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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신화: 오공>의 성취는 중국 문화권 바깥에서도 충분히 이해되는 것인가?
이를테면 많은 한국 게이머들은 매 챕터가 끝날 때 등장하는 ‘다음 회에서 알아보자’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는 회본 형태로 챕터가 정리되는 서유기 원전의 끝 문장을 그대로 차용해 온 부분이고 원전 ‘서유기’가 한국에서는 널리 읽히는 편은 아니라는 문제에서 기인한다. 그나마 친연성이 있는 한국에서도 이런 상황인데, 서구권까지 넘어가게 되면 사실상 <오공>을 이해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 Back <검은 신화: 오공>의 성취는 중국 문화권 바깥에서도 충분히 이해되는 것인가? 21 GG Vol. 24. 12. 10. 오랜 시간 동안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을 차지해 온 지라, 중국의 디지털게임을 향한 도전에서 중국 고전은 언제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온 바 있었다. GG의 지난 칼럼(참조)에서처럼, 중국의 디지털게임 제작은 초창기부터 <봉신연의>, <료재지이> 같은 중국의 고전 소설들을 디지털게임으로 가져오는 작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유기>는 매우 자주 디지털게임으로의 시도가 이어져 온 작품이다. 8비트 게임 시절부터 중국에서는 <대화서유>, <서유기>, <서전취경>과 같은 여러 회사에 의한 다양한 게임 장르로의 시도가 서유기를 딛고 이루어졌다. (관련내용은 GG 2호, " 중국의 레트로 게임: 8비트 시대의 흔적들 " 참조) 비단 중국에만 국한되었다기보다는 <서유기>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판타지성은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 전반에서 현대적 대중문화 콘텐츠로의 잦은 시도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이루어진 <손손>과 같은 아케이드 디지털게임화, <서유기>를 초기 모티프로 삼아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아예 서구권 전반에서 ‘손오공’이 아닌 ‘손 고쿠’를 고유명사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성공한 <드래곤볼>과 같은 사례와 함께 한국에서도 <날아라 슈퍼보드>를 기반으로 한 ‘사오정 시리즈’의 성공이나, <마법천자문>과 같은 사례들이 서유기라는 고전 판타지의 확장성을 증명한다. 동아시아 고전 판타지라는 강한 배경을 가진 게임 <검은 신화: 오공(이하 <오공>)의 제작 발표가 있은 뒤부터 이 게임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한편의 기대와 한편의 걱정을 동시에 이끌어냈다. 티저 트레일러에서 보여준 액션 어드벤처 게임으로서의 상당한 완성도가 오래도록 다시 익혀 내어 온 고전의 새로운 게임적 재해석에 빛나는 성과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또 서유기?’라는,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주제에 안이하게 천착해버릴 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는 시장 규모에 비해 오랫동안 이렇다 할 ‘문화적 업적’으로서의 대표작을 보여주지 못한 중국 게임제작 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한 배경이었다. 높은 장르적 완성도는 세계관과 결부되며 빛을 발한다 <오공>의 성과는 액션 어드벤처라는 장르적 측면에서도 상당하다. 곤술과 창술이라는 우슈에 기반한 무기 액션은 특유의 부드러운 초식 연격을 통해 매끄러운 전투 흐름을 완성했고, 사실상 전투 액션의 핵심이 되는 강공격은 천지를 울리는 과장법을 무리없이 연출해내내는 데 성공했다. 전투 액션에서의 성공은 게임 시작부터 이어지는 주인공 캐릭터의 완성도 이상으로 다채로운 기믹을 자랑하는 수많은 보스 몹들을 통해 이뤄지는데, 이른바 ‘복붙’으로 만들어지는 장면들 대신 풍성한 파훼법을 고민하게 만드는 다양한 전투 도전이 게임의 중심을 놓치지 않고 이끌어냈다. 난이도 설정이 별도로 없다는 점은 일부 게이머들에게는 진입장벽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고전적인 방식인 ‘시간을 들이면 해결된다’는 기믹을 살려둠으로써 완화점을 두었다. 초반부는 소울라이크를 방불케 할 만큼 확실히 도전적인 난이도를 보여주지만, 특정 구간들을 지나면서 열리는 도술과 특성이 누적되면서 난이도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일정 수준 이상의 시간을 들이면 못 넘어설 것은 아니라는 일련의 안도감을 부여한다. 소울라이크 느낌을 내면서도 게임 오버에도 경험치를 흘리지 않게 만들어진 디자인은 난이도 설정이 없다는 점을 보완하는 디자인이었고, 게임은 전반적으로 쉽다고 말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지만 그렇다고 초심자를 완전히 내팽개친다고만은 볼 수 없는 타협점을 보여주었다. 디지털게임의 성취를 바라볼 때 메카닉만을 뚝 떼어 보는 것은 게임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방법이다. 단순히 막대기를 돌리고 휘두르는 공격 액션이 훌륭하다고 하면 굳이 ‘서유기’라는 배경과 이야기라는 스킨을 덧씌운 게임에서 우리가 받는 감상을 정리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오공>의 성취 또한 상당히 공들인 전투 액션이 어떤 세계관 하에서 어떤 목적을 향하고 있는지와 결부될 때 비로소 본격적인 의미를 드러내는데, 기본적으로는 ‘서유기’의 세계관을 활용하되, 손오공의 서역 여정길 당시가 아닌 그 다음의 이야기라는 배경 설정을 통해 게임은 이 세계관을 21세기에 디지털게임으로 재현할 때 필요한 많은 자유로움을 끌어낸다. 신분제 시절의 판타지가 못다 한 이야기의 현대적 재구성 중국의 또다른 판타지 소설인 ‘봉신연의’와 마찬가지로 ‘서유기’ 또한 요괴라는 이름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총출동한다. <오공>은 ‘서유기’에 등장한 수많은 요괴들 중 액션 어드벤처 게임에서 도드라지는 기믹이 될 수 있는 요괴들을 서유기 원작의 순서와 관계없이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고전 판타지 소설이 액션 어드벤처 게임으로 재구성될 때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하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서 <오공>은 주인공인 손오공의 서역 행보를 되새기는 것이 아닌, 그가 죽은 뒤 그의 후계를 자임하는 주인공 ‘천명자’의 행보를 그려낸다. <오공>이 그려낸, 삼장법사 일행의 고행이 끝난 뒤의 세계는 원작이 그려내지는 않았지만, 원작의 상상력을 이어 간다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어떤 세계의 후속담이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공>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서역에서 가져온 대승의 불경이 중국에 도착했다면 이 세계는 부처의 대자대비심으로 이전보다 나은 세계가 되었어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오공>은 끊임없이 보여주고자 한다.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 일행이 지났던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고, 아예 원작에서 투전승불의 지위에 올라 해탈에 이른 것으로 결론지어진 손오공은 게임 시작부터 죽었다고 나온다. 관세음보살이 현장법사에게 일러 주었던, 중생을 구제할 대승의 새 불경은 딱히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이 <오공>이라는 게임의 출발점이다. 더욱 의뭉스러운 것은 세계의 남은 자들이 그런 세계를 구하기 위해 불경을 다시 가져온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죽어버린 손오공의 부활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주인공 천명자는 부처의 지위를 버리고 다시 원숭이 왕으로 살고자 했다 죽게 된 손오공이 세상에 남긴 육근을 모아 손오공의 부활을 시도한다. 세상을 더 낫게 만들 방법이 서역에서 가져온 불경이 아니라 손오공의 부활이라는 점은 언제나 다음에 이어질 세상을 보다 낫게 만드는 것을 암묵적 전제로 삼는 디지털게임의 구조 안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다. 원전 ‘서유기’가 그려낸 세계는 신격 존재들과 인간들, 그리고 요괴들이라는 구분이 엄격한 세계였다. 일종의 신분제라고도 볼 수 있을 이 구분은 한편으로는 엄격하면서도 아예 고정불변인 것은 아닌데, 이를테면 원래 요괴 출신이었던 손오공이 천계의 부름을 받아 옥황상제와 겸상하거나 투전승불이 될 수도 있고, 천계의 군인이었던 천봉원수와 권렴대장이 잘못을 저질러 요괴로 환생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신분은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지만, 그 오름과 내림이 명확한 격차를 갖는다는 점에서 이 세계의 신분제는 태생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상벌적 개념에 가깝다. <오공>의 시작부분에서 손오공은 천계로 부름받은 투전승불이라는 지위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그 외침에 대해 천계는 군대를 보내 손오공의 목소리를 지우는 것으로 화답한다. 이는 고전 소설 ‘서유기’가 시대적 한계로 그려내지 못한 지점을 21세기의 디지털게임이 다시 가져올 때 살려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고전 판타지의 게임을 통한 현대적 재해석은 이미 크게 시도된 바 있는데, <오공>의 제작진들이 직접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한 바 있는 <갓 오브 워> 리부트 시리즈다. 원작이 되는 북유럽 신화가 오딘과 토르라는 주신들의 관점에서 진행된 바 있다면, 게임으로 등장한 <갓 오브 워>의 북유럽 신화는 실제 신화 속에서 반영웅의 위치에 있었던 로키의 시각에서 신화를 풀어나가고자 했다. 시점을 바꾸면 이야기는 크게 달라지는데, 오딘의 지혜는 게임 안에서 교활함으로 재해석된다. 신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세계 전체를 지배하려 들고, 그 신의 범주에 들지 못한 이들의 저항은 주신들의 관점에서는 세계의 멸망, 라그나뢰크인 것이다. 라그나뢰크가 예언한 세계의 종말은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결국 ‘그들만의 세계’에 찾아오는 종말이라는 해석은 고전적 신분제 사회를 벗어난 현대에 들어 신화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주요한 관점이다. 그리고 <오공>은 같은 맥락으로 ‘서유기’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에 나선다. 신분제가 명확했던 시절에는 자연스러웠을 신계가 인간계를 관리하고(혹은 보호하고) 있는 모습은 신분제가 사라진 현대에 들어서는 그 자체로 이미 억압적인 무언가가 된다. 로키라는 악신의 존재를 활용한 <갓 오브 워>의 방식 대신, <오공>은 원작의 주인공이었던, 요괴 출신이지만 천계의 명령에 순순히 복무했던 이가 받은 의심과 실망을 부각시킴으로써 고전적 신분제 하에서의 평화와 행복이 가진 모순을 정면으로 끌어내는 방식을 사용했다. 각론은 다르지만, 두 게임 모두 고전 사회에서 만들어진 신화와 판타지가 현대 관점에서는 여전히 모순일 어느 지점을 향해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냈다는 점에서 신화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평을 받을 만 하다. 중국 문화권 바깥에서 이 게임의 의미에 다가가는 어려움에 대해 고전 소설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 성공적일 수 있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제작진들이 고전 소설로서의 ‘서유기’를 깊고 풍부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 ‘서유기’는 원전 자체가 보편적 교양 소설로 취급받으며, 한국에 비해 폭넓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실제 <오공> 안에 등장하는 원작 출신의 많은 캐릭터들은 원작에서 보여줬던 성격과 캐릭터를 게임 특성에 맞게 변형한 상태로 등장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특성이 게임 메커닉과 강하게 결부되며 게임을 말그대로 살아움직이는 ‘서유기’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로 만들어진 2차창작 콘텐츠로서의 <오공>은 이 점 때문에 오히려 ‘서유기’에 익숙하지 않은 중국 바깥의 게이머들에게는 미처 다 전달되지 않는 지점 또한 적지 않다. 이를테면 많은 한국 게이머들은 매 챕터가 끝날 때 등장하는 ‘다음 회에서 알아보자’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는 회본 형태로 챕터가 정리되는 서유기 원전의 끝 문장을 그대로 차용해 온 부분이고 원전 ‘서유기’가 한국에서는 널리 읽히는 편은 아니라는 문제에서 기인한다. 그나마 친연성이 있는 한국에서도 이런 상황인데, 서구권까지 넘어가게 되면 사실상 <오공>을 이해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 다음 회에서 풀어보자는 말의 의미는 중국 문화권이 아니면 이해가 어려울 것이다. 충분히 잘 만들어진 게임이지만 <오공>에 대한 아쉬움은 역으로 이 게임이 원전에 너무나 충실했다는 점에서 원전이 보편적이지 않은 이들에겐 미처 그 정교함이 다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 때문에 온다. 원전에 대한 세심한 재해석에 경탄하면서도 내내 이걸 서구권 게이머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를 떠올린 것은, 게임의 기저에 흐르는 ‘서유기’라는 원전에 대한 추가적인 이해를 도울 수 있을 여러 서브 컨텐츠들이 충분히 갖춰지지는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사천왕과의 전투라는 것도 아마 서양권 이용자들에겐 '멋진 거대 몬스터와의 박력있는 전투'까지만 전달될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마우스워싱>: 노스탤지어가 흐물거릴 때
자본주의적 체인 안에서 상품이 개별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과정은 세세하게 분할되어 실체는 추상적인 절차로 파편화되고 프로세스는 우연적인 집합에 불과할 때, 블랙 박스 속 물건을 통해 주권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지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 Back <마우스워싱>: 노스탤지어가 흐물거릴 때 21 GG Vol. 24. 12. 10. -이 글에는 <마우스워싱>에 대한 전반적인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노스탤지어적 로우 폴리곤 역사학자인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는 저서인 『노스탤지어, 어느 위험한 감정의 연대기』에서 다양한 시대와 형태의 노스탤지어를 소개한다. 디즈니의 영화 리부트나 N64와 같은 1990년대의 미디어가 2020년대에 각광받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아널드포스터는 세대론적 관점을 제시한다. 2020년대 초반에 성년이 된 사람들이 1990년대에 태어났으며, 이 시기는 또한 “21세기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모든 것이 나오기 전의 마지막 시기”라는 설명이다 [1] . 실제로 itch.io와 같은 인디 플랫폼에 제출된 로우 폴리곤 기반의 게임들, N64나 PS1을 키워드로 게임의 제작자와 향유자는 노스탤지어를 적잖이 인용한다. 그러므로 이들 90년대생이 유년기에 향유하던 게임의 추억을 현재로 데려오고자 하는 시도로써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관점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이런 양식의 게임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배경으로는 제작에서의 이점을 간과할 수 없다. 호러 인디 게임 컴필레이션 을 엮은 브레오간 해케트는 90년대의 저해상도 3D로 게임을 제작하는 동기로 접근성을 언급한다. “텍스처에 4K 해상도가 필요하지 않고 캐릭터 모델이 수천 개가 아닌 수십 개의 폴리곤으로 계산될 때 솔로 크리에이터가 3D로 전환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다 [2] . 그렇게 빚어낸 이미지는 AAA 게임과 직관적인 차이를 구획하고, 와 같은 작품이 드러내듯 아예 스스로를 실패작으로, 인디한 것으로 천명하며 등장하기도 한다 [3] . 무엇보다도 이런 종류의 기하학적인 신체와 저해상도 텍스처가 지속적으로 향유되는 데에는 특유의 매력이 있을 것이다. 3D로의 이행은 명백히 기술적 한계에 직면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평면적이면서도 블록 같은 질감은 투박하지만 분명 구체적인 신체성을 지닌 무엇이다. 그 위에 기입된 엉성한 텍스쳐는 계속해서 미끄러지므로 인식의 혼란을 초래하며 불안을 자아낸다. “때때로 게임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이러한 그래픽은 따라서 호러 장르와 밀접하게 얽히게 된다. 이렇게 레트로 호러 게임이 향유되는 동기를 살펴봤을 때, 지난 9월에 출시된 심리 호러 어드벤처 게임인 <마우스워싱Mouthwashing>은 설명에 모범적으로 들어맞는 사례처럼 읽힌다. 롱 올간Wrong Organ 스튜디오의 멤버들은 스웨덴 게임 개발 교육 기관에서 만나 팀을 이뤘다. 거기서 그들은 전작인 <하우 피쉬 이즈 메이드How Fish is Made>를 완성했고, 확장팩에서 후속작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마우스워싱>의 핵심 인물인 ‘컬리’는 이 게임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아이코닉한 이미지를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그가 운행하던 우주선 ‘툴파르’ 호는 천체와 충돌하는 사고를 겪게 되는데, 폭발은 컬리의 전신을 강타하며 흔적을 아로새겼다. 작중에서 컬리는 사지와 눈꺼풀을 잃고 극심한 화상으로 인해 신음한다. 게임의 1인칭의 카메라는 플레이어블 아바타와 플레이어의 시점을 융합시키며 가상의 신체로부터 비롯되는 감각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한다. 격통이 화면 너머 플레이어에게 전달되지는 않기에 끔찍한 몸에 접속했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특별한 감각을 일깨우지는 않는다. 그보다 더 두드러지는 공포는 가상의 육신 내외부에서 일어나는 붕괴와 결합에서 파생된다. 어떤 퀘스트는 컬리의 살을 자르고 섭취할 것을 종용한다. 딱딱한 플라스틱 덩어리나 다름없어 보이는 저화질의 벌건 살은 가상의 신체가 언제든 인접한 다른 환경으로 무너져 내릴 가능성을 자극한다. 9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21세기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모든 것이 나오기 전의 마지막 시기”를 향유한다는 게이머 노스탤지어에 관한 설명은 “추억 소환 섹션”에 놓여 있는 대상에 한정한다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4] . <마우스워싱>은 로우 폴리곤이라는 장치가 범연히 1990년대적인 것의 부흥이라고 설명한 바와 다소간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상상적으로 구현된 미디어적 참조는 현재적으로 “풍부한 시청각적 라이브러리를 구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5] . <마우스워싱>이 엮어내는 영상 소스(뤼미에르 형제의 <유쾌한 해골>부터 1950년대 반공주의 프로파간다 애니메이션인 을 거쳐 가글액의 광고 화면으로 이어진다)는 로우 폴리곤이 표방하는 1990년대 게임 하드웨어 이전의 시기까지 소급해 가며 현재화를 시도한다. 주권성에 대한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로 상상되는 과거는 현재를 인식하는 방식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노스탤지어는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시간에 속한 순간들”에서 촉발되는데, 결국 “현재 우리가 보유한 가치나 윤리, 자기감에 더욱 부합하게끔 정보를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6] . 이 지점에서 90년대와 지금 사이의 연속성을 되짚어보게 된다. <마우스워싱>의 내러티브가 디디고 있는 역사적 토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인식과 밀접하다. 80~90년대 워싱턴 컨센서스를 통해 구현된 신자유주의는 “사사화privatiation와 개인의 책임”을 핵심으로 한다. “부와 의사 결정이 대중과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는 정책 결정 기구에서, 개인이나 기업과 같은 책임지지 않는 자들의 손으로 넘어” 가는 것이다 [7] . 그 결과 구조 조정과 노동유연화, 고용 불안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풍경이 삶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마우스워싱> 속 툴파르 호는 마지막으로 남은 유인 우주 화물 서비스를 전문 기업인 포니 익스프레스의 소속이다. 열악한 근무 조건 속에서 승무원들이 화물을 운반하는 와중에 툴파르 호가 소행성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부함장인 ‘지미’는 구조가 올 때까지 다른 동료들을 책임지고 건사하고자 한다. 한편 비선형적으로 이어지는 게임의 내러티브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사고의 전후를 퍼즐처럼 재구성하도록 요청한다. 작중에서 상기의 영상 콜라주는 한 장의 메일을 트리거삼아 재생된다. 그 메일이란, 본사는 이번 배송을 완료한 후에 툴파르 호의 인원이 전원 해고될 것이며 포니 익스프레스의 서비스가 무인 체제로 전환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컬리가 함장의 자격으로 그 메일을 수신하는 장면은 잠시 중지되고, 구시대의 애니메이션들이 흘러나오며 경제적 주체로서의 가장과 같은 자본주의의 유익한 삶을 역설한다. 이미지의 잡동사니가 멎은 자리에는 끄트머리가 꺾여버린 사다리들이 놓여 있다. 사다리는 컬리가 지미와 나누었던 대화를 환기하는 요소다. 컬리 : ...최근 이런 생각을 좀 해 봤어. 이걸로 충분한 건가? 지금까지 잘해 왔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이대로 살아도 되나? 좋은 장거리 화물선 함장으로 말이야. 지미 : 그게 안 좋은 건가요? 컬리 : 내가 하려는 말이 바로 그거야. 안 좋지는 않아. 하지만... 아주 무서운 일이지. 이런 생각이 들어. “이게 내 최선인가? 앞으로도 평생 이렇게 살아가야 하나?” … 지미 : 이 사다리의 꼭대기에 올랐는데... 애초에 잘못된 사다리를 오른 건 아닐까 생각하신다는 거죠. 그래도 어떤 관점에서 보든, 한참 위까지 올라가셨잖아요. ...전 아직도 그 사다리를 끝없이 오르고 있는데 말이죠. 『잔인한 낙관』을 저술한 로런 벌랜트는 신자유주의 문화에서 ‘좋은 삶’이라는 환상을 구성하는 애착심에 관해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위험하고 불안정한 삶 속에서 우리는 소진되거나 마모되면서도, 더 좋은 삶이라는 환상에 애착을 품는다.“잔인한 낙관은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대상에 애착심을 유지하는 상태”이며 또한 “우리에게 ‘좋은 삶’이라고 호명하는 대상에 대한 정동적 애착심 속에 기거하면서 ‘좋은 삶’을 살펴보게 하는 자극제”이기도 하다 [8] . 위의 대사에서 컬리는 지금껏 유지해 왔던 삶의 형식이 어느 정도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정황을 감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벌랜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마모된 주체인 그는 ‘좋은 장거리 화물선 함장’이 주는 낙관이 불능에 처했음을 미묘한 어휘로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허무감을 공유받는 지미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사다리의 ‘한참 위’에 있기에 가능한 토로라고 일축한다. 그러므로 사고 이후 임시 함장이 된 지미는 지속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되뇌며, 부상으로 불능 상태가 된 컬리를 대신하려 한다. 지미는 선원들의 안위와 툴파르 호의 위기를 책임지려 한다. 더 나아가서 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수습함으로써 불안정한 고용 상태를 다시 되돌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지미는 생존 물품을 찾아보기 위해 운송 창고 개방을 결단한다. 창고를 개방할 수 있는 열쇠는 함장만이 소지 가능하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휘두른 주권은 곧 미끄러진다. 영상의 콜라주로 이어진 시퀀스가 종료되면 마침내 플레이어는 창고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물은 생존에는 하등 쓸모없는 가글액에 불과하다. 이 가글액은 포니 익스프레스가 직접 생산하지 않은 물건일뿐더러 1950년대의 애니메이션과 병치된 광고 형식은 시대착오적이다. 요컨대 목전으로 닥친 자동화와 무인화의 미래를 절대 극복해 주지 못할 물건이다. 자본주의적 체인 안에서 상품이 개별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과정은 세세하게 분할되어 실체는 추상적인 절차로 파편화되고 프로세스는 우연적인 집합에 불과할 때, 블랙 박스 속 물건을 통해 주권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지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그는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 함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주권성이란 객관적 상태라고 오인된 환상”으로 “개인적, 제도적 자기 정당화의 수행성을 열망하는 입장이며, 그 입장이 안전과 능률성을 제공한다는 환상과의 관계 속에서 통제권을 갖는다는 정동적 느낌”이다 [9] . 일반적으로 법에서는 주체를 행위하고 그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 상정한다. 이는 범박한 의미에서의 게임이 플레이어의 개입을 통해 상호작용 하는 미디어로 정의된다는 지점을 환기한다. 지미의 행위를 견인하는 동기는 플레이어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로우 폴리곤 아바타를 꾸역꾸역 붙들고 있는 이유와도 일치한다. 툴파르 호와 승무원을 건사하는 것이다. <마우스워싱>의 게임 플레이는 정해진 루트를 따라 나가는 일방적인 워킹 시뮬레이터식 진행에 가깝다. 이 같은 구성은 전권을 휘두르는 주권성으로부터 비껴 나간다. 사고 당시를 재연하는 프롤로그는 이어질 전개의 메타포다. 소행성이 눈앞으로 들이닥치는 가운데, 조종간을 오른쪽으로 돌리라는 경고문이 주어지지만 플레이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오직 왼쪽으로 꺾는 일뿐이다. 여기서 주권성은 실패한 선택지를 고르는 데에 발휘된다. 그렇게 지미는 툴파르 호를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고, 플레이어는 지미의 ‘업보’를 책임지지 못한다. 1인칭 카메라를 활용한 시점 트릭은 여태껏 플레이어가 불완전한 책임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그렇게 플레이어는 시점으로부터 미끄러져 나가며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마우스워싱>은 노스탤지어적 장치를 활용하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짤막한 역사적 라이브러리를 구축하고 있다. 잔인한 낙관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구현해 내는 것은 <마우스워싱>의 마지막 장면이 아닐까 싶다. 모든 관계가 파탄 난 상황 속에서 지미는 부상당한 컬리를 수면 장치에 밀어 넣는다. 비록 컬리는 망가진 신체와 고통으로 잠 못 드는 신세임에도 일단 수십 년간 냉동 수면 상태에 있다 보면 언젠가는 구조되리라는 일방적인 기대에 내걸린다. 훗날 컬리가 어색하게 눈을 떴을 때, 그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1]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 손성화 역. 『노스탤지어, 어느 위험한 감정의 연대기』. 서울: 어크로스. 2024. 273쪽. [2] Natalie Clayton, “The horror games harking back to the PSone era”, 2019.10.31.등록, 2024.11.05.접속, WhyNowGaming, [3] 이 게임은 닌텐도 64를 위한 게임을 “야심넘치게 개발하다가 프로젝트를 폐기할 위기”에 놓인 일련의 이야기로 소개된다. https://l4ndo.itch.io/abandoned-64 [4]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 273쪽. [5] Natalie Clayton, 위의 글. [6]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 15쪽. [7] 리사 두건. 한우리·홍보람 역. 『평등의 몰락-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가』. 현실문화. 2017. 57쪽. [8] 로런 벌랜트. 윤조원·박미선 역. 『잔인한 낙관』. 서울: 후마니타스. 2024. 48·55쪽. [9] 로런 벌랜트. 184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규리 자기 소개 :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데스티니2를 오래 즐겨왔고, 다음 작인 마라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익숙한 게임이 주는 재미와 낯선 경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보려 고민하고 있습니다.
- 공포와 액션의 사이에서: 바이오하자드 시리즈
공포 게임의 공포는 반드시 옅어지고, 무뎌지고, 희석되고, 탈각된다. 바이오하자드/레지던트 이블이 9개의 넘버링과 3개의 외전과 3개의 리메이크, 그 외 다수의 서브 작품을 진행하면서 얻은 결론은 이 태생적 모순을 피하거나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7편의 방향성을 2~4편의 리메이크작과 8편 또한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긍정하고 활용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 Back 공포와 액션의 사이에서: 바이오하자드 시리즈 19 GG Vol. 24. 8. 10. * 어떤 공포 게임의 차기작 이미지이지만 팬메이드인, 가짜. ‘공포’ 게임 공포는 흥미로운 감정이다. 감정 중에서도 생존과 직결되었기에 가장 강렬한 반응을 이끌어내는데, 동시에 유희의 방법으로도 활용이 되는 모순된 감정이다. 이 특징 때문에 공포 장르는 흥행이 어렵다. 무서우면 재밌지만, 무서우면 꺼려진다. 이 모순의 균형을 해결하는 것이 모든 공포 장르의 숙제다. * 반복되는 공포는 학습이 되어 무뎌진다. 이 친구는 이제 더는 무섭지 않다. 문학, 연극, 만화, 영화, 게임 등에서 구현된 모든 공포 장르의 기본 구도는 같다. 가장 중요한 극중 갈등은 인물과 인물 외부의 세계 혹은 ‘무언가’다. 인물 외부에는 불가해한 무엇이 존재하고 그 무엇은 인물의 생존을 위협한다. 인물은 이 위협에서 도망치거나 위협을 극복해야만 한다. 하지만 방법은 알 수가 없고, 위협의 근원이 주는 공포로 인해 갈등 극복은 어려워진다. 마침내 인물은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위협을 물리치거나, 위협에서 도망치거나, 가끔은 이겨내지 못하고 위협에게 잡힌다. 이런 구조 속에서 나오는 서사가 공포 장르의 서사, 생존 투쟁의 서사다. 수용자는 이런 일련의 서사를 유희의 도구로서 감상한다. 체험이 특징인 게임만은 다르지만. 아무튼 그래서 공포 장르의 진입 장벽은 높다. 수용자는 생존 투쟁의 스트레스를 유희로서 받아들일 만큼 심리적 거리를 만들어야 하지만, 동시에 유희로서의 몰입을 할 정도로는 가까워야 한다. 유희로서의 공포에 관해서 윤장원은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의 놀이이론을 공포 게임에 적용한 연구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윤장원 교수의 가장 중요한 문장은 이렇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로제 카이와는 놀이의 속성을 네 가지로 나누었는데, 그 중 일링크스(ilinx)는 ‘현기증’으로 대표되는 감각 자극의 속성이다. 윤장원은 공포 감정이 일링크스 영역에 주로 해당한다고 하면서, “이것들은 흥분의 즐거움, 환상의 즐거움, 합의된 혼란의 즐거움, 약한 충격의 즐거움, 안전한 충격의 즐거움들이다.”( 윤장원, “공포게임속 유희적 공포를 중심으로”, 2008.05, 조형미디어학 제11권 제2호 )라고 썼다. 즉, 공포 장르의 공포는 ‘언제든 피할 수 있는 공포’이기 때문에 유희가 된다. * 작중에서 아무리 피할 수 없는 공포가 등장한다 해도, 작품 바깥은 내 생존에는 영향이 없다. 공포 ‘게임’ 다른 공포 장르에서의 공포는 관람하는 유희지만, 게임은 체험의 양식이다. 그래서 ‘돌파하여 극복하는’ 구도를 수용자가 직접 수행해야 하는 게임은 앞선 모순점의 숙제를 훨씬 더 민감하게 다뤄야 한다. 여기서 민감하다는 의미는 모순의 저울이 하나가 아니라는 의미다. 공포와 안전이 1번 저울의 쌍이라면, 2번 저울의 쌍은 신선한 공포와 무뎌진 공포다. 게임에서 위협적인 대상을 만나면, 플레이어는 게임의 특성에 따라 교전이나 도망을 수행한다. 그리고 숙련도가 쌓이게 되면서 점점 더 익숙해진다. 공포란 낯설고 생경한 것에서부터 오는 것이 기본이다. 익숙해진 공포는 더 이상 공포가 아니고, 공포 게임에서 공포가 옅어지면 큰 재미 요소를 잃는 것이다. 공포의 수위 문제인 1번 저울의 경우엔 작품의 완성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해결이 가능하지만, 공포의 희석이라는 2번 저울의 모순은 게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만나게 된다. 아무리 컨텐츠의 수행 패턴을 바꾸면서 낯설음을 유지하려고 해도, 플레이어는 점차 적의 행동 패턴을 연구하고 공간을 학습하고 기괴한 디자인에 적응한다. 그렇게 자신을 쫓아오는 괴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응 방법을 손쉽게 수행하기 시작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2회차 플레이부터는 공포 요소의 위치가 익숙해지게 되면서 공포 게임이 아닌 기억력 퍼즐 같은 플레이가 되기도 한다. 가장 질 좋은 공포는 최초 탐험인지라, 공포 게임은 장르의 시작부터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예언 받은 셈이다. 그래서 게임에서 공포 장르는 생존 공포라는 특징이 대세가 된다. 1989년 일본의 영화 ‘스위트홈’의 게임판에서부터 시작된 생존 공포라는 세부 장르 명칭은 중복 형용인 것 같지만, 운명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묻어나는 이름이다. 이 장르에서 플레이어는 대항 행위에 쓸 자원을 제한적으로만 받게 된다. * 게임 스위트홈에는 한정된 공간, 치명적 함정, 초자연적인 적 등의 생존 공포 요소가 구현되어 있었다. 바이오하자드 1편은 이 게임을 리메이크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는 설이 있다. 공포 장르의 요소 중에는 제한적 공포 요소가 있다. 활동의 제약을 주는 공간적 제한, 정보의 제약을 주는 시각적 제한에 이어 능력의 제한 요소는 공포 게임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공포 게임은 이 능력 제한 요소에 ‘대응 수단’을 집어넣으면서 생존을 가장 중요한 위치로 끌어왔다. 그리하여 모자란 자원 때문에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적도 도망쳐야 할 대상이 되었다. 대응 자원은 아끼고 아껴서 가장 필요한 순간, 예컨대 보스전 같은 때에 써야 한다. 다른 적들은 왠만해서는 상대하지 않고 피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보스전에서 전투를 수행할 숙련도와 캐릭터 업그레이드는 필요하니 완전히 안 싸울 수는 없다. 결국 어느 적은 피하고 어느 적은 싸울지를 정하면서 이 모순을 헤쳐간다. * 이 장면 앞에서 도망치는 자는 공포 게이머, 싸우는 자는 액션 게이머. 결과적으로, 조우하는 모든 요소가 나를 공격하는 생존 위협의 상황이자 집단 광기의 상황이 손쉽게 만들어진다. 이는 2번 저울의 모순점을 최대한 뒤로 미루는 영리한 방법이다. 그리고 자원 제한이라는 이 능력 제한 요소를 가장 잘 사용하였고 그것이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가 된 장수 시리즈가 바이오하자드/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다. ‘공포’ 액션 바이오하자드를 요약하면, 좁은 공간에서 총으로 좀비를 쏘는 게임이다. 그리고 초기작인 1~3편에서는 제한된 탄약으로 인해 쏘는 행위보다 피하는 행위가 더 많았다. 시작점인 1996년작인 1편의 경우에는 3D 기술을 연습하자는 제작사의 의도가 있었다는 일설도 있는 바, 기술적 완성도는 약간 떨어졌지만 오히려 능력 제한 요소로 받아들여지면서 생존 공포를 공포 게임의 주류로 만드는 첫 빗방울이 되었다. 동시에 이 일설에 의해 3D 액션으로 형식이 정해지면서, 바이오하자드는 액션으로 공포를 피하고 극복하는 게임이 되었다. * 경찰 특수부대가 외딴 집에서 좀비들과 조우하는 내용의 1편. ‘Wow, What a mansion!’이 먼저 떠오른다면 밈적 사고화를 주의하자.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의 제한적 공포 요소는 매우 충실하다. 0편에선 고립된 기차 안, 1편에선 외딴 저택 안, 2/3편에선 폐허가 된 도시라는 식으로 공간 제한이 있다. 시야 또한 0/1편은 문으로 나뉘어진 방이라는 식으로 제한이 되는데, 당시 기술의 한계로 인해 로딩 시간을 문이 열리는 애니메이션으로 처리한 것이 또한 공포 요소로 작용했다. 2/3편은 광원이 많은 도시가 공간이지만 폐허가 된지라 어두운 골목이나 수풀 같은 시야 제한 요소를 활용했다. 또한 2/3편에는 특정 시점 전까지는 절대 죽일 수 없는 거대한 적이 쫓아오는 요소도 있었다. 이런 구성에 자원 제한까지 더해지면서 탄약 소모를 최소한으로 하여 위험 지역을 돌파하고 안전 지역에서 정비한 후 다음 위험 지역의 공포로 뛰어드는 플레이 패턴이 정립되었다. 공포 ‘액션’ 제한된 실내 공간 혹은 좁은 폐허 공간이었던 0~3편과 달리 4편부터는 야외 공간이 조금씩 넓어지고 많아지기 시작했다. 2편의 경우, 도시가 배경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대부분의 플레이는 무인 상태의 경찰서 건물이었고, 그나마 야외로 나간 3편은 소개(疏開)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폐허가 된 도시라 넓은 공간도 많지 않았다. 반면 4편부터는 실내라도 넓은 공간이 생겨났고, 벌판이나 마을 내지는 도시 공간도 활용되었다. * 이런 공간에서의 조우는 결국 전투, 필연적으로 액션 요소가 된다. 그만큼 다양한 교전 상황이 만들어지긴 했다. 그런 상황에 대응할 수 있게 ‘체술’이라는 형태의 액션 공격-반격-회피가 도입되었다. 조금씩 자원 제한이 해제되고 있던 것이다. 다양한 대응 방법이 지급되면서, 이 게임의 좀비와 괴물은 ‘도망칠 수 있는 공포’에서 ‘쳐부술 수 있는 공포’로 바뀌어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시리즈의 인기와 흥행이 올라가면서 외전작들과 다양한 트랜스미디어 작품들이 쌓여갔다. 이러면서 작중 세계에 대한 정보가 누적되었다. 잘 설명되는 것은 익숙한 것이지 공포가 아니다. 최건과 장지영은 디아블로 3의 공포 요소가 실패한 원인을 지나친 언어화에서 찾았다. ( 게임과 공포 서사를 통해 살펴본 언어화와 공포의 비대칭적 상관관계에 대한 비교연구, 최건, 장지영, 2022.02, 비교문학 제86호 )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다. 게임 속에서 만나는 공포 상황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게임 안팎에서 여럿 제시가 되면 상황을 공포가 아니라 전투로 인식하게 된다. 서사와 설정의 측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작중에서 등장하는 좀비와 괴물은 모두 바이러스나 기생생물로 인해 변이한 인간이다. 작중의 정식 명칭도 그래서 ‘생물 병기’이고 좀비 아웃브레이크 상황은 ‘생물 재해’다. 이런 생물 재해를 일으키는 방법은 당연히 테러고, 그래서 4~6편은 테러에 대응하는 액션 장르에 가깝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숙달을 통과하면서 공포가 희석되는 과정이 시리즈 전체 진행에서도 발생한 것이다. 공포, 모순 활용법 2017년의 7편, “바이오하자드 7 레지던트 이블”부터는 1편의 컨셉으로 돌아가는 것 이상이었다. 공간은 다시 좁은 실내 위주로 바뀌었고, 주인공도 새로운 인물이며, 등장하는 적은 기존의 바이러스와 기생충이 아닌 새로운 생물 병기였으며, 2/3편의 저항할 수 없는 적 요소도 돌아왔고, 아예 시점마저 제한성이 높은 1인칭 시점이 되었다. 역대 변화에 쉼표를 찍은 소프트 리셋의 느낌이었다. 반면 다양한 무기와 액션으로 대응 방법을 다각화하는 요소는 4~6편의 방향을 계승했다. ‘무뎌진’ 후의 액션 장르로의 해석 또한 긍정하는 방향이었다. * 7편의 플레이에서, 4~6편의 넓은 공간과 다양한 대응 요소는 후반부에 가야 제시된다. 그전까지는 이런 상황에서 회피 위주의 전투라는 1/2편의 요소를 해결해야 한다. 전작의 두 줄기, 공포와 액션의 요소를 둘 다 계승하는 것은 모순을 해소하는 방법이 아니다. 공포 게임은 그 개념의 시작부터 모순을 내재하고 있다. 공포라는 광의의 장르부터 모순의 장르이며, 공포 게임은 그 모순이 극대화되는데, 생존 공포 장르에 액션을 도입한 것부터가 모순적인 시도다. 어차피 게임은 경험의 매체이고, 경험은 사람을 바꾼다. 경험 진행에 따라 수용자가 변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이런 태도가 이 시리즈의 생명력의 근간에 있을지도 모른다. 태생적 모순을 전제하고 세계를 펼쳐냈으니, 그 세계의 비극미는 강조된다. 거기서 피어낸 인물들은 매력적이고, 그들과 그들의 세계는 영화, 만화, 연극으로 확장했을 때도 매력을 가진다. 수용자의 성장을 전제하는 모순이니, 이 모순을 인정한다는 것은 수용자를 신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공포 게임의 공포는 반드시 옅어지고, 무뎌지고, 희석되고, 탈각된다. 바이오하자드/레지던트 이블이 9개의 넘버링과 3개의 외전과 3개의 리메이크, 그 외 다수의 서브 작품을 진행하면서 얻은 결론은 이 태생적 모순을 피하거나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7편의 방향성을 2~4편의 리메이크작과 8편 또한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긍정하고 활용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 물론 가끔 실수는 나온다. 8편의 인형제작소 구간은 1번 저울, 공포의 정도 조절 모순을 실패한 측면이 있다. 너무 무서워서 플레이를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속출했지만, 그래도 그 공포의 질은 매우 높았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Why is the Korean Console Market Size so Small? - A Retrospective of Korean Console Games
I have a vague memory of a time when I was in upper elementary school, sometime in the early 90's or so, but I can’t recall the exact year. I had gotten a "gaming console". I think I won it in a magazine giveaway. Given the age, I can assume what model it was, but I can only make an assumption. I also do not recall the exact model. < Back Why is the Korean Console Market Size so Small? - A Retrospective of Korean Console Games 11 GG Vol. 23. 4. 10. You can see the Korean version of this article at this URL: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match=id:58 I have a vague memory of a time when I was in upper elementary school, sometime in the early 90's or so, but I can’t recall the exact year. I had gotten a "gaming console". I think I won it in a magazine giveaway. Given the age, I can assume what model it was, but I can only make an assumption. I also do not recall the exact model. The reason my memory is so fuzzy is simple: I only played with that console a handful of times. The ROM packs had either a single collection of games or none at all, so the minigames on the internal ROM were all there was. The reason, of course, was my parents. I wasn't kept from playing it, but buying a new ROM pack was out of the question, and the very act of connecting it to the TV at home was frowned upon. I had no concept of what a cable was, or why there were so many wires, and I needed an adult to show me how to connect all the right wires, but my parents actively refused to take on that role. To play the console I had to go over to a friend's house, and while their parents would help me connect everything, I wouldn’t say that they looked comfortable doing it. With no games to play and nowhere to play them, the first game console of my life naturally disappeared into a closet and was completely forgotten. I imagine that the gamers who grew up in the '80s and '90s probably shared a similar experience. As a result, console games only make up a small percentage of the South Korean gaming market today. According to the 2020 White Paper on Korean Games, the percentage is 4.5%, but 1.4% of this is taken up by arcade games, which virtually barely remain in existence. This is a far cry from North America's 38.4%, Europe's 37.5%, and South America's 19.1%, as well as the 2022 global ratio of 25.2%. In Asia, console games accounted for a mere 8.7% of the market, in large part likely due to South Korea's small console market. PC and mobile games, on the other hand, account for 25.7% and 54.1% in Asia, respectively, a stark contrast to the rest of the world. * 2020 White Paper on Korean Games, p. 668 The reason for this can be traced back to its humble beginnings in the 80s and 90s. It's a sad story of a market that started small and never experienced the momentum of hegemony experienced by arcades and PC and mobile. Let's go back to those sad days for a moment. The first game console that was sold in South Korea was the Otron TV Sports. It was a console with built-in games, just like the American "Pong" console, and was initially priced at 29,500 won, and later reduced to 198,000 won. In comparison, in 1977, the average monthly salary of a worker was 69,000 won. It was a price that was far from market formation or popularization, so it didn’t mean much apart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first of its kind. Due to the price, console gaming in Korea never really took off in the era of the family Pong and Atari, and in the '80s, Nintendo was brought to the forefront. However, the idea of Nintendo being imported into South Korea, a country with strong anti-Japanese sentiment at the time, was out of the question. Instead, PC games on the 8-bit MSX platform were imported in the early 80s as a substitute. Even then, they were a luxury, and as of 1982, less than a thousand units were imported into Korea. By the late 80s, South Korea had succeeded in hosting the Asian Games and the Olympics, and the pride from those achievements were through the roof. Naturally, the anti-Japanese sentiment had subsided somewhat, and with Daewoo Electronics releasing its own console called the Zemmix in 1985, much of the unfamiliarity with the new culture that was gaming had dissipated. Still, public sentiment made it difficult for Japanese companies to set up local subsidiaries, so domestic corporations imported consoles under different names. Only then did relevant gaming consoles begin emerging. Samsung imported and marketed the SEGA Master System under the name “Game Boy” which became a hit. Hyundai then imported Nintendo's NES, the North American version of the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and released it as the “Hyundai Comboy”. Thus, the pioneering of the Zemmix, Game Boy, and Combo formed the market. However, this market was not large-scale enough to be called a mass market. While it was a huge success, and was well-known enough for the masses to be aware of its existence, it was a market centered around enthusiasts. This much was evident based on the individual price of each console. * Daewoo’s Zemmix advertisement, priced at 70,000 KRW. (approx. 53 USD today) * Samsung’s Game Boy advertisement, priced at 119,000 KRW. (approx. 91 USD today) * Hyundai’s Comboy advertisement, priced at 139,000 KRW. (approx. 106 USD today) * The prices of console game titles in the latter half of 1992. Therefore, the cost of console games also had to be accounted for on top of the cost of the gaming console itself. With the year 1990 as the standard, these were times when the starting salaries for secondary school teachers and businessmen for large companies were less than 600,000 won. The wealth gap grew from this point on, making it a bit difficult to use 1.5 million won as the benchmark for the average monthly wage of the working class. Nevertheless, unlike with the Otron from a decade earlier, these prices were ‘a bit overwhelming but still manageable.’ In addition, the hegemony of the gaming market was slowly but surely shifting from arcades to PCs. The PC was actually a competitor to the gaming console, despite costing anywhere from 1 million KRW up to 2 million KRW at the time. In fact, they were actually holding their own weight in the competition against gaming consoles priced under 200,000 won. PCs held the advantage with the context that they were ‘preparing for the technological future’ and could be used in various ways for ‘education.’ Unlike the multifunctional PCs, consoles only offered the gaming feature, rendering even the relatively lower cost to be pointless. Furthermore, the biggest difference between consoles and PCs was the space that they took up. In general, a console belonged in the living room, and a PC in the bedroom. Gaming consoles require to be connected to a TV. The TV is a family-shared media, and so belongs in the living room. Usage of the living room TV was determined by the parents, so the children had to fight for the right to play their console games in the living room. In addition, students of that time had to study late in the night, and thus were often unable to spend time in the living room at all. On the off chance that they could, it was difficult to negotiate for TV time in the living room when their parents had just gotten home from work. But with a PC, the space becomes the room, and you don't have to contend with the usage of the living room. Once you were done studying at night, or if your parents were watching TV, you could just head into your own room. The fact that copying and distributing game software was much easier than copying console ROM packs probably also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spread of PC gaming. In the narrative of the transition from playing games in arcades to playing games at home, North America and Europe were different. The distribution rate of the PC was much faster than it was in Korea, so the perception that PCs were multifunctional rather than just used for gaming was already widespread. Essentially, the PC was already a part of the parents’ generation. Their children did not have after-school study programs nor late-night studying, and the parents already had the PC as one of their leisurely options, meaning they could afford to cede some of the power of the living room to their children. Plus, parents became cognizant of the role that consoles played as caretakers. They figured, if they gathered a few of the neighborhood kids in the living room, ordered them a pizza and gave them the game console, they could sneak out for a night at the movies downtown. Korean parents, on the other hand, had their grandparents, other parents, or late-night studying to be the caretaker, and so had no reason to give console games a glance. However, this is less the case in Europe than in North America, which can be explained by the average living space. In North America, where the residential space is much larger, having a console in the living room was no problem; but in Europe, you had to consider it first before making that change. Eastern Europe, in particular, is a former communist region with a high threshold for importing game consoles, a product of the capitalist camp. It also had a smaller living space than the rest of Europe did, which is why it has the lowest console market share. The only exception to this interpretation is the United Kingdom, where English is the native language and so is less mentally distant in regard to American culture. * While from 2014, this data helps us gather that the average residential space in North America and Australia is greater than that of Europe (especially in Russia, the eastern part of Europe.) In 1990, South Korea had an average of 62.94 square feet of living space per household, similar to Denmark in this graph, but for the cultural reasons mentioned above, they did not take advantage of this space. Therefore, we can say that North America and Western Europe saw a shift in gaming hegemony from arcades to consoles to PCs, while Korea and Eastern Europe went straight from arcades to PCs. Given the status of gaming arcades in these countries, we can summarize the narrative in terms of space. In North America and Western Europe, it's downtown to the living room, then the living room to the personal room. In Korea and Eastern Europe, it’s straight from neighborhoods to personal rooms. The narrative of these spaces is now shifting to being ‘directly in your hands’ with the concept of ‘mobile’ platforms, but the context of these spaces goes beyond that. Whether it's a glitzy downtown gaming center in North America and Europe or a dingy neighborhood arcade in Korea, arcades are public spaces built for gaming, so they naturally build a sense of community. Think of all the times you went to your local arcade to watch your friends play and play against other players from other neighborhoods. We could describe arcades as being "socially-friendly gaming spaces". When this gaming space transitions into the private space of the living room, the social aspect fades, but it doesn't disappear. Someone can watch you play games, you can converse with someone while playing, and/or you can play together, all in the living room. Console gaming is a solitary medium, but it's also a great offline social medium. When the gaming space shifted to the personal room, the social aspect became much less important. The room is a strictly private space, which is why it's possible for Korean parents to have their kids playing PC games while the parents can watch TV. The word PC stands for personal computer, after all. So, before the advent of online gaming, gaming in Korea was a one-person media, back when "playing games together" meant each person held a joystick/pad at a separate arcade/console cabinet. You could describe this as both offline anti-socialization + online socialization. The antisocial nature of PC gaming has been brought down to console levels due to the proliferation of the internet. In the case of internet cafes, it was like reverting the room’s space back to an arcade, and the “arcadeification” of StarCraft was an especially huge historical pivot in Korea. It was socially offline when you went to play StarCraft at an internet cafe with a group of friends, but it could also be done online as well. In other words, Korea’s internet cafe culture has diluted the offline, antisocial nature of PC games, but has also developed the social, online nature due to the expansion of infrastructure, and the result is no more than a reinforcement: You do not have to meet people in-person to play MMORPGs together. And so, society’s perception of games changes. In North America and Europe, where the market share is close to 40%, the offline-social view of gaming is still somewhat alive, such as when you invite friends over to play Halo. The fact that one of the slang terms for video games in American English is “nintendo games” is a testament to Nintendo's historical influence, but it also indirectly demonstrates that the social aspect of consoles is deeply woven into the perception of gaming in English-speaking societies. In Korea, on the other hand, after exiting the arcade, you go straight to your room. The perception of offline socialization is almost non-existent. Two characters that illustrate a stark difference are Thor and Koo Kyung. In the movie, Avengers: Endgame, Thor is presented as a gaming addict who plays Fortnite together in the living room with his friends. On the other hand, Koo Kyung, the main character in the Korean drama Inspector Koo, is a gaming addict, but plays MMORPGs alone in her own home. She interacts with her guildmates through the game, but is a reclusive loner otherwise in the world outside. The difference between Thor’s living room and Fortnite, and Koo Kyung’s own room and MMO role-playing game, is the distinct characteristic of Korean gaming – the lack of consoles. * Thor has become disconnected from society, but he still plays his games together with his friends. This can be seen as a remnant of the faintly offline social nature of consoles. * Koo Kyung has also become distanced from society, but unlike Thor, only she exists in her offline space. This can be seen as society’s perception of online, socially-oriented PC games. This historical context, or difference in experience, is where the difference between the social perception from outside of gaming and the gaming that consumers experience looking out from the inside comes from. The number of Korean console games being extremely low does not simply and one-dimensionally mean that fewer games are made for this platform, but also that fewer games that can be used for offline socialization are produced and consumed. Another way to put it is that games made or distributed in South Korea are made with online socialization as the primary, or even sole assumption. And now, we approach the year of 2022. The hegemony of gaming has progressed in the order of arcade, console, then PC, and is currently transitioning into mobile platforms. The offline space for mobile is incredibly narrow because that space is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it's more offline-antisocial than PCs are. Looking at this transition, you can imagine a graph where offline socialization continues to fade and online socialization grows in importance. So, are the weight of the times shifting to be completely online-social? This is a memory from a few years ago. One of my exes was hooked on the augmented reality game, Pokémon GO. They had to meet up with people in order to capture and trade for more Pokémon, and would even occasionally meet up with people from the community near their house to move in groups together around the neighborhood. This was the point where online socialization became offline socialization. Despite having the “look and feel” of a traditional online game, Pokémon GO was bringing people together to play, leaving plenty of room for interpretation as a mobile arcade or mobile internet cafe on the streets. Looking back, I remember seeing celebrities traveling from city to city to play Pokémon GO, with fans chasing them along the way. This was one of the marketing points of the Nintendo Switch. It's a console that's both stationary and portable, so two players who meet offline can play together by connecting their consoles. This proves that the mobile platform actually hides an aspect of offline-socialization. It's a paradox that makes it the first platform to facilitate offline contact because it's portable. It's phenomenally convenient compared to lugging a game console or PC to a friend's house to play together offline. Throw in the possibility of augmented reality (AR) games, and the social aspect of mobile gaming has the potential to guarantee a solid place in society. But can the offline-social aspect of Korean games, which has been missing since the arcade era due to the absence of console games, make a dramatic comeback? Can something beyond the social activities that Pokemon GO fostered be created? That answer lies in the imagination of developers and how users utilize it.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Freelancer Journalist) Sung Gap Hong a freelance journalist. I suspect that this occupational name is synonymous with 'unemployed'. Starting his journalist career at the Ddanji Ilbo, he was the first to report on the manipulation of NIS comments. Recently, I succeeded in losing weight through exercise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and I fell ill praising the trainers who coach the exercise. (Translator) Esther Yum
- 동시대 JRPG의 얼굴들 – 야쿠자, 왕자, 그리고 이방인
<33원정대>는 두 현실 사이에 중재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둘 중 하나의 편을 택해야 하며, 선택은 곧 다른 하나의 세계와 가능성을 돌이킬 수 없이 폐기하는 행위로 기능한다. 각자에게 할당된 엔딩 이후 캔버스 속 세계의 운명은 정리되어 치워지고, 주인공들에게서 이전의 모험을 반복하거나 지속할 동기나 가능성은 사라진다. < Back 동시대 JRPG의 얼굴들 – 야쿠자, 왕자, 그리고 이방인 25 GG Vol. 25. 8. 10. 파이널 판타지 XV의 개발 총괄 하지메 타바타와 샌드폴 인터랙티브의 게임 <클레르 옵스퀴르 : 33원정대(이하 33원정대)>의 감독 기욤 브로체의 대담에서, 타바타는 <33원정대>를 "일본인의 입맛에 맞춘 프랑스 식사"로 비유한다. 기욤 브로체 역시 <33원정대>가 JRPG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그에 고유한 "느낌"을 전달하고자 했음을 여러 번 밝힌다. JRPG가 일본 롤플레잉 게임(Japanese Role-playing Game)의 약어임을 떠올리면, 프랑스 JRPG란 표현은 형용모순처럼 들리기도 한다. [1] 하지만 JRPG는 공간적이고 지리적인 분화를 암시하면서도 한 세대의 유년기 게임 경험을 함축하는 장르로서 종종 호소력을 갖기 때문에 반드시 일본에서 생산될 필요는 없다고 자주 주장된다. J.D 맬린딘의 「카트리지 속의 유령: 향수와 JRPG 장르의 구축」은 게임 커뮤니티의 담화를 분석하며, "JRPG라는 이름의 “일본” 요소는 단순한 지리적 표시가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적 환경 속에서 정체성과 기억이 어떻게 협상되는지를 보여주는 요소로 기능"함을 보인다 [2 ]고 지적했다. 게임 유저들이 콘솔 기기로부터 PC로 게임 기기가 옮겨가는 기술적 전환을 경험하며, 사후적으로 콘솔 중심의 RPG 게임, 주로 일본 발의 시리즈가 주류를 이뤘던 시대의 게임을 JRPG로 프레이밍했다. 그리고 이러한 프레이밍과 협상, 항목화의 절차를 추동하는 정서적 축은 노스탤지어다. "이전에 나왔던 게임과 같은 느낌을 선사해야 한다"거나, "JRPG를 플레이하게 되면, 즉각적으로 그것이 JRPG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발화에 J.D 맬린딘은 주목한다. JRPG가 기술적으로 지체되고, 과거를 반복하고, 특정 세대의 향수에 호소하는 죽은 장르란 비판 역시 그것이 노스탤지어에 기대어 있다는 암묵적인 합의에서 출발하지 않던가? 동시에 저자는 플레이어들이 오로지 새롭고 참신한 감정을 얻기 위해서만 게임을 한다는 전제를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으로 의심하며 어쩌면 "같은 느낌"을 반복하는 것, 과거의 게임에서 느꼈다고 생각한 감정을 다시 얻기 위해 JRPG를 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제언한다. JRPG라는 장르명을 사용하는 게임 커뮤니티 언중의 담화를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카트리지 속의 유령: 향수와 JRPG 장르의 구축」은 이 반복되는 "같은 느낌"을 구성하는 반복의 구조를 깊이 다루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는 '왕도'라 일컬어지는 일직선적인 내러티브, 홀로 나아가기 보다 동료 및 파티와의 우정을 쌓아가며 강해지는 주인공, 각자 역할이 분할된 3-4인 파티 단위의 턴제 전투, 시네마틱 컷신의 삽입을 흔히 그 "느낌"의 근거로 떠올릴 수 있다. 위의 대담에서 <폴아웃> 같은 영미권의 고전 RPG와 비교하며, 기욤 브로체는 일상성을 함축한 대화, 진지함과의 적절한 거리, 마치 연속적인 컷신처럼 구성되는 턴제 전투를 JRPG의 특징으로 꼽기도 한다. 반복되어야 할 "같은 느낌"이란 일관성을 배제하고 이야기될 수 없을 터, 이 일관성을 영이의 『게임 코러스』는 ‘일관된 목소리,’ ‘믿을 수 있는 목소리’임을 약속하며 디오니소스적 근원과의 합일로 초대하는 UI의 역할과 연결한다. [3] 특징적인 UI의 반복적 배치는 일관성의 경험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과거의 순간과 우연적으로 결부되어 버리며 어떠한 시간적인 반복의 느낌을 자아낸다. 물론 어떤 장르가 되었든 그 애호가들에게는 향수로 가득한 반복과 재확인의 열망이 있을 터다. JRPG는 그 일관성의 약속이 더 강력한 구속력을, 자주 퇴행적이고 관습적이란 오명을 쓰는 그러한 구속력을 띄고 나타나는 듯 보인다. 2. 위의 논의를 바탕으로, 나는 <33원정대>를 비롯한 최근의 JRPG, 혹은 JRPG의 영향을 받은 게임들이 JRPG 특유의 "느낌"을 반복하려는 주인공들을 등장시키고 있음에 주목하려 한다. 마치 플레이어블 캐릭터(PC) 혹은 주인공이 JRPG 플레이어가 지닌 노스탤지어를 공유하거나 이해하는 양, 그들의 이야기는 게임적 환상의 반복 혹은 연장을 향한 소망으로 얼룩져 있곤 한다. JRPG를 재생산하고 반복하려는 소망을 품은 캐릭터를 내세움으로써, 한 게임이 여전히 JRPG가 되어야 할 필연성이 부연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용과 같이 7의 스팀 소개 이미지 가령 가장 노골적인 예시로, <용과 같이 7>의 주인공 이치반을 살펴보자. 본래 실시간 격투 게임의 동사들을 더 많이 빌려 오던 <용과 같이> 시리즈는 <용과 같이 7>에서 JRPG의 특징으로 꼽히곤 하는 턴제 전투로 전환하며 매너리즘을 쇄신하려 시도한다. <용과 같이 7>의 주인공 이치반은 타인의 죗값을 대신 치르러 십 수년의 청춘을 감방에서 보내며 세속 사회와 오랜 세월 단절된 인물이다. 장래 희망이 용사였다고 천진난만하게 밝히는 그는 어릴 적 플레이했던 <드래곤 퀘스트>의 세계관에 여전히 몰두해 있다. 아니, 몰두하기를 넘어서 이치반의 세계는 곧 전 야쿠자와 한구레와 양아치들이 몬스터 대신 들끓는 요코하마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한 드래곤 퀘스트와 다름이 없다. 실시간 격투 위주의 샌드박스 게임이었던 용과 같이 시리즈가 턴제 RPG로 전환하는 개연성은 주인공 이치반의 시대 착오적인 환상을 경유하여 설명된다. 커뮤니티 기능과 소위 '레벨업 노가다'를 가능케 하는 던전, 캐릭터의 '직업'을 결정하는 시스템이 새로이 시리즈에 출현한다. 이치반과 친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으로는 도적, 마법사, 검사 대신 노숙자, 프리터, 캬바걸, 호스트가 있다. 명랑 만화의 주인공처럼 지칠 줄 모르는 이치반은 거의 미치광이에 가까운 낙관과 의협심을 유지하며, 밑바닥 출신 동료들로 이뤄진 파티와 우정을 뽐내는 필살기를 써가며 용사의 역경을 돌파해 간다. 폭도법으로 몰락하고 변이한 야쿠자 세계와 동시대 일본의 도시 생태는 그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게임적인 구조, JRPG의 장르적인 느낌으로써 여과되고, 재해석된다. 한편 <메타포: 리판타지오>의 주인공은 애초부터 모험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소망에서 출발한 존재다. 왕의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핍박 받는 소수종족으로서 무력하게 숨어 지내야 했던 왕자는 어떠한 종족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그린 서적을 탐독하곤 했다. 그러한 세계를 정말로 만들기 위해 동료들과 힘을 합치는 모험, 그 모험을 능히 해낼 수 있는 강인함에 대한 소망이 투사되어 만들어진 왕자의 분신이 곧 <메타포>의 주인공이다. 왕자의 분신이면서 꿈 속의 존재인 그는 익명의 인물로 출발하지만, 유토피아를 현실로 번안하려는 용사의 여정을 따라가 온갖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그들의 연대 속에서 되고 싶었던 존재가 되고 만다. 최종 보스는 특이하게도 우리가 익히 아는 현대 일본이 진짜 현실 세계이며 그들의 판타지 세계는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주인공이 최종 보스의 설득에 넘어가 버리면 평소의 ‘FANTASY IS DEAD’란 게임 오버 메시지의 변주로 ‘FANTASY IS ONLY FICTION’이란 문구가 뜬다. 게임 오버 메시지를 통해 <메타포>는 환상을 "단지 픽션"에 머물지 않게 하는 어떤 힘을 믿어야 함을 역설한다. 여기서 장르는 기능적 UI로 설명되고 규명될 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타인과 연결되는 방법론적 틀을 제시한다. 최근의 성공적인 JRPG 풍 타이틀이 내세우는 주인공들은 ‘이’ 현실이 가능한 현실의 전부라는 식의 현실주의와 대립각을 세우고, 현실주의를 타파하는 연대로 향해 가는 과정에서 JRPG의 서사 구조를 긍정적인 자기 설명의 형태로 사용한다. 삶과 예술의 영역을 가리지 않는 정동적 기대의 공간으로 규정되는 로렌 벌렌트의 '장르' 개념을 빌리자면, 허구적 인물에게 있어 JRPG의 세계관이 현실을 견딜 만하게 해주는 하나의 장르로 출현하는 것이다. 3. <33원정대> 1막의 파티원들 <33원정대>의 접근법은 위의 게임들과 엇나가게 포개어진다는 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33원정대> 역시 애착을 투여한 환상을 반복하려는 소망이 캐릭터의 내러티브의 차원에서 표현한다. 그런데 위의 두 게임과 달리, <33원정대>에선 그 소망이 명명백백히 식별되는 원톱 주인공에게 덧씌워진 소망이 아니다. <33원정대>에서 플레이어가 조작하게 되는 '아바타'와 주인공의 일치와 불일치, 교체와 혼선이 이뤄지는 기제를 먼저 짚고자 한다. 메인 플레이 내에서, 플레이어는 아무 파티원이나 골라잡아 파티의 대표자로 조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야영지와 같이 휴식과 일상적 대화가 이뤄지는 장소에선 하나의 캐릭터, 1막, 2막, 3막의 주인공으로 대두되는 캐릭터만을 활용하여 대화해야 한다. JRPG의 문법에서 주인공은 플레이어에 의해 조작되고 움직일 수 있는 아바타로의 속성만이 아니라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인연의 중심 축으로서 성격을 띈다. 더불어, 성별화된 각본을 따르는 장르에 익숙한 기대에 따라서, 우리는 '히로인들'과의 관계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는 구스타브가 주인공이라고 쉬이 짐작한다. 주인공으로서 구스타브는 사랑하는 옛 연인을 고마주로 잃고 인생의 마지막 해인 33살을 맞아 33원정대에 합류한다. 수평선 너머에 웅크린 마녀 페인트리스는 매년 인류의 수명을 줄여서 쓰고, 그 수명을 넘긴 인간은 소멸하게 만든다. 이 소멸이 곧 '고마주'고, 고마주를 앞둔 사람들을 모아 원정대를 매해 꾸려왔으나 페인트리스의 토벌은 이뤄지지 않는다. 노인도 중년도 단 한 명도 눈에 띄지 않는 역전된 고령화 도시 뤼미에르에서 인류는 느릿느릿 다가오는 멸망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수긍에 저항하려 한 33원정대는 페인트리스의 영역에 상륙하자마자 수수께끼의 노인과 괴물들에 의해 거진 몰살당한다. 그렇지만 그와 누이처럼 자란 마엘과 남아 있는 생존자 루네, 시엘이 구스타브와 다시 여정을 함께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페인트리스에게 차근차근 다가선다. 구스타브는 그 자신의 유약함을 떨쳐 내고 세계를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구스타브는 다시금 원정대의 길을 막아선 노인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당한다. 마엘 역시 죽게 되기 전에 낯선 남자가 막아선다. 어떤 논리로 그게 가능한지는 몰라도, 베르소는 구스타브의 인벤토리에 있던 아이템과 경험치까지 계승한다. 고마주가 시작되고 최초에 보내진 원정대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신원을 밝힌 베르소는 그를 포함한 옛 원정대원 중 일부가 마녀로부터 불멸을 얻었음을 밝힌다. 불멸을 고집하는 이들은 원정대로서 본분을 잊고 페인트리스를 지키려 한다. 그 자신은 이기적인 불멸에 회의를 느껴서 마녀를 토벌하려는 원정대원들에게 여러 번 협력해왔다. 적어도 베르소의 주장은 그러하다. 말그대로 플레이어 앞에 튀어나온 이방인인 베르소가 죽은 구스타브를 대신해 2막의 주인공 자리를 꿰찬다. 다만 시네마틱 컷신 상에서 중심에 놓이는 종류의 주인공은 2막의 베르소도 살해당한 1막의 구스타브도 아니다. 시네마틱 컷신은 플레이어의 조작을 배제한 채로, 급변하는 상황을 보여주거나 일방적인 내러티브의 강제력이 작동해야 하는 순간에 곧잘 끼어드는 게임적 장치다. 컷신이 초점을 맞추는 드라마는 원정대의 막내 마엘의 것이다. 고향인 뤼미에르에서 마음 둘 곳을 찾을 수 없어 어린 나이에 원정대에 합류한 마엘은 마녀와 괴물들의 땅에 와서 어떤 친숙함을 감지한다. 그 친숙함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고 한편으로 겁에 질리게 한다. 마엘과 분신처럼 닮아 있으나 얼굴 반쪽이 일그러진 소녀가 원한에 찬 유령처럼 그녀 주변을 떠돈다. 가족과 같던 구스타브 마저 잃은 상황에서, 마엘은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세계를 멸망으로 몰고 가는 저주와 그녀가 관련되어 있다는 불길한 암시를 읽는다. 한편 베르소는 수수께끼와 불안으로 가득 찬 컷신 중심에 놓인 마엘을 곁눈질하며 침묵하는 얼굴로 나타난다. 베르소를 조작해야 하는 플레이어조차 그가 마엘에 대한 모종의 계획을 품고 진실을 감추며 술수를 부리는 모략가임을 짐작할 뿐, 어떤 꿍꿍이를 품었는지 실마리를 짚어낼 수 없다. 진실에 근접해 있으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를 택하는 인물을 조작하는 건 플레이어와 플레이어블 캐릭터 사이의 동일시를 원하는 쪽에선 곤혹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이야기의 중추는 마엘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읽히니 혼란은 배가된다. 뻐꾸기 새끼처럼 원정대에 비집고 들어온 베르소는 여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들과 관계를 쌓는 과정이 JRPG 상에서 '인연', '커뮤니티', '코옵'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온 시스템을 통해서 시작되고, 플레이어는 장르의 문법에 따라 관계망의 중심에 자리한 베르소를 새로운 주인공으로 어색하게, 또 간신히 식별할 수 있게 된다. 인연 레벨을 올리는 과정에서, 베르소는 구스타브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마엘에게 그 대신 오빠 노릇을 해주려 들고, 시엘과 르네같은 성인 여성들과는 친구가 되어가는 단계인지 연인 이전 단계인지 모호한 대화를 나눈다. 시네마틱 컷신과 메인 플레이, 인연 레벨 세 가지 차원 상의 플레이는 밀도가 다르기 때문인지 헛도는 태엽 바퀴처럼 영 맞아떨어지지 않는 인상을 준다. 티격태격하거나 추궁하거나 농담하는 식의 평범한 대화의 일상성 마저도 한편으로 가장된 것으로서,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게 다가온다. 원정대는 여러 모로 믿기 어렵지만 적어도 페인트리스 공략법은 정통한 듯한 베르소의 안내를 따라간다. 정체가 규명되지 않은 마엘의 신비한 힘 덕분에 길을 막아서는 노인의 불사 역시 해제하고 죽일 수 있게 된다. 그들은 구스타브의 복수를 해내고 마침내 마녀 페인트리스까지 무찌르는데 성공한다. 루네와 시엘, 마엘은 그들이 이제 함께 늙어가는 미래를 손에 쥐었음을 감격하며, 그 많은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고 기뻐한다. 대륙에 돌아간 그들을 사람들은 영웅으로 떠받들며 환대한다. 이 축제의 장에서 플레이어들은 비로소 그들의 주인공이 숨기고 있던 바를 비로소 알게 된다. 베르소는 페인트리스가 멸망을 부르는 게 아니라 멸망을 지연하고 인간들에게 경고하고 있음을 숨겼고, 마녀가 진정 멸망을 부르는 존재를 봉인 중이었단 걸 알리지 않았다. 그렇게 인류는 축제 속에서 멸망한다. 알리시아란 부제가 붙은 에필로그를 통해서 페인트리스와 마엘의 비밀이 밝혀지는데, 그 비밀은 규모 면에서는 하잘 것 없게 느껴진다. 마엘은 '알리시아'로 자신을 부르며 신경질적으로 재촉하는 목소리에 깨어난다. 그녀가 깨어난 저택은 플레이어들에게 아주 친숙한 장소다. 던전 도처에 '어디로든 문'을 연상시키는 입구가 있어 원정대원들이 드나드는 셸터로 기능해 온 수수께끼의 저택과 동일한 외양이다. 플레이어는 이제 알리시아로 불리는 마엘만을 조작하는데, 알리시아는 화상으로 얼굴 반쪽이 얽어지고 성대 역시 불타 말 한 마디 제대로 내뱉을 수 없다. 화마에 휩싸였던 저택 곳곳은 보수공사 중이다. 장남 베르소는 알리시아를 구하고서 화재 속에서 죽었다. 어머니 알린은 실의에 빠졌고 세상 일을 등졌다. 알린은 유년 시절 아들이 그렸던 동화 풍의 캔버스에 들어가서, 현실과 달리 영원한 생을 누리는 가짜 도플갱어 가족을 그려내고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계를 돌보며 페인트리스로서 머문다. 캔버스에의 접속이 페인터의 육체를 소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까지 잃을까 두려워하는 르누아르는 알린의 뒤를 따라가 캔버스 속 세계를 강제로 지워버리고자 한다. 두 페인터의 힘겨루기가 절멸을 향해 엄습해 오던 고마주의 정체다. 부부의 일은 가상 세계를 디자인하고 개발하거나 삭제하는 게임 디자인에 가까워 보이기에, 페인터의 비유는 한편으로 잘 맞아떨어지지 않게 들린다. 한편, 부부 싸움의 교착 상태에서 첫째 딸 클레아는 부모가 팽개치고 간 가문의 일과 화재를 일으킨 정적과의 싸움을 처리하고 있다. 클레아는 의기소침한 여동생을 돌보는 일을 내놓고 마뜩치 않아 하고, 어머니를 되찾아오려는 아버지의 일이나 도우라고 알리시아의 등을 떠민다. 하지만 페인터로서의 재능 혹은 힘이 부족했던 알리시아는 그대로 그려진 세계에 휩쓸려 어머니의 피조물 중 하나로 마엘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모두가 고마주로 소멸한 뒤, 마엘은 알리시아로서의 기억을 되찾는다. 베르소의 정체도 밝혀진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페인트리스가 그려낸 불멸의 도플갱어였다. 그는 비록 그려진 존재지만, 본래 베르소가 지닌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어머니를 현실로 돌려보내고 자신 또한 안식을 얻고자 원정대원들을 속이고 배신해왔다. 백 년 가까이 지속된 부부 싸움에서 마침내 승리한 르누아르는 아내가 다시 유혹에 빠지지 못하도록 그려진 세계와 그려진 베르소를 지워 없애려 하지만, 알리시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마엘은 페인터의 능력을 각성하고 아버지에게 저항한다. 그 능력으로 루네와 시엘을 되살리고, 아버지에 맞서 어머니 페인트리스의 자리를 계승하려는 게 3막의 줄거리다. 마엘은 본래 절도 있는 펜싱 스타일의 전투 애니메이션을 갖고 있었는데, 알리시아의 기억을 되찾고 나선 마녀 페인트리스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는 비현실적인 움직임이 특징적인 스킬을 주력으로 활약하게 된다. 마엘의 필살기 중 하나는 아예 이름이 “고마주”다. 캐릭터를 육성한 방식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 이 국면부터 플레이어들은 마엘 외의 캐릭터는 주력 공격보다는 보조로 활용하게 된다. 게임의 메인 콘텐츠인 전투 상에서 마엘은 이제 완벽한 주인공이다. 극적이고 시각적인 변신을 거친 마엘은 강력하고 힘겨웠던 적에게 천문학적인 데미지를 입히며 전투를 비교도 안 될 만큼 수월하게 바꿔놓는다. 강력한 미소녀 마법 검사를 조작하는 만족감은 한편으로 플레이어로 하여금 마엘의 캐릭터와 선택을 경험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마엘은 알리시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마엘은 플레이어가 그러한 것처럼, 바로 이것을, 이 순간을, 승리와 진전을 반복하고 세계를 구하는 역할을 맡고 싶을 것이다. 마엘은 아버지를 설득할 때 마음을 정리하고 모두와 이별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 구하고 있을 뿐이라고, 자신은 어머니와 다르며 돌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깊은 내심으로는 캔버스 안에서 죽을 때까지 머무를 작정이다. 실상 막간의 기능에 가까웠던 에필로그에서, 소위 '현실' 세계의 알리시아에게 허락된 상호작용은 화마의 상흔이 곳곳에 새겨진 저택 내를 빙글빙글 오르내리면서 자신 때문에 가족의 평온이 불가역적으로 파괴되었음을 되새기는 독백을 묵언으로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저택에서 유일하게 대화가 가능한 인물인 언니 클레아는 알리시아와 마주하는 게 성가시고 짜증스러운 티를 숨기지 않으며 자신은 동생을 위해 죽는 불가해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비아냥거린다. 마엘이 돌아가야 하는 삶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목격한 다음, 플레이어는 제작진이 공들인 게 분명한 마엘의 멋진 애니메이션으로 전투를 채우며 기이한 쾌감과 간극을 느낀다. 이 간극이 결국 마엘로 하여금 호소하게 만드는 것일 테다. 밖에서 그녀는 그저 간신히, 존재만 하고 있다고. 인연 레벨 올리기로 대표되는 JRPG 동료 시스템의 함의는 캐릭터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유대감에 대한 수량적 표현이며, 이러한 동료와의 상호작용을 게임적으로 장려하기 위하여 게임 플레이를 더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보상을 제공한다. 실제로 <33원정대> 역시 인연 레벨을 올림에 따라 동료가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필살기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 인연 맺기의 중심에 위치한 베르소는 '만렙'으로 수치화된 유대감과 상호 이해의 맥락 자체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는 듯이, 마지막에 이르러서 다시금 마엘, 시엘, 루네, 모두를 배신한다. 누구와 연인이 되거나 어떠한 선택지를 고르거나 인연을 어느 수치까지 달성하거나 따위의 조건 달성도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다. 동료들과 가장 내밀한 유대의 순간을 겪는다 한들, 그는 자신의 현실이 지속 불가능하고 애초에 존재해선 안 되는 현실임을, 고작 한 가족의 비극을 종식하기 위하여 모두가 희생되어야 함을 고집한다. 베르소는 이미 구스타브를 살릴 수 있었으나 죽도록 내버려둔 바 있는데, 구스타브의 주인공으로서 자리, 마엘 곁에서 모두의 신뢰를 얻고 페인트리스로 향하는 틀린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그 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연은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자원으로 동원된다. 이 인연 시스템은 게임 플레이 내에서 언제나 자원으로 기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단지” 자원이었단 건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JRPG의 인터페이스가 오랜 역사성과 완고함을 내포하고 있는 만큼, 그 기반이 시험 당하는 순간은 더욱 낯설고 이질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다. <33원정대>는 어머니의 외연도 한계도 모르는 애도 하에서, 어른이 되기도 전에 늙어버린 자식들이 엇비슷한 운명을 공유하는 서로를 결국에 참지 못하는 이야기다. 마엘과 베르소의 마지막 대결은 가짜가 진짜를 변호하고, 진짜가 가짜를 변호하는 역설이기 보다 상호 양립할 수 없는 두 정서적 현실의 충돌이다. 전자는 마치 여생을 보낼 완벽한 요양원을 찾은 것처럼, 장르가 허락한 역할놀이를 반복하며 자신이 죽을 때까지 존재할 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기대하고, 후자는 연명치료의 중단을 외치는 대신 껍데기만 남은 역할 놀이의 반복이 종결되기를 원한다. 두 사람은 모두 최종장에서 비등하게 중심 서사를 이끄는 인물이지만, 각자 상이한 플레이 차원을 차지한 주인공으로서 비대칭적이다. 마엘의 플레이가 반복과 변주의 쾌,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을 무력하게 만드는 향락적 차원에 해당한다면, 베르소의 플레이는 관계의 관리와 비밀의 통제, 이야기 자체의 종결을 지향하는 통제적 차원에 해당한다. 이런 대조 속에서 <33원정대>는 JRPG를 반복하고자 하는 정서적 기대와 인물 내부의 이야기 및 전체적인 세계관 사이에 긴장을 유발한다. 플레이어는 최후의 순간에 베르소와 마엘 둘 중의 한 사람의 편을 들기를 택해야 한다. 베르소는 그가 가짜임을 실감케 하는 원본의 기억에 의해서, 마엘은 죄책감과 고독으로 인해서 자신이 연원한 곳에 편안히 소속될 수 없는 이들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종용하면서 모순적이게도 자신의 현실은 조용히 인생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란다. 그들은 닮아 있지만 결코 상대가 소망하는 바를 용납치 못한다. <33원정대>는 결국 이전의 두 게임과 달리 ‘이’ 현실이 가능한 현실의 전부라는 식의 현실주의에 저항하는 이야기이기 보다는, 두 개의 현실주의 사이에 팽팽한 적대를 그리는 이야기다. <33원정대>는 두 현실 사이에 중재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둘 중 하나의 편을 택해야 하며, 선택은 곧 다른 하나의 세계와 가능성을 돌이킬 수 없이 폐기하는 행위로 기능한다. 각자에게 할당된 엔딩 이후 캔버스 속 세계의 운명은 정리되어 치워지고, 주인공들에게서 이전의 모험을 반복하거나 지속할 동기나 가능성은 사라진다. 엔딩 직전으로 돌아가지만, 엔딩의 촉매인 최종 보스가 사라져 있는 결말 이후의 플레이는 플레이어들이 남은 콘텐츠를 마저 즐기라고 남겨둔 여지에 지나지 않는다. 다회차도 썩 내키지 않는다. 세계를 구하는 용사의 여정, 마녀의 손에서 아이들을 구출하는 사명과 함께 늙어가리라는 희망 모두 최초의 순간부터 불가능하단 걸 알면서 그 모든 시간을 다시 쏟을 수 있을까? 결국 <33원정대>는 한 번 엔딩을 보고 나선 게임 내에서 “같은 느낌”에의 재방문은 불가능하다. “같은 느낌”에 근접한 무언가를 느끼기도 어렵다. 본 게임 자체가 그 자신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으로 게임 플레이를 전환해내고 있다고 봐야 할 지도 모르겠다. [1] https://news.denfaminicogamer.jp/interview/250415a/2 [2] Mallindine, J. D., 2016. Ghost in the Cartridge: Nostalgia and the Construction of the JRPG Genre. gamevironments 5, 80-103. Available at http://www.gamevironments.uni-bremen.de . [3] 영이, 게임 코러스, 워크룸프레스, 2025, 24-26. Tags: 프랑스게임, JRPG, 턴제, 애도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성훈 문학을 전공했다. 게임과 만화를 좋아한다. <심즈 4>는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 게임인데 1500시간 정도 했고 그게 수치스러운지 웃긴 건지 헷갈린다. 뚜이부치란 필명으로도 활동한다.
- 게임과 예술: 게임 플레이 경험을 깊이있게 만드는 것은 가능한가
‘게임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은, 그 질문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합리적인 대답을 기대한다면 생산적일 수 없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하고,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얻게 되는 “미적 경험(aesthetic experience)”에 대한 사유가 게임을 예술 또는 비예술로 분류하는 것보다 더 나은 접근 방법임을 주장하려고 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 Back 게임과 예술: 게임 플레이 경험을 깊이있게 만드는 것은 가능한가 12 GG Vol. 23. 6. 10. You can see this article's english version at below URL: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match=id:229 ‘게임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은, 그 질문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합리적인 대답을 기대한다면 생산적일 수 없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하고,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얻게 되는 “미적 경험(aesthetic experience)”에 대한 사유가 게임을 예술 또는 비예술로 분류하는 것보다 더 나은 접근 방법임을 주장하려고 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적 작품이란 곧 미적 경험의 주입과 같은 것이 아닌가요?” 이에 대한 대답은 ‘당연하다’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와 같은 ‘경험’의 유형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게임이 다양한 감정을 지닌 주인공이 겪게 되는 복잡다단한 내면의 상태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면, 우리는 게임을 문학이나 철학적 작품과 비교(하고 또 그에 따라 판단)하고자 할 것이다. 나의 제안은 (게임의) 예술적 지위 여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그 경험을 조망함으로써 관심의 초점을 (기껏해야 미심쩍을 뿐인 목표인) 게임의 고급 문화로의 편입으로부터 보다 심오한 게임플레이 경험으로 옮기자는 것이다. 이처럼 게임플레이 경험 깊이의 심화라는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그 경험에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면서 게임이 기존의 경험적 한계를 넘어서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미학’ 그리고 ‘경험’ 게임은 멀티미디어 작업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게임은 숙련된 개인들의 협업으로 만들어져 단일 매체의 경계를 가뿐히 넘어서는 종합예술(Gesamstkunstwerks)라 부를 수 있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 우리는 그 초점을 전체적인 경험에 맞추거나, 또는 시각적 재현이나 애니메이션, 레벨 디자인, 대사, 음악 등 보다 협소한 부분에 맞출 수 있다. 여기서 내가 ‘경험’이라 칭한 것의 개념은 ‘미학(또는 미적인 것)’의 개념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통해 드러날 수 있는데, 그 의미는 다원적이다. 서양 미학은 일반적으로 아이스테시스(aísthēsis, 감각 및 그로부터 얻는 분별력)과 노에시스(noesis, 순수하게 지적인 이해 또는 이성의 적용)을 구분해왔다. ‘미학’은 종종 ‘감각(sensation)’, ‘지각(perception)’ 및 ‘판단(judgement)’의 개념이 중첩되어 확장된 방식으로 이해되곤 하는데, 여기서 감각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얻는 것이고, 지각에서는 관찰자의 활동이 대상을 인식하거나 인지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며, 판단의 경우 미학적 판단이 개념이나 이성의 적용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닌다. ‘게임 미학’이란 컴퓨터게임, 디지털게임 또는 비디오게임이 지니는 특별한 독특성을 함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게임 미학은 ‘게임의 플레이란 어떤 느낌인가’와 같은 게임플레이 경험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감각을 통해 특정한 유형의 경험이나 인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데, 미학적 관점에서 연구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는 지속적으로 소위 ‘고급’ 문화(high culture)와 대중문화(popular culture)간의 연속성을 주장해왔다. 듀이의 생각은 인간이 분열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와 같은 분열은 우리의 (감정적, 지적, 감각적) 능력이 서로 자연스럽게 상호작용하지 못하도록 구획되거나 분리될 때 발생한다. 이 분열은 ‘예술’의 영역이 ‘생활’의 영역과 분리된 것으로 여겨지는 순간에 발생하는데, 예컨대 미술 갤러리나 오페라 하우스 같은 지정된 공간에 진입할 때에만 미적 경험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그리고 그 외부에서는 미적 경험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그 순간에 발생한다. 이러한 인식은 결국 그 외의 다른 모든 경험들을 비(非)미적인 것으로 방치하는 것이자, 심지어는 임금을 벌거나 집 청소하기, 건강 유지, 친구와의 대화 등 다양한 여타의 경험들을 직접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거기에는 다른 어떤 가치도 없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즉각적인 경험(immediate experiences)이 향상되면서 미적 경험이 개인의 주요 관심사와 삶에 통합될 때 가능한 풍요로움을 놓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가, 큐레이터, 비평가들을 탓하자는 뜻은 아니며, 예술세계에 우리의 경험을 깊이 있게 발전시킨 작품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 그러한 작품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예술세계를 분리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원하는 금전적 이해관계가 실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비/예술의 구분을 짓는 권력을 공고히 하고 ‘이것이 예술이다’라는 상징적 지위를 부여하는 권능은 현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게임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에는 다양한 중요 가정들이 내재하는데, 이러한 가정들이 게임 플레이 경험에 대한 세밀한 주의력을 발전시키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우선 어떤 것이 예술 작품인지 아닌지를 추정할 때 적용되는 ‘예술’의 개념에 대한 가정이 있다. 이러한 가정은 이분법적으로 분류함으로써 질문의 확장을 억압할 수 있다. 둘째, ‘게임’을 단일한 카테고리로 묶는 가정이 있다. 이는 단일한 장르에서도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 게임플레이를 분석하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게임을 (대부분의) 다른 예술 작품들의 방식을 통해 식별이 가능한 객체 또는 작품이라고 보는 가정이 있다. 이러한 인식틀에서 (게임의 미적) 가치는, 게임플레이의 경험을 최대한 활성화하기 위해 플레이어가 게임플레이에 들여오는 과정보다는, 개발자의 예술적 통찰이 담긴 표현에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다크 소울(Dark Souls, 2011, From Software)〉 같은 게임이 우울증에 대해 도움이 된다는 보고가 있는데, 그와 같은 플레이어의 경험적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긴 과정 동안 형성된 플레이어와 게임 간의 연결 속에서 플레이어가 가지게 된 심리적 상태(와 게임플레이에 대한 전념)였다. 비평가의 미학적 기준 지난 2005년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Roger Ebert)는 저자의 통제를 필요로 하는 문학이나 영화 등의 진지한 예술과는 달리, 본래적 속성상 플레이어의 선택을 요하는 게임은 예술의 위상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후에 이와 같은 발언이 바보같은 짓이었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에버트의 주장은 게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 - 게임은 유치하고, 세련되지 못하며, 즉각적인 만족을 충족시킬 뿐이며, 화려한 시각효과만 가득하고, 모호성을 배제하기 위해 정량화되고, 저속한 감정에 영합하는 것이라는 - 에 부합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수행했던) 로저 에버트의 주장에 대한 해체나 반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의 본질을 강조하려 한다. 그 주장이란 예술의 지위를 진지하게 다투려면 게임이 다른 예술 형식들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이와 같은 주장은 논쟁의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며, 심지어 일부 게임 철학연구자들조차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예술 철학자인 그랜트 태비노어(Grant Tabinor)는 주로 게임을 예술로 간주할 수 있을지와 같은 존재론적 문제를 연구해왔다. 이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음에도, 그는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일부 비디오게임만이 예술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접근 방식은 예술에 대한 기존의 정의에 기반하여, 게임이 해당 조건을 충족시키는지 여부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어떤 단일한 이론에만 의존하는 접근은 피하는 대신, 미적인 속성이 목록화된 ‘클러스터 이론(cluster theory)’의 방식을 취했다. 즉 목록의 미적인 속성 중 충분한 수를 충족시킨 게임은 예술작품이라 간주되는 것이다. 2009년의 저작 〈The Art of Videogames〉의 177페이지에서 태비노어는 미학자 베리스 거트(Berys Gaut)가 제시했던 클러스터의 정의를 언급하는데, 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속성들에 부합하는 것을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것들은 예술 작품이 아니다: (1) 아름다움이나 우아함 등(감각적인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속성)과 같은 긍정적인 미적 속성을 지닐 것, (2) 감정을 표현할 것, (3) 지적으로 도전적인 것(예를 들어 기존의 견해나 사고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질 것), (4) 형식적으로 복합적이되 일관될 것, (5) 복잡다단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것, (6) 개별적인 관점을 보여줄 것, (7) 창의적인 상상력을 수행할 것(독창적일 것), (8) 숙련된 고도의 기술로 생산된 인공물 또는 퍼포먼스일 것, (9) 기존 예술 형식(음악, 회화, 영화 등)에 속할 것, (10) 예술작품을 만들겠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산물일 것 태비노어는 베리스 거트가 예술 작품이라면 이와 같은 10개의 조건을 전부 충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군집적인 정의를 구성하는 조건을 제시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태비노어가 기존의 클러스터 이론이 제시한 이와 같은 조건들이 광범위하게 옳다는데 동의하는 것 - 그러한 이론이 세부 사항에 대한 수정 권한을 보유하고 있을지라도 - 은 명백해 보인다. 이러한 접근 방식에 따라 그는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 1978, Taito)〉나 〈레드 데드 리뎀션(Red Dead Redemption, 2010, Rockstar San Diego)〉 등 게임계에서 클래식으로 인정받은 게임들을 예술적 지위에서 배제했는데, 왜냐하면 이 게임들은 클러스터 이론과 매우 부분적으로만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Routledge Companion to Game Studies(p. 60)〉의 한 챕터에서 태비노어는 〈레드 데드 리뎀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레드 데드 리뎀션〉은 최신 게임 예술의 정점으로서 자주 거론되지만, 게임의 드라마나 내러티브는 섣부르게 흉내낸 파생적인 서부극에 가깝다. 영화로 치면 단호하게 B급이다. 많은 경우 게임의 서사나 캐릭터, 연기, 각본 등에서 낮은 수준이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승인된 예술에서 나타나는 세련됨의 정도에 도달하는 경우를 게임 중에서 찾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상기의 글은 결국 〈레드 데드 리뎀션〉에 대해 ‘내러티브, 캐릭터, 연기, 각본’에 따라 판단했음을 보여준다. 그와 같은 요소들은, ‘상호작용(또는 그 고유한 속성을 지칭하는 다른 프레임)’에 의해 생성되는 게임플레이 경험의 리듬이나 느낌보다는, 클러스터 이론에 더 부합하는 것들이다. 결국 태비노어는 게임이 단순히 기존 예술형식의 파생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하나의 예술 형식이라고 보는 입장임에도, 클러스터 이론을 적용한 그의 주장은 기존의 예술 이론에서 나온 (미적) 속성의 목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러한 속성들은 게임이 예술로서의 자격 - 심지어는 게임이 미학적으로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는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 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고려가 이루어지지 않은 문화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수립된 것들이다. 결국 태비노어의 철학적 방법론은 이와 같은 결과로 이어져 버렸다. 게임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들은 게임플레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기존의 철학 분야만 게임플레이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계는 중립적인 역사적 맥락 내에서 게임을 소개함으로써 게임플레이의 속성에 관한 문제를 우회하는 경향이 있다. 영국에서 최초로 열렸던 게임 전시는 2002년 바비칸 아트 갤러리(the Barbican Art Gallery)에서 열렸던 〈Game on: the History and Culture of Video Games〉였다. 미국의 스미소니언 미술관(The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또한 2012년 The Art of Video Games 전시를 통해 〈컴뱃(Combat, 1977)〉에서부터 〈리틀 빅 플래닛(Little Big Planet, 2011)〉까지의 과정을 역사적으로 접근했다. 또 다른 (우회) 전략으로는 게임의 아바타나 가상세계 거주의 개념, 게임의 표상적 측면 등 게임에 대한 이해에 있어 보편적인 측면들을 앞세우는 것이 있다. 미국의 아티스트 코리 아켄젤(Cory Arcangel)은 게임의 시각적 측면에 관념적으로 접근하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게임-관련 예술(game-related art)’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현대미술 박물관, 휘트니 박물관, 시카고 현대 미술 박물관 등지에서 전시되었다.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1983년의 게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모딩하여 푸른 하늘과 8비트의 하얀 구름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없앤 비디오 설치 작품 〈슈퍼마리오 클라우드(Super Mario Clouds)〉가 있다. 여기에는 마리오도, 쿠파도, 굼바도 없다. 이 작품에서 게임플레이는 시각적 명상(visual contemplation)을 위해 퇴치되었다. 아켄젤은 또한 2011년 바비칸에서 〈Beat the Champ〉라는 전시를 선보였는데,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간 순서대로 14개의 볼링 게임을 정렬한 이 설치 작품에서도 게임플레이는 배제되었다 . 전시 공간을 걸어가면서 관객은 볼링공이 핀에 부딪히는 소리가 아닌 거터볼(gutter ball) 소리를 듣게 되는데, 이는 점수를 낼 수 없도록 아켄젤이 볼링 게임들을 프로그래밍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갤러리의 관객들은 로저 에버트가 찬양했던 작가적 통제(authorial control)와 조우하게 된다. 연이어 발생하는 상황(실패)에 대한 사유를 유도하기 위해 디자인된 실패한 볼링 게임의 상황을 관객들이 오디오-비주얼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플레이의 경험적 측면에서 볼 때 이는 실패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사회적 및 게임의 맥락이 거세된 (미리) 결정된 실패다. 전시회장에 전시된 콘솔의 존재는 - 해당 전시에서 게임 플레이는 단순한 녹화본이 아니었다 - 관객이 게임을 직접 플레이할 수 없다는 불능성(inability)을 강조한다. 이 불능성은 게임플레이와 연계되어 발생하는 긴장과 불안, 춤을 추듯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의 움직임, 게임 리듬에 적응해가는 과정, 피할 수 없는 좌절, 그리고 어떤 게임이 가장 매력적인 게임플레이를 제공했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판단을 경험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아켄젤은 게임을 가지고 이 작품을 만들었으며, 이는 또한 그가 게임을 전시한 방식이기도 하다. 〈수퍼마리오 클라우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예술성은 전시의 개념적이고 시각적인 측면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예술 세계에서 익숙한 언어다. 하지만 이는 분명 게임이 아니다. 하나의 경험으로서 게임플레이의 신체적 도전 또한 다뤄지지 않았다. * Image from: https://coryarcangel.com/shows/beat-the-champ 한편, 로비 쿠퍼(Robbie Cooper)의 설치작품 〈Immersion(2008)〉은 게임플레이를 핵심적인 관심사로 둔다. 이 작품은 전세계 디지털 미디어 이용자들의 신체적인 반응을 기록한 것 인데, 아이들의 게임 플레이로 구성된 부분이 눈에 띈다. 플레이어 얼굴의 고화질 캡쳐는 플레이어들의 순간적인 마음 상태를 우리가 엿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이 작품에서 카메라는 마치 플레이어들이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는 듯한 위치에 놓여있다). 비록 바뀌는 게임 화면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대신 게임에서 들려오는 사운드와 플레이어의 얼굴 표정 및 신체 자세 간의 대응을 볼 수 있다. 한 소녀가 격투 게임인 〈철권5: 다크 레저렉션(Tekken 5: Dark Resurrection)〉을 플레이하고 있다. 타격이 이어지면서 캐릭터들의 신음소리나 고함소리 등과 함께 특수 효과가 곁들어 진 사운드가 들린다. 우리는 게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맞출 수 있는데, 왜냐하면 〈철권〉을 플레이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움직임이 어떤 사운드를 내는지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쿠퍼의 주체들이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인지적으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볼 수 있으며, 또한 플레이어에 의해 어떤 행동이 수행되었으며 이후 그러한 행위가 플레이어-게임 간의 장치적 루프(machinic loop) - 즉 게임플레이 - 내에서 플레이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겪는 경험의 복잡성 및 그러한 경험이 플레이어의 신체적 존재감과 어떤 식으로 엮여들어가는지에 대해 우리가 주의를 집중시키는 데 성공한 쿠퍼지만, 그 너머를 밝히는 것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거울을 들어 보여주기는 했지만 관련해서 주석은 달지 못한 셈이다. * Image from: https://robbiecooper.com/project/immersion 게임 경험을 발전시키기 위해 기존의 게임플레이 규범에 도전하는 인디 게임개발자들은 플레이어와 개발자들이 ‘좋은 게임플레이’ 모델로서 수용하여 일반화된 장르 경험을 인식시킴으로써 우리의 게임 경험을 발전시켜왔다. 그에 따라 그들은 현재의 게임 디자인에 있어서 진부해진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다른 대안적인 경험은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해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해왔다. 물론 보다 규모가 큰 개발사들도 이러한 시도를 해왔다. 나는 여기서 그와 같은 혁신의 역사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와 연관된 인디 게임의 사례들은 수없이 많고, 이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도 많이 논의가 되어왔으므로, 여기서는 간결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려 한다. 우선 〈언더테일(Under Tale, 2015, Toby Fox)〉은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유일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그리고 그것이 게임플레이가 생성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플레이어로 하여금 RPG라는 장르가 지녀온 가정을 대면하도록 만들었다. 〈브레이드(Braid, 2008, Number None)〉는 시간-기반 메카닉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면서 많은 게임들에 영향을 미쳐왔던 인과성에 대한 생각을 재고토록 했다. 〈스탠리 패러블(Stanley Parable, 2013, Galactic Cafe)〉는 게임 내 반복성의 한계를 통해 선택과 자유의 문제를 다루면서 게임 속 자유가 궁극적으로 제한적이라는 문제를 다뤘다. 〈항아리 게임(Getting Over It with Bennett Foddy, 2017, Bennett Foddy)〉는 플레이어가 ‘(스스로를) 이겨내는 것’이 가능한지, 아니면 그 자신의 자아 또는 ‘하드코어 게이머’로서의 정체성을 위해 자신에 대한 가혹한 기대 속에 갇히게 되는지를 통해 플레이어와 그 자신 간의 관계를 시험하게 한다. 그 밖에도 다양한 게임들이 게임플레이 경험에 대한 성찰을 유발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신중한 제안들을 기다려야 한다거나 게임의 예술로서의 지위나 미학적 경험을 그러한 게임들에 온전히 의지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깊이 있는 게임플레이 경험을 위해 일상의 삶과 예술을 통합하자는 존 듀이적 프로젝트는 우리가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루어 예술적인 관심을 일상으로 가져올 때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는 결코 쉬운 도전이 아니다. 이번 글에서 나는 게임플레이 ‘경험’ 및 그 경험을 깊이 있게 만들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각 개인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게임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그러한 능력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규범에 맞춰 자신들의 능력을 구획하지 않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듀이적 이념과 부합한다. 다양한 범주의 게임들이 공유하는 게임플레이 경험이 지니는 보편적인 측면들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와 같은 기술적인 일반화(descriptive generalization)는 개인들이 특정 상황에서 겪게 되는 특정한 경험들에 대한 희미한 그림자일 뿐임을 인정해야 한다. (게임 플레이 경험에는) 게임의 메카닉을 내재화하고, (게임에) 적응해가면서 추론해낸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대응하면서 점진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기술이 발전하는 것에는 기쁨이 존재한다. 또한 다양한 선택에 대한 전략적 평가와 그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한 추측이 존재한다. 관련성 여부에 따라 정보의 조각들이 선택적으로 기억되거나 잊혀지는 긴장이 존재한다. 또한 (게임플레이 경험에는) 움직이는 특정 자극에 대해서 지적이지만 무의식적인 주의 집중 - 다른 것에는 향하지 않는 - 이 존재하는데, 이는 복잡다단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회와 위협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휴식과 패배 또는 승리가 걸린 순간들이 흘러들어왔다가 나가는 흐름에 대한 감상도 존재한다. 일부 레벨 같은 특정 맥락에서는 찰나의 행동이 일부 가능성을 응축시키고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예리한 인식이 존재한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으로, 콘트롤이 포기되면서도 행사되는 고요한 순간에 자동적이고, 직관적으로, 그리고 원숙하게(능수능란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에서 느껴지는 즐거움이 존재한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게임플레이 경험과 관련해서 기억상실을 겪곤 한다. 게임을 플레이한 경험을 우리 자신의 머리 속에서 단순한 '재미'의 경험으로 치부하고는 나중에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예술’이라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해 미학적 관점을 적용하지 않는 탓이다. 그렇지 않으면, 게임을 보다 나아지거나 도전을 이기는 유형의 훈련으로 여겨, 그 진척의 정도에 따라 가치를 측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 대신, 게임플레이의 윤곽과 질감에 대해 곰곰히 곱씹어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게임플레이가 어떤 식으로 펼쳐졌고, 어떻게 발전해갔으며, 어떤 부분이 다를 수 있었을지,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를 매료시켰던 점 또는 그렇지 못했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물론 게임플레이 중에는 수행해야 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플레이하는 그 순간에 그와 같은 성찰을 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게임에 능숙해질수록 그와 같은 성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월해질 것이다. 그와 같은 성취(게임 내에서의 성취와 게임플레이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 대한 성취 모두)를 이루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습관의 철학자인 클레어 칼라일(Clare Carlisle)은 생각, 신체적 감각 및 감정적 반응에 대한 우리의 주의력이 행동을 통해 습관화할 수 있으며 감정적 감수성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복잡다단한 게임플레이 경험 속에서 우리는 그 경험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고양시킬 수 있을 것이며, 그에 따라 우리의 경험에 깊이를 더함으로써 게임이 잠재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포용성을 키울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Tags: 예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펑 주, Feng Zhu 펑 주 박사(Dr. Feng Zhu)는 영국 킹스칼리지 런던(King’s College London)의 디지털 인문학부에서 게임과 가상환경(Games and Virtual Environment)을 가르치고 있으며, 권력, 주체성, 놀이의 교차점으로서 게임플레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로 우리가 게임플레이를 통해 어떤 식으로 습관화되는지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수행하며, 특히 반영성과 주의력의 양가적 형태를 심어줄 수 있는 종단적 자아 형성으로서 게임플레이 형식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 가운데서 일부는 존재의 미학적인 측면에서 해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 축소 지향 헌터들 연대기:<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어떻게 손 안에 축소되었다가 혼종적으로 변모하려고 하는가
작년에 20주년을 맞이하게 된 캡콤 제작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2000년대 초부터 대두되고 있던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대한 일본 게임계의 대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이 처음 등장했던 2004년 일본 게임업계는 2002년 성공적으로 MMORPG를 콘솔 게임에 이식한 <파이널 판타지 XI>를 제외하면 마땅한 청사진이 없었다. < Back 축소 지향 헌터들 연대기:<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어떻게 손 안에 축소되었다가 혼종적으로 변모하려고 하는가 25 GG Vol. 25. 8. 10. 1. 단기지향적인 헌터 파티: 로컬 멀티플레이 액션 게임으로서 정체성 작년에 20주년을 맞이하게 된 캡콤 제작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2000년대 초부터 대두되고 있던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대한 일본 게임계의 대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이 처음 등장했던 2004년 일본 게임업계는 2002년 성공적으로 MMORPG를 콘솔 게임에 이식한 <파이널 판타지 XI>를 제외하면 마땅한 청사진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로는 당시 대세였던 콘솔인 플레이스테이션2 (이하 PS2)의 한계가 있었다. 이론적으로 PS2는 인터넷 대응이 되었지만, 인터넷 보급 문제와 더불어 <파이널 판타지 XI>나 <몬스터 헌터> 시리즈를 제외한 몇몇 게임을 제외하면 사실상 없는 기능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인기를 끈 <파이널 판타지 XI>조차도 외장 하드를 달아야 플레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장벽이 좀 있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이 본격적으로 인터넷 대응이 된 건 사실상 PS3 시절부터다. 콘솔 위주로 흘러갔던 일본 게임업계 입장에서는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 만들기에 상당한 제약이 걸린 셈이다. 그래서인지 2000년대 초 일본 게임계에는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을 오프라인으로 옮겨놓고 상상하게 하는 부류의 유사 온라인 게임이 더러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파이널 판타지 XI>와 엇비슷한 시기에 인기를 끌었던 프랜차이즈 <닷핵> 시리즈가 있다. 이 프랜차이즈는 실제 알맹이는 전형적인 일본 싱글 플레이 RPG 게임이었지만, 일본 게임 유저들에게 온라인 (RPG) 게임이 무엇인지 알려주려고 기획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당시 일본 게임업계에서 온라인 멀티플레이라는 개념이 일종의 괴리감이 있었다는 현상인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1999년부터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을 준비해 왔던 캡콤으로서도 MMORPG나 멀티플레이 게임을 내놓는데 조심스러웠다. 캡콤 멀티플레이 게임 프로젝트의 초기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그 점에서 온라인 멀티플레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아예 헌팅 액션 게임이라 불리는 장르로) 토착화되고 발전해 갔는지를 보여주는 게임이다. 기본적으로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삼인칭 액션 게임 기반으로 하되, 규모를 늘린 중후기 일부 토벌 퀘스트를 제외하면 4인 위주의 소규모 파티 경향이 강했던 게임이었다. 정확히는 MMORPG의 보스몹 레이드 개념을 싱글 플레이 기반 액션 어드벤처 게임의 보스전과 합치고 재해석한 후, 플레이어 혼자 또는 소수의 헌터 동료와 우직하게 보스 몬스터를 파고들고 대응해 가며 진행하는 게임이었다. 이렇기에 초창기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그 점에서 시작부터 제법 인기를 얻었지만, 코어한 경향이 강했다. 게임 디자인 자체의 불친절함과 더불어 상술한 온라인 플레이의 한계로 실상 솔로 플레이를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초기 <몬스터 헌터>는 온라인 플레이를 하기 위해 KDDI 멀티 매칭 BB라는 유료 온라인 서비스에 가입해야 했다. 시리즈가 지향했던 소규모 멀티플레이 환경은 어울리지 않는 거치형 콘솔이라는 옷을 입고 있었던 셈이다. 여기다 명확한 레벨링 시스템 없이 (간단히 말해 헌터 랭킹이 캐릭터 능력치랑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장비와 전투 숙련도로 플레이어의 실력을 가늠하는 게임 디자인과 더불어 ‘물욕 센서’로 지칭되곤 했던, 2(DOS)부터 도입된 지난한 채집 요소들도 이런 문턱에 한몫했다. 그렇기에 2부터 몬스터 헌터는 반복되는 수렵과 채집으로 장비를 만들고 개별 몬스터 파훼법을 감각으로 익혀야 다음 진행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게임이 되었다. 이를 종합해서 보면 극 초기작들은 입문자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다는 건 유추할 수 있다. 1편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 캡콤은 1편을 PSP로 이식하기로 결정한다.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 (이하 PSP)이 게임보이 어드밴스드나 원더스완으로 대표되던 휴대용 게임기에 완전히 새로운 판도를 열였기 때문이다. PSP는 비슷한 시기에 발매되었던 닌텐도 DS보다도 전체적인 성능도 훨씬 나았던데다 네트워크 기술이나 지원이 좋았던 편이었기에 <몬스터 헌터> 시리즈로서는 충분히 승산있는 시장이었다. 다만 <몬스터 헌터 포터블> 당시에도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온전한 온라인 게임이라 보긴 힘들었다. <포터블> 시절에도 무선랜 환경은 아직 초창기 단계였기에 지금과 같은 인터넷 환경을 지원하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저런 고려 끝에 포터블 시리즈는 애드 혹이라는 단말기 간 직접 통신을 이용한 소규모 로컬 멀티플레이 시스템만을 공식 지원했고, 온라인 플레이를 하려면 우회적인 편법을 동원해야 했다. 그렇기에 <몬스터 헌터> 제작진이 포터블 시리즈를 발매하면서 처음 노렸던 것은 다소 축소된 PS2 게임을 손에 들고 사람들과 만나 기기들끼리 로컬 멀티플레이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실상 TRPG나 보드게임을 즐기는 방식하고 크게 떨어져 있지 않은 셈이다. 이렇듯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당시 일본 콘솔 온라인 환경의 한계 속에서 처음 등장한 게임이기에, MMORPG와 동떨어진 방향으로 발전해 왔으며 온라인 게임을 추구했음에도, 내실은 로컬 멀티플레이 액션 게임에 가깝게 정립되었다. 심지어 <월드> 이전까지는 싱글 플레이 퀘스트와 멀티플레이 퀘스트가 분리되어 있을 정도로 제작 단계에서부터 싱글 플레이 게임 관점에서 멀티플레이와 온라인을 접근했다는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크게 주목할 부분이 있다. 바로 이 시리즈가 멀티플레이 유저 간 상호작용에 상당히 제약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몬스터 헌터> 시리즈에는 MMORPG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레이어 간 물물 교환이라는 개념이 없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모든 재화나 장비는 플레이어 본인이 직접 채집하거나, 제작해야 하며 플레이어 간에 교환하는 방법은 없다. 전반적으로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멀티플레이 유저들을 NPC 파티원을 대신하는 존재에 가깝게 정립하고 있으며 (물론 여전히 한계가 있는 NPC AI 동료에 비하면 강력하고 유용한 존재이긴 하다), 복잡한 유저 간 관계 구축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게임이다. 어찌 보면 상당히 폐쇄적인 관계라 할 수 있는데 실제로도 <월드> 이전까지는 다른 유저의 퀘스트 난입할 수 없었다. 다른 유저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필드 이외에는 퀘스트를 수주받고 정비하는 마을 내 한정된 공간 정도였고, 게임 내 길드 설립이나, 대항전 같은 시스템은 당연히 없었다. 모든 파티는 퀘스트를 위해 일시적으로 성립하고 종료 후 해체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나마 <월드>부터 이런 개념들이 조금씩 확장되는 추세다. 전반적으로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플레이하다가 다른 유저를 만난다는 개념 자체가 오랫동안 없었고, 혼자서 즐기거나 (오프라인이든 인터넷 커뮤니티든) 사전에 알게 된 사람들끼리 네트워크로 모여서 레이드를 뛴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렇기에 <몬스터 헌터> 내에서 처음 만난 헌터랑 교류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길드 카드를 서로 확인하고 등록한다는, 지극히 일본 명함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시스템을 쓰고 있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그 점에서 어떤 끊임없이 돌아가는 유저 생태계를 구현한다기보다는, 혼자서 즐기는 싱글 플레이 게임에 멀티플레이 요소를 도입해 일시적으로 모였다 퀘스트 클리어 후 해체하고 초면인 사람은 길드 카드로 교환해 교류를 이어간다는, 단기지향적인 부족/길드적인 감각으로 확장해 온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여러모로 기존 MMORPG나 MMOFPS하고는 완전히 다른 폐쇄적인 경향이 짙었지만, <몬스터 헌터>는 포터블 시리즈를 통해 <퀘이크>로 대표되던 랜파티 게임의 진화를 상징하는 게임 중 하나가 되었다. 다시 말해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정통적인 삼인칭 액션 게임을 휴대용에 맞게 ‘축소’한 후 네트워크 멀티플레이 영역을 기술적 발전과 맞춰 확장해 성공한, 꽤 독특한 방식으로 성공가도를 달려왔던 게임이다. 상술한 단기지향적인 부족/길드적 감각과 연계해 보면 게임 자체의 엔드 콘텐츠 지향적인 요소를 제외한다면 부담 없이 서로 연결하고 끊어질 수 있는 동료 관계를 지향해온 게임이라 할 수 있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멀티플레이 게임들을 기점으로 랜파티 게임은 단순히 한 장소에 고정된 컴퓨터/콘솔과 인터넷이 아닌, 휴대용 게임기 간의 무선 통신, (나아가 무선랜)을 통해 언제든지 모일 수 있게 변했다. 어찌 보면 2000년대 중후반 이후 흔해진 집 바깥에서 게임기나 스마트폰을 맞대고 대전하거나 파티 플레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중적으로 끌어낸 게임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2. 축소 지향에서, 확장 지향으로: <4>와 <월드>의 급변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2편인 DOS 시리즈가 종료될 무렵,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눠진다. 우선 스기우라 카즈노리를 주축으로 DOS 디자인을 들고 PC 쪽으로 분가해 본격적인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이 되려고 도전한 <프론티어> 시리즈가 있다. <프론티어>도 설왕설래가 있긴 해도 장기 서비스했을 정도로 성공한 편이지만, 게임계는 본가 쪽에 훨씬 더 주목했다. 왜냐하면 본가 쪽은 상술했던 축소 지향을 심화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나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트라이>까지는 선 거치형 콘솔, 후 휴대용 콘솔이라는 원칙을 지켰지만 <몬스터 헌터 4>부터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아예 휴대용 콘솔인 3DS로 이적해 자신을 훨씬 더 축소하기에 이른다. 콘솔 세대가 교체될 무렵, 거치형 콘솔을 버린다는 과감한 선택을 한 셈인데 오히려 이 시기부터 휴대용으로는 최초로 온라인 환경을 공식적으로 대응하는 등 멀티플레이 환경 개선에 주력하는 등 손안에서 즐길 수 있는 소규모 멀티플레이 액션 게임이라는 장점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다만 좋은 변화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몬스터 헌터 4>부터 게임 그래픽이나 기타 요소는 사실상 정체되게 된다. 물론 그대로 사용하지만은 않고, 새 게임이 나올 때마다 새 몬스터와 배경이 추가되고 큼직한 변화가 있긴 했지만, 사실상 이 시절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PS2~Wii 시절 게임 디자인이나 에셋을 대다수 재활용하면서 휴대용 게임기의 성능에 맞춰가는 방식으로 수명을 연장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인기의 큰 원동력인 휴대용 멀티플레이 액션 게임이라는 개념은 잘 지켜냈으니, 대다수의 유저들은 별말 없이 따라왔고 신규 유입도 수월히 이뤄졌다. 하지만 반대로 이걸 ‘우려먹기’나 한계에 갇혔다고 여기는 불만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몬스터 헌터 4>가 이적한 닌텐도 콘솔들은 성능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부류였기에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고 있다는 비판 의견도 강해져 갔다. 3DS 후기/말기에 발매된 <몬스터 헌터 크로스> 시리즈는 그 점에서 ‘축소 지향의 헌터’ 시절이 끝났음을 선언하는 시기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크로스>가 발매될 당시 혜성같이 등장한 스마트폰 시장이 점점 몸집을 키워가면서 휴대용 게임기라는 개념 자체가 다시 격변을 겪고 있었다는 점이다. 휴대용 게임기를 샀던 구매층은 대다수 스마트폰 쪽으로 이동했고, 이제 휴대용 게임기는 스마트폰과 차별화를 해야 했다. 닌텐도도 이를 염두에 둬 스마트폰 도입 초창기 발매된 3DS에서 3D 기능을 내세워 차별화를 시도했지만, 콘솔 자체의 성공과 반대로 막상 3D 게임은 정착에 실패했다. 당시 Wii U도 실패한 상태라 닌텐도는 차기작으로는 휴대용/거치용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스위치라는 휴대용과 거치용이 결합한 혼종 콘솔을 내세우게 된다. 즉 중간급 성능의 거치형 콘솔과 휴대용 게임기 콘셉트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성능과 단가 간의 줄타기를 시도했다. 세대 교체된 현시점에서 보자면 닌텐도 스위치는 8세대 콘솔 초창기 사양(PS4/Xbox One)으로, FHD 수준을 온전히 구현할 여력을 실현한 첫 닌텐도 콘솔이자 거치형 게임기와 휴대용 게임기 간의 경계를 무너트린 최초의 콘솔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고사양을 지향하는 플레이스테이션이나 엑스박스 간의 괴리는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저 둘이나 스마트폰이 갈 수 없었던 영역을 갔다는 점에서 스위치는 게임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콘솔이다. 스팀 덱을 비롯한 혼종적인 핸드헬드 게임용 PC들의 물꼬를 터준 게임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캡콤도 그 혼종적인 가능성을 주목했다. 2017년 닌텐도 스위치 발매가 이뤄졌고, 동시에 <더블 크로스> 스위치판 발매와 거치형 콘솔 복귀작 <몬스터 헌터 월드>가 발표되었다. 이는 <몬스터 헌터> 시리즈를 지배해왔던 축소 지향적인 헤게모니가 완전히 막을 내렸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더블 크로스> 스위치판은 단순히 확장판 이상으로, 스위치의 휴대용/거치용 콘솔 간 혼종적 성향을 따라가겠다는 천명이었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 제작진이 다시 거치형 콘솔로 돌아가기로 한 것은, 지금까지 휴대용 게임기에 맞춰왔던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방향성을 재정립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라 봐야 한다. 그렇게 <월드>는 새로운 <몬스터 헌터> 청사진을 제시하는 게임이 되었다. 우선 <월드>는 기존의 멀티플레이 환경을 그동안 발전한 인터넷 환경에 맞게 확장했다. <월드>는 상시 온라인 연결을 요구할 정도로 온라인 비중이 높아진 첫 <몬스터 헌터> 시리즈였다. 후술하겠지만 이는 토쿠다 유야가 제작한 몬스터 헌터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온라인과 멀티플레이 간의 결합을 고려한 듯한 디자인이 대거 도입되었다. 싱글 플레이와 멀티플레이 퀘스트가 하나로 합쳐졌고, 구조신호라는 개념을 통해 다른 플레이어의 개입을 허용하게 조처했다. 플레이어는 퀘스트를 진행하다가 도무지 어렵겠다 싶으면, 베이스캠프에서 구조신호를 쏴 올릴 수 있다. 이 구조신호는 집회소에 있는 퀘스트 게시판에서 등록되어 다른 헌터들이 확인하고 중도 참여할 수 있다. 한번 퀘스트를 시작하면 타인의 접근이 차단되는, 어떤 소규모 부족 내지는 길드적인 멀티플레이를 지향해왔던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처음으로 완라인으로 연결된 타인의 개입을 허락했다는 점에서 꽤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월드>가 한창 진행되던 시절에 더 큰 결단이 하나 일어났다. 2019년 상술했던 <프론티어> 서비스를 정리한 것이다. 의도는 명확했다. <몬스터 헌터>가 그동안 취해왔던 이원화 멀티플레이 노선을 폐기하고 하나의 게임으로 합치겠다는 의도였다. 실제로 <프론티어> 서비스 종료 당시, DOS 기반 디자인이 2010년대에 들어서서 너무 낡았기에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프론티어>의 서비스 종료는 <더블 크로스> 스위치판과 더불어, DOS 시절 디자인과 노선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앞으로 어떤 방향성으로 나아갈지 보여주는 실마리기도 했다. 바로 혼종적인 것들을 배합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창출하려는 방향성이다. 3. 혼종적 세계화의 성공과 위험: <라이즈>와 <와일즈> 시대의 명암 <월드>를 마무리한 뒤,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라이즈>를 발매해 다시 스위치에서 시작했다. <라이즈>는 <월드>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다소 사양이 떨어지는 스위치로 개발되었기에 기기 특성상 <더블 크로스> 시절의 게임 디자인과 비주얼로 회귀한 구석도 있었지만, 이 회귀엔 의미는 달라졌다. 자신을 정체시키는 방식으로 축소해 왔던 <4>랑 달리, <라이즈>는 <월드>에서 시작된 변화와 풀 스케일적인 게임의 지향성을 고려하면서도, 휴대용 게임기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는 상술했던 닌텐도 스위치의 혼종적인 특성에서 기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PSP에서 3DS로 넘어가면서, <몬스터 헌터>는 콘텐츠 축소 이상으로 구세대 게임이라는 오명을 쓸 각오하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지켜갔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이런 선택은 정체를 의미했고, 거치형 콘솔과 휴대용 콘솔 간에는 명백한 계급 의식 내지는 상하관계가 당시엔 강하게 있었기에, 시대에 뒤처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스위치는 그 계급 의식을 상당히 없애버렸고 그 결과 <라이즈>는 <월드>보다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구세대 게임이라는 오명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로도 <라이즈>는 이후 다른 거치형 콘솔과 PC로도 이식되었다. <라이즈>는 그 점에서 좀 더 고전 <몬스터 헌터>로 회귀하면서도 휴대용과 거치형, 온라인과 오프라인, 싱글 플레이와 멀티플레이 간의 혼종을 염두에 두는 2010년대 후반 이후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방향성을 선언하는 포부였다. 이후 다시 거치형 콘솔로만 발매된 <와일즈>가 나왔기에 <라이즈>를 잇는 휴대-거치 혼종적 콘솔 지향 <몬스터 헌터> 게임이 다시 나올지는 조금 기다려야 하겠지만, 적어도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양방향 노선을 짜고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간단히 말해 캡콤은 <월드>, <라이즈>와 <와일즈>를 통해 축소 지향 시절 다져놓았던 소규모-단기적 멀티플레이 게임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유행을 쫓아가고 싶어 한다. 그 점에서 <월드>와 <라이즈>는 휴대용 콘솔의 혼종적 변화라는 사건을 두고 이뤄진 변증법적인 관계를 형성한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월드>와 <와일즈> 같은 거치용 콘솔 전용 <몬스터 헌터>를 통해 공격적으로 외양을 확장하고, 이때 받은 피드백을 <라이즈> 같은 휴대용 게임기 중심 혼종 지향 <몬스터 헌터>로 적용해 내실을 꾀하는 것이다. 다만 올해 발매된 <와일즈>가 겪고 있는 위기는 캡콤이 새로이 내세우고 있는 지향성이 자칫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방향성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이 문제는 역설적으로 온라인의 비중을 늘려 지금까지 단단하게 유지해 왔던 경계를 무너트리고 공간을 확장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사실 <월드>부터 온라인 서비스로서 정체성을 강화하고 필드 세계를 풍부하게 하려는 토쿠다 유야의 노선과 이에 반발하며 싱글 플레이/소규모 멀티플레이 콘텐츠에도 신경 써 주라고 요구한 유저들 간의 대립이 암암리에 이어왔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몇몇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줄타기에 성공했던 <월드>랑 달리 <와일즈>는 괜찮은 싱글 플레이 콘텐츠와 정반대로 부족한 멀티플레이 엔드 콘텐츠 문제와 더불어 온라인 환경을 강제하는 방향성과 디자인상 여러 문제로 많은 반발을 샀고 대량 유저 이탈로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와일즈>는 세미 오픈 월드 도입과 더불어 파티원 이외 필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헌터들을 볼 수 있는 첫 번째 <몬스터 헌터> 게임이라는 것이다. 설정상으로 <와일즈>의 헌터들은 개척자에 가까운지라 베이스캠프가 집회소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필드에서도 파티원 이외 헌터들을 계속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다 기존 퀘스트 수주 시스템에다 자율 탐사 도중 필드에 돌아다니는 몬스터를 공격해 퀘스트를 시작하는 시스템을 추가하면서 수렵을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변했다. 이렇게 필드에서 몬스터를 공격하면 퀘스트를 발동하면 여러 추가 보상이 주어진다는 이점으로 헌터가 세미 오픈 월드 시스템을 거쳐 가도록 유도하고 있다. <와일즈>에서 확실해진 점이 있다면 토쿠다 유야 체제 <몬스터 헌터>는 시리즈가 암암리에 지켜져 왔던 폐쇄적으로 구분된 공간과 헌터 간 관계망, 퀘스트 구조를 실제 수렵 과정 내지는 온라인 게임처럼 ‘열려있게’ 변하는 방식으로 게임의 외연을 확장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상술한 <프론티어> 서비스 종료와 연계해서 보면, <월드>와 <와일즈>는 여러모로 온라인 (세미) 오픈 월드 헌팅 액션 게임으로서 <몬스터 헌터> 시리즈를 유도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단순히 기종뿐만이 아니라 게임 디자인에서도 혼종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세미 오픈월드적인 시도들에 대한 반응은 그리 좋지 못하며 <와일즈>에 이르면 콘텐츠 강요라는 비난까지 나올 정도로 많은 반발을 사고 있다. 이런 반발은 지금까지 정체성과 신규 요소가 잘 조화되지 못했던 부분도 있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퀘스트를 하기 전 거점에서 준비한 뒤 출발하고, 퀘스트 종료 후 거점에서 재정비하는 절차가 강한 게임이다. 그렇기에 거점과 몬스터가 있는 필드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고 자유롭게 다니게 하는 세미 오픈 월드 구성을 취할 거면 완전히 새로운 방법론을 택해야 했다. 즉 헌터가 거점과 필드 간의 전환을 해야 할 강한 동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와일즈>는 다소 안이한 절충주의를 택했다. 그 결과 세계의 밀도는 높아졌는데, 정작 그 높아진 밀도가 핵심 콘텐츠인 헌팅/채집에 포만감보다 피로감을 더한다는 <월드> 당시의 지적이 오히려 심화하여 나타나게 되었다. 자율 탐사 도중 수렵 퀘스트 돌입 시 추가 보상 역시 일부러 헌터가 세미 오픈 월드 형식을 따라가야 할 강력한 동기 유발이 되지는 못했다는 게 발매 후 중론이다. 결국 <와일즈>의 반쯤 열린 세계는 중간이 희박하고, 그 중간에 들어간 요소들은 헌터 입장에서는 지극히 미시적 것들이라 지금까지의 싱글 플레이 기반으로 칼같이 구분된 공간과 관계망에서 진행되는 부족적이고 단기지향적 멀티플레이에서는 오히려 불편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월드> 시절부터 거의 반 강제화된 온라인 환경이 정작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사실 역시 피로감을 가중하는 결과만 나왔다. 즉 <와일즈>는 시리즈 기준으로 과감하게 세계의 경계를 허물었고 그 지점에서만 한정해서 보면 어느 정도 성취를 거뒀지만, 정작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게임 디자인과는 잘 조화되지 않고 어색하게 동거하는 모양새가 되어 자기 발목을 잡은 셈이다. 이외 <와일즈>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들도 있으나, 이 글 방향성에서는 다소 일탈하기에 생략한다. <와일즈>가 지금 겪는 진통은 거치형 콘솔 <몬스터 헌터>로 복귀 후 생긴 과도기 현상의 지나친 지속/개악과 더불어 유저들과 개발진의 성향 차와 알력이 맞물려 벌어진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월드> 이후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싱글 플레이 액션 게임을 확장한 소규모 멀티플레이 게임이라는 기존 정체성과 세미 오픈 월드-온라인 게임이라는 새로운 정체성 간의 혼종을 꾀하려 하나, <와일즈>에서는 계산 실패로 걸려 넘어졌고 그 결과 헌터들은 이탈했다. 그렇기에 <와일즈>의 진통은 역설적으로 싱글 플레이와 멀티플레이 간의 경계가 아직도 견고하며,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월드>부터 내세우는 기종적, 게임 디자인적 혼종이 여전히 난제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완전히 끝장났다고 보긴 힘들다. 일단 시리즈 전통으로 확장판을 내놓아 타이틀의 수명을 늘리는 전략이 있었고, 2010년대부터 서비스로서 게임 개념이 강해지면서 당장의 곤란만으로 게임 전체의 수명을 판단하기엔 힘들어졌다. 물론 <와일즈>가 이렇게 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엔 <와일즈>가 완전히 망하더라도 혼종적 휴대용 게임기라는 성과를 이어가려는 스위치 2라는 와일드카드가 있다. 지금 당장은 스위치 2로 나올 <몬스터 헌터> 신작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라이즈>에서 그들은 휴대용 게임기의 새로운 가능성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야심을 보였다. 그렇기에 다시 살짝 축소한 뒤 소규모 멀티플레이의 재미를 내세우는 고전적이지만 시류도 잘 따르는 <라이즈> 스타일의 <몬스터 헌터>로 성난 헌터들을 유혹하려는 건 시간 문제리라 본다. 그렇기에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축소 지향 및 휴대용 게임기 지향으로 획득한 정체성은 유령처럼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프랜차이즈를 맴돌고 있으며, 캡콤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Tags: 몬스터헌터, 프랜차이즈, 액션롤플레잉, 일본게임, 헌팅액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이이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전문사 졸업 후 영화•게임 비평 기고 활동중. 어드벤처 게임 좋아함. (antistar23@gmail.com )
- 게임을 산책하기(장려상)
지난 5월 2일 민형배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은 “가상공간에서의 가상인물을 통한 음란행위”를 성범죄로 규정하고 있다1). 물론 민형배 의원의 개정안은 현실의 성폭행 범주를 고스란히 옮겨와 메타버스 속 성범죄를 온전히 규정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이 개정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메타버스라는 아바타를 신체의 확장으로 바라보며, 아바타의 경험이 실제 신체의 체험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Back 게임을 산책하기(장려상) 07 GG Vol. 22. 8. 10. 지난 5월 2일 민형배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은 “가상공간에서의 가상인물을 통한 음란행위”를 성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1) . 물론 민형배 의원의 개정안은 현실의 성폭행 범주를 고스란히 옮겨와 메타버스 속 성범죄를 온전히 규정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이 개정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메타버스라는 아바타를 신체의 확장으로 바라보며, 아바타의 경험이 실제 신체의 체험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메타버스 등의 용어로 불리는 가상공간을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은 게임이다. 디지털 게임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 이동 및 탐험을 경험하는 것이다. 아타리의 게임 〈어드벤처〉(1979)의 이스터에그를 찾아내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마지막 미션이 시사하듯, 게임이라는 경험의 본질은 공간을 탐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경험은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메타버스 성범죄의 사례는 게임에서의 경험이 실제의 경험과 동등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MMORPG에서 타 유저와의 의사소통, 오픈월드 게임에서 마주하는 NPC와의 랜덤 인카운터 등은, 도시를 돌아다니는 현대인이 마주하는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발터 벤야민은 보들레르나 에드거 앨런 포 등 19세기 문필가의 작품을 분석하며, 대도시 군중의 모티프가 반복됨을 지적한다. 그는 이들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대도시 군중 속을 걷는 거리 산책자의 충격체험이 신문, 아케이드의 간판, 대중교통 등이 초래하는 대도시의 촉각적 경험과 충격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분석한다 2) . 이는 변화하는 현대 파리의 모습을 보고 기억하는 산책자의 행위에 주목했던 보들레르의 관점이, 대도시 군중과 어깨를 부딪히며 나아갈 수밖에 없는 대도시의 산책자의 상황에 이르러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변화는 벤야민이 살아가던 1920~30년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동시에 대도시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가속화되고 있다. 어쩌면 벤야민이 말하던 충격체험은 대도시의 속도 속에서 삭제된, 폴 비릴리오의 말을 빌리자면 “속도에 의한 공간의 절멸”로 인해 사라지고 있는 경험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한 의미에서 디지털 게임이 구현하는 가상공간의 경험은, 삭제된 경험을 되살리는 것일 수 있다. 가상공간에서 서로의 아바타가 맞닿는 과정이 플레이어의 신체에 물리적인 충격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디지털 게임은 인간에게 실제 살아가는 공간과 유사한 현실성의 공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디지털 공간의 현실성은 가상공간이 더 이상 실재가 아닌 가상이라 치부되며 실제의 열화된 버전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공간과 동등한 선상에 놓고 논의해야 할 필요성을 요구하게 된다 3) . 이러한 인식 속에서 게임이 제공하는 공간 경험은 신체가 느끼는 ‘정동적 놀람’의 상태를 동반한다. 게이머들이 〈레드 데드 리뎀션 2〉(2018) 속 아서 모건의 이야기에 동화되어 감동을 느끼거나,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2020) 속 엘리의 폭력적 복수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그러한 ‘정동적 놀람’ 상태의 대표적 예시다. 공간 경험에 기반한 정동적 놀람의 상태는 앞서 언급한 산책자의 충격경험과 유사하다. 앞서 언급한 예시를 이어가자면, 아서 모건의 여정을 함께한 플레이어의 경험은 광활한 게임 속 영토를 탐험하는 경험과 함께한다. 선형적인 구성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엘리의 여정을 함께하더라도, 그것은 게임 속 스테이지를 옮겨 다니던 이동의 경험이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는 게임 속 플레이어블 캐릭터 혹은 아바타의 가상 신체를 통해 게임 속 공간을 돌아다니는 산책자가 된다. 그러한 산책자로서의 경험이 강조된 게임을 꼽자면 코지마 히데오의 〈데스 스트랜딩〉(2019)이 있겠다. 〈데스 스트랜딩〉은, 물론 전투가 존재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동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게임이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샘은 배송기사고, 멸망 이후의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이 쉘터에서 저 쉘터로 배송한다.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콘텐츠는 그러한 배송 자체다. 때문에 〈데스 스트랜딩〉의 핵심은 ‘배송하는 감각’을 재현하는 것에 있다. 디지털 게임이 게임기기의 입력장치를 통해 캐릭터의 움직임을 모방한다고 할 때, 〈데스 스트랜딩〉의 조작방식은 무거운 화물을 등에 짊어지고 움직이는 주인공 샘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체험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면 짊어진 화물의 중량에 따라 샘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그때마다 게임패드의 트리거 버튼을 알맞은 방향으로 눌러 샘의 무게중심을 잡아주어야 한다. 만약 무게중심을 잃은 샘이 넘어지게 된다면 짊어진 화물들이 쏟아지게 되고, 화물들을 다시 주워야 하는 것은 물론 화물이 데미지를 입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샘이 황량한 게임 속 세상을 걸어 다닐 때뿐 아니라, 바이크 등 탈것에 탑승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플레이어는 샘을 통해 게임 속 세계를 산책하며 그곳을 경험한다. 게임패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물리적 경험은 게임이 지닌 가상공간 속에서의 체험을 강조한다. 물류를 배송하며 겪는 BT(Beached Things, 좌초된 것들)나 택배도둑 뮬(Mule)과의 전투, 시시각각 변화하는 기후에 따른 어려움 등은, 비록 벤야민이 정의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일지라도, 일종의 충격체험을 플레이어에게 선사한다. 혹은 산책을 의도치 않은 게임 속에서 산책을 시도함으로써, 게임에 내재된 규칙을 전용하는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2021년 배틀로얄 게임 〈배틀그라운드〉(2017) 내에서 진행된 〈에란겔: 다크투어〉 퍼포먼스가 대표적인 예시다. 퍼포먼스는 온라인으로 접속한 다른 참가자들을 이끄는 리드 퍼포먼서로 게임평론가 이경혁, 디지털 스토리텔링 연구자 권보연, 기계비평가 이영준을 섭외하여 각기 게임을 잘 아는 원주민, 게임을 잘 알지만 다른 게임세계에서 이주한 이주민, 게임 자체를 모르고 완전히 낯설게 초대된 이방인 역할을 수행하게끔 하고, 게임방송 BJ를 섭외하여 퍼포먼스를 중계하였다. 〈배틀그라운드〉 속에서 리드 퍼포먼서 및 이들을 돕는 조교 역할을 수행하는 퍼포머들이 참가자들과 함께 게임 내의 지역인 ‘에란겔’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한다는 컨셉으로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 〈에란겔: 다크투어〉의 메뉴얼은 "단 한 명의 생존자가 되기 위해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대신, "단지 총성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이 게임 공간 속에 의미가 풍부한 각종 오브젝트와 건물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 4) 이라며, 마치 몰락한 구 소비에트 연방의 어느 변두리를 연상케 하는 게임의 무대가 되는 가상공간 에란겔 섬에 대한 다크투어리즘을 제안한다. 참가자들은 플레이어가 아닌 관광객으로서 게임에 접속하고, 세 명의 리드 퍼포먼서가 진행하는 게임 내 강연의 청중으로, 다른 퍼포먼서 및 참가자들과 함께 게임의 가상공간을 산책하는 산책자로, 마지막에는 한자리에 모여 게임이 구현하는 동작의 한계 내에서 집단적인 의식의 춤을 추는 퍼포먼서로 참여하게 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에란겔: 다크투어〉는 디지털 게임의 가상공간을 산책하고 관광함으로써 새로운 방식으로 그곳을 경험할 것을 제안한다. 세 리드 퍼포먼서의 강연은 기본적으로 디지털 게임이 그려내는 가상세계가 현실과 동떨어진 일종의 정서적 피난처나 단순한 유희공간이 아닌, 그것이 드러내는 이미지, 텍스트, 사운드, 규칙, 상호작용 등의 요소들을 통해 현실과 관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령, 〈배틀그라운드〉가 묘사하는 가상공간이 지금의 모습이 되기 전에는 어떤 인류학적 장소였을 수 있다는 암시를 찾아내거나, 각기 다른 규칙이 존재하는 다른 가상세계 혹은 현실세계의 이야기를 에란겔의 상황과 중첩시키는 등의 방식을 택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게임을 전용하는 것은 보들레르가 말했던 산책자의 기억술을 대도시가 아닌 디지털 게임이라는 대안적 공간 안에서 소생시킨다. 또는 정말로 산책과 결합된 게임의 형태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나이언틱이 개발한 〈포켓몬 고〉(2016)를 실행하면 구글맵(Google Map)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지도가 등장한다. 현실의 지리학을 고스란히 가져온 지도 위에 포켓스탑과 포켓몬 체육관이 표시되어 있고, 플레이어의 실제 위치는 스마트폰의 GPS를 통해 게임 내 캐릭터의 위치와 동기화된다. 〈포켓몬고〉의 지도는 아무런 지명, 건물명, 교통수단 정거장 등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단지 텅 빈 지도 위에 공공시설, 역사적 장소, 공공성을 띠는 조형물 등이 포켓스탑의 형태로 등장할 뿐이다. 그것의 생김새마저 포켓스탑을 터치해야 등장하는 사진을 통해 볼 수 있다. 〈포켓몬 고〉의 플레이어는 평소라면 지나쳤을 장소에 게임을 위해 머무르게 된다. 이를 통해 익숙한 산책로, 등굣길, 출퇴근길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게임의 공간은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접속 가능하지만, 게임의 가상공간 자체가 현실의 지리학을 따르는 덕분에 게임의 가상공간과 현실의 공간 사이의 위계가 무력화된다. 그럼으로써 〈포켓몬 고〉의 유저들은 새로운 지역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도 한다. 희귀한 몬스터를 사냥하고 포획할 수 있는 레이드나 인게임 재화를 얻기 위해 필수적인 체육관 점령 등 다수의 유저가 참여해야 하는 콘텐츠는 지역 별로 〈포켓몬 고〉 커뮤니티를 형성하게끔 유도한다. 굳이 오픈 채팅방 등을 통해 커뮤니티에 소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레이드나 체육관 점령 등을 위해 〈포켓몬 고〉를 켜고 산책하다 보면 다른 유저를 마주칠 수 있기도 하다. 그러한 상황을 발생시키는 것 자체가 〈포켓몬 고〉의 콘텐츠인 셈이다. 게임이 만들어내는 가상공간이 점차 현실의 공간과 위계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소위 메타버스의 시대라 할 수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포켓몬 고〉의 사례는 그것을 물리적으로 입증하는 하나의 사례다. 더 나아가 정여름 작가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처럼 실제 공간 위에 덧씌워진 가상이라는 〈포켓몬 고〉의 컨셉을 영화와 미술 작업에 활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다시 처음 언급한 “성폭력 특례법 일부개정안” 이야기로 돌아가자. 게임의 가상공간 안에서 산책자로서 활동할 수 있다면, 그것에 따른 부작용 내지는 현실에 존재하는 차별 또한 가상공간에 존재한다는 의미다. 산책자, 그러니까 플라뇌르(flâneur)는 프랑스어 남성명사다. 이는 보들레르나 벤야민이 플라뇌르를 개념화하던 시기의 산책자는 주로 남성이었으며, 여성은 남성의 시선이 닿는 사물적 대상이거나 소득을 얻기 위해 길 위를 서성이는 성노동자였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로런 엘킨이 제시한 "도시를 걷는 여자들", 즉 여성명사 플라뇌즈(Flaneuse)는 그러한 개념어의 전복이다. “성폭력 특례법 일부개정안”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작금의 상황은 게임과 메타버스 내에서도 플라뇌르는 여전히 가능하지만 플라뇌즈는 아직 불가능함을 시사한다. 게임에서의 공간 경험이 현실에서의 경험과 점점 분간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아니, 굳이 분간할 필요 없이 제2의 자연으로 가상공간이 존재하는 상황에 가깝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게임 내 성폭력, 각종 차별과 혐오발언은 자유로운 산책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러므로 게임 속 가상공간이 제공하는 경험의 질을 규명하는 것은 그곳의 성격을 직시함으로써, 이곳저곳에 산재한 문제를 해소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의 경험이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 될 때, 모두가 동등하게 게임 속을 산책할 수 있을 때, 가상공간의 유토피아라는 허황된 꿈에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 있다. 1) 국민참여입법센터 국회입법현황, https://opinion.lawmaking.go.kr/gcom/nsmLmSts/out/2115468/detailRP (2022.06.27 접속) 2)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발터 벤야민 선집 4』, 최성만(역), 서울: 도서출판 길, 2010. 3) 오현주, 「디지털 게임 공간의 체험적 특성」, 홍익대학교 대학원 영상학과 박사논문, 2016. 4) <에란겔: 다크투어>에 관한 스테이트먼트, 매뉴얼 등은 다음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notion.so/03-20-21-14-00-15-00-2-4652d0e6c472438595a27e889dd55b7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박동수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하고 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미술, 게임, 방송 등 시각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영화평론가, 팟캐스트 [카페 크리틱] 진행자, 공동체상영 기획자이기도 하다.
-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의 순간
리얼리즘의 탄생은 근대 이래 과학주의의 확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하지만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다양성, 사회적 상호작용의 게임화는 리얼리즘과 과학주의 간 긴밀한 관계를 위협하고 있고, 이로 인해 우리는 리얼리즘이란 것에 대해 다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게임적 리얼리즘(ゲーム的リアリズム)’ 이론은 그 안에 이론적 균열과 논리적 모순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하여금 리얼리즘 내러티브라는 문제와 침묵하는 독자를 자율적인 행위자로 바꾸는 게이머 문제를 사고하도록 해주었다. < Back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의 순간 12 GG Vol. 23. 6. 10.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 [1] 의 순간 游戏性现实主义:“第三时间”与多异性时刻 [2] 리얼리즘의 탄생은 근대 이래 과학주의의 확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하지만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다양성, 사회적 상호작용의 게임화는 리얼리즘과 과학주의 간 긴밀한 관계를 위협하고 있고, 이로 인해 우리는 리얼리즘이란 것에 대해 다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게임적 리얼리즘(ゲーム的リアリズム)’ 이론은 그 안에 이론적 균열과 논리적 모순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하여금 리얼리즘 내러티브라는 문제와 침묵하는 독자를 자율적인 행위자로 바꾸는 게이머 문제를 사고하도록 해주었다. 디지털 게임 속에서 리얼리즘적인 스토리 시간과 내러티브적 시간이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읽는 시간 즉 ‘제3의 시간’, ‘노는’ 시간이 구해진 것이다. 실제 세계로부터의 신체적인 충동이 게임 행동의 핵심으로 전환되고, 리얼리즘 내러티브의 정신적 이끔이 게임적 리얼리즘의 감각적 이끔으로 대체된다. 행동을 주도하는 의미생성 방식이 그 핵심이 되는 것이다. 게이머는 더 이상 세계의 사물 뒤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사람들의 육체가 존재하는 방식처럼 세계의 사물 자체에 놓이게 됐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리얼리즘 비디오게임의 디자인, 소비, 상벌, 인식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일종의 파노라마적인 지식의 환각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 게이머는 신체의 감각에 빠져 파노라마 지식 환각의 의미를 조각화, 껍데기화하는 것에 전념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비디오 게임 내러티브에서 게이머의 행동 중 어느 것도 상징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며, 불안정한 ‘다이성’을 나타나게 된다. 이제 가상현실은 메타스페이스에 도달하였고, 이곳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게임적 방식’으로 개인의 일상 경험에 몰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험은 이제 거짓이나 상상이 아니라, ‘리얼’이다. 즉, 인류의 지식에서 배제됐던 ‘게임’은 “자유의지”(Immanuel Kant), “심리상태의 경계”(Friedrich von Schiller), 혹은 “정력의 과잉”(Herbert Spencer)의 게임이 되고, 메타버스 시대에 새로운 지적 경험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즉 “게임을 통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게임 자체가 지식”이 됐음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메타버스는 일상의 잉여로서의 ‘놀이’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인류 일상의 이념을 변화시켰다. 세 가지 리얼리즘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캐릭터 독립(角色独立)’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본 연구자 아즈마 히로키가 창안한 개념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 개념의 정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의 글이나 오오츠카 에이지(大冢英志)와의 대담을 통해 이 개념의 의미를 추론할 수 있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 동물화된 포스트모던>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세 가지 리얼리즘을 언급했다. 그는 오오츠카 에이지의 연구가 자연주의 리얼리즘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라는 두 가지 리얼리즘을 도출했다고 봤다. 자연주의 리얼리즘이 꼭 에밀 졸라(Émile Zola)로 대표되는 자연주의 유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일본에서 라이트노벨이 등장하기 전에 존재했던 순수문학의 한 형태로서 ‘사소설(私小說)’을 지칭한다. 오오츠카 에이지에 따르면 사소설은 모두 상대적으로 안정적 발화 주체인 ‘나’를 갖고 있으며, ‘나’가 스토리의 논리와 구조에 따라 발화하는 소설이라고 언급한다. 한편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일본에서 새롭게 등장한 라이트노벨을 지향하는데, 이러한 종류의 소설에는 등장인물이나 캐릭터, 스토리, 플롯을 통제할 수 있는 안정적인 발화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라이트노벨의) 작가는 캐릭터 자체에 얽매이는데, 오타쿠들이 애정하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 속의 ‘2차원’ 캐릭터 자체가 이야기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라이트노벨은 사소설이 한 명의 ‘나’로 소설을 통제한다는 의식을 바꿔버렸다. 아즈마 히로키는 오오츠카 에이지의 두 가지 리얼리즘 구분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자연주의 리얼리즘이든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든 작금의 현실을 완전히 드러내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즈마 히로키는 이 새로운 리얼리즘을 ‘게임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면서 세 가지 리얼리즘의 분류를 완성했다. 그렇다면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게임적 리얼리즘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모두 ‘캐릭터’가 핵심이지만, 게임적 리얼리즘의 경우 캐릭터의 메타서사 기능(메타적 스토리성)에 기초한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핵심포인트는 여전히 “캐릭터 독립”이라는 것이다. 즉, 이야기(故事)는 플롯(情节)이나 현실 때문에 설정되는 게 아니라, 어떤 캐릭터를 위해서 설정되는 것이다. 독자들이 그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감동적인 순간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 속 캐릭터의 삶과 상태를 느끼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캐릭터 독립이란 사실 캐릭터가 게임적으로 존재함을 가리키며, 이는 게이머나 독자가 자유롭게 캐릭터를 이용한 결과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메타서사’를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게임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곧 소위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신체와 캐릭터 사이의 경계를 제거하고, 게이머/독자를 텍스트의 일원으로 만드는 방식——게이머/독자의 캐릭터화——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캐릭터’ 독립의 관점으로부터 설정되는 게임적 리얼리즘에서 중요한 측면을 망각하는데, 공교롭게도 ‘캐릭터 독립’은 독자가 읽고 소비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하는 결과라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독자가 캐릭터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갖기 때문에 스토리 설정의 내적인 동력이 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독자가 원하는대로 캐릭터를 위한 스토리를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독자는 침묵하는 독서인이 아니라 ‘게임을 열독하는’ “게이머”가 된다. 따라서 ‘캐릭터 독립’은 읽는 행위의 문제를 지향하는데, 독자들이 이와 같은 캐릭터 독립을 원하기 때문에 캐릭터는 독립할 것이란 점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텍스트에서 독자의 의지는 얼마든지 이야기의 의지(그것이 존재한다면)를 바꿀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적 리얼리즘은 사람과 캐릭터가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며, 즉 독자(게이머)가 캐릭터 속으로 완전히 녹아드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에서도 발생했지만, 가상현실 시대에는 더욱 전형적으로 변화했다. 가상현실 서사 [3] 에서는 인간과 캐릭터의 구별이 모호해졌다. 그들의 삶의 경계는 점차 통합되며, 이와 같은 인간과 머신의 공생은 새로운 캐릭터 의식을 낳았다. 근대 이후 과학적 진실에 대한 요구가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을, 내러티브 속 캐릭터의 ‘재생’에 대한 포스트모던 사회의 요구가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을, 가상현실 시대에 인간과 가상 캐릭터의 일체화가 게임적 리얼리즘을 만들어낸 것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종의 새로운 현실 경험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가상의 형식으로 실제의 신체적/정신적 경험을 창조하기 때문에 가상세계의 경험은 실제 생활 경험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뿌리는 바로 ‘게이머’ 자체다. 게이머는 캐릭터가 담고 있는 의미를 잠재적으로 구성하고, 실제 텍스트 활용의 과정에서 이와 같은 텍스트 활용 과정을 게임적 리얼리즘의 핵심으로 만들어버린다. 바로 여기서 게임적 리얼리즘은 단순히 장르(genre)나 형식(style)이 아니라, 가상현실 자체를 지향하는데, 이때 ‘게임적 리얼리즘’은 가상현실의 철학 이념과 스토리텔링의 규칙을 의미하게 된다. 여기서 ‘캐릭터 독립’이란 곧 읽는 행위의 문제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캐릭터 독립은 왜 발생할까? 그것은 독자가 이와 같은 독립을 원하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오타쿠의 2차원적 내러티브에서 캐릭터가 꼭 이야기에 속하는 것은 아니며,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이야기가 결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 역시 아니라는 점, 즉 라이트노벨에서는 캐릭터의 성격이 플롯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따라서 라이트노벨은 사소설과는 다르다. 사소설이 작가 중심적이라면, 라이트노벨은 독자 중심적이다. 캐릭터에 대한 독자들의 활용(물론 완전히 자유로운 활용은 아니다)은 캐릭터에게 자율적인 생명을 불어넣으며, 모든 캐릭터들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 중복해서 활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자신을 바꾼다. “제3의 시간” : 사람의 게임, 게임을 즐기는 사람에서 게이머로 나아가 게임적 리얼리즘은 캐릭터의 독립을 통해 그동안 매체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독서 행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가상현실 시대의 비디오 게임 서사는 언제나 행동 주도로 이뤄지며, 인간과 캐릭터와의 간극이 가상현실 서사 속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메타버스적 ‘게임형태’는 인류 생존의 선형적 역사를 폭발시켜 현재진행형으로 변화시켰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서사는 이야기 발생 시간과 서사가 차지하는 시간으로 이뤄져 있다. 이것이 서사의 첫 번째 시간(이야기 시간)과 두 번째 시간(서사 시간)을 형성한다. 서사 시간은 문학의 핵심이며, 그것은 이야기 시간이 작품에 나타나는 방식을 제어한다. 상대적으로 리얼리즘 텍스트는 스토리텔링 시간과 스토리텔링 시간의 조화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는 반면, 모더니즘 텍스트는 오히려 서사 시간과 균형을 맞추는 데 더 많이 사용된다. 따라서 다니엘 벨(Daniel Bell) [4] 은 모더니즘의 특징은 현장성(거리의 소멸, eclipse of distance), 즉 독자로하여금 이야기꾼의 말버릇이나 말투가 독자에게 들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전통 소설들은 대체로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의 조합이다. 하지만 전통 서사에서 읽는 시간——이를 ‘제3의 시간’이라고 하자——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며, 사람들은 ‘제3의 시간’을 ‘제로 시간’ [5] 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반대로 게임적 리얼리즘은 ‘제3의 시간’을 위주로 하여 텍스트의 사용 활동(제1의 시간)과 텍스트의 서사 행동(제2의 시간)이 함께 새로운 ‘게임 행위’(제3의시간)를 구성한다. ‘제3의 시간’ 안에서 신체의 충동이 게임행위의 핵심으로 변화하고, 게임적 리얼리즘의 ‘주인공’이 ‘캐릭터’에서 ‘플레이어’로 바뀐다. 서사자로부터 ‘서사’의 핵심적 지위는 플레이어의 ‘플레이’로 바뀌게 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세계의 사물 뒤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탐구하지 않으며, 실제 삶에서 사람들의 신체가 존재하는 방식처럼 세계의 사물 자체에 놓이게 된다. 전통적인 텍스트에서 독자의 존재는 텍스트 입장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볼프강 이저(Wolfgang Iser)는 어떠한 이야기든 이상화된 암묵적 독자를 설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암시적 독자(Der implizierte Leser)’ [6] 라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암시적 독자는 휴머니즘의 주체론적 환상을 더 많이 보여준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텍스트를 읽는 과정을 탐색했다. 그는 텍스트에 대해 “to be or to have”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위에 ‘쓰기 가능한 텍스트(writerly text)’의 범주를 제시했다. 하지만 ‘쓰기 가능한 텍스트’는 텍스트 의미의 틈새를 통해 구축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읽기 행위에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읽기를 일종의 성적 활동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은밀성만 강조했을 뿐 텍스트 읽기 자체에 주체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미학과 독자반응이론, 버밍엄 학파의 암호에 대한 강조를 수용하는 것은 사실 “텍스트 의미의 실현”이나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태도”에 중점을 두는 것이며, 제3의 시간이 서사 측면에서 제1의 시간이나 제2의 시간을 주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독자, 관중 등은 ‘플레이어’와 같지 않다. 전자(독자)는 텍스트 뒤에만 나타날 수 있고, 후자(관중)는 텍스트 서사의 새로운 행동을 발현한다. 우리가 오직 게임적 리얼리즘 텍스트, 특히 비디오게임 텍스트 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제3의 시간’은 완전히 구원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인류의 게임 발전은 세 가지 형태를 거쳤다. 최초는 낮에 사냥하고 밤에 사냥을 모방하는 ‘인간의 놀이’ 형태로 출현했다. 다음으로는 ‘놀이하는 인간’이 나타났는데, 프리드리히 폰 실러는 이를 두고 이질적 산업화 세계에서 게임을 통해 규율과 이질성에 저항하는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놀이란 곧 목적 없는 합목적성, 불규칙한 규율성, 자유의 상징(놀이 충동)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놀이’나 ‘놀이하는 인간’을 연구하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게임’, 즉 ‘플레이’를 핵심으로 하는 게임을 연구한다. 플레이란 텍스트를 즐기는 것이자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곧 ‘제3의 시간’의 중심화를 형성한다. 이때 ‘플레이어’는 더 이상 텍스트 밖의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서사적 행동 속의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전통 서사와 게임 서사는 매우 다르며, 후자는 전통 서사에 없는 ‘제3의 시간’ 서사를 만든다. 전통 서사는 독자들이 서사 시간을 통해 이야기 시간에 몰입하게 하고, 자신의 현실 시간을 잊게 한다. 따라서 전통 서사의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이야기의 폐쇄성을 형성하고, 일단 이야기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고 독자의 읽는 시간은 껍데기가 된다. ‘독자’는 설정적인 캐릭터가 되고, 읽기란 개인의 생생한 삶의 경험을 착취하는 과정이 된다. 말하자면 전통 서사는 텍스트의 독서자/사용자를 구조적으로 배척한다. 게임 서사는 이와 반대인데, 그것의 심오함은 ‘제3의 시간’이 이야기 시간을 빌어 서사 시간을 소멸시켜버린다는 데 있다. 사람들이 완전히 현실로 돌아오게 하거나, 혹은 현실의 시간이 거대한 작용을 하도록 하는 것인데, 게임은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이 끝날 때에야 비로소 진짜 시작된다. 가상현실 시대, 게임의 ‘제3의 시간’은 더욱 풍부하고 생동감 있게 변화했다. 첫째, 그것은 서사가 단순한 인과적 사슬을 따라가게 하지 않고, 대신 이야기에 몰입한 ‘행동자’에게 이야기가 벌어지는 공간적 상황을 느끼게 함으로써 이야기의 시간적 논리를 공간적 논리로 대체시킨다. 전통적인 이야기에서 인간과 이야기는 표현하고 표현되는 관계인 반면, 가상현실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과 이야기는 함께 행동하는 관계가 된다. 즉 사람들이 이야기를 구동하며, 이야기가 사람을 인도하지 않는다. 둘째, 플레이어가 위탁한 ‘아바타’의 함의는 은유가 아니며, 유일무이한 개인의 완전한 대표 그 자체다. 따라서 게임 서사의 이야기는 ‘과거의 시간’을 다루지 않으며, 일종의 ‘현재진행형’이다. 플롯이 아니라 게임 캐릭터의 행동을 이끌어냄으로써 보다 넓은 상상력과 다양한 형태의 캐릭터 인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게임 서사의 핵심은 게임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게임을 진행하고 어떻게 게임 속에서 게임을 완성하느냐에 딸려 있다. 간단히 말해 오직 게임의 행동만이 독립적인 인간의 자유로운 태도를 설정——즉, 놀이가 인간의 모든 것을 구성한다——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인물의 운명은 더 이상 미리 짜여지지 않고 ‘사건화’된다. 여기서 가상현실 서사는 개개인이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를 생성하고, 각각의 ‘작은 이야기’는 모두 결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침잠하는 사건이며, 영원히 ‘진행중’인 사건이란 점이 ‘제3의 시간’의 핵심이 된다. 그러니까 제3의 시간이란 영원히 일어나는 이야기를 가정한 시간이다. 분명히도 ‘제3의 시간’은 우리가 게임의 철학적 함의를 새로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게임은 인간의 이성적 생활의 ‘평안함’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 끼워져 있는 의제이다. 게임이야말로 상징계와 상상계에 의해 완전히 정복될 수 없는 진실의 일부를 폭로한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게임이 철학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이라는 사실이다. 19세기 이래 인류의 이성주의에 대한 강한 공감과 자제, 자율, 자각을 둘러싼 초자아적인 욕망은 게임의 사회정치적 함의를 배양해왔다. ‘게임’은 ‘게임 플레이를 하는 사람’의 통제력을 부각시킴으로써 이성주의 시대에 잠재된 ‘비인간화의 충동’, 즉 이질적인 노동규율에 완전히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려는 무의식적인 충동을 드러낸다. 여기서 ‘비인간화’란 인간의 탈인간화가 아니라, 사회 내에서 규정되는 방식보다 자신의 신체적 경험을 따르는 ‘인간화’, 즉 ‘비사회적 인간화’를 가리킨다. 전통적인 철학, 사회학, 인류학 연구 시야에서 ‘게임’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여전히 ‘면대면’의 인간 활동이며, 오늘날까지도 ‘게임’은 가상현실의 이야기 공간이다. 전통적 문화비평, 또는 미학 연구자의 관점에서 게임은 ‘서사’의 어떤 도움으로 껍데기를 구축하는 쾌감적 행동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게임은 일종의 ‘서사’로서 이야기의 시간적 단서들을 수정하고, 플레이어들의 게임 활동 중 ‘사건적 행동’의 문을 열어준다. 문화연구에서 ‘게임’(아케이드, 휘파람 부는 소년, 해변의 서퍼 등)은 청년 저항성의 표징이지만, 게임의 주이상스(jouissance) [7] 를 보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확실성에 대한 미련(결국 저항은 확실성을 내포한 행위이므로)이다. 문화연구에서 말하는 저항이란 어디까지나 확정적인 행위인데, 게임은 소환되지 않은 신체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경험이다. ‘ 다이성’의 순간과 플레이어로서의 나 제3의 시간에서 이야기는 이미 발생한 일(과거)에서 발생하고 있는 과정(현재진행)으로 바뀐다. 즉, 가상현실의 새로운 의미 표현의 물꼬를 튼 것(다의성, multi-paradox)이다. 이와 같은 다이성 속에서 ‘플레이어’가 함유하고 있는 뜻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내가 보기에 메타버스로 대표되는 가상현실 시대에 게임적 리얼리즘의 ‘제3의 시간’은 다이성의 순간을 창조할 수 있다. 즉 여기서 다양한 가능성과 다양한 불가능성이 충돌의 순간을 교차하게 된다. ‘다이성’은 각종 모순과 역설의 동시발생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고정적 의미, 즉 역사적으로 안정적이고 통일적인 이해, 혹은 미리 결정된 플롯화 서사가 아니다. 일이 어떻게 발생할지 모르고 심지어 보고 싶지 않은 일이 발생하거나, 일어나길 바라는 일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전통 서사에서 이야기의 결말(이야기의 끝)과 엔딩(서사의 완료)은 따로 존재한다. 게다가 결과는 이미 일어났지만 엔딩이 여전히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엔딩과 결말의 분립은 독자의 ‘제3의 시간’을 ‘규칙화’, ‘권력화’, ‘질서화’하겠다는 전통 서사의 야망을 보여준다. 비디오 게임 서사와 전통적인 서사는 정반대인데, 게임 중의 서사 시간과 ‘제3의 시간’은 교묘하게 접목되고 스토리텔링의 시간은 여기에서 보류된다. 따라서 많은 슈팅 게임들이 반전과 평화를 말하지만 서사 시간과 ‘제3의 시간’은 이야기 시간을 빼앗고 침잠하여, 플레이어들을 끊임없이 ‘제3의 시간’의 살육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엔딩이 일어나는 순간은 바로 ‘제3의 시간’의 반복적인 중첩이 이뤄지는 순간이며, 스토리에서 사망한 플레이어가 계속해서 플레이해야 게임의 의의가 진정으로 풀리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Hearts of Iron IV)’는 “1936~49년 간 세계 어느 나라든 정치·경제·첩보·외교·전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 기간의 판도를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많은 플레이어들은 히틀러를 선택해 전 세계를 점령하는 걸 선택한다……. 확실히 그것은 서사 시간과 스토리텔링 시간이 ‘제3의 시간’을 규율하는 게 아니라, ‘제3의 시간’이 독보적 시간이 됐음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어디에서 끝나느냐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어디에서 다시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로 인해 플레이어의 선택권은 ‘제3의 시간’이 되며, 그것은 플레이어가 게임의 스토리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자신의 쾌락을 구축하는 것으로 구현된다. 다시 말해, 게임 스토리의 시간과 서사 시간 사이의 모든 의미는 ‘제3의 시간’을 활성화하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플레이는 ‘제3의 시간’을 진정으로 텍스트 주도의 시간으로 만들고, 플레이어는 다이성의 주체, 즉 홑따옴표만 있는 “‘나”가 되는 것이다. 홑따옴표 ‘나는 처음엔 실제 사람이지만, 그 후에는 게임 속 캐릭터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나와 캐릭터’의 융합체이며, 이는 플레이어의 정의를 구성한다. 즉 ‘나는 ‘제3의 시간’을 게임 속으로 갖고 들어가, 모종의 캐릭터와 융합된다. 이것이 바로 ‘게임 텍스트’를 전통 서사 텍스트와 다르게 만드는 부분이다. 전통적인 서사 텍스트는 작품을 시작하는 첫 글자부터 끝맺는 마지막 글자까지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책의 앞표지부터 마지막까지의 전체 내용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게임 텍스트는 소위 ‘과학 텍스트(算学文本)’ 즉 기술적 인터페이스 텍스트일 뿐만 아니라, 플레이어 캐릭터 텍스트 즉 ‘나의 텍스트’라는 두 번째 측면의 텍스트이기도 하다. 물론 게임 텍스트는 게임 제작사가 생산해낸 일부이며, 플레이어와 더불어 플레이를 할 때 ‘제3의 시간’을 가지고 게임 속으로 들어가 캐릭터가 융합된 부분의 모음이다. 다시 말해 게임 텍스트는 동적 텍스트, 즉 플레이의 과정으로서의 텍스트인 것이다. 그럼 플레이어는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플레이어는 하나의 ‘잉여인(空余人)’ [8] 이다. ‘플레이어’는 게임 진행 중에 역설적인 경험을 분출해냄으로써 일종의 ‘잉여인’의 얼굴을 보여준다.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벌거벗음(Nudities)>의 ‘페르소나 없는 정체성’이라는 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체가 순수하게 생물적인 비사회적 신분으로 귀결될 때, 그것은 각종 가면을 쓰고 인터넷상에서 제2, 제3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도 부여받는다.” 여기서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의 남아있는 부호로서의 신체인 플레이어 ‘나의 쾌락은 시비의 의의가 지배한다. 또 다른 텍스트를 맞닥뜨리면 ‘나는 곧 다른 얼굴이 될 수도 있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플레이어가 여전히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말하는 ‘이드(id)’, 즉 한 사람 마음 속 욕망의 쾌감을 깊숙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스나이퍼 엘리트(Sniper Elit)>에서 모든 플레이어는 살인자이지만 동시에 플레이어이기도 하다. 한데 게임은 이미 알고 있는 비밀을 모르는 척하는 방식일 뿐이다. 살인은 게임을 방불케 하지만 저격하는 쾌락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살인이라는 고통스러운 일과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분석해보면, ‘플레이어’가 또 하나의 “역사적 현실의 국외자”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편으로는 플레이어는 그 안에서 플레이의 가치를 점수나 장비, 등급을 통과해 창조하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가치의 표지물이 무의미한 행동(플레이)의 내적 뒷받침일 뿐, 플레이어의 플레이는 그런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강렬한 ‘씽킹 프롬 씽커(Thinking from Thinker)’를 보여준다. 그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으로 허무에 대항하는 것이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은 다음의 측면에서 철저하게 개조됐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캐릭터 독립으로부터 독자의 욕구가 게임적 리얼리즘에 대한 환원적이고 규정적인 성질을 도출하고, 이를 통해 비디오 게이머들이 서사의 시간에 대항하는 이와 같은 행동을 ‘제3의 시간’이란 개념으로 보여줬다. 이 지점에서 플레이 행동은 해방됐으며,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종의 불안정한 자아를 지향하고, 케릭터와 안정적 세계 사이에 항구적인 모순과 대립을 지향하게 됐다. 한 사람이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을 때, 그의 심리 상태는 안정적이고 합리적이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순간, 게임 속의 불안정한 ‘나로 변모할 수 있다. 그것은 살인의 쾌락, 돌격하는 용감함, 숨겨놓은 비열함, 죽은 동료들 가운데에서도 홀로 살아남았다는 기쁜, 그리고 전우를 구해냈다는 신성함 등을 아우른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에서 다이성의 자아가 이렇게 터무니없이 강림해오는 것이다. 바깥 세계에는 안정성에 대한 갈망이 있지만, 게임의 ‘제3의 시간’은 불안정성에 대한 갈망으로 구축되어 게임의 현실적인 역설을 형성한다. 게임 규칙에 대한 준수와 세계의 결핍을 플레이할 가능성에 대한 싫증 역시 역설적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순간’은 바로 ‘다이성’의 순간이다. 이 세계는 플레이할 만한 것들이 결핍되어 있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규정된 동작을 따라야 하며, 이는 곧 ‘플레이’에 대한 주도적인 욕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게임은 플레이할 수 있고, 규정적인 것에 대한 파괴이며, 동시에 규정성을 내재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여러 역설들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게임적 리얼리즘은 역설적인 현실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플레이어’의 얼굴은 ‘다이성’의 형태를 띠게 된다. 그것은 플레이어로서 규칙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플레이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다. 그것은 ‘현실’을 이미지의 세계로 분해하고, 이미지 차원에서 주변을 맴도는 것을 지향한다. 또한 그것은 물질적인 원칙을 게임의 정신 활동 속에 포함시킨다. ‘타자와 나’를 수면 위로 부상시키고, 주체의 안정적인 함의를 제거하여 게임적 리얼리즘 속에서 생명력있고 불확실한 상태에 있는 ‘어떤 것’으로 변화시킨다. 플레이어의 이와 같은 불안정성 때문에 게임산업은 비로소 천편일률적 충돌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비인간/폐인’이라는 의식을 고수하면서 인간의 역사적 활동에 대해 ‘현장에 내가 없는 척’ 가장하는 태도를 취해 가상현실 경험과 에고의 장벽에 빠져들게 한다. 디지털 세계의 파괴자로서 그것은 파괴력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고, 역사적 현실세계의 유령으로써 어둠 속에서 흔들리며 떨어질 것 같은(摇摇欲坠) 등불로 남겨져 있다. 그것은 침묵하고 있지만, 게임은 시끄럽게 울리기도 한다. 게임 세계가 닫히는 순간 그것은 크게 소리를 낸다. *본문출처 : 《난징사회과학(南京社会科学)》 2023년 제3기에 실린 본문은 1만3천 자로 이를 축약하였음. [1] 역주 : 원문의 ‘多异性’은 저자가 창안한 학술 어휘로 보인다. 영어로 하면 multi-difference 정도의 뜻을 갖는데, 이러한 의미를 정확하게 지시하는 한국어 어휘가 없어 한자 독음 그대로 직역했다. [2] 国家社科基金重大项目“虚拟现实媒介叙事研究”(21&ZD327) [3] 역주 : 국내에서 아즈마 히로키의 개념을 소개하는 텍스트들은 ‘작은 이야기’와 ‘커다란 이야기(거대서사)’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이를 각각 ‘故事’와 ‘叙事’로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는 원문의 故事는 ‘이야기’로, 叙事는 ‘서사’로 번역하였다. [4] 역주 : 다니엘 벨은 미국의 사회학자로, 《이데올로기의 종언(The End of Ideology)》(1960년)을 통해 포스트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이야기했고, 《탈산업사회의 도래(The Coming of the Post-Industrial Society)》(1973년)를 통해 '제조업 경제'에서 '과학기술에 기반한 경제'로의 전환을 전망했다.(위키피디아 참고) [5] 역주 :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가 창안한 ‘ti con zero’를 지칭한다. 그의 단편소설집 <티 제로(ti con zero)>(1967) 속 단편들은 수학과 시적 상상력이 혼합된 시공간과 우주의 진화를 다룬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à invisibili)>(1972)은 기존 이야기들의 시간중심 서사를 무너뜨리고, 공간 중심의 서사를 펼친다. 독자들에게 일정한 권한을 주되, 그 안에서 여러 의미를 갖는 내용을 담아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위키피디아, amazon.com 등 참고) [6] 역주 : 볼프강 이저는 독일의 문학 연구자이자 비평가로, 독자반응비평 이론을 연구했다. 이저에 따르면, 구조화된 행위로서의 독자의 역할은 독자가 텍스트 구조를 상상 속으로 수렴하게 하여 텍스트 구조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보여준다. 독자가 읽기 과정에 참여할 때 텍스트 구조가 연결되고 살아나며, 독자는 역사적 현실과 자신의 경험, 독자로서의 역할 수용 사이의 긴장 속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7] 역주 : 저자는 라캉 이론을 통해 게임적 쾌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주이상스는 강렬한 성적 쾌락인 동시에 쾌락원리 및 언어상징 너머의 전복(顚覆) 충동이다. 주이상스는 현실원칙을 파괴하기 때문에 결국 고통이 된다. 이때 주체는 분열적 상황에 빠지고, 대타자를 파괴하려는 강렬한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8] 역주 : 원문의 空余(공여)는 ‘남아돌다’를 뜻한다. 여기서는 空余人을 ‘잉여인’으로 번역했다. Tags: 번역 예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난카이대학 문학원 교수) 저우즈창, 周志强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DejaVu Sans The NFT Games Dream – is it yet another tulip mania or path to our future?
Constraints can become stepping stones to innovation. The disproportionate market attention towards integrating blockchain technology into games is perhaps stemming from people’s desire to overcome the current constraints. Here, the idea of combining blockchains and games can be examined from two perspectives: First, exploring the intention behind advocating for this change, and second, discussing why such a change is deemed necessary at this time. Combining the findings from these two would allow us to acquire a comprehensive view of this matter and thus enable critical reflections on what the innovation could bring to our future. < Back DejaVu Sans The NFT Games Dream – is it yet another tulip mania or path to our future? 15 GG Vol. 23. 12. 10. Are NFTs for now or for the future? Constraints can become stepping stones to innovation. The disproportionate market attention towards integrating blockchain technology into games is perhaps stemming from people’s desire to overcome the current constraints. Here, the idea of combining blockchains and games can be examined from two perspectives: First, exploring the intention behind advocating for this change, and second, discussing why such a change is deemed necessary at this time. Combining the findings from these two would allow us to acquire a comprehensive view of this matter and thus enable critical reflections on what the innovation could bring to our future. Notably, a significant portion of the ongoing discourse about integrating a blockchain into games is concentrating on optimistic views toward the future. Discussions about related topics like Play-to-Earn (P2E) and Non-Fungible Tokens (NFTs) are also revolving around on the view towards the future rather than present; on what could happen, and should happen according to the previous attempts. Here, we cannot get away from the feeling that something is not right – something is off. Of course, one could still argue that these messy attempts and discourse are stepping stones towards the next paradigm shift and that we must first prioritise broader and newer attempts rather than hindering innovation with over-verification. Coming from this context, this article aims to delve into the issue of NFTs in games, exploring both the social and technical contexts. First, we take a look at the context of non-fungibility and decentralisation and the game industry’s vision towards its future, along with its remaining technical challenges. From there we look more in-depth at where these endeavours might leave their mark on games. Contexts of Non-Fungibility In recent days in South Korea, the term Non-Fungible Tokens (NFTs) is most commonly used in discussions regarding virtual assets, emphasising their potential value deriving from unique ownership attribution over notions about their technological aspects. Meaning, rather than delving into the technical feasibility of obtaining this non-fungibility status, the discourse surrounding NFTs tends to focus more on how much value can be derived from those assets and how to leverage it. Under current South Korean law, it is not possible to introduce NFTs into games, including its live operation services. There are many restrictions and thus a considerable amount of time would be needed before any NFT games can be fully in operation at a viable commercial level in this country. But the potential gain could be high: If NFT games can somehow reach the mainstream market, they could quickly become the most accessible medium for trading cryptocurrencies, using already existing in-game markets – without making much of an early investment in facilitating entirely new channels. Not to mention, South Korean game players are already accustomed to taking financial burden while playing games. Active players are more likely to become devoted fans of the game, and for them, paying to access the blockchain currency may be perceived as an acceptable range of costs. Here it’s worth closely looking at the case of the game “CryptoKitties” (Dapper Labs, 2017) a prime example of games and blockchain integration. The in-game transactions of “CryptoKitties” occur through trading with the virtual currency Ethereum, providing opportunities to trade more exotic digitally-generated cats at higher monetary values. So, what makes this game ‘fun’? Do players find it ‘fun’ when they successfully create exotic digital cats, or does the enjoyment come from engaging in monetary trading as the prices of digital cats might increase? While the game’s primary game design mechanic revolves around collecting and breeding cute digital cats, “CryptoKitties” trade mechanisms combined with real-world monetary values (i.e., currency that can be used even outside the game) make it hard for us to articulate what the particular design elements are that truly resonate with a feeling of ‘fun’ of players. Let’s consider a hypothetical situation where someone has successfully generated an exotic, high-valued cat in the game. If one considers acquiring a unique cat in the “CryptoKitties” through collecting and breeding as ‘fun’: Does that feeling stem from the self-satisfaction of acquiring a rare item (in this case, an exotic digital cat), or does that come from the optimistic expectations of being able to trade it for a higher amount of money? Perhaps it could be a bit of both. Even if the player has no intention of trading that digital cat, just having an expensive object may already give the person a prestigious and satisfying feeling. This somewhat resembles other game business models already common in some South Korean MMO games – and potentially online games from other regions. Then the question is, why NFTs? What makes incorporating NFTs into the game differerent from other conventional game design and business mechanics? In the next chapter, let’s examine the benefits of NFTs from the perspectives of game companies and gamers. Contrasting views towards Non-Fungibility At the current state, one of the primary issues is that game companies have yet to clearly define how the introduction of NFTs can make more ‘fun’ to the game, and what exact innovative changes they envision for their game’s live service. For example, the game “Nine Chronicles” (Planetarium, 2020) demonstrates the notion of decentralisation by going open-source as a blockchain game. But most blockchain game projects do not seem to provide a solid answer on why they need to choose blockchain technology in particular, and rather adopt blockchain first and then find its reasoning as they run. Furthermore, one of the most widely accepted business models among these blockchain-backed games is the pre-sales scheme, selling items early in advance, which is not entirely something new (from the consumer’s standpoint) but more of a replication of existing business models but with added blockchain hype. This inconsistency leads to worrying public views on game companies’ intentions regarding NFTs, which question the corporate vision as the attempt to introduce cryptocurrency into game services while evading state regulations. From the consumer’s standpoint, the company seems to be attempting to profit from the player-to-player item trades through NFTs. (Translator’s note: South Korean game law prevents game companies from directly facilitating player-to-player item trades if it involves purchasing or selling virtual items with real-world money, KRW. Instead, various third-party currency exchange agencies, apart from the game service providers, can mediate the exchange of virtual items with real money, subject to a certain amount of transaction fees.) Many blockchain game proposals from some major South Korean game companies aim to gain control over direct real-world item trade; Proposing to install virtual item trade through company-issued cryptocurrencies, which is a clear indication of the corporation’s attempt to evade government’s regulations. While game companies’ vision toward NFTs is still fixated on product value, for players, the future it presents has somewhat conflicting implications. Some players may view NFTs as a channel for game items as monetary investments, while others see them as collectibles that could last even after the termination of the game’s service. Considering that all online game services’ assets and efforts that gamers accumulate over time could vanish once the game service ends, without any reliable method to possess such intangible values made in games, NFTs can perhaps provide players a permanent ownership of the things that they have achieved in games. Here, NFTs can be interpreted as a token through which players could feel personally connected with the games that they love. Perhaps the NFTs could be perceived as a medium through which players can express their attachment towards the game — a non-fungible token that signifies their devotion as a fan of the game. For these individuals, NFTs are no longer just about the technical wonder but rather a tool for the meaning-making journey of their gameplay. For instance, online game players are aware that the online game service will eventually end. Despite knowing this potential future, they remain devoted to their current satisfactions with the game, accumulating virtual assets that may one day no longer be available. Perhaps NFTs can resolve this uncertainty (the risk) that players must endure, by becoming a proof of record of in-game items that can last indefinitely. A token with which they can enshrine their love towards the game that can safely be stored without the risk of losing it. Contexts of decentralisation What the blockchain currently guarantees in terms of non-fungibility is the data. While attempts to enhance technologies such as proof-of-work (PoW) and hardware storage capacities are in progress, uploading the entire game system to run on the blockchain is still challenging. Let’s consider a hypothetical scenario where the game system remains outside the blockchain, perhaps locally or internally within the game company’s server, while the game state (data) is kept on the blockchain. In this setup, even if the game company is no longer able to manage the game services — terminating its live operation — the records of the items still exist on the blockchain to prove who owns that particular item. However, without the game system to actually run or operate that specific item this is just a data record, which diminishes its non-fungibility – and thus, become basically worthless. While the game company could add more data, but this could significantly decrease the amount of data that can be stored in the blockchain, leading to higher costs. Higher production costs may result in slower updates , and keeping track of all gamers’ play data on the blockchain could burden computational power, potentially hindering seamless gameplay. Recent new methods proposed to improve blockchain usage (e.g., power consumption, transaction costs, and transaction times) contradict the goal of decentralisation for efficiency in proof delegation. Furthermore, most current blockchain transactions are mediated through trading platforms, which deviates from decentralisation in the first place. Another important note here is that if the game company intends to establish a genuinely centralised way to control its game service and trades, a blockchain is perhaps, unnecessary. As even with the conventional techniques already in use in current game technologies, the company could still choose and guarantee the value of their gamers’ data (and their item’s value) – and perhaps be able to do so more efficiently in terms of speed and cost than using a blockchain. Therefore, game corporations must truthfully reveal their intentions and reasoning for adding blockchains in games despite the corresponding complexity and cost risks. Without such justification, their proposals can only be seen, from the players’ standpoint, as a deceptive corporate manoeuvre – promising non-valuable values in an attempt to evade the law. What we find fascinating in attempts to decentralise games is not to facilitate a central server to operate and manage the game but rather to have it open by envisioning a pivotal shift in the relationship between game companies and users – a relationship that has historically been one-sided and hierarchical. In decentralised games, the relationship between game companies and gamers can take on a more flat and open structure. This collective relationship could also influence how in-game interactions and business models are designed, potentially addressing or altering the stress on gameplay (as recently highlighted in South Korean gaming culture) caused by game designs that favour competition and a win-or-lose mentality. Finding somewhere in between What NFTs could bring to games? In this chapter, we explore intriguing attempts to mediate, compromise, negotiate, and introduce new models that could inspire further innovations. Technical enhancements could one day be able to solve blockchain-related issues. In particular, blockchain has been a significant concern because of its high power consumption due to proof-of-work (PoW). Therefore, newer technologies that do not rely on PoW are being introduced. While it is unlikely that existing blockchains already in operation will alter or adopt these new methods, it could potentially offer further future technical alternatives to issues related to non-fungibility and decentralisation that may arise. In contrast, the game corporations’ attempts to leverage blockchain technology to free themselves from laws and social responsibilities cannot be achieved solely through technical solutions. First, let’s acknowledge that the idea (or attempt) of connecting in-game currency with real-world currency without violating the law is not particularly new; perhaps there’s a good reason for that. The issue is more fundamentally interconnected with the world, and thus, no particular technology—let alone blockchain—can be a magic wand. We believe that even if the use of blockchain becomes more common than ever before, for instance in the banking system, the practices are likely to be somewhere between convention and innovation – a fusion of blockchain technology with the existing banking system. As such, the compatibility between virtual assets and real currency should be mediated, perhaps within the scope that satisfies the existing laws of our society. Implications could also involve using blockchain technology to enhance communication between game companies and players. One such inspiration is the game “EVE Online” and its annual event, ‘Eve Fan Fest,’ which any EVE Online player can sign up for and participate in. Among the many side events in Eve Fan Fest, one we would like to point out is the ‘Player Presentation,’ which offers a 40-minute presentation or a roundtable discussion to pre-registered players. The game operates a single shared universe (global region server) for players worldwide, eliciting user participation both in and outside gameplay: At the event, EVE Online players from various factions gather for discussions and negotiations regarding faction relationships and agreements. Perhaps we could use the blockchain to create and enable various forums like Eve Fan Fest, where South Korean game devs and players can join and engage together. Company representatives can listen to players’ opinions and reflect those ideas into the game’s service, enabling a feedback loop with real in-game implications. Such attempts can perhaps prevent potential conflicts or issues that may stagnate if the company solely dictates decision-making by dismissing the power of collecting intelligence from players. Instead, the blockchain could contribute to recording and tracing player’s ideas and opinions efficiently, supporting the enhancement of fairness and transparency in player communication and game company service decisions. In addition, if the game service continues for a long time, it can serve as an archive of accumulated communication between game developers and players. The blockchain may help regain the trust between South Korean players and game developers, which has reached a dangerously precarious state in recent years. Perhaps loot box probability disclosure, mandated by law in Korea from March 2024, can be verifiably realised by archiving all records of randomised items created in the game on the blockchain. Players may be able to further verify whether the game’s system is operating as the game company intends. At the time of writing, it seems evident that many in South Korean game companies and developers are concerned about what this new law could bring to the industry and how to even comply with this upcoming regulation. Perhaps with blockchain’s potential for transparency and decentralisation, the disclosure of loot box probabilities in South Korea is not far from reality. Of course, we cannot emphasise enough how a careful implementation of new technology, like blockchain, should be based on a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the real world and our real problems. Lastly, we again ask: So what do game companies hope to achieve through NFTs? Is the phenomenon of NFT games a futuristic indicator towards our near future, or are they just a mere reflection of the pending issues of our current reality? Attempts are being made to identify the nature of this phenomenon and clarify our understanding of the blockchain game discourse. Finding the right pathway cannot be achieved unless one can figure out one’s location, calculated based on observing the terrain relative to the starting point where one began one’s journey. As such, we must concentrate on navigating through our future discourse while carefully traversing our current and upcoming terrain of topics and never stop asking the very fundamental starting question: “What is fun in games—and can a game still be called a game when its purpose is something other than the pursuit of fun?”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ctoral researcher at Aalto University, Finland) Solip Park Born and raised in Korea and now in Finland, Solip’s current research interest focused on immigrant and expatriates in the video game industry and game development cultures around the world. She is also the author and artist of "Game Expats Story" comic series. www.parksolip.com (게임개발자, 연구자) 오영욱 게임애호가, 게임프로그래머, 게임역사 연구가. 한국게임에 관심이 가지다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것에 취미를 붙이고 2006년부터 꾸준히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있다. 〈한국게임의 역사〉, 〈81년생 마리오〉등의 책에 공저로 참여했으며, 〈던전 앤 파이터〉, 〈아크로폴리스〉, 〈포니타운〉, 〈타임라인던전〉 등의 게임에 개발로 참여했다.
- 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
이 작품의 결말은 AR 안경을 쓰고 이루어지는 놀이와 장난스러운 일이 등장인물의 연애 관계를 넘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를 사용하는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부모들은 AR 안경을 압수해버리려고 하는데, 이 때 주인공인 유코와 그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한 번 그 세계에 몸담아서 그 세계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게임의 세계를 이미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게임 이전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게임이 만들어 낸 달콤함과 고통 모두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Back 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 01 GG Vol. 21. 6. 10. 지금으로부터 십몇 년 전 이름을 대면 알법한 대기업 회장님 앞에서 ‘메타버스’란 키워드를 소재로 신사업 기획 프레젠테이션을 할 기회가 있었다. 린든 랩이 만든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라는 가상 세계가 메타버스란 키워드로 주목받던 시절이었다. 그 때 같이 그 기획안을 준비하던 그 대기업의 부장은 우리 팀에 이런 주의를 자주 주었다. “회장님은 게임을 정말 싫어하세요. 자제분들에게도 절대 게임은 못하게 하시거든요. 그래서 신사업 기획에 우리 안이 절대 게임으로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프레젠테이션에서 게임의 ‘게’자도 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획은 아뿔싸! <세컨드 라이프> 같은 메타버스의 저작 툴의 개념과 그 당시 유행했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MMORPG를 결합한 형태였던 것이다. 그 프레젠테이션에서 게임의 메커닉과 같은 핵심 요소들은 회장님이 게임을 싫어하신 나머지 처음에는 ‘재미요소’라는 단어로, 그 뒤에는 영어 단어 ‘funness’로 대체되었다가 최종 본에는 아예 빠지게 되었다. 물론 겉은 메타버스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분명히 사용자의 유입을 유도하기 위해 게임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소프트웨어를 게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황은 매우 아이러니하면서 동시에 게임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 〈Second Life〉. 메타버스와 같은 새로운 플랫폼을 개발하여 부를 축적하고는 싶지만 이러한 플랫폼의 서비스가 게임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인식은 게임과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 자체가 일반적인 사회의 기준으로는 별로 가치 없고 쓸모없는 행위라고 판단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러한 게임 혐오 심리에는 게임이 문화적으로 무가치하다는 인식이 잠재되어 있다. 게임에 대해 무지한 사람일수록 게임에 대해 더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지만, 이러한 게임 포비아는 세대와 연령을 가리지 않고 게임을 근본 천출(賤出)의 문화로 간주해 왔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는 이어질 노동을 위한 휴식과 투자로 간주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시간 낭비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그간 정치권과 미디어, 여성계, 종교계 등에서 주도했던 셧다운제, 쿨링오프제, 게임중독법, 게임 중독 질병코드 등재 등의 여러 게임규제들은 게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매체성을 기존 사회 가치에 반하는 것으로 자리매김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해왔다. 그 이면에는 정치권과 미디어를 비롯한 주류 사회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젊은 세대에 대해 두려워하는 부분이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교육과 노동을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 강박을 그 이데올로기로 내세워왔다. [1] 따라서 자기 자식과 가족들을 그 교육과 노동의 장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다양한 대중문화들을 늘 희생양으로 삼아왔다. 7-80년대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그런 희생양이었다면, 게임이 10대와 20대 사이에서 보편적인 대중문화 양식으로 자리 잡은 90년대 이후에는 게임에 대한 국가적인 규제와 미디어의 비판이 뒤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백래시 현상의 기저를 살펴보면 게임이 다른 매체보다 대중적으로 사랑받아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작용도 컸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2020년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전 국민의 게임 이용률은 70.5%에 달한다고 한다. [2] 그 중 10대의 게임 이용률은 91.5%에 달하며 20대 85.1%, 30대 74.0%, 40대 76.6%, 50대 56.8% 등으로 거의 전 연령대에 걸쳐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대 이후 한국 게임이 보여준 산업적인 성장과 양적 팽창은 다른 문화콘텐츠를 압도할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진 자부심의 크기는 매우 작아 보인다. 2019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게임 이용 장애의 질병코드 등록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자 국내에서도 게임업계와 학계 및 협단체를 중심으로 이에 반대하는 여러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그 때 제기된 운동 중 하나가 주로 SNS를 배경으로 하여 ‘게임은 질병이 아닙니다. 게임은 문화입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거는 것이었다. 전 국민의 70% 이상이 여가 선용을 위해 플레이하는 게임이 대중문화 중 하나가 아닐 리가 없지만, 이러한 운동은 온라인에서 게임 사용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연매출 15조가 넘어가는 게임 업계의 산업적인 기여 대부분은 확률형 아이템과 강화형 시스템을 통해 이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돈을 더 낸 사람이 게임에서 더 유리한 구조를 차지하는 ‘페이 투 윈(Pay to win)’ 시스템이 국내 게임시장의 주류가 되면서 그간 셧다운제, 쿨링오프제, 게임중독법 발의 등과 관련하여 항상 게임업계의 편이 되어주었던 사용자들의 성원이 이제는 게임 업계에 규제를 해달라는 청원으로 바뀌어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게임업계와 학계 및 협단체를 중심으로 제기한 ‘게임은 문화다’ 운동의 저변에는 그간 사회로부터 근본 천출의 문화로 취급받아온 억울함이 내재되어 있다. 게임을 만드는 쪽에서 ‘게임은 문화다’라고 주장해버리면서 그간 일반적인 사회 통념상 게임은 문화적인 결격 형태에 해당해 왔다는 것을 시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확률형 아이템과 강화형 시스템이라는 국내 게임업계의 원죄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러한 자격지심이 표출되었을 수도 있다. 다만 게임을 문화라고 주장할 수 있는 다양한 긍정적인 사례들이 대부분 해외의 사례였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게임 사용자들에게마저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업계 자체의 운동으로 끝나버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게임업계가 결연함만을 보여주는 대신 좀 더 의연하게 대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게임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좋지 않은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게임을 단순히 문화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확률형 아이템 등에 대해 반성하는 자세를 보였으면 사용자들의 시선은 지금보더 훨씬 더 우호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은 돈대로 벌고 싶고 문화로 인정도 받고 싶은 모순된 2가지 감정이 착종되면서 “게임은 당연히 문화가 맞는데, 왜 주변에 문화로 인정을 받아야 하지?”라는 의문이 생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게임이 문제적인 매체가 된 것은 미구엘 시카트가 지적한 바대로 ‘게임이 행동을 유도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 [3] 이다. 행동을 유도한다는 것은 게임을 다른 매체와 구분시켜주는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행동을 유발하면서 연쇄적으로 게임 내의 다음 상황에 집중하도록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 다른 매체와 달리 게임은 플레이어를 위해 플레이어가 참여할 시공간의 빈틈을 만들어 놓고 그 틈을 플레이어로 하여금 채우게 만든다.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게임 속의 시공간은 자신이 들어가서 채워 넣고 행동해야 할 무대가 된다. 이 때문에 게임은 사용자들에게 참여할 공간을 마련해주면서 지속적인 몰입을 유도할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해 냈다. * 〈디스 워 오브 마인〉의 한 장면. 또한 게임 내에서 발생하는 행동은 필수적으로 가치의 평가와 직결된다. 게임은 작품 내에서 사용자들에게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행동을 촉구하는 주요한 설득적인 매체로 기능하게 된다. 최근 10년간 게임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소셜 임팩트 게임(social impact games)의 창작이 급속도로 늘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소셜 임팩트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늘 언급되듯 <디스 워 오브 마인(This War of Mine)>이나 <미싱(Missing)> 같은 해외 사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제주 4.3사건의 비극성에 대해 초점을 맞춘 <언폴디드> 시리즈, 시리아 난민의 독일 정착 문제를 시뮬레이션 한 <21 데이즈>,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 운동을 벌였던 최재형 선생의 일대기를 조명한 <페치카> 같은 소셜 임팩트 게임들이 활발하게 창작되었고 주요 인디게임 공모전에서 입상을 해왔다. 게임의 표현력이 정교해지고 시스템적으로 플레이어를 설득하는 연출방식이 개발자들에게 공유되면서 이제 게임은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매체로 거듭나고 있다. 따라서 “게임은 문화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상세하게 파고들기 위해서는 사실 먼저 ‘게임’과 ‘게이밍(gaming)’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게이밍’이란 실제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게임 플레이 주변에 전유되는 다양한 활동들 즉, 유튜브나 트위치로 게임 방송보기, 게임 웹진에서 게임과 관련한 정보와 소감 나누기 활동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게임은 그 자체로 일정한 가치를 지닌 문화상품이며, 게이밍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문화적인 행동 양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게이밍이 보편적인 문화적 행동양식이 되기 전에는 이른바 오타쿠로 대표되는 하위문화(subculture)의 범주에서 주류 문화에 대한 대안형태로 존재했었지만, 지금과 같이 전 국민의 70% 이상이 게임하기 과정에 동참하는 상황에서 게임은 동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대표적인 대중문화 매체가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오타쿠로 대표되던 소속감 높은 하위문화적인 정체성은 다소 느슨하게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비디오 게임에 온라인 네트워크 환경이 도입되면서 사용자들은 게임 내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실시간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사회적인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스마트폰의 도입 이후 이러한 게임을 통한 사회적인 활동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일과 놀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매일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유튜브와 트위치, 디스코드에 모여 다른 사용자의 플레이를 감상하고 토론하며, 자신만의 엔터테인먼트를 새롭게 생산해낸다. 마인크래프트와 로블록스 같은 샌드박스나 메타버스 플랫폼에는 사용자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서브 게임과 미션들로 가득하다. 최근의 게이밍 문화는 점점 혼자 플레이하는 스탠드 얼론(stand-alone) 게임에서 사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는 방식으로 진화해 온 것이다. 최근의 메타버스 붐이 다시 일어나면서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았던 <전뇌코일(電脳コイル)>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작품은 2025-26년경 다이코쿠시라는 가상의 일본 소도시를 배경으로 이 도시로 전학 온 오코노기 유코와 아마사와 유코라는 두 여학생의 얽힌 인연을 다룬다. 2007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미래를 예견하듯 언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AR 안경이 작품 내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게 된다. 이 작품의 결말은 AR 안경을 쓰고 이루어지는 놀이와 장난스러운 일이 등장인물의 연애 관계를 넘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를 사용하는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부모들은 AR 안경을 압수해버리려고 하는데, 이 때 주인공인 유코와 그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한 번 그 세계에 몸담아서 그 세계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게임의 세계를 이미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게임 이전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게임이 만들어 낸 달콤함과 고통 모두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전뇌코일〉의 한 장면. 게임 속으로 들어와 버린 우리는 다시 게임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1] 이동연, 「누가 게임을 두려워하랴?」, 『게임포비아』, 커뮤니케이션북스, 2021, p.78. [2] 문화체육관광부, 『2020 대한민국 게임백서』, 한국콘텐츠진흥원, 2020, pp.495-496. [3] 미구엘 시카트, 김겸섭 역, 『컴퓨터 게임의 윤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p.6.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논모던 워페어nonmodern warfare
당연한 이야기지만 매개자의 증식이 전쟁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다만 현대의 일상적인 세계는 때때로 전쟁보다도 불투명하다. 물류와 인프라가 점점 고도화되면서 모든 것들이 상시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착각이 팽배하지만, 역설적으로 매개자들의 네트워크는 (아이패드처럼) 이음새 없이 매끈하게 빛나는 표면 아래서 가시성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알고리즘의 지배로부터 팬데믹을 거쳐 급격한 기후 변동까지, 2020년대의 우리는 마치 이 모든 비인간 행위자들이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세상에 등장하기라도 한 듯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 Back 논모던 워페어nonmodern warfare 09 GG Vol. 22. 12. 10. 더 이상 편한 날은 없다 The Only Easy Day...Was Yesterday 〈콜 오브 듀티〉 만큼 널리 알려진 게임 프랜차이즈도 드물 것이다. 특히 〈모던 워페어〉 시리즈는 게임 플레이의 일신(一新)과 엄청난 상업적인 성공,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사회/정치적인 논란들이 합쳐져서 그야말로 블록버스터 게임의 어떤 ‘범례’로 자리매김했다. 영화에서 폭발을 떠올리면 반자동적으로 마이클 베이가 연상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전 FPS 게임을 이야기할 때 모던 워페어를 떠올리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당연하게도 수많은 논의들이 있어 왔고, 그중 대부분은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범주들 사이에서 진동한다. 그런데 이미 나왔던 이야기들을 비슷하게 반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 외에도 이 카테고리들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2022년의 시공간은 모던 워페어 시리즈가 발매되었던 2007-2011년과는 완전히 다르며, 심지어 첫 번째 리부트가 등장한 2019년과도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1) 흔히 ‘클래식은 시대를 타지 않는다’ 고 이야기하지만, 이 문장에서 생략된 전제는 시대가 변할 때마다 새롭게 (혹은 다시금) 부각되는 관점에 맞춰서 의미망을 성공적으로 업데이트한 작품들만이 클래식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방식으로 ‘왜곡’된 2022년의 렌즈로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바라볼 때, 우리는 기존의 의미망들이 잘 작동하지 않음을 목도한다. 예를 들어,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개발한 인피니티 워드가 속한 액티비전 블리자드의 2022년 3분기 매출 2) 발표에 따르면 회사 총매출의 52%가 모바일 게임들에서 발생한다. 그중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는 작품은 모던 워페어의 스펙터클한 느낌과는 거의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캔디 크러쉬 사가〉다. 2021년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매출 을 기록한 탑 3 게임은 전부 모바일 게임들이며, 리스트 어디에도 콜 오브 듀티와 같은 전통적인 블록버스터나 다른 트리플 A 게임들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액티비전의 챔피언 〈캔디 크러쉬 사가〉만이 당당히 7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을 뿐. 3) ‘블록버스터’ 라는 단어가 아주 큰 상업적인 성공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계속해서 시장에 쏟아지는 압도적인 연출과 그래픽을 내세운 (모던 워페어 리부트를 포함한) ‘소위’ 대작들은 다른 어떤 게임보다도 더 ‘블록버스터’스러운 외양을 자랑하지만 정작 온전한 의미로서 블록버스터라고 명명되기에는 애매한, 이런 웃지 못할 상황에 처해 있다. * 깜찍한 ‘블록버스터’ 〈캔디 크러쉬 사가〉 게임 플레이의 일신 또한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규정하는 한 축으로 여겨져 왔다. 〈콜 오브 듀티 4: 모던 워페어〉는 이 시리즈의 근간이 되는 게임 플레이의 포석을 깔았다는 점에서 특히 더 중요한데, 〈하프라이프〉의 오프닝 트램 시퀀스를 센세이셔널하게 비틀어 버린(“repurposing the techniques popularized by Half-Life’s tram to march you through a city being torn apart, and ultimately, to your own execution.”) 4) 프롤로그의 ‘쿠테타The Coup’ 미션부터 마치 드론 조종사가 된 것 같은 섬뜩한 기시감을 전달해 주는 그 유명한 AC-130 건쉽 미션인 ‘하늘의 저승사자Death From Above’, 수많은 적 탱크들과 보병들이 코 앞에서 지나가는 걸 낮은 포복자세로 숨 죽인 채 기다려야 하는 ‘위장 완료All Ghillied Up’ 미션까지, 타이트한 연출로 제어되는 스펙터클이 게임 플레이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매우 ‘쫄깃한’ 싱글 플레이 경험을 선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던 워페어 1이 발매되었던 2007년은 보통 해가 아니었다. 7세대 콘솔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3와 엑스박스 360, 그리고 닌텐도 Wii가 바로 그 전 해에 출시가 된 상황이었고, 업그레이드된 하드웨어에 발맞춰서 무시무시한 타이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슈퍼 마리오 갤럭시〉, 〈포탈 1〉, 〈갓 오브 워 2〉, 〈팀 포트리스 2〉, 〈바이오쇼크〉, 〈매스 이펙트 1〉, 〈메트로이드 3 커럽션〉, 〈헤일로 3〉, 〈언차티드: 엘도라도의 보물〉, 〈크라이시스〉 등등. 그 외에도 거대 프랜차이즈의 시작을 알린 〈위쳐 1〉과 〈어새씬 크리드〉가 발매되었다. 즉, 모던 워페어가 게임플레이의 혁신을 이유로 명함을 내밀기에는 좀 뻘쭘한 그림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2007년에 출시한 ‘인디’ FPS 게임 〈스토커 섀도우 오브 체르노빌〉과 비교해봐도, 마치 오래된 롤러코스터를 연속으로 타는 것과 같은 모던 워페어의 계산된 스펙터클은 어느 순간 지겨움과 상호 교차가 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물론 멀티 플레이를 빼놓고 모던 워페어의 게임 플레이에 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 실제로 캐릭터 퍽과 킬스트릭 시스템은 기존 모던 워페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할 뿐 아니라 다른 많은 멀티플레이 게임들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킬스트릭을 통해서 앞서 언급한 AC-130 건쉽을 일종의 공중지원 보너스로 끌어옴으로써 특정한 싱글 플레이 미션의 충격 효과를 멀티플레이에서의 반복으로 소진시키는 탁월함(?)을 뽐내기도 했다. 하지만 참신한 시스템으로 인더스트리를 선도하던 모습은 ‘그땐 그랬지’의 느낌처럼 추억 속의 이야기가 되어 가는 중이다. 모던 워페어 1 리부트의 멀티 플레이 버전으로 2020년 출시한 〈콜 오브 듀티: 워존 퍼시픽〉은 (올해 출시된 워존 2.0과 마찬가지로) 〈배틀그라운드〉와 〈포트나이트〉가 본격적으로 유행시킨 배틀로얄 모드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혁신의 아이콘이기보다는 노련한 후발 주자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고 싶어 하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이처럼 기존 모던 워페어 시리즈의 담론을 지탱하던 두 개의 커다란 범주들(게임 플레이의 혁신, 굉장한 상업적인 성공)은 점점 ‘라떼는 말이야~’와 같은 톤에 가까워지고 있다. 반면 사회/정치적인 논란들을 둘러싼 이야기는 좀 더 미묘한 방향으로 선회한다. 엿같은 날들 S.S.D.D.(Same Shit, Different Day) 사실 모던 워페어 시리즈가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적과 아군이 비교적 명확하고 (영화와 게임 제작자들에게 나치가 얼마나 소중한(?) 빌런인지 생각해 보자) 어느 정도 역사적 평가가 마무리된 2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현대전modern warfare은 여전히 ‘전장의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아무리 가상의 국가와 인물, 심지어는 가상의 타임라인을 설정한다고 해도 ‘중동’, ‘러시아’, ‘대량살상 무기’, ‘테러리즘’, ‘블랙 옵스’, ‘극단적 국수주의자’ 등과 같이 민감하고 복잡다단한 역사적인 레이어들이 누적된 키워드는 게임 바깥의 현실과 긴밀하게 연동됨으로써 게임의 유틸리티적인 측면(무해한 오락으로서의 소프트웨어)이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정치적 텍스트로서의 측면을 급부상시킨다. 더욱이 모던 워페어 시리즈가 연이어서 발매되던 2007년과 2011년 사이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끝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5) 그 와중에 현대전으로의 전환을 처음부터 탐탁지 않아했던 퍼블리셔 액티비전 6) 과는 달리 개발사 인피니티 워드는 미국 해병대USMC의 자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은 물론, 논란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문제적인 미션들도 서슴없이 도입하는 등 매우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특히 1편의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미션과 2편의 ‘러시아어 사용금지No Russian’ 미션은 지금도 종종 회자될 정도로 악명이 높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같이 선명한 정치적인 논란은 블록버스터적인 연출과의 기이한 콜라보를 통해서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대작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종종 보이던) 일종의 ‘맛있는 불량식품’을 만들기 위한 완벽한 레시피로 거듭날 수 있다. 모던 워페어 시리즈는 그런 면에서 꽤 훌륭한(?) 길티 플레져 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부분에 더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서 이 게임을 둘러싼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맛있는’에 집중하는 (모던 워페어를 포함한)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광적인 팬들이 존재한다. 그 반대편에는 ‘불량식품’에 치를 떠는 (아마도 게임 그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들과 모던 워페어의 정치적 스탠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혼재되어 있을) 비판자들이 소리 높인다. 마지막으로 ‘맛있는 불량식품’이 가지는, 그 약간의 죄책감이 얹힌 맛을 제대로 음미할 줄 아는 계몽된 냉소주의자들이 조용히 게임을 플레이한다. 폴리곤의 〈 How Call of Duty turned war into a circus 〉 7) 영상은 계몽된 냉소주의자인 화자의 입장에서 나머지 두 팩션을 가로지르는 재치 있는 영상으로 세 가지 다른 입장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이점을 제공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을만한 지점인데, 바로 모던 워페어 시리즈의 내러티브는 바보 같다는 점이다. 이 공통의 감각(?)은 모던 워페어를 둘러싼 담론의 장을 (단발적인) 논란으로 가득 차게 만듦과 동시에 도식적인 구도를 강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논의의 지루한 공회전을 유지시키는 역설적인 상황을 조성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를 통해 이야기해보자. 이전 글 8) 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거의 모든 비디오 게임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루도내러티브 부조화가 작용한다. 이에 따라 게임 플레이를 통한 경험과 게임의 공식적인 내러티브는 마치 한 컵에 담긴 물과 기름처럼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못한 채, 일종의 느슨한 동기화로 연결된다. 때로는 특정한 사건(괴랄한 게임/과금 디자인 혹은 모딩과 같은 유저의 초월적인 개입)으로 인해서 마치 예전 아이튠즈처럼 아예 동기화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에 이르기도 한다. 즉, 동기화는 보장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반(半) 연결적인 투 트랙의 구조는 게임의 분열적인 수용을 가속화한다. 모던 워페어 시리즈의 멀티플레이를 이미 수천 시간 이상 뛰었으며, 아마 지금도 리부트의 멀티플레이인 워존에서 구르고 있을 ‘찐팬’들에게 바보 같은 내러티브라는 조롱은 통하지 않는다. 킬스트릭을 달성하면 주어지는 AC-130 건쉽 폭격의 등장을 내러티브적으로 녹여냈다는 것만으로도 모던 워페어의 스토리는 이미 “장르적인 정당성”을 획득한다. 비판자들에게 모던 워페어의 황당무계한 내러티브는 영미 제국주의와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프로파간다 텍스트다. 대부분은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단 한 번도 플레이해보지 않았을 것이며, 그중 소수는 약간의 싱글 플레이를 통해서 자신들의 신념을 재확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멀티 플레이에 수백 시간 아니 수 시간도 쓰고 싶지 않을 것이다. 계몽된 냉소주의자들은 양쪽의 의견을 모두 공감할 뿐 아니라, 그 간극이 주는 ‘불량식품’의 맛을 은근히 즐기고 있을 것이다. 관건이 되는 것은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모던 워페어가 출시할 때마다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비슷한 비판들이 다시 도래하며, 또다시 비슷한 반론이 재등장한다. 비슷한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러거나 말거나 ‘찐팬’들은 바로 이전 모던 워페어와 아주 유사하지만 약간 다른 멀티플레이에 다시 수천 시간을 퍼붓는다. 어쩌면 우리는 이 일련의 행위들을 축제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축제는 반복된다. 그런데 기존 모던 워페어 시리즈의 ‘마이클 베이스러운’ 9) 내러티브가 더 이상 의례 그렇듯이 바보처럼 보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면, 그때도 우리는 이 축제를 지속할 수 있을까. 가령 자국 내의 ‘극단적 국수주의자’ 반군들이 미국과 인근 유럽 국가들을 침략해서 전쟁이 벌어지자 그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평화 회담장으로 향하는 러시아의 대통령을 국수주의자 무리의 리더가 납치하는 이야기와, 본인부터가 ‘극단적 국수주의자’인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인근 유럽 국가의 침공을 명령하는 이야기 중 어느 쪽이 더 황당무계하고 초현실적인가. 둘 다 만만치 않지만 나는 후자에 손을 들어주겠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는 지금까지도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을 가리킨다. 장기전에 돌입하면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에게 행한 전쟁 범죄 10) 가 더 확연하게 드러나는 중인데, 그에 따라 러시아군을 굉장히 악랄하게 묘사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던 모던 워페어 1 리부트가 사실 알고 보니 그들을 미화(?)했던 거라는 블랙 코미디스러운 재평가를 받는 지경에 이른다. * 러시아 대통령마저 납치하는 상남자 마카로프. 하지만 게임 바깥의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다. 〈콜 오브 듀티 4: 모던 워페어〉의 ‘쿠테타The Coup’ 미션에서 유저들은 이 게임의 메인 빌런 중 하나인 알 아사드가 생중계되는 카메라를 앞에 두고, 자신들의 머리에 총을 쏘는 것을 중동 ‘어느’ 국가의 대통령의 시점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몇 년 뒤 세계는 아이에스Islamic State가 포로들을 ‘참수’하는 영상들을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퍼뜨리는 것을 (이번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또다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1) 그뿐 아니라 마치 ‘아랍의 봄’의 뒤집힌 악몽과도 같이 아이에스는 스마트폰이라는 물리적 네트워크 노드 기반 위에서 소셜 미디어와 다크 웹을 통한 매우 공격적인 ‘모집’ 과정을 전개했다. 그 결과는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유럽 전역과 동남아시아에 걸쳐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테러들이다. 201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이미 ‘중동을 너무 선정적으로 묘사했다’, ‘스테레오 타입들의 캐릭터로만 채워져 있다’는 식의 관습적인 모던 워페어 비판들은 길을 잃어버린다. 어느 순간 현실은 거의 스너프 필름에 가까워지고, 중동의 ‘새로운 전사’들은 네트워크로 연계된 새로운 양태의 테러를 직접 시연함으로써 기존의 스테레오 타입들에서 아득히 멀어진다. 먼지에서 먼지로 Dust to Dust 모던 워페어 시리즈가 배태한 그 수많은 논란들은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당시의 세계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음을 알려 주는 일종의 지표가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기존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할 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거나 오히려 어떤 편안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만큼 지금의 세계가 더 많이 불안정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던 워페어는 이제 평화로운 시대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당시에는 나름 센세이셔널했던) 추억의 펑크록 앨범 같은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인가. 나는 아직 그렇게 단정 짓기는 이르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게임 시리즈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현재의 급격한 불안정성을 예비하는 단초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전이 이전 시기의 전쟁들과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은 바로 물류, 장비, 인프라, 기술, 국경, 평화협정 등을 포함한 수많은 비인간적인 요소들에 의해서 심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전쟁은 인간들의 결정에 의해서 많은 것들이 좌지우지된다. 하지만 사소해 보이는 기술 하나가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거나, 혹은 아예 전쟁 자체를 예방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제3차 대만 해협 위기 때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당시 중국군은 위협용으로 대만의 군기지 근처에 미사일 3개를 연달아 발사했다. 첫 번째 미사일은 예정된 목적지에 떨어졌지만, 나머지 2개의 행방이 묘연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날아가는 도중 그 2개 미사일 내에 GPS 신호가 끊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는 미국이 개발하고 관리해 온 시스템이다. 즉, 미군은 중국군이 GPS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단기적으로는 중국군이 물러남으로써 전쟁 위기를 해소하는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중국 정부가 이를 갈고 자체적인 항법 시스템을 개발해서 위성을 쏘아 올리도록 만들었다. 12) 이렇듯 스마트폰의 여러 앱들을 통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GPS 같은 기술조차 전쟁 상황에서는 그 파급력을 가늠하기 어렵다. 모던 워페어 시리즈 역시 이러한 자의식이 느껴지는 레벨 디자인을 선보인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던 ‘하늘의 저승사자Death From Above’ 미션은 (3편의 ‘철의 여인Iron Lady’ 미션도 마찬가지로) 유저들을 AC-130 건쉽 조종사의 모니터링 스크린 앞으로 데려다 놓는데, 이때 유저들이 경험하는 것은 사실 무인 드론 조종사의 포지션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굉음을 내는 건쉽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방 안에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지상의 풍경은 무인 드론 조종사의 모니터 화면과 놀랄 만큼 유사한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오버랩은 이 미션의 꽤 노골적인 (소격 효과를 노리는) 의도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미션을 수행하는 건쉽 오퍼레이터들의 건조한 대화 중 간간이 들리는 즐거운 환호성과 농담보다도 유저를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건쉽/드론을 조종하는 감각이다. 한껏 당긴 망원 렌즈 덕에 원근감이 제거된 평평한 화면 위로 작게 꼬물거리는 ‘타겟’들은 마치 치워 버려야 할 ‘벌레’처럼 제시되며, 그들을 ‘처리’하는 과정은 실제 벌레를 잡는 일보다도 훨씬 간단하다. 즉, 수백 명을 학살하는 행위는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은 일상적인 ‘클릭질’의 영역으로 전환한다. 이는 또다시 무인 드론 조종사의 실제 경험과 겹쳐지면서, 초점을 유저/조종사와 같은 인간적 주체에서 건쉽/드론 - 적외선 카메라 - 모니터/스크린 - 마우스/조이스틱으로 이어지는 (라투르의 표현을 빌자면) 매개자들의 네트워크로 옮겨 놓는다. 그리고 바로 이 비인간 행위자들의 네트워크가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학살자’로서의 유저/드론 조종사를 역으로 ‘주조해’ 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모던 워페어modern warfare가 어째서 ‘근대적이지 않은지nonmodern’ 이해할 수 있다. * ‘하늘의 저승사자Death From Above’ 미션의 스크린(왼쪽)과 실제 무인 드론의 스크린(오른쪽) 당연한 이야기지만 매개자의 증식이 전쟁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다만 현대의 일상적인 세계는 때때로 전쟁보다도 불투명하다. 물류와 인프라가 점점 고도화되면서 모든 것들이 상시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착각이 팽배하지만, 역설적으로 매개자들의 네트워크는 (아이패드처럼) 이음새 없이 매끈하게 빛나는 표면 아래서 가시성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알고리즘의 지배로부터 팬데믹을 거쳐 급격한 기후 변동까지, 2020년대의 우리는 마치 이 모든 비인간 행위자들이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세상에 등장하기라도 한 듯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여기서 모던 워페어 시리즈는 과장된 스펙터클과 거친 매너로 우리의 등을 떠밀면서 그들(비인간 존재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였으며, 우리 역시 그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새롭게 거듭났었다는 진실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위태로운precarious 현재란 다른 무엇도 아닌 그들과 우리가 함께 만들어 온 역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 누군가는 비관적인 전망을 하며 이렇게 반문할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냐고. 프라이스 대위라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네가 알던 그 세계는 끝났어. 그런데 그걸 다시 되찾을 수 있다면 너는 어디까지 갈 수 있지? Your world as you knew it is gone. How far would you go to bring it back?” 1) 얼마 전에 발매한 모던 워페어 2 리부트 역시 이미 여러 해 전부터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일종의 타임캡슐적인 성격을 지닌다. 2) Evgeny Obedkov, “Diablo Immortal and Candy Crush were biggest contributors to Activision Blizzard’s mobile growth in Q3” Game World Observer, 2022.11.10. https://gameworldobserver.com/2022/11/10/diablo-immortal-candy-crush-saga-mobile-revenue-activision-blizzard 3) David Curry, “Top Grossing Games (2022)” Business of Apps, 2022.10.27. https://www.businessofapps.com/data/top-grossing-games/ 4) Amr Al-Aaser, “Shock and Awe: The Political Influence of Modern Warfare” Paste Magazine, 2016.11.02. https://www.pastemagazine.com/games/call-of-duty/shock-and-awe-the-political-influence-of-modern-wa/ 5) 미국은 결국 2011년 12월에 이라크 전쟁의 종결을 공식 선언했다. 모던 워페어 3가 출시한 지 한 달 뒤의 일이다. 6) 액티비전이 콜 오브 듀티 4가 모던 워페어로 출시하지 않기를 바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굳이 황금알을 잘 낳고 있는 거위(2차 세계대전 배경의 콜 오브 듀티 1,2,3)의 배를 가르고, 논란이 클 것이 뻔한 현대전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 비즈니스적으로 큰 리스크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바비 코틱은 개발사 인피니티 워드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고, 개발사는 그대로 밀어붙여서 모던 워페어를 출시한다. 7) Patrick Gill, “How Call of Duty turned war into a circus” Polygon, 2022.05.06. https://www.youtube.com/watch?v=JIEB5DKzJLM 8) 웜뱃, “게임은 XX다: 동어반복적 회로를 차단하기” 게임제너레이션, 2022.08.08.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143 9) 공교롭게도 모던 워페어 2에는 마이클 베이가 감독한 〈더 록〉의 샤워실 총격신을 그대로 옮긴 듯이 오마주한 챕터가 있다. 10) DW Documentary, “War crimes in Ukraine | DW Documentary” DW Documentary 2022.11.27. https://www.youtube.com/watch?v=ONWW02pNvFk 11) 유튜브와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메인스트림 앱들은 재빠르게 대응했지만, 이내 IS는 텔레그램과 Surespot 같이 소셜 미디어의 기능이 혼합된 메시지 앱으로 이동했다. 12) Minnie Chan, “'Unforgettable humiliation' led to development of GPS equivalent” South China Morning Post, 2009.11.13. https://www.scmp.com/article/698161/unforgettable-humiliation-led-development-gps-equivalent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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