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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모전] 게임과 행위 원리 – 놀이와 협박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은 노는 자가 왜 노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의 논의들 중에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기여한다며 생산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은 그러한 효용적 가치들을 충분히 발생시킬 수는 매체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가 정말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500시간 동안 앉아 있는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 Back [공모전] 게임과 행위 원리 – 놀이와 협박 13 GG Vol. 23. 8. 10.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은 노는 자가 왜 노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의 논의들 중에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기여한다며 생산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은 그러한 효용적 가치들을 충분히 발생시킬 수는 매체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가 정말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500시간 동안 앉아 있는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게임, 즉, 놀이의 형태는 고양이의 놀이이다. 사람이 레이저나 막대기, 털 장난감 등으로 인공적으로 놀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고양이들은 자연 상태에서도 자기들끼리 여태까지 잘만 놀아 왔고 지금도 잘만 놀고 있다. 고양이는 자연 속에서 나뭇잎이나 막대기, 빛, 곤충이나 동물 시체 등을 갖고 논다. 이러한 놀이는 언뜻 사냥을 연습하기 위해 그 행위들을 가상으로 모방하여 시뮬레이션하는 모습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상 가장 중요한 순간, 정말로 곤충이나 작은 동물들을 사냥해서 잡아 그 시체를 뜯어 먹기 바로 직전에 보이는 유희의 형태를 본다면 그들 놀이의 본질에는 어떠한 가상도 모방도 연습도 없으며, 실용성이 아니라 오직 즐거움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미 죽어서 차갑게 식어 움직이지 않는 시체나 척추가 부러진 채로 아직 죽어가고 있어 반항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그저 꿈틀거리기나 하는 초주검의 동물을 붙잡고 양손으로 데굴데굴 굴리거나 입으로 물어 공중으로 던진다던지 하는 행위는 그 어떤 다른 ‘실제 행위’도 모방하지 않고 있고 그저 그 자체로서가 이미 고유한 실제 행위이다. 그리고 이 놀이 행위들은 그 어떤 실용적 경험치에도 봉사하지 않고 그저 식사 이전의 재미, 신남, 기쁨 등만을 생산해 내고 있을 뿐이다. 즉, 놀이로서 게임은 즐거움을 생산하는 행위 그 자체로서가 목적이다. 다른 외부적 목적에 부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게임 <핫라인 마이애미>의 결말 장면에서 이러한 게임의 행위 목적성을 아주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핫라인 마이애미>는 게임의 진행 과정에 따라 두 가지 서로 다른 결말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흔히 말하는 ‘보통의 결말 (normal ending)’과, ‘숨겨진 결말 (secret ending)’의 구조이다. 두 가지 결말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플레이어가 만나게 되는 두 인물은 해당 게임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들을 배후에 숨어서 조종하고 있던 ‘청소부 (janitor)’들이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요 사건에 대해 잠깐 설명하겠다. 어느 날부터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동물 마스크를 배달받고, 이렇게 동물 마스크를 배달받은 사람들은 모르는 이들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전화의 내용은 어떤 특정 장소로 가서 배달받은 동물 마스크를 쓰고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령이다. 이 전화의 발신자가 바로 청소부들이고, 주인공은 청소부들에게 명령을 받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이야기의 막바지에 다다라서 자신이 지금까지 따라온 명령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게 된다. 주인공은 결국 청소부들의 비밀 본부를 찾아내고. ‘보통의 결말’에서 이들에게 ‘왜’ 이러한 일들을 벌이게 되었는지 물어볼 수 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청소부 A: 그야 심심했으니까 그렇지! 청소부 B: 왜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해야 하겠어? 너는 우리가 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을 저질러 왔잖아, 안 그래? 청소부들은 주인공이 제기한 ‘왜’에 대해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해서였다고 밝힌다. 주인공이 청소부들에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며 주인공은 그저 자신들의 “장기 말”에 불과하다고 대답한다. 청소부들은 주인공과 같은 사람들을 조종하며 갖고 노는 ‘놀이자’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주인공 또한 청소부들의 명령에 따르면서 직접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실제 자신의 손으로 사람들을 살해하는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을” 저지름으로써 즐거움을 느끼는 위치에 처해 있었다. 주인공은 청소부들에게 “너희들은 왜 사람을 죽이는 거야?”라고도 물어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청소부들은 그 질문 속의 주어 설정이 굉장히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아무도 안 죽였어, 너가 죽였지...” 즉, 이 ‘보통의 결말’은 청소부들과 주인공 모두의 행위가 다른 어떤 목적으로도 변명 될 필요 없이 오로지 즐거움만을 위해 실행되었던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청소부들이 주인공을 향해 “너”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것이 주인공을 조종해 사람들을 죽이며 즐거움을 얻은 또 다른 놀이자, 플레이어도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에게 명령하고 주인공을 갖고 노는 놀이자로서의 청소부와 청소부의 명령을 수행하며 즐거움을 획득하는 놀이자인 주인공의 구도처럼, 플레이어에게 명령하고 플레이어를 갖고 노는 게임이라는 놀이자와 게임이 명령하는 사항들을 이행하며 즐거워하는 플레이어라는 놀이자의 구도 또한 형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전반부에서 만나게 되는 닭 마스크의 환영은 주인공-플레이어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게임과 플레이어 사이에서 생산되는 즐거움이 가지는 본질적인 행위 원리의 진실을 시사한다. "너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걸 좋아하니?" 즉, 주인공이 모르는 전화 속 목소리의 명령을 따르는 것도, 플레이어가 이 게임이 명령하는 사항들을 기쁜 마음으로 따르는 것도, 결국 이 행위자들 모두가 그 명령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단 하나의 행위,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진실 말이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명령하는 사항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맞닥뜨릴 수 있는 튜토리얼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너에게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여기 와 있다. 이 게임은 좌우 스틱으로 조작된다. R 버튼을 눌러 때린다. 얼굴을 노려라! 우선 네가 누군가를 쓰러뜨렸으면 그를 마무리까지 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너는 X 버튼을 누른다. 알겠나? R을 눌러 때려라! X를 눌러 끝내라! 내 말 알아듣겠나? 실수하지 말아라! 튜토리얼에서부터 <핫라인 마이애미>는 플레이어가 이 게임 속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살인 행위뿐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탑다운 형식으로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사람 형상을 조작해 또 다른 조그만 사람 형상들을 쏘고 때리고 찢어발기는 게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이 게임을 그럼에도 계속해서 플레이하는 ‘원인’은 우리가 이러한 가학 행위에서조차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즐거움이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속편에서도 우리의 행위 원리에 대한 같은 진실이 드러나는 장면이 존재한다. <핫라인 마이애미 2>의 16번째 장, “사상자들 (Casualties)”에선 죽음이 거의 확정된 임무에 자신들의 부대원들을 보내게 된 “대령 (the Colonel)”이란 인물이 임무 전날 밤, 죽은 퓨마의 안면 피부를 벗겨 미간 부위에 피로 성조기를 그려 놓은 다음 그것을 자신의 얼굴에 쓰고 나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게 보이나? ... 내 얼굴이 보이냐고? 이것이 내 진정한 본성(nature)이다! 보이지, 안 그래? 이게 나야! 이게 우리 모두란 말이다. 우린 동물이야! ... 부인할 길은 없어! 우리가 빌어먹을 동물들이라는 것을! 그들은 우리가 학살하거나 학살되도록 내보내고 있지...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 앉아서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할지, 그리고 어떻게 할지를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우리 자신의 의지는 없다. 그저 영혼 없는 복종일 뿐이야! 우리는 우리가 지금 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우리가 아는 것은 그저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걸 즐기고 있다는 거야. 파괴와 폭력... 이것들은 그저 우리 본성의 일부일 뿐이지.” 위의 대사를 말하는 “대령”이 퓨마라는 동물의 얼굴을 벗겨 마스크로 쓰고 미간에 피의 성조기를 그려 놓았던 것, 그리고 이 피의 성조기는 바로 청소부들이 암약하는 비밀 단체의 상징이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대령”의 발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 바로 이 게임의 제작자들이 말하고자 했던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디오니소스적인 실재의 차원에서 우리가 자연 (nature)의 의지와 공명하며 그 모든 것들을 깊이 즐기고 있기 때문에 진실을 드러낸다. 여기서 갑작스레 왜 대령이 청소부들의 상징을 사용했다고 해서 제작자들의 입장을 대표하게 되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든 독자도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명의 청소부들과 마찬가지로 이 게임의 개발자도 단 두 명이다. 그리고 플레이어에게 보여지는 청소부들의 얼굴그래픽은 게임 개발자들 자신들의 얼굴을 픽셀로 캐리커쳐한 형상이다. 즉, 청소부들은 이 게임의 개발자들이 사용하는 페르소나인 것이다. 주인공이 청소부들에게 그들이 “누구 밑에서 일하고 있는 것”인지를 추궁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 밑에서도” 일하고 있지 않은 “독립”적인 작업자들이며 “모든 것을 우리끼리 다 했”다고 당당하게 밝힌다. 마치 이 게임을 제작한 두 명의 독립 개발자들이 스스로에게 가지는 자부심과 마주하는 듯한 장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청소부들의 대사를 통해 이 게임의 개발자들이 자신들은 순전히 즐겁기 위해 창작 행위를 한 것이며, 그 어떤 누구의 명령이나 협박과 같은 외부적 조건 따위에 의해 행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청소부들이 주인공을 “장기 말”이라고 불렀던 것은, 플레이어가 주인공을 조종하며 자신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개발자들도 게임을 통해 플레이어를 갖고 놀고 있었던 것임을 의미한다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는 <핫라인 마이애미>뿐만 아니라 모든 게임에서 참이다. 게임은 항상 플레이어에게 퀘스트, 도전과제 그리고 R 버튼을 눌러 때리고 X 버튼을 눌러 마무리하는 조작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령을 제공하고 그 명령의 가짓수가 곧 게임의 부피를 결정한다. 그런데 이때 게임의 명령을 플레이어가 따르게 되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우선 첫 번째로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인공처럼 그저 재밌어서 따르는 경우가 있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인공이 그에게 아무런 위협이나 조건 따위가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화 속 목소리에 그대로 따랐던 것은 그가 청소부들의 지시사항, 그러니까 대량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게임은 자신의 명령이 플레이어에 의해서 제대로 실행될지의 여부를 항상 즐거움만에 맡기지는 않는다. 즉, 자신이 명령받은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마저도 제대로 명령을 따르도록 만들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강제와 협박 같은 외부 목적적 수단들이 필요하고, 많은 경우에 게임도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조건적이고 강제적인 명령 방식이 드러나는 장면을 우리는 <핫라인 마이애미>의 ‘숨겨진 결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숨겨진 결말’은 플레이어가 청소부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특정 패스워드를 찾아 놓고 비밀 본부에 있는 컴퓨터에 해당 패스워드를 집어넣어야지만 볼 수 있다. 이렇게 ‘숨겨진 결말’을 보기 위한 조건을 만족한 뒤 청소부를 만나면 주인공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이런 정신 나간 계획을 생각해 낼 수 있었지?” 청소부 A: 정신 나가...? 네가 깨달아야 하는 건 말이야- 청소부 B: 사람들이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만들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시 결과가 따를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거야. 청소부 A: 우리 사회 전체가 이 원칙 위에 지어져 있지. 여기서 청소부들은 게임 바깥의 현실에도 적용되는 조건 명령 방식, 협박에 대해 꽤 좋은 비평을 남기고 있다. 청소부들이 말하는 “우리 사회”가 위에서 최근 게임에 대한 논의들이 그 목적성에 대한 변명으로 천착한다고 언급했던 정치 · 사회의 표본이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하리라. “하지 않았을 시 결과가 따를 거”라는 협박으로 행위의 원인 항을 강제로 채우는 법, 규범, 도덕, 국가 등은 청소부들의 대사 그대로 “이 원칙 위에 지어져 있”다. 그런데 “이 원칙”,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정신분석에서 상징계의 근간을 이루는 ‘언어’가 거세 협박을 통해 신경증 환자들에게 습득되는 과정부터가 바로 “이 원칙”의 실사례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와 사회의 체계가 신경증 환자와 같은 모범 시민들에게 명령하는 방식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러한 현실의 명령 방식이 플레이어를 향한 게임의 또 다른 명령 방식으로 나타나는 양상에 좀 더 집중하기로 하자. 왜냐면 미리 말하건대,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이러한 명령 방식들은 플레이어-행위자의 즐거움에 기반한 비조건적이고 자발적인 명령 이행보다 현저하게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핫라인 마이애미>에서 “R을 눌러”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X를 눌러” 쓰러진 상대방의 머리를 밟아 으깨라는 명령에는 그 어떤 조건절도 선행하지 않지만, 게임은 때때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의 조건절을 플레이어 행위의 원인으로 설정하고자 ‘협박’을 일삼기도 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의 협박은 HUD에 떠올려져 있는 ‘체력 바’와 같이 주인공의 죽음, 즉, ‘게임 오버’의 위협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형태의 UI에서 행해진다. 이러한 방식의 명령들은 처음에 즉각적으로 플레이어를 게임플레이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UI의 대화 방식으로는 효과적이다. 당장 ‘죽음’이라는 협박이 가지는 급박함이 우선 게임에 몰입하기 이전까진 게임 외부의 경험적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플레이어의 주의를 끌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게임 안의 현실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 끊임없이 즐거움을 탐색하는 플레이어에게 저러한 협박은 그다지 지속적으로 효과를 발하지는 못한다. 물론 체력을 채우고 유지하고 관리하는 그 행위들 자체에서 직접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으로 플레이어는 게임플레이를 멈추지 않고 지속해 나갈 수 있지만, 이 시점에서 UI가 원래 가했던 협박의 조건절, ‘나를 채우지 않으면 주인공은 죽게 되고 너는 게임을 더 이상 플레이할 수 없게 된다’는 문구는 그 전과 같은 효력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으면 뭐 어떻단 말인가? 게임은 언제든지 다시 플레이할 수 있다. ‘게임 오버’는 영원한 것이 아니며 그저 죽기 전까지의 플레이 과정을 다시 돌려 플레이해야 한다는 일시적인 불편 정도밖에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불편과 싸우는 것 자체 또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게임플레이의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소위 ‘죽음’이 플레이어의 행위를 강제하는 협박으로 기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심지어 게임 속에서 일부러 자의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한다. 체력이 바닥났으나 회복 수단까지 다 떨어졌을 경우, 스테이지를 거의 다 클리어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충분한 점수를 얻지 못했을 경우, 이러한 경우들에는 이제 게임 내에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의 가능성이 소진되어 더 이상 원하는 만큼의 즐거움을 얻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그저 빨리 죽고 다시 시작해 즐거움의 가능성을 원래대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혹은 그냥 죽는 것 자체가 재밌어서, 죽는 행위 자체가 발생시키는 즐거움을 위해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죽기도 한다. 특히 주인공의 죽음 자체가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게임들, 그러니까 주인공이 죽을 수 있는 방식이 매우 다채롭고 흥미로워 일부러 그 가능한 모든 죽음의 시나리오들을 전부 실험해 보도록 만드는 게임들의 경우에는 ‘게임 오버’의 협박이 더더욱이나 가당치도 않은 것이 된다. 특히 <데드 스페이스>, <사일런트 힐>, <바이오 하자드> 등의 호러 장르 게임들에선 괴물, 환경 등 주인공의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 각각이 저마다 고유하고 독창적인 죽음의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새로운 위협 요소와 마주칠 때마다 이 요소는 주인공을 어떻게 죽이게 될 것인지를 실험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 혹자는 물을 수도 있다. 실재적 차원의 현실에서도 우리는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고, 단 한 번의 죽음이 곧 삶의 영구적인 끝을 의미하는데, 게임 속에서 일어나는 죽음에 플레이어가 급박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가 진정으로 게임 속 현실에 몰입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고. 그리고 그렇다면 게임에서 조건 없는 즐거움의 명령이 조건적인 협박식의 명령보다 유효하다는 걸 현실에서의 행위 원리와 비교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냐고. 우선 진정한 의미에서는 실재적 차원에서도 이미 언제나 “죽음의 경험이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전에, 게임 속 세계 자체에서 플레이어의 의지에 따라 무한히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이 실재적으로 벌어지는 일인 것으로 간주되는 게임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1) 보편적으로 게임들은 그 안에서 주인공이 죽었을 때 플레이어가 ‘불러오기’ 혹은 ‘이어하기’ 등의 기능을 이용해 다시 주인공을 부활, ‘재생성 (respawn)’시키는 과정을 게임플레이 바깥의 메뉴 영역에 국한되어 벌어지는 일인 것으로 ‘가정’한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예만 보더라도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몇 번이고 반복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카타나 제로>와 같은 게임들의 경우에는 주인공도 주인공이 속한 세계도 모두 주인공의 영원히 반복되는 죽음을 실재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인식한다. <카타나 제로>에서 주인공은 ‘크로노스 (Chronos)’라는 이름의 마약을 투여해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경우의 수를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게임 속 전투 상황, 즉, 주인공의 끝없는 죽음을 포함한 그 모든 상황들은 주인공의 계산 속 경우의 수들인 것이다. 이렇게 됐을 경우 게임 내의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오직 주인공이 죽지 않고 모든 적을 처치한 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 바로 그 경우의 수뿐일 테지만, 우리는 이 또한 허위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니체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대립 그 자체가 미학에서는 도대체 부적합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삶과 세계는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면 현실과 실재를 구분하는 데에도 주관과 객관이라는 기준은 전혀 무의미할 터이다. 2) “겨우 일주일이 지났지만, 마치 일년처럼 느껴지”고 “모든 말이 길어지고, 모기는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 주인공 그 자신의 주관적 현실에선 그 모든 죽음의 경험들은 더욱 생생해질 여지도 없을 만큼 실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카타나 제로>에서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죽음은 주인공에게도 전혀 희석되지 않은 채로 아주 선명하게 실재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아가 <핫라인 마이애미>를 포함해 아무리 많은 게임들이 게임 내 세계 안에서 주인공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 죽음을 경험하는 주인공 자신조차 자신의 죽음에 무지하다 하더라도, 정작 플레이어는 그 무한한 경우의 수를 모두 자신의 경험 안에서 플레이한다. 그렇다면 플레이어의 ‘주관적’ 실재에서 그 모든 죽음은 언제나 ‘실제’로 일어난 일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다시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근본적인 목적으로 돌아올 수 있다. 게임 내에서 명령되는 사항들을 플레이어가 이행하는 원리 중에서 조건절로 협박하는 명령보다 조건 없이 플레이어 자신의 즐거움을 자극하는 명령들이 언제나 더 강력하고 효과적이라면, 애초에 현실에서 플레이어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500시간 동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게 하는 원동력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오직 즐거움뿐이리라. 그리고 굳이 게임이 예술의 영역 안으로 포섭되어야만 할 필요도 없겠지만, 게임은 플레이어가 그 어떤 외부적 목적도 전혀 안중에 놓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 안에서 즐거움만을 끌어내기 위해 플레이한다는 지점에서만 예술과 궤를 함께할 수 있다. 아니면 예술이 게임과 궤를 함께하든가. 물론 이 포섭과 범주의 선후는 중요하지 않다. 둘은 인간 행위라는 점에서 목적과 원리가 동일하니까. 아무튼, 그러니까 말하자면, 애초에 예술 현상이 무슨 외부적 효용을 위해 벌어진단 말인가? 1) 안티 오이디푸스, 547p. 2) 비극의 탄생, 99p.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벼개가 된 사나히>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와 『게임 코러스』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 아케이드가 할 수 있는 미래의 역할
오락실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아케이드 게임장은 1980~1990년대의 많은 게이머에게 여전히 소중한 존재로 남아있다. 점차 가정용 게임기와 PC가 보급되며 집에서 게임을 즐기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어가는 환경에서도, 집에서 절대 즐길 수 없는,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게임을 동전 하나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의미를 넘어 게임 환경의 선두를 달린다는 이미지마저 주는 곳임을 뜻했고, 실제 게임 산업의 선두를 달리는 분야가 아케이드 게임이기도 했다. < Back 아케이드가 할 수 있는 미래의 역할 04 GG Vol. 22. 2. 10. 오락실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아케이드 게임장은 1980~1990년대의 많은 게이머에게 여전히 소중한 존재로 남아있다. 점차 가정용 게임기와 PC가 보급되며 집에서 게임을 즐기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어가는 환경에서도, 집에서 절대 즐길 수 없는,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게임을 동전 하나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의미를 넘어 게임 환경의 선두를 달린다는 이미지마저 주는 곳임을 뜻했고, 실제 게임 산업의 선두를 달리는 분야가 아케이드 게임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아케이드 게임장은 매리트가 많이 사라져, 한국에서는 그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시기이다. 가정용 게임기와 PC의 그래픽 성능이 더욱 좋을 정도로 더 이상 시각적으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온라인 환경이 발전한 결과 집에서 편하게 게이머들이 전 세계 상대들과 마음껏 경쟁을 할 수 있는 것도 크다. 오히려 실력으로만 놓고 보면 전 세계와 경쟁을 즐길 수 있는 지금이 경험적 측면에서 훨씬 풍부한 것도 사실이다. 아케이드에서 형성되었던 게이머들의 커뮤니티 역시 개인 SNS로 얼마든지 전 세계와 소통을 할 수 있는 지금은 발걸음을 옮길 만한 매리트로 이어지지 않는다. 더해 아케이드는 가장 저렴하게 게임을 즐길 방법이었으나, 지금은 기본 무료 게임들과 모바일 게임의 보급으로 고유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으며, 에뮬레이터 프로그램으로 인해 아케이드 게임을 돈을 내고 즐기는 것이 아깝다는 그릇된 인식조차 생긴 상황이다. 결국 아케이드 게임장은 살아남기 위해 재미보다 감성을 공략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코인노래방과 인형 뽑기를 위주로, 여전히 집에서는 즐기기 어려운 체감형 게임 위주로 환경을 세팅하며, 스틱과 버튼으로 조작하는 게임은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인기 레트로 게임들로 편성하였다. 사실 2000년 이후 아케이드 게임 산업이 크게 줄어 신작 게임이 나오는 일이 드물어졌기 때문에, 이처럼 레트로 게임들로 꾸민 것은 그나마 소비자의 관심을 얻을 수 있는 합리적이면서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인구가 훨씬 많고, 아케이드 게임 산업이 발달했던 미국이나 일본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미 미국의 아케이드 게임장은 테마파크나 레저시절에 같이 편승하여 체감형 게임 위주로 운영되고 있으며, 가장 게임 시장에서 아케이드의 영향력이 강했던 일본 역시 상징과 같았던 유명 게임장들이 연달아 문을 닫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인구의 규모가 커 여전히 새로운 게임들이 조금씩이나마 출시되고 있지만, 현재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팬데믹 상황을 이야기하기가 민망할 만큼, 전 세계적으로 아케이드 게임장은 오랜 기간 매리트를 잃고 서서히 규모가 줄어들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 ‘동네 오락실’이라는 용어가 무색할 정도로 지역에 오락실이 있다는 사실조차 놀라는 시대가 되었다. 아케이드 게임장의 위기에 관련 회사들은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5년 전부터 도입된 VR기기이다. 아케이드가 주는 매력 중 하나가 집에서는 즐기기 어려운 새로운 체험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노린 발상이다.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었지만, 어떻게든 아케이드로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겠다는 이 시도는 VR 산업이 예상보다 커지지 못하면서 소프트웨어의 부족과 기술 정체, 팬데믹 상황까지 겹쳐 현재까지 유의미한 결과를 이루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상황이다. 더해 새로운 시도가 연달아 빠른 속도로 이어지다 보니 업계의 시도만큼 정책이 따라가지 못해, VR 테마파크를 건설하는 데 있어 법률 관련 문제가 미흡했거나, 아케이드 업체 입장에서 체감 게임이 주가 되는 이상 금형 비용 지원이 중요한데 정부는 여전히 소프트웨어 개발비를 기준으로 산업 육성 차원에서 지원하는 부분 등 산업 발전을 위해 손발을 맞추는 것도 버거운 모양새였다. 설상가상으로 비디오 게임 소매업체도 디지털 게임 구매의 가속화로 수익이 지속해서 감소하고 있다. 이 흐름이 아케이드 게임과 전혀 연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 게임을 위해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이유 자체가 상실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아케이드는 미래의 역할을 진지하게 파악해야 할 때가 왔다. 새로운 시대는 피할 수 없고, 아케이드는 결국 변해야 한다. 비디오 게임 소매업체의 경우, 갈수록 악화하는 상황 속에 “사람들이 매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공간”에 대한 실험을 이미 전 세계에서 2년 전부터 진행하고 있다. 현재 이 같은 실험에서 가장 유의미한 결과를 내는 곳은 미국 게임스탑의 컨셉 스토어이다. 협동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대형 TV와 소파, TRPG로 대표되는 테이블 게임, 함께 게임을 즐기기 위해 앉을 수 있는 12~36개의 게임 부스, 레트로 코너, 수집품 전시장 등의 코너를 준비했으며, TRPG의 경우 큰 히트를 기록해 일부 매장은 프리랜서 던전 마스터를 고용하기도 했다. 구매하기 전 즐기는 것을 넘어, 같은 게임이라도 이 공간에서 즐긴다는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한국으로 따지면, PC방 서비스에 복합 게임 공간이 결합한 상황인 게임스탑의 실험 목적은 “게임을 위해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것”도 있으며, 게임스탑은 여전히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는 상황이지만 현재까지 유의미한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자평하고 있다. 이 같은 복합 오프라인 공간은 한국도 몇 곳이 존재하며, 모두 나름의 생존전략을 찾아 오프라인 및 온라인 이벤트로 수년 이상 활발하게 공간을 가동하고 있다. 2022년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실제 생활에서 게임들과 게임을 즐기기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결과를 끌어낸 것이다. * 오클라호마주 털사에 있는 게임스탑의 컨셉 스토어. 이 같은 사례로 미루어 볼 때, 결국 중요한 것은 콘텐츠의 커뮤니티 형성이고, 아케이드는 여전히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오프라인 커뮤니티의 형성은, 대상의 정보를 온라인보다 훨씬 많이 빠르게 습득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낯익은 얼굴이 밸런타인데이에 나와 같은 오락실에 나타났을 때 동질감을 느끼는 망상부터, 상대가 처한 환경을 보다 직접적으로 알 수 있기에, 특유의 커뮤니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여전히 유효하다. 그만큼 게임에 있어 인성 역시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e스포츠 문화에 아케이드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킬러 콘텐츠와 오프라인 커뮤니티 특유의 예의 있는 교류가 합쳐진다면, 팬데믹이 지나 다시 한번 아케이드 게임 공간은 다시 사람들이 매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공간으로 될 것이라 믿는다. * 디시디아 파이널 판타지 아케이드는 세 명이 팀을 이루어 다른 팀과 싸우는 게임으로, 낯선 사람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 팀을 이루는 순간, 오프라인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유대감이 생겨난다. 따라서 현재 가장 큰 숙제는 커뮤니티를 이끌어갈 만한 아케이드만의 경쟁력 높은 콘텐츠이다. 소속 커뮤니티가 뭉쳐 지역 최강 → 국내 최강 → 세계 최강으로 향한다는 흐름은 2022년의 게임 업계에서 아케이드를 떠나 게임 커뮤니티의 단합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현재의 아케이드는 네트워크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어 실제 자신의 세계 랭킹을 확인하는 것이 한국도 가능한 시대이고, 점포끼리 대전도 가능하다. 안타까운 것은 콘솔 시장을 이끄는 소프트 메이커들이 아케이드 게임 시장을 이끄는 구성이기도 한 일본과 달리, 한국은 이 같은 인프라를 위해 달려들 기술력과 자본들 있는 아케이드 소프트 메이커가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새로운 체험을 위해 구글 코리아가 기획한 게임 프로젝트인 구글 플레이 오락실 행사 역시, 애초 구글이 기획을 한 행사였기에 국내 게임사들의 다양한 모바일 게임을 전시하며 오락실이라는 명칭과 달리 유사 게임쇼 형식에 머무는 결과로 그쳤다. 90년대 출간된 만화 중 게이머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은 ‘브레이크 에이지’라는 만화가 있다. 작가가 미국의 아케이드 게임인 배틀 테크를 본 뒤 이와 연관된 미래를 상상하며 그린 이 만화는, 제한된 리소스 안에서 자신이 로봇을 자유롭게 커스텀 할 수 있는 통신대전형 체감 게임인 ‘데인저 플래닛(Danger Planet)’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출간 이후 버추어 온, 아머드 코어 등 조작이나 개념이 비슷한 게임이 출시될 때마다 ‘드디어 데인저 플래닛 같은 게임을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가’라는 말이 따라다닐 정도의 인기를 얻었고, 결국 2010년 중반에 재판이 출간하게 되었다. 실제 이 만화로 인해 게임 업계에 뛰어든 사람도 적지 않다. 사람들이 이 만화에 열광한 이유는, 게임의 개념이나 등장인물들의 매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다. 체감형 아케이드 게임이 주는 박력이 상상됨과 더불어 남녀노소가 게임을 통해 건전한 교류를 하는 따뜻한 모습과, 지금의 NFT 개념과 비슷하게 자신이 만든 커스텀 기체를 판매하고 쉽게 구할 수 없는 부품을 찾아 돌아다니는 모습 및 실력만 있다면 개발사와 플레이어 모두 수익을 낼 수도 있는 건설적인 환경이 게이머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게임이 30년 전에는 SF에 그쳤을지 모르나, 현재의 기술로 만화 내용의 구현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현재의 아케이드 산업은 코인 노래방, 인형 뽑기, 체감형 게임으로 유지되는 상황이며, 시장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홀로그램 등 새로운 기술을 체감할 수 있는 최첨단 체감형 게임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지만,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시장을 이끌어갈 수 있는 킬러 콘텐츠가 부족한 상황이다. 다행인 것은 이 문제가 실제 전 세계의 대형 아케이드 게임 제작사들이 가장 중점적으로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하며, 올해도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 차례차례 등장할 예정이라는 점이다. 아케이드 산업을 살리겠다는 개발사들의 시도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이상, 아케이드는 향후 다시 한번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게이머들의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저 업계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열정이 꺾일 정도로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IGN코리아 대표) 이동헌 1999년 월간 게임라인을 시작으로 게임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기간을 게임 개발사에서 보낸 뒤, 게임 제작자보다 글로서 게임 문화에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2018년부터 IGN Korea를 운영하고 있다.
- '실험 게임 페스티벌'이라는 실험: 아웃오브 인덱스의 여정
아웃 오브 인덱스 (Out Of Index: 이하 OOI) 는 국내 유일의 실험 게임 페스티벌이다. 자바 언어의 에러 메시지 중 ‘배열을 벗어났다’는 뜻의 ‘Array Index Out Of Bounds’ 에서 영감을 얻은 페스티벌의 이름은, ‘장르’나 ‘트렌드’ 와 같은 단어로 설명되어지는 일반적인 분류(Index) 밖에 자리한 실험적인 작품들을 다루고자 하는 페스티벌의 철학을 담고 있다. < Back 03 GG Vol. 21.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eonyong Park The kind of person who, with nothing to play, makes something to play with—and with no playground around, builds one and gathers friends to it. And so: makes games, builds developer communities, and creates game events.
- 애증의 가 2023년에 보여준 가능성
<와우>의 명성이 예전 같지 않은지는 오래되었다. 열성 플레이어들도 나이를 먹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새로운 플레이어의 유입보다 기존 플레이어의 여전한 참여가 <와우>를 유지시키고 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와우>가 기존 플레이어들만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 Back 15 GG Vol. 23.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hinKyu Kang Editorial board member of Culture/Science, a journal specializing in cultural theory. Researches media and culture, including games, broadcasting, comics, and fandom. Books include Fandom in Flux: From Play to Labor, From the Real to the Virtual (2024), Subculture Criticism (2020), IP: The Beginning of Every Story (2021, co-authored), Third Life: New Lifestyles in the Age of Technological Revolution (2020, co-authored), and The Theory of Games: From Play to Digital Games (2019, co-authored). Papers include "Fun Without Winning: Sociality, Agency, and Striving Play in Parent-Child Game Play" (2024), "Fandom That Consumes Communication: Idol Fan Platforms and the Reconfiguration of Fandom" (2022), "How Does 'In-Game Spending' Become Play?: Focusing on In-Depth Interviews with Whale Game Players" (2022, co-authored), and "Gamifying Broadcasting: From Producerly Text to Playerly Text" (2019).
- 내 마음의 퍼즐 상자: 〈애니멀 웰〉과 〈리프 이어〉의 세계에 대해
이 글은 《게임제너레이션》 20호에 실린 「기계장치의 우주: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의 불능감에 대해」의 후속편으로, 지난 글의 결론부에서 언급만 하고 넘어갔던 장르명인 ‘메트로브레이니아(metroidbrainia)’에 대한 논지를 심화해 〈애니멀 웰 (Animal Well, 2024)〉과 〈리프 이어 (Leap Year, 2024)〉를 뜯어보는 것이 목표다. 그러므로 우선 곧장, 메트로브레이니아가 무엇인지를 정리하며 글을 열겠다. < Back 내 마음의 퍼즐 상자: 〈애니멀 웰〉과 〈리프 이어〉의 세계에 대해 24 GG Vol. 25. 6. 10. 다시 들어가며 이 글은 《게임제너레이션》 20호에 실린 「 기계장치의 우주: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의 불능감에 대해 」의 후속편으로, 지난 글의 결론부에서 언급만 하고 넘어갔던 장르명인 ‘메트로브레이니아(metroidbrainia)’에 대한 논지를 심화해 〈애니멀 웰 (Animal Well, 2024)〉과 〈리프 이어 (Leap Year, 2024)〉를 뜯어보는 것이 목표다. 그러므로 우선 곧장, 메트로브레이니아가 무엇인지를 정리하며 글을 열겠다. 지난번에 잠시 언급했듯, 이 단어는 선구적인 《슈퍼 메트로이드 (Super Metroid, 1994)》와 그 영향을 받은 《악마성 드라큘라 X 월하의 야상곡 (Castlevania: Symphony of the Night, 1997)》의 합성어인 ‘메트로배니아(metroidvania)’에 ‘브레인(brain)’을 집어넣은 말장난이다. 일종의 내부자용 농담 같은 이 단어에 대해 게임 저널리스트 케이트 그레이는 「대관절 메트로브레이니아가 뭐야?」라고 물어보는 글 [1] 에서 《메트로이드》가 뭐고 《캐슬배니아》란 또 무엇인지부터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이런 작명이 “기이할 정도로 도움이 되지 않고, 기계적이고 자기 참조적”이라고 비판한다. 대신에, 그는 자신과 동료가 고안한 ‘지식 노드 퍼즐(knowledge node puzzle)’과 ‘정보 게임(information game)’이라는 훨씬 직관적인 표현을 통해 “정보의 획득이 목표고, 이미 얻은 정보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이를 해내”며 그를 위해 “정보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감춰서, 세계와 그 구조에 대한 플레이어 본인의 이해력을 통해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내는” 유형의 게임들을 묶고자 한다. 이렇게 지식·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레이의 접근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런 유형을 정의 내리며 플레이어의 경험과 그에 딸려 오는 (고고학자나 탐정 같은) 어떠한 기분 또한 중대하게 언급한다는 것이다: “게임은 (마치 역사처럼) 당신보다 앞서서 펼쳐져 있고, 당신은 정말 무엇도 바꿀 수 없을 뿐, 그저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다.” 이런 설명을 지난 글과 연결 짓자면, 〈아우터 와일즈〉와 〈레인 월드〉는 각각 태양계와 생태계의 법칙을 그 임의성까지도 어느 정도 포함해 모의하며 플레이어에게 “우리-없는-세계” [2] 한복판에 떨어진 기분을 제공했을 테다. 비밀스러운 세계와 그 벽들 [3] : 메트로배니아와 메트로브레이니아에 대해 그렇지만, 나는 메트로브레이니아에서 플레이어가 숨겨진 지식·정보를 차근차근 연결 짓고 이해하도록 하는 진행이 중요한 만큼 메트로배니아적인 특성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레이의 문장대로 “게임이 거의 마치 당신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당신은 그저 이를 발견했을 뿐”인, 세계에 대한 플레이어의 불능(감)을 고전적인 메트로배니아 장르를 활용하면서도 충분히 추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메트로배니아의 ‘불변하는 매력’이 대관절 무엇인지를 여러 게임 제작자에게 물어보는 인터뷰 [4] 에서, 많은 이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맵 속에서 필요한 아이템을 찾거나 역추적을 해야만 극복할 수 있는 방해물로 이뤄진 사이드 스크롤링 액션-어드벤처”의 구조가 특정한 플레이 경험을 생성한다고 밝힌다. 이 경험은 대개 새로운 이동기나 공격기를 얻으며 성장하는 플레이어의 주체적인 행위성과 관련되어 있다. 플레이어가 주어진 세계를 익혀나가고 그에 익숙해지는 분투가 그 세계를 무대 삼은 서사로 이어지는 진행 과정의 등치를 통해 “그저 사건들의 정해진 순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그 사건들을 (어떤 경우에는 항상 같은 순서도 아니게) 일으키는 기분”과 “다수의 방식으로 탐험 준비를 마친 거대한 맥락 속에 플레이어가 들어간 인상을 (심지어 그 인상이 거짓일지라도) 선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술한 메트로배니아 고전들의 주동 인물이자 플레이어 캐릭터인 사무스와 알루카드부터 플레이어의 숙련에 따라 각종 파워 업을 얻고 장비 세트를 되찾으며 강해지고, 결국엔 제베스 행성에서 마더 브레인을 또 악마성에서 드라큘라를 물리친다. 그러니 아무리 거대한 맵을 헤매거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밀리더라도, 끝에 가면 이들을 제어하는 플레이어가 작중 서사의 중심이 된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할 테다 [5] . 다시 말해, 메트로배니아는 거대하게 연결된 세계를 탐험하며 성장하는 플레이를 작중 서사의 전반적인 진행과 일치시켜, 플레이어가 주어진 사건과 맥락 속에서 인과나 행위력을 출중히 발휘하는 전능(감)을 고양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메트로배니아의 전제에서 출발해,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비인격적이고 무심한 우리-없는-세계에 직면하려는 시도” [6] 를 상상해 본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플레이어가 세계의 구조나 비밀을 알아가는 과정이 그 상위의 맥락이나 사건에 직접적인 인과를 발휘하지 않으면서 등치가 어긋나는 식으로 말이다. (다시 지난 글을 되짚자면, 〈아우터 와일즈〉의 결말은 화로인의 ‘관측’이 가히 우주적인 힘을 발휘하도록 인과를 극적으로 연결 짓는 한편, 〈레인 월드〉의 결말은 슬러그캣의 귀결이 그가 뒤로 한 세계에 큰 인과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스킬 및 아이템의 해금이나 레벨·파워 업 같은 중대한 게임적 요소를 그보다 덜 게임적일 지식·정보의 획득 및 연결로 치환할 때,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진행의 감각은 모호하게 흐트러지면서 전능(감)에 불능(감)이 흘러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는다. 그렇다면, 메트로브레이니아를 규칙이 고정된 장르보다는 플레이어가 지식·정보를 매개로 게임 속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으로 이해해 보자. 주어진 지식과 정보를 알맞은 방식으로 연결 짓자 “필연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으며, 숨겨지고 은닉된 채 남겨진” [7] 듯한 세계의 비밀이 드러나는 메트로브레이니아적인 작동법은 플레이어의 진행을 쉽게 수량화하거나 가시화할 수 없도록 하며, 세계의 인과가 오로지 플레이어의 행위성에만 연동되지 않는다는 점도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메트로브레이니아 유형의 게임들은 다른 경우들보다 불능(감)이 우선 두드러질 수도 있겠지만,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해 플레이어에게 모르는 의미나 숨은 비밀을 알아차릴 때의 짜릿한 전능(감)을 효과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 메트로브레이니아를 메트로배니아에서 구분 짓는 특성이 바로 이것이라고 둘 수도 있겠고 말이다. 이와 더불어, 앞서 인용한 메트로배니아의 정의에서 특히나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연속적으로 이어진 맵’이라는 특성이다. 유기적으로 짜여 역추적과 그를 통한 새로운 지역의 개방이 가능한 메트로배니아의 세계가 여타의 2D 플랫포머가 제시하는 세계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성훈의 논의 [8] 를 빌려오자면, 각 스테이지가 선형적으로 진행되고 스테이지끼리도 선형적으로 연계되곤 하는 2D 플랫포머들은 “이차원적인 움직임으로서의 전진에 대한 비평을 게임 내적인 논리에서 마련한다. 그 비평은 특히 게임이 제공하는 최후의 조우와 최후의 공간을 중첩하는 방식에 따라서 특유의 완결된 형식미를 갖춘다.” 곧 일반적인 2D 플랫포머에서 제시되는 세계란 시작에서 끝으로 향하는 경로 자체로, 그 일직선 구조를 반영하듯 “명쾌하고 명료하며 직선적인 이야기는 한편으로 스테이지 간의 근원적인 단절을 숨기고, 좌우로 길게 봉합된 스테이지의 연쇄를 통과하며 전진하고 있단 환상을 유지한다.” 이러한 2D 플랫포머의 세계에서 일직선 공간의 끄트머리는 ‘최종장’이라 비유되듯 플레이 전반의 마무리와도 자연스레 겹친다. 선형적인 경로의 마지막 칸에 닿으면, 그 세계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완결이 나는 셈이다. 이에 비해 메트로배니아가 제시하는 세계는 플레이어의 방문 순서가 느슨하게 짜이는 등 다른 2D 플랫포머에 비해 훨씬 비선형적이고, 그런 만큼 주어진 세계의 ‘최종장’이 아니라 중심부에서부터 훨씬 더 멀리 떨어진 ‘변방’을 향해 탐험하며 이동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나가는 플레이를 제공한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주어진 세계의 끄트머리에 닿더라도, 이는 서사 전반의 마무리로 직결되며 플레이의 공간과 시간을 겹치지는 않는다. 이런 특성을 통해 다른 2D 플랫포머에 비해 메트로배니아에서는 세계가 자기 완결적으로 닫혀 있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할 수가 있다. 「 최종장과 변방 」에서 3D 오픈 월드의 세계로 설명하듯, “이곳이 곧 끝이지만, 게임 내적으로 이곳이 곧 끝이라고 선언되어서는 안 된다는 역설. 경계 부근은 열린 세계의 닫힌 지역이라는 점에서 오픈 월드의 모순이 격화되는 장소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본론에서는 기본적으론 2D 플랫포머인 〈애니멀 웰〉과 〈리프 이어〉를 중심으로, 퍼즐 상자 같은 세계가 제 비밀을 드러내는 메트로배니아적인 동시에 메트로브레이니아적인 특성을 짚겠다. 닫힌 세계와 그 겹들: 〈애니멀 웰〉에 대해 〈애니멀 웰〉의 1인 제작자 빌리 배쏘(Billy Basso)는 비밀이 겹겹(layer)으로 숨겨져 있다는 단골 문구로 이 게임을 소개하곤 하는데, 이 겹겹의 비밀은 크고 작은 플랫포밍 퍼즐과 얼기설기 엮인 채 가로세로 16칸씩으로 이뤄진 세계의 전반적인 형상과 함께 차차 밝혀지도록 짜여있다. 첫 겹에서는 평범한 2D 플랫포머에 가깝게 진행하며 결말을 보았다면, 두 번째 겹에서는 세계 곳곳에 숨어 있는 듯한 달걀들을 전부 찾아내고, 심지어 그보다도 더 숨겨진 겹을 향해 토끼 굴을 파고 내려가는 식으로. 이 세계를 돌아다니는 자그마한 덩어리인 플레이어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얻은 장난감들을 통해 이 세계에 주어진 다양한 퍼즐 및 겹겹의 비밀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익혀나간다. 〈애니멀 웰〉의 핵심이라 할만한 이 장난감들은 거의 다 둘 이상의 쓰임새를 가지는데, 이는 종종 플레이어가 세계를 좀 더 능숙히 이동하도록 돕는 동시에 각종 지식·정보를 제시하며 전능(감)의 조건들을 짜맞춘다. 이를테면 원반으로 개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한편 원거리에서 날려 레버를 조작하거나 몇 오브젝트를 부술 수도 있고, 심지어는 플레이어 캐릭터가 올라타 방을 가로질러 날아갈 수도 있는 식으로. 이런 유용한 장난감들을 도구 삼아 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식이 늘어날수록, 플레이어가 돌아다닐 수 있는 스테이지의 범위 또한 넓어진다. 중앙에서부터 출발하는 지도를 (첫 번째 겹의 공략 목표인 네 개의 불빛이 위치한) 변방으로 밝혀가면서 이 세계를 구석구석 탐험하는 진행은 방마다 주어진 플랫포밍 퍼즐 외에도 더 큰 규모의 퍼즐로 향하는 단서나 그보다도 훨씬 깊숙하게 숨겨진 비밀의 존재를 알아차려 가는 공략 전반과 자연스레 겹친다. 그렇게 자신이 획득한 지식·정보가 장난감들이 그렇듯 복수의 의미와 용도를 지닌다는 점을 깨달은 플레이어는 단서들을 알맞게 연결하며 이 퍼즐 상자 같은 세계의 조작법을 익히고 그에 익숙해지는 전능감을 얻는다. (배경에 서 있는 동상이나 측면으로 난 동물 머리 같은 시각적 요소에서도 〈슈퍼 메트로이드〉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듯) 메트로배니아의 기본 공식에 꽤 충실한 만큼, 〈애니멀 웰〉은 관습적인 장르 공식을 뒤틀어 제 나름의 메트로브레이니아적인 특성들을 덧붙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게임의 또 다른 홍보 문구인 ‘전투 없는 메트로배니아’가 지시하듯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공격기 자체를 제거했다는 점이 그렇다. 플레이어에게 기초적인 행위성과 그에 따른 전능(감)을 부여하곤 하는 전투가 없다는 점에서 〈애니멀 웰〉은 무시무시한 타조나 캥거루 등에 맞서지 못하는 불능(감)을 키우는 편이며, 그외에도 우물 곳곳에 거주하는 수많은 동물이 이 자그마한 덩어리에 종종 호전적이거나 대개 무심하다는 점 또한 다시금 이 세계가 플레이어 당신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는 ‘우리-없는-세계’의 기분을 가중한다. 그러나 〈애니멀 웰〉의 세계는 (〈아우터 와일즈〉의 태양계나 〈레인 월드〉의 생태계가 시험하는 만큼의)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그가 온갖 지식·정보와 비밀을 수집해 해결하도록 만들어진 퍼즐 상자에 가까운 만큼, 여전히 어느 정도는 대개의 게임이 그런 만큼 “우리에-대한-세계” [9] 이기도 하다. 플레이어가 세계에 관한 일정한 지식·정보를 획득하고 이해하면 충분히 퍼즐을 풀고 비밀을 찾을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막막하고 이해 불가능하게 느껴지듯이, 메트로브레이니아의 플레이에 잠재된 전능함은 플레이어가 겪는 불능감과 늘 충돌하며 그렇게 플레이어 ‘당신’과 세계 사이에 당연한 듯 싶었던 인과는 어긋난다.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먹을 때야, 플레이어는 비로소 전능(감)과 행위성을 얻을 수 있고 어쩌면 그제야 세계에 나름의 인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메트로배니아의 불능한 이면을 적극 활용하는 메트로브레이니아의 역설적인 작동법일 테다. 메트로배니아가 생경한 세계에 익숙해지는 플레이어의 행위성을 변방까지 지도를 구석구석 밝히는 탐험이나 플레이어 캐릭터의 인과에 반응하는 서사 등으로 반영해 ‘우리에-대한-세계’를 제작할 때, 메트로브레이니아는 그러한 세계에 대한 지식·정보만을 전략적으로 숨겨 플레이어가 마치 ‘우리-없는-세계’에 떨어진 것만 기분이 들게끔 한다. 앞서 인용한 메트로배니아 인터뷰에서 “제가 플레이 중인 게임의 세계가 제 존재와 무관한 척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치 제가 이 세계의 손님일 뿐이고, 게임이 제가 발을 딛거나 말거나 계속 거기서 존재하고 있을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고 싶었어요.”라는 발언을 끌어오자면, 여기서 중요한 건 플레이어에게 실제로 지극히 무심하거나 그와 완전히 무관한 세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러한 ‘척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화면 밖에서 입력을 집어넣는 당신이 그리 중요치 않다고 떵떵대더라도, 게임은 결국 플레이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 묘한 인력 관계 속에서, 〈애니멀 웰〉과 같은 메트로브레이니아 유형의 게임들은 전략적이고 효과적으로 무관하거나 무심한 ‘척’을 하다가 자신의 불능을 받아들이고 이 세계의 지식·정보를 파고드는 플레이어에게 비밀과 전능을 향한 길목을 열어 보인다. 이 넓고 낯선 세계 속 네 귀퉁이에서 얻은 불빛으로 중앙 허브의 기둥들을 밝히자, 우물 속의 우물이 어둑한 아가리를 의미심장하게 벌리는 것처럼. 자그마한 세계와 그 점프들: 〈리프 이어〉에 대해 「기계장치의 우주」를 작성할 때만 하더라도 메트로브레이니아 유형 게임으로 자주 호명되던 〈튜닉 (TUNIC, 2023)〉을 내정하고 있다가, 그보다 덜 알려지고 더 조그만 게임인 다니엘 린센(Daniel Linssen)의 〈리프 이어〉를 선택한 이유는 어느 정도 『폴리곤』에 올라온 글 [10] 때문이다. 이 게임이 “메트로브레이니아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메트로브레이니아”라는 제목을 단 그레이슨 몰리의 리뷰는 자신이 퍼즐 상자를 뜯어 볼 끈기가 없어 〈애니멀 웰〉을 그리 좋아하지 못했던 것에 비해 〈리프 이어〉가 “〈애니멀 웰〉을 알아먹은 사람들이 느낀 기분을 상상하게 해준 작은 모사품”이라고 밝힌다. 이때 그가 말하는 ‘기분’이 앞서 다뤘듯 불능감과 전능감의 오묘한 조합이라 한다면, 〈리프 이어〉는 정말로 그저 가벼운 메트로브레이니아의 경험만을 제공하는 것일까? 〈애니멀 웰〉의 빽빽한 256칸에 비해 〈리프 이어〉는 2024년의 본편과 올 초 발매된 DLC 모두 약간 헐렁한 40~50칸짜리 세계를 제시하기에 상대적으로는 작다고 둘 순 있겠지만, 〈리프 이어〉가 2D 플랫포머의 문법을 통해 제시하는 메트로브레이니아적인 특성과 기분은 〈애니멀 웰〉의 축소판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와 사뭇 다르기도 하다. 〈애니멀 웰〉에 숨겨진 겹겹의 비밀이 배쏘가 공언한 대로 어둑하고 깊숙하게 숨겨진 여러 지식·정보의 배치라면, 〈리프 이어〉에 숨겨진 겹겹의 비밀이란 다름 아니라 플레이어 캐릭터가 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상호작용하는 이동법 자체와 연관되어 있다. 린센이 게임을 ‘서투른(clumsy)’ 플랫포머라고 소개하듯, 플레이어는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자신의 캐릭터가 점프하고 땅바닥에 닿으면 바로 시뻘겋게 바뀌며 죽어버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플랫포머에서 가장 중요한 움직임일 점프에 굉장한 제약을 걸면서, 〈리프 이어〉는 우선적으론 플레이어의 이동 자체를 퍼즐로 만들어버리는 플랫포머가 된다. 다른 게임이라면 간단한 점프 한 방으로 이동할 수 있을 만한 곳들마저도 이런 규칙의 세계에서는 위험천만할 뿐이며, 이에 따라 게임의 메트로배니아적인 특성은 플레이어 캐릭터가 지금의 점프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공간들을 여럿 제시하는 데에서 나타난다. 〈리프 이어〉의 겹겹의 비밀은 바로 이러한 제약 덕에 비로소 빛날 수가 있는데, 플레이어 캐릭터가 점프해 떨어지는 높이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세계와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차차 밝혀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두세 칸 높이로 떨어져 죽지 않게 주의해야만 했던 점프가, 그보다 더 깊게 너덧 칸 높이로 떨어지면 플레이어 캐릭터를 빨강이 아닌 분홍으로 바꾸며 다시 튕겨 오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프란 일반적인 메트로배니아에서처럼 플레이어가 진행 과정에서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메트로브레이니아에 가깝게 게임 속에서 언제나 실행할 수 있고 단지 플레이어가 모르고 있었을 뿐인 능력이기도 하다. 이렇게 〈리프 이어〉는 플랫포머로서 플레이의 핵심인 점프를 중심으로 이동 자체를 퍼즐로 만들어 둘을 합쳤을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지식·정보마저도 일종의 비밀로 숨겨두며 여기에 또 다른 겹을 덧붙인다. 까다로운 플랫포밍 자체를 아예 메트로배니아이자 메트로브레이니아적인 경험으로 바꿔버린 셈이다. 〈애니멀 웰〉의 장난감들이 어떠한 의미에서는 파워 업을 위한 아이템으로서 전통적인 메트로배니아의 구성 요소에 더욱 가깝다면, 〈리프 이어〉는 이보다 좀 더 대담하게 그 어떤 아이템도 없이 오로지 플레이어가 이미 ‘파워 업’이 된 점프의 비밀을 언제 알아차리고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시험하도록 이끌며 메트로브레이니아에 훨씬 더 가까워진다. 플레이어가 28개의 달력 조각을 찾으러 조심스레 돌아다니는 이 세계는 화면에 한 칸씩 들어오는 스테이지를 어떠한 유형의 점프로 접근할 수 있는지에 따라 작더라도 꽤 유기적인 플랫포밍으로 짜여있고, 이런 구성은 자연스레 메트로배니아적인 진행처럼 새로운 점프 활용법을 익히기 전까지는 갈 수 없었던 곳들에 도달할 수 있도록 플레이어를 유도한다. 새롭게 알아차린 점프의 비밀을 어떻게 익혀서 적용할 수 있을지를 궁리하며 이 자그마한 세계를 몇 번씩이고 돌고 도는 동안, 플레이어는 자연스레 〈리프 이어〉의 플랫포밍 퍼즐 상자 같은 세계에 익숙해진다. 겹겹의 비밀로 이뤄진 점프에 전능하게 익숙해질수록 그와 상호작용하는 세계 또한 마치 비밀 통로처럼 드러나는 듯한 지름길들 또한, 점프와 마찬가지로 게임에서 가장 처음부터 완결된 상태로 주어져 있었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자신보다 ‘앞서서 펼쳐진’ 퍼즐 상자 안으로 들어온 플레이어가 이를 풀어내는 방법만 알아차리면 될 뿐. 그런 의미에서 〈리프 이어〉는 〈애니멀 웰〉보다 훨씬 작게 압축된 세계임에도 어쩌면 그보다 능숙하게 메트로배니아의 기본적인 전제와 공식을 메트로브레이니아적으로 변환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떨어지는 높이를 더욱 키워서 점프하면 무엇이 가능할지를 파고들수록, 〈리프 이어〉의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방법은 더욱 뒤집히며, 이곳 또한 마침내 숨겨져 있던 변방을 드러내 보인다. 다시 나가며 그렇다면 이제 두 게임의 마지막 구간들을 얘기해 볼 수 있겠는데, 흥미롭게도 양쪽 모두 주어진 세계의 밖으로 나가버리는 순간을 제공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애니멀 웰〉에서는 두 번째 맨티코어를 타고 (그 자체도 새로운 겹의 퍼즐이긴 한) 공중을 날아다니는 엔딩에서, 〈리프 이어〉에서는 (올 초에 나온 DLC까지 포함해) 외벽이나 외곽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지역으로 빠져나오는 후반부에서. 이런 공간적인 비약은 게임 내 지도에 표시마저 되지 않은 바깥을 향하는 만큼 플레이어에게 무척 강렬한 감흥을 전달하는 한편, 다시금 메트로배니아에서 종종 실감할 수 있는 ‘자기 완결적으로 닫힌’ 느낌 또한 넘어선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먼저 〈애니멀 웰〉의 자기 완결적으로 닫힌 성질은 플레이어가 상하좌우 중 한 방향으로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반대쪽으로 나오는 순환적이고 폐쇄적인 구조에서 나타난다. 곧 이 세계에서는 아무리 각종 장난감 도구를 활용하며 전능하게 이동하더라도 그저 거대한 퍼즐 상자의 폐쇄적인 안쪽만을 뱅뱅 돌 뿐이지 아예 밖으로 나가는 출구는 없다. 게다가 그 구조가 순환적인 만큼 적어도 경계 너머의 바깥을 암시하기라도 하는 ‘변방’마저도 없다. 그런 만큼 철저하게 닫힌 세계의 바깥으로 나가버리는 결말은 게임에서 가장 깊숙이 숨겨진 비밀까지는 아닐지라도, 플레이어에게 가장 해방적으로 전능한 기분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런 지라 개인적으로는 그 이후에 한두 겹의 비밀이 남아 있더라도 이 엔딩을 〈애니멀 웰〉이 제공하는 일종의 ‘최종장’으로서 의미화할 수 있겠다. 그와 동시에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사항이란, 게임의 거의 모든 퍼즐과 겹겹의 비밀이 ARG에 혈안이 된 플레이어 집단의 협동 덕에 사나흘 만에 거의 다 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닿을 수 없는 채 새까맣게 남은 영역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게임 내에서 제공되는 도구나 경로, 방법 등으로는 절대 갈 수 없고 오직 치트 키나 개발자 도구로 이동해야지만 확인할 수 있는 이 공간들은 공식적이거나 적법한 플레이에서는 아예 완벽하게 은폐된 ‘비밀’로서 숨어 있다. 그럴싸하게 말이 되지 조차 않는 이 ‘비밀’들은 게임이 제공하는 무대 너머를 어떻게든 엿보려는 이들을 골려 먹기 위한 이스터 에그일까, 아니면 여태까지의 대규모 보물찾기에서마저도 플레이어들이 찾아내지 못한 더욱 깊은 겹으로 향하는 단서인 걸까? 어쩌면 〈애니멀 웰〉의 세계 안팎으로 여전히 숨겨진 채 남아 있는 이런 비밀들은 비디오 게임의 세계가 아무리 전능(감)이 뚜렷한 ‘우리에-대한-세계’처럼 느껴지더라도, 어느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불능(감)이 도사리는 ‘우리-없는-세계’가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리프 이어〉의 바깥이란 맵 최하단에 위치해 바닥이 없는 채로 바람이 몰아치는 지역일 테다. 여기서 게임은 다시금 점프의 변주를 통해 플레이어 캐릭터가 이 변방과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한다. 플레이어의 점프가 두세 칸이나 너덧 칸 높이도 심지어 (파란색이 되어 말 그대로 땅을 뚫고 들어가게 해주는) 예닐곱 칸 높이까지도 지나서 떨어지면, 캐릭터가 노란색으로 뒤집히며 바닥이 아닌 천장에 붙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점프는 곧 〈애니멀 웰〉의 장난감과 유사하게 점프 높이만으로도 세계와 다양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복수의 용도를 제시하며, 플레이어는 다시금 메트로브레이니아적인 플레이로 익힌 몇 유형의 점프를 다양하게 짜맞추는 플랫포밍을 통해 메트로배니아적인 세계를 이동할 수가 있다. 이렇게 점프 하나에 겹친 다양한 플레이를 반영하듯, 게임은 반전된 상태로 최하단 변방으로 이동했을 때 지도에서 숨겨져 있던 마지막 퍼즐 지역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플레이어가 시작 위치로 되돌아가게끔 이끌며 여태까지 익숙해졌던 자그마한 세계를 반전된 관점으로 제법 낯설게 재맥락화하기까지 한다. 이런 식으로 〈리프 이어〉가 자그마한 세계 속에서의 점프 안에 비밀을 가득 숨겨 넣으며 풍부한 플레이 경험을 만들어 냈다면, 올 초 발매된 DLC인 〈리프 이어: 3월 (Leap Year: March)〉은 본편에서 점프와 얽힌 비밀들을 플레이어가 이미 꿰차고 있다는 전제하에 플랫포밍 자체부터 맵의 유기성과 퍼즐의 유형과 난이도까지 고루 보강된 세계를 제시한다. 이번에는 밖에 위치한 해변에서 시작되는 게임은 본격적인 플레이가 벌어지는 안쪽으로 들어가도록 플레이어를 이끈 뒤 후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 세계를 뛰어넘도록 한다. 플랫폼을 켰다 끄는 버튼이 새로운 규칙으로 추가되고 뒤집어진 상태로 닿을 수 있는 최하단 변방의 플랫포밍 퍼즐들을 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달력 조각을 전부 얻었을 때 개방되는 세계의 옆구리에서는 플랫포머의 점프 관습을 일찌감치 비튼 〈VVVVVV (2010)〉의 악명 높은 스테이지 (이른바 ‘고통을 즐기는 자’)와 유사한 도약을 선보이기도 한다. 전례 없는 높이로 점프하고 떨어지며 세계의 변방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플레이어 캐릭터는 마침내 빨강에서 분홍, 파랑, 노랑을 지나 초록색이 되며 땅바닥에 닿는데… 그 이후의 마지막 구간은 나마저도 이 글에서만큼은 좀 치사하게 숨겨두고 싶다. 퍼즐 상자 속의 모든 걸 밖으로 꺼내 보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 [1] Kate Gray, “What The Heck Is A ‘MetroidBrainia’? Introducing The Newest Genre On The Block”, Nintendo Life, 2022.05.21. [2] 유진 새커,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 김태한 옮김, 필로소픽, 2022, 13쪽. [3] 이후 소제목들은 한나 렌,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이영미 옮김, 엘리, 2020의 제목을 변형. [4] Christian Nutt, “The undying allure of the Metroidvania”, Game Designer, 2015.02.13. ( https://www.gamedeveloper.com/design/the-undying-allure-of-the-metroidvania ) [5] 제작자들 또한 이를 인지하듯, 여러 발언에서 행위 주체로서의 플레이어인 ‘당신’을 강조한다: “당신이 이야기고, 당신이 바로 모험입니다. 어디로 갈지를 발견하고 당신이 갇힌 세계의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건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 “당신 스스로 자신만의 플레이 방식을 생각하고, 느끼고, 탐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새커, 같은 책, 18쪽. [7] 새커, 같은 책, 15쪽. [8] 성훈, “최종장과 변방_비디오 게임 속 공간적 한계의 실감”, 『게임 제너레이션』 13호, 2023.08.10. (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2783c2df-7cc1-45bf-bbed-4b34c153d7e3 ) [9] 새커, 같은 책, 18쪽. [10] Grayson Morley, “Leap Year is a Metroidbrainia for people who hate Metroidbrainias”, Polygon, 2024.09.21. ( https://www.polygon.com/gaming/453137/leap-year-metroidbrainia-you-jump-you-die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나원영 2016년에 웹진 [weiv]를 통해 대중음악 비평을 시작했고, 2022년 웹진 ma-te-ri-al을 통해 <대체 현실 유령>을 출간했다. 아무래도 작은 게임을 랩톱에서 짧게 하는 편이다. 계속됩니다.
- 묘를 파헤치면 주검이 나올까 –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의 로어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가 몰두하는 대상은 <다크소울> 시리즈의 로어를 관통하는 그윈과 그 친인척들로 엮인 주요 서사로부터 거리가 멀고, 다른 항목과 접점을 만들어 내기에도 희박해보인다. Hawkshaw는 굴하지 않고 꾸준히 <다크소울 1>로 되돌아가, 끝이 명시적으로 선언된 세계 안에서 여백을 ‘착즙’해내고 있다. < Back If We Dig Up the Grave, Will There Be a Body? — The Lore of FromSoftware’s Games 31 GG Vol. 26. 8. 10. It has been nearly ten years since the Dark Souls series took 3 as its final numbering. Hidetaka Miyazaki, director at the studio FromSoftware, publicly declared the series concluded, and with the success of Elden Ring its style has clearly shifted by subtle degrees. Even amid all this, there are people who still devise and upload lore concerning Dark Souls . A representative case is Hawkshaw, who shows a sustained interest in the “nameless blacksmith deity” who appears briefly in the flavor text of the upgrade material titanite [1] . Viewed objectively, the object of his devotion lies far from the main narrative that runs through the Dark Souls series — the story woven around Gwyn and his kin — and seems to offer only the thinnest ground for contact with anything else. Undeterred, Hawkshaw keeps returning to the first Dark Souls , pressing the blank spaces for every last drop within a world whose end has been explicitly declared. Hawkshaw’s case may look excessively marginal. The videos of VaatiVidya, for instance — which anyone curious about the stories of FromSoftware’s games ends up watching at least once — produce a far smoother, more comfortable storytelling. His story videos run mainly through the major bosses and quest lines, realizing a more comprehensive and hospitable approach than Hawkshaw’s obsessive fastening onto a single piece of subtext. Representative is the Prepare to Cry series, a project that reconstructs narrative around the life of a single figure — a particular NPC or boss — gathering and rearranging storylines that the games’ nonlinear structure makes difficult to experience whole in a single playthrough. The series thereby functions as a device that fills the gaps between different play experiences and restores, after the fact, the narratives one missed. Still, the two channels fundamentally reveal the general manner in which stories are enjoyed and conceived in FromSoftware’s games. They totalize the audiovisual sensations set side by side within the game, drawing up that feeling by which a receiver comes to believe they have experienced a “story” woven of causal sequence. Among those who enjoy FromSoftware’s games (and in wider circles besides), such work is called — by creators and viewers alike — lore. On the Korean web, too, the word lore seems at some point to have entered natural use. One finds, for instance, cases like the tweet below. [2] The lore here does not seem to be invoked in quite the same sense as the lore that Hawkshaw or VaatiVidya practices. The “lore” named in the tweet is something that ought to behave coherently. It is posited as things and events that have already taken place; should it slip out of joint, it leaves the impression that the makers failed to exercise consistent control and management over their own product. Working, as here, as a standard by which a work’s coherence may be judged, lore also sits somewhere in the game as a definite entity. When the tweet’s author views lore as bound up with the makers’ competence, those who produce lore videos about FromSoftware’s games pursue the same coherence. They set the hypothesis that some story unfolded on the game’s other side, and to prove it they explicate particular “clues” like source materials excavated at an archaeological site [3] . What matters is to erect, among the stories so devised, a flawless narrative free of error. Their work, in other words, proceeds in the posture of discovering something that already exists within the game — a practice, too, of reaching, through the structures and patterns salient in the work, toward the designer “implied” by them [4] . But can every backstory be reconstructed just by digging hard enough at the game? In Ash Lake — the region of the first Dark Souls that was released in an unfinished state — a single giant skull lies abandoned. It may belong to the nameless blacksmith deity, or to someone else entirely unguessed at, or mean nothing at all in the first place. When one tries to affix a story to the places the implied designer has left derelict, whoever produces FromSoftware’s lore ends up erecting causal relations between fragments that can never be confirmed, upon the very ground where the game keeps silent. And this is exactly why the attempt is thwarted even when the story is built pressed close to in-game clues. On the Korean and Japanese web, the pastime of “speculating, interpreting, and theorizing over the settings” of FromSoftware’s worlds goes by the word From-noe — “From-brain” [5] — a parody of “game brain,” the pseudoscientific term of the early 2000s that claimed gaming addicts’ brains become deformed [6] . The word carries a measure of self-mockery. The word lore, then, splits into two subtly different webs of meaning. On one side is the lore transmitted from the makers and arriving to us — an object of verification and adjudication. On the other is the lore that swells extravagantly, whether or not it heeds that transmission. The two spectra of meaning do not exclude each other; they function like a kind of narrative engine that keeps producing story. Taking the lore of FromSoftware’s games as its case, this essay looks at how this desire, forked in two, sustains itself — and produces stories. Lore, Emplaced It is worth noting, first, that within the game industry lore circulates as a term of practice. The game designer Matthew Weise defines lore as content secondary to the main plot or to the interactions between characters — material that fills in the history and context around the story [7] . In such speech, the central resources are allotted to the directly playable region, and lore is set on the subordinate tier beneath it. As a case of lore’s concrete deployment, Tanya Krzywinska looks to World of Warcraft : by expanding and drawing in narrative resources, it builds a grand worldness [8] . The game world establishes itself as a vessel able to receive all such minor stories. In this usage some magnetic pull of J. R. R. Tolkien seems to remain. Deeply versed in medieval English literature, Tolkien favored lore in the sense of transmitted tradition [9] , and that imagination — passing through D&D and its kin — settled as the name for the work of designing and documenting worlds. The game world is commonly required to hold an integrated consistency — one that applies, as Krzywinska writes, not only to spatial coordinates, style, and physical law, but to the past events that compose the present state of the world in which the player character stands [10] . The situation of the moment one inhabits must connect persuasively to the historical events and accumulated choices of which it is the result. Here lore — made concrete as maps, chronicles, setting books, item descriptions — narratively explains the game’s rules and origins, helping the player set the coordinates of individual scenes of play within a wider world. In this respect lore appears as a synonym for the worldbuilding, the setting. In many games, the thing that centrally performs this function is flavor text — defined as text that has no effect on actual gameplay but supplies the player with additional information about the game’s world, or humor composed to delight [11] . Lee Seonin, meanwhile, writes of the Souls series as an “extremely scant stipulation of the world” — a world that “does not speak” [12] . In FromSoftware’s games, which do not readily tell of themselves, the place this text occupies is somewhat special. The anecdote that Hidetaka Miyazaki wrote every line of Bloodborne ’s flavor text by his own hand [13] lends the player’s attitude toward that text a certain reverence. And the texts are indeed set in strategic places: dropped before an object of peculiar appearance, offered by an NPC in a particular register, or granted after a boss is subdued. Phases of play that resist neat division are translated into the form of collectible items in the inventory, and the flavor text inscribed on the item explains, after the fact, the history of the time and space just passed through. Even so, flavor text is finally a “language of indirect speech,” a “language of detour” [14] . Indirect speech recalls the original utterance it has skirted by one layer, and in the same moment provokes the lack. The place left over does not remain as silence: it calls in words to take its place. Sentences that stand in for what the game did not say arise outside the game, and become in turn the grounds of the next sentence. Amusingly, this point resonates with the expanded web of meaning that derives from lore’s etymology. Lore, Leaping Before lore became, at a stroke, a term of subculture, folklore represented its usage. Lore here names knowledge handed down without the sanction of institutions — knowledge that spreads pliantly by word of mouth rather than in writing. As the site of story moved onto the network, this motive force expanded further. In Japan, for instance, “netlore” — the name for the horror-story posts of the bulletin board 2channel — compounds “net” and “lore.” Sometimes the entire process of a story’s being told is bundled as one lore, as with the Backrooms or creepypasta. The force that creates and spreads lore tends, in this way, to arise from the leap. Na Won-young reads the lore spoken of today as a manifestation of the customs of nonlinear information-seeking and connection-making formed on the network. Lorification — an operation that, in Na’s words, “detaches its object from the original context and lines its reverse with fiction, serving as an excellent horror-production device and as the distribution network that spreads it efficiently” — is achieved by “leaping straight over the distances between pieces of information, or the standards already established on the basis of several facts, to produce a fictional other side larger than reality” [15] . This occurs even where no connection to lore’s point of origin can be claimed. In the period when Elden Ring had shown a single trailer and gone silent — days swollen with anticipation — a “fake lore” phenomenon broke out on the Elden Ring subreddit. This is one branch of the fake game: representations advanced with the intent of making people believe that a game’s rules, mechanics, and narrative actually exist, though the game itself does not. Users of the subreddit carried on as though the unreleased game were already out, bemoaning the difficulty of its bosses and trading strategies. As such posts bred confusion, the community later legislated a rule that related posts carry the tag “fake lore.” The fake-lore phenomenon can be classed as the limit case in which the customs of lore interpretation are made to precede the very absence of a source text [16] . This Is Not a Door — the Topographical Layer and the Topological Layer In the case of the lore that emerges from FromSoftware’s games, the flavor text itself first courts lorification, appending description to items and to particular junctures. At the same time, there is a respect in which the medium of the game as such incites lorification through the leap. With the advance of photorealistic graphics, digital games have evolved toward showing ever vaster worlds without a seam — but not every space realized in a game actually stands open to the player. Within it, the layer one can actually tread and the layer one can never reach are clearly divided. Behind the Cleric Beast boss arena in Bloodborne , for instance, there is a door that looks for all the world like a path onward and yet never opens [17] . This misalignment between the image the screen presents and the places one can actually go, Espen Aarseth distinguishes as two layers within the ludic landscape: the topographical layer, the sign-stream the game engine presents to the player; and the topological layer, the room-for-movement through which the player’s token actually travels [18] . At this point, the lore that players of FromSoftware’s games so fervently construct can be understood as an interpretive practice that seeks, within a ludic world ruled by topology, to return the topography to a space of explicable story. Lance McDonald, the well-known Bloodborne modder, tears open the space behind the Cleric Beast arena outright and — taking the surrounding structure, and its resemblances to other architecture in the series, as clues — deduces the space and the history that might have lain beyond, reconstructing in imagination the world’s completeness past the topological paths the engine permits [19] . Similarly, VaatiVidya makes active use of the free camera in producing lore videos. The original game software fixes the camera behind the playable character’s back, designed so that the player takes in the surroundings only within the range the character’s shoulders allow the viewpoint to turn. A free camera, achieved through external tools such as Cheat Engine, helps one detour around this design and slip free of the topological space. The character’s position, gravity, collision — all are temporarily disabled, and the world can be regarded from any viewpoint one pleases. It becomes possible even to inspect the hidden faces of objects that ordinary play never shows. But is anything really there on that hidden face — if we dig up the grave, will there be a body? The Cathedral of the Deep in Dark Souls III takes for its boss arena the chamber enshrining Aldrich’s sarcophagus. Bishops pour out in a throng, ringing the great coffin against the player’s intrusion. In one video VaatiVidya, free camera engaged, vaults lightly up and shows viewers the top of the coffin, which the player’s view was never meant to reach. The lid, presumed beyond the player’s gaze, is blankness itself. And those who played the game knew the answer from the start. Clear the Cathedral of the Deep and return to the hub, and the NPC Anri tells you: Aldrich’s coffin was empty. Nele Van de Mosselaer and Kathleen Murphy-Hollies observe a resemblance between those who advance lore in game fandom and conspiracy theorists. Both assume that someone’s intent lies dissolved on the far side of the phenomena, and form communities on the fuel of their zeal to decode that intent or find its meaning. The incomplete gaps and ambiguities a phenomenon or a text harbors become objects that must be brought to clarity [20] . Of course, those who produce the lore of FromSoftware’s games are fond of expressions that suspend assertion — “perhaps,” “maybe” — invoked wherever the context set behind some object is being deduced. Since the true state of affairs cannot be fixed, the suspension discloses that one’s added inference does not explain things whole — that a surplus remains. At the same time, because the suspension is bound to experience examined in one’s own play, it is also a word that quietly signals that the inference filling the text’s blank did not depart from arbitrary fancy but from evidence excavated within play. One ratifies, in other words, the existence of the author implied by the artifact called the game — and yet, in the places where that author keeps silent, returns the authority of utterance to oneself. This suspension of the “perhaps” is the very form by which lore keeps running as lore. The engine of story-imagining — in which faith toward the transmitted design, and the extravagant proliferation that exceeds it, turn interlocked without excluding one another — will not stop where the author is silent; nor, perhaps, where there is no author at all. [1] https://www.youtube.com/@Hawkshaw [2] Posted Mar. 13, 2026. x.com [3] Paul Thomas., “The Analytical Behaviors of Genshin Impact Lore Enthusiasts: An (Auto)ethnographic Look at r/Genshin_Lore”, Game Studies vol.25(2), 2025, https://gamestudies.org/2502/articles/paul_thomas [4] The concept of the implied designer is Van de Mosselaer and Gualeni’s adaptation to games of Wayne Booth’s “implied author.” Booth’s implied author is distinguished from the flesh-and-blood person (FBP) and from the narrator within the text: a figure implied from a personal standpoint arranged and staged by particular themes, values, and ethics. (Wayne Booth, “Resurrection of the Implied Author,” in James Phelan, Peter J. Rabinowitz et al., trans. Choi Ra-young, Narrative Theory 1, Somyong, 2015, pp. 139, 143.) Van de Mosselaer and Gualeni explain the implied (game) designer as “the conceptualization of the designer that players construct in the process of dynamically interpreting the game (understood broadly, down to paraludic elements such as marketing materials).” In short, players attribute to this inferred figure every intention thought to fundamentally underwrite the creation of the game in question. (Nele Van de Mosselaer· Stefano Gualeni,. “The implied designer and the experience of gameworlds”, Proceedings of the 2020 DiGRA international Conference , 2020, Tampere, Finland, p. 12.) [5] “From-noe” (From-brain), Namuwiki , https://namu.wiki/w/%ED%94%84%EB%A1%AC%EB%87%8C , [6] 박상우, “게임뇌 증후군,<정원사 챈스>”, Cine21 , posted Nov. 28, 2002, https://cine21.com/news/view/?mag_id=15417 [7] Matthew Weise “Narrative design myth-busting: It's not "just lore"”. Game Developer, Posted Oct. 27, 2021. https://www.gamedeveloper.com/design/narrative-design-myths-2-it-s-not-just-lore . [8] Tanya Krzywinska, “World creation and lore: World of Warcraft as rich text”, in: Hilde G. Corneliussen, et al. (ed), Digital culture, play, and identity: A World of Warcraft reader , MIT Press, 2009. [9] Dimitra Fimi, “Hobbit Songs and Rhymes: Tolkien and the Folklore of Middle-earth”, Dimitrafimi.org . Posted Mar. 2009, https://dimitrafimi.org/articlesandessays/hobbit-songs-and-rhymes-tolkien-and-the-folklore-of-middle-earth/ [10] Krzywinska, op. cit., p. 127. [11] Kim Hong-gyun, “A Study on the Translation of Game Flavor Text: The Case of Hearthstone,” T&I Review 9, 2019, p. 74. [12] Lee Seonin, “What Are We ‘Role-Playing’ Now?,” GameGeneration , posted Apr. 1, 2025,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0a3f1970-eaf4-4a88-938b-9cd24e586eda#viewer-s7mgg128631 [13] Anayama, “[Interview] A Summary of SIE Producer Masaaki Yamagiwa on the Making of Bloodborne,” Ruliweb , posted Mar. 3, 2020, https://bbs.ruliweb.com/ps/board/300001/read/2208936 [14] Lee Seonin, op. cit. [15] Na Won-young, “The Rotten Internet Hypothesis: Brief Notes on the Web of the Early 2020s (1),” Ma-te-ri-al , posted Sep. 16, 2025, https://ma-te-ri-al.online/archive/1494/ [16] Nele Van de Mosselaer, "Fake games: On dark and deceptive representations of non-actual games", Eludamos: Journal for Computer Game Culture, 16(2), 83-84p. [17] conjee, “[Question] Where on Earth Is That Door in the Cathedral That Won’t Open?,” Ruliweb, posted Apr. 25, 2016, https://bbs.ruliweb.com/family/4892/board/182048/read/9208780 . [18] Espen Aarseth, “Ludoforming: Changing Actual, Historical or Fictional Topographies into Ludic Topologies”, in Espen Aarseth·Stephan Günzel (Eds.), Ludotopia: Spaces, Places and Territories in Computer Games, 2019, transcript Verlag, p.131. [19] Lance McDonald, “Bloodborne Cut Content :: The Door Behind The Cleric Beast :: Unused Shortcut”, Youtube , posted May 9, 2018, https://www.youtube.com/watch?v=h2ojsgp1SCw [20] Nele Van de Mosselaer · Kathleen Murphy-Hollies, “Conspiracy Thinking and Videogame Interpretation”, Conference: Abstract Proceedings of DiGRA 2025: Games at the Crossroads. Tags: 게임 로어, 프롬 소프트웨어, 다크 소울, 블러드본, 플레이버 텍스트, 팬덤 해석, 암시된 디자이너, FromSoftware, Dark Souls, Video Game Lore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yuri Kim Interested in the ways games let us experience stories. After poking around here and there, lately played Marathon.
- [Editor's View] 기술의 후예로서, 혹은 기술의 관찰자로서
디지털게임은 기술매체입니다. 아마도 현재까지, 그리고 근미래까지도 당분간은 가장 첨단의 기술을 활용해 인간이 삶과 사고를 그려내는 매체로는 게임이 유력할 것입니다. 아니, 달리 말하자면 첨단의 기술들을 통합적으로 활용해 만드는 앞으로의 모든 미래 매체들을 우리는 게임, 혹은 게임의 연장선상에 있는 매체로 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 Back 24 GG Vol. 25.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Editor's View] Ways of Seeing
아이템을 기획하는 내내 편집위원들과 편집장은 보는 게임이라는 개념의 모호함에 대해 토로했다. 어디까지가 게임일 것인가? 어디부터가 게임의 변화인 것인가? 인간의 역사가 늘 그래왔듯이 우리는 동시대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시대를 이끌어가는 것은 즉시성있는 답변보다 늘 우직하게 본질을 바라보는 질문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보는 게임’의 시대에 감히 어떤 정답을 내리기보다는, 다양한 질문과 사유를 통해 이 시대 게임의 변화를 사유하는 계기로 ‘GG’3호가 자리잡을 수 있었으면 한다. < Back 03 GG Vol. 21.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이 꽤나 발칙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요 귀여운 녀석이 게임에 미쳐 부모님 몰래 수십만 원어치의 현질을 했고, 그걸 들켜 죗값을 달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우리 엄마는 비슷한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은 바, 대수롭지 않게 ‘애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이모는 ‘이노무 시키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발을 동동거렸다. < Back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 01 GG Vol. 21. 6. 10. 시작하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이 꽤나 발칙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요 귀여운 녀석이 게임에 미쳐 부모님 몰래 수십만 원어치의 현질을 했고, 그걸 들켜 죗값을 달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우리 엄마는 비슷한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은 바, 대수롭지 않게 ‘애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이모는 ‘이노무 시키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발을 동동거렸다. 실로 익숙한 흐름의 대화였다. 게임을 ‘중독’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둬 악마화하거나 정신병리학적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우리 엄마가 나의 오빠를 키우던 때에도 구사한 문법이니 말이다. 같은 배에서 태어났지만 오빠와 달리 나는 디지털 게임을 즐겨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쥬니어 네이버’ 세대답게 나 역시 ‘슈 게임’을 하며 유년시절을 보냈고 조금 더 머리가 큰 뒤로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피카츄 배구’나 ‘보글보글’, ‘테트리스’, ‘카트라이더’ 등을 하며 점심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게임을 즐겨 하지 않던 나조차도 추억 저편에 게임이 있을 정도라면,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의 유년시절은 온통 게임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게임이 우리 일상으로 들어온 지는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뿐인가.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의 레드 카펫 위에서 한국영화를 알리고, 방탄소년단이 빌보드의 화려한 조명 아래서 K팝을 알릴 때, 모니터 너머의 가상 세계에는 이미 ‘한국 vs 비한국’이라는 대결 공식이 생겼을 정도로 한국 게임문화의 위상은 최정점에 놓여있던지 오래다. 상황이 이쯤 되면 이제는 게임도 엄연한 취미이자 하나의 문화로 봐 줄 법도 한데, 여전히 게임은 하찮고 저급한, 그래서 ‘문화’라는 이름조차 아까운 취급을 받고 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우선적으로는 타성에 젖은 사고방식 때문일 테다. 시대가 변했고, 세대교체가 여러 번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시절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한 편견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뿌리 깊게 남아있고, 그로 인해 게임은 문화가 아닌 잠깐의 일탈이나 못된 유흥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런데 정말 그뿐일까? 세상만사가 단 하나의 절대적인 이유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면, 게임이 문화영역에서 제 몫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또한 외부적 편견 탓만은 아닐 것이다. 분명 그 밖의 다른 요인도 있을 것이며, 나는 그것을 ‘비평’으로 지목할 셈이다. ‘게임비평’? 사실 게임이 맥락적인 조건 속에서 주조되는 하나의 문화적 텍스트이자 실천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타의 문화예술처럼 비평이 따라붙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하지만 게임비평은 여전히 생소하고 이질적인 단어의 조합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타 영역의 비평에 비해 그다지 활발하게 전개되지 않은 탓이며 비평의 무능과 게으름, 그것이야말로 이 글이 쓰인 배경이자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계급투쟁의 영토로서 영화/비평 문화비평 중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것은 단연 미술비평과 문학비평이다. 초기에는 양자 모두 작품의 고유한 특징과 미학적 가치를 규명함으로써 예술가의 창작 활동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고 작품과 세계가 맺는 관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미술사’ 또는 ‘문학사’와 함께 발맞춰 전개되었지만, 근대 전환기에 이르러 예술이 인간 이성의 지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자 비평은 역사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세기 무렵이 되자 비평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예술 시장의 확대와 부르주아 계층의 급속한 팽창으로 인해 단순히 작가와 문화 향유자 사이를 중개하던 비평가의 역할이 특권 집단의 배타적인 취향을 형성하는 역할로 변모한 까닭이다. 특히나 미술과 문학은 일찍이 상류층의 취미이자 고급예술의 대표적 형태로서 문화사에 기입되어 왔기에 비평이 제 스스로 그것의 차별성과 우월성을 강조하여 대중문화와의 구별짓기를 수행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으며, 이때부터 비평은 문화예술의 지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다. 반면 영화와 영화비평의 관계는 위와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진화·발전을 이룩해왔는데, 영화는 근대의 산물이기에 태초부터 고도화된 자본 및 기술, 매체 등과 밀접한 연관을 지닐 수 밖에 없으며, 그 중에서도 신문과 잡지는 1895년 12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 발명과 영화의 탄생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조푸앵(Mise au point)>(1897)이나 <르파시나퇴르(Le Fascinateur)>(1903)와 같은 영화 전문 잡지가 창간되면서 근대 영화비평의 초석이 마련되었는데, 달리 말해 영화는 미술이나 문학과 달리 탄생부터 그것에 대한 글쓰기와 함께한 셈이다. [1]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 발명 초기, 영화가 ‘미래가 없는 발명’이라 말했지만 그들이 틀렸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우려와 달리 영화는 초현실주의와 표현주의, 사실주의 등 온갖 종류의 장르 및 스타일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자기 식대로 소화했고 제작과 평론, 관람을 한데 모으는 비옥한 토지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대중매체로서 영화의 영향력이 증대함에 따라 점차 영화 산업에도 활기가 돌고 영화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는데, 1920년대에 들어서자 영화 칼럼을 고정으로 싣지 않는 주간지가 없을 정도로 영화 비평은 몸집을 부풀렸고 정기 간행물 형태의 전문 영화 잡지 역시 앞다퉈 창간됐다. [2] 그리고 이때부터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비평에 참여하면서 그 수준도 현저하게 끌어올려졌는데 알렉상드르 아스트뤽(Alexandre Astruc), 앙드레 바쟁(André Bazin), 장 조르주 오리올(Jean George Auriol), 로제 레나르트(Roger Leenhardt), 자크 도니올-발크로즈(Jacques Doniol‐Valcroze) 등은 철학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영화 미학을 심도 깊게 탐구하고, 비평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이하 <카이에>)와 <포지티프(Positif)> 역시 이러한 지적 계보 속에서 탄생했다. [3] 이렇게만 보면 영화/비평은 나름대로 순탄하게 독자적인 예술의 지위를 차지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문 영화비평이 등장한 초기만 하더라도 영화는 연극이나 문학의 빈곤한 확장으로 여겨졌으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는 제국주의적 충동에 사로잡힌 이데올로기적 매체라는 편견이 빠르게 확산됐다. 게다가 전쟁 이후 맹렬한 기세로 성장한 할리우드 영화 산업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는데 쉽게 말해, 영화가 미술이나 문학과 같이 하나의 예술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영화만의 미학적인 속성과 가치를 규명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정치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완전히 말소시켜야 했고, 그와 더불어 일반 대중들의 저속한 유희거리에 불과하다고 여겨지던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 역시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 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초창기 영화이론가 리초토 카누도(Ricciotto Canudo)가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 선언한 이후 영화비평은 영화가 고유한 내적 세계와 미학적 가치를 지닌 예술의 한 형태이며, 그에 대해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모든 행위는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감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지성의 작용이라 주장했는데, 이는 아스트륔의 ‘카메라 만년필론(camera-stylo)’에서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아스트뤽는 1948년 <레크랑 프랑세(L'Écran française)>의 지면을 빌어 영화감독은 화가나 작가에 비견되는 예술가로, 감독이 사용하는 촬영 기자재는 소설가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만년필과 같다고 썼다. [4] <레크랑 프랑세>의 또 다른 필자였던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역시 이미지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일종의 의식이자 실천적 행위라고 말하며 ‘사유-이미지(Images-pensée)’를 주창했고, 영화비평의 전성기인 ‘황색 시대’ [5] 를 견인한 앙드레 바쟁 또한 카메라의 힘이 현실에 무언가를 추가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에 있다고 역설하며 영화의 독자성을 강조했다. [6] 이렇듯 영화가 ‘근(현)대 예술’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비평의 역할은 실로 막대했다. 비평이 촉발시킨 영화 미학에 관한 물음과 논쟁은 당대 많은 부르주아-엘리트의 관심을 끌었고, 이것이 영화의 인식 개선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결정적으로 영화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한 단계 더 큰 도약을 하며 명실상부한 ‘예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순수한 의미의 시네필 문화를 수호하던 비평계가 누벨바그 운동에 직면하며 폭넓은 지적 조류에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그간의 비평은 의식적으로 비정치성을 강조해왔는데, 이는 영화-이미지 이면에 놓인 감독(작가)의 천재성과 영화의 특수성을 세간에 드러냄으로써 영화와 비평을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으려는 기획의 논리적 확장이었다. 요컨대 “영화를 ‘본다는 것’은 감독이 마련한 자신만의 일관되고 독특한 세계관이 담긴 작품 세계로서의 미장센에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앞서 이념적 해석이나 정치적 성향은 필요치 않다.” [7] 만약 “이를 강요한다면 영화의 시각적 구성을 볼 수 없게 만드는 편향된 ‘읽기’를 필연적으로 야기할 것” [8] 이며, 이는 결국 영화를 도구적으로만 참조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세대교체로 인해 젊은 감독들은 구시대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화적 조류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비평도 변혁을 요구받았는데, 비평 역시 세계의 일부라면 모종의 투쟁에 연루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변화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누벨바그의 거장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다. 그는 영화 안에는 언제나 미지의 상태로 남겨진 의미와 기능, 형식들이 존재하기에 자기 자신에게로 닫혀서는 안 되며, 이 미완성이야말로 영화의 진정한 힘이기에 영화는 결코 고립된 채 이해될 수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 리베트 이전의 비평이 작품의 내적 탐구를 통해 영화를 진지한 사유와 토론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데 주력을 기울였다면, 리베트 시대의 비평은 작품의 안과 밖을 잇는 시도를 통해 영화의 이론적 정립과 과학적 글쓰기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리베트는 <카이에>를 이끄는 동안 영화의 의미 확장과 저변 확대를 위해 인류학과 문학 이론, 라캉의 정신분석학,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 등과 같은 새로운 분야의 지적 자원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했는데, 당시 리베트와 함께 <카이에>를 이끌던 필진들 역시 블랑쇼,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융 등을 인용하면서 철학과 영화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 영화를 다르게 사유하고 감각할 수 있는 방법 등을 강구했다. 이제 비평은 근대인의 미적 체험의 대상으로서 영화에 주목하는 대신 그것이 자극하는 무의식과 불안에 초점을 맞추고 적극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더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영화의 목표가 “사람들로 하여금 둥지 밖으로 나오도록 신화를 깨부수는 것” [9] 으로 변모함에 따라 비평이 중요하게 포착해야 할 것 또한 작품이 높인 맥락, 즉 영화가 탄생한 환경적인 조건이나 현실 세계와의 연관성, 그리고 그것의 표현 방식 등으로 이동하게 된 셈이다. [10] 그리고 몇 년 뒤 영화/비평은 또 한 번의 변화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세르주 다네(Serge Daney)의 회고처럼 1968년에 일어난 ‘68혁명’은 어느 누구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거나 그에 관해 쓸 수 없게 만들었다. 68혁명의 주창자들이 이끈 정치경제학적 변혁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여파로 프랑스 사회 내 모든 가치가 의문시되었고 영화 역시 황색 시대에 구축된 제도와 관습, 원칙, 규율 등이 1968년 이후의 상황을 다루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전 시네필리아에 대한 거부가 만연해지자 영화에 대한 새로운 언어와 사유 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이러한 요구 담론의 지속적인 형성 및 축적은 ‘영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열어내는 것으로 이어졌다. 권력투쟁의 이중 전선, 한국영화/비평 그렇다면 한국영화는 어떨까? 한국영화사에 비평 집단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이었지만 이때의 평론은 서구의 초기 영화비평처럼 일간지나 잡지 등지에서 영화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감상을 나누는 정도였으며, 보다 선명한 문제의식을 지닌 비평가 집단이 출현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5.16의 발발로 활동이 중단되었던 ‘한국영화비평가협회’에 10여명의 문학평론가를 영입하며 196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새롭게 출범한 것이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하나의 비평적 공동체로 묶어준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새로운 ‘세대성’이었다. 해방직후의 비평은 ‘민족영화 건설’이라는 모토를 내세웠고, 1950년대 전후 비평 역시 ‘한국영화의 근대화’라는 역사적 과업을 이어받았지만, 이 새로운 비평 집단은 영화의 문학성(서사성)이나 외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이미지-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강조하고 내적 세계를 포착함으로써 영화 고유의 미학적 가치를 강조했다. “리얼리즘을 초극해야 한다” [11] 는 한국영화의 암묵적인 전제는 바로 여기서 탄생했다. 영화는 본디 기록의 매체이니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하되, 거기에 안주하거나 머물러서는 안되며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리얼리즘은 한국영화의 절대적 명령이 아닌 하나의 선택적 가치에 불과하며, 영화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라는 오브제가 아니라 그 오브제를 다루는 영상-이미지이다. [12] 이러한 흐름만 놓고 본다면 한국영화/비평이 걸어온 길 역시 서구의 궤적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근대 도시의 통속적이고 저속한 볼거리로 여겨지거나, 인접한 예술의 하위호환 버전으로 간주되거나, 정치적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부각되다가 대대적인 세대 교체와 함께 그것의 역사적, 매체적, 미학적 특성을 규명하며 종국에는 예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한국영화는 언제나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앞서 언급한 세계영화문화의 공통된 목표였다면, 다른 하나는 문화 열강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국가·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국가·민족 고유의 미학적 가치를 내세우는 것은 무엇보다 식민국 또는 후진국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벗어던지고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힘의 획득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 한국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풀어 말하자면 50년대 한국영화는 일제의 잔재를 지우고 식민지적 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를 대안으로 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세우는 테크놀로지나 스펙터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거리두기를 했다는 것이다. 실제 60~70년대의 한국영화비평은 기술과 예술을 엄격히 구별하고 전자보다 후자에 우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한국영화가 안고 있는 기술적 낙후성에 대한 불안과 좌절로부터 비롯된 의식적 부인으로 보인다. 한국영화의 물적 토대를 감안했을 때 할리우드가 선보이는 기술과 기교는 분명 선망의 대상이지만, 그것을 졸렬한 기술-자본이 만들어낸 말초적 쾌락이라 호명하며 예술성의 고양을 주창한 것이다. [13]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한국영화의 기술력을 논할 때는 다소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가령 국내 최초의 컬러영화가 등장하자 비평단은 이를 한국영화의 획기적인 진전이라 상찬하고, 국산 시네마스코프가 제작되었을 때는 한국영화를 해외영화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위대한 업적이라 호평했다. [14] 이것이 너무 까마득한 역사처럼 느껴진다면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를 장악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그에 대한 평단의 반응을 떠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리나라는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흐름에 편승했는데 당시 물밀듯 밀려 들어온 해외 문화로 인해 자국 문화의 위기설이 나돌았고, 이때 전 지구적 자본의 풍랑에 맞서 한국의 영화산업을 이끌 대표 주자로서 부상한 것이 ‘한국형 블록버스터’였다. 민족주의적 서사를 채택하며 처음 등장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막대한 자본과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술력을 등에 업고 인기몰이를 했는데, 이에 대한 비평 역시 60~7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컨대 영화 시장의 개방으로 국내에 대거 유입된 해외 스펙터클 영화에 대해서는 자국의 영화를 말살시키는 ‘위협’의 딱지를 붙였지만,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대해서는 해외 문물로부터 국가·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가치를 지켜낼 문화예술의 지위를, 더 나아가 IMF 외환 위기와 구제 금융을 겪으며 좌절한 한국사회를 다시 일으킬 산업분야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15] 해외영화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자본에 대한 한국영화/비평의 이중적인 태도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영화는 외래 문화로 출발했으나 영화가 테크놀로지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기술은 근대성의 상징이자 욕망의 대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영화/비평이 보이는 이중적 태도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조건이 만들어낸 모순, 또는 지정학적 특수성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16]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한국영화/비평의 과제는 서구의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한국의 영화/비평은 영화에 근대 문화예술의 지위와 자격을 부여하고 그것을 철학적 사유와 이론적 고찰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 것과 더불어 외래 문화와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독자적인 위상을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온 까닭이다. 이렇듯 한국영화/비평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대중문화)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문화 열강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저항과 해방을 꾀한, 이른바 ‘권력투쟁의 이중 전선’이라 할 수 있다. 맺고 새로 시작하며: 현대 문화예술로서의 게임을 위하여 긴 우회로를 거쳤으니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글을 시작하며 나는 게임이 현대의 일상문화와 한국의 문화산업 한복판에 놓여 있음에도 대체 어떤 이유로 여전히 천대를 받고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비평 문화의 비활성화를 언급했었는데, 이 글의 목적이 비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통한 비평의 각성에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를 뒤집어 말하는 것이 더 적확하고 명쾌한 설명일 테다. 즉 게임비평의 소극적인 태도, 나태함, 약간의 무기력함과 무능함 등의 논리적인 귀결은 게임문화 전반에 대한 폄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서 길게 서술했듯 영화 역시 고전 미학의 권위에 짓눌려 꽤나 오랫동안 문화예술계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지금의 위상을 차지하게 된 데에는 비평의 공이 컸다. 특히나 한국영화의 경우 서구 문화의 계급투쟁 계보를 이으면서도 독자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이중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현재의 한국게임문화에 주는 시사점이 많아 보인다. 다만 그것이 주는 교훈을 통해 보고 배우는 과정에서 실수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영화 비평은 수십 년 전부터 ‘위기설’이 감돌 정도로 그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데, 빠른 속도로 몸체를 부풀리는 OTT 플랫폼으로 인해 영화 관람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디지털 담론장 형성과 지식-정보의 범람으로 인해 아마추어 비평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문 비평의 지나친 엘리트주의나 미학주의는 대중예술로서 출현한 영화의 본분을 망각하고 특권 계층의 전유물과 같은 부르주아적 성향을 보여 많은 이들의 반감을 샀다. 이는 영화를 미학적 탐구와 학문적 고찰의 대상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주관비평에서 객관비평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던 과거의 비평적 요구가 절대화됨으로써 초래된 결과였다. 기실 비평적 주체는 늘 제3자로서 중립적인 해석자의 역할을 수행해왔고, 지워진 비평 주체의 주관성은 역설적으로 비평가의 전문성과 객관성을 보증해 주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비평 행위는 단순히 제3자로서 사실을 기록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매개로 사태에 개입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보고,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은 언제나 삶을 살아가는 것과 동시적이며, 따라서 어떤 것에 대해 쓰고, 읽고, 말하고, 듣고, 보는 주체는 오늘의 시간을 지나쳐가는 주체와 겹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평의 전문성을 보장한답시고 현실과 유리된 언어를 구사하거나, 자신들만의 리그에서나 통할법한 논리를 내세우는 일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비평의 핵심적 역할이 세계와 텍스트 사이에 오솔길을 놓고 장 안팎의 행위자들을 이을 연결고리를 마련하는 것이라면, 이 새롭게 마련된 비평-플랫폼의 책임은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는 마주침의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데에 있다. 지적 자본을 내세운 이들의 날카로운 시선과 신랄한 목소리, 열정 자본으로 무장한 이들의 뜨거운 열기와 유쾌한 분위기, 문화 자본으로 다듬어진 섬세한 감수성과 고아한 취향, 현장의 목격자 및 관찰자들의 순수한 호기심과 앎에 대한 열망 등이 뒤섞일 때, 그래서 저마다 활발하게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담론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게임은 비로소 현대 대중문화예술로 호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 이 새로운 비평-플랫폼이 서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젠가 게임문화가 현대 대중문화의 치열한 계급전쟁에서 권력을 탈환하고 개별 학문의 지위를 차지하여 대학의 문턱을 넘는 날이 오기를, 한평 남짓한 책상 앞에서 펼치는 우아한 지적 활동이자 역동적인 취미로서 존중받는 날이 오기를, 그리하여 현질까지 해가며 기를 쓰고 게임을 한 우리 귀염둥이의 노력이 사춘기 소년의 한심한 일탈이 아닌 꿈을 위한 진지한 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게임 제너레이션〉의 건투를 빈다. [1] 박희태, 「프랑스 영화비평의 현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47,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14, 390쪽. [2] 에밀리 비커턴, 정용준·이수원 역, 『카이에 뒤 시네마: 영화비평의 길을 열다』. 이앤비플러스, 2013, 31-33쪽. [3] 박희태, 「프랑스 영화비평의 현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47,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14, [4] http://www.newwavefilm.com/about/camera-stylo-astruc.shtml [5] <카이에>는 노란 겨자색 표지에 커다란 흑백사진을 실은 30페이지짜리의 잡지로 1950년대 파리에서 가장 ‘우아한’ 잡지로 여겨지곤 했는데, 특히 별다른 헤드라인 스틸 사진을 사용하여 표지를 구성한 것은 <카이에>가 영화 미학에 큰 비중을 두겠다는 다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6]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51-52쪽. [7]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65쪽. [8]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65쪽. [9] Rivette, Cahiers 204, September 1968. [10]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85-90쪽. [11] 이영일, 『영화예술』, 1965년 4월호, 24-29쪽. [12] 문재철, 「60년대 중반 영화비평담론의 새로움」, 『영화연구』 41, 한국영화학회, 2009, 61-79쪽. [13] 문재철, 「한국 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7, 한국영화학회, 2008, 132쪽. [14] 문재철, 「한국 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7, 한국영화학회, 2008, 133쪽. [15] 이 시기가 한국영화 담론의 황금기였다는 사실을 추가로 덧붙일 필요가 있는데, 비약적인 기술 발전과 해외 문화 유입으로 인해 디지털 매체를 기반으로 한 대중문화가 급속도로 팽창하자 대중문화론이 지식인 사회에서 각광 받기 시작했고, 영화를 학문적으로 제도화하려는 시도가 확대된 것이다. 이 시기의 영화는 이전과 달리 영상문화 전반에 걸친 지적 담론을 구성하고, 인문사회과학과의 상호텍스트적인 관계망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해갔는데, 그 결과 한국사회에서도 영화가 엄연한 분과학문으로 인정받아 영화아카데미 설립 및 운영, 전문 예술대학의 건립, 종합대학의 영화학과 설치 등과 같은 다양한 결실을 맺었다. [16] 문재철, 「한국 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7, 한국영화학회, 2008, 135-136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한송희 자기소개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편의상 “영화연구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스스로는 영화를 매개로 세계를 탐구하는 문화연구자로 정체화하고 있다. 주로 재현, 표상, 담론의 정치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무한히 확장하고 분할되다 중첩되기도 하는 세상의 모든 경계에 애정을 쏟고 있다. 나와 나 아닌 것, 안과 밖, 이곳과 저곳, 우리와 저들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하면 더 무르고 희미하게 만들어 느슨한 연결을 가능케 할까, 가 최근의 가장 큰 관심사다.
- 일본의 보는 게임: 같은 듯 다른 일본의 상황들
일본의 ‘보는 게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보는 게임은 확실히 기존의 하는 게임과는 구별되는 현상이지만 완전한 새로운 것은 아니며 이전에도 존재했다. 특히 가정용 콘솔과 함께 일본의 게임 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아케이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임센터에서는 이러한 ‘보는 게임’은 흔하게 일어나는 광경이었다. < Back 03 GG Vol. 21.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uhyung Shin Conducts research mainly on serious games and the places where serious games are played. Also takes part in the game archiving project at the Ritsumeikan Center for Game Studies (RCGS).
- 공명하는 사무라이: 역사적 정확성과 시장성 사이에서
이제 어느 정도 피로감마저 느껴질 만큼 야스케라는 인물이 게임 주인공으로 등장한 사실에 대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반발은 이미 잘 알려진 논란이 되었다. 이 논란은 2024년 처음 불거졌는데, 사실 2022년의 유비포워드Ubifoward 행사에서 <어쌔신크리드: 섀도우스>가 ‘코드네임 레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할 당시에는 야스케의 존재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 Back 공명하는 사무라이: 역사적 정확성과 시장성 사이에서 24 GG Vol. 25. 6. 10. ***You can see an English version of this article at this URL: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3b16cb9b-4ee8-4852-86b0-0147005c11c6 ***원문의 상세 각주는 원문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야스케, 프랜차이즈에 합류하다 이제 어느 정도 피로감마저 느껴질 만큼 야스케라는 인물이 게임 주인공으로 등장한 사실에 대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반발은 이미 잘 알려진 논란이 되었다. 이 논란은 2024년 처음 불거졌는데, 사실 2022년의 유비포워드Ubiforward 행사에서 <어쌔신크리드: 섀도우스>가 ‘코드네임 레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할 당시에는 야스케의 존재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2024년 5월 15일 공개된 시네마틱 트레일러에서 처음 유비소프트는 야스케라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렸는데, 논란은 이때부터 불붙었다. 캐릭터 공개 이후 두 달 넘게 서구와 일본 양 쪽의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이 캐릭터의 디자인 선택을 둘러싼 비판이 이어졌다. 특히 서구의 일부 보수적 성향을 지닌 게이머층은 야스케의 등장에 초점을 맞추어 격렬한 토론을 벌였으며, 일부는 개발팀 멤버들을 향한 사이버불링도 시도했다. 유비소프트는 2024년 7월 23일 다소 모호한 성명을 발표했는데, 명목상으로는 일본 커뮤니티를 향한 메시지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전세계 이용자층을 겨냥해 자신들의 진정성Authenticity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하는 내용이었다. *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의 주인공 중 하나인 야스케. 이 성명은 야스케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을 보여준다. 표면적으로 이는 역사적 정확성에 관한 문제로 보이지만, 사실 이 문제의 핵심은 지금까지 어쌔신크리드라는 프랜차이즈가 특정한 관객층들을 어떻게 만족시켜 왔는가에 더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2021년 de wildt, Auspers의 연구에 따르면(이 연구는 유비소프트의 전직 게임디렉터 및 고위개발자 수십 명의 인터뷰를 포함하고 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전반적으로 어떤 시대적 배경을 선택하느냐는 결정에서 시장성Marketability을 우선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비소프트는 ‘마케팅-브랜드-에디토리얼 버거’라는 모델을 사용한다. 이는 프랜차이즈의 핵심 요소는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소스(문화적 배경)’는 그때그때 바꿔 새로운 고객층을 유입시키거나 기존 고객층의 재구매를 유도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어쌔신 크리드> 프랜차이즈 대부분의 게임은 핵심 고객층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주인공을 내세워 왔다. 예를 들어 <어쌔신 크리드: 블랙 플래그>의 주인공인 에드워드 켄웨이는 유럽인의 시각에서 나소Nassau(역주: 바하마의 최대도시)와 카리브해 인근의 식민주의 역사를 경험케 한다. <어쌔신 크리드 2>와 <어쌔신크리드: 브라더후드>에서는 에지오 아우디토레라는 주인공을 통해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문화를 체험케 하고, <어쌔신크리드: 레벨레이션>에서는 에지오를 매개로 하여 비교적 (서구인들에게) 낯선 이스탄불이라는 공간을 탐험하게끔 한다. 주인공이 좀더 복잡한 경우(예를 들어 <어쌔신크리드 3>의 코너 켄웨이, <어쌔신크리드: 프리덤 크라이>의 아드왈레 등)에도, 게임의 중심 구조는 여전히 유럽 및 미국의 관점으로 구성된다. 왜 이처럼 <어쌔신크리드> 시리즈는 서구 중심의 디자인을 지속해 왔을까? 그리고 이번 야스케 논란은 이러한 디자인 경향으로부터 어떠한 단절 혹은 연속성을 보여주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정확성보다는 ‘공명Resonance’, 즉 관객의 기대와 감정적 반응을 우선하는 전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확성의 문제: 역사적 정확성과 게이머의 기대 사이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18년간 꾸준히 역사적 정확성이라는 주제를 둘러싼 논의의 중심에 있어 왔다. 관련한 게임 매체들의 기사만 해도 수 천 건에 달하고, 이를 다룬 학술논문과 단행본의 챕터들도 무수하게 출판된 바 있다. 초창기 논의에서는 주로 게임이 교육의 도구로서 활용되거나 혹은 고고학적 모델, 과거 사건에 대한 충실한 재현의 사례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역사적 정확성은 필수적이라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요구들은 게임 디자인에서의 여러 요소들, 이를테면 다루는 지역, 시간적 배경, 게임 서사가 집중하는 주요 사건들에 걸쳐 투영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게이머들이 게임의 중심을 끌고 가는 주인공이 그 시대적 배경과 조화를 이루는 인물이기를 기대한다는 점이다. 배경, 이야기, 캐릭터가 일관된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화가 실제 역사적 진실과 부합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게임에서 다뤄지는 역사적 정확성이란 언제 어떤 지점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 일정 수준의 허용 가능한 왜곡은 존재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아담 채프먼Adam Chapman은 플레이어가 자신의 사전지식과 게임 속 역사적 요소가 일치한다고 느끼는 순간, 그 게임은 비로소 ‘역사적으로 공명historically resonant’한다고 본다. 실제 플레이어들은 일반적으로 게임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변형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며, 특히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처럼 암살단, 기사단과 같은 비밀조직 뿐 아니라 외계인 음모론까지 등장하는 경우에는 이를 좀더 관대하게 받아들인다. 이번 작품에서도 암살단과 기사단에 대응하는 일본 내 조직인 카쿠시바 잇키, 신바쿠후와 같은 설정이 있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러한 구조적 왜곡은 시리즈 전반에서 나타나며, 실존 인물들을 게임 속에서 틀에 맞게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야스케에 대해 가해진 각색 역시 다른 주요 인물들에 비해 특별히 과도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쌔신크리드: 오딧세이>의 소크라테스와 아스파시아, <어쌔신크리드: 오리진>의 클레오파트라 역시 높은 수준의 각색을 거친 사례다. 이 시리즈는 역사 그 자체라기보다는 언제나 ‘역사적 픽션’이었으며, 이는 제작사인 유비소프트 또한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인정해 온 사실이었다. 유비소프트는 2025년 발표한 공개 메시지에서 야스케가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시리즈의 공식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설명하며 그의 독특하고 신비로운 삶이 이 프랜차이즈의 패턴과 잘 부합한다고 밝혔다. 이는 앞서 언급한 de Wildt와 Aupers의 분석과도 일치한다. 마케팅적 고려가 언제나 주요한 판단 기준이며, 모든 서사적, 표상적 결정은 ‘시장에서 가장 많은 이용자층’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프랜차이즈 책임자인 장 게스동Jean Guesdon 또한 대중적 유행을 반영해 프랜차이즈 판매를 강화한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바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20여년 간 점점 대중문화콘텐츠 내에서 가시성이 높아진 야스케라는 인물을 기용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타당한 선택이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서 다양한 시각적 기호들과 색채 감각을 차용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즈>는 야스케를 단순한 유색인종 캐릭터로서가 아니라 일본사회에 접근하는 외부자로서의 캐릭터로 설정한다. 그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나름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으며, 플레이어(역주: 서구권 플레이어를 가리킨다)와 마찬가지로 외부자의 시선에서 접근해 일본을 서서히 이해해 가는 서사를 경험하게 된다. 이는 플레이어가 상상할 수 있는 다른 유명한 사무라이들, 이를테면 미야모토 무사시나 사사키 코지로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과는 다른 전략적 접근이다. * 야스케는 일본의 전쟁에 난반(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유럽) 개념을 사용한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이와 같은 게임사의 이상적 대상 선정 기준과 역사적 정확성에 부합하는 선택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은 최근 몇 년 사이에 학계에서도 주목받은 바 있었다. 필자의 기존 연구에서는 이 결정과정을 ‘대표성representation과 동일시identification 사이의 긴장’으로 분석한 바 있다. 영화연구자 찰스 애클랜드Charles Acland는 영화의 맥락에서 ‘동일시’란 관객이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과 장소, 다른 인물의 상황 속으로 몰입하는 복잡한 과정임을 지적했다. 이와 반대로 ‘대표성’은 관객이 자신의 경험들에 쉽게 흡수할 수 있는 인물과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는 관객으로부터 ‘나에게 와닿는다’는 반응을 유도하는 방식이며, 지난 10여년간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 대한 학술적 비평의 주요 주제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 시리즈는 항상 이와 같은 쉬운 동일시가 가능한 경험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어 왔다. 비록 주인공이 그 시대와 문화에 강하게 결부되어 있더라도 서구권의 핵심 게이머층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상황, 혹은 이데올로기적 배경이 마련되어 있어 왔다. 그런 점에서 야스케는 매우 독특한 사례다. 그는 봉건시대 일본에 외부자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지금까지 시리즈가 제공해온 주체적인 주인공으로서의 포지션과는 다른 결을 지닌다. 그의 등장은 분명 혁신적이고 새롭다는 평가를 받을 만 하지만, 연구자 키쇼나 그레이Kishonna Gray가 아이티를 배경으로 삼았던 <어쌔신크리드: 프리덤 크라이>의 아드왈레 사례에서 지적했듯, 게임의 기본 틀이 여전히 백인 중심의 미국, 유럽을 기준으로 한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백인 캐릭터라 할지라도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게임 내 서사가 결국 서구 중심의 관객 시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테면, <어쌔신크리드: 섀도우즈>에서 흑인 이방인인 야스케는 또다른 주인공인 일본 태생의 나오에와 비교했을 때 게임 내 여러 공간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제한을 갖지 않는다. 실제였다면 좀더 강한 충돌과 도전적인 상황이 나왔을 많은 요소들은 게임 속에서 상당히 부드럽게 처리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게이머와의 공명’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면, 야스케라는 캐릭터가 전면에 나선 선택은 충분히 논리적이겠지만, 이번 경우에는 기존 10여 년간 게임이 우해대 온 이용자층과는 다른 새로운 이용자층을 겨냥하고 있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야스케가 DEI(다양성, 평등성, 포용성)에 기반한 채용이라고 비난받은 사례는 해당 캐릭터의 서사가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인지에 대한 철저한 분석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유색인종과 동일시하기 어렵다는 이용자층이 가진 인종적 편협성으로부터 나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쌔신크리드> 가 보여준 그간 어떠한 주인공이라도 그 이야기가 역사적 진실에 철저히 부합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기에 이러한 비판은 모순적이기도 하다. 이번 반발 사태는 적어도 서구권에서는 인종과 성별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그에 반해 일본측의 반응은 좀더 절제된 양상이면서 게임 플레이에서 볼 수 있는 일본의 성스러운 장소(역주: 이를테면 신사의 토리이 같은 곳의 훼손 가능성 문제 등)에 대한 훼손 요소를 향한 우려가 주된 쟁점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어쌔신크리드: 섀도우즈>에서 표출된 논란은 과연 서구권 전체 게이머층의 의견을 반영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일부 특정한 소비자집단의 목소리가 과도하게 부각된 것인가? 보상의 국면: 상품으로서의 야스케 야스케에 대한 게이머들의 반응이 실제로 뜨거웠는지 차가웠는지를 단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른바 ‘성공’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목소리가 큰 일부 게이머층의 반응이 기준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좀더 국제적이고 넓은 범주에서의 게이머 수용 양상을 고려해야 할까? 혹은 비평적 평가를 참고하되 이를 고립된 사례로 볼 것인지, 아니면 최근 시리즈 작품들과의 비교 맥락 속에서 평가할지도 고민해야 한다. 현재까지 평론가와 게이머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플랫폼으로는 메타크리틱을 꼽을 수 있다. 비록 이번 작품에 대한 평가도 일부 조직적인 리뷰 테러 시도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말이다. 메타크리틱을 통해 보면 실제로 오픈월드 기반 시리즈들 사이에서의 비교에서는 꽤 안정적인 패턴을 볼 수 있다. 평론가 평점에서 <섀도우즈>는 81점, <발할라>가 80점, <오디세이>는 83점, <오리진>은 81점으로 대체로 유사한 수준이다. 이용자 평점의 경우 전체적인 비율에서 부정적 리뷰가 많다는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섀도우즈> 62점, <발할라> 60점, <오디세이> 68점, <오리진> 73점으로 <섀도우즈>에 대한 평가는 기존 시리즈에 대한 평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흐름 안에 놓인다. 종합해보면 비평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이번 작품이 전반적인 품질 면에서 기존 시리즈와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이용자 평가에서는 직전 작품에 비해 소폭 개선된 반응이 나타난다.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섀도우즈>에서 ‘극단적으로 낮은 점수’의 비중이 훨씬 높게 나타난다는 점인데, 이는 리뷰 테러의 영향을 시사하는 지표일 수 있다. 메타크리틱 역시 다른 리뷰 플랫폼과 같이 적극적으로 로그인해 리뷰를 남길 만큼 깊숙하게 개입하는 게이머층의 의견이 과대표현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평가점수의 일관성은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상대적 안정성을 드러내고 있고, <섀도우즈>또한 이 흐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야스케를 둘러싼 논란은 실제 판매 실적에도 동일하게 반영되었는가? 산업적 차원에서 게임이 보이콧되거나 판매실적 부진으로 이어졌는지 또한 중요한 지표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 판매량을 보면, <섀도우즈>는 이 프랜차이즈의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출시 첫 날 판매량을 기록했다. 1위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의 외부효과에 힘입어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린 <발할라>임을 감안하면 고무적인 수치다. * 모든 오픈월드 기반 <어쌔신크리드> 타이틀에 대한 리뷰 점수 집계(미라지 제외). 장기 판매량 분석에 따르면 현재까지 <섀도우즈>는 플레이스테이션5 플랫폼에서만 약 170만장이 판매되었다(Alinea, 2025). 아직은 장기 판매 성과를 평가하기에는 이른 시점이며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점은 감안하자. 참고로 <오디세이>는 첫 달동안 약 2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바 있다. 또한 현재의 경제상황 속에서 가처분소득에 대한 압박을 고려할 때, 이번 작품이 과거를 아우르는 역사적 대성공에 가까울 정도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상업적 성공으로 평가할 만한 수치는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결론: 문제의 본질은 정확성 이슈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학계의 반응이란 상대적으로 시간이 더 걸리는 법이다. 질적연구와 비판적 담론은 좀더 긴 출판 주기를 가지고 있어 아직까지 뚜렷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시점이다. 하지만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번 작품이 프랜차이즈의 기존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는 결과가 아니었음을 고려한다면 학계의 후속 결과 또한 지난 10년간의 의견과 유사한 합의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즉, <섀도우즈>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시장적 선택’을 따랐으며, 적절히 기능하는 캐릭터들을 통해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게임의 핵심 공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다. 어떤 면에서 이번 작품은 우리가 2007년부터 익히 알아온 그 <어쌔신 크리드>이며, 특히 2017년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오픈월드 형태로의 전환 이후의 방향성을 그대로 이어가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틀의 유지 속에서도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반응을 보였다는 점은 새로운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게임과 같은 가상세계에서 발생한 의례 공간의 훼손 문제에 대한 비판은 주로 학술 담론장 안에 국한되어 왔지만, 이번 작품의 경우 국가 차원의 대응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다. 이는 <어쌔신크리드> 시리즈가 파리 노트르담 성당 화재 이후 복원 지원을 통해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장식하며 공식 찬사를 받은 것과 같이 서구권 국가들이 유비소프트의 콘텐츠와 상호작용하는 모습과 대비된다. 야스케 논란은 출시 초기 이후 점차 온도가 식어가고 있으며, 프랜차이즈 전반에 걸쳐 존재해 왔던 인종과 성별 문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으로 흡수되는 추세다. 그럼에도 이 논란이 여전히 흥미로운 점은, 이번 사례에서 이용자들의 정서가 어떤 방향으로 나타났는가 하는 점에서다. 야스케는 현대적 감수성과 이용자 수요에 영합하는 기업적 행보로 비판받았지만, 기존과는 다른 사례였다. <오디세이>에서 알렉시오스가 서브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제공되었을 때는 별다른 논란이 없었고, <오리진>의 개발 기획에서 최초에는 여성 캐릭터 아야Aya가 주인공으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실제 출시 후에는 남성 바예크가 진주인공격으로 구성된 사실이 드러났을 때도 큰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결국 이용자들이 이른바 ‘정확성’에 대해 보이는 경직성은 실제 정확성이라기보다는 언제나 개인적 취항에 의해 만들어져 왔다. 만약 이번 논란이 정말로 특정 캐릭터가 가진 역사적 정확성에 관한 문제였다면, 그동안의 시리즈 속에서도 유사한 사례들에 대해 이번과 같은 격렬한 논쟁이 나타났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Researcher) 안드레이 자네스쿠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콩코르디아 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와 인류학·사회학과에서 박사후 연구원 및 시간강사로 재직 중이다. AAA 게임 스튜디오의 문화적 적응 관행에서 '공명(resonance)'을 기업 전략으로 활용하는 방식과, 영화 및 텔레비전의 문화 자본과 연결된 시상 기관 형성을 통한 게임의 정당화 과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Assassin’s Creed, Magic: The Gathering, DOTA 2 등 다양한 게임과 시상 기관에 관한 게임 및 플랫폼 연구를 활발히 발표하고 있으며, 《New Media & Society》(2021), 《Games & Culture》(2024), 《The Journal of Consumer Culture》(2021), 《Convergence》등에 논문을 발표한 바 있으며 또한 『Streaming by the Rest of Us: Microstreaming Videogames on Twitch』(MIT Press, 2025)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이 꽤나 발칙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요 귀여운 녀석이 게임에 미쳐 부모님 몰래 수십만 원어치의 현질을 했고, 그걸 들켜 죗값을 달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우리 엄마는 비슷한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은 바, 대수롭지 않게 ‘애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이모는 ‘이노무 시키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발을 동동거렸다. < Back 01 GG Vol. 21.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onghee Han When the occasion calls for an introduction, says "I study film" for convenience's sake, but self-identifies as a cultural researcher who explores the world through the medium of film. Attends chiefly to the politics of representation, signification, and discourse, and pours affection into all the boundaries of the world—those that endlessly expand, divide, and sometimes overlap. The biggest recent preoccupation: how to make the boundaries between self and not-self, inside and outside, here and there, us and them softer and fainter, so that looser connections become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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