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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모전수상작] 크리퍼가 부수고 간 자리

    마인크래프트(Minecraft)는 겉시늉의 세상이다. 엉성한 외피 이미지로 포장된 네모난 객체들이 생태계를 이룬다. 또한 현실과 비현실, 매끈함과 모서리, 플레이어와 데이브(주인공), 원형과 변형 등 양립 불가능한 것들이 공존한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데이브의 몸으로 젖지 않는 비를 피해 귀가한다. 그리고 온기 없는 모닥불을 피워 몸을 녹인다. 방 안이 따뜻한 빛으로 물들면, 솜 없는 침대에 누워 깨어 있는 채로 잠에 든다. < Back [공모전수상작] 크리퍼가 부수고 간 자리 20 GG Vol. 24. 10. 10. 마인크래프트(Minecraft)는 겉시늉의 세상이다. 엉성한 외피 이미지로 포장된 네모난 객체들이 생태계를 이룬다. 또한 현실과 비현실, 매끈함과 모서리, 플레이어와 데이브(주인공), 원형과 변형 등 양립 불가능한 것들이 공존한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데이브의 몸으로 젖지 않는 비를 피해 귀가한다. 그리고 온기 없는 모닥불을 피워 몸을 녹인다. 방 안이 따뜻한 빛으로 물들면, 솜 없는 침대에 누워 깨어 있는 채로 잠에 든다. 전술한 과정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맞닿아 있지만 엄연히 다르게 작동한다. 현실과 다른 인지 체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상의 객체와 플레이어 사이에 생성되는 보이지 않는 관계망은 현존감(presence)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는 어느새 스크린 밖으로 나와 현실 위에 포개진다. 마인크래프트의 겉시늉은, 크리스마스트리에 걸린 장식용 선물 상자와 같다. 그저 작고 가볍게 포장된 이미지로서의 역할을 한다. 솜 없는 침대 현실 세계는 매끈한 표면의 사물로 가득하다. 그러나 마인크래프트 속 세상은 모두 블록 형태로 모서리를 갖고 있다. 입체의 면으로만 이루어진 객체들은 간신히 식별 가능한 범위 내에서 (비)현실적으로 단순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부분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 있어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사물을 인지할 때 그다지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 속 사물은 물리적인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모든 사물은 형상과 관념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물은 겉을 이루는 외형보다 관념으로서 존재하는 순간이 더 많은 듯하다. 그렇기에 마인크래프트의 단순한 묘사는 대상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인지함에 있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상상력이 부족한 부분을 알아서 채워 넣기 때문이다. 이렇듯 마인크래프트의 블록 세상에 들어서면, 우리의 인지는 저절로 전이된다. 누구도 네모난 고양이에 대해 이의제기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전이는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이다 [1] . 우리가 기존에 알던 것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뒤바뀌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부분이 맞닿은 상태로 변형되어 또 다른 형상을 갖게 되는 것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변형이 되어도 원형을 상기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인지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이다. 마인크래프트 속 세상을 거닐면, 기억 저편에 담긴 현실 세계의 이미지가 무수한 형태로 분절되어 떠오른다. 그리고 확장된 인지 체계 위에 포개진다. 무엇이 원본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일은 무의미해 진다. 사실 인지의 전이는 마인크래프트에만 해당된다기 보다 비디오게임 전반에서 일어난다. 상하좌우로만 이동하는 납작한 이차원 게임을 떠올려 보자. 이차원의 세계는 우리가 경험해 본 적 없는 곳이다. 그러나 비디오게임 안에서는 이러한 제약이 문제 되지 않는다. 또한 이차원 게임에서는 마인크래프트보다 고도로 압축된 형상의 객체들이 등장한다. 우리는 두 개의 네모난 픽셀만 보고도 인간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이렇듯 비디오게임 내부에서는 고도로 압축된 묘사가 추상적인 레벨에서 소화 과정을 거친다. 인지의 전이는 우리가 가진 고정된 관념과 사고, 그리고 이미지로부터 해방을 선사하며 확장된 감각의 세계를 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젖지 않는 비에 추위를 느끼고, 온기 없는 벽난로에서 몸을 녹이고, 솜 없는 침대에서 푹신함을 느낄 수 있다. * 마인크래프트의 침대 [2] 네모난 고양이의 골골송 [3] 비디오게임 속 객체들은 명백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현존감을 기반으로 게임 속 가상의 객체들과 지각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비디오게임에서의 현존감은 말 그대로 현실을 넘어 게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상태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험은 가상 환경 내부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이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닌, 플레이어가 주관적으로 감각하는 심리적인 공간에 가깝다 [4] .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데이터로 이루어진 가상의 우주로, 현실과 동일한 물리적 실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존감은 비디오게임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현실감 외에도, 플레이어와 가상의 객체 사이에 생성되는 사회적 관계를 포함한다. [5] 마인크래프트의 싱글 플레이 모드는 온 우주를 플레이어 혼자 쓴다. 플레이어를 제외한 다른 생명체는 모두 NPC(Non Player Character)다. 이러한 점이 플레이어에게 자유로움과 안락함을 주기도 하지만,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마인크래프트에 등장하는 다양한 생물, (비)공격적인 몹(mob), 마을 주민은 매우 단순한 행동으로 프로그래밍된 NPC이긴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살아있다는 것을 감각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 마인크래프트의 고양이 [6] 플레이어는 여러 동물과 상호 작용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신뢰를 쌓으면 반려동물처럼 함께 지내는 것도 가능하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마인크래프트의 고양이는 생선을 좋아한다. 플레이어가 바다에서 생선을 낚아 고양이에게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면 점차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네모난 상자에 다리와 꼬리가 달린 투박한 고양이는 야옹 소리를 내며 사뿐하게 걷고 침대 위에서 시간을 보낸다. 긴 채집 끝에 집으로 돌아가 고양이를 마주하면, 보드라운 반려묘의 감촉이 떠오르며 골골송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렇듯 마인크래프트 속 가상의 생명체와 플레이어 사이에 오가는 상호작용은 단순하고 때로는 단방향적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가까운 관계망을 피워내기도 한다. 홀로 숲이나 동굴에 들어가 재료를 채집하고, 외딴곳에 집을 짓고 살아갈 때는 알지 못했던 플레이어의 생기를 감지할 수 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온종일 낚시만 해야 했던 고양이와 ‘나(플레이어)’ 사이의 결속은 사회적인 풍부함(Social Richness) [7] 으로 이어지는 현존감을 발생시키며 물리적 실체의 필요성을 허문다. 그들은 어떤 생물의 외피를 두르고 단순하게 움직이는 상자처럼 보일 수 있으나, 플레이어를 움직이게 하고 때로는 죽게 만드는 크고 작은 동기가 된다. 즉 가상 세계에서의 삶과 죽음은 이들이 관장한다. 내재적인 모서리 게임은 셀 수 없이 많은 요소로 구성된 하나의 무리다. 즉 게임은 시스템적이다. 여기에서 시스템은 광범위한 의미를 담아낸다. 우선 게임의 시스템은 사물과 사물, 사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지는 가지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가지는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수한 갈래로 뻗어 있다. 게임의 시스템은 구조적인 요소와 감각적인 요소를 포괄한다. 따라서 이를 텍스트로서 정의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스템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이 상호작용적인 관계 안에서 복합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8] . 이는 게임의 시스템에 대한 모호한 정의를 하나로 묶어 냄과 동시에 여러 가지 경우를 포함한다. 비디오게임의 시스템은 무수하게 얽힌 관계망을 기반으로 하나의 복합체를 이루며 내부에서 외부로 점차 뻗어 나간다 [9] . 이렇게 시스템은 또 다시 현실 위에 포개지고 또 다른 우주를 이루게 된다. 마인크래프트에 등장하는 크리퍼(Creeper)는 이름처럼 몰래 다가와 자폭하며 일대를 박살 내는 몹이다. 크리퍼는 일정 조도 이하로 내려가면 어디서든 생성된다. 특히 지하 동굴이나 깊은 숲, 비 오는 날에 자주 출몰한다. 크리퍼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폭발할 듯 빛을 내며 경고한다. 그리고 삽시간에 터져 버린다. 물론 크리퍼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아도 스스로 폭발하기도 한다. 즉 크리퍼의 행보는 예측할 수 없다. 소리 없이 다가와 일상의 한 부분을 통째로 날려버리고는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다. * 크리퍼가 부수고 간 자리 [10] 그러나 크리퍼는 사실 현실 도처에 존재한다. 위기는 언제나 소리 없이, 예측 불가능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드러난 거친 모서리를 흉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모서리를 내재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모서리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둘 이상의 면이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본 채로 맞닿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또한 무수한 존재자들의 각으로 이루어진 모서리의 세계다.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어느 한 부분이 맞닿은 채로 커다란 시스템을 이룬다. 이처럼 크리퍼가 부수고 간 자리는 내재적인 현실의 모서리를 보는 눈과, 이를 매만질 수 있는 손으로 확장된다. 마인크래프트의 네모난 블록, 그리고 이를 감싸고 있는 외피는 이미지 너머로 연결되는 또 다른 차원의 경로를 연다. 다시 크리스마스트리에 걸린 장식용 선물 상자를 떠올려 보자. 이는 분명 선물 같은 외양을 하고 있지만 선물로 기능할 수 없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는 이 작고 가벼운 상자에 담을 수 없는 따뜻한 온기와 안락한 공간을 떠올리고 감각할 수 있다. 온 세상의 모서리와 외피를 매만지며, 지난 겨울 공원에서 우연히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늦더위를 달래 본다. * 지난 겨울의 공원 [1] 곤살로 프라스카,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게임”, 김겸섭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2008, p.18. [2] 이미지 출처: https://minecraft.fandom.com/wiki/Bed [3] 고양이가 기분이 좋을 때 내는 소리를 노래하는 것에 비유해 일컫는 말이다. [4] 김영욱, “VR 영상 콘텐츠의 현황과 프레즌스(presence) 향상을 위한 과제”, 문화영토연구 Vol. 4 No.2, 2023, pp14-17. [5] 조수선, 이숙정 외 3명, “뉴미디어 뉴커뮤니케이션”, 이화출판, 2014, pp.107-109. [6] 이미지 출처: https://www.digitaltrends.com/gaming/how-to-tame-cat-minecraft/ [7] 조수선, 이숙정 외 3명, “뉴미디어 뉴커뮤니케이션”, 이화출판, 2014, pp.111-112. [8] 케이티 세일런, 에릭 짐머만, “게임디자인원론Ⅰ”, 권용만, 윤형섭 역, 지코사이언스, 2010, p.113. [9] 위의 책, pp.117-118. [10] 이미지 출처: https://modbay.org/mods/1756-creeper-spores.html 참고문헌 곤살로 프라스카,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게임”, 김겸섭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2008. 김영욱, “VR 영상 콘텐츠의 현황과 프레즌스(presence) 향상을 위한 과제”, 문화영토연구 Vol. 4 No.2, 2023. 조수선, 이숙정 외 3명, “뉴미디어 뉴커뮤니케이션”, 이화출판, 2014. 케이티 세일런, 에릭 짐머만, “게임디자인원론Ⅰ”, 권용만, 윤형섭 역, 지코사이언스, 20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큐레이터) 박정서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시각예술 분야에서 전시, 비평, 워크숍을 한다. (비)과학에 관심을 두고 뉴미디어 아트와 비디오게임을 탐구한다. 최근 참여한 프로젝트로는 연구 <기이한 게임과 으스스한 게임>(2024, 서울문화재단 RE:SEARCH), 전시 (2024, WWW SPACE), 워크숍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게임 비평>(2024, 아트코리아랩 아트랩클럽), 전시•워크숍 (2024, 하자센터 미디어아트 작업장) 등이 있다.

  • [공모전] 모바일 리듬 게임에서 ‘엄지러’를 선택하기-‘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하츠네 미쿠’를 중심으로

    ‘엄지족’이라는 신조어가 있었다. 2000년대 폭발적으로 보급된 스마트폰이 사회 전 분야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을 때였다. 엄지를 이용해 스마트폰의 화면을 누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청년을 일컬어 ‘엄지족’이라 불렀다. M으로 시작하는 것에 착안해 이들 세대를 모바일 세대, M 세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모두가 ‘엄지족’이자 모바일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 Back [공모전] 모바일 리듬 게임에서 ‘엄지러’를 선택하기-‘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하츠네 미쿠’를 중심으로 13 GG Vol. 23. 8. 10. ‘엄지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엄지족’이라는 신조어가 있었다. 2000년대 폭발적으로 보급된 스마트폰이 사회 전 분야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을 때였다. 엄지를 이용해 스마트폰의 화면을 누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청년을 일컬어 ‘엄지족’이라 불렀다. M으로 시작하는 것에 착안해 이들 세대를 모바일 세대, M 세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모두가 ‘엄지족’이자 모바일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바일 리듬 게임의 세계에서 ‘엄지족’, 다른 말로 ‘엄지러’는 여전히 실존한다. 스마트폰 리듬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0년대 후반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모두가 ‘엄지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바일 리듬 게임의 세계에서 ‘엄지러’의 위치는 다소 미묘하다. 노트를 정확한 타이밍에 터치해야 하는 일반적인 포맷의 모바일 리듬 게임을 상상했을 때, 분명히 모바일 리듬 게임의 유저 대다수는 엄지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엄지러’다. 그러나 노트가 더 많이, 빨리 등장하며 고난도의 플레이가 요구될수록 뚱뚱한 엄지 두 개만을 움직이는 플레이는 명확한 한계를 가진다. 이론상 발로도 플레이할 수 있는 <지오메트리 대시Geometry Dash>나 엄지가 누비기 비교적 수월한 세로형 인터페이스의 <피아노 타일 2Piano Tiles 2>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기에 모바일 리듬 게임의 ‘엄지러’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한계가 있음을 알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엄지로 플레이하거나, 지금부터라도 낮은 레벨부터 다른 손가락을 사용하는 연습을 하며 플레이 스타일을 ‘교정’하는 방법이다. 전자를 선택한 이용자라도 이걸 엄지로 하라고 만든 것이 맞는지 의심되는 곡을 만나면 다시 갈등을 시작한다. 이 필연적인 고민은 하나의 의문을 낳는다. 리듬 게임의 ‘엄지러’는 바뀌어야만 하는가? 인터페이스의 전환과 ‘엄지러’의 탄생 ‘엄지러’는 원래 리듬 게임에 존재하지 않는 계층이었다. 리듬 게임은 이전까지 감각적인 콘트롤러를 탑재한 아케이드 기기를 무기로 이용자를 매혹시켰다. 이용자는 강렬한 음악이 귓가를 때리는 오락실에서 버튼을 누르고, 돌리고, 발판을 밟고, 북을 치고, 기타를 치는 식으로 리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2000년대부터 오락실이 쇠퇴함에 따라 온라인과 콘솔, 모바일 등 각각의 형태를 기반으로 리듬 게임이 분화되었다. 모바일 리듬 게임으로 넘어오며 리듬 게임은 기존의 무기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각양각색의 감각적인 콘트롤러 대신 게임사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은 피처폰의 조악한 버튼, 조금 더 나아가서는 스마트폰의 작은 터치스크린뿐이었다. 이 터치스크린 속에서 특정한 버튼을 누르면 여전히 소프트웨어는 우리의 입력에 반응하지만, 과거와 같이 게임 소프트웨어 바깥에서 주어지는 ‘눌렸음’의 촉각적 신호는 사라진다.1) 이 물리적 제약은 감각적인 콘트롤러를 내세웠던 리듬 게임에 엄청난 도전이었다. 대신 스마트폰은 리듬 게임에게 휴대성과 대중성을 가져다주었다. 게임사는 모바일 환경에 맞춰 ‘엄지족’이 엄지로 간편하게 플레이할 수 있게끔 리듬 게임을 설계했고, ‘엄지족’은 엄지로 플레이를 했다. ‘엄지러’의 탄생이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리듬스타 등의 피처폰 모바일 리듬 게임이 인기를 끌었으며, 2010년부터는 고사양의 스마트폰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아이폰, 안드로이드와 같은 스마트폰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한 리듬 게임들이 개발되었다.2) 형태의 전환은 새로운 규범을 만들었다. 스마트폰으로 리듬 게임을 한다는 것은 게임사가 더는 이용자가 리듬 게임을 하는 방법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케이드 리듬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정해진 장소로 가 정해진 콘트롤러를 정해진 방식으로 조작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모바일 리듬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용자들에게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그들은 불특정한 장소에서 불특정한 기기를 불특정한 방식으로 조작한다. 이용자는 카페에서 태블릿을 눕혀놓고 모든 손가락을 활용해 게임을 플레이할 수도 있고, 핸드폰을 들고 집에 누워서 엄지로 플레이할 수도 있으며 최신형 접히는 핸드폰을 산 것을 후회하며 접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검지로 플레이할 수도 있다. 이 새롭고 다양한 사용자 경험 위에서 이전과 다른 플레이 문화가 축적됐다. 인터페이스의 전환이 새로운 장르적 전통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바일 리듬 게임에게 ‘어느 정도 엄지 플레이를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은 필수적인 동시에 중요하다. 이 질문에 어떤 답을 내리느냐에 따라 해당 리듬 게임의 방향성이 결정된다. 캐릭터 IP를 내세운 대중적인 모바일 리듬 게임인 처럼 이론상 엄지로만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있는 한편, 아예 어려운 리듬 게임을 테마로 한 <다이나믹스Dynamix>처럼 엄지 플레이가 거의 불가능한 게임도 있다. <칼파KALPA>처럼 엄지 플레이 난이도와 다지 플레이 난이도를 이원화하는 선택을 하거나, 특정 레벨 이상부터 다지 플레이를 필수로 만드는 등의 절충안을 내놓은 경우도 존재한다. “모든 곡은 두 손가락으로 풀 콤보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중 ‘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하츠네미쿠’(이하 프로세카) 또한 이론상 엄지로만 플레이가 가능한 모바일 리듬 게임이었다. 주식회사 세가와 컬러풀 파레트, 크립톤 퓨처 미디어가 공동 개발한 프로세카는 보컬로이드 IP를 이용한 캐릭터 수집 요소를 결합해 만든 대표적인 모바일 리듬 게임 중 하나다. 이 리듬 게임이 호명된 이유는 이 게임이 더 이상 엄지로만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서버에서 개최된 창작 콘테스트 ‘초고난이도 프로세카 ULTIMATE’의 당선작 3곡이 게임 내 최고 레벨을 경신하는 37레벨로 수록되며 이 명제가 깨진 것이다. 이는 게임의 프로듀서인 콘도 유이치로의 “모든 곡은 두 손가락으로 풀 콤보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과거 발언을 번복하는 문제로써 이용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었다. 이에 게임사는 37레벨은 번외 레벨로 예외적인 경우이며, 이하의 레벨에서는 앞서 말한 원칙을 지키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사실 프로세카가 이론상으로 엄지로만 플레이가 가능했을 때에도 높은 난이도의 곡들은 거의 엄지로 플레이하기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프로세카에는 엄지만 사용하여 올 퍼펙트를 달성한 것이 확인되지 않은 곡이 다수 존재하며, 같은 난이도의 곡이라도 엄지로 플레이할 때 압도적으로 어려운 곡도 존재한다. 높은 난이도의 곡을 엄지로 플레이하는 이용자가 있더라도 그것은 극히 소수일 뿐이다. 그리고 가능과 불가능의 영역을 넘어, 여러 손가락으로 플레이하는 것은 엄지로만 플레이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런데 왜 ‘엄지러’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물론 여러 손가락을 사용하려면 태블릿과 같은 일정 크기 이상의 터치스크린을 눕혀야 한다는 제약이 존재한다. 하지만 높은 난이도의 곡을 시도할 정도로 열성적인 이용자가 단지 그것 때문에 엄지를 고수한다는 점은 이상하다. 더 이상한 점은 여러 손가락으로 플레이하는 이용자조차 37레벨 곡 업데이트에 대하여 ‘엄지 배려’를 하라고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다. 높은 난이도의 곡 플레이가 가능한 ‘엄지러’는 원래도 거의 없었는데,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이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는가? ‘엄지러’라는 전통 이 모든 반응은 ‘엄지 플레이’와 ‘다지 플레이’의 구분이 단순한 플레이 방식의 차이 그 이상을 함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이 구분이 단순한 플레이 방식의 차이였다면 엄지로 32레벨까지 클리어하고 막히면 33레벨부터는 다지로 플레이 해 클리어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용자들은 33레벨 ‘엄지’ 클리어와 33레벨 ‘다지’ 클리어를 다른 것으로 구분한다. 게임 내적 시스템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클리어하든 아무 구분 없이 표기되는 데도 말이다. 이용자들은 대신 게임 외적으로 엄지로 특정 레벨까지 클리어 한 사실을 자랑한다거나, 엄지로 특정 곡을 클리어 한 영상을 공유하며 그들만의 전통을 축적한다. ‘엄지러’를 기준으로 한 비공식 곡 난이도 표를 만들고, ‘다지러’가 엄지로 어디까지 플레이가 가능한지 도전하기도 한다. 이렇게 축적된 전통 위에서 ‘엄지러’의 높은 난이도 도전은 몇몇 이용자의 기행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런 모습은 플레이 방식의 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여러 직업이 있는 RPG 게임에서 상이한 난이도의 직업 루트를 선택하는 것과 더욱 유사해 보인다. 하나의 직업으로 최종 보스를 처치했다는 사실이 인정받으면서도 그것이 곧 다른 직업의 성취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다른 매체와 구분되는 게임의 특징을 논할 때 공통적으로 거론되는 점이 바로 게임과 이용자 간의 상호작용으로 생성되는 새로운 맥락과 이용자의 창조성이다. 이경혁3)은 게임 매체의 수용이 일종의 창조 행위라는 것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로 오락실의 <펌프 잇 업> 고수가 펼치는 두 발 외의 몸을 사용하는 펌프 퍼포먼스를 들었다. 이런 예시는 개별 이용자의 창조적 수용을 보여준다. ‘엄지러’의 전통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게임사를 포함한 모바일 리듬 게임이라는 장르의 구성원은 모두 이 암묵적인 장르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게임 외적으로 구축된 전통은 개별적인 창조적 행위가 아닌 인터페이스의 특징에서 촉발되어 장르의 구성원이 새롭게 창조한 ‘규범’에 가깝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앞선 프로세카 같은 리듬 게임은 특히 게임 내적 시스템의 영향으로 다른 모바일 리듬 게임보다 ‘엄지러’의 규범이 강하게 작용한다. 실제로 엄지 플레이를 염두에 두고 설계된 것뿐만 아니라, 대중성을 위해 양적 랭킹 시스템을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프로세카에는 일정 기간 동안의 플레이 횟수에 따른 양적 랭크인 이벤트 랭킹과 실력을 겨루는 질적 랭크인 랭크 매치가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양적으로 순위를 매길 때 더 유리한 플레이 방법은 당연히 엄지를 이용한 플레이다. 이러한 이원화는 엄지 플레이에 확실한 효용을 부여함으로써 엄지 플레이의 지위를 보장한다. ‘엄지러’를 선택하기 단순한 플레이 방식 이상의 ‘엄지러’ 전통을 고려했을 때, 프로듀서의 발언을 차치하고서라도 이론상 엄지로만 칠 수 없는 곡의 등장이 강한 논란을 불러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RPG 게임의 비유를 다시 가져오면,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지 여부와 별개로 하나의 직업 루트에만 번외 콘텐츠가 개방된 셈이니 말이다. 혹여 ‘다지러’로 전직하더라도, 모바일 리듬 게임을 하는 한 ‘엄지러’의 전통은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 다시 질문해보자. 리듬 게임의 ‘엄지러’는 바뀌어야만 하는가? 무의미한 질문이다. 바꾼다 해도 내가 선택해 키운 ‘엄지러’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1) 이경혁 (2023.04.05.), 플레이어의 숙련도가 머물렀던 곳은 어디였을까: 터치스크린 시대의 숙련도, <게임제너레이션>, URL: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152d8082-f4a1-486d-875d-a05088a28625 2) 강현구 (2019), 스마트폰을 위한 리듬게임 User Interface Design 연구, 석사학위,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3) 이경혁 (2019), <(놀이에서 디지털 게임까지) 게임의 이론>, 문화과학사.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대학원생) 손민정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현대문학과 문화를 공부 중입니다. 글과 함께한 만큼 게임과 늘 함께 해왔습니다. 별별 게임 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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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G Vol. 1 한국에서 문화로서의 게임이라는 말은 다양한 함의를 내포한다. 중독을 유발하므로 규제해야 한다는 규제담론과 산업으로서 진흥되어야 한다는 산업담론 사이에서 갈곳을 잃은 문화담론의 의미를 짚는다. 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 이 작품의 결말은 AR 안경을 쓰고 이루어지는 놀이와 장난스러운 일이 등장인물의 연애 관계를 넘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를 사용하는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부모들은 AR 안경을 압수해버리려고 하는데, 이 때 주인공인 유코와 그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한 번 그 세계에 몸담아서 그 세계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게임의 세계를 이미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게임 이전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게임이 만들어 낸 달콤함과 고통 모두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Read More <용과 같이>, 관광게임 속의 정치적 맥락들 그러나 현실의 우리에게도 용과 같이 시리즈의 주인공 처럼 행동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휴가를 내서 관광지로 여행을 떠난 경우가 그렇다. 일상으로 돌아가 해결해야 할 여러 복잡한 난제를 머리 속에 넣고 있는 상태에서도 우리는 도쿄 신주쿠, 오사카 도톤보리, 오키나와, 후쿠오카, 삿포로, 나고야, 요코하마 등의 거리를 거닐고 지역 음식 등 문화를 경험하면서 하루종일 즐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용과 같이 시리즈를 플레이하는 우리는 코로나19 시대에 일본 관광을 즐기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게 이 시리즈가 본질적으로 관광 게임인 이유이다. Read More QUOVADIS, 게임법 - 국회 안에서 바라본 게임법 진행의 경과와 미래 물론 전부개정안의 모든 내용이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발의하고 보니 보완해야할 부분들도 여럿 보였다. 특히 국내대리인지정제도는 더욱 강화해서 발의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개정안에 빠져 있거나 부족한 부분들은 심사 과정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될 것이다. 또한 다른 게임법 일부개정안과도 병합심사되어 더 좋은 내용으로 고쳐질 것이다. 이를테면 확률형 아이템에 대해서는 컴플리트 가챠 규제 법안이나 이용자 권익보호위원회 규정 법안과 함께 병합심사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느릴지언정 멈추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꾸준히 내딛고 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국민의 꾸준한 관심은 국회를 일하게 한다. Read More [Editor's view] 선언을 넘어선, 실천으로서의 게임문화 매우 급박하게 변하는 것 같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도도한 맥락을 놓치지 않고자 하는 것이 〈게임 제너레이션〉의 목표다. 첫 호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꾸준히 그리고 우직하게 그 길로 가고자 한다. 동시대의 교양으로서, 혹은 지금 시대의 가장 뜨거운 놀이로서 게임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앞으로 이어질 의 모든 이야기일 것이다. Read More [인터뷰] 북미 게임연구자 Consalvo, 한국과 북미의 게임문화를 말하다 콘살보 교수와의 이번 인터뷰는 게임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고찰에 있어 필수적인 게임학의 현재를 진단해보는 한편 북미의 상황에 대해 들어봄으로써 이 시점, 여기에서 고민해볼 만 한 지점들을 모색하고자 기획하였다. 실시간 인터뷰가 어려운 현재 여건상 이 인터뷰는 이메일로 진행되었음을 밝힌다. Read More [창간사] 문화를 향하는 가교의 역할을 기대하며게임문화재단 이사장 적은 인구와 제한된 국토가 우리의 현실이다. 즉 우리의 하드웨어는 매우 초라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창조하고 혁신할 수 있는 생각이라는 소프트웨어다. 그것도 기발한 생각들이 필요하다. 그 절묘한 연결성들을 만들어 내는 게임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미술이 문화로 자리잡은 건 미술관과 큐레이터 때문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제 게임에도 그 장소와 사람이 필요하다. 가 그 역할을 할 가장 중요한 적임자가 되어 주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Read More [축사] 창간을 축하합니다 이렇듯 게임이 단순한 놀이가 아닌 하나의 산업이자 문화로서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게임의 가능성과 가치를 계속 공유하고 논의해야 합니다. 이번에 창간하는 ‘게임 제너레이션’이 게임의 역사, 게임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게임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 등을 되짚어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는 담론의 장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또한 정부와 게임업계, 이용자들이 소통하는 대표 창구로 성장하길 기대합니다. Read More ‘보는 게임’ 제작의 현장을 찾아서 - ‘LCK’ 세계화의 주역, 라이엇게임즈 코리아 진예원 프로듀서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이스포츠 리그는 라이엇 게임즈의 LCK (League of Legends Champions Korea)일 것이다. LCK는 국내와 해외 등지의 LOL 게이머들과 프로 선수들의 팬덤을 아우르는 최대의 축제이다. 이 축제에서 관객들은 경기를 관전하는 짜릿함과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린다. 이렇게 LCK는 게임이 가져다 주는 재미를 끊임없이 확장해나가고 있다. 특히 지난 2020년 롤드컵 결승은 미국 방송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에미 (Emmy) 상을 거머쥐어 그 저력을 톡톡히 증명해내었다. 이번 기사에서는 라이엇 게임즈 코리아에서 LCK 프로듀싱 전반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진예원 PD를 만나 LCK 제작의 비화를 듣는 것은 물론 이스포츠의 전망까지 살펴보도록 할 예정이다. Read More “개발자는 자기 자신을 향해 끝없이 질문해야 한다” - 죄책감 3부작의 개발자 somi 인터뷰 세계에서 마주하게 되는 죄책감을 느슨한 연결로 풀어낸 SOMI의 ‘죄책감 3부작’이 막을 내렸다. 전의 두 작품이 세상 밖으로 닿는 길을 터주었다면, 2020년 신작 <더 웨이크>는 한 개인의 과거와 깊은 내면으로 안내한다. 암호를 해독하며 엔딩에 이르렀을 때, 눈 앞에 펼쳐진 가장 개인적인 삶은 나를 뒤돌아보게 한다. Read More 〈로블록스〉의 상상된 즐거움 로블록스는 조악함으로 가득하다. 게임에 보이는 텍스트의 한글 번역은 개발자가 어떤 번역기를 사용했는지 궁금해질만큼 기괴하고 오류가 많다. 글로벌 게임의 필수 업무인 현지화 작업은 기대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게임의 3D디자인은 대체로 투박한 로우 폴리곤이다. 그 오브젝트를 감싸는 텍스쳐는 단색이거나 대충 그려진 수준이 허다하다. 외형만 그러한가. 캐릭터가 걸어다니는 애니메이션은 어색하고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캐릭터의 몸은 게임 도중에 이유없이 뒤틀리고, 기물 사이에 쉽게 낀다. 다른 온라인 게임에서 버그로 리포트되는 것들이 로블록스에서는 일상적이다. 게임이 추구하는 주제들 또한 무겁지 않고 가볍다. 게임 일부를 예로 들면, 보모가 되어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좀비가 나타나는 학교에서 하룻밤을 보내거나, 무서운 돼지 귀신을 피해 도망다니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자 전부다. Read More 게이머는 난민이 될 수 있는가? - <로스트아크> 대량이주 사태와 난민의 정체성 2021년은 한국 mmorpg 게이머들에게 대량이주의 해로 기록될 것이다. <메이플 스토리>나 <마비노기>의 경우, 아이템을 강화하는 세공도구 같은 유료아이템의 불투명한 확률 매커니즘이 문제였다. 랜덤이라고 표기되었지만 실은 옵션별 숨어있는 차등확률을 통해 랜덤확률에도 못미치는 효과를 보거나, 응당 적용되어야 할 옵션이 오류로 적용되지 않아 수년동안 0%의 확률로 실패한 뽑기를 유발한 것이 문제였다. Read More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이 꽤나 발칙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요 귀여운 녀석이 게임에 미쳐 부모님 몰래 수십만 원어치의 현질을 했고, 그걸 들켜 죗값을 달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우리 엄마는 비슷한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은 바, 대수롭지 않게 ‘애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이모는 ‘이노무 시키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발을 동동거렸다. Read More 구독이 세상을, 게임을 바꿀까? - 구독형 결제,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여기 두 개의 질문이 있다. “당신은 지금까지 몇 개의 게임을 플레이해봤습니까?”와 “당신은 지금까지 몇 개의 게임을 소유해봤습니까?”이다.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온 두 개의 숫자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소유하지 않은 게임도 플레이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Read More 리그 오브 레전드의 유동적 원근법에 관한 노트 변화하는 원근법과 그에 맞추어 재편되는 게임 내 공간감, 플레이어의 시각성은 앞으로 우리의 시각 문화에서 더욱 중요한 위상을 차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각성은 과연 우리의 눈에 어떤 변화들을 불러들일까? 복수 개의 원근법, 회전하는 원근법이 구성하는 세계는 어떤 풍경일까? 우리의 눈은 그런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 더 많고 풍성한 논의가 이 글 위에 쌓여 가기를 기대해 본다. Read More 메타버스, 호흡을 고르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메타버스가 오고 있다”고 발언했다. 에픽게임즈 CEO 팀 스위니도 10억 달러 규모 투자를 유치하고 메타버스를 핵심 비전으로 언급했다. 마크 저커버그는 "향후 5년 후에 페이스북을 메타버스 회사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펄어비스와 텐센트도 메타버스를 주요 아젠다로 언급했고, 지난 NDC에서도 넥슨 김대훤 부사장이 “더이상 게임 회사, 게임 산업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 제안했다. 다분히 메타버스를 의식한 발언이다. Read More 여름은 언제 시작할까 - 북미 최대의 게임쇼, E3가 맞이한 변화와 도전 미국에는 100일간의 여름(100 days of summer)라는 개념이 있다. 5월의 마지막 월요일에 자리잡고 있는 공휴일인 메모리얼 데이를 여름의 시작으로 본다. 한국으로 치면 현충일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메모리얼 데이는 가진 의미와는 상관 없이 그렇게 한국의 절기로 치면 입하같은 날이다. 그리고 여름의 끝은 9월의 첫째 월요일인 레이버 데이다. 노동절 연휴가 되면 이제 여름이 끝났음을 실감한다. 대략 이 기간이 100일이기 때문에 이 때를 100일간의 여름이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도 소소한 인기를 끈 영화 500일의 썸머 또한 이런 개념에서 제목을 빌려온 것이다. 여름에 특별한 시작과 끝이 있다는 개념. 이 개념에 입각해서 보자면 게이머들에게 여름의 시작과 끝은 뭘까? 게이머들에게 여름의 시작은 E3고 끝은 게임스컴이다. Read More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들 - <잇 테이크 투>로 본 게임 플레이어의 조건 2021년 상반기의 최대 화제작이자, 신데렐라를 뽑자면 첫번째로 나올 게임은 바로 <잇 테이크 투> 다. 아직도 영화 <깝스>에서 사타구니에 총을 끼우고 발사하던 장면을 연출한 장본인이라는 사실부터 떠오르는 영화 감독이자, 배우이자, 게임 제작자인 요제프 파레스의 이 최신작은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결과물이다. Read More 즐기는 사람들을 지켜라 - 만화는 어떻게 멸시와 비하를 딛고 일어섰는가 1972년 6월 29일 동아일보에선 “불량만화 화형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불량만화는 사회악의 근원이다”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한국아동도서보급협회’는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위치한 자리다!)에서 ‘어린이 악서 추방대회’를 열고 만화책을 모아 불태웠다. 이 단체는 만화를 두고 ‘유소년의 정서발달을 해친다’, ‘제대로 된 지식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주류의 시선에서, 당시 만화는 ‘악서’였던 셈이다. Read More 한국 게임비평의 궤적과 방향 세계 최초의 게임잡지는 1981년 영국에서 발간된 <컴퓨터와 비디오게임(Computer & Video Games: CVG)>이다. 2004년부터 온라인으로만 발행되다, 2015년에는 온라인사이트까지 폐쇄하고, (www.gamesradar.com )로 리디렉션됐다. Gamesradar+는 여전히 기대작이나 신작 리뷰, 업계동향뿐 아니라 알찬 내용의 작품비평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한국에서 게임잡지가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뒤인 1990년대 초반이다. 1980년대 PC 보급시기와 맞물려 닌텐도(Nintendo)의 ‘패미콤(Famicom)’을 국산화한 ‘현대 컴보이’가 소개됐다. 이후 세가(Sega)의 16비트 ‘메가 드라이브(Mega Drive)’를 삼성전자가 국내버전으로 바꾼 ‘수퍼 겜보이’가 발매되고, 콘솔게임에 대한 관심 급증이 게임전문잡지의 탄생을 추동했다. Read More

  • This is a Title 03 | 게임제너레이션 GG

    < Back This is a Title 03 This is placeholder text. To change this content, double-click on the element and click Change Content. This is placeholder text. To change this content, double-click on the element and click Change Content. Want to view and manage all your collections? Click on the Content Manager button in the Add panel on the left. Here, you can make changes to your content, add new fields, create dynamic pages and more. You can create as many collections as you need. Your collection is already set up for you with fields and content. Add your own, or import content from a CSV file. Add fields for any type of content you want to display, such as rich text, images, videos and more. You can also collect and store information from your site visitors using input elements like custom forms and fields. Be sure to click Sync after making changes in a collection, so visitors can see your newest content on your live site. Preview your site to check that all your elements are displaying content from the right collection fields. Previous Next

  • 되돌릴 수 있는가? - 13기병방위권, 호라이즌, 우크라이나

    물론 게임은 현실과 다르다. 게임을 통해 얻은 이러한 통찰을 현실에 적용한다고 하면 어떤 일이 가능할까? 회고적 평가를 전제하는 슬로건을 거부하는 것이 시작이다. 과거의 정상적 상태를 회복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원칙과 대안을 논하는 일이 필요하다. 과거 러시아가 지배한 영토가 어디든 우크라이나를 침공해도 되는 이유는 애초에 없다. < Back 되돌릴 수 있는가? - 13기병방위권, 호라이즌, 우크라이나 06 GG Vol. 22. 6. 10.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매력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세계에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는 데에 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말 그대로 세상이 멸망한 상황을 전제한다. 게임의 주인공은 망한 세상 안에서도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이러한 노력은 유저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의 결실을 맺는다. 즉, 우리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를 향유하는 이유는 세상이 망하더라도 인류는 어떻게든 자기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어서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세상이 망한다’라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온 것일까? 어떤 대답이든 게임 밖 현실에 대한 불만족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세상을 ‘리셋’할 수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대가를 치르는 원인이 된 어떤 실수 혹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믿음은 종종 정치적 구호로 표현된다. 가령 도널드 트럼프의 “Make America Great Again”은 무언가 잘못되기 시작하기 직전의 어떤 시점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즉 ‘정상화’의 욕망에 호응하는 회고적 선거 구호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감각은 전쟁에도 동원된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복해서 호출하는 세계관도 결국은 이것이다. 푸틴의 전쟁 논리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일 때만 ‘정상적 상태’일 수 있다. 따라서 푸틴에게 있어서 전쟁은 우크라이나를 새롭게 러시아의 영토로 병합하는 게 아니라 뭔가 잘못된 현재를 제대로 된 과거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게 푸틴이 지금의 사태를 ‘전쟁’이라 표현하지 않고 ‘특수작전’이라고만 고집스럽게 말하는 것의 배경 중 하나일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인들의 인식은 이와는 정반대인데, 그들에게는 소련으로부터 지배를 당한 과거가 비정상적 상태인 현재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해법은 소련의 지배를 받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일 수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9세기의 ‘키이우 루시’까지 언급하는 이유는 정통성에 있어 우크라이나의 우위를 근본적으로 확립하고자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의 시계를 9세기로 돌릴 순 없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정치는 러시아가 아닌 유럽의 일부가 되는 게 가능했던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타협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이 오랜 기간 현안으로 다뤄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론적으로 말해서,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는 것에 성공한다 해도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예를 들어 〈13기병 방위권〉의 결말에 대해 생각해보자. 〈13기병 방위권〉은 이상적 세계를 다시 만들기 위한 재시작의 시점을 언제로 해야 하느냐 라는 주제를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물론 이것이 게임이 다루는 주제의 전부는 아니다). 일본인들이 만든 게임이다 보니 ‘역사’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 점을 감안해서 보자면 게임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과거 시점이 1945년과 1985년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게임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때, 결국 일본인들이 ‘되돌아갈 수 있는’ 선택지는 패전으로 치달은 군국주의이거나 안보투쟁 이후 거품으로 귀결된 80년대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임의 주된 배경은 1985년의 세계이다. 1945년의 세계는 비록 그것이 외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멸망을 피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주인공들은 게임의 엔딩에서 자신들이 그 일부를 이루는 1985년의 세계를 새로운 미래에 다시 구현하려고 한다. 결국 〈13기병 방위권〉의 결말이 제시하는 ‘재시작’의 시점은 어찌됐건 1980년대로 봐야 하는 것이다. * 〈13기병 방위권〉은 일본 현대사의 여러 시점을 오가며 주인공들의 교복과 주변 환경 등을 통해 이를 드러내고자 한다. 각각의 시점은 실제 일본 현대사에서의 주요 분기점으로 나타난다. 오늘날의 일본 주류정치는 현실의 불만에 대한 돌파구를 군국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에서 찾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만든 일본 정부는 이제 ‘적 기지 공격 능력’을 거론하며 패권을 확장하려고 한다. 일본의 우익세력이 실제 전쟁을 일으킬 의지를 갖고 있는지와는 별개로, 이것은 어찌됐건 ‘전쟁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어떤 행보로 평가하는 게 불가피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쟁의 가능성’을 실제로 뒷받침하는 알리바이로 기능한다. 일본 뿐만 아니라 독일의 재무장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런 현실까지 고려하면 〈13기병 방위권〉의 메시지는 패전을 겪고 평화주의를 수동적으로 채택하는 결말을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것으로도 읽힌다. 그러나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것은 현실에선 1945년이 있었기 때문에 1985년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패전이 있었기 때문에 요시다 내각의 평화주의가 가능했던 거고, 요시다 독트린이 있었기 때문에 그 반발로서 기시 내각이 1960년 신미일안보조약을 추진한 것이며, 그게 다시 1970년까지의 안보투쟁 국면과 그 이후 정경유착으로 기억되는 경제 우선의 시스템으로 귀결됐던 거다. 1985년은 그러한 이유로 조성된 호황기가 플라자 합의 등 대외 변수가 작용한 끝에 꺾이기 시작한 해다. 이 시점에 다시 시작한들, 불황과 이어지는 우익의 재부상을 막는 게 가능할까?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13기병 방위권〉의 결말은 ‘쇼와 향수’로의 도피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기만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 ‘회상편’과는 달리 ‘붕괴편’에선 기계들과의 싸움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사실은 작품 자신에 대한 우화처럼 느껴진다. 어느 시점에서 다시 시작해도 실패를 되풀이하는 게 불가피하다면 아예 태초로 돌아가보는 것은 어떨까? 〈호라이즌〉 시리즈는 이런 가정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호라이즌〉이 상정한 다시 되돌아 온 ‘태초’는 인위적이다. 멸망 후 도래한 암흑 속에서 신이 “빛이 있으라”고 말하는 것은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새로운 시작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되돌아간다’는 것을 전제하려면 ‘재시작’은 반드시 인간이 설정한 어떤 조건들의 반영이어야 한다. 〈호라이즌〉에서는 비록 100%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이아’ 시스템이 이 역할을 전담한다. 그러나 바로 이 조건 때문에 ‘재시작’은 그저 ‘되돌아가는 것’이 될 수 없었다. 〈호라이즌 제로던〉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이아’ 시스템의 어떤 오류가 또 한번의 인류 멸망을 촉발할 위기를 일으킨 것을 주인공 에일로이가 막아내는 얘기다. 만일 〈호라이즌〉 시리즈의 얘기가 이렇게 마무리가 됐다면 우리는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태에 현명하게 대응한 인류가 이전 세계의 지식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재시작’의 시대를 순조롭게 이어가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의 결말은 이러한 기대를 순진한 것으로 만들고야 만다. 새로운 인류를 다시 멸망시킬 뻔한 ’가이아’의 오류는 돌발사태였던 게 아니라 이전 세계로부터의 연속성을 가진 사건의 결과였던 것이다. 심지어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의 결말은 이전 세계의 존재 때문에 멸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류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이전 세계의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모든 것을 새롭게 ‘재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되돌아가고자 했다’라는 사실까지 되돌릴 수 없는 이상 온전히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유일하게 남는 선택지는 설령 미래가 절망뿐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발을 딛고 선 바로 그 지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모색을 계속하는 것이다.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 엔딩의 에일로이와 동료들이 마주한 길도 그것이다. 물론 지구를 향해 달려오는 절대악에 직면해있는 이들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은 ‘게임’이기 때문에, 〈호라이즌〉 시리즈를 이것으로 끝내기로 한 게 아니라면, 에일로이와 동료들은 그게 뭐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물론 게임은 현실과 다르다. 게임을 통해 얻은 이러한 통찰을 현실에 적용한다고 하면 어떤 일이 가능할까? 회고적 평가를 전제하는 슬로건을 거부하는 것이 시작이다. 과거의 정상적 상태를 회복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원칙과 대안을 논하는 일이 필요하다. 과거 러시아가 지배한 영토가 어디든 우크라이나를 침공해도 되는 이유는 애초에 없다. 러시아의 침공이 부당한 이유는 먼 옛날부터 존재해 온 독립적 국가로서 우크라이나의 역사나 민족의 문제과 큰 관계없다. 전쟁은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전쟁은 오늘 이 순간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인 것이다. 이미 답을 다들 알고 있는데, 안 되는 일을 안 된다고 말하는 걸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이 별로 없는 세상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Kim Gyuri

    A researcher studying at Sungkyunkwan University, Department of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with the focus on immersive gameplay prompt from pre-existing canon versus unexpected encounterments. She is a long-time player of Bungie’s and excited for reboot. Kim Gyuri Kim Gyuri A researcher studying at Sungkyunkwan University, Department of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with the focus on immersive gameplay prompt from pre-existing canon versus unexpected encounterments. She is a long-time player of Bungie’s and excited for reboot. Read More 버튼 읽기 Is this Lies of K?: “Lies of P” game discourse in the context of the South Korean game industry’s longing for a stand-alone game title “Lies of P” (Neowiz, 2023) takes place in Krat, a fictional city inspired by the Belle Époque period in Europe. One of the game’s NPCs (non-player characters), Eugénie, is portrayed as an outsider from a distant country east of Krat. She claims to come from the so-called ‘country of the morning,’ with a visual character design that resembles East Asian ethnic groups. Perhaps this character’s story was inspired by the Joseon Dynasty, a kingdom that existed on the Korean peninsula from the 14th to 19th century, which was typified as the “Land of Morning Calm” in the West around the 18th century based on the loose translation of the country’s name in Chinese characters (朝鮮).

  • 21

    GG Vol. 21 게임과 시간이 얽히며 만들어지는 21세기 디지털게임의 독특한 현상들을 기술, 철학, 산업의 관점에서 살펴봅니다 4X장르의 강자 패러독스 인터랙티브가 구축한 대전략의 길 개인적으로 4X/대전략 게이머가 되는 일에는 하나의 허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문명’ 시리즈로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거기서 더 나아가 다른 4X, 대전략 게임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느냐다. 애초에 일반적으로는 4X 라는 명칭도 무슨 소리인지를 잘 모른다. Read More <검은 신화: 오공>의 성취는 중국 문화권 바깥에서도 충분히 이해되는 것인가? 이를테면 많은 한국 게이머들은 매 챕터가 끝날 때 등장하는 ‘다음 회에서 알아보자’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는 회본 형태로 챕터가 정리되는 서유기 원전의 끝 문장을 그대로 차용해 온 부분이고 원전 ‘서유기’가 한국에서는 널리 읽히는 편은 아니라는 문제에서 기인한다. 그나마 친연성이 있는 한국에서도 이런 상황인데, 서구권까지 넘어가게 되면 사실상 <오공>을 이해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Read More <다키스트 던전>을 <다키스트 던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개발진이 어째서 전작과 후속작의 틀을 바꾸고자 했는지. 어떤 요소들이 이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아야만 결정이 왜 내려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무엇이 다키스트 던전을 각별하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Read More <마우스워싱>: 노스탤지어가 흐물거릴 때 자본주의적 체인 안에서 상품이 개별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과정은 세세하게 분할되어 실체는 추상적인 절차로 파편화되고 프로세스는 우연적인 집합에 불과할 때, 블랙 박스 속 물건을 통해 주권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지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Read More [Editor's View] 시간 속의 게임, 게임 속의 시간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시간 속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존재들이 살아온 시간의 시간의 누적을 기록해 역사라고 부르기도 하죠. 그 누적 속에서 놀이는 사실 오랫동안 잉여시간 취급을 받아온 것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Read More [논문세미나] 우리 삶 속의 게임: : No Time to Dream 브랙스턴 소더만(Braxton Soderman)의 은 젠더화된 게임 취향을 ‘시간’의 관점에서 규명한 글이다. 그에 따르면 흔히 게이머는 ’하드코어(hardcore)’와 ‘캐주얼(casual)’ 집단으로 구분되고, 이중 하드코어 게이머는 ‘백인 청소년 남성’, 캐주얼 게이머는 ‘중년의 여성’ 집단으로 표상되곤 한다. 즉, 백인 청소년 남성들이 곧 ‘하드코어 게임’을 즐기는 ‘하드코어 게이머’이며, ‘캐주얼 게임’을 플레이하는 ‘캐주얼 게이머’는 곧 중년 여성들이라 인식되어왔다는 것이다. Read More [논문세미나] 평행하다가도 뒤엉키는 게임과 현실의 시간: "Introduction to Game Time". In First Person: New Media as Story, Performance, and Game 게임에 열중하다가 시계를 봤을 때 몇 시간이 훌쩍 흘러가있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반대로 온라인 게임을 할 때면 많은 양의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 몬스터가 다시 리젠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우두커니 한 자리에 서있는 그 순간은 몇 초밖에 되지 않더라도 어느 때보다 지난하게 흘러간다. 시간은 어떤 플레이를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체감되기 때문에 게임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흘러가는 면이 있다. Read More [인터뷰] 게임연구학회의 새로운 도전, DiGRA-K 윤태진 학회장 024년 3월, 세계 최대 게임 연구 단체인 '디그라(DiGRA; Digital Games Research Association)'의 한국지회(디그라 한국학회)가 설립되었다. 디그라 한국학회는 영미권과 유럽, 남미 등에 이어 18번째로 설립된 지회로서, 게임 연구의 학제적 접근과 현장과의 연결성을 지향하고 후속세대 지원, 국제교류 및 협력연구 등의 활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분과를 뛰어넘는 학술교류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상대적으로 미진했던 국내 게임 연구 분야에 있어, 다양한 업계 현장과 학계를 포괄하고자 하는 새로운 형태의 학회가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Read More 게임에 대한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의 문화 코드화 트랜스페미닌 (transfeminine)은 논바이너리부터 트랜스여성까지, 트랜스젠더 중에 상대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젠더 표현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논바이너리 중에 스스로를 여성 젠더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 이들 (she/they)이 여기 속하고 트랜스여성 (she/her)이 가장 확실하게 속하는 계열이다. 그리고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라고 하면 다양한 SNS 및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를 기반으로 산발적으로 발생한 정체성 기반 네트워크를 이른다. Read More 어느새 넘쳐나는 연말 게임쇼 총정리 어워드가 필요로 하는 여론이 이 세 원천에서 발원하기에, 보통 시상식 심사는 창작자 중심 구성에서 출발해 비평자가 추가되고, 여기에 수용자를 대변하는 용도로 대중 투표가 추가되어 구성이 된다. 문화산업계에서 가장 젊은 업계인 게임의 시상식 또한 창작자들의 심사 투표로 이루어지는 경우, 비평자들이 갑론을박을 하며 심사 투표하는 경우, 대중의 투표가 추가되는 경우로 분류할 수가 있다. Read More 자아와 투쟁하던 이야기로 세상을 구하게 만드는 방법 - 헬블레이드 2: 세누아의 전설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고 묘사하는 것은 때로 놀라울 만큼 쉽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천재나, 비현실적인 실력을 가진 전사를 만들 수도 있다. 어떤 문제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고,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곤란함은 그들의 비범함 앞에서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Read More 지연시간을 두고 벌이는 개발자와 이용자의 개선과 적응 현대 게임 서버의 개발자들은 0.3초 지연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게임 서버를 개발한다. 이부분을 명시적으로 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0.2초~0.5초에서 지연이 발생했을 때도 자연스럽게 게임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설계해야 한다는 부분은 경험을 통해서나 혹은 선배 개발자들의 조언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기도 한다. Read More 쿨타임과 숨고르기 숨고르기가 중요한 이유는 지속에 있다. 게임은 승패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재미있지만, 이겼을 때만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과정이 충분하다면 지는 것도 재미있을 수 있다.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을 우선시한다면 패배는 게임을 지속하는 것을 방해하며, 다른 게임을 선택할 때 이길 수 있느냐를 가장 염두에 두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게임에 흥미를 느끼는 동안 지더라도 다시 도전하고, 다른 게임을 선택할 때 자기만의 취향과 기준으로 고를 수 있다. 숨고르기는 게임을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잘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Read More 플레이시간의 자본주의적 상품관계 - 탕진의 재미와 축적의 재미 온라인게임 시대가 만들어낸 이 변화는 놀이 역사에서 보기 드문 전환을 만들어냈다. 노는 일이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무언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놀이의 본질은 일종의 무용함, 생산의 시간에 맞선 시간 탕진의 즐거움에 가까웠지만,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그 무용함의 효용마저도 상품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기도 하다. Read More 필연적으로 실패하지만 계속되는 것, 선택을 위해 제시되는 두 개의 분기점은 결국 실패하지 않는 삶, 매끈한 하나의 서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선택은 불가피하다. 오히려 굴절된 한 분면만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가 그 선택이 충실한 것임을 간절하게 희구하게 만드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Read More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신현우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Read More 버튼 읽기 거대전쟁기계와 게이밍, 전 지구적 지각의 병참학 - 세계체제 자본주의 게임공간의 알레고리 이 냉혹한 전지구 권력의 게임공간 안에서 플레이어들은 힘의 수직적 전달자, 말 그대로 행위의 주체가 아닌 논 플레이어블 캐릭터(None Playable Character)가 된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전쟁은 이제 단순히 TV나 소셜미디어에서 흘러나오는 스펙타클이 아닌, 실존의 위협이라는 사실이 인지되어야 한다. “전쟁, 전쟁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버튼 읽기 합리적 트릭스터: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숙련화 게임 게임에 몰입한 플레이어에게 수지타산이나 합리성만큼 낯선 단어는 없을 것이다. 게임 플레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유용한 생산물을 안겨주지 않는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주변으로부터 ‘공부를 그렇게 했어봐라’ 는 말을 듣는 이유는 게임이 기본적으로 인생에서 효율적인 시간에 해당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인간의 노동은 삶의 여러 토대를 제공하지만, 게임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지언정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버튼 읽기 시뮬레이티드 셀프: 놀이하는 인간이 시뮬레이션을 작동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세계는 불확정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생동하는 물리적 실재를 파악할 수 없으며, 단지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가정법에 따른 결과론, 혹은 결정론은 입자들의 불확정한 위치에 선형성을 부여하는 매력적인 시뮬레이션이다. ‘만약 ~라면 어땠을까?’ ‘만약 ~한다면 어떨까?’는 확률의 세계에서 확고한 인과관계를 부여할 뿐 아니라 대안적인 실재를 상상하도록 어떤 유희의 프레임을 제공한다. 만약 조선이 자생적 근대화에 성공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와 같은 질문을 통해 우리는 지적인 유희를 즐길 뿐 아니라 구체적인 시뮬레이션 절차들을 상정함으로써 확률의 시공간을 결과의 시공간으로 바꿔놓게 된다. 버튼 읽기 대안세계를 향한 미래고고학: 반문화의 문제계로서 〈사이버펑크2077〉 〈2077〉은 한계와 단점이 뚜렷한 게임이다. 수많은 구매자들이 비난했듯이 이 게임은 수 년간 홍보해온 수많은 시스템과 기능들을 대부분 폐기처분 했으며, 짜임새 있는 트리형 서사구조 구축에는 성공했지만 플레이어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 버튼 읽기 역사적 트라우마와 유령의 소환술: 〈반교: 디텐션〉의 역사주의 이처럼 애매하고, 역설적이고, 공백으로 가득 찬 대안적 역사인식의 상징극장(학교)을 탐색하며 퍼즐 열쇠들을 수집하는 플레이어는, 유령이 된 채 부재하는 현재의 표식들을 이어붙이고, 역사의 버려진 시신을 가르는 부검의가 된다. “너는 나고, 나는 너다” 며 자신의 그림자에게 읊조리는 주인공의 대사처럼, 파편화된 상흔들은 수집과 탐색행위로 이뤄진 이 부검에 의해 점차 진혼된다. 플레이어의 부검은 사망 원인 추적에 그치지 않고, 망자의 부릅뜬 눈을 감기는 의식으로 연동되는 것이다. 버튼 읽기 보편과 토착의 긴장 속에 도사리는 지정학적 미학: 〈7인의 사무라이〉에서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 이르기까지 〈라스트 사무라이〉가 일본 대중문화에 심취한 와패니즘의 대명사인 반면, 〈킬 빌〉은 오리엔탈리즘을 전유하는 대중주의다. 무사도와 신성한 사무라이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라스트 사무라이〉의 상당 부분은 뉴질랜드 로케이션으로 촬영되었고, 〈킬 빌〉은 이소룡과 사무라이를 섞고 중국계 미국인 배우 루시 리우에게 기모노를 입혀 대문자 오리엔탈(The Oriental)을 혼성모방한다. 버튼 읽기 캣스모폴리틱스(Catsmopolitics): 고양이와 기계가 자본세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 인종차별, 여성혐오, 소수자 차별, 장기화된 실업, 투기와 불평등, 전쟁과 극우정치가 만연한 오늘날 유일하게 아무에게도 미움 받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고양이일 것이다. 좌파도 우파도, 남성도 여성도, 베이비부머도 청년도, 무슬림도 카톨릭도 고양이를 사랑한다. 사람들은 기꺼이 골목길에 사료와 물그릇을 갖다놓으며, 고양이와의 사랑스런 일상을 촬영해 공유한다.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인간이 아닌 고양이다. 버튼 읽기 기억의 조작술: 사건의 컨벤션으로부터 벗어나기로서 인디게임 장르는 게이밍에서 오랜 논쟁의 주제 중 하나다. 디지털게임의 매커닉과 외형은 무궁무진하지만 소설이나 영화, TV쇼와 마찬가지로 어떤 약속된 경로들이나 재현의 양태가 축적되고 있음다. 컨벤션(convention)은 창작자와 텍스트, 그리고 수용자 사이에 형성되는 하나의 묵시적인 관습으로 우리는 무수히 많은 텍스트들이 생산되고 반복적으로 읽히는 과정에서 공통의 컨벤션을 체화한다. 장르가 계약을 통해 창작자-수용자 모두 텍스트의 진행 과정을 사전에 공식화한다면, 컨벤션은 비공식적으로 모두가 따르는 불문율이다. 장르는 헌법처럼 작동하지만 컨벤션은 그 안의 관습법 혹은 윤리처럼 흐른다. 장르는 끌어당기는 반면, 컨벤션은 대류한다. 장르는 포뮬러(정형화된 공식)와 컨벤션을 만들고, 스타일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스테레오타입과 클리셰를 생산한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서다솜

    큐레이터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종종 전시를 기획하거나 글을 쓰고 주로 게임을 한다. 큐레이터 게임 동호회 'Mods'의 멤버다. 서다솜 서다솜 큐레이터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종종 전시를 기획하거나 글을 쓰고 주로 게임을 한다. 큐레이터 게임 동호회 'Mods'의 멤버다. Read More 버튼 읽기 모험은 그곳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의 모험에 대하여 게임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모험가가 된다. 평범한 일상을 벗어난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 나가며 때로는 자신 안의 영웅적 면모를 깨워 세상을 구하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 세계 곳곳에 산재된 난제를 해결하는 모든 여정에 기꺼이 뛰어들며 게임을, 모험을 이어왔다. 게임과 모험은 그 궤적을 함께하며 게임을 경험하는 친숙한 방법론을 구축해왔다. 게임의 역사 자체가 일종의 모험기처럼 계속해서 쓰여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 글은 ‘게임’이라는 오래된 모험기를 다른 방향에서 펼쳐 본다. 거꾸로 펼친 모험기는 모험의 바깥에서 주인공의 모험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

  • 공포라는 감각, 낙차라는 설계도, 림보하는 질문  - <위니언 바이러스>에 나타난 호러 연출, 언캐니와 리미널 스페이스를 중심으로-

    영화 <언프랜디드:다크웹(2018)> 속 ‘다크웹’은 사이버 공간일 뿐임에도 그곳을 실제 존재하는 공간처럼 연출했다. 나룻배를 타고 벽마다 희미한 횃불이 붙은 좁은 동굴 통로를 따라 한참을 깊숙이 들어가야만 닿는 곳. 해당 장면은 앞서 나온 어떤 잔인하고 폭력적이던 장면보다 오싹한 공포감을 일으켰는데, 꼭 그 미지의 공간이 실제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딧 이후 세트장은 철거되고, 배우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공간만은 계속 그곳에 남아 손짓하는 것 같았다. < Back 공포라는 감각, 낙차라는 설계도, 림보하는 질문 - <위니언 바이러스>에 나타난 호러 연출, 언캐니와 리미널 스페이스를 중심으로- 24 GG Vol. 25. 6. 10. ※ 아래 내용은 <위니언 바이러스>, <두근두근 문예부>, < KinitoPET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Welcome to the playground [1] : 0과 1이 만들어낸 공간 Welcome to the playground, follow me Tell me your nightmares and fantasies 놀이터에 온 걸 환영해 날 따라와 너의 악몽과 환상에 대해서 말해줘 Sink into the wasteland underneath Stay for the night, I'll sell you a dream 지하의 황무지에 가라앉아 / 하룻밤만 지내 내가 너에게 꿈을 팔게 [2] * 영화 <언프랜디드:다크웹> 속 ‘다크웹’으로 묘사된 공간 영화 <언프랜디드:다크웹(2018)> 속 ‘다크웹’은 사이버 공간일 뿐임에도 그곳을 실제 존재하는 공간처럼 연출했다. 나룻배를 타고 벽마다 희미한 횃불이 붙은 좁은 동굴 통로를 따라 한참을 깊숙이 들어가야만 닿는 곳. 해당 장면은 앞서 나온 어떤 잔인하고 폭력적이던 장면보다 오싹한 공포감을 일으켰는데, 꼭 그 미지의 공간이 실제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딧 이후 세트장은 철거되고, 배우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공간만은 계속 그곳에 남아 손짓하는 것 같았다. ‘믿’어야 작동하기에, 공포의 신화 다수는 힘을 잃었다. 러브크래프트가 언급했듯,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와 관련된다. 역으로 말하면 폭로되고 정복된 공포는 더이상 공포로서 그 권능을 행사하지 못한다. <주술회전(2018)>, <체인소맨(2020)>과 같은 현대 이능 판타지물 속 빌런-저주 혹은 악마-의 힘이 사람들이 그것을 공포로서 ‘믿’는지 ‘안 믿’는지에 따라 비례 또 반비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구태의연한 괴담과 귀신 혹은 과학으로 해명된 이상 현상은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때문에 현대 콘텐츠들이 대체세계 혹은 SF로 서사적 배경을 옮겨가는 것은 당연한지 모른다. 이로 미루어볼 때, 미지의 공간이자 미개척지인 사이버 공간이 공포의 공간으로 설계되는 것은 효과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공포의 공간으로서 사이버 공간을 개척해나간 게임은 다수 있다. 흔한 비주얼 노벨인 줄 알았던 <두근두근 문예부(2017)>는 연애 시뮬레이션의 외피를 배신하고 게임 중반부부터 그 노선을 호러로 급선회한다. 그 중심에는 프로그램과 현실세계 사이에 갇혀 플레이어에게 집착하다 못해 인터페이스를 넘나들고 프로그램을 조작하는 모니카란 캐릭터가 있다. 한편, 속 귀여운 시스템 비서인 줄만 알았던 ‘키니토 펫’은 사실 그곳에 오랜시간 갇혀 있던 존재였고, 더이상 혼자가 되기 싫어 플레이어를 그곳에 붙잡아 두려 기존 윈도우 시스템을 활용해 온갖 공포를 안겨준다. 그렇다면, 사이버 공간 속 공간이 실존한다는 가정을 하나의 설계도법으로 채택한 게임들은, 단지 ‘낯섦’의 그것이 인류 공포의 본질과 가장 맞닿아 있단 이유로만 그것을 채택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공간은 몰락한 공포의 신화를 되살려낼 수 있는 미개척지로서의 의미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일까. 어떤 ‘공간’에 대한 공포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 <위니언 바이러스(2024)>는 이에 대해 유의미한 답을 주었다. Liminal Space : 경계공간이란 공포 <위니언 바이러스>는 큰 틀에서, “위니언 키우기” 프로그램을 다운받은 유저-플레이어-가 일반 육성게임처럼 평화롭게 어린 다섯 위니언을 기르게 되지만, 바이러스로 인해 위니언이 죽거나 서로를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사실 그 뒤엔 더 큰 음모가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위니언 키우기” 플레이 화면 우선 게임은 우리에게 꽤 익숙한 상상력 ’생명을 가진 데이터’란 설정에서 출발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두근두근 문예부>, 과 같은 심리적 호러 게임에서뿐만 아니라, , 와 같은 SF적 질문을 던지는 게임과 영화에서도 빈번히 등장하는 상상력이다. 1966년 개발된 내담자 중심 상담 인공지능 일라이자(ELIZA)가 그 허술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인격체로 착각한 현상에서 유래한 ’일라이자 효과‘는 이런 상상력이 연출로써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증명한다. 일라이저 효과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프로그래밍으로 짜여진 알고리즘이라는 것을 망각하게 하고, 그에게 영혼을 부여하게 하고, 애착하게 만들며, 결국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다만, <위니언 바이러스>는 친숙함으로써의 일라이저 효과를 넘어 공포를 연출하는 하나의 장치로써 그 효과를 활용한다. 컴퓨터 뒷세계에 놓인 구식 CRT 모니터는 위니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위니언은 디지털 환경에서 사는 데이터 형태의 생명체이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복감과 우울감을 느끼며, 육체 또한 지니고 있어 다치거나 죽기도 한다. 그러니 부디 위니언을 데이터가 아닌 생명체로서 존중해주길 바란다고. 노이즈 낀 소리, 불길한 단조 bgm, 검은 배경에 강조되는 암시와 같은 특정 붉은 단어의 이 컷신은 플레이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복선이 된다. * 게임은 여러 테마를 동원해 플레이어에게 위니언이 ‘생명체’임을 강조하고 환기한다. 바이러스에 의해 정신과 육체가 잠식되어버린 픽스(Fix)의 해리성 장애와 사이코패스적 행동은 다섯 어린 위니언들이 겪는 비극의 단초가 된다. 호전적이던 평소의 성격이 극단적 부정성으로 반전된 픽스는 가장 밝았던 아이온(I-on)을 표적 삼아 폭력성을 표출한다. 때리고 할퀴는 것을 넘어서, 감정적으로 몰아붙여 협박하거나 스토킹하고, 그것도 모자라 재생이라는 위니언의 육체적 특질을 악용해 식인이란 만행을 저지른다. 가장 약하게 태어난 디버그(Debug)의 여린 마음을 또 다른 타깃으로 삼은 픽스는 디버그의 자해 습관을 약점 삼고 다른 위니언들의 목숨을 인질 삼아 가스라이팅을 일삼는다. 이도 성에 차지 않는지 픽스의 폭주는 죽은 아이온의 시체를 인터페이스 너머 점프스케어로 매달아 전시하는 사건으로 결국 정점을 찍는다. 난도질당한 피범벅의 시체, 이등신 도트 안에 들어있던 실제 같은 장기들. 호러 게임이 으레 그러듯 그것들은 플레이어가 진저리칠 만큼 끔찍하고 고어하게 연출된다. 이제 위니언은 더이상 우리가 알던 16bit의 귀여운 그들이 아니다. * 아이온의 희생과 그것을 잔인하게 전시하는 연출 알록달록한 16bit의 외피가 울컥 토해낸 뜨끈 물컹한 내용물에 플레이어는 단지 ’호러’란 두 글자로는 채 다 설명될 수 없는 기이한 공포감을 느낀다. 귀여운 도트 이등신 안에 들어차 있는 실제와 같던 육체의 흔적은 현실 속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참담할 만큼 정교하게 재현된 감정적 폭력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신체적 폭력과 훼손, 살인 행위는 현실의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단지 영혼이 있음 직한 존재로 상정했던 것과 달리 소름 돋을 만큼 적확히 우리와 닮은 지점에서 플레이어는 섬뜩함을 느낀다. 닮았을 뿐 같지 않은 완전한 타자로서의 거리감으로부터 비롯된 애착은 이제, 우리에게 내제되어 있지만 늘 외면하고 억누르고자 했던 끔찍한 부분으로서 범람해온다. 이 잔혹한 유사성은 멀미와도 같은 섬찟함을 선사한다. 낯선 것에서 느끼는 억압됐던 익숙한 것의 귀환, 언캐니[Uncanny(운하임리히, Unheimlich)] [3] 이다. 뜨끈한 내용물의 매끈한 외피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특히 주목할만하다. <위니언 바이러스>의 공간은 차원이라는 지표로 크게 2D 공간과 3D 공간으로 양분된다. 2D 공간은 플레이어가 “위니언 키우기”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표면적 공간이며, 3D 공간은 그 프로그램 너머인 내 PC, 쓰레기통, 그리고 코딩됐지만 나타나지 않은 잠재적 공간이다. 서사진행의 주요부분을 차지하는 내 PC 즉, 프로그램 ‘뒷세계’는 무한한 복도와 그에 파생되는 무한한 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한 구석에 CRT 모니터가 존재하거나 벽지 구성이 바뀔 뿐 공간은 림보한다. 그곳엔 복도를 오가거나 문을 여닫는 존재도, 어딘가로 향하기 위해 복도를 통과하거나 문을 여닫을 목적도, 처음과 끝 출발지와 종착점이라는 시간개념도 모두 부재하는 곳이다. * 0과 1이 만들어낸 경계공간 이 공간은 <이스케이프 더 백룸(2022)>이란 게임 속 공간과 무척 닮아있는데 이는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란 공간 구성적 미학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경계 혹은 문턱을 뜻하는 리미널리티(Liminality)에서 파생된 이 개념은 경계공간에서 느끼는 방향감각의 상실과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모호한 감각을 내포한다. 친숙한 공간에서 느껴지는 부재와 상실, 그로부터 오는 괴리감과 위화감은 <위니언 바이러스> 속 잠재공간의 특질이다. * <이스케이프 더 백룸> 속 리미널 스페이스 단지 데이터의 정렬뿐으로 이해된 공간은 가볍게 전복되며 그것만의 사이버 공간을 펼쳐 보인다. 그곳은 버려진 잉여 데이터와 사체들이 겹겹이 쌓여 분진을 일으키는 공간이며, 무한히 파생되고 인과가 뒤섞인 문과 복도를 지닌 미로 공간이다. 0과 1의 코드가 물적 콜라주로 산재한 해체적 공간이며, 코드 오류(Bug)가 아닌 벌레(Bug)가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의 공간이다. 부재와 해체를 설계 문법으로 채택한 이 공간은 0과 1을 넘어선 그것만으로 작동하는 기호적 공간 [4] 을 직조해낸다. 물론 플레이어는 합리적 이성으로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다. 이 공간은 그저 컴퓨터 언어로 프로그래밍 된 데이터들이 모니터의 액정패널을 통해 투사되는 것일 뿐이라고. 다만 그렇게 몇번이고 되뇌도 이 공간은 공포의 동력이자 권능으로서 작동한다. 편편하고 매끈한 2D의 공간에서 불완전하고 까끌거리는 3D 공간으로 내던져지는 기시적인 틈의 감각. 그것의 논리만으로도 작동하고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공간을 직조해낸 어떤 세계의 재림. 시뮬라크르 [5] 의 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Happy ever after : 아이러니적 벡터의 추동 다소의 희생이 있었지만 <위니언 바이러스>는 좋은 결말을 맞이한다. 디버그와 보는 픽스의 기억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픽스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된다. 최초 바이러스였던 시스템 위니언도 비지트(Bizit)라는 자신의 원래 이름과 기억을 되찾는다. 이후 부모 위니언으로서 다섯 어린 위니언들에게 저지른 폭력을 반성하고 삭제를 받아들이게 되며, 비대해진 뇌만 남은 감옥과도 같은 공간에서 풀려나게 된다. 돌연변이 양자 위니언 생산을 위해 육성 프로그램이란 탈을 쓴 불법 프로그램 “위니언 키우기”를 배포했던, 그렇게 위니언 무한 생산과 개조, 살육을 반복했던 WIN-S는 수사대상이 되었다. 남아있던 그리드와 보는 위니언 수사대에 안전하게 인계되어 국가 보호 아래 유능한 위니언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행복했던 다섯 위니언의 한때가 엔딩 크레딧으로 올라간다. 에필로그는 모든 비극이 시작되기 전 어린 위니언들이 쓴 애정어린 메일이 플레이어에게 도착하며 마무리된다. 더해서 이스터 에그인 픽스의 암호문구(I love my friends)를 보면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다. 말 그대로 너무 많은 일이 있었지만 역경을 딛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이다. * 감동적인 엔딩 일러스트 <위니언 바이러스>의 매끈하게 메워진 닫힌결말은 전형적인 마스터 플롯을 따르고 있다. 무너진 질서의 회복, 권선징악, 성장서사로 짜여진 이 플롯은 플레이어에게 서사적 완결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플레이를 마친 우리는 무언가 꺼림직한 기분, 미완되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다시 말해, 홀가분하게 ‘Happily ever after.’라 외칠 수 없다. 게임은 이미 완결됐으며 기대 층위의 종결을 완수했다. 서사는 더이상 ‘더 읽기’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6] . 다만, 이 엔딩이 끝이 아닐 거야-라는 반응이 다수 포착되는 커뮤니티의 반응처럼 우리는 그저 감각할 뿐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위니언 바이러스>에서 플레이어가 느끼는 무력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많은 상황적 가짓수와 엔딩 기점으로 파생되는 인터렉티브 비디오 게임의 선지와 달리, <위니언 바이러스>의 선지는 표현만 다를 뿐 하나의 상황과 엔딩만을 허락한다. 때문에 플레이어의 행동반경은 극히 제한적이고 엔딩에 대한 일말의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하나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운명론적 귀결을 목도할 수 밖에 없는 데서 오는 무력감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위니언 바이러스>의 서사는 그정도로 완벽하게 닫혀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위니언 바이러스>가 공포를 설계하는 연출문법은 기대 층위의 종결을 이루어낸 서사를 애써 열어젖히며 ‘더 읽기’를 권유한다. 우리와 끔찍하리만큼 닮은 그가 그곳에 계속 살아 있을 것만 같다 [7] . 프로그램 너머 무한히 림보하는 세계가 여전히 존재할 것 같다. 인터페이스 너머로 내민 손과 구조를 요청하며 내지른 그 목소리는 마치 이곳을 향해 뻗어있는 것만 같다. 여전히 그곳에 존재할 것 같은 위니언들과 지금 이 순간도 림보하며 스스로를 직조해내는 컴퓨터 뒷세계. 무력하게 닫힌 운명론적 결말은 우리를 ‘덜 읽기’로 안내했지만, 바로 이 공간이, 기이한 공포감과 기호로 지어 올려진 0과 1의 공간이 우리에게 ‘더 읽기’를 권하며 손짓한다. 그렇게 닫힌 서사를 활짝 열어젖히며 그 틈을 벌리고 폭로하며 완결을 지연시킨다. 이처럼 공포의 서사와 공포적 연출은 <위니언 바이러스>란 하나의 게임 안에 조화로운 구성으로 녹아있지만, 그것이 가진 종결 층위에서의 힘은 정면으로 대치한다. 이런 낙차를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적 벡터는 경계공간 속 실재의 균열을 추동한다 [8] . 최초의 의도성이 어찌 되었든, 그것은 현실에서 비현실로 미끄러지는 감각을 기민하게 포착해내는 우리의 감각적 센서를 툭 켜버린 셈이다. Your Reality [9] : 재현과 해체로서의 게임 But in this world of infinite choices / What will it take just to find that special day? 하지만 이 무한한 선택지의 세계 속에서 / 어떻게 해야 그 특별한 날을 찾을 수 있을까? And if this world won't write me an ending / What will it take just for me to have it all? 이 세계가 나에게 결말을 주지 않는다면 / 그냥 전부 다 내 것으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10] 아주 먼 과거부터 존재했던 서사에 대한 욕망, 좀더 명확하게는 서사의 종결성에 대한 욕망은 미완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인류의 오랜 욕망과 맞닿아 있다. 전통적 서사라 함은 늘 완결성을 보장해왔다. 시련이 있기에 성장이 있고, 타락한다면 추락할 것이며, 혼돈은 질서를 약속한다. 따라서 하나의 매끈한 플롯은 유기적으로 꿰어낼 수 없는 체험들과 종결이 결여된 카오스적 실재에 대한 필사적 질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완결성을 서약하는 전통적 서사와 달리 실재 세상은 무의미성과 미완의 틈으로 가득 차있다. 앞서 말한 ‘Happily ever after.’를 후련하게 외치지 못한 그 감각이 바로 그것이다. 낙차는 필연적으로 해체를 수반한다. 구조의 틈이 폭로된 순간 그것의 허물어짐은 멈출 수 없다. 영화 <인셉션(2010)>에서 꿈을 자각하는 순간 애써 설계한 광활한 꿈 공간이 산산이 붕괴 되는 장면처럼. 이로 미루어본다면 <위니언 바이러스>는 설계하는 동시에 해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게임은 기이하도록 우리와 닮은 위니언이란 존재를 만들어내고, 0과 1의 벽돌을 쌓아 경계공간을 지어 올린다. 그 기호 자체만으로도 작동하는 기호의 세계는 마치 어딘가에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의 재현, 아틀란티스를 연상시킨다. 동시에 <위니언 바이러스>는 그에 뒤따르는 기이한 공포감과 부재가 종결된 서사성과 맞부딪히며 아이러니적 벡터를 만들고, 그 동력은 지어 올려진 아틀란티스를 스스로 해체 시킨다. 그것은 마침표 대신 반점을, Happily ever after 뒤에 물음표를 붙이게 한다. 플레이어는 플레이란 체험을 통해 0과 1로 지어진 경계공간을 건설해내는 동시에 허무는 주체가 된다. 이는 필히 종결된 미완이란 모순적 체험을 가능케 하고 ‘더 읽기’란 행위로 이어진다. 닫힌 동시에 열어 젖혀졌기에, 우리는 서사와 연출로 구성된 게임, 플레이란 체험 전반, 그리고 그 둘의 사이를 씨실과 날실로 엮어내며 독자적으로 핍진한 어떠한 궤적을 덧그려내는 체험에 참여하게 된다. 디버그와 보는 정말로 안전히 보호받고 있을까. 희생된 아이온과 픽스 그리고 디버그는 위니언들의 내세로 갔을까. 어떤 다른 어린 위니언은 여전히 버그에게 쫓기며 그 으스스한 뒷세계를 계속 림보하고 있지 않을까. 비지트가 개조된 끔찍한 그 모습은 인격체를 수단화하는 현대사회와 단적으로 너무 닮아있는데. 게임 속 세계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곧 존재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 곁에 어떤 위니언은 또 어떤 뒷세계는 이미 도래한 것이 아닐까. 질문은 상이하더라도 그것은 지연되는 완결성이란 하나의 줄기로 모인다. 종결과 미완이 꼬리잡기하듯 서로가 서로를 뒤따르지만, 끝내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마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서사와 연출의 낙차를 통해 <위니언 바이러스>가 가능케 한 이런 일련의 체험을 가히 ‘차연적’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11] . Spinning glove [12] : 무한히 덧그려 나아가는 물음 완결성(完結性)과 미완성(未完性)은 낙차를 만든다. 그리고 그런 벡터의 대항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생각하” [13] 게 한다. 질문 층위의 열림은 하나로 고정되는 것이 아닌 생동하는 에너지의 흐름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서사의 첫 희생양이자, 양자 위니언으로서 그 모든 가능성을 안고 있던 ‘아이온(I-on)’의 이름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있고 화학에서의 이온(Ion)과 양자 컴퓨터 스마트업의 아이온큐(IonQ)가 그 예이다. 화학 분자로서 이온(Ion)의 의미로 보면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 매개자이자 전이자, 변화의 축이란 의미에서 서사적 역할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실제 아이온의 죽음으로 인해 서사는 급물살을 탄다. 한편, 과학과는 거리가 느껴지는 다른 유래의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온(Aion[Αἰών])’이란 그리스 신화 속 우주와 영원의 신이다. 아이온(Αἰών)의 시간은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과 대비되며 영원히 끝나지 않고 순환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서사를 인과로 조직해내는 시간이 아닌 존재 전체를 감싸고 맴도는 시간-아닌-시간이다. 즉, ‘아이온((Αἰών)의 시간’은 차연하는 시간성을 의미한다. 어떤 것도 완전히 시작되지도 끝나지도 않은 시간. 그 안에서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해석은 지연되며 서사는 열리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다른 위니언들의 이름을 읽어본다면 어떨까. 픽스는 ‘수리하다(fix)’라는 관점에서, 최초 바이러스인 시스템 위니언의 난폭함을 바로잡고 그 부당한 현실을 수리하기 위해 디버그 대신 자신이 희생되는 것을 택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선택은 오히려 희생의 고리와 죄책감으로 인한 비극을 고착화하고 앞당기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이 세상을 수리하고 고쳐내 다시 ‘다섯 위니언들이 행복하게 지내던 평화로운 시간’에 영원히 ‘고정(fix)’되는 걸 가장 간절히 바랐던 픽스이지만, 그 바람은 오히려 가장 큰 비극으로 돌아왔다. * 빨간색 픽스로 시작해 반시계방향으로, 디버그, 보, 그리드. 가장 가운데는 노란색 아이온. 픽스가 ‘고정(fix)’한다면 디버그는 ‘해체(debug)’한다. 프로그래밍 중 발생한 오류를 찾아 수정하는 디버깅(debugging)에서 유래한 그 이름은 뜻대로, 이 비극의 실타래를 푸는 데에 디버그가 전면으로 내세워진다. 다만 시간은 디버그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결국 디버그는 몸과 마음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 위니언은 감정을 가진 존재였기에, 디버그는 죄책감으로 난도질당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픽스라는 고정값과 디버그라는 해체값이 그렇게 덧셈과 뺄셈의 과정을 거쳐, 서사는 0이란 균형의 국면을 맞는다. 이후 남은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위니언이자, 최종 생존자로서의 위니언은 그리드(Grid)와 보(Bo)이다. 격자무늬, 신경망의 알고리즘과 같은 ‘규칙(Grid)’으로 읽히는 그리드는 0으로 돌아온 세계를 다시 규칙으로 지어올리는 암시를 떠올리게 한다. 주변값을 기반으로 추정해 자연스럽게 채워 넣는 ‘보간법’에서 유래한 보의 이름은 틈을 메꾸어내는 암시를 떠올리게 한다. 무너진 규칙을 세우고 틈을 메꾸는 행위. 이 흐름은 앞서 언급한 닫힌 서사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아이온-픽스-디버그-그리드와 보라는 순서로 보자면, 아이온-그리드와 보는 전적으로 대비 된다. 이름의 축으로도 설명될 수 있듯, <위니언 바이러스>는 낙차를 만든다. 그렇기에 그 기이함과 부재의 경계공간이 선사한 공포라는 순간적 감각은 질문이라는 영속적인 감각, 즉 아이온적 감각으로 우리에게 도착하게 된다. 질문이란 관점에서, 제목 자체가 질문의 형식을 가진 지브리의 2023년 작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언급하고 싶다. 제목이 발표된 순간 사람들은 그것이 가지는 어조 탓에 어떤 교조적인 교훈이 담겼을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개봉 후, 지브리의 전작들과 달리 조금 난해 하다는,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다는 반응과 함께 제목은 그 자체로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단 반응으로 바뀌었다. 애니메이션은 정형화된 답이 아닌 각자의 답을 관객에게 물었다. 꼭 바이트 상 존재하긴 하지만 화면상에 표시돼 존재하지는 않는 Null 값처럼. 질문에 대한 답은 비어 있었다. 작품 속 마지막 장면, 마히토는 환상을 빠져나왔음에도 그 세계를 기억하고 있다. 현실-환상-현실 구조의 마스터 플롯에서는 금기시되는 일이다. 이에 마히토를 환상 속으로 이끌었던 매개자 왜가리는 “혹시 뭐 가져온 것이 없”냐고 묻는다. 그에 마히토가 주머니에서 저쪽 세계에서 가져온 돌을 꺼내 보이자, 왜가리는 그것을 “강력한 부적”이라고 칭하면서도 “다행히 힘센 돌은 아니니까, 점점 잊을거고, 그거면 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돌”은 저쪽 세계에서의 서사는 종결됐지만 그 세계를 계속 기억하도록 하기에 미완의 서사와 그 맥락을 같이한다. 그리고 그것이 “강력한 부적”인 까닭은 지연된 질문은, 그리고 계속해 지연될 질문은 이제 그 자체로 열린 채 생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왜가리에게는 안타깝게도 마히토는 “점점 잊”는 것이 아닌 환상과 현실 그리고 그 잔여를 기억하고 또 품으며 열려있는 텍스트로서, 질문으로서 그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 질문으로서의 무너뜨림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게임은 서사와 연출, 체험과 그 체험을 나누는 담론이 유기적으로 흘러 오가는 매체이다. 그 모든 것은 플레이어 한 명 한 명의 직접적이고 실감 나는 체험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층위가 만들어내는 색채는 여타 다른 매체보다 다채로울 수밖에 없다. 시대와 함께 나아가며 그것을 충실히 흡수하기도, 때론 재치 있는 전복을 해내기도 하는 역동성은 분명 플레이어와 개발자들을 설레게 하는 힘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도 무수한 층위를 만들어나가고 있을 게임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에게 답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물을 수 있는 공간을 활짝 열어 보일 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엔딩 곡 속 ‘세계’를 의미하는 ‘Globe’ 앞에 붙은 수식어 ‘Spinning’처럼. 아이온의 시간 속에서 지연되는 물음으로. 질문으로서의 질문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려나가”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자 전부이고 최선이라는 듯. 우리는 그렇게 게임이라는 체험적 감각을 덧그려 나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ㅁ [1] ost “Playground” 가사 일부 [2] 악몽과 환상이 뒤섞인 공간-자운-으로의 초대 서곡으로 쓰인 이 곡은 마치 어떤 공간 속으로 플레이어를 초대하는 게임의 초대장과도 닮아있다. 게임이 초대하는 그곳은 놀이터이자 꿈이며 0과 1로 지어진 공간이다. [3] 유진월, <비바리움>의 부조리한 세계와 출구 없는 삶의 공포 : 언캐니와 그로테스크를 중심으로, 횡단인문학(9), 2021, p216. [4] 박치완, 『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 HUINE(2016). p.90. [5] 위의 책, p.114-115. [6] 독자는 텍스트를 주도적으로 읽기 시작할 때 그것을 향한 힘을 필연적으로 행사하게 되는데, 그 형태는 ‘덜 읽기’와 ‘더 읽기’로 크게 나뉜다. ‘덜 읽기’는 서사 속 존재하는 내용을 취사선택하는, 해석적 종결을 짓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돼있다. 한편, ‘더 읽기’는 마스터 플롯에 의해 촉발된 정동이 드러낸 틈을 자발적으로 메우고자 하는 행위로, 그것을 해명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 - H.포터 애벗, 『서사학 강의』, 문학과 지성사(2008), p.169-177. [7] 실제로 게임의 중반, 평화롭던 분위기가 점점 호러로 발돋움할 무렵, 위니언 상식을 설명하는 화면과 별개로 “WE ARE ALIVE HERE”라는 보이스가 겹쳐지며 플레이어를 놀라게 한다. [8] 마르틴 하이데거, 『예술 작품의 샘』, 한충수 역, 이학사(2022), p.93. [9] 마찬가지로 경계공간이란 설정을 사용한 <두근두근 문예부>의 엔딩 곡. 처음부터 끝까지 음성 없이 텍스트로만 진행된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직 모니카만’의 목소리를 해당 곡에 입혀지는 보이스를 통해 들을 수 있다. [10] 플레이어를 향한 모니카의 집착적 애정이 드러나는 곡이지만, 이는 무수한 선택을 반복할 수 있는 게임과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플레이어의 현실세계(your reality)의 ‘차이’를 인정하고 플레이어를 떠나보내며 스스로 게임 데이터를 모두 지워나가는 모니카의 선택 또한 드러나는 곡이다. [11] 이조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 인식론과 선」, 禪學(23), 2009, p335. [12]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엔딩 곡 영어 제목. 원제는 지구본(地球儀). [13] H.포터 애벗, 『서사학 강의』, 문학과 지성사(2008), p.126-129.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김성은 이야기가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국문학을 공부하였으며 인생 게임은 . ‘인생은 요지경’이 ‘인생은 낯설어’로 변화한 순간을 엿본 뒤로 게임이란 세계에도 푹 빠져있는 중입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최선주

    선주는 기술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그로 인한 사회적 현상에 주목하며 활동해왔다. 새로운 기술이 예술 개념을 어떻게 바꾸는지 관심을 두고 인공지능 창작물의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였으며 미디어의 이면을 탐색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코리아나미술관 *c-lab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아이돌로직 신드롬』(2021, 공저), 『특이점의 예술』(2019) 등이 있다. 최선주 최선주 선주는 기술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그로 인한 사회적 현상에 주목하며 활동해왔다. 새로운 기술이 예술 개념을 어떻게 바꾸는지 관심을 두고 인공지능 창작물의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였으며 미디어의 이면을 탐색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코리아나미술관 *c-lab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아이돌로직 신드롬』(2021, 공저), 『특이점의 예술』(2019) 등이 있다. Read More 버튼 읽기 탈출 없는 삶에서 의미를 만드는 게임적 방법 〈하데스 Hades〉는 혹평이 거의 없는 좋은 게임의 정석 같은 게임이다. 2020년 하반기 최고작으로 뽑히며 더 게임 어워드(The Game Awards, TGA) 올해의 게임 노미네이트, 각본상, 인디 게임상, 액션 게임상을 수상했고, 메타크리틱 게임 리뷰에서 93점의 높은 점수를, 현재 스팀에서도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SF 문학상인 네뷸러상과 휴고상까지 수상하니, 국내의 한 게임 비평지에서는 “하데스는 깔 게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여기에 이렇게 길게 수상 목록과 긍정적인 평가를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하데스〉가 보편적으로 잘 만든 게임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 게임은 XX다: 동어반복적 회로를 차단하기(최우수상)

    “장르에 무관하게 예술 작품은 환언하기가 불가능하다. (중략) 지식은 언제나 위로 환언하기 혹은 아래로 환언하기에 해당하지만, 예술은 소크라테스적 철학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일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 Back 게임은 XX다: 동어반복적 회로를 차단하기(최우수상) 07 GG Vol. 22. 8. 10. 달리의 이미지들 그레이엄 하먼의 책 〈예술과 객체〉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장르에 무관하게 예술 작품은 환언하기가 불가능하다. (중략) 지식은 언제나 위로 환언하기 혹은 아래로 환언하기에 해당하지만, 예술은 소크라테스적 철학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일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1) 여기서 ‘환언’(환원과 헷갈릴 수 있는)이라는 개념이 많이 낯설다면 원문에 있는 패러프레이즈(paraphrase)를 가져오는 것이 좀 더 이해를 도울 수 있다. 거칠게 말하면 저자는 패러프레이즈의 가능 여부에 따라 지식과 예술이 구분되는 경계선을 긋는다.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떠오른 것은 당시에는 조금 뜬금없게도 OpenAI 사(社)의 이미지 생성 AI 시스템인 달리(DALL・E)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이었다. 그것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유저가 간단한 설명(예를 들어, 말위에 탄 우주비행사 같은)을 제시하면, 달리는 조금씩 스타일은 다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그 설명에 부합하는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그 중 한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바꿔도 제시된 설명에 부합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달리의 이미지들은 서로 패러프레이즈가 가능한 것일까. 안타깝게도 이야기가 그렇게 간단히 흘러가지는 않는다. 이미지는 언제나 그것의 묘사나 혹은 분석만으로는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잔여를 남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통적으로 같은 설명에 기반한 이미지들이라고 해서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온전하게 ‘설명’해낼 수는 없다. 다만 달리의 이미지들에는 (James Bridle이 〈 Something is wrong on the internet 〉 2) 에서 날카롭게 펼쳐 보이듯이) 유튜브의 보상 알고리즘에 의해 추동된 채로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조금씩 변조되지만 여전히 똑같은 주제와 전개 과정, 캐릭터를 공유하는 수많은 영상들과 유사한 종류의 스산함이 묻어나는 것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 달리(DALL・E)의 이미지들(왼쪽) 그리고 챗봇 플라밍고와의 대화(오른쪽) 이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는 한 트윗 3) 을 인용한 김성완 인공지능 연구자의 페이스북 글 4) 이었다. 구글 딥마인드의 연구자인 Antoine Miech는 그들이 새로 개발한 AI 챗봇 플라밍고(Flamingo)에게 달리 2(2022년에 새롭게 등장한 달리의 새 버전)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보여준 뒤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있냐고 묻는다. 가짜인 것 같다고 대답하자 그럼 이 가짜 사진을 만들어낸 기술은 무엇일까 라고 다시 묻는다. 플라밍고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It looks like someone used a GAN to create this image.”(누군가 GAN 모델을 이용해서 이 이미지를 만든 것 같습니다.) 이를 인용한 김 연구원은 “물론 DALL-E 2은 GAN 모델이 아니라 최신의 Diffusion 모델로 이미지를 생성한 거지만 이정도면 최고의 답변입니다.” 라고 코멘트를 덧붙였다. 매우 흥미로운 실험이고 또 대단한 성취가 맞지만 여기서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부분은 바로 플라밍고가 ‘얼추’ 맞췄다는 점에 있다. 만약 플라밍고가 ‘누군가 Diffusion 모델을 이용해서 이 이미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라고 확고하게 대답했다면 완벽한 답변이었겠지만 나는 별달리 흥미를 못 느꼈을테고, ‘스카이넷이 멀지 않았구나!’ 같은 부질 없는 한탄이나 하고 앉았을 터였다. 물론 Antoine 가 직접 이어지는 트윗에서 밝힌 것처럼 플라밍고를 훈련시킬 당시에 달리 2에 대한 웹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러한 모범적인 답변은 불가능했다. 즉, 플라밍고는 달리 2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도 제공된 사진이 (Diffusion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가장 발전된 형태의 머신러닝 테크닉(GAN, 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을 이용해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것을 ‘추론’해 낸 것이다. 그 추론의 과정은 연구자들에게도 대부분 블랙박스에 가깝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 AI 챗봇은 (인간의 시지각은 인지 못하는) 딥러닝으로 구성된 이미지의 정체를 수월하게 알아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실제 인물 사진들과 This Person Does Not Exist 5) 같은 사이트에서 GAN 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이미지들을 랜덤하게 섞어서 보여준다면 나는 아마 둘을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플라밍고라면 앞서 달리의 이미지를 봤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의해 거의 자동적으로 ‘생성된’ 영상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나와는 다르게, 혹시 플라밍고는 달리의 이미지들에서 풍겨져 나오는 그 소름끼치는 동질성을 꽤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적어도 플라밍고의 관점에서는 달리의 이미지들은 서로 패러프레이즈가 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달리(DALL・E)의 이미지들은 비로소 지식이 된다. 이 지점에서 패러프레이즈가 가능한 것들, 즉 지식의 범주를 좀 더 넓혀 볼 수 있지 않을까. 몇 년 뒤 혹은 빠르면 내년에는 동영상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플라밍고 2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 때 유행하게 될 어떤 오픈월드 게임의 인게임 플레이 영상을 이 놀라운 챗봇에게 보여준다고 상상해 보자. 그것의 대답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It looks like someone used Ubisoft's open-world formula to create this game.”(누군가 유비식 오픈월드 게임을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Ludonarrative dissonance 어게인? 게임 역시 지식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지식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 〈어쌔씬 크리드〉 시리즈의 디스커버리 투어 모드를 통해서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신전들을 마구잡이로 뛰어다닐 수 있으면 진정한 지식의 힘이 비로소 발현되는 것인가.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경우처럼 날이 추우면 말의 고환이 수축한다는 식으로 실제 동물들의 행동 패턴과 생리적인 과정들을 게임 속에서 정밀하게 재현하면 그게 바로 ‘살아 있는’ 지식인가. 15세기 초반 보헤미아 왕국(지금의 체코 지방)내에 프라하 인근 지역을 마치 스캔해서 옮긴 듯한 디테일과 당시의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킹덤 컴: 딜리버런스〉는 역사 지식 그 자체가 아닌가. 이 질문들이 그 모든 ‘당연한’ 답변들에 의해 집어 삼켜지기 전에 ludonarrative dissonance(이하 루도)의 샛길로 잠시 빠져 보자. '게임내러티브 부조화' 정도로 직역할 수 있는 루도를 둘러싼 논의는 한 블로그 글 6) 에서 시작되었다. 게임개발자 Clinton Hocking은 〈바이오쇼크〉를 플레이 한 뒤 자신이 느낀 어떤 불편한 감각을 전달해 줄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단어가 좀 어려워 보여서 그렇지 이 개념은 사실 꽤 직관적이다. 게임의 공식적인 내러티브와 플레이어가 게임플레이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내러티브가 서로 심하게 상충될 경우 몰입감이 완전히 깨지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두 내러티브의 간극을 루도라고 정의한다. 민감한 스포일러의 이유로 바이오쇼크는 제외하고 〈배틀필드 1〉의 예를 들어보겠다.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인 이 FPS 게임은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통해서 묵직한 반전(反戰)의 모티프를 전달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려한 그래픽으로 구현된 그 참상들을 ‘감상’하면서 잠시 간담이 서늘할 수는 있겠지만 총을 쏠 때마다 느껴지는 반동과 탱크를 직접 운영하는 감각, 폭탄들이 떨어져서 폭발하는 떨림 같은 촉각적인 경험에 중독되는 순간 그 반전(反戰)의 내러티브는 플레이어가 ‘손맛’에 취한 채 조건반사적으로 달성하게 되는 일종의 기이한 성취로 탈바꿈한다. 폴리곤의 비교적 최근 칼럼 7) 에서도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잊을만 하면 다시 등장하는 오래된 떡밥인 루도는 블록버스터(트리플A) 게임의 산업적인 측면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실재하는’ 두 내러티브의 부조화인 루도는 게임 고유의 현상이며, 고쳐야 할 문제라는 의견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루도가 없는 게임이 가능할까. 바꿔 말해서 두 개의 내러티브가 완벽히 매끈하게 엮이면서, 결과적으로 하나의 내러티브만을 가지게 되는 이상적인(?) 상황을 연출해 낸 게임은 무엇일까. 즉각적으로 〈테트리스〉와 같은 고전 게임이 떠오를 수 있다. 다만 테트리스의 경우는 의도적으로 게임플레이를 제외한 내러티브를 아예 배제한 경우에 가깝다. 게임 플레이를 통한 경험이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 시점에서 이러한 몇몇 고전게임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게임들은 게임 플레이를 통한 경험과 (비록 장식에 불과할지라도) 공식적인 내러티브가 평행선을 달리는 구조를 채택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발사가 아무리 게임플레이를 내러티브에 일치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고 해도 예측 불가능한 플레이어들의 변칙성은 때때로 이러한 노력을 쉽게 무력화시킨다. 유튜브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스피드런(speedrun) 영상이 대표적이다. 문자 그대로 시공간을 초월해서 (버그마저 초월해 버리고) 〈엘든링〉을 7분 안쪽으로 클리어 해버리는 영상 8) 만큼 루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인터넷의 수많은 자생적인 커뮤니티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는 모드(mod)들은 상황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든다. 모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베데스다의 게임 중 하나인 〈폴아웃 4〉를 살펴 보자. 인벤토리의 무게 제한을 해제해주는 모드는 거의 ‘바닐라’ 상태와 마찬가지라고 여겨질 정도로 매우 사소한 변형이지만, 그것이 내러티브에 끼치는 여파는 생각보다 크다. 무게 제한이 없어진 플레이어는 더 이상 보급과 거래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고 따라서 〈폴아웃 4〉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맵 곳곳에 흩어져 있는 정착지 건설에 매진할 이유가 사라진다. 또한 인벤토리의 용량을 늘려주는 캐릭터 퍽(perk)을 찍을 이유도 없어지기 때문에 플레이어 캐릭터의 성장 역시 달라진다. 가장 간단한 모드의 파급력이 이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내러티브 사이의 간극이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모더(modder)들은 그 ‘간극’을 만들어 내는 놀이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 해도 무방하다. 이쯤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루도를 특정 게임들이 때때로 맞닥뜨리는 문제일 뿐이라고 납작하게 눌러 놓은 채 지나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 그것은 차라리 현대의 디지털 게임이 가지는 핵심적인 특성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파생되는 불편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루도가 피해갈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라면 우리(게이머)는 어떻게 여전히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일까? 게이머들은 많은 경우 특정한 논리 시스템을 대상으로 삼는 실험가들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역시 사례와 함께 중첩시켜 보자.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통칭 야숨)에서 우리는 시작하자마자 최소한의 조건만을 갖추고, 하이랄 성으로 곧장 ‘날아 가서’ (실력이 받쳐 준다면) 가논을 처단하고 게임을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끝내버릴 수 있다. 혹은 정확히 그 반대로 할 수도 있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가논과 그 짐승을 온 힘을 다해서 봉인하고 있는 젤다 따위는 나 몰라라 하고 링크 앞에 펼쳐진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세상을 마음껏 누비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게임이 바로 그 방향으로 게이머들을 은근하게 유도한다는 점이다. 물론 기억을 되찾고 재앙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 앞의 설산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다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작은 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신전은 궁금하지 않아? 라는 식으로. 혹은 여관 주인을 짝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 메뚜기를 10마리 잡아보자는 등. 그 광대한 세계가 끊임없이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정도(正道)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한다. 마치 게임 스스로가 루도를 원하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야숨은 “오히려 아방가르드의 목표는 내용이 아무튼 그 매체를 가리키거나 암시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9) 는 그린버그식 정의에 완벽히 부합하는 아방가르드 게임일지도 모른다. ∗ 뇌전의 검을 들고 잔디를 깎는 링크 위와 같은 샌드박스적인 펼쳐짐은 게임 내에서 매우 다채로운 방식으로 구현된 물리적인 상호작용들과 폭발적인 시너지를 일으키며 플레이어들이 계속해서 ‘실험’에 몰두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들을 실제로 발과 손을 ‘디딘 채’ 올라가 볼 수 있고, 게임 내의 대부분의 요소들과 촉각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철로 된 무기는 비오는 날 떨어지는 번개에 취약하며, 횃불을 들고 들판에 가면 들풀들이 탄다) 상호작용할 수 있는 세계는 게이머들로 하여금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보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토록 반응성이 뛰어난 시스템에서 공식적인 내러티브는 중요한 맥락으로 부상한다. 이 세계는 논리적이지만 우리의 현실과 같은 세계는 아니다. 마치 장르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암묵적인 장치들이 핍진성을 심각하게 결여하고 있더라도 우리가 그 영화를 즐기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게임의 내러티브는 특정한 시스템만의 논리에 장르적인 정당성을 부여한다. 앞서 봤듯이 우리는 야숨에서 무엇이든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바로 그 모든 행동들의 가능성을 떠받치고 있는 하이랄의 대지는 가논의 재앙이 100년 간 유예된 세계이다. 어딜 가든 우리는 계속해서 그 흔적들과 마주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애써 무시한 채 마치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 내가 하고 싶은 행동들을 한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링크(게이머)가 그 앞의 설산을 오를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의 캐릭터를 포함한 이 모든 것들은 어차피 그저 수많은 폴리곤 덩어리일 뿐 아닌가. 백지 상태에서 ‘모든 것은 가능하고, 뭐든지 해도 된다’ 라는 말은 마치 자유처럼 들리지만 사실 정확히 그 반대에 가깝다. 역설적으로 게이머들은 내러티브라는 관습화된 약속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야 비로소 그 세계에서 마음껏 실험할 자유를 얻는다. 그에 따라 게임은 게이머들이 내러티브라는 조건 아래에서 주어진 시스템의 한계를 가늠해 보는 지속적인 실험 과정으로 변모한다. 재현성 위기는 기회다 ‘게임은 지식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게임은 실험 과정일 수 있다’ 라는 답변은 대략 근사치에 가까워 보인다. 실험을 하다 보면 그게 지식이 되는 것 아닌가. 미안하지만 실험과 지식 사이의 그 (빌어먹을) ‘간극’은 생각보다 심대하다. 실험에서 지식으로 이르는 과정을 간단히 상기 해보자. 자신이 세운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 중 하나가 실험이고, 물론 실험 역시 검증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험을 검증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같은 실험을 반복해 보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실험이 제대로 설계되었다면 그 실험을 누가 하든, 어디서 하든 혹은 몇 번을 반복하든 간에 (모든 변인이 적절하게 통제된다는 가정 하에서) 도출되는 값은 동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크 소울〉 시리즈에서 보통 헐벗고 다니는 고인물 ‘망자’들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들이 마치 미래에서 온 것처럼 가장 최적의 움직임으로 길 위에 잡몹들을 빠르게 압살해 버리고, 보스마저 한 대도 맞지 않고 여유 있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반복된 수많은 실험들(YOU DIED)을 통해서 이 실험의 결과값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크 소울은 리듬 게임이라는 농담 10) 도 바로 이 연장선상에서 나온다. 그런데 만약 플레이어들이 ‘YOU DIED’ 라는 문구를 볼 때마다 맵의 구조가 완전히 달라질 뿐 아니라 잡몹들의 출현 위치와 등장하는 숫자도 랜덤으로 변하고, 결정적으로 보스의 공격 패턴마저 전혀 예측 불가능하게 달라진다면 어떨까. 제 아무리 고일대로 고인 망자들이라도 팬티 한 장만 걸치고 다닐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이 실제 랩에서 같은 실험을 반복하던 중에 일어난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그 실험은 엉터리이고, 실험이 바탕을 두고 있는 가설은 지식 근처에도 못 갈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런 일이 유명하고 권위 있는 저널에 이미 게재된 논문을 바탕으로 한 실험에서 벌어졌다면? 그것도 한 두 건이 아니라면? 스캔들을 넘어서 위기 상황이라고 부를 만하다. 아이러니 한 것은 실제로 그 일들이 벌어졌고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재현성 위기(The replication crisis)라고 부른다. 네이쳐(Nature)지에서 1,576명의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한 서베이 조사를 소개하는 2016년 아티클 11) 에 따르면 그들 중 70% 이상이 다른 연구자가 진행한 연구의 실험들을 재현(반복)하려다가 실패했다고 대답했다. 더 충격적이게도 그들 중 절반 이상은 자신들이 직접 한 실험들을 재현하는데도 실패했다. 재현성 위기가 단순히 자연 과학 영역을 넘어서 (특히 이 문제가 처음 대두된 영역이 심리학과 사회과학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지식계 전반에 던진 충격파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럼에도 이 현상을 게임과 겹쳐 보면 심각한 위기로 가득 찬 큰 길 옆에 또 다른 샛길을 어렴풋이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다크 소울〉 시리즈가 충실히 이행된 실험의 메타포로 기능했듯이, 우리는 재현성 위기를 반영하는 게임들을 탐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언뜻 보기에는 타임루프물만큼 재현성 위기를 제대로(?) 겪고 있는 게임도 없어 보인다. 플레이어는 모종의 이유로 특정한 시간과 공간으로 계속해서 돌아가는 것이 강제된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같은 상황을 계속해서 맞닥뜨려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반복적인 ‘실험’을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 아닌가. 그런데 폴리곤의 〈 Time loops are a weird genre for an anxious time 〉 12) 영상에서 올바르게 짚어내듯이 모든 게임은 근본적으로 타임루프물이다. (“All video games are implicitly time loops.”) 왜냐하면 캐릭터가 죽더라도 우리는 세이브를 통해서 (세이브가 없는 로그라이크 같은 게임이라면 게임오버를 통해서) 언제든 다시 특정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게임은 어떤 식으로든 재현성 위기에 처해 있다고 다시 고쳐 말해야 할까. 그 결론으로 시급히 달려가기 전에 잠시 게임에서 반복이 지니는 모호함을 상기 해보자. 우리는 게임의 소프트웨어적 특성 때문에 게임을 플레이함에 있어서 자잘한 반복적인 행위들을 필연적으로 하게 된다. 특정한 버튼에 할당된 특정한 행위들을 하는 것의 조합들이 매우 다양한 결과들을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복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게임 개발자들은 플레이어를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대한 반복적인 조합을 피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세심하게 디자인한다. 이는 특히 아이러니하게도 (또 어쩌면 당연하게도) 노골적인 타임루프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반복되는 플레이의 지루함을 덜기 위해 절차적으로 생성되는(procedurally generated) 레벨을 도입한 〈리터널〉, 계속 같은 곳으로 되돌아오더라도 새롭게 알게 되는 정보들을 활용해서 플레이어들을 끊임없이 새로운 공간으로 유도하는 〈포가튼 시티〉, 같은 지역이라도 어떤 시간대인지에 따라 분위기와 적들의 규모와 위치가 변하는 〈데스루프〉 등. 결과적으로 우리는 대놓고 타임루프를 표방하는 게임들 내에서 오히려 반복적인 ‘실험’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타임루프물이 아닌 게임이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잇 테이크 투〉는 마치 뷔페처럼 모든 스테이지에서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극도로 잘 조율된 레벨 디자인을 선보인다. 그뿐 아니라 역시 극도로 타이밍이 좋은 자동 세이브 기능 덕에 플레이 중 캐릭터가 죽더라도 이미 지나쳐 온 과정을 반복하는 행위를 최대한 피할 수 있다. 이제는 반복을 회피하려는 강박이 없으며, 그 반복의 결과들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그런 게임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그게 과연 ‘재미있는’ 게임일까. 나는 당연히 그런 게임들은 존재하며 심지어 끝내주게 재미있는 것도 있다고 주장할 참이다. 그 중 하나가 〈프레이〉다. 〈프레이〉가 특히 훌륭하게(?) 재현성 위기에 처해 있는 이유 중 큰 부분은 이 게임이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머시브 심(Immersive Sim)이라는 점에 있다. 앞서 언급한 야숨과 폴아웃 등도 반응성이 뛰어난 시스템 우선의 플레이 스타일로 몰입형 시뮬레이션적인 특징을 공유하지만 오픈 월드라는 형식을 경유해서 그것들을 마치 빵에 잼 바르듯이 얇고 넓게 펼쳐 놓는다면, 〈프레이〉는 ‘탈로스-1’ 이라는 우주 정거장 하나만을 배경으로 삼는 대신 해상도를 극적으로 높인다. ∗ 우주에서 바라 본 탈로스-1 스테이션 예를 들어, 나는 플레이 하던 도중 잠긴 문으로 막힌 공간을 발견했고 어떤 방법으로도 그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다만 촘촘한 창살 사이로 내부 공간을 엿보는 것이 가능했는데 그 안에는 문 옆에 조그만한 버튼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지고 있던 장난감 석궁으로 좁은 창살 사이를 조준해서 그 버튼을 맞추었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그런데 만약 내가 다른 공간에서 키카드를 입수할 수 있었다면 그냥 그 키카드로 문을 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힘이 충분했다면 그 공간 뒤쪽에 장애물들을 치우고 그 공간으로 진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그 안에 진입하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관건이 되는 것은 게임의 물리엔진을 위배하지 않는 한 어떤 방식이든 허용되며, 스크립트로 짜여진 공식적인 루트는 없다는 점이다. 또한 나를 둘러싼 세계는 (아주 작은 버튼 같은) 꽤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논리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이 특성은 제한적인 공간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이 게임의 레벨 디자인과 결합하며 이상적인 실험 환경을 구축한다. 여기서 반복되는 실험들의 제각기 다른 결과값들은 모두 ‘정당’하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 위계는 없다. 즉, 이 실험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동어반복적 회로를 차단하기 게임은 예술이 아니며, 지식이 되는 것에는 실패한 실험 과정이라는 시나리오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심지어는 그렇게 인기가 있는 가능성도 아닐 듯하다. 게임은 예술 혹은 문화, 하다못해 지식이라도 ‘되어야만’ 하는 시대에 무슨 생뚱맞고 처량하게 실패한 실험 운운인가. 그런데 어쩌면 바로 실험이 ‘실패’한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게임 = 예술, 지식, 문화’ 와 같은 (완벽하게) 숨 막히는 동어반복적 회로를 잠시라도 차단하고 완전히 다른 회로를 돌려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게임이 당위적으로 스스로를 정의/선언할 필요가 없는 회로를 말이다. 〈포탈 2〉의 그 모든 ‘실험’들이 스펙타클하게 실패한 이후 글라도스(GLaDOS)는 마침내 골칫덩이 실험체인 첼(플레이어)을 바깥 세상으로 놓아준다. 특유의 위트와 미묘한 슬픔이 뒤섞인 그녀의 작별인사 13) 는 마치 기이한 예언이 그렇듯이 예상치 못한 어떤 가능성을 예비한다. Go make some new disaster (가서 새로운 사고를 쳐) That's what I'm counting on (그게 내가 바라는 바야) You're someone else's problem (너는 이제 내 알 바 아니니까) (I used to want you dead but) (예전에는 네가 죽기를 원했는데) Now I only want you gone (이제는 그냥 너가 사라져 줬으면 좋겠어) 1) 그레이엄 하먼, 『예술과 객체』, 김효진 역 (서울: 갈무리, 2022), p.90-91. 2) James Bridle, “Something is wrong on the internet” Medium, 2017.11.7. medium.com/@jamesbridle/something-is-wrong-on-the-internet-c39c471271d2 3) Antoine Miech, Twitter, 2022.5.3. twitter.com/antoine77340/status/1521218333412139009 4) 김성완, Facebook, 2022.5.7. facebook.com/story.php?story_fbid=7748085815216489&id=100000454416270 5) https://this-person-does-not-exist.com/en 6) Clinton Hocking, “Ludonarrative dissonance in Bioshock” Typepad, 2007.10.7. clicknothing.typepad.com/click_nothing/2007/10/ludonarrative-d.html 7) Chris Plante, “The Last of Us 2 epitomizes one of gaming’s longest debates” Polygon, 2020.6.26. polygon.com/2020/6/26/21304642/the-last-of-us-2-violence 8) Distortion2, “Elden Ring Any% Unrestricted Speedrun in 6:59 (WORLDS FIRST SUB 7 MINUTES)” Youtube, 2022.4.12. youtube.com/watch?v=XuUEk6e1LOE 9) 그레이엄 하먼, 『예술과 객체』, 김효진 역 (서울: 갈무리, 2022), p.230. 10) “[영상] 다크소울은 리듬게임이다.” 루리웹, 2021.9.16. bbs.ruliweb.com/family/4892/board/183787/read/9590253 11) Monya Baker, “1,500 scientists lift the lid on reproducibility” Nature, 2016.5.25. nature.com/articles/533452a 12) Polygon, “Time loops are a weird genre for an anxious time ” Youtube, 2022.1.29. youtube.com/watch?v=QWEVGbVoxQ4 13) TheMediaCows, “Portal 2: End Credits Song 'Want You Gone' by Jonathan Coulton [1080p HD] ” Youtube, 2011.4.19. youtube.com/watch?v=dVVZaZ8yO6o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웜뱃 잡다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입니다. 역시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게임에는 특히 관심이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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