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결과
Search this site
공란으로 1346개 검색됨
- 아포칼립스의 거울: 불완전한 정보는 어떻게 인간을 심판자로 만드는가?
태양 폭발로 문명이 무너진 세계, 플레이어는 매일 밤 TV 앞에 앉아 정부가 배포하는 식별 가이드를 시청한다. 지하에서 올라와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방문자’를 색출하라는 임무다. 뉴스는 완벽하게 고른 흰 치아, 털 없는 매끈한 겨드랑이, 빛에 민감해서 충혈된 눈 등을 방문자의 징후라고 보도한다. 위생 관리가 불가능한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청결함은 역설적으로 괴물의 증거가 된다. 이 플레이어에게 건네는 첫 번째 질문이다. < Back 아포칼립스의 거울: 불완전한 정보는 어떻게 인간을 심판자로 만드는가? 28 GG Vol. 26. 2. 10. 태양 폭발로 문명이 무너진 세계, 플레이어는 매일 밤 TV 앞에 앉아 정부가 배포하는 식별 가이드를 시청한다. 지하에서 올라와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방문자’를 색출하라는 임무다. 뉴스는 완벽하게 고른 흰 치아, 털 없는 매끈한 겨드랑이, 빛에 민감해서 충혈된 눈 등을 방문자의 징후라고 보도한다. 위생 관리가 불가능한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청결함은 역설적으로 괴물의 증거가 된다. 이 플레이어에게 건네는 첫 번째 질문이다. 문제는 정보는 필연적으로 맥락을 삭제한 채 극도로 단편적으로 전달된다는 점에 있다. 뉴스가 ‘방문자’라고 말한 기준을 현장에 적용하는 순간 플레이어는 지독한 딜레마에 빠진다. 문을 두드린 남자는 자신의 손톱 밑 흙에 대해 정원사라서 당연하다고 항변하고, 치아가 고른 이는 최근에 교정을 마쳤을 뿐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붉게 충혈된 눈을 가진 여성은 빛에 민감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잃고 밤새 울었기 때문일 수 있다.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정보는 ‘충혈된 눈은 곧 괴물’이라는 공식뿐이지만, 눈앞의 현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사연을 품고 있다. 그러나 생존 본능은 복잡한 맥락을 무시하고 안전한 공식을 따르도록 강요한다. 결국 플레이어는 정원사를, 교정 환자를, 유가족을 잠재적 괴물로 규정하고 총구를 겨누게 된다. 위험한 존재를 집에 들이는 것은 플레이어뿐 아니라 같은 장소에 기거하는 생존자들의 안전도 위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그림1. 정보만으로 인간과 ‘방문자’를 구분할 수 없다고 해서 혼자 생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에서 집에 혼자 남는 경우는 ‘방문자’의 표적이 되거나 연제청에 잡혀가 제거된다. 게임의 엔딩 중 하나인 ‘비질란테의 분노’는 불완전한 정보를 맹신한 인간이 어떻게 파멸에 이르는지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방문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광기에 사로잡힌 자경단원은 “너 같은 인간들이 내 친구를 죽였다”고 울부짖으며 플레이어의 집을 찾아온다. 그가 움켜쥔 전리품, 즉 뽑힌 치아와 잘린 손가락은 그가 사냥한 대상이 괴물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진짜 인간의 것이다. 이는 방문자의 식별 징후인 ‘완벽하게 고른 치아’를 색출하겠다는 강박이 개인적 원한과 결합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타자를 괴물로 오인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의 도구로 전락하는지를 보여준다. 자경단원은 스스로를 공동체의 심판자로 규정했지만, 결국 그는 괴물보다 더 끔찍한 학살자가 되어버린다. 그의 손에 들린 전리품은 단순한 증거물이 아니라, 인간성을 잃고 광기에 잠식된 자경단원의 몰락을 상징하는 물증이다. 이 엔딩은 미디어가 제공하는 불완전한 식별 기준이 무력, 그리고 맹목적인 복수심과 결합할 때 어떤 참혹한 결과를 낳는지를 경고하며, 괴물을 잡겠다는 집착이 오히려 인간을 괴물로 변모시킨다는 아이러니를 그려낸다. <격리 구역(Quarantine Zone: The Last Check)>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관료주의적 시스템 안으로 끌어온다.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세상에서 격리 시설 관리자가 된 플레이어는 검문소에 선 생존자들을 오직 수치로만 판단해야 한다. 체온계, 청진기, 육안 검사라는 도구가 주어지지만 이 역시 인간의 생사를 가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다리에 있는 상처가 좀비에게 물린 자국인지 단순히 넘어져 생긴 멍인지 구별하기 어렵고, 얼굴이 붉은 것은 감염 증상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더위에 익은 것일 수도 있다.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플레이어를 압박하는 것은 ‘효율성’이라는 이름의 비용이다. 감염자를 들이면 기지가 위험해지고, 의심스러운 자를 모두 격리하면 수용 시설 유지비가 폭증한다. 결국 플레이어는 화씨 180도 이상이라는 숫자에만 매몰되거나,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일단 추방하는 효율성의 논리를 택한다. 아이의 떨림이나 생존자의 호소는 배제된 채, 인간은 오직 데이터로 전락한다.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다 보면 어느새 플레이어는 비인간적인 행위에 가담하게 된다. 성벽 밖에서 으르렁거리는 감염자보다, 모호한 정보 앞에서 효율성을 택하는 자신의 손끝이 더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반면 는 시각 정보가 주는 공포를 역이용해 판별 행위 자체를 무력화하는 독특한 지점을 보여준다. 주인공 샘은 창문을 열어 ‘방문자’라 불리는 우주적 존재를 목격하거나 인식하면 끔찍한 괴물로 변이한다는 명확한 정보를 획득한다. 샘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물리 법칙이 무시된 미로로 변해 있으며, 복도에는 하키 마스크를 쓴 거구의 여성, 머리가 카메라와 융합된 이웃 라일, 바퀴벌레 떼가 뭉쳐 지성을 갖춘 바퀴 씨 등 기괴한 형상의 이웃들이 돌아다닌다. 기존의 서바이벌 호러 문법대로라면 이들은 생존을 위해 제거하거나 배제해야 할 ‘적’으로 간주되지만, 샘은 시각적 기표가 주는 혐오감을 넘어 그들의 내면을 보기를 택한다. 그는 변이한 이웃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고 거처를 제공하며 대화를 시도하고, 그들은 괴물의 외형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샘에게 고마움을 표하거나 그를 왕으로 추대하는 등 인간적인 유대와 이성을 유지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게임 후반부에 이웃이자 조력자였던 ‘11’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판별의 무의미함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증명된다. 인류의 기원은 사실 우주를 떠도는 거대한 생명체인 방문자의 미세한 말단 신경세포였으며, 인간이 방문자를 목격하는 순간 발생하는 변이는 외부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 아니라 독립된 개체라는 환상이 깨지고 본체와 하나가 되려는 회귀 본능의 발현이었다. ‘11’이 기억을 지우고 육체와 분리되면서까지 숨기려 했던 것은 바로 “우리가 곧 괴물의 일부”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눈으로 보고 괴물이라 판별하며 배척하려 했던 존재는 가장 근원적인 자아의 본모습이었고, 이 게임에서 창문은 외부를 감시하는 방어 기제가 아니라 내면의 끔찍한 기원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시각적 정보에 의존해 타자를 괴물로 규정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그리고 불완전한 정보가 어떻게 우리를 진실로부터 격리시키는지를 이 게임은 역설한다. 판별의 서사는 <도시전설 해체센터>에 이르러 물리적 실체를 넘어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정보’ 그 자체에 대한 가차 없는 폭로로 확장된다. 앞선 작품들이 가시적인 괴물과 인간의 경계를 획정하려 했다면, 이 작품은 SNS와 미디어라는 거울에 투영된 비가시적 공포, 즉 도시전설의 이면을 해체하는 인식론적 탐구에 집중한다. * 그림2. <도시전설 해체센터>의 침대 밑의 남자 에피소드. 괴담은 단편적인 시각 정보와 결합되어 확산된다. 플레이어는 ‘침대 밑의 남자’, ‘저주받은 상자’, ‘도플갱어’ 등 전형적인 괴담의 형식을 띤 사건들을 추적하지만, 그 심연에서 마주하는 것은 초자연적 존재가 아닌 인간의 뒤틀린 욕망과 악의다. 첫 번째 에피소드인 ‘침대 밑의 남자’의 경우, SNS를 통해 괴한의 침입이라는 공포가 실시간으로 확산되지만 그 실상은 타인의 파멸을 발판 삼아 이득을 취하려는 치밀한 기획이었다는 사실을 플레이어는 확인할 수 있다. 목격자를 자처했던 김하나는 사실 고위층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 브로커였으며, 피해자를 심리적 궁지로 몰아 통제하기 위해 괴한을 고용한 자작극을 벌인 것이다. 대중은 자극적인 이미지와 텍스트에 매몰되어 피해자를 향한 무분별한 신상 털기와 2차 가해를 서슴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의 진짜 괴물은 침대 밑의 괴한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유희로 소비하고 확산시킨 익명의 대중과 조작된 정보 그 자체다. ‘저주받은 상자’ 에피소드 역시 궤를 같이한다. 상자를 접한 이들이 뱀의 환각과 심장마비를 일으킨다는 소문은 오컬트적 저주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남미산 환각 성분과 알코올의 상호작용에 의한 화학적 반응으로 밝혀진다. 저주의 매개체로 여겨진 치아와 인형 또한 광신도 집단 ‘삼매지마’에 세뇌된 택배 기사가 살의를 담아 배치한 범죄 도구에 불과했다. 나아가 후반부의 ‘그레이트 리셋’ 음모는 실체 없는 공포가 어떻게 사회를 붕괴시키는지 극명하게 투영한다. 테러 집단은 예언의 형식을 빌린 카드를 유포해 대중의 불안을 선동하고, 이를 주가 조작과 사회 혼란의 도구로 삼았다. 우리가 재앙이라 믿었던 현상들은 사실 조회수를 갈구하는 미디어, 타인을 해하려는 악의, 그리고 검증 없이 정보를 유포하는 대중 심리가 합작한 거대한 시뮬라크르였던 셈이다. “소문 자체가 악이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인간이 문제”라는 센터장 빈차아의 일갈은 이 게임의 문제의식을 관통한다. 현대의 아포칼립스는 핵전쟁이나 좀비 창궐이 아니라,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혐오를 배양하고 인간성을 잠식하는 순간 도래한다. <도시전설 해체센터>는 불완전한 정보를 맹신하고 확산시키는 우리의 태도야말로 시대의 진정한 공포임을 역설하며, 판별의 화두를 타자가 아닌 ‘정보를 소비하는 나 자신’에게로 돌려놓는다. 앞서 언급한 네 편의 게임이 공유하는 핵심은 판별이라는 행위가 지닌 윤리적 함정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정보와 모호한 기준을 손에 쥐고 너무나 쉽게 타인을 심판대에 세운다. 생존을 위해 타인을 의심하는 동안 그 의심의 근거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잊어버린다. “당신은 인간입니까?”라는 질문은 결국 “당신은 단편적인 정보로 타인을 괴물로 낙인찍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괴물은 바깥에서 침략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손쉬운 정보로 심판하려는 게으른 시선 속에 이미 도사리고 있다. 아포칼립스가 비추는 거울 속에서 플레이어는 괴물이 아니라 정보를 맹신하며 방아쇠를 당기는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Tags: 포스트휴먼, 인본주의, AI, 인공지능, 비인간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성균관대학교 강사) 홍현영 패미콤을 화목한 가족 구성원의 필수품으로 광고한 덕분에 게임의 세계에 입문했다. <저스트댄서> 꾸준러. 『81년생 마리오』, 『게임의 이론』, 『미디어와 젠더』 등을 함께 썼다.
- 압둘 와합과 〈21DAYS〉를 플레이하다
필자는 최근 압둘 와합과 〈21Days〉를 같이 플레이해 보았다. 한국 사회에서 난민을 다룬 이야기가 드문 가운데 그것도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게임적 형식이라는 점이 꽤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압둘 와합(Abdul Wahab Al Mohammad Agha)은 시리아 출신으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 활동을 하다 시리아 내 한국 유학생들을 친구를 둔 인연으로 2009년에 처음 한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다. 하지만 2011년 고국의 민주화 시위 이후 복잡하게 전개된 내전 때문에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헬프 시리아’라는 단체를 만들며 시리아 문제의 실상을 알리고, 난민들을 돕는 활동을 시작했다. < Back 압둘 와합과 〈21DAYS〉를 플레이하다 04 GG Vol. 22. 2. 10. 시리아 난민을 다룬 시리어스 게임 〈 21Days 〉(2017)는 독일에 도착한 시리아 난민 모하메드 쉐누가 자신의 가족들을 기다리며, 21일동안 노동과 교육, 외로움과 편견으로부터 견뎌내는 경험을 다루고 있다. 서울대 정보문화학 연합전공 수업 〈게임의 이해〉를 통해 만난 현유지, 고은비, 최우빈, 김진형, 이원석 등이 이정엽 교수의 코디네이팅을 받아 출시했다. 제작자들은 게임연구자 이안 보고스트의 시리어스 게임이론을 기초로 플레이어가 퀘스트 완료에 성공하기보다는 오히려 실패하도록 만듦으로써 난민의 현실을 드러내는 게임 디자인을 추구했다. 필자는 최근 압둘 와합과 〈21Days〉를 같이 플레이해 보았다. 한국 사회에서 난민을 다룬 이야기가 드문 가운데 그것도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게임적 형식이라는 점이 꽤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압둘 와합(Abdul Wahab Al Mohammad Agha)은 시리아 출신으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 활동을 하다 시리아 내 한국 유학생들을 친구를 둔 인연으로 2009년에 처음 한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다. 하지만 2011년 고국의 민주화 시위 이후 복잡하게 전개된 내전 때문에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헬프 시리아’라는 단체를 만들며 시리아 문제의 실상을 알리고, 난민들을 돕는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난민에 대한 막연한 혐오가 없어지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스토리텔링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말한다. 스토리텔링은 나와 다른 자의 입장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그들 또한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유일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같은 이야기라도 게임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특이성이 있을까? 당사자 입장을 가진 플레이어로서 압둘 와합이 느낀 바를 중심으로 기록해 보았다. 이는 컴퓨터 게임이라는 형식에 대해, 타자의 입장을 플레이한다는 윤리적 당위를 넘어서 그 입장을 어떻게 구조화하고 설계하는 것이 더 좋을 지 논평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몇 가지 비판적인 발언으로 시리아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감에 따라 여권 갱신 등이 자유롭지 않아 활동에 제약이 생긴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귀화뿐이었다. 압둘 와합은 2020년 10월 한국에 귀화했다. * 교사 김혜진이 저술한 〈내 친구 압둘와합을 소개합니다〉(2021, 원더박스) 표지 - 게임 하기 앞서 Q: 압둘 와합은 게임을 즐겨했었나? A: 유년시절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주로 경험해 보았다. 축구게임같은 스포츠 게임을 친구들과 했었다. 게임을 자주 하기에는 언제나 부모님의 잔소리가 많으셨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웃음) 요즘 사람들처럼 깊게 파고 든 적은 없었다. Q: 오늘 플레이할 게임은 조작이 어렵거나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지는 않으니 저와 상의하면서 플레이하면 될 것 같다. A: 좋다. - 0Days 압둘 와합은 게임의 첫장면, 난민관리국에서 모하메드의 난민인정이 신속하게 이뤄지는 부분에서 놀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이 게임이 시작부터 가장 어려운 것을 해결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실에서는 난민인정을 받기까지 신원조회부터 적응교육까지 여러 준비를 해야 한다. 그는 “게임에서지만 가장 어려운 것을 시작부터 이루게 되어 기쁘네요.”라고 말했다. 제작진에 따르면 이같은 상황은 게임 디자인 안에서 의도된 것이었다. 그 동안 난민 소재의 시리어스 게임들이 주로 유럽지역 탈출루트 이동의 어려움이나 난민캠프에서 어려움을 극적으로 게임화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21days〉는 그러한 고난이 끝나고도 발생하는 일상의 어려움을 시뮬레이션 하고자 했다. 그들이 한 사회에 들어와 겪는 노동의 고단함과 차별 또한 난민의 고통이지만 표현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임 상에서 주인공 모하메드는 자신의 난민인정 이후 아내와 아들을 독일에 무사히 도착하게 해 UN의 가족결합원칙 하에 난민인정을 받게 만드는 일을 목표로 삼게 된다. 이제부터 플레이어는 이를 위해 브로커를 고용할 돈을 벌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압둘 와합은 모하메드가 받아든 난민인정 증명서의 국적이 ‘RYSIA’인 점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것이 제작진의 오타인가 싶었지만 이 또한 의도된 것으로 실제하는 시리아 난민뿐 아니라 모든 난민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특정 국가를 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같은 게임적 의도는 게임이 끝난 후 제작자에게 문의하여 압둘 와합에게 알려주었다. - 1 Days 우리는 모하메드를 난민관리국이 소개해 준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도록 했다. 공사장 반장에게 일에 대해 설명을 받는 데, 자막 곳곳에 ㅁㅁ표시로 구멍이 나서 자세한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아직은 모하메드의 언어능력이 좋지 않아 독일어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점을 표현한 것이다. 벽돌을 나르는 일 같은데, 대충 알아듣고 한 것으로 처리가 되었다. 3시간 30분을 일하고 80시리를 받았다. 압둘 와합은 이 같은 게임적 표현이 재밌다고 평가했다. “제가 한국에 처음 와 일할 때도 열심히 일하라는 것인지, 그만 두라는 것인지 알아듣기 어려워 고생한 경험이 떠올라요”라고 말했다. 모자란 언어능력이 신경쓰여 공사장 아래 위치한 어학원에 등록해 독일어를 공부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압둘 와합은 이 부분은 게임적인 연출같다고 말한다. 실제로 난민들은 어학교육을 이수하는 조건으로 생활비를 보조받기에 자신이 개인적으로 등록하는 일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언어학습은 〈21Days〉의 중요한 요소로 언어능력이 모자랄 때, 일을 맡지 못하거나 노동 시 급료가 깍이는 패널티가 있다. 심지어 어학원 등록비는 40시리로 비싸다. 벌면 족족 어학원비로 나가도록 디자인되어 있어 이 게임의 난이도에 영향을 끼친다. 필자는 지속적인 언어학습이 없을 때 외국인이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압둘 와합에게 주었다. 노동도 하고 공부도 했으니 우리는 모하메드에게 음식을 먹이기로 했다. 더 싼 맥도날드가 있었으나 그곳에는 돼지고기가 섞인 음식이 많아 실제로도 무슬림들은 꺼려 한다고 한다. 첫날이니 아랍 음식점으로 가서 케밥과 허머스, 페투쉬, 팔라펠 중 무엇을 먹을 지 골랐다. 압둘 와합은 웃으며 비싼 음식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비싼 순서가 팔라펠→페투쉬→허머스→케밥 순서가 아니라 케밥(고기)→페투쉬(샐러드)→허머스(병아리콩으로 만든 소스형 음식)→팔라펠(병아리콩으로 만든 고로케) 순이 대충 맞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게임상에서 케밥은 가성비가 좋은 음식이니 우리는 앞으로도 자주 케밥을 먹어야 겠다고 농담을 던졌다. - 2Days 어제보다 떨어진 멘탈 지수가 신경쓰였다. 혹시 지도상에 보이는 모스크에 가서 기도를 하면 이 수치가 올라갈 수 있을 지 궁금했다. 모스크에 가는데, 교통비가 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게임에서 이동은 곧 시간과 돈을 소모한다. 궁금하다고 아무 곳이나 가기보다는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스크에 가니 같은 처지에 있는 난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과 대화 도중 모하메드는 “그래도 이 나라만큼 난민들을 환영하는 나라는 없어”라고 대답했다. 압둘 와합은 게임에서 언급하고 있는 독일 메르켈 총리는 난민들 입장에서는 정말 좋은 사람이며, 훌륭한 정치가라고 평가했다. 메르켈은 각종 난민문제로 지지율이 흔들리는 가운데 뚝심있게 난민유입 정책을 체계적으로 세워나가 여론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모스크에서 기도를 하니 멘탈 수치가 올랐다. 압둘 와합은 한국에 와서 고국이 어려움에 휩싸일 때,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내 계획은 무엇이고 그 진행과정대로 진행하고 있는 지, 나는 왜 무엇을 위해 고생해야 하나 같은 질문을 던지며 매일 기도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이 게임에서 모스크에 가서 기도하는 일이 멘탈점수를 높이는 것은 사실적인 표현이라고 말했다. 귀가하는 도중 숙소 앞에서 노래하는 버스커에게 팁을 주었다. 무려 10시리나 되었기에 몇 번을 망설이다가 주었다. 혹시나 독일인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압둘 와합은 멘탈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고독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결정이 게임 상에서 어떤 변화가 있을 지 기대하며 우리는 버스커 친구에게 돈을 주었다. 그는 시리아에 파병된 아들을 둔 자로 훗날 자신이 일하는 라이브 카페를 소개해 주었다. -3 Days 아내가 보내달라는 200시리를 보내야 하는 날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의 사치?를 반성하고 일을 열심히 하기로 했다. 배고픔 수치가 절반 이상 떨어져도 계속해서 오전 오후로 일하기로 했다. 공사장에 일이 없어 레스토랑에 취직해 설겆이를 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어학원은 다니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급해도 공부를 멈추면 기회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 앞에는 난민을 혐오하는 남자가 “ㅁㅁ나는 무슬림”이라고 모하메드에게 외쳤다. 굶어가면 모은 돈 중 200시리를 아내에게 송금했다. 배고픔 수치가 너무 떨어져 있어, 싫어도 맥도날드에 가서 핫도그를 먹고 이른 잠을 청했다. - 4 Days 아침부터 교통비가 없는 상황이 되어 모하메드는 40분이나 걸려 모스크에 가야 했다. 압둘 와합은 별 다른 현지인 커뮤니티에 가입하지 못하고 직장과 모스크 정도만을 가야하는 게임안의 상황이 너무 리얼하며 동시에 안타깝다고 말했다. 유럽식 레스토랑이 선택지에 생겼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고 동시에 돼지고기가 든 음식이 많았다. 게임 상에서 먹을 수는 있었지만 플레이어인 압둘 와합은 선택하지 않았다. 공원에 들려 “우리 나라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다고” 주장하는 노인을 만났다. 압둘 와합은 자신이 만났던 어떤 한국 할아버지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결국엔 그 사회에서도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외국인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현실이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물론 공원에는 모하메드에게 선의를 보이는 시민도 있었다. 다시 돈을 벌어야 하니 공사장까지 걸어가 노동을 했다. - 5 Days 아내의 편지가 도착했다. 가방을 도둑맞아서 송금한 돈을 다 잃어버렸다고 한다. 가족에게 3일안에 다시 200시리를 보내야 하게 되었다. 교통비가 없어 역시 또 공사장까지 걸어가야 했다. 오전 오후 일을 했으니 아랍식당에 가는 호사를 누리기로 했다. 배고픔이 조금 가시면서 멘탈도 약소하게 오르게 되었다. 버스커 친구가 일하는 카페 블루노트에 갔더니 입장료 25시리를 지불하라고 한다. 술과 음악을 즐기는 현지인들을 부러워 하며 친구의 노래를 들었다. 취객 중 하나가 이민자였는데, 그는 모하메드에게 “어허 독해져야 해”라고 충고했다. 순간 매우 한국적인 충고라서 압둘 와합과 나는 한참 웃었다. 압둘 와합은 아직 해금되지 않은 지역 중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문화원과 유원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장소를 모하메드가 다녀야 그 사회에 대한 호기심도 유지하고 멘탈도 건강해진다는 논리였다. 실제 본인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었다. 모하메드는 이제 숙소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버스커 친구와 이런 저런 속내를 털어놓으며 고향에 있던 부모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압둘 와합은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자 대개의 나이든 부모님들이 피난을 고사하고, 젋은 자식들부터 탈출시켰다고 말해 주었다. - 6 Days 아내에게 돈 독촉하는 편지가 왔다. 플레이어에게 긴장감을 주려는 게임 내 장치는 이해되지만 돈 이야기만 들어야 하는 모하메드의 상황이 피로하게 느껴졌다. 돈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맥도날드로 가서 가장 싼 햄버거를 먹었다. 조금 먼 곳에 주유소 일자리가 해금되어 있어 세차 일을 했다. 압둘 와합은 독일의 난민 정책은 실제로는 난민에 대한 직업훈련코스가 정비되어 있어, 게임처럼 공사장과 식당, 주유소 같이 일용직만 전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독일 외 지역 대개의 난민들은 저런 악순환 고리 속에서 바보가 되어가기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사실적인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공원에서 다시 만난 할아버지는 역시 또 난민혐오적 발언을 한다. 모하메드는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한다. 압둘 와합은 이 상황이 모하메드의 심성이 착한 것이 아니라 싸움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하는 언행이라고 해석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뭔가 한탕을 노리는 룸메이트를 만났다. - 7 Days 주유소에 일이 없어 공사장으로 가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일을 계속 했더니 멘탈과 배고픔이 계속 떨어졌다. 아내에게 돈을 송금해야 하기 때문에 모하메드에게 밥도 먹지 않고 일만 시켰다. 이른 오후에 숙소에 들어가 잠을 잤다. - 8 Days 아내로부터 브로커를 고용하기 위해 250시리가 필요하다고 편지가 왔다. 압둘 와합과 나는 모하메드의 멘탈과 배고픔 수치의 관리를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빠르게 일만 시키기로 했다. 배고픔이 거의 바닥을 치니 캐릭터는 느려지고 멘탈 수치는 점점 감소되고 만다. 모하메드는 공원의 할아버지와 티격태격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IS에 대해 욕하고 있기에, 우리도 그 IS를 피해서 도망친 사람들이라고 답변했다. 압둘 와합에게 이 할아버지의 생각이 혹시 바뀔 수 있을까 질문해보았다. 압둘 와합은 자신의 경험으로는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쉽게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하메드는 이 날도 녹초가 되어 잠이 들었다. - 9 Days 아내는 기차역 근처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고 연락을 했다. 헤이트 스피치를 하는 남자를 또 숙소 앞에서 만났다. 배고픔과 멘탈 수치가 바닥이 치는 가운데, 일할 의욕도 공부할 의욕도 잃어버렸다. 모스크에 가서 간신히 멘탈수치를 높였다. 하지만 이미 바닥난 멘탈과 배고픔에 모하메드는 일할 의욕을 잃었다. 멘탈수치를 조금이라도 높이고자 카페 블루노트에 가서 음악을 들었지만 크게 오르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숙소로 이른 귀가를 했다. 룸메이트는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뭔가 나쁜 일인 것처럼 보였다. 잠을 잤다. 아내가 말한 250시리를 모으지 못한 상황이다. - 10 Days 아내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아들 압둘이 아프다고 한다. 오늘까지 반드시 기차표를 살 돈을 보내야 하는데 여의치 않았다. 일할 의욕이 사라져서 모스크에 갔다. 약간의 멘탈 회복이 되어 공사장에 갔으나 결국 작업명령을 못 알아들어 사고를 치게 되었다. 급료가 깎였다. 결국 아내에게 보낼 돈을 다 벌지 못하고 숙소에 왔다. 숙소에 도착하니 룸메이트가 3층 카심의 방으로 오라는 쪽지를 남겼다. 주인 없는 방에 가서 룸메이트 메흐디의 지갑이 떨어진 것을 보게 되었다. 훔칠까 말까 고민하다 훔쳤다. 이것만 훔치면 아내에게 돈을 보낼 수 있으니까. 아내에게 송금하고 돌아오니 메흐디가 지갑을 잃어버려서 화가 나 있었다. - 11 Days 아내가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했다. 내일까지 다시 200시리를 보내야 한다. 하지만 모하메드는 멘탈도 체력도 바닥이 나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 - 12 Days 도저히 방법이 없어 모하메드는 모스크에 갔다. 멘탈 수치가 조금 올랐지만 돈도 없고, 여전히 배고프다. 어학원을 다닌 지 오래되니 공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대화도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내에게 송금하지 못했다. - 13 Days 아내와 아들에게서 소식이 없다. 모하메드는 이제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렸다. 이렇게 배드엔딩을 보게 된 압둘 와합과 나는 매우 허탈한 마음이었다. 우리는 모하메드의 가족이 도착하기 까지 21일 중 겨우 13일을 버틴 것이었다. 이 게임을 더 나은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1Days〉는 일반적인 세이브 로드 시스템이 없었다. 완전히 새로 시작하거나 지난 날 중 하나를 선택해 그 이후의 날짜는 되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재플레이가 가능했다. 다음날 터키로 실제 출국을 앞 둔 압둘 와합이 사정상 빠진 이후, 필자는 게임 4일차로 되돌아 가 플레이 해 보았다. 하지만 게임 상의 모하메드가 겪는 현실은 소매치기의 유혹과 범죄가담 등으로 더욱 더 암울해져 갔다. 노동조건은 가혹해지고 건강상태는 나빠지니 필연적으로 옳지 못한 길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가족과 상봉하는 날짜가 다가오지만 내용상으로 결코 좋은 엔딩이 아니었다. 이 게임은 성실한 노동자가 된 모하메드의 행복한 가족상봉은 애초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스팀에 진열된 이 게임에 대한 평가로 누군가 ‘순진한 프로파간다’라고 적어놓았는데 세상에 프로파간다를 이렇게 암울하게 재현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난민들의 입장을 미화시키기는 커녕, 그들의 행동이 필연적으로 어긋나도록 디자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깔끔하게 클리어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로 하여금 실패시켜 그 원인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 게임 플레이 후 소감 1회차 게임이 끝난 뒤 압둘 와합에게 아래와 같이 질문하였다. Q: 난민문제에 대한 게임적 접근법에 대한 본인의 의견은? A: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뉴스나 영화도 좋지만 게임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이성이 분명 있다고 본다. 5년 전에 한 시리아 출신인 압둘라 알 카람이라는 친구를 만났는데 그는 직접 컴퓨터 게임을 만들어 난민 포비아와 이슬람 포비아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그는 플레이어들에게 게임을 통해 시리아 사태를 경험시켜 난민들에 대한 선입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싶다고 했다. 압둘라 알 카람의 게임 [〈 Path Out 〉(2017)]의 초반부 한 씬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내전이 발발하기 직전 시리아인의 평범한 생활상을 경험하던 중 플레이어는 도시의 골목에서 낙타를 발견하게 된다. 대개의 플레이어는 당연히 낙타를 향해 타기 위해 돌진한다. 그 때 프로그래머는 게임 화면에 실사화면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시리아인들이 낙타를 타고 다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며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이라고 일갈한다. 게임 플레이와 다큐적 표현, 가벼움과 진지함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나도 그 때부터 게임의 가능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 게이머 세대에게 게임을 통해 세계의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매우 필요하다. Q: 〈21Days〉는 의도적으로 배드엔딩만을 보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A: 그렇다. 아마도 이 게임은 난민의 고난을 체험시켜 현실을 환기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 같다. 게임을 통해서 직접 당사자가 되는 경험을 주는 이런 시뮬레이션은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개발자 분들이 난민이 하나의 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을 테마로 후속작을 따로 만들어주시도 좋을 것 같다. (웃음) 중간 중간 모하메드가 범죄의 유혹에 빠지는 데 실은 이런 결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희망’이 필요하다. 희망이 높은 자는 범죄의 선택지를 선택할 수 없는 디자인도 멋지지 않을까? Q: 게임적인 구조 안에서 희생되는 현실의 디테일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이러한 현실적인 요소들 하나 하나 다 신경쓰다 보면 게임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게임은 복잡한 현실에 대한 최대한 단순한 구조적 분석을 바탕으로 하기에 중요한 것은 게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Q: 만약 이 게임에 해피엔딩이 가능하려면 어떤 요소를 추가해 달라고 말하고 싶은가? A: 게임 안에 희망(hope)이라는 수치를 추가하고, 모하메드의 선택지에 여행과 놀기를 집어넣어 반영하고 싶다. 실제로 이러한 장소들은 난민으로서 내게 큰 도움이 된 적이 있다. 현지 독일인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커뮤니티도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웃음) 난민이나 이주노동자가 그 사회에 잘 적응하는 방법은 그 곳을 즐겁게 느끼는 일에서 시작한다. 실제로 이 게임의 주인공처럼 일만 하는 사람은 고독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 사례를 자주 보았다. 일만 하다가 멘탈이 무너지는 사람들이 많다. - 재현에서 아쉬웠던 점 압둘 와합은 모하메드가 게임상에서 아내에게 돈을 송금할 때 ATM기를 사용하는데, 실제로는 그리 용이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갓 난민지위를 얻은 자가 유럽밖으로 돈을 보내는 일에는 여러 절차가 필요하다. 차라리 모하메드쪽에서 브로커를 고용하는 방법이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게임 상에서 아내에게 메시지를 받을 때, 컴퓨터 메일로 받는데 실제로는 스마트폰 문자로 소통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내의 상황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동하는 가운데 컴퓨터를 쓰는 행위보다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편이 기동성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실제 난민들이 되도록 좋은 스마트폰을 갖고 있으려는 이유다. - 게임과 사회 게임 플레이가 반드시 퀘스트 수락과 클리어만으로 이루어질 필요는 없으며, 때로는 현실의 부조리를 시뮬레이션해 보다 나은 질문을 유도하기 위해 설계될 수 있다는 것을 〈21Days〉의 사례는 잘 보여준다. 게임체험을 내적 구조 안에 갇힌 유희가 아니라 현실 밖으로 질문하는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여길 때 게임은 사회와 또 다른 연결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게임의 개념을 무엇이든 접속 가능한 매개의 개념으로서 상상하면 게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재미의 회로와 현실의 회로 사이를 연결하는 일은 여전히 발명중이며, 이 발명품들로 게임의 역사는 지금보다 더 다양한 계보를 가질 것이다. 옳음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다름을 위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21Days〉를 응원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오영진 2015년부터 한양대학교 에리카 교과목 [소프트웨어와 인문비평]을 개발하고 [기계비평]의 기획자로 활동해 왔다. 컴퓨터게임과 웹툰, 소셜 네트워크 등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화의 미학과 정치성을 연구하고 있다. 시리아난민을 소재로 한 웹반응형 인터랙티브 스토리 〈햇살 아래서〉(2018)의 공동개발자이다. 가상세계에서 비극적 사건의 장소를 체험하는 다크투어리즘 〈에란겔: 다크투어〉(2021.03.20-21)와 학술대회 [SF와 지정학적 미학] 연계 메타버스 〈끝나지 않는 항해〉(2012.06~19)를 연출했다.
- [논문세미나] 베트남 게임 환경과 무협문학의 관계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무술과 영웅담은 문학, 영화, 텔레비전 등 다양한 미디어로 확장되는 무협 이야기를 이루는 근간이 된다. 베트남 현지어로 키엠히엡(kiếm hiệp), 트루옌쯔엉(truyện chưởng)으로 불리는 무협물은 베트남에서 중요한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았다. 20세기 초 베트남에 처음 소개된 무협소설은 인쇄매체와 온라인게임을 통해 다양한 역사적 변천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는데, 우리는 이 글에서 오늘날의 베트남 디지털게임이 다루는 무협 콘텐츠가 어떠한 배경 속에서 무협문학으로부터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나는 초창기의 무협물에 관한 경험이 베트남의 동시대 게임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생애사적 접근법과 문화적 근접성의 개념을 활용해 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를 간단하게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 Back 23 GG Vol. 25. 4. 10. Tags: 베트남, 무협, 온라인게임, MMORPG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Editor-in-Chief in GameGeneration) Phan Quang Anh (Editor-in-Chief in GameGeneration)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게이머는 난민이 될 수 있는가? - <로스트아크> 대량이주 사태와 난민의 정체성
2021년은 한국 mmorpg 게이머들에게 대량이주의 해로 기록될 것이다. <메이플 스토리>나 <마비노기>의 경우, 아이템을 강화하는 세공도구 같은 유료아이템의 불투명한 확률 매커니즘이 문제였다. 랜덤이라고 표기되었지만 실은 옵션별 숨어있는 차등확률을 통해 랜덤확률에도 못미치는 효과를 보거나, 응당 적용되어야 할 옵션이 오류로 적용되지 않아 수년동안 0%의 확률로 실패한 뽑기를 유발한 것이 문제였다. < Back 게이머는 난민이 될 수 있는가? - <로스트아크> 대량이주 사태와 난민의 정체성 01 GG Vol. 21. 6. 10. 2021년은 한국 mmorpg 게이머들에게 대량이주의 해로 기록될 것이다. <메이플 스토리>나 <마비노기>의 경우, 아이템을 강화하는 세공도구 같은 유료아이템의 불투명한 확률 매커니즘이 문제였다. 랜덤이라고 표기되었지만 실은 옵션별 숨어있는 차등확률을 통해 랜덤확률에도 못미치는 효과를 보거나, 응당 적용되어야 할 옵션이 오류로 적용되지 않아 수년동안 0%의 확률로 실패한 뽑기를 유발한 것이 문제였다. 확률 매커니즘을 공개하고,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문제발견이 빨랐거나 유저들이 기망당했다고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유저들은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해 게임사에 시정과 해명을 요구해 개발사와 각각 간담회를 열었다. 하지만 만족할만한 답변이나 조치를 받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게이머들은 대체재가 될만한 게임으로 <로스트 아크>를 지목해 올해 3월 한달동안 대량이주를 이어갔다. 한편 <리니지M>의 유저들은 핵과금 유저와 중저과금 유저들의 경쟁구도를 만들어 과금을 부추기는 게임구조를 숨기고, 유저들간의 반목처럼 보이도록 일관한 개발사에 화가 나 있었다. 이들은 과거 <리니지2>의 혈맹 간 계급투쟁이었던 <바츠 해방전쟁>을 패러디 해 <개돼지해방전쟁>으로 자신들의 저항적 행동을 명명하고 항의성 차원에서 <로스트 아크>나 <검은 사막>으로 이주해 나갔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각기 메난민(메이플스토리 난민), 마난민(마비노기 난민) 등으로 불리우며 '난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게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게임이주 운동은 제품향상이나 서비스개선을 요구하는 소비자운동의 연장선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민'이라는 명명에는 몇 가지 중요한 함의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메난민, 마난민에 비해 린난민(리니지M)보다는 린저씨가 더 자주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리니지M 유저의 경우 난민이 겪을 고단함이나 소수자, 약자의 입장이 없을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돈많은 침략자처럼 묘사되는 경향을 보였다. 여기서 대중들이 생각하는 리니지M의 게임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플레이를 숙련하기 앞서 상세한 전략을 세워 각종 아이템을 맞추고, 한정 아바타를 과감히 구입하는 플레이 습관으로 <로스트 아크>의 경제를 인플레이션 시킬 수 있다는 공포를 로아 유저들은 느꼈다고 한다. '난민'이라는 명명에는 다음과 같은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첫째, 이주자들은 그 스스로 하나의 가상적 종족성을 가진 존재로서, 새로운 게임환경에 적응을 해야 하는 고단함을 '난민'으로 표현하고 있다. 둘째, 이주자들이 본래 활동하던 게임공간을 가상의 고향땅으로 간주하고, 혹시라도 고향땅의 문제가 해결되면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난민'으로 지칭한다. 셋째, 이주 대상이 된 게임의 올드 유저들은 특정한 게임성으로 훈련된 뉴비들이 와서 자신들이 형성한 게임성을 오염시키고 변형할 지 모른다는 공포를 드러내는 단어로 '난민'이라는 명칭을 쓴다. 이 경우 '난민'은 멸칭에 가깝다. mmorpg의 게임공간은 단지 놀이적 재미만을 얻는 곳이 아니라 현실과는 또 다른 인격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곳으로 유저로 하여금 다른 어떤 장르보다 오랜 시간을 가상적 환경에서 보내며 사회적 관계를 이루도록 만든다. 그들이 특정 게임에서 형성한 게임적 습관은 제시된 게임룰을 개량하도록 개발사에 요구하고 유저들과 암묵적으로 합의해 얻은 사회적 결과다. 그들이 자신의 게임에 불만이 있다해도 바로 탈주할 수 없는 이유는, 게임공간이 여전히 유저들의 역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적 공간에서는 매일 같이 전쟁이 벌어지고, 강제될 수밖에 없는 협력의 업무들이 있다. 물론 이들은 재미를 위해 디자인되었고, 노력이 필요하다 한들 현실의 노동에 비하면 가볍게 즐길 만하다. 적게 노력하면서 손쉽게 소속감을 얻을 수 있다. 게이머가 자신의 자부심을 특정한 게임종족으로 표출하거나 게임성을 유지하려는 욕망은 정체성의 불안과 연관을 맺는다. 현실 속의 모호함을 가상 속의 명확함으로 돌파하려는 것이다. 게임공간과 게이머의 관계는 단순한 상품과 소비자의 관계가 아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스마트폰을 사용하지만 운영체제 안드로이드에서 iOS로 이주했다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반면 메난민, 마난민 등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난민'이라는 표현은 게임이라는 플랫폼이 오늘날 새로운 가상적 정체성을 발명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특정한 게임의 문화는 특정 집단의 민속적인 기록으로서 가치를 갖는다고도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인터넷과 게임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공간이다. 가상 민족지학(virtual ethnography)은 인터넷 공간 속의 다양한 매개를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집단과 문화적 기록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뜻하는 신조어로 점차 그 실체가 입증되어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3월말 도입된 <로스트 아크>의 염색시스템을 소위 마난민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해 기존에 없는 새로운 플레이를 선보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아바타의 신체와 의상의 색을 바꾸는 꾸미기 플레이를 <마비노기>시절부터 익혀왔는데, 그 수준이 일반적인 갈색이나 노란색의 구분이 아니라 선호하는 색을 다크초코(#29141A)와 바나나(#FFE062)로 세분화하고, 해당 색의 색상코드(HEX)까지 암기하는 경지에 이른 자들이었다. 당연히 마난민들의 아바타 꾸미기 실력은 장인급이었고, 이들은 황금비율의 색배합을 담은 문건과 노하우를 공유하거나 다양한 예시를 보여주어 지금까지의 <로스트 아크>에서는 보지 못한 캐릭터들을 게임 내 전시하였다. 이는 염색 시스템을 이용해 꾸미기 플레이로 빠져들 가능성을 열어준 적극적인 게이밍으로 평가받을만 하다. 이 점에서 '난민'은 단순히 유입된 신규유저가 아니라 적극적인 혼종 플레이의 유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기존에 <로스트 아크>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잠재적 플레이를 극대화시켜, 해당 게임의 게임성을 풍부하게 만든다. 그들은 이주하기 전 게임의 게임성을 새로운 게임공간 안에 이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마 자신들도 온전히 과거의 플레이를 모두 구현할 수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변형 굴절되면서 <로스트 아크>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 다시 말해 기존 게임성을 변형시키면서 그 안으로 동화되고 있는 것이다. 인류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는 현대인들이 단지 이동상의 초국적 경험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이미 가상적인 초국성을 띤다고 지적한다. 현실의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제멋대로 파편적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김치를 먹으면서 유럽인의 정체성을 내재화하기도 하고, '한국적인'이라는 수식어는 점점 모호해져서 실상은 글로벌 코드에 가까운 보편성에 이르렀음을 확인하기도 한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이 임시적이라는 것을 안다. 동시에 서로 다른 정체성이 중층으로 겹쳐서 나타날 수도 있음을 이해하고 있다. 게임 속 난민이 보여준 혼종적 플레이는 인터넷 공간이 가속화하고 권유하는 혼종적 정체성의 작은 판본이다. 무엇보다 디지털공간은 현실보다 매끄럽고 장애물이 적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재난이나 박해로 인한 강제적 이주의 의미가 강한 '난민'보다 본래적으로 흩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존재라는 점에서 '디아스포라'를 강조해 새로운 조어를 선택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이른바 사이버 디아스포라(Cyber Diasporas)라는 개념이다. 사이버 디아스포라의 주인공인 우리들은 정체성이 모호하거나 없는 자들이 아니라 이 곳 저 곳을 매끄럽게 여행하며, 다종의 정체성을 획득하고 혼용하는 존재들이다. 지난 3월 20일 공연한 다원예술작품 <에란겔: 다크투어>에서는 배틀로얄 게임 <배틀그라운드>의 커스텀 게임을 이용해 게임공간을 기존 플레이 방식과 다르게 전유하는 실험을 했다. 사전에 신청한 일반관람객들을 에란겔 섬 세 곳(스쿨, 갓카, 밀타파워)을 지정해 모이게 하고, 그들이 그 안에서 다양한 형식의 게임비평을 듣게 해 교감하는 것이 전반부의 내용이었다. 그 중 스쿨에서 열린 권보연(게임씽킹 디자이너)-장병호(문화연구자)의 스크립트의 한 대목을 소개해본다. "플레이어란 현실과 가상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플레이하고 접속하면서 자기존재를 증명해요. 나는 그것을 착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도 배틀그라운드가 전쟁게임이고 내가 살아남으려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놀이를 해야한다는 것은 알고 왔어요. 하지만 내가 동숲러 '뽀'로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은 내가 누군가를 죽이러 선택해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예요. 나는 이 곳 배틀그라운드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많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여기 와보고 싶었죠. 아름다운 자연, 멋진 건물, 신기한 아이템. 그리고 귀여운 춤도 마음껏 출 수 있다고요. 배틀그라운드에서는 총에 맞아 죽는 것만 빼면 내가 동물의 숲에서부터 좋아했던 것들을 다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NZUGs-uYmMA ‹에란겔: 다크 투어› #2 .이주민(권보연)/삼선동 주민(장병호) (c)가상정거장) 연사들은 <동물의 숲>의 유저였지만 <배틀그라운드> 에란겔 섬에 자기 발로 왔다고 말한다. 동시에 이 곳의 룰을 이해하고 존중하지만 한편 다르게 사용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그들은 에란겔 섬을 마치 동물의 숲처럼 뛰어다니고, 탐색하는 게임공간으로 만들자고 제의한다. 이 뻔뻔함은 이들이 쫓겨온 난민보다는 자발적 디아스포라처럼 보이게 한다. 약간의 풍자적 유머를 담은 이 씬은 우리 시대의 게이머가 보다 더 적극적인 디아스포라로 전향되었을 때, 오히려 게임공간이 더 많은 가능성으로 해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21년 대한민국의 게임 난민들은 스스로 자신이 거주한 게임공간에 이의를 제기하고 뛰쳐나왔다. 그리고 이주해 온 땅에 기꺼이 스며들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필자는 게이머가 게임성을 바꾸는 혁명적인 사건의 시작으로 이 사태가 기록되길 바래본다. 이러한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조금 더 공정하게 게임의 룰을 바꾸는 것 뿐 아니라 자신이 가담하고 있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시뮬레이션으로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길어내는 공간이 게임이라면 이 공간에서부터 개길 수 있어야 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오영진 2015년부터 한양대학교 에리카 교과목 [소프트웨어와 인문비평]을 개발하고 [기계비평]의 기획자로 활동해 왔다. 컴퓨터게임과 웹툰, 소셜 네트워크 등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화의 미학과 정치성을 연구하고 있다. 시리아난민을 소재로 한 웹반응형 인터랙티브 스토리 〈햇살 아래서〉(2018)의 공동개발자이다. 가상세계에서 비극적 사건의 장소를 체험하는 다크투어리즘 〈에란겔: 다크투어〉(2021.03.20-21)와 학술대회 [SF와 지정학적 미학] 연계 메타버스 〈끝나지 않는 항해〉(2012.06~19)를 연출했다.
- USA in Fallout, USA today
We once thought that the era of Donald Trump had come to an end, but it appears it hasn't. While Trump may have lost the election, his supporters' enthusiasm remains robust. What fuels this enduring energy? Moreover, is the driving force behind Trump's rise aligned with traditional 'American' values or does it run counter to them? It's worth recalling that Trump's campaign slogan was 'Make America Great Again'. Yet, years later, when President Joe Biden won the election after a vigorous anti-Trump campaign, he declared his presidential message as 'America is back.' So, which vision truly represents 'America' – Trump's or Biden's? < Back 14 GG Vol. 23. 10. 10. Tags: fallout3, projectpurity, GECK, fukushima, radioactive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스플릿 픽션」에 대해 쓰지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합시다.
작년 겨울 즈음이다. 영화평론가 유운성 선생님께 ‘청탁이 점차 줄고 있다.’며 한탄한 적이 있다. 유운성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글 청탁이란 누구나 그 양이 줄어간다.’라고 답해주셨다. 마치 시간에 의해 소멸되는 무언가처럼, 평론가에게 있어서 글을 쓸 기회라는 것은 한정 자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요즘이다. < Back 「스플릿 픽션」에 대해 쓰지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합시다. 26 GG Vol. 25. 10. 10. 내가 평론가로 등단한지도 벌써 8년차다. (이런 글에 걸맞는 매우 전형적인 클리셰다.) 2017년 만화 비평 공모로 등단해 지금은 게임에 관한 글도 함께 쓰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은 게임 비평을 더 많이 쓴다. 곧 있으면 평론가의 생활도 10년차에 도달할 예정인데 슬슬 이 직업이 어떤 존재인지 고민이 되던 차였다. 이럴 때에 ‘평론가’에 대한 글을 청탁받았다는 사실에는 뭔가 운명적인 것이 있다. 평소대로라면 청탁을 받는 순간부터 플레이 할 게임을 고르고, 스크린샷을 열심히 찍고, AI비서에게 연구 자료 조사를 돌려놓았을 일인데, 아무런 사전 조사도 연구도 없이 불쑥 내 이야기를 쓰려니 영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데에서 뭔가 근질근질 거리는 걸 보면 그래도 평론가처럼 살아오긴 한 모양이다. 평론가로 살아오기 작년 겨울 즈음이다. 영화평론가 유운성 선생님께 ‘청탁이 점차 줄고 있다.’며 한탄한 적이 있다. 유운성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글 청탁이란 누구나 그 양이 줄어간다.’라고 답해주셨다. 마치 시간에 의해 소멸되는 무언가처럼, 평론가에게 있어서 글을 쓸 기회라는 것은 한정 자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요즘이다. 한편 2023년에 좋은 상을 받을 기회가 생겼다. 시상식에 나가서 함께 수상한 분들과 대화해보니 절반 정도는 이미 등단을 거친 분들이었기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등단 이후에 청탁과 기고의 기회가 마땅치 않아서 집필을 그다지 하지 못하신 분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청탁이 줄고 있다’며 미래를 걱정하는 것도 조금 배부른 생각이지 않나. 여러면에서 따지자면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어찌되든 약 3년 정도 한 잡지로부터 꾸준히 청탁을 받았으며, 지금도 GG로부터 계속 글을 쓸 기회를 받고 있다. 평론가에게 글을 쓸 기회라는 건 상시적 자원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조건을 통해 발생하고 그때그때 예정된 이들에게 돌아가는 선택적 자원에 가깝다. 이 ‘여러가지 조건’에는 정말 여러가지 것들이 포함되기 때문에 전부 나열하기도 벅차다. 그것들을 어떻게 해석하든 평론가는 어느정도 ‘선택받는’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며, 그 조건은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평론가 개인의 관점에선 언제나 공평하게만도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내가 머리를 기르는 걸 탐탁치 않게 생각하시는데, 아버지께서 불만을 말씀하실 때 마다 ‘내 직업은 눈에 띄는 게 중요하다.’며 적당히 둘러댄다. 그런데 이게 또 아무말이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평론가는 어찌되든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야 하는 직업이지 않은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 대한 ‘주목’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으로 기회는 증가하지 않을까. 평론가의 세계는 주목경제의 세계인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청탁을 줄 리 없을 터이니’ 그 세계에 순응하면서도, 또다른 한편 ‘경제성의 효과’에 의탁해야 한다는 사실이 내가 가진 평론가의 자아와 충돌한다. 길을 걷다가 또는 대중 교통을 타고 이동하다가 문득 ‘어떤 사람이 계속 청탁받는 평론가인가’에 대해서 질문해보곤 하는데, 특별히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SNS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다양한 기회와 많이 접촉하는 쪽이 더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나에게 그런 능력이 없는 것도 알고 있고, 다른 한편 그게 전부는 아니겠거니 싶기도 하다. 올해에는 비평을 써본 적 없는 사람들과 함께 비평 쓰기 스터디를 진행했다. 스터디를 진행하는 멤버들의 자기 평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진행을 주도하는 입장에선 결과가 꽤 만족스럽다. 어떤 글이 비평인지 설명할 수 있겠다 싶은 확신은 작년 GG의 비평 공모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가질 수 있었다. 뭐가 되었든 8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비평 쓰기라는 행위에 꽤 익숙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비평 쓰기’에 대해서는 알아도 ‘비평을 쓰게되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일천하다. 대체 누가, 어떤 경위로, 특정한 매체에 글을 쓰게 되는 걸까. 지난 8년간, 나는 ‘ㅇㅇ에서 글을 봤습니다. 저희 매체에도 써주실 수 있을까요?’라는 청탁을 한 번 받아봤다. 이 직업을 얻기 전까진 평론가란 그렇게 글을 쓸 기회를 가진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미디어를 통해 보편적으로 유통되는 전형적인 판타지의 일종인가 싶기도 하다. 아니면 그저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지. 어찌되든 올해는 좋은 기회가 있어 대학 강의를 시작했다. 교강사 미팅을 나갔더니 나를 알아보고 인사해주시는 분이 계셨다. 맞인사를 하곤 너무 부끄러워서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는데, 혹시 이런 태도가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여전히 머릿 속을 맴돈다. 게임 평론가로 살아오기 앞서 유운성 선생님과의 대화 와중,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조언은 다음과 같았다. 청탁을 기다리기 보다, 개인적으로라도 글을 꾸준히 쓰고 책을 출판하세요. 저자가 된다면 강연의 기회가 생기니 그렇게 대중과 접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나는 선생님의 훌륭한 조언에 바로 찬물을 끼얹었다. 선생님, 그런데 게이머들은 게임 평론가를 좋아하질 않아서 강연의 기회는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은 ‘아 그렇구나’하는 표정을 지으셨다. 며칠 전에 나는 ‘만화 작가 토크 콘서트’의 사회를 맡았다. 게스트인 두 작가와 친분이 깊어서 생긴 좋은 기회다. 나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만화평론가이지만(심지어 대본 초안에는 내가 ‘평론가이자 스토리 작가’인 걸로 나와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비평 쓰기와는 다른 ‘평론가의 일’과 마주할 때가 종종 있다. 어떻게보면 지금 하고 있는 대학 강의도 만화 평론의 연장이기도 하니까. 이게 바로 내가 받은 조언의 핵심이다. 잘 생각해보면 평론가의 일은 집필에만 한정되진 않는다. 물론 여전히 비평 쓰기야 말로 이 직업의 근간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비평적으로 사유하기’가 그보다 더 심층에 있는 근간이라면 그 발산에는 다양함이 존재할 수 있다. 나는 2023년 즈음에 ‘게임 평론도 하는 만화 평론가’가 되기 보다는 확실히 ‘게임 평론가’가 되기로 다짐했다. 그 짐에 호응해주듯 GG로부터 계속 청탁을 받을 수 있었고, 이에 대해 언제나 감사한 마음 뿐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 뒤에는 아직 떨어지지 않은 금붕어 똥같은 질문이 붙어다닌다. 과연 무엇이 나를 ‘게임 평론가’로 있을 수 있게 만드는 걸까.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GG에 더는 글을 기고하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여전히 ‘게임 평론가’일까? 물론 게임을 플레이 하고, 비평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은 게임 평론가다. 하지만 이런 규정은 어디까지나 존재론에 의거한 자신(自信)의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로부터 ‘게임 평론가’로 지칭될 수 있는 조건이란 마음만으로는 안되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게임 평론가’로 인식되기 위해 GG에 기생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는 좀 어렵다.(GG 미안해요!) 브런치에 스스로 글을 쓰기로 결정하기도 했으나 ‘직업적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 후순위로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아니, 블로그 등을 통한 자가 기고가 핵심적인 해결책이라고만도 말할 순 없다. 역시 비평가의 활동이라는 것이 가지는 더 넓은 방법들과 접촉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 몇달 전에 어떠한 소셜 커뮤니티 모임의 모임 주도를 시도해본 적이 있다. 게임 평론가라는 사실을 좀 강하게 어필하고 게임을 통해 대화하는 모임을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몇 개 정도의 기획서를 보냈지만 돌아온 건 ‘보드게임 모임처럼 모여서 즐겁게 게임을 하는 모임’같은 요청이었고, 나는 그냥 더 진행하기를 포기했다. 이 플랫폼과 함께 내가 원하는 방식의 ‘게임으로 사유하기’를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마음을 가져서다. 더 강하게 밀어붙여서 설득하고 관철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 에너지를 내기도 전에 먼저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해야하는 건가, 하는 회의감도 들어 한동안 시달렸다. 그런데 이 플랫폼이 특별히 유별난 곳이겠는가. 이게 아마 지금 우리 세계의 일반적인 인식일 것이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평론가에 대한 세계의 규정은 시대의 요구와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대한민국에서 비디오 게임 평론가로 산다는 건 스스로 유령이 되기로 결정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좀 거칠게 말하자면) 이 세계에는 아직 이 ‘직업’을 맞이해줄 마음이 준비되어있지 않다. ‘대체 게임 평론가는 무슨 이야기를 해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템플릿처럼 준비해 다닌다. 그래봐야 애당초 상대가 비디오 게임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절반 정도는 무력한 언어로 소비된다. 게임이 일상적인 세대의 탄생, 게임 인구의 점진적 증가 같은 이야기야 떠돌고 있지만 「어벤저스 : 엔드 게임」을 천만명이 봤다는 뉴스를 볼때와의 기분과 사뭇 다르지는 않다. 어쩐지 세계가 아직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공허한 다짐을 반복하는 기분도 든다. 그럼에도 게임 평론가로 살겠는가? 새 동료들이 탄생하는 좋은 자리에 음울한 이야기나 쏟아내고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 마음 한구석이 편치는 않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쏟아내면서도 나는 여전히 게임 평론가로 살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이야말로 지금의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 아닐까. 그런데 특별한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게임 평론이 재밌다. 나는 게임 평론이 다른 평론보다 ‘특별히’ 더 재밌다고 여긴다. 당연히 비디오 게임이 다른 분야에 비해 더 특별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냥 내가 게임을 만화만큼, 혹은 영화만큼 좋아하기 때문인데, 딱히 우열은 가린 적은 없지만 세 분야를 비슷하게 좋아한다. 그리고 게임 비평을 특별히 더 좋아하는 이유는,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마주침의 기회가 적기 때문인 것 같다. 더 희소한 일을 하기 때문에 가치 있다는 편향된 결정은 아니다. 이경혁 선생님이 몇번이고 이야기하는 대로 지금의 시대에 게임 평론은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나는 그러한 생각에 충분히 공감한다.) 필요는 하지만 요청받기는 어려운 일, 내가 하지 않으면 마주치기 어려운 일을 한다는 건 사유의 과감성을 준다. 어쩐지 내가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매우 커다란 심적 만족감(!)을 주는 면도 적지는 않다. 그런데 그런 자기 고유성이라는 명예로운 만족감의 탓만은 아니다. 그냥 ‘에라 모르겠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아무말이든 일단 던져볼 수 있다는 내적 만족감이 크게 작동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게임 평론을 하는 재미라는 건 아이러닉한 측면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세계로부터 유령처럼 취급되는 존재니까 아무렇게나 떠돌 수 있고, 그게 재미있다. 이러면 다시금 평론가로 살며 비평을 쓰는 이유로 환원되어버린다. 결국 우리는 왜 쓰고 왜 떠드는가? 어떠한 이야기를 진탕, 공식적으로, 마음껏 떠들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러니 저러니 이유를 붙였지만 ‘비디오 게임’에 대해서 대범하게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우리에게만 부여되는 특권이다. 비록 누가 읽고 있는지, 듣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더라도 특권화의 쾌락이 있다. 게임 평론가라고 칭할 수 있으니까 어느 자리에서건 권위있는 척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는 법이다. (자리를 함께하는 분들이 어떻게 쳐다볼지는 몰라도.) 여튼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이러다보면 언젠가 비디오 게임의 대중 강연도, 토크 콘서트도 많이 생길 지 누가 아는가. 이런 전장의 안개로 가득찬 미래를 뚫고 나갈 힘은 오직 쾌의 감각에서부터만 나오지 않을까. 실리나 명예, 가치의 취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불확실성을 뚫고 나가기엔 너무 나약한 힘이다. 공자의 말 ‘호지자불여락지자( 好之者不如樂之者) ’를 당위의 관점으로 보기보다 생존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럴싸하게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어떤 세계는 락지자만이 인고를 견딜 힘을 얻는다. 마지막. 평론가가 되고 한 4년차 즈음에 되었을 때, 어쩐지 나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평론가 동료들을 매우 친애하게 되었다. 그때 즈음이 평론가는 외로운 직업이라는 사실을 실감한 시기다. 물론 우리는 가끔 만날 수 있다. 서로에 대해 안부를 물을 수도 있고, 기회가 된다면 팟캐스트 같은 것으로 함께 프로젝트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결국 글을 쓸 때는 혼자다. 사유의 끝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남이 아니라 나를 끝없이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즐거워서 뛰어든 일이지만 때로는 외로운 일인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외로움을 안고 나아가야 하는 동지들에게 친애와, 연민과, 애정과, 존경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 자리를 빌어 GG의 필진분들에게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려 한다. 올 봄엔 GG에 기고하는 평론가 셋이 모여서 한참을 떠든 날이 있다. 차마시고 밥먹으면서 한 7시간은 떠들었던 것 같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동료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 때 나중에 온라인으로 「GTFO」를 함께하기로 했는데 역시나 실행은 안되고 있다. (다들 바쁜 것도 있고, 네 명일 때 최적으로 재밌는 게임이라는 말도 있어서 그만...) 그래서 생각하는데, 가끔은 멀티 플레이어 게임을 같이할 사람이 없을 때 함께 해주는 것도 꽤 괜찮은 연대라고 생각한다. 그래, 우리 같이 할 사람이 없어서 「스플릿 픽션」에 대해서는 쓰지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하면 어떨까. 「스플릿 픽션」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보편과 토착의 긴장 속에 도사리는 지정학적 미학: 〈7인의 사무라이〉에서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 이르기까지
〈라스트 사무라이〉가 일본 대중문화에 심취한 와패니즘의 대명사인 반면, 〈킬 빌〉은 오리엔탈리즘을 전유하는 대중주의다. 무사도와 신성한 사무라이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라스트 사무라이〉의 상당 부분은 뉴질랜드 로케이션으로 촬영되었고, 〈킬 빌〉은 이소룡과 사무라이를 섞고 중국계 미국인 배우 루시 리우에게 기모노를 입혀 대문자 오리엔탈(The Oriental)을 혼성모방한다. < Back 보편과 토착의 긴장 속에 도사리는 지정학적 미학: 〈7인의 사무라이〉에서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 이르기까지 06 GG Vol. 22. 6. 10. 1. 그들은 왜 사무라이와 닌자를 사랑하는가 *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좌) 와 〈킬 빌〉(우). 〈라스트 사무라이〉가 일본 대중문화에 심취한 와패니즘의 대명사인 반면, 〈킬 빌〉은 오리엔탈리즘을 전유하는 대중주의다. 무사도와 신성한 사무라이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라스트 사무라이〉의 상당 부분은 뉴질랜드 로케이션으로 촬영되었고, 〈킬 빌〉은 이소룡과 사무라이를 섞고 중국계 미국인 배우 루시 리우에게 기모노를 입혀 대문자 오리엔탈(The Oriental)을 혼성모방한다. 정갈하게 무릎 꿇은 다이묘와 쇼군이 차를 마시며 명예와 무사도를 논한다. 일본 전통 음악이 흘러나오는 다다미방에서 기모노를 입은 게이샤와 복면을 두른 닌자가 밀서를 교환한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갈대밭에서 두 명의 검객이 우아하게 일본도를 맞부딪치고, 가문의 복수를 마친 사무라이가 함박눈을 맞으며 할복한다. 일본 대중문화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한 번쯤은 스쳐 지나갔을 법한 장면들이다. 한국인들이 ‘왜색’ 이라며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표하는 것과는 별개로, 전 세계의 대중들은 사무라이와 닌자를 사랑한다. 지난 수십 년간 서방의 창작자들은 멋진 일본도, 이국적인 현악기 음악, 하이쿠와 다도, 명예와 바람의 길에 푹 빠졌다. 문화평론가들은 이를 80년대 일본의 버블경제와 문화산업의 융성에 힘입은 대중문화 와패니즘이라 규정하기도 하고, 문화연구자들은 전도된 시각성 속에서 문화제국주의를 읽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평과는 상관없이 사무라이와 닌자는 오늘날에도 끝없이 재생산된다. 일본도를 든 여고생, 사이보그 닌자, 기모노를 입은 접대용 안드로이드 등등. 이러한 재현물들 중 대부분은 상업적인 목적으로 표상과 설정만 가져와서 치장하는 키치(kitsch)이거나, 서구 재현체계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미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오리엔탈리즘인 경우가 많다. 어떤 지역 또는 공동체의 독특한 문화재현 양식을 상품화하거나, 굴절된 시선 속에서 전유하는 것은 마냥 좋거나(상업적 성공이란 관점에서) 혹은 나쁜(제국주의의 본질을 은폐하는)것일까? 일본문화에 대한 터부가 강한 한국에서 이는 매우 복잡한 문제다. 문화, 경제, 정치 전 영역에 걸친 식민지 경험을 통해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일본문화가 잔학무도하고 끔찍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사무라이는 신성한 바람의 길을 걷는 존재가 아니라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러 양민들을 학살하는 존재이고, 게이샤와 기모노는 문란한 일본식 성문화를 암시하는 상징물이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를 수탈했던 서구인들은 한술 더 떠 일본의 극악성을 숭상하고 상업화하는데, 이들에게는 아무리 입이 닳도록 참견해도 쇠귀에 경 읽기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김구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하루 빨리 위대한 대한민국의 문화 영토를 세계 곳곳에 건설해 ‘왜색’과는 차별화된 색다른 대안이 있다고 공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문화적 재현양식을 국민-국가의 틀거리로 협소하게 규정해, 문화적 민족주의 또는 주류 문화(서구의 시선)의 눈에 들기 위해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으로 치장하는 등의 인정투쟁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데에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국민-국가 문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특정한 문화적 관습이나 재현이 민족성이나 혈통 등 고정불변한 요소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과정 속에서 구성된다는(부르디외가 ‘아비투스’ 라고 규정한) 접근을 지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경이 아니라 접경이 있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생동하는 기호계가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도대체 왜 사무라이와 닌자를 사랑하는가? 국민-국가, 와패니즘, 오리엔탈리즘보다 더 큰 심급이 여기에 도사린다. 즉 지구(global)와 지역(local), 보편(universal)과 토착(vernacular) 사이를 편류하는 지정학적 미학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2. 보편과 토착의 변증법, 그리고 게이밍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일찍이 『계몽의 변증법』에서 전 지구적으로 평평하게 된 문화산업의 지배 하 상품처럼 찍어내는 대중문화의 보편성을 발견했다. 상품으로서의 대중문화가 융성하기 위해서는, 지구 어느 지역에서라도 수월히 팔릴 수 있고 또 이를 균질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체계(재현, 내러티브)가 전제되어야 한다. 패스트푸드가 그 보편적인 맛 때문에 뉴욕에서나 상파울루에서나 똑같이 잘 팔리듯이, 문화상품 또한 그러하다. 이를 위해서는 지구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문법과 체계가 준비되어야 했고, ‘장르’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고안되었다. 장르는 즐길 거리들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하나의 문화적 테일러리즘으로 출발했다. ‘중간계’에 심취한 이들은 중간계를 변용한(혹은 이름과 설정만 바뀐) 또 다른 판타지를 찾는다. 셜록 홈즈에 감명받은 사람들은 에르큘 포와로와 파일로 반스가 등장하는 다른 추리물을 소비하고, 〈스타워즈〉의 장엄한 우주 서사시는 〈듄〉에서 새롭게 변주된다. 전 지구의 문화소비 시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자본은 바로 이러한 보편성을 바탕으로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으리만치 촘촘한 포획망, 즉 프레드릭 제임슨이 정확히 표현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과 상상력이 쉽게 파악해낼 수 없는 문화생산의 권력과 통제망”인 지정학을 형성한다. * 지정학은 특정하게 축적된 ‘익숙함’의 소비 감각을 상업문화 재현체계 전반에 편재하도록 만드는 구조적 힘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예술-상업문화 간 첨예한 마찰은 지정학의 매끄럽고 평평한 톱니바퀴들을 마모시키고, 불규칙하지만 미학적인 불협화음을 연출한다. 보편성의 공고한 지구적 벨트가 곳곳에서 작동을 멈추고, 차이를 드러내며 지정학에 반대하는 힘들, 즉 토착적인 것(The Vernacular)이 부상해 새로운 힘-관계를 형성한다. 수없이 반복되는 서부 활극 속에서 사무라이 활극이 나타나고, 갱스터물의 범람 가운데 스타일을 추구하는 필름누아르가 발아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단지 지역 특산물이나 여행지의 이국적인 음식을 즐기고자하는 취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독특한 정치적, 사회적 힘 관계들을 반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헐리우드의 스튜디오-스타 시스템을 해체하고자 했던 프랑스 누벨바그는 68혁명의 탈영토화의 물결 위에서 다양한 실험적 기법들(핸드헬드, 소외효과, 소비에트 몽타주, 즉흥연기 스토리보드 없는 촬영)을 개발했으며, 영화에 실존주의 철학을 결합시켰다. 뉴 저먼 시네마는 과거사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요청되는 가운데 누벨바그와 브레히트의 서사극를 접목한 문명 비판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지정학에 반대하는 힘들은 중심부 국가 뿐 아니라 지구 곳곳에서 토착성을 만들어내며 미학과 래디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경향을 띤다. 나아가, 장르 문법을 역으로 전유해 지역 공동체의 정치적·계급적 모순들을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나아가기도 한다(이 분야에서 현재 가장 권위 있는 사람으로는 봉준호 감독이 꼽힐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여기고, 또 가장 궁금한 것은 ‘게이밍에서 지정학에 반대하는 미학이 가능한가?’이다. 이는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 ‘게임이 정치적일 수 있는가?’ 보다 더 광범위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형식으로서의 예술이라는 협의의 질문으로 소구시킨다면, 그렇다, 게이밍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예술이 될 수 있다. 이 질문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데, 새롭게 등장한 언리얼 엔진5, 유니티 디지털 휴먼, GPT-3 기반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Dall-E 2 등의 기술은 형식으로서의 재현 경계(시네마, 애니메이션, 게임, 포토리얼리즘)를 무력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발명은 더 많은, 균질화된 재현의 생산에 봉사하고자 개발되고 있는 것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장르가 문화적 층위에서의 지정학을 위해 고안되었다면, 상기의 신기술은 컴퓨터적 층위에서의 기술적 지정학을 위한 평탄화 작업의 일환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게임이 정치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페이퍼, 플리즈〉, 〈스펙 옵스: 더 라인〉 같은 작품들은 게임이 특정한 방식으로 정치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정학에 반대하는 힘을 생성하는 문제는 훨씬 복잡하고 방대하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예술형식이나 정치를 촉발하는 행위성 이전에, 전 지구적으로 평평한 문화재현 체계의 인력에 무의식적으로 부딪치는 척력과 결부해 있기 때문이다. 시네마와 문학이 지역의 독특한 언어와 풍습, 사회구조와 닿아있는 토착성을 반 지정학으로 발전시킨 것과 반대로, 컴퓨터의 언어는 공용 언어였기 때문에 기존의 장르적 보편성과 쉽사리 연동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인도인도, 유럽인도 베이직과 C++언어를 공용 언어로 사용한다. 초창기 전자 게임인 〈스페이스 워!〉가 일본에서 〈스페이스 인베이더〉, 〈갤러가〉 등 거의 동일한 형태로 출현했음을 상기하자. 초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게이밍의 작은 역사는 가장 보편적이고 평평한 것들만을 골라서 한정된 비트의 시공간에 구현해내는 과정이었다. 요컨대 토착성은 게임과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이며, 이안 보고스트의 지적처럼 지금까지 게임에서 중요한 요소는 컴퓨터 언어(즉 보편 기술언어)로 현상된 ‘절차적 수사학(procedural rhetoric)’ 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게임 속 플레이어의 조형행위를 유도하는 절차적 수사학의 개념만으로는 게이밍의 지정학적 미학을 찾아내는 데 불충분하다. 미국식 RPG(자유도)와 일본식 RPG(캐릭터와 선형성)의 차이를 규명하는 정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리는 게임이 어떤 방식으로 지정학에 대항하는 힘을 주조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3. 공통적인 것들의 은하계, 게이밍의 지정학적 미학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사무라이 영화들이 세계 시네마에 엄청난 내파를 불러일으킨 이후, 지역 장본인인 일본과 서구의 창작자들은 무수히 많은 사무라이들을 재생산해 왔다. 〈황야의 7인〉 같은 서부영화가 사무라이 결투를 참조해 새로운 서부극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와패니즘과 오리엔탈리즘은 제외하도록 하자). 게임에서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일본에서는 〈천주〉, 〈귀무자〉, 〈인왕〉 시리즈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서구에서는 〈쉐도우 택틱스〉, 〈세키로〉 같은 게임들이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사무라이와 에도시대라는 토착성을 재구성해냈다. 〈쉐도우 택틱스〉가 치밀한 퍼즐풀이 설계 기믹 속에 사무라이와 닌자, 게이샤의 스테레오타입을 녹여낸다면, 〈세키로〉는 극한의 조작술을 요구하는 게임 매커닉에 사무라이 결투의 긴장감을 조화시켰다. 가장 최신의 결과물 중 하나인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몽골군의 쓰시마 침략에 맞서 싸우는 사무라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게임은 매우 고급스러운 방식으로 토착성을 소환하는데, 다양한 게임의 조형적 요소들과 기존 재팬 사무라이 시네마가 추구한 미학적 장치들을 조합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캐릭터의 등 뒤를 조작 시점으로 채택하는 게임들이 필수적으로 도입한 미니맵(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한) 대신, 버튼을 누르면 바람이 불어 목적지를 알려준다. 플레이어는 주인공을 조작해 피리를 연주할 수 있는데, 이 순간 게임 속 날씨가 바뀐다. 또한 특정한 장소에 가면 플레이어는 주어진 문구들을 조합해 하이쿠를 창작할 수 있는데, 시점을 옮겨가며 특정 풍경 사물에 위치해 있는 시구들을 선택하여 자신만의 시감을 정해 시를 쓰는 방식이다. 이러한 독특한 매커닉들은 구로사와 아키라를 위시한 많은 사무라이 시네마가 추구하던 토착성의 기법들을 게임적인 방식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사무라이들이 결투를 시작하면 바람이 불고, 갈대가 흔들린다.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 창문을 열면, 눈이 내리고 있다. 일본 사무라이 영화의 토착적 힘은 자연환경의 변화와 군중의 움직임을 화면 안에서 기하학적으로 배치하는 데서 나온다. 이는 헐리우드가 매끄러운 카메라워크로 평평하게 화면을 흘려보내는 상업영화의 보편성에 저항하는 강력한 단자로 작용했고, 유수의 상업영화 감독들(스필버그, 피터 잭슨, 조지 루카스) 및 작가주의(스탠리 큐브릭, 타르코프스키)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 구로사와 아키라를 위시한 일본 사무라이 시네마의 강력한 설득력은 화끈한 칼싸움, 이국적인 복장이나 전통문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치밀한 계산 위에 위상학적으로 배치된 군중들, 사건에 따라 전략적으로 배치된 환경과 날씨 및 이를 통해 당대 사회의 모순과 긴장을 고도로 은유하는 전개가 핵심이다. 우리가 익히 접한 것과 달리 사무라이들의 칼싸움은 매우 둔탁하거나 정적이다(좌, 〈하리키리〉). 또한 대다수의 사무라이들은 무쌍이나 멋과는 거리가 멀며(우, 〈7인의 사무라이〉),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채 굴욕적인 삶을 살아간다. 위로부터의 혁명, 군국주의,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여전히 유예된 일본의 봉건적인 사회 모순들이 복잡한 심경으로 표현된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이러한 토착성의 미학 요소들을 디지털 게임의 보편화된 기술적 작동 인자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보편적인 것들의 공통화’를 꾀하며, 시네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정학에 저항한다. 이를 기점으로 사무라이와 일본도는 더 이상 일본의 전통 문화도, 일본적인 것도 아닌, 보편적이면서 낯선 공통의 것으로 전화한다. 구로사와 스타일로 배치된 치밀한 공간과 화면,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비쳐지는 광원 효과는 단순히 게임의 그래픽을 치장하는 것을 넘어 플레이어들은 쓰시마의 어느 장소, 어떤 환경에 있건 아름다운 경관의 포토제닉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왜색’에 반감이 깊은 한국의 플레이어들마저도 〈고스트 오브 쓰시마〉의 미려한 토착 구상 앞에서 국민-국가의 감각을 관대히 걷어내게 된다. 이는 한국의 대중들이 탈식민적 저항을 멈추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사무라이물’이 지닌 토착성의 반-지정학이 세계 공용의 언어가 되어, ‘공통적인 것(The Common)’ 들로 이뤄진 하나의 문법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의 문화계는 이러한 공통계를 낯설게 여기고 협소한 국민-국가 문화의 틀에 사로잡혀 사무라이와 고양이, 교복 여고생과 일본도의 혼성모방만을 도돌이표처럼 재생산하고 있는 형국이다. 시네마와 문학이 보편타당하고 지구적인 지정학에 토착성으로 부딪친다면, 게이밍은 이미 공고해진 문화산업의 보편성 속에서 ‘공통적인 것’들을 찾아내 평평한 세계를 다시 구형으로 입체화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사실 〈고스트 오브 쓰시마〉 같은 게임은 극히 일부의 가능성 또는 이행적인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 매커닉과 인터페이스-상호작용 환경구성은 사무라이, 닌자, 에도시대 같은 지역적 재현 요소들보다 더욱 보편성이 큰 만큼 공통적인 것이 되기도 쉽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계급적 알레고리를 게임 내 공간·사물과 상호작용하는 매커닉에 결합시키는 시도는 보편적인 것들의 공통화라는 게이밍의 미적 목표에 더욱 용이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코소보 전쟁을 알레고리로 하여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형성하는 〈디스 워 오브 마인〉, 대만의 전체주의와 정치탄압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2차원적 평면구상 안에서 회상하는 〈반교: 디텐션〉, 그리고 이를 다시 다른 지역(제주 4.3사건)의 정치적 사건과 결합시키는 〈동백이야기〉는 어떨까? 이들 게임은 횡스크롤 방식으로 탐색하는 시공간에 지구적인 참극들이 상업적 보편성이 아닌 공통계 안에서 연대될 수 있고, 촘촘하고 광범위한 문화산업의 그물망에 구멍을 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게이밍의 문화적-기술적 공통계를 창작자들과 플레이어들이 함께 경작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민족-국가나 지역의 지엽성을 뛰어넘어 대항적인 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경로들을 발견한다. 어쩌면 게이밍의에서 이미 지역적 경계들은 이미 접경화 되고 있지 않을까? 물론 앞으로 더 넘어서기 힘든 장벽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기는 하다. 언리얼과 유니티로 대동단결된 재현 생산 체계에서 토착적인 것들의 맹아들은 점차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가 기존의 문학과 시네마에서 찾을 수 있던 여행의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반비례해 ‘공통화’의 미덕이 어떻게 대중미학으로 나아며, 또 지정학을 전복하는 힘으로 발로되는가를 관찰하는 것 또한 흥미로운 전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나는 짤렸다: 미국 게임계의 해고 붐 한복판의 현장 스케치
2023년 11월 나는 짤렸다. 상사가 예정에도 없는 짧은 미팅을 제안했고 그 때 부터 뭔가 좀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맡고 있던 큰 클라이언트가 계약을 해지했다는 뉴스를 들었기 때문이다. 불안함은 현실이 됐다. 상사가 나에게 절대 퍼포먼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해줬지만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 Back 18 GG Vol. 24. 6. 10. Tags: 북미, 미국, 해고, AAA게임, 게임산업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ounghoon Hong Lives in California and works in the game industry. Aims to offer insight to as many people as possible through podcast appearances and contributions to various outlets. Hopes to spend a lifetime writing engaging pieces across every field, from fashion to games.
- [고스트] 시리즈: 찬바라의 뒤섞인 계보 위에서 패링하기
찬바라를 적극 수용한 게임도 다채로운 그래픽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1980년대부터 찾아볼 수 있다. 세가의 아케이드 게임 [사무라이](侍, 1979), 데이터 이스트의 제목부터 [찬바라](ちゃんばら)인 횡스크롤 액션 게임부터 [사무라이 스피리츠](サムライスピリッツ, 1993), [부시도 블레이드](ブシドーブレード, 1997) 등의 대전 격투 게임, 닌자 잠입 액션을 표방한 [천주](天誅, 1998), 최근의 [세키로: 쉐도우 다이 트와이스](セキロ: シャドウズ ダイ トゥワイス, 2019)까지, 사무라이와 닌자를 주인공 삼은 대부분의 액션 게임을 찬바라 게임의 범주에 집어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미소녀 좀비 액션을 표방한 [오네찬바라](お姉チャンバラ, 2004) 같은 게임도 있으니 말이다. < Back The Ghost Games: A Parry Through Chanbara's Tangled Family Tree 30 GG Vol. 26. 6. 10. Chanbara (ちゃんばら) is a compound of chanchan (ちゃんちゃん), the onomatopoeia for the sound of clashing blades, and barabara (ばらばら), the onomatopoeia for the sound of blood scattering. Originally a term of derision for the slapdash Edo-period costume dramas churned out in bulk, it is now used as a genre label covering films, novels, games, and plays in which samurai, ninja, and the like carry on their action with bladed weapons. There is even a sport called chanbara that uses foam swords and padded weapons, so the term itself can be said to circulate widely, indifferent to genre or medium. Chanbara first came into popular use in the dawn of the Japanese film industry, from the 1920s up to the defeat of 1945. Chanbara theater did exist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but it was the costume dramas mass-produced from the silent era onward—taking swordplay as their central material—that fixed the word in popular usage. In the period when imperial Japan was beginning its wars in earnest, the chanbara costume drama was also pressed into service as nationalist propaganda emphasizing bushido . By one count, six thousand costume dramas were produced in Japan from 1908 up to the defeat, a figure equal to half the films made in the country.[1] Not all of these, of course, would have been chanbara films. Poster for the arcade game Chanbara (top) and the cover of Onechanbara*, released on PS2 (bottom).* For this reason chanbara can be seen as a subgenre of popular culture boasting a history of more than a hundred years. Games that actively took up chanbara can be found from the 1980s, the moment when richly varied graphics began to appear in earnest. From Sega's arcade game Samurai (侍, 1979) and Data East's side-scrolling action game titled, right on the nose, Chanbara (ちゃんばら); through fighting games like Samurai Shodown (サムライスピリッツ, 1993) and Bushido Blade (ブシドーブレード, 1997); to the ninja-infiltration action of Tenchu (天誅, 1998) and the recent Sekiro: Shadows Die Twice (セキロ, 2019)—it would do no harm to file most action games with samurai and ninja as protagonists under the heading of chanbara games. After all, there is even a game like Onechanbara (お姉チャンバラ, 2004), billed as bishōjo-zombie action. To set the starting point of this genealogical sketch outside of games is only natural, since chanbara seeped into popular culture through the films (and a few novels) of the early twentieth century. In the lineage of exploitation—where a word first used as an insult settled into a genre as the works piled up—chanbara holds its place with confidence. Ghost of Tsushima (2020), the final exclusive for the PlayStation 4, and its successor Ghost of Yōtei (2025) can be called the most recent works of the chanbara genre as it has settled into popular culture. Nate Fox, the creative director of both games, has stated that he was influenced by the chanbara manga he read in childhood, such as Lone Wolf and Cub (子連れ狼, 1970–1976) and Usagi Yojimbo (兎用心棒, 1984–). I leave them unmentioned because it is not an area I know well, but anime like Samurai Champloo (サムライチャンプルー, 2004–2005) and manga like Bleach (ブリーチ, 2001–2016) and the recent mega-hit Demon Slayer: Kimetsu no Yaiba (鬼滅の刃, 2016–2020) can be said to profess the chanbara genre or to fall within its sphere of influence. When the American studio Sucker Punch announced it would make a chanbara game, that these would become its primary references was a matter of course. To bind into a single genealogy the chanbara scattered across the whole field of popular culture would be impossible. What can be drawn, though, is an unfinished genealogy that moves between film and game—the traits of chanbara one comes to feel while playing Ghost of Tsushima and Ghost of Yōtei , or the path running between the spaghetti Westerns and other Westerns born under chanbara's influence and the Japanese-style Westerns that branched off once that influence returned home to Japan. From Western to Chanbara, and Back to Western In a Japan where, after the defeat, the Occupation forces had banned the depiction of swordsmanship and other martial arts on film, the revival of the chanbara film came through Akira Kurosawa. Not long after the Occupation's censorship was lifted in 1952, Seven Samurai (七人の侍, 1954) was released. Because this was the Kurosawa who a few years earlier had taken the Grand Prix at the 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 with Rashomon (羅生門, 1950), another masterpiece from his hand at once captured the critics and the public alike. Kurosawa makes no secret that his chanbara films—the series of films starring Toshiro Mifune as a samurai—were influenced by the Hollywood Western.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when the chanbara film was gripping the Japanese public, the genre that flourished alongside it was unquestionably the Western. From the silent era through the postwar Occupation, the Western was the biggest film commodity not only in Japan but worldwide. Kurosawa, too, took the Westerns of this period as his chief motif. Seven Samurai (top) and How Green Was My Valley (bottom). The setup, for instance, of a near-rōnin samurai helping villagers face off against bandits immediately calls to mind a film like John Ford's My Darling Clementine (1946). Though not a Western, John Ford's How Green Was My Valley (1941) is also drawn upon for scenes in Seven Samurai . The scenes in Yojimbo (用心棒, 1961) and Sanjuro (椿三十郎, 1962), where the wandering rōnin departs right after the final duel, naturally summon up not only Ford's Stagecoach (1939) but George Stevens's Shane (1953) and Fred Zinnemann's High Noon (1952). Even in a war film like Throne of Blood (蜘蛛巣城, 1957) or an adventure like The Hidden Fortress (隠し砦の三悪人, 1958), Kurosawa put a katana in Mifune's hand and had him swing it. As John Wayne's figure functioned in Ford's films, Kurosawa made Mifune's feral aspect the emblem of the anti-hero in his own. As if in answer to the signal flare of chanbara's revival fired off by Kurosawa, several chanbara series appeared in succession. Zatoichi (座頭市, 1962), starring Shintaro Katsu, takes a blind swordsman as its protagonist and runs on through twenty-six sequels and a remake directed by and starring Takeshi Kitano. Lone Wolf and Cub: Sword of Vengeance (子連れ狼 子を貸し腕貸しつかまつる, 1972), produced by the very Shintaro Katsu who played Zatoichi, was based on the manga of the same name and, recording a major hit, was made into six films and a TV drama. Alongside their popularity in Japan, these works were categorized—together with Hong Kong kung-fu/wuxia films and Korean kwŏn'gyŏk (fist-fighting) films—as "Asian martial arts films," and circulated worldwide in the form of pirated prints, unauthorized dubs, and recut versions. Of course, the films of the Venice Grand Prix laureate Akira Kurosawa were introduced around the world through official distribution networks and exerted great influence on Europe and Hollywood. Steven Spielberg and George Lucas put out Star Wars (1977), effectively a remake of The Hidden Fortress . In being a pseudo-Western set in space, this creates a strange genealogy in which the films of Kurosawa—who took John Ford as his cinematic master—pass through chanbara and circle back once more to the Western. A more direct uptake took place in Italy. A Fistful of Dollars (1964), produced by Sergio Leone with Clint Eastwood, lifts Yojimbo wholesale—so much so that there is an anecdote about Eastwood thinking of Yojimbo the moment he read the script. That said, Leone's spaghetti Western drags over only the shell of the chanbara film Kurosawa made. He takes only the components—the plot, the anti-hero character, the showdown—and makes a film of an entirely different character. Different, one might say, from Kurosawa's films, which transposed the way the John Ford Western depicts America into something Japanese. The similar compositions of Yojimbo (top) and A Fistful of Dollars (bottom). In any case, through Leone's films the Western entered a different phase. The outlaw anti-hero became the mainstream of the spaghetti Western, and the level of violence rose above that of the 1930s–50s Western—as in the machine-gun spraying of Sergio Corbucci's Django (1966). Hollywood, too, put out The Magnificent Seven (1960), a direct remake of Seven Samurai ; this drew notice for its glittering star casting, but the film's own impact was not large—though it did become a film that, together with spaghetti Westerns and revisionist Westerns like The Wild Bunch (1969), spawned countless imitators. The spaghetti Western, influenced by Kurosawa's chanbara films, returns to Japan once more—just as in 1970s Korea the Manchurian Western emerged under the influence of Leone's (and Kurosawa's) films. Juzo Itami's Tampopo (タンポポ, 1985), which hauls in a great heap of Western clichés, used "ramen Western" as its promotional tagline, displaying Japanese cinema's answer to the spaghetti Western. An anime conscious of the Western right down to its title, like Cowboy Bebop (カウボーイビバップ, 1998), recorded a major hit, and Takashi Miike, a master of Japanese genre film, even made it into the competition section of the 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 with Sukiyaki Western Django (スキヤキ・ウエスタン ジャンゴ, 2007). The manga Golden Kamuy (ゴールデンカムイ, 2014–2022), which reached its conclusion a few years ago, carried on the tradition of the Japanese Western too, setting itself in Hokkaido and featuring Ainu people as major characters. Chanbara as Cultural Melting Pot, or Chimera So… the work of drawing a genealogy that moves between Western and chanbara brings on a certain awkwardness. As one can see from the countless films mentioned above, drawing the genealogy of these films is possible, but it is no different from a maze in which one is bound at some point to lose the way. Genres mix across borders—as in Zatoichi Meets the One-Armed Swordsman (新座頭市 破れ!唐人剣, 1971), the twenty-second film in the series, which attempted a kind of collaboration with the Hong Kong wuxia masterpiece The One-Armed Swordsman (獨臂刀, 1967)[2]—and, as seen above, diverse mutations are born within the repetition of a genre's import and re-import. Indeed, unlike Japan's pre-defeat chanbara films, which put bushido forward as their theme, the chanbara films after Kurosawa (as the revisionist Westerns did) exposed the cruel violence and toxic masculinity inherent in bushido, and at times revealed an aversion to the lingering traces of feudalism. Masaki Kobayashi's Harakiri (切腹, 1962), which took ritual disembowelment as its material, and Bushido, Samurai Saga (武士道殘酷物語, 1963), which criticized the totalitarianism grounded in bushido, appeared around the same time as Kurosawa's chanbara films. Chanbara films critical of bushido continue to appear to this day: The Twilight Samurai (たそがれ清兵衛, 2002), portraying a fading samurai at the end of the Edo shogunate; Nagisa Oshima's Taboo (御法度, 1999), treating the male homosociality grounded in bushido; and, similarly, Takeshi Kitano's Kubi (首, 2023), treating the (sexual) violence within a samurai band of the Sengoku era. The Kill Bill poster, mixing Bruce Lee's yellow tracksuit with the chanbara katana (top), and the 47 Ronin poster, a representative case of conscripting the samurai as a symbol of Orientalism (bottom). On the other hand, in a situation where the figure of the samurai is no longer what it was, bushido migrates to objects that are not chanbara. The tokusatsu hero series Kamen Rider (仮面ライダー), begun in 1971, presents—for an older audience than other tokusatsu shows—a dark hero in a style resembling the chanbara film, or the spaghetti Western's outlaw. Some of the series' spin-offs even set out, with an adults-only rating in mind, chanbara-style gore and bloodshed. If inside Japan chanbara mutates into the tokusatsu hero, outside Japan chanbara becomes a representative symbol of Orientalism and Wapanism (the Western fetishization of things Japanese). In the spaghetti Western Red Sun (Sole rosso, 1972), featuring Toshiro Mifune, a samurai appears, out of nowhere, in the Western desert. In The Last Samurai (2003), starring Tom Cruise, the samurai is placed in exactly the position of the Western's "Indian." Tarantino's Kill Bill: Volume 1 (2003), which haphazardly blends chanbara with kung-fu film, blaxploitation, and more, pays homage to everything from Kurosawa's films to Zatoichi , Lady Snowblood (修羅雪姬, 1973), and Tattooed Life (刺靑一代, 1965).[3] Beyond such successful films, there are of course cases like 47 Ronin (2013), starring Keanu Reeves, or the villain "Silver Samurai" in The Wolverine (2013)—but such cases are, so to speak, without end. So: chanbara has now become a genre, or a representation, unrelated to bushido. What bushido can one feel in the duel between Wolverine and the Silver Samurai? Even if it were the bushido that Inazo Nitobe[4] Orientalistically distorted in Bushido: The Soul of Japan (1899). The bushido-flavored imagery shown by Arasaka in Cyberpunk 2077 (2020), for instance, is nothing more than imagery borrowed. The grotesque form of Adam Smasher, Arasaka's "kagemusha," is already set far apart from anything like bushido. Or take how, in John Wick: Chapter 4 (2023), Caine, played by Donnie Yen, reveals the strange contradiction of being a kung-fu master and at the same time the blind swordsman "Zatoichi." What is emphasized in samurai-led games like Samurai Shodown or Bushido Blade is not bushido but only "chanbara" swordplay and its pleasures. The imagery and characters left behind by the chanbara film keep being broken down into morphemes—mobilized for the genre or concept of the action—and reassembled, over and over. Adam Smasher, bodyguard of the Japanese corporation Arasaka in Cyberpunk 2077*. The armor encasing his body references the design of samurai armor. The katana in the capture is also a weapon you can make major use of in the game. Personally, I cleared my first playthrough using only the katana….* At that very point, the two chanbara games made by the American studio Sucker Punch come close to being cases that lay out, just as they are, the complex topography of the genealogy in which "chanbara" sits. Ghost of Tsushima , set in the Kamakura period, takes as its central material the Yuan dynasty's 1274 attempt to subjugate Tsushima. When Tsushima is suddenly overrun and occupied by the Mongol army, the game captures the process by which Jin Sakai—a samurai who alone survives the battle—abandons bushido and becomes the first shinobi (ninja). Because, in the face of the Mongol army's overwhelming force, responding while keeping to bushido is impossible. In this story, the clichés accumulated in moving between chanbara and Western do not work all that much. The protagonist is not a rōnin or outlaw like Toshiro Mifune or Clint Eastwood, and, depicted as the nephew of the lord who governs Tsushima, he is in his own way a man of power. The only chanbara/Western element within this story, one might say, is the point at which he casts off bushido and becomes a kind of anti-hero, "the Ghost." Its successor Ghost of Yōtei , set in Hokkaido, far more actively draws in a chanbara/Western mood. Music that sounds like Ennio Morricone-style Western scores played on instruments like the shamisen; the vast Hokkaido landscape that has already served as the backdrop for many a Japanese Western; a rōnin protagonist returning home with reasons of her own—from story to setting, in many directions, it evokes the cinematic genealogies mentioned above more than its predecessor did. On top of that, many striking elements are scattered throughout: the "standoff" combat system in both games pulls in the shot composition of the showdown that ran from Yojimbo to A Fistful of Dollars , and so on. https://www.youtube.com/watch?v=lbB3EUruQ4U Footage of Ghost of Yōtei played with Kurosawa, Miike, and Watanabe Modes all switched on. A hybrid situation unfolds: a black-and-white screen mimicking a film look, drenched in excessive blood, while jazzy music plays. But how can the two games be positioned atop the chanbara/Western genealogy described above? Intriguingly, both games reveal their own hybrid identity through the modes they themselves provide. If Ghost of Tsushima has a "Kurosawa Mode" offering a black-and-white image and sound with a texture resembling Akira Kurosawa's films, Ghost of Yōtei has modes taken, respectively, from Takashi Miike of Sukiyaki Western Django and Shinichiro Watanabe of Cowboy Bebop and Samurai Champloo . In Miike Mode the blood and mud spray all the more; in Watanabe Mode the Western-ish music is swapped for lo-fi contemporary music. To play the game with all three modes switched on would be an experience that lets you take in the accumulated genealogy of the chanbara genre all at once. Playing Ghost of Yōtei in that state is quite a chore, admittedly…. Seen from the standpoint of bushido, Jin Sakai of Ghost of Tsushima and Atsu of Ghost of Yōtei are figures converging on a midpoint from opposite directions. Jin Sakai, a samurai grounded in bushido, gradually abandons it after defeat and becomes the first shinobi. Atsu, who burned with vengeance from the start, comes (without becoming a samurai) to understand bushido a little, through her companions the "Wolf Pack" and, above all, through her reunion with Jubei, the twin younger brother she had not known was alive. But this is no more than an alibi to keep the narrative running. To dig deep and analyze these stories is closer to exhuming the stale spirituality called bushido. And what we would then find would likely be a figure like an oni, rotted here and there. Chanbara = Parrying? Bushido has been reduced to an object of discard or critique, and the samurai and ninja have been taxidermied—from a thoroughly Orientalist gaze—into mere popular-culture icons. The center of gravity binding them together seems all but gone. So what, then, do the works that can be bound together as "chanbara" have in common? Here we need to return once more to the etymology. It is worth attending to the fact that what audiences went wild for in the early-twentieth-century Japanese costume dramas disparaged as chanbara was, rather than bushido, the swordplay itself. The so-called tachimawari (立ち回り)—the staged melee—comes close to the heart of chanbara. After all, even the etymology of chanbara is the compounding of onomatopoeia depicting blades clashing and blood scattering. The final duel of Sanjuro (top)—chanbara itself—and a standoff scene from Ghost of Yōtei (bottom). Translate the onomatopoeia "chanchan barabara" into a game mechanic and you get parrying. Indeed, the game known as the first to feature parrying is the samurai fighting game Samurai Shodown II (真SAMURAI SPIRITS 覇王丸地獄変, 1994). Parrying as a game mechanic then began to be used mainly in fighting games like Killer Instinct 2 (1996) and the Tekken series (鉄拳, 1994–). The technique of parrying itself, of course, existed from the Middle Ages in Western swordsmanship and in sports like fencing; but chanbara's influence is immense in its becoming established as a game mechanic. Parrying in Samurai Shodown II (top) and a parrying GIF from Sekiro (bottom). Today parrying can be found not only in fighting games but in nearly every action game—whether the game uses bladed weapons and shields or centers on fists and kicks. Even in a JRPG-style turn-based game like Clair Obscur: Expedition 33 (2025), where combat and magic mingle, parrying has come to be used as the single most important system. What popularized the parry system across action games today was, in all likelihood, the games of FromSoftware. In Dark Souls (2011), the dull sound effect that appeared on a successful parry was essential to the "riposte," the critical follow-up that lets you deal heavy damage. But befitting a game famous for its punishing difficulty, from Dark Souls through Elden Ring (2022) parrying was less a tool every player needed than an optional play-style for veterans. The intriguing case is Sekiro . While it keeps its distance from FromSoftware's orthodox Souls line, in this game—which foregrounds a single weapon and a Posture system—the single most important action is parrying. Memorizing the enemy's attack patterns wholesale and knocking them back (in-game the action is rendered not as "parry" but as "deflect") makes up most of the action, to the point where players call it a rhythm game. The method of filling the enemy's Posture gauge through deflects, breaking their stance, and landing a single blow left as strong an impression as the Dark Souls series, and created a fad of another kind. What is more, the "shinobi-kill" (忍殺) Deathblow—dispatching the opponent with a single strike after trading blows blade to blade—immediately evokes the iconic final scene of Sanjuro . Parrying in Ghost of Yōtei. Ghost of Tsushima , too, adopts a similar system. Of course, since its release date is only about a year apart from Sekiro 's, there would not have been enough time to borrow Sekiro's system directly. But Ghost of Tsushima likewise has nearly the same construction of action mechanic—breaking the opponent's stance through a parry and landing a single blow. The differences are only that it has more moments of one-against-many combat than Sekiro , and that the action is built around learning various swordsmanship stances and responding according to the opponent's weapon (katana, spear, shield, and so on). This is not greatly different in Ghost of Yōtei ; the only difference is that Jin Sakai's various swordsmanship stances are replaced, for Atsu, by various weapons—the ōdachi, the kusarigama, the spear, the dual blades, and more. In the "standoff," one of the game's systems, the figures of protagonist and enemy glaring at each other belong to chanbara but at the same time to the Western. From the vantage of the 2020s it is impossible to tell them apart. That the stages of both games handle regions outside Japan's "mainland"—Tsushima and Hokkaido—is surely a clear Western influence. Ghost of Tsushima , which chooses the thirteenth century rather than the Sengoku era, and Ghost of Yōtei , which treats the Sengoku era and mentions great battles like Sekigahara yet stands one step removed from their center, draw in the Western by way of avoiding the chanbara film's two principal settings (the Sengoku era and the Edo shogunate). What makes the two games chanbara, though, is that their action follows the parry-based manner of the chanbara film. That parrying as a game mechanic emerged under chanbara's influence, the two games faithfully inherit. So, in the end, the core of the two games is this: that they are swordfighting games. From top: the final duel of Yojimbo, the duel of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1966), and a standoff scene from Ghost of Tsushima. The similarity of composition runs through them. Merely by richly providing the pleasure of action one can expect from a chanbara action game, the two games are a success. The Western-style atmosphere that settled into Hokkaido by way of the spaghetti Western from chanbara, the narrative of a wandering, outlaw anti-hero—these are no more than a set of shells needed to render chanbara action vividly. Picked apart in detail, these shells are not even sufficiently "real." The Yuan subjugation of Tsushima, the chief motif of Ghost of Tsushima , involved not only Mongol forces but Goryeo (Korean) troops, who do not appear in the game. The design of Jin Sakai's armor and katana follows the Sengoku era rather than the thirteenth-century Kamakura era—because that is the image of the samurai more familiar to those who will play the game. That Ghost of Yōtei , unlike other games set in the Sengoku era, takes Hokkaido as its stage is to present a plausible backdrop for a lone individual, Atsu, to defeat the Saitō clan and the Yōtei Six; beyond that, a reason is hard to find. The construction of the finished game comes closer to the result of selecting the options through which a fitting chanbara-action tachimawari can be played and felt via the PlayStation DualShock/DualSense. In that context, atop the genealogy that the genre named "chanbara" has formed across all sorts of media, Ghost of Tsushima and Ghost of Yōtei are, paradoxically, composed of elements that lay out one by one the path chanbara has traveled. The traces of bushido as a national project; the motifs and clichés developed in exchange with the Western; parrying, the chanbara of game mechanics. Chanbara is a genre of the Japanese popular-culture tradition and, at the same time, has become a cultural icon whose traces can be found in any country on earth. At any rate, the two works—American games both—confirm this anew. [1] Kim Ryeo-sil, Ilbon yeonghwa-wa naesyeoneollijeum [Japanese Cinema and Nationalism] (Seoul: Chaeksesang, 2005), 28. [2] As an aside, the Japanese release of this film is said to have ended with Zatoichi's victory, while the Hong Kong release ended with the One-Armed Swordsman's. [3] Strictly speaking, the protagonist is a yakuza rather than a samurai, but the swordfight of the latter half, captured in long takes, can be said to follow the chanbara template. [4] A Japanese thinker, educator, and statesman, known as an internationalist who worked toward Japan's modernization in the Meiji era; he was also the figure depicted on the old 5,000-yen note.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ngsoo Park Majored in art studies as an undergraduate and is currently studying media cultural studi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Yonsei University. Writes primarily about film, while keeping a curious eye on visual culture broadly—art, games, and broadcasting among them. Also a film critic, host of the podcast Café Critique, and an organizer of community film screenings.
- <2023 대한민국 게임백서> 깊이 읽기
이 글은 이번 게임백서에서 주목할 만한 데이터들과 놓치면 안 될 흐름들을 소개한다. 백서가 더 널리 활용되기 위해 고려할 지점들에 대해서는 지난 10호에서 살핀 바 있고, 그 내용들이 여전히 유효한 상황이므로 이 글에서 반복하지는 않도록 한다. 물론 그 중에는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음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 Back <2023 대한민국 게임백서> 깊이 읽기 17 GG Vol. 24. 4. 10. 2024년 3월 <2023 대한민국 게임백서(이하 ‘백서’ 혹은 ‘게임백서’)>가 발간됐다. 백서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매년 발행하는 정기간행물로, 1년 간의 국내 게임산업 현황(산업 규모, 업종별 현황, e스포츠 동향, 산업 전망, 교육기간 현황 등), 게임이용 동향(플랫폼별 이용 현황 및 특성, 게임에 대한 인식 및 태도 등), 해외 게임산업 현황(플랫폼별·국가별) 등을 다룬다. 국내외 산업규모와 이용행태를 파악하고 경제적 가치를 분석해, 정책수립 또는 연구조사를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백서 발행의 목적이다. 공공과 민간 영역을 막론하고 게임산업이나 이용에 대한 다른 광범위한 조사가 없는 데다, 다른 콘텐츠산업(출판, 만화, 음악, 영화, 애니메이션, 방송, 광고, 캐릭터, 지식정보, 콘텐츠 솔루션) 현황과의 비교 속에서 이뤄지는 조사인 만큼 그 데이터가 갖는 의미는 크다 하겠다. 주로 수치 중심의 데이터를 다루지만, 수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산업·이용 양상과 관련 이슈, 트렌드들에 대해서는 질적으로도 분석함으로써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즉, 게임백서는 게임산업과 이용에 관한 한 해 동안의 양적·질적 데이터가 망라돼 있는 결과물인 셈이다. 이 글은 이번 게임백서에서 주목할 만한 데이터들과 놓치면 안 될 흐름들을 소개한다. 백서가 더 널리 활용되기 위해 고려할 지점들에 대해서는 지난 10호에서 살핀 바 있고, 그 내용들이 여전히 유효한 상황이므로 이 글에서 반복하지는 않도록 한다. 물론 그 중에는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음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중요한 데이터와 흐름들에는 약간의 해석을 덧붙이고자 한다. 2022년 한 해 동안(2024년 초에 발간된 2023 백서이지만, 기준 데이터는 2022년의 것이다)의 게임산업과 이용을 둘러싼 양상, 이슈, 트렌드를 살피고, 그것들이 갖는 의미를 짚어본다. 한국 게임시장 규모: 22조원 돌파, 성장률 둔화, 플랫폼별 균형 있는 성장 2022년 한국 게임시장은 22조 2,149억 원 규모로, 2021년(20조 9,913억 원) 대비 5.8% 성장했다. 2020년 21.3%, 2021년 11.2% 성장했음을 감안하면, 성장률이 조금씩 둔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플랫폼별 시장에서 두드러지는 지점들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바일 게임시장의 굳건한 강세다. 그간 모바일 게임시장 규모는 빠르게, 큰 폭으로 팽창해왔다. 다만 전체 시장에서 모바일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49.7%, 2020년 57.4%, 2021년 57.9%, 2022년 58.8%로, 최근 들어 아주 크게 늘고 있지는 않다. 모바일 게임시장 비중의 확장세 둔화가 앞으로도 계속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다른 플랫폼들의 비중 역시 아주 크게 달라지고 있지는 않아, 당분간 아주 큰 폭으로 비중이 늘지는 않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비중이 크게 늘지는 않았음에도 매출액 13조 720억 원으로 전년(12조 1,483억 원) 대비 8.9%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는 게임 제작 및 배급업 중 아케이드게임(8.9%) 다음으로 높은 수치다. 둘째, 아케이드와 PC 게임시장의 성장세가 아주 크지는 않은 가운데, 콘솔 게임시장이 1년 만에 마이너스에서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됐다. 아케이드 게임시장은 전년 대비 8.9% 성장해 2,976억 원 규모를, PC 게임시장은 3.0% 성장해 5조 8,053억 원 규모를 나타냈다. 하지만 2019년 전년 대비 31.4%, 2020년 57.3% 성장하다가 2021년 –3.7%의 성장률을 보였던 콘솔 게임시장은 1조 1,196억 원 규모로, 전년(1조 520억 원) 대비 성장률 6.4%를 기록했다. 아케이드 게임시장의 경우 코로나19로 인해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던 해당 게임시장이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와 오프라인 활동 수요 폭증으로 대폭 증가했다가 회복세에 접어들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코로나19 발생 전인 2019년 4.3% 감소했던 PC 게임시장은,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선호경향의 혜택으로 2020년부터 2022년까지 플러스 성장을 보였다. 하지만 전체 게임시장 내 점유율은 26%대로 성장에 있어 한계가 드러났다. 콘솔 게임시장의 경유 성장률은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전환됐다 해도, PC 게임시장과 유사하게 점유율이 2021년과 비슷한 5% 초반이다. 2022년 콘솔 게임기기나 타이틀 관련해 시장의 변화를 주도할 흐름이 발견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큰 폭의 하락을 보여 왔던 PC방 및 아케이드 게임장 매출액이 2021년에 이어 소폭 증가했다. PC방 매출은 2019년 2조 409억 원에서 2020년 1조 7,970억 원으로 큰 역성장(-11.9%)을 기록했고, 아케이드 게임장은 2019년 703억 원에서 2020년 365억 원으로 시장이 거의 반토막(-48.1%) 났었다. 이는 물론 코로나19만이 아니라 PC 게임시장의 성장 정체와 모바일게임으로의 이용 집중, 가정에서 플레이되는 콘솔게임의 인기 폭증 등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게임 유통시장 매출은 정부의 아케이드 게임산업 활성화 정책, PC 및 아케이드 게임시장의 성장, 그리고 야외 활동 본격화 등과 맞물려 반등했다. 종합적으로, 2022년 한국 게임시장은 지난 4년, 그러니까 코로나19 전후를 비교해봤을 때 아주 크게 확대됐다고는 할 수 없지만(2019년 9.0%, 2020년 21.3%, 2021년 11.2%, 2022년 5.8%), 플랫폼별로 비교적 균형 있게 성장해온 듯 보인다. 그동안 ① 크게 성장하는 플랫폼시장(모바일게임, 콘솔게임), ② 성장이 정체된 플랫폼시장(PC게임, 아케이드게임), ③ 크게 역성장하는 유통시장(아케이드게임장, PC방)의 양상으로 전개되던 흐름이, ① 여전히 성장 중이나 조금씩 안정화되는 플랫폼시장(모바일게임), ② 성장세 둔화와 뚜렷한 플랫폼시장(PC게임), ③ 하락세 혹은 보합세에서 다시 성장세로 전환된 플랫폼시장(콘솔게임, 아케이드게임) 및 유통시장(아케이드게임장, PC방)의 양상으로 전환된 것이다. * 그림 1. 한국 게임시장의 규모 및 성장률(2013~2023년). (단위: 억 원, %).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2024). <2023 대한민국 게임백서>, 28쪽. * 표 1. 한국 게임시장의 플랫폼별 매출액 및 성장률(2019~2022년). 단위: 억 원, %.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2024). <2023 대한민국 게임백서>, 30쪽. 세계 게임시장 내 한국의 위상: 세계 4위로 3위인 일본을 바짝 추격 2022년 세계 게임시장 규모는 2021년 대비 0.9% 증가한 2,082억 4,900만 달러로 집계됐다. 2021년 성장률이 5.9%였음을 감안하면, 성장률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볼 수 있다. 엔데믹 이후 세계 게임시장은 가시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다. 세계 경제위기, 전염병, 전쟁 등 외부 악재와도 맞물려 불확실성도 심화되는 상황이다. 전체 게임시장의 성장을 견인해왔던 모바일게임이 마이너스 성장(-0.5%)했고, PC게임의 성장률도 0.1%에 그쳤다. 콘솔게임이 2021년과 비슷한 수준인 2.6%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아케이드게임도 2021년(9.5%)에 비하면 크게 성장했다 보기는 어렵다(4.1%). 2016년 이후 세계 게임시장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해온 모바일게임은 2022년에도 916억 8,100만 달러 규모로, 점유율 44.0%를 기록했다. 그 뒤는 콘솔게임(591억 4,100만 달러, 28.4%), PC게임(363억 5,200만 달러, 점유율 17.5%), 아케이드게임(210억 7,600만 달러, 10.1%) 순이다. 표 2. 세계 게임시장의 플랫폼별 매출액(2020~2025년). (단위: 백만 달러, %). 출처: PwC(2023), Enterbrain(2023), JOGA(2023), iResearch(2023), Play meter(2016); NPD(2023); 한국콘텐츠진흥원(2024). <2023 대한민국 게임백서>, 742~743쪽. 2022년 세계 게임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7.8%다. 2019년 점유율이 6.2%, 2020년이 6.9%, 2021년 7.6%였음을 감안하면 비슷한 수준으로 비중이 아주 조금씩 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순위도 2020년 5위에서 2021년 4위로 한 순위 올라간 후, 2022년에도 마찬가지로 4위를 유지했다. 2020년 0.8%, 2021년 1.4% 차이였던 5위 영국과의 거리도 2.2%로 더 크게 벌렸다. 3위인 일본과의 차이는 1.8%로 영국과의 차이보다 적다. 2021년 2.7% 차이에서 0.9%나 좁힌 것을 감안하면, 향후 몇 년 간 한국이 일본을 앞지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1위인 미국(22.8%)과 2위 중국(22.4%)의 차이도 0.4%밖에 나지 않아, 둘의 순위가 바뀔지도 관건이다. * 표 3. 세계 게임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과 위상(2022년). * 출처: PWC(2023), Enterbrain(2023), JOGA(2023), iResearch(2023), Playmeter(2016), NPD(2023); 한국콘텐츠진흥원(2024b). <2023 대한민국 게임백서>, 767쪽에서 재인용. 한국게임 수출·입 규모: 수출 3.6% 증가, 수입 16.7% 감소, 아케이드게임만 수출 감소 2022년 한국게임 수출액은 89억 8,175만 달러(약 11조 6,040억 원, * 한국은행 2022년 연평균 매매기준율 적용)로 집계됐다. 전년(86억 7,287만 달러)과 비교했을 때 3.6% 증가한 수치다. 2017년 증가율 80.7%를 기록한 이후 2018년 8.2%, 2019년 3.8%로 수출성장세가 주춤하다가, 2020년만 23.1%로 반짝 높은 수치를 보이고 2021년 5.8%, 2022년 3.6%로 다시 이전 증가율 수준이 된 셈이다. 플랫폼별로는 역시 모바일게임의 수출규모가 55억 6,300만 달러(2021년 53억 3,030만 달러)로 가장 컸고, PC게임이 31억 9,467만 달러(2021년 31억 4,562만 달러)로 뒤를 이었다. 콘솔게임 수출규모는 1억 8,651만 달러(2021년 1억 5,674만 달러), 아케이드게임 수출규모는 3,757만 달러(2021년 4,021만 달러)로 나타났다. 전년대비 수출규모를 비교하면, 대부분 플랫폼에서 증가세를 보인 가운데 아케이드게임만이 전년대비 6.6% 감소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표 4. 한국 게임 수출·입 현황(2016~2022년). (단위: 천 달러, %).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2024b). <2023 대한민국 게임백서>, 31쪽의 표를 재구성. 수입은 전년대비 16.7% 감소한 2억 6,016만 달러(약 3,361억 원)를 기록했다. 2017년 이후 계속 감소해왔던 수입 증가율이 4년 만인 2021년 잠깐 반등했다가 다시 큰 폭으로 감소한 것이다. 2016년부터 7년 간 수입액 증가율이 수출액보다 높았던 건 2018년과 2021년뿐이었고, 나머지 해에는 수출액 증가율이 수입액 증가율보다 높게 나타났다. 다른 모든 플랫폼의 수입액 규모에서 감소세가 나타나는 가운데(아케이드게임 –66.3%, 콘솔게임 –48.3%, 모바일게임 –13.4%), PC게임만이 5.4% 증가했다. 2021년 완전히 반대로 모든 플랫폼 수입액이 전년대비 크게 증가하고 PC게임만이 감소했던 것을 감안하면 특기할 변화라 하겠다. * 표 5. 한국 게임 플랫폼별 수출·입 규모 비교(2021년 vs. 2022년). 단위: 천 달러, %.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2024b). <2023 대한민국 게임백서>, 32쪽의 그림을 재구성. 게임 이용현황: 전체의 62.9%가 이용, 이용률 11.5% 감소, 모바일게임 이용률이 최고 만 10~65세의 일반인(n=10,000)을 대상으로 2022년 6월 이후 게임 이용여부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2.9%가 게임을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게임 이용률은 2020년 이후 증가세를 보이다가(2019년 65.7% → 2020년 70.5% → 2021년 71.3% → 2022년 74.4%), 다시 2019년 수준으로 하락한 셈이다. 게임을 이용한 경험이 있는 사람(n=6,292)들에게 있어 이용률이 가장 높은 플랫폼은 모바일게임(84.6%)이었다. PC게임(61.0%), 콘솔게임(24.1%), 아케이드게임(11.8%)이 뒤를 이었다. 또, 게임 이용경험이 있는 응답자(n=6,292)의 99.4%가 평소에 인터넷을 이용한다고 응답했다(전년 대비 0.4%p 증가). 업무/학업 외 목적으로 인터넷에 접속할 때 사용하는 기기를 조사한 결과 스마트폰이 93.2%로 가장 높았고, 데스크톱PC가 60.1%, 노트북이 56.4%, 태블릿PC가 42.8%였다. PC방 이용현황에 대한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게임 이용자들(n=6,292)의 56.8%가 2022년 6월 이후 1년 간 PC방을 이용한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18.3%가 월 1회 이상 PC방을 이용하고 있었다. 성별로는 여성보다 남성이, 연령별로는 20대가 이용률이 가장 높았다. 게임 이용자의 1회 평균 PC방 이용시간은 169.2분, 미이용자는 126.5분이었다(42.7분 차이). PC방에서 게임을 한다고 응답한 사람(n=3,229)에게 PC방에서 게임하는 이유를 질문했을 때, 1+2순위 응답을 기준으로 ‘친구/동료와 어울리기 위해’(56.7%)와 ‘여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55.7%)를 꼽은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특히, 연령대가 낮을수록 ‘친구/동료와 어울리기 위해’를 응답한 비율이 높았다. 게임업계 노동환경: 코로나19 이후 사업체 규모별 격차 심화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며 게임업계 생산환경은 신기술 기반으로 급격하게 변화를 맞았다. 메타버스, 블록체인, P2E(play to earn), 인공지능과 관련된 신기술 개발·도입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관련기술 보유 인재에 대한 주요 게임사들의 확보 경쟁도 심화됐다. 이에 따라 주요 게임사들의 인력과 인건비 지출이 함께 증가했는데, 특히 개발직군의 임금이 전체적으로 상향 평준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022년 2분기 이후 10대 상장 게임사의 정규직 인력은 오히려 소폭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코로나19 특수의 종료, 인건비 급등에 따른 비용 부담, 신작 미출시 혹은 실적 미흡 등의 원인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외적 환경도 긍정적이지 않다. 엔데믹이 본격화되는 국면에서 글로벌 금융시장 악화, 전쟁, 중국의 게임규제 강화 흐름들도 한국 게임업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단기간 내 인력상황이 급변한다는 것은, 그만큼 게임시장의 노동환경이 불안정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상대적으로 큰 회사들까지 그렇다면, 작은 회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주 52시간 근무제의 유연화를 둘러싼 논쟁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새 정부 출범 후인 2022년 6월 고용노동부는 연장근로 관리 단위 및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 기간 확대 등을 포함하는 유연근로제 활성화 계획을 발표했다. 게임업계에 주 52시간 근무제가 단계적으로 적용되고 안착화되어 가는 분위기에서, 이러한 계획은 사측과 노조를 중심으로 한 종사자측 입장을 다시 한 번 갈라놓는 계기로 작용했다. 노동시간 유연화를 찬성하는 사측의 논거는 주 52시간제 자체가 게임업계 현실과 맞지 않다는 것, 중국 등 글로벌 게임사와의 경쟁에서 뒤처지게 될 우려가 커진다는 것, 현장에서 유연근로제의 활용률이 떨어진다는 것 등이었다. 반면 노조측은 노동시간이 유연화될 경우 그간 게임업계 노동의 고질적 문제 중 하나로 지적되었던 크런치 모드가 다시 활성화될 우려가 크며, 과로사 등 여러 문제가 되풀이될 것이라며 반발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이 결국 노동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 우려한다. 그에 따르면 일부 기업들이 시행 중인 휴양지 워케이션, 주 4일 근무제 도입 등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일과 삶의 균형을 보장하는 흐름으로 가고 있고, 그나마 상대적으로 큰 기업에서 노조에 가입해 있는 종사자들은 교섭권을 바탕으로 처우와 복지 등에 있어서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반면, 노조가 부재하고 포괄임금제를 유지하고 있는 중소게임사 종사자들의 경우 노동환경 악화의 위험성이 더 커질 수 있다. 이처럼 2022년 국내 게임업계 노동환경은 안팎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속에서, 일부 긍정적인 변화, 그리고 고용, 노동시간, 처우 등에 있어 대체로 불안정한 요소들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였다. 바로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국내 게임시장이 쇠퇴기에 접어들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당분간 노동환경은 더욱 안 좋아질 확률이 높다. 한국 게임시장 전망: 안정기에서 쇠퇴기로, 그리고 불확실성의 증대 한국의 게임들이 질적·양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고, 전세계 게임시장에서 한국 게임시장이 차지하는 비중도 커지고 있지만, 시장규모가 갈수록 축소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게임백서에 따르면 2023년 한국 게임시장 규모는 2022년 대비 10.9% 감소한 19조 7,900억 원을 형성할 전망이다. 2013년 전후로 마이너스 성장한 적 없던 한국 게임시장이, 그리고 이제 20조 규모에 안정적으로 접어든 듯 보였던 한국 게임시장이 이처럼 위축될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엔데믹으로 향유 가능한 여러 엔터테인먼트와 야외 활동이 많아진 때문이자, 금리 인상에 따른 경기부진이 현실화되고 있는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게임시장의 주축인 모바일 게임시장은 꾸준히 전체 시장에서 가장 높은 점유율을 유지는 하겠지만, 그 성장률은 한국 경제 전반의 움직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PC 게임시장은 멀티 플랫폼화와 충성도 높은 플레이어들의 존재에 힘입어 현상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콘솔 게임시장 역시 멀티 플랫폼화, 니치마켓을 추구하는 게임 개발사들의 진입 등 성장에 긍정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지만, 차세대 콘솔기기가 언제 출시돼 얼마나 인기를 끌지에 따라 큰 영향을 받게 될 듯하다.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크지 않은 아케이드 게임과 게임장은 특별한 전기 없이 아케이드 게임을 즐기는 세대들의 엔터테인먼트 트렌드에 영향을 받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가정 보유 PC의 고사양화가 상당히 진행되고 PC방을 찾을 유인이 낮은 상황에서 PC방의 인기는 갈수록 성장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인건비, 개발비, 간접비 등 제반비용의 상승은 게임업계의 영업이익에 긍정적이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무엇보다, 불경기가 심화되고 사람들의 전반적인 가처분소득도 감소 중이다. 글로벌 게임시장도 마찬가지지만, 한국 게임시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예측이 어려운 상황으로 진입하고 있다. 시장규모의 축소가 예상된다면 그 규모는 얼마나 될지, 또 얼마나 계속될지, 그것에 정부, 업계, 그리고 플레이어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구체적이면서도 다양한 논의가 조속히 이뤄져야 할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강신규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게임, 방송,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저서로 <흔들리는 팬덤: 놀이에서 노동으로, 현실에서 가상으로>(2024), <서브컬처 비평>(2020), <아이피, 모든 이야기의 시작>(2021, 공저), <서드 라이프: 기술혁명 시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2020, 공저),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게임까지>(2019, 공저) 등이, 논문으로 ‘<체인소 맨>의 한국적 수용과 문화적 증폭’(2026), ‘극사실주의의 게임적 재구성: <나는 SOLO>의 상호/텍스트성과 수용구조’(2026), ‘이기지 않아도 재미있다: 부모-자녀 게임 플레이의 사회성과 행위성, 그리고 분투형 플레이’(2024), ‘커뮤니케이션을 소비하는 팬덤: 아이돌 팬 플랫폼과 팬덤의 재구성’(2022) 등이 있다.
- 유보된 이야기와 넓어진 유희공간- <용과 같이 8>
이 글에서 다루는 <용과 같이>는 전통적으로 자유도가 높은 게임으로 취급되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카무로쵸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이 수두룩하고, 선형적인 이야기 속에서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으며, 무수한 미니게임이 게임의 공간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 Back 17 GG Vol. 24.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ngsoo Park Majored in art studies as an undergraduate and is currently studying media cultural studi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Yonsei University. Writes primarily about film, while keeping a curious eye on visual culture broadly—art, games, and broadcasting among them. Also a film critic, host of the podcast Café Critique, and an organizer of community film screenings.
- 모험은 그곳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의 모험에 대하여
게임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모험가가 된다. 평범한 일상을 벗어난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 나가며 때로는 자신 안의 영웅적 면모를 깨워 세상을 구하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 세계 곳곳에 산재된 난제를 해결하는 모든 여정에 기꺼이 뛰어들며 게임을, 모험을 이어왔다. 게임과 모험은 그 궤적을 함께하며 게임을 경험하는 친숙한 방법론을 구축해왔다. 게임의 역사 자체가 일종의 모험기처럼 계속해서 쓰여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 글은 ‘게임’이라는 오래된 모험기를 다른 방향에서 펼쳐 본다. 거꾸로 펼친 모험기는 모험의 바깥에서 주인공의 모험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 < Back 모험은 그곳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의 모험에 대하여 02 GG Vol. 21. 8. 10. 게임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모험가가 된다. 평범한 일상을 벗어난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 나가며 때로는 자신 안의 영웅적 면모를 깨워 세상을 구하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 세계 곳곳에 산재된 난제를 해결하는 모든 여정에 기꺼이 뛰어들며 게임을, 모험을 이어왔다. 게임과 모험은 그 궤적을 함께하며 게임을 경험하는 친숙한 방법론을 구축해왔다. 게임의 역사 자체가 일종의 모험기처럼 계속해서 쓰여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 글은 ‘게임’이라는 오래된 모험기를 다른 방향에서 펼쳐 본다. 거꾸로 펼친 모험기는 모험의 바깥에서 주인공의 모험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모험 서사 속 여성의 위치를 묻는 질문에 여성은 본래부터 ‘그곳(there)’에 있으며 영웅이 도달하려는 곳 그 자체라고 대답했다. 그곳은 이를테면 영웅의 영광스러운 업적의 끝으로 모험의 종착지이자 그를 위한 보상이 기다리는 곳이다. 이 보상은 물질적인 부나 명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그에게 구출되길 간절히 기다리는 여인이 있다. 어떤 모험은 그곳에 붙잡혀 간 여인을 찾아 떠나면서 시작되기도 한다. 그는 영웅의 모험 동기이면서 동시에 승리를 거둔 이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되는 셈이다. 고전 게임 ‘동키콩’ 속 레이디가 그러하듯, 게임 속 수 많은 여인들이 게임의 목표이자 최종 보상이 되어 그곳을 지켰다. 그들은 모험의 시발점 혹은 목적지로 설정되지만 결코 이야기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 게임의 서사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자 모험의 이정표가 될 뿐이다. 스스로는 모험을 떠날 수 없어 악당의 탑에 갇혀 구출되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 피치공주. 모험의 바깥에 자리한 여성 캐릭터로 ‘슈퍼 마리오 시리즈’의 피치공주를 빼놓을 수 없다. 1985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로 피치공주는 수많은 시리즈에서 납치를 당하고 마리오가 영웅으로 거듭나는 수 많은 여정 끝에서 구출되기만을 기다렸다. 시리즈가 이어지며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수행한다거나 다양한 능력을 지녔다는 설정이 생겨났지만 스토리의 전개를 위해서는 아무 의심없이 납치 당하고 구해지고 있다. 그렇게 구해진 피치공주는 마리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마리오의 볼에 입을 맞춘다. 피치공주의 키스는 무사히 모험을 마치고 자신을 구해준 남성-주인공을 위한 보상으로서 여러 타이틀에서 반복되며, 남성-영웅과 납치된 여인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붙잡힌 여인’의 대표 명사인 피치 공주도 단독 주인공으로 모험을 떠난 적이 있다. ‘슈퍼 프린세스 피치’(2005)에서 피치공주는 납치된 마리오와 루이지를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이 작품은 시리즈의 외전으로 제작되어 기존 시리즈와는 다른 점이 두드러지는데, 우선은 ‘여자아이들도 즐길 수 있도록’ 상당히 쉬운 난이도로 제작되었으며 ‘감정 액션’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감정 액션’은 희로애락이라는 4가지 감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술로, 극적이고 풍부한 감정 표현이 게임의 무기가 되었다. 피치공주는 상징과도 같은 풍성한 분홍 드레스를 입고 울고 웃고 화내며 맵을 활보했다. 닌텐도의 또 다른 공주, ‘젤다의 전설’ 시리즈의 젤다는 수동적인 ‘공주’ 캐릭터로 시작했지만 점차 새로운 캐릭터성을 보여주고 있다. 젤다는 세상을 구할 핵심적인 힘을 지닌 캐릭터지만 그 힘 때문에 적대 세력의 주요 타겟이 되는 일이 빈번했다. 시리즈가 전개되면서 ‘시간의 오카리나’(1998)나 ‘바람의 지휘봉’(2002)에서는 링크를 돕는 주요 조력자로도 등장했지만 ‘공주’로서 모험에 동참하지는 못했다. 두 작품에서 젤다는 남성으로 변장하거나 해적으로서 모험에 동참하여 활약하지만, 공주로서의 정체를 드러내자마자 납치당하거나 위험하다는 이유로 모험에서 배제된다. 또한 변장한 젤다는 짙은 피부와 활동적인 복장으로 자신을 감추다가 공주로서 정체를 드러내면 피부톤이 밝아지고 화려한 드레스로 환복한다. 마리오와 루이지를 구하고자 떠난 피치공주가 분홍 드레스를 벗어 던지지 못했 듯, 그들의 모험은 ‘공주다운’ 복장에 제한되었다. 시리즈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이들은 시작부터 모험의 가장 바깥으로 떠밀려버리거나 주인공들의 영웅성을 돋보이게 할 역할로만 한정되어 ‘수동적 공주’라는 전형성 안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야 젤다는 세계를 구할 모험의 핵심적인 존재로서 설정이 확고해지고 있다. 가장 최근 소개된 후속작 트레일러에서는 긴 금발 머리와 드레스를 입은 익숙한 공주의 모습이 아닌 짧아진 머리에 모험가 복장을 한 젤다를 확인할 수 있다. 비로소 오랜 시간 링크의 모험을 지켜보던 젤다도 새로운 모험에 돌입하고 있다. * 사무스 아란. 한편 일찍이 모험을 나선 여성 캐릭터도 있다. 1986년 닌텐도에서 출시한 ‘메트로이드’ 시리즈의 주인공 사무스 아란은 강화 슈트를 입고 우주를 종횡하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개발진들은 강화 슈트 속의 전사가 여성이라면 더 멋지지 않겠냐는 아이디어에서 ‘메트로이드’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처음 발매된 ‘메트로이드’에서 사무스 아란의 외모는 강화 슈트로 인해 드러나지 않으며 게임에서도 그의 성별을 추측할 단서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게임을 좋은 성적으로 클리어하면 엔딩에서 사무스 아란은 헬멧을 벗어 강화 슈트 속 전사가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플레이어에게 ‘파격적인’ 반전을 선사했다. 더 좋은 성적으로 클리어하게 되면 레오타드나 비키니와 같이 노출이 심한 복장까지 볼 수 있었다. 복과묵하고 강인한 우주 전사도 게임이 끝난 뒤에는 ‘팬서비스’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이러한 ‘팬서비스’는 시리즈에서 전통처럼 계속되었다. * 라라 크로프트. 사무스 아란이 마케팅의 일환으로 고의적으로 성별을 숨겨 화제성을 노렸다면, 여성으로서 강한 파급력을 보인 캐릭터로는 단연 라라 크로프트가 꼽힐 것이다. 라라 크로프트는 ‘툼 레이더’의 주인공으로 1996년 처음 등장하여 높은 인기를 얻으며 최근까지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변주되고 있다. 초기 라라 크로프트는 독립적이고 야망있는 캐릭터로 설정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90년대의 ‘걸 파워’ 유행도 맞물려 있다. 제작 초반에는 남성을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었지만, 설정을 여성으로 바꾸면서 수동적이지 않고 강하면서 동시에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로 수정되었다. 하지만 기획 의도에서 당당한 여성상을 추구한 것과는 별개로 실제로 라라 크로프트는 ‘섹스 심벌’로서의 이미지로 홍보되거나 소비되어 왔다. 여러 버전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 있었지만 라라 크로프트를 떠올리는 상징적인 복장은 첫 작품에서의 쌍권총과, 민소매, 짧은 반바지를 입은 모습이다. 초반에는 기술의 한계로 인해 어색한 폴리곤 덩어리로 구현되었음에도 비현실적인 볼륨감이 두드러지며, 민소매와 반바지 차림은 자유로운 활동성보다도 몸매를 과하게 드러내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성적 대상화도 구체화되어 노출도가 높은 코스튬이 제공되거나 바스트 모핑이 도입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성적 대상화된 육체가 아닌 한 인물로서의 라라 크로프트에 주목하기 위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플레이어들이 게임 내에서 라라의 복장을 바꾸거나 누드로 만드는 모드를 제작하거나 모드로 새롭게 연출된 라라 크로프트의 모습을 공유하는 등 캐릭터를 소비하는 방식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사무스 아란과 라라 크로프트는 분명히 모험의 중심에 있지만 이들이 플레이되는 방식, 보여지고 소비되는 방식은 다른 ‘전통적인 영웅’들의 행보와는 크게 다르다. 남성 유저가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게임 시장 특성상 여성 캐릭터들은 ‘캐릭터’가 아닌 ‘여성’에 방점이 찍힌 채로 탄생하고 소비되고 플레이되었다. 여성 캐릭터의 모험에는 게임 속 세계의 위험천만한 장애물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넘어서야 하는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역경이 더해져 왔다. 모험을 떠나는 여성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도 모험의 장벽이 되어왔다. 2014년 발매된 ‘어쌔신 크리드 : 유니티’에는 최대 4인까지 함께할 수 있는 협동 미션이 도입되었는데, 여성이나 유색 인종으로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아 많은 비판이 있었다. 당시 디렉터 알렉스 아만시오는 초기에는 여성 암살자도 계획되었으나 “2배의 애니메이션, 목소리, 영상 소스”를 제작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컸기에 “여성 캐릭터를 삭제”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반발은 #womenaretoohardtoanimate라는 해쉬태그를 통해 공유되었다.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이 사건 이후로 ‘어쌔신 크리드’는 플레이가능한 몇 명의 여성 캐릭터를 선보였다. ‘어쌔신 크리드 : 신디케이트’(2015)의 이비는 쌍둥이 남매 제이콥과 함께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했고, ‘어쌔신 크리드 : 오리진’(2017)의 아야는 주인공 바예크의 아내이자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였다. 이비는 마스터 암살자가 될 만큼 유능하고 아야는 ‘어쌔신 크리드’ 세계관의 핵심 집단인 ‘형제단’을 창설했다는 설정이 있지만, 실제 게임에서는 이들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대폭 축소되고 홍보 아트에서도 이들의 존재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주인공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었던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2018)조차 홍보에서는 공식 캐논인 카산드라보다 알렉시오스가 주력으로 등장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여성캐릭터가 단독 주인공으로 등장한 건 외전인 ‘어쌔신 크리드 3 : 리버레이션’(2012) 뿐이다. 그리고 2020년 블룸버그를 통해서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이러한 행보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이슈는 ‘어쌔신 크리드’의 제작사 유비소프트 내의 성추행, 성차별적 구조와 권력 남용에 대한 집단 소송 건이었다. 그리고 이 고발에는 2018년에 ‘어쌔신 크리드 : 오디세이’가 단독 여성 주인공으로 개발될 예정이었으나, ‘여성 주연 게임은 팔리지 않는다’라는 고위층의 주장에 의해 주인공의 성별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출시되었다는 폭로도 함께 실려 있었다. ‘어쌔신 크리드’를 해 본 유저라면 다음의 문장이 익숙할 것이다. “이 가상 시나리오는 다양한 종교, 성적 성향 및 성 정체성을 가진 다문화 팀에서 기획, 개발, 제작하였습니다.” 다양성을 명시한 문장 너머에는 넘을 수 없던 현실이 가로막고 있었다. 게임을 만들어내는 게임 바깥의 차별적인 문화가 실제 게임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갖은 고난과 난제에 부딪히면서도 여성 캐릭터들의 모험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비욘드 굿 & 이블’의 제이드 (2003),’ ‘미러스 앳지’의 페이스 (2008),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 의 맥스 (2016), ‘호라이즈 제로 던’ 의 에일로이 (2017), ‘하프-라이프 : 알릭스’의 알릭스(2020)까지, 이들은 더 이상 탑에 갇힌 공주가 아니라 스스로 뛰쳐나와 자신만의 모험을 이끄는 모험가다. 여성 캐릭터들의 모험의 양상이 다양해지면서 동시에 주변의 이야기도 더욱 복잡다단해지고 있다. 때때로 유의미한 시도와 전진하지 못하는 입장이 반복되기도 하며, 어떤 성취는 또 다른 도전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모험가는 난제를 해결할 또 다른 가능성을 품고 다시 여정에 오른다. 모험의 본질은 닥쳐오는 장애물을 피하지 않고 세계를 마주하는 것이다. 현실과 타협하느라 고정관념에 얽매인 사고를 뛰어넘어서 새로운 상상으로 돌입하는 일이다.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게임 속 세계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런 가능성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전시 기획자) 서다솜 큐레이터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종종 전시를 기획하거나 글을 쓰고 주로 게임을 한다. 큐레이터 게임 동호회 'Mods'의 멤버다.



![[논문세미나] 베트남 게임 환경과 무협문학의 관계](https://static.wixstatic.com/media/d03518_4b0369afd0174b45ae317d4074535767~mv2.jpg/v1/fit/w_176,h_124,q_80,usm_0.66_1.00_0.01,blur_3,enc_auto/d03518_4b0369afd0174b45ae317d4074535767~mv2.jpg)





![[고스트] 시리즈: 찬바라의 뒤섞인 계보 위에서 패링하기](https://static.wixstatic.com/media/d03518_b1961b77e0e142e98b20d590c4f54d0b~mv2.jpg/v1/fit/w_176,h_124,q_80,usm_0.66_1.00_0.01,blur_3,enc_auto/d03518_b1961b77e0e142e98b20d590c4f54d0b~mv2.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