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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각장애인과 게임: 편견이라는 경계를 넘어
반지하게임즈의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시각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하여 당사자로서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생기고 있다.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하지 못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직업도 게임과는 무관한 것이라서 사실 이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늘 조심스럽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평범한 시각장애인으로서 내가 경험한 게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시각장애인들이 더 폭넓게 게임을 즐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역시 한 게이머의 입장으로 말해 보고자 한다. < Back 04 GG Vol. 22.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hinhye Kang A blind person with a keen interest in games. Currently teaches Korean at a middle school while also contributing to game story work at Banjihagames.
- 전자오락, 게이머, 인터페이스의 공진화
인터페이스는 설계에 투영된 이상을 정확히 구사하기 위해 발전할 수도 있지만, 우연한 계기들에 의해 손쉽게 그 설계가 변형되기도 한다. 변형된 인터페이스는 게이머들의 게임 실천 자체를 변형시키기도 하며, 이런 변화된 게임실천은 게임이 제공하는 경험의 변형을 가져오고, 게임성 그 자체를 다르게 느끼게 하는 효과도 가져온다. 이처럼 인터페이스는 단순한 입력장치이고,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 없는 게임의 요소라기보다는 게임을 구성하고 있는 하드웨어이면서 동시에 게이머와 연결되어 신체화된 기계적 대상물이다. 인터페이스는 게임의 설계에 따라 발전하거나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과 게이머는 물론이고 자신과 연결된 모든 환경과 함께 상호작용하며 변화무쌍하게 공진화(co-evolution)하는 과정 안에 놓여있다. < Back 02 GG Vol. 21.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Eunki Jeon Majored in cultural anthropology and cultural studies, and currently works as a researcher at the Cheonggyecheon Technology and Culture Research Lab and the Institute for Global Multicultural Studies at Hanyang University.
- 평화주의자는 게임에서 총을 쏠 수 있는가?
‘평화주의자는 게임에서 총을 쏠 수 있는가?’라는 문장은 매체를 통해 재현되는 전쟁의 문제, 윤리와 당위의 문제, 현실과 가상이라는 구분의 문제 등 다양한 층위의 함의를 지닌다. 이 글은 게임과 전쟁, 폭력에 관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 Back 평화주의자는 게임에서 총을 쏠 수 있는가? 25 GG Vol. 25. 8. 10. 나는 평화활동가다. 반전 집회를 조직하고, 무기 산업을 비롯해 전쟁과 군사화에 자본을 투자해 이윤을 얻는 전쟁수혜활동을 비판하며, 한국이 분쟁 지역과 독재 국가에 무기 수출하는 것을 감시하고 실효성 있는 통제체제 도입을 요구한다. 한편 게이머로서 나는 전쟁 게임을 즐긴다. <카운터 스트라이크>, <서든어택> 같은 FPS(1인칭 슈팅 게임)부터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같은 RTS(실시간 전략 게임), , <팬저 코어> 같은 TBS(턴 전략 게임), <리스크>, <임페리얼> 같은 보드게임까지 매체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이런 이중의 정체성이 어째서 나에게 도덕적 모순을 제기하지 않는지 설명해보겠다. ‘평화주의자는 게임에서 총을 쏠 수 있는가?’라는 문장은 매체를 통해 재현되는 전쟁의 문제, 윤리와 당위의 문제, 현실과 가상이라는 구분의 문제 등 다양한 층위의 함의를 지닌다. 이 글은 게임과 전쟁, 폭력에 관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폭력적인 게임’이란 무엇인가? 폭력적인 게임이 플레이어를 더 폭력적·군사주의적으로 만드는가? 폭력적인 게임이 플레이어의 양심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무엇이 게임 속 폭력과 현실의 폭력을 구분하는가? ‘폭력적인 게임’이란 무엇인가? 게임이 그 자체로 혐오표현이자 폭력인 경우도 있다. 미국의 극우단체 국민동맹(National Alliance)이 2002년에 발매한 FPS <인종청소>에서 플레이어는 네오나치 스킨헤드나 KKK 단원이 되어 흑인, 유대인, 라틴 아메리카인을 학살해야 한다. 이 조악한 게임은 피해자들을 조롱하듯 마틴 루터 킹의 날인 1월 21일에 출시됐으며, 백인우월주의 상징 숫자인 14.88달러 [1] 에 판매됐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는 ‘폭력적인 게임’은 <인종청소>처럼 표현물로서 그 자체가 현실에서 정서적·문화적 폭력을 행사하는 게임이 아니라, 단지 매체로서 폭력을 묘사하거나 플레이어로 하여금 가상의 폭력 행위를 수행하게 하는 게임을 말한다. 이 두 범주가 칼 같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전자는 혐오 표현처럼 사회적·역사적으로 억압받아 온 집단이나 소수자를 표적으로 삼는다고 거칠게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게임에서 왜 ‘가상 살인’은 허용되고 ‘가상 소아성애’는 허용되지 않는지에 대한 Luck(2009)의 설명과 맥을 같이 한다 [2] . 어떤 게임이 전쟁을 다루거나 ‘19금’이라는 이유만으로 플레이해서는 안 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국의 게임물관리위원회 같은 게임 심의 기구들은 게임의 전체 맥락을 고려한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폭력, 섹스, 마약, 도박 등의 표현 수위에 따라 등급을 결정한다. 일각에서는 특정 게임이 해롭기 때문에, 평화주의자든 아니든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게임이 해롭다고 말하려면, 단지 폭력을 묘사한다는 것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유가 필요하다. 예컨대 그 게임이 플레이어를 더 폭력적이거나 군사주의적으로 만든다면 어떨까? <인종청소> 게임 플레이 영상 캡처 폭력적인 게임이 플레이어를 더 폭력적 · 군사주의적으로 만드는가? 게임과 폭력성의 관계를 둘러싼 많은 상반된 이론과 연구 결과가 존재한다. 하지만 게임과 폭력 간의 연관성을 강하게 믿었던 이들이 진행한 초기 실험들은 여러 한계를 지녔으며, 문제를 보완한 후속 연구나 메타분석, 종단 연구들은 게임이 폭력에 영향을 준다는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못했다 [3] . 오히려 어떤 연구는 폭력적인 게임이 플레이어를 더 ‘착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부도덕한 가상 행위 [4] 에 대한 죄책감이 도덕적 감수성의 향상과 나아가 이타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5] . 게임이 이처럼 ‘윤리 교과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디스 워 오브 마인>과 <프로스트펑크>가 있다. 두 게임은 각각 전쟁과 기후재난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윤리적 딜레마로 플레이어를 몰아붙인다. 한편 게임이 플레이어를 더 폭력적으로 만들지는 않더라도, 군사적 세계관을 내면화하는 데는 영향을 줄 수 있다. Martino(2012)는 <콜 오브 듀티> 시리즈를 군사화된 게임의 전형으로 본다. ‘군사적 아비투스(military habitus)’의 형태로 군사화(“사람이나 사물이 점차 군대의 통제하에 놓이거나 군국주의 사상에 종속되는 단계적 과정”)를 촉진하고, 플레이어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쳐 전쟁 선호 정서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6] . 게임이 직접적으로 폭력성을 증가시키지 않더라도, 위계질서에 익숙해지게 만들거나, 군사적 수단의 사용에 대한 거부감을 낮추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다. 군국주의 선전 영화가 그렇듯, 일부 군사 게임도 폭력의 정상화(normalization)에 기여하고 교련 수업과 유사한 기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펙 옵스: 더 라인>처럼 폭력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게임도 존재한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연상케 하는 이 게임과 <콜 오브 듀티>를 구분 짓는 것은 플레이어에 의해 수행되거나 모니터와 스피커로 재현되는 가상 폭력의 수위가 아니라 맥락과 의도다. 군국주의 영화와 반전(反戰) 영화의 차이가 영상물 등급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덧붙여, 게임의 폭력성이나 유해성 논의는 대체로 FPS 내지 <배틀그라운드>, 같은 TPS(3인칭 슈팅 게임)에 집중된다. 그러나 어쩌면 일선 병사로서 전투를 수행하는 FPS나 TPS보다, 병사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휘관의 시점에서 전쟁을 재현하는 RTS나 TBS가 더 ‘해로울’ 수도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게임에 묘사된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재현되고 수행되는 맥락과 방식에 있다. 이것은 게임 플레이의 장단기적 영향에 대한 정량적 연구보다 게임 비평이 다뤄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된다. 이 같은 비평은 게임의 장르 구분이나 등급 심의에 대한 판단을 넘어, 개발자의 의도부터 게임이 나온 사회적 배경까지 개별 게임의 맥락을 면밀히 따져야 할 것이다. <스펙 옵스: 더 라인> 폭력적인 게임이 플레이어의 양심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한 동료 평화활동가는 20여 년 전 어느 날, FPS를 하다 참을 수 없는 어지러움과 두통을 느꼈다고 한다. 단순한 3D 멀미가 아니라, ‘병역거부자인 내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목표인 게임을 해도 되나?’라는 고민에서 비롯된 정신적 거부 반응이었다 [7] . 그렇다면 평화주의자는 <서든어택>, <배틀그라운드>, <스타크래프트> 같은 폭력적인 게임을 해서는 안 되는가? 앞의 질문이 사실과 진위 판단에 관한 것이라면, 이는 윤리와 당위에 관한 것이다. 특정 게임이 플레이어를 더 폭력적이고 군사주의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그 게임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종청소>처럼 게임 자체가 폭력이 아닌 이상, 핵심은 게임 플레이가 개인의 윤리적 신념 내지 양심과 양립 가능한가 하는 문제다. 2018년 12월, 대검찰청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양심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한 판단 지침을 하달했다. 이 지침에는 FPS 게임 가입 여부를 확인하는 내용이 담겼다. 일선 검찰은 지침에 따라 기소장에 병역거부자의 FPS 이용 기록을 적시했고, 이는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됐다. 2019년 6월, 서울북부지방법원은 <서든어택> 등 FPS를 두 차례, 총 40여 분 이용한 병역거부자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게임을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접속 횟수나 시간에 비춰 보면 종교적 신념이나 양심이 진실하지 않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8] . 그런데 바로 한 달 뒤인 2019년 7월, 대전지방법원은 다른 병역거부자에게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입영을 거부한 이후에도 폭력성 짙은 게임을 한 점 등에 비춰보면 종교적 신념이 깊다거나 확고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9] . FPS 이용 기록이 판결의 유일한 근거는 아니었겠지만, 판결문에도 적시된 것을 보면 양심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게임 이용 기록이 과연 개인의 신념을 부정할 수 있을까? 폭력적인 게임 플레이를 진정한 평화주의자라면 할 수 없는 폭력 행사에 준하는 행위로 볼 수 있을까? 유튜브 채널 <스브스뉴스> 썸네일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의 마음가짐이다 게임은 가상 매체지만, 다른 매체들과 구분되는 ‘행위성(agency)’을 특징으로 한다. 소설 속 살육을 읽는 것과, 키보드와 마우스를 조작해 게임 캐릭터를 죽이는 가상 폭력을 행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를 수 있다. 같은 이유로, 게임 속 행위의 최종적인 책임은 게임이 아닌 플레이어에게 있다. 이는 사형 집행을 소재로 한 실험 게임 <엑시큐션>이 제기하는 도덕적 문제와도 일치한다. 1992년작 영화 <토이즈>에 이런 장면이 있다. 형으로부터 장난감 회사를 물려받은 전직 군 장성 릴랜드 지보는 장난감을 개조해 무기를 만들려는 전쟁광이다. 그는 오락실에서 탱크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며 적의 병력은 쏘지 않고 유엔 트럭들만 골라 파괴한다. 적의 탱크를 쏘면 300점, 헬리콥터를 쏘면 500점을 얻고, 유엔 트럭을 쏘면 1,000점이 감점되는데도 말이다. 이는 플레이어가 단순히 점수나 승리를 목표로 움직이는 자동 기계가 아니라, 자기 가치관에 따라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게임은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며, 플레이를 통해 수용되는 상호작용적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령 특정 게임이 통계적으로 폭력과 군사화를 유발하더라도, 그것은 게임에 내재된 속성이기보다 게임이 개별 플레이어에게 수용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면 평화주의자는 여전히 게임에서 총을 쏴선 안 되는가? 영화 <토이즈>의 한 장면 게임 플레이의 가상성과 연극성 폭력적인 게임 플레이가 평화주의 신념에 모순되는가라는 질문은, 게임 플레이의 ‘가상성’보다 ‘연극성’에 주목해야 한다. FPS에서 다른 플레이어 캐릭터나 NPC(비플레이어 캐릭터)를 죽이는 행위가 폭력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가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가상 세계에서도 다른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욕설을 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격투 스포츠나 BDSM 플레이는 가상 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일어나지만, 이들을 게임과 같은 범주로 묶는 것이 연극성이다. 직접적·구조적 폭력이 해악인 이유는 그것이 누군가의 권리 실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무대(게임 공간)에서 배우(플레이어)들이 대본(합의된 규칙)에 따라 하는 연극(play)은 폭력이 아니다. 그것이 아무도 해치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있으며, 거기에 동의한 채 참여한다.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는 베트남 전쟁 당시 “어떤 베트콩도 나를 깜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며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누구도 알리가 직업적으로 사람을 때린다는 이유로 그의 전쟁 반대 신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게이머는 한정된 가상 공간에서 합의된 규칙에 따라 한 행위로 양심을 의심받아야 할까? 게임에서 적 캐릭터를 죽이며 느끼는 성취감은, 사격 선수가 과녁을 맞췄을 때 기뻐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것은 폭력이나 폭력의 재현이 아니라, 난관을 극복하고 목표를 성취한 데 대한 반응이다. 폭력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놓인 맥락이다. 살인자 역의 배우나 권투 선수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듯, 플레이어는 죄가 없다. 게임에서의 폭력적인 행위가 현실 윤리의 배신은 아니다. 진정한 평화주의는 현실의 전쟁과 폭력을 멈추기 위한 고민과 실천이다. 그리고 게임이라는 가상의 체험은 오히려 그 고민을 더 깊고 정교하게 만들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1] 14와 88은 각각 네오나치 은어로 “우리는 백인 민족의 존립과 백인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We must secure the existence of our people and a future for white children)”라는 슬로건을 뜻하는 ‘14단어’와 H가 알파벳의 8번째 글자라는 점에서 “히틀러 만세(Heil Hitler)”를 뜻하는 ‘HH’를 상징한다. [2] Luck, M. (2009). The gamer’s dilemma: An analysis of the arguments for the moral distinction between virtual murder and virtual paedophilia. Ethics and Information Technology 11 (1):31-36. [3] 유창석, 게임, 폭력, 범죄 연구의 타임라인, GG Vol. 14, 2023년 10월 10일.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9906eddb-0772-48e4-b3d0-6256f4accd17 [4] 피실험자들은 <오퍼레이션 플래시포인트: 콜드 워 크라이시스>의 변형된 버전에서 테러리스트(실험군)와 유엔 평화유지군(대조군) 중 하나를 플레이했다. [5] Grizzard, M.. et al. (2014), Being Bad in a Video Game Can Make Us Morally Sensitive, Cyberpsychology, Behavior, and Social Networking 2014 17:8, 499-504 [6] Martino, J. (2012). Video Games and the Militarisation of Society: Towards a Theoretical and Conceptual Framework. In: Hercheui, M.D., Whitehouse, D., McIver, W., Phahlamohlaka, J. (eds) ICT Critical Infrastructures and Society. HCC 2012. IFIP Advances in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 vol 386. Springer, Berlin, Heidelberg. [7] 이용석, 폭력 게임이 폭력적인 사람을 만드나요, 폭력적인 사람이 폭력 게임을 하나요?, 전쟁없는세상 블로그, 2022년 12월 8일. http://www.withoutwar.org/?p=19647 [8] 한겨레, ‘살상게임’ 접속한 병역거부 여호와의 증인 신도 무죄, 2019년 6월 20일.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98621.html [9] 세계일보,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FPS 게임을 해?…‘병역법 위반’, 2019년 7월 16일. https://www.segye.com/newsView/20190716511591 Tags: 평화운동, 반전, 병역거부, 폭력성, 전쟁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활동가) 쥬 전쟁 게임을 즐기는 평화주의자. <인티파다: 팔레스타인에 자유를>, <세상을 바꾸다: 광장에서 국회까지>, <내 머릿속의 무지개> 등 반식민 투쟁과 비폭력 사회운동, 정신장애 임파워먼트 등을 주제로 보드게임을 만든 게임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 뱀서라이크 - 게이머와 게임의 생존전략
‘서바이버즈-라이크’ 장르가 주는 재미는 단순히 간단하고 쉬운 반복 플레이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인간의 생존 본능을 자극하고 다양한 생존전략을 취할 수 있게 하는 기본적인 욕망으로부터 즐거움을 끌어내고 있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즐거움은 게이머가 게임을 어떻게 즐기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 장르가 10, 20년 후까지 존재하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많은 표절, 모방 게임이 쏟아지고 있고, 게이머들은 이 행태에 반감을 갖기도 한다. 특히 무분별한 장르의 남용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 Back 뱀서라이크 - 게이머와 게임의 생존전략 09 GG Vol. 22. 12. 10. 2021년 겨울, 게임 ESD 플랫폼 스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디게임이 있다. 흔히 ‘뱀파이어 서바이벌(이하 뱀서)’이라고 불리는 〈뱀파이어 서바이버즈(Vampire Survivors)〉이다. 당시 ‘앞서 해보기’로 단돈 3,300원에 출시한 이 게임은 저렴한 가격과 더불어 저사양, 간단한 게임 플레이로 전문 유튜버나 게임 스트리머뿐만 아니라 일반 게이머들 사이까지 유행했다. ‘뱀서’는 투박한 도트 그래픽과 2D 탑 다운(Top-down) 뷰를 이용한 고전 아케이드 슈팅 스타일을 채택하고 있다. 이는 마치 팩 인 비디오가 개발한 〈람보〉 시리즈나 〈GTA〉 시리즈 1, 2편과도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게임은 2021년 말~2022년 초 사이에 나온 게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어떻게 보면 전통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전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고전 게임에 추억이나 경험이 있는 혹은 레트로 스타일의 인디게임을 좋아하는 게이머에게는 즐겁게 게임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게임에 추억이나 경험이 없는 그 밖의 게이머에게는 매력적으로 어필되기 힘들다. 그런데도 다양한 게이머에게 이토록 인기를 얻게 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지금도 ‘뱀서’의 인기는 식지 않는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비슷한 게임들이 올 한 해 쏟아져 나왔다는 점이다. 〈20 Minutes Till Dawn〉과 같은 도트 스타일, 〈Brotato〉와 같은 카툰풍, 〈Beautiful Mystic Survivors〉와 같이 미소녀 3D 버전의 유사 게임도 출시되고 있다. ‘뱀서’ 스타일의 시작은 한국의 1인 개발사 LEME가 만든 모바일 게임 〈매직 서바이벌〉이다. 종종 게이머들은 〈매직 서바이벌〉같은 장르는 예전부터 있어 왔다고 이야기한다. 필자도 게임에서 등장하는 시스템이나 표현들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유사한 것 같은 느낌의 원인은 〈매직 서바이벌〉의 장르적 특징이 복합적인 장르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게임 틀은 고전 아케이드 슈팅이다. 적이 발사하는 탄막을 피하고 적을 처지하는 구조가 기본적인 게임 플레이 방식이다. 결국 ‘이런 스타일과 장르의 원조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고전 게임 계보까지 살펴야 한다. 그렇다면 고전 게임과는 〈매직 서바이벌〉은 어떠한 차별점이 있는 것일까? * 〈매직 서바이벌〉 인 게임 화면. 겉으로 보이는 고전 게임 스타일과는 다르게 〈매직 서바이벌〉에서 현대 게임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시스템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심은 ‘로그라이트’와 ‘캐주얼’이라는 키워드가 자리 잡고 있다. ‘로그라이트(Rogue-lite)’ 장르는 1980년 출시된 최초의 2D 그래픽 RPG인 〈로그(Rogue)〉가 지닌 영구적인 죽음, 절차적 생성과 같은 핵심 원칙을 적용하되, 죽더라도 다음 게임 플레이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일정량의 보상을 가져가게 된다는 특징을 가진다. 게이머는 다음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캐릭터를 강화하거나, 새로운 아이템을 미리 장착하는 등의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다. 캐릭터가 죽을 때마다 여전히 게임을 다시 시작하지만, 진정으로 0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는 점이 핵심이다. 〈매직 서바이벌〉은 로그라이트를 채택했다는 점에서 〈로그〉를 단순 수용이 아닌 변용 했다. 이러한 점이 레트로 장르에 대한 실천적 계승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이 게임은 간단한 게임 플레이 방식과 쉬운 접근성을 바탕으로 한 캐주얼을 중심으로 두고 있다. 그럼에도 파고들 수 있는 요소가 가득하다. 이는 어떻게 보면 ‘하드코어’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캐주얼게임을 ‘하드코어’의 반대급부로 보는 것은 캐주얼의 단편적인 면만 강조한다. 예스퍼 율(Juul, 2010)은 캐주얼 게임이 일반적으로 ‘하드코어’ 게임과 상반되는 형태의 게임이라는 관점과 달리, 초창기 게임의 ‘단순함’으로부터 재발견된 범주로 본다. 이러한 점에서 단순히 〈매직 서바이벌〉이 캐주얼게임이기에 고전 게임과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캐주얼’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다. 즉, 〈매직 서바이벌〉은 단순한 고전 게임의 모방과 무분별한 수용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조금 더 자세한 게임 플레이 메카닉은 후술하겠지만, 〈매직 서바이벌〉과 같은 게임은 그 자체로 새로이 등장한 장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실제로 ‘뱀서’의 제작자도 장르와 스타일의 기반이 〈매직 서바이벌〉이라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 ‘뱀서’는 〈매직 서바이벌〉을 참고하면서도 해당 게임이 가진 문제점을 개선하여 출시되었다. 개발사는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통해 장르를 탄탄하게 개량하고 있다. 게이머나 커뮤니티 혹은 게임 웹진에서도 ‘like vampire survivors’라는 용어를 쓸 정도이니 말이다. 이른바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라이크’라 불리는 장르는 기존 장르와 어떤 부분이 차별화되는 것일까? ‘서바이버즈-라이크’에서 살아남는 방법 * 〈뱀파이어 서바이버즈〉 메인 메뉴와 인 게임 화면. 그렇다면 게임을 조금 더 살펴보자.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는 제작사에서 “로그라이트 요소를 갖춘 고딕 호러 케주얼 게임” 이라 밝히고 있다. 소개 문구만 보면 감이 잘 안 온다. 게임을 처음 시작하면 레트로 비트 사운드와 함께 단순한 메인 메뉴가 반겨준다. 처음 시작하는 게이머는 콜렉션, 강화나 잠금 해제 메뉴 모두 아무것도 이용할 수 없다. 이것들 전부 잠금 되어있거나 메뉴 상단에 보이는 돈은 0이기 때문에 강화도 할 수 없다. 결국 게이머는 어쩔 수 없이 시작 버튼을 누르고 캐릭터를 골라서 시작한다. 캐릭터는 풀밭에 놓이게 된다. 어떤 튜토리얼도 주어지지 않지만, 캐릭터는 자동으로 채찍질하고 있고, 멀리서 박쥐가 캐릭터를 향해 날아온다. 이후 게이머는 WASD나 방향키로 캐릭터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과, 공격이 캐릭터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게임은 일련의 과정을 설명해주지 않지만, 게이머는 경험적으로 알아차리고 터득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제작사가 밝힌 “케주얼”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레고리 트레프리(Trefry, 2010)는 〈Casual Game Design〉에서 캐주얼 게임의 몇 가지 속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뱀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캐주얼 게임의 속성은 “규칙과 목표가 명확해”야 하고, “게이머가 빠르게 게임 플레이에 숙련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Trefey, 2010). 이처럼 ‘뱀서’는 게임에서 분명하게 플레이 방식을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게임 메커니즘은 감각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도록 손쉬운 접근성을 제공한다. 게이머는 그저 방향키를 움직여 캐릭터를 조작하고, 자동 공격을 몬스터에 맞추기만 하면 된다. 이걸 반복적으로 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즉, 게임을 계속해서 플레이하기 위해 몰려오는 적들을 물리치거나 피한다는 단순 명쾌한 목표가 제시된다. * 레벨업 메뉴와 보물상자 연출 화면.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캐릭터는 박쥐, 언데드와 같은 몬스터를 처치하면서 보석을 습득하면 경험치를 얻게 된다. 이를 통해 레벨이 올라간 캐릭터는 세 가지의 선택지를 골라서 무기를 강화하거나 새로운 능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주인공은 RPG 게임의 캐릭터처럼 성장한다. 이 과정을 어느 정도 반복하다 보면 기존 몬스터와 색이 다른 몬스터를 볼 수 있다. 열심히 색이 다른 적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하면 처치할 수 있다. 여기서 색이 다른 보석 혹은 보물 상자가 나타난다. 보물상자를 습득하게 되면 특별한 연출이 나오면서 돈과 강화 아이템이 나오게 된다. 이는 랜덤하게 더 많은 돈과 아이템을 얻게 되는 기회가 된다. 게이머는 이 과정을 마치고 나면 또 하나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가운데 상단에 표시된 시간이다. 시간이 지나게 되면 빛나는 몬스터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되면 다음 단계의 스테이지로 넘어가듯이 보스가 등장한다. 난도가 높은 탄막들이 날아오고, 캐릭터는 이를 피하면서 보스를 공격한다. 하지만 초반 플레이에서 보스를 쓰러뜨리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캐릭터는 결국 죽게 되고, 게이머가 게임 오버 화면을 보고 나면 다시 메인 메뉴로 돌아온다. 하지만 메인 메뉴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 바로 돈이 생겨서 캐릭터 강화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몇몇 요소들이 해금된다. 게이머는 다음 게임에서 이것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즉, 우리는 처음부터 더 강해진 캐릭터로 게임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서바이버즈-라이크’ 플레이는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실천된다. 반복적으로 플레이하면서 조금씩 얻게 되는 돈을 통한 업그레이드와 새로이 얻게 되는 해금 요소들로 캐릭터는 오랜 시간 버틸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러한 요소들이 스테이지를 도전하는 게이머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게이머는 처음에 몇 가지 안 되는 무기들만 고를 수 있지만, 해금되는 요소들을 통해 다양한 무기와 아이템, 그리고 진화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닿는다. 이를 통해 캐릭터는 더 많은 적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이 점점 쌓이면서 캐릭터는 강해진 적과 보스를 물리칠 수 있다. 게이머는 이를 반복하며 일정 시간까지 버티게 되면 승리한다. 하지만 게임이 끝났다고 완전히 클리어한 것은 아니다. 다음 맵이 해금되면서 게이머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시한다. 게이머도 새로운 무기, 캐릭터와 함께 새 스테이지에 도전한다. ‘로그라이트’ 메커니즘은 게이머에게 계속해서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하는 동기를 제시하면서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게이머는 항상 캐릭터와 무기의 선택을 고민하면서,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고자 한다. 랜덤하게 제시되는 선택지는 판마다 신선함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게임은 게이머의 조작과 캐릭터 강화로 운을 극복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순전히 운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점이 게이머에게 실질적인 플레이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기존 로그라이크, 로그라이트 게임과 차별화되는 부분이 아주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타 장르와 차이점은 ‘서바이벌’에 있다. ‘서바이버즈-라이크’ 게임은 분명하게 생존 게임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흔히 생존 게임이라 부르는 장르는 현실감을 부여한 시뮬레이션 장르나 오픈 월드 액션 어드벤처 장르의 ‘하드코어’ 게임을 떠올린다. 하지만 생존 게임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는 생존전략에 있다. 생존 게임 게이머는 생존하기 위해 맵 곳곳에 있는 자원과 물자를 모으고, 새로운 무기와 아이템을 만들거나 습득하며 앞으로의 위험에 대비한다. 생존주의가 생존 게임 장르의 기초 문법이다. ‘서바이버즈-라이크’는 생존전략을 핵심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게이머는 캐릭터를 조작해서 어느 방향이든 갈 수 있다. 맵을 돌아다니다 보면 무작위로 생성된 다양한 오브젝트가 존재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캐릭터는 자동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근처에 가기만 해도 오브젝트를 공격하게 된다. 이윽고 오브젝트가 파괴되고 아이템들이 나온다. 여기서 게이머는 적을 처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맵에 배치된 아이템들을 통해 캐릭터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 알게 된다. 이를 알게 된 게이머는 더 많이 맵을 돌아다니게 되고 다양한 지형을 발견한다. 게임별로 재단, 집터, 건물, 거목 등과 같이 다양한 지형으로 배치된다. 여기서 게이머는 랜덤하게 강화용 아이템이나 특수한 이벤트들을 마주치게 된다. 즉, 더욱 강한 무기나 아이템들을 얻을 기회는 단순히 적을 처치하는 것 외에도 맵에 배치된 오브젝트를 통해 제공된다. 맵에서 자원과 물자를 모아 더욱 강한 캐릭터를 만드는 행위는 시간이 지나고 등장하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준비이다. 비록 질병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시뮬레이션 된 현실성은 없지만, 게이머는 살아남기 위해 자원을 모으고 새로운 무기를 손에 넣는다. 이는 게임 방식과도 연관이 있다. 게이머는 능동적으로 게임을 클리어할 수 없다. 일정 시간을 채워야만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다. 즉, ‘서바이버즈-라이크’는 주어진 생존환경에서 살아남아야만 클리어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다. 게임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내러티브를 통해 생존 본능을 자극한다. 혼자 남아 있는 캐릭터와 나만 공격하는 적은 일종의 ‘배틀로얄’ 구도와 같다. 우리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갈구한다. 게임 내 아이템이 됐든, 캐릭터를 조작하는 게이머의 손가락이 됐든 살기 위한 움직임이 존재한다. 이러한 점이 게이머에게 생존 본능과 함께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다양한 게이머가 이 장르를 좋아해 주는 데에는 단순히 레트로 인디게임이라는 점 때문은 아니다. 게임 기반에는 다양한 레트로 장르에 대한 각색과 생존주의가 깃들어 있다. 이 같은 지점이 기존 레트로 인디게임을 좋아하는 게이머뿐만 아니라 캐주얼 게이머, 하드코어 게이머까지 어필할 수 있는 ‘서바이버즈-라이크’가 가진 재미 요소이다.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더 재밌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후속 게임들은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를 모방한다. 특히 일부 게임이 ‘서바이벌’이 아닌 ‘서바이버즈’라는 제목을 달고 출시한다. 분명하게 원조는 〈매직 서바이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도 몇몇 게임은 ‘뱀서’에 새로운 요소를 더하거나 불편한 부분을 제거하여 출시되기도 한다. 사뭇 달라진 게임 스타일은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즉, 많은 후속 게임이 ‘뱀서’에서 영감을 얻고 있지만, 그 형태는 미묘하게 다르다. 또 하나는 〈매직 서바이벌〉은 본래 모바일 게임이었지만, 상당수의 게임이 PC 플랫폼으로도 출시되었다는 점이다. 간단한 조작법과 짧은 플레이 타임은 모바일에 적합했지만, PC로 넘어오게 되면서 더 많은 연산이 가능해진 점은 많은 적과 큰 규모를 강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게이머는 게임 플레이를 위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이처럼 후속 게임들은 ‘뱀서’에서 틀을 가져와서 지금 상황에 알맞게 바꾼다. 어째서 이들은 모방을 넘어 변화하는가? 이는 당연한 논리이다. 게임 시장은 급격하게 변하는 환경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게임이 개발되고 있고, 일주일만 해도 수십 개의 PC게임이 출시한다. 모바일 환경을 포함하면 더욱 많아진다. 이 중에서 ‘서바이버즈-라이크’ 게임 또한 분명하게 존재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대다수 게임은 흥행에 실패할 것이다. 장르를 선점하고 있는 게임들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환경에 맞게 변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진화’라 부른다. 진화는 진보가 목적이 아니다. 진화는 생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변화, 즉, ‘변이’다. 변이가 바로 진화의 제1 조건이다 . 개발자들은 ‘서바이버즈-라이크’가 우후죽순 나오는 지금 시장에서 모범이 되는 게임을 모방하고 변이하는 생존전략을 실천하고 있다. 이들에게 장르의 진화는 생존을 위한 것이다. 게임들은 어떤 변이가 게임 시장에 더 잘 맞을지 이리저리 모습을 바꾸고 있다. 그리고 결국 유리한 형질을 가진 게임은 살아남아 장르를 확립할 것이다. 마치 자연 선택의 원리처럼 말이다. * 〈탕탕특공대〉 인 게임 화면. 이 생존전략이 어느 정도 성공한 사례가 바로 〈탕탕특공대〉이다. 이 게임은 ‘서바이버즈-라이크’가 지향하는 바를 실천함과 동시에 게임이 오랫동안 플레이 될 방법을 고안해냈다. 모바일 환경에 맞게 플레이할 수 있는 횟수를 제한하는 ‘스태미나 시스템’을 도입했다. 또한 게임 내의 육성 시스템은 간소화했지만, ‘장비 가챠 시스템’을 도입하여 캐릭터가 영구적으로 들고 갈 수 있는 업그레이드 요소는 오히려 강화했다. 게이머는 캐릭터의 능력치를 올리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비를 착용함으로써 시작 무기를 바꾸거나 더욱 높은 공격력과 방어력을 통해 이점을 갖고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게이머는 ‘서바이버즈-라이크’ 게임이 주는 즐거움과 게임 플레이 경험을 온전히 얻을 수 있다. 오히려 〈탕탕특공대〉는 라이브 게임 서비스를 통해서 더 오랫동안 게임을 즐길 수 있게 유도하고 있다. 이것이 기존 후속 게임과는 다른 생존전략이다. 나가며 ‘서바이버즈-라이크’ 장르가 주는 재미는 단순히 간단하고 쉬운 반복 플레이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인간의 생존 본능을 자극하고 다양한 생존전략을 취할 수 있게 하는 기본적인 욕망으로부터 즐거움을 끌어내고 있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즐거움은 게이머가 게임을 어떻게 즐기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 장르가 10, 20년 후까지 존재하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많은 표절, 모방 게임이 쏟아지고 있고, 게이머들은 이 행태에 반감을 갖기도 한다. 특히 무분별한 장르의 남용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하고 창의적인 인기 게임이 많이 출시하고 있는 현 게임 시장에서 ‘서바이버즈-라이크’가 짧은 시간이지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들은 게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름의 생존전략을 세우고 변화하는 환경에 대비하고 있다. 앞으로의 추이가 기대된다. 참고문헌 Trefry, G. (2010). Casual Game Design: Designing Play for the Gamer in ALL of Us (1st ed.). CRC Press. Juul J. (2010). A casual revolution : reinventing video games and their players. MIT Pres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수진 게임연구에 발을 들인 대학원생입니다. 지금은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첨단종합학술연구과에서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최근엔 게임을 매개로 한 다양한 게임 경험과 일본 내 서브컬처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글 쓰는 건 여전히 어렵습니다.
- [Editor's View] 무던히도 게임이 많았던 2023년을 마무리하며
2년 반동안 GG의 글들을 눈여겨 봐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내년 2월, GG는 여전히 디지털게임과 우리라는 주제를 들고 변함없이 돌아오겠습니다. 차분함과 평온함이 가득한 연말연시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Back 15 GG Vol. 23.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너’의 가치를 소멸시키는 ‘우리’의 게임들 : 헤이즈라이트의 강제적 코옵 게임들에 관해
이 때, ‘나’에게 ‘너’는 교환 불가능한 대상으로 남는다. 이 교환 불가능성은 ‘너’가 게임을 특별히 잘해서 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달성한 순간은 달성의 정도와 무관하게 영원히 감각으로만 남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너’가 아닌 다른 누구를 앉힌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대체할 수는 없게 된다. 이것이 코옵 플레이의 마술이다. < Back ‘너’의 가치를 소멸시키는 ‘우리’의 게임들 : 헤이즈라이트의 강제적 코옵 게임들에 관해 28 GG Vol. 26. 2. 10. 비디오 게임 메커닉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그럴싸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종종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허드슨 소프트의 1983년 작 「바이너리 월드」를 떠올리곤 한다. 이 게임의 메커닉은 1인에 의한 비대칭성의 동시조작을 그 중심에 둔다. 게임의 스테이지는 좌우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스테이지의 상단에만 협소하게 연결된 통로가 보인다. 플레이는 좌우의 두 캐릭터(패미컴 판이라면 펭귄)을 동시에 조작하는데, 양자는 Y축의 움직임은 공유하지만 X축의 움직임은 반대로 적용된다. 한쪽의 펭귄은 플레이어의 조작계 그대로 움직이지만, 반대쪽의 펭귄은 역전된 X축의 움직임을 가진다. 플레이어는 이렇게 의도적으로 흐트러진 두 조작계에 적응해가며 두 펭귄을 골인 지점에서 만나게 해야 한다. 두 캐릭터는 연인이라는 설정이며, 플레이어가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게임의 메커닉은 명백히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를 그 불편한 조작계로 체험시키고 있다. 「바이너리 랜드」는 1인 플레이 게임이지만 이 게임을 통해서 코옵 플레이라는 독특한 수용자성의 면모를 얼핏 들여다볼 수 있다. 코옵 플레이, 그러니까 '두 플레이어의 협업'이라는 개념에는 양자간의 어긋남과 불응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코옵 플레이의 핵심은 둘이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그 맥락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최초의 아케이드용 코옵 플레이 게임으로 알려져 있는 「파이어 트럭」 역시 전열차와 후열차를 각자 움직여 목적지까지 간다는 '어긋남'의 감각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플레이의 쾌감은 둘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움직임에 지나치게 간섭해 해결 불가능한 혼란이 발생하는 것을 전제한다. 두 플레이어의 놀라운 협응이 혼돈을 정지시킬 때에 쾌감은 발생하는 것이다. * 「바이너리 랜드」(1983)는 협응의 문제를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체험시킨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코옵 플레이의 메커닉, 아니 그보다는 코옵 플레이를 발생시키는 전제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를 따라가며 점차 변화해왔다. 그 미묘한 변화는 둘의 ‘차이’를 얼마나 벌려놓는지의 문제와 관계된다. 예를 들어 닌텐도의 「마리오 브라더스」나 타이토의 「버블 보블」, 테크노스 재팬의 「더블 드래곤」 같은 아케이드 코옵의 대명사같은 게임들은 차이라는 개념을 극도로 좁혀놓는다. 이들이 언제나 '형제' 또는 '쌍둥이'라는 설정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에는 양자(1플레이어와 2플레이어)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야 한다는 명제가 붙는다. 형제 또는 쌍둥이라는 설정은 그 동질성을 구태여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다. 말하자면 이 당시의 코옵 플레이는 협력성이라는 목표지향은 작동하고 있었을지언정 둘 사이의 불협화음은 오직 상황적 문제로만 제기되었다. 「마리오 브라더스」의 경우, 뒤집어진 적을 쳐내려는 찰나에 다른 플레이어가 그 적을 되돌려놓아 어이없게 사망하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되곤 했다. 이 때에 둘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란 '나'라는 플레이어 역시 작동시킬 수 있는 수행성의 가능태로서 존재한다. 즉 이 사건들의 통제 불가능성은 '나'의 대행된 몸을 통해서 유추하거나 다시금 재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다. 이런 전제를 경유하자면, 이 때 코옵 플레이의 대상인 두번째 플레이어, 이른바 '너'는 구태여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존재하기에 흥미로워지는 국면이 있기야 하겠지만, '내'가 게임을 올바르게 돌파하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되는 면도 있었던 셈이다. 이 형태의 '너'는 소통이 가능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도플갱어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까 차이는 오히려 그것의 필요성의 문제와도 결부되는 것 아닐까? '내'가 돌파할 수 없는 것을 '너'라서 돌파할 수 있게 되는 것. '나'의 방식만으로는 유추와 재현이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주는 방법으로서의 '너'를 마주시키는 것이 변화의 명제였을 수도 있겠다. 전반적으로는 기능이 같지만 특수 공격에서만 차이가 발생하는 「서유항마록」 정도에 도달하면 플레이어로 하여금 '캐릭터를 통해 어떠한 해결법을 제시하겠다'라는 차이의 문제가 드러난다 [1] . 캡콤의 「파이널 파이트」 까지 온다면, '숙련된 내가 더 다루기 어려운 캐릭터를 선택해 너를 보조하겠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다름의 방식이 도래한다. 캡콤은 이런 탐구의 선지자이며 선구자다. 이 방식의 극한을 아케이드라는 공간에서 체험시킨 것이 바로 「던전즈 & 드래곤즈 : 섀도우 오버 미스타라」(이하 「SOM」)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클래스는 서로 다른 조작, 기능, 해법, 필요를 지닌다.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서 플레이어들은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클레릭에게는 치료를 요구하고, 특정한 무기나 아이템은 다른 이의 기능을 위해 양보한다. 상자를 여는 캐릭터를 통해 변화하는 아이템의 다이내믹함은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결정과 연결된다. 이 때 중요한 건 플레이에 그가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파티에 클레릭이 없다면 치료 마법을 요구할 수 없다. 매직 유저가 없다면 광역 마법을 통해 적을 일소하거나 보스를 빠르게 다운 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SOM」은 함께 플레이하는 타인의 존재가 소통의 방식을 바꾸는 중요한 체험을 준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근간이 여기에서부터였다고 해도 그다지 과장은 아닐 수 있다. 동질성과 차이의 문제를 지나치면 그 다음 마주하게 되는 것은 필요성의 문제다. 차이의 발생과 필요성의 발생은 온건히 맞물리지 않는다. 클레릭이 있다면 치료를 요구할 수 있지만, 치료 마법은 게임 플레이의 충분 조건은 되더라도 필요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더 뛰어나면, 숙련되어 있다면, 적의 패턴을 잘 알고 있다면, 더 안전한 루트를 알고 있다면 '너'의 도움을 구태여 받을 이유는 없다. (물론 있는데 구태여 만류할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말이다.) 이제 '너'가 다르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되었다. 하지만 '너'가 필요하다는 문제가 근원으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너'는 여전히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문제 없는 상황이 된다. 그렇다면 '너'를 지우는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그건 공교롭게도 비디오 게임이 기술 기반의 매체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비디오 게임은 포커를, 바둑을, 보드게임을 혼자서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비디오 게임의 연산 처리 능력은, 때로 '너'의 필요성을 지우기 위해 동원된다. TT 게임즈의 레고 게임 시리즈는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샘플이다. 이 시리즈에는 '두 개의 버튼을 동시에 누르기', '한 사람이 플랫폼을 만들어준 사이에 점프해 넘어가기' 같은 협력 기반의 퍼즐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 과정에서 구태여 인간인 '너'를 필요로 하진 않는다. 홀로 플레이하는 나에게는 그 모든 일들을 보조할 AI 서포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캐릭터는 버튼을 함께 눌러주고, 내가 점프하는 동안에 플랫폼의 형성을 유지시켜 준다. 그러고보면 「SOM」에도 여러개의 발판 스위치를 눌러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긴 하지만, 그 근처에는 언제나 '사람을 대신할' 갑옷상像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떤 플레이어들은 이에 더해 적 캐릭터를 이용해 버튼을 누르기도 한다.) *「레고 호빗」(2014)같은 레고 비디오 게임들은 AI를 보조를 통해 협력의 퍼즐을 돌파할 수 있다. 물론 비디오 게임이 꼭 '너'를 느끼게 해줘야 하는가부터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에는 이미 ‘네’가 존재해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너’와 ‘나’를 어떻게 관계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더 논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이전까지 말한 두 가지 명제가 중요하게 작동한다. 그것은 첫째, 차이를 가질 것 그리고 둘째, 상대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 두가지 명제 중 하나라도 부재하다면, 우리는 비디오 게임의 세계에서 '너'를 요구하지 않게 될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이 모든 전제를 수렴한다면, 이 안에는 ‘나’와 ‘너’라는 관계의 문제가 따라붙는다. 즉, 1플레이어인 ‘나’에게 있어서 ‘너’는 무관계한 누군가가 되어서는 안된다. ‘너’는 필요한 협력의 존재로서 바로 ‘나의 플레이’라는 세계에 초대되어야 한다. 즉 ‘나’와 ‘너’가 함께 게임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사건이 된다. 오스트리아의 종교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세계를 맞이하는 사람의 몸은 두 종류의 근원어, ‘나-너’와 ‘나-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부버는 ‘나-너’라는 근원어는 ‘나’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우리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나-그것’의 근원어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며 이는 사뭇 운명적이다. 이 때, ‘나-그것’이라는 근원어는 내가 대상을 관찰, 계측, 수량화, 가치 매김 등으로 만드는 방향성을 지칭한다. 부버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형상과 흐름은 ‘나-그것’을 향해 가는 결정론을 지니기에, ‘나-너’에 대한 지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부버의 논의가 가진 거대함을 비디오 게임의 코옵 플레이에 적용하는 것이 상당히 어색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나-그것’이라는 근원어의 규정은 이상할 정도로 비디오 게임의 수량화된 세계를 감각하는 우리의 체계와 닮아있다. 그렇다면 비디오 게임에서의 ‘나-너’라는 관계, 대상을 ‘그것’이 아닌 더 본질의 무언가로 감각하고 존치시키는 방식에 대해서 더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헤이즈라이트와 강제적 코옵Mandatory Co-Op 헤이즈라이트의 ‘강제적 코옵Mandatory Co-Op’ 게임들, 「어 웨이 아웃」, 「잇 테익스 투」, 「스플릿 픽션」의 특징은 이러한 ‘나-너’라는 관계를 통해서만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은 게임의 기초적인 메커닉을 도해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결을 가진다. 단순히 협력적 게임 플레이, ‘내’가 무언가를 할 때 ‘너’의 도움을 받는다는 경험의 문제만으로는 이 게임들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서 도사리는 건 그보다는 더 명백한 조건이다. 이 게임들은 게임의 플레이를 위해 특정화된 ‘너’를 요구한다. 가장 알기 쉬운 조건은 ‘랜덤 온라인 매칭’의 비적용이다. 요제프 파레스는 이 게임들을 ‘소통이 가능한 누군가’와만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조건짓는다. 온라인 플레이는 가능하지만 불특정한 누군가와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특정할 수 있는 누군가와 온라인으로 즐기겠다면, 프렌즈 패스를 이용해 아주 쉽게 두 사람이 함께 플레이할 수 있다. 이 ‘강제적 코옵’ 플레이의 핵심은 모두 이 조건과 결부되어 있다. 이 조건에서 발생하는 것은 강력한 소통의 가능성이다. ‘동시에 또는 연속된 특정 행위를 함께 해서 상황을 돌파한다’는 전제조건에서 특별한 것이 작동하지 않는다. 헤이즈라이트의 게임들은 이 행위를 ‘직접적 소통의 방식을 통해’ 돌파하는 것을 유도하고 있다. 물론 플레이어가 원한다면 온라인을 통해서, 때로는 모르는 사람에게 프렌즈 패스를 전달해, 함께 플레이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하나 둘 셋’의 구호를 던져서 함께 빠져나가야 하는 손뼉치기의 형식에서 어색함을 느낀다면 이 게임들의 지향으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이 게임들은 플레이의 목적에 역전을 두고 있는 느낌도 든다. 그러니까 게임을 플레이 하기 위해 두 사람이 동원되기 보다는, 때로는 두 사람이 함께 하기 위해서 게임들이 동원된다는 바로 그 느낌 말이다. 특히 요제프 파레스가 이 게임들을 위해 준비해놓은 서사의 틀이 이런 감각을 확충시킨다. 파레스가 말했듯 이 게임들에는 각각의 ‘관계의 감정’이 코드처럼 준비되어 있다. 「어 웨이 아웃」은 신뢰, 「잇 테익스 투」는 사랑, 「스플릿 픽션」은 우정이다. 이 게임들의 서사는 이 관계 감정들의 실현 불가능 혹은 분열의 직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치 두 플레이어 사이에서도 이 관계들이 예비되어 있다는 듯이. 그런 면에서 앞서 말한 역전의 느낌은 게임 플레이 내내 도사린다. 마법의 사각형Magic Rectangle 그래서 이 게임들을 플레이할 때 느끼는 감각에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특정할 수 있는 누군가’라는 조건을 클리어 하고 나면, 함께 플레이하는 ‘너’와 게임이라는 매개를 통해 연결되는 듯한 느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실의 ‘너’는 현실의 조건들과 매개되어 있기에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함을 가진 대상이다. 하지만 「잇 테익스 투」를 매개한다면, ‘너’는 특정한 스테이지에서 ‘내’가 발사하는 못을 박아주는 망치가 되어준다. 못 만으로는 게임 내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매우 특별해진다. 스테이지의 구조에 따라서 ‘너’는 망치를 휘두르는 사람, 화염을 쏴주는 사람, 중력을 거스르는 사람이 되며, ‘나’ 혼자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함께 해결해주는 둘도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럼에도 더 특별한 것은 이것이 어떠한 ‘롤플레이’의 연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잇 테익스 투」를 플레이할 때, 조준에 자신이 없는 파트너가 ‘나’에게 못의 역할을 넘겨주고 자신은 망치의 역할을 가져간 경우가 있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코디와 메이의 입장을 역전시켰지만 그로 인한 혼란은 그다지 겪지 않았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누가 코디이고 누가 메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너’가 아닌 다른 이가 나에게 코디 또는 메이가 되어줄 수는 없었던 것일 뿐,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를 매개하는 ‘대역의 몸’을 바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스플릿 픽션」(2025)을 플레이 하다보면 서로의 특기를 따라 캐릭터를 교체하는 경우가 생긴다. 따라서 여기(=플레이의 장소)에는 4개의 몸이 있다. ‘나’, ‘너’, ‘리오/코디/미오’, ‘빈센트/메이/조이’라는 몸들. 실제의 몸과 디지털의 몸은 각각 묶음 쌍이 되어 서로를 교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실제와 디지털의 관계라면 언제든지 서로를 교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리고 ‘리오/코디/미오’와 ‘빈센트/메이/조이’가 각별해지는 만큼 실제의 몸들도 그러한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결과물로서의 컷씬을 감상하며 ‘우리’의 성취와 분열 가능성에 대한 연장된 소통을 나눈다. 이 안에는 외부와의 교환 불가능한, 내부에서만의 한정된 교환을 허가하는 닫힌 체계가 발생한다. 요한 하위징아의 단어를 전유하자면, 이는 ‘마법의 사각형’이다. 이 닫힌 사각형 내부는 정말로 제의적이다. 디지털의 몸이 ‘함께’ 체험하는 것은 미묘하게도 ‘우리’가 함께 체험하는 감각을 준다. ‘우리’가 함께함의 기능을 증가시킬 수록, 디지털의 몸이 나아가는 ‘함께’도 점차 효과적으로 변모한다. 디지털의 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감상의 대상이면서도 ‘우리’의 관심사가 된다. 즉, ‘우리’는 디지털의 몸을 매개하며 현실의 동시적 행위를 체험함과 동시에 디지털의 몸이 진행하는 서사를 감각한다. 사각형 안에서 네 개의 꼭짓점은 서로를 ‘그것’으로 인지하지 않는 관계적 울타리를 짓는다. 그렇기에 「어 웨이 아웃」의 마지막 부분, 빈센트의 배신과 대립의 구성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Gamecloud의 닉 밸런타인Nick Ballantyne은 이 게임의 후반부에 대해 《The What, Why & WTF: A Way Out’s Ending Sucked》 [2] 라는 강력한 제목으로 비판한다. 이런 비판은 대체로 강한 협력적 체계를 갑작스레 대립 구조로 바꿔 불편함을 야기했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하지만 마법의 사각형의 구조로 본다면 조금 관점이 달라진다. 이 게임에서 빈센트가 배신한 대상이 디지털의 파트너인 리오만이 아닌 것이다. 그는 현실의 ‘두 몸’ 까지도 배신한 것이 된다. (필요에 따라 디지털의 몸을 서로 바꿨을 수도 있는) ‘우리’는 그것을 조작하는 와중에도 빈센트의 진위와 진심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규약의 위반이며, 사각형의 마법을 깨어버릴 저주다. 이후의 작품들인 「잇 테익스 투」와 「스플릿 픽션」이 주인공들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심어놓을지언정, 다른 ‘셋’을 배신하지 않도록 구성하고 있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마법의 사각형은 비디오 게임이라는 ‘그것’의 세계에서 ‘우리’를 확고히 만들 수 있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사건이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 웨이 아웃」(2018)의 후반 전개가 주는 파격적인 배신감은 역설적으로 ‘마법의 사각형’의 존재를 확실히 알린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하나가 아닌 둘에서 시작되어 세계를 경험하게 될 때, 세계는 과연 무엇일까? 동일성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차이로부터 검증되고, 실행되고, 체험된 세계란 과연 무엇일까? 저는 사랑이란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 좀 더 솔직히 말해 차이의 관점에서 시련을 영위하는 것에 관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포함시키는 그런 계획입니다.” [3] 따라서 차이는 전제조건이어야 하지, 규약의 위배를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알려진 다름만이 다름으로 인정될 때에야 ‘우리’는 코옵이라는 사건과 마주할 수 있다. 가치없는 ‘너’와 마주하는 순간으로서 물론 이러한 규약의 힘과 에너지가 헤이즈라이트의 게임들에게서만 나오지는 않는다. 「킵 토킹 앤 노바디 익스플로드」나 「더 패스트 위딘」, 「레고 보이저스」같은 게임들 역시 특정화된 대상으로서의 ‘너’를 소환한다. 이 게임들에서 무엇인가를 달성하고, 함께 손뼉을 치고 기뻐할 때 ‘너’는 그 순간 특별한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부버는 ‘그것’의 세계에서 우리가 ‘너’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너’로 영원히 존재하는 종교적 대상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코옵 플레이를 통한다면, 일시적으로나마 ‘너’를 감각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이 때, ‘나’에게 ‘너’는 교환 불가능한 대상으로 남는다. 이 교환 불가능성은 ‘너’가 게임을 특별히 잘해서 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달성한 순간은 달성의 정도와 무관하게 영원히 감각으로만 남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너’가 아닌 다른 누구를 앉힌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대체할 수는 없게 된다. 이것이 코옵 플레이의 마술이다. 앞서 언급한 조건들, 차이를 가질 것과 필요로 할 것이 만족된다면 특별한 ‘우리’가 탄생할 조건도 될 수 있다. 대체불가능성의 탄생이다. 빌럼 플루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타자인 너는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죽으면 내가 너에 관하여 어떤 손실을 입는 것이 아니라 너의 죽음을 통해 모든 사물들이 가치를 잃는 것이다. 사물들이 가치를 지니는 것은 내가 그것들을 교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교환하는 이유는 내가 네 안에서 나를 알아보기 때문이다. 나의 타자인 너는 모든 가치의 무가치한 기반이다.” [4] 우리는 삶에서 ‘가치없는 너’를 얼마나 경험할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나와 다른 ‘너’가, 게임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존재가 될 때에 우리는 교환 불가능한 경험으로서의 ‘우리’를 맛볼 수 있게 된다. 비디오 게임이라는 필요성의 세계가, 그러니까 ‘그것’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느낄 수 있다는 아이러니야 말로 ‘우리’가 ‘함께’ 게임을 하는 이유가 된다. 플루서는 이어서 ‘나’와 ‘너’는 죽을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불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의 게임은 불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옵 플레이는 비디오 게임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이 되리라. * 통신을 주고 받는 「레고 보이저스」(2025)의 두 주인공들 [1] 「서유항마록」의 세 플레이어 캐릭터는 기초적인 조작계를 공유하며, 어느 정도의 능력치 차이를 가진다. 하지만 일종의 특수 공격인 대금단大金丹을 소모하는 공격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2] https://gamecloud.net.au/features/opinion/a-way-outs-ending-sucked [3]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조재룡 역, 도서출판 길(2010) [4] 빌럼 플루서 「사물과 비사물」, 김태희·김태한 역, 필로소픽(2023)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혼례-귀신-사랑 : <종이혼례복> 시리즈와 ‘중국식 공포’의 유행
최근 중국 내 추리 게임에는 ‘중국식 공포’가 유행하고 있다. <페이퍼돌스>(纸人; 리치컬쳐, 2019)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回门; 핀치게임즈, 2021)은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의 오래된 저택에 들어가 결혼과 장례, 장례용 종이인형, 풍수 등 민속을 바탕으로 스릴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 Back 15 GG Vol. 23.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Activist, Writer) Xu Jia (Activist, Writer) Myeonggyo Hong Activist and writer. Works at the social movement organization Platform C on East Asian international solidarity and social movements. Author of To My Vanished Chinese Friend and A Ghost Throws a Punch at the World, and translator of Xinjiang Uyghur Dystopia and Dying for an iPhone (co-translated).
- 물류는 게임 속에 어떻게 재현되는가
물류 전문기자로 살아온 것이 어언 10여년. 필자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으니 “물류는 어디에든 있다”이다. 물류(物類)란 그 단어가 품은 의미처럼 ‘만물의 이동’이다. 우리가 물류라고 굳이 인식하진 않겠지만, 매일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오늘 입고 신은 옷가지와 신발, 식당에서 사용한 식기와 반찬 종지까지 모든 것에는 물류가 따라왔다. < Back 물류는 게임 속에 어떻게 재현되는가 18 GG Vol. 24. 6. 10. 물류 전문기자로 살아온 것이 어언 10여년. 필자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으니 “물류는 어디에든 있다”이다. 물류(物類)란 그 단어가 품은 의미처럼 ‘만물의 이동’이다. 우리가 물류라고 굳이 인식하진 않겠지만, 매일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오늘 입고 신은 옷가지와 신발, 식당에서 사용한 식기와 반찬 종지까지 모든 것에는 물류가 따라왔다. 그리고 물류는 많은 경우 효율을 목표한다. 역시나 인식하진 않았겠지만, 이미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활 속 물류 효율을 높이고자 노력한 경험이 있다. 예컨대 늦잠으로 지각 위기에 처한 어느 날 지하철, 버스, 택시, 전동킥보드, 도보 등 각종 이동수단을 조합하여 회사까지 이동하는 최단경로, 최단시간을 구해본 기억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물류가 추구하는 ‘최적화’다. 혼자만 이동하는 것은 그나마 쉬워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수천~수만명에 달하는 직장인들의 주거지부터 회사까지 특정 시간의 출근 이동을 ‘최단 시간’을 목표로 최적화하고자 한다면 어떨까. 여기에 5000원 이하의 금액을 사용해야 한다는 ‘제약’이 걸려있다면 어떨까. 갑작스러운 폭우와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이 겹쳐버렸다면 어떨까. 최단 시간을 산출하기 위해 고려할 변수는 말 그대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개인의 경험으로 최적화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선다. 흔히 우리는 화물을 나르는 택배기사, 창고 노동자의 집품과 포장 업무와 같이 눈에 보이는 단순 반복 노동만을 ‘물류’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 각 기업 물류 관리자들이 하는 일은 노동집약적인 물적 이동(물론 이들도 급하면 단순 반복 노동 현장에 투입된다.)이 아니다. 각자의 제약조건 속에서 비용 절감이나 일정 % 이상의 당일 출고율과 같은 서비스 지표 달성을 목표로 모든 물류를 최적화하는 것이 이들의 일이다. ‘물류’는 가상 세계에도 존재할 수 있나 모든 이동의 맥락에 ‘물류’가 녹아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가상 세계인 게임 속에서도 물류는 존재한다. 그리고 게임 속 물류에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효율을 추구하고 있다. 예컨대 <마비노기>에서 이동수단인 ‘말’을 구매하여 탑승한다면, 말이 없을 때보다 빠른 속도로 필드를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와 동승자의 시간의 효율을 높일 수 있고, 그 자체로 과시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말은 멋있으니까. 다른 예로 <디아블로>의 인벤토리와 창고는 그 자체로 최적화의 도구다. 한정된 공간이라는 제약 속에서 가치 있는 것을 추려서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니 말이다. 공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가치 없는 것은 과감히 버리고, 가치 있는 것을 남기는 선택의 연속을 강요받는데, 현실 세계의 물류에서도 이와 유사한 맥락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게임 속 물류가 추구하는 효율화의 방향은 현실 속 물류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꽤나 다르다. 그 이유는 게임은 기본적으로 현실과 연동되지 않은 가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물류는 실체의 이동을 다루지만, 게임의 물류는 가상의 데이터 패킷의 이동을 다룬다. 따라서 게임 속에서 보관하거나 이동시킨 재화는 게임 안에 남아있을 뿐 현실의 가치로 연결되지 못한다. (메타버스 시대(?)가 왔다지만, 아직 가상의 물류를 완연하게 현실의 움직임으로 구현한 사례는 많지 않다. 산업용 디지털 트윈이 어느 정도 그 역할을 할 뿐.) 이러한 차이점으로 인해 게임 속 물류는 현실 속 물류가 추구하는 ‘비용 절감’이라던가 ‘생산성 향상’과 같은 목표를 추구하기 어렵다. 대신 전혀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형태로 진화했다. 그것은 애초에 우리가 게임을 하는 이유인 ‘재미’에서 찾을 수 있다. 게임 속 물류 또한 플레이어의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갖은 예외를 허용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해도 과언 아니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본다. 데스 스트랜딩과 유로트럭 : 재미가 ‘목적’인 경우 코지마 히데오의 <데스 스트랜딩>은 세간에 ‘택배 게임’이라 알려졌으며, 이는 어느 정도 틀린 말이 아니다. 초자연적인 재난으로 멸망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묵시록 세계관의 미래에서 ‘전설의 배달부’라는 별명을 가진 주인공이 겪는 일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의 주 내용은 특정 출발지부터 목적지까지 다양한 물성의 화물을 가능한 빠르고, 안전하고 확실하게 운송하는 것이다. 물류학 교과서에 나오는 현실 물류의 목적인 3S(Speedy, Safety, Surely)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데스 스트랜딩>이 정말로 현실 세계 택배기사의 하루하루를 다룬 게임이었다면 재밌었을까. 여러 주거단지를 돌면서 하루에만 300여개에 달하는 박스를 묘기처럼 배송하는 현실 택배 업무를 시뮬레이션으로 구현한 게임을 한다면 처음에는 재밌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이 매일매일 똑같은 곳에서, 거의 동일한 업무로, 오랜 시간 반복되면 어떨까. 더군다나 현실 속 물류는 물량을 나른 만큼 ‘돈’이라도 주는데, 게임 속 물류는 실체적인 보상은 아무 것도 없다. 당연히 플레이어는 금방 싫증을 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진짜 화물운송 하는 시뮬레이션인데 ‘힐링 게임’으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던 <유로트럭 시뮬레이터>를 꺼내면서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건 진짜 현실 세계 화물운송 트럭커의 일상을 다룬 게임이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로트럭 시뮬레이터>에서도 재미를 위한 많은 예외조건들이 설정돼있다. 먼저 유로트럭 플레이어들은 현실 세계 트럭커처럼 ‘삶’의 압박을 느끼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스스로 일거리를 선택할 수 있고, 심지어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유럽 도시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유랑을 떠나는 선택을 해도 괜찮다. 처음에는 트럭커로 시작할지언정, 성장 과정을 거치며 거대한 운송회사를 경영하는 재미 또한 느낄 수 있다. 또 사고에 대한 위협에서도 자유롭다. 장시간 휴식을 취하지 않고 운전을 계속 하면, 화면이 블랙아웃 되는 졸음운전까지 구현된 <유로트럭 시뮬레이터>지만, 졸음운전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다. 심지어 고속도로에서 시속 150km로 달리다가 5중 추돌 사고가 나더라도 <유로트럭 시뮬레이터> 세계관에서는 그대로 업무 재개가 가능하다. 벌금과 수리비만 좀 차감될 뿐이다. 물론 어느 순간이 되면 운행 과정에서 차감된 예산으로 인해 파산을 걱정하는 단계가 올 수 있지만, 알게 뭐람. 다시 시작을 누르면 그만이다. <데스 스트랜딩>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건 ‘택배도’ 하는 게임이지, 택배만 하는 게임이 아니다. 처음에는 인편으로 배송 업무를 하다가 점차 바이크 등 운송수단을 활용할 수 있고 드론, 로봇 등 대신 물류를 시킬 수단들도 추가된다. 심지어 택배기사의 역할을 뛰어넘어서,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로나 집라인 인프라를 설치하는 등 건설 시뮬레이션과 같은 재미 또한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게임 내 ‘물류 효율’을 높이는 수단이 되는데, 점점 택배왕이 돼가는 캐릭터를 보면서 MMORPG에서 레벨업을 하고 강해지는 내 캐릭터를 보는 것과 비슷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더군다나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이후 택배를 할지 안 할지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플레이어의 의지다. 광활하게 펼쳐진 <데스 스트랜딩>의 오픈월드는 그야말로 다채로운 재미를 준다. 묵시록 세계관의 북미 대륙을 유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그 와중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을 체험할 수 있다. 택배화물을 노리는 사이버펑크 도적단(뮬)과 초반에는 공격할 수단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초자연적인 존재(BT)들이 필드를 돌아다님은 물론이고, 피부에 직접 닿으면 급격하게 노화돼 죽음에까지 이르는 비(타임폴)가 내리기도 한다. 사실 이런 것들은 현실 물류에서는 당장 내일 물류 업무를 그만둬야 하는 대재앙이지만, 게임 속에서는 그저 극복해야 할 대상이자 재미 요소다. 게임 시작 시점에는 대항할 수단조차 마땅치 않았던 적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쉽게 소탕할 수 있는 대상이 되며, 더 나아가선 택배랑 상관없이 액션 게임처럼 게임을 즐기는 것도 플레이어의 자유가 된다. <올팜>과 <치킨 키우기> : 재미가 ‘수단’인 경우 앞서 설명했던 게임 속 물류가 그 자체로 게임을 하는 이유가 되는 ‘재미’를 만드는 장치 중 하나로 기능했다면, 게임 속 물류를 재미와는 별개의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례 또한 존재한다. 앞서 완연한 메타버스 따위는 없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게임 속 물류가 현실 가치와 일부나마 결합되는 사례들이 나타난다. 어느 순간 국내 이커머스 업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앱테크 게임(앱을 통해 재테크가 가능한 게임)’이라 불리는 이들이 대표적인 예다. 올웨이즈의 <올팜>을 시작으로, 컬리의 <마이컬리팜>, 오늘의집의 <오늘의 가든>, 두잇의 <치킨 키우기>, 11번가의 <11키티즈>, 이마트의 <이마트팜> 등 종류도 다양하다. 앱테크 게임은 하나 같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치킨이든 무언가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들을 목표한 수준까지 성장시킨다면, 이에 대한 보상으로 현실 세계의 무엇인가를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올팜>의 경우 나무를 다 키우면 고구마 등 현실 세계의 작물을 택배로 받을 수 있다. <치킨 키우기>에서 병아리를 다 키우면 교촌치킨 허니콤보 한 세트를 배달 주문할 수 있다. 게임에서의 노력이 진짜 현실 세계 물류와 연결돼 플레이어에게 ‘실물 상품’ 보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앱테크 게임은 일반적인 게임과는 운영 목표가 다르다. 사실 게임이 재미를 추구하는 이유는, ‘재미’라는 가치가 수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게임이 재밌어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더 많은 사람이 게임을 구매하여 실질적인 판매 매출이 늘어난다. 게임을 무료 배포하더라도 게임 내 성장재화 및 꾸미기 아이템 매출과 연결시킬 수 있다. 즉 재미는 트래픽을 만들고, 트래픽은 게임사의 매출과 연결되는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앞서 예시로 언급한 앱테크 게임들은 모두 ‘무료’로 플레이할 수 있으며, 성장재화 또한 유료로 판매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많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더라도 게임을 통해서 개발사가 얻는 수익은 0에 수렴한다. 오히려 목표를 달성한 플레이어에 대한 보상 지급으로 비용을 게임 운영사가 감당하기 때문에, ‘적자’를 가속화시킬 수 있는 위기 요인이 된다. 이커머스 기업들이 이 공짜 게임들을 운영하는 이유를 일반적인 게임의 문법에서 찾으면 그야말로 답이 안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행처럼 앱테크 게임이 번지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앱테크 게임의 보상비용은 이커머스 기업들이 고객 획득을 위해 통상 투하하던 ‘마케팅 비용’을 대체한다. 인스타그램, 네이버, 카카오 등지에 광고하는 데 사용했던 비용을 자체 앱 서비스에 투하함으로 오히려 더 높은 고객의 가입 전환, 구매 전환 효과를 노리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앱테크 게임 플레이어는 성장 재화를 확보하기 위해서 기업이 유도하는 다양한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단순한 게임내 액션만으로 빠른 성장을 만드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인데, 따라서 친구를 커머스 앱에 초대하거나, 특정 상품 페이지를 몇 초 이상 보거나, 아니면 실제 상품을 구매하는 등의 미션을 게임 내 성장을 위해 자발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는 게임이 그 자체로 고객의 정량화된 행동을 유도하는 강력한 ‘퍼포먼스 마케팅’ 도구가 됐다는 걸 의미한다. 이커머스 기업은 이를 통해 쇼핑앱 방문과 체류 시간을 늘리고 실제 상품 판매량을 늘리거나, 여기 광고 등 판매자 대상 B2B 수익모델을 결합시켜서 게임 운영과 보상에 사용한 비용 이상의 매출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앱테크 게임에서 실물 보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물류’는 더 큰 목표인 매출 창출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 자체로 재미를 주기 위한 목적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보상을 지급받은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여기 물류가 따라왔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항해시대>와 홍해 해적 :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면 정리하자면 게임 속 물류는 현실 속 물류와 마찬가지로 ‘효율’을 추구하나, 그 목적은 전혀 다르다. 먼저 게임 속 물류는 매출 증대를 위해 ‘재미’를 추구하지만, 현실 속 물류는 오히려 ‘안정성’을 추구한다. 그것이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등 물류 수익성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임 속 물류는 재미를 위해서 최대한 매일매일 다양한 사건이 일어나면 좋다. 예컨대 <대항해시대>에서 플레이어의 미션을 가로막는 해적은 성장 재화를 모아 동료를 모으고, 선단을 강화하여 언젠가 무찌를 수 있는 대상이다. 심지어 게임의 핵심 콘텐츠인 무역은 내팽개치고, 플레이어 스스로가 해적이 돼서 전혀 다른 형태의 재미를 추구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 세계의 해적은 어떠한가. 바로 지금 이집트 수에즈운하를 지나는 핵심 항로인 ‘홍해’를 지나는 민간 선박들에 예멘 반군의 미사일 공격이 날아오고 있다. 기업은 이러한 위기를 감수하고 기존 홍해 항로를 통과하거나, 위기를 회피하는 대신 훨씬 더 높은 비용을 감수하고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우회하는 항로를 택하는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강요받는다. <대항해시대>처럼 민간 물류회사가 국가도 어쩌지 못하는 반군을 토벌하거나, 역으로 해적왕이 되는 선택지로 가는 건 도저히 현실적이지 않다는 건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다음으로 재미를 충성고객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앱테크 게임에 있어서도 현실 세계의 물류 효율과는 다른 맥락은 관측된다. 앱테크 게임에서 물류는 고객 행동을 유도하는 보상 장치다. 재미를 목적으로 게임을 하는데 겸사 실물 상품도 보상으로 주니 좋다고 생각하는 사용자들이 앱테크 게임을 플레이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의 물류는 ‘삶’의 문제이고, 같은 관점에서 앱테크 게임의 보상은 터무니없는 수준이다. <올팜>에서 고구마 한 박스를 선물 받으려면 몇 달 넘게 게임을 플레이해야 하는데, 이게 우리의 본업이라고 생각하면 과연 용납이 되나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현실 세계의 물류는 자유롭게 언제든 안하면 그만인 게임이 아니라, 당장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 나가야 하는 ‘일자리’인 것이다. 요컨대 게임 속 물류가 우리에게 재미있게 다가왔던 이유는 그것이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게임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 재미는 희석될 가능성이 높다. 생각해보자. 리세마라를 돌리면서 ID를 팔아먹는 유통업자들은 좋은 캐릭터를 얻기 위해 무의미하게 게임을 반복하면서 과연 즐거웠을까. 어쩌면 게임 속 물류의 즐거움은 그것이 물류라고 느껴지지 않을 때에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Tags: 유통, 최적화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커넥터스 대표) 엄지용 버티컬 콘텐츠로 아름답게 돈 벌기에 관심 많은 야생의 콘텐츠 잡부. 여러 버티컬 미디어에서 콘텐츠 창작자 및 커뮤니티 기획자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2021년 9월부터 유통물류 콘텐츠 기반 비즈니스 멤버십이자 커뮤니티 ‘커넥터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게임 요리에서는 아무 맛이 나지 않는걸
그러나, 다른 여느 일상의 메커니즘처럼 요리를 게임에 구현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핵심 가치인 맛이라는 스테이터스를 플레이어들에게 현실과 동일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게임에서 이러한 행위, 또는 메커니즘은 수치화를 기반으로 재창조될 수 밖에 없고, 요리 또한 그렇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 수치화가 대략 가늠이라도 잡히는 다른 요소에 비해 맛이라는 가치를 파라미터로 표현할 수 있을까? < Back 하지만, 게임 요리에서는 아무 맛이 나지 않는걸 30 GG Vol. 26. 6. 10. 게임의 수많은 게임 플레이와 메커니즘은 현실의 그것을 모방하는 식으로 구현되곤 한다. 자연 법칙, 행정 절차, 인문학적 상식 등등 수많은 행위 또는 현상의 시뮬레이팅은 게임의 기본이다. 게임을 하다보면 느끼는 또 하나의 재미는 이렇게 모사된 현실의 현상이나 행위들이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달라지는지 찾아보는 일이다. 그러한 대표적인, 게임 속에서 매우 자주 찾아볼 수 있지만 구현의 딜레마가 느껴지는 메커니즘 중 하나는 바로 요리다. 의식주 중의 하나로 우리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지만 게임에서는 항상 구현의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요리란 레시피라는 공식을 따라가는 행위이다. 아무리 간단한 음식도 조리법이 있기 마련. 때문에 과정을 실수 없이 해내야 하는 퍼즐 요소로서 수많은 게임에서 활용되었다. 문제는 요리를 하나의 게임 플레이로 구현할 때, 성공의 이면에는 실패가 있다는 점이고, 요리를 하고 나면 발생하는 음식이라는 결과물이 있다는 점이다. 모든 게임플레이에서, 실패의 위험이 있기에 성공의 가치가 생겨나는 법이다. 그런데 요리에서의 실패는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다. 일단 ‘실패한 요리’ 란 무엇일까? 현실에서는 어떤 요리를 실패한다고 하던가? 간단히 생각했을 때, 관건은 역시 ‘맛’ 이다. 어쨌거나 소화 가능한 유기물이라면 모두 가능한 영양분 섭취라는 면을 제외하고, 요리,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맛이다. 특히 요리라는 과정을 볼 때, 우리가 어떠한 레시피라는 공식을 따르는 이유 자체는 적절한 조리를 거쳐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기 위함이기에 ‘레시피를 따라 조리하는’ 요리라는 과정의 성공 여부는 결국 맛에 좌우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여느 일상의 메커니즘처럼 요리를 게임에 구현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핵심 가치인 맛이라는 스테이터스를 플레이어들에게 현실과 동일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게임에서 이러한 행위, 또는 메커니즘은 수치화를 기반으로 재창조될 수 밖에 없고, 요리 또한 그렇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 수치화가 대략 가늠이라도 잡히는 다른 요소에 비해 맛이라는 가치를 파라미터로 표현할 수 있을까? 결국 현실에서 실패한 요리와 게임의 실패한 요리는, 이러한 감각 전달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요리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건 맛이 거의 전부라 해도 거짓이 아닐진대, 게임에서는 그 맛을 전달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맛있음’ 을 기반으로 성공을 재정의하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진다. ‘맛있는 요리’ 또는 ‘맛있는 음식’ 이란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맛있음’ 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효과로 정의될 수 있는가? 고민 끝에, 수많은 게임들은 이러한 ‘맛있음’ 의 효과를 일종의 섭취한 플레이어의 상승효과로서 받아들였다. 맛있는 음식은 기본적으로 섭취한 인간의 행복을 고양시킨다. 부차적으로 만약 그 음식의 재료들이나 조리 방법이 특히 건강할 경우, 육체적으로 긍정적인 효과가 있음도 자명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게임 속 음식, 요리들은 섭취자에게 버프를 제공하고, 더 귀한 식재료를 쓰고, 더 복잡한 조리 과정을 거치고, 더 맛있는 형태일 때(통솔적인 의미에서) 더 좋은 효과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다른 문제는 이러한 스테이터스 강화 요소가 모든 게임에 항상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게임에서 ‘맛있는 요리’ 라는 결과물을 판단하려면, 그 게임에서 ‘맛없는 요리’ 또는 ‘실패한 요리’ 는 어떠한 형태를 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봐야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게임 속 ‘실패한 요리’ 의 유형을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각각 이렇다. 1. 아예 음식이 만들어지지 않음. 2. 부정적인 효과가 달리거나 긍정적 효과가 적은 별도의 ‘실패한 음식’ 이 생성됨. 3. 실패한 요리=게임 오버 또는 임무 실패. 첫번째, 요리에 실패할 경우 아예 음식이 만들어지지 않는 경우는 가깝게는 ‘마비노기 모바일’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게임의 경우 요리는 확률 생성에 기반하여, 10% 단위로 끊긴 성공 확률에 따라 제작대에 재료를 투입하고 확률적으로 음식이 만들어진다. 매우 단순한 방식이다. 두번째, 요리에 성능이 다른 실패한 요리가 별도로 생성되는 경우 또한 매우 많은 게임이 채택하고 있는 방식이다. 대표적으로 ‘몬스터 헌터’ 시리즈를 보면, 전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고기를 굽는 액션은 기본적으로 타이밍에 맞춰 버튼을 눌러야 하는 간단한 퍼즐의 형태다. 고기가 구워지는 도중 고기는 3단계에 걸쳐 모습이 변하고, 구워지는 고기가 적절하게 익은 모습일 때 버튼을 눌러 완료하는 형태다. 실패한다면 덜익은 고기나 탄 고기가 생성되고, 이들은 그 긍정적인 효과(스태미너 증가)가 적게 설정되어 있다. 세번째, 요리의 성공/실패 여부가 게임의 성공/실패 여부 자체를 판가름 하는 기준인 게임들도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는 아예 요리를 협심해서 만드는게 목표인 ‘오버쿡드!’ 가 있으며, ‘커피톡’ 시리즈 역시 넓게는 여기에 포함할 수 있다. ‘커피톡’ 에서는 어떤 재료를 넣더라도 음료는 만들어지지만, 누군가에게 무언가 제공해야 하는 정답이 정해져 있고, 이들이 두루뭉술하게 주문하는 재료의 조합을 가지고 하나하나 맞추어 완성해 제공해야 한다. 즉, 여기서는 요리 자체의 완성이 아니라 ‘먹는 사람의 기호를 맞추는 것’ 까지가 성공적인 요리라는 의미이며, 이를 맞추는 건 게임의 엔딩과 업적 달성에 영향을 주니 게임의 성취도 자체로 음식의 성공을 판가름하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두번째 케이스들이다. 어쨌거나 게임의 아이템 데이터 베이스를 쓸모가 그저 ‘실패 판정’ 인 아이템이 차지하고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사하중이나 다름 없다. 그 뿐 아니라 여러가지 이유로 이 ‘실패한 요리’ 가 쓰임새를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이렇게 만들어지는 ‘실패한 요리’ 가 특별한, 또는 유용한 쓰임새를 가진 게임들을 살펴보면 ‘룬 팩토리’ 시리즈와 대중적인 게임 중에서는 ‘원신’ 이 있다. (이미지 출처 : 룬 팩토리 4 정보봇 @RF4_KR_info) ‘룬 팩토리’ 시리즈의 실패한 요리는 레시피에서 어긋난 요리를 하게 되면 발생한다. 이 요리들은 적에게 디버프를 거는 용도로 쓰일 수 있고, 또 일부 괴상한 취향을 가진 NPC 에게 주어 호감도를 올리는 용도로 쓰인다. ‘원신’ 에서도 실패한 요리는 비슷한 쓰임이 있다. 이상한 요리를 만들어 접대하거나,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 선물하기도 한다. 또 업적 중에도 이 이상한 요리를 만들어내는게 있다. 또한, ‘몬스터 헌터’ 에서도 일부 아이템의 재료로서 잘못 구워진 고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요리를 일종의 스킬 체크로 활용하는 방식과 음식이라는 아이템을 얻기 위한 허들로서 활용하는 방식 두가지에 따라 게임 속 ‘요리’ 와 ‘음식’ 의 위상이 달라진다. ‘오버쿡드!’ 와 ‘커피톡’ 은 요리라는 스킬 체크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활용하는 게임들이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나 ‘룬 팩토리’ 시리즈, ‘마비노기 모바일’ 등은 음식이라는 아이템을 얻기 위한 과정이고, 이에 실패할 경우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을 얻게 되는 식이다. 그리고 이쯤 오면, 이들 요리를 판단하는데 ‘맛’ 이 대체 무슨 상관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서 이야기했듯, 근본적으로 이러한 괴리는 게임 속 ‘요리’ 라는 개념이 플레이어에게 직접적으로 그 맛을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의 ‘실패한 요리’ 와 개념적으로나 표현적으로나 차이가 생기는데서 발생한다. 현실의 요리는 ‘맛이 없다’ 고 하면 끝이지만, 그 맛이라는게 게임 속에서는 전달할 수 없으니 그 ‘실패’ 를 여러 개념으로 대체하다보니 생기는 일이다. 비슷한 느낌은 현실에서도 있다. 맛있는 요리를 구분하는데 있어 절대적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먹기엔 맛이 없는데, 다른 사람이 먹으면 괜찮고, 또는 만족한 맛은 아닌데 가격 생각하면 괜찮은 것 같고, 또 보기에는 나쁘지 않고... 반대로 나쁘지 않지만 이 가격에 이 수준이면 안될 것 같고. 현실에서 ‘맛있는 요리’ 를 구분하는데에 ‘맛’ 이 지배적이라는데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지만, 그 ‘맛’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기대치, 취향 자체가 모두 다르니 오히려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기 어렵다. 결국 게임에서의 요리의 성공과 실패는 현실과는 달리 명확한 기준이 필요했고, 둘은 극적으로 대비되어야만 했다. 더구나 이러한 요리, 그리고 음식이라는 아이템이 게임마다 가지는 플레이에서의 비중이 다르기 때문에 ‘실패한 요리’ 라는 개념은 여기저기 분화하게 되었고, 그 ‘실패한 요리’ 의 대척으로서 ‘성공한 요리’ 또한 변화해 왔다보니 현실의 요리와 게임 상의 요리 상의 괴리가 좁혀지기는 커녕 벌어지기만 했다. 즉 게임 상에서 현실의 요리를 최대한 모사하려던 시도가 결국 또 거리감을 오히려 만드는 셈.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게임 속 요리의 가치 기준이 현실과 아예 상관이 없어져도 되는 건 아니다. 결국 게임 속에 등장하는 요리와 레시피는 현실의 것을 따오거나 그에 기반할 수 밖에 없고, 과거 유행했던 플래시 게임 ‘고향만두’ 처럼 엉터리 스킬체크로 가득하다면 게임이 보여주는 요리에 전혀 공감할 수 없게 된다. 요는 플레이어가 직접 게임 상에서 맛을 보지는 못하지만, 레시피와 외형, 그리고 조리 과정 등을 통해 그 맛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맛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 맛으로 연결되는 논리적 연관성(조리법, 외형, 재료의 종류 등)을 설득력 있게 내어야 그나마 게임 속 요리와 현실 요리의 간극을 좁히고 맛을 간접적으로 연상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게임 내에 등장하는 요리/음식이 특별하게 기억에 남은 경우는 그 맛을 어떻게 표현했느냐보다도, 맛을 제외한 다른 음식의 특성을 이용하여 요리가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했을 때였다. 애초에 맛으로 승부할 수 없다면, 감성으로 승부하면 된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에서 어떤 확실한 가치나 대단한 목적이 아닌, 그저 평범한 행위로서 하는 요리가 더 깊게 기억에 남고 의미가 있는 경우도 있다. ‘천수의 사쿠나 히메’ 에서 농사를 하고 밥을 짓는건 그다지 특출난 게임 플레이도 아니고 대단한 요리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 자체로 값지게 쌀을 수확해 밥을 지어 동료들과 나눠먹는 기억이 너무나 특별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커피톡’ 시리즈에서도 어떤 음료를 탄다고 해서 대단한 효과가 돌아오는건 아니지만, 마시고 난 캐릭터가 “마음에 들어요.” 라고 하는 말 하나를 듣기 위해서 레시피를 검토하며 몇 번이고 재시도를 하곤 했다. 정말 일상적인 요소이지만 요리가 가져다주는 만족감은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하기 때문이고, 요리란 어떤 과정 속에서 플레이어의 행동과 몰입감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 예를 들어 ‘몬스터 헌터’ 시리즈에서의 요리와 음식은 어디까지나 주된 콘텐츠가 아닌 사냥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부이고 플레이어의 준비 상태를 점검하는 기능이기도 하다. 그만큼 앞서 소개한 게임들 중 게임 내에서 작거나 크거나 요리가 구현되었을 때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는 메커니즘의 논리나 구현의 적절함 만큼이나 ‘요리’ 라는 행위가 들어갈 당위성이 크게 영향을 미쳐왔다. 요리는 게임 속 일상성을 유지하고 플레이어의 몰입을 끌어들이는 요소이고, 때론 게임 내 다른 캐릭터와의 유대를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결국 게임이나 현실이나 요리와 음식의 쓰임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맛을 느낄 수 있냐 없냐이고, 이런 면에서는 우리가 직접 섭취하는 음식이 아니라 브라운관을 통해서 보는 간접 경험으로서의 요리, 음식과 맥락이 맞닿아 있는 것 같다. 핵심 감각을 배제한 상태에서 어떠한 물질의 특성을 표현하는 건 언뜻 불가능해보이지만, 때론 보이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알 수 있듯이 훌륭한 요리, 맛있는 음식의 가치는 다른 방식으로라도 전달되기 마련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물류는 게임 속에 어떻게 재현되는가
물류 전문기자로 살아온 것이 어언 10여년. 필자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으니 “물류는 어디에든 있다”이다. 물류(物類)란 그 단어가 품은 의미처럼 ‘만물의 이동’이다. 우리가 물류라고 굳이 인식하진 않겠지만, 매일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오늘 입고 신은 옷가지와 신발, 식당에서 사용한 식기와 반찬 종지까지 모든 것에는 물류가 따라왔다. < Back 18 GG Vol. 24. 6. 10. Tags: 유통, 최적화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iyong Um A wild content jack-of-all-trades, keenly interested in making money beautifully through vertical content. Drawing on experience as a content creator and community planner across various vertical media, has run "Connectus"—a business membership and community built on distribution and logistics content—since September 2021.
- <폴아웃 3>로 보는 후쿠시마 오염수 사태
인간은 절멸을 앞둔 위기 속에서도 ‘프로젝트 퓨리티’가 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계속 노력할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로 방사능 비가 내리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상기에 서술한 문제가 실제로 발생하거나 그것이 우려될 때, 인류는 블레이드 러너의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인류는 살아갈 것이고 또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오늘의 결정을 신중히 하고 혹시 다른 대안이 없는지 좀 더 찾아보자는 주장은 보편타당성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우려나 악몽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남의 발언을 선동으로 규정하는 선동이 더 위험한 세상 아닌가? < Back 14 GG Vol. 23. 10. 10. Tags: 후쿠시마, 오염수, 폴아웃3, 프로젝트퓨리티, GECK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Kim is known for his activities as a critical expert on current affairs in various press media. But he is also an active gamer who never let go of games. Some of his publications includes 『a cynical society』, 『Otaku Loved Lenin』, as well as a co-author of 『Now, Here, Far-Rightism』, 『right-wing discontent』, 『Twitter, that 140-character egalitarianism』. His latest publication is 『Democracy where you vote because you don't like that side』.





![[Editor's View] 무던히도 게임이 많았던 2023년을 마무리하며](https://static.wixstatic.com/media/d03518_d7b2758a51c7467cb550da0d64068a8f~mv2.png/v1/fit/w_176,h_124,q_85,usm_0.66_1.00_0.01,blur_3,enc_auto/d03518_d7b2758a51c7467cb550da0d64068a8f~mv2.p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