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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ditor's View] 기술의 후예로서, 혹은 기술의 관찰자로서

    디지털게임은 기술매체입니다. 아마도 현재까지, 그리고 근미래까지도 당분간은 가장 첨단의 기술을 활용해 인간이 삶과 사고를 그려내는 매체로는 게임이 유력할 것입니다. 아니, 달리 말하자면 첨단의 기술들을 통합적으로 활용해 만드는 앞으로의 모든 미래 매체들을 우리는 게임, 혹은 게임의 연장선상에 있는 매체로 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 Back [Editor's View] 기술의 후예로서, 혹은 기술의 관찰자로서 24 GG Vol. 25. 6. 10. 디지털게임은 기술매체입니다. 아마도 현재까지, 그리고 근미래까지도 당분간은 가장 첨단의 기술을 활용해 인간이 삶과 사고를 그려내는 매체로는 게임이 유력할 것입니다. 아니, 달리 말하자면 첨단의 기술들을 통합적으로 활용해 만드는 앞으로의 모든 미래 매체들을 우리는 게임, 혹은 게임의 연장선상에 있는 매체로 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술과 게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디지털 기술이 들어오기 이전의 핀볼과 같은 기계부터 VR에 이르기까지 게임의 방식은 언제나 기술적으로 가능한 무언가와 연동되어 왔습니다. 1980년대 이후 연산장치의 급격한 발달 과정은 디지털게임의 발전과 같은 궤적에 놓였으며, 여러 올드게이머들이 경험하신 것처럼 때로는 최신 게임의 원활한 구동을 위해 다음 세대의 하드웨어와 기술을 작동시킬 수 있는 더 강력한 하드웨어를 필요로 하는 역전도 자주 발생한 바 있습니다. 그런 기술과 게임의 관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GG가 던지는 질문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발전하는 기술은 우리의 게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왔는가이고, 또 다른 각도에서의 질문은 그런 디지털게임은 게임 안에서 기술을 어떻게 재현하고 다뤄 왔는가입니다. 전자가 기술의 후속이라면, 후자는 기술에 대한 해석이자 예언일 것입니다. 게임 속에 비춰지는 기술의 변화와 기술을 통해 변화하는 게임의 외양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며 우리는 다시 한 번 게임과 기술이 갖는 불가분의 관계를 곱씹어 봅니다. 21세기가 열린 이후 기술의 발전은 더욱 가파른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러한 발전은 동시에 고도화하기 시작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눈길을 끌며 오늘날 기술 발전을 이윤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시각을 중심에 두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GG는 비평웹진이고, 그러한 자본의 시선 바깥에서 게임과 기술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이번 호에서 꿈꿔 봅니다. GG는 올해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비평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GG와 함께 해 주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며 공모전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확률이 만드는 스킵: 즐거움과 귀찮음 사이를 맥동하는 플레이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상황을 풍부한 경우의 수로 뽑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확률은 디지털게임에서 직면하는 상황의 다채로움을 만들어내며 빛을 발한다. ‘다키스트 던전’에서 랜덤하게 튀어나오는 스트레스 상황과 영웅의 기상은 플레이어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나락에서 극락까지의 폭넓은 감정 변화를 만들어내고, ‘슬레이 더 스파이어’에서 매 라운드마다 주어지는 랜덤한 카드보상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예측불가능한 도전에 대해 예측과 적응으로 돌파하게 만드는 즐거움의 원천이다. < Back 확률이 만드는 스킵: 즐거움과 귀찮음 사이를 맥동하는 플레이 17 GG Vol. 24. 4. 10. 초창기 놀이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운과 확률의 중요성은 꾸준히 강조되어 온 바 있었다 . 아곤 agon 과 알레아 alea 의 경합이라는 카이와의 놀이에 대한 이해는 디지털게임의 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이 놀이매체의 중심을 관통한다 . ‘ 테트리스 ’ 에서 다음 블록으로 어떤 모양이 떨어지게 될 지를 예측하지 못하던 순간은 ‘ 리그 오브 레전드 ’ 에서도 평타가 치명타로 들어갈 확률을 생각하는 순간까지 이어지며 이 디지털 놀이를 주사위값에 의해 무작위로 변화하는 상황과 그에 맞춘 플레이어의 대응으로 만들어낸다 .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상황을 풍부한 경우의 수로 뽑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확률은 디지털게임에서 직면하는 상황의 다채로움을 만들어내며 빛을 발한다 . ‘ 다키스트 던전 ’ 에서 랜덤하게 튀어나오는 스트레스 상황과 영웅의 기상은 플레이어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나락에서 극락까지의 폭넓은 감정 변화를 만들어내고 , ‘ 슬레이 더 스파이어 ’ 에서 매 라운드마다 주어지는 랜덤한 카드보상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예측불가능한 도전에 대해 예측과 적응으로 돌파하게 만드는 즐거움의 원천이다 . 많은 로그라이크 장르들이 사랑받는 이유의 중심에는 이러한 확률의 폭넓은 상황 재현력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그러나 모든 확률이 이처럼 풍부한 상황 재현의 원동력만으로 오늘날의 게임에서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 우리는 오히려 확률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디지털게임의 어떤 순간에서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 하는 의문감을 떠안곤 한다 . 서사 압축으로 기능하는 확률이 만드는 '스킵' 한때 해괴한 광고로 물의를 일으켰던 모바일게임 ‘ 왕이 되는 자 ’ 의 전투를 생각해보자 . ( 나는 연구 차원에서 억지로 플레이한 적이 있다 .) 이 게임에서 전투는 자신의 군사력과 적의 군사력을 각각 수치로 보여준 뒤 ‘ 공격하시겠습니까 ?’ 라는 문구를 보여주고 , 공격을 선택할 경우 각각의 군사력에 일정 확률을 더해 전투결과를 뽑아내는 형태로 구성된다 . 일종의 자동 전투와 같은 방식이다 . 자동전투는 본래 수동전투 ( 수동전투라는 표현 자체가 좀 어색하긴 하다 ) 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을 대체하기 위한 개념이었다 . ‘ 토탈 워 ’ 시리즈의 경우 , 전술 화면에서 실제 병력들을 지휘해 벌이는 전투가 게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애당초 적과 아군의 병력 차이가 확연해 전투를 통해 플레이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변수가 무의미하게 적을 경우 플레이어는 자동전투 버튼을 눌러 이 전투의 승패 결과값만을 받아들 수 있다 . 선택지로서의 자동전투는 나름 유의미하다 . 사례로 든 ‘ 토탈 워 ’ 시리즈의 경우 , 전략 영역에서의 플레이 또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에 중후반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국지적인 전투에 일일이 공을 들이는 것 자체가 전략적 플레이에 비해 지루하고 귀찮은 일이 되며 , 이럴 때 자동전투 버튼은 플레이의 초점을 전술에서 대전략으로 옮겨가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 . 초반부에는 유의미했지만 점차 비중이 줄어드는 플레이의 특정 지점을 플레이어로 하여금 ‘ 스킵 ’ 할 수 있게 만드는 자동전투는 확률이라는 장치를 통해 ‘ 스킵 ’ 을 제공함으로써 전략적 플레이의 연속성을 부각시킨다 . 흥미로운 점은 이 방식이 바로 ‘ 스킵 ’ 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이다 . 컴퓨터의 연산에 의해 만들어지는 상황과 그렇게 주어진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플레이어가 사고하여 만들어내는 행동이 일정한 플로우 밖으로 벗어날 때 , 게임은 플레이의 두 주체 – 난이도와 숙련도 간의 긴장관계를 기본적으로 주어진 데이터들을 기반으로 한 확률값으로 뽑아내며 과정을 스킵한다 . 이 때 확률은 원본이 되는 일련의 수동 전투를 대체하는 장치가 된다 . 사람의 머리와 손으로 그려냈어야 할 어떤 상호작용의 과정을 스킵한 뒤 , 그 결과만을 예상되는 값으로 출력하면서 확률은 마치 오늘날 인공지능들이 그러하듯 시작점과 종착점 사이의 모든 과정들을 스킵하는 도구가 된다 . 디지털게임 안의 세계를 지탱하는 뼈대는 수치화된 데이터다 . ‘ 테트리스 ’ 안의 세계는 2 차원 좌표계 안에 블록의 유무를 구현함으로써 만들어지고 , ‘ 발더스 게이트 3’ 의 캐릭터 간 감정은 각각의 이벤트를 거치며 합산된 값을 통해 만들어진다 . 이런 데이터들은 세계를 구현하는 일종의 형태소이지만 , 데이터는 단지 의미에 정렬된다고 해서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적어도 두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 첫번째로는 각각의 데이터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작동하는 세계로 거듭나야 하며 , 두번째로는 그 작동하는 세계에 플레이어가 개입하여 주어진 환경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 아주 단순하게 비유하자면 , 전자가 NPC 로 가득찬 , 마치 영화 ‘ 주먹왕 랄프 ’ 와 같은 세계라면 , 그 세계에 플레이어의 개입이 가능하게 만들어지는 시점부터를 우리는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이런 단계를 전제로 놓고 다시 ‘ 스킵 ’ 의 문제를 살펴보면 , 우리는 이 ‘ 스킵 ’ 이 무엇을 건너뛰고 대체하는지를 좀더 명확히 이해하게 된다 . 완성된 , 작동하는 세계로서의 NPC 월드는 본래 사람에 의해 변화되도록 디자인되었으나 , 플레이어 대신 데이터 월드는 확률이라는 랜덤성에 기초해 외부로부터 자극받는다 . 자동전투 속에서 확률의 개입에 의해 스킵되는 대상은 외부자극 , 곧 플레이어인 것이다 . 놀고싶은 본능과 귀찮음의 본능 사이에서 디지털게임에서 확률이 쓰이는 방식은 앞서 이야기한 바처럼 그 자체로서보다는 어떤 목적에 의해 쓰이느냐에따라 게임에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 로그라이크에서의 확률은 조합을 통한 경우의 수를 바탕으로 상황의 가짓수를 넓혀 더욱 다양한 플레이어 개입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데 쓰이고 , 자동전투에서의 확률은 플레이어의 개입 자체를 대체하여 NPC 월드를 NPC 들만의 월드로 만들어내는 데 쓰인다 . 다시 카이와의 아곤 – 알레아 개념으로 돌아가본다면 , 로그라이크적 확률이 다양성을 늘려 아곤의 비중을 두텁게 하는 것과 반대로 자동전투로서의 확률은 알레아의 비중을 두텁게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확률이 플레이어의 개입을 대체하는 경우의 양 극단인 아곤 – 알레아에서 100% 알레아만으로 이뤄지는 경우를 상상한다면 아마도 뽑기 , 도박 , 복권 내지는 포춘 쿠키와 같은 형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 당연하게도 우리는 아곤과 알레아 , 플레이어의 개입과 운적 요소 , 조금 더 구체화해서 이야기한다면 과정과 결과라는 두 축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순간이 좋은 게임을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 그러나 확률이 대체하고자 했던 요소 , 인간의 개입이라는 요소가 갖는 의미가 변화하고 있다는 생각도 해 볼 필요가 있다 . 애초에 일정 수준에 이른 플레이어가 손쉬운 전투를 의미없다고 생각해 스킵하거나 , 특정 레벨에 도달하기 위해 무의미한 사냥을 필드에서 반복하는 행위를 이른바 ‘ 노가다 ’ 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우리는 개입하는 플레이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속성 중 하나인 귀찮음을 발견한다 . 플레이어의 개입은 디지털게임이라는 요소의 특성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요소이고 사실상 이 매체의 즐거움은 그 개입을 통해 이뤄지지만 , 동시에 개입의 속성은 양가적이다 . 주어진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이리저리 손과 머리를 굴리는 과정은 너무나 흥미롭지만 , 동시에 다른 매체활동에 비해 무척이나 귀찮고 복잡한 일이다 . 당장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책과 드라마 , 영화를 볼 수는 있지만 그 자세로 전통적인 인터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디지털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움을 알 수 있다 . 플레이가 가지고 있는 그 귀찮음의 속성이 확률이 플레이를 계속 대체하고자 시도되는 이유다 . 초창기에는 없었으나 , 롤플레잉 게임에 이르면 점차 전투가 ‘ 노가다 ’ 로 불리게 되는 과정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게임적 의미로 주목하는 부분은 이 전투의 결과가 이미 예측되는 순간에 ‘ 노가다 ’ 라는 호명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 난이도와 숙련도의 상호작용이 더 이상 두근두근한 기대값을 갖지 못하게 되는 순간 , 상호작용의 의미는 즐거움보다 귀찮음으로 크게 기울어버린다 . 복잡다난한 입력을 생략하고 , 양 측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몇 가지 확률공식만 돌려 경험치와 아이템만 뽑아내는 것은 플레이에 내재한 속성인 귀찮음을 극복하기 위한 게임 디자인과 , 그에 호응하는 이용자들의 합의로부터 이루어진다 . 그리고 이런 귀찮음의 문제는 단지 디지털게임에만 , 그리고 게임 플레이의 시작과 끝이라는 짧은 시간선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도 아닌 것 같다 . 일정 부분 유비해보자면 우리는 점점 미디어가 주는 귀찮음을 자각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미디어 전반에서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 영상은 정속이 아니라 1.5 배속 , 2 배속으로 보는 것이 속편하고 , 그보다도 ‘10 분안에 몰아보기 ’ 가 훨씬 더 명쾌하게 느껴지는 것이 오늘날이다 . 한때 묘사의 섬세함으로도 독자들과 교감할 수 있었던 문자문학은 이제 ‘ 지리한 ’ 묘사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빠르게 본론을 전개하는 것이 보다 널리 받아들여진다 . 숏폼이라는 15 초의 시간이 의미하는 인간의 미디어적 인내력은 시간선상의 매체에서는 배속과 숏폼으로 , 상호작용 매체에서는 개입을 생략한 채 결과만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 아마도 추측하건대 이러한 변화는 개별 미디어나 수용자의 변화가 아니라 미디어 및 정보환경 전체의 변화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 소설의 결말을 굳이 지인으로부터 스포당하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과거와는 달리 , 오늘날의 정보사회에서는 검색 한 번에 어지간한 정보를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환경이다 . 검색어 입력 – 결과값 출력의 속도가 즉문즉답이 된 시대에서 고전적인 미디어들의 방식은 이제 정상속도가 아닌 ‘ 굳이 느려터진 ’ 상대 속도로 이용자들에게 체감된다 . 이미 다 알고 있을 법한 내용을 굳이 붙잡을 이유가 없는 시청자가 배속을 택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 디지털게임의 플레이 또한 보다 빠른 형태의 외주형 플레이인 확률에 넘기기로 이용자들의 선택은 넘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한편으로는 고전적 플레이에 익숙하고 또한 이를 애정하는 입장이지만 , 더불어 유년기와 달리 쉽게 피로해지는 신체에 얹혀 사는 입장에서 게임 플레이가 가진 귀찮음의 속성은 갈수록 그 무게감을 더한다 . 시대의 매체 속도가 빨라지고 , 신체의 생체 속도는 느려지는 더블 부스터의 시대를 맞은 과거 유년기의 게임 키드들이 중년이 되어 보다 확률의 개입이 두터워진 게임을 붙잡고 소파에 눕는 이유는 한때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성으로부터 감명받고 매료되었던 이유와 함께이기에 더욱 서글퍼진다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e스포츠의 미래를 위하여 - 젠지글로벌아카데미 백현민 디렉터

    이러한 시선을 바꾸고 e스포츠라는 업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리더들이 필요한데, 이 리더들은 e스포츠에 대해서 열정만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분야에 대한 전문가여야 합니다. 그 분야가 마케팅이 될 수도 있고, 영업이나 스폰서십이 될 수도 있고 교육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분들이 많아지면서 e스포츠가 성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e스포츠 배경이 아니라 교육 배경을 가지고 있고 저희 CEO님 같은 경우에도 메이저리그 야구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e스포츠를 사랑하면서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업계가 성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업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Back e스포츠의 미래를 위하여 - 젠지글로벌아카데미 백현민 디렉터 03 GG Vol. 21. 12. 10. 오늘날의 게임 생태는 많은 특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e스포츠는 ‘보는 게임’으로의 전환이 가장 대표적으로 일어나는 영역이다. e스포츠의 시청자층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으며, 그 안에는 직접 게임을 하지 않지만 중계를 챙겨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실제로 2012년에 1억 3000만이었던 세계 e스포츠 시청 규모는 2023년에 6억 4,600만 명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있어 우려도 존재한다. 급변하는 게임 환경 속에서 e스포츠 시장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속 빈 강정이 되지 않을지에 관한 우려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려처럼 게임 생태는 급변할 수 있음에도, 다음 세대를 바라보고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얼핏 보면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게임과 교육을 접목시키려 한다. 심지어 게임 교육기관이 미국 대안학교로 인증을 받고, 유수의 대학들과도 연계했다. 이들은 e스포츠에 대해서 어떤 상(想)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젠지 글로벌 아카데미(GGA, 이하 GGA)의 백현민(Joseph Baek) 디렉터를 편집장이 만나고 왔다. 편집장: 기본적으로 아카데미가 가지고 있는 비전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백현민 디렉터: 저희의 비전은 저희 학생들이 e스포츠 내에서 성공적인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성공은 단순히 게임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각기 다른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편집장: 그러면 그 비전 속에서 학생들의 일과나, 한 학기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등 아카데미의 실제 운영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백현민 디렉터: 먼저 젠지 엘리트 e스포츠 아카데미(GEEA)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GEEA는 국제학교로서 학업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엘리트 학교에서 하루 4시간 고등 교육에 해당하는 수업을 받고 그다음에 저희 건물로 넘어와서 e스포츠 관련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때, 수업들은 블록 스케줄 식으로 운영이 돼 월, 수 / 화, 목을 나누어 각기 다른 수업을 하고, 금요일은 선택 과목을 듣게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e스포츠에 관련해 제공하는 교육은 게임 이론 즉, 영상을 보면서 게임에 대해 배우는 부분도 있고, 스크림을 통해서 팀플레이를 배우는 부분도 있고, 금요일 선택 과목 같은 경우에는 e스포츠의 역사나 e스포츠 업계에 관하여 배우는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교육적 관점에서 저희 GEEA의 특별한 지점은 단순히 게임을 더 잘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개별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가르친다는 부분입니다. 많은 학부모님이 저희한테, “자녀가 예전에는 잠도 안 자고, 밥도 제때 안 먹었고 게임을 했는데, GEEA 수업을 듣고 나서는 새벽 1시에도 영어 숙제를 하고 있었다”는 말씀들을 해주십니다. 이처럼 학업이나 일상적인 부분에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데, 저희는 이런 학업적인 성장이 그들의 게임 플레이에도 반영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희 학생들의 평균 티어가 다이아 3이었을 때, 평균 티어가 다이아 1인 다른 학원과의 스크림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저희 학생들이 피지컬 쪽에서 떨어지더라도 팀플레이로 부족한 부분들을 메꾸었기 때문입니다. 편집장: 결국 게임 플레이라는 것이 그냥 ‘논다’는 의미로만 묶이지 않는 것 같아요. 학업도, 게임도 일종의 사회 활동이고 이런 활동을 통해 게임 플레이에서도 기존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보고 계시는 거지요? 백현민 디렉터: 네. 맞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내용을 기반으로 저희의 두 번째 주요 프로그램인 GGA 온라인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GGA는 온라인 학원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편하실 겁니다. GGA 온라인은 개개인의 역량에 맞춘 굉장히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프로 선수들에게 피드백을 받는 경우에 ‘이번 플레이가 좋았다’, ‘안 좋았다’는 식의 단순한 피드백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저희 코치님들 같은 경우에는 ‘이 순간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팀원의 플레이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는지’ 등 세부적으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이 학생의 게임 실력뿐 아니라 소통하는 방법 등 인간적인 영역에서의 성장을 돕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저희 학생들끼리도 ‘우리는 어떤 전략을 갖고 있었지?’ ‘그 전략이 왜 성공했지?’ 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소통을 합니다. 이러한 초점은 많은 학생들이 더 빠른 속도로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편집장: 요즘에는 사설이나 과외 형태로 개인 강습을 받는 학원이나 프로그램이 많은데, GGA 같은 경우에는 그냥 게임을 잘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백현민 디렉터: 네. 저도 그 부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최고의 선수가 단순히 게임 실력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게임을 통해서 인간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학생들은 더 높은 티어의 선수들과 스크림을 해서도 이길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점수나 티어 등에 신경 쓰지 않고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서 인간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었을 때 학원을 운영했었는데 다른 학원들을 보면 굉장히 대표적인 한국 스타일, 그러니까 시험 점수를 올리는 것을 강조하고, 시험을 볼 때 필요한 전략이나 노하우, 팁들을 굉장히 중요시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연습을 하다 보면 시험 점수는 올라가겠지만, 시험 점수 이외에는 얻는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 학생들에게는 내용을 이해하고 이 내용이 왜 중요한지 강조하곤 합니다. 그리고 GGA에서도 학생들이 전반적으로 성장을 함으로써 티어가 함께 올라가고 있습니다. 편집장: e스포츠 선수들 같은 경우에 한동안 인성 문제로 굉장히 논란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e스포츠 플레이에 대한 교육을 받는 데 인성에 관련된 교육 프로그램도 준비가 되고 있나요? 백현민 디렉터: 네. 저희도 그런 부분들을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좀 상대적으로 덜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미국에서는 굉장히 강조되는 부분이 ‘소프트 스킬’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직업에서 필요한 전문적 지식이나 능력이라기보다 팀워크나 리더십, 소통, 적응력 등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는 부분들을 소프트 스킬이라고 하는데, 하버드 조사에 따르면 직업에서 성공을 결정하는 요인의 85%가 소프트 스킬이라고 합니다. 저도 많은 프로 선수들이 과거 인성 문제로 논란이 되어 있었다는 걸 알고 있고, 그것 때문에 아직도 e스포츠의 평판이 안 좋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다음 세대의 선수들의 인격을 육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부분은 다음 세대 선수들이 좋은 쪽으로 업계를 대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세대에 투자함으로써 e스포츠 업계가 장기적으로 성공적인 미래를 가질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 홈페이지에 게시된 GEEA의 수업 사진 편집장: 아카데미의 첫 번째 사업이 일종의 대안 교육의 형태이면서 한국에서는 생소한 방식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생소함이 같이 있는데 첫 번째는 게임을 가지고 교육을 한다는 생소함. 두 번째는 게임이 아니더라도, 스포츠와 교육을 병행한다는 생소함입니다. 한국의 엘리트 스포츠는 교육과의 병행을 목표로 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이 교육이 정말 성과가 있을지 실제로도 학부모들로부터 질문을 많이 받으실 텐데 주로 어떻게 답변을 하시나요? 백현민 디렉터: 네. 학부모님들이 그런 걱정을 많이 하세요. 특히 한국에서는 학업과 스포츠를 병행한다는 일에 대해서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오히려 전통적인 스포츠보다 e스포츠가 학업과 병행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통적인 스포츠는 신체적인 부분에 많이 포커스가 맞춰져 있지만, e스포츠는 기술적이고 전략적인 부분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어서 그런 부분들이 인간적인 성장 혹은 학업적인 성장을 많이 유도해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희 학생 중에서는 학교에서 성적이 굉장히 안 좋거나 학교를 자퇴한 학생들이 있었지만, 저희 프로그램을 통해서 대학교를 간 사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런 e스포츠의 특징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또 다른 사례로 한 학생 같은 경우에는 저희한테 처음 왔을 때 실력이 그렇게 특출나지는 않았지만, 저희 프로그램을 거치고 현재 오버워치 팀 서울 다이너스티의 선수로 등록이 되는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이런 성공 사례들을 기반으로 전에는 학교에서 성적을 잘 못 내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성적을 잘 내는 학생들도 저희 프로그램과 함께함으로써 자신의 미래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서 많이 오고 있습니다. 편집장: 대안학교 이야기가 나왔는데, 젠지 아카데미는 대안학교로의 기능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시나요? 백현민 디렉터: 먼저 GEEA는 공식적으로도 대안학교로 인정을 받고 있고요. GGA 온라인의 경우, 대안학교는 아니지만 결국은 GEEA와 같은 결과물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GGA 역시 e스포츠 교육을 중점으로 하고 있지만, 저희 프로그램을 통해서 외국으로 유학 가거나 한국 내에서 대학교를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편집장: 고등학교를 대안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남들과 다른 길을 간다는 데에서 오는 불안함이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게임의 특성상 경쟁을 하다 보니까 지거나 도태된다는 점에서 오는 불안과 스트레스가 있을 것 같은데, 혹시 그런 지점들에 대한 관리가 별도로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백현민 디렉터: 물론 학생들이 경쟁에 대한 불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코치들이야말로 그런 부분을 케어해 주시기에 가장 적합한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저희 코치들은 전부 프로 경험이 있거나 업계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일해온 분들이기에 게임 내에서의 승패와 경쟁에 대한 스트레스를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코치진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학생들을 잘 케어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안학교라는 게 남들과 다른 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요즘에는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진학하고 졸업한다고 해서 좋은 직업이나 좋은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e스포츠라는 색다른 길을 감으로써 더 성장을 하고 더 성공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편집장: 많은 학생들이 프로 게이머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아카데미에 문을 두드립니다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 도달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당연히 많은 청소년이 좌절감을 느낄 것인데, 교육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좌절감을 걷어내고 또 다른 길을 제시해 주셔야 하잖아요. 이에 어떤 길들을 주로 제시하시는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진출해서 본인도 만족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례가 있으신지 묻고 싶습니다. 백현민 디렉터: 둘 다 한꺼번에 대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많은 학생들이 저희 GGA를 찾아오는 이유는 프로 선수가 되고 싶다는 부분이 맞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학생들에게 얘기하는 것은 ‘GGA가 자동으로 프로 게이머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꿈을 좇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점입니다. 다만, 조금 더 생산적인 방법으로 꿈을 좇게끔 도와주는 것인데, 프로 선수가 된다는 꿈 하나만 너무 좁은 초점으로 바라본다면 프로 선수가 되기를 실패했을 때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게 너무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학생들이 좀 넓은 시야를 갖고 다양한 가능성을 바라보게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대학에 진학한 친구를 사례로 말씀드리자면 그 친구 같은 경우에는 프로 선수가 꿈이었지만 나이나 기타 상황의 문제로 프로 선수가 되지 못했고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새로운 꿈으로 삼았지만 그것도 잘 안 됐습니다. 하지만 저희 프로그램을 통해서 미국의 캔터키 대학에 40% 장학금을 받고 진학을 할 수 있었고 지금도 캔터키 대학에서 e스포츠 관련 부분에 대해 리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 학생 같은 경우에는 저희 젠지 재단에서 후원을 받고 젠지와 인턴십 경험까지 하면서 꿈을 확장시킨 사례입니다. 프로 선수라는 원래 꿈은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저희는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대안이나 다른 커리어를 제공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편집장: 한국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일 것 같은데요. 홈페이지에 지금 나와 있는 소개를 보면 미국 대학으로의 진출 케이스들이 많은데 현실적으로 한국 학부모들은 아카데미 출신이 한국 대학에 특례 입학 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이에 대한 계획이 있으신가요? 백현민 디렉터: 네. 저희도 한국 대학과 파트너십을 맺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사실 아직도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는 게임을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보거나 애들이 스트레스 풀려고 하는 것이라고 가볍게, 혹은 안 좋게 보는 시선들이 많습니다. 이에 저희는 e스포츠를 보는 시선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스포츠와 게임 업계는 전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미래에 성장할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e스포츠라는 업계가 책임감 있고 긍정적이며 생산적인 방향으로 성장해 나가려면 이런 시선을 바꿔야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한국의 대학들이 시선을 바꿀 수 있게끔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저희 졸업생 한 명이 이번에 한성대학교에서 20% 장학금을 받고 진학하게 된 케이스가 있습니다. 한성대학교는 ‘리그 오브 레전드’ 관련 신설 학과를 개설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졸업생은 아니지만 GGA 학원을 경험한 학생도 비슷한 목표를 달성한 학생이 있습니다. 편집장: e스포츠는 굉장히 큰 산업이죠.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항상 가지고 있는 우려, 즉 하나의 게임, 하나의 장르가 영원할 수 없다는 리스크도 분명히 있습니다. 만약 한 장르가 쇠퇴했을 때, 그 길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막막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으실지 묻고 싶습니다. 백현민 디렉터: 네. 말씀하시는 부분도 분명히 우려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같은 사례가 있다시피 게임 종목이 갑자기 퇴보할 수도 있고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일단 다양한 종목을 가르치고 있고, 무엇보다 저희에게 중요한 것은 게임 자체라기보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인간적으로 학생들이 성장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새로운 게임, 새로운 종목들이 나오면 그것을 통해서 또 미래 학생들을 성장시키는 데 노력하려고 합니다. 편집장: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에서 게임이, 그리고 e스포츠가 어떤 식으로 인식되면 좋겠다라는 꿈이 있으실까요? 백현민 디렉터: 중요한 것은 게임과 e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뀔지에 관한 것일 것 같습니다. e스포츠를 사랑하고 e스포츠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업계가 더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사회적으로 안 좋게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선수들이나 코치, 매니저 등 e스포츠라는 환경 자체는 만들어져 있었지만, 프로페셔널하지 않다거나 체계적이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선을 바꾸고 e스포츠라는 업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리더들이 필요한데, 이 리더들은 e스포츠에 대해서 열정만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분야에 대한 전문가여야 합니다. 그 분야가 마케팅이 될 수도 있고, 영업이나 스폰서십이 될 수도 있고 교육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분들이 많아지면서 e스포츠가 성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e스포츠 배경이 아니라 교육 배경을 가지고 있고 저희 CEO님 같은 경우에도 메이저리그 야구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e스포츠를 사랑하면서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업계가 성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업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검은 신화: 오공>의 성취는 중국 문화권 바깥에서도 충분히 이해되는 것인가?

    이를테면 많은 한국 게이머들은 매 챕터가 끝날 때 등장하는 ‘다음 회에서 알아보자’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는 회본 형태로 챕터가 정리되는 서유기 원전의 끝 문장을 그대로 차용해 온 부분이고 원전 ‘서유기’가 한국에서는 널리 읽히는 편은 아니라는 문제에서 기인한다. 그나마 친연성이 있는 한국에서도 이런 상황인데, 서구권까지 넘어가게 되면 사실상 <오공>을 이해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 Back <검은 신화: 오공>의 성취는 중국 문화권 바깥에서도 충분히 이해되는 것인가? 21 GG Vol. 24. 12. 10. 오랜 시간 동안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을 차지해 온 지라, 중국의 디지털게임을 향한 도전에서 중국 고전은 언제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온 바 있었다. GG의 지난 칼럼(참조)에서처럼, 중국의 디지털게임 제작은 초창기부터 <봉신연의>, <료재지이> 같은 중국의 고전 소설들을 디지털게임으로 가져오는 작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유기>는 매우 자주 디지털게임으로의 시도가 이어져 온 작품이다. 8비트 게임 시절부터 중국에서는 <대화서유>, <서유기>, <서전취경>과 같은 여러 회사에 의한 다양한 게임 장르로의 시도가 서유기를 딛고 이루어졌다. (관련내용은 GG 2호, " 중국의 레트로 게임: 8비트 시대의 흔적들 " 참조) 비단 중국에만 국한되었다기보다는 <서유기>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판타지성은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 전반에서 현대적 대중문화 콘텐츠로의 잦은 시도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이루어진 <손손>과 같은 아케이드 디지털게임화, <서유기>를 초기 모티프로 삼아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아예 서구권 전반에서 ‘손오공’이 아닌 ‘손 고쿠’를 고유명사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성공한 <드래곤볼>과 같은 사례와 함께 한국에서도 <날아라 슈퍼보드>를 기반으로 한 ‘사오정 시리즈’의 성공이나, <마법천자문>과 같은 사례들이 서유기라는 고전 판타지의 확장성을 증명한다. 동아시아 고전 판타지라는 강한 배경을 가진 게임 <검은 신화: 오공(이하 <오공>)의 제작 발표가 있은 뒤부터 이 게임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한편의 기대와 한편의 걱정을 동시에 이끌어냈다. 티저 트레일러에서 보여준 액션 어드벤처 게임으로서의 상당한 완성도가 오래도록 다시 익혀 내어 온 고전의 새로운 게임적 재해석에 빛나는 성과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또 서유기?’라는,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주제에 안이하게 천착해버릴 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는 시장 규모에 비해 오랫동안 이렇다 할 ‘문화적 업적’으로서의 대표작을 보여주지 못한 중국 게임제작 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한 배경이었다. 높은 장르적 완성도는 세계관과 결부되며 빛을 발한다 <오공>의 성과는 액션 어드벤처라는 장르적 측면에서도 상당하다. 곤술과 창술이라는 우슈에 기반한 무기 액션은 특유의 부드러운 초식 연격을 통해 매끄러운 전투 흐름을 완성했고, 사실상 전투 액션의 핵심이 되는 강공격은 천지를 울리는 과장법을 무리없이 연출해내내는 데 성공했다. 전투 액션에서의 성공은 게임 시작부터 이어지는 주인공 캐릭터의 완성도 이상으로 다채로운 기믹을 자랑하는 수많은 보스 몹들을 통해 이뤄지는데, 이른바 ‘복붙’으로 만들어지는 장면들 대신 풍성한 파훼법을 고민하게 만드는 다양한 전투 도전이 게임의 중심을 놓치지 않고 이끌어냈다. 난이도 설정이 별도로 없다는 점은 일부 게이머들에게는 진입장벽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고전적인 방식인 ‘시간을 들이면 해결된다’는 기믹을 살려둠으로써 완화점을 두었다. 초반부는 소울라이크를 방불케 할 만큼 확실히 도전적인 난이도를 보여주지만, 특정 구간들을 지나면서 열리는 도술과 특성이 누적되면서 난이도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일정 수준 이상의 시간을 들이면 못 넘어설 것은 아니라는 일련의 안도감을 부여한다. 소울라이크 느낌을 내면서도 게임 오버에도 경험치를 흘리지 않게 만들어진 디자인은 난이도 설정이 없다는 점을 보완하는 디자인이었고, 게임은 전반적으로 쉽다고 말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지만 그렇다고 초심자를 완전히 내팽개친다고만은 볼 수 없는 타협점을 보여주었다. 디지털게임의 성취를 바라볼 때 메카닉만을 뚝 떼어 보는 것은 게임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방법이다. 단순히 막대기를 돌리고 휘두르는 공격 액션이 훌륭하다고 하면 굳이 ‘서유기’라는 배경과 이야기라는 스킨을 덧씌운 게임에서 우리가 받는 감상을 정리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오공>의 성취 또한 상당히 공들인 전투 액션이 어떤 세계관 하에서 어떤 목적을 향하고 있는지와 결부될 때 비로소 본격적인 의미를 드러내는데, 기본적으로는 ‘서유기’의 세계관을 활용하되, 손오공의 서역 여정길 당시가 아닌 그 다음의 이야기라는 배경 설정을 통해 게임은 이 세계관을 21세기에 디지털게임으로 재현할 때 필요한 많은 자유로움을 끌어낸다. 신분제 시절의 판타지가 못다 한 이야기의 현대적 재구성 중국의 또다른 판타지 소설인 ‘봉신연의’와 마찬가지로 ‘서유기’ 또한 요괴라는 이름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총출동한다. <오공>은 ‘서유기’에 등장한 수많은 요괴들 중 액션 어드벤처 게임에서 도드라지는 기믹이 될 수 있는 요괴들을 서유기 원작의 순서와 관계없이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고전 판타지 소설이 액션 어드벤처 게임으로 재구성될 때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하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서 <오공>은 주인공인 손오공의 서역 행보를 되새기는 것이 아닌, 그가 죽은 뒤 그의 후계를 자임하는 주인공 ‘천명자’의 행보를 그려낸다. <오공>이 그려낸, 삼장법사 일행의 고행이 끝난 뒤의 세계는 원작이 그려내지는 않았지만, 원작의 상상력을 이어 간다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어떤 세계의 후속담이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공>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서역에서 가져온 대승의 불경이 중국에 도착했다면 이 세계는 부처의 대자대비심으로 이전보다 나은 세계가 되었어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오공>은 끊임없이 보여주고자 한다.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 일행이 지났던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고, 아예 원작에서 투전승불의 지위에 올라 해탈에 이른 것으로 결론지어진 손오공은 게임 시작부터 죽었다고 나온다. 관세음보살이 현장법사에게 일러 주었던, 중생을 구제할 대승의 새 불경은 딱히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이 <오공>이라는 게임의 출발점이다. 더욱 의뭉스러운 것은 세계의 남은 자들이 그런 세계를 구하기 위해 불경을 다시 가져온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죽어버린 손오공의 부활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주인공 천명자는 부처의 지위를 버리고 다시 원숭이 왕으로 살고자 했다 죽게 된 손오공이 세상에 남긴 육근을 모아 손오공의 부활을 시도한다. 세상을 더 낫게 만들 방법이 서역에서 가져온 불경이 아니라 손오공의 부활이라는 점은 언제나 다음에 이어질 세상을 보다 낫게 만드는 것을 암묵적 전제로 삼는 디지털게임의 구조 안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다. 원전 ‘서유기’가 그려낸 세계는 신격 존재들과 인간들, 그리고 요괴들이라는 구분이 엄격한 세계였다. 일종의 신분제라고도 볼 수 있을 이 구분은 한편으로는 엄격하면서도 아예 고정불변인 것은 아닌데, 이를테면 원래 요괴 출신이었던 손오공이 천계의 부름을 받아 옥황상제와 겸상하거나 투전승불이 될 수도 있고, 천계의 군인이었던 천봉원수와 권렴대장이 잘못을 저질러 요괴로 환생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신분은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지만, 그 오름과 내림이 명확한 격차를 갖는다는 점에서 이 세계의 신분제는 태생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상벌적 개념에 가깝다. <오공>의 시작부분에서 손오공은 천계로 부름받은 투전승불이라는 지위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그 외침에 대해 천계는 군대를 보내 손오공의 목소리를 지우는 것으로 화답한다. 이는 고전 소설 ‘서유기’가 시대적 한계로 그려내지 못한 지점을 21세기의 디지털게임이 다시 가져올 때 살려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고전 판타지의 게임을 통한 현대적 재해석은 이미 크게 시도된 바 있는데, <오공>의 제작진들이 직접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한 바 있는 <갓 오브 워> 리부트 시리즈다. 원작이 되는 북유럽 신화가 오딘과 토르라는 주신들의 관점에서 진행된 바 있다면, 게임으로 등장한 <갓 오브 워>의 북유럽 신화는 실제 신화 속에서 반영웅의 위치에 있었던 로키의 시각에서 신화를 풀어나가고자 했다. 시점을 바꾸면 이야기는 크게 달라지는데, 오딘의 지혜는 게임 안에서 교활함으로 재해석된다. 신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세계 전체를 지배하려 들고, 그 신의 범주에 들지 못한 이들의 저항은 주신들의 관점에서는 세계의 멸망, 라그나뢰크인 것이다. 라그나뢰크가 예언한 세계의 종말은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결국 ‘그들만의 세계’에 찾아오는 종말이라는 해석은 고전적 신분제 사회를 벗어난 현대에 들어 신화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주요한 관점이다. 그리고 <오공>은 같은 맥락으로 ‘서유기’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에 나선다. 신분제가 명확했던 시절에는 자연스러웠을 신계가 인간계를 관리하고(혹은 보호하고) 있는 모습은 신분제가 사라진 현대에 들어서는 그 자체로 이미 억압적인 무언가가 된다. 로키라는 악신의 존재를 활용한 <갓 오브 워>의 방식 대신, <오공>은 원작의 주인공이었던, 요괴 출신이지만 천계의 명령에 순순히 복무했던 이가 받은 의심과 실망을 부각시킴으로써 고전적 신분제 하에서의 평화와 행복이 가진 모순을 정면으로 끌어내는 방식을 사용했다. 각론은 다르지만, 두 게임 모두 고전 사회에서 만들어진 신화와 판타지가 현대 관점에서는 여전히 모순일 어느 지점을 향해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냈다는 점에서 신화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평을 받을 만 하다. 중국 문화권 바깥에서 이 게임의 의미에 다가가는 어려움에 대해 고전 소설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 성공적일 수 있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제작진들이 고전 소설로서의 ‘서유기’를 깊고 풍부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 ‘서유기’는 원전 자체가 보편적 교양 소설로 취급받으며, 한국에 비해 폭넓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실제 <오공> 안에 등장하는 원작 출신의 많은 캐릭터들은 원작에서 보여줬던 성격과 캐릭터를 게임 특성에 맞게 변형한 상태로 등장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특성이 게임 메커닉과 강하게 결부되며 게임을 말그대로 살아움직이는 ‘서유기’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로 만들어진 2차창작 콘텐츠로서의 <오공>은 이 점 때문에 오히려 ‘서유기’에 익숙하지 않은 중국 바깥의 게이머들에게는 미처 다 전달되지 않는 지점 또한 적지 않다. 이를테면 많은 한국 게이머들은 매 챕터가 끝날 때 등장하는 ‘다음 회에서 알아보자’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는 회본 형태로 챕터가 정리되는 서유기 원전의 끝 문장을 그대로 차용해 온 부분이고 원전 ‘서유기’가 한국에서는 널리 읽히는 편은 아니라는 문제에서 기인한다. 그나마 친연성이 있는 한국에서도 이런 상황인데, 서구권까지 넘어가게 되면 사실상 <오공>을 이해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 다음 회에서 풀어보자는 말의 의미는 중국 문화권이 아니면 이해가 어려울 것이다. 충분히 잘 만들어진 게임이지만 <오공>에 대한 아쉬움은 역으로 이 게임이 원전에 너무나 충실했다는 점에서 원전이 보편적이지 않은 이들에겐 미처 그 정교함이 다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 때문에 온다. 원전에 대한 세심한 재해석에 경탄하면서도 내내 이걸 서구권 게이머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를 떠올린 것은, 게임의 기저에 흐르는 ‘서유기’라는 원전에 대한 추가적인 이해를 도울 수 있을 여러 서브 컨텐츠들이 충분히 갖춰지지는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사천왕과의 전투라는 것도 아마 서양권 이용자들에겐 '멋진 거대 몬스터와의 박력있는 전투'까지만 전달될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영상기술, 매체, 도구, 방법론으로서의 머시니마에 대한 소고

    도입부에 적어둔 것처럼 머시니마는 1990년대 비디오게임 녹화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가능해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디즈니의 스턴트 시뮬레이터 게임 [스턴트 아일랜드 Stunt Island](1992)에서 인게임 기능으로 처음 도입된 것이 그 출발점이다. 해당 게임은 가상의 섬에서 다양한 스턴트 시퀀스를 제작하고, 그것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녹화해 보여주는 것이 주된 플레이였다. < Back 26 GG Vol. 25.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ngsoo Park Majored in art studies as an undergraduate and is currently studying media cultural studi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Yonsei University. Writes primarily about film, while keeping a curious eye on visual culture broadly—art, games, and broadcasting among them. Also a film critic, host of the podcast Café Critique, and an organizer of community film screenings.

  • BIC 2022 탐방기

    9월 1일부터 9월 4일 까지 부산역 근처 부산항 국제전시 컨벤션센터에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디게임 행사가 열렸다. 부산 인디 커넥트 페스티발이다. 올해로 8번째를 맞은 이 행사는 코로나로 인해 2020년 은 완전 비대면으로, 2021년엔 사전선정자만 오프라인으로 참여할수 있게 한정적으로 열렸다. 코로나가 완저히 종식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점진적으로 해제되면서 3년만에 완전 오프라인으로 열린 셈이다. < Back 08 GG Vol. 22.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oungWook Oh Game enthusiast, game programmer, and historian of games. A growing interest in Korean games turned into a hobby of collecting and organizing materials, and has been steadily gathering and archiving them since 2006. Co-authored books including The History of Korean Games and Mario, Born in '81, and contributed as a developer to games such as Dungeon & Fighter, Acropolis, Pony Town, and Timeline Dungeon.

  • 손맛보다 눈맛, 사람들은 이제 게임을 ‘본다’

    2020년 초, 한 모바일 게임의 광고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제 모두들 손 떼!”라고 외치고, 가끔씩만 만져줘도 맛이 최고라며 게이머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게임은 원래 이 맛”이라고 선언한다. “어머, 어딜 손 대요?”라며 능청을 부리기도 한다. 게임의 제목부터 “키보드에서 떨어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위 방치형 RPG로 불리는 〈AFK(Away from keyboard) 아레나〉 이야기다. < Back 손맛보다 눈맛, 사람들은 이제 게임을 ‘본다’ 03 GG Vol. 21. 12. 10. 잘못된 전제 2020년 초, 한 모바일 게임의 광고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제 모두들 손 떼!”라고 외치고, 가끔씩만 만져줘도 맛이 최고라며 게이머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게임은 원래 이 맛”이라고 선언한다. “어머, 어딜 손 대요?”라며 능청을 부리기도 한다. 게임의 제목부터 “키보드에서 떨어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위 방치형 RPG로 불리는 〈AFK(Away from keyboard) 아레나〉 이야기다. 게임은 원래 ‘손맛’이 아니라 ‘보는 맛’이라 우기는 광고 카피. 적잖은 게이머들은 “게임은 플레이할려고 하는 거 아닌가? 본질을 없애버리네!”같은 댓글에 동의하고 공감했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진행되는 게임을 게임이라 부를 수 있는가? 키보드나 마우스로 입력을 하고 그래서 점수든 승리든 목표를 달성하는 것, 즉 게이머와 게임 텍스트의 상호작용이 게임의 매체적 본질 아니던가? 버릇처럼 텔레비전을 켜놓고 연예인들이 박장대소하며 히히덕대는 장면들을 멍하니 쳐다보는 카우치 포테이토족의 모습과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역동적인 게이머 모습은 당연히 구분되어야 하는게 아닌가? 수동적 텔레비전 시청자와 능동적 게임 플레이어의 구분은 꽤 오랜 기간 양 미디어의 본질적 차이인 것처럼 여겨졌다. 직관적으로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암묵적인 전제가 있다. “본다”는 것은 (손을 움직이는 것보다) 수동적인 행위라는 전제가 있고, ‘상호작용성’이야말로 (텔레비전이나 영화와 차별되는) 게임의 매체적 본성이라는 전제가 있다. 크게 의심받지 않던 이 전제들. 최근,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들이 자꾸 생긴다. 자기가 게임을 하는 대신 남들이 게임하는 모습 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내가 조작을 하는 대신 기계가 알아서 내 캐릭터를 육성시켜주는 게임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키보드에서 손 떼라는 게임도 나왔고, 성공했다. 우리가 뭔가 잘 못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보는 행위는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은 그리 게으르고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흘긋) 보다(see)”와 “바라보다(look)”는 구별되어야 한다. 일상적 삶에서 우리 시선이 어떤 대상들에 우연히 머물거나 스쳐가는 상황이 아니라 목적성과 방향성을 가진 자발적인 행동으로서의 ‘바라봄’은 바라보는 ‘실천 행위’이다. 길가에서, 술집에서, 운전을 하다가, “뭘 봐, 인마!”라는 마술같은 네 글자로 인해 싸움이 일어나고 목숨이 왔다갔다하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해변에서, 클럽에서, 응시하는 자와 시선을 피하려는 자의 줄다리기는 드문 일이 아니다. CCTV로 잠재적 범죄자들을 감시하는 편의점 사장이나 몰래카메라로 누군가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변태 범죄자에게 ‘바라봄’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힘 있는 행위이다. 시선만으로도 권력과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감옥의 간수와 죄수는 이 명제를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사례다. 푸코(Michel Faucault)가 19세기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Jeremy Bentham)의 아이디어를 빌려와 원형 감옥의 작동 원리를 설파할 때, 그 핵심은 시선의 권력이 내면화된다는 점이었다. 중앙 첨탑에서 죄수의 방을 비춘다면 죄수는 첨탑의 간수를 볼 수 없다. 나는 그를 볼 수 없지만 그는 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일차적인 권력의 자원이 된다면, 그가 지금 나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가 정한 규율과 표준을 내면화하여 행동해야 하는 것이 권력 작동의 최종 결과가 된다. 간수는 시각의 주체이다. 죄수는 대상이다. 시각중심주의는 주체와 대상을 공간적으로 분리하고, 주체에게 바라보고 분석할 힘을 준다. 이론(theory)의 어원은 본다(theoria)이다. 눈은 권력을 가졌지만 대상에 개입하지 못한다. 하지만 바라보는 주체는 능동적인 해석의 주체이기도 하다. 코미디를 보면서도 울 수 있다면 이를 어찌 수동적 수용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텍스트 중심주의의 미디어 문화이론이 수용자에 대한 관심으로 선회했던 이유도 바로 해석 주체의 능동성 때문이었다. 홀(Stuart Hall)이 부호화와 해독에 대한 도발적 논의를 시작한 때가 40여 년 전이고, 이를 이어받아 피스크(John Fiske)가 저항적 즐거움과 기호론적 민주주의를 제기한 지도 30년 이상이 흘렀다. 오히려 수용자의 능동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냐는 반성이 나왔을 정도니,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신문기사나 만화를 보는 것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행위보다 수동적이라 믿어버리는 것은 시대착오적 전제가 아닐 수 없다. 게임은 과연 상호작용적 미디어인가? 하지만, 여전히, 게이머의 개입적 행동을 영화 관객의 해석적 행동과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는 없다. 게임의 본질이 ‘상호작용성’이라는 믿음도 여기서 출발한다. 주체와 대상이 공간적으로 분리된 전통적 시각매체와 달리, 게임에선 수용자가 대상 텍스트의 내용과 구조에 작용을 가하고(입력) 그 결과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진다는 점은 분명한 차별 지점이기 때문이다. 게임문화연구의 초기, 게임과 게임플레이를 유희의 관점에서 보는 접근(루돌로지)과 서사의 관점에서 보는 접근(내러톨로지)이 대립했을 때도 상호작용성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 전자는 게임의 본질을 게이머의 입력행위에서 찾았고 후자는 게임 텍스트가 상호작용적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놀이’가 놀이 주체(플레이어)의 작용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 구성된다. 이것을 상호작용적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무엇과의 상호작용인가? 축구는 공과의 상호작용인가, 상대 팀과의 상호작용인가, 아니면 심판이나 관중과의 상호작용인가? 축구 경기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경기를 하나의 서사로 간주하는 비유이다. 이 서사는 선수들이 플레이함으로써 완성된다. 자유도는 높지만, 서사 구성의 정해진 규칙은 있다. 게임을 게이머의 참여로 완성되는 서사의 일종으로 이해했던 머리(Janet Murray)의 정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축구라는 ‘각본 없는 드라마’를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관중이다. 영화의 서사를 즐기듯, 축구 서사를 만끽한다. 놀이의 주체가 선수로부터 관중으로 옮겨지는 순간이다. 게임에 대한 두 가지 암묵적인 전제, 즉 ‘보는’ 행위가 수동적이라는 전제와 ‘상호작용성’이야말로 게임의 매체적 본성이라는 전제는 처음부터 불안한 기반 위에 놓여 있었다. 게임을 설명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일 수는 있지만, ‘본질’이라 말할 수는 없다. 게임의 주체도 게이머로부터 관중으로 옮겨질 수 있다. 이스포츠(eSporsts)나 게임 스트리밍 시청의 경우이다. 이스포츠의 경우, 프로 게이머가 게임 서사를 완성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관중은 게임 서사를 (능동적으로) 바라보고 즐기는 주체가 된다. 방치형 게임 플레이어는 적극적인 입력을 하는 대신 서사의 전개과정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된다. 게임을 즐기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 게임의 본질을 거스르는 기형적 상황은 아니다. 시각성의 재림 게임을 즐기는 새로운 방식이라 치더라도, 왜 하필 지금 ‘보는 게임’이 각광을 받게 되었는지 의문은 남는다. 더 정확히 질문하자면, 시각과 청각과 촉각을 모두 사용하던 게임 플레이가 당연하던 시기를 지나 거의 전적으로 시각에만 의존하는 방식의 플레이(관람)가 중요해진 시기가 도래한 계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쇄술의 발달 이후 시각은 다른 감각에 비해 상대적 우위에 있어 왔다. 매체 철학자인 맥클루언(Marshall McLuhan)은 인쇄술이 인간의 감각들을 서로 떼어 놓고, 다양한 감각들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구술 중심의 부족문화에서 문자 중심의 필사문화로, 그리고 인쇄술 발전으로 인해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등장했다는 그의 매체사적 통찰 속에서, 시각은 필사문화 시기부터 중심적 감각으로 등장하여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시기에는 다른 감각들을 억압하는 지배적 감각이 된 것이다. 총체적 인간 감각이 분화되고, 시각이 나머지 감각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시각 권력은 근대성의 등장에 맞춰 지배적 지위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시각 권력과 원형감옥의 간수가 갖는 시각 권력이 같은 의미는 아니다. 맥클루언이 강조한 근대적 시각성의 지배는 인쇄술과 선형적 문자중심성과 더불어 등장, 강화되었고, 따라서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와 과학에 대한 맹신으로 이어진다. 신의 시점이 아닌 인간의 시점을 강조하면서 원근법에 충실한 과학적 그림이 등장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누군가를 감시하거나 훔쳐보고 나아가 통제하는 생체권력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 제기이다. 다시 맥클루언을 인용하자면, 시각 중심으로 형성된 인쇄-미디어 문화가 주술적이며 마법적인 청각 세계를 붕괴시켰던 것처럼, 구텐베르크 은하계 역시 전기 미디어의 발명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신과 라디오, 텔레비전은 메시지를 찰나적으로 만들어 합리성보다는 직관과 통찰을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은 가장 탈근대적인 매체이다. 게임 내의 다양성과 차이들을 잠시 접어두고 단순화하자면, 게임은 시각중심성에 저항하는 감각 분산적 매체이다. 게임을 즐기는 이들의 태도는 인쇄매체에 담긴 선형적 언어를 따라가는 (맥클루언이 말하는) 시각중심적 자세도 아니고 경건한 자세로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벤야민이 말하는) 정신집중의 태도도 아니다. 7,80년대의 오락실에서 시작해 90년대말 PC방에 의해 대중화되고 21세기 이후의 모바일 미디어로 인해 폭발한 디지털 게임은 근대성에 대한 회의와 도전과 때를 같이한다. 그렇다면 이스포츠와 방치형 게임에서 발견되는 시각성의 재림은 근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일까? 다시 시각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는 단서로 이해해야 할까? 탈근대적 시각성의 게으름 여기서 근대적 시각성과 구별되는 탈근대적 시각성을 발견한다. 전자가 시지각에만 의존해서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사고하는 과정을 설명한다면, 후자는 시각 주체로서 대상을 바라보되 게으르고 산만하고 찰나적인 바라봄을 지칭한다. 물론 다른 감각기관이 주변화된다는 면에서는 유사하고, 시각중심적 문화라는 지칭도 온당하다. 그러나 디지털 영상을 보는 지금의 태도는 읽고 이해하고 해석해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탈근대적 시각성은 디지털 영상매체의 발전과 같은 속도로 전파되었다. 일방적으로 뿌려지는 (근대 성격의) 텔레비전 방송이 아닌, 개인화되고 상호작용적이며 시공간 제약도 극복할 수 있는 미디어들이 보편화되면서, 몰입하지만 자유로운, 유익하지만 심심풀이인 바라봄도 따라서 보편화되었다. 비유하자면, 노동과 생산을 위한 시각성이 아니라 여가와 휴식을 위한 시각성이다. 공을 차는 대신 축구 중계를 시청하고 먹는 대신 먹방을 즐겨보는 행위는 게으르고 산만하다. 방치형(idle) 게임의 idle은 게으름, 나태함, 빈둥거림을 뜻한다.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 상태. 생산성 없는, 노동의 반대편에 있는 휴식의 상태이다. 노동의 반대편에는 휴식 대신 여가가 자리잡기도 한다. 일하지 않는 주말, 사람들은 열심히 여가활동을 즐긴다. 영화를 보거나 근교 관광지를 가거나, 아마 골프를 치러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낮잠을 자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여가활동’이라 부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가활동’은 준(準)노동이기도 하다. 함께할 친구들과 미리 약속을 하고, 버스 시간을 알아보고,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야 하기도 한다. 생산하지 않는 행위라 하여 노동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피곤한다. 이를 적극적/소극적 여가로 구분하기도 하고, ‘준노동적 여가’와 ‘보상적(compensatory) 여가’로 구분할 수도 있다. 혹은 (학술적 개념은 아니겠으나) ‘진지한’ 여가와 ‘게으르고 산만한’ 여가로 구분하는 편이 더 직관적일 수도 있겠다. 맑스의 사위이기도 한 라파르그(Paul Lafargue)는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찾는 운동을 제창한 바 있는데, 게으르고 산만한 여가야말로 이 운동에 딱 맞는 활동 아닐까. 방치형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진지한 플레이를 거부하는 것이고, 게으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시각 주체 노릇은 하지만 개입하지 않고, 열심히 바라보지만 해독하지 않는 게이머. 탈근대적 시각성은 게으르고 산만하다. 게임 본질주의의 쇠락 방치형(idle) 게임이라 퉁치기는 했지만, 게이머의 게으름에 기댄 게임의 종류는 상당히 많다. 역사도 결코 짧지 않다. 요즘은 흔해진 자동전투 기능도 방치의 일종이고, 방치를 필수 요건으로 만들어 놓은 파밍 게임들도 있다. 방치형 게임 연구 논문을 발표한 박이선은 게임의 방치 구조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5분 이내로 방치하면서 간헐적으로 게임에 진입하는 게임 (〈AFK아레나〉)도 있고, 몇 시간까지 게임을 켜두고 꾸준히 방치해야 하기 때문에 일과를 보내다가 잠시 게임이 생각나면 화면을 확인하고 개입하는 방식 (〈리니지2 레볼루션〉)도 있다. 플레이어가 게임에 접속하지 않아도 게임이 항상 진행되는 항시적 방치 게임(〈중년기사 김봉식〉)도 있다. 다양한 종류와 위계 속에서,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게으름’에 맞는 적절한 게임을 선택해서 즐긴다. 혹은 바라본다. 이스포츠를 예로 들었지만, 사실 남들이 게임하는 것을 관람하는 방식도 여러 종류이다. 특정 게임의 공략방법을 배우기 위한 유튜브 채널을 열심히 보는 사람도 있고, 셀러브리티의 미숙한 게임 플레이를 팬심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내가 플레이하는 대신 남들을 보며 즐기는 행동을 ‘상호수동성’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관찰주체는 감정을 다른 대상에게 위임함으로써 안도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시각에만 의존하여 즐거움을 얻는 이런 관람행위들은 근대적 의미의 진지한 바라봄과는 구별되는, 산만한 바라봄이라는 점이다. 플레이어의 적극적 개입 없이 시각에만 주로 의존하는 게임(관람) 방식이 확대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방치형 게임이 게임산업의 미래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스포츠가 게임보다 더 중요한 문화적 영역이 될 것이라는 뜻도 아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자판이나 마우스, 컨트롤러를 움직이는 것이 게임 플레이의 지향점이 되는 시기를 벗어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PC방에서 컵라면 먹으며 밤을 새는 것이 전형적인 게이머의 이미지가 되는 시기가 지났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른 글이나 사석에서도, 나는 소위 ‘진짜’ 게이머가 설 자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해왔다. 캐주얼 게이머, 노년 게이머, 방치형 게이머를 무시하며 “너희가 게임을 알아?”라며 언제든지 코웃음칠 자세가 되어 있던 이들이 점점 주변화됨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게임의 가장 중요한 ‘매체적 본질’이 상호작용성이라는 전제를 폐기한다면, 그리고 방치형 게이머의 산만한 바라봄을 근대적 시각 권력과 차별화하여 이해할 수 있다면, 게임 씬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변화는 소소한 유행이 아니라 거대한 문화적 변동의 일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학교 과제를 하면서 자동 사냥을 흘긋 쳐다보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유형의) 게이머를 보며, 혹은 게임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이스포츠 중계에 열광하는 (과거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유형의) 게이머를 보면서, 사실은 탈근대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코끼리의 종아리 어딘가를 만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세대학교 교수) 윤태진 텔레비전 드라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지금까지 20년 이상 미디어문화현상에 대한 강의와 연구와 집필을 했다. 게임, 웹툰, 한류, 예능 프로그램 등 썼던 글의 소재는 다양하지만 모두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활동들”을 탐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몇 년 전에는 『디지털게임문화연구』라는 작은 책을 낸 적이 있고, 요즘은 《연세게임·이스포츠 연구센터(YEGER)》라는 연구 조직을 운영하며 후배 연구자들과 함께 여러 게임문화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 <사이렌> 속 불쾌한 플레이

    리플레이 디자인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사이렌>의 내러티브는 더욱이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다. 이 게임의 내러티브 진행은 극도로 제한된 정보량으로 제공되는 내러티브 전개이다. 게이머는 일반적으로 주어진 스테이지를 플레이하면서 게임의 스토리를 파악하기 어렵다. <사이렌>은 그저 스테이지가 시작하면 게이머에게 클리어 조건을 제시하고 방치한다. < Back <사이렌> 속 불쾌한 플레이 23 GG Vol. 25. 4. 10. <사이렌(サイレン; SIREN)>(SCEジャパンスタジオ, 2003)은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재팬 스튜디오에서 개발한 호러 어드벤처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시리즈의 공통적인 줄거리는 주인공 일행이 (당장은) 알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해 농어촌 마을에 갇힌 상태에서 살아 남아 탈출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제목이 알려주듯, 이 알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음을 알려주는 알림이 바로 ‘사이렌 소리’이다. 기본적으로 <사이렌>은 시리즈의 틀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사이렌>의 특징은 사실적인 인물 표현과 실제 일본 풍경을 참조한 현실적 호러 묘사다. 게임은 심리적 공포를 유도하는 방식을 주로 이용하는데, 이를 극대화하는 요소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 ‘시인(屍人; 시비토)’이다. 시인의 디자인은 흔히 볼 수 있는 인간형 귀신이나 좀비처럼 그로테스크하게 표상되는데, 이들 시인은 인간일 적에 했을 법한 일상적 행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경찰관 시인은 총을 들고 순찰하며, 농부 시인은 낫을 들고 작물을 수확하거나 엽총을 들고 새를 쫓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괴물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적임을 표현하는 시인의 존재는 <사이렌>의 리얼리티와 엮이며 역설적이면서도 기묘한 공포감을 강조한다. 심리적 공포와 현실적인 디자인으로 여전히 훌륭한 호러 게임으로 평가받는 <사이렌> 시리즈이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게임을 플레이한 게이머들이 게임에 대해 어렵고 짜증난다는 평가를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야후 재팬 지혜봉투 [1] 에서 한 유저는 “<사이렌>이라는 게임은 어렵다고 들었는데, 플레이하면서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짜증나는 느낌인가요? (…) ” [2] 라고 질문을 올리기도 하고, 관련 질문에도 난이도에 대해 알려달라고 하는 글이 다수 올라왔다. 일본 실황 영상 타이틀에는 빠지지 않고 난이도가 높다는 댓글들이 자주 달린다. 오죽하면 일본의 한 블로거 珠音真珠(타마네 펄; 2022)은 “명작 호러 게임 「SIREN」은 무엇이 어려운가 게임 디자인을 해설(名作ホラーゲーム「SIREN」は何が難しいのかゲームデザインを解説)” [3] 이라며 이 게임의 어려움을 설파할 정도이다. * (<사이렌> 실황 타이틀. 난이도 올라가고 있다(難易度上がってきた)라던가, 불합리 오브 불합리(理不尽of理不尽) 등의 문장과 수식어는 그 악명을 보여준다. – 출처: YouTube) <사이렌>의 난이도 악명은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게임 커뮤니티에서도 “뭔지도 모르겠는 지도만 보고 길찾기가 무섭다(O)” [4] 라며 어려워서 무섭다며 비꼬는 의견에 동의하듯이, “옛날 게임 특유의 (비속어) 난이도”라는 덧글이 달리기도 한다. 개인 블로그의 게임 플레이 리뷰나 유튜브 영상에서도 어려움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는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에 걸치는 사이에 출시된 호러 어드벤처 게임에서 어려움을 언급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일례로 <바이오하자드(Biohazard, 1996)>의 경우, 좀비들을 쓰러뜨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한정적인 수의 총알로 인해 적절한 타이밍에 총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게이머들 사이에서 높은 난이도로 인해 불만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사이렌>은 이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리플레이 디자인에서 비롯된 불쾌함 이 게임의 어려움은 무엇이 다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사이렌>이 채택하고 있는 게임 디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이렌>은 공포 뿐 아니라 불편함과 불쾌함을 유발하는 플레이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사이렌>은 가장 기본적인 상호작용 시스템 층위에서부터 불편함을 유발한다. 우선 게임 내 상호작용 버튼을 누르게 되면 게이머가 취할 수 있는 행위를 선택지로 제공하는데, 이를 통해 주변 NPC 부르기(기본 기능)나 아이템 수집, 오브젝트와의 상호작용 행위가 가능하다. 하지만 오브젝트에 다가서도 이 오브젝트와 상호작용하라는 별도의 지시는 나오지 않는다. 앞에 있는 오브젝트가 상호작용이 가능한 것인지, 어느 정도까지 가까이 가야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 수집이 가능한 물건인지, 심지어 이것이 게임을 클리어하는 데에 필요한 것인지조차도 게이머는 직관적으로 알 수 없다. * (<사이렌>의 상호작용 시스템. 거리나 위치에 따라서 상호작용 가능한 개수가 달라진다.) 이러한 시스템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게임 플레이 경험은 어렵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게임의 전반적인 클리어 과정은 시인과의 추격 관계 하에 이루어진다. 게이머는 시인을 피하면서 스테이지 내에서 시인의 행동을 파악하고 [5] , 은신해서 피하며, 스테이지를 탐색하는 식으로 퍼즐 풀이를 해 나간다. 불친절한 지도 시스템은 우리가 찾고 있는 클리어 조건이 어디에 있는지도, 플레이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보여주지 않는다. 불충분한 정보 안에서 게이머는 시인을 피하면서, 혹은 시인을 무력화시켜 가면서 게임 클리어를 위한 단서를 수집해야 한다. 다만 주인공은 시인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다. 일시적으로 쓰러뜨리더라도 시인은 다시 부활한다. 결국 주인공은 시인에게 죽고, 게이머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방금 전까지 쫓아오던 시인의 위치와 행동 패턴은 다시 리셋 되어 주인공 앞에 나타나고, 왔던 길을 다시 지나면서 아까 살펴보지 못한 곳을 다시 살핀다. 점차 공포를 유발하던 시인의 존재는 공포의 표상이 아닌 비대칭적 관계에서 비롯된 장애물로 여겨지게 된다. 게이머가 받는 시인이나 게임 분위기로부터의 공포는 점차 사라진다. 이는 <사이렌>이 채택하고 있는 기본적인 게임 플레이 디자인이 바로 ‘반복’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플레이를 통해 <사이렌>의 공포 경험은 우리가 다른 게임을 하며 경험하는,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목표지향적 놀이로 변화한다. 즉, <사이렌>의 게임 플레이 경험은 다시 하기, ‘리플레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때 공포는 장애물을 극복하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목표지향적 놀이의 부차적인 요소가 되어 어려움을 유발하는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 이미 이 시점에서 공포는 없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의 리플레이는 공포를 피로, 지루함 등의 불쾌함으로 만든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공포에서 변질된 어려움으로 인한 불쾌한 게임 경험을 얻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게이머에게 여전히 최종적으로 게임을 클리어하겠다는 목표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서튼 스미스는 다양한 유형의 놀이와 게임의 동기 부여 요인에 부정적 감정 또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놀이가 단순히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 아닌, 이러한 감정들을 재인식하여 지배하고 있는 부정적 제약을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보았다(Sutton-Smith, 2008). 즉, 공포에서 불쾌함으로 변화하는 게이머의 부정적 감정 경험은 게임을 계속해서 할 수 있게 만드는 동기의 일체인 셈이다. 게이머는 불쾌함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플레이하게 되고, 비로소 자신에게 주어진 불쾌함의 근원을 해결했을 때 성취감과 함께 게임을 플레이했다고 느끼게 된다. 즉, 게이머가 겪는 <사이렌>의 경험은 부정적 감정을 재인식하고, 정서적 기술을 연마하여, 예측할 수 없는 혹은 직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의 개발과 실천을 동반하는 시뮬레이션으로써 놀이가 된다(Henricks, 2015a). 난잡한 내러티브 해독 게임 리플레이 디자인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사이렌>의 내러티브는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이 게임의 내러티브 진행은 극도로 제한된 정보 제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게이머는 일반적 방식으로 주어진 스테이지를 플레이하면서는 게임의 스토리를 파악하기 어렵다. <사이렌>은 그저 스테이지가 시작하면 게이머에게 클리어 조건을 제시하고 방치한다. 제한된 내러티브는 다른 스테이지 내에서 스토리 관련 아이템을 수집하거나 다른 스테이지의 정보(맵 이름, 등장인물 등)와 조합해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을 반복해도 플레이어는 게임의 기본적인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 이유는 게임 플레이가 여러 캐릭터를 통해 진행되고, 인물 사이의 관계들이 스토리 이해에 중요하게 작용하며, 이 인물들로 조합되는 사건들이 다양한 시간대를 오가며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런 난잡함은 게임 내러티브 이해 자체를 방해한다. 게이머가 느끼는 답답함과 의문은 특정 엔딩에 도달하더라도 풀리지 않기도 한다. 이처럼 게이머가 겪는 두루뭉실한 내러티브 참여는 불쾌한 게임 경험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 (시간대, 등장인물을 표시해주는 ‘링크 내비게이터 시스템’) 또 하나의 난점은 ‘종료조건’이다. <사이렌>의 종료조건은 일반적으로 다른 게임에서 볼 수 있는 클리어 요건이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이 게임에서의 종료조건은 한 스테이지에 2가지가 존재한다. 2번째 종료조건은 해당 스테이지가 아닌 다른 스테이지에서 특정한 조건을 달성하거나 아이템을 수집해야만 등장한다. 이 때문에 게이머는 다른 종료조건을 가진 채로 이전에 플레이한 스테이지를 다시 플레이해야만 한다. 앞선 게임 플레이 디자인이 의도하듯이, <사이렌>은 리플레이 유도를 내러티브 전개에서도 활용한다. 종료조건 또한 게임 플레이와 내러티브 디자인이 의도한 불편함을 유발하는 중요한 장치인 셈이다. * (<사이렌>의 종료조건. 특정 위치에 도달하는 것이 기본 목표이다.) 이렇게만 보면 이 게임은 마치 게이머에게 불쾌감만을 주기 위해 디자인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내러티브 참여의 불쾌한 경험이 단순히 재미나 즐거움을 반감시키기 때문에 놀이로 기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게이머가 계속해서 내러티브에 참여하며 플레이하게 되는 것은 결국 몰입에 의해 이루어진다. 허나 몰입은 지루함과 불안 사이의 중간 지점에 존재하는 상태로 긍정적 감정 경험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Henricks, 2015b; Calleja, 2022). <사이렌>의 내러티브 경험은 난해, 불편, 불쾌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수반하지만, 게이머는 내러티브를 이해하기 위한 정보를 종합하여 앞으로의 플레이에 반영한다(Henricks, 2015b; Calleja, 2022). 게이머가 겪는 불편하고 불쾌한 내러티브 참여 과정 그 자체는 놀이 과정의 한 단계로 기능하게 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게임 시스템은 ‘아카이브’이다. 여러 게임에서도 아카이브는 존재하지만, <사이렌>의 아카이브는 내러티브 이해를 위해 필수적이다. 특정 아이템에서 도출되는 텍스트는 게임 내 별도의 기능인 아카이브에 저장된다. 아카이브는 게임 설정이나 스토리의 일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당연하게도 아카이브만으로 내러티브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파편화되어 있는 아카이브를 모으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며 얻는 내러티브 정보와 이어 붙이는 작업을 통해 비로소 <사이렌>의 스토리는 이해할 수 있는 글이 된다. 남아 있는 불쾌함을 해소하기 위한 게임 텍스트 밖 놀이 정말 놀라운 사실은 두 가지 방향(게임 플레이 & 내러티브 이해)에서 게이머가 열심히 노력해도 진정으로 <사이렌>을 완전히 즐길 수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도 이 게임의 모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스토리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스테이지의 모든 부분을 가 보고, 상호작용해 보고, 모든 텍스트를 정리해서 자기 나름의 설정집을 만들어본다면 혼자 힘으로도 가능하다. 이쯤 되면 이 게임은 사실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가진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사이렌>이 그만큼 치밀하고 방대하게 짜여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독특한 파고들기 요소가 가미된 것은 맞지만, 게이머에게 불편함을 유발해 어려움을 겪게 하고 불쾌한 감정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은 게임 디자인 의도된 결과이다. 그러므로 한 명의 게이머가 이 게임을 전부 파헤치길 바랬던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사이렌>에 관한 게임 플레이 공략과 내러티브 이해를 위한 커뮤니티 실천이 곳곳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일본의 경우, 인물이나 시계열순으로 시나리오 공략을 작성하거나 [6] , 아카이브만을 위한 공략 등 [7] 이 존재했고, 한국의 경우도 시스템부터 스테이지 순서대로 공략을 작성하는 등의 노력 [8] 들이 있었다. 물론 공략이 활발했던 것이 당시 <사이렌>만의 특징이라고 할 순 없다. 여기서 또 하나의 독특한 양상은 난잡한 내러티브를 정리하려는 실천이 공략뿐만 아니라 2차 창작까지 이어지기도 했다는 점이다. 일본의 <사이렌> 팬 페이지인 ‘레무리아(Lemuria)’ [9] 는 <사이렌>의 세계관, 설정, 시나리오, 등장인물 등을 활용해 실사 영상을 만들어서 이를 보고 문제를 해결하는 웹게임처럼 구성되었다. 물론 그 방식은 여전히 <사이렌>과 같이 비-선형적이지만, 게임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장치들을 게임 텍스트 밖에서 즐길 수 있도록 마련해 두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이처럼 <사이렌>을 둘러싼 게임 텍스트 밖 실천들은 엔딩에 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산발적인 내러티브가 어떻게 선형적으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공략이나 관련 글을 접하면서 게이머는 자신의 놀이 반경을 넓혀간다. 게이머는 이런 외부 공략을 보고 자신의 플레이에 반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게임이 끝난 후 다시금 게임 속 이야기를 즐긴다. 즉, 놀이는, 매직 서클과 같이 제한된 영역이 아닌, 분리된 경계가 없고, 게이머 자신만의 해석 프레임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 어떠한 행위라도 놀이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Calleja, 2022). <사이렌>에서 겪은 불쾌한 플레이 경험은 게임이 끝난 후의 일상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메타게임 플레이 과정 중 하나이다. 나가며 <사이렌>의 플레이는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불쾌함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놀이이다. 게이머는 게임 디자인이 의도한 리플레이를 피하고자, 제한적인 정보를 효율적으로 조합하여 공략을 찾아간다. 이러한 플레이 속에서 접하게 되는 내러티브는 산발적이고, 난잡하다. 나아가 같은 스테이지를 강제적으로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게이머는 <사이렌>을 즐기기 위해 타인의 공략을 참조하거나 스토리가 정리된 글 또는 영상을 보는 등의 행위를 통해 메타적 실천을 행한다. 이 사이클이야말로 <사이렌>이 제시하는 부정적 감정 경험으로서 놀이이다. 물론 이는 모든 게이머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수수께끼와 같은 구조에서 파고드는 재미를 느끼거나, 게임이 제시하는 불편함조차 도전 욕구를 자극하는 플레이 요소로 여겨질 수도 있다. 또 놓쳐서는 안 될 지점은 <사이렌>이 제공하는 불쾌한 게임 경험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놀이는 아니라는 점이다. 서튼 스미스나 헨릭스가 말하듯이, 놀이는 모든 감정 경험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특정한 놀이는 긍정적 감정 추구가 아닌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생존하는 놀이로 존재해왔다(Henricks, 2015a). 그러나 본고는 우리가 이 게임에 대해서 왜 어렵다고 느끼고, 또 남겨진 평가에서 왜 자신의 불쾌했던 경험을 표출하는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해석을 덧붙여보고자 했다. 비단 이러한 놀이 양상은 <사이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이렌>을 살펴보고자 했던 출발점은 세간의 평가에 녹아 있는 부정적인 경험에 대한 단상이었다. [10] 이 측면에서 여러 게임에 대한 평가를 찾아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순수하게 특정 게임의 안티로서 비난하는 글들이나 코멘트를 제외하고도, 게이머들은 종종 부정적이었던 게임 경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특정 게임에 대해 자신들의 의견을 순간의 분노나 불쾌감의 표현을 위해 표출하면서도 ‘그래서 재미없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무용담처럼 ‘난 이런 점이 어려웠고, 되게 힘들고, 그거 때문에 불쾌했지만, 이젠 클리어했지.’와 같은 발언들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의 의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여러 불특정 다수와 이를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상호간의 의견을 지속적으로 교환해 나간다. 게이머들은 플레이 당시 부정적이었던 자신의 게임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그 경험을 게시글이나 코멘트, 영상으로 남기고, 이 속에서 플레이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창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필자는 지금 이 현상에 대해 관찰하고 있고, 여러 아이디어를 정리해보고자 시도하고 있다. 이 글 또한 그 과정 중 하나다. 아직은 엄밀하게 ‘부정적 게임 경험’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여러 이론적 자원을 바탕으로 이러한 현상을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제언해 보며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Calleja, G. (2022). Unboxed: Board game experience and design. The MIT Press. Henricks, T. S. (2015a). Play as experience. American Journal of Play, 8(1), 18-49. Henricks, T. S. (2015b). Play and the Human Condition.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Sutton‐Smith, B. (2008). Play Theory: A Personal Journey and New Thoughts. American Journal of Play, 1, 80-123. 참고자료 SCEジャパンスタジオ. (2003). サイレン(SIREN). [Game]. 東京, SONY. [1] 네이버 지식인과 같은 형태의 야후 재팬 질문 사이트이다. [2] https://detail.chiebukuro.yahoo.co.jp/qa/question_detail/q1011257965 [3] https://tamane-pearl-survive.com/%E5%90%8D%E4%BD%9C%E3%83%9B%E3%83%A9%E3%83%BC%E3%82%B2%E3%83%BC%E3%83%A0%E3%80%8Csiren%E3%80%8D%E3%81%AF%E4%BD%95%E3%81%8C%E9%9B%A3%E3%81%97%E3%81%84%E3%81%AE%E3%81%8B%E8%A7%A3%E8%AA%AC/ [4] https://bbs.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2209319?m=humor&t=now [5] 여기서 ‘환시’라는 적의 시야를 하이재킹하는 시스템이 사용된다. 이 시스템 또한 <사이렌>의 매우 독특한 시스템이지만, 이번 분석에서 환시는 <사이렌>이 의도하는 플레이에서 어려움을 가미해주는 조미료에 가까웠다. [6] http://kremnant.html.xdomain.jp/siren/siren-character.html [7] https://niwaka-games.com/2018/05/15/2466/ [8] https://blog.naver.com/gamedonga/223752058889 [9] https://nakadararirurero.wixsite.com/lemuria-sirenda [10] 물론 그 이후 필자는 직접 게임을 해보면서 납득할 수 있는 지점과 그러한 점들이 모여 이 게임을 계속해서 플레이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Tags: 게임디자인, 난이도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수진 게임연구에 발을 들인 대학원생입니다. 지금은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첨단종합학술연구과에서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최근엔 게임을 매개로 한 다양한 게임 경험과 일본 내 서브컬처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글 쓰는 건 여전히 어렵습니다.

  • 호러를 즐기는 보통의 방식

    사실 호러 게임은 꽤 마이너한 장르에 속한다. 물론 좀비물의 성격을 차용한 <더 라스트 오브 어스>처럼 장르적 요소를 가져오거나, <바이오 하자드> 시리즈나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처럼 본격적으로 호러 게임을 표방하는 AAA 게임이 없던 것은 아니다. < Back 19 GG Vol. 24.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ngsoo Park Majored in art studies as an undergraduate and is currently studying media cultural studi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Yonsei University. Writes primarily about film, while keeping a curious eye on visual culture broadly—art, games, and broadcasting among them. Also a film critic, host of the podcast Café Critique, and an organizer of community film screenings.

  • ​Oldies But Goodies - 클래식 게임의 조건

    그래서 다시 클래식 게임이다. 그의 분투는 눈물겹다. 이 보다 더 순수할 수 없을 그 시대만이 줄 수 있는 순정의 게임 경험과 이를 통한 자수성가형 성취감을 제공한 클래식 게임은 게임 미디어의 '형식'으로서 명예의 전당에 봉인되는 순간, 수 많은 아류작과 온전한 장르의 모태가 됨으로써 태를 바꾸어 '미디어'로 존재한다. 이렇게 미디어로 명명된 클래식 게임은 상징으로 일반화되고, 상징을 통해 제시된 '기대'는 클래식 게임 고유의 경험을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재현하고 확장한다. < Back Oldies But Goodies - 클래식 게임의 조건 02 GG Vol. 21. 8. 10. 안타깝지만 게임은 나이에 우호적이지 않다. 생각보다 손이 늦게 움직일 때, 초점이 맞지 않아 어둠 속의 적을 보지 못할 때, 무엇보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적에 스릴보다 심장이 더 걱정되기 시작할 때, 게임은 더 이상 친숙한 존재가 아니다. 이럴 땐 나도 모르게 신랄한 비평으로 게임을 탓하며 나이를 감춘다. 그래픽만 근사하고 코어가 약하다는 둥, 영혼 없는 모방작이라는 둥, 그 다음은 어김없이 화려한 '라떼'의 기억, 고통스럽지만 보람찼던 모험을 회상한다. 모눈종이에 매핑하던 순간들, 계단 반 칸에서 떨어져도 죽던 세상 허약한 주인공의 모험담, 늘 그렇듯 어디론가 납치된 여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쏟아부은 수 많은 시간들, 고독한 모험의 유일한 동반자 개 한 마리를 포기해야 하는 사악한 선택지로 인한 딜레마, 그리고 그 혹독한 시험에서 결국 만나게 되는 엔딩의 충만함까지. 잠깐의 플래시백으로 '라떼'의 영광을 찾아 여전히 생생한 기억 속 게임에 다시 한 번 말을 건넨다. 그런데 과거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몇 가지 기술적 단계가 필요하다. RF 단자밖에 없는 콘솔 게임기를 RGB 단자 TV로, 나아가 hdmi 단자의 TV에까지 연결한다. 물론 권하고 싶지는 않다. 8bit 게임기를 대형 TV에 연결시켜 실시간 시력테스트를 하는 기분은 결코 유쾌한 플레이 경험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과거의 유명한 게임들은 휴대용 게임기, 스팀이나 콘솔 온라인몰에서 리마스터 버전 등으로 출시된다. 내게는 심전도 검사와 같은 최신 게임을 포기하고, 이제야 ‘진짜’ 게임을 플레이한다. 하지만 1시간 남짓, 우리의 대화에 노이즈가 발생한다. 본질에 충실하다 보니 최신 게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편함이 눈에 거슬리고, 군더더기 없다 보니 뼈대만 있는 게임 구조와 단순한 스토리에 지루하고, 더 이상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운 도트 그래픽의 조악함이 걸림돌이 된다. 이쯤되면 우리가 하는 것이 대화일 수 있을까. 게임 잡지나 웹진에서 다룰 법한 '역사에 남을 100대 게임', '놓쳐서는 안될 고전 게임' 같은 특집도 약효는 일시적이다. 클래식 게임의 역사적 의미, 장점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개인사적 경험담에 공감하면서도 적극적인 플레이 경험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클래식에 대한 존중이 게임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영화 잡지를 들춰도 비슷한 취지의 기사는 널려 있다. 문학이나 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리스트를 꼼꼼히 적으며 영화들을 찾아보는 씨네필이나 클래식 음악 매니아는 흔하다. 문학에서는 고전 읽기가 일반 대학의 교양과목일 정도로 자연스럽다. 그에 비해 공감과 행위의 괴리가 게임만큼 분명한 장르가 또 있을까. 물론 이러한 차이는 컨텐츠가 의존하는 기술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원형적 기술은 가장 오래 전에 등장했지만 지금도 차이가 없는 반면, 파생되어 발전한 기술은 등장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지만 지금도 그 변화가 급격하다. 의존하는 기술이 변화함에 따라 컨텐츠 변화 속도도 상이하다. 소설은 수백 년 동안 큰 변화가 없지만, 영화는 몇 십년만에, 게임은 몇 년 만에 그 큰 변화를 겪는다. 결국 기술적 변화가 크면 클수록 컨텐츠의 라이프 사이클은 짧아진다. 게임은 의존 기술과 변화에 있어 가장 격렬한 컨텐츠다. 당연히 게임에도 고전 혹은 클래식 게임이 존재한다. 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만한 게임들의 리스트는 쟁쟁하다. 하지만 영광은 거기까지다. 여전히 현역으로 자부하지만, 환호하는 관중은 없다. 이유는 많다. 최신 게임이 더 접근하기 편하고, 더 진화된 시스템의 경이가 있고, 황홀한 그래픽과 스토리의 스케일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클래식 게임은 게이머들에게 많은 추억을 남겼으며, 지금도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하지만, 더 이상 플레이를 통해 소통할 수 없는, 그저 우리 모두의 첫사랑일 따름이다. 한때 우리의 모든 시간과 정열을 바쳐 연모했으나, 이제 다시 만나 뭘 해볼 수 없는 까마득한 과거의 연인이다. 문학과 영화가 빛바랜 소설을 읽고, 흑백 영화를 보면서 클래식에 대해 바치는 실천적 존중이, 클래식 게임에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플레이되지 않는 무용담은 공소한 '라떼의 영광'일 뿐일까. ‘로그라이트’라는 명명(命名) 2017년 스팀에서 ‘앞서 해보기’로 처음 등장한 〈Dead Cells〉(Motion Twins)은 여러모로 화젯거리였다. 8bit나 16bit 시절을 떠올리는 도트 그래픽, 몇 개의 키로 가능한 플랫폼 액션의 경쾌함, 단순하게 느껴질 정도로 직관적이지만 진행할수록 매력적인 게임 시스템 등 클래식 게임 요소가 강한 동시에 최신 게임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스타일, 조작 그리고 편의성을 갖추고 있었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OB들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완벽한 클래식 게임의 플레이 경험을 제공하는 한편, 게임에 입문한 NB들에게는 새로운 감각의 경험을 제공했다. 이런 특색 때문에 이런 류의 게임을 ‘레트로 게임’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레트로 게임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레트로 게임은 클래식 게임을 현대라는 거울에 비춘 하나의 상(象), 즉 존재할 수 없는 클래식 게임에 대한 회고적 경험을 거울을 통해 현전으로 구성한 상이다. 따라서 레트로 게임은 시간의 퇴화를 견딘 여전히 건재하는 영광이 아닌, 영광을 추억하는 이를 위한 아카이브이며, 과거에 머물던 영광의 부활이 아닌, 그 영광은 과거에만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역설하는 레퍼런스 없는 시뮬라끄르다. * 〈Dead Cells〉. 이미지출처: 스팀 공식페이지. 물론 〈Dead Cells〉의 가치는 클래식 게임을 재현함으로써 그 위상을 확인 사살했다는 데에 있지만은 않다. 〈Dead Cells〉은 장르적으로 로그라이트(Roguelite)에 해당된다. 이러한 장르명은 21세기 초반까지 널리 사용되고 우리에게 익숙한 액션, RPG, 전략 등과는 현저히 이질적이다. 로그라이트 장르의 명명은 1980년 출시된 〈Rogue〉(Michael Toy & Glenn Wichman)에서 출발한다. 〈Rogue〉는 당시 유행한 던전 크롤러(dungeon crawler)를 기반으로 두 가지 놀라운 시스템을 시도했다. 플레이 캐릭터의 ‘영구적 죽음(permadeath)’과 시작할 때마다 달라지는 맵 시스템이 그것이다. 그로 인해 기존의 모눈종이 지도 제작 실력은 도움이 될 수 없었으며, 플레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캐릭터 사망에 대한 중압감은 가중되는 가혹한 시스템이었다. 금지옥엽 키운 캐릭터가 죽는 매 순간, 키보드와 함께 게이머의 영혼도 파괴되곤 했다. PTSD를 극복하려면 상당한 치유의 시간이 필요한 〈Rogue〉와 같은 스타일의 게임을 이후 '로그라이크(Roguelike)’라 불렀으며, 이후 캐릭터의 죽음과 함께 아이템이나 스테이터스를 완전히 압수하는 대신, 약소하지만 남겨주는 적선(積善)의 형태로 변화하면서, 'like' 대신 ‘lite’를 붙여 ‘로그라이트’라는 장르로 자리잡는다. 그런데 '로그라이트’라는 장르명은 개발사의 마케팅 기믹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회학자 루만(Niklas Luhmann)은 조직 이론의 ‘느슨한 커플링’, ‘조여진 커플링’ 개념을 빌어 반-본질주의 미디어(media)/형식(form) 개념을 제시했다. 모래사장의 모래와 그 위를 걷는 이의 발자국처럼 루만의 미디어/형식은 ‘느슨함/조여짐’의 상대적 정도를 통해 규정된다. 모래사장에 있는 느슨한 모래들이 '미디어'라면, 그 위를 걸어 조금 단단하게 결합된 발자국이 '형식'이다. 다만 이 개념쌍은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느슨한 커플링' 앞에서는 '형식'이 되고, 더 '조여진 커플링' 앞에서는 '미디어'가 된다. 루만의 미디어/형식 개념을 이제 문학과 게임에 적용해 보자. 문학과 『햄릿』, 게임과 〈Rogue〉. 문학과 게임을 문화콘텐츠로서 기여하는 '미디어'라 할 때, 개별 작품 『햄릿』과 〈Rogue〉는 각 미디어의 요소를 더 조여 커플링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햄릿』은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직ㆍ간접소비되지만, 〈Rogue〉는 대개 -이 글에 인용되는 방식처럼- 간접소비될 따름이다. 즉, 게임기자들이 특집 기사를 쓰고, 평론가들이 클래식 게임의 화려한 영광에 열변을 토하지만, 영광의 게임을 애써 플레이하려는 이는 적다. 그래서 클래식 게임은 게임이라는 '미디어' 안에서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소비되지 않는 한 존재 의의는 없다. 그렇다고 클래식 게임의 참패(慘敗)는 아니다. 대신 '로그라이크/라이트'가 있다. 〈Rogue〉는 더 이상 플레이되지 않지만, 그를 모태로 하는 '로그 같은' 혹은 '쉬운 로그'들이 여전히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OB와 NB는 기꺼이 그들을 소비한다. 게임이라는 모래사장에서 〈Rogue〉는 모래를 단단하게 해준 첫 발자국이라면, 이제 더 많은 게임들이 그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보태어 보다 단단한 발자국의 결합을 만든다. 결국 게임이라는 미디어에서 형식으로서의 〈Rogue〉는 더 이상 소비되지 않음으로써 존재 의의를 상실했지만, 수많은 '로그라이크/라이트' 게임들이라는 '형식'과 새로운 쌍을 이루며 '미디어'로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왜 게임에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게임은 소프트웨어라는 '미디어'에 대해 '형식'인 만큼, 기능에 대한 창의성 대신, 코딩에 대한 원천 가치를 존중한다.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통한 기능의 재현은 게임에서도 가능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해커 문화라는 지평 위에서 게임은 저작권보다는 코드를 공유하고, 경쟁적으로 코드를 개선해서 양질의 게임을 만드는, 게임만의 독특한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태도를 지닌다. 그 결과 게임은 여전히 90퍼센트 이상의 레거시와 10퍼센트 안팎의 독창성 위에 존재한다. 하나의 형식으로서 개별작품이 또 다른 형식의 결합 요소를 수용할 때 잘하면 ‘오마주’ 잘못하면 ‘표절’이 되는 다른 미디어와 달리, 게임 미디어에서 레거시의 수용은 또 다른 명작의 시발점이 된다. 그래서 게임은 다른 모든 미디어에 비해 자유롭다. 여전히 모든 어른으로부터 필요한 것들을 흡수하여 더 빨리 성장하려는 아이처럼 본능적이며 원초적이다. 모든 원초적인 것들은 경외의 대상이 되기 쉽다. 한때 생존경쟁에 밀려 아프리카 북단에서 쓸쓸히 멸종되었다는 네안데르탈인 대해 매료된 적이 있으나, 사실 그들은 멸종이 아닌, 호모 사피엔스와의 혼종 교배를 통해 여전히 우리 유전자 속에 남아있다고 한다. 결국 사라졌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여전히 존재하는 네안데르탈인의 노스탤지어처럼, 다양한 언술 속에 재배치되는 작금의 클래식 게임은 '형식'이 아닌, '미디어'로서 새롭게 경험될 수 있다. 기대와 커뮤니케이션 개별 게임이라는 '형식'은 기술 발전과 함께 빠르게 소비 영역에서 이탈한다. 소비되지 않는 게임은 대화의 소재가 되기 어렵고, 커뮤니케이션은 쉽게 중단된다. 루만의 이론에 따르면 커뮤니케이션은 자아와 타아가 마주해 발생하는 '이중 우발성(double contingency)' 위에서 구축된다. 자아는 타아가 어떻게 대응할 지 확정할 수 없는 우발성의 조건에서 발신하고, 타아 역시 이 발신이 지닌 가능한 의미의 확정 없이 수신한다. 양쪽에서 발생하는 우발성 속에서 각자에게 기대되던 피드백이 돌아올 때에만 커뮤니케이션은 성립한다. 이중 우발성이 만드는 가능성의 확장 속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가능성의 확장에서 발생하는 복잡성에 대한 감축이다. 개별 작품이라는 형식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역시 복잡성의 감축을 요구한다. 사회학자 파슨스(Talcott Parsons)에 따르면, 이중 우발성의 복잡성 감축은 공통의 경험과 지평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Rogue〉를 플레이한 경험이 있다면, 커뮤니케이션 성립은 수월하다. 하지만 만일 한쪽의 경험과 다른 한쪽의 간접 체험만으로 이뤄진다면, 커뮤니케이션에서 이 복잡성의 감축은 불충분하다. 경험자가 던진 경험의 감정들이 간접 체험자에게는 이해될 수 없으며, 간접 체험자의 표면적 기술(description)은 경험자에게는 공소한 반응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복잡성 감축을 위한 장치가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타아의 대응을 완전한 우발성의 영역에 두지 않고, 비록 아직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가능한 결정의 범위를 예상하는 것이다. 타아에 의한 피드백에 대한 자아의 대응 역시 마찬가지로 아직 결정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정해진 범위 안에서 이뤄지길 기대한다. 많은 유사한 커뮤니케이션이 시도되고, 성립하고, 실패하는 과정에서 가능성을 한정하는 의미에 대한 반복적 지시가 등장한다. 즉, 반복적 지시에 따른 감축을 통해 ‘상징’이 사용되고, 상징에 따른 일반화를 통해 자아와 타아 모두 가능성의 영역에 대해 ‘기대’를 통한 복잡성의 감축이 가능해진다. 1994년부터 개발된 〈Ancient Domains of Mystery〉를 플레이한 게이머와 2006년 등장한 〈Dungeon Crawl–Stone Soup〉를 플레이한 게이머가 마주한 경우를 가정해 보자. 각기 상대 게임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커뮤니케이션은 각자의 경험 위에서만 시도된다. 커뮤니케이션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복잡성을 줄여야 하기에 각기 상대의 발신과 수신에서의 탐색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 과정이 수월하지 않을 때 커뮤니케이션은 실패한다. 만일 이들이 상대가 어떤 범위 내에서 발신 및 수신할 지를 한정하는 기대가 있다면, 복잡성의 감축을 위한 탐색 과정은 한결 단축된다. 이 역할을 하는 것, 즉 커뮤니케이션이 성립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미디어로 기능하는 ‘로그라이크’이다. 각자 상대의 경험이 ‘로그라이크’라는 범위 위에서 의미를 가질 것임을 기대하고 행위하기 때문에, 상대 게임을 정확히 알지 못해도 ‘로그라이크’라는 명명이 가진 의미의 한정을 통해 수신/발신 과정에서 생산된 복잡성을 감축하고 형식인 게임에 대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다. * 〈Ancient Domains of Mystery〉(왼쪽)와 〈Dungeon Crawl–Stone Soup〉(오른쪽). 이미지출처: 게임 공식 홈페이지. '형식'이 아닌, '미디어'로서 역할하는 클래식 게임의 존재 양상은, 이처럼 새로운 명명에 따른 기대를 통해 게임을 둘러싼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할 수 있도록 복잡성의 감축을 유도한다. 게임을 둘러싼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형성된 의미 시스템이 곧 게임 문화다. 문화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현현하고, 그를 통해서만 유지된다. 다양한 문화적 소재들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커뮤니케이션'될 때만 문화로서 의미가 정위(定位)된다. 따라서 우발성의 복잡성 감축을 유도하는 미디어로 존재 양식을 갖춘 클래식 게임은 게임문화의 유지와 확장에 기여하는 새로운 위상을 확립하게 된다. 게임문화와 클래식 게임 지금까지 클래식 게임을 통해 '기대'가 커뮤니케이션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았다. 물론 ‘기대’는 클래식 게임을 통해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클래식 게임이 게임에 대한 긍정적 값을 지닌 커뮤니케이션의 기대로 존재한다면, 역으로 부정적 값을 지닌 기대도 존재할 수 있다. 비호감 게임리뷰에 자주 등장하는 ‘한국형 양산게임’이라는 표현은 원래 사전적 의미에서는 '한국 게임개발사에서 대량생산된 게임'을 중립적으로 통칭할 뿐이지만, 커뮤니케이션에 작동하는 양상은 이와 달리 매우 부정적이다. 한국형 양산게임이 커뮤니케이션에 제공하는 '기대'는, 장르의 개성이나 세계관의 고유성은 없고, 비즈니스 모델만 강조된, 개발사의 수익률을 위해 고도의 사행성을 장착한 게임이다. 즉, 한국형 양산게임에 대한 '부정적 기대' 역시, 로그라이크의 '긍정적 기대’처럼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존재하는 우리 게임문화의 또 다른 양상을 규정한다. 한국형 양산게임만이 아니다. 게임과는 어울리지 않는 ‘작업장’이라는 표현이나 경험이라는 게임의 본원적 규정과 어울리지 않는 ‘자동전투’ 시스템, 그리고 온라인 게임을 매개 및 무대로 하여 벌어지는 커뮤니케이션에서 발견되는 차별적이고 공격적이며 상호혐오로 가득한 언술 등 이 모든 것은 부정적 값을 지닌 '기대'로서 커뮤니케이션을 성립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며, 그렇게 성립하는 커뮤니케이션 또한 우리 게임문화의 일면이다. 게임문화는 단순히 세기의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게임평론가의 극찬을 받는 소외된 걸작들,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몇 편의 인디게임을 통해 형성될 수는 없다. 게임을 둘러싼 커뮤니케이션과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기대’의 지형이 게임문화의 현 주소를 규정한다. 게임과 관련한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게임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 원인이라 말하곤 한다. 게임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문제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게임문화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게임문화는 오직 게임을 둘러싼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존재한다. 여기에는 긍정적 '기대'도 물론 존재하지만, 동시에 부정적 '기대', 심지어 독소(毒素)의 '기대' 또한 포함된다. 면피의 가능성이 존재의 양상을 바꿀 수는 없다. 변화는 오직 커뮤니케이션에서 복잡성의 감축과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대'의 성쇠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그래서 다시 클래식 게임이다. 그의 분투는 눈물겹다. 이 보다 더 순수할 수 없을 그 시대만이 줄 수 있는 순정의 게임 경험과 이를 통한 자수성가형 성취감을 제공한 클래식 게임은 게임 미디어의 '형식'으로서 명예의 전당에 봉인되는 순간, 수 많은 아류작과 온전한 장르의 모태가 됨으로써 태를 바꾸어 '미디어'로 존재한다. 이렇게 미디어로 명명된 클래식 게임은 상징으로 일반화되고, 상징을 통해 제시된 '기대'는 클래식 게임 고유의 경험을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재현하고 확장한다. 폭넓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클래식 게임과 만나고, 긍정하고, 새롭게 다른 방식으로 욕망한다. 이렇게 클래식 게이머의 첫사랑은 라떼의 '추억팔이'가 아닌, 우리 모두의 첫사랑이 되고, 게임의 원형적 경험으로서 게임문화의 일부가 된다. 화려한 영광의 수사로 치장되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순간, 무대에서 퇴장만이 남은 순리에 따르는 대신, 클래식 게임은 '미디어'로서 자신을 추종하는 수많은 '형식'들을 이끌고, 독소의 '기대'와 싸우며 새로운 희망의 기대를 세상에 퍼뜨린다. 그렇다면 나도, 최종 보스까지는 아득하지만, 나이에 우호적이지 않은 게임세상에 사자후를 토하며 그 오랜 세월을 버틴 클래식 게이머의 노익장을 과시하련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평론가) 박상우 몇몇 대학과 대학원에서 게임관련 강의를 했으며, 몇몇 잡지와 신문에 게임 관련 칼럼을 연재했고, 몇 권의 게임관련 책을 썼으나, 내가 산 책이 더 많다. 게임제작 및 퍼블리싱 관련 개발사 컨설팅을 하다가 막판에는 게임회사 대표직도 맡았고, 이제는 은퇴했다. 게임 평론가나 게임 전공 교수, 게임 컨설턴트나 게임회사 대표가 아닌 '게임을 참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 게임의 조건 : 게임은 스포츠 종목이 될 수 있는가?

    예들 들어 ‘대통령배 전국 아마추어 이스포츠 대회’, ‘이스포츠 대학리그’, ‘동호인대회’, ‘전국장애학생e페스티벌’, ‘한중일 이스포츠대회’,‘세계이스포츠대회’의 공식 종목들이 궁극적으로 국내 게임 산업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일이다. < Back 15 GG Vol. 23.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Eunkyung Choi Currently Head of the Graduate School of Esports Convergence and Professor of Visual Content Studies at the College of Peace and Liberal Arts, Hanshin University. PhD in Communication, Loughborough University, UK. Formerly Assistant Professor, Department of Esports, Chonnam Techno University.

  • [논문세미나] 옛날 전쟁 비디오게임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려주는 것 : <환경을 위한 역설적 투쟁으로서 레트로 폭력>

    최근 우리는 게임의 문제를 기후/환경 문제와 연결짓는 담론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게임장비와 콘솔에 물질적 자원이 투입될수록 전자폐기물(E-waste) 문제가 더 많이 발생하고, 게이머의 플레이 시간이 늘어날수록 탄소배출량이 늘어난다는 기사들이 적잖이 나오고 있다. 이제 게임 플레이는 거의 환경오염의 문제와 불가분이 되었고, 게임회사 또한 게임을 개발한다면 필연적으로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고려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다. < Back [논문세미나] 옛날 전쟁 비디오게임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려주는 것 : <환경을 위한 역설적 투쟁으로서 레트로 폭력> 31 GG Vol. 26. 8. 10. TEXT: Fernandes, A. (2026). Retro violence as a paradoxical fight for the environment: The nostalgic circular video games economy. Media, War & Conflict , 17506352261421845. 들어가며 최근 우리는 게임의 문제를 기후/환경 문제와 연결짓는 담론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게임장비와 콘솔에 물질적 자원이 투입될수록 전자폐기물(E-waste) 문제가 더 많이 발생하고, 게이머의 플레이 시간이 늘어날수록 탄소배출량이 늘어난다는 기사들이 적잖이 나오고 있다. 이제 게임 플레이는 거의 환경오염의 문제와 불가분이 되었고, 게임회사 또한 게임을 개발한다면 필연적으로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고려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논문 <환경을 위한 역설적 투쟁으로서 레트로 폭력: 향수에 기반한 비디오게임 순환경제>은 이러한 배경에서 최근 ‘레트로 비디오게임의 재유행 현상’이 역설적으로 기후환경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에 주목한다. 통상적으로, 전쟁이나 폭력을 소재로 한 비디오 게임을 한다는 것은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처럼 인식된다. 선행연구 또한 이러한 게임들이 인간의 공격성을 얼마만큼 유발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반복해 왔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이전 연구를 통해, 레트로 비디오 게임이 최신 콘솔로 재출시되거나 스마트폰으로 이식되는 현상이 최소한 ‘물질적 차원’에서는 새로운 게임이나 콘솔의 구매비용을 절감하고 전자폐기물 축적을 낮추는 효과가 있음을 주장한다. 이는 ‘향수의 순환경제(circular economy of nostalgia)’라는 용어로도 요약된다. 겉보기에 환경적으로 유해하게 보이는 (게임에 대한) ‘향수’는 정말 환경보전이나 지속가능성의 가치와 상충할까? 아니면 역으로 해당 가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까? 레트로 비디오게임의 순환경제 구조를 분석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게임 밖에서 벌어지는 물질적 효과와 게임 내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적 실천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이 연구는 폭력적 레트로 비디오게임 안에서 자연이 재현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자연에 어떠한 의미와 행위성이 부여되는지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연구방법과 자료 분석을 위해 이 연구는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을 접근법으로 하며, ‘비디오게임 연구의 객체지향적 접근(object-oriented approach in videogame studies)'을 지향한다. ANT는 자연, 기술, 사회가 갖는 복잡한 관계를 환원주의적으로 설명하지 않기 위해 세 층위 중 어느 영역에도 우선권을 두지 않는데, 이는 전쟁과 비디오게임, 환경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유용한 방법이다. ANT의 주요 특성 중 하나는 기존의 전통적 사회학이 ‘사회적이지 않은’ 요인으로 간주해 왔던 비인간(non-human)적 요소를 사회적 관계형성의 행위자로서 분석하는 것이다. 본디 사회과학에서 ‘행위자(actor)’는 ‘인간 주체’의 행위성을 전제로 한 개념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라투르는 기호학의 행위소(actant)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하면서, “행위하거나, 다른 존재들에 의해 행위성을 부여받는 어떤 것(something that acts or to which activity is granted by others)” 즉 고정된 속성이 아닌 관계적 속성을 가진 개념으로서의 행위자 개념을 제안한다. 라투르의 도식 아래에서 행위성(agency)의 범위는 사회를 넘어 기술과 자연으로 확장되며, 행위자 개념 역시 인간을 넘어서는 관계론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간의 비디오게임 연구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인간’만을 중심에 두어 왔다. ANT를 활용한다면, 게임은 (인간에게 플레이될 뿐만 아니라) 플레이어에게 일정한 힘을 행사하는 행위자의 위상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특히 저자는 ANT의 관점으로 게임을 볼 때, 비디오게임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공간(저자는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문화의 재생산 기제이기도 하다고 설명한다)’으로 이해되는 차원을 넘어설 수 있으며, 게임 내 난이도나 승리 기회 같이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요소들도 문제시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 게임에 대한 ANT적 분석은 게임/플레이어 사이의 구체적인 상호작용 과정은 이 과정에서 어떠한 행위자들이 구성되는지를 주목하는 데 초점을 둔다. 따라서 게임 내적 요소뿐 아니라 게임 외부의 물질적 환경, 게임 플랫폼, 플레이어의 인간관계 같은 게임 외부적 요소까지 모두 포함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 연구는 비디오게임 속 ‘자연’의 출현 방식을 분석하기 위해, 비디오게임 자체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파악한다. 이 ‘네트워크’는 미리 주어지거나 게임의 외부 조건 또는 인간 행위자에 의해서만 일방적으로 결정되어서 게임 속에 재현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게임은 색채, 게임플레이, 시점, 게임에서 능동적으로 작동하는 요소나 수동적으로 배치된 요소, 위계적으로 강조되는 요소, 주변화되는 요소 등 게임을 구성하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연과 기술의 의미를 형성한다. 한편 이 연구는 과학기술학(STS)의 특정 맥락에서 형성된 개념인 ANT의 연합(associations), 필수통과지점(obligatory passage points), 기입 장치(inscription devices) 같은 고전적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이들이 서로에게 무엇을 하는가를 통해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는지를 기술하려는 ANT의 수행적(performative) 요구를 따르고자 한다. 이 연구는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전쟁 서사를 전개하는 대표적 레트로 비디오게임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으며, 분석 대상은 다음 요건 아래서 선정했다: 1) 16비트 이하 콘솔용 레트로 게임(32비트/64비트 기반 게임에 비해 생태적 가치가 높음) 2) 레트로 게임 사이트에서 플레이 횟수가 높은 게임 3) 군사, 총기, 무력 충돌을 주 소재로 하는 게임 4) ‘인간을 넘어서는 자연(more-than-human nature: 생태철학과 인문학에서 인간을 비인간 존재와 동등한 관계망 속 요소로 보는 관점)’의 요소를 포함하는 게임(즉 실내 공간이나 우주를 배경으로 하거나, 지속가능성이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지 않는 포스트아포칼립스 배경 게임은 분석에서 제외). 한편, 본 연구에서 선정한 ‘레트로(retro)’는 개념적 차원에서는 선형적이고 목적론적 시간관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ANT에서는 문제시되는 개념일 수 있으나, 이 연구에서는 ‘오래 전에 제작된 비디오게임’이라는 사전적인 용도로만 사용하고자 한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선정된 분석 대상 게임은 <콘트라(Contra)(1987)>, <배틀 시티(Battle City)(1985)>, <리버 레이드(River Raid)(1982)>의 3가지다. 먼저, 레트로 비디오게임 중 가장 플레이횟수가 높은 <콘트라>는 두 명의 특공대원이 남아메리카의 이름 없는 섬에서 외계인의 침략을 저지하는 컨셉의 런 앤 건(Run and Gun) 액션 게임이다. 스테이지명과 화면 구성 요소는 모두 초원, 설원, 강, 산, 숲 등 자연환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 군사 장비가 배치된 컨셉이다. <배틀 시티>는 플레이어가 전차를 조종하여 적 전차를 파괴하고 자기 기지를 방어하는 방식의 전방향 탑뷰 슈팅 게임이다. 이름에 ‘시티’를 표방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도시를 연상시키는 도로, 인도, 창문 같은 요소는 없다. 게임에서는 파괴 가능한 벽돌 벽, 파괴되지 않는 철벽, 수풀 속에 숨겨진 전차, 이동을 방해하는 빙판 등 여러 자연지형과 장애물이 배치되어 있고 플레이어의 기지가 파괴되거나 목숨을 소진하면 게임이 종료된다. <리버 라이드>는 플레이어가 전투기를 조종하여 강둑이나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적들을 공격하는 스크롤 슈팅 게임으로, 전투기가 추락하거나 연료가 모두 소진되면 게임이 종료된다. 분석: 비자연적인 자연(the unnatural nature)? 먼저 세 가지 게임 중 <콘트라>의 경우를 살펴보자. <콘트라>에서 플레이어의 임무는 자연환경 속에 설치된 적의 기계들을 제거하여 공격적인 인간/기술 행위자들을 정화(cleansing)하는 역할이지만, 플레이어가 적의 장치를 파괴할 때 그것이 놓인 자연환경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자연은 그저 플레이어가 서고 달리고 점프하게 만들어 주는 부동의 지반처럼 보인다. 예외적으로 절벽이나 낭떠러지처럼 플레이어가 점프해야 하는 끊어진 지형이나 낙하하는 바위를 피해야 하는 상황이 등장하는데, 동식물이 아니라 ‘자연’이 이런 상황을 주도한다는 점 또한 인간의 행위가 자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불변의 자연은 결말부에 모든 적을 처치하고 플레이어가 탈출할 때 폭발에 휘말려 불타게 된다. 자연의 파괴란 곧 인간 입장에서 모든 악을 처치했을 때 나오는 긍정적인 결과로 제시되는 셈이다. <콘트라>는 적과 자연을 묶어놓음으로써, 자연 자체의 도덕적 가치가 그곳에 거주하는 존재들의 도덕성과 상호의존적이라는 인식을 구성한다. 결국 <콘트라>에서의 자연은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는 쉽게 파괴되지만 다른 순간에는 어떤 공격에도 영향받지 않는, 인간중심성을 위해 취약성과 불변성을 동시에 부여받은 존재로 프로그래밍된 셈이다. <배틀 시티>의 자연은 좀더 적극적인 역할로 나타난다. 이곳의 자연요소 중 수풀은 적이 숨어있는 위장 요소이고 물과 얼음은 플레이어의 전차 이동을 방해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플레이어가 이들을 피해서 적군을 처치해야 하는 한편, 이들 자연은 결코 플레이어에 의해 파괴되거나 영향받지 않는다. 즉 자연은 인간의 전쟁 목적과 무관하게 존재하면서도 게임 속에서 끊임없이 제약으로 등장하면서 인간 플레이어의 능력이 지니는 한계를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게임에서 인간이 자연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은 벽돌 벽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해체하는 것이지만 그 경우 적의 공격에 더 쉽게 노출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배틀 시티>에서 자연은 인간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중립적 행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연은 인간과 전쟁의 목적에 길들여지지 않으며 오히려 전쟁의 결과, 즉 게임의 승패를 결정하는 힘을 일방향적으로 행사한다. <리버 레이드>는 명확한 결말 없이 영원히 반복되는 루프 구조로 무한히 플레이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사실상 플레이어는 무한정 자연 속에 머물 수 있지만, 강둑과 충돌하거나 연료가 다 소진되는 순간 즉시 게임 오버가 되기 때문에, 무한성을 얻기 위해선 조건이 주어진다. 비디오게임이라는 기술은 자연이 인간과 무관하게 영원히 지속되는 것처럼 상상하게 만들지만, 결국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유한성을 드러내는 셈이다. 또한 강둑 충돌이 보여주듯이 <리버 레이드>에서 자연환경은 플레이 진행을 직접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플레이어가 죽어버리면 그 이후 자연을 결코 목격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무한한 자연은 본질적으로 유한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존재처럼 제시된다. 이러한 자연 속에 플레이어가 계속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료가 소진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전투기에 연료를 보급하는 것 뿐이다. 즉, 인간이 자연과 영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직 다른 자연을 착취해야만 하는 상황이 주어지는 것이다. * 왼쪽부터 <콘트라>, <배틀 시티>, <리버 레이드>의 게임 플레이 장면. (출처: 구글 이미지) 논의: 비디오게임의 인간을 넘어서는 자연(more-than-human nature) <콘트라>, <배틀 시티>, <리버 레이드>에서 등장한 게임 속 자연은 모두 ‘죽은 자연(dead nature)’, 즉 현실에서 경험하는 자연과 같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자연을 의미하고 있다. 게임 속의 자연은 수동적으로 프로그래밍된 배경이면서, 게임 속 게이머의 행위에 따라 변화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 즉, 이들 게임의 자연은 모두 플레이어와의 어떤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형태로 남아 있다. 왜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으며, 이 점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세 게임은 1980년대에 나왔고 당대 프로그램 기술의 제약 때문에 자연을 이런 식으로 재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또 이 게임들이 환경친화 슬로건을 걸지 않는 단순 슈팅 게임이기 때문에 자연의 재현 방식은 게임사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콘트라>에서 바위가 낙하하는 모습이나 <리버 레이드>에서의 강둑 충돌 사례처럼 당시의 기술로도 역동적 자연을 만드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저자는 이 게임들에 나온 자연을 당시의 단순한 기술적 결함의 문제를 넘어서 철학적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저자는 세 비디오게임에 드러나는 ‘인간과 충분히 상호작용하지 않는 자연’, ‘인간이 언제나 이해가능한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는 자연’은 오히려 인간을 넘어서는 자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게임 속에서 인간이 자연과 제한적으로만 관계맺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애초에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 자체에 내재하여 프로그램된 한계다. 또한 이러한 자연의 접근 불가능성과 무한성 자체는 유한한 기술적 행위자들과 인간 행위자들의 어셈블리지(assemblage)를 통해서만 구성된 결과다. 이러한 점에서 기술을 통해 인간은 인간을 넘어서는 관점을 획득하게 되며 비디오 게임 또한 인간의 경험으로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인간이 어떠한 한 관점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관계 맺을 수 없는 것과 관계를 맺게 하는’ 매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비디오게임이 칸트가 구분한 물자체(noumenon)와 현상(phenomenon)의 차이, 즉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자연 그 자체로서의 물자체와 인간이 이해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비디오게임이 제시하는 현상으로서의 자연을 구분해서 보여준다고 말한다. 인간이 비록 사물(자연)의 물자체(au sich)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게임을 통해) 형이상학적으로 이를 사유해 볼 수는 있다. 비디오게임 또한 자연을 인간의 관점으로 환원되지 않는 존재로 제시함으로써 인간이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자연이라는 개념을 사유하게끔 하는 것이다. <배틀 시티>에서 자연이 ‘물자체’의 차원에서 파괴될 수 없는 존재인 반면 인간이 만든 ‘현상계’로서 도시는 그 게임에서 인간이 유일하게 파괴 가능한 것으로 드러나듯이 말이다. 인간을 넘어서는 자연의 사례는 <리버 레이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리버 레이드>에서 플레이어가 무한한 자연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연료)를 소모해야만 하는 사례를 생각해 보자. 연료를 소비하고 오염을 발생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은 자연의 무한성 스스로를 소멸시켜야만 하는 입장에 있다. “즉 자연의 무한성을 목격하기 위한 [인간의] 조건은 바로 그 무한성을 파괴하는 조건과 동일하다”는 역설이 발생하고야 만다. 무한히 결말 없이 플레이 가능한 게임 구조 또한 영원히 게임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 자신이 불멸의 존재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즉 이 게임을 종료하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 자신의 유한성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유한성이 비디오게임 속에 프로그램된 자연을 무한히 응시하거나 경험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자연을 완전히 인간적으로 이해하거나 인간의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가 본질적으로 한계를 지닌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비디오게임에서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선행연구(Abraham & Jayermanne, 2017)에서 제시한 네 가지 고전적 유형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 본 연구는 환경이 인간 플레이어를 위한 배경이나 자원의 원천, 인간의 적대 대상, 탐색 대상일 뿐만 아니라 ‘back-ground’로서 또 다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 때의 ‘back-ground’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이 발 닿은 기반(ground)이자 동시에 그 기반을 끊임없이 흔들어서 인간중심성을 해체하는 존재를 뜻한다. 즉 비디오게임은 인간의 행위 가능성의 한계를 수행적으로 드러내는 인간을 넘어서는 또 다른 행위자인 것이다. back-ground 개념은 인간에게 게임 속 환경이 드러내는 한계를 단순히 넘어설 수 없는 장벽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자체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비디오게임이 상호작용적/사실적 자연을 구현하는 데 실패한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으며, 오히려 탈인간중심적 자연의 관점에서는 진실인 세계를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이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점으로, ‘레트로 비디오게임을 단순히 자연을 비현실적으로 재현하는 매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공들여 환경친화적 디자인을 갖춘 전쟁 게임을 만들고 그 게임에서 인간과의 상호작용에 따라 자연환경이 실제로 파괴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해도 게임을 리셋하는 순간 레트로 게임에서 드러났던 자연의 파괴불가능성은 반복될 것이다(반대로 플레이어의 행위에 따라 자연환경이 결코 복원되지 않는 게임을 구현한다면 인간이 오랜 시간 플레이하지 못하는 게임이 될 것이다). 최신 비디오게임들이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더 풍부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것은 자연을 인간이 조작하고 이해가능한 대상으로 바라보는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을 더 강화할 것이다. 언제나 인간에게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응답하는 자연을 제시할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자연이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접근 불가능하다는 관점은 오히려 가려지게 될 수 있다. 자연에는 침묵(silence)과 비응답성(unresponsiveness)이 포함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비디오게임의 무의식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한계에 의해 규정되는 관계임을 현실적으로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기술을 통해 그 한계를 넘어서는 포스트휴먼적 인간-자연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비디오게임이라는 기술을 통해 자연은 완전히 총체화될 수 없는 존재로 모습을 드러내며, 비디오게임은 인간이 자연과 맺는 한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경계를 넘어 자연과 관계를 맺도록 한다. 저자는 이같은 관계에 대해 비디오게임이 최소한 접근 불가능함을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서 경험하게 만든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인간은 한계를 완전히 넘어설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한계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는 도달할 수 있다. 정리하며 비디오게임에 대한 ANT적 분석을 수행하는 이 연구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기존의 통상적인 방식과는 다른 형태로 생각해 보게 해 준다는 의의가 있다. 게임 속에서 자연이 파괴될 수 없는 대상, 혹은 플레이어에게 응답하지 않는 대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 겉보기엔 단순한 기술의 한계나 재현의 결핍처럼 보이지만 실은 게임을 하는 인간 플레이어에게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 게임이 굳이 환경문제나 지속가능성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아도, 심지어 전쟁이나 폭력을 소재로 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인간(사회)-기술-자연에서 한 항에 쏠리는 환원주의를 피하기 위한 인상이 커서인지는 몰라도, 논문의 구체적인 접근방식과 논의는 과잉되었다는 인상을 피하기 힘들었다. 크게 다음과 같이 이 글의 한계가 읽힌다. 첫째, 이 연구는 기본적으로 레트로 게임의 재유행과 리플레이가 비디오게임 산업의 지속가능한 순환경제를 위한 유효한 필수 조건이라고 보고 있다. 저자의 이전 연구결과를 토대로 한 주장이긴 하지만 ‘레트로 게임을 하면 결과적으로 친환경적’이라는 전제에 의문을 제기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소비는 레트로 게임도 사고 콘솔도 사고 에뮬레이터도 하는, ‘대체’보다는 ‘확장’된 소비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레트로 게임이 순환경제에 기여한다’는 서론부 논의와 ‘레트로 게임이 자연을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로 그린다’는 본문 논의 사이의 연결고리는 대단히 약하다. 마치 후자의 결과 때문에 전자의 문제를 더 주목해야 한다는 방식의 주장처럼 읽히는데, 서론부는 사실상 별도의 분석과 연구문제를 요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둘째, 이 연구가 정말 ANT적 분석을 수행했는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ANT 분석에 시도되는 기본적인 고전적 개념들을 쓰지 않으면서 ANT의 수행적 접근에 동의한다는 식의 요지는 ANT 분석이라는 이 글의 주장을 약하게 만든다. 비디오게임을 ANT로 분석한다면, 저자가 지적했듯 게임 내적 요소뿐 아니라 이를 연결하는 다양한 외부 요소가 필요하다. 자연환경이나 지형지물을 만들 때 들어갔어야 할 기술들, 게임개발자들의 문제, 게임이 이식될 당시의 하드웨어 특성, 게임 시장과 산업 등 수많은 구성요소들의 행위성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행위자들을 따라감으로써 네트워크를 파악해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연구는 게임 내적 요소에 분석의 영역을 한정하고, 행위소들의 구체적인 네트워크 분석보다는 게임 텍스트에 비인간중심주의를 기반으로 한 기호학적, 철학적 독해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연구는 ANT를 수행한 연구라기보다는 객체지향적 접근에 기반한 포스트휴먼 비평으로 봐야 하지 않는가가 발제자로서 나의 생각이다. 셋째, 게임 속의 ‘응답하지 않는 자연’을 둘러싸고 저자와 나의 해석이 너무나 다르다. 저자는 응답하지 않는 자연이 인간을 넘어서는 자연을 보여주고 그 접근 불가능성을 인간에게 감각할 수 있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응답하지 않는 자연은 오히려 기술적 제약 때문이든 자연을 고려하는 인식이 없기 때문이든간에 자연을 말 그대로 배경으로 객체화한 결과가 아닐까? 이 경우 게임 속에 재현된 자연은 더 강한 인간중심주의로 읽어낼 수 있다. 관련 이론에 과문한 탓에 더 깊게 들어가기 어렵지만, 객체지향 존재론이나 ANT이 가정하는 존재론적 접근에서는 게임 개발자나 연구자의 인식 및 의도와 무관하게 행위자들의 네트워크가 존재론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설명하고 그를 (역설적이게도 인간 행위자인 연구자의 인식론으로) 풀어내는 것처럼 보여진다. 게임이 인간을 넘어서는 자연을 보여준다는 해석이 인간 행위자에게서 발생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왜인지 모순으로 다가온다. 어찌되었든, 이 연구는 게임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터랙티브 요소를 확장해야 하고 그 요소로 자연을 고려해야 하는 개발자들이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흥미로운 지점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더 많은 인터랙티브를 만들어낼수록 이는 인간의 응답대로만 움직이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즉 인간중심성을 강화하는 게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Tags: 레트로 게임, 게임과 환경,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포스트휴머니즘, 콘트라, 배틀 시티, 리버 레이드, 논문세미나, Retro Games, Actor-Network Theory, Games and Ecology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수 문화와 지식, 공간과 학술 장 등 다양한 영역을 공부합니다. 게임의 역사와 게이머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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