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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회공모전수상작] 게임은 어떻게 우리를 소외시키는가
소외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인간 집단에서 배제되어 외로움을 느낀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에서 소외라고 말하면 대체로 이를 의미한다. 반면 다른 하나는 철학 특히 마르크스가 주로 사용한 의미로, 한 인간이 특정 대상에 대한 주권을 상실하여 더 이상 주체로 있지 못 하고 오히려 그 대상의 객체로 전락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권리와 정체성이 외부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 상태를 뜻한다. < Back [4회공모전수상작] 게임은 어떻게 우리를 소외시키는가 26 GG Vol. 25. 10. 10.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1] ' 소외 '소외'만큼 현시대의 인간상을 관통하는 단어가 있을까. 소외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인간 집단에서 배제되어 외로움을 느낀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에서 소외라고 말하면 대체로 이를 의미한다. 반면 다른 하나는 철학 특히 마르크스가 주로 사용한 의미로, 한 인간이 특정 대상에 대한 주권을 상실하여 더 이상 주체로 있지 못 하고 오히려 그 대상의 객체로 전락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권리와 정체성이 외부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전자가 명확한 사회적 사건이라서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한 것과 달리, 후자는 개인 내부의 실존적 문제기 때문에 원인과 해법을 분별하기는커녕 그 존재조차 파악하기 어렵고, 그래서 인류 역사에서 오랜 기간 동안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서 '개인'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자리 잡자 자연스레 그 개인의 문제인 소외 또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됐다. 이후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그 학술적 사회적 중요성은 점점 커지더니, 소외란 -'그저 나쁜 상태'가 아닌- 인간 존재에 내재된 본성임이 밝혀졌다. 이는 곧 소외가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알아낼 열쇠 중 하나라는 의미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인간인 이상 결코 소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탓에 실존적 위기로써 소외가 다뤄진 지 근 2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소외에 시달리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사회가 다각화되고 새로운 기술과 위기가 등장함에 따라 전에 없던 소외가 생겨났고 수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소외를 겪게 됐다. 우리 내부에 자리 잡은 외부가 우리와 함께 커졌다. 자동차가 땅을 기어다니는 일개 행성도 이 정도인데, 수많은 우주선이 날아다니는 초거대 우주 정거장은 얼마나 심각할까? <우주 정거장 청소부의 일기> <우주 정거장 청소부의 일기>(이하 <청소부>)는 마치 소외를 게임화시켜 놓은 듯한 작품이다. 제목으로 알 수 있듯이 거대한 우주 정거장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은 매우 번잡하고 발달한 곳이라서, 곳곳에서 값비싼 상품들이 거래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능력을 얻을 수도 있는 기회의 땅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플레이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면 플레이어는 그저 푸른 피부의 중성적인 청소부일 뿐이고, 땅에 떨어진 잡동사니를 주워 소각하거나 팔아서 번 푼돈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연명하는 게 할 수 있는 것의 전부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조차도 할 수 없다. 그녀가 버는 돈으로는 아무리 싼 식품도 버거우며 그렇다고 유사 식품을 사 먹으면 구토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종족은 정기적으로 '성별을 구매'해야 하기에 또 돈을 써야 하는 데다가, 어쩌다가 빨간 완장을 찬 공권력을 만나면 돈을 빼앗기기도 한다. 그녀는 언젠가는 이 거지 같은 곳을 벗어나고자 성실하게 일하지만, 일 하면 일 할수록 오히려 더 가난해지기만 한다. 그런 주인공에게 더 큰 일이 닥치는데, 보물을 찾기 위해 들어간 지하 던전에서 저주에 걸려버린 것이다.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해골이 나타나 자꾸 옆에서 소리를 지르는데 정말 죽을 맛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저주를 풀려면 세 개의 석판 조각을 모아야 하는데 그 과정도 전부 너무나 무의미하고 피곤한 일들 뿐이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 했길래?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말도 안 되고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따로 있으니, 바로 이 우주 정거장 그 자체다. 단언컨대 이 정거장을 설계한 작자는 인류에 대한 끝없는 악의를 가진 천재일 것이다. 도대체가 길을 맙소사 찾을 수가 없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요일명도 아무 단어나 조합해서 만든 듯한 각종 고유 명사도 낯설지만, 그중에서도 정거장 구조는 특히나 낯설어서 도저히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없다. 고통과 스트레스 . 그게 <청소부>가 플레이어에게 주는 전부다. 세 가지 소외 이렇게 <청소부>는 '안티-어드밴처 장르'답게, 일반적인 어드밴처는 물론이고 보편적인 게임의 틀에서도 크게 벗어나 있다. 플레이어는 성장할 수 없고 활약할 수 없으며 극복하지도 못한 채, 그저 불가해한 원인에 의해 끊임없이 휘둘릴 뿐이다. 여느 게임과 달리 이 게임을 하면서 즐거움이나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고 오히려 당혹감과 좌절감 그리고 무력감만 느껴질 뿐이다. 그렇다면 이 게임의 의의는 도대체 무엇일까? 명백하게도 <청소부>는 일종의 사회비판물을 지향한다. 실제로 개발자 브래드포드 호튼과 이소벨 샤샤는 게이머게이트를 비롯한 정치적 혐오나 가난한 청년들, 성 정체성 혼란 등의 사회적 문제와 모순들을 본 게임에 담아냈다고 말했다 [2] . 그러나 이에 대해서 일부는 동의하고 일부는 동의하지 않는데, 왜냐면 본 작품은 단순한 사회적 사례를 넘어 인간 본질에 대한 고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청소부>는 크게 세 가지 부분에서 플레이어를 소외시킨다. 첫째는 계급 에 의한 소외다. 플레이어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상품과 퀘스트 진행에 필요한 물건을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구매하거나 얻을 수 없는데, 여기서 핵심은 -애초에 그것들이 게임 내에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고 구매하거나 획득할 수 있는데도 플레이어의 경제적 사회적 계급이 낮기 때문에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치 있는 상품을 홍보하는 찌라시라도 주인공에겐 또 하나의 소각할 쓰레기일 뿐이고, 수많은 우주선이 오고 가는 우주 정거장에서 살지만 어디로도 벗어날 수 없다. 플레이어 또한, 향락과 가능성이 가득한 곳에서 살지만 그 무엇도 갈망할 수 없고 그저 삥이나 뜯기는 존재에 불과하다. 플레이어의 권리와 욕구 그리고 정체성이 -그의 자유의지나 합리적 근거가 아닌- 오직 계급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일견 이는 자본주의의 문제로 보이지만 그보다는 인간 사회 자체의 한계라 보는 것이 옳다. 자연적 경제가 원인이든 인위적 정치가 원인이든, 사회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계급에 의한 소외가 있어왔다. 현대 대한민국에는 최고의 인프라를 가진 주거 시설이 즐비하지만 국민 중 다수는 평생을 일해도 그곳에 살 수 없다. 근현대 공산국가에도 안락하고 부유한 삶은 있었지만 이를 누릴 수 있는 이는 당과 가까운 사람들뿐이었다.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계급은 물질뿐 아닌 능력, 사상, 민족, 종교, 성별, 거주지, 직업 등 온갖 차이에서 발생해왔다. 따라서 아무리 평등해지고 계급 간의 벽이 낮아진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완전히 동일한 개체가 아닌 이상은- 인간 사회라면 어디든 계급에 의한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 둘째는 부조리 에 의한 소외다. 퀘스트라고 주어진 것들은 전부 영문을 알 수 없고 전혀 즐겁지 않은 것들 투성이다. 어째서 해골이 따라다니는지도 설명되지 않고 어째서 저주를 풀기 위해서 성인 서적을 사야 하는지 혹은 지하에 숨겨진 오브젝트를 찾아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아홉 여신의 우상을 모으는 일은 정말로 아무런 단서가 없어서 우주 정거장 곳곳을 무식하게 돌아다녀야 하며, 심지어 마지막 퀘스트는 600 MC의 금액을 요구하는데 이를 벌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20일 넘게 노동만 해야 한다. 그 어떤 행운도 편법도 활약도 없다. 플레이어는 이유도 모른 채, 타인이 하라고 했기 때문에 혹은 운명이 그렇게 정해졌으니까, 괴롭고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 한다. 더 어이없는 건 당초 목표인 우주 정거장을 벗어날 돈을 모았음에도 저주를 풀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그 돈을 저주를 푸는 데 써버린다는 사실이다. 플레이하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비상식적이기 그지없지만 사실 현실의 우리들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다. 비록 어느 날 눈을 떴더니 벌레가 됐다거나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소송을 당한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부조리한 운명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탄생이 결정되고, 그 탄생 환경과 어렸을 적의 작은 선택이 인생 전부를 좌우한다. 성장한 후에도 그저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졌고 또 명령을 받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삶을 살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끝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점은 어느샌가, 의문을 갖거나 거부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문지기가 자신을 위해 문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문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처럼, 우주 정거장에서 탈출할 수 있음에도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느라 탈출을 망각한 주인공처럼, 방충망을 열어줬음에도 여전히 '방충망 너머에 밖이 있다'라고 굳게 믿고 방충망을 떠나지 않는 날벌레처럼, 우리는 우리가 만든 운명 속에서 소외당한다. 셋째는 위치 에 의한 소외다. <청소부>에서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 여기서 위치는 정체성으로서의 위치와 공간으로써의 위치 모두를 의미한다. 먼저 정체성으로서의 위치는 정기적으로 성전환을 해야 하는 기믹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성별(로 상징되는 사회적 위치)을 꼭 가져야 한다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성별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작중에 나오는 성별의 이름이라곤 'CROSSFIT'이나 'DIRT'나 'MEH' 같이 무작위로 정한 듯한 이름뿐이다. (이는 요일명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플레이어는 꼭 사회적 위치를 가져야 해서 식비를 아끼면서까지 위치성을 확보하지만, 정작 그 위치는 정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결과적으로 그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위치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래서 자신이 의지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 것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건 공간으로써의 위치다. 상대적으로 과소평가(?) 당했지만 본 작품에서 가장 끔찍한 건 단연코 길 찾기다. 상술했듯 악의적인 천재가 설계했는지, 길을 찾는 건 커녕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건물들 사이에서 유의미한 규칙성이나 차이를 찾을 수 없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 무작위라서 그 차이가 무의미하다. 둘째로 흔히 '디즈니 위니 Disney Weenie'라고 불리는, 어디서든 보이고 눈길을 끄는 구조물 [3] 이 거의 없다. 그나마 있는 구조물도 주변 건물이 다 높은 탓에 가려져서 볼 수가 없고, 그래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파악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는 살짝 스포일러인데- 가운데의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매우 유사한 몇 개의 구역이 반복된다. 그런데 플레이어는 도중까지 이 사실을 알 수가 없기에 -상술한 이유 때문에 눈치채기 어렵다- 계속 돌아다녀도 매번 같은 곳으로 돌아오게 되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되고, 결국 전체 구조를 완전히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유의미한 차이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결국 각 기표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기의가 아닌- 다른 기표와의 차이기 때문에, 차이가 상실되면 기표는 무화無化되고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낯선 실재가 출현하게 된다. 자크 라캉의 '수집가 프레베르의 성냥갑 우화 [4] ', 앤디 워홀의 <캠밸 수프>, 게슈탈트 붕괴 현상, 리미널 스페이스의 반복된 이미지와 공간,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의 '엔들리스 에이트' 등도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는 위치를 가져야만 하는데, 위치는 유의미한 차이에 의해서만 성립하기에, 끝없는 반복에 갇힌 존재는 위치를 상실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소외에서 실존으로 의문은 해결되기는커녕 더 깊어진다. 본작이 소외의 결정체라는 건 알겠지만, 어떻게 그게 게임의 의의일 수 있는가? 그저 답답하고 괴롭기만 한 이 게임에 도대체 어떤 효용성이 있단 말인가? 분명 게임의 기본적인 목적은 재미를 주는 것임에도 <청소부>는 재미가 없다. 그러나 <청소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 모든 소외는 놀랍게도 재미의 훌륭한 재료가 된다. 왜냐면 우리는 실존할 때 재미를 느끼는데, 역설적이게도 소외는 실존의 단초 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소외의 반대로 하면 실존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소외를 이해할수록 우리는 인간에 대해 알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실존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의미다. 결국 소외와 실존 모두,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인간의 본질일 뿐이기에. 생각해 보라, 소외란 자기 자신을 보장하던 무언가를 상실한다는 것인데, 애초에 다른 무언가에 의해 보장받는 상태 자체가 곧 그 무언가에 의한 소외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을 보장하던 것을 상실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기회이며, 이는 곧 실존을 의미한다. 물론 인간인 이상 언제나 다른 무언가에 의해 보장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추구해야 할 것은 -언제나 독립되어 있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 무엇에 보장받던 '그것은 그저 일시적 수단일 뿐 결코 영구적 본질이 아님'을 항상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자유의지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안락한 보장 상태에서 박탈당하는 사건, 즉 소외다. 특정한 직업이나 사유재산 같은 물질을 잃었을 때 진정한 자유가 가능해지고, 말도 안 되고 당혹스러운 상황에 쳐할 때 스스로에 의한 (그리고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 되며, 고정된 좌표를 상실하고 위상적 비전체로 떨어질 때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직접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너무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일뿐더러 <청소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다른 예시를 들어야 한다. <킹덤컴 시리즈>나 <언더월드>같이 높은 자유도의 오픈월드 RPG가 재밌는 것은, 게임이 상당히 복잡한 데 비해 플레이어의 계급과 능력치가 낮은 탓에 초반에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소외), 점차 성장하고 적응하다 보면 계급의 격차를 극복하거나 혹은 반대로 계급의 벽을 우회하여 자유롭게 활동(실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넷핵>이나 <슬레이 더 스파이어> 등의 로그라이크 '계열' 게임들은 실수 한 번으로 자신의 모든 걸 잃을 수 있지만(소외), 오히려 그렇기에 특정 빌드나 플레이 스타일에 구속되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할(실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스탠리 패러블>이나 <페이퍼 플리즈>와 같은 게임이 재밌는 것은, 처음에는 근거 없고 불합리한 명령이 부과되고 플레이어는 이를 따라야만 하지만(소외), 동시에 그것을 거부하고 반항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실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우터 와일즈>, <섹시 브루탈>, <포가튼 시티> 등의 타임 루프물은 훨씬 더 노골적이다. 이 게임들은 모두 플레이어의 의지와 무관하게 똑같은 사건이 영원히 반복되고 그래서 게임 내 모든 차이가 소멸하는 위기에 처하는데(소외), 이때 플레이어는 각종 활동과 추론을 통해 반복되는 연쇄를 끊고 차이(실존)를 다시 불러낼 수 있다. 이 게임들 속에서 플레이어들은 실제로 실존한다. <청소부>에서 경험한 소외가 진짜인 만큼, 이 게임들에서의 실존 또한 진짜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소외의 효용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는 단연코 <레인 월드>다. <레인 월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척박한 야생을 배경으로 하는 생존 플랫포머 게임으로, 플레이어는 끔찍한 조작감의 하얀 생물 '슬러그캣'으로써 살아남아야 한다. 이 세계의 생태계는 매우 유기적이고 적대적이어서 각양각색의 동식물과 현상이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데, 문제는 슬러그캣이 그 먹이 피라미드의 거의 밑 바닥이라 대부분의 생물이 천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게임의 무대는 오래전에 멸망한 인류가 남긴 정체불명의 구조물과 그 위에 퇴적된 자연 지형이라 맵이 극도로 복잡한데, 목적지를 가르쳐주는 가이드도 거의 없어서 길 찾기는커녕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정기적으로 내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폭우는 피난처를 제외한 모든 공간과 그 위의 생물을 -물론 슬러그캣도- 집어삼켜 버리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죽지 않으려면 매일매일 벌레를 잡아먹고 피난처를 찾아야만 한다. 말 그대로 낯선 세상에 피투彼投되어 배타적 환경에 소외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디자인했을까? <언더월드>처럼 플레이어가 고통받기를 바랬던 것일까? 이에 대하여 <레인월드>의 개발자 요아르 야콥슨Joar Jakobsson은 ' 맨해튼의 쥐 ' [5] 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지하철에 살고 있는 쥐는 그 지하철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쥐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는 쥐에게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지하철을 마치 제 집처럼 돌아다니는데, 어쨌거나 쥐는 무엇이 자신에게 위험하고 유용하고 맛있는지를 알며 결국 중요한 건 그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쥐의 인식은 지하철을 건설하고 이용하는 인간들의 인식과 다르겠지만, 배부르기만 하다면 쥐에게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하여 더 이상 지하철의 낯섦과 미지는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쥐의 방식과 세계관이 지하철을 가득 채운다. '맨해튼의 쥐'가 '쥐의 맨해튼'으로 역전되는 것이다. (개발자가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유학했을 때의 경험도 이와 같은 맥락을 가진다) <레인월드>의 플레이어도 마찬가지다. 막 게임을 시작하면 알 수 없는 생물과 공간에 휘둘려 고통받을 뿐이지만, 점차 적응하면 할수록 뭐가 좋고 나쁘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여전히 그것들의 정체는 모르지만, 어떤 행동과 선택이 자신에게 득이 될지는 안다. 어느샌가 미로 같던 맵을 앞마당처럼 돌아다니게 되더니, 심지어는 자신을 잡아먹던 포식자까지 사냥할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피투성에서 기투로, 소외가 실존이 된 것이다. 게임만이 줄 수 있는 재미 이쯤에서 제목을 바꿔야 할 듯하다. 소외와 실존의 작동 원리가 완전히 동일하다면, '게임은 어떻게 우리를 소외시키는가?'라는 질문과 '게임은 어떻게 우리가 실존할 수 있게 해주는가?'라는 질문 또한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리고 그 대답은 이미 둘러본 바 있다: 게임은 향유자가 직접 참여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매체기 때문이다. 영화나 소설 같은 미디어는 작품이 향유자에게 일방적으로 작용하고, 그래서 작중에서 소외나 실존이 아무리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하더라도 수신자의 입장에서는 아주 실감 나는 대리 체험에 불과하다. 반면 <청소부>에서는 플레이어가 직접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생존하기 위해 매일 쓰레기를 줍는 노동을 하는 것도, 비싸고 좋은 상품을 사려다가 단념하는 것도, 제대로 된 음식과 값싼 유사 식품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도, 상한 음식과 젠더 캡슐을 먹어야 하는 부조리에 얽매이는 것도, 불합리하고 지루한 퀘스트를 묵묵히 진행하는 것도, 이 모든 것을 매일 일기로 쓰는 것도 전부 플레이어의 몫이다. 그렇기에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낀 채 소외되는 것도 -주인공이 아닌- 플레이어 자신이다. 소외를 실존으로 승화시킨 게임들도 마찬가지다. 플레이어가 직접 실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과 자유의지를 발현해야 하지만, 이는 소외를 스스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기에 먼저 소외를 직접 당해야 한다. 그리고 소외를 당하기 위해서는 부조리와 불합리에 휘둘려야 하는데, 이는 오직 플레이어가 직접 그 세계에 참여하고 맞부딪힐 때만 가능하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자신을 발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상실해야 하고, 자신을 상실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기에 자신이 있어야 한다'라고. 그렇기에 플레이어가 직접 소외당하고 실존하는 경험은 참여형 미디어인 게임에서만 가능하고,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를 발현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실존적 재미' 또한 오직 게임의 전유물이다. (때로는 소외도 그 자체로 재미가 된다) 그런 점에서 <청소부>가 선사한 그 끔찍한 경험에는 제대로 의미가 있다. 게임이 실제로 플레이어를 소외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게임이 플레이어의 자유의지와 정체성에 관여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는 곧 게임이 플레이어를 실존하게 해줄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기 때문이다. 비록 <청소부> 자체는 두 번 다시 플레이하고 싶지도 추천하기도 힘든 게임이지만, 그 시도는 게임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때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자꾸 소외네 실존이니 반복하는데, 그렇다면 게임의 의의는 실존이라는 것인가? 실존이 재미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인가? 이는 정말로 바보 같은 질문이다. 왜냐면 실존이 곧 재미고 재미가 곧 실존 이기 때문이다. 분명 실존이라는 개념은 학술 용어로 자주 쓰이고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핵심적이기에, '오락'처럼 가벼운 개념과는 상반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오락도 인간의 일부고 오락에서 느끼는 재미 또한 그렇다. 재미 중에서는 크리쳐 100마리를 도살하거나 0.02퍼센트의 확률을 뚫고 상품을 얻는 재미도 있지만, 기존의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거나 미지 너머의 새로운 곳으로 도약하는 재미도 있다. 지금까지 계속 얘기했던 바로 그 재미 말이다. 그렇다면 실존이 재미있지 않을 이유는 무엇이고, 재미를 위해 실존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니 인간 존재를 고찰하는 것과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어차피 둘은 게임 속에서 하나가 되니까. 분명 본 글의 의의 중 하나는 '게임이 인간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도구'임을 설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실존과 재미가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를 공유함을 증명하는 시도이기도 하며, 궁극적으로는 게임을 더욱 재밌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몰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게임이 <청소부>와 같거나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게임이 줄 수 있는 재미에는 실존적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외의 재미들도 모두 가치있고 필요하다. 게다가 실존적 재미는 기본적으로 소외를 전제하기 때문에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밖에 없다. 불친절함은 무력감으로 부조리함은 당혹감으로 불합리함은 불쾌함으로 이어지기 쉽다. 즐거워야 할 게임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은 사람은... 적어도 절반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소외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실존해야 한다. 왜냐면 그럴 때 인간 존재의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갈 수 있고, 오직 게임만이 개척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이 시작되며, 무엇보다 훨씬 짜릿하고 차원이 다른 재미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게임이여, 계속해서 우리를 소외시켜다오. '방황해 보지 않으면 자각에 이르지 못하는 법이야' [6]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317행 [2] https://www.vice.com/en/article/diaries-of-a-spaceport-janitor-asks-players-to-find-the-beauty-in-garbage/ [3] https://mouseplanet.com/the-origin-of-the-disneyland-wienie/5245/ [4] 자크 라캉, <세미나 7. 강의 8> (1960.01.20) [5] https://www.vice.com/en/article/rain-world-is-like-stalker-but-a-platformer-and-youre-a-rodent/ [6]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7847행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류호준 게이머. 오락으로써의 게임도, 작품으로써의 게임도, 실험으로써의 게임도 모두 중시합니다.
- Levelling Up: An Overview of Malaysian Video Game Culture
One late afternoon in a quaint village. Rembo the rooster crowed loudly, adding to the countryside ambiance. You, your identical twin, and some friends from kindergarten were spinning tops in the yard. Just another joyful day of playing freely. < Back 26 GG Vol. 25.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소수자들의 게임에 대한 세 가지 소고
디지털게임은 한때 ‘소수자’들의 매체이기도 했다. 소수자라는 개념이 단순히 적은 숫자를 가진 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디지털게임 초창기에 한국에서 게이머는 소수자에 가까웠다. 전자오락실은 불량한 이들이나 다니는 곳으로 낙인찍혔고,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엄연한 자영업장인 오락실에 학교 교사들이 들이닥쳐 ‘손님’인 학생 게이머들을 강제로 끌고나가는 영업방해 행위도 자연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뉴스와 신문에서는 연일 불량한 오락실과 게임 때문에 망가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쏟아냈고(이 부분은 아직도 유지되는 바 또한 있다) 게임은 눈치보면서 해야 하는, 말그대로 여가오락 문화 부문에서의 소수자 포지션이었다. < Back 소수자들의 게임에 대한 세 가지 소고 04 GG Vol. 22. 2. 10. 디지털게임은 한때 ‘소수자’들의 매체이기도 했다. 소수자라는 개념이 단순히 적은 숫자를 가진 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디지털게임 초창기에 한국에서 게이머는 소수자에 가까웠다. 전자오락실은 불량한 이들이나 다니는 곳으로 낙인찍혔고,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엄연한 자영업장인 오락실에 학교 교사들이 들이닥쳐 ‘손님’인 학생 게이머들을 강제로 끌고나가는 영업방해 행위도 자연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뉴스와 신문에서는 연일 불량한 오락실과 게임 때문에 망가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쏟아냈고(이 부분은 아직도 유지되는 바 또한 있다) 게임은 눈치보면서 해야 하는, 말그대로 여가오락 문화 부문에서의 소수자 포지션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디지털게임을 소수자들의 매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콘솔게임 같은, 한국에서 수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소수자라는 개념은 단지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분류하는 말은 아니다. 특히 급격히 게이머 범주가 넓어지기 시작한 모바일 시대 이후를 생각한다면 게임은 오히려 대중문화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 위상을 바꿔온 바 있었다. 대중문화콘텐츠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면서 디지털게임과 소수자의 문제는 좀더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대중문화라는 이름과 함께 하는 디지털게임의 이야기를 할 때 크게 세 맥락의 소수자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이 매체에 접근가능한 매체이용자로서의 접근성 관점에서 바라보는 소수자 문제이고, 두 번째는 이 매체가 콘텐츠 안에서 재현하고 재구성해내는 대상으로서의 소수자 문제다. 그리고 온라인게임이라는 특성에 따른, 게임 안에서 게이머들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재현을 통해 나타나는 소수자 문제가 마지막으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은 대중문화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단지 ‘모두가 즐긴다’는 말로 그 의미를 뭉뚱그려선 안된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등에서도 지속적으로 시도되었던,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매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실천과 개선의 방향까지를 대중문화로서의 매체는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더욱 넓어지는 게이머 저변 안에서 커진 덩치만큼 우리의 디지털게임은 대중문화로서 갖춰야 할 지향을 제대로 가지고 있는지, 또 그 실천이 얼마만큼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지를 고찰해 볼 때다. 접근성 관점에서의 소수자 이슈들 서구권의 게임연구들에서는 오랫동안 ‘비디오게임’의 주이용자층을 ‘젊은 백인 남성’이라는 그룹 안에서 살피며 게이머집단에서의 주류화와 그에 따른 마이너리티의 발생을 논의해온 바 있었다. 그러나 이용자집단의 문제는 게임 저변이 점차 넓어지면서 과거와는 사뭇 다른 형태로 게이머집단의 구성이 변화하는 흐름이 존재한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서구의 ‘젊은 백인 남성’에서 ‘백인’은 빠지게 되며, ‘젊은’ 또한 게이머집단이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에서 점차 희미한 정체성이 되어가는 중이다. 콘텐츠가 타겟으로 삼는 소비자집단이 호응하는 피드백 속에서 남성 중심의 게임콘텐츠와 게이머집단이라는 점은 여전히 주류집단의 존재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게임 플랫폼의 다양화와 모바일기기를 통한 대중화 속에서 남성중심적인 게임이라는 말도 과거만큼의 집중도를 보인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지는 추세다. 전반적인 대중화의 과정에서 오히려 두드러지는 것은 특유의 인터페이스로 인해 접근성 자체가 제한되는 경우인 장애인 게이밍, 혹은 노화나 미디어 리터러시 문제로 인해 접근이 어려워진 노년 게이밍과 같은 영역일 것이다. 여전히 손쉽게 게임에 접근할 수 없는 여러 환경들이 존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난 호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게임 접근성에 대한 고민들이 점차 누적되면서 아주 조금이나마 대중문화로서의 게임이 가져야 할 범용성의 위상에 대한 변화들도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매체의 재현에서 드러나는 소수자 문제 오랫동안 디지털게임이 주류 게이머가 아닌 대상을 향해 만들어낸 대상화된 재현의 문제는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받아온 주제였다. 수동적 대상이나 트로피처럼 등장하는 게임 속 여성의 문제, 존재 자체가 지워진 성소수자 문제, 비서구권 캐릭터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의 반복과 같은 문제들이 꾸준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고, 이는 2000년대 이후 디지털게임 시장이 소비자 확장의 상황을 맞이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오버워치>의 저격수 캐릭터 ‘아나’는 그런 변화를 상징할 만한 캐릭터다. 60대 노년 여성에 장애를 가진 비서구 아랍권 출신의 캐릭터는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라기보다는 마치 과거 인종차별과 대상화에 적극적이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변화한 양상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욱 넓어진 시장에서 대중문화콘텐츠로 어필하기 위해 이뤄진 시장적 조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의도가 어떤 것이건간에 게임에서의 소수자 재현 문제에 변화가 일어나는 확인 가능하다. <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가 리부트되면서 변화한 캐릭터나, 가 게임 내 NPC들의 인종적 다양성을 컴퓨터 사양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옵션을 추가하는 것과 같은 변화는 분명 소수자 재현 문제에 있어 유의미한 변화다.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변하지 않는 부분들도 적지 않다는 점 또한 공존한다. 게이머 저변의 확대로부터 비롯되는 시장의 압박에 의한 변화가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는 글로벌 릴리즈가 중심인 AAA급 대형 게임들에 한정된 변화이며, 대중문화로서의 게임콘텐츠 전반에 걸친 변화라고 이야기하기엔 이제 겨우 첫 발을 뗀 수준이라는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게이머 속에서의 소수자 문제 콘텐츠 내부에서 발생하는 소수자 이슈보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불거지는 이슈는 게이머 스스로로부터 발생하는 이슈들이다. 온라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멀티플레이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디지털게임은 생산자로부터 소비자로 이어지는 메시징 이상으로 게이머간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나타나는 맥락이 더욱 높은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게임에서 수시로 나타나는 여성, 성소수자, 인종, 장애인에 대한 비하들부터 게임 캐릭터 등을 활용한 2차창작에 이르기까지 게이머들이 직접 생산하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폭넓게 나타난다. 게임 규칙 내적으로서의 트롤링이나 일반적인 욕설, 모욕이 아니라면 아직까지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발언이나 혐오발언 등이 별도로 제재받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는 않다. 현실의 현행법상에서도 차별금지법 등이 입법에서 난항을 겪는 것을 생각하면 게임 속에서의 소수자 차별 문제는 더 험난한 과정을 거칠 것이라는 예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된 콘텐츠 이상으로 이용자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소수자에 대한 대상화, 혐오 문제는 디지털게임과 소수자 문제를 다룰 때 더욱 큰 영향력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전망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다. 왜 게임이 소수자 문제를 신경써야 하는가 접근성, 콘텐츠, 상호작용 세 측면 모두에 걸쳐 디지털게임과 소수자 문제를 살펴보는 이유는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결국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모두의 게임’이라는 대중문화로서의 디지털게임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소수집단에 의해 향유되는 것이 아닌, 이름 그대로 ‘대중’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매체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대중 전반에 끼치는 영향력과 그에 따라 해당 매체가 짊어져야 할 사회적 책무가 요구된다. ‘게임은 문화다’ 라는 말은 실제 한국사회를 이루는 대중문화의 일각으로 디지털게임이 자리하고자 할 때 요구되는 최소한의 윤리와 공공성을 갖추고자 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대중화 시대를 맞아 게임이 갖게 된 영향력은 기존에 비할 바 없을 정도로 커졌다. 영향력이 커질수록 이 매체가 짊어져야 할 책임과 부담 또한 막중해질 수 밖에 없다. 디지털게임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한 장벽 허물기, 게임 콘텐츠 안에서 사회적으로 소수자인 이들을 향한 부당한 표현을 줄이기, 그리고 게이머들 스스로가 이 매체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나와 다른 누군가에게 무례가 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기. 이런 여러 요소들이 함께 할 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당당하게 ‘게임은 문화다’라는 말을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실천이 따라가지 않는 한, 디지털게임은 적어도 좋은 의미로의 문화에 다다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산업계와 이용자 모두 이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더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은 경험을 위한 제노바 첸의 작업들
게임이 미술관에서 ‘작품’으로 전시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듯, 게임을 만드는 것 역시 하나의 표현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예술 매체로서 게임, 예술가로서 게임 제작자. 게임을 예술 매체로 취급하는 새로운 시각과 함께 예술가로서 게임 제작자들의 존재감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 Back 더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은 경험을 위한 제노바 첸의 작업들 12 GG Vol. 23. 6. 10. 게임이 미술관에서 ‘작품’으로 전시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듯, 게임을 만드는 것 역시 하나의 표현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예술 매체로서 게임, 예술가로서 게임 제작자. 게임을 예술 매체로 취급하는 새로운 시각과 함께 예술가로서 게임 제작자들의 존재감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럴 때마다 종종 사례로 언급되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제노바 첸(Jenova Chen)’이다. 제노바 첸(이하 첸)은 게임 〈저니 Journey〉(2012)의 제작자이다. 그는 댓게임컴퍼니(thatgamecompany)라는 개발 스튜디오의 대표이자 디렉터이며, 게임 퍼블리셔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Annapurna Interactive)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하다. 첸은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게임 개발자로서 ‘클라우드’, ‘플로우’, ‘플라워’, ‘저니’, ‘스카이’와 같은 간결한 이름을 가진 다수의 게임 제작에 참여해온 인물이다. 첸의 게임들은 시장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저니는 플레이스테이션 스토어에서 가장 빠르게 판매된 게임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여러 어워드에서 올해의 게임(GOTY, Game of the year) 수상이 셀 수 없이 많이 언급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게임들은 예술 영역에서도 환영을 받아왔다. 첸의 〈플로우 flOw〉(2007, PS3)는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 영구적으로 소장된 14개의 게임 중 하나로 채택됐다. 또 다른 게임 〈플라워 Flower〉(2007, PS3)는 워싱턴 스미소니언 미술관이 보존하고 있는 영구 소장품이 되었다. 지난달부터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게임사회〉에서도 플로우와 플라워가 전시장에 등장하여 플레이 가능하게 전시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첸의 게임은, 게임을 구매하거나 다운로드 받아 즐기는 플레이어와 전세계의 미술관을 방문하는 관람객 모두로부터 플레이되고 있다. 이렇게 게임을 예술 매체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그는 퍼블리셔와 미술관, 소비자와 관람객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이목을 끌어 왔다. 그의 게임들은 어떤 특징으로 분석될 수 있으며, 작가로서의 첸은 어떤 생각을 토대로 게임을 만들어왔을지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은 제노바 첸이라는 한 명의 게임 제작자에 주목하면서 그의 작품과 생각을 들여다본다. * 제노바 첸 콘솔 게임이 금지된 나라에서 콘솔 게임의 나라로 중국 출신의 첸은 1세대 중국 컴퓨터 공학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왔다. 다른 가정보다 상대적으로 기술 친화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배경이 있었지만, 첸이 10대 시절의 중국은 콘솔 게임기 판매 금지령이 내려지고 있었다. 제한적인 게임 플랫폼의 상황에서 첸은 콘솔보다는 PC 게임을 주로 플레이하게 되었고, 특히 PC로 〈파이널 판타지 7 Final Fantasy 7〉(1997)를 플레이하길 좋아했다.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이름인 ‘제노바’는 훗날 자신의 영문 이름이 된 배경이기도 하다. 게임을 즐겨하다보니 게임 제작도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면서 그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으로 하여 대학에 진학한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시각적으로 창작하는 일이 좋아서 공대 수업보다는 예술 대학 수업에 기웃거리는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 학사 졸업 후 그는 먼 훗날 픽사(Pixar)에서 일을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USC)의 인터랙티브 디자인 석사 과정 하에 영화, 게임,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제작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하게 된다. 학생으로서 참여한 두 번의 작업 〈클라우드 Cloud〉(2005, PC)는 대학원 재학 시절 첸의 초기 작업으로, 6명의 학교 사람들과 진행한 교내 게임 제작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클라우드는 꿈 많은 소년이 하늘을 유영하면서 구름을 뭉쳐 날씨를 변화시키는 짧은 스토리의 게임이다. 각각의 목적을 가진 4개의 스테이지에서 플레이어는 구름을 막대사탕 모양으로 디자인 하기도 하고, 작은 구름을 합쳐 더 큰 구름을 만들기도 하며, 비가 필요한 지역에는 흰구름과 먹구름과 충돌 및 상쇄시켜 비를 내리기도 한다. 첸은 클라우드를 제작할 당시 게임회사 EA로부터 장학금을 지원 받았다. EA는 USC와 협약을 체결하고 학생들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하면서 게임 개발을 장려했다. 이는 클라우드의 저작권이 첸이 아닌 USC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첸은 학교와 회사의 지원 덕분에 게임을 본격적으로 개발할 동기를 얻게 되었고, 이 인연으로 클라우드 출시 이후에는 EA의 맥시스 스튜디오의 〈스포어 Spore〉(2008) 개발팀에서 잠시나마 일을 하기도 했다. * 〈클라우드〉 그렇게 제작된 클라우드는 온라인에 무료로 배포되어 홍보 없이도 약 50만 회 이상의 다운로드 수를 기록하며 인터넷 상에서 인기를 얻게 된다. 여러 게임들과 다르게 이 게임은 비폭력성을 띠며 긍정적 메시지를 추구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구름이 되어본다”는 설정이 마치 상상력 풍부한 어린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사람들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첸은 이때 익명의 플레이어들로부터 “당신들(개발자)은 아름다운 사람들이다”라고 쓴 팬 레터를 메일로 받기도 했다. 클라우드에 이어서 진행된 첸의 차기 게임 작업은 〈플로우 flOw〉(2006)였다. 독특하게도 그는 석사 졸업을 위해 플로우를 제작했다. 석사 학위 연구 프로젝트를 검증하기 위해 게임을 이론적으로 설계한 뒤 사람들에게 배포하여 테스트한 것. 플로우는 심해의 유기체로 태어나 바닷속을 유영하며 양분을 먹거나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어 유기체의 성장과 진화를 도모하는 게임이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flow) 이론에 관심이 있었던 첸은, 몰입 이론에 기반한 새로운 게임 디자인론을 제시하고, 이를 적용한 게임을 만들었다. 하지만 논문을 쓰기 위해 제작된 게임이라고 하기에 게임의 인기는 기대치를 상회했다. 2006년 플래시 게임 포털에 게시되었던 플로우는 2008년까지 35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얻어 웹 상에 퍼져 나갔고, 순식간에 전세계인들이 즐기는 유명 게임이 되어버렸다. 회사로서 얻은 세 번의 창작 지원 플로우의 성공을 기점으로, 첸은 클라우드를 제작했던 대학원 동료 켈리 산티아고(Kellee Santiago)와 함께 회사 댓게임컴퍼니를 설립해 자신만의 게임 제작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댓게임컴퍼니와 소니(Sony)와의 계약이 성사되었다. 소니는 그동안 첸의 게임들이 보여준 가능성을 판단하고 플레이스테이션 플랫폼에 3개의 게임 출시할 수 있도록 일종의 창작 지원을 약속했다. 이는 댓게임컴퍼니 회사 설립과 운영의 기초가 되었다. 물론 소니와의 계약은 개발사에게 커다란 수익으로 이어지진 않는 구조였으며 저니 개발 당시 회사는 거의 파산 위기에 가까웠다고 공동 창업자 켈리는 훗날 언급하기도 했다. * 〈플로우〉 소니와의 계약 이후 댓게임컴퍼니는 우선 첸이 석사 논문 프로젝트로 했던 플로우를 기존 PC 플랫폼에서 PS3 플랫폼에 맞게 리디자인 하여 2007년에 출시했다. 그리고 2009년에는 2년 간의 개발을 거친 플라워가, 2012년에는 3년의 개발을 거친 저니가 플레이스테이션 플랫폼에 출시되었다. 이 게임들은 연달아 호평을 받으면서 다음 작업에 대한 투자를 보증해왔다. 그리고 소니의 세 번의 창작 지원 이후, 첸은 모바일 플랫폼에 대한 도전으로 〈스카이: 빛의 아이들 Sky: The children of the light〉(2018)을 출시하기에 이른다. 이는 댓게임컴퍼니와 첸의 글로벌한 인지도를 현재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게 되었다. 첸은 게임 개발사의 대표이자 디렉터, 게임 디자이너로서 클라우드, 플로우, 플라워, 저니, 스카이를 만들어냈다. 그는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게임 제작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다면에 걸쳐 작업에 투영해냈다. 개개인마다 해석의 여지는 다양하겠지만, 제노바가 연설, 인터뷰, 글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남긴 자료를 통해 필자는 그의 작업적 실천을 크게 세 개의 분류로 함축하고자 한다. (1) 영화의 기법을 게임에 적용하려는 시도 첸이 석사 생활을 했던 USC의 인터랙티브 디자인 과정은 게임에 특화 되어있는 곳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다루는 다양한 매체 중 하나가 게임이었으며, 그는 필름 스쿨에서 배울 법한 시나리오 라이팅을 실습하기도 했다. 첸은 시나리오 라이팅을 하면서 할리우드와 같은 전통적인 영화 산업에서 ‘3막 구조’를 충실히 사용하고 있음을 알았고, 이를 게임에 적용하려했다. 3막 구조란, 스토리를 3단으로 구성하여 도입부인 1막에서 주인공의 상황을 설정하고, 중반부인 2막에서 그 상황에 따른 여정을 제시하며, 마지막 3막에 다다라서는 그 여정의 결과를 마주하는 구조로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을 뜻한다. 영화에서 사용하는 스토리텔링 기법을 게임에서 적용할 때 떠오르는 중요한 지점으로, 그는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강조했다. 영화를 볼 때 “왜 이 장면에서 갑자기 눈물이 날까”를 어렸을 때부터 궁금해왔다는 그는, 위치상 2막이 끝날 때쯤 감상자의 감정이 가장 낮은 지점에 도달했다가 3막에서 최고점을 찍었던 것에 그 원인이 있음을 판단했다. 3막 구조의 스토리텔링에서 서사는 2막이 끝날 때 쯤 가장 낮은 지점에 도달했다가 빠르게 최고점에 도달하며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 저니의 3막 구조 그의 게임들은 이러한 3막 구조 적용을 통해 플레이어에게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저니의 도입부는 황량한 사막에서 여정을 떠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무너진 사원 사이를 지나가고 생명체를 가진 듯 움직이는 직물들과 상호작용하는 플레이어는 저 멀리 보이는 산 정상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향한다. 공중에서 이동하는 능력을 얻어 성장하여 점차 높은 곳으로 상승하고, 빠른 속도로 계곡 사이에 스키를 타면서 짜릿한 활강을 즐기던 플레이어는 심연에서 적을 만나 위기를 겪는다. 그러다가 산 정상에 올라가면서 그동안 축적해왔던 성장 요소를 모두 빼앗기고 힘을 잃어가다가 끝내 죽음을 겪게 된다. 하지만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비로소 주변 상황이 변화하고 플레이어는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필자가 짧게 요약한 감이 있지만, 제노바는 여러 연설에서 저니의 3막 구조 적용에 대해 자세하고 설명하고 있으니 미세한 경험 설계를 확인하고자 한다면 GDC 2013 연설 등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저니 뿐 아니라 초기작 클라우드나 플라워에서도 이러한 내러티브 구조는 발견된다. 긍정적이고 활기찬 여정에서 고난을 마주하고 끝내 희생이나 상실, 죽음을 통해 플레이어의 허망함을 필연화하고 극대화 시키는 것은 그의 게임의 특징 중 하나다. 이는 그의 전작들을 온라인 게임의 틀로서 통합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모바일 기반의 스카이에서 일명 ‘죽음을 통한 성장형 윤회’ 시스템으로 적용되어 플레이어의 지속적인 플레이를 이끌어내는 요소가 되고 있다. (2) 플레이어 스스로가 게임 경험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해외 저널 Communications of the ACM에 2007년 발표된 〈Flow in Games (and Everything Else)〉은 첸이 자신의 석사 학위 논문을 요약해 공개한 것으로, 그가 평소에 게임 디자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조나 철학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이론’에 경유하여 자신만의 디자인을 제안한다. 우선 칙센트미하이는 사람들이 어떤 일에 몰두하면서 현실에서의 걱정이나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잊은 채 긍정적 감정 상태를 유지하는 순간을 ‘몰입’(Flow)이라고 규정했다. 이 몰입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도전과 그에 맞는 대상자의 숙련이 필요하다. 상황에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도전성이 높아진다면 불안을 일으키고, 반대로 숙달된 것에 반해 도전성이 크지 않다면 지루함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몰입 이론은 게임하는 행위를 포함한 취미나 사회 전반의 영역에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첸은 몰입 이론을 게임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도전과 숙련이 균형을 이룬 상태인 ‘플로우 존’(flow zone)에 게임 경험이 위치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이 존을 벗어날 경우 게임에 흥미를 잃거나 기쁨이 아닌 고통을 받아 이탈하게 된다. 게임에서 도전과 숙련이란 즉 난이도의 문제이기도 하며, 난이도는 플레이어가 게임에 대해 기존에 가진 능력이나 지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첸은 이에 기존에 게임 조작 능력과 지식이 풍부한 ‘하드코어 게이머’와 게임을 즐긴 경험이 거의 없거나 조작 능력이 탁월하지 않은 소위 ‘캐주얼 게이머’로서 플레이어를 구분하고, 하드코어 게이머에게는 플로우 존은 도전 더 가깝게, 캐주얼 게이머에게는 숙련에 더 가깝게 설계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설계를 여러 개의 포인트와 경로 이동으로 바꿔 마치 플레이어가 스스로 좌표를 이동하며 플로우 존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며 “스스로 몰입을 찾아가도록 하는 자유”를 주는 것이다. * 첸의 몰입 이론 그가 이론을 적용하여 제작한 〈플로우〉는 플레이어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다. 지네 또는 새우의 모습을 닮은 해저의 한 유기체로 시작하고 나면, 영양분을 섭취해 몸을 성장시킬 수 있다. 비어 있는 몸의 마디마디가 채워지는 것처럼 플레이어는 자신의 캐릭터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바다를 유영하다 보면 다양한 영양분이 등장하고, 다른 유기체들이 등장해서 공격해 더 많은 영양분을 섭취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빨간색/파란색 영양분이 화면에 종종 등장하는데, 이 유색 영양분은 플레이어의 난이도를 나누는 분기점으로 작용한다. 빨간색 먹이를 먹으면 수심은 더 깊어지며 강한 유기체가 등장하는 경쟁과 불안 상태로 이어지고, 파란색 먹이를 먹게 되면 수면에 가까이 가지만 약한 유기체밖에 없어서 성장이 없이 평화가 지속된다. 첸은 현재 상태를 언어가 아닌 직관적인 색깔로 전달하는 것을 즐기는데, 적대적 존재는 주황색으로, 친화적인 존재는 흰색으로 표현, 그리고 심해로 가까워질수록 배경은 어둡게 변화한다. 이러한 설계에서, 물 속을 유영하는 행위 자체를 즐기거나 혹은 컨트롤이 익숙지 않아서 더 큰 적과 상대하기 어려운 플레이어는 빨간색 먹이를 먹는 것을 회피하거나 미룰 수 있다. 자신에게 너무 어려운 컨트롤을 요구하는 수심 깊이라면, 파란색 먹이를 먹어 오히려 난이도를 낮출 수도 있다. 플레이어들은 첸이 설계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는 느낌을 실제로 받았다. 따라서 게임은 “재밌다”는 평가를 받게 되고 다수의 어워드에서 ‘최고의 게임’에 뽑히기도 했다. 첸의 이론이 어느 정도 증명된 셈이다. 그는 플로우를 통해 자신의 경험 설계의 방법론을 쓰고 플라워, 저니, 스카이에도 여실히 적용해 나갔다. 게임 디자이너는 플레이어가 플로우 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게 가능한 다양한 균형점을 콘텐츠로서 제공하는 임무를 얻고 충실히 수행한다. 또한 이 균형을 알기 위해 개발 과정에서 플레이 테스트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3) 더 많은 사람들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되는 것 앞서 짚은 첸의 게임 디자인론이 잘 적용된다면, 게임이 익숙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 동일하게 즐길 수 있게 된다. 첸은 자신의 꿈을 “더 많은 사람들이 나의 게임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혀왔다. 그의 소망은 게임 제작에서 튜토리얼, 인터페이스, 플랫폼 등 다양한 영역에서 드러난다. 그의 게임은 글자가 잔뜩 써 있거나 플레이와 분리되어 있는 별도의 튜토리얼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만큼 조작이 쉽기도 하다. 첫번째 스테이지를 플레이하면서 게임 사용법이 자연스럽게 습득이 되는데, 이때 전개되는 스토리는 전체 맥락 위에 놓여 연속적이다. 플라워는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조작방식이 쉽다. 컨트롤러 패드의 회전으로 꽃잎을 움직이고 단일 키 버튼으로 가속하는 것이 전부다. 플로우는 마우스의 이동으로만 조작이 가능하고, 스카이는 모바일 터치 인터페이스에서 매끄럽게 이해되는 캐릭터 이동 및 카메라 이동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첸은 직관적인 모바일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는 데에만 3년이 소요되었다고 전한다. * 인터페이스 게임의 플랫폼은 플레이어를 나누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콘솔 게임 기기가 없다면 콘솔 게임을 할 수 없다. 그는 플로우를 출시할 때,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연구가 검증 되기를 원했다. 따라서 2000년대 당시 가장 파급력이 높았던 웹 플랫폼 ‘플래시’를 선택하게 된다. 플래시 플랫폼에서 게임은 다운로드나 사양의 제약 없이 플레이가 가능했다. 첸은 이전까지 플래시를 개발해본 적이 없었는데, 플로우를 플래시로 출시하기 위해서 3개월동안 공부하여 제작하는 과정을 거쳤다. 플라워와 저니를 출시 할 때에는 콘솔 플랫폼에 대한 고민거리가 있었다. 첸은 손쉬운 사용과 접근 가능성을 중요시해 인터페이스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정작 플레이스테이션이 없는 사람은 게임을 즐길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이 있었다. 콘솔 게임시장이 성장하고 있지만 전체 비율에서는 아직도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은 그가 스카이를 모바일 플랫폼에서 출시한 배경에 있기도 하다. 가장 보편적인 게임 기계를 찾다가 누구나 한 대 씩 가지고 있는 모바일을 선택했다. 그 외에도 게임은 화면에 문자 언어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고 색이나 사운드, 컷신으로 상황의 변화를 드러낸다. 색의 경우 노란색은 흥미로움, 길을 잃거나 위기가 닥쳤을 때 짙은 녹색 또는 검정색, 생명력이 없을 때 흰색, 푸른 하늘은 해방감으로 그리고 있다. 플레이어의 현 상황을 한 마디로 보여주기 위해 매 스테이지 별로 등장하는 유적지 벽화는 저니의 상징적인 요소이다. 또한 캐릭터는 정체성이 모호하게 디자인되어 있어 인간 캐릭터의 경우 명확하게 남성인지 여성인지, 나이, 인종 등의 정보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도 그의 게임 중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이 글은 제노바 첸이라는 인물을 작가의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을지 타진해본 글이었다. 그는 1인 개발자는 아니었으며, 다수의 인원을 거느리는 팀의 디렉터로 활동했다. 모든 작업이 그의 아이디어를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여러 작업에서 드러나는 공통적인 요소는 첸이라는 사람이 가진 가치관과 그의 실천 의식에 기반했다고 충분히 분석될 수 있다. Tags: 제노바첸, 플로우, 작가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이선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놀이하는 전정기관에의 상상 - 멀미 너머의 게임
매클루언의 아이디어를 빌리자면, 이 감각기관이 우리에게 잘 인지되지 않는 것은 이 기관은 다른 감각기관들에 비해 그다지 기술에 의해 확장된 시도가 없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지구의 보편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인간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마치 우리를 둘러싼 공기처럼 너무나 보편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여지기에 ‘특별한’ 감각적 자극을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 Back 놀이하는 전정기관에의 상상 - 멀미 너머의 게임 22 GG Vol. 25. 2. 10. 미디어의 시대, 멀미의 시대 매클루언은 미디어를 신체의 확장, 좀더 구체적으로는 감각의 확장으로 이해했다. 기술 발전에 힘입어 인간은 신체 기능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까지 감각이 가 닿을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며 발전해 왔다. 청각만으로는 가 닿을 수 없는 거리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시야를 벗어난 먼 거리에서 일어난 일들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기술은 인간의 감각 확장을 단지 동시대의 것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과거에 벌어졌던 사건들까지도 지금 당장 우리의 감각 앞에 고스란히 옮겨놓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감각의 확장이지만 다른 의미로는 감각의 과잉 시대인 미디어 시대에 인간은 지나치게 쏟아지는 새로운 자극들 앞에서 간혹 일시정지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멀미라는 증상이 대표적이다. 현재까지의 의학적 연구 결과들은 멀미를 여러 감각 정보들이 서로 다른 정보를 뇌에 전달할 때 생기는 문제를 뇌가 위험 신호로 받아들여 신체를 일시적으로 주저앉히려는 기제로 이해한다. 눈으로 보는 상황과 전정기관이 인지하는 신체의 평형 상태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뇌로 전달할 때, 뇌는 이를 신체의 이상이라고 인식하고 신체 기능을 저하시켜 일단 정지 후 휴식을 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멀미에 관한 기록들은 고대 그리스의 뱃멀미로부터 시작된다. 매클루언의 이야기를 따라간다면 배 또한 신체의 확장이며 마찬가지로 미디어의 일종이며, 배를 탄 상태에서 전정기관이 느끼는 출렁임의 평형감각은 눈으로 보는 시각정보와 불일치하기에 멀미를 유발한다. 뱃멀미도 결국 미디어 멀미의 일종이며, 신체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정보 앞에 인간의 신체는 위험 상황을 인식하고 셧다운을 건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특히 시각정보에 크게 기대는 인간에게 있어 멀미는 주로 새로운 미디어가 시각에 관련된 정보로 확장할 때 발생하곤 했다. 인류에게 기계적 스펙터클을 처음 제공한 시점 중 하나로 자주 거론되는, 마차와 기차의 네모난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고속의 이미지는 평행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차와 기차가 만드는 진동은 전정기관으로 하여금 이 시각정보가 결코 평탄한 횡스크롤이 아님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마차 멀미, 기차 멀미에 이어 초창기 영화 스크린을 보며 멀미를 경험했음을 이야기한 많은 기록들은 뱃멀미로로부터 이어지는 동일한 맥락에 서 있다. 감각정보의 불일치가 만드는 게임 속의 불화들 디지털게임은 현대의 여러 미디어 중 멀미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매체일 것이다. 인간이 영상매체에 익숙해지면서 영화 멀미는 몇몇 특수한 시점의 카메라 상황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없어진 것과 같이 거론되지 않는데 비해 게임에서는 적지 않은 멀미 호소가 이어지곤 한다. 물론 <심시티>같은 조감 시야에서 멀미를 호소하는 경우는 없다. 대부분의 멀미는 1인칭, 혹은 3인칭 시점의 3D 기반 게임에서 나타난다. 영화에서도 1인칭 카메라를 통해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되는 경우에 멀미 이야기가 나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 때의 멀미들은 어느 정도 영상매체 속 화자의 위치, 다시말해 카메라의 시점에 의해 나타난다. 상당수의 영화들에서 카메라가 위치하는 곳이 3인칭 시점인 것과 달리,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직접 조작하는 많은 현대의 액션 어드벤처 게임들은 카메라가 언제나 주인공을 향해 맞춰진, 그것도 주인공의 위치와 운동이 연출자로서의 게임 제작자가 아닌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의도에 의해 변화하는 주인공을 향하고 있다. 이 때 플레이어는 컨트롤러를 잡고 있는 손과 같은 신체를 통해 가상공간인 게임 속 세계로 자아의 위치를 이전한다. 전후좌우로 뛰고 구르는 행위는 단지 스틱을 기울이고 마우스를 돌리는 문제가 아니라 마치 실제로 자신의 신체를 굴리고 기울이는 행위처럼 여겨진다. FPS게임에서 벽 뒤에 엄폐를 끼고 내다볼 때 자신도 모르게 신체를 기울이는 행위가 나오는 것이 이런 점에서다. 현재까지의 디지털게임들이 가상공간 안의 세계를 구현하는 방식은 상당부분 시청각 데이터를 통해서인데, 멀미는 이 때 정직한(?) 전정기관의 항의로부터 비롯된다. 눈과 귀는 플레이어가 2층에서 뛰어내렸다고 보고하는데, 전정기관은 가상공간으로부터 아무런 정보를 받지 못하기에 플레이어의 뇌에 “아닌데요? 자리에 앉아있는데요?”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게임에서의 멀미는 감각정보로 치면 이런 과정을 거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VR과 같은 좀더 몰입적인 환경을 시청각 정보를 통해 제공하는 상황에 더욱 강렬해진다. 나는 <유로트럭> 같은 자동차 운전 게임을 VR로 플레이해본 적이 있는데, 운전하는 자세가 게임하는 자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멀미를 거의 못 느끼던 와중에 게임 속에서 도시 도로의 과속방지턱을 넘어가는 순간 멀미감이 확 쏟아짐을 느꼈다. HUD 속 디스플레이에서는 방지턱을 넘는 트럭의 시각 정보를 고스란히 제공했지만, 나의 전정기관은 아무런 정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VR은 HUD착용자의 머리 움직임을 계산해 그 궤적만큼의 변화를 3D그래픽으로 표현하며 스크린의 시야를 사실상 360도에 가깝게 재현한다. 고개를 돌리면 돌린 방향만큼의 변화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이 장치에 대해 사람들은 “와, 진짜같다!”고 환호하지만, 이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시청각 정보에 국한된 감탄에 머문다. 현재까지의 VR기술은 우리의 평형과 운동을 감지하는 전정기관에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정기관의 평형감각은 영원히 인류 놀이의 적이기만 할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전정기관이라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오감이라고 부르는 시, 청, 후, 미, 촉의 다섯 감각이 아니면서도 사실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하고 많은 감각정보를 제공하던 감각기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운동과 평형을 측정하고 그 정보를 뇌에 전달해 주는 이 기관은 그 중요성과 정보량에 비해 우리에게서 ‘감각’이라고 인식된 바가 거의 없었다. 매클루언의 아이디어를 빌리자면, 이 감각기관이 우리에게 잘 인지되지 않는 것은 이 기관은 다른 감각기관들에 비해 그다지 기술에 의해 확장된 시도가 없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지구의 보편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인간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마치 우리를 둘러싼 공기처럼 너무나 보편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여지기에 ‘특별한’ 감각적 자극을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우리는 전정기관을 가지고 논 적이 있다. 놀이공원의 바이킹과 롤러코스터가 대표적이다. 여러 안전장치를 통해 절대 떨어져 죽거나 다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이로드롭에서 떨어지는 그 순간의 아찔함을 놀이로 승화한다. 공포에 질려 눈을 질끈 감아도 여전히 바이킹이 최대 고도에서 떨어지기 시작하는 그 순간의 하강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놀이공원의 여러 탈것들은 아마도 전정기관이라는 숨겨진 감각을 발굴해 내 놀이의 미디어로 만든 몇 안되는 사례일 것이다. 전정기관의 운동감각을 다른 감각과 동일한 수준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놀이매체로서의 게임이 가지고 있는 멀미라는 극복점에 대해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여지도 갖게 된다. 조금 더 기술이 발전할 수 있다면, 놀이매체에 대한 새로운 시도로서 전정기관의 평형감각을 가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어떤 기술이 놀이로서 출현하는 순간을 상상해보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케이드 오락실에 가면 간혹 레이싱 게임 같은 경우에는 가상의 유압 서스펜션을 활용해 어느 정도 재현된 평형감각을 놀이에 활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직까지의 기술은 전정기관의 감각이 놀이에 도움된다는 사실까지를 확인했을 뿐, 이를 실제로 재현하는 방식은 가상의 재현이 아니라 실재적 재현에 가깝다. 말 그대로 플레이어의 몸을 기계에 싣고 흔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전정기관의 감각을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이 개발될 수 있다면, 아직까지 모든 다른 감각에 비해 정직한 정보를 흘리는 통에 멀미를 유발한다는 눈총을 받고, 때로는 3D 게임 멀미 극복을 위해 멀미약을 통해 평형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홀대받은 이 감각기관의 의미가 놀이매체에서 다시 재조명받을 순간이 올 지도 모를 일이다. 지나친 상상이라고 지적받을 수 있는 발상이긴 하겠지만, 애초에 우리가 지금 누리는 많은 놀이 기술들은 처음부터 진지한 실현을 생각한 발상이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상상이었음 또한 기억해야 한다. 현재까지의 3D게임에서는 멀미 극복을 위한 기술 개발에 많은 자원을 쓰고 있지만, 먼 훗날에는 지금 이 시대를 역사 속에서 읽으며 한때 방해되는 감각으로 받아들여졌던 전정기관의 평형감각이 이제는 놀이의 주역이 된 감각이라고 이야기하는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페르소나 3 리로드> 일본 정치와 함께 톺아보기
<페르소나 3>는 <페르소나 시리즈> 전체로 보면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여신전생 시리즈>의 외전 격으로 개발된 시리즈의 핵심 정체성을 확립한 타이틀이기 때문이다. <여신전생 시리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던전RPG를 표방하는데, 던전 탐색에 악마 소환 및 합체를 결합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소나 시리즈>도 큰 틀에서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전 시절의 1인칭 시점을 고수하진 않지만, 게임의 핵심 축은 여전히 던전과 전투이다. < Back 18 GG Vol. 24. 6. 10. Tags: 일본, 정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Kim is known for his activities as a critical expert on current affairs in various press media. But he is also an active gamer who never let go of games. Some of his publications includes 『a cynical society』, 『Otaku Loved Lenin』, as well as a co-author of 『Now, Here, Far-Rightism』, 『right-wing discontent』, 『Twitter, that 140-character egalitarianism』. His latest publication is 『Democracy where you vote because you don't like that side』.
- ‘공포’와 ‘놀이’로서의 비장소 : <8번 출구>를 포착하기
현대의 공포는 흐른다. 곧, 어디서든 틈입한다. 일찍이 공포라는 키워드 하에 내포되어 온 스테레오 타입화된 형상들―가령 괴물, 귀신, 살인마, 악마 등―만으로 이 정서의 출처는 설명되지 않는다. 해당 공포는 좀 더 내밀한, 혹은 하이퍼객체와 같은 유동성을 발휘하기에 우리는 이 공포를 ‘앎’의 영역으로 안배하기에 항상 실패한다. < Back 19 GG Vol. 24.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Chanmi Jeong Pursues scholarship in the Department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at Sungkyunkwan University. A devotee and an observer of subculture. In the midst of tracking down new methodologies for thinking through the times.
- 표절이라는 확고부동하지 않은 선
요 몇 년 부쩍 게임기자라는 부담스러운 직함을 달고서 듣기에 더더욱 부담이 가는 질문들이 있다. “이 게임이 저 게임을 베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건 표절이 맞지 않나요?” 마치 녹음기를 켠 채 내 커리어를 끝장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질문들인데, 그때마다 대처하는 방법은 같다. ‘예/아니오’ 로 답하는게 아닌, 상대방과 열띤 토론을 시작하는 것이다. < Back 표절이라는 확고부동하지 않은 선 24 GG Vol. 25. 6. 10. 요 몇 년 부쩍 게임기자라는 부담스러운 직함을 달고서 듣기에 더더욱 부담이 가는 질문들이 있다. “이 게임이 저 게임을 베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건 표절이 맞지 않나요?” 마치 녹음기를 켠 채 내 커리어를 끝장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질문들인데, 그때마다 대처하는 방법은 같다. ‘예/아니오’ 로 답하는게 아닌, 상대방과 열띤 토론을 시작하는 것이다. 게임과 게임 사이의 표절 시비는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더더욱 자주 마주하게 되는 것 같다. 또 이전보다 게임사들이 보다 직접적으로 보호를 위해서 나서는 것도 눈에 띈다. 표절을 직접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법은 저작권과 관련된 법이지만, 최근 불거진 몇가지 대표적인 사례들을 보면, 결국 제기된 소의 내용은 저작권이 아니라 특허권이나 부정경쟁방지 위반, 영업기밀 침해 등으로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선택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이유는 현재의 상황에서 저작권은 각사의 이익을 보호할 수 없지만 특허권 침해나 부정경쟁방지 위반 등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거나 최소한 협상카드로서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저작권이 보호하는 영역이 명확하기 때문에도 있지만, 게임이라는 미디어에서 유독 그 한계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다 근본적으로 질문을 바꿔보자면, 게이머들이 보기엔 아무리봐도 표절인 게임들이 어째서 법적으로는 그러한 판단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게이머들이 확증편향에 물들어 잘못된 생각을 하는걸까?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는 법과 수용자가 각 작품 또는 결과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법이라면 특허권을 침해했거나 또는 제조법을 도용했는지를 판단하려면 제작 과정을 살펴볼 것이고, 저작권처럼 어떤 발상을 침해했거나 타인의 아이디어로 부정한 성과를 얻으려고 한다면 아이디어를 직접적으로 표절했는지, 정도는 어느정도인지 살펴볼 것이다. 이들 법은 이미 게임 밖 다른 미디어에서는 여러 사례들을 낳았고, 물론 다른 미디어에서도 그 한계 또는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가 많지만 어느정도 성과를 내왔다. 하지만 유독 게임에서는 표절과 오마주, 벤치마킹에 대한 구분이 옅고 항상 격론이 오가는 주제가 되곤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법알못으로서, 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보다는 우리가 겪는 괴리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모든 창작물은 정반합을 거듭하며 발전하고, 때문에 미메시스(Mimesis)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유사한 발상 자체를 원천 차단하는 것은 더 나은 발전을 아예 가로막아버리는 일이 되기 쉽다. 다른 창작물만큼이나 게임의 제작은 레퍼런스에서부터 시작하며, 창작과 발상은 수렴과 변용으로 시작한다. 그 때문에 이러한 행위 자체를 일종의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나 카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실제로 표절은 게임계에서 매우 민감한 주제이지만, 그만큼이나 어떤 게임을 설명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 역시 “이 게임은 XXX한 OOO임.” 이라며 비슷한 다른 게임에 빗대어 표현하는게 일반화되어 있을 정도이니. 그만큼 대부분의 디지털 게임들은 그 원류가 비교적 명확하며 장르적 정반합에서 언제나 비교당하기 일쑤다. 때문에, “이 게임은 어느 게임을 닮았죠?” 또는 더 나아가 “이거 XXX 베낀거 아닌가요?” 라는 말을 들을 때면, 한마디로 쉽게 답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단 게임 자체가 너무 복합적인 미디어이기 때문에 아무리 간단한 게임이라도 그를 구성하는 요소가 수백 수천가지라고 하기에도 부족할 정도이고, 또 대체 그 중에서 어느것이 같거나 비슷할 때 표절이라 할 수 있는가, 어느정도 비율이 넘어서야 표절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까지 같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즉, 게임에서의 표절 논쟁은 그 정의에서부터 갈림길에 서있다. 비교적 그 정의를 내리기 쉬운 다른 미디어에 비하면 말이다. 물론 다른 미디어들이 가진 표절 논쟁에서도 항상 “어디까지가 표절인가?” 라는 이야기는 나오곤 하지만 게임만큼 이 문제가 골치 아픈 것도 없다. 같은 그래픽 스타일을 가졌지만 게임 플레이는 판이하게 다른 케이스는 흔해 빠졌고, 플레이 구성요소가 비슷하다고 해도 이를 어떻게 배치하냐에 따라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같은 플레이 메커니즘을 가지고 다른 그래픽 요소와 플레이 도구, 구성으로 바꾸어 만들어내는 것이 게임적 변용의 기본이다. 아무리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건 없다는 말도 있지만, ‘미메시스’ 라는 말로 포장하기에는 애매한 선에 걸친 것도 참 많다. 즉, 이처럼 어떤 게임의 표절 여부를 판단하는데 있어 법적인 부분을 떠나 게이머 입장에서도 판단하기 쉽지 않은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게임 자체가 워낙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창작물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표절 또는 벤치마킹한 요소가 분량 면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더라도 플레이 측면에서는 오히려 다른 요소가 부각되고 중심이 된다면 그건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릴 수 있고, 역으로 아주 사소한 부분이지만 그게 게임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면, ‘베꼈다’ 라는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근래에 있었던 가장 큰, 그리고 유명한 사례라고 한다면 미호요의 ‘원신’ 과 닌텐도의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법적인 표절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원신’ 은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의 표절이 되기는 어렵다. 명칭을 그대로 가져다 쓰거나, 디자인 요소를 트레이싱하거나, 당연하게도 미호요가 닌텐도를 해킹이라도 한게 아닌 이상 제작과정이나 그 소스코드가 동일할리는 없다. 그러나 이 게임은 많은 부분에서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를 닮아있으며, 개발사인 미호요도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가 준 영향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좋은 참고가 되었다는 말은 결국 ‘원신’ 의 레퍼런스에는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가 들어가있었다는 말이 되며 그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플레이어 입장에서도 두 게임을 할 때의 경험이 거의 비슷한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게임의 전반적인 그래픽 스타일 지향점이나 스태미나 아이콘 같은 시각요소의 차용에서부터, 넓게보면 퍼즐 중심의 오픈월드 탐색이라는 게임 경험 자체도 유사성을 드러낸다. 글라이더 활공에서부터 벽타기, 맵의 구성과 몬스터 배치까지 단순히 유사한 정도를 넘어서는 부분도 있다. 최소한 ‘원신’ 의 어드벤처 파트는 그 근원이 ‘젤다의 전설: 브레드 오브 더 와일드’ 있다는데에 모두가 동의한다. 따라서 ‘원신’ 이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를 표절했음을 주장하는 쪽은 주로 이러한 부분을 인용한다. 게임 내 콘텐츠와 메커니즘의 구성과 더불어 조작감, 타격감 같은 상당히 개인적으로 심리적인 요인들까지도 언급된다. 그러한 이유는 결국 게임이란 경험에 의해 정의되는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대리 체험할 때의 경험보다도 내가 직접 플레이어로서 게임을 플레이할 때, 그로써 얻어지는 성취감, 순간적인 피드백, 감각들이 비슷하다면, 이유와 근거를 명확하게 들 수는 없어도 이들이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 셈이다. 그래서 문제는 이것이다. 그래서 이 게임은 표절작인가? 레퍼런스를 참고해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는 관행은 오랫동안 이어져왔고 당연한 행위이지만, 이 자체를 리버스 엔지니어링과 동일한 행위로 단정지을 수 있을까?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이 질문을 던질 때 나온다. 표절이라고 하는 측과, 그렇지 않다고 하는 측이 제기하는 근거가 게임의 서로 다른 부분이라서다. 어떤 요소를 차용했다고 볼 수는 있지만, 게임 전체가 어느 게임의 표절인가 하는 결론에 다다랐을 때에는 결국 전체 게임의 종합적인 부분을 살펴보게 되기 때문이다. ‘원신’ 과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의 경우 어드벤처 파트는 굉장히 높은 유사성을 보이지만, 전투는 액션이라는 공통 분모를 빼면 그 근간 자체가 다르다고 볼 수 있으며, 플랫폼과 BM에서 발생하는 플레이 특성 자체도 완전히 다르다. ‘원신’ 은 기본적으로 캐릭터 수집 및 육성이 주요 콘텐츠이기 때문에 이 캐릭터를 가챠로 뽑고, 육성 재화와 장비를 수집해 일정 이상의 완성도로 캐릭터를 빚고 깎아내는 과정이 핵심이다. 물론 이 또한 완전히 전에 없던, 다른 게임에 없던 ‘발명’ 은 아니지만 최소한 ‘젤다의 전설’ 에서는 크게 거리가 있으며 독자적인 발전을 가장 많이 꾀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4개 캐릭터와 원소 반응을 통한 파티 빌딩, 하나의 핵심 장비를 중심으로 여러 부품 단위로 세부 스펙을 쪼개어 조합하고 빌딩할 수 있는 장비 성장은 ‘원신’ 의 핵심이고, 이미 여러 갈래로 발전해온 빌드깎기 게임의 ‘원신’ 적인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나아가 7신과 국가와 여러 캐릭터가 등장하는 원신만의 세계관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감성적인 만족감은 오롯이 ‘원신’ 이 이루어낸 성과다. 물론 이들 요소도 비슷한 사례를 찾으라면 못할 건 없지만, 유사성보다는 오리지널리티가 더 돋보이는건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 게임으로서 ‘원신’ 이 가진 독자적인 영역도 결코 적고 좁다고 할 수 없다. 게임은 그 자체로 굉장히 많은 레이어를 가지고 있으며, 그중 몇몇 레이어가 겹친다고 해서 완전히 동일한 총합으로 보기는 도저히 어려운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벤치마킹한 부분이 지배적이라면 또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단될 수 있지만, ‘원신’ 에 있어서는 모사한 레이어 만큼이나 직접 고민하고 그려낸 레이어가 많고 그것이 게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비록 논쟁의 여지가 있어도 사람들이 ‘원신’ 을 무조건적인 표절작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는 단순히 수학적인 비율 산정을 말하고자 하는건 아니다. 게임의 경험은 매우 미시적인 체험들의 총합으로 하나의 거대한 경험이 된다. 때문에 아무리 같은 재료를 썼다 하더라도 곁들이는 음식이나 조리법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음식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벤치마킹한 부분 외의 레이어가 충분히 두터울 때 전체 경험의 성격이 바뀌는” 현상을 이루어낸다면 단순한 표절작이 아닌 새로운 갈래의 발산이 될 수 있다. ‘원신’ 은 분명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의 어드벤처 파트를 토대로 하지만, 그 위에 자신만의 요소들을 쌓아올림으로서 다른 형태의 게임을 빚어냈다. 그래서 이제 ‘원신’ 은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를 표절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간단하게 예, 아니오로 답할 수는 없다. 필자라면, “게임의 핵심적인 요소 일부를 본땄지만, 그만큼의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다.” 라고 답하겠다. 결국 표절을 판단하는 기준은 정량적일 수 없으며, 우리는 각각의 게임에 대해 저마다 들어맞는 고민과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근래 ‘소울 시리즈’ 의 대성공 이후 우후죽순처럼 쏟아졌던 소위 소울라이크 게임들 역시 어떤 정량적인 기준을 가지고 소울라이크다, 이건 소울을 계승했다, 이건 소울라이크가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었다. 대부분, 모두가 어떠한 정성적인 감각들, 경험들의 총합으로서 여러 플레이어의 논의를 거쳐 일종의 합의를 이루어낸 것에 가깝다. 이 일련의 이야기는 왜 저작권을 판단하는데 있어 법이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지 증명하는 셈이다. 법이라는 정량적인 판단으로는 선을 명확히 긋는게 불가능하며, 결국 재판관이나 배심원 같은 심리를 진행하는 권한자들의 재량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마저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법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법에게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면 그만큼의 부작용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법리적인 판단과는 별개로, 이러한 게임의 독창성과 특별함들은 지금보다 더 보호받아야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게임이 새로운 방향으로 계속 발산하고 발전하고 정반합의 과정을 반복하는걸 방해하여서는 안된다. 얼핏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그 사이에 매우 미세한 틈이 있다고 믿는다. 결국 어떤 일에서도 어떤 선을 긋고 경계를 정의하는 건 반복적인 조정과 다시긋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글조차도 그러한 과정 중 하나이며, 그때그때 우리는 엄격한 선을 조금씩 이동시킨다는 얼핏보면 모순적인 일을 해야 한다. 법이 그 역할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면, 누가 그 역할을 해내야 할까? 이에 대한 답 또한 간단하고 원론적이다. 결국은 게이머다. 소비자이자 독자이자 애정자인 게이머들이 표절이 아닌 독창성을 높게 판단하고, 가치를 발굴하고 그런 게임을 플레이하며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공유하는 것. 점차적으로 시장에, 게임이라는 넓은 세계에 그러한 ‘스스로 추구하는’ 게임들이 지배적으로 남도록 하는 것. 일종의 시장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좀더 넓은 범위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단순한 소비자주의가 아니라 어떤 문화의 향유자로서, 명확한 가치관으로서 자신이 즐기는 문화에 대해 고민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 그런 행위들이야 말로 무분별한 표절작을 근절하고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추구를 치하할 수 있는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플레이어에 대한 존중과 함께 절대적인 선(線)이 있다고 믿기보다는 항상 새롭게 판단하고 스스로가 엄격한 기준이 될 자신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다들 자기 나름대로의 선 안에서 옥석을 가려가며 치밀하게 소비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조금은 지루하고 현학적이라도, 단정적일 수 만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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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TRPG로 미술하기: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제작자 인터뷰
지난 6월과 7월, 전시장 ‘팩션’에서는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라는 게임의 형식과 관객 참여형 예술을 결합한 전시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이 열렸다. 전시장을 활용해 약 한시간 반 동안 진행되는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TRPG 게임 마스터가 되고 게임의 참여자인 관객들은 재난이 닥친 고향에 돌아왔다는 설정의 캐릭터가 되어 함께 이야기를 구성한다. < Back 19 GG Vol. 24.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isu Kim Studies a range of fields—culture and knowledge, space, and the academic field. Also interested in the history of games and the lives of gamers.
- Pings, Parley, and Pictures - How Players Communicate
Games are inherently social. In the wake of MUDs (Multi-User Dungeons) in the late 1970s to MMORPGs in the early 90s, playing games has been heralded as an opportunity to socialise and be social - antithetical to the usual “loner” gamer stereotype that is so pervasive in popular media. More recently, during the COVID-19 pandemic, games offered a pre-existing framework for keeping in touch and hanging out with friends when regions in Canada and the U.S. were facing mandatory lockdowns and curfews to stem the infection rates. Many turned to their headsets and keyboards to play games and catch up with friends when they could not see them face-to-face. However, a caveat to being a social space, is the potential for anti-social behaviours. This is not formed in the lack of socialising, a typical tenant of being anti-social, but rather in the deploying of modes of communication to have a different kind of social “fun”. < Back 14 GG Vol. 23. 10. 10. Tags: ping, voicechat, MTG, emote, toxicity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Cortney Blamey (Game Researcher) Marc Lajeunesse
- 누가 미국을 묻는다면 패드를 들어 GTA를 플레이하게 하라
이토록 GTA는 찬사와 공격, 열광과 거부를 동시에 받아왔다. 한편에서는 미국 사회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문화적 기록물로 평가받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도덕·질서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공격받았던 것이다. 2기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통치가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지금, 미국이라는 지리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쉬지 않고 꺼내온 GTA 시리즈가 지니는 의미는 남다르다 할 수 있겠다. < Back 28 GG Vol. 26. 2. 10. Tags: 락스타, GTA, 미국, 범죄, 느와르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Worked for eight years as a reporter at ThisIsGame. Now handles external relations at a subculture startup. Loves editors and the power of cheat codes.

![[4회공모전수상작] 게임은 어떻게 우리를 소외시키는가](https://static.wixstatic.com/media/d03518_1143f99b38cd4ab3b62c0467fe2446ae~mv2.png/v1/fit/w_176,h_124,q_85,usm_0.66_1.00_0.01,blur_3,enc_auto/d03518_1143f99b38cd4ab3b62c0467fe2446ae~mv2.png)







![[인터뷰] TRPG로 미술하기: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제작자 인터뷰](https://static.wixstatic.com/media/d03518_a490031cf2914aa0b7cb33578a25827c~mv2.jpg/v1/fit/w_176,h_124,q_80,usm_0.66_1.00_0.01,blur_3,enc_auto/d03518_a490031cf2914aa0b7cb33578a25827c~mv2.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