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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이 꽤나 발칙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요 귀여운 녀석이 게임에 미쳐 부모님 몰래 수십만 원어치의 현질을 했고, 그걸 들켜 죗값을 달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우리 엄마는 비슷한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은 바, 대수롭지 않게 ‘애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이모는 ‘이노무 시키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발을 동동거렸다.  < Back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 01 GG Vol. 21. 6. 10. 시작하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이 꽤나 발칙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요 귀여운 녀석이 게임에 미쳐 부모님 몰래 수십만 원어치의 현질을 했고, 그걸 들켜 죗값을 달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우리 엄마는 비슷한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은 바, 대수롭지 않게 ‘애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이모는 ‘이노무 시키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발을 동동거렸다. 실로 익숙한 흐름의 대화였다. 게임을 ‘중독’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둬 악마화하거나 정신병리학적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우리 엄마가 나의 오빠를 키우던 때에도 구사한 문법이니 말이다. 같은 배에서 태어났지만 오빠와 달리 나는 디지털 게임을 즐겨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쥬니어 네이버’ 세대답게 나 역시 ‘슈 게임’을 하며 유년시절을 보냈고 조금 더 머리가 큰 뒤로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피카츄 배구’나 ‘보글보글’, ‘테트리스’, ‘카트라이더’ 등을 하며 점심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게임을 즐겨 하지 않던 나조차도 추억 저편에 게임이 있을 정도라면,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의 유년시절은 온통 게임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게임이 우리 일상으로 들어온 지는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뿐인가.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의 레드 카펫 위에서 한국영화를 알리고, 방탄소년단이 빌보드의 화려한 조명 아래서 K팝을 알릴 때, 모니터 너머의 가상 세계에는 이미 ‘한국 vs 비한국’이라는 대결 공식이 생겼을 정도로 한국 게임문화의 위상은 최정점에 놓여있던지 오래다. 상황이 이쯤 되면 이제는 게임도 엄연한 취미이자 하나의 문화로 봐 줄 법도 한데, 여전히 게임은 하찮고 저급한, 그래서 ‘문화’라는 이름조차 아까운 취급을 받고 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우선적으로는 타성에 젖은 사고방식 때문일 테다. 시대가 변했고, 세대교체가 여러 번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시절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한 편견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뿌리 깊게 남아있고, 그로 인해 게임은 문화가 아닌 잠깐의 일탈이나 못된 유흥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런데 정말 그뿐일까? 세상만사가 단 하나의 절대적인 이유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면, 게임이 문화영역에서 제 몫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또한 외부적 편견 탓만은 아닐 것이다. 분명 그 밖의 다른 요인도 있을 것이며, 나는 그것을 ‘비평’으로 지목할 셈이다. ‘게임비평’? 사실 게임이 맥락적인 조건 속에서 주조되는 하나의 문화적 텍스트이자 실천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타의 문화예술처럼 비평이 따라붙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하지만 게임비평은 여전히 생소하고 이질적인 단어의 조합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타 영역의 비평에 비해 그다지 활발하게 전개되지 않은 탓이며 비평의 무능과 게으름, 그것이야말로 이 글이 쓰인 배경이자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계급투쟁의 영토로서 영화/비평 문화비평 중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것은 단연 미술비평과 문학비평이다. 초기에는 양자 모두 작품의 고유한 특징과 미학적 가치를 규명함으로써 예술가의 창작 활동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고 작품과 세계가 맺는 관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미술사’ 또는 ‘문학사’와 함께 발맞춰 전개되었지만, 근대 전환기에 이르러 예술이 인간 이성의 지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자 비평은 역사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세기 무렵이 되자 비평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예술 시장의 확대와 부르주아 계층의 급속한 팽창으로 인해 단순히 작가와 문화 향유자 사이를 중개하던 비평가의 역할이 특권 집단의 배타적인 취향을 형성하는 역할로 변모한 까닭이다. 특히나 미술과 문학은 일찍이 상류층의 취미이자 고급예술의 대표적 형태로서 문화사에 기입되어 왔기에 비평이 제 스스로 그것의 차별성과 우월성을 강조하여 대중문화와의 구별짓기를 수행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으며, 이때부터 비평은 문화예술의 지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다. 반면 영화와 영화비평의 관계는 위와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진화·발전을 이룩해왔는데, 영화는 근대의 산물이기에 태초부터 고도화된 자본 및 기술, 매체 등과 밀접한 연관을 지닐 수 밖에 없으며, 그 중에서도 신문과 잡지는 1895년 12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 발명과 영화의 탄생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조푸앵(Mise au point)>(1897)이나 <르파시나퇴르(Le Fascinateur)>(1903)와 같은 영화 전문 잡지가 창간되면서 근대 영화비평의 초석이 마련되었는데, 달리 말해 영화는 미술이나 문학과 달리 탄생부터 그것에 대한 글쓰기와 함께한 셈이다. [1]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 발명 초기, 영화가 ‘미래가 없는 발명’이라 말했지만 그들이 틀렸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우려와 달리 영화는 초현실주의와 표현주의, 사실주의 등 온갖 종류의 장르 및 스타일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자기 식대로 소화했고 제작과 평론, 관람을 한데 모으는 비옥한 토지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대중매체로서 영화의 영향력이 증대함에 따라 점차 영화 산업에도 활기가 돌고 영화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는데, 1920년대에 들어서자 영화 칼럼을 고정으로 싣지 않는 주간지가 없을 정도로 영화 비평은 몸집을 부풀렸고 정기 간행물 형태의 전문 영화 잡지 역시 앞다퉈 창간됐다. [2] 그리고 이때부터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비평에 참여하면서 그 수준도 현저하게 끌어올려졌는데 알렉상드르 아스트뤽(Alexandre Astruc), 앙드레 바쟁(André Bazin), 장 조르주 오리올(Jean George Auriol), 로제 레나르트(Roger Leenhardt), 자크 도니올-발크로즈(Jacques Doniol‐Valcroze) 등은 철학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영화 미학을 심도 깊게 탐구하고, 비평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이하 <카이에>)와 <포지티프(Positif)> 역시 이러한 지적 계보 속에서 탄생했다. [3] 이렇게만 보면 영화/비평은 나름대로 순탄하게 독자적인 예술의 지위를 차지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문 영화비평이 등장한 초기만 하더라도 영화는 연극이나 문학의 빈곤한 확장으로 여겨졌으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는 제국주의적 충동에 사로잡힌 이데올로기적 매체라는 편견이 빠르게 확산됐다. 게다가 전쟁 이후 맹렬한 기세로 성장한 할리우드 영화 산업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는데 쉽게 말해, 영화가 미술이나 문학과 같이 하나의 예술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영화만의 미학적인 속성과 가치를 규명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정치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완전히 말소시켜야 했고, 그와 더불어 일반 대중들의 저속한 유희거리에 불과하다고 여겨지던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 역시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 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초창기 영화이론가 리초토 카누도(Ricciotto Canudo)가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 선언한 이후 영화비평은 영화가 고유한 내적 세계와 미학적 가치를 지닌 예술의 한 형태이며, 그에 대해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모든 행위는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감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지성의 작용이라 주장했는데, 이는 아스트륔의 ‘카메라 만년필론(camera-stylo)’에서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아스트뤽는 1948년 <레크랑 프랑세(L'Écran française)>의 지면을 빌어 영화감독은 화가나 작가에 비견되는 예술가로, 감독이 사용하는 촬영 기자재는 소설가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만년필과 같다고 썼다. [4] <레크랑 프랑세>의 또 다른 필자였던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역시 이미지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일종의 의식이자 실천적 행위라고 말하며 ‘사유-이미지(Images-pensée)’를 주창했고, 영화비평의 전성기인 ‘황색 시대’ [5] 를 견인한 앙드레 바쟁 또한 카메라의 힘이 현실에 무언가를 추가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에 있다고 역설하며 영화의 독자성을 강조했다. [6] 이렇듯 영화가 ‘근(현)대 예술’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비평의 역할은 실로 막대했다. 비평이 촉발시킨 영화 미학에 관한 물음과 논쟁은 당대 많은 부르주아-엘리트의 관심을 끌었고, 이것이 영화의 인식 개선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결정적으로 영화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한 단계 더 큰 도약을 하며 명실상부한 ‘예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순수한 의미의 시네필 문화를 수호하던 비평계가 누벨바그 운동에 직면하며 폭넓은 지적 조류에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그간의 비평은 의식적으로 비정치성을 강조해왔는데, 이는 영화-이미지 이면에 놓인 감독(작가)의 천재성과 영화의 특수성을 세간에 드러냄으로써 영화와 비평을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으려는 기획의 논리적 확장이었다. 요컨대 “영화를 ‘본다는 것’은 감독이 마련한 자신만의 일관되고 독특한 세계관이 담긴 작품 세계로서의 미장센에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앞서 이념적 해석이나 정치적 성향은 필요치 않다.” [7] 만약 “이를 강요한다면 영화의 시각적 구성을 볼 수 없게 만드는 편향된 ‘읽기’를 필연적으로 야기할 것” [8] 이며, 이는 결국 영화를 도구적으로만 참조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세대교체로 인해 젊은 감독들은 구시대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화적 조류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비평도 변혁을 요구받았는데, 비평 역시 세계의 일부라면 모종의 투쟁에 연루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변화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누벨바그의 거장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다. 그는 영화 안에는 언제나 미지의 상태로 남겨진 의미와 기능, 형식들이 존재하기에 자기 자신에게로 닫혀서는 안 되며, 이 미완성이야말로 영화의 진정한 힘이기에 영화는 결코 고립된 채 이해될 수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 리베트 이전의 비평이 작품의 내적 탐구를 통해 영화를 진지한 사유와 토론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데 주력을 기울였다면, 리베트 시대의 비평은 작품의 안과 밖을 잇는 시도를 통해 영화의 이론적 정립과 과학적 글쓰기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리베트는 <카이에>를 이끄는 동안 영화의 의미 확장과 저변 확대를 위해 인류학과 문학 이론, 라캉의 정신분석학,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 등과 같은 새로운 분야의 지적 자원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했는데, 당시 리베트와 함께 <카이에>를 이끌던 필진들 역시 블랑쇼,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융 등을 인용하면서 철학과 영화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 영화를 다르게 사유하고 감각할 수 있는 방법 등을 강구했다. 이제 비평은 근대인의 미적 체험의 대상으로서 영화에 주목하는 대신 그것이 자극하는 무의식과 불안에 초점을 맞추고 적극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더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영화의 목표가 “사람들로 하여금 둥지 밖으로 나오도록 신화를 깨부수는 것” [9] 으로 변모함에 따라 비평이 중요하게 포착해야 할 것 또한 작품이 높인 맥락, 즉 영화가 탄생한 환경적인 조건이나 현실 세계와의 연관성, 그리고 그것의 표현 방식 등으로 이동하게 된 셈이다. [10] 그리고 몇 년 뒤 영화/비평은 또 한 번의 변화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세르주 다네(Serge Daney)의 회고처럼 1968년에 일어난 ‘68혁명’은 어느 누구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거나 그에 관해 쓸 수 없게 만들었다. 68혁명의 주창자들이 이끈 정치경제학적 변혁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여파로 프랑스 사회 내 모든 가치가 의문시되었고 영화 역시 황색 시대에 구축된 제도와 관습, 원칙, 규율 등이 1968년 이후의 상황을 다루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전 시네필리아에 대한 거부가 만연해지자 영화에 대한 새로운 언어와 사유 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이러한 요구 담론의 지속적인 형성 및 축적은 ‘영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열어내는 것으로 이어졌다. 권력투쟁의 이중 전선, 한국영화/비평 그렇다면 한국영화는 어떨까? 한국영화사에 비평 집단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이었지만 이때의 평론은 서구의 초기 영화비평처럼 일간지나 잡지 등지에서 영화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감상을 나누는 정도였으며, 보다 선명한 문제의식을 지닌 비평가 집단이 출현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5.16의 발발로 활동이 중단되었던 ‘한국영화비평가협회’에 10여명의 문학평론가를 영입하며 196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새롭게 출범한 것이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하나의 비평적 공동체로 묶어준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새로운 ‘세대성’이었다. 해방직후의 비평은 ‘민족영화 건설’이라는 모토를 내세웠고, 1950년대 전후 비평 역시 ‘한국영화의 근대화’라는 역사적 과업을 이어받았지만, 이 새로운 비평 집단은 영화의 문학성(서사성)이나 외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이미지-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강조하고 내적 세계를 포착함으로써 영화 고유의 미학적 가치를 강조했다. “리얼리즘을 초극해야 한다” [11] 는 한국영화의 암묵적인 전제는 바로 여기서 탄생했다. 영화는 본디 기록의 매체이니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하되, 거기에 안주하거나 머물러서는 안되며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리얼리즘은 한국영화의 절대적 명령이 아닌 하나의 선택적 가치에 불과하며, 영화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라는 오브제가 아니라 그 오브제를 다루는 영상-이미지이다. [12] 이러한 흐름만 놓고 본다면 한국영화/비평이 걸어온 길 역시 서구의 궤적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근대 도시의 통속적이고 저속한 볼거리로 여겨지거나, 인접한 예술의 하위호환 버전으로 간주되거나, 정치적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부각되다가 대대적인 세대 교체와 함께 그것의 역사적, 매체적, 미학적 특성을 규명하며 종국에는 예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한국영화는 언제나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앞서 언급한 세계영화문화의 공통된 목표였다면, 다른 하나는 문화 열강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국가·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국가·민족 고유의 미학적 가치를 내세우는 것은 무엇보다 식민국 또는 후진국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벗어던지고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힘의 획득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 한국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풀어 말하자면 50년대 한국영화는 일제의 잔재를 지우고 식민지적 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를 대안으로 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세우는 테크놀로지나 스펙터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거리두기를 했다는 것이다. 실제 60~70년대의 한국영화비평은 기술과 예술을 엄격히 구별하고 전자보다 후자에 우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한국영화가 안고 있는 기술적 낙후성에 대한 불안과 좌절로부터 비롯된 의식적 부인으로 보인다. 한국영화의 물적 토대를 감안했을 때 할리우드가 선보이는 기술과 기교는 분명 선망의 대상이지만, 그것을 졸렬한 기술-자본이 만들어낸 말초적 쾌락이라 호명하며 예술성의 고양을 주창한 것이다. [13]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한국영화의 기술력을 논할 때는 다소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가령 국내 최초의 컬러영화가 등장하자 비평단은 이를 한국영화의 획기적인 진전이라 상찬하고, 국산 시네마스코프가 제작되었을 때는 한국영화를 해외영화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위대한 업적이라 호평했다. [14] 이것이 너무 까마득한 역사처럼 느껴진다면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를 장악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그에 대한 평단의 반응을 떠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리나라는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흐름에 편승했는데 당시 물밀듯 밀려 들어온 해외 문화로 인해 자국 문화의 위기설이 나돌았고, 이때 전 지구적 자본의 풍랑에 맞서 한국의 영화산업을 이끌 대표 주자로서 부상한 것이 ‘한국형 블록버스터’였다. 민족주의적 서사를 채택하며 처음 등장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막대한 자본과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술력을 등에 업고 인기몰이를 했는데, 이에 대한 비평 역시 60~7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컨대 영화 시장의 개방으로 국내에 대거 유입된 해외 스펙터클 영화에 대해서는 자국의 영화를 말살시키는 ‘위협’의 딱지를 붙였지만,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대해서는 해외 문물로부터 국가·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가치를 지켜낼 문화예술의 지위를, 더 나아가 IMF 외환 위기와 구제 금융을 겪으며 좌절한 한국사회를 다시 일으킬 산업분야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15] 해외영화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자본에 대한 한국영화/비평의 이중적인 태도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영화는 외래 문화로 출발했으나 영화가 테크놀로지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기술은 근대성의 상징이자 욕망의 대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영화/비평이 보이는 이중적 태도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조건이 만들어낸 모순, 또는 지정학적 특수성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16]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한국영화/비평의 과제는 서구의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한국의 영화/비평은 영화에 근대 문화예술의 지위와 자격을 부여하고 그것을 철학적 사유와 이론적 고찰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 것과 더불어 외래 문화와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독자적인 위상을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온 까닭이다. 이렇듯 한국영화/비평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대중문화)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문화 열강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저항과 해방을 꾀한, 이른바 ‘권력투쟁의 이중 전선’이라 할 수 있다. 맺고 새로 시작하며: 현대 문화예술로서의 게임을 위하여 긴 우회로를 거쳤으니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글을 시작하며 나는 게임이 현대의 일상문화와 한국의 문화산업 한복판에 놓여 있음에도 대체 어떤 이유로 여전히 천대를 받고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비평 문화의 비활성화를 언급했었는데, 이 글의 목적이 비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통한 비평의 각성에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를 뒤집어 말하는 것이 더 적확하고 명쾌한 설명일 테다. 즉 게임비평의 소극적인 태도, 나태함, 약간의 무기력함과 무능함 등의 논리적인 귀결은 게임문화 전반에 대한 폄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서 길게 서술했듯 영화 역시 고전 미학의 권위에 짓눌려 꽤나 오랫동안 문화예술계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지금의 위상을 차지하게 된 데에는 비평의 공이 컸다. 특히나 한국영화의 경우 서구 문화의 계급투쟁 계보를 이으면서도 독자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이중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현재의 한국게임문화에 주는 시사점이 많아 보인다. 다만 그것이 주는 교훈을 통해 보고 배우는 과정에서 실수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영화 비평은 수십 년 전부터 ‘위기설’이 감돌 정도로 그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데, 빠른 속도로 몸체를 부풀리는 OTT 플랫폼으로 인해 영화 관람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디지털 담론장 형성과 지식-정보의 범람으로 인해 아마추어 비평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문 비평의 지나친 엘리트주의나 미학주의는 대중예술로서 출현한 영화의 본분을 망각하고 특권 계층의 전유물과 같은 부르주아적 성향을 보여 많은 이들의 반감을 샀다. 이는 영화를 미학적 탐구와 학문적 고찰의 대상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주관비평에서 객관비평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던 과거의 비평적 요구가 절대화됨으로써 초래된 결과였다. 기실 비평적 주체는 늘 제3자로서 중립적인 해석자의 역할을 수행해왔고, 지워진 비평 주체의 주관성은 역설적으로 비평가의 전문성과 객관성을 보증해 주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비평 행위는 단순히 제3자로서 사실을 기록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매개로 사태에 개입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보고,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은 언제나 삶을 살아가는 것과 동시적이며, 따라서 어떤 것에 대해 쓰고, 읽고, 말하고, 듣고, 보는 주체는 오늘의 시간을 지나쳐가는 주체와 겹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평의 전문성을 보장한답시고 현실과 유리된 언어를 구사하거나, 자신들만의 리그에서나 통할법한 논리를 내세우는 일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비평의 핵심적 역할이 세계와 텍스트 사이에 오솔길을 놓고 장 안팎의 행위자들을 이을 연결고리를 마련하는 것이라면, 이 새롭게 마련된 비평-플랫폼의 책임은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는 마주침의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데에 있다. 지적 자본을 내세운 이들의 날카로운 시선과 신랄한 목소리, 열정 자본으로 무장한 이들의 뜨거운 열기와 유쾌한 분위기, 문화 자본으로 다듬어진 섬세한 감수성과 고아한 취향, 현장의 목격자 및 관찰자들의 순수한 호기심과 앎에 대한 열망 등이 뒤섞일 때, 그래서 저마다 활발하게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담론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게임은 비로소 현대 대중문화예술로 호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 이 새로운 비평-플랫폼이 서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젠가 게임문화가 현대 대중문화의 치열한 계급전쟁에서 권력을 탈환하고 개별 학문의 지위를 차지하여 대학의 문턱을 넘는 날이 오기를, 한평 남짓한 책상 앞에서 펼치는 우아한 지적 활동이자 역동적인 취미로서 존중받는 날이 오기를, 그리하여 현질까지 해가며 기를 쓰고 게임을 한 우리 귀염둥이의 노력이 사춘기 소년의 한심한 일탈이 아닌 꿈을 위한 진지한 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게임 제너레이션〉의 건투를 빈다. [1] 박희태, 「프랑스 영화비평의 현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47,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14, 390쪽. [2] 에밀리 비커턴, 정용준·이수원 역, 『카이에 뒤 시네마: 영화비평의 길을 열다』. 이앤비플러스, 2013, 31-33쪽. [3] 박희태, 「프랑스 영화비평의 현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47,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14, [4] http://www.newwavefilm.com/about/camera-stylo-astruc.shtml [5] <카이에>는 노란 겨자색 표지에 커다란 흑백사진을 실은 30페이지짜리의 잡지로 1950년대 파리에서 가장 ‘우아한’ 잡지로 여겨지곤 했는데, 특히 별다른 헤드라인 스틸 사진을 사용하여 표지를 구성한 것은 <카이에>가 영화 미학에 큰 비중을 두겠다는 다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6]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51-52쪽. [7]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65쪽. [8]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65쪽. [9] Rivette, Cahiers 204, September 1968. [10]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85-90쪽. [11] 이영일, 『영화예술』, 1965년 4월호, 24-29쪽. [12] 문재철, 「60년대 중반 영화비평담론의 새로움」, 『영화연구』 41, 한국영화학회, 2009, 61-79쪽. [13] 문재철, 「한국 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7, 한국영화학회, 2008, 132쪽. [14] 문재철, 「한국 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7, 한국영화학회, 2008, 133쪽. [15] 이 시기가 한국영화 담론의 황금기였다는 사실을 추가로 덧붙일 필요가 있는데, 비약적인 기술 발전과 해외 문화 유입으로 인해 디지털 매체를 기반으로 한 대중문화가 급속도로 팽창하자 대중문화론이 지식인 사회에서 각광 받기 시작했고, 영화를 학문적으로 제도화하려는 시도가 확대된 것이다. 이 시기의 영화는 이전과 달리 영상문화 전반에 걸친 지적 담론을 구성하고, 인문사회과학과의 상호텍스트적인 관계망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해갔는데, 그 결과 한국사회에서도 영화가 엄연한 분과학문으로 인정받아 영화아카데미 설립 및 운영, 전문 예술대학의 건립, 종합대학의 영화학과 설치 등과 같은 다양한 결실을 맺었다. [16] 문재철, 「한국 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7, 한국영화학회, 2008, 135-136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한송희 자기소개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편의상 “영화연구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스스로는 영화를 매개로 세계를 탐구하는 문화연구자로 정체화하고 있다. 주로 재현, 표상, 담론의 정치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무한히 확장하고 분할되다 중첩되기도 하는 세상의 모든 경계에 애정을 쏟고 있다. 나와 나 아닌 것, 안과 밖, 이곳과 저곳, 우리와 저들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하면 더 무르고 희미하게 만들어 느슨한 연결을 가능케 할까, 가 최근의 가장 큰 관심사다.

  • [논문세미나] <에이지 오브 원더스 4>의 다양성 이면에 있는 위계적 구조

    이러한 논의는 게임의 특성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을 남긴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설령 게임의 내용이 아무리 진보적인 가치를 담으려 해도 게임 메커니즘이 보수적 가치를 재생산한다면 사실상 게임은 대안우파적 속성을 내재한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으로 연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 Back [논문세미나] <에이지 오브 원더스 4>의 다양성 이면에 있는 위계적 구조 31 GG Vol. 26. 8. 10. 2023년에 나왔지만 DLC가 발매될 때마다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는 패러독스의 <에이지 오브 원더스 4>(이하 AoW4)는 <문명> 시리즈와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의 장점을 잘 녹인 게임으로 한국 게이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AoW4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볼 수 있는 시스템은 게임 내에서 종족을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게임에선 일반적인 판타지 세계관에 등장하는 종족인 엘프, 드워프, 오크, 고블린뿐 아니라, 개구리 모습의 토드족, 산양이나 염소를 닮은 고트킨,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을 닮은 사이런 등 각기 다른 문화와 종족 특성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종족이 등장한다. 게다가 이들의 문화(야만, 봉건, 원시, 강탈, 산업, 어둠 등)와 종족 특성까지도 커스텀할 수 있는 자유도를 제공한다. 이러한 게임의 특징은 세계관에 대한 몰입을 극대화하고, 전략과 전술에 깊이를 더한다고 평가받는다. 종족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자유도는 또 한 가지 특성을 가지게 하는데, 게임에서 인종적 폭력이 어떻게 재현되는지에 대한 비판적 담론을 피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4X 장르(eXplore, eXpand, eXploit, eXterminate)의 게임 메커니즘은 인구/종족을 관리 가능한 자원 단위로 수치화하는 걸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인종 개념을 재현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가령, <문명> 시리즈를 하면서 ‘역사와 특정 영웅에 기반을 둔 것이니 반박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은 기술, 일본은 전쟁 특화 민족이라고 보는 것은 뭔가 좀...’하며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 인종과 인종 특성에 관한 재현은 본질주의적이고 위계적인 인종 개념 위에서 만들어졌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AoW4는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데, 첫째로는 현실에서의 인종과 판타지 게임에서의 종족 개념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설령 게임 플레이에서 특정한 인종적 고정관념이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유로운 시스템 속에서 게이머의 폭력성이 드러난 것이지 게임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종족의 외형과 특성을 분리해서 자유롭게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게임 시스템은 판타지 세상에서 반복된 고정관념을 뒤집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 현실에서 인종과 인종적 특징을 연결시키는 차별적 관점에 대한 의심을 싹틔울 수도 있다. 그런데 켄터키 대학의 마크 하인스(Mark Hines)는 이러한 인식에 대해 반기를 든다. 게임에서의 재현을 단순히 텍스트로 바라보지 않고, 플레이와 연결시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인즈의 논의는 고전적인 인종주의적 비판을 넘어서면서도 한편으로는 게임의 특수성이라는 것이 정치적 함의와 어떻게 가닿을지 고민하게 만든다. 이번 논문세미나에서는 진보적이게 보이는 판타지 게임의 종족 시스템이 현실의 인종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자. 부유하는 기표와 강화되는 인종적 질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AoW4는 판타지 매체에서 인종을 본질주의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미묘한 도전이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들이 판타지 속 인종적 미학과 문화, 기술, 도덕성의 상호작용을 고찰하도록 유도한다. 즉, 게임에서의 인종주의가 본질주의적으로 위계화되어 있어서 플레이어가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문화적 요인들과 함께 플레이어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인스는 AoW4가 본질주의적 인종주의 묘사를 회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묘하면서도 해로운 인종적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때 활용되는 개념이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의 ‘부유하는 기표’인데, 이는 어떤 단어나 상징이 하나의 고정된 뜻을 갖지 않고 시대와 맥락에 따라 계속 다른 의미로 채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인스는 여기에 라클라우(Ernesto Laclau)와 무페(Chantal Mouffe)의 인식을 더해서, 부유하는 기표가 단순히 의미가 유동적이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유동성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집단이 주도권을 잡으려 경쟁하는 정치적 다툼의 장이라는 점을 짚고자 한다. AoW4가 플레이어에게 종족의 의미를 자유롭게 구성하도록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고정된 무언가가 남아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AoW4는 어떻게 유해한 인종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일까? 응우옌이 이야기한 것처럼, 게임은 현실의 복잡성과 모호성을 평면화할 수 있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가진다. '내 인생의 성공은 무엇인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와 같이 복잡한 질문들을 게임은 체계화하고 수치화해서, 명료하고 일관적인 목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AoW4의 목표들을 살펴보면 백인 남성중심의 환원주의적인 인종적 세계관이 드러난다. 가령, 제국 전체는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개별 도시는 반드시 하나의 종족으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종족이 한 도시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그림 자체가 게임 안에는 없는 셈이다. 또, 어떤 종족을 가장 많이 보유한 플레이어는 그 종족 전체를(심지어 적의 편에 속한 구성원까지) 마법으로 한꺼번에 바꿔버릴 수 있다. 이는 종족이 각자의 정치적 소속과 상관없이 하나의 몸처럼 묶여 있다는 인식을 은연중에 심어준다. 영웅 시스템도 비슷하다. 플레이어는 다른 문명 출신의 영웅을 데려와 자기 편으로 쓸 수 있지만, 그 영웅이 타고난 마법 능력만큼은 원래 종족의 것을 그대로 유지한다. 즉 새로운 문화에 녹아드는 게 아니라, 마치 그 능력이 태초부터 정해진 우주의 법칙인 것처럼 계속 따라다니는 것이다. 이런 설정은 결국 인종을 '원래 그렇게 타고나는 것'으로 못 박는 효과를 낳는다. 4X 장르와 백인 남성 주체성의 결합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비유적으로 게임이 백인 민족주의 논리를 답습한다는 점이 아니다. 게임의 단순화는 백인 남성 중심의 게이머가 자기 현실 경험을 게임 세계와 분리시켜, 인종과 젠더적 차별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게 만든다. 그리고 현실과 게임의 경계를 넘어 초월적인 인종적 법칙을 내재화한다. 예를 들어, 무수한 평행우주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다른 종족과의 전투는 '서로 다른 존재들은 언제나 차이를 발견하고 그것을 폭력의 명분으로 삼는다'는 명제를 보편적 법칙으로 만들고, 반복 플레이라는 순환적 시간은 게임 속 통치와 전쟁 원리를 '상식'이나 '영원한 진리'처럼 보이게 만든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이 게임은 종족의 형질을 마음대로 뜯어고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실리콘밸리의 TESCREAL(테크노-유토피아적 우생학 사고) 담론과 그대로 맞닿는다. 플레이어는 마법으로 자신의 백성을 원하는 방향으로 개조하고, 여러 종족이 뒤섞인 제국보다는 단일 종족으로 밀고 나가는 쪽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인스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사실상 '우생학 놀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 문제가 있다면 인구 집단을 기술적으로 개량하고 수치적으로 체계화해서 세상을 재편하면 되지 않나?'하는 엘리트주의적 논리가, 재미있는 게임 시스템의 얼굴을 하고 답습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게임이 플레이어의 행위로 이루어지기에 일견 과한 비판이 아닐까 싶지만, 메타적으로 결정 주체인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권한이 가치중립적이게끔 느껴지게 한다는 점에서 '영원한 객관성'의 원칙을 내재화하는 효과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판은 백인 남성인 게이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인스 비판의 핵심은 인간을 '완전한 인간 / 반쯤 인간 / 비인간'으로 나누어 규율하는 사회정치적 과정 자체에 있다. AoW4의 진짜 매력은 신체·정신·문화·이념 등을 자유롭게 조합해 종족을 설계하는 이 인종화 과정에 있고, 그 위계를 부여하는 것은 플레이어 자신이다. 얼핏 보면 AoW4는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을 전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탈인종적인 시대 분위기에 맞춰 인종 형성 과정을 좀 더 유연하고 세련되게 포장했을 뿐,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위계화하고 타자화하는 근본 틀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실제 인종과 상관없이 누구나 냉철하게 판단하고 전략적 위험을 감수하며 더 큰 이득을 위해 인내할 수 있는 백인 남성의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위계적 구조를 답습하는 게임의 특성 결국 하인스가 논문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다. AoW4에서 종족의 겉모습과 문화는 얼마든지 흔들리고 재조합될 수 있지만, '차이는 곧 적대의 근거가 된다'는 전제만큼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 종족은 부유하는 기표처럼 자유롭게 떠다니는 듯 보여도, 그 아래에는 모든 의미가 들러붙는 하나의 고정된 축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하인스가 이 문제를 AoW4라는 개별 게임의 결함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가 진짜로 겨냥하는 건 4X 장르, 나아가 게임이라는 매체 자체가 가진 속성이다. 복잡한 사회적 판단을 명료한 숫자와 위계로 환원하는 능력, 완벽한 정보를 손에 쥔 플레이어에게 세계를 재설계할 권한을 쥐여주는 구조. 하인스는 이 속성이 우파적 세계관과 이상하리만치 잘 들어맞는다고 말한다. 게임이라는 형식 자체가 그런 세계관을 유독 편안하고 재미있게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게임의 약속은 현실의 위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자체를 꺼내기 어렵게 만든다. "이건 그냥 게임일 뿐"이라는 감각이야말로 플레이어를 정치적 판단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뜨려 놓는 장치이다. 이러한 논의는 게임의 특성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을 남긴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설령 게임의 내용이 아무리 진보적인 가치를 담으려 해도 게임 메커니즘이 보수적 가치를 재생산한다면 사실상 게임은 대안우파적 속성을 내재한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으로 연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4X 게임뿐만 아니라 전략 시뮬레이션 전반, 자동화 시뮬레이션, 덱빌딩 게임, 빌드 최적화 중심의 RPG, 심지어 방치형 게임까지도 체계화하고 효율화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재생산하는 기제로 읽힐 수 있다(가령 시민을 행복도·세수 같은 지표로 환원하는 도시 시뮬레이션, 인구를 투입-산출 함수로 다루는 공장 자동화 게임처럼). 다만 이 지점에서 하인스의 논증이 완전히 매듭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게임에서의 수치화가 곧 우파적 사고로 이어진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스스로 선을 긋지만, 정작 글 전체는 그 수치화·위계화 자체를 우파적 세계관의 증거처럼 다룬다. 이 둘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메울 것인가는 논문이 답하지 않고 남겨둔 질문이다. 인종차별과 '탈인종적 인종주의'를 가르는 선도 마찬가지다. 하인스는 후자를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차이 사이의 적대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남겨두는 태도"로 정의하지만, 어디까지가 판타지 장르 특유의 서사적 관습(종족 간 갈등은 이야기를 굴러가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이고 어디부터가 정치적 세계관의 침투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이 모호함이야말로 이 논문이 완전한 논증이라기보다 하나의 도발적인 질문에 가까운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질문 자체는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우리가 게임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자유로운 설계'와 '필연적인 적대'의 조합이, 정말 우연의 산물일 뿐일까? 아니면 게임이라는 매체가 애초에 그런 조합을 편애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걸까? 하인스의 논문은 이 물음에 완결된 답을 주기보다, 우리가 즐기는 게임의 재미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한 번 더 의심해 보게끔 만든다. 참고문헌 Hines, M. (2026). Racecraft à la carte: Fantasy assemblages in Age of Wonders 4. Game Studies, 26(2). https://gamestudies.org/2602/articles/hines Tags: 인종주의, 기호론, 4X, 제국주의, 우생학, 에이지 오브 원더스 4, 4X 전략게임, 게임과 인종주의, 판타지 종족, 부유하는 기표, 논문세미나, Age of Wonders 4, 4X Strategy Games, Race in Video Games, Game Studies, Stuart Hall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게임으로 사랑을 담아 내기 -

    <댓 드래곤 캔서>가 ‘게임’으로 제작된 이유는 무엇일까? <댓 드래곤 캔서>는 게임으로 제작되었지만, 당시의 조류에 있어서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은 왜 반드시 게임이여야 했을까? < Back 게임으로 사랑을 담아 내기 - 16 GG Vol. 24. 2. 10. ※ 본 글은 의 주요한 게임의 줄거리 및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사랑을 담은 게임 (이하 < 댓 드래곤 캔서 >) 는 2016 년 Numinous Games 의 소규모 팀에 의하여 개발된 자서전 형태의 게임이다 . 라이언 그린 (Ryan Green) 과 에이미 그린 (Amy Green) 은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게임을 제작하였는데 , 그들은 자신들의 셋째 아이인 조엘 (Joel) 이 암을 투병해 나가는 모습을 게임으로 담아내었다 . 게임의 제목인 ‘ 댓 드래곤 캔서 ’ 는 ‘ 암 (cancer)’ 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른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주기 위하여 고안된 상징적 장치로 , 조엘이 겪고 있는 암을 무찔러야 할 ‘ 드래곤 ’ 그리고 투병 중인 조엘을 ‘ 용사 ’ 로 묘사한다 ( Green, 2017). 그림1, 2. 용사 조엘과 드래곤(Numinous Games) 그린 부부의 셋째 아들인 조엘은 생후 1 년 만에 뇌암을 진단받았다 . 당시 의사들은 아이의 수명이 4 개월 남짓 밖에 남지 않았다고 판단하였지만 , 조엘은 치료를 통해 3 년을 더 살았고 4 살이 되던 해에 숨을 거두었다 . 추가적으로 얻게 된 3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린 부부는 “ 사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법 ” 을 배웠으며 이러한 경험을 전달하기 위하여 < 댓 드래곤 캔서 > 를 제작했다 (Aki, 2016). 그림3, 4. 라이언과 그의 아들 조엘(Robertson, 2016; Numinous Games) 게임은 간단한 포인트 앤 클릭 방식으로 1 인칭과 3 인칭을 오가며 진행된다 . 플레이어는 그린 부부의 시점에서 매 순간을 조엘과 함께하게 되는데 , 이로서 불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와 그를 돌보는 부모의 경험에 참여하게 된다 . 게임을 구성하는 14 개의 작은 챕터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보다는 특정 상황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 각 챕터들을 통해 플레이어는 투병 중인 아이와 함께하며 얻게 되는 기쁨과 , 불안 , 사랑과 , 의심 , 절망 등의 복합적인 감정들을 경험한다 . ‘게임’으로 ‘사랑’을 담아내기 조엘과 함께한 시간을 심리적으로 기록한 < 댓 드래곤 캔서 > 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담아낸 게임이다 . 그린 부부가 실제로 느꼈던 조엘에 대한 당시의 ‘ 사랑 ’ 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임인 셈이다 . 한편 , ‘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 은 이야기를 다루는 모든 미디어에서 가장 흔한 주제 중 하나이다 . 자식에 대한 부모의 절절한 사랑을 다루는 글이나 영화는 특히나 넘쳐 난다 . 그럼에도 개발자들은 ‘ 게임 ’ 으로 자신들의 ‘ 사랑 ’ 을 담아 내길 선택했다 . 그렇다면 , < 댓 드래곤 캔서 > 는 왜 하필 게임이었을까 ? 제작자인 그린 부부가 자신들을 사랑을 기록하기 위해 ‘ 게임 ’ 이라는 매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 그것은 왜 영화나 소설이 아니었을까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2016 년 SDF 1) 에서 진행된 라이언 그린의 짧은 강연으로부터 엿볼 수 있다 . 2) 해당 강연에서 라이언은 제작 중 겪은 어려움을 바탕으로 , 게임이라는 매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이 어떻게 사랑을 담는 매체가 될 수 있는지 , 그리고 되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 “게임은 재미를 위한 매체 ” 라는 풍조 속에서 < 댓 드래곤 캔서 > 는 환영 받을 수 있는 주제는 아니었다 . ‘ 시한부 아이의 투병기 ’ 는 이용자들이 쉽게 즐기기에는 너무나도 어둡고 무거운 주제였기 때문이다 . 이러한 괴리는 투자금 확보에 있어 큰 장애가 되었는데 , 제작자들은 왜 이 새로운 주제가 게임으로서 가치가 있는지를 계속해서 증명해야만 했다 . 3) 여기서 라이언 그린은 게임이라는 미디어가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이야기 하며 < 댓 드래곤 캔서 > 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 먼저 , 게임에 대한 그의 정의는 다소 광범위하다 . 라이언에 따르면 , 게임은 ‘ 인터렉티브 미디어 ’ 로 수용자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독특한 매체이다 . 즉 , 어떠한 행동 (action) 을 취하는 것이 게임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 게임 제작자들은 특정한 행위성을 만들어 내고 , 수용자는 게임을 플레이하게 됨으로써 제작자가 정한 특정한 행위를 수행하게 된다 . 4 ) 한편 , 대부분의 게임들이 따르는 행위성은 매우 한정적이다 . 그들은 특정한 미션을 제시하고 , 플레이어의 행위에 대한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는 형식을 취한다 . 그리고 , ‘ 성과 ’ 라는 기준으로 플레이어의 ‘ 행위 ’ 를 판단하는 위와 같은 게임들은 너무나도 신자유주의적이다 . 수많은 게임들이 장애물을 극복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중요한 행위의 척도로 설계되지만 , 이는 성취 지향적이고 자기책임 논리에 복속되어 있는 미디어의 한 형태일 뿐이다 . 결국 인터렉티브 미디어는 어떤 행위성에 대한 설계이며 , 그 행위성은 사회의 특정 가치를 담고 있다 . 그렇다면 , 게임이 담아낼 수 있는 행위성 역시 다양할 것이다 . 게임은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 될 수 있고 ,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며 ,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풀고 그를 사랑하는 것 역시 될 수 있다 . 즉 , 게임이라는 매체가 담을 수 있는 행위는 무궁무진하다는 말이다 . 여기서 , 라이언 그린은 인터렉티브 미디어가 포용적이기 위해서는 미디어가 제시하는 행위가 사회 공동체적 가치와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성공이나 성취를 위한 행위 보다는 사랑과 배려 , 관용을 베푸는 게임 , 즉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게임을 설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 그리고 , < 댓 드래곤 캔서 > 는 정확히 이러한 주장과 맞닿아 있다 . 그림5. 풍선을 타고 다른 행성으로 떠나가는 조엘(Numinous Games) <댓 드래곤 캔서 > 는 본질적으로 성취가 불가능한 게임이다 . 약 두 시간 남짓의 플레이 타임 동안 플레이어는 다양한 활동들을 하지만 , 그 어떤 행동도 조엘의 병을 이겨내게 할 수 없다 .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 암으로 인한 조엘의 죽음 ’ 이라는 하나의 결말로 나아갈 뿐이다 . 실제로 , 플레이 과정 중 이용자들이 하는 모든 액션은 성공이나 실패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 < 댓 드래곤 캔서 > 에서 유저들은 아이와 놀아주고 ,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 편지를 읽는다 . 모두는 ‘ 실패가 불가능 ’ 한 활동들이다 . 이는 미니게임에서 역시 마찬가지인데 , 카트 라이딩에는 제한 시간이 없으며 , 드래곤을 무찌르고자 나아가는 용사 조엘은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나아가며 미션을 완수한다 . 행위에 대한 적절성 보다는 무언가를 한다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 이와 같이 , < 댓 드래곤 캔서 > 는 ‘ 성취 ’ 가 아닌 ‘ 사랑 ’ 을 위해 디자인 된 게임이다 . 한 방의 역전이나 선택에 따른 긴장은 없지만 , 플레이어들은 ‘ 불치병에 걸린 아이와 함께 산다 ’ 라는 상황 안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을 수행하며 전혀 다른 상황 안에 있는 사람들에 공감할 기회를 얻게 된다 . 이러한 접근은 게임이란 매체 자체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에 기여하였는데 , 제작자들은 플레이어가 무언가를 반드시 얻어 내지 않더라도 즐길 수 있는 디자인을 선보임으로써 ‘ 혁신성 (Most Innovative)’ 분야의 상을 수상하였다 . 그림6,7. 미니게임 장면들(Numinous Games) 여기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 < 댓 드래곤 캔서 > 가 ‘ 게임 ’ 으로 제작된 이유는 무엇일까 ? < 댓 드래곤 캔서 > 는 게임으로 제작되었지만 , 당시의 조류에 있어서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지도 않았다 . 그럼에도 그것은 왜 반드시 게임이여야 했을까 ? 이는 제작자들이 담아내고자 한 것이 아가페 (Ageape) 적 사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 ‘ 헌신적인 거룩한 사랑 ’ 을 의미하는 아가페는 대상에 무조건적으로 베풂으로써만 실천된다 . 시한부 아이를 돌보는 일은 아이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애정을 베푸는 것이다 . 이러한 의미에서 게임은 아가페적 사랑이 가능한 유일한 매체이다 . 게임은 플레이어가 직접 교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터렉티브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 5) 이처럼 , < 댓 드래곤 캔서 > 는 사랑의 매체로서 게임을 보여준다 . 게임은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그냥 주는 것 역시 될 수 있다 . 그리고 , 사랑은 순간적인 감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행동을 통해 표현하는 적극적인 행위이기에 , 행위성을 통해 보여지고 게임을 통해 담아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 참고문헌 라이언 그린 (2016, 5, 20). 친밀함을 위한 게임 디자인 : 댓 드래곤, 캔서 [That Dragon, Cancer]. . URL: https://www.sdf.or.kr/archive/2016/ko/video/10000000347 Aki, A. (2016, 1, 22). ‘That Dragon, Cancer’: Q&A With Developer Ryan Green. Voice of America. URL: https://blogs.voanews.com/techtonics/2016/01/22/that-dragon-cancer-qa-with-developer-ryan-green/ Eilon, S. (2018, 7, 21). That Dragon, Cancer. IEEE: Technology and Society. URL: https://technologyandsociety.org/that-dragon-cancer/ Green, A. (2017). A video game to cope with grief. TED. URL: https://youtube.com/watch?v=vWJwa7lntTs Tanz, J. (2016, 1). Playing for Time. WIRED. URL: https://www.wired.com/2016/01/that-dragon-cancer/ Robertson, A. (2016, 2, 12). That Dragon, Cancer: the video game that takes death seriously. The Guardian. URL: https://www.theguardian.com/technology/2016/feb/12/that-dragon-cancer-video-game Stafford, P. (2015, 4, 16). A GAME ABOUT CANCER, ONE YEAR LATER. Polygon. URL: https://www.polygon.com/features/2015/4/16/8374481/that-dragon-cancer 1) SDF(SBS D포럼)는 SBS가 사회공헌을 목적으로 실시해온 지식나눔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2) 강연에 대한 전체 내용은 다음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sdf.or.kr/archive/2016/ko/video/10000000347 3) <댓 드래곤 캔서>의 투자금 유치에 있어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예술로서의 게임’ 논쟁으로 유명한 캘리 산티아고(Kellee Santiago)이다. 그녀는 <댓 드래곤 캔서>가 가지는 가능성에 주목하여 투자금 유치에 적극적인 조력자가 되어주었다(Stafford, 2015). 이후 개발자들은 클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Kickstarter를 통해 약 3,700명의 후원자로부터 100,000달러 이상을 모금 받아 게임을 제작하였다. 때문에 게임 내부에는 클라우펀딩에 참여한 사람들의 사진 및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4) 이는 게임을 행위성의 매체로 본 티 응우옌(Nguyen, C. Thi)의 주장과도 닿아 있다. 5) 실제로, 제작자들은 조엘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 보다는 그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방점을 맞추었다. 조엘을 그대로 남기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세세한 묘사에 효과적인 영화나 수필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이연우 함께하는 게임에 관심을 가지고 게임의 관계성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게임으로 다함께 즐거워지길 바랍니다.

  • <시티즌 슬리퍼>: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인류는 늘 유한성에 저항해 왔다. 이러한 저항은 단지 물리적인 제약을 극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착화된 이념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유한성에 대한 저항은 어떤 의미인가? 이 글에서는 저마다의 '몸에 새겨진 꿈'으로부터 그 답에 다가서고자 한다. 여기에서 몸은 지극히 사회적이며 개인적인 신체를 뜻한다. 그리고 꿈은 희망과 절망을 의미한다. ‘꿈을 꾸는 것’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자,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헛된 기대이기 때문이다. < Back <시티즌 슬리퍼>: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22 GG Vol. 25. 2. 10. ※ 스포일러가 간접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 슬리퍼(Sleeper) [1] 인류는 늘 유한성에 저항해 왔다. 이러한 저항은 단지 물리적인 제약을 극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착화된 이념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유한성에 대한 저항은 어떤 의미인가? 이 글에서는 저마다의 '몸에 새겨진 꿈'으로부터 그 답에 다가서고자 한다. 여기에서 몸은 지극히 사회적이며 개인적인 신체를 뜻한다. 그리고 꿈은 희망과 절망을 의미한다. ‘꿈을 꾸는 것’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자,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헛된 기대이기 때문이다. 이 둘은 자신의 꼬리를 물고 놓지 않는 우로보로스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그러므로 몸에 새겨진 꿈이란, '나'에게 얽매여 있는 내외부적 요인으로부터 자유를 꿈꾸는 여러 주체들의 염원이다. 신체와 사회라는 이중벽 모든 생명은 신체를 갖고 살아가는 한 여러 한계를 지닌다. 인간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을 비롯해 사회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복합적인 제약을 지닌다.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난 일들도 결국 '나'를 제외한 세계에 연루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 미래에, 나의 신체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이러한 상상은 사실 공상 과학 영화나 문학, 그리고 게임에서 자주 다루어져 왔다. 주로 인간의 신체를 영구적으로 개조하거나 안드로이드에 의식을 이식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는 단지 기술 발전에 대한 인류의 환상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신체에 내재한 사회적 의미를 재고하게 한다. 새로운 신체를 획득하는 것에 대한 상상은 나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조망하고, 나아가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어떤 조건들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즉 한정된 신체를 넘어선다는 것은 그저 강력한 힘이나 영생을 얻고자 하는 일만을 지시하진 않는다. 게임 개발사 점프 오버 디 에이지(Jump Over the Age)의 <시티즌 슬리퍼(Citizen Sleeper)>(2022)는 앞서 서술한 논의를 아우르는 게임이다. 이 게임은 자신의 신체와 출신지를 떠나 눈(eye)이라는 도시에 이제 막 도착한 '슬리퍼'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슬리퍼는 인간의 의식과 로봇의 몸을 가진 존재다. 그런데 눈의 시민은 대다수가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어 슬리퍼는 철저히 외부인으로 취급된다. 그는 자유와 행복을 찾아 이곳으로 도망쳐 왔지만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꿈을 간직한 채 삶을 꾸려 나가는 것이 그의 목표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슬리퍼라는 '주체'를 경험할 수 있도록 TRPG(Tabletop Role-Playing Game) 기반의 내러티브적 설정을 활용한다. 즉 시스템의 불가변성과 플레이어의 자율성을 동시에 수용함으로써, 견고하고 거대한 사회에 맞서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이 게임의 시스템은 현대 사회에 내재한 이데올로기를 투사하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신체와 사회로 쌓아 올려진 이중벽을 마주한 채 슬리퍼로서의 꿈을 지켜내야 한다. 시스템 사이를 떠도는 ‘나’ TRPG 시스템은 가상 세계에서 통용되는 공동의 규칙을 갖는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그 범위 안에서 행동을 수행해야 한다. <시티즌 슬리퍼>의 주요 규칙은 다음과 같다. 우선 사이클마다 무작위로 주사위가 부여되며, 그 값은 슬리퍼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슬리퍼의 몸 상태가 나쁘면 주사위의 개수가 줄어들고 행동 성공률이 낮아진다. 주사위는 돈을 벌고, 노동을 하고, 사람을 사귀는 등 행동하는 데에 쓰인다. 반복이 불가능하거나 연한이 정해진 행동이 있다. 주사위를 모두 소진하면 더 이상 행동을 수행할 수 없으며 사이클을 종료해야 한다. 방금 살펴본 것들은 플레이어가 개입할 수 없는 부분으로 제한적이다. 또한 게임의 시스템은 내러티브 안에서 심리적인 제약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과거 노예 로봇이었던 슬리퍼는 눈에서 사회적 약자에 속한다. 이는 에피소드 초반부터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플레이어는 매사에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여러 번 고민한다. 간혹 도와주는 사람이 등장하지만, 눈의 사회는 그들의 호의를 의심하게 만든다. 게다가 슬리퍼의 몸체는 의도적 구식화를 겪고 있다. 일정 기간 내에 제조사에서 판매하는 전용 영양제를 투여하지 않으면 기력을 잃게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곳에서는 쉽게 구할 수가 없다. 이로써 슬리퍼의 컨디션은 급격히 나빠지고 행동 성공률도 낮아지게 된다. 눈의 사회는 슬리퍼의 주체성을 서서히 마비시킨다. 앞서 살펴본 두 요소는 슬리퍼의 행동에 제약을 준다. 그러나 플레이어는 이 모든 과정 사이에 자신의 관점을 투영함으로써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다. 우선 <시티즌 슬리퍼>는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하기에 앞서 각각의 캐릭터가 가진 능력과 성격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한눈에 이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정보다. 그러므로 플레이어는 자신을 중심으로 캐릭터를 바라보게 된다. 즉 플레이어의 내면이 캐릭터의 자아에 투사되는 것이다 [2] . 그리고 이는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플레이어이자 캐릭터인 '나'를 통해 슬리퍼의 주체성으로 발현된다. 또한 눈이라는 낯선 사회로의 진입은 플레이어와 슬리퍼에게 동등하게 주어진다. 예측 불가능한 삶에 갑작스럽게 불시착한 그들은 서로 결속을 다진다. 그뿐만 아니라 플레이어는 게임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상황에 즉각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에피소드는 주로 등장인물 간의 대화로 진행되는데, 이때 플레이어는 슬리퍼의 태도와 행동을 직접 선택할 수 있다. 심지어 주어진 임무를 모두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 초반에는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곳에 점차 적응하면서 진취적인 태도로 나서게 된다. 이처럼 <시티즌 슬리퍼>의 시스템은 플레이어의 행동에 일정 부분 제약을 주지만, 결정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플레이어에게 거부와 순응, 저항의 강도, 가치의 추구 등에 대한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슬리퍼로서의 꿈을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삶의 주도권은 자꾸만 사회로 되돌아가려 한다. 슬리퍼라는 존재가 가진 근원적인 한계일까? 이곳에서는 '내일'을 맞이할 권리가 이상하리만치 멀게 느껴진다. 슬리퍼, 꿈의 의미 <시티즌 슬리퍼>는 개인이 대항할 수 없는 사회의 불가변성을 시스템의 중심에 두었다. 그리고 신체가 가진 제약도 결국 그로부터 비롯됨을 플레이어 스스로 인지해 나가도록 했다. 이 게임에서의 자율성은 슬리퍼의 행동에 대한 결정권을 넘어, 사회에 내재한 비판 거리를 취할 수 있는 권한으로 확장된다. 특히 에피소드마다 제공되는 시적인 글은 슬리퍼에 대한 이해를 도모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가 함축하는 의미를 다각도로 바라보게 한다. 이 글의 마지막 장에서는 처음에 제시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인류가 한정된 신체로부터의 해방을 염원해 온 이유에 조금이나마 다가서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게임을 플레이하며 발견한 '슬리퍼'와 '꿈'에 담긴 의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슬리퍼는 인간의 신체로부터 벗어난 존재다. 즉 과거에 지니고 있던 어떤 제약에서 이미 벗어나 있다. 그럼에도 슬리퍼는 신체와 사회라는 이중벽에 또다시 직면했다. 슬리퍼의 본체인 인간은 떠나온 곳 어딘가에 여전히 잠들어 있다. 즉 슬리퍼는 살아 움직이는 누군가의 꿈인 것이다. 또한 슬리퍼에게는 인간이었던 시절의 기억이 데이터화되어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다. 이는 대체로 무더움, 차가움, 쓰라림, 딱딱함 등 '로봇의 몸으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감각'에 대한 것들이다. 슬리퍼는 몸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 날 때마다 감각과 사고 사이에 지연을 느껴 혼란스러워한다.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몸에 대한 감각은 슬리퍼의 기억 안에 정보로만 남아 있다. 그렇다면 슬리퍼는 인간인가, 로봇인가? 사실 이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슬리퍼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눈의 사회, 그리고 타인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물론 플레이어에게는 이에 대항할 권리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 또한 슬리퍼에 내재한 꿈으로 흡수되고야 말았다. 결국 한정된 신체로부터의 해방은 '나'를 규정하는 사회,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집단적 이념에 균열을 내는 일이다. 즉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스스로 확립하고 지켜내기 위한 예사로운 투쟁이다. 사실 슬리퍼의 꿈은 정말 사소했다. 그는 단지 살고 싶었다. <시티즌 슬리퍼>의 결말은 그 꿈이 희망이었는가 절망이었는가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저 '내일을 꿈꿀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메시지가 암시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슬리퍼는 모순된 존재다. 누군가의 이루어진 꿈이 다시 꾸는 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의 속성은 본래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희망과 절망, 현실과 이상, 기대와 좌절,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돌고 도는 것이 바로 꿈의 의미다. 저마다의 몸에 새겨진 꿈은 이 궤도를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에서 깨어나지 않아도 된다. [1] 이미지 출처: https://www.pointnthink.fr/en/interview-gareth-damian-martin-2/ [2] 이승제, 정의준, 김정애, “ 청소년 대상 TRPG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위한 콘텐츠 개발연구 -청소년의 정서적 외로움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 겨레어문학 제73집, 2024, p.61-62.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큐레이터) 박정서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시각예술 분야에서 전시, 비평, 워크숍을 한다. (비)과학에 관심을 두고 뉴미디어 아트와 비디오게임을 탐구한다. 최근 참여한 프로젝트로는 연구 <기이한 게임과 으스스한 게임>(2024, 서울문화재단 RE:SEARCH), 전시 (2024, WWW SPACE), 워크숍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게임 비평>(2024, 아트코리아랩 아트랩클럽), 전시•워크숍 (2024, 하자센터 미디어아트 작업장) 등이 있다.

  • 김갑환에서 도깨비까지 : 게임 속 한국의 코드는 누가 써왔는가

    이 태도를 고민함에 있어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게임이 주로 미국과 일본 위주로 개발-발전해 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게임 속의 한국이란, 한국 자신이 만들지 않은 이상은 대부분이 미국과 일본의 시선이게 마련이다. 또 하나는 시간적인 변천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의 경우, 거리가 먼 한국에 대한 정보가 적거나 고증의 필요성이 적었던 것이 2010년대 이전이다. < Back 김갑환에서 도깨비까지 : 게임 속 한국의 코드는 누가 써왔는가 31 GG Vol. 26. 8. 10. 2020년, 인벤의 정재훈 기자는 “게임 속 ‘한국’을 보고 싶다” 는 칼럼 기사를 썼다. 이 칼럼은 한국의 요소가 게임에서 활용된다면 어떤 것이 가능할까를 질문하고 사유하는 마케팅적 내용이다. 그래서 칼럼의 핵심 질문은 이 부분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앞서 우리는 모른다. 세계가 한국 문화, 한국 역사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지, 어떤 부분에 매력을 느낄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닌자`는 팔리고, `사무라이`도 통한다. `삼국지`도 동아시아권에서 엄청나게 소비된다. 그런데 한국적 요소 중 세계에서 이렇게 통하는 게 하나라도 있던가?” 정재훈 기자 자신이 이 질문에 답을 하면서 꼽은 필요 조건은 “코드와 완성도”이다. 완성도-만듦새는 엄밀히는 의미가 없는 지적일 수 있다. 날카로운 문화 코드를 찾아내어 반영했어도, 매력적으로 반영하지 않았거나 게임 디자인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영향력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심은 ‘코드’다. 중국의 쿵푸, 일본의 닌자/사무라이와 같은, 국가 문화에 부여되는 대표 이미지에 대한 고민이다. 정재훈 기자의 결론은, 무엇이 히트하여 대표 코드로 호명될지 알 수 없으니 이것저것 계속해서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완성도 높은 코드 구현이 다양하게 시도되다 보면 그 중에서 몇 가지는 한국의 대표 이미지로 자리잡을 것이다. 비단 게임에만 적용되지 않을 이 생각은 ‘한국을 보여주겠다’, 즉 1인칭 중심의 사고가 아니라 ‘한국을 무엇으로 보는가’ 라는 타인 중심의 사고다. 자신을 규정할 권리는 타인에게도 있으므로, 그리고 마케팅에서는 그 타인이 중심이 되어야 하므로 옳은 방향이다. ‘Do you know...?’가 아닌 ‘How about this?’의 질문이다. 수용자의 해석에서부터 출발하므로 오해와 오독도 일단 긍정하며 출발하는 태도다. 이 태도를 고민함에 있어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게임이 주로 미국과 일본 위주로 개발-발전해 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게임 속의 한국이란, 한국 자신이 만들지 않은 이상은 대부분이 미국과 일본의 시선이게 마련이다. 또 하나는 시간적인 변천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의 경우, 거리가 먼 한국에 대한 정보가 적거나 고증의 필요성이 적었던 것이 2010년대 이전이다. 고증이 필수 업무인 역사 게임에서의 한국은, 엄밀히 말하면 한국이 아니고 과거의 한국이기에 되도록 생각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국성’의 표현으로서 한국을 쓴다거나, 한국을 표현할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투박한 형태로 표현하다가, 2010년을 전후하면서부터는 서서히 묘사에 구체성이 생기기 시작한다. 특히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신드롬 수준의 글로벌 유행을 타면서 촉발된 K-컬처의 전파가 기점이 된다. 일본은 이런 변곡점이 필요하지 않았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인한 오해와 왜곡은 있을지언정, 오래 쌓인 교류의 역사가 있기에 그 정도는 다른 문화권에 비해 적었다. 외국 중에서 가장 한국을 친숙하게 여기는 일본이, 한국을 게임에서 다루면서 선택한 대표 코드는 태권도였다. 태권도 90년대에 아케이드 격투 게임의 붐이 일면서, 일본산 격투 게임에는 한국 시장을 노리는 겸 하여 들어가는 한국인 캐릭터가 있었다. 94년 ‘통쾌 간간 행진곡’의 이해권, 96년 ‘풍운 슈퍼 태그 배틀’의 김수일, 98년 ‘소울칼리버’의 성미나와 황성경이 등장했다. 당나라 대도술을 조선에서 이어받아 쓴다는 설정의 소울칼리버 캐릭터들은 홍윤성 등의 파생 캐릭터로 이어졌으나, 가장 큰 성공은 태권도 사범으로 등장한 92년 ‘아랑전설2’의 깁갑환이다. 태권도 한국의 상징, 김갑환 그리고 깁갑환은 수많은 파생 캐릭터를 만들어내며 확장했다. 이후 아랑전설 시리즈와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에는, 아들인 김동환과 김재훈, 스승인 강일, 동문인 전훈과 이진주 등의 캐릭터가 깁갑환의 태권도 코드를 확장한 결과로서 등장했다. 여기에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에서 처음부터 깁갑환의 서브 캐릭터로 등장한 장거한과 최번개 역시 설정상으로는 깁갑환의 태권도 제자라는 연결점이 있으며, 아예 ‘풍운 태그 배틀’의 김수일 캐릭터도 이 계보로 흡수되었다. 태권도 코드는 철권 시리즈의 백두산과 화랑 두 캐릭터에도 구현되었고,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4’의 한주리로도 이어졌다. 다만 한주리의 경우에는 태권도 코드만이 다른 캐릭터와의 공통점일 뿐, 다른 설정은 철저하게 한국 태권도 캐릭터의 클리셰를 비켜간 악역 캐릭터여서 전형성은 적다. 장르적으로 김갑환의 계보에 속하는 백두산과 화랑 ‘한국인 여성’이라는 것만 결정된 상태에서는 김연아 이미지도 고려되었으나 거미 테마의 태권도 악녀라는 컨셉으로 결정된, 한주리 하지만 깁갑환, 화랑, 한주리가 등장하는 스테이지의 배경은 일본인이 인식한 한국의 대표 공간이 엿보인다. 소울칼리버와 같이 역사적 과거 시점의 게임에서는 스테이지로 사찰과 같은 전근대 건물의 공간이 나오는데, 이 건축 코드가 현대 시점의 게임에서도 주로 사용되었다. ‘소울칼리버 2’에서의 성미나 스테이지 ‘킹 오브 파이터즈 96’에서 김갑환과 한국팀의 스테이지. 김갑환의 경우, 아랑전설에서는 숭례문, 김갑환의 도장 등이 스테이지로 나왔다. ‘철권 3’에서의 화랑 스테이지. 백두산과 화랑은 대부분 이런 전근대 건물을 스테이지로 썼다.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4’에서의 한주리 스테이지. 사찰 근처의 장터다. 전근대 건축물의 고풍스러움은 일본 제작사 입장에서는 익숙하면서 약간 다른 느낌, 즉 ‘어느 정도의 친근함’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동북아시아 혹은 나아가 동아시아에서는 그런 느낌이겠지만, 비 동아시아 권역에서는 매우 이국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인데, 그런 경우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사용법에서 볼 수 있다. 아제로스의 수많은 종족이 이룩한 다양한 문화를 구현하기 위해 제작사 블리자드는 현실 세계의 각종 문명에서 디자인을 가져왔는데, 한국의 건축은 나이트 엘프의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 참조된 대상 중 하나다. 시작 지역에서 대도시 다르나서스로 들어가는 성문은 남대문을 그대로 가져왔으며, 나이트 엘프의 건축물 중에는 석가탑과 똑같은 구조물이 있으며, 몇몇 건물은 전작인 ‘워크래프트 3’에서의 디자인과 약간 달라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한국식 처마를 활용했다. 다르나서스의 성문 군대 고풍스러운 옛 건물을 배경으로 태권도를 수련하는 이미지만으로는 외부에서의 한국이 구성되지 않는다. 현재의 한국을 이루는 요소 중에는 휴전 국가, 그리고 징병제가 있다. 이 요소는 일본의 게임 제작자들에게 일종의 판타지로 작용한 것인가 싶다. 철권 시리즈의 화랑은 3편 이후 영장이 나와 입대를 했고, 4편 직전에 탈영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러스트를 보면 병사 계급인데 권총을 쓰고, 실제 무력 사용 작전에 투입되고, 탈영한 화랑을 잡기 위해 완전무장을 한 병력들이 투입되는 등 현실과는 아득한 거리에 있는 묘사가 나온다. 특수부대는 부사관 위주이고 보통 징집병이 가지 않으며, 저 복장은 대체 무엇이며 등등의 의구심이 든다. 비단 일본만 한국군 요소를 오해하고 있지는 않다. 2014년, 김상민은 연구 「미국 문화에 나타난 한국이미지: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디지털 게임을 중심으로」에서 여러 미국산 전쟁 게임에 등장한 한국군 요소를 들여다봤다. 소련이 사라진 후 주적의 자리에 올릴 여러 국가 중 하나로 북한이 선택되었고, 그리하여 한국군 혹은 한국군과 연관 있는 요소가 묘사되는 경우들이다. 대부분은 중요한 이해의 대상이 된다기보다는 유닛의 일종으로서 기능한다. 김상민, 「미국 문화에 나타난 한국이미지: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디지털 게임을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논총 35권, 인문과학연구소, 2014. 04년 ‘고스트 리콘 2’의 주적은 쿠데타를 일으킨 북한 내 강경파 군부를 제거하기 위해 미군이 침투하는 내용이다. 05년 ‘스플린터 셀: 혼돈 이론’은 같은 전쟁, 즉 2차 한국 전쟁을 다룬다. 그래서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한반도의 도시가 스테이지로 주어지는데, 북한과 북한군의 묘사는 중국풍이 많이 느껴지고, 스토리상 남북한의 전쟁을 일본의 한 극우 관료가 이간책으로 조장했다는 내용은 오히려 남북한을 서사의 중심에서 탈락시켰다. 현수막과 간판에 적힌 어색한 한국어 단어는 악명이 높다. 07년 ‘로그 워리어’는 원작 소설의 베트남을 북한으로 억지로 바꿨고, 북한의 미국 침공을 다룬 11년의 ‘홈프론트’는 발전된 몰이해를 보여줬다. ‘홈프론트’의 북한은 냉전 시대의 소련을 대체하는 역할이고, 대한민국은 북한의 팽창 정책에 희생당하는 역할이어서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홈프론트의 최초 기획은 중국이 북한, 나아가 남한까지 손에 넣고 일본과 호주를 넘어 미국까지 도달하였기에, 향토 방어(homefront)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배급사의 우려에 이를 북한으로 바꾸는 바람에 핍진성을 하나도 획득하지 못한 게임이 되어버렸다. 중국을 억지로 북한으로 바꾸다 보니 적군의 무기 체계에 관한 고증은 물론이고, 통일을 이룩하고 정복전쟁에 나선 북한의 정식 국호 등의 디테일한 설정에 불명확한 구멍이 많다. 몰이해의 이유 중에는 가상 전장으로 쓰기 좋기 때문에 그 역할만 하면 된다는 식의 납작한 인식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 몰이해의 이면에는 역으로 한국군의 전투력에 대해, 마치 화랑의 군 복무 내용과 같이 고평가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11년의 ‘소콤 4’에는 한국군의 707 부대원들이 주요 캐릭터로 등장한다. ‘소콤 4’의 707 특임대 소속, 박윤희. 내란을 겪은 후의 한국에서 707 부대는 조금 다르게 다가오지만, 일단 한국군의 유력 특수부대로의 위상이 보이는 캐릭터다. 유능한 군인으로서의 한국군 이미지는 레인보우 식스 시리즈에서는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707 부대원은 물론이고, 12년의 ‘메달 오브 아너: 워파이터’에서 기용할 수 있는 한국군 UDT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서는 한국군이 은근히 등장하지 않고, 14년의 ‘콜 오브 듀티: 어드밴스드 워페어’에서 주요 적군으로 북한군이 등장하는 정도였다가, 26년 10월에 출시 예정인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4’에서 2차 한국 전쟁을 다루면서 한국군은 물론이고 한국 도시의 거리가 상당한 고증 수준으로 등장한다. 모던 워페어4는 굉장히 오랜만에 등장한 한국군 관련 전쟁 게임이라는 특징 외에도, 캐릭터 모델링 역시 인종 특성을 꽤 반영하여, 비 한국인 인종 인물과 확연히 구분이 된다. 이는 몰이해에 기반했거나 몰이해의 흔적이 보이는, 장기판과 장기말 정도로 인식되던 이전의 한국군 등장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다. 상당한 핍진성을 가진 간판이 눈에 띈다. 어쩌면 ‘오버워치’의 D.Va , 송하나 또한 한국군 계열의 캐릭터로 볼 수 있겠다. 메카닉 부대가 창설되고, 전투에서 메카닉 장비를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고, 그래서 메카닉 전투 게임에서 두각을 나타낸 프로게이머를 징집해 군인으로 삼았다는 설정에는 분명 그런 흔적이 있다. 그리고 동시에 송하나의 캐릭터는 또 다른 한국의 코드, 게임과 IT를 비롯한 첨단성을 보여준다. 군인 신분이라는 설정으로 군대 요소를, 프로 게이머 출신과 메카닉 파일럿이라는 보직으로 첨단성 요소를 띄는 송하나 D.Va . 사회에서는 연예인처럼 활동한다는 설정은 아이돌 산업의 요소도 있어 보인다. 첨단의 도시 문명 시리즈에서 한국 문명에 붙어나오는 특성이 대부분 과학 기술 쪽인 것은, 단순히 세종의 역사적 행적 때문만은 아니다. 깔끔하게 정비된 도시, 빠르게 보급된 대중 인터넷, 도시 곳곳에서 활용되는 각종 기계, 집단 주거 시설인 아파트가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한 주거 시설인 나라. 기술에 행정과 치안까지 결합되어야 가능한 상황에, 최신 매체인 게임에서 상위권을 휩쓰는 한국 선수들과 그들을 길러낸 PC방 같은 문화들이 이 이미지를 만들었다. 송하나 캐릭터만큼이나 이런 요소들을 하나에 담아내는 이미지는, 고층 건물이 빽빽하고 온갖 간판과 행인으로 가득한 야간의 대도시 거리다. 이는 사이버 펑크에서 애용하는 이미지가 되어 ‘사이버 펑크 2077’의 거리에서 한국어 간판이 등장하는 식으로도 사용된다. 간단히 압축하면 서울이고, 특히 강남이다. 서울은 비슷한 메갈로폴리스인 뉴욕과는 다른 선택지를 거쳐 비슷해졌다. 뉴욕의 반 정도 크기에 인구밀도는 6배가 되는 도시인지라, 서울은 용적률을 늘리는 방식으로 택했다. 높은 용적률과 인구밀도로 얻는 압도적인 유동 인구로 인해, 서울 혹은 서울과 유사한 대도시의 업장은 행인에 대한 홍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간판이 필요한 수많은 업장이 높은 용적률 공간을 가득 메우고, 그래서 건물의 외관에는 그 모든 업장의 간판이 무수히 붙는다. 여기에 광고용 간판이 추가된다. 간판 투성이의 크고 작은 건물이 연속되는 모습이 자본주의 도시 서울의 풍경이다. 이 도시는 24시간 잠들지 않는 불야성이다. 때문에 3단 점프를 액션의 기본으로 삼은, 17년작 ‘에이전트 오브 메이헴’은 근미래의 서울을 게임의 공간으로 삼았다. 게임에서 가장 많이 수행하는 동작은 여러 간판이 붙은 건물을 뛰어넘고 기어오르는 것이다. 비록 게임 자체의 기술력과 기획력 부족으로 인해 작중의 서울은 유동 인구가 보이지 않는 텅 빈 도시가 되었지만, 그런 도시를 달리고 뛰어오르는 액션은 뉴욕 시내에서 웹스윙을 하는 스파이더맨 게임의 체험과 본질은 같다. 잠들지 않는 도시에서의 질주다. 압축되었으면서도 메갈로폴리스인 사이버 펑크 대도시이면서도 전근대 건축물을 품고 있는 이 특성이 제작진의 구미를 당겼을 것 같다. ‘세인츠 로우: 더 서드’의 책임디자이너 스콧 필립스는 강남스타일의 뮤직비디오를 이 시리즈가 추구하는 톤과 비슷하다는 발언을 했다. 자본주의가 전제되어야 하는 첨단 도시의 불야성 이미지는, 그래서 오버워치와 에이전트 오브 메이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닥다닥 붙은 한글 간판의 형태는 97년의 슈팅 게임 ‘아인핸더’의 배경에서도 찾을 수 있고, 08년의 ‘GTA 4’에도 등장한다. 이미 사이버 펑크스러운 야경을 배경으로 쓸 때, 한국어 간판이 활용되는 경우가 97년에 있었다. ( 출처 ) 우리 입장의 시도 지금껏 열거한 세 가지가 아마도 한국의 이미지 중 게임에서 구현된 가장 큰 덩어리일 것이다. 물론 다른 장르의 예술 매체에서도 저 셋은 유효해 보인다. 그런데 이쯤에서 다시 최초의 질문, 정재훈 기자의 ‘우리는 아직 모르지 않나?’라는 질문을 다시 소환해 끼워넣어보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온다. 과연 저 셋뿐일까? 혹은, 우리는 저 셋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한국의 게임은 한국을 어떤 식으로 담아내길 원할까? 가장 자주 관찰되는 욕망은, 역시 한국이라는 공간을 게임 공간으로 그대로 사용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03년의 레이싱 게임 ‘시티레이서’와 06년의 레이싱 게임 ‘레이시티’는 당시의 서울을 게임 내에 구현하여 트랙으로 사용했다. 14년의 ‘클로저스’ 역시 서울을 비롯한 한국 곳곳의 거리를, 간판까지 그대로 구현하여 배경 이미지로 활용했다. 현재 개발 중에 있는 게임들은 더욱 과감하게 한국의 공간을 활용하려 시도한다. 클로저스의 배경으로 사용된 실제 거리를 정리한 유저도 있다. 메타버스 시뮬레이션인 ‘인조이’는 현재 세 개의 공간이 공개가 되었는데, 도원의 경우엔 서울 강남구를 모델로 하여 사실상 삼성동의 지리를 그대로 구현한 형태를 하고 있다. ‘낙원: Last Paradise’는 폐허가 된 여의도와 종로의 구현이 발표된 상태로, 탑골공원과 낙원상가가 게임 공간으로 쓰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펄어비스에서 개발 중인 ‘도깨비’ 역시 한국의 현재 공간을 게임 공간으로 옮겨놓으려 한다. 트레일러에서 보여준 흰고래 마을은 부산의 흰여울문화마을을 기반으로 만든 공간이다. 같은 시도를 하고 있는 ‘프로젝트 류’라는 오픈월드 RPG 개발 프로젝트도 있다. 현재의 한국 외에 과거의 한국을 소재로 하는 시도도 존재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이 가상의 조선에서 좀비를 등장시키는 설정으로 글로벌 히트를 친 경험, 그리고 이 드라마에 등장한 ‘cool hats’, 즉 갓, 전립 등의 각종 모자에 대한 열광은 중요한 힌트를 제공해주었다. 역사적 요소도 어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선비라는 코드는 중국의 협객과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스테레오 타입으로의 전환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한국의 과거 코드를 역사물이 아닌 게임에서 반영하기 좋은 장르는 역시 판타지다. 그래서 ‘검은사막’은 2023년에 진행된 ‘아침의 나라’ 업데이트를 통해 한국의 전통 요소를 디자인과 게임 플레이에 대거 도입했다. 그 결과 한양 육조거리와 궁궐이 게임 공간으로 들어왔다. 이 분야에서의 최근 도전은 개발 중인 ‘우치 더 웨이페어러’와 ‘프로젝트 윈드리스’가 있다. 전우치를 주인공으로 한 ‘우치 더 웨이페어러’는, 현재 얼리억세스 단계인 인디 게임 ‘전우치’와 혼동될 수 있지만, 훨씬 규모가 크다. 특히 트레일러로 미루어 보면, 도사인 전우치를 통해 한국의 과거 유교, 불교, 도교, 무속이 중심 요소로 등장할 것이 확실하다. ‘프로젝트 윈드리스’는 소설가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의 세계 설정을 가져와 제작 중인 게임이다. 이 설정 속에는 한국의 전통 문화에서 따온 요소가 가득하다. 도깨비라는 종족, 씨름이라는 스포츠, 한국식 궁술 등등. 과거 요소를 구현하기 위한 장르는 역사 아니면 판타지다. 이 계통에서의 다음 힌트는 이 두 게임의 결과물이 서로 다른 지점에서 보여주게 될 것이다. 정재훈 기자의 지적에 따르면 완성도가 성공 여부를 결정하겠지만, 힌트로서의 기능은 완성도와 별개로도 발휘될 것이다. ‘우치 더 웨이페어러’는 도사, 무당과 같은 전통 오컬트 요소가 중심이다. 이영도의 ‘새 시리즈’ 세계 속 도깨비를 비롯한 여러 요소가 글로벌 유저에게 어떻게 설명되고 이해될지가 기대되는 지점이다. 자신을 규정할 권한은 타인에게도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의 게임 창작자들은 한국의 현재와 과거에서 이런저런 요소를 찾아내고 있다. 이 요소들이 게임으로서 재배치된 후에, 한국 바깥의 사람들은 게임을 통해 어떤 이해와 오해를 하게 될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것 자체가 힌트이며, 동시에 그 이해와 오해를 거쳐 바깥에서 인식한 한국이 다시 그들의 게임 속에 담겨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그들의 인식이 김갑환, 북한과의 전쟁, 강남 빌딩과는 또 다른 부분에 이르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우리를 게임을 통해 체험하게 해줄 것이다. Tags: 게임 속 한국, 한국 재현, K-컬처, 김갑환, 태권도, 오버워치 D.Va, 검은사막, Korea in Video Games, Korean Representation in Games, K-Culture, Seoul in Game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보다 책임감 있는 재현을 실천하는 게임을 향해

    어떤 매체에 대한 담론은 해당 매체가 겨냥하는 수용자 또는 이용자가 어떤 존재이며 그들이 매체와 맺는 관계에는 어떤 의도들이 담겨있는 것인지에 대한 여러가지를 드러낸다. 북미와 유럽의 게임 관련 공공 담론에 있어 오랫동안 게임은 - 거칠게 말해 - 번쩍이는 컴퓨터 화면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빠져들 수 있는 오락에 하릴 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십대 소년들을 위한 것으로서 인식되어왔다. < Back 04 GG Vol. 22.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Ida Jørgensen Holds a PhD in game studies from the IT University of Copenhagen, Denmark where her research revolved around gender representation, game culture and games as media. Today she works as a postdoctoral researcher at the University of Southern Denmark. (Game Researcher) Bora Na A game researcher. Game-playing goes back quite a long way, but the first encounter with game studies came by chance, through a game course taken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Since graduating, has carried out research and writing centered on game history and culture, here and there. Contributed to The History of Games, The Theory of Games, and Mario, Born in '81, among others.

  • The Resonant Samurai: Historical Accuracy versus Market Appeal

    By now, the online backlash against the inclusion of Yasuke as one of two protagonists in the story has become somewhat infamous, if not tired, since outrage first erupted last year. Although the game had teased at the 2022 UbiForward as Codename Red, it wasn’t until the full reveal on May 15, 2024, with the cinematic trailer that the inclusion of Yasuke, as a co-protagonist, became clear. < Back The Resonant Samurai: Historical Accuracy versus Market Appeal 24 GG Vol. 25. 6. 10. ***이 글의 한국어 버전은 아래 URL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953c58c4-a26a-4e46-8aac-48c10227ca8b Introduction: Yasuke Enters the Franchise By now, the online backlash against the inclusion of Yasuke as one of two protagonists in the story has become somewhat infamous, if not tired, since outrage first erupted last year. Although the game had teased at the 2022 UbiForward as Codename Red [1] , it wasn’t until the full reveal on May 15, 2024, with the cinematic trailer that the inclusion of Yasuke, as a co-protagonist, became clear. [2] [3] For over two months, criticism swirled at design choices in both Western and Japanese circles, though the online discontent among segments of the more conservative Western audience specifically focused on the inclusion of Yasuke, [4] leading, among the many heated discussion threads, to harassment of members of the development team. On July 23rd, Ubisoft released a somewhat ambiguous statement about the context, backhandedly addressing global audiences by way of seemingly focusing on the Japanese Community, and reaffirming their commitment to overall authenticity . [5] * Figure 1: Yasuke as Protagonist This statement raises a number of concerns that articulate the controversy surrounding Yasuke, which taken at face value is about historical accuracy, but arguably has more to do with how this segment of the audience has been served by the franchise so far. As discussed by de Wildt and Aupers in a 2021 study focusing on the franchise overall and including dozens of interviews with former Ubisoft game directors and assorted senior developers, Assassin’s Creed overall privileges the marketability of any given setting. [6] That marketability is further contextualized by a audience that is disproportionately European and American (roughly 79% all of Ubisoft sales). [7] With that market in mind, Ubisoft has put to use a model they term the “marketing-brand-editorial burger,” where the core of the franchise must remain generally similar, while changing the sauce (the cultural setting) in order to draw in new or repeat clientele. [8] To that end, most of the franchise’s games have generally featured protagonists that are relatively uncomplicated to access for that core audience. For instance, Black Flag’ s Edward Kenway presents a European perspective into Nassau and Caribbean colonialism, while Assassin’s Creed II and Brotherhood engages with Ezio as a cultural insider in Renaissance Italy. [9] [10] [11] It also uses Ezio as a way to access the comparatively more distant Istanbul setting and culture in Revelations . [12] Even when protagonists are more complicated, as is the case for Connor Kenway in Assassin’s Creed III [13] and Adewale in Freedom Cry , [14] it is nonetheless the dominant European and American perspectives that orient the core structure of the games. [15] [16] So, why is that centering of the Western audience the case, and how does the controversy surrounding indicate breaks or continuities with this design trend? The answer, broadly, comes from a prioritizing of resonance, of expectations, above accuracy. The Question of Accuracy: Accuracy versus Expectations The question of historical accuracy in the Assassin’s Creed series, over its 18-year span, has been the subject of thousands of games journalism pieces, not to mention dozens of academic articles and book chapters. In early inroads, historical accuracy appears as a demand, essential for games to be taken seriously, as a pedagogical tool, an archaeological model or an account of events past. [17] This demand is draped over a number of design elements, such as the areas of the game included, in conjunction with the time period covered (along with the key events that the narrative focuses on). Perhaps most importantly, there is enduring concern and desire for the protagonists at the center of these games to match the historical period which audiences understand as a coherent whole. In other words, the setting, the story and the characters need to work in harmony, but whether that harmony adheres to historical truth is another matter altogether. [18] [19] When discussing historical accuracy, it would be useful to consider at what point is the media portrayal considered accurate. Is any deviation allowed? As Adam Chapman argues, there is a threshold where the game can be considered historically resonant, and that point is when individual players deem the historical aspects to match their pre-existing knowledge. [20] Evidently players tolerate deviation from historical fact as necessary to game adaptation in general, and especially in the context of Assassin’s Creed , where historical figures are repositioned as actors in secret conspiracies and ancient aliens plotlines. The fact that the franchise requires a genealogy of assassins and templars, in this case the Kakushiba Ikki (League of the Hidden) and the Shinbakufu (True Shogunate). The distortions necessary to make the armature of the franchise fit with the real persons that the game adapts are in most cases no more or less intensive than the depth provided to Yasuke. This level of adaptation or distortion is also in line with the degree of departure players can find in Odyssey [21] , for instance, with the portrayals of Sokrates and Aspasia of Miletus, [22] or Origins ’ Cleopatra. [23] The games are all, to put it bluntly, historical fiction, rather than history, an approach detailed by Ubisoft itself. [24] As they explain in their 2025 open letter, Yasuke presented an “ideal candidate” for the series formula that incorporates “fantasy elements” and that his “unique and mysterious life” is considered by the company to be a match for franchise patterns. [25] The idea of Yasuke as a candidate for cultural representation is in keeping with de Wildt and Aupers mentioned earlier, where marketing dominates broader choices, and where any narrative or representational choice “defers to the market and the largest possible audience.” [26] Franchise lead Jean Guesdon had previously spoken about tapping into popular zeitgeist to buttress franchise sales, so relying on Yasuke, a figure that has become increasingly visible in popular media over the past two decades makes sense. [27] Unlike Sucker Punch’s Ghost of Tsushima , [28] from which Shadows borrows much of its visual language and colour scheme, Assassin’s Creed provide Yasuke a proxy for audiences, not as a man of colour, but as an outsider to Japan.Yasuke is legitimate enough as a choice, given his historic presence, yet, like players, experience Japan as a foreigner becoming gradually integrated. [29] In other words, the game’s internal structure is positioned to open with, and favor an outsider perspective, over one of the other notable candidates audiences can imagine, including notable samurai like Musashi Miyamoto or Sasaki Kojiro. * Figure 2: Yasuke Criticized for Use of nanban (European) concepts in the context of Japanese warfare. This tension, between what a game company considers an ideal candidate, and what serves historical accuracy most, has been the subject of research over the past few years. [30] In my previous work on the subject, I locate this decision space as shaped by the tension between representation and identification. As film scholar Charles Acland notes, with respect to cinema, the work of identification is complicated and requires exiting one’s own reality to inhabit the specific circumstances of another person, in another place and time. [31] Identification, on the other hand, provides protagonists and perspectives ready-made for individuals to absorb into their experiential frame. This form of media production is positioned to produce the “that resonates with me” reaction, and has been the subject of academic critique concerning Assassin’s Creed for the better part of the last decade. So far, installments have been positioned to always provide that kind of easy identification, if not in main protagonists, then at least in circumstances and ideological positions. Yasuke, in that vein, presents a particular issue. His perspective provides an outside-in look at feudal Japan, but it also bucks against the generally empowering positions that series protagonists have enjoyed. Yasuke’s inclusion seems in itself revolutionary and novel, but as scholar Kishonna Gray noted in the case of Adéwalé in Haiti, there is an echo of white European and American social positions within the very framework of the game. [32] Even when the characters are non-white, their social positions in the game privilege the presumed Euro-American audience mentioned above. In Shadows , Yasuke is not gated from spaces any more than the game’s other protagonist, Naoe, is. The game’s fiction smooths out the creases in what would otherwise be a presumably more confronting experience. Then, if the game resonating with audiences is the primary goal, the game’s choice to platform Yasuke presents quite logically, with the exception that the audience being favored is not the same audience that has been favored in the past decade. To put it bluntly, the racial intolerance evident in Yasuke’s characterization as a “DEI hire” showcases as barrier in audiences identification with a man of colour, more than a rigorous analysis of whether that character’s story is accurate, which is already difficult to claim for any Assassin’s Creed protagonist in good faith. [33] The backlash, at least in the West, has clearly been centered on race and gender, while the Japanese response has certainly been more tempered, and focused on how players are allowed to damage holy sites. The subsequent question that arises is whether or not this entire outrage, as visible as it has been, represents the whole of the consumer base in the West, or rather a specific subset of consumers. The Payoff: Yasuke as Commodity Whether or not reception to Yasuke has been hot or cold is difficult to definitely weigh in on. How do we define success? Is it based on the sentiment of a vocal segment of the audience, or do we prioritize something closer to an international audience reception? Do we look at critical reception, and do we look in a vacuum or in the context of how recent installments have been received? Perhaps the most representative forum for critical and audience reception remains Metacritic, despite concerted efforts to review bomb the title. [34] In fact, when comparing the open-world installments, the pattern is relatively stable. Critics have Shadows at 81, compared to Valhalla ’s 80, Odyssey ’s 83, and Origins ’ 81. Audiences, even keeping in mind a greater proportion of disproportionately negative reviews, have Shadows at 62, compared to Valhalla ’s 60, Odyssey ’s 68, and Origins ’ 73. Critical consensus seems to be that the game is qualitatively in line with previous installments, and for audiences seems a slight improvement over the previous title. Where it does depart is in Shadows ’ higher proportion of extremely low scores, which may be indicative of review bombing. Metacritic, like any review aggregator, will overrepresent audiences that are already invested enough to log on and review, but the consistency in scores over time indicates relative stability between titles at a broader level. * Figure 3: Review Score Aggregates for all Open-World AC Titles (Mirage Omitted). Surely then, the outrage professed against Yasuke was equally felt in terms of sales, which would at least provide an industrial indication that the game was boycotted or sold less well. In actuality, Shadows boasts the second-highest day one sales for the franchise, behind Valhalla , which Ubisoft attributes to the “perfect storm” of conditions during the pandemic. [35] Longer tail analytics show a “modest” sales record of roughly 1.7M copies sold on Playstation 5 alone (Alinea, 2025). [36] So, the picture is somewhat murky, given that we won’t have the long-tail data for a while yet. Compared to Odyssey’s roughly 2M sales in the first month, as well as keeping in mind the pressures on discretionary expenses in the current economic climate, the game is not the historic success of yore, but it’s certainly still successful. Conclusion: It was Never about Accuracy The academic response, as always, will take a longer while to cement, as qualitative studies and criticism goes through the comparatively longer publication cycle. It is my sense, given the title’s consistency within franchise patterns, that academic consensus will broadly settle where it has for the past decade: that Shadows is a relatively safe market bet, with serviceable characters and the core formula unchanged. It is, in many ways, the same Assassin’s Creed we’ve come to know since 2007, and more specifically since the series’ open-world shift in 2017. Within that framework though, the Japanese governmental response to the game is novel, as critiques of desecration of ritual sites has generally been confined to academic critiques, rather than the state. [37] [38] In fact, the homage paid to the series at the Paris Olympics for Ubisoft’s assistance with the Notre Dame reconstruction signals a significant gap in how Western states interact with the company’s cultural products. Likewise, the Yasuke controversy, which seems to have lost steam since last year, has faded away into the series’ tenuous relationship with race and gender across many of its installments. It is nonetheless interesting to consider which way audience sentiment slices. Here, Yasuke was called out as corporate pandering to modern sensibilities and audience demand, yet that was not so much the case when Odyssey ’s Alexios was provided as a secondary protagonist for players to enjoy, or when company scandals revealed that Aya was intended as the main character of Origins , despite the release featuring almost exclusively Bayek. The audience’s rigidity regarding accuracy is always one that has been shaped by personal taste, and if the issue was really the accuracy of the character, we’d have had similarly caustic debates about many titles in the series. [1] Ubisoft, dir. 2022. Ubisoft Forward: Official Livestream - September 2022 | #UbiForward . https://www.youtube.com/watch?v=rvV4ZBx6_bo . [2] Ubisoft, dir. 2024. Assassin’s Creed Shadows: Official World Premiere Trailer. https://www.youtube.com/watch?v=vovkzbtYBC8 . [3] Ubisoft. 2024. “Assassin’s Creed Shadows Launches November 15, Features Dual Protagonists in Feudal Japan.” https://news.ubisoft.com/en-ca/article/2LH4Ael4X1TlNJY3B3aYg5/assassins-creed-shadows-launches-november-15-features-dual-protagonists-in-feudal-japan . [4] Walker, John. 2024. “Ubisoft Issues Weird Statement On Assassin’s Creed Shadows Controversies.” Kotaku, July 23, 2024. https://kotaku.com/assassins-creed-shadows-ubisoft-statement-yasuke-1851602337 . [5] Ubisoft. 2024. “Assassin’s Creed Shadows - An Update for the Japanese Community.” https://news.ubisoft.com/en-us/article/7dWPCtVQU7udC0KkPFOyXh/assassins-creed-shadows-an-update-for-the-japanese-community . [6] Wildt, Lars de, and Stef Aupers. 2019. “Playing the Other: Role-Playing Religion in Videogames.” European Journal of Cultural Studies 22 (5–6): 867–84. https://doi.org/10.1177/1367549418790454 . [7] Ibid, 4. [8] Ibid, 11-12. [9] Ubisoft. 2013. “Assassin’s Creed IV: Black Flag.” [10] Ubisoft. 2009. “Assassin’s Creed II.” 2009. Ubisoft. [11] Ubisoft. 2010. “Assassin’s Creed: Brotherhood.” [12] Ubisoft. 2011. “Assassin’s Creed: Revelations.” [13] Ubisoft. 2013. “Assassin’s Creed.” [14] Ubisoft. 2013. “Assassin’s Creed Freedom Cry.” [15] Shaw, Adrienne. 2015. “The Tyranny of Realism: Historical Accuracy and Politics of Representation in Assassin’s Creed III.” Loading... 9 (14). https://journals.sfu.ca/loading/index.php/loading/article/view/157 . [16] Zanescu, Andrei. 2023. “Blockbuster Resonance in Games: How Assassin’s Creed and Magic: The Gathering Simulate Classical Antiquity.” Phd, Concordia University. https://spectrum.library.concordia.ca/id/eprint/992024/ . [17] Ibid, 17-57. [18] de Wildt and Aupers, 2019. [19] Westin, Jonathan, and Ragnar Hedlund. 2016. “Polychronia – Negotiating the Popular Representation of a Common Past in Assassin’s Creed.” Journal of Gaming & Virtual Worlds 8 (March):3–20. https://doi.org/10.1386/jgvw.8.1.3_1 . [20] Chapman, Adam. 2016. Digital Games as History: How Videogames Represent the Past and Offer Access to Historical Practice. 1st ed. New York: Routledge. [21] Ubisoft. 2018. “Assassin’s Creed Odyssey.” [22] Ubisoft North America, dir. 2017. Assassin’s Creed Origins: Developer Q&A - History & Setting | Ubisoft [NA]. https://www.youtube.com/watch?v=FK43sE36rdo . [23] Ubisoft. 2017. “Assassin’s Creed Origins.” [24] Ubisoft. 2024. “Assassin’s Creed Shadows - An Update for the Japanese Community.” https://news.ubisoft.com/en-us/article/7dWPCtVQU7udC0KkPFOyXh/assassins-creed-shadows-an-update-for-the-japanese-community . [25] Ibidem. [26] De Wildt and Aupers, 13. [27] Zanescu, 2023. [28] Fox, Nate. 2020. “Ghost of Tsushima.” Sucker Punch Productions. [29] DJangi, Parissa. 2025. “The Real History of Yasuke, Japan’s First Black Samurai.” History. https://www.nationalgeographic.com/history/article/the-real-history-of-yasuke-japans-first-black-samurai . [30] Eklund, Lina, Björn Sjöblom, and Patrick Prax. 2019. “Lost in Translation: Video Games Becoming Cultural Heritage?” Cultural Sociology 13 (4): 444. [31] Acland, Charles R. 2020. American Blockbuster: Movies, Technology, and Wonder. 1 online resource (xi, 388 pages) : illustrations (black and white) vols. Sign, Storage, Transmiss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https://doi.org/10.1515/9781478012160 . [32] Gray, Kishonna L. 2018. “POWER IN THE VISUAL: EXAMINING NARRATIVES OF CONTROLLING BLACK BODIES IN CONTEMPORARY GAMING.” Velvet Light Trap, no. 81 (March), 62–67. [33] Mercante, Alyssa. 2024. “This Was Never About Anything Other Than Hate.” Kotaku. July 23, 2024. https://kotaku.com/this-was-never-about-anything-other-than-hate-1851602820 . [34] Wolens, Joshua. 2025. “Ubisoft Says Don’t Compare Assassin’s Creed Shadows’ Success to Valhalla: The Latter Launched in Covid’s ‘perfect Storm’ and Feedback on Platforms ‘Less Affected by Review Bombing’ Is Stellar.” PC Gamer, March 25, 2025. https://www.pcgamer.com/games/assassins-creed/ubisoft-says-dont-compare-assassins-creed-shadows-success-to-valhalla-the-latter-launched-in-covids-perfect-storm-and-feedback-on-platforms-less-affected-by-review-bombing-is-stellar/ . [35] Ibidem. [36] Alinea. 2025. “Xbox Dominated PlayStation’s Top 10 Games by Copies Sold in April, as Forza Horizon 5 Overtakes 1.4 Million Copies on PS5.” Alinea. https://alineaanalytics.com/blog/playstation_april_2025/ . [37] Small, Zachary. 2024. “The Fight Over a Black Samurai in Assassin’s Creed Shadows.” The New York Times, September 11, 2024, sec. Arts. https://www.nytimes.com/2024/09/11/arts/assassins-creed-shadows-yasuke-samurai-japan.html . [38] Murray, Conor. n.d. “New ‘Assassin’s Creed’ Releases To Strong Reviews—But Sparks Anti-’Woke’ Backlash And Roils Japanese Government.” Forbes. Accessed May 30, 2025. https://www.forbes.com/sites/conormurray/2025/03/21/new-assassins-creed-releases-to-strong-reviews-but-sparks-anti-woke-backlash-and-roils-japanese-government/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Researcher) 안드레이 자네스쿠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콩코르디아 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와 인류학·사회학과에서 박사후 연구원 및 시간강사로 재직 중이다. AAA 게임 스튜디오의 문화적 적응 관행에서 '공명(resonance)'을 기업 전략으로 활용하는 방식과, 영화 및 텔레비전의 문화 자본과 연결된 시상 기관 형성을 통한 게임의 정당화 과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Assassin’s Creed, Magic: The Gathering, DOTA 2 등 다양한 게임과 시상 기관에 관한 게임 및 플랫폼 연구를 활발히 발표하고 있으며, 《New Media & Society》(2021), 《Games & Culture》(2024), 《The Journal of Consumer Culture》(2021), 《Convergence》등에 논문을 발표한 바 있으며 또한 『Streaming by the Rest of Us: Microstreaming Videogames on Twitch』(MIT Press, 2025)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 [인터뷰]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만들어내는 게임 문화: PUBG UX 유닛 한수지 실장, UI 디자인팀 문휘준 팀장

    그러나 오늘날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단순하지 않다. 보이스 채팅이 생기고, 다양한 방식의 전술적 소통 방식이 도입되기도 하였다. 이런 변화는 게임 문화에 어떤 영향을 줄까?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변화가 게임의 재미와 플레이 방식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이번 호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PUBG의 UI 디자인팀 문휘준 팀장과 UX 유닛 한수지 실장을 만나고 왔다. < Back 14 GG Vol. 23. 10. 10. Tags: PUBG, 배틀그라운드, 크래프톤, 의사소통, 감정표현, 이모티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won Seo Studies culture in pursuit of a more interesting life. Curious about a wide range of cultural domains, including games, religion, and film.

  • [논문세미나] 우리 삶 속의 게임: : No Time to Dream

    브랙스턴 소더만(Braxton Soderman)의 은 젠더화된 게임 취향을 ‘시간’의 관점에서 규명한 글이다. 그에 따르면 흔히 게이머는 ’하드코어(hardcore)’와 ‘캐주얼(casual)’ 집단으로 구분되고, 이중 하드코어 게이머는 ‘백인 청소년 남성’, 캐주얼 게이머는 ‘중년의 여성’ 집단으로 표상되곤 한다. 즉, 백인 청소년 남성들이 곧 ‘하드코어 게임’을 즐기는 ‘하드코어 게이머’이며, ‘캐주얼 게임’을 플레이하는 ‘캐주얼 게이머’는 곧 중년 여성들이라 인식되어왔다는 것이다. < Back [논문세미나] 우리 삶 속의 게임: : No Time to Dream 21 GG Vol. 24. 12. 10. Text: Malkowski, J., & Russworm, T. M. (Eds.). (2017). "No Time To Dream: Killing Time, Casual Games, and Gender." Gaming Representation: Race, Gender, and Sexuality in Video Games. Indiana University Press: 38-56 브랙스턴 소더만(Braxton Soderman)의 은 젠더화된 게임 취향을 ‘시간’의 관점에서 규명한 글이다. 그에 따르면 흔히 게이머는 ’하드코어(hardcore)’와 ‘캐주얼(casual)’ 집단으로 구분되고, 이중 하드코어 게이머는 ‘백인 청소년 남성’, 캐주얼 게이머는 ‘중년의 여성’ 집단으로 표상되곤 한다. 즉, 백인 청소년 남성들이 곧 ‘하드코어 게임’을 즐기는 ‘하드코어 게이머’이며, ‘캐주얼 게임’을 플레이하는 ‘캐주얼 게이머’는 곧 중년 여성들이라 인식되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구통계학적 지표를 특정한 취향과 연관시키는 것은 그 집단의 구성원들이 지니는 본질적인 특성의 문제로 환원되곤 하지만, 소더만이 볼 때 캐주얼과 하드코어의 구분은 다른 무엇도 아닌 시간의 문제이다. 하드코어와 캐주얼 먼저, 하드코어와 캐주얼의 구분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하드코어 게이머는 게임 문화에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집단을 가리킨다. 여기서 열성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자원 투여의 양과 직접 관련되는데, 하드코어 게이머들은 게임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고, 상당한 수준의 돈을 쓰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양(quantity)’은 다시 게임 플레이의 ‘질(quality)’과 연관되어 하드코어 게임이라는 특정한 게임 스타일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구체적으로 하드코어 게임이라는 용어는 곧 시간과 돈을 많이 들여야만 플레이 할 수 있는 특정 게임들을 의미하며, 주로 PC나 가정용 콘솔로 즐길 수 있는 1인칭 슈팅 게임, 격투게임, 고자본이 투여된 높은 난이도/그래픽의 게임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Chess & Paul, 2019). 하드코어 게이머/하드코어 게임이 높은 자원 투여량을 특징으로 한다면, 반대로 ‘캐주얼 게이머’와 ‘캐주얼 게이밍’은 저비용에 쉬운 난이도로 특징지어진다. 캐주얼 게이머는 게임에 큰 자원을 투여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들이 플레이하는(플레이한다고 여겨지는) 캐주얼 게임은 게임 구성이 비교적 느슨하여 누구나 쉽게 플레이할 수 있는 것들이다. 매체로 특정지어 보자면, 하드코어 게임은 PC나 콘솔 게임으로, 캐주얼 게임은 대개 모바일 게임으로 볼 수 있다. 자원 투여를 기준으로 삼는 개념이니 만큼, 캐주얼과 하드코어 간의 구분은 마케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고 추정된다. 체스와 폴 (Chess & Paul, 2019)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게임 전문 잡지들로부터 ‘하드코어 게이머’와 ‘캐주얼 게이머’라는 분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분류는 젠더 및 연령 코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는데, 흔히 하드코어 게이머는 ‘젊은 (백인) 남성’으로, 캐주얼 게이머는 그 밖의 ‘중년의 여성’ 등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 결과, 하드코어와 캐주얼 간의 구분은 게이머에 대한 대표성 담론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게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진짜 게이머(real gamer)’는 하드코어 게이밍을 하는 ‘젊은 (백인) 남성’으로 구성된 집단이며, 나머지 집단 (특히 캐주얼 집단으로 추정되는 중년의 여성)은 언제라도 게임을 그만두고 다른 취미로 이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젊은 (백인) 남성’에 맞추어 게임을 제작·유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 Open Ai의 이미지 생성 모델 '달리(Dall·E)'에 "하드코어 게이머(hardcore gamers)"를 입력값으로 넣은 결과이다. 하드코어 게이머에 대한 편향된 사회적 관념을 확인할 수 있다 (생성일: 2024. 11.13) 대표적으로, 2016년 SIEK(Sony Interactive Entertainment Korea)의 크리스마스 시즌 광고는 게임사가 누구를 ‘진짜 게이머’로 인지하고 있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허락보다 용서가 빠르다”를 핵심 슬로건으로 내세운 이 광고 영상은 플레이스테이션4를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배우자에게 허락을 받고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산 이후에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허락/용서를 구하는 주체로서 기혼 남성’과 ‘게임을 원하지 않는 이성 배우자’라는 이분법적 구도로부터 우리는 게임사가 (기혼) 남성을 ‘진짜 게이머’, (기혼) 여성을 ‘비 게이머 집단’으로 상정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2016년 12월 21일자 플레이스테이션4 광고 영상의 한 장면이다. 영상에서 플레이스테이션4 구입을 망설이던 한 기혼 남성은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라는 문구와 함께 쇼핑 카트에 기기를 한껏 담아 달려가는 남성 무리를 마주한다. 이렇게 젠더나 세대, 인종적 코드를 바탕으로 게이머 집단을 나누는 시도는 게임 계 내부의 다양성을 저해하고 차별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꾸준히 비판 받아왔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지금까지 ‘젊은 남성’이라는 집단이 게임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데 큰 축을 담당해왔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위 광고가 제작된 2016년 기준 전체 게임 이용률은 연령대에 따라 크게 벌어졌으며(10대, 20대, 30대 모두는 80%이상, 40대, 50대, 60~65세는 모두 50%대), 젠더에 따라서도 10%가량 차이 났다(남성: 75.0% /여성: 65.5%). 젠더 간의 차이는 ‘하드코어 게임’이라 일컫는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졌는데, 2016년 기준 PC용 패키지게임과 비디오콘솔게임 모두에서 남성 이용자 수는 여성 이용자 수의 두 배 이상이었다. 더불어 여성 게이머들의 경우 대부분이 모바일로(여성 게이머 92.1%가 모바일게임을 플레이) 퍼즐 게임을 즐긴다(그중 66.2%)고 나타났는데, 이와 같은 지표들은 젠더나 연령대에 따라 선호하는 게임이 다르다는 주장과 공명하고 있었다. 시간과 게임 다만, 위와 같은 구분이 발생하는 원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흔히 게이머 집단을 구별 짓는 문제는 "남성은 어렵고 복잡한 게임을 선호하며, 여성은 쉽고 가벼운 게임을 선호한다"는 식의 선천적인 취향 차이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저자의 관점에서 집단 간 게임 플레이 양상이 달라지는 주된 원인은 취향의 차이가 아니라 '시간'의 차이에 있다. 흔히 ‘캐주얼 게임 이용자’로 분류되는 가사 노동자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들은 분절된 여가 시간을 보낸다. 가사 노동자는 일상과 노동이 뒤섞인 삶을 살며, 특정한 근무 시간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침에는 다른 가족 구성원의 준비를 돕고, 가족들이 집을 떠난 후에는 그동안 쌓인 다양한 가사 업무를 처리하며, 다시 가족이 귀가할 준비를 한다. 이렇게 순환적인 일상 속에서 그들의 노동은 완전히 끝나는 일이 드물며, 삶 전체가 끊임없는 준비와 실행의 연속으로 채워진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가사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가는 필연적으로 제약을 받는다. 짧고 분절된 시간을 활용해야 하는 그들은 즉시 업무로 복귀할 수 있어야 하기에, 오랜 시간 동안 몰입하거나 높은 집중력이 요구되는 여가 활동에는 참여하기 어렵다. 따라서 가사 노동자들은 주로 언제든 쉽게 빠져들고 종료할 수 있는 가벼운 형태의 여가를 선호하며, 소위 캐주얼 게임이라 불리는 놀이는 여기에 정확히 부합한다. 캐주얼 게임을 특징짓는 모바일 기기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들고 다니는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접근할 수 있는 편의성을 제공한다. 또한, 그 안의 게임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완료할 수 있으며, 다시 접속했을 때 큰 부담 없이 이어서 즐길 수 있는 설계가 주를 이룬다. 이상의 특성은 분절된 여가 시간을 가진 사람들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데, (집안)일 사이사이의 짧은 휴식 시간이나 이동 중의 틈새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각 게이머 집단이 지니는 젠더적 관념에 대한 다른 설명을 제공해 준다. 지금까지 하드코어와 캐주얼은 각각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왔지만, 여성의 게이밍이 캐주얼쪽으로 기운 이유는 지금까지 대다수의 여성들이 가사 노동을 수행하였고, 캐주얼 게임이 가사 노동자와 같이 분절된 시간 구조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최적화된 여가 형태였기 때문이었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짧고 파편적인 여가 시간을 보내는 (여성) 가사 노동자들은 하드코어 게임과 같이 한 번에 오랜 시간 높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놀이를 꿈을 꿀 시간이 없었다(No Time to Dream). 즉, 노동이 젠더화되었기 때문에 놀이 역시 젠더화되어 보인 것이다. 우리 삶 속의 게임 놀이는 순전히 개인 취향의 문제로 여겨지곤 하지만, 여가는 삶과 함께한다. 곧,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어떻게 노느냐를 결정한다. 그래서 동질적인 집단은 유사한 여가 활동을 하고, 삶의 방향이 바뀌면 향유하는 여가 역시 변화한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팬데믹 시기를 떠올려볼 수 있다. 당시 성별이나 연령을 불문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게임 플레이 시간이 대폭 증가하였는데, 이는 사람들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남녀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 구분이 점차 흐려지고, 젠더에 따른 노동 시간이 재배치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하드코어 게임이 남성적이고 캐주얼 게임이 여성적이라는 것은 점차 낡은 관념이 되어가고 있다. 젠더에 따른 사회적 활동에 대한 인식이 유연해질수록 성별에 따른 게이밍 양태 역시 변화하고 있는데, 2023년 게임 백서 기준 여성의 게임 이용률(44.5)은 남성의 이용률(55.5)과 거의 비슷하며, 특히 콘솔 게임 이용률의 경우 젠더 간의 격차가 상당히 줄어든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연령대를 고려한다면 더욱 부각되는데, 노동과 젠더가 비교적 긴밀히 묶여 있는 30대부터 50대와 달리, 10대와 20대의 경우 젠더 간 게임 이용률은 거의 차이 나지 않는다. 이상의 지표는 어떤 게임을 즐기는지의 문제가 단순히 개인의 취향이나 성별에 따른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처한 환경과 시간적 제약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만 함께 고려해야하는 점은 게임 역시 이용자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이다. 게임은 사람들의 생활 양식에 맞추어 여가 활동으로 자리잡았지만, 이용자의 생활 양식을 다시 바꾸어놓기도 한다. 이의 대표적인 사례로 캐주얼 게임을 생각해 보자. 오늘날 캐주얼 게임은 누구나 짧은 시간에 간단히 즐길 수 있는 게임이라 인식되고 있지만, 실상 그 플레이 양상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예를 들어, <캔디크러쉬 사가>와 같은 게임은 간단한 규칙과 직관적인 조작법을 제공하면서도, 끊임없는 레벨 추가와 반복적인 도전을 유도하는 설계를 통해 사용자의 플레이 시간을 연장한다. 이를테면 하트가 다 떨어질 즈음 게임은 아이템이나 무제한 이용권 등을 지급해주는데, 이는 이용자로 하여금 더 오랜 시간을 게임에 보내도록 한다. 우리가 밤새 핸드폰을 부여 잡고 다음 레벨을 깨기 위해 밤을 새는 등 캐주얼하지 않은 캐주얼 게이머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게임을 플레이 하는 과정에서 이용자들은 자신의 생활 패턴을 바꾸기도 하는데, 목표를 달성하거나 레벨을 클리어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시간을 게임에 할애하거나, 특정 시간에 제공되는 보상을 받기 위해 일정을 조정하기도 한다. 삶은 시간의 집합이다. 우리의 하루는 무수한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순간들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을 띤다. 어떤 사람은 시간을 흘려 보내고, 또 어떤 사람은 시간을 채워가며 삶의 모양새를 빚어낸다. 그리고 게임은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이자, 우리의 삶과 밀착된 또 다른 세계다. 어떤 게임을 즐길지, 얼마나 깊이 몰입할지는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마주한 선택지들과 긴밀히 얽혀 있는데, 또 어떤 게임을 선택하는지가 다음의 결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게임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여가 이상의 의미를 품는다. 그것은 삶의 구조 안에서 시간을 채우는 동시에, 시간을 통해 삶의 또 다른 구조를 그려나가는 행위다. 게임 속에서 우리는 단순히 레벨을 깨고 점수를 쌓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마다 삶을 들여다보고, 다시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Chess, S., & Paul, C. A. (2019). The end of casual: Long live casual. Games and Culture, 14(2), 107-118.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이연우 함께하는 게임에 관심을 가지고 게임의 관계성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게임으로 다함께 즐거워지길 바랍니다.

  • 게임제너레이션 GG

    < Back GG Vol. Tags: 논문세미나, 다양성과 포용성, 게임 커뮤니티, 여성 게이머, 게이머게이트, 체계적 문헌고찰, 게임 산업, Journal Club, Diversity and Inclusion, Gaming Communities, Gamergate, Game Studie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공포’와 ‘놀이’로서의 비장소 : <8번 출구>를 포착하기

    현대의 공포는 흐른다. 곧, 어디서든 틈입한다. 일찍이 공포라는 키워드 하에 내포되어 온 스테레오 타입화된 형상들―가령 괴물, 귀신, 살인마, 악마 등―만으로 이 정서의 출처는 설명되지 않는다. 해당 공포는 좀 더 내밀한, 혹은 하이퍼객체와 같은 유동성을 발휘하기에 우리는 이 공포를 ‘앎’의 영역으로 안배하기에 항상 실패한다. < Back ‘공포’와 ‘놀이’로서의 비장소 : <8번 출구>를 포착하기 19 GG Vol. 24. 8. 10. 1. 유동하는 공포의 교집합은‘어디’인가 현대의 공포는 흐른다. 곧, 어디서든 틈입한다. 일찍이 공포라는 키워드 하에 내포되어 온 스테레오 타입화된 형상들―가령 괴물, 귀신, 살인마, 악마 등―만으로 이 정서의 출처는 설명되지 않는다. 해당 공포는 좀 더 내밀한, 혹은 하이퍼객체 [1] 와 같은 유동성을 발휘하기에 우리는 이 공포를 ‘앎’의 영역으로 안배하기에 항상 실패한다. 바우만은 인간이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순간은 그것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할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포착이 불가능할 때,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라고 토로한다 [2] . 그리고 “공포에서 벗어나, 공포의 온상인 무지에서 해방된 세계”로 나아가야 했을 근대(이성)의 희망이 단지 “길고 긴 우회로에 불과했음”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유동적 근대의 환경이 인간의 일생 전체를 다각적인 공포 속에 몰아넣게 되었음을 설파한다 [3] . 우리는 나날이 불어나는 ‘불확실한’ 공포를 동반자 삼아 ‘불확실한’ 삶을 영위하는 유목민이 되어서는, 이 유동하는 공포를 ‘명명하는(내지는 개념화하는)’ 일로부터도 한계를 느껴왔다. 다만 유동성으로 말미암아 ‘미지의 것’으로 한계 지었던 공포에 대하여, 그 윤곽을 포착할 수 있는 주요한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공간 [4] ’에 다름없지 않을까. 공간 자체가 공포의 대상으로 집약될 때, 우리에게는 식별 불가능했던 공포를 잠시나마 직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공간은 직접 경험과 추상적 사고라는 양극단을 가진 연속체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인식가능하기 때문이다 [5] . 그리고 현대인으로서 공간에 대한 공포란 어쩌면 시간에 대한 공포보다 ‘몰입’을 해내게 되는 공포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푸코의 진단―오늘날의 불안은 확실히 시간보다는 공간에 훨씬 더 근본적으로 관련된다고 믿는다―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것이다 [6] . 실제로 우리는 육박하는 시간의 흐름보다 ‘지금-여기’의 내가 머물고 있거나 머물렀던 곳의 으스스함에 대해, 더 나아가 그곳에서의 ‘나’의 존재에 대해 더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상대성이나 추상성이 강한 시간의 공포와 달리, 객관적 지표로서의 구획을 실마리로 지닌 공간의 공포는 인간(들)에게 있어 크고 작은 교집합을 이루게 될 가능성을 둔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현재 유동하던 공간의 공포가 과연 어떤 공동의 지점을 발생시키고 있는가, 즉 ‘어디에서’ 고이고 있는가에 대한 탐색이 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어디에서’의 문제는 서브 컬처계에서, 특히나 게임의 영역에서 창발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8번 출구>는 바로 이 ‘어디’에 대한 확증의 재현에 다름 없다. 이를테면 소위 ‘유동하는 공포’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흘러들어와 있었고, 이를 포착한 사람들에 의해 그 공포가 어떤 식으로 ‘고임’을 이루며 특정 공간으로서 구축되거나 변용되고 있는지. <8번 출구>는 호러 게임 특유의 점프 스케어를 연발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공간 자체에 압축된 공포만으로 플레이어들을 압도하는 식이다. 사실 게임 자체의 구성은 단순하다. 끝없이 펼쳐진 지하도에서, ‘8번 출구’에 도달할 때까지 소위 ‘이상 현상’이라 불리는 지점을 찾아 탈출에 성공하면 된다. 길게는 60분, 짧게는 2분 남짓으로까지 클리어가 가능하며 특유의 무한 반복 구조로 인해 형식만 놓고 본다면 플레이어 입장에서 다소 ‘심심한’ 게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가 이 게임(의 정체성인 공간)을 두려워하고, 플레이하고, 급기야는 그에 매혹된다. 어디선가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논)픽션의 ‘어디’에 대해. 우리는 어째서 집단적인 공포와 몰입을 이루게 되는 것일까. 2.‘비장소’라는 호러 : ‘인간(성) 없음’의 장 <8번 출구>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지하도이다. 지하도는 일반적으로 ‘북적이는 익명의 사람들’이 ‘스치듯’ 교차하고 통행하는 곳이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오제에 따르면 이러한 공간은 정체성의 장소, 관계의 장소, 역사의 장소로서의 특질을 갖는 ‘인간적(인류학적) 장소’와 다른, ‘비장소(non-place)’로서 구분되는 곳이다. 장소가 정체성과 관련되며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면,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은 비장소가 되는 셈이다 [7] . 지하도를 비롯하여 공항, 고속도로, 대형 쇼핑몰, 멀티플렉스 영화관 등이 이러한 비장소로서 지목될 수 있다. 오제는 사람보다 텍스트나 이미지에 의한 매개가 중심이 되는 이러한 비장소의 요소―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해당 장소를 단지 스쳐지나가는 곳으로 인식하게 만드는―의 작용이 해당 공간에서 요구하는 ‘승객’이나 ‘소비자’, ‘운전자’와 같이 익명의 다수에 의해 공유되는 단일한 정체성을 생성해 냄을 거론한다 [8] . 그리고 이러한 비장소와 이용자들의 일시적인 ‘계약 관계’를 통해 비장소 안에서의 ‘나’의 존재는 ‘행인’과 같은 다소 안정적인 익명성으로서 포섭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8번 출구>에서는 이러한 비장소가 ‘호러’가 된다. 그 이유를 꼽자면, 이때의 ‘비장소’에는 플레이어인 ‘나’를 제외한 최소한의 ‘인간(성)’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비장소’ 자체가 ‘인간-인간’ 간의 직접 경험이나 교류에 대한 느슨함을 전제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체험해온 비장소는 ‘대중’ 자체가 경유하는(해야만 하는) 공간으로서 인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비장소는 누구나 그곳을 지나칠 수 있다는 ‘공적 공간’의 지위로서 건설되고 이해된다. 비장소에서 인간은 ‘동존하며 교차하기’라는 공공의 역할을 암묵적으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공동으로 수행함으로써 비로소 해당 공간에서 ‘이용자’라는 역할을 획득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장소에 단독자로서 남게 되었을 때, 공적인 행보에 능숙했던 우리는 이 공간에서의 갑작스러운 사적 행보에 불안을 느낀다. 인간(성)들 사이에서의 익명성이라는 ‘보호막’은 사라지고, 어느새 끊임없이 증식하는 공간과 불명료한 ‘나’만이 대면하게 된다. 이때의 ‘나’는 ‘익명’으로서의 ‘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장소의 바깥에서의 ‘나’의 정체성도 아닌 ‘모름’이라는 공포를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나’가 된다. 물론 지하도의 복도를 돌 때마다 우리는 ‘중년 남성’의 형상을 띤 NPC의 출현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인간성이 결여된, 움직이는 메트로놈과 다를 바 없다. 그는 해당 공간 내 플레이어(나)의 탈출 욕구나 공포에는 관심이 없다. 게임 내 ‘루프’의 루즈함을 덜기 위한 오브젝트로서, ‘중년 남성’은 인간의 편이 아닌 ‘공간의 일부’로서 기능함에 가깝다. 실제 비장소에서 ‘나’에게 가해지는 위해는 인간(성)에 의해 구호받을 수 있지만, <8번 출구>의 지하도에는 그럴 만한 인간된 타자가 없다. 붉은색 물이 밀려오고, 액자에 귀신이 생기고, 안내판이 뒤집히는 등 예측 불허한 ‘이상 현상’만이 랜덤으로 ‘나’를 덮친다. 어쩌면 <8번 출구>는 익명성에 묻히는 순간 동반되는 비장소성으로부터의 고독, 곧 익명성에 지나치게 안주할 경우 언젠가 어떤 인간(성)으로부터도 구호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여과 없이 재현해 낸 ‘있을 법한’ 평행 공간의 현현일지도 모른다. 3.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밈 : ‘영속적인 현재’에서의 놀이 이처럼 <8번 출구>를 비롯한 ‘호러’된 비장소의 재현 시도들은 해당 게임이 출시된 2023년 이전부터, 북미 커뮤니티 레딧(Reddit)이나 트위터와 같은 웹 공간에서 굵직하게 출몰해 왔으며, 현재까지도 그에 대한 대중들의 ‘몰입’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8번 출구> 자체의 모티브이면서 ‘호러화된 비장소’가 밈(meme)이 된 형태를 총칭해 온 개념이 바로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이다. 리미널 스페이스는 1909년부터 ‘리미널리티(liminality)’라는 학술적 개념을 중심으로 존재해 왔으며, 건축이나 미술 등의 분야에서 차용되다가, 이후 2010년을 전후로 하여 웹공간을 순환하는 ‘인터넷 밈’의 일환으로 점층적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출몰한 바가 있다. 이때 ‘리미널’은 ‘문간방(threshold)’ 또는 ‘경계’를 나타내는 라틴어 ‘리멘(Limen)’을 어원으로 두고 있으며 [9] , 인류학자 아놀드 판 헤네프(Arnold van Gennep)가 제시한 ‘통과의례 [10] ’의 3단계 구분―①분리(separation) ②전이(transition) ③재통합(re-aggregation) [11] ―의 중간단계인 ‘전이’의 단계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문화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이러한 일상적인 문화•사회의 상태와, 어떤 상태를 형성하고 시간을 경과시키며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구조적인 지위를 정해가는 과정 사이의 ‘문턱에 있음(리미널리티)’의 상태를 보다 발전시켜 문화적 변화의 전반적인 국면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 확장시키기도 했다 [12] . 그리고 이런 ‘문턱됨’에서 비롯된 ‘리미널 스페이스’란 사적공간과 공적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13] , 하나의 장소 또는 다른 장소도 아닌, 하나의 분야 또는 다른 분야도 아닌, 그들 사이에서(in-between)의 제3의 공간(thirdspace)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뜻으로 정의될 수 있다 [14] . '밈'으로서 대두된 리미널 스페이스에는 ‘문턱에 있음’ 상태의 비장소를 출처 삼은 이미지들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동반된 감각은 대개 ‘공포’로, 이때의 ‘리미널 스페이스’는 <8번 출구>의 지하도와 같이 친숙한 공간으로 보이지만 어쩐지 낯선 위화감과 두려움을 지닌다. 대부분 인적이 없고 시간대가 불명한 이미지의 정보값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텅 빈 건물 복도, 호텔 로비, 끝없이 이어지는 새벽의 어느 국도, 영업이 끝난 쇼핑몰의 내부 등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15] . 그러나 유튜브 스트리머들의 <8번 출구> 플레이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해당 공간을 과연 ‘공포’의 대상으로만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숙고가 필요하다. 판 헤네프는 일찍이 이러한 ‘문턱된’ 상태가 적용된 시간을 ‘실험’과 ‘유희’가 넘쳐 흐르는 ‘미술적인 시간’으로 파악하면서, 현실 사회의 구조적인 여러 활동들을 ‘직설법’이라 한다면 사회 문화적인 과정에 있어서의 ‘리미널리티’란 마치 ‘가정법’과도 비슷하여 현실적이고 직설법적인 구조에 반격을 가하는, 일종의 사고•언어•상징•메타포에 대한 ‘놀이적인 창조’의 가능성을 담지하는 ‘가정법적인 시간•공간’이 될 수 있음을 긍정하기도 한 바가 있다 [16] . 그리고 이의 연장선상으로서 우리는 ‘밈’된 리미널 스페이스의 이면에도, 일종의 ‘놀이’로서 대중을 견인하는 측면이 존재함을 추측해 볼 수 있다. <8번 출구>에 대두되는 리미널 스페이스(내지는 비장소)의 경우, 표면적으로 그것은 게임이라는 형식상 어느 정도 ‘거리-두기’가 가능한 공포에서 오는 유희를 염두에 두고 있다. 다만 그 심층에는 ‘영속된 현재’에 대한 놀이의 감각을 즐기는 플레이어의 정서가 개입되어 있기도 하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하는 ‘현재성’의 지배는 본디 비장소의 특질로, 리미널 스페이스는 이때의 ‘현재성’을 영구히 늘어뜨리는 마력을 지닌다. 결정적으로 이와 같은 요소는 불분명한 과거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자유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욕망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문턱된 상태’를 이미지나 게임과 같은 매체로서 창조한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경유할 뿐인 비장소의 현재성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며, 그에 따른 자극에도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로제 카이와에 따르면 규칙과 놀이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지만, 놀이의 원천에는 근본적인 자유―쉬고 싶은 욕구이며 아울러 기분전환 및 변덕스러움의 욕구―가 있으며, 이런 자유는 놀이의 필수 불가결한 원동력이 된다 [17] . 곧, <8번 출구> 역시 해당 공간 내에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규칙(e.g.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즉시 되돌아가세요.”)이 존재하긴 하지만, 플레이어가 진입하는 리미널 공간 특유의 ‘영속된 현재’에는 공포만으로 포섭하기 어려운 ‘놀이’의 욕망, 그로 인한 자유로의 (불)가능성이 혼융되어 있다. 4. 공간은 행위자가 된다 공간은 힘이 세다. 개중 비장소는 유동하는 공포의 교차점이자, 몰입할 수 있는 놀이로서의 가능성이 결집된 곳으로, 이를 활용한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밈이 게임의 세계에서 각광 받고 있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이 불안과 매혹의 비장소는 게임 내에서 현실과 사이버 공간을 횡단하며 대중들을 끌어들이고, 마침내 ‘인간-공간’의 지위 설정에 대한 역전까지를 가능케 한다. 기존 체계에의 인간이 언제나 공간을 생성하고 존립하게 하는 존재였다면, 비장소성을 담지한 리미널 스페이스에서, 오히려 역동적으로 행위하는 쪽은 공간인 셈이다. 이를테면 <8번 출구>의 경우 인간(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수행성이 오직 앞뒤로 걷거나 달리는 일에 그쳤다면, ‘지하도’라는 비장소는 그 자체로 각종 ‘이상현상’을 일으키며 인간보다 더욱 스펙터클한 움직임과 변화를 보여주는 식이다. 이 공간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익숙하던 객체가 아니며 거꾸로 우리를 응시하고 새로운 관계 속으로 던져버린다 [18] . 그 안에서 인간은 공포로서 압도당하는 한편, 놀이로서 유희하는 복합적인 감각을 지닌다. 이때의 감각에는 비장소성에서 기인한, 근대적 개인들의 내밀한 신경증 같은 것이 동반되어 있다. 결국 게임 내 리미널한 비장소에 대한 ‘공포’와 ‘몰입’의 요인 탐색에 착수하는 일로부터. 우리는 게임의 사회학이 아닌, 게임을 시발점으로 둔 사회학의 단초까지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궁극적으로 게임은 인간의 복합적인 내면이 투영된 공간, 곧 ‘어디’의 가능태를 탄력적으로 선취하는 사회적 기술로서 긍정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1] 티모시 모튼이 주장한 개념. 시공간에 너무나 거대하게 (hyper-) 퍼져 있어서 인간의 인식을 벗어나는 객체(-object)로, 모튼은 이 하이퍼객체의 특성을 점성(viscosity), 용해성(molten-ness), 비국지성(non-locality), 초차원성(phased-ness), 간객관성(interobjectivity)의 다섯 가지로 명명한다. [2] 지그문트 바우만, 함규진 옮김, 『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2009, 11쪽. [3] 위의 책, 12-16쪽 참조. [4] 본고에서는 장소와 공간에 대한 논의에 대하여, 양자 모두 어떠한 물리적 지점이나 위치에 인간의 삶과 실천 행위가 누적되며 특정한 의미가 부여된 곳으로서의 위상을 지님을 전제한다. 다만, 정적이고 안정적이면서 지역성에 기초하여 생활세계에 부착되는 대상으로 장소를 이해하는 논의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추상적이면서 그 자체의 유동성과 역동성을 강조하는 것을 공간에 관한 논의의 특징으로 구분해 둔다. (정헌목, 「전통적인 장소의 변화와 '비장소(non-place)'의 등장」, 『비교문화연구』 제19집 제1호, 서울대학교 비교문학연구소, 2013, 116쪽 참조.) [5] 에드워드 렐프, 김덕현, 김현주, 심승희 옮김, 『장소와 장소상실』, 논형, 2005, 39쪽. [6] 미셸 푸코, 이상길 옮김, 『헤테로토피아』, 문학과지성사, 2023, 48쪽. [7] 마르크 오제, 이상길, 이윤영 옮김, 『비장소』, 아카넷, 2017, 97쪽. [8] 정헌목, 앞의 글, 119쪽. [9] 조대원, 임종엽, 「리미널 스페이스의 특성과 건축적 응용 및 재현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계획계 제23권 제1호, 대한건축학회, 2003, 279쪽. [10] 빅터 터너, 이기우, 김익두 옮김, 『제의에서 연극으로』, 현대미학사, 1996, 208쪽 참조. 이 ‘통과의례’는 모든 문화 유형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어떤 사회 문화적인 상태나 지위에서 다른 상태나 지위로 옮겨갈 때, 이를테면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처녀에서 기혼녀로, 아이에서 부모로, 유령에서 조상의 영혼으로, 질병에서 건강으로, 평화에서 전쟁으로, 또는 그 반대로, 곤궁에서 부유로,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갈 때, 그 지표나 매개”로서 이것은 나타나고 있다. [11] 위의 책, 209쪽 참조. 판 헤네프는 통과의례의 3단계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① (일상 사회생활로부터의) 분리(separation). ② (문지방을 뜻하는) 주변 혹은 전이역(轉移域, transition): 이때 제의의 당사자는 제의 이전의 생활양식과 이후 생활양식의 ‘중간상태’에 빠진다. ③ 재통합(re-aggregation): 이때 다시 제의적인 과정을 통해 세속적인 집단으로 되돌아오는데, 의례의 당사자는 제의 참가 이전보다 더 높은 상태로 이행하며, 의식이 변하고, 이전과는 달라진 사회적 존재가 된다. [12] 위의 책, 207-208쪽. [13] 조경진, 한소영, 「역공간(Liminal Space) 개념으로 해석한 현대도시 공공공간의 혼성적 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조경학회지』 39권 4호, 한국조경학회, 2011, 53쪽. [14] 조대원, 임종엽, 앞의 글, 280쪽. [15] 정지돈, 『스페이스 (논)픽션』, 마티, 2022, 39쪽. [16] 빅터 터너, 앞의 책, 208쪽. [17] 로제 카이와, 이상률 옮김, 『놀이와 인간』, 문예출판사, 1996, 57쪽. [18] 신지연, 이승빈, 김영대, 『이제 공간에 주의하십시오』, 영남대학교출반부, 2023, 28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정찬미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문합니다. 서브컬처의 애호가이자 관망자. 시대를 사유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론들을 추적하는 중입니다.

  • 방치형게임, 누가 어떤 마음으로 운영할까? 〈어비스리움〉운영진 인터뷰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면서 일상의 많은 것이 컴팩트해졌다. 손안의 기기는 지갑이 되기도 하고 영화를 찍는 촬영 장비가 되기도 한다. 게임 또한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다양한 갈래를 보이고 있는데, 방치형 게임이 그중 하나다. ‘지금부터 당신의 수족관이 시작됩니다.’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는 〈어비스리움〉은 외로운 산호석이 친구를 찾아 힐링한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없던 산호석 주변에 각종 물고기와 산호가 늘어나는 모습은 한 사람의 사회적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유저가 힘들여 움직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 Back 방치형게임, 누가 어떤 마음으로 운영할까? 〈어비스리움〉운영진 인터뷰 03 GG Vol. 21. 12. 10.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면서 일상의 많은 것이 컴팩트해졌다. 손안의 기기는 지갑이 되기도 하고 영화를 찍는 촬영 장비가 되기도 한다. 게임 또한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다양한 갈래를 보이고 있는데, 방치형 게임이 그중 하나다. ‘지금부터 당신의 수족관이 시작됩니다.’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는 〈어비스리움〉은 외로운 산호석이 친구를 찾아 힐링한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없던 산호석 주변에 각종 물고기와 산호가 늘어나는 모습은 한 사람의 사회적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유저가 힘들여 움직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방치형 힐링 게임’이라는 타이틀로 세상에 나온 〈어비스리움〉. 〈어비스리움〉이 외로운 산호석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플레로게임즈의 최덕수 팀장, 장연정 사원과 이야기해보았다. Q. 〈어비스리움〉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나마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어비스리움〉은 올해 7월에 5주년을 맞은 게임입니다. 현재 시장에서 ‘힐링게임’이라는 키워드로 불리고 있고요. 성장 압박을 심하게 받지 않고 원할 때 켜두기만 해도 힐링 되는 형태의 게임이라고 많이들 얘기합니다. 서비스하는 입장에서는 힐링을 강요하기보다는 예쁘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Q. ‘방치형 힐링 게임’이라는 게 나름 선구적인 포지션입니다. 회사나 직원의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발전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었는지요. A. 네. 회사 차원에서는 〈어비스리움〉을 하나의 IP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핀오프 작품도 이미 두 개 낸 상태고요. 앞으로도 내놓을 수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관을 확장해나갈 가능성을 계속해서 살피는 중이에요. Q. 콘텐츠로써의 게임은 이용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가장 중요할 것 같습니다. 5년 동안 고객들에게서 받은 피드백 중 기억에 남는 게 있을까요? A. SNS에 스크린샷 찍은 걸 포스팅해 주는 유저들이 종종 있어요. 하나같이 저희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예뻐서 항상 감탄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어비스리움〉 물고기 도감을 운영하는 유저들도 있는데 그 포스팅도 즐겁게 보고 있고요. 또, 대부분의 게임사가 그렇지만 저희는 매달 업데이트를 하거든요. 이 업데이트를 진행했을 때 꼭 예상을 뛰어넘는 유저들이 있어요. 한 달 치 콘텐츠를 준비했는데 세 시간 만에 완료한다던가.(웃음) 피드백이라고 말하기 어려울진 모르겠지만 유저들의 이런 플레이를 기쁘게 지켜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Q. 이번 호의 테마는 ‘보는 게임’입니다. 그 ‘보는 게임’ 안에서도 ‘방치형 게임’을 찾아오게 됐는데요, 〈어비스리움〉을 운영하시는 입장에서 ‘방치형 게임’은 뭐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A. 사실 〈어비스리움〉을 ‘유저들이 방치하도록 만들어야지’ 하고 운영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보는 즐거움을 위해 위젯처럼 시계가 나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더 보기 좋게 만드는 건 있는데요, 따지고 보면 방치형 게임 전반의 플레이 스타일인 것 같아요. 우선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하나의 콘텐츠를 길게 늘여놓은 걸 ‘방치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장 폭 자체가 크진 않은데 숫자를 길게 늘여놓고 일종의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거죠. 그게 방치 게임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게임성이라고 봅니다. 별개로 〈어비스리움〉은 단순 방치에서 그치지 않는 형태의 콘텐츠들도 추가하는 중이에요. 그래서 방치형 게임 그 자체를 즐기는 유저들과 업데이트하고 세 시간 이내에 완수하는 유저들 모두에게 선택지를 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Q. ‘방치형 게임’이라는 단어를 사람마다 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같긴 합니다. 사실 ‘방치형 게임’은 소위 ‘진정한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로부터 공격받는 포지션이기도 하죠. ‘방치형 게임은 진정한 게임이 아니다’라는 의견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게임’이라는 건 대부분 콘솔게임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그런 입장이거든요. 모순적이죠.(웃음) 이건 제 개인적인 경험인데, 굉장히 조작감이 많은 게임이 있었어요. 그런데 리텐션의 측면이라든가 매출 지표적인 측면에서 성적이 좋지는 않았어요. 고정 유저층이 있긴 했지만, 지금 모바일 게임에 요구되는 목소리는 그런 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조작하는 맛이 있는 게임을 바라는 유저와 아닌 걸 선호하는 유저가 양립하는 건 맞지만요. Q. 그럼 ‘진정한 게임’이라는 건 비판적인 목소리 크기 차원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네요. 그렇잖아도 저는 그게 항상 궁금했거든요. 왜 아직도 커뮤니티는 콘솔 쪽만 활발하고 모바일 게임 쪽은 아닌가. 혹시 이거에 관해 의견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A. 제가 게임 서비스하면서 그런 목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게임 조작하는 건 재밌는데 너무 피곤해.’ 그래서 원래 의도는 아니었지만, 오토 기능이나 한 번에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계속 넣을 수밖에 없었어요. 커뮤니티에서 의견이 잘 나오지 않는 건 그런 유저 경향도 다소 반영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Q. 그럼 질문을 확장해보죠. 예쁜 물고기들이 오가는 수족관을 디지털 액자처럼 보여줄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상상해볼게요. 그러면 그것과 〈어비스리움〉은 어떤 차이를 갖고 있을까요? A. 내 폰 안에 들어있는 내 어비스리움은 내 고유의 아이디가 박혀있는 뭔가로 인지되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유튜브 같은 데서 캡처된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과 내 수조 안에 무언가를 넣는 건 또 다른 측면이거든요. 그래서 디지털 액자보다는 어비스리움 쪽이 ‘내 소유’라는 인식이 강하지 않나 싶어요. ‘이 게임 안에 들어가 있는 이 수조는 온전한 내 거다.’라는 전제가 깔리는 거죠. Q. 지금 말씀에서 어떤 힌트를 얻은 느낌이네요. ‘방치형’이라는 장르 안에는 ‘소유’라는 개념이 대단히 크게 들어가는 거 같습니다. A. 맞습니다. 그리고 방치형 게임이 예전에는 ‘스트레스 없는 빠른 성장’으로 많이 나왔는데 요즘 나오는 것들을 보면 주로 달고 있는 부제가 ‘키우기’예요. 그런 부분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걸 키운다.’라는 열망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남들이 보면 다 똑같은 캐릭터고 성장하는 폭도 같지만 다른 사람이 만렙을 찍은 것과 내가 찍은 건 다르니까요. Q. 말씀해주시는 중간에 ‘키우기’라는 키워드가 나왔어요. 어떻게 보면 게임 역사 속에서 ‘키우기’라는 건 전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무언가였죠. 그런데 ‘전투가 빠진 성장’이라고 하면 그게 무슨 재미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A. 전투를 통해 얻게 되는 건 결국 경험치라는 수치잖아요? 그 수치로 캐릭터 레벨업을 시키고 다른 무언가를 계속 달성해나가는 거고요. 저희 게임 같은 경우에는 전투는 빠졌지만 산호석이라는 캐릭터를 성장시킵니다. 그리고 이 산호석이 성장하면 ‘생명력’을 계속 뱉어내는데, 이 생명력은 RPG로 비유하자면 경험치나 재화랑 마찬가지예요. 그런 맥락에서 생명력은 곧 전투의 결과물과 같으니, 그게 ‘보는 게임’ 나름의 재미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성장’이라는 것도 파고들면 어려운 개념이죠. 많은 사람이 빠른 성장을 원하지만 정말로 빠르게 성장하면 할 게 없어지는 상황이 초래되기도 하고요. ‘어디서 어디까지가 적절한 성장인가’가 늘 애매한 것 같습니다. 실제 운영하시는 입장에서는 성장 밸런스를 어떻게 맞추려고 하시나요? A. 일단 성장이라는 것 자체가 PC 온라인 게임 시절이랑 많이 달라진 것 같긴 합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극단적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게임이 없었거든요. 처음 자동 전투가 들어왔을 때도 ‘이게 무슨 재미야’라는 의견이 주류였는데 지금은 그걸 다 하고 있죠. 그래서 저희도 이 부분이 항상 숙제처럼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단순히 저희 게임만의 문제도 아니고 또 모바일 게임만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추구하는 재미 영역이 다르니까 느긋하게 방치형으로 즐기는 유저도, 업데이트 몇 시간 만에 확 크는 유저도 있는 거겠죠. 그 사이를 찾아서 모든 유저들이 업데이트 텀 동안 즐길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긴 한데, 유저들의 성향이 극단을 달리는 현상 자체는 어쩔 수 없는 추세 같습니다. Q.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게요. 〈어비스리움〉의 물고기들을 눌러보면 응원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테이블 위 화초처럼 볼 수 있으면서도 응원의 메시지가 나오는, 이런 것들이 〈어비스리움〉이 추구하는 ‘힐링’이 아닐까 싶은데 혹시 ‘힐링’ 이외에도 특별히 전하고자 하는 게 있으신지요. A. 〈어비스리움〉 시리즈의 모든 스토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키워드가 우정과 애정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방치형이기에 힐링이다.’라는 걸 넘어서, 게임의 키워드 자체를 유저들에게 전달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푸시 메시지에서도 응원의 의미를 담으려 노력하고 있고요. Q. 듣다 보니 같은 힐링 계열이지만 게임과는 또 다른 영역인 명상 앱도 생각이 나네요. 〈어비스리움〉이 명상 앱과는 어떤 차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A. 유저들이 게임을 즐겁게 플레이하는 것뿐만 아니라, 캐릭터들이 던지는 메시지를 통해서 어떤 위로 같은 걸 받길 원하고 있어요. 메시지를 작성하는 저희도 스스로를 위로하는 측면이 없잖아 있고요. ‘위로’라는 부분에서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Q. 그러면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아까 〈어비스리움〉이 디지털 액자 같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캔버스로 보면 또 어떤 시각일까요? 그러니까 미술 작품으로 이해해보면 어떠냐는 거죠. A. 이 게임이 미술 작품으로서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고민은 한 적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동세대에 같은 감성을 공유하는 제작진들이 스스로가 감동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구조다’ 정도로 답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작품적인 걸로 보자고 하면 너무 거창한 느낌이라. 그래도 굳이 이야기해보자면, ‘그냥 내 감정에 공감해주길 바라.’라고 무겁지 않은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해요. 커뮤니티에 글을 쓰는 것처럼요. 예술도 여러 종류 있겠지만, ‘미술’이라는 단어에 깔린 거창한 것들과는 확실히 거리가 느껴지긴 합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해석 가능한 측면도 있겠지만 의도 자체는 동세대의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동세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게임인 게 크고요. 그렇게 해서 녹여낸 감성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거라 믿고 있습니다. Q. 〈어비스리움〉이 작품을 만드는 도구가 되는 거로 생각해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A. 그런 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샌드박스 같은 느낌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힐링 받을 수 있는 물고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물고기를 꺼내놓고 그 풍경을 즐기는 걸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Q. 그런 힐링을 ‘내가’ 이뤄냈다고 하는 게 핵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미술을 할 줄 모르더라도 어느 정도 원하는 느낌을 낼 수 있고,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즐거움이 SNS 사진 공유를 하게 만드는 바탕이 되는 것 같고요. A. 네. 저희가 따로 안내는 안 했는데요, 사실 동일한 종류의 작은 물고기를 여러 마리 생성해두면 무리 지어 움직입니다. 그 풍경을 보면서 신기하다, 재밌다 하는 유저들도 많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도 그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이런 부분을 확장해서 보자면 말씀 해주신 거랑 같은 거죠. Q. 그런 물고기에 대해 다루려면 모든 제작진이 어류 도감 같은 레퍼런스를 많이 보시겠네요. A. 많이들 보고 있긴 합니다. 최근에는 범위를 넓혀서 포유류까지 보고 있습니다. Q. 도감 말고도 따로 특별히 참고한다거나 영감을 받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A. 저희가 매 업데이트 때마다 테마를 다르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업데이트 콘텐츠를 꾸릴 때마다 참고할만한 데이터가 너무 없다는 것에 부딪히곤 해요. 업데이트가 잦은 편이다 보니 더 그렇죠. 그래서 어류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고 매달 눈에 띄는 예쁜 거, 지금 트렌드가 되는 어류, 포유류, 새 같이 여러 가지를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방치형 게임’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짧게 짧게 플레이되던 기존의 게임들과는 다르게 느릿한 시간 속에서 느껴지는 안온한 감각도 있는 것 같고요. A. 키우기 게임의 경우에는 만렙이 되면 환생하거나 옷을 갈아입히는 것처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잖아요? 그게 일반 RPG에서는 전투 한 번 끝난 거랑 마찬가지거든요. 다른 게임은 그런 식으로 하루면 끝날 걸 방치형은 며칠 더 늘여놨으니 기술적으로 방치될 수밖에 없죠. 그래도 그렇게 방치함으로써 느껴지는 어떤 편안함이 분명 존재하는듯합니다. 맞는 말씀 같아요. Q.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현대인의 시간관, 놀이, 여가와 엮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방치 게임이 다른 놀이, 다른 게임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을 오히려 없애는 경향이 있지 않나 우려도 드네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저 게임을 플레이한다고 해서 방치형 게임을 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서로 다른 형태의 놀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 경우에도 다른 게임을 하고 있어도 옆에서는 방치형 게임이 계속 돌아가고 있거든요. 다른 게임 하다가 죽으면 어비스리움 한 번 보고.(웃음) 그래서 이 둘은 완전한 별개의 놀이가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한테 ‘너 온라인 게이머니, 모바일 게이머니, 콘솔 게이머니.’ 이런 식으로 물어본다면 적어도 두 개 이상은 말하지 않을까 싶고요. Q. 제가 모바일 게임 관련 인터뷰하면서 흥미롭게 본 게 있는데, 드라마를 보면서 게임을 병행하는 경우가 대다수더라고요. 드라마 시청 시간을 침범하지 않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바일 게임, 방치형 게임은 굉장히 안정적인 게임이 되는 것 같습니다. A. 아까도 한 이야기지만, 모바일 게임에 관해서 ‘무슨 게임 하는데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요.’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합니다. 이게 다르게 표현하자면 ‘모바일 게임에 이 정도로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이 정도로 조작하고 싶지 않다.’일 수도 있거든요. 그 방면에서 방치형 게임이 요구하는 것과 패키지 게임이 요구하는 건 다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모바일 게임에서 패키지 게임 같은 게임성을 요구하는 이들은 방치형 게임을 하지 않겠죠. 그 때문에 안정적이라는 인상이 드는 게 아닐까 싶어요. Q.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지면서 마무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으십니까. A. 장연정 사원: 〈어비스리움〉은 시간을 쪼개 짬짬이 플레이해 주시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짧은 시간 안에서도 힐링이 될 수 있는 게임을 계속 만들어가고 싶고요. 〈어비스리움〉이 일상 속 작은 휴식 같은 게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최덕수 팀장: 개인적으로는 지금 〈어비스리움〉 시스템이 조금 복잡하지 않나 싶습니다. 구체화가 되어있는 건 아니지만 우선 고령자가 봤을 때 글자가 잘 보이도록 만들고 싶고요.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심플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다흰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관해 관심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모 온라인 게임에 복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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