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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학부모』의 과잉 경험과 리얼리즘의 신화

    ‘리얼리즘 게임’이라 불리는 『중국 학부모(中国式家长)』는 서민적인(接地气)1) 콘텐츠 덕분에 “매우 현실적”이고 “삶에 근접해 있다”는 등 일관된 평가를 받았다. 이 게임은 현장 조사에서 얻은 실제 경험을 제시함으로써 실제 경험을 과잉 경험으로, ‘현실감’을 ‘현장감’으로, 실제 상황을 ‘공감(感同身受)’으로 대체하며, 궁극적으로 사회구조 문제를 가족윤리 문제로 축소한다. 또, “부모를 용서하라”는 감정주의적 결말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게임의 기초적인 설정 - 세대속성의 대물림(다음 세대 아이가 윗세대의 우세속성을 물려받는다) - 이 모든 ‘리얼리즘’ 게임에서도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이란 점이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게임의 ‘리얼리즘’은 바로 계급 상승의 신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과잉 경험과 그 이면에 깔린 리얼리즘의 신화는 『중국 학부모』로 하여금 진짜 문제를 은폐하는 동시에 폭로자가 되도록 한다. < Back 『중국 학부모』의 과잉 경험과 리얼리즘의 신화 11 GG Vol. 23. 4. 10. [편집자주] 비디오 게임은 그저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니다. 그것에 대해 관찰해 보면 사람들은 각기 다른 시각을 지닐 수 있다. 문화에 대한 시각과 기술에 대한 시각이 있을 수 있고, 게임을 하는 사람에 대한 시각과 게임개발자에 대한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심지어 미디어에 대한 시각과 산업에 대한 시각도 있으며, 최소한 사회변화와 게임의 역사에 대한 시각도 있는데, 이것들은 마치 없어서는 안 될 두 개의 성악 파트처럼, 그 소일거리라는 강바닥에서 지식의 악장을 연주한다. 펑파이신문( www.thepaper.cn )의 ‘아이디어 시장’ 섹션은 인문과 사상조류의 관점에서 오늘날 게임적 현실의 주요한 방향을 최대한 종합적으로 조사 및 파악해 게임 비평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에 매주 토요일 ‘게임론’ 연재를 시작한다.) ‘비평의 방향’, ‘역사의 시선’, ‘문화의 논리’, ‘매체와 현실성의 확장’ 등 다양한 글들이 담긴 연재로서, 한·중·일 관련 분야에서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 연구자, 게임연구에 뜻을 둔 젊은 연구자, 게임업계의 선배들과 종사자 등 업계와 학계 각 방면 게임동호인들의 원고를 모을 것이다. 이를 통해 게임비평의 개념과 관점을 제시하고, 게임비평의 가치·가능성·방향·경로 등을 두고 토론할 것이다. 또, 역사를 지향 삼아 문화와 기술, 동아시아와 글로벌, 현대와 포스트모던 등 맥락에서 게임 역사의 원류와 방향을 드러내고, 게임텍스트와 사회문화 사조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고 탐구하는 것은 게임이 장난감에서 문화미디어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특징을 나타낸다. 비판적 시각으로 오늘날 게임 세계의 내부적 원리를 고찰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 게임산업의 독특하고 지배적인 문화생산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게임(산업) 문화에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탐색하며, 게임의 전통적 매체에 대한 재생산과 게임을 통한 현실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밖에도 이 연재는 게임과 젠더에 대한 토픽과 게임 ‘진화’의 원동력으로서 젠더를 포함하며, 게임 속의 젠더 의제에 대해 토론할 것이다. 그리고 게임 플레이어들에 대한 여러 기사들, 서버운영자(网管)와 스트리머(主播), 대리게이머(金币农夫; 중국 게임계의 한 현상. 아이템 수집 등으로 일정한 보수를 받으며 게임을 하는 사람들), 따이롄(代练; 온라인 게임에서 누군가의 레벨업을 돕고, 돈을 받는 행위들), e스포츠 선수 등 게임이라는 영역 내 변두리에 있는 이색적인 집단을 소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게임을 매개로 일본과 한국에서 게임비평의 기준점을 제공했거나 제공하고 있는 해외 작품들을 골라 게임 배후의 광범한 구도에 대해 논할 것이다. [역자의 말] 각주는 모두 국내 출간물 표기 또는 역주로, 원문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기하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리얼리즘 게임’이라 불리는 『중국 학부모(中国式家长)』 는 서민적인(接地气) 1) 콘텐츠 덕분에 “매우 현실적”이고 “삶에 근접해 있다”는 등 일관된 평가를 받았다. 이 게임은 현장 조사에서 얻은 실제 경험을 제시함으로써 실제 경험을 과잉 경험으로, ‘현실감’을 ‘현장감’으로, 실제 상황을 ‘공감(感同身受)’으로 대체하며, 궁극적으로 사회구조 문제를 가족윤리 문제로 축소한다. 또, “부모를 용서하라”는 감정주의적 결말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게임의 기초적인 설정 - 세대속성의 대물림(다음 세대 아이가 윗세대의 우세속성을 물려받는다) - 이 모든 ‘리얼리즘’ 게임에서도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이란 점이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게임의 ‘리얼리즘’은 바로 계급 상승의 신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과잉 경험과 그 이면에 깔린 리얼리즘의 신화는 『중국 학부모』로 하여금 진짜 문제를 은폐하는 동시에 폭로자가 되도록 한다. 『중국 학부모』는 모위완 게임즈(墨鱼玩游戏, Moyuwan Games)가 제작한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2018년 9월 29일 코코넛아일랜드 게임즈에서 대행해 출시했다. 이 게임이 출시되며 인터넷에선 많은 화제가 일었는데, 가장 인기있는 댓글평에는 “매우 리얼하다”, “실제 삶과 닮았다”, “너무 공감된다” 등이 있다. 『중국 학부모』의 게임 소개 페이지에는 “현실적인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쓰여 있다. 이러한 자기 포지셔닝은 대부분의 게이머가 이 게임에 대해 평가하는 바와 일치한다. 이 게임은 아이가 태어나 대학 입시(高考)를 치르기까지를 따라가는데, 게임의 최종적인 목표 미션은 바로 아이가 만족할만한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일자리를 얻는 것에 있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부모와 자녀의 이중 역할을 맡는다. 부모로서의 플레이어는 자녀의 하루 일정을 짜야 하는데, 아이가 공부할 내용과 개발할 기술 등을 결정해야 하며, 자녀로서의 플레이어는 자녀의 시각에서 대인 관계와 문제 해결 등을 진행하고, 학급 임원 선거에 출마하거나 이성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오락용품을 사는 등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게임 플레이 방법으로서는 평범한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보이지만, 게임에 ‘리얼리즘’의 분위기를 채워주는 독특한 ‘중국식’ 가정의 요소들이 많다. 예를 들어 학부모는 자녀를 활용해 이웃이나 친구의 자녀와 ‘체면 대결’을 치러야 하고, 아이는 부모의 체면을 세워줌으로서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춘절 연휴에 친척들과 ‘홍바오 2) 쟁탈전(红包拉锯战)’을 치를 때 홍바오를 너무 빨리 먹으면 친척이 기분 나빠하고, 또 너무 양보하면 어머니가 기분 나빠한다. 홍바오를 가져갈 때 반드시 신중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또, 부모에게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하면 부모는 “어린 애가 무슨 스트레스니?”라고 질책하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 수치는 더 높아진다. 이처럼 모든 디테일들이 『중국 학부모』와 자녀들 간 세대 갈등을 강조하는데, 이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어린시절로 돌아간 듯하다”고 “공감”하는 것이다. 『중국 학부모』에 대한 평가들은 비판과 성찰을 담고 있으며, 그 디테일에 대한 언론들의 경탄은 『중국 학부모』를 더더욱 ‘중국식 교육’에 대한 비판의 훌륭한 소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중국 학부모』가 제시하는 다양한 ‘현실’이란 비단 중국 가정교육의 실제 딜레마를 반영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과잉 경험으로 구조적 문제를 감추는 것에 있다. 과잉 경험 : ‘현실’과 ‘현장’ 『중국 학부모』의 시나리오 텍스트 내용 대부분은 현실 조사를 통해 발췌한 것으로, 조사 대상자가 진술한 실제 경험을 게임 속에 직접 배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 학부모』의 줄거리는 완전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경험에서 구축한 거대한 ‘경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게임 속에선 일련의 무작위(随机; 랜덤, 임의) 선택이 촉발되고, 플레이어의 선택은 아이의 속성치에 영향을 미친다. ● 오늘 부모님은 일찍 잠들었고, 당신은 방에서 몰래 휴대폰을 꺼내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10연승의 결정적 순간이 다가오기 직전, 당신은 숨을 꾹 참는데… 그런데 돌연 방의 문이 열렸네요! ○ 휴대폰을 끄고 재빨리 숨을 참고 잠자는 척한다. 그리곤 긴장을 풀고 강좌를 듣는다. (기억력 40 증가) ○ 큰 소리로, 당신이 깨어났다고 말한다. 그러자 부모님은 깜짝 놀라 방에서 나간다. (지능 50 증가) ○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계속해서 플레이한다. 알고보니 그것은 가을바람이 지나간 잘못된 경보였다. (오성 悟性 50 증가) 이러한 유형의 선택지에서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저 세 가지 옵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플레이어가 다른 길 - 부모님에게 실수를 인정하고 휴대폰을 넘기는 등 - 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무작위 선택의 몰입감은 전적으로 플레이어 선택에 대한 제한에 기반하며, 플레이어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척하는 옵션으로 물러선다고 할 때, 플레이어가 ‘자주적으로’ 선택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수면 역시 플레이어의 현실 경험을 쌓는데 있어 중요한 부분이 된다. 왜냐하면 이는 나(플레이어) 스스로 선택하고 “공감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게임 속에서 촉발되는 무작위위 이벤트들도 있다. 이벤트가 발생하면 플레이어에게 그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 선택하라는 메시지가 나타나고, 선택을 하고나면 게임 화면상에 나와 같은 선택을 한 플레이어가 몇 명인지 알려준다. ● 엄마와 할머니는 기저귀를 사용할지,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할지를 두고 말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 어린아이는 무료 입장! 하지만 당신의 키가 기준선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엄마는 당신에게 무릎을 조금 굽혀서 기준선을 넘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결국 들키고 말았네요.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 수업시간에 몰래 떠들었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벌점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선생님에게, 애가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시라고 말씀하시네요. 이와 같은 설계는 플레이어의 몰입감을 확고하게 포착한다. 플레이어가 ‘예’를 선택하든 ‘아니오’를 선택하든, 같은 선택을 한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비슷한 경험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아직 겪지 못한” 경험은 플레이어를 특정 집단에 속할 수 있도록 묶어주고, 여러 플레이어들이 “공감한다”고 외치게 하는 ‘현실’의 요소가 된다. 여기서 『중국 학부모』가 ‘리얼리즘’의 에토스를 구축하려는 전략이 드러난다: 즉, 플레이어의 선택지를 제한함으로써, 플레이어는 특정 선택지 그룹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의 선택이 ‘무작위위 선택’에서 플레이어의 ‘생각’인 것으로 바뀌도록 설정돼 있으며, 이러한 무작위 선택에서 플레이어의 경험(또는 미경험)은 일반적인 경험(또는 미경험)으로 변한다. 이러한 설정 하에서 『중국 학부모』는 거대한 ‘경험의 집합체’로서 스스로의 고유한 역할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중국 학부모』가 제공하는 경험은 결국 과잉 경험이다. 저우즈창(周志强) 교수는 벤야민의 「경험과 빈곤」(1933) 3) 을 해설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소위 ‘경험과 빈곤’이 반드시 사람들의 경험 생산 부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바로 ‘경험과잉’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문화생산 시스템이 끊임없이 현실적 상태를 감추는 경험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경험과 빈곤을 구성하게 된다. (…) 감정과 경험이 풍부할수록 실제 경험은 더 적어진다.” - 저우즈창, 「유사 경험 시대의 문학정치비평 - 벤야민과 우화론 비평」(伪经验时代的文学政治批评——本雅明与寓言论批评), 『난징사회과학』, 2012년 제12기. 과잉 경험은 거짓 경험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감정이 충만하며, 생생한 경험을 가리킨다. 하지만 풍부하고 충만한 것처럼 보이는 과잉 경험이 많을수록, 실제적인 경험은 적어진다. 『중국 학부모』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경험은 모두 이와 같은 과잉 경험이다. 그것들은 진실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분노의 정서와 자조적인 구원으로 가득 차 있지만, 실제 상황을 반영하지는 못한다. 수십 가지의 무작위 이벤트와 옵션들이 구성한 과잉 경험의 집합체에서 플레이어의 지나간 경험과 일치하는 것이 몇 가지만 있으면 그것들은 죄다 “공감”과 같은 것으로 식별될 것이다. 별자리 안내서의 어떤 별자리에 대한 서술처럼 한두 가지 자신과 맞아떨어지는 내용만 있으면, 독자는 “정말 진짜같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 학부모』의 ‘리얼리즘’은 차라리 “현장주의”라고 하는 편이 낫다. 저우즈창 교수는 “오늘날 리얼리즘은 서민적인 행위나 사실적 표현이라는 담론에 포위되어, 서서히 현장주의로 대체되고 있다” 4) 고 말한 바 있다. 즉, 점차 더 많은 ‘리얼리즘’ 작품들이 ‘현실감’을 ‘현장감’으로, ‘공감’을 ‘실제 상황’으로, 과잉 경험을 실제 경험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잉 경험은 현장감이 충만하고 감정도 풍부하지만, 반드시 진실된 경험이라 할 수는 없다. 이처럼 『중국 학부모』는 한 명 한 명의 플레이어가 직접 경험한 ‘통점’을 통해 과잉되고도 풍부하며 충만한 고통의 경험을 플레이어의 유일한 경험으로 설정한다. 벤야민은 「경험과 빈곤」에서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사람들의 경험 평가 절하가 진지전에 의해 까발려진 전략 경험, 인플레이션에 의해 까발려진 경제 경험, 기근을 통해 폭로된 신체 경험, 권력자들에 의해 까발려진 윤리적 경험 등 그들이 직접적으로 겪은 전쟁과 그 영향에 의해 폭로됐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전의 직접적인 경험으로는 전쟁의 이러한 문제를 설명할 수 없었을 때 그러한 경험 부족을 은폐하기 위해 균열을 메우는 일련의 심령주의(오컬트)가 부활했다는 것이다. 즉, 직접적인 경험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 할 때마다 사람들은 명확한 비난의 대상을 찾는 경향이 있다. 심령주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고대 중국 책력 상의 불길한 징조라던지, 관상이 좋지 않았다던지, 흉년(流年不顺) 등 비난 대상이 그것이다. 즉, 경험의 과잉을 통해 경험의 결핍을 덮는 것이다. 『중국 학부모』라는 이 게임에서도 ‘중국 학부모’는 플레이어들이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 『중국 학부모』가 드러내는 과잉 경험은 구조적 문제에 대해 ‘가정’이라는 매우 적나라한 답을 제공한다. 청년들이 대인관계, 일과 학업, 심지어 친밀한 관계에서 겪는 각종 문제들은 하나같이 가족 문제로 귀결된다. 여기서 ‘중국 학부모’는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는 “고정 지시어” 5) , 즉 대상 안에 머무르면서 대상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다른 이들과 구별해낸 잉여이다. 원래 지적될 수 있는 것으로서 ‘중국 학부모’는 좋은 외모에, 독선적이며,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등의 “유효한” 특징들을 암시했다. 하지만 ‘가정 원죄’라는 맥락에서 순서가 뒤바뀌었는데, 이는 일련의 특징들이 ‘중국 학부모’를 만들어낸 게 아니라, 그 학부모가 이와 같은 특징들을 갖게 된 것이 바로 ‘중국 학부모’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점을 가리킨다. 고정 지시어로서의 “중국 학부모”와 반유대주의 논리 속의 유태인은 궤를 같이 한다. ——즉, 당신이 까다롭고, 이익만 생각하기 때문에 유태인인 게 아니라, 당신이 유태인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당신은 까다롭고 돈만 밝힌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독일 사회 전체의 문제는 유태인의 존재로 축소되어버렸듯, 각종 사회문제들은 게임 속에서 ‘중국 학부모’ 자신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과 같다. “부모를 용서하라” : 주정주의 7) 적 해결 방안 『중국 학부모』 게임을 시작할 때 한 문장의 인용구가 나타난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그들의 부모를 사랑하고, 나이가 들면 부모를 심판하며, 때로는 부모를 용서한다.” 8) - 오스카 와일드 이 문구는 게임 전체의 기본 아이디어로서 ‘부모를 용서하라’로 설정했다. 플레이어가 1라운드를 끝내고 다음 세대 아이를 키우기 시작할 때, 게임의 2라운드에도 흥미로운 대화가 등장한다. 아빠(이전 세대의 플레이어가 키운 자식) : 생각치도 못했지만 나도 아이를 가질 나이가 됐으니, 교육을 잘 시켜야 할텐데, 우리 부모님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해!!! 엄마(이전 세대의 플레이어가 택한 동반자) : 당신과 함께 시부모님댁에 갈 때마다 당신이 아버님이랑 똑같단 생각이 들어! 생각하긴 뭘 생각해! 얼른 기저귀나 갈아! 대화를 나눈 후 플레이어들은 새로운 게임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 게임은 이전의 메커니즘, 시스템, 무작위 이벤트, 무작위 선택 등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체면 대결’, ‘홍바오 쟁탈전’, ‘재능 대결’, ‘작문 백일장’ 등 이벤트들이 마찬가지로 적지 않게 일어나고, 플레이어들은 부모의 희망 수치와 스트레스 수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춤으로써, 아이가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가출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게임은 바로 이처럼 “당신을 당신의 부모로 바꾸는” 반복적 메커니즘을 통해, 플레이 방법의 측면에서 플레이어가 “부모를 용서”하도록 하는 것에 있다. 비록 당신이 부모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더라도, 게임의 모든 메커니즘은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다. 즉, 아이들에게 기술을 학습하도록 해야 하고, 아이들의 스케줄을 정리해야 하고, 아이들이 높은 성적을 받도록 해야 하며, 좋은 일자리를 얻도록 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아이는 메커니즘 속에서 새로운 ‘중국 학부모’가 된다. 그렇게 새로운 부모가 된 플레이어는 “내가 원치 않던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바로 부모님의 고심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게임 엔딩을 맞으면 아이의 소감 한 구절이 나타난다. “대입 시험 전과 후의 일상이 꽤 다른 것 같단 생각을 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저 자신은 더는 아이가 아닌 것 같아요. 적어도 부모님 눈에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닌 거죠. 부모님과 늘 함께 했던 날들이 그리워요. 그게 어떠했든 꽤나 아름다운 시기였어요.” 『중국 학부모』는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한 게임 내용을 갖고 있음에도 온정적인 핵심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말들은 부모 탓은커녕 그리움과 용서가 담겨 있다. “나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네요.” —— 즉, 어린 시절에는 비록 항상 혼나고 이해받지 못했지만, 커서 보니 그 시절이 얼마나 좋았는지 알게 됐고, 부모님 눈에는 어린아이로 남고 싶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게임 속에서 세대 간의 각종 갈등은 단지 노련한 농담에 불과하며, 감정의 대화합이 주제인 셈이다. 2015년에 인기리에 방송된 『환락송(欢乐颂)』에는 남존여비의 가정에서 자란 판셩메이(樊胜美)가 등장하는데, 한때 시청자들 사이에서 화제 중심에 있었다. 그 이후로 부모와 자녀 간 관계에 초점을 맞춘 여러 화제작들이 점점 더 많이 등장했다. 『도정호 : 가족의 재발견(都挺好)』, 『아빠와 함께 유학을(带着爸爸去留学)』, 『소환희(小欢喜)』 등이 그것이다. 이 드라마들은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하나같이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중국 학부모’들이 등장한다. 이 드라마들의 내러티브에서 모든 문제는 가족 갈등에서 비롯되며, 문제해결 방식은 단 하나, 바로 부모와 자녀가 서로 이해하는 것에 있다. 따뜻한 결말로 과정상의 갈등을 희석시키는 것은 가정을 소재로 한 작품들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드라마 『도정호 : 가족의 재발견』 전체 서사의 전환점은 마지막에 쑤다창(苏大强)이 유언을 남기는 부분에 있다. 쑤밍위(苏明玉)의 회사에서의 위기, 쑤밍청의 결혼 파탄, 쑤밍저의 사업 문제는 모두 쑤다창이 오열하며 “너희 세 형제자매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행동하고, 도울 수 있는 한 서로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해결된다. 이때부터 온 가족의 관계가 빠르게 바뀌기 시작하는데, 쑤밍위는 아버지가 사리를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했던 이유가 바로 알츠하이머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에 따라서 이 드라마의 전반부 갈등과 문제의 전말이 분명해진다. 한바탕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는 신파극이 일가족의 진실된 곤경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이다. “부모를 용서하라”는 주정주의적 결말은 가족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를 대체하는 해결이기도 하다. 과잉 경험 속에서 부모가 유일한 원망의 대상으로 세팅되어 있다면, “부모를 용서하라”의 결말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 되는 셈이다. 게임 전체의 설정은 플레이어가 부득불 ‘전철을 반복’하는 것에 있으며, 게임의 원망하는 내용과 감동적 결말은 플레이어가 부모를 용서하는 ‘전철을 반복’하도록 한다. 이는 일종의 스스로 문제를 옮긴 뒤 스스로를 설득하는 자화자찬의 대체 해결이라 할 수 있다. 『중국 학부모』의 반복적인 메커니즘에서 우리는 구조적 문제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 부모가 낳은 문제가 아니라, 게임 메커니즘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용서하는 결론의 온정 강박 하에서 우리는 다시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 “네가 부모가 되어도 이렇게 할 거야” 같은 부모의 고뇌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리얼리즘 신화 『중국 학부모』에서 과잉 경험은 그것의 ‘리얼리즘’을 구축하는 기본요소다. 한데 흥미로운 점은 게임 전체의 리얼리즘이 하나의 ‘신화’를 기반으로 하며, 이것이 게임의 세대 간 속성의 계승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중국 학부모』는 다른 모의 양성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키우는 대상의 속성을 평가하는 수치 시스템을 갖고 있다. 게임 속에서 아이의 속성은 IQ, EQ, 체력, 기억력, 상상력, 매력 등 다섯 가지로 나뉜다. 속성별 수치는 아이의 과목별 성적과 장래 직업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게임의 기본적인 플레이 방법은 바로 부모의 ‘스케줄링’과 아이의 ‘브레인스토밍’을 기반으로 속성의 수치를 향상시키는 것에 있다. 전자는 부모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가 아이의 일정을 배치하여 아이의 특정 기능들을 배양하는 것이고, 후자는 아이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가 미니게임을 통해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세대 간 속성 계승은 바로 플레이어 세대가 키운 아이가 다음 라운드 게임에서 키울 아이의 부모가 되면서, 이전 세대의 우세적인 속성이 아이의 몸에 물려지는 것을 가리킨다. 만약 플레이어가 키운 아이가 결국 프로그래머가 되면 다음 세대 아이는 IQ에 15점이 추가되고, EQ는 3점, 상상력 3점, 기억력 5점, 신체 3점이 추가된다. 만약 아이가 운동선수가 된다면, 신체에 더 많은 능력치가 추가되고, 다른 속성들엔 더 적게 부여된다. 세대 간 속성 계승을 통해 다음 세대 아이는 반드시 이전 세대보다 우수해지는데, 이는 즉 플레이어들이 세대를 거듭해 꾸준히 키워나가기만 한다면, 당신의 아이는 항상 칭화대와 베이징대 같은 명문대에 합격해 인생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게 됨을 뜻한다. 이처럼 “다음 세대가 전 세대보다 강하다”는 설정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기본 동력이 된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의 게임 목표는 모두 “우리 가문의 몇 대손이 베이징대학에 합격하는지 보는 것”에 있다. 속성 수치로 플레이어의 게임 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의 기초 설정이다. 게임이 플레이할 가치를 갖기 위해선 플레이어가 게임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을 갖고, 플레이어들의 투입 시간이 누적되고 플레이 전략의 최적화됨으로써 끊임없이 수치가 증가할 수 있는 설계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게임 속 아이의 인생은 단순하고도 곤란해진다. 단순함이란 시간을 들여서 수치를 쌓고 최적화 전략을 짜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있고, 곤란함이란 아무리 훌륭한 방안을 사용하더라도 자연적인 속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과잉 경험으로 가득 찬 이 ‘리얼리즘’ 게임은 구조적 문제를 감추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문제를 돌출시킨다. 즉, 가장 비현실적이고 게임화된 수치 시스템을 빌리지 않는 한, 게임의 리얼리즘적 기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리얼리즘’과 가장 무관한 부분인 세대 간 속성의 계승은 하나의 예정된 신화인데, 이 게임의 모든 ‘리얼리즘’이 이러한 계층 상승의 신화를 기반으로 구축되어 있다. 한마디로, 만약 이와 같은 신화 예고를 제거해버리면 그것이 중국 학부모든 미국 학부모든, 아이를 성공시킬 수 없다. 이 게임의 근본 모순이 여지없이 드러난 셈이다. 한 측면에서 아이는 그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의 속성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아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이 모순을 잠재우기 위한 계층 상승 신화는 곧 무결점 피부를 보여주면서도 그 속의 끔찍한 흉터를 암시하는 마스킹액과 같다. 여기서 세대 간 속성 계승에 따른 계층 상승은 그 자체의 비현실이 작품의 리얼리즘적 토대를 이룬다는 점에서 하나의 ‘리얼리즘 신화’가 되었다. 합리적이고 진실되며 현장감 넘치는 디테일을 모두 제거하고나면, 상징계에 의해 수용될 수 없는 하드코어만 남게 되는데, 지젝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실재계의 손상”이다. 벤야민의 맥락에서 이 하드코어는 바로 아름다운 경험의 실체를 까발리는 인플레이션, 기근, 권력자이다. 그것은 바로 신화를 들춰내는 리얼리즘의 역설이며, 이는 우리에게 “계층 상승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제출한다. 『중국 학부모』는 이 문제에 대해 말없이 침묵하며, 자신이 지닌 리얼리즘의 거짓을 폭로한다. 계층 상승의 신화 속에서 당신은 다섯 시간에 걸쳐 세 아이를 키우고 갑부나 대문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계층이 고착화된 구조적 문제 앞에서는 자녀의 학교생활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평생 열심히 일해도 자녀가 매일 수업을 빼먹고 인터넷PC방에 다니다가 결국 대입 시험에 실패해 “아빠는 맨날 일만 하느라 바빠서 내 공부엔 관심도 없었는데, 우리 집안은 내게 뭘 가져다 줬나"같은 글을 올릴 수 있다. 경제학자 마일스 코라크(Miles Corak)는 ‘위대한 개츠비 곡선(Great Gatsby Curve)’을 제시하면서 미국의 계층분화가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이 곡선은 언론이 ‘아메리칸 드림’의 거짓을 지적할 때 볼 수 있다. 하지만 2003년 이래 우리나라의 지니계수도 0.46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핀디에(拼爹) 지수로 불리기도 하는 세대 간 소득탄력성 계수(intergenerational elasticity; IGE) 역시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세대 간 소득탄력성 지수는 세대 간 소득 변화를 보여주며, 한 세대의 경제적 소득이 다음 세대의 경제적 소득 또는 경제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나타낸다.) 바로 이 두 지수가 ‘위대한 개츠비 곡선’을 구성하는 X·Y축이다. 『중국 학부모』에서 과잉 경험은 문제를 가정 문제로 단순화하고, 용서하는 결말은 이성주의 대결을 주정주의적 포용으로 유화시킨다. 최종적으로 이 게임은 우리에게 가족 구성원들 간에 서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가르쳐준다. 물론, 가족의 윤리적 문제는 상호 이해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구조적 문제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부모님의 고된 노력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그 메커니즘의 강압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 계층 상승의 신화와 고착화된 현실 사이에서 『중국 학부모』는 현실적인 디테일들로 가득하지만, 거짓된 신화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중국 학부모』의 리얼리즘은 결국 하나의 코딩 시스템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과잉 경험으로 진실의 문제를 덮어버리고, 온정적인 결말을 통해 대체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며, 상상계와 상징계의 겹들은 실재계의 존재를 말소해버린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코딩에서 벗어난 하드코어는 언제나 실재계의 왜상으로 게임 속에 존재함으로써, 그 리얼리즘으로하여금 목구멍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계층 상승의 ‘리얼리즘 신화’이다. 신화의 불가능성은 그 현실의 거짓을 암시하고, 달콤한 꿈 뒤에는 감출 수 없는 고착화된 모순이 있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이 모순에 접근하려고 하면 주정주의적 가르침은 가족애를 내세워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혹은 우리를 대신해 문제를 전이시켜버린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공감의 향수나 ‘중국 학부모’에 대한 원망일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게임 전체의 논리 뒤에 감추어져 있는 진짜 문제이다. 우리가 되물어야 하는 것은 ‘중국 학부모’가 어떠하냐가 아니라, 왜 이러하냐에 있다. ‘중국 학부모’의 문제는 가정의 윤리 문제가 아니며, 자녀와 부모 간 갈등 완화로 해결할 수도 없다. 이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우리는 더 이상 ‘출신 가정’의 아픔에 매달리지 않고 사회 전체에서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구어 ‘接地气’는 정치인이나 인기 연예인 등이 유명인답지 않게 소탈하게 생활하는 모습을 가리킨다. 대중의 일상과 접촉하며 어울리고, 대중의 요구를 경청하고, 대중의 습관과 문구 등을 사용하는 것 등을 지칭한다. 중국 바깥의 기준으로 보면 일종의 포퓰리즘 현상을 대중의 언어생활에서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홍바오는 중국 춘절 연휴에 주고받는 돈주머니로, 한국으로 따지면 세뱃돈과 유사하다. 대다수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위챗’ 등 소셜미디어앱에는 ‘홍바오’ 기능이 있는데, 이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룹채팅방 안에서 나눠줄 수 있다. 카카오톡에도 이와 유사한 기능이 있다. 3) 국내에서는 2008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최성만 옮김, 길)에 수록되어 출간됐다. 4) 저우즈창, 「현실-사건-우화: 리얼리즘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现实·事件·寓言:重新思考现实主义)」, 『남국학술(南国学术)』, 2020년 제1기. 5) 현실 세계와 대비되는 가능성의 세계(possible universe; 논리학·철학에서 가능성·필연성·우연성 등의 양상 명제를 논리적으로 다루기 위한 이론적 장치)에서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언어 표현을 ‘고정 지시어(rigid designator)’라고 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사울 크립키(Saul A. Kripke)의 반기술주의가 우리가 본질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고 어떤 특정한 영역의 결정적 역할을 공식화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를 제공해준다고 본다. 크립키의 ‘고정 지시어’ 개념은 라캉의 ‘지배기표(master signifier)’ 개념과 일치한다. 지배기표는 대상의 실증적 속성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언표작용적 행위를 통해 화자와 청자 간 새로운 상호주관적 관계를 확립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중국 학부모”라고 하면 우리는 대상이 가진 실증적 속성들에 포함되는 게 아니라 발화 수행으로 상징적 위임을 그 대상에 부여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상징적 현실과 관계가 창출되며, 그 관계에서 특정한 책무를 떠맡는다. 6)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새물결, 2013. 원서: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7) 원문의 ‘情感主义’는 주정주의(emotionalism)의 중국식 표현으로, 이성이나 지성보다 감정이 우월하다고 여기거나, 감정이 가장 근원적인 것이라고 하는 사상을 가리킨다. 8) 이 유명한 문구는 오스카 와일드가 1890년에 집필한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의 등장인물 헨리 워튼경이 한 말이다. 9) ‘比拼老爹’의 준말로, 스스로 경쟁(比拼)하지 않고, 부모(老爹)의 능력에 의존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저우스위, 周思妤 난카이대학 문학대학원 석사과정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Collaborate, Compete, and Broadcast: Gaming’s 21st Century Cultural Shifts from MMOs to Live Streaming and Online Platforms

    If you’re a video game enthusiast born after the year 2000, chances are good that you grew up with relatively easy access to video game media. Though gaming still maintains some of its countercultural reputation, it has simultaneously become a facet of mainstream culture, and the sheer volume of player-produced video game content has done a lot of legwork to keep our favorite games alive in our eyes and ears long after we’ve signed off for the night. For even some of the most obscure games, it feels like there is a limitless amount of game content available for players to consume without even needing to play. Video gaming’s cultural spaces now weave in and out of games, online communities, and numerous digital platforms like Steam and Discord.  < Back Collaborate, Compete, and Broadcast: Gaming’s 21st Century Cultural Shifts from MMOs to Live Streaming and Online Platforms 23 GG Vol. 25. 4. 10. ***You can see the Korean version of this article at below URL: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caffe7a3-6d3f-40e0-9c16-99fb33d9ee75 The Same as it Never Was If you’re a video game enthusiast born after the year 2000, chances are good that you grew up with relatively easy access to video game media. Though gaming still maintains some of its countercultural reputation, it has simultaneously become a facet of mainstream culture, and the sheer volume of player-produced video game content has done a lot of legwork to keep our favorite games alive in our eyes and ears long after we’ve signed off for the night. For even some of the most obscure games, it feels like there is a limitless amount of game content available for players to consume without even needing to play. Video gaming’s cultural spaces now weave in and out of games, online communities, and numerous digital platforms like Steam and Discord. At the turn of the millennium the situation was very different. As a young Canadian gamer in 1999, I have fond memories of waiting every week for two 30-minute television shows - Video and Arcade Top Ten and The Electric Playground - which were the only consistently available televised media about games in my area. * Canadian video game television show Video and Arcade Top Ten - Credit to videoandarcade YouTube channel. [1] To get our fix of game-related content outside of these programs we’d largely turn to monthly gaming magazines which came in three main varieties: proprietary magazines like Nintendo Power which essentially functioned as long-form commercials for recently released or upcoming products, review magazines like GamePro , or magazines directed at hobbyists looking for the latest hardware or industry details, like Next Generation . So how did we get from a handful of publications and two blink-and-you’ll-miss-them television shows a week that largely served to sell the newest games to players, to a vast repository of video game media that serves as a platform for numerous ongoing debates about various issues across gaming culture? The consumption environment of video games and their cultural spaces didn’t evolve on their own. Games are one facet of what Henry Jenkins dubbed “Convergence Culture” – effectively a whirlpool that unstoppably pulls disparate segments of culture together in new ways as our media technologies develop. [2] Video games are part of a complex media environment that involves film, television, magazines, and most critically, the emergent and novel forms of media content and game design affordances that the internet made possible. The first quarter of the 21st century saw an immense shift in how we experience games together, and the development of video game culture is a byproduct of the convergence era made possible by ‘web 2.0,’ and the democratization of the internet. Players became central figures as culture producers, and took on a more active role in publicly shaping culture through increased connectivity both in and out of game worlds. Consider that the current market leaders for game-related media consumption - Twitch and YouTube - didn’t even exist until 2006; two years after World of Warcraft launched and popularized an already flourishing subculture of online gaming across the globe. It may seem unthinkable now that millions of players could congregate together without myriad videos explaining all the new class changes, metagame concerns, and boss strategies, but at the time players were experimenting with new ways of interacting with each other online, and improvised new ways to communicate complex ideas about how to successfully overcome challenges together, all while learning new social contracts and ways of interacting with fellow players. Players were participating in the construction of a new online society; one where play served as the connective thread that linked disparate people together. At the same time, esports was a novelty with some aspiring gamers and organizers in the West turning to Korea’s impressive StarCraft [3] scene both for inspiration, and to validate burgeoning aspirations that one day the hobby or passion project of gaming could become a profession at the level of play, and not just at the level of game production. These forces collided with legacy media and emergent internet-driven media production – alongside the continuing trend originally propelled by reality television in the late 1990s of ordinary people becoming increasingly worthy of celebrity status in the public eye – to propel us towards a new gaming cultural landscape. MMOs and the New Normal of Connectivity and Sociality Though multiplayer gaming wasn’t a new phenomenon at the turn-of-the-millenium, the MMO boom of the early 2000s was foundational for bringing players together. In the same way that arcades were the central gaming spaces of the 1970s and early 1980s, [4] and home consoles and their respective brand wars were the focus of the 1990s, the 2000s became the era of the MMO. Earlier online multiplayer games like MUDs (Multi-user Dungeons) connected players together through largely text-based RPG systems, and though these proto-MMOs connected hundreds of players, they were still a relatively niche gaming subculture. While games like EverQuest [5] and Ultima Online [6] achieved some popularity in the late 1990s, World of Warcraft [7] brought a new level of popular appeal through its graphical style and smooth, approachable gameplay. Though World of Warcraft built a strong following on its own, the South Park episode “Make Love Not Warcraft” in 2006 put a formerly niche genre into the public sphere in previously unprecedented ways. Not only was this an unparalleled promotional moment for a game of this kind, but it signalled a new kind of cultural presence for the MMO genre that countless companies would strive to achieve through their own massively multiplayer games. * A congregation of players in World of Warcraft await a boat to travel to new lands - Author’s Screenshot. The most important takeaway from WoW ’s success and all the competing MMOs that followed would naturally be that MMOs were the next big thing – but MMOs afforded easier access to large-scale playful connection in a way that only a handful of MUD enthusiasts were able to access before. MMOs put both competitive and collaborative multiplayer opportunities in front of players, and most importantly they served as some of the first points of avatar-based online connectivity in play spaces for an entire generation of players. This kind of playful connectivity was a floodgate that could not be closed, and the DNA of MMO connection worked its way into countless genres as social media and mobile gaming leveraged the appeal of play for their own platforms. We could now join our friends, make new friends, and compare and share ourselves with others. More than ever before, it started to matter what and how our friends were playing, even on social media games like Farmville [8] , or as we chased achievements in our single-player console games. Video Game Broadcasting and Live Streaming as the Next MMO At the same time, in the mid 2000s, most websites were continuing to release short editorials focused on industry issues or technological developments , alongside a steady stream of video game reviews. Nearing the end of the first decade of the 2000s, there was a visible pivot – particularly visible in the creation and development of the website Giant Bomb, following Jeff Gerstman’s departure from Gamespot, which was a more conventional games journalism outlet. Giant Bomb’s content was more focused on discussions between members of the website team as informed players and experienced games journalists, without much of the pretense or artifice of traditional reviews or articles. The visible authenticity of the individuals who were broadcasting together, and the unplanned moments that would arise within segments, became as central to the overall experience of video game media consumption as the game content itself. In each of these cases, community is central to the audience experience. Twitch and similar live streaming sites aren’t the same without an active chat, and YouTube ‘Let’s Plays’ and Giant Bomb videos are a site for comment, discussion, and community. People identify with the personalities on screen and those who make themselves seen as members of these communities. This is often more important than the game that is being played or discussed – but that there is a game at all is an integral glue to that early 2000s connectivity: a society under construction linked together by play. While the MMO boom peaked in North America between 2008 and 2010, players of all kinds still clamored for the kind of communities that MMOs fostered, but now external sites had developed the infrastructure to support a play-based sociality outside of the confines of a fantastically rendered digital world. Celia Pearce wrote about the closure of the game Myst Online: Uru Live [9] and its players as a video game diaspora – as players maintained a strong sense of communal identification among one another even after they migrated to other games like Second Life and There.com . [10] Similarly, Mia Consalvo and Jason Begy found that players of the now defunct game Faunasphere stayed in touch and felt connected to each other as ‘ Faunasphere players,’ finding new games to play together or ways to stay in touch. They noted that players “actively work to form groups and relocate their play activities elsewhere, often investing great energy in the search for a new virtual ‘home.’” [11] This “new virtual home” isn’t necessarily a game even if the content might be play-related. Watching someone else play could be as satisfying as - sometimes more satisfying - than playing a game yourself, especially when this act of spectatorship is undertaken communally with friends and acquaintances from one’s own social network of prior gaming relationships. [12] Not only are viewers invested in the broadcaster’s success in the game they’re playing, but in their meta-success as a streamer trying to establish a career. Instead of trying to help our guildmates by providing them supplies or doing our part in a challenging boss fight, we’re now invested in the success of our favorite streamers. MMOs pulled players into shared social spaces through games, and once a similar playful connectivity was established outside the boundaries of virtual worlds, players and game fans alike were able to chase that connection and sociality without being tethered to a particular game and its digital geography. The growth of live streaming also affected what kinds of games would become popular. The idea of a “streamable” game is just as important as a playable game, and games that are just as fun to watch as they are to play became a key segment of the market. Games like League of Legends , [13] PUBG [14] , and Among Us [15] have tension built into every moment of gameplay through competition, and that tension is what makes experiencing these games vicariously as part of a collective audience their own pivotal gaming experiences. The success of Elden Ring , [16] for example, isn’t something we can attribute solely to the quality of the game, as streamers produce a bounty of viral moments of struggle through each challenging encounter attempted in front of thousands of viewers each, while the audience bonds as we share in our favorite streamer’s failures and (hopefully) eventual success. In a moment of peak convergence, esports and live streaming were perfect partners as Twitch served as a new centralized platform for putting competitive gaming in front of interested players. In my prior work, I note that this connection helped both sectors grow: "Esports grew from having “about 10 tournaments in 2000 to 696 in 2012,” [17] to have an estimated 523 million viewers across the globe. [18] While gaming has had a competitive element for decades, it reached new levels of saturation. Live streaming itself grew substantially during this time, as individual personalities began to broadcast their own gameplay for others, forming participatory audience-communities [19] and parasocial relationships. [20] [21] " The Platform Era and Uncertain Futures Taking a page out of the tech sector playbook, companies with a foothold in online gaming began to operate as ecosystems, such as Valve developing Steam into an all-encompassing market for games and cosmetic goods crossed with a social platform. In my work on toxic game culture, I outline the cultural impact and shape of gaming’s platform era: "Early voice communication software that players used like Ventrilo and Teamspeak were barebones VoiP programs, a far cry from the user-friendly multi-server social media-like hub that Discord has become since its release in 2015. There were fewer channels for players to connect to one-another across games, fewer broadcasters of gaming content circulating ideas about what the culture should look like, and there were also fewer online games overall for players to move between. Now, following in the footsteps of larger media companies like Disney and HBO, video game companies like Valve and Blizzard have become less interested in keeping players within individual games, instead opting to invest players in various games that are housed in their proprietary platforms (Steam for Valve, Battle.net for Blizzard). [22] [23] " Players are now living through the effects of platformization, which are still developing and ongoing. What is clear at this point is that over twenty-five years, players have been pulled much closer together across game, platform, and genre. We have been conditioned to socialize online, but we have done so through a combination of internet culture and a social environment whose very language has developed out of the online gaming lexicon. There has never before been more access to vast libraries of games, and an even greater number of players with whom to share our gaming passions. In many ways the linked networks that run through Twitch, Steam, and Discord, alongside all our favorite games, have connected us in a second-level persistent virtual world. This world is one made up of live streams, YouTube videos, esport team fandoms, and other subcommunities, each with different stakes in what gaming means, and who the cultural space should belong to. Is our current gaming landscape of unprecedented online proximity set to pull us even closer together in even more realistic and immersive environments through VR, or are we primed in what many are calling gaming’s “culture wars,” to be driven apart? As of now there is no clear answer. The only thing that can definitively be said, is that the future of gaming culture is as unpredictable as its past. [1] Videoandarcade YouTube Channel. https://www.youtube.com/watch?v=OWFm2qU0k5o&ab_channel=videoandarcadetop10 (accessed March 26th, 2025). [2] Jenkins, Henry. Convergence Culture: Where Old and New Media Collide. New York: NYU Press, 2006. [3] Jin, Dal Yong. “Historiography of Korean Esports: Perspectives of Spectatorship.” International Journal of Communication 14 (2020): 3727-3745. [4] Kocurek, Carly A. Coin-Operated Americans: Rebooting Boyhood at the Video Game Arcad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5. [5] Sony, 1999. [6] EA, 1997. [7] Blizzard Entertainment, 2004. [8] Zynga, 2009. [9] Ubisoft, 2003. [10] Pearce, Celia. Communities of Play. Cambridge: The MIT Press, 2009, 7. [11] Consalvo, Mia, and Begy, Jason. Players and their Pets: Gaming Communities from Beta to Sunset.”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5, 91-92. [12] Consalvo, Mia, Marc Lajeunesse, and Andrei Zanescu. Streaming by the Rest of Us: Microstreaming on Twitch. Cambridge: MIT Press, 2025. [13] Riot Games, 2009. [14] Krafton, 2017. [15] Innersloth, 2021. [16] FromSoftware Inc., 2022. [17] Hiltscher, Julia. “A Short History of eSports.” eSports Yearbook 2013/2014 (2014): 9-15. [18] “Esports Ecosystem in 2023: Key Industry Companies, Viewership Growth Trends, and Market Revenue Stats.” Insider Intelligence article. January 1st, 2023. [19] Hamilton, William A., Garretson, Oliver, and Kerne, Andruid. “Streaming on Twitch: Fostering Participatory Communities of Play within Live Mixed Media.” CHI ‘14: Proceedings of the SIGCHI Conference on Human Factors in Computing Systems. April 14th, 2014, 1315-1324. [20] Sherrick, Brett, et al. “How Parasocial Phenomena Contribute to Sense of Community on Twitch.” Journal of Broadcasting and Electronic Media 67, no 1 (2023): 47-67. [21] Lajeunesse, Marc. “Transgressive Positivity in Four Online Multiplayer Games.” PhD Dissertation, Concordia University, 2023. [22] Zanescu, Andrei, Lajeunesse, Marc, and French, Martin. “Gaming DOTA Players: Iterative Platform Design and Capture.” Proceedings of DiGRA 2019. Kyoto, Japan, August 6-10, 2019, 1-3. [23] Lajeunesse, Marc. “Transgressive…”, 2023. Tags: NorthAmerica, MMORPG, Online Game, live streaming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Marc Lajeunesse Marc is a PhD candidate in Concordia University's department of communication studies in Montreal, Canada. Marc’s research focuses on toxicity in online games. He is driven to understand toxic phenomena in order to help create more positive conditions within games with the ultimate hope that we can produce more equitable and joyful play experiences for more people. He has published on the Steam marketplace and DOTA 2, and is a co-author of the upcoming Microstreaming on Twitch (under contract with MIT Press).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정필권

    농부이자 제빵사이자 바리스타. 현재는 게임 기자로 글을 쓴 지 8년차 입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필권 정필권 농부이자 제빵사이자 바리스타. 현재는 게임 기자로 글을 쓴 지 8년차 입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Read More 버튼 읽기 <다키스트 던전>을 <다키스트 던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개발진이 어째서 전작과 후속작의 틀을 바꾸고자 했는지. 어떤 요소들이 이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아야만 결정이 왜 내려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무엇이 다키스트 던전을 각별하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버튼 읽기 매너리즘을 넘어서는 전통의 긍지: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원더 잘 짜인 레벨 디자인. 플랫포밍의 역사라 부를 수 있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시리즈는 1985년 첫 작품이 등장한 이후에도 현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이 시리즈는 40년 정도의 시간을 거치며 시리즈는 수많은 변화를 거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인 플레이 양상은 변화하지 않았다. 달리고. 뛰고. 밟으면서 코스를 돌파한다는 핵심적인 요소다. 버튼 읽기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단절을 넘어서-퀘이크 리마스터 최근 다수의 리마스터 타이틀이 얼굴을 비추고 있다. 과거 발매되었던 게임의 비주얼이나 시스템을 조정해 다시금 선보이는 리마스터 / 리메이크들이 예다. ROM 혹은 디스크 등의 형태를 넘어서 디지털로 복각되고 라이브 서비스를 진행하는 MMORPG 또한 ‘클래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과거의 빌드를 그대로 서비스하는 사례도 여럿이다. 버튼 읽기 텍사스 한복판에서 사회주의 게임의 깃발을 꽂다 - Tonight we Riot ‘투나잇 위 라이엇’은 너무도 투박하게. 그리고 솔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단순하게 바라보자면 그저 이룰 수 없는 폭력과 메시지만을 담은 게임이 될 것이란 것은 분명한 단점이다. 하지만 적어도 몇 부분에서는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려 노력하는 계기로는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현실의 한계와 폐해를 담아낸 게임이 있듯이, 한편으로는 해방이라는 소재로 사회주의의 한계와 현실적 고민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게임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버튼 읽기 하이파이러시: 같은 뿌리의 리듬과 액션 사이에서 리듬은 사전적 정의에서 ‘일정한 박자나 규칙에 따라 장단과 강약이 반복될 때의 규칙적인 음의 흐름’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에 있다. 박자에 따라서 음이 일정하게 반복될 때. 음의 덩어리를 리듬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게임에서 리듬 게임이라 부르는 장르 자체는 연주하는 행위. 혹은 건반을 정확한 타이밍에 수행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리듬 그 자체보다는 음악 연주를 모사하는 것에서 시작하므로 날아오는 노트를 처리하는 형태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 「스플릿 픽션」에 대해 쓰지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합시다.

    작년 겨울 즈음이다. 영화평론가 유운성 선생님께 ‘청탁이 점차 줄고 있다.’며 한탄한 적이 있다. 유운성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글 청탁이란 누구나 그 양이 줄어간다.’라고 답해주셨다. 마치 시간에 의해 소멸되는 무언가처럼, 평론가에게 있어서 글을 쓸 기회라는 것은 한정 자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요즘이다. < Back 「스플릿 픽션」에 대해 쓰지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합시다. 26 GG Vol. 25. 10. 10. 내가 평론가로 등단한지도 벌써 8년차다. (이런 글에 걸맞는 매우 전형적인 클리셰다.) 2017년 만화 비평 공모로 등단해 지금은 게임에 관한 글도 함께 쓰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은 게임 비평을 더 많이 쓴다. 곧 있으면 평론가의 생활도 10년차에 도달할 예정인데 슬슬 이 직업이 어떤 존재인지 고민이 되던 차였다. 이럴 때에 ‘평론가’에 대한 글을 청탁받았다는 사실에는 뭔가 운명적인 것이 있다. 평소대로라면 청탁을 받는 순간부터 플레이 할 게임을 고르고, 스크린샷을 열심히 찍고, AI비서에게 연구 자료 조사를 돌려놓았을 일인데, 아무런 사전 조사도 연구도 없이 불쑥 내 이야기를 쓰려니 영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데에서 뭔가 근질근질 거리는 걸 보면 그래도 평론가처럼 살아오긴 한 모양이다. 평론가로 살아오기 작년 겨울 즈음이다. 영화평론가 유운성 선생님께 ‘청탁이 점차 줄고 있다.’며 한탄한 적이 있다. 유운성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글 청탁이란 누구나 그 양이 줄어간다.’라고 답해주셨다. 마치 시간에 의해 소멸되는 무언가처럼, 평론가에게 있어서 글을 쓸 기회라는 것은 한정 자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요즘이다. 한편 2023년에 좋은 상을 받을 기회가 생겼다. 시상식에 나가서 함께 수상한 분들과 대화해보니 절반 정도는 이미 등단을 거친 분들이었기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등단 이후에 청탁과 기고의 기회가 마땅치 않아서 집필을 그다지 하지 못하신 분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청탁이 줄고 있다’며 미래를 걱정하는 것도 조금 배부른 생각이지 않나. 여러면에서 따지자면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어찌되든 약 3년 정도 한 잡지로부터 꾸준히 청탁을 받았으며, 지금도 GG로부터 계속 글을 쓸 기회를 받고 있다. 평론가에게 글을 쓸 기회라는 건 상시적 자원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조건을 통해 발생하고 그때그때 예정된 이들에게 돌아가는 선택적 자원에 가깝다. 이 ‘여러가지 조건’에는 정말 여러가지 것들이 포함되기 때문에 전부 나열하기도 벅차다. 그것들을 어떻게 해석하든 평론가는 어느정도 ‘선택받는’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며, 그 조건은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평론가 개인의 관점에선 언제나 공평하게만도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내가 머리를 기르는 걸 탐탁치 않게 생각하시는데, 아버지께서 불만을 말씀하실 때 마다 ‘내 직업은 눈에 띄는 게 중요하다.’며 적당히 둘러댄다. 그런데 이게 또 아무말이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평론가는 어찌되든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야 하는 직업이지 않은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 대한 ‘주목’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으로 기회는 증가하지 않을까. 평론가의 세계는 주목경제의 세계인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청탁을 줄 리 없을 터이니’ 그 세계에 순응하면서도, 또다른 한편 ‘경제성의 효과’에 의탁해야 한다는 사실이 내가 가진 평론가의 자아와 충돌한다. 길을 걷다가 또는 대중 교통을 타고 이동하다가 문득 ‘어떤 사람이 계속 청탁받는 평론가인가’에 대해서 질문해보곤 하는데, 특별히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SNS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다양한 기회와 많이 접촉하는 쪽이 더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나에게 그런 능력이 없는 것도 알고 있고, 다른 한편 그게 전부는 아니겠거니 싶기도 하다. 올해에는 비평을 써본 적 없는 사람들과 함께 비평 쓰기 스터디를 진행했다. 스터디를 진행하는 멤버들의 자기 평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진행을 주도하는 입장에선 결과가 꽤 만족스럽다. 어떤 글이 비평인지 설명할 수 있겠다 싶은 확신은 작년 GG의 비평 공모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가질 수 있었다. 뭐가 되었든 8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비평 쓰기라는 행위에 꽤 익숙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비평 쓰기’에 대해서는 알아도 ‘비평을 쓰게되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일천하다. 대체 누가, 어떤 경위로, 특정한 매체에 글을 쓰게 되는 걸까. 지난 8년간, 나는 ‘ㅇㅇ에서 글을 봤습니다. 저희 매체에도 써주실 수 있을까요?’라는 청탁을 한 번 받아봤다. 이 직업을 얻기 전까진 평론가란 그렇게 글을 쓸 기회를 가진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미디어를 통해 보편적으로 유통되는 전형적인 판타지의 일종인가 싶기도 하다. 아니면 그저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지. 어찌되든 올해는 좋은 기회가 있어 대학 강의를 시작했다. 교강사 미팅을 나갔더니 나를 알아보고 인사해주시는 분이 계셨다. 맞인사를 하곤 너무 부끄러워서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는데, 혹시 이런 태도가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여전히 머릿 속을 맴돈다. 게임 평론가로 살아오기 앞서 유운성 선생님과의 대화 와중,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조언은 다음과 같았다. 청탁을 기다리기 보다, 개인적으로라도 글을 꾸준히 쓰고 책을 출판하세요. 저자가 된다면 강연의 기회가 생기니 그렇게 대중과 접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나는 선생님의 훌륭한 조언에 바로 찬물을 끼얹었다. 선생님, 그런데 게이머들은 게임 평론가를 좋아하질 않아서 강연의 기회는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은 ‘아 그렇구나’하는 표정을 지으셨다. 며칠 전에 나는 ‘만화 작가 토크 콘서트’의 사회를 맡았다. 게스트인 두 작가와 친분이 깊어서 생긴 좋은 기회다. 나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만화평론가이지만(심지어 대본 초안에는 내가 ‘평론가이자 스토리 작가’인 걸로 나와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비평 쓰기와는 다른 ‘평론가의 일’과 마주할 때가 종종 있다. 어떻게보면 지금 하고 있는 대학 강의도 만화 평론의 연장이기도 하니까. 이게 바로 내가 받은 조언의 핵심이다. 잘 생각해보면 평론가의 일은 집필에만 한정되진 않는다. 물론 여전히 비평 쓰기야 말로 이 직업의 근간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비평적으로 사유하기’가 그보다 더 심층에 있는 근간이라면 그 발산에는 다양함이 존재할 수 있다. 나는 2023년 즈음에 ‘게임 평론도 하는 만화 평론가’가 되기 보다는 확실히 ‘게임 평론가’가 되기로 다짐했다. 그 짐에 호응해주듯 GG로부터 계속 청탁을 받을 수 있었고, 이에 대해 언제나 감사한 마음 뿐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 뒤에는 아직 떨어지지 않은 금붕어 똥같은 질문이 붙어다닌다. 과연 무엇이 나를 ‘게임 평론가’로 있을 수 있게 만드는 걸까.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GG에 더는 글을 기고하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여전히 ‘게임 평론가’일까? 물론 게임을 플레이 하고, 비평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은 게임 평론가다. 하지만 이런 규정은 어디까지나 존재론에 의거한 자신(自信)의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로부터 ‘게임 평론가’로 지칭될 수 있는 조건이란 마음만으로는 안되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게임 평론가’로 인식되기 위해 GG에 기생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는 좀 어렵다.(GG 미안해요!) 브런치에 스스로 글을 쓰기로 결정하기도 했으나 ‘직업적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 후순위로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아니, 블로그 등을 통한 자가 기고가 핵심적인 해결책이라고만도 말할 순 없다. 역시 비평가의 활동이라는 것이 가지는 더 넓은 방법들과 접촉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 몇달 전에 어떠한 소셜 커뮤니티 모임의 모임 주도를 시도해본 적이 있다. 게임 평론가라는 사실을 좀 강하게 어필하고 게임을 통해 대화하는 모임을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몇 개 정도의 기획서를 보냈지만 돌아온 건 ‘보드게임 모임처럼 모여서 즐겁게 게임을 하는 모임’같은 요청이었고, 나는 그냥 더 진행하기를 포기했다. 이 플랫폼과 함께 내가 원하는 방식의 ‘게임으로 사유하기’를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마음을 가져서다. 더 강하게 밀어붙여서 설득하고 관철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 에너지를 내기도 전에 먼저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해야하는 건가, 하는 회의감도 들어 한동안 시달렸다. 그런데 이 플랫폼이 특별히 유별난 곳이겠는가. 이게 아마 지금 우리 세계의 일반적인 인식일 것이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평론가에 대한 세계의 규정은 시대의 요구와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대한민국에서 비디오 게임 평론가로 산다는 건 스스로 유령이 되기로 결정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좀 거칠게 말하자면) 이 세계에는 아직 이 ‘직업’을 맞이해줄 마음이 준비되어있지 않다. ‘대체 게임 평론가는 무슨 이야기를 해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템플릿처럼 준비해 다닌다. 그래봐야 애당초 상대가 비디오 게임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절반 정도는 무력한 언어로 소비된다. 게임이 일상적인 세대의 탄생, 게임 인구의 점진적 증가 같은 이야기야 떠돌고 있지만 「어벤저스 : 엔드 게임」을 천만명이 봤다는 뉴스를 볼때와의 기분과 사뭇 다르지는 않다. 어쩐지 세계가 아직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공허한 다짐을 반복하는 기분도 든다. 그럼에도 게임 평론가로 살겠는가? 새 동료들이 탄생하는 좋은 자리에 음울한 이야기나 쏟아내고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 마음 한구석이 편치는 않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쏟아내면서도 나는 여전히 게임 평론가로 살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이야말로 지금의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 아닐까. 그런데 특별한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게임 평론이 재밌다. 나는 게임 평론이 다른 평론보다 ‘특별히’ 더 재밌다고 여긴다. 당연히 비디오 게임이 다른 분야에 비해 더 특별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냥 내가 게임을 만화만큼, 혹은 영화만큼 좋아하기 때문인데, 딱히 우열은 가린 적은 없지만 세 분야를 비슷하게 좋아한다. 그리고 게임 비평을 특별히 더 좋아하는 이유는,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마주침의 기회가 적기 때문인 것 같다. 더 희소한 일을 하기 때문에 가치 있다는 편향된 결정은 아니다. 이경혁 선생님이 몇번이고 이야기하는 대로 지금의 시대에 게임 평론은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나는 그러한 생각에 충분히 공감한다.) 필요는 하지만 요청받기는 어려운 일, 내가 하지 않으면 마주치기 어려운 일을 한다는 건 사유의 과감성을 준다. 어쩐지 내가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매우 커다란 심적 만족감(!)을 주는 면도 적지는 않다. 그런데 그런 자기 고유성이라는 명예로운 만족감의 탓만은 아니다. 그냥 ‘에라 모르겠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아무말이든 일단 던져볼 수 있다는 내적 만족감이 크게 작동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게임 평론을 하는 재미라는 건 아이러닉한 측면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세계로부터 유령처럼 취급되는 존재니까 아무렇게나 떠돌 수 있고, 그게 재미있다. 이러면 다시금 평론가로 살며 비평을 쓰는 이유로 환원되어버린다. 결국 우리는 왜 쓰고 왜 떠드는가? 어떠한 이야기를 진탕, 공식적으로, 마음껏 떠들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러니 저러니 이유를 붙였지만 ‘비디오 게임’에 대해서 대범하게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우리에게만 부여되는 특권이다. 비록 누가 읽고 있는지, 듣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더라도 특권화의 쾌락이 있다. 게임 평론가라고 칭할 수 있으니까 어느 자리에서건 권위있는 척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는 법이다. (자리를 함께하는 분들이 어떻게 쳐다볼지는 몰라도.) 여튼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이러다보면 언젠가 비디오 게임의 대중 강연도, 토크 콘서트도 많이 생길 지 누가 아는가. 이런 전장의 안개로 가득찬 미래를 뚫고 나갈 힘은 오직 쾌의 감각에서부터만 나오지 않을까. 실리나 명예, 가치의 취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불확실성을 뚫고 나가기엔 너무 나약한 힘이다. 공자의 말 ‘호지자불여락지자( 好之者不如樂之者) ’를 당위의 관점으로 보기보다 생존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럴싸하게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어떤 세계는 락지자만이 인고를 견딜 힘을 얻는다. 마지막. 평론가가 되고 한 4년차 즈음에 되었을 때, 어쩐지 나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평론가 동료들을 매우 친애하게 되었다. 그때 즈음이 평론가는 외로운 직업이라는 사실을 실감한 시기다. 물론 우리는 가끔 만날 수 있다. 서로에 대해 안부를 물을 수도 있고, 기회가 된다면 팟캐스트 같은 것으로 함께 프로젝트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결국 글을 쓸 때는 혼자다. 사유의 끝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남이 아니라 나를 끝없이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즐거워서 뛰어든 일이지만 때로는 외로운 일인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외로움을 안고 나아가야 하는 동지들에게 친애와, 연민과, 애정과, 존경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 자리를 빌어 GG의 필진분들에게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려 한다. 올 봄엔 GG에 기고하는 평론가 셋이 모여서 한참을 떠든 날이 있다. 차마시고 밥먹으면서 한 7시간은 떠들었던 것 같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동료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 때 나중에 온라인으로 「GTFO」를 함께하기로 했는데 역시나 실행은 안되고 있다. (다들 바쁜 것도 있고, 네 명일 때 최적으로 재밌는 게임이라는 말도 있어서 그만...) 그래서 생각하는데, 가끔은 멀티 플레이어 게임을 같이할 사람이 없을 때 함께 해주는 것도 꽤 괜찮은 연대라고 생각한다. 그래, 우리 같이 할 사람이 없어서 「스플릿 픽션」에 대해서는 쓰지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하면 어떨까. 「스플릿 픽션」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최태섭

    지은 책으로 《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설명서》, 《한국, 남자》, 《잉여사회》 등이 있다. 최태섭 최태섭 지은 책으로 《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설명서》, 《한국, 남자》, 《잉여사회》 등이 있다. Read More 버튼 읽기 기울어진 협곡에서 - <당신엄마가 당신보다 잘 하는 게임〉에 부쳐 사람들이 게임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공평하다는 것이다. 게임은 모니터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고, 오로지 그가 제때에 버튼을 누르고 있는지 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게임은 인종, 성별, 계급에 상관없이 오로지 실력과 그것을 위해 쏟는 노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는 인터넷이 보편화 되던 시절 즈음에 유행하던 “전자민주주의”라는 장밋빛 구상, 즉 익명성을 전제로 하는 온라인에서는 모두가 계급장을 떼고 의견 대 의견으로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의 게임 버전이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김서율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저널 ACT!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영화를 중심으로 문화 전반에 관심을 두고 종종 글을 끄적이거나 기고해왔다. 현재는 구로구 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 일한다. 어느샌가 사회 운동에 뛰어들어 연구자와 활동가, 이론과 실천 사이에 단절된 통로를 고민하며 길을 모색 중이다. 김서율 김서율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저널 ACT!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영화를 중심으로 문화 전반에 관심을 두고 종종 글을 끄적이거나 기고해왔다. 현재는 구로구 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 일한다. 어느샌가 사회 운동에 뛰어들어 연구자와 활동가, 이론과 실천 사이에 단절된 통로를 고민하며 길을 모색 중이다. Read More 버튼 읽기 〈디스코 엘리시움〉 하나의 세계에서 태동하는 모순, 적대, 역설의 게임(장려상)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으며 우뚝 선 ZA/UM의 개발자들은 이제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예술이라고 밝히는 데에 이르렀다. “타인의 기억에 남고 싶다면, 체계적으로 반감을 사야 합니다. 반감을 살 준비가 되었다면, 정말로 역사적인 기회를 얻게 됩니다.”3)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적절하지 않을까.

  • 게임제너레이션::필자::구윤지

    유미주의자이지만 항상 카니발적 그로테스크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타이쿤류의 게임들을 좋아해서 척추가 망가졌다. 게임이든 뭐든 궁금한건 못 참아서 빠르게 엔딩을 보고 자주 새로 시작한다. 구윤지 구윤지 유미주의자이지만 항상 카니발적 그로테스크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타이쿤류의 게임들을 좋아해서 척추가 망가졌다. 게임이든 뭐든 궁금한건 못 참아서 빠르게 엔딩을 보고 자주 새로 시작한다. Read More 버튼 읽기 〈Deluded Reality (망상 현실)〉: ‘통로’를 지나 풀 다이브(full-dive) 필자는 지난 호에서도 큐레이터 동료가 언급한 바 있는 전시, 《MODS》(2021, 합정지구, 서울)에서 장진승 작가와 프로젝트 ‘SYNC’를 진행했었다.1) 전시를 위한 이 프로젝트는 작가와 서로 관심이 있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시작되었는데, 우리의 대화는 동시대 시뮬레이션 비디오게임 플레이어의 자율성, 몰입도로 초점이 맞춰졌다.

  • 분투형 게임과 전쟁: 행위성의 뒤집힌 거울상

    이와 같은 현상은 지난 세기 걸프전 이후 더욱 가속화된 ‘전쟁의 게임화’에 관한 분석에서 거울상을 발견한다. 게임의 한 장면처럼 보도되는 폭격의 현장에서부터 게이미피케이션을 통한 병사 훈련, 그리고 드론을 동원한 전쟁에 이르기까지. 게임이 전쟁을 재현(mimesis)할 때, 전쟁은 게임을 모사(mimesis)한다. < Back 분투형 게임과 전쟁: 행위성의 뒤집힌 거울상 25 GG Vol. 25. 8. 10. 블리자드 사(社)는 전쟁을 사랑했다 아니, 이름부터 ‘워’ 크래프트(Warcraft)였으니까. <워크래프트>는 한때는 게이머들에게 숭앙의 대상이었던 블리자드 사의 실시간 전략(Real-Time Strategy, RTS) 게임이자,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 인간과 오크 사이의 전쟁을 그린 <워크래프트> 친구 집에서 처음 접하고 머릿속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플레이하다가 밤을 새운 게 아니다. 머릿속에서 게임 플레이를 회상하고 상상하고 시뮬레이션하다가 불현듯 아침을 맞았다. 우주 전쟁, 그러니까 <스타크래프트(Starcraft)>가 출시되었을 때, 또 그랬다. 블리자드는 악마와도 싸운다. 액션 롤플레잉 게임 <디아블로(Diablo)>는 주인공이 겪는 고투의 후경에 성전(聖戰)을 배치한다. 한국의 올드 게이머들로서는 KOEI를 빠뜨릴 수 없다. KOEI의 <삼국지 2(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Ⅱ)>는 워크래프트보다도 먼저 심취했던 게임이었다. 삼국지가 소재인 게임에서 무얼 하겠는가? 전쟁이지. 조부모님 댁에 있는 삼촌의 컴퓨터에 설치해 두고, 몰래 밤새워 플레이하곤 했다. 몰래는 무슨 몰래. 연로한 분들의 이마에 주름을 늘게 하는, 앞날이 걱정되는 손자가 되었다. 심지어 ‘대항해시대 2’의 해전조차 좋았다. 그때는. <콜 오브 듀티(Call of Duty)>, <배틀필드(Battlefield)>, <메달 오브 아너(Medal of Honor)>, <월드 오브 탱크(World of Tanks)>, <월드 오브 워쉽(World of Warships)>,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Company of Heroes)>, <토탈 워(Total War)> 등등. 연극, 영화, 드라마, 소설 등 다른 매체들도 전쟁과 전투를 소재로 삼는다. 그런데 게임계에는, 정말 많다. 왜 그렇게 전쟁을 재현하는 데 진심이냐고 게임 개발자들에게 묻는 건 아예 당위적이기까지 하다. 대체 게임과 전쟁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길래. 이런 마당에 전쟁을 재현하는 게임에 대한 윤리적, 정치적 분석이 게임 연구의 한 흐름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건 짝사랑이 아니었음을 이와 같은 현상은 지난 세기 걸프전 이후 더욱 가속화된 ‘전쟁의 게임화’에 관한 분석에서 거울상을 발견한다. 게임의 한 장면처럼 보도되는 폭격의 현장에서부터 게이미피케이션을 통한 병사 훈련, 그리고 드론을 동원한 전쟁에 이르기까지. 게임이 전쟁을 재현(mimesis)할 때, 전쟁은 게임을 모사(mimesis)한다. * 게임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던 걸프 전쟁 당시 바그다드 공습 보도 화면 * 서로 거의 흡사한 실제 전투기에서의 폭격 화면과 게임 화면 그런데 정말 게임이 전쟁을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쟁 역시 게임을 모사한다면, 분석은 게임을 전쟁의 재현물로 보는 것에 국한할 수 없다. 양자의 접점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 접근을 통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를 향해 점근(漸近)한다. 게임과 전쟁이 집결하는 공간의 성격은 하나로 귀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곳은 싸우는 공간이다. 물론 조용한 전쟁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싸움’의 범주 바깥에 자리한 게임들도 많다. 하지만 다툼, 쟁투, 분투, 고투가 게임과 전쟁 양쪽 모두에서 대주주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점에 있어서 게임과 전쟁을 일방적 관계가 아닌 상호-참조적 관계를 맺고 있다. 분투형 플레이와 목표의 지위 게임과 전쟁이 분기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은 그 싸움의 목표다. 전쟁의 목적이나 목표는, 당신이 이데올로기 비판을 수행하거나 배면의 진의를 의심하는 이가 아니라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명확하다. 모든 위정자는 그들의 전쟁의 목표와 이유를 다중에게 선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목표는 실질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게임에서는 그게 좀 어려운 경우가 있다. 친구와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ter)>를 함께 플레이한다고 해보자. 달뜬 얼굴로 내 캐릭터를 두들겨 패는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왜 이렇게까지 때리는 거야?”라고 묻는 것이다. 속 깊고 다정하며 사회적 지능 뛰어난 우리의 실제 친구는 내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하고 장난스러운 위로와 함께 기분을 풀어주려 할 테지만, 반사실적 가정을 이어가 보자. * 대전 격투 게임의 플레이 과정은 정말 분투 그 자체다. 가상의 이 친구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래야 이기지.”라고 답할 것이다. 친구와 즐겁게 게임을 하다 패색이 짙다는 이유로 기분이 상한 우리는, 행위의 근본적 성격을 묻는 것으로 옹색함을 감출 수 있다. 친구에게 진지한 탐구자의 얼굴을 하고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이기려는 거야?”라고 묻도록 하자. 아니, 정말로, 그들은 왜 그렇게까지 할까? 격투 게임에서 승리하면 하늘에서 뭐라도 떨어지나? 뭔가 이득을 얻는 것도 아닐 텐데 내 친구는 대체 무엇을 위해 내 캐릭터를 그렇게 열심히 때릴까. 철학자 C. 티 응우옌 (C. Thi Nguyen)은, 게임 외적 보상이 관건이 아니라면, 그 목적이 둘로 나뉜다고 본다. 하나는 승리다. 승리하고 성취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며 그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내 친구는 나의 캐릭터를 두들겨 패고 나를 이겼다는 사실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다른 목적도 있다. 바로 ‘싸움 그 자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철학자 버나드 슈츠(Bernard Suits)는 그의 저서 The Grasshopper: Games, Life and Utopia 에서 게임 플레이를 “불필요한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자발적인 시도”로 정의한다. 골프를 생각해 보자. 골프 공을 홀에 넣는 것이 관건이라면 우리는 그냥 손으로 공을 들고 홀에 넣으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클럽이라는 비효율적인 도구를 사용해 온갖 규칙 속에서 공을 치려 애쓴다. 어째서일까? 슈츠에 따르면, 바로 그 ‘비효율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고투와 분투의 과정 자체가 게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목표 달성이라는 결과보다, 그 과정의 고군분투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이때 장애물 너머에 있는 목표는 사실 무의미하다. 그것은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즐기기 위해 가정된 목표에 불과하다. 고투하는 그 과정을 위해 마련된 가상의 목표와 비효율적인 도구, 각종 규칙은 게임을 벗어나기만 하면 실제로는 불필요한 장애물이다. 그것은 고투 자체를 즐긴다는 목적에 의해서 의미와 필요를 획득한다. 성취, 보상, 승리보다는 그 싸우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과 의미의 원천이다. 응우옌은 이러한 슈츠의 게임 이론을 수용한다. 응우옌에 의하면, 유희를 위한 일시적 목표를 상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분투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은 게임에 존재하는 고유한 플레이 방식 중 하나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의 게임 플레이를 ‘분투형 플레이(striving play)’라고 응우옌은 명명한다. 분투형 플레이를 즐기는 게이머들은 승리에 뒤따르는 외적 보상이나 게임에서의 승리보다 분투, 고투, 싸움 그 자체를 즐긴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친구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친구야, 내가 너를 그저 이겨 먹으려는 게 아니야. 승리라는 일시적 목표를 수용함으로써 너와 겨루는 과정 자체를 즐기려는 거야.” 게임과 전쟁의 분기(였던 것) 어색하게 문어체로 말하면서도 어딘가 포용력 있어 보이는 이 친구의 풍모와 달리, 응우옌의 이론은 모든 게임을 아우르는 포괄적, 일반적 설명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게임이라는 매체에서 유독 고유하게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에 대해 논할 뿐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목적, 목표, 성취, 결과보다는 과정과 수행 중심적 참여를 가능케 하는 매체적 특성에서 발생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게임이 이러한 매체로서 기능할 때 그것이 전쟁과 확실하게 분기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 목표의 차원에서 그러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실제 전쟁과 전투에선 실질적 목표를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저 분투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주조된 일회적 목표 따위가 아니다. 저기 어딘가에 실제로 방공 포대가 존재하고 이라크의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이 존재하며 그를 호위하고 있는 적군이 존재한다. 그것이야말로 실질적이고 명확한 목표다. 그것들은 미군의 전쟁 수행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형편 좋게 마련된 도구가 아니다. 분투형 플레이를 가능케 하는 게임 내에 설정된 목표는, 전쟁의 그것과 명확하게 구별된다. 군인들에게 주어지는 실제 전쟁의 목표와 달리, 분투형 게임의 목표는 본질적으로 불필요한 것이자 언제든 폐기할 수 있는 것이며 일회적인 것이면서 가상의 것이다. 전쟁의 목표가 전쟁 중의 행위를 성립시키기 위해 마련된 도구가 아닌 것에 비하여, 분투형 게임의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게임 내의 행위성을 조형하기 위해 마련된 도구의 일환이다. 그렇기에 그 게임의 행위성을 버리는 순간, 분투를 즐기려는 ‘유희적 태도’를 버리는 순간, 게임의 목표는 의미를 상실한다. 양자의 차이는 목표를 달성하고 마주하는 순간 더욱 돌출한다. 분투형 게임의 경우, 목표의 달성은 유희의 종식을 의미한다. 분투형 플레이를 성립시키는 것에서 의미를 부여받았던 목표였기에, 분투형 플레이가 중단되는 순간 그 목표는 의미를 상실한다. 논리적 귀결일 뿐이다. 성취 지향적 플레이의 경우라면 다르겠지만,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건 어떤 현재성이 아니라 지난 분투 과정을 곱씹을 시간이다. 달성되는 순간 그것은 투명해진다. *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 장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씬 레드 라인’ 같은 영화는 서로의 목표물이 되는 병사들이 얼마나 적나라하고 구체적인 존재인지 보여준다. 전쟁에서 달성된 목표는 더 붉다. 화염의 붉음이든 선혈의 붉음이든, 전쟁에서 달성된 목표는 진하고 구체적인 감각적 결과물을 행위자의 눈과 손 앞에 차려 놓는다. 목표가 달성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접근한 이가 마주하는 결과물의 감각적 구체성은 전혀 가볍지 않다. 쉽게 윤리적 무게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간의 분투 과정을 반추하고 곱씹을 여유 같은 것은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행위가 초래한 결과물이 어떠한 것인지, 그것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이러한 결과일 것이라고 정말 인지하고 각오하고는 있었는지, 그 결과물은 빨갛고 무겁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물어온다. 그리고 이제 이 분기가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행위성의 정제, 예술, 그리고 정교한 야만 이러한 게임과 전쟁의 분기점은 현대의 전쟁이 게임의 면모를 닮아감에 따라 희미해진다. 이는 단순히 전쟁에서 수행되는 행위성이 게임에서의 그것과 유사하다든가, 아니면 유사한 인터페이스와 조작을 통해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행위가 수행된다는 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태는 목표의 추상화와 그로 인한 행위성의 부각에 있다. 응우옌은 그의 저서 『게임: 행위성의 예술』에서 게임을 Art of Agency, 즉 행위성의 예술이라고 명명한다. 게임에는 유희적 목표, 전-유희적 목표, 유희적 태도, 규칙, 불필요한 장애물 등이 다양하게 배치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게임에서 특정한 행위성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분투형 플레이는 바로 이 행위성을 경험하는 최적의 플레이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게임은 이 행위성의 구현에서 미적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행위성을 소재로 삼는 예술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게 응우옌의 주장이다. 게임이 목표와 성취로부터 해방되고 분투 행위에서 의의를 발견함으로써 그것은 행위성의 예술이 된다. 목표로부터 해방된 게임이 예술의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에 비하여, 전쟁에서는 다른 양상이 관찰된다. 전쟁이 게임의 수행성을 닮아가는 것은 여러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그 행위성이 목표와 유리되는 것을 빠뜨릴 수 없다. 전투기 조종사는 목표 대상을 육안으로 관찰하지도 않은 채, 레이더를 보고 버튼을 눌러 미사일을 발사한다. 목표 대상의 구체적이고 적나라한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드론 전쟁은 더욱 노골적이다. 드론 조종사는 게임 컨트롤러와 유사한 장비로 ‘스크린 속’ 목표를 제거한다. 자폭형 드론이 목표에 적중하는 순간, 공포와 고통에 비명을 질렀을 법한 적군 병사는 스크린에서 사라진다. 이러한 방식의 전쟁을 수행하는 자는 목표에 접근할 기회로부터 면제되거나, 또는 그것을 박탈당한다. 면제와 박탈 사이의 모호성 속에서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정밀 타격률’, ‘효율적 자원 운용’과 같은 데이터다. 즉, 그의 행위성에 대한 반추를 수치화하고 정돈한 것들이다. 그렇게 본디 구체적인 목표물들은 추상화된다. 그것은 모니터 안의 영상, 명멸하는 신호, 수치화된 데이터 등으로 추상화된다. 목표물이 추상화되는 곳에서 전쟁 수행자에게 더 분명하게 남는 것은 그의 행위성이다. 비로소 전쟁의 수행자는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분투와 전투에서 성립하는 행위성을 더욱 정교하게, 합리적으로 다듬어 간다. 그들은 마치 ‘분투형 플레이어’와 흡사한 조건에 놓이게 된다. 더 나아가, 이때 사상되는 것은 전쟁 목표물의 빨갛고, 무겁고, 뜨끈하고도 축축한 구체성이다. 죽음, 파괴, 트라우마는 스크린 속 데이터나 수리에 담기지 못하는 구체적이고 참혹한 현실이다. 그리고 앞서 지적했듯이 이러한 구체성은 전쟁 행위의 당사자에게서 여하한 윤리적 무게로 치환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면제인지 박탈인지 모를 공백의 정체가 확연해진다. 목표물과 거리가 멀어지는 현대의 전쟁 수행자는 이 피 튀기는 사후 정산서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들에게선 목표를 달성하고 결과를 야기한 행위자로서의 윤리적 ‘책임’은 증발하고 행위성의 정교한 도야만이 남는다. 그것은 정교하고도 섬세한 야만이다. * 드론 공격을 성공시키고 환호하는 병사의 모습 분투형 게임과 전쟁: 행위성의 뒤집힌 거울상 지금까지의 논의는 게임과 전쟁이 거울상의 관계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게임과 전쟁은 행위성의 뒤집힌 거울상으로서 서로를 비춘다. 분투형 게임에서는 실제로는 무의미한, 무가치한 목표를 설정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처럼 일회적인 가장과 유희적 태도를 취한다. 이를 통해 분투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하거나 행위성을 조형한다. 목표가 일회적, 유희적 대상으로 왜소화되었기에 오히려 게임은 행위성의 예술적 가능성을 표현하는 매체가 될 수 있었다. 현대의 전쟁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유희적 태도를 통해 의미를 일시적으로 획득하는 것과 정반대의 사태가 벌어진다. 전장에 선 군인들은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척 가장하지 않는 것에 그칠 수 없다. 생사가 오고 가는 현장에서 그들의 목표를 진정으로 추구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한다. 목표를 달성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 역시 적나라한 구체성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전쟁에서 목표물은 굳이 접근하고 목격하고 손에 쥘 필요가 없는 것으로 유리되고 추상화된다. 그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없거나 상관없게 되어버림으로써, 분투형 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군인들에게도 점차 분투와 행위성만이 남는다. ‘목표’와 ‘결과’와 ‘책임’이 휘발되어 가는 이러한 사태는, 예술적 가능성을 마련했던 분투형 게임에 대하여, 실로 행위성의 뒤집힌 거울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Tags: 응우옌, 행위성, 전쟁, 예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철학연구자) 최건 철학연구자로서의 정체성과 게임애호가 및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강의, 강연, 연구, 저술, 번역 활동에 임해왔으며, 현재는 인하대 등에서 학생들과 사유를 공유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 [인터뷰] 근대에서 현대로의 궤적을 따르다,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 아로코트 개발자

    작년 8월 열린 부산인디게임페스티벌(BIC)에 출품된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The Fire Nobody Started)는 흔히 접할 수 있는 게임들과는 다른 내러티브와 아트의 독창성을 자랑하는 게임이다.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형식의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각각 특정 시대로 대변되는 기차 칸들을 오가며 유럽 근세사의 질곡을 체험하게 된다. 산업혁명기부터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사회의 다양한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는 이 게임에는 인류로부터 비롯되는 발전과 폭력이라는 양가적 주제가 녹아나 있다. < Back [인터뷰] 근대에서 현대로의 궤적을 따르다,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 아로코트 개발자 23 GG Vol. 25. 4. 10. 작년 8월 열린 부산인디게임페스티벌(BIC)에 출품된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The Fire Nobody Started)는 흔히 접할 수 있는 게임들과는 다른 내러티브와 아트의 독창성을 자랑하는 게임이다.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형식의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각각 특정 시대로 대변되는 기차 칸들을 오가며 유럽 근세사의 질곡을 체험하게 된다. 산업혁명기부터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사회의 다양한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는 이 게임에는 인류로부터 비롯되는 발전과 폭력이라는 양가적 주제가 녹아나 있다. GG에서는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이하 <더 파이어>)>를 제작한 ‘팀 스핏파이어’의 개발자 아로코트를 만나 서양 근세사라는 게임의 테마와 작가로서 개발자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들을 들어보고자 했다. 이경혁 편집장: GG의 인터뷰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더 파이어>를 만드시게 된 계기를 여쭙고 싶습니다. 아로코트: 원래 이 게임은 무한히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모티프였지만 아무래도 게임의 배경으로 쓰기에는 좁은 감이 있어 기차로 바꾸었어요. 어딘가를 향해서 끝없이 질주하는데 어딘가로 향하는지는 모르는 기차 안에서 대화하는 게임을 만들고 싶어서 친구랑 이야기를 했어요. 메타 판타지 느낌으로 우로보로스처럼 세상 밖을 도는 열차로서 다양한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임을 할까, 아니면 좀더 현실에 가까운 얘기를 할까 하다가 친구가 아무래도 기차라면 산업혁명이 떠오르니 산업혁명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했어요. 그렇게 친구와 얘기하며 한 2시간 만에 스토리 개요가 짜인 거죠. 이경혁 편집장: 기차로 시작할 수 있는 여러 맥락 중에 산업 혁명이라는 주제를 타고 가셨다는 거죠. 말씀하신 개발 동기로서의 기차가 이 콘텐츠의 외피라면 이 게임의 알맹이 자체는 근대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혹시 관련 전공자이신지도 궁금했습니다. 아로코트: 사실 저는 컴퓨터공학이 전공이라 역사 쪽 전공자는 전혀 아니에요. 다만 평소에 그 친구나 저희 아버지와 관련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러면서 뭔가 제 안에서 관련 지식이나 고찰이 쌓여 갔던 거죠. 그렇게 쌓여왔던 것들이 그 날의 대화로 일종의 촉매가 되어서 게임으로서 형태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이경혁 편집장: <더 파이어>에서 하고 싶으셨던 이야기 자체는 그림이나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의 방식, 혹은 영화로도 만들어볼 수 있었을 텐데 여러 방식 중 게임을 고르셨습니다. 이 작품이 혹시 아로코트님께 첫 작품이신지요? 아로코트: 대중에 제 이름을 공개한 게임으로는 <더 파이어>가 처음입니다. 저는 정말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게임으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어떤 사람은 영화로 만들고 어떤 사람은 소설을 쓰듯이 저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그게 게임의 형식으로 구체화되는 거죠. 이경혁 편집장: 첫 게임의 주제로 서구 근대사를 다루게 된 이유가 있으셨을까요? 게임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세지가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아로코트: 사실 대중에게 공개하는 첫 게임이긴 하지만, 제가 이제껏 기획해 왔던 게임의 성격이 굉장히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심리적 고찰에 가까웠다 보니 <더 파이어>가 특이한 사례긴 해요. 학생 시절까지는 정말 저에 대해서만 집중했는데, 어른 되고 나서 보니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조금 더 눈길이 가더라고요. 물론 다른 사람보다는 서구 근대사에 대한 관심이 좀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아버지가 이런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어요. '세상에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이나 정책은 없다. 내가 무언가를 선택을 하면 누군가는 이득을 보고 또 누군가는 어떻게든 고통을 받는다. 그렇게 보면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선택을 해야 되는 사회구조 자체가 원죄처럼 느껴진다'. 그게 굉장히 뇌리에 남았어요. 사회 구조 자체가 아무에게도 상처 입히지 않거나 피해 주지 않는 삶을 만들 수 없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어떤 행위 자체는 필연적으로 또 어떠한 착취로 이어지는 것 같다. 근데 그런 걸 인식을 해봐야 이 세상은 너무 거대하고 저는 너무나도 작잖아요. 제가 그렇다고 혁명을 할 인물상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그래서 저는 게임을 통해 어떤 대답 대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하고자 했어요. 이 세상의 구조와 그 안에서 맞닥뜨리는 부조리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이라면, 사실 해답은 개개인의 삶과 경험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로 정해질 수는 없고 개별적인 것이겠죠. 하지만 각자의 해답에 대해서 서로 논의하고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해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모두 한번 이 질문을 생각해 보자라는 느낌으로, 어떻게 보면 그게 이 게임을 만들게 된 동기인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저는 <더 파이어>에 실제로 사용된 문구나 글을 보면 피상적인 인용이 아니고 레퍼런스를 참조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마르크시즘에 대한 언설들도 나오는데 그것도 나름의 공부를 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혹시 이 주제와 관련해 책이나 자료 같은 소위 말한 레퍼런스로 볼 만한 것들이 있으셨을까요? 아로코트: 사실 처음부터 특정한 레퍼런스를 잡고 진행했다기보다는 작업을 하면서 참고한 것들이 많다 보니 딱 어느 것이 레퍼런스라고 짚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마르크시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이 있었긴 했지만 추가로 정보가 필요하면 그때그때 여러 가지 문헌들을 찾아봤어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에서 관련된 사항들을 읽고 가져올 수 있는 정보를 메모해두기도 했구요. 이경혁 편집장: 제작 과정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더 파이어>의 마지막 크레딧에 한 명이 더 들어가 있는 걸 보긴 했는데, 완전히 혼자 게임을 제작하신 것인지요? 전공은 개발자신데 그림도 그렇고 사실 글 쓰는 것도 굉장히 힘드셨을 것 같아요. 아로코트: 마지막 크레딧에 나온 분은 아까 말씀드렸던 제 친구입니다. 게임 자체는 사실상 1인 개발로 이루어졌지만, 내용적인 부분에서는 친구가 초반에 등장하는 1차 세계대전 시기까지의 고증 작업을 도와주었어요. 예를 들어 챕터 3에서는 막스 베버의 책을 어떤 노동자가 읽었다는 설정을 만들었다가 고증을 통해 그걸 수정한다던지. 챕터 5에서 대공황 시대에 나오는 볼스테드 법의 허점에 대해 알려준다던지. 고증이 세게 들어간 부분은 제 친구가 써준 것도 있고, 그걸 기반으로 제가 다듬은 것도 있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거의 다 제가 썼어요. 이경혁 편집장: 게임의 전체 플레이 타임이 1시간 정도로 그렇게 길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위 말하는 기존의 게임 팬들 사이에서 '이건 게임이 아니야'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만약 이런 질문이 나오면 어떻게 답을 하시겠어요? 아로코트: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이건 사실 게임의 정의에 대한 문제이긴 한데, 흔히 게임도 예술이다라는 얘기를 하잖아요. 무엇이 게임이라는 매체를 예술로 만드는가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대중들이 그 매체를 예술로서 다룰 수 있어야 하고 가장 단순하게는 다른 예술들이 할 수 있는 걸 이 매체도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게임이 예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안에서 정말 다양한 시도를 할 수도 있고 다른 매체들이 다룰 수 있는 주제를 게임도 다룰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요. 이 게임이 인기가 없을 거라는 건 짐작했어도 스스로 이 게임은 게임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네요. 이경혁 편집장: 인디게임의 1인 개발자로서 BIC(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에 참석하시게 된 계기와 현장 부스의 분위기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아로코트: BIC는 처음에 게임 만들 때, 되든 안 되든 게임쇼 같은 데 작품을 내고 싶다는 제 로망이 있어서 직접 참여하게 됐어요. 현장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런 전시가 처음이었고 실은 돈이 없어서 장비도 못 빌렸거든요. 개발하던 걸 그대로 갖고 가서 동생 노트북과 제 노트북으로 전시를 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고 저는 그 정도면 만족이라고 생각해요. 또 현장에서는 그런 한계도 있었어요. 데모판 플레이 타임이 아무리 짧게 잡아도 한 10-15분은 걸리는데 저는 한 30분 정도로 상정했었으니까 게임쇼 내내 <더 파이어>를 돌린다고 해도 직접 경험시켜 드리는 데는 한계가 있더라구요. 이경혁 편집장: 저도 뒤쪽에서 봤습니다. 게임쇼의 안타까운 점이기도 하죠. <더 파이어>도 그렇지만 플레이타임이 긴 게임들은 사실상 거기서 시연이 어렵다 보니까요. 아로코트: 아무래도 게임 쇼에서는 뭔가 짧고 메커니즘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종류의 게임이 부스로서 사람들에게 강점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좀 많이 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국내에서 <더 파이어>와 비슷한 시도를 하는 분으로 저는 소미(SOMI) 님이 생각나기도 했어요. 혹시 소미님 작품은 플레이 해보셨을까요? 아로코트: 네, 소미님은 항상 존경하는 분이에요. 스토리랑 게임의 시스템을 잘 맞물리게 하는 방법을 잘 아시는 것 같고 사실 그게 그분의 강점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사실 그래서 저도 원래는 어느 정도 게임에 퍼즐 요소를 넣어서 인물들의 이야기가 퍼즐로 표현이 되었으면 했는데, 프로그래밍을 그렇게 잘 못했던 건 아쉬운 점이에요. 이경혁 편집장: <더 파이어> 중간에 알파벳 맞추기라던가 퍼즐을 시도하시는 것도 느껴졌는데 확실히 게임에서 퍼즐 요소가 적긴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로코트: 원래는 시대별로 보드 게임을 반영해서 첫 번째 챕터에서는 틱택토, 두 번째 챕터는 체스 이런 식으로 반영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제 경우에는 아트까지 다 담당을 하다 보니 무엇 하나는 포기를 해야만 했었어요. 아트는 약간 (이 게임의) 정체성 같은 거라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림과 퍼즐 사이에서 퍼즐을 포기했던 거죠. 그래서 팀원을 되게 절실하게 원하긴 했어요. 저 스스로도 개인적으로 개발 쪽으로는 욕심이 많이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사소하게 작동하는 메카닉 하나도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여된다는 걸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더 파이어>에서는 아트도 상당히 눈에 띄는데요. 아트에 비중을 많이 두고 싶으셨던 이유와 구성하기까지의 과정들이 궁금합니다. 아로코트: 전공자도 아니고 그림은 초등학생 때 이후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게임과 관련된 퍼즐 요소에는 확신이 없어도 아트는 이걸 해내면 정말 대단할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원래는 <더 파이어>에서 아트를 칸마다 다양화할 생각이 없었는데, 아까 저를 어드바이스해준 친구와 얘기하면서 시대에 맞춰 아트를 각자 그리자는 얘기가 나와서 하게 됐어요. 결국 제가 제 무덤을 팠던 거지만요(웃음). 이경혁 편집장: 각 시대별로 예술 사조를 다 맞추신 거잖아요. 마지막엔 팝아트랑 컨템포러리까지 가셨던 것 같아요. 아로코트: 실은 후반으로 갈수록 각 시대에 아트 스타일이 명확하게 들어맞지는 않아요. 예를 들면 1950년대 매카시즘이 나오는 시대의 아트 스타일로 바우하우스를 선택했는데 사실 바우하우스는 1930년대거든요. 점차 사조들이 갈래가 다양해지기도 하고, 그보다 후반으로 가면 저작권 문제도 있습니다. 이전 시대까지는 각자 모티프로 삼은 작가들이 있었어요. 첫 챕터인 산업혁명 시대 같은 경우에는 신문에 나오는 단색 리소그래피 판화를 택했고, 두 번째 챕터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 세 번째 챕터에서는 툴루즈 로트랙, 네 번째 챕터에서는 몽고메리 플래그 이런 식으로 명확한 작가들을 정했어요. 그런데 후반부로 가니 그렇게 하면 법적인 문제에 걸릴 가능성이 있어 그보다는 시대별 분위기에 맞춰서 선정하고자 했어요. 개인적인 느낌인데 그래서 후반으로 갈수록 제 취향이나 경향성이 조금 더 많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이경혁 편집장: 콘텐츠에 대한 질문으로 저는 이 얘기를 꼭 여쭤봐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제작자이자 창작자로서 인류의 근대라는 걸 어떻게 보시나요? 아로코트: 저희가 <더 파이어>를 만들 때 명확하게 합의하고 넘어간 게 있었어요. 우리가 볼 때 인류의 근대는 실패의 역사다. 지금도 보세요, 이 게임을 완성할 때까지만 해도 세상이 이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지만 계엄령도 내려지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지금보다 조금 더 이전 시대 사람들은 그래도 자신만의 이상이나 최선을 상상하고 꿈꾸지 않았나 싶거든요. 근데 지금의 세상은 더 이상 최선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최악을 고르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경혁 편집장: 작품에서 불이라는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셨지요. 처음에는 남포등에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그것이 나중에는 원자폭탄이 되고 최종에는 불이 타오르는 쪽으로 계속 걸어가면서, 마지막쯤에 ‘우리가 불이다’ 라는 선언을 하는 모습도 나오고요. 하지만 기술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도 사실이라는 이야기도 살짝 나오잖아요. 그래서 저는 <더 파이어>에서 불이 갖는 의미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게 아닌가 했어요. 아로코트: 맞아요, 이중적이에요. ‘우리가 불이다’는 아까 말씀드린 인류의 사회와 구조 자체가 원죄라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피우지 않은 불에 의해서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세상을 잘 살펴봤을 때 고통받고 있는 우리도 이 부조리의 일부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게임 후반부로 갔을 때 그렇게 산발적으로 그려놓은 불이라는 이미지와 상징을 하나하나 다 끌어모아서 하나로 통합하지는 않았어요. 이 게임을 대답이 아니라 질문으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그 상징들을 보면서 플레이어가 그 상징들과 제가 대략적으로 잡아놓은 형태를 보면서 플레이어가 불꽃이란 무언가에 대해서 스스로 결론을 내렸으면 했어요. 이경혁 편집장: 산업혁명이나 원자 폭탄 등으로부터 출발해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쟁 등의 서사를 보면, 물질적으로 생명이 죽어나가는 순간들을 포착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완전히 근현대까지는 안 오셨고 사실상 베트남 전쟁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로코트: 사실 후반에 소련 붕괴나 911, 서브프라임 사태 이런 것들이 짧게 짧게 지나가잖아요. 원래는 그 사이에 이라크 전쟁을 넣어서 그 문제를 부각하려 했어요. 그랬지만 저한테도 두려움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웃음)... 저는 그래서 사실 계엄령이 내려왔을 때 정말 무서웠거든요. 이성적으로는 게임 창작자로서 역사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이게 정치 사회적으로 짚고 넘어갈 만한 이야기인 것도 맞는데 왜 이런 부분에서 두려워해야 되나 생각하며 현타도 많이 오더라구요. 이경혁 편집장: <더 파이어>가 언어를 그래도 꽤 많이 지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번역은 어떻게 처리하셨을까요? 아로코트: 번역의 경우 제 친구가 영어 부분을 해줬고, 그걸 기반으로 BIC에서 마사케이라는 분을 만나서 그분이 일본어 번역해 주셨고 나머지는 itch.io (해외 인디게임 커뮤니티)에서 번역 자원봉사자 분들을 구해서 했었어요. 이경혁 편집장: 역시 개발자들은 itch.io에서 시작하시는군요. 게임의 판매수익은 얼마 정도 될까요? 그동안 들어간 공수가 있으니, 그와 대비해서 이 정도는 회수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기대가 있으셨을 것 같아요. 이런 물질적 기반이나 상업적 성과가 창작자가 다음 작품으로 가는 데 또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해서 여쭤봤습니다. 아로코트: 저는 이 게임에 정말 (상업적으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돈을 벌면 좋으니까 최대한 게임을 알리기는 하는데,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이 게임이 해외에서도 되게 마이너한 분야이고 얼마만큼의 수요를 낼지 장담할 수 없는데 한국에서는 어떻겠어요.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시장의 크기가 있다 보니 그만큼 마이너 장르도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걸 많이 느껴요. 그래도 그런 것 치고는 제 기대보다는 잘 됐다의 느낌이구요. 하지만 조금 더 잘 됐으면 좋겠다고 항상 느끼고 있어요. 이경혁 편집장: <더 파이어>의 경우 국내보다도 해외 쪽 반응이 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해외 반응들은 좀 보신 게 있으세요? 아로코트: <더 파이어>도 사실 국내보다는 해외 쪽에서 뭔가 조금 이제 힘을 낼 수 있는 작품 같은데, 해외 반응을 살피기 전에 게임이 애초에 해외로 잘 퍼져 나가야 되는데 그러기가 사실 쉽지는 않아요. 인디 게임 홍보에 가장 난점이고 가장 필요한 부분이 네트워크인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사회적인 인간이 아니기도 하지만 예전에 학생일 때는 그런 걸 모르고 살았다가 이제야 그것들을 체감하기 시작하니까, 이걸 앞으로 어떻게 홍보를 하고 알릴지가 정말 힘들더라구요. 우선은 비트 서밋(일본 국제 인디게임 페스티벌)에 내보긴 했습니다. 아무래도 <더 파이어>가 아트라는 명확한 장점이 있으니까 이걸로 어떤 수상을 하면 관심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요. 이경혁 편집장: 개발자 본인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다가가 보면, 게이머로서는 또 어떤 분이신가 궁금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게임들을 두세개 정도 꼽아주시면 어떤 건가요? 아로코트: 쯔꾸르 게임 중에서 08년도에 나온 <오프>라는 RPG 게임이 있어요. 서양권에서는 많이 유명한 메타픽션 게임의 계보에 있는데. <오프>는 RPG 쯔꾸르라고 하면 보통 생각하는 일반적인 이미지를 전혀 따르지 않는 게임이었어요. 이렇게 게임을 만들어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저에게 있어 게임이란 시스템 이전에 이야기가 먼저 존재하고 게임은 그 이야기를 표현하는 수단인데요. 쯔꾸르 게임들, 특히 <헬로우 샤를로테>라는 게임을 하면서 그런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에반게리온 같은 느낌의 우울증 걸린 게임인데(웃음). 제가 고등학생 때 정말 힘들었고, 저한테 학교라는 공간은 단 한 번도 좋게 기억된 적이 없었는데 <헬로우 샤를로테>가 그러한 감성들을 정말 명확하게 풀어낸 거예요. 게임을 하면서 개발자가 겪었을 그 고통들이 정말 생생하게 느껴졌어요. 그 게임을 통해 저도 제가 가지고 있는 이 기억들을 언젠가 게임으로 다시 풀어내고 싶다, 자기 표현 욕구의 수단으로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 외에는 <이브>나 <마녀의 집> <원샷> 같은 이야기를 표현하는 게임과 메타적인 연출들을 많이 좋아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기획부터 완성까지 여러 고충이 있었습니다만, 결국 스스로 이 게임을 만들 때 재미있으셨을까요? 아로코트: 정말 솔직히 난점이 많았죠. 특히 아트 스타일을 만들 때는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요(웃음). 고쳐도 별로고 안 고쳐도 별로고, 진짜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거랑 너무 다르고. 그런데 재미있었냐라고 묻는다면 정말 재미있어요. 하는 시간만 놓고 봤을 때는 사실 힘들고 고민도 많이 해야 되고 특히 저는 주변에 아무도 없이 그냥 집에서 이것만 개발했거든요. 속으로는 내가 이렇게 시대별로 고생을 해봐야 누가 알아줄 거라는 보상도 확신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그게 재밌었던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개발자로서 아로코트님의 향후 진로나 창업에 대한 생각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아로코트: 언젠가는 회사를 세워서 제가 생각한 이야기들을 더 만들고 싶은 게 목표고, 제가 생각하는 것들을 일종의 IP나 프랜차이즈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해요. 제가 원하는 게임을 만드는 것 외에도 어느 정도 수익성이 나는 그런 것들을 많이 고려하지만 특별히 현실에 타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제 게임 스타일이 이런 걸로 고정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제 개발 능력의 모자람이기도 해서(웃음) 지금은 저보다 훨씬 더 능력이 있으신 분들과 협업을 할 기회가 생겼는데, 앞으로는 그럴 수 있다면 훨씬 더 적극적이고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고 싶어요. 이경혁 편집장: 마지막으로 후속작 계획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간단한 컨셉트 같은 걸 공개해 주실 수 있으면 그것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로코트: 후속작으로는 지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어요. <더 파이어>를 보고 같이 작업하자고 연락 주신 분들이 계셔서 그분들과 하는게 있고 개인적으로도 기획 중인 게임들이 있습니다. 먼저 팀으로 제작중인 게임으로 한국 도깨비가 등장하는 뱀서가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제작하는 스토리 게임 중에서는 우선 브로맨스 요소가 들어간 대화 형식의 게임을 만들고 있구요. 도시에서 괴물을 키우는 텍스트 어드벤처 계열 게임도 기획 중인데, 사이키델릭한 심리적 요소를 많이 곁들인 게임으로 계획하고 있어요. Tags: 근대, 인디게임, 역사, 1인개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수 문화와 지식, 공간과 학술 장 등 다양한 영역을 공부합니다. 게임의 역사와 게이머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공모전수상작] 크리퍼가 부수고 간 자리

    마인크래프트(Minecraft)는 겉시늉의 세상이다. 엉성한 외피 이미지로 포장된 네모난 객체들이 생태계를 이룬다. 또한 현실과 비현실, 매끈함과 모서리, 플레이어와 데이브(주인공), 원형과 변형 등 양립 불가능한 것들이 공존한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데이브의 몸으로 젖지 않는 비를 피해 귀가한다. 그리고 온기 없는 모닥불을 피워 몸을 녹인다. 방 안이 따뜻한 빛으로 물들면, 솜 없는 침대에 누워 깨어 있는 채로 잠에 든다. < Back [공모전수상작] 크리퍼가 부수고 간 자리 20 GG Vol. 24. 10. 10. 마인크래프트(Minecraft)는 겉시늉의 세상이다. 엉성한 외피 이미지로 포장된 네모난 객체들이 생태계를 이룬다. 또한 현실과 비현실, 매끈함과 모서리, 플레이어와 데이브(주인공), 원형과 변형 등 양립 불가능한 것들이 공존한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데이브의 몸으로 젖지 않는 비를 피해 귀가한다. 그리고 온기 없는 모닥불을 피워 몸을 녹인다. 방 안이 따뜻한 빛으로 물들면, 솜 없는 침대에 누워 깨어 있는 채로 잠에 든다. 전술한 과정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맞닿아 있지만 엄연히 다르게 작동한다. 현실과 다른 인지 체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상의 객체와 플레이어 사이에 생성되는 보이지 않는 관계망은 현존감(presence)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는 어느새 스크린 밖으로 나와 현실 위에 포개진다. 마인크래프트의 겉시늉은, 크리스마스트리에 걸린 장식용 선물 상자와 같다. 그저 작고 가볍게 포장된 이미지로서의 역할을 한다. 솜 없는 침대 현실 세계는 매끈한 표면의 사물로 가득하다. 그러나 마인크래프트 속 세상은 모두 블록 형태로 모서리를 갖고 있다. 입체의 면으로만 이루어진 객체들은 간신히 식별 가능한 범위 내에서 (비)현실적으로 단순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부분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 있어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사물을 인지할 때 그다지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 속 사물은 물리적인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모든 사물은 형상과 관념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물은 겉을 이루는 외형보다 관념으로서 존재하는 순간이 더 많은 듯하다. 그렇기에 마인크래프트의 단순한 묘사는 대상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인지함에 있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상상력이 부족한 부분을 알아서 채워 넣기 때문이다. 이렇듯 마인크래프트의 블록 세상에 들어서면, 우리의 인지는 저절로 전이된다. 누구도 네모난 고양이에 대해 이의제기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전이는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이다 [1] . 우리가 기존에 알던 것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뒤바뀌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부분이 맞닿은 상태로 변형되어 또 다른 형상을 갖게 되는 것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변형이 되어도 원형을 상기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인지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이다. 마인크래프트 속 세상을 거닐면, 기억 저편에 담긴 현실 세계의 이미지가 무수한 형태로 분절되어 떠오른다. 그리고 확장된 인지 체계 위에 포개진다. 무엇이 원본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일은 무의미해 진다. 사실 인지의 전이는 마인크래프트에만 해당된다기 보다 비디오게임 전반에서 일어난다. 상하좌우로만 이동하는 납작한 이차원 게임을 떠올려 보자. 이차원의 세계는 우리가 경험해 본 적 없는 곳이다. 그러나 비디오게임 안에서는 이러한 제약이 문제 되지 않는다. 또한 이차원 게임에서는 마인크래프트보다 고도로 압축된 형상의 객체들이 등장한다. 우리는 두 개의 네모난 픽셀만 보고도 인간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이렇듯 비디오게임 내부에서는 고도로 압축된 묘사가 추상적인 레벨에서 소화 과정을 거친다. 인지의 전이는 우리가 가진 고정된 관념과 사고, 그리고 이미지로부터 해방을 선사하며 확장된 감각의 세계를 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젖지 않는 비에 추위를 느끼고, 온기 없는 벽난로에서 몸을 녹이고, 솜 없는 침대에서 푹신함을 느낄 수 있다. * 마인크래프트의 침대 [2] 네모난 고양이의 골골송 [3] 비디오게임 속 객체들은 명백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현존감을 기반으로 게임 속 가상의 객체들과 지각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비디오게임에서의 현존감은 말 그대로 현실을 넘어 게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상태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험은 가상 환경 내부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이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닌, 플레이어가 주관적으로 감각하는 심리적인 공간에 가깝다 [4] .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데이터로 이루어진 가상의 우주로, 현실과 동일한 물리적 실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존감은 비디오게임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현실감 외에도, 플레이어와 가상의 객체 사이에 생성되는 사회적 관계를 포함한다. [5] 마인크래프트의 싱글 플레이 모드는 온 우주를 플레이어 혼자 쓴다. 플레이어를 제외한 다른 생명체는 모두 NPC(Non Player Character)다. 이러한 점이 플레이어에게 자유로움과 안락함을 주기도 하지만,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마인크래프트에 등장하는 다양한 생물, (비)공격적인 몹(mob), 마을 주민은 매우 단순한 행동으로 프로그래밍된 NPC이긴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살아있다는 것을 감각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 마인크래프트의 고양이 [6] 플레이어는 여러 동물과 상호 작용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신뢰를 쌓으면 반려동물처럼 함께 지내는 것도 가능하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마인크래프트의 고양이는 생선을 좋아한다. 플레이어가 바다에서 생선을 낚아 고양이에게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면 점차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네모난 상자에 다리와 꼬리가 달린 투박한 고양이는 야옹 소리를 내며 사뿐하게 걷고 침대 위에서 시간을 보낸다. 긴 채집 끝에 집으로 돌아가 고양이를 마주하면, 보드라운 반려묘의 감촉이 떠오르며 골골송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렇듯 마인크래프트 속 가상의 생명체와 플레이어 사이에 오가는 상호작용은 단순하고 때로는 단방향적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가까운 관계망을 피워내기도 한다. 홀로 숲이나 동굴에 들어가 재료를 채집하고, 외딴곳에 집을 짓고 살아갈 때는 알지 못했던 플레이어의 생기를 감지할 수 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온종일 낚시만 해야 했던 고양이와 ‘나(플레이어)’ 사이의 결속은 사회적인 풍부함(Social Richness) [7] 으로 이어지는 현존감을 발생시키며 물리적 실체의 필요성을 허문다. 그들은 어떤 생물의 외피를 두르고 단순하게 움직이는 상자처럼 보일 수 있으나, 플레이어를 움직이게 하고 때로는 죽게 만드는 크고 작은 동기가 된다. 즉 가상 세계에서의 삶과 죽음은 이들이 관장한다. 내재적인 모서리 게임은 셀 수 없이 많은 요소로 구성된 하나의 무리다. 즉 게임은 시스템적이다. 여기에서 시스템은 광범위한 의미를 담아낸다. 우선 게임의 시스템은 사물과 사물, 사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지는 가지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가지는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수한 갈래로 뻗어 있다. 게임의 시스템은 구조적인 요소와 감각적인 요소를 포괄한다. 따라서 이를 텍스트로서 정의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스템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이 상호작용적인 관계 안에서 복합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8] . 이는 게임의 시스템에 대한 모호한 정의를 하나로 묶어 냄과 동시에 여러 가지 경우를 포함한다. 비디오게임의 시스템은 무수하게 얽힌 관계망을 기반으로 하나의 복합체를 이루며 내부에서 외부로 점차 뻗어 나간다 [9] . 이렇게 시스템은 또 다시 현실 위에 포개지고 또 다른 우주를 이루게 된다. 마인크래프트에 등장하는 크리퍼(Creeper)는 이름처럼 몰래 다가와 자폭하며 일대를 박살 내는 몹이다. 크리퍼는 일정 조도 이하로 내려가면 어디서든 생성된다. 특히 지하 동굴이나 깊은 숲, 비 오는 날에 자주 출몰한다. 크리퍼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폭발할 듯 빛을 내며 경고한다. 그리고 삽시간에 터져 버린다. 물론 크리퍼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아도 스스로 폭발하기도 한다. 즉 크리퍼의 행보는 예측할 수 없다. 소리 없이 다가와 일상의 한 부분을 통째로 날려버리고는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다. * 크리퍼가 부수고 간 자리 [10] 그러나 크리퍼는 사실 현실 도처에 존재한다. 위기는 언제나 소리 없이, 예측 불가능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드러난 거친 모서리를 흉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모서리를 내재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모서리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둘 이상의 면이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본 채로 맞닿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또한 무수한 존재자들의 각으로 이루어진 모서리의 세계다.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어느 한 부분이 맞닿은 채로 커다란 시스템을 이룬다. 이처럼 크리퍼가 부수고 간 자리는 내재적인 현실의 모서리를 보는 눈과, 이를 매만질 수 있는 손으로 확장된다. 마인크래프트의 네모난 블록, 그리고 이를 감싸고 있는 외피는 이미지 너머로 연결되는 또 다른 차원의 경로를 연다. 다시 크리스마스트리에 걸린 장식용 선물 상자를 떠올려 보자. 이는 분명 선물 같은 외양을 하고 있지만 선물로 기능할 수 없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는 이 작고 가벼운 상자에 담을 수 없는 따뜻한 온기와 안락한 공간을 떠올리고 감각할 수 있다. 온 세상의 모서리와 외피를 매만지며, 지난 겨울 공원에서 우연히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늦더위를 달래 본다. * 지난 겨울의 공원 [1] 곤살로 프라스카,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게임”, 김겸섭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2008, p.18. [2] 이미지 출처: https://minecraft.fandom.com/wiki/Bed [3] 고양이가 기분이 좋을 때 내는 소리를 노래하는 것에 비유해 일컫는 말이다. [4] 김영욱, “VR 영상 콘텐츠의 현황과 프레즌스(presence) 향상을 위한 과제”, 문화영토연구 Vol. 4 No.2, 2023, pp14-17. [5] 조수선, 이숙정 외 3명, “뉴미디어 뉴커뮤니케이션”, 이화출판, 2014, pp.107-109. [6] 이미지 출처: https://www.digitaltrends.com/gaming/how-to-tame-cat-minecraft/ [7] 조수선, 이숙정 외 3명, “뉴미디어 뉴커뮤니케이션”, 이화출판, 2014, pp.111-112. [8] 케이티 세일런, 에릭 짐머만, “게임디자인원론Ⅰ”, 권용만, 윤형섭 역, 지코사이언스, 2010, p.113. [9] 위의 책, pp.117-118. [10] 이미지 출처: https://modbay.org/mods/1756-creeper-spores.html 참고문헌 곤살로 프라스카,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게임”, 김겸섭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2008. 김영욱, “VR 영상 콘텐츠의 현황과 프레즌스(presence) 향상을 위한 과제”, 문화영토연구 Vol. 4 No.2, 2023. 조수선, 이숙정 외 3명, “뉴미디어 뉴커뮤니케이션”, 이화출판, 2014. 케이티 세일런, 에릭 짐머만, “게임디자인원론Ⅰ”, 권용만, 윤형섭 역, 지코사이언스, 20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큐레이터) 박정서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시각예술 분야에서 전시, 비평, 워크숍을 한다. (비)과학에 관심을 두고 뉴미디어 아트와 비디오게임을 탐구한다. 최근 참여한 프로젝트로는 연구 <기이한 게임과 으스스한 게임>(2024, 서울문화재단 RE:SEARCH), 전시 (2024, WWW SPACE), 워크숍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게임 비평>(2024, 아트코리아랩 아트랩클럽), 전시•워크숍 (2024, 하자센터 미디어아트 작업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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