 믿기 어렵지만 적어도 페인트리스 공략법은 정통한 듯한 베르소의 안내를 따라간다. 정체가 규명되지 않은 마엘의 신비한 힘 덕분에 길을 막아서는 노인의 불사 역시 해제하고 죽일 수 있게 된다. 그들은 구스타브의 복수를 해내고 마침내 마녀 페인트리스까지 무찌르는데 성공한다. 루네와 시엘, 마엘은 그들이 이제 함께 늙어가는 미래를 손에 쥐었음을 감격하며, 그 많은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고 기뻐한다. 대륙에 돌아간 그들을 사람들은 영웅으로 떠받들며 환대한다. 이 축제의 장에서 플레이어들은 비로소 그들의 주인공이 숨기고 있던 바를 비로소 알게 된다. 베르소는 페인트리스가 멸망을 부르는 게 아니라 멸망을 지연하고 인간들에게 경고하고 있음을 숨겼고, 마녀가 진정 멸망을 부르는 존재를 봉인 중이었단 걸 알리지 않았다. 그렇게 인류는 축제 속에서 멸망한다. 알리시아란 부제가 붙은 에필로그를 통해서 페인트리스와 마엘의 비밀이 밝혀지는데, 그 비밀은 규모 면에서는 하잘 것 없게 느껴진다. 마엘은 '알리시아'로 자신을 부르며 신경질적으로 재촉하는 목소리에 깨어난다. 그녀가 깨어난 저택은 플레이어들에게 아주 친숙한 장소다. 던전 도처에 '어디로든 문'을 연상시키는 입구가 있어 원정대원들이 드나드는 셸터로 기능해 온 수수께끼의 저택과 동일한 외양이다. 플레이어는 이제 알리시아로 불리는 마엘만을 조작하는데, 알리시아는 화상으로 얼굴 반쪽이 얽어지고 성대 역시 불타 말 한 마디 제대로 내뱉을 수 없다. 화마에 휩싸였던 저택 곳곳은 보수공사 중이다. 장남 베르소는 알리시아를 구하고서 화재 속에서 죽었다. 어머니 알린은 실의에 빠졌고 세상 일을 등졌다. 알린은 유년 시절 아들이 그렸던 동화 풍의 캔버스에 들어가서, 현실과 달리 영원한 생을 누리는 가짜 도플갱어 가족을 그려내고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계를 돌보며 페인트리스로서 머문다. 캔버스에의 접속이 페인터의 육체를 소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까지 잃을까 두려워하는 르누아르는 알린의 뒤를 따라가 캔버스 속 세계를 강제로 지워버리고자 한다. 두 페인터의 힘겨루기가 절멸을 향해 엄습해 오던 고마주의 정체다. 부부의 일은 가상 세계를 디자인하고 개발하거나 삭제하는 게임 디자인에 가까워 보이기에, 페인터의 비유는 한편으로 잘 맞아떨어지지 않게 들린다. 한편, 부부 싸움의 교착 상태에서 첫째 딸 클레아는 부모가 팽개치고 간 가문의 일과 화재를 일으킨 정적과의 싸움을 처리하고 있다. 클레아는 의기소침한 여동생을 돌보는 일을 내놓고 마뜩치 않아 하고, 어머니를 되찾아오려는 아버지의 일이나 도우라고 알리시아의 등을 떠민다. 하지만 페인터로서의 재능 혹은 힘이 부족했던 알리시아는 그대로 그려진 세계에 휩쓸려 어머니의 피조물 중 하나로 마엘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모두가 고마주로 소멸한 뒤, 마엘은 알리시아로서의 기억을 되찾는다. 베르소의 정체도 밝혀진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페인트리스가 그려낸 불멸의 도플갱어였다. 그는 비록 그려진 존재지만, 본래 베르소가 지닌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어머니를 현실로 돌려보내고 자신 또한 안식을 얻고자 원정대원들을 속이고 배신해왔다. 백 년 가까이 지속된 부부 싸움에서 마침내 승리한 르누아르는 아내가 다시 유혹에 빠지지 못하도록 그려진 세계와 그려진 베르소를 지워 없애려 하지만, 알리시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마엘은 페인터의 능력을 각성하고 아버지에게 저항한다. 그 능력으로 루네와 시엘을 되살리고, 아버지에 맞서 어머니 페인트리스의 자리를 계승하려는 게 3막의 줄거리다. 마엘은 본래 절도 있는 펜싱 스타일의 전투 애니메이션을 갖고 있었는데, 알리시아의 기억을 되찾고 나선 마녀 페인트리스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는 비현실적인 움직임이 특징적인 스킬을 주력으로 활약하게 된다. 마엘의 필살기 중 하나는 아예 이름이 “고마주”다. 캐릭터를 육성한 방식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 이 국면부터 플레이어들은 마엘 외의 캐릭터는 주력 공격보다는 보조로 활용하게 된다. 게임의 메인 콘텐츠인 전투 상에서 마엘은 이제 완벽한 주인공이다. 극적이고 시각적인 변신을 거친 마엘은 강력하고 힘겨웠던 적에게 천문학적인 데미지를 입히며 전투를 비교도 안 될 만큼 수월하게 바꿔놓는다. 강력한 미소녀 마법 검사를 조작하는 만족감은 한편으로 플레이어로 하여금 마엘의 캐릭터와 선택을 경험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마엘은 알리시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마엘은 플레이어가 그러한 것처럼, 바로 이것을, 이 순간을, 승리와 진전을 반복하고 세계를 구하는 역할을 맡고 싶을 것이다. 마엘은 아버지를 설득할 때 마음을 정리하고 모두와 이별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 구하고 있을 뿐이라고, 자신은 어머니와 다르며 돌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깊은 내심으로는 캔버스 안에서 죽을 때까지 머무를 작정이다. 실상 막간의 기능에 가까웠던 에필로그에서, 소위 '현실' 세계의 알리시아에게 허락된 상호작용은 화마의 상흔이 곳곳에 새겨진 저택 내를 빙글빙글 오르내리면서 자신 때문에 가족의 평온이 불가역적으로 파괴되었음을 되새기는 독백을 묵언으로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저택에서 유일하게 대화가 가능한 인물인 언니 클레아는 알리시아와 마주하는 게 성가시고 짜증스러운 티를 숨기지 않으며 자신은 동생을 위해 죽는 불가해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비아냥거린다. 마엘이 돌아가야 하는 삶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목격한 다음, 플레이어는 제작진이 공들인 게 분명한 마엘의 멋진 애니메이션으로 전투를 채우며 기이한 쾌감과 간극을 느낀다. 이 간극이 결국 마엘로 하여금 호소하게 만드는 것일 테다. 밖에서 그녀는 그저 간신히, 존재만 하고 있다고. 인연 레벨 올리기로 대표되는 JRPG 동료 시스템의 함의는 캐릭터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유대감에 대한 수량적 표현이며, 이러한 동료와의 상호작용을 게임적으로 장려하기 위하여 게임 플레이를 더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보상을 제공한다. 실제로 <33원정대> 역시 인연 레벨을 올림에 따라 동료가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필살기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 인연 맺기의 중심에 위치한 베르소는 '만렙'으로 수치화된 유대감과 상호 이해의 맥락 자체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는 듯이, 마지막에 이르러서 다시금 마엘, 시엘, 루네, 모두를 배신한다. 누구와 연인이 되거나 어떠한 선택지를 고르거나 인연을 어느 수치까지 달성하거나 따위의 조건 달성도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다. 동료들과 가장 내밀한 유대의 순간을 겪는다 한들, 그는 자신의 현실이 지속 불가능하고 애초에 존재해선 안 되는 현실임을, 고작 한 가족의 비극을 종식하기 위하여 모두가 희생되어야 함을 고집한다. 베르소는 이미 구스타브를 살릴 수 있었으나 죽도록 내버려둔 바 있는데, 구스타브의 주인공으로서 자리, 마엘 곁에서 모두의 신뢰를 얻고 페인트리스로 향하는 틀린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그 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연은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자원으로 동원된다. 이 인연 시스템은 게임 플레이 내에서 언제나 자원으로 기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단지” 자원이었단 건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JRPG의 인터페이스가 오랜 역사성과 완고함을 내포하고 있는 만큼, 그 기반이 시험 당하는 순간은 더욱 낯설고 이질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다. <33원정대>는 어머니의 외연도 한계도 모르는 애도 하에서, 어른이 되기도 전에 늙어버린 자식들이 엇비슷한 운명을 공유하는 서로를 결국에 참지 못하는 이야기다. 마엘과 베르소의 마지막 대결은 가짜가 진짜를 변호하고, 진짜가 가짜를 변호하는 역설이기 보다 상호 양립할 수 없는 두 정서적 현실의 충돌이다. 전자는 마치 여생을 보낼 완벽한 요양원을 찾은 것처럼, 장르가 허락한 역할놀이를 반복하며 자신이 죽을 때까지 존재할 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기대하고, 후자는 연명치료의 중단을 외치는 대신 껍데기만 남은 역할 놀이의 반복이 종결되기를 원한다. 두 사람은 모두 최종장에서 비등하게 중심 서사를 이끄는 인물이지만, 각자 상이한 플레이 차원을 차지한 주인공으로서 비대칭적이다. 마엘의 플레이가 반복과 변주의 쾌,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을 무력하게 만드는 향락적 차원에 해당한다면, 베르소의 플레이는 관계의 관리와 비밀의 통제, 이야기 자체의 종결을 지향하는 통제적 차원에 해당한다. 이런 대조 속에서 <33원정대>는 JRPG를 반복하고자 하는 정서적 기대와 인물 내부의 이야기 및 전체적인 세계관 사이에 긴장을 유발한다. 플레이어는 최후의 순간에 베르소와 마엘 둘 중의 한 사람의 편을 들기를 택해야 한다. 베르소는 그가 가짜임을 실감케 하는 원본의 기억에 의해서, 마엘은 죄책감과 고독으로 인해서 자신이 연원한 곳에 편안히 소속될 수 없는 이들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종용하면서 모순적이게도 자신의 현실은 조용히 인생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란다. 그들은 닮아 있지만 결코 상대가 소망하는 바를 용납치 못한다. <33원정대>는 결국 이전의 두 게임과 달리 ‘이’ 현실이 가능한 현실의 전부라는 식의 현실주의에 저항하는 이야기이기 보다는, 두 개의 현실주의 사이에 팽팽한 적대를 그리는 이야기다. <33원정대>는 두 현실 사이에 중재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둘 중 하나의 편을 택해야 하며, 선택은 곧 다른 하나의 세계와 가능성을 돌이킬 수 없이 폐기하는 행위로 기능한다. 각자에게 할당된 엔딩 이후 캔버스 속 세계의 운명은 정리되어 치워지고, 주인공들에게서 이전의 모험을 반복하거나 지속할 동기나 가능성은 사라진다. 엔딩 직전으로 돌아가지만, 엔딩의 촉매인 최종 보스가 사라져 있는 결말 이후의 플레이는 플레이어들이 남은 콘텐츠를 마저 즐기라고 남겨둔 여지에 지나지 않는다. 다회차도 썩 내키지 않는다. 세계를 구하는 용사의 여정, 마녀의 손에서 아이들을 구출하는 사명과 함께 늙어가리라는 희망 모두 최초의 순간부터 불가능하단 걸 알면서 그 모든 시간을 다시 쏟을 수 있을까? 결국 <33원정대>는 한 번 엔딩을 보고 나선 게임 내에서 “같은 느낌”에의 재방문은 불가능하다. “같은 느낌”에 근접한 무언가를 느끼기도 어렵다. 본 게임 자체가 그 자신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으로 게임 플레이를 전환해내고 있다고 봐야 할 지도 모르겠다. [1] https://news.denfaminicogamer.jp/interview/250415a/2 [2] Mallindine, J. D., 2016. Ghost in the Cartridge: Nostalgia and the Construction of the JRPG Genre. gamevironments 5, 80-103. Available at http://www.gamevironments.uni-bremen.de . [3] 영이, 게임 코러스, 워크룸프레스, 2025, 24-26. Tags: 프랑스게임, JRPG, 턴제, 애도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성훈 문학을 전공했다. 게임과 만화를 좋아한다. <심즈 4>는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 게임인데 1500시간 정도 했고 그게 수치스러운지 웃긴 건지 헷갈린다. 뚜이부치란 필명으로도 활동한다.

  • [인터뷰] 쥐와 함께 6년을 살아 온 인디게임사, <카셀게임즈> 황성진 대표

    올해로 창립 6년 차를 맞은 카셀게임즈의 황성진 대표를 만나, 그의 창작 철학과 개발 과정에 대한 고민, 인디게임사 운영의 현실, 그리고 다음 프로젝트를 향한 구상까지 진솔하게 들어보았다. < Back [인터뷰] 쥐와 함께 6년을 살아 온 인디게임사, <카셀게임즈> 황성진 대표 25 GG Vol. 25. 8. 10. 이번 호 GG는 서강대학교 게임교육원 출신 학생들이 설립한 인디 게임 개발사 카셀게임즈를 주목한다. 카셀게임즈의 첫 작품 <래트로폴리스(Ratropolis)>는 카드 게임과 디펜스 장르의 요소를 결합하여 쥐들의 도시를 지키는 게임으로, 스팀 ‘탑셀링’ 카테고리 1위를 차지하며 게임 팬들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뒤를 이은 차기작 <래토피아(Ratopia)>는 쥐들을 통치하여 사회를 건설하는 샌드박스-던전형 도시 경영 시뮬레이션이며 2023년 경기게임오디션에서 2위를 수상하는 등 가능성을 입증했다. 올해로 창립 6년 차를 맞은 카셀게임즈의 황성진 대표를 만나, 그의 창작 철학과 개발 과정에 대한 고민, 인디게임사 운영의 현실, 그리고 다음 프로젝트를 향한 구상까지 진솔하게 들어보았다. 중소 인디게임사의 살아남기 이경혁 편집장: GG의 인터뷰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게임사 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황성진 대표: ‘카셀게임즈’는 서강대학교 평생교육원이라는 게임 교육 전문기관에서 교육받던 학생들이 창업해서 만든 게임 개발사입니다. 대학생 때 만든 <래트로폴리스>에 많은 분들께서 사랑과 응원을 주셔서 창업 기반을 다졌고, 지금은 차기작 <래토피아>를 개발하고 있구요. 회사 규모도 조금씩 키워나가면서 생존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한국에서 중소형 인디 개발사로 6년을 무사히 헤쳐나온 게 쉬운 일은 아니셨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중견급이라 할 수도 있을텐데요, 출시하신 작품 2개가 나름 시장에서 성과를 유의미하게 보이고 있는데 소회가 어떠신지요. 황성진 대표: 주변에 개발자 모임 가면 뵙고 싶었던 분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는 걸 보며 마음이 아픈데요. 저희도 응원해 주신 국내 팬 분들이나 정부나 기업체 지원이 아니었으면 현상 유지가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까지 주변에서 좋게 평가해 주시는데도 중소 개발자들의 어려움이 크다는 걸 깨달았어요. 아직 더 발전해야 된다는 걸 느끼고, ‘다음 작품은 더 대박나지 않으면 정말 힘들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하게 됩니다. 이경혁 편집장: 인터뷰는 카셀게임즈라는 회사 얘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실제로 6년간 중소 게임사를 이끌며 겪었던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있었을 텐데요. 가장 힘들었던 점이나, 정부나 기관에서 개선해야 한다고 느끼는 문제점들이 있었을까요? 황성진 대표: 팀원들도 회사 생활이 처음이었고 저 역시 비슷하다 보니, 조직 내부에서 운영방향이나 비전, 체계를 정립하는 법을 배우고 서로 맞춰나가는 부분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대외적 차원에서 어려웠던 점은 법 이슈나 해외 사이트의 심의절차 정도가 생각나구요. 아니면 보험이나 퇴직금 문제들. 이런 것들을 저도 잘 모르다 보니 갑자기 지출이 확 나가면 대응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어요. 전부 무지에서 비롯된 것들인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이곳을 창업하기 전에 다른 회사 경험은 없으셨던 거군요. 황성진 대표: 네. 제 경우 단기 인턴이나 지인 회사 일을 도와드린 수준의 경험만 있었고, 저희 다른 팀원들도 거의 다 알바생이었습니다. 그나마 같이 오래 협업했던 프로그래머 분이 회사나 사업 운영경험이 있으셔서, 공부를 따로 해서 회사처럼 운영하기 위한 노력들을 공유해 주셨어요. 지금 제가 대표직이긴 하나 경영 쪽은 그분이 좀 더 주도적으로 얘기해 주시고 협의하는 식으로 맞춰가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사람들이 ‘청년 창업’이라는 얘기를 쉽게 하지만 기업 경험을 많이 못 해 본 청년에게 창업 지원만 하는 게 과연 충분한가 싶어요. 특히 게임 개발사는 콘텐츠를 만들고 운영하는 능력과 기업을 운영하는 능력이 모두 필요한데, 이 둘은 서로 성격이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기업 운영과 관련된 교육이나 지원을 따로 받은 경험이 있으셨을까요? 황성진 대표: 그렇진 않았어요. 경기콘텐츠진흥원 등에서 창업교육 관련 프로그램들이 있긴 하지만 저희는 그 단계는 좀 건너뛴 상태였구요. 멤버들도 어떻게 보면 사원보다는 팀원의 형태에 가깝다보니, 경직된 회사 문화보다는 서로의 피드백을 통해 바꿔나가는 능동적인 운영형태를 원하기도 했어요. 기존의 일반적인 기업이 갖는 체계에 저희 개발자들을 맞추는 게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지금 팀원이 7명 정도인데, 앞으로 회사가 더욱 커진다면 이런 문제가 더 복잡해질 수도 있을 텐데 계속 규모를 확장할 계획이 있으신 거죠? 황성진 대표: 추후 회사가 확장될 여지가 있다고 보지만, 아무래도 체계를 정립하고 규칙을 만들 때 생기는 문제들이 우려되긴 합니다. 기존의 멤버들을 설득시켜야 하는 부분도 있고, 규칙을 만드는 순간 그걸 관리해야 하는 관리자의 코스트도 있고. 없었던 게 규칙으로 생기면 그걸 지켜야 된다는 문제도 있을거구요. 이경혁 편집장: 동아리와 회사의 경계에 있는 조직들이 겪는 문제 같네요. 소규모일 때는 별 문제가 안 되다가 조직이 커지고 원래 우리 그룹이 아니었던 사람이 들어올 때 새로 생기는 문제에 대한 감각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황성진 대표: 네. 그렇다보니 신규 채용을 하고 나서도 자체적으로 조직 체계를 정리하는 시간도 한번 가져보고 이런 식으로 진행해 왔던 것 같아요. 저희 팀 운영을 하면서도 이런 점들이 쉽지 않은데, 다른 인디 개발사 대표님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더라고요. 다른 게임사는 팀원 간 조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어떤 리더쉽을 발휘하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이경혁 편집장: 여러 고민이 많으시겠지만, 반대로 카셀게임즈가 6년간 회사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한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게임 개발 지망생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신가요? 관련 강연도 좀 하셨던 것 같은데요. 황성진 대표: 강연에서는 주로 저희가 게임을 어떤 식으로 개발해 왔고 그 과정에서 제가 느끼고 배운 점에 대해 얘기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느낀 점이나 배운 점들 모두 맥락은 똑같았어요. ‘우리는 가진 게 하나도 없으니까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된다’. 워낙 열악한 상황이니 남들보다 어떻게든 돈이 덜 드는 선에서 홍보 효과를 보려 노력하고, 꾸준히 개발 일지를 써서 공유하고 네트워킹에 열심히 참여하고 공모전 유저 피드백 같은 소통도 더 열심히 해야지 발전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취지로 얘기한 기억이 나네요. IP가 된 '쥐' 이야기 이경혁 편집장: 카셀게임즈의 작품 이야기로 넘어가볼까 합니다. <래트로폴리스>가 대표님의 첫 작업이신가요? 황성진 대표: 제게는 팀을 결성해 만든 게임으로서는 여덟 번째 작품이구요. 다른 팀원들의 경우에도 세 번째 프로젝트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로젝트를 만들 때마다 단순히 학교에서 배운 프로세스를 적용해서 평가받고 끝내는 형태가 아니라 실제 유저에게 어떻게 재미를 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만들곤 해요. <래트로폴리스>는 마지막 학기에 했던 프로젝트였고, 개발할 수 있는 환경이 어느 정도 갖춰진 상황에서 상용화 가능한 버전으로 도전하고 싶어 만든 게임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고 팀원들이 출시까지 함께 해주어 진행하게 됐습니다. 래트로폴리스 이경혁 편집장: 국내도 그렇지만 <래트로폴리스>는 특히 해외 반응이 좋았던 걸로 기억해요. 황성진 대표: 저도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어요. 사실 국내에서도 잘 만든 인디 게임들이 굉장히 많지만 노출이 안 되어 묻히는 경향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희는 공모전 수상으로도 도움을 받았고, 국내 스트리머들이 많이 플레이해 주시다 보니 한국 유저의 게임 구매율이 높아지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스팀에서 상위권을 유지해서 해외 유입도 지속될 수 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겸손하게 말씀해 주셨지만, 해외 반응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이 게임의 장르적 특이성 때문이라고도 생각했거든요. <래트로폴리스>는 한국의 소규모 개발사가 보통 만드는 장르들과는 차별화된 점도 있으니까요. 이 장르를 선택하게 된 배경이 있었나요? 황성진 대표: 인디 게임을 좋아하다보니 매번 출시작들을 탐구하곤 하는데, <슬레이 더 스파이어>가 워낙 인기였잖아요. 저도 정말 재미있게 한 게임인데 이 게임의 특성이 심플한 2D 위주라는 점에 주목해서 이런 시스템을 사용해서 게임을 만들어보려 했어요. 우리가 만들기에 기술력이 너무 뛰어난 모델은 (모티브로) 어렵지만, 노력해서 어느 정도는 따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면 용기가 생기거든요. 또 저희만의 차별점을 챙겨야 하기에 제가 즐겨했던 다른 게임들과도 조합해 봤어요. 처음엔 <문명>과 조합했더니 템포가 좀 느리고 요즘 트렌드에 잘 안 맞는 느낌이었어요. 이후 <킹덤>이라는 또 다른 게임을 참고해 실시간 전투나 디펜스를 참고해 조합했더니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대성공했던 해외 인디 게임 2개를 버무렸다 보니 운이 좋게도 해외 반응도 따라왔던 것 같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그래도 턴제 게임인 <슬레이 더 스파이어>를 <킹덤> 류의 실시간 액션으로 녹여낸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두 게임이 근본적으로 가진 차이도 있고요. 황성진 대표: 저희만의 차별성은 실시간과 피지컬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었어요. 다만 <킹덤>에 있는 뷰를 가져왔지만 그곳의 조작 방식이나 주인공 캐릭터를 등장시키지는 않을 거고, <슬레이 더 스파이어>의 시스템을 가져왔지만 거기서 발생하는 턴제의 신중한 결정 같은 걸 포함하지는 않겠다. 그 게임에서 호평받는 시스템들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따라가면 (게임이) 완전히 비슷해질 수 있기 때문에 겹치지 않는 쪽으로 가려고 노력했어요. <슬더스>나 <킹덤>의 특정 부분들을 참고했으면 좋겠다는 유저 의견도 많았는데, 처음 이 게임을 만드려 했던 우리의 취지에 벗어나지 않도록 재고를 많이 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가로선상에서 일어나는 전투는 <팔라독> 같은 당시 유행하던 모바일 횡스크롤 디펜스 게임의 영향도 크지 않았나 싶었어요. 황성진 대표: 오히려 <팔라독>이나 <냥코 대전쟁> 같은 게임은 거의 참고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얘기를 주변에서 많이 듣긴 했는데 서로 비슷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우연이거나 개발자들의 생각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이경혁 편집장: 두 게임을 베이스로 하여 새로운 메카닉을 만들어낸 건데, 이 메카닉의 외피가 ‘쥐’인 것도 흥미로워요. 캐릭터로 쥐를 선택하신 배경도 있을까요? 황성진 대표: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제가 평소에 이 얘기를 워낙 많이 해서 신선도는 떨어질 것 같지만요(웃음). 예전에 기획했던 게임 중 쥐들의 도시인 탑을 올라가서 보스를 잡는 리듬액션 게임이 있었습니다. 그런 컨셉이 마음에 들어서 이번 작품에서도 쥐가 주인공인 게임을 하고 싶었구요. 또 당시 모바일에서 고양이 컨셉 게임이 많이 나오는 상황이라 고양이보다 쥐로 가면 이목을 끌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마지막으로 실험쥐 자체의 느낌이 참 인디게임과 비슷한 것 같아요. 신약 실험시 많은 실험쥐들에게 약을 투여하고 검사해서 그 중에 하나가 효과가 있으면 디벨롭해서 상용화된 약품으로 전 세계에 배급을 하잖아요. 인디 게임 또한 게임성에 대한 여러 실험들을 하고, 그게 <슬더스>처럼 잘 되면 대기업에서도 활용하게 되고 전 세계 사람들이 플레이할 기회가 생겨나는 거죠. 그런 부분 때문에 쥐라는 컨셉에 빠져들게 됐어요. 이경혁 편집장: 출시한 게임 두 가지가 모두 쥐를 디자인으로 한 것도 재미있었어요. 황성진 대표: 두 번째 게임까지 꼭 쥐로 캐릭터를 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저희의 생존 전략이기도 했어요. 전작에서 어느 정도 유저 풀이 생기다 보니 어떻게든 이 유저분들도 차기작까지 하게끔 끌고 가게 하는 게 우리가 전략적으로 좀 더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해서요. 캐릭터의 모습은 더 예쁘고 귀엽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쥐들이 뭐랄까 전작보다 좀더 다양한 표현을 하더라고요. 카셀게임즈의 두 번째 게임으로 <래토피아>라는 게임이 나왔는데 전작과 장르가 완전히 다릅니다. <래토피아>는 어떤 게임일까요? 간단히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황성진 대표: <래토피아>는 도시를 건설하고 경영하는 샌드박스 게임입니다. 플레이어가 쥐들의 도시의 지도자가 되어 마음대로 도시를 통치하면서 통치자의 고충도 한번 느껴보고, 쥐들의 도시가 발전하는 걸 보며 대리만족을 하기도 하는 그런 평화로운 게임이에요. <래토피아> 이경혁 편집장: 게임을 해보면 정말 쥐들이 굴을 파잖아요. 굴을 파서 도시를 만들고 운영하는 컨셉의 게임들도 적지 않을텐데, <래토피아> 제작 과정에서는 어떤 레퍼런스를 많이 보셨을까요? 황성진 대표: 가장 많이 참고한 게임은 클레이사의 <산소미포함>이었고 <크래프트 더 월드>라는 게임도 많이 참고했습니다. 그 외 2D 어드벤처 게임인 <스팀월드 디그>나 <테라리아>도 있고, 땅을 파는 게임들이 워낙 많다보니 그런 것들도 은연 중에 많이 참고한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개인적으로 그런 장르를 참 좋아하고 저 같은 경우 <캡틴 오브 인더스트리>도 많이 하는 편입니다. <래토피아>도 처음 데모판을 해보며 국내에서 이런게 나와 참 반가웠던 기억이 있었어요. 이쪽 장르는 사실 처음 만들어 보셨을 텐데 이 장르에 처음 손을 댔을 때는 어떠셨나요? 황성진 대표: 저도 <산소미포함>도 원래 좋아했고 시뮬레이션 게임의 광팬이거든요. 학교 처음 들어갈 때부터 시뮬레이션을 만들고 싶었구요. 그런데 전에도 주변에 말해보면 “뭔 소리냐, 우리는 테트리스 만드는 데도 세 달이 걸린다”는 얘기를 듣곤 했어요(웃음). 시뮬레이션은 개발이 그만큼 어려운 장르라 나중에 성공했을 때 도전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래트로폴리스> 이후 차기작 장르 논의할 때 <산소미포함>을 공유해 드렸더니 팀원들이 마음에 들어하셨어요. 게임이 워낙 어렵고 한두 시간 플레이해서는 알 수 없는 게임이지만, 저희가 자신감도 있었고 하다 보니 그렇게 개발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당시에 제가 완전 몰입해서 빠져들었던 게임 장르를 선택했고, 그 게임에서 더 개선했으면 재미있게 했었을 것 같은 부분을 녹여내려고 했어요. 이경혁 편집장: <래토피아>를 <산소미포함>처럼 어떤 기계공학적인 스타일로 만들지는 않으셨던 것 같아요. 황성진 대표: 그렇죠. 그거는 저조차도 너무 어려웠고, 유저 평가나 팀원들과 회의에서 그 부분이 취향에 안 맞는 것 같다는 분들이 많으셔서 좀 더 가벼운 스타일로 만들려 노력했습니다. 전투 시스템이 있으면 재밌겠다는 의견도 있어서 <래트로폴리스>에서 했던 전투 디펜스를 섞어보려 했구요. 이경혁 편집장: 메카닉 자체는 라이트해지되, 전투나 실시간 액션이 좀더 들어간 형태로 결과물이 나온 셈이네요. 현재 <래토피아>의 시장 반응은 어떻습니까? 황성진 대표: 아직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조금 차가운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기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뭔가 저희가 크게 성장하거나 팀원 증원이나 사무실을 저희가 스스로 구할 수 있을 정도의 그런 성공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전작의 경우에는 게임 스트리머들의 푸시도 좀 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어땠나요? 황성진 대표: 이번 작품은 아무래도 저희 출시 직전에 <33 원정대>가 워낙 이목을 끌기도 했고, 스트리머 시장 자체도 많이 바뀌었다 보니 주목을 크게 받지는 못했습니다. 다행히 유튜버 풍월량님이 나중에 한 번 플레이하셔서 한국에 좀 알려졌던 것 같아요. 저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저희만의 착각이었고(웃음) 실제 국내 매출은 풍월량님 유튜브가 올라간 시점부터이지 싶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래트로폴리스>와 <래토피아>를 비교해보면 전작은 스테이지 기반이라 스트리밍으로 보여주기가 확실히 편할 것 같거든요. 후자는 특별한 엔딩이 없는 스타일이다보니 중간에 들어가서 보기도 애매하고 시작부터 쭉 긴 시간을 따라가기도 애매한 문제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황성진 대표: 그것도 큰 것 같아요. <래토피아>가 스트리머 분들이나 아니면 전시회 같은 데서 하기에 적합한 게임은 전혀 아니거든요. 이번 작품 같은 경우에는 그래서 홍보적인 측면에서도 어려움이 있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해외 반응은 어떤가요? 이 게임 장르는 국내보다 해외가 더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요. 황성진 대표: 7월부터 저희가 정부지원으로 해외 인플루언서 대상 마케팅을 진행해보고 있는데요. 초창기 <래트로폴리스>처럼 스팀 탑 차트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유입되는 효과는 얻지 못하다 보니 그렇게 드라마틱한 효과는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얼리액세스 때는 해외 반응이 높았지만 정식 출시 이후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나고 있지 않아서요. 다만 <래토피아>는 저희가 서비스하고 유저분들을 더 만나면서 길게 지켜봐야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시뮬레이션 게임 플레이어들이 성향 자체가 신중하기도 하고 게임도 출시 직후보다 어느 정도 안정화된 게임을 선호하시는 영향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아까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33 원정대>와 출시 시점이 겹쳤었군요. 알고 내셨던 걸까요? 이런 걸 다 피해 갈 수도 없는 거고 어렵네요. 황성진 대표: 네, 원래는 작년 말에 내려고 했다가 계속 부족한 부분들이 밟혀서 개선하다 보니 밀리게 됐거든요. 4월 말까지 갔다가 <33> 소식을 듣고 또 미루었지만 출시 약속은 지켜야겠다 싶어 5월 초로 잡은 건데. 어떻게든 여러 요인을 생각해본다면 그렇지만, 실은 <33>과 저희 유저 풀이 그렇게 겹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서 그냥 저희가 부족했던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래토피아> 같은 게임을 만들 때 제일 어려운 게 규모의 연산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식량을 얼마를 먹고 얼마간 활동할 수 있고 피로도가 얼마가 쌓이는지 처음에 설정한 기본적인 변수들이 후반으로 갈수록 개체가 늘고 공간이 넓어지면서 방대한 연산을 필요로 하게 되잖아요. 그때부터 기획자가 이 복잡한 연산의 결과를 얼마나 일일이 피드백을 해서 고쳐나갈 수 있는가가 제일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하고 <산소미포함>이 그런 걸 되게 잘해냈다고 봐요. 실제 기획할 때 그 규모의 경제라 부르는 부분에서 마주했던 어려움 같은 건 없으셨어요? 황성진 대표: 제가 기술적인 담당은 아니다 보니 팀원분들의 의견을 듣고 그에 맞춰 기획 갈무리를 했거든요. 개체 수가 100명이 넘는 도시를 지향하기 때문에 지원하지 못하는 기존 게임의 기능을 어떻게 돌릴 수 있을지도 많이 논의했어요. 여러 아이디어를 건의하긴 했지만 기술적 검토 결과 최적화에 문제가 생기거나 구현이 어려운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거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최적화가 안 좋아지면 결국 부정적인 유저 경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험에서도 최대한 최적화에 영향 없이 콘텐츠를 추가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정말 많이 고민했던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요즘 인디게임 개발사에서는 그런 점 때문에 AI를 넣어서 해결하자는 얘기를 하시는 대표님들이 좀 계십니다. AI가 참 효율적인데 어떻게 좀 붙여볼까라는 고민들을 다들 하시다보니 어떻게 생각하시나 싶은데, 카셀게임즈도 AI에 대한 검토를 하시는 편인가요? 황성진 대표: <래토피아>의 경우 AI가 활성화되기 이전 기반 시스템들을 만들어서 잘 접목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AI 답변을 믿고 수정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AI가 아예 저희 시스템 전체를 이해를 해야 거기에 적합한 솔루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물론 인디게임에서 실험적인 시도들이 나오고 결과가 좋으면 대기업이나 다른 팀들에서 그걸 활용하고 발전시킬 텐데요. 아무래도 결국 연산이나 최적화 규모가 커지는 문제다 보니 저희 입장에서 얼리 어댑터처럼 적용하기에는 형편이 그렇게 여유가 있지는 않을 것 같구요. 이경혁 편집장: 슬슬 마지막 얘기로 가야 될 것 같은데, 향후 <래토피아>는 어떤 업데이트 방향을 보고 계신지 궁금하고 차기 신작에 대한 고민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황성진 대표: <래토피아>는 일단 계속 유지보수를 하면서 후속 업데이트를 준비 중입니다. 제가 작성해 놓은 업데이트 리스트에만 몇백 개가 있고 실은 오늘도 10개 정도를 추가하긴 했는데(웃음) 너무 많은 수치라 유저들의 니즈가 큰 것들 위주로 선별해서 진행하려 합니다. 차기작 같은 경우에는 제가 출산을 했고 육아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프로그래머 분께서 총괄 핸들을 맡아서 진행하고 계세요. 장르는 다키스트 던전류의 턴제 RPG가 되었고, 오토 배틀러 형태도 약간 고려를 하고 있습니다. 개발 속도는 빠르게 되고 있어서 올해 말쯤 데모 버전이나 프로토타입 정도가 완성될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카셀게임즈의 세 번째 작품도 ‘쥐 시리즈’로 가게 될까요? 황성진 대표: 맞아요. 그리고 아트 담당자님들의 역량도 더 커졌기 때문에 더 귀엽고 애니메이션이 더욱 발전된 형태로 나갈 것 같습니다. 늘 유저분들이 보내주시는 응원에 감사하고, 저희들이 열심히 개발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많은 기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ags: 인디게임, 인터뷰, 게임산업, 래토피아, 래트로폴리스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수 문화와 지식, 공간과 학술 장 등 다양한 영역을 공부합니다. 게임의 역사와 게이머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바이페즈(双相)>와 게임의 신체화

    2022년 11월 중순, 랩시드(西山居SEED实验室, 시산쥐SEED실험실)에서 인큐베이팅한 중국산 공익게임 <바이페즈>가 정식 출시됨으로써, 국내 최초 게임 형식으로 양극성 장애[역주: 조울증]를 다룬 게임이 됐다. 조증과 우울증이 번갈아 나타나는 정신질환인 양극성 장애는 전 세계에 약 6천만 명의 환자가 있다. < Back <바이페즈(双相)>와 게임의 신체화 13 GG Vol. 23. 8. 10. 2022년 11월 중순, 랩시드(西山居SEED实验室, 시산쥐SEED실험실)에서 인큐베이팅한 중국산 공익게임 <바이페즈>가 정식 출시됨으로써, 국내 최초 게임 형식으로 양극성 장애[역주: 조울증]를 다룬 게임이 됐다. 조증과 우울증이 번갈아 나타나는 정신질환인 양극성 장애는 전 세계에 약 6천만 명의 환자가 있다. <바이페즈>는 수평 액션의 2D 플랫폼 점프게임이다. 게임이 처음 시작되면 다양한 액션 규칙을 통해 플레이어가 백색 피에로를 컨트롤해 빨간색과 검정색이 교차한 블록과 기호 사이를 점프할 수 있도록 한다. 레벨을 통과하려면 플레이어는 태양과 유사한 백색의 기하도형을 터치해야 한다. 이 게임의 플레이 메커니즘은 1990년대 ‘소패왕 학습기(小霸王学习机)’[역주: 1980년대 말, 재미 화인기업가가 창립한 소패왕문화발전유한공사(小霸王文化发展有限公司)에서 만든 컴퓨터 학습도구] 카세트(팩)에서 볼 수 있었던 < 콘트라(魂斗罗)> 나 < 모험섬(冒险岛)> , < 슈퍼마리오> 등 평범한 오락게임을 연상시키지만, <바이페즈>의 플레이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구체적인 인지를 통해 양극성 장애의 기본 증상인 조증 위주의 조울증을 번갈아가며 경험할 수 있다. 필자 역시 게임을 하는 동안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더 많이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조울증 환자였던 필자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다양한 치료를 받은 후에야 서서히 정신 상태가 개선된 경험을 한 바 있다. 정신장애 : 게임의 신체화 게임 디자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양극성 장애의 게임 체험은 ‘스크린 안쪽에 표시되는 가상의 신체를 가진 캐릭터’와 ‘스크린 바깥에 구성된 물리적 신체를 가진 플레이어' 1) 사이의 관계 간극을 인위적으로 강화함으로써 게임의 말단 설계에서 실현된다. 캐릭터와 플레이어의 두 가지 ‘나’ 사이엔 ‘은폐된 비대칭성’이 존재하며, 게임 플레이의 메커니즘은 일시적이나마 이 둘의 동일화와 주체 전환시 발생하는 현기증의 인지를 온 힘을 다 해 완성하고자 한다. 나아가 플레이어의 실제 공간과 게임의 3D 공간이 스크린 공간(screen space)에 겹쳐지면서 게임의 시점이 분산되고, 플레이어는 자신의 주체성을 의식하지 않은 채 복수의 캐릭터들의 미션 시점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있게 된다. 현대 정신병리학 이론에 따르면 게임은 본질적으로 정신분열증 증상으로 플레이어가 여러 인칭과 시각, 주체 사이를 반복적으로 넘나들고, 상징화된 게임세계는 진정한 깊이가 없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스스로 깊이 있는 체험을 복구해야만 한다. 게임이 만드는 신체화(somatization)는 자기 인지의 보완 과정에서 성공적으로 보류된다. 게임은 시뮬레이션의 투사라는 측면에서 이미 주체를 분열시키는 구조이지만, 게임에서 조울증 환자의 감정을 재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면식이론(acquaintance theory)’ 상의 ‘타자 마음의 문제(Problem of other minds)’를 더더욱 복잡하게 포함되기 때문이다. ‘타자 마음의 문제’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한 마음을 경험한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에 있다. 통속심리학에서는 두 유형의 방법론을 선호하는데, 추리추측을 통한 이론론(the theory theory)과 자신이 상대방의 시야에 있다고 가정하는 가장론(the simulation theory) 2) 이 그것이다. 스포츠 게임의 시뮬레이션(룰 기반, 세계 기반, 액션 기반 등)은 가장론의 방법론에 보다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가장론은 자신과 상대가 사용하는 사적인 감각이 정상적이고, 같은 언어에 의해 서로 통하고 표현될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정신장애환자의 문제가 있다. 질환을 갖는 시기 동안 개인의 사적 감정은 분열되고 가변적이며, 불안정한 정신상태로 인해 표현력이 쇠퇴하거나 심지어 사라지는 증상을 보이게 된다. 일상생활에서도 신체의 증상화 징후가 형성된다. 즉, 장애의 문제가 심리적인 증상으로 나타나지 않고, 신체적인 증상으로 대체되며, 정신적 수준의 피해와 고통이 억제되어 신체로 전이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증상은 낙인찍기의 심리화(psychologization)가 이뤄지는 사회환경에서 더 가혹하게 나타나고,신체 경험의 궤적도 더욱 강하게 형성된다. 3) 이렇게 하면 환자는 심리적 증상의 생리학적인 성분을 더 많이 인정하고, 심리적인 영향은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가장론의 인지적인 기초는 정신장애 환자가 타자 마음을 증명하는 것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정상인은 환자의 경험이나 감정을 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정신장애를 소재로 한 여러 게임들은 플레이어가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이 어떤 경험을 해야 하는지, 시청각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이론론의 방식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타운 오브 라이트(The Town of Light)>에서 플레이어는 정신분열증 환자 르네(Renèe)의 안내를 받아 정신병원을 돌아다니며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고, 환각을 경험하며, 마지막에는 그녀와 함께 전두엽 절제술의 과정에 의해 각종 고통을 직접 맞닥뜨리는 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때로 게임은 상호작용을 통해 시청각적 감각을 강화하기도 한다. 게임 <에디스 핀치의 유산(What Remains of Edith Finch)> 속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는 루이스 핀치(Lewis Finch)는 해리 장애를 앓고 있는데, 편지를 읽을 때 플레이어는 루이스의 정신 상태를 모방함으로써 미로를 걷고 생선을 자르는 이중적인 행위를 수행해야 한다. <아웃 오브 핸즈(Out of Hands)>에선 정서 장애를 겪는 ‘나’의 육체가 무수히 많은 손들이 그러모은 모조품이 되어버리고, 플레이어가 수행하는 카드 게임은 다양한 부정적 정서와의 싸움이 된다. 하지만 <바이페즈>의 게임 설계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내러티브를 포기하고 감정적인 독백을 통해 내러티브의 존재 가능성을 돌이켜 본다. 이 게임의 제작자 쉬루이샹(徐瑞翔)은 내러티브보다는 구조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게임 데모 시연 당일에도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은 처음에 게임 메커니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바이페즈>는 조울증 환자의 신체화된 증상을 플레이어에게 전달하기 위해 보다 가장론적인 접근 방식을 활용하는 경향이 있으며, 스포츠 게임의 현실 세계 모방에 매우 가깝기도 하다. 하지만 고작 하나의 모방은 시청각적 경험에 기반하고, 다른 한 가지는 정신적인 감정에 기반한다. 이 두 모방은 시점이 동일하지 않은데, 마츠모토 켄타로은 이것이 1인칭 시각과 3인칭 햅틱을 결합한 것이라고 한다. <바이페즈>에서 빨간색과 검정색이 교차되는 시각은 조울증 환자의 1인칭 시점을 시뮬레이션한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색상과 기호 블록 사이를 오가는 조작된 하얀 피에로의 햅틱은 3인칭이기 때문에, 결국 플레이어는 둘 간의 조율되지 않은 지각의 부조화를 회복할 방법이 없다. 플레이어는 분열 속에서 둘 사이의 지각 부조화를 고칠 수 없고, 그 분열 속에서 정신 부조화의 세계로 빠져들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때문에 이것은 일부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더욱 고통스러운 신체화 게임 경험을 갖게 한다. 빨간색과 검정색의 교차 : 시각의 신체화 스포츠 게임이나 피지컬 게임이 아닌 게임의 경우, 신체화는 표현하기 어렵고 통증 연상을 통해서만 시청각적인 감각으로 전환될 수 있다. 하지만, 시청각 감각은 하나의 실험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는 정신장애를 겪는 환자의 눈에 비친 세상이 두 차례에 걸쳐 전환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감지하는 것이다.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의 <절규>가 그 예시다. 이 작품은 불안장애 증세를 보이는 환자의 눈으로 바라본 왜곡된 세계만이 아니라, 불안장애 환자 자신의 모습도 담고 있다. 그 스스로 심각한 불안장애를 겪었던 뭉크는 모더니즘 하에서 소외된 이의 감정에 대한 공감대를 느끼기 위해 독립적이고 빙빙 도는 색채의 상호작용을 그렸다. <절규>에서 감상자는 타인의 눈에 비친 절규만이 아니라, 그림 속 인물의 절규에 영향을 받은 주변세계, 즉 1인칭 시점이 3인칭 시점으로 재조명되는 것을 마주하게 된다. 정신장애인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심미적 주체로서 자아는 자기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동시에 ‘정상인’의 체험에 의해 비교하면서 바라보는 대상이 된다. 또, 만약 게임이 정신장애인이 바라보는 세상을 그대로 재현한다면, 이와 같은 핍진성은 ‘정상인’의 체내에 잠복하고 있는 정신장애를 촉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바이페즈>는 반드시 양자 사이에서 균형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바이페즈>에서 컨트롤하는 하얀색 피에로는 고도로 기하화(geometrization)된 캐릭터다. 플레이어는 이어지는 퍼즐 해석 속에서 그것이 양극성 장애를 앓는 ‘열여섯 여름의 그녀’라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하지만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플레이어가 캐릭터의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공감대 형성이 어렵고, 오직 시청자의 관점에서만 캐릭터를 컨트롤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빨간색과 검정색이 교차되는 시각적 세계는 양극성 장애를 가진 사람의 눈에 보이는 1인칭 시점으로, 캐릭터가 바운스할 때마다 스크린이 빨간색과 검정색으로 색깔들이 점프한다. 바운스는 게임 플레이를 끝내기 위해 계속해서 수행해야 하는 동작이기 때문에 플레이어 눈의 게임 인터페이스는 빨간색과 검정색 전환이 수행되는 동안 계속해서 인터레이스된다. 이 때문에 광과민성 간질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광과민성 간질의 신체화 증상은 조증 발작시의 증상과 일부 유사하며, 이는 양극성 증상 을 유발할 가능성을 높인다. 따라서 게임을 시작하는 화면에는 “양극성 장애가 있는 분은 게임 플레이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게임은 광과민증이 있는 분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으며,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라는 명시적 알림 메시지가 뜬다. 이 알림은 사실상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조울증 환자는 관찰의 대상이 되고, 그들/우리는 구경꾼들의 눈에 비친 세계가 진정으로 그들이 느끼는 그대로 인지 아닌지 느낄 수가 없다. 게임 속 여기저기에서 강렬한 생산 전환을 볼 수 있는데, 특히 해와 달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장면에서 더욱 그렇다. 붉은색 백야와 검정색의 밤이 과도기적인 전환 없이 나타나고, 시각 체험에 있어서도 심각한 불연속성(discontinuity)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잠은 사람들로 하여금 낮과 밤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양극성 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수면만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각성 요법과 같은 어떤 의학 치료방식들은 수면 박탈이라는 방식을 통해 정서와 인지능력의 즉각적인 보상을 촉진하도록 설계됐다. 물론 수면 보상을 시행한 이후 재발 확률은 급격하게 증가한다. 4) 게임에서 하얀 피에로가 하는 하는 일은 빨간색 블록과 검정색 블록을 끊임없이 돌리면서 게임으로부터 탈출하거나 통과하는 것이다. 이는 치료의 한 형태이기도 한데, 수면 박탈, 리튬, 빛을 결합한 3중 생체시계 치료법(필자도 경험한 바 있음)이 게임에서 모두 표현되어 있다. 검정색은 수면 박탈, 리튬은 약물 복용, 빨간색은 빛을 강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얀 피에로는 계속해서 탈출을 시도하는데, 이는 수면을 박탈하면서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빛을 지속하는 방식으로 깨어 있는 것이다. 게임을 통과하기 위해 태양을 터치할 수 있는지 여부는 덜 중요해진다. 이 1인칭 시점은 게임의 3인칭 햅틱에 의해 끊임없이 상기되고 강화되어, 플레이어의 시야는 빨간색과 검정색의 시차적 변화, 바운스하는 동작의 시각적인 동선, 그리고 접점을 오가는 단조로운 경험이라는 3중 간섭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3중 간섭 하에서 하얀 피에로는 더 이상 조울증의 화신이 아니며, 대신 실시간 화면(screen of real time)에서 역동적인 빛의 한 지점이 된다. 5) 그렇기에 플레이어는 화면의 위계와 의학적인 관찰을 통해 새로운 시간적 감각을 얻게 된다. 이 때 전자(화면의 위계)는 레이더 추적 방식의 체험인데, 플레이어가 하얀 피에로를 컨트롤하는 것은 광선총(lightgun)을 사용해 광점을 추적하는 과정이 된다. 후자는 한계 뇌파의 동적인 궤적이 된다. 이와 동시에 체크포인트의 ‘왕복’과 ‘순환’에는 뇌파도계(encephalofluctuograph)와 유사한 구조가 대량으로 등장한다. 뇌전도나 뇌파도계는 모두 ‘정상인’이 정신이상자를 판단하는 척도 중 하나이기 때문에, 1인칭 시점으로 보이는 시각성은 더더욱 ‘과학적으로 관찰된’ 타자의 시야에 의해 사라져버리고, 조울증 환자는 게임 인터페이스에서 광점으로 소외된 채 남루하게 배치되어 탈출하는 것이 점점 더 험난해진다. 컨트롤의 불균형 : 감정의 신체화 “악의 문학적 표현양식" 6) 인 반복은 지옥 신화에서 연이어 묘사된 고통의 영구 형벌로 존재하며, 지옥은 언-오르트(Un-Ort)가 된 순환 공간이다. 또한 지옥 속의 개체는 신체화된 형벌의 대상이 된다. 사르트르는 희곡 <닫힌 방(Huis clos)>에서 실존주의적 해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곧 무한한 것(ad infinitum)의 모방으로 단조로움과 반복을 가져와, 그 속의 주체를 끊임없이(마치 업보를 태우는 불처럼) 불 태워버리는 느낌을 만든다. [역주: 원문의 业火(업화)는 불교 용어로, 죄인을 태우는 지옥불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불타는 감각은 플레이어의 자의식을 괴롭히는 조증과 매우 유사하다. <바이페즈>에서 플레이어는 게임을 통해 하얀 피에로를 컨트롤하는데, 이 과정에서 3인칭 햅틱이 더해져 플레이어는 과잉 시각화(overvisual)의 평면에 현혹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게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플레이어를 강렬한 양극성 정서(특히, 조증 정서)으로 이끌어내는 것은 캐릭터가 아니라, 게임 속의 여러 반복 행동들이다. 이 게임의 메커니즘은 루트를 끝내는 것, 플레이 경험, 시야의 확산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감정의 신체화를 악화시키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되었다. 루트를 끝내는 과정에서 게임 프로세스엔 반복적인 작업들이 많이 나타난다. 제작자 쉬루이샹(徐瑞翔)에 따르면 이는 “양극성 장애가 재발하는 현실을 반영하기 위한 것인데 (…) 이는 바로 외출을 하고 싶다면 이곳에서 빙빙 돌기만 해야 한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세 번째 스테이지가 시작되면 플레이어는 레벨을 완료하기 위해 메커니즘을 지렛대로 삼기 위해 동일한 인터페이스를 반복해야 한다. 여섯번째 스테이지 이러한 경험이 더욱 두드러진다. 하얀 피에로는 촉발된 기관 여러 차례 중복해 통과해야 할 뿐만 아니라(전략 가이드를 참고한다는 전제 하에), 어떤 특수 장면에서는 능동적으로 추락해 게임 인터페이스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빨간색과 검정색 두 가지 색상으로 만들어진 파손된 통관 루트를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중복(too repetitive) 메커니즘은 계속해서 플레이어들의 인내심을 낭비하고, 게임의 플레이가능성을 계속 희생시켜, 1인칭 시각성의 자극으로 불안과 무료함을 이중적으로 체험하는 걸 강화한다. 게임 체험에서 이러한 느낌은 더욱 확대된다. 스마트폰 컨트롤 인터페이스에서 이 게임의 조이스틱(摇杆) 체험성은 매우 엉망이다. 손이 시야를 일부 가리게 되어 터치 오류가 날 확률이 매우 높고, 이는 하얀 피에로가 스마트폰에서의 점프 컨트롤이 데스크탑에서보다 더 어렵도록 만든다. 이는 또한 캐릭터가 추락해 죽을 확률도 크게 높인다. 만약 기관을 반복해 오고가는 게 수평적인 불안의 체험이라면, 죽음이 거듭된 뒤 게임을 재개하는 것은 수직적인 불안 경험이 된다. 종횡으로 교차해 만들어진 불안의 장력은 끊임없이 플레이어의 시각과 청각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플레이어가 자신의 손가락 컨트롤에 대해 짜증을 느끼게 만든다. 게임 인터페이스는 색깔 블록 말고도 메커니즘이 작동할 때 움직임의 궤적을 바꾸는 대량의 선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선들은 신체 바깥에 있는 기호의 표본을 만드는데, 이는 하얀 피에로의 빨강-검정 색상 전환과 메커니즘이 촉발하는 컨트롤과 관련되어 글자들의 춤(written dance)을 만든다. 순수하게 물리적인 특성, 즉 비생명의 객체가 생명의 활력(élan vital)을 갖추는 방식으로 형성된다. 그런 다음 “업무 중 지령이 암시하는 억압의 정도에 따라 점차적으로 약화”된다. 7) 시청각적인 경험이든 컨트롤의 감각이든, 모두 게임의 신체화를 통해 정신장애의 신체화를 모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이페즈> 플레이어의 지각은 여러 인칭들에 의해 분열되고, 동시에 투시체험은 여러 각도로 분리된다. 그래픽이 중첩되는 방식(즉, 4인칭 단수 시점) 8) 을 통해 각기 다른 카메라의 시선이 마치 뒤샹의 <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역주: Nude Descending a Staircase (No. 2)] 과 같은 어지러움에 도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은 하이퍼 시각화된 평면은 스크린 공간에 투사되어, 응시의 단일한 초점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인지조화가 이뤄진 ‘정상인’은 게임 도중 초점이 인터페이스의 도처를 조급하게 돌아다니게 되고, 이미 신체화된 양극성 정서장애 환자는 게임을 더욱 어려워 하게 된다. 내러티브 독해 : 결말의 신체화 게임 체험 말고도 <바이페즈>의 숨겨진 결말은 또 다른 의미로 신체화된 독해의 가능성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곧 전두엽이 절제된 미래이다. 게임 속에서 빨간색-검정색이 교차하는 것은 단순히 양극성의, 낮/밤이 교착된 이미지가 아니다. 게임의 다섯번째 스테이지 <미궁>에선 빨간색-검정색이 직접적으로 접점을 이루는 교착점의 조합이 바로 의약품인데, 이는 게임 플레이 영상에서 언급된 바 있는 리튬이다. 바꿔 말해, 또 다른 의미에서 플레이어는 스테이지를 통과하도록 캐릭터를 컨트롤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캐릭터에 의해 컨트롤당하고 있는 셈이다. 플레이어는 약을 복용하는 캐릭터가 가져다주는 보다 평평한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두 개의 색깔만으로 이뤄져 있고, 구체성이 없으며, 도처에 함정과 추락으로 가득 찬 평평한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환각제(LSD)를 복용한 후 올더스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는 <인식의 문>에서 가장 행복했던 경험이 바로 다양한 색깔들이 뒤엉킨 평면적인 세계를 체험한 것이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게임이 말하고 있듯, 약물 치료는 사실 단지 정신질환을 일시적으로 보류할 뿐, 진정으로 치료할 수는 없다. 9) 오랫동안 비판받아온 완치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바로 전두엽 절제술이다. “의사들은 가벼운 우울증과 불안증부터 조현병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두엽 절제술을 시행했다. 한마디로 그 당시 의료 전문가들은 전두엽 절제술을 ‘영혼을 위한 수술’이라고 여겼고, 가벼운 우울증부터 심각한 정신분열증까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0)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언제라도 추락할 수 있는 하얀 피에로(양극성 장애 환자)는 당연히 비정상적이다. 전두엽 절제술 이후 환자는 다시는 양극성 장애를 앓지 않지만, 완전히 순종적인 좀비가 되어버린다. 이 역시 ‘완치’의 결과일 수 있다. 많은 영화 및 TV프로그램들에서, 정신질환자의 경험을 심도 깊게 보여주는 작품일수록 결말은 점점 더 전두엽 절제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인다.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1971), <판의 미로(Pan's Labyrinth)>(2006), <서커 펀치(Sucker Punch)>(2011), <니하오, 미친놈(你好,疯子)>(2016) 등 모든 영화들이 그렇다. <바이페즈>에 대한 또 다른, 좀 더 자기 구속적인(self-imposed) 해석도 존재한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하얀 피에로의 치유를 돕고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사실 하얀 피에로는 ‘전두엽 절제술’이 이뤄질 미래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얀 피에로는 이 운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데, 플레이어가 줄곧 피에로를 컨트롤하고 있고, 태양을 향해 그녀를 컨트롤하고 있기 때문이다. (빨간색과 검정색이 중첩된 흰색은 전두엽 절제술이 이뤄질 테이블의 흰색 전등을 상징한다.) 피에로는 (철창 안에 갇힌 채)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자신이 완치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미로에 갇힌 채) 적극적으로 약물을 복용하며, 심지어 (반복에 갇힌 채로) 다시 또 다시 이뤄지는 치료에 계속해서 협조한다. 하지만 플레이어(사회 또는 가족)는 결코 믿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컨트롤하며 태양을 향해 컨트롤한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에 피에로는 아홉번째 스테이지를 통과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에 나타나는 영상은 피에로가 플레이어에게 한걸음씩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2차원 이미지였던 피에로는 3차원의 주체적 사람이 되고는 “고생했어요”라고 말한다. 이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플레이어에게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제부터는 더 이상 발병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게임의 아홉번째 스테이지의 숨겨진 결말은 플레이어가 하얀 피에로를 컨트롤해 태양이 없는 또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해석에 의해 뒷받침된다. 따라서 태양 뒤에 치유의 문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피에로가 전두엽 절제술을 받지 않고도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가능한데, 플레이어는 그 대가로 게임에 대한 길고 지루한 해설을 볼 수 없고, 하얀 피에로가 조울증 환자라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한병철은 정신질환의 치유가 본질적으로 일종의 살해라고 여긴다. 그것은 인간성을 죽이며, 그것을 통해 고도로 자기 훈련된 의식의 산업으로 되돌려 놓는다. 여기서 ‘정상인’으로서 우리는 ‘우애로운 빅브라더’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빅브라더)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자기 착취와 자기 계몽(Selbstauslechtung)을 통해 더더욱 원자화되도록 교도한다. “더 높은 생산성을 창출하기 위해 감정의 자본주의(Kapitalismus der Emotion)는 또 다른 형태의 노동(das Andere der Arbeit)인 게임을 배우게 됐다. 감정 자본주의는 일상과 일터를 모두 게임화(Gamifizierung)한다." 11) 어떤 면에서 <바이페즈> 역시 게임화의 산물인데, 게임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신체화된(소외된) 자아를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죽고 또 부활하는 게임적 리얼리즘(ゲーム的リアリズム)은 죽음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특히 모바일 체험이 엉망인 상황에서 그것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인상을 더욱 배가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소외의 경험은 플레이어를 감정 자본주의의 함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러한 경험들은 자기계발의 방식으로 게임을 완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빨간색과 검정색이 교차하는 게임 인터페이스를 비플레이어와 비캐릭터의 4인칭 관점에서 본다면,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이 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에서 보여준 엇갈린 톱니바퀴가 다시 우리 앞에 떠오른다. 훈육 사회에서 집중 교정된(konzertierte Orthopädie) 화면들이 꼭 양극성 정신장애 환자의 세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가 느끼는 강한 조급증(emotionszustand)의 정서 상태는 양극성 장애 환자의 체험이 아니라, 개체로서의 존재의 흔적이다. 필자 주 1 ) 마츠모토 켄타로(松本健太郎), 「스포츠 게임의 구성 : 현실의 무엇을 모방하는가?」, 덩지안(邓剑) 번역, 천즈난(陈梓楠) 교정, 『게임 왕국의 보물을 탐험하다(探寻游戏王国里的宝藏)』, 상하이서점출판사(上海书店出版社), 2020. 12. 2 ) 이론론은 마음과 행동의 관계에 대한 일련의 이론들을 바탕으로 타인의 심리를 추측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내가 내 몸의 일부를 긁는 행위는 그 부분에 가려움을 느낀다는 신호라고 보면, 타인이 자신의 다리를 긁는 것이 다리가 가려운 상태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 것. 이는 우리의 추리(reasoning)를 통해 이뤄진다. 가장론은 상대방의 위치(place)와 관점(perspective)에서 자신을 상상함으로써 행동을 예측하고, 가설을 세워 이를 테스트하는 등의 방식으로 행동을 해석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론론과 가장론은 모두 서로 다른 내용을 가진 다양한 구체적 주장을 포함하는 큰 부류의 이론틀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즈후(知乎)에 게시된 이 내용을 참고하라. 3 ) Karen Hanson. Social Origins of Distress and Disease: Depression, Neurasthenia, and Pain in Modern China by Arthur Kleinman. New Series, Vol. 1, No. 3, Obstetrics in the United States: Woman, Physician, and Society (Sep., 1987), pp. 343-345 4 ) Linda Geddes. Staying awake: the surprisingly effective way to treat depression. https://mosaicscience.com/story/staying-awake-surprisingly-effective-way-treat-depression/ 5 ) 레프 마노비치, 『뉴미디어의 언어(新媒体的语言)』, 구이저우인민출판사(贵州人民出版社), 2020. 6 ) 피터 앙드레 알터, 『악의 미학적 여정: 낭만적 읽기(恶的美学历程:一种浪漫主义解读)』, 닝잉(宁瑛)·왕더펑(王德峰)·종창성(钟长盛) 번역, 중앙편역출판사(中央编译出版社), 2014. 7 ) 클라우스 피아스, 『비디오 게임의 세계(电子游戏世界)』, 숑슈어(熊硕) 번역, 푸단대학출판사(复旦大学出版社), 2021. 8 ) 황원다(黄文达), 「제4인칭 단수: 영화 이미지의 자율성에 대하여(第四人称单数——论电影影像的自主性)」, 베이징전영학원학보(北京电影学院学报), 2010. 9 ) 올더스 헉슬리, 『지각의 문(众妙之门)』, 천창두어(陈苍多) 번역, 베이징옌산출판사(北京燕山出版社), 2016. 10 ) John Kuroski, 「The Twisted History Of The Widely Misunderstood Lobotomy」 https://allthatsinteresting.com/lobotomy-walter-freeman 11) 한병철, 『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문학과지성사, 2015. 필자가 참고한 중국어 번역본은 『精神政治学』, 관위홍(关玉红) 번역, 중신출판사(中信出版社), 2019.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단위안, 但愿 쓰촨사범대학(四川师范大学) 문학원 문예미학 박사.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Editor's View: 오프라인은 어떤 의미인가?

    GG 8호가 주목한 주제는 ‘오프라인 게임’입니다.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으로 오늘날의 게임들은 온라인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지만, 게임의 역사를 돌아보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오프라인 기기 기반의 플레이들이 만들어 온 맥락이 온라인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Back Editor's View: 오프라인은 어떤 의미인가? 08 GG Vol. 22. 10. 10. 안녕하세요,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입니다. GG 8호가 주목한 주제는 ‘오프라인 게임’입니다.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으로 오늘날의 게임들은 온라인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지만, 게임의 역사를 돌아보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오프라인 기기 기반의 플레이들이 만들어 온 맥락이 온라인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이 보급된다고 해서 영화가 사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온라인 게임이 보편화된 시대라고 해서 오프라인 게임의 의미가 완전히 퇴색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기에 온라인 시대의 오프라인 게임이 갖는 의미에 주목합니다.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지 않아도 작동하는 무엇은 어쩌면 점점 희귀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속에서 또다른 의미로서의 ‘온라인이 아닌’ 게임으로 오프라인 게임의 의미는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따로 서버에 연결되지 않는 오락실 기기들, 온라인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지만 오프라인 현장의 플레이가 더욱 중요한 PC방과 e스포츠를 넘어 아예 디지털의 범주 바깥에 존재하는 보드게임까지 우리는 오프라인이라는 이름으로 온라인과 대립항을 이루는 여러 게임들을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역으로 드러나는 것은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대전제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가이기도 합니다.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라인이라는 개념이 갖는 관계망으로서의 의미를 통한 접근 또한 유효할 것이고, 그렇기에 이번 호의 기획은 어쩌면 온라인이라는 시대 배경에 대한 접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호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손맛보다 눈맛, 사람들은 이제 게임을 ‘본다’

    2020년 초, 한 모바일 게임의 광고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제 모두들 손 떼!”라고 외치고, 가끔씩만 만져줘도 맛이 최고라며 게이머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게임은 원래 이 맛”이라고 선언한다. “어머, 어딜 손 대요?”라며 능청을 부리기도 한다. 게임의 제목부터 “키보드에서 떨어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위 방치형 RPG로 불리는 〈AFK(Away from keyboard) 아레나〉 이야기다. < Back 손맛보다 눈맛, 사람들은 이제 게임을 ‘본다’ 03 GG Vol. 21. 12. 10. 잘못된 전제 2020년 초, 한 모바일 게임의 광고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제 모두들 손 떼!”라고 외치고, 가끔씩만 만져줘도 맛이 최고라며 게이머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게임은 원래 이 맛”이라고 선언한다. “어머, 어딜 손 대요?”라며 능청을 부리기도 한다. 게임의 제목부터 “키보드에서 떨어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위 방치형 RPG로 불리는 〈AFK(Away from keyboard) 아레나〉 이야기다. 게임은 원래 ‘손맛’이 아니라 ‘보는 맛’이라 우기는 광고 카피. 적잖은 게이머들은 “게임은 플레이할려고 하는 거 아닌가? 본질을 없애버리네!”같은 댓글에 동의하고 공감했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진행되는 게임을 게임이라 부를 수 있는가? 키보드나 마우스로 입력을 하고 그래서 점수든 승리든 목표를 달성하는 것, 즉 게이머와 게임 텍스트의 상호작용이 게임의 매체적 본질 아니던가? 버릇처럼 텔레비전을 켜놓고 연예인들이 박장대소하며 히히덕대는 장면들을 멍하니 쳐다보는 카우치 포테이토족의 모습과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역동적인 게이머 모습은 당연히 구분되어야 하는게 아닌가? 수동적 텔레비전 시청자와 능동적 게임 플레이어의 구분은 꽤 오랜 기간 양 미디어의 본질적 차이인 것처럼 여겨졌다. 직관적으로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암묵적인 전제가 있다. “본다”는 것은 (손을 움직이는 것보다) 수동적인 행위라는 전제가 있고, ‘상호작용성’이야말로 (텔레비전이나 영화와 차별되는) 게임의 매체적 본성이라는 전제가 있다. 크게 의심받지 않던 이 전제들. 최근,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들이 자꾸 생긴다. 자기가 게임을 하는 대신 남들이 게임하는 모습 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내가 조작을 하는 대신 기계가 알아서 내 캐릭터를 육성시켜주는 게임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키보드에서 손 떼라는 게임도 나왔고, 성공했다. 우리가 뭔가 잘 못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보는 행위는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은 그리 게으르고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흘긋) 보다(see)”와 “바라보다(look)”는 구별되어야 한다. 일상적 삶에서 우리 시선이 어떤 대상들에 우연히 머물거나 스쳐가는 상황이 아니라 목적성과 방향성을 가진 자발적인 행동으로서의 ‘바라봄’은 바라보는 ‘실천 행위’이다. 길가에서, 술집에서, 운전을 하다가, “뭘 봐, 인마!”라는 마술같은 네 글자로 인해 싸움이 일어나고 목숨이 왔다갔다하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해변에서, 클럽에서, 응시하는 자와 시선을 피하려는 자의 줄다리기는 드문 일이 아니다. CCTV로 잠재적 범죄자들을 감시하는 편의점 사장이나 몰래카메라로 누군가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변태 범죄자에게 ‘바라봄’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힘 있는 행위이다. 시선만으로도 권력과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감옥의 간수와 죄수는 이 명제를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사례다. 푸코(Michel Faucault)가 19세기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Jeremy Bentham)의 아이디어를 빌려와 원형 감옥의 작동 원리를 설파할 때, 그 핵심은 시선의 권력이 내면화된다는 점이었다. 중앙 첨탑에서 죄수의 방을 비춘다면 죄수는 첨탑의 간수를 볼 수 없다. 나는 그를 볼 수 없지만 그는 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일차적인 권력의 자원이 된다면, 그가 지금 나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가 정한 규율과 표준을 내면화하여 행동해야 하는 것이 권력 작동의 최종 결과가 된다. 간수는 시각의 주체이다. 죄수는 대상이다. 시각중심주의는 주체와 대상을 공간적으로 분리하고, 주체에게 바라보고 분석할 힘을 준다. 이론(theory)의 어원은 본다(theoria)이다. 눈은 권력을 가졌지만 대상에 개입하지 못한다. 하지만 바라보는 주체는 능동적인 해석의 주체이기도 하다. 코미디를 보면서도 울 수 있다면 이를 어찌 수동적 수용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텍스트 중심주의의 미디어 문화이론이 수용자에 대한 관심으로 선회했던 이유도 바로 해석 주체의 능동성 때문이었다. 홀(Stuart Hall)이 부호화와 해독에 대한 도발적 논의를 시작한 때가 40여 년 전이고, 이를 이어받아 피스크(John Fiske)가 저항적 즐거움과 기호론적 민주주의를 제기한 지도 30년 이상이 흘렀다. 오히려 수용자의 능동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냐는 반성이 나왔을 정도니,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신문기사나 만화를 보는 것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행위보다 수동적이라 믿어버리는 것은 시대착오적 전제가 아닐 수 없다. 게임은 과연 상호작용적 미디어인가? 하지만, 여전히, 게이머의 개입적 행동을 영화 관객의 해석적 행동과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는 없다. 게임의 본질이 ‘상호작용성’이라는 믿음도 여기서 출발한다. 주체와 대상이 공간적으로 분리된 전통적 시각매체와 달리, 게임에선 수용자가 대상 텍스트의 내용과 구조에 작용을 가하고(입력) 그 결과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진다는 점은 분명한 차별 지점이기 때문이다. 게임문화연구의 초기, 게임과 게임플레이를 유희의 관점에서 보는 접근(루돌로지)과 서사의 관점에서 보는 접근(내러톨로지)이 대립했을 때도 상호작용성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 전자는 게임의 본질을 게이머의 입력행위에서 찾았고 후자는 게임 텍스트가 상호작용적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놀이’가 놀이 주체(플레이어)의 작용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 구성된다. 이것을 상호작용적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무엇과의 상호작용인가? 축구는 공과의 상호작용인가, 상대 팀과의 상호작용인가, 아니면 심판이나 관중과의 상호작용인가? 축구 경기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경기를 하나의 서사로 간주하는 비유이다. 이 서사는 선수들이 플레이함으로써 완성된다. 자유도는 높지만, 서사 구성의 정해진 규칙은 있다. 게임을 게이머의 참여로 완성되는 서사의 일종으로 이해했던 머리(Janet Murray)의 정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축구라는 ‘각본 없는 드라마’를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관중이다. 영화의 서사를 즐기듯, 축구 서사를 만끽한다. 놀이의 주체가 선수로부터 관중으로 옮겨지는 순간이다. 게임에 대한 두 가지 암묵적인 전제, 즉 ‘보는’ 행위가 수동적이라는 전제와 ‘상호작용성’이야말로 게임의 매체적 본성이라는 전제는 처음부터 불안한 기반 위에 놓여 있었다. 게임을 설명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일 수는 있지만, ‘본질’이라 말할 수는 없다. 게임의 주체도 게이머로부터 관중으로 옮겨질 수 있다. 이스포츠(eSporsts)나 게임 스트리밍 시청의 경우이다. 이스포츠의 경우, 프로 게이머가 게임 서사를 완성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관중은 게임 서사를 (능동적으로) 바라보고 즐기는 주체가 된다. 방치형 게임 플레이어는 적극적인 입력을 하는 대신 서사의 전개과정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된다. 게임을 즐기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 게임의 본질을 거스르는 기형적 상황은 아니다. 시각성의 재림 게임을 즐기는 새로운 방식이라 치더라도, 왜 하필 지금 ‘보는 게임’이 각광을 받게 되었는지 의문은 남는다. 더 정확히 질문하자면, 시각과 청각과 촉각을 모두 사용하던 게임 플레이가 당연하던 시기를 지나 거의 전적으로 시각에만 의존하는 방식의 플레이(관람)가 중요해진 시기가 도래한 계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쇄술의 발달 이후 시각은 다른 감각에 비해 상대적 우위에 있어 왔다. 매체 철학자인 맥클루언(Marshall McLuhan)은 인쇄술이 인간의 감각들을 서로 떼어 놓고, 다양한 감각들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구술 중심의 부족문화에서 문자 중심의 필사문화로, 그리고 인쇄술 발전으로 인해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등장했다는 그의 매체사적 통찰 속에서, 시각은 필사문화 시기부터 중심적 감각으로 등장하여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시기에는 다른 감각들을 억압하는 지배적 감각이 된 것이다. 총체적 인간 감각이 분화되고, 시각이 나머지 감각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시각 권력은 근대성의 등장에 맞춰 지배적 지위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시각 권력과 원형감옥의 간수가 갖는 시각 권력이 같은 의미는 아니다. 맥클루언이 강조한 근대적 시각성의 지배는 인쇄술과 선형적 문자중심성과 더불어 등장, 강화되었고, 따라서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와 과학에 대한 맹신으로 이어진다. 신의 시점이 아닌 인간의 시점을 강조하면서 원근법에 충실한 과학적 그림이 등장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누군가를 감시하거나 훔쳐보고 나아가 통제하는 생체권력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 제기이다. 다시 맥클루언을 인용하자면, 시각 중심으로 형성된 인쇄-미디어 문화가 주술적이며 마법적인 청각 세계를 붕괴시켰던 것처럼, 구텐베르크 은하계 역시 전기 미디어의 발명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신과 라디오, 텔레비전은 메시지를 찰나적으로 만들어 합리성보다는 직관과 통찰을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은 가장 탈근대적인 매체이다. 게임 내의 다양성과 차이들을 잠시 접어두고 단순화하자면, 게임은 시각중심성에 저항하는 감각 분산적 매체이다. 게임을 즐기는 이들의 태도는 인쇄매체에 담긴 선형적 언어를 따라가는 (맥클루언이 말하는) 시각중심적 자세도 아니고 경건한 자세로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벤야민이 말하는) 정신집중의 태도도 아니다. 7,80년대의 오락실에서 시작해 90년대말 PC방에 의해 대중화되고 21세기 이후의 모바일 미디어로 인해 폭발한 디지털 게임은 근대성에 대한 회의와 도전과 때를 같이한다. 그렇다면 이스포츠와 방치형 게임에서 발견되는 시각성의 재림은 근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일까? 다시 시각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는 단서로 이해해야 할까? 탈근대적 시각성의 게으름 여기서 근대적 시각성과 구별되는 탈근대적 시각성을 발견한다. 전자가 시지각에만 의존해서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사고하는 과정을 설명한다면, 후자는 시각 주체로서 대상을 바라보되 게으르고 산만하고 찰나적인 바라봄을 지칭한다. 물론 다른 감각기관이 주변화된다는 면에서는 유사하고, 시각중심적 문화라는 지칭도 온당하다. 그러나 디지털 영상을 보는 지금의 태도는 읽고 이해하고 해석해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탈근대적 시각성은 디지털 영상매체의 발전과 같은 속도로 전파되었다. 일방적으로 뿌려지는 (근대 성격의) 텔레비전 방송이 아닌, 개인화되고 상호작용적이며 시공간 제약도 극복할 수 있는 미디어들이 보편화되면서, 몰입하지만 자유로운, 유익하지만 심심풀이인 바라봄도 따라서 보편화되었다. 비유하자면, 노동과 생산을 위한 시각성이 아니라 여가와 휴식을 위한 시각성이다. 공을 차는 대신 축구 중계를 시청하고 먹는 대신 먹방을 즐겨보는 행위는 게으르고 산만하다. 방치형(idle) 게임의 idle은 게으름, 나태함, 빈둥거림을 뜻한다.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 상태. 생산성 없는, 노동의 반대편에 있는 휴식의 상태이다. 노동의 반대편에는 휴식 대신 여가가 자리잡기도 한다. 일하지 않는 주말, 사람들은 열심히 여가활동을 즐긴다. 영화를 보거나 근교 관광지를 가거나, 아마 골프를 치러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낮잠을 자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여가활동’이라 부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가활동’은 준(準)노동이기도 하다. 함께할 친구들과 미리 약속을 하고, 버스 시간을 알아보고,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야 하기도 한다. 생산하지 않는 행위라 하여 노동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피곤한다. 이를 적극적/소극적 여가로 구분하기도 하고, ‘준노동적 여가’와 ‘보상적(compensatory) 여가’로 구분할 수도 있다. 혹은 (학술적 개념은 아니겠으나) ‘진지한’ 여가와 ‘게으르고 산만한’ 여가로 구분하는 편이 더 직관적일 수도 있겠다. 맑스의 사위이기도 한 라파르그(Paul Lafargue)는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찾는 운동을 제창한 바 있는데, 게으르고 산만한 여가야말로 이 운동에 딱 맞는 활동 아닐까. 방치형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진지한 플레이를 거부하는 것이고, 게으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시각 주체 노릇은 하지만 개입하지 않고, 열심히 바라보지만 해독하지 않는 게이머. 탈근대적 시각성은 게으르고 산만하다. 게임 본질주의의 쇠락 방치형(idle) 게임이라 퉁치기는 했지만, 게이머의 게으름에 기댄 게임의 종류는 상당히 많다. 역사도 결코 짧지 않다. 요즘은 흔해진 자동전투 기능도 방치의 일종이고, 방치를 필수 요건으로 만들어 놓은 파밍 게임들도 있다. 방치형 게임 연구 논문을 발표한 박이선은 게임의 방치 구조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5분 이내로 방치하면서 간헐적으로 게임에 진입하는 게임 (〈AFK아레나〉)도 있고, 몇 시간까지 게임을 켜두고 꾸준히 방치해야 하기 때문에 일과를 보내다가 잠시 게임이 생각나면 화면을 확인하고 개입하는 방식 (〈리니지2 레볼루션〉)도 있다. 플레이어가 게임에 접속하지 않아도 게임이 항상 진행되는 항시적 방치 게임(〈중년기사 김봉식〉)도 있다. 다양한 종류와 위계 속에서,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게으름’에 맞는 적절한 게임을 선택해서 즐긴다. 혹은 바라본다. 이스포츠를 예로 들었지만, 사실 남들이 게임하는 것을 관람하는 방식도 여러 종류이다. 특정 게임의 공략방법을 배우기 위한 유튜브 채널을 열심히 보는 사람도 있고, 셀러브리티의 미숙한 게임 플레이를 팬심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내가 플레이하는 대신 남들을 보며 즐기는 행동을 ‘상호수동성’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관찰주체는 감정을 다른 대상에게 위임함으로써 안도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시각에만 의존하여 즐거움을 얻는 이런 관람행위들은 근대적 의미의 진지한 바라봄과는 구별되는, 산만한 바라봄이라는 점이다. 플레이어의 적극적 개입 없이 시각에만 주로 의존하는 게임(관람) 방식이 확대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방치형 게임이 게임산업의 미래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스포츠가 게임보다 더 중요한 문화적 영역이 될 것이라는 뜻도 아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자판이나 마우스, 컨트롤러를 움직이는 것이 게임 플레이의 지향점이 되는 시기를 벗어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PC방에서 컵라면 먹으며 밤을 새는 것이 전형적인 게이머의 이미지가 되는 시기가 지났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른 글이나 사석에서도, 나는 소위 ‘진짜’ 게이머가 설 자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해왔다. 캐주얼 게이머, 노년 게이머, 방치형 게이머를 무시하며 “너희가 게임을 알아?”라며 언제든지 코웃음칠 자세가 되어 있던 이들이 점점 주변화됨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게임의 가장 중요한 ‘매체적 본질’이 상호작용성이라는 전제를 폐기한다면, 그리고 방치형 게이머의 산만한 바라봄을 근대적 시각 권력과 차별화하여 이해할 수 있다면, 게임 씬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변화는 소소한 유행이 아니라 거대한 문화적 변동의 일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학교 과제를 하면서 자동 사냥을 흘긋 쳐다보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유형의) 게이머를 보며, 혹은 게임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이스포츠 중계에 열광하는 (과거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유형의) 게이머를 보면서, 사실은 탈근대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코끼리의 종아리 어딘가를 만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세대학교 교수) 윤태진 텔레비전 드라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지금까지 20년 이상 미디어문화현상에 대한 강의와 연구와 집필을 했다. 게임, 웹툰, 한류, 예능 프로그램 등 썼던 글의 소재는 다양하지만 모두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활동들”을 탐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몇 년 전에는 『디지털게임문화연구』라는 작은 책을 낸 적이 있고, 요즘은 《연세게임·이스포츠 연구센터(YEGER)》라는 연구 조직을 운영하며 후배 연구자들과 함께 여러 게임문화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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