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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염, AI, 그리고 <발더스 게이트>
적어도 분명한 것은, 앞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이제 인류는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든 피할 수 없는 위협으로 다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가끔은 망상하듯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가령 고타쉬는 현실의 누구인가? 우리 곁의 ‘황제’는 누구 혹은 어떤 것이며, 어떤 모습으로 당신을 현혹하고 있는가? < Back 15 GG Vol. 23.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의 순간
리얼리즘의 탄생은 근대 이래 과학주의의 확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하지만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다양성, 사회적 상호작용의 게임화는 리얼리즘과 과학주의 간 긴밀한 관계를 위협하고 있고, 이로 인해 우리는 리얼리즘이란 것에 대해 다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게임적 리얼리즘(ゲーム的リアリズム)’ 이론은 그 안에 이론적 균열과 논리적 모순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하여금 리얼리즘 내러티브라는 문제와 침묵하는 독자를 자율적인 행위자로 바꾸는 게이머 문제를 사고하도록 해주었다. < Back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의 순간 12 GG Vol. 23. 6. 10.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 [1] 의 순간 游戏性现实主义:“第三时间”与多异性时刻 [2] 리얼리즘의 탄생은 근대 이래 과학주의의 확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하지만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다양성, 사회적 상호작용의 게임화는 리얼리즘과 과학주의 간 긴밀한 관계를 위협하고 있고, 이로 인해 우리는 리얼리즘이란 것에 대해 다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게임적 리얼리즘(ゲーム的リアリズム)’ 이론은 그 안에 이론적 균열과 논리적 모순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하여금 리얼리즘 내러티브라는 문제와 침묵하는 독자를 자율적인 행위자로 바꾸는 게이머 문제를 사고하도록 해주었다. 디지털 게임 속에서 리얼리즘적인 스토리 시간과 내러티브적 시간이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읽는 시간 즉 ‘제3의 시간’, ‘노는’ 시간이 구해진 것이다. 실제 세계로부터의 신체적인 충동이 게임 행동의 핵심으로 전환되고, 리얼리즘 내러티브의 정신적 이끔이 게임적 리얼리즘의 감각적 이끔으로 대체된다. 행동을 주도하는 의미생성 방식이 그 핵심이 되는 것이다. 게이머는 더 이상 세계의 사물 뒤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사람들의 육체가 존재하는 방식처럼 세계의 사물 자체에 놓이게 됐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리얼리즘 비디오게임의 디자인, 소비, 상벌, 인식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일종의 파노라마적인 지식의 환각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 게이머는 신체의 감각에 빠져 파노라마 지식 환각의 의미를 조각화, 껍데기화하는 것에 전념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비디오 게임 내러티브에서 게이머의 행동 중 어느 것도 상징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며, 불안정한 ‘다이성’을 나타나게 된다. 이제 가상현실은 메타스페이스에 도달하였고, 이곳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게임적 방식’으로 개인의 일상 경험에 몰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험은 이제 거짓이나 상상이 아니라, ‘리얼’이다. 즉, 인류의 지식에서 배제됐던 ‘게임’은 “자유의지”(Immanuel Kant), “심리상태의 경계”(Friedrich von Schiller), 혹은 “정력의 과잉”(Herbert Spencer)의 게임이 되고, 메타버스 시대에 새로운 지적 경험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즉 “게임을 통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게임 자체가 지식”이 됐음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메타버스는 일상의 잉여로서의 ‘놀이’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인류 일상의 이념을 변화시켰다. 세 가지 리얼리즘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캐릭터 독립(角色独立)’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본 연구자 아즈마 히로키가 창안한 개념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 개념의 정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의 글이나 오오츠카 에이지(大冢英志)와의 대담을 통해 이 개념의 의미를 추론할 수 있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 동물화된 포스트모던>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세 가지 리얼리즘을 언급했다. 그는 오오츠카 에이지의 연구가 자연주의 리얼리즘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라는 두 가지 리얼리즘을 도출했다고 봤다. 자연주의 리얼리즘이 꼭 에밀 졸라(Émile Zola)로 대표되는 자연주의 유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일본에서 라이트노벨이 등장하기 전에 존재했던 순수문학의 한 형태로서 ‘사소설(私小說)’을 지칭한다. 오오츠카 에이지에 따르면 사소설은 모두 상대적으로 안정적 발화 주체인 ‘나’를 갖고 있으며, ‘나’가 스토리의 논리와 구조에 따라 발화하는 소설이라고 언급한다. 한편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일본에서 새롭게 등장한 라이트노벨을 지향하는데, 이러한 종류의 소설에는 등장인물이나 캐릭터, 스토리, 플롯을 통제할 수 있는 안정적인 발화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라이트노벨의) 작가는 캐릭터 자체에 얽매이는데, 오타쿠들이 애정하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 속의 ‘2차원’ 캐릭터 자체가 이야기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라이트노벨은 사소설이 한 명의 ‘나’로 소설을 통제한다는 의식을 바꿔버렸다. 아즈마 히로키는 오오츠카 에이지의 두 가지 리얼리즘 구분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자연주의 리얼리즘이든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든 작금의 현실을 완전히 드러내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즈마 히로키는 이 새로운 리얼리즘을 ‘게임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면서 세 가지 리얼리즘의 분류를 완성했다. 그렇다면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게임적 리얼리즘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모두 ‘캐릭터’가 핵심이지만, 게임적 리얼리즘의 경우 캐릭터의 메타서사 기능(메타적 스토리성)에 기초한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핵심포인트는 여전히 “캐릭터 독립”이라는 것이다. 즉, 이야기(故事)는 플롯(情节)이나 현실 때문에 설정되는 게 아니라, 어떤 캐릭터를 위해서 설정되는 것이다. 독자들이 그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감동적인 순간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 속 캐릭터의 삶과 상태를 느끼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캐릭터 독립이란 사실 캐릭터가 게임적으로 존재함을 가리키며, 이는 게이머나 독자가 자유롭게 캐릭터를 이용한 결과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메타서사’를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게임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곧 소위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신체와 캐릭터 사이의 경계를 제거하고, 게이머/독자를 텍스트의 일원으로 만드는 방식——게이머/독자의 캐릭터화——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캐릭터’ 독립의 관점으로부터 설정되는 게임적 리얼리즘에서 중요한 측면을 망각하는데, 공교롭게도 ‘캐릭터 독립’은 독자가 읽고 소비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하는 결과라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독자가 캐릭터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갖기 때문에 스토리 설정의 내적인 동력이 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독자가 원하는대로 캐릭터를 위한 스토리를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독자는 침묵하는 독서인이 아니라 ‘게임을 열독하는’ “게이머”가 된다. 따라서 ‘캐릭터 독립’은 읽는 행위의 문제를 지향하는데, 독자들이 이와 같은 캐릭터 독립을 원하기 때문에 캐릭터는 독립할 것이란 점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텍스트에서 독자의 의지는 얼마든지 이야기의 의지(그것이 존재한다면)를 바꿀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적 리얼리즘은 사람과 캐릭터가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며, 즉 독자(게이머)가 캐릭터 속으로 완전히 녹아드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에서도 발생했지만, 가상현실 시대에는 더욱 전형적으로 변화했다. 가상현실 서사 [3] 에서는 인간과 캐릭터의 구별이 모호해졌다. 그들의 삶의 경계는 점차 통합되며, 이와 같은 인간과 머신의 공생은 새로운 캐릭터 의식을 낳았다. 근대 이후 과학적 진실에 대한 요구가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을, 내러티브 속 캐릭터의 ‘재생’에 대한 포스트모던 사회의 요구가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을, 가상현실 시대에 인간과 가상 캐릭터의 일체화가 게임적 리얼리즘을 만들어낸 것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종의 새로운 현실 경험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가상의 형식으로 실제의 신체적/정신적 경험을 창조하기 때문에 가상세계의 경험은 실제 생활 경험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뿌리는 바로 ‘게이머’ 자체다. 게이머는 캐릭터가 담고 있는 의미를 잠재적으로 구성하고, 실제 텍스트 활용의 과정에서 이와 같은 텍스트 활용 과정을 게임적 리얼리즘의 핵심으로 만들어버린다. 바로 여기서 게임적 리얼리즘은 단순히 장르(genre)나 형식(style)이 아니라, 가상현실 자체를 지향하는데, 이때 ‘게임적 리얼리즘’은 가상현실의 철학 이념과 스토리텔링의 규칙을 의미하게 된다. 여기서 ‘캐릭터 독립’이란 곧 읽는 행위의 문제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캐릭터 독립은 왜 발생할까? 그것은 독자가 이와 같은 독립을 원하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오타쿠의 2차원적 내러티브에서 캐릭터가 꼭 이야기에 속하는 것은 아니며,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이야기가 결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 역시 아니라는 점, 즉 라이트노벨에서는 캐릭터의 성격이 플롯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따라서 라이트노벨은 사소설과는 다르다. 사소설이 작가 중심적이라면, 라이트노벨은 독자 중심적이다. 캐릭터에 대한 독자들의 활용(물론 완전히 자유로운 활용은 아니다)은 캐릭터에게 자율적인 생명을 불어넣으며, 모든 캐릭터들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 중복해서 활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자신을 바꾼다. “제3의 시간” : 사람의 게임, 게임을 즐기는 사람에서 게이머로 나아가 게임적 리얼리즘은 캐릭터의 독립을 통해 그동안 매체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독서 행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가상현실 시대의 비디오 게임 서사는 언제나 행동 주도로 이뤄지며, 인간과 캐릭터와의 간극이 가상현실 서사 속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메타버스적 ‘게임형태’는 인류 생존의 선형적 역사를 폭발시켜 현재진행형으로 변화시켰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서사는 이야기 발생 시간과 서사가 차지하는 시간으로 이뤄져 있다. 이것이 서사의 첫 번째 시간(이야기 시간)과 두 번째 시간(서사 시간)을 형성한다. 서사 시간은 문학의 핵심이며, 그것은 이야기 시간이 작품에 나타나는 방식을 제어한다. 상대적으로 리얼리즘 텍스트는 스토리텔링 시간과 스토리텔링 시간의 조화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는 반면, 모더니즘 텍스트는 오히려 서사 시간과 균형을 맞추는 데 더 많이 사용된다. 따라서 다니엘 벨(Daniel Bell) [4] 은 모더니즘의 특징은 현장성(거리의 소멸, eclipse of distance), 즉 독자로하여금 이야기꾼의 말버릇이나 말투가 독자에게 들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전통 소설들은 대체로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의 조합이다. 하지만 전통 서사에서 읽는 시간——이를 ‘제3의 시간’이라고 하자——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며, 사람들은 ‘제3의 시간’을 ‘제로 시간’ [5] 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반대로 게임적 리얼리즘은 ‘제3의 시간’을 위주로 하여 텍스트의 사용 활동(제1의 시간)과 텍스트의 서사 행동(제2의 시간)이 함께 새로운 ‘게임 행위’(제3의시간)를 구성한다. ‘제3의 시간’ 안에서 신체의 충동이 게임행위의 핵심으로 변화하고, 게임적 리얼리즘의 ‘주인공’이 ‘캐릭터’에서 ‘플레이어’로 바뀐다. 서사자로부터 ‘서사’의 핵심적 지위는 플레이어의 ‘플레이’로 바뀌게 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세계의 사물 뒤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탐구하지 않으며, 실제 삶에서 사람들의 신체가 존재하는 방식처럼 세계의 사물 자체에 놓이게 된다. 전통적인 텍스트에서 독자의 존재는 텍스트 입장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볼프강 이저(Wolfgang Iser)는 어떠한 이야기든 이상화된 암묵적 독자를 설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암시적 독자(Der implizierte Leser)’ [6] 라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암시적 독자는 휴머니즘의 주체론적 환상을 더 많이 보여준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텍스트를 읽는 과정을 탐색했다. 그는 텍스트에 대해 “to be or to have”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위에 ‘쓰기 가능한 텍스트(writerly text)’의 범주를 제시했다. 하지만 ‘쓰기 가능한 텍스트’는 텍스트 의미의 틈새를 통해 구축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읽기 행위에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읽기를 일종의 성적 활동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은밀성만 강조했을 뿐 텍스트 읽기 자체에 주체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미학과 독자반응이론, 버밍엄 학파의 암호에 대한 강조를 수용하는 것은 사실 “텍스트 의미의 실현”이나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태도”에 중점을 두는 것이며, 제3의 시간이 서사 측면에서 제1의 시간이나 제2의 시간을 주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독자, 관중 등은 ‘플레이어’와 같지 않다. 전자(독자)는 텍스트 뒤에만 나타날 수 있고, 후자(관중)는 텍스트 서사의 새로운 행동을 발현한다. 우리가 오직 게임적 리얼리즘 텍스트, 특히 비디오게임 텍스트 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제3의 시간’은 완전히 구원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인류의 게임 발전은 세 가지 형태를 거쳤다. 최초는 낮에 사냥하고 밤에 사냥을 모방하는 ‘인간의 놀이’ 형태로 출현했다. 다음으로는 ‘놀이하는 인간’이 나타났는데, 프리드리히 폰 실러는 이를 두고 이질적 산업화 세계에서 게임을 통해 규율과 이질성에 저항하는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놀이란 곧 목적 없는 합목적성, 불규칙한 규율성, 자유의 상징(놀이 충동)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놀이’나 ‘놀이하는 인간’을 연구하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게임’, 즉 ‘플레이’를 핵심으로 하는 게임을 연구한다. 플레이란 텍스트를 즐기는 것이자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곧 ‘제3의 시간’의 중심화를 형성한다. 이때 ‘플레이어’는 더 이상 텍스트 밖의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서사적 행동 속의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전통 서사와 게임 서사는 매우 다르며, 후자는 전통 서사에 없는 ‘제3의 시간’ 서사를 만든다. 전통 서사는 독자들이 서사 시간을 통해 이야기 시간에 몰입하게 하고, 자신의 현실 시간을 잊게 한다. 따라서 전통 서사의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이야기의 폐쇄성을 형성하고, 일단 이야기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고 독자의 읽는 시간은 껍데기가 된다. ‘독자’는 설정적인 캐릭터가 되고, 읽기란 개인의 생생한 삶의 경험을 착취하는 과정이 된다. 말하자면 전통 서사는 텍스트의 독서자/사용자를 구조적으로 배척한다. 게임 서사는 이와 반대인데, 그것의 심오함은 ‘제3의 시간’이 이야기 시간을 빌어 서사 시간을 소멸시켜버린다는 데 있다. 사람들이 완전히 현실로 돌아오게 하거나, 혹은 현실의 시간이 거대한 작용을 하도록 하는 것인데, 게임은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이 끝날 때에야 비로소 진짜 시작된다. 가상현실 시대, 게임의 ‘제3의 시간’은 더욱 풍부하고 생동감 있게 변화했다. 첫째, 그것은 서사가 단순한 인과적 사슬을 따라가게 하지 않고, 대신 이야기에 몰입한 ‘행동자’에게 이야기가 벌어지는 공간적 상황을 느끼게 함으로써 이야기의 시간적 논리를 공간적 논리로 대체시킨다. 전통적인 이야기에서 인간과 이야기는 표현하고 표현되는 관계인 반면, 가상현실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과 이야기는 함께 행동하는 관계가 된다. 즉 사람들이 이야기를 구동하며, 이야기가 사람을 인도하지 않는다. 둘째, 플레이어가 위탁한 ‘아바타’의 함의는 은유가 아니며, 유일무이한 개인의 완전한 대표 그 자체다. 따라서 게임 서사의 이야기는 ‘과거의 시간’을 다루지 않으며, 일종의 ‘현재진행형’이다. 플롯이 아니라 게임 캐릭터의 행동을 이끌어냄으로써 보다 넓은 상상력과 다양한 형태의 캐릭터 인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게임 서사의 핵심은 게임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게임을 진행하고 어떻게 게임 속에서 게임을 완성하느냐에 딸려 있다. 간단히 말해 오직 게임의 행동만이 독립적인 인간의 자유로운 태도를 설정——즉, 놀이가 인간의 모든 것을 구성한다——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인물의 운명은 더 이상 미리 짜여지지 않고 ‘사건화’된다. 여기서 가상현실 서사는 개개인이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를 생성하고, 각각의 ‘작은 이야기’는 모두 결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침잠하는 사건이며, 영원히 ‘진행중’인 사건이란 점이 ‘제3의 시간’의 핵심이 된다. 그러니까 제3의 시간이란 영원히 일어나는 이야기를 가정한 시간이다. 분명히도 ‘제3의 시간’은 우리가 게임의 철학적 함의를 새로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게임은 인간의 이성적 생활의 ‘평안함’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 끼워져 있는 의제이다. 게임이야말로 상징계와 상상계에 의해 완전히 정복될 수 없는 진실의 일부를 폭로한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게임이 철학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이라는 사실이다. 19세기 이래 인류의 이성주의에 대한 강한 공감과 자제, 자율, 자각을 둘러싼 초자아적인 욕망은 게임의 사회정치적 함의를 배양해왔다. ‘게임’은 ‘게임 플레이를 하는 사람’의 통제력을 부각시킴으로써 이성주의 시대에 잠재된 ‘비인간화의 충동’, 즉 이질적인 노동규율에 완전히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려는 무의식적인 충동을 드러낸다. 여기서 ‘비인간화’란 인간의 탈인간화가 아니라, 사회 내에서 규정되는 방식보다 자신의 신체적 경험을 따르는 ‘인간화’, 즉 ‘비사회적 인간화’를 가리킨다. 전통적인 철학, 사회학, 인류학 연구 시야에서 ‘게임’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여전히 ‘면대면’의 인간 활동이며, 오늘날까지도 ‘게임’은 가상현실의 이야기 공간이다. 전통적 문화비평, 또는 미학 연구자의 관점에서 게임은 ‘서사’의 어떤 도움으로 껍데기를 구축하는 쾌감적 행동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게임은 일종의 ‘서사’로서 이야기의 시간적 단서들을 수정하고, 플레이어들의 게임 활동 중 ‘사건적 행동’의 문을 열어준다. 문화연구에서 ‘게임’(아케이드, 휘파람 부는 소년, 해변의 서퍼 등)은 청년 저항성의 표징이지만, 게임의 주이상스(jouissance) [7] 를 보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확실성에 대한 미련(결국 저항은 확실성을 내포한 행위이므로)이다. 문화연구에서 말하는 저항이란 어디까지나 확정적인 행위인데, 게임은 소환되지 않은 신체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경험이다. ‘ 다이성’의 순간과 플레이어로서의 나 제3의 시간에서 이야기는 이미 발생한 일(과거)에서 발생하고 있는 과정(현재진행)으로 바뀐다. 즉, 가상현실의 새로운 의미 표현의 물꼬를 튼 것(다의성, multi-paradox)이다. 이와 같은 다이성 속에서 ‘플레이어’가 함유하고 있는 뜻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내가 보기에 메타버스로 대표되는 가상현실 시대에 게임적 리얼리즘의 ‘제3의 시간’은 다이성의 순간을 창조할 수 있다. 즉 여기서 다양한 가능성과 다양한 불가능성이 충돌의 순간을 교차하게 된다. ‘다이성’은 각종 모순과 역설의 동시발생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고정적 의미, 즉 역사적으로 안정적이고 통일적인 이해, 혹은 미리 결정된 플롯화 서사가 아니다. 일이 어떻게 발생할지 모르고 심지어 보고 싶지 않은 일이 발생하거나, 일어나길 바라는 일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전통 서사에서 이야기의 결말(이야기의 끝)과 엔딩(서사의 완료)은 따로 존재한다. 게다가 결과는 이미 일어났지만 엔딩이 여전히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엔딩과 결말의 분립은 독자의 ‘제3의 시간’을 ‘규칙화’, ‘권력화’, ‘질서화’하겠다는 전통 서사의 야망을 보여준다. 비디오 게임 서사와 전통적인 서사는 정반대인데, 게임 중의 서사 시간과 ‘제3의 시간’은 교묘하게 접목되고 스토리텔링의 시간은 여기에서 보류된다. 따라서 많은 슈팅 게임들이 반전과 평화를 말하지만 서사 시간과 ‘제3의 시간’은 이야기 시간을 빼앗고 침잠하여, 플레이어들을 끊임없이 ‘제3의 시간’의 살육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엔딩이 일어나는 순간은 바로 ‘제3의 시간’의 반복적인 중첩이 이뤄지는 순간이며, 스토리에서 사망한 플레이어가 계속해서 플레이해야 게임의 의의가 진정으로 풀리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Hearts of Iron IV)’는 “1936~49년 간 세계 어느 나라든 정치·경제·첩보·외교·전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 기간의 판도를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많은 플레이어들은 히틀러를 선택해 전 세계를 점령하는 걸 선택한다……. 확실히 그것은 서사 시간과 스토리텔링 시간이 ‘제3의 시간’을 규율하는 게 아니라, ‘제3의 시간’이 독보적 시간이 됐음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어디에서 끝나느냐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어디에서 다시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로 인해 플레이어의 선택권은 ‘제3의 시간’이 되며, 그것은 플레이어가 게임의 스토리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자신의 쾌락을 구축하는 것으로 구현된다. 다시 말해, 게임 스토리의 시간과 서사 시간 사이의 모든 의미는 ‘제3의 시간’을 활성화하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플레이는 ‘제3의 시간’을 진정으로 텍스트 주도의 시간으로 만들고, 플레이어는 다이성의 주체, 즉 홑따옴표만 있는 “‘나”가 되는 것이다. 홑따옴표 ‘나는 처음엔 실제 사람이지만, 그 후에는 게임 속 캐릭터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나와 캐릭터’의 융합체이며, 이는 플레이어의 정의를 구성한다. 즉 ‘나는 ‘제3의 시간’을 게임 속으로 갖고 들어가, 모종의 캐릭터와 융합된다. 이것이 바로 ‘게임 텍스트’를 전통 서사 텍스트와 다르게 만드는 부분이다. 전통적인 서사 텍스트는 작품을 시작하는 첫 글자부터 끝맺는 마지막 글자까지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책의 앞표지부터 마지막까지의 전체 내용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게임 텍스트는 소위 ‘과학 텍스트(算学文本)’ 즉 기술적 인터페이스 텍스트일 뿐만 아니라, 플레이어 캐릭터 텍스트 즉 ‘나의 텍스트’라는 두 번째 측면의 텍스트이기도 하다. 물론 게임 텍스트는 게임 제작사가 생산해낸 일부이며, 플레이어와 더불어 플레이를 할 때 ‘제3의 시간’을 가지고 게임 속으로 들어가 캐릭터가 융합된 부분의 모음이다. 다시 말해 게임 텍스트는 동적 텍스트, 즉 플레이의 과정으로서의 텍스트인 것이다. 그럼 플레이어는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플레이어는 하나의 ‘잉여인(空余人)’ [8] 이다. ‘플레이어’는 게임 진행 중에 역설적인 경험을 분출해냄으로써 일종의 ‘잉여인’의 얼굴을 보여준다.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벌거벗음(Nudities)>의 ‘페르소나 없는 정체성’이라는 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체가 순수하게 생물적인 비사회적 신분으로 귀결될 때, 그것은 각종 가면을 쓰고 인터넷상에서 제2, 제3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도 부여받는다.” 여기서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의 남아있는 부호로서의 신체인 플레이어 ‘나의 쾌락은 시비의 의의가 지배한다. 또 다른 텍스트를 맞닥뜨리면 ‘나는 곧 다른 얼굴이 될 수도 있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플레이어가 여전히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말하는 ‘이드(id)’, 즉 한 사람 마음 속 욕망의 쾌감을 깊숙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스나이퍼 엘리트(Sniper Elit)>에서 모든 플레이어는 살인자이지만 동시에 플레이어이기도 하다. 한데 게임은 이미 알고 있는 비밀을 모르는 척하는 방식일 뿐이다. 살인은 게임을 방불케 하지만 저격하는 쾌락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살인이라는 고통스러운 일과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분석해보면, ‘플레이어’가 또 하나의 “역사적 현실의 국외자”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편으로는 플레이어는 그 안에서 플레이의 가치를 점수나 장비, 등급을 통과해 창조하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가치의 표지물이 무의미한 행동(플레이)의 내적 뒷받침일 뿐, 플레이어의 플레이는 그런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강렬한 ‘씽킹 프롬 씽커(Thinking from Thinker)’를 보여준다. 그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으로 허무에 대항하는 것이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은 다음의 측면에서 철저하게 개조됐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캐릭터 독립으로부터 독자의 욕구가 게임적 리얼리즘에 대한 환원적이고 규정적인 성질을 도출하고, 이를 통해 비디오 게이머들이 서사의 시간에 대항하는 이와 같은 행동을 ‘제3의 시간’이란 개념으로 보여줬다. 이 지점에서 플레이 행동은 해방됐으며,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종의 불안정한 자아를 지향하고, 케릭터와 안정적 세계 사이에 항구적인 모순과 대립을 지향하게 됐다. 한 사람이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을 때, 그의 심리 상태는 안정적이고 합리적이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순간, 게임 속의 불안정한 ‘나로 변모할 수 있다. 그것은 살인의 쾌락, 돌격하는 용감함, 숨겨놓은 비열함, 죽은 동료들 가운데에서도 홀로 살아남았다는 기쁜, 그리고 전우를 구해냈다는 신성함 등을 아우른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에서 다이성의 자아가 이렇게 터무니없이 강림해오는 것이다. 바깥 세계에는 안정성에 대한 갈망이 있지만, 게임의 ‘제3의 시간’은 불안정성에 대한 갈망으로 구축되어 게임의 현실적인 역설을 형성한다. 게임 규칙에 대한 준수와 세계의 결핍을 플레이할 가능성에 대한 싫증 역시 역설적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순간’은 바로 ‘다이성’의 순간이다. 이 세계는 플레이할 만한 것들이 결핍되어 있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규정된 동작을 따라야 하며, 이는 곧 ‘플레이’에 대한 주도적인 욕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게임은 플레이할 수 있고, 규정적인 것에 대한 파괴이며, 동시에 규정성을 내재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여러 역설들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게임적 리얼리즘은 역설적인 현실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플레이어’의 얼굴은 ‘다이성’의 형태를 띠게 된다. 그것은 플레이어로서 규칙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플레이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다. 그것은 ‘현실’을 이미지의 세계로 분해하고, 이미지 차원에서 주변을 맴도는 것을 지향한다. 또한 그것은 물질적인 원칙을 게임의 정신 활동 속에 포함시킨다. ‘타자와 나’를 수면 위로 부상시키고, 주체의 안정적인 함의를 제거하여 게임적 리얼리즘 속에서 생명력있고 불확실한 상태에 있는 ‘어떤 것’으로 변화시킨다. 플레이어의 이와 같은 불안정성 때문에 게임산업은 비로소 천편일률적 충돌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비인간/폐인’이라는 의식을 고수하면서 인간의 역사적 활동에 대해 ‘현장에 내가 없는 척’ 가장하는 태도를 취해 가상현실 경험과 에고의 장벽에 빠져들게 한다. 디지털 세계의 파괴자로서 그것은 파괴력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고, 역사적 현실세계의 유령으로써 어둠 속에서 흔들리며 떨어질 것 같은(摇摇欲坠) 등불로 남겨져 있다. 그것은 침묵하고 있지만, 게임은 시끄럽게 울리기도 한다. 게임 세계가 닫히는 순간 그것은 크게 소리를 낸다. *본문출처 : 《난징사회과학(南京社会科学)》 2023년 제3기에 실린 본문은 1만3천 자로 이를 축약하였음. [1] 역주 : 원문의 ‘多异性’은 저자가 창안한 학술 어휘로 보인다. 영어로 하면 multi-difference 정도의 뜻을 갖는데, 이러한 의미를 정확하게 지시하는 한국어 어휘가 없어 한자 독음 그대로 직역했다. [2] 国家社科基金重大项目“虚拟现实媒介叙事研究”(21&ZD327) [3] 역주 : 국내에서 아즈마 히로키의 개념을 소개하는 텍스트들은 ‘작은 이야기’와 ‘커다란 이야기(거대서사)’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이를 각각 ‘故事’와 ‘叙事’로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는 원문의 故事는 ‘이야기’로, 叙事는 ‘서사’로 번역하였다. [4] 역주 : 다니엘 벨은 미국의 사회학자로, 《이데올로기의 종언(The End of Ideology)》(1960년)을 통해 포스트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이야기했고, 《탈산업사회의 도래(The Coming of the Post-Industrial Society)》(1973년)를 통해 '제조업 경제'에서 '과학기술에 기반한 경제'로의 전환을 전망했다.(위키피디아 참고) [5] 역주 :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가 창안한 ‘ti con zero’를 지칭한다. 그의 단편소설집 <티 제로(ti con zero)>(1967) 속 단편들은 수학과 시적 상상력이 혼합된 시공간과 우주의 진화를 다룬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à invisibili)>(1972)은 기존 이야기들의 시간중심 서사를 무너뜨리고, 공간 중심의 서사를 펼친다. 독자들에게 일정한 권한을 주되, 그 안에서 여러 의미를 갖는 내용을 담아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위키피디아, amazon.com 등 참고) [6] 역주 : 볼프강 이저는 독일의 문학 연구자이자 비평가로, 독자반응비평 이론을 연구했다. 이저에 따르면, 구조화된 행위로서의 독자의 역할은 독자가 텍스트 구조를 상상 속으로 수렴하게 하여 텍스트 구조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보여준다. 독자가 읽기 과정에 참여할 때 텍스트 구조가 연결되고 살아나며, 독자는 역사적 현실과 자신의 경험, 독자로서의 역할 수용 사이의 긴장 속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7] 역주 : 저자는 라캉 이론을 통해 게임적 쾌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주이상스는 강렬한 성적 쾌락인 동시에 쾌락원리 및 언어상징 너머의 전복(顚覆) 충동이다. 주이상스는 현실원칙을 파괴하기 때문에 결국 고통이 된다. 이때 주체는 분열적 상황에 빠지고, 대타자를 파괴하려는 강렬한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8] 역주 : 원문의 空余(공여)는 ‘남아돌다’를 뜻한다. 여기서는 空余人을 ‘잉여인’으로 번역했다. Tags: 번역 예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난카이대학 문학원 교수) 저우즈창, 周志强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바이페즈(双相)>와 게임의 신체화
2022년 11월 중순, 랩시드(西山居SEED实验室, 시산쥐SEED실험실)에서 인큐베이팅한 중국산 공익게임 <바이페즈>가 정식 출시됨으로써, 국내 최초 게임 형식으로 양극성 장애[역주: 조울증]를 다룬 게임이 됐다. 조증과 우울증이 번갈아 나타나는 정신질환인 양극성 장애는 전 세계에 약 6천만 명의 환자가 있다. < Back 13 GG Vol. 23.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단위안, 但愿 쓰촨사범대학(四川师范大学) 문학원 문예미학 박사.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Why is the Korean Console Market Size so Small? - A Retrospective of Korean Console Games
I have a vague memory of a time when I was in upper elementary school, sometime in the early 90's or so, but I can’t recall the exact year. I had gotten a "gaming console". I think I won it in a magazine giveaway. Given the age, I can assume what model it was, but I can only make an assumption. I also do not recall the exact model. < Back Why is the Korean Console Market Size so Small? - A Retrospective of Korean Console Games 11 GG Vol. 23. 4. 10. You can see the Korean version of this article at this URL: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match=id:58 I have a vague memory of a time when I was in upper elementary school, sometime in the early 90's or so, but I can’t recall the exact year. I had gotten a "gaming console". I think I won it in a magazine giveaway. Given the age, I can assume what model it was, but I can only make an assumption. I also do not recall the exact model. The reason my memory is so fuzzy is simple: I only played with that console a handful of times. The ROM packs had either a single collection of games or none at all, so the minigames on the internal ROM were all there was. The reason, of course, was my parents. I wasn't kept from playing it, but buying a new ROM pack was out of the question, and the very act of connecting it to the TV at home was frowned upon. I had no concept of what a cable was, or why there were so many wires, and I needed an adult to show me how to connect all the right wires, but my parents actively refused to take on that role. To play the console I had to go over to a friend's house, and while their parents would help me connect everything, I wouldn’t say that they looked comfortable doing it. With no games to play and nowhere to play them, the first game console of my life naturally disappeared into a closet and was completely forgotten. I imagine that the gamers who grew up in the '80s and '90s probably shared a similar experience. As a result, console games only make up a small percentage of the South Korean gaming market today. According to the 2020 White Paper on Korean Games, the percentage is 4.5%, but 1.4% of this is taken up by arcade games, which virtually barely remain in existence. This is a far cry from North America's 38.4%, Europe's 37.5%, and South America's 19.1%, as well as the 2022 global ratio of 25.2%. In Asia, console games accounted for a mere 8.7% of the market, in large part likely due to South Korea's small console market. PC and mobile games, on the other hand, account for 25.7% and 54.1% in Asia, respectively, a stark contrast to the rest of the world. * 2020 White Paper on Korean Games, p. 668 The reason for this can be traced back to its humble beginnings in the 80s and 90s. It's a sad story of a market that started small and never experienced the momentum of hegemony experienced by arcades and PC and mobile. Let's go back to those sad days for a moment. The first game console that was sold in South Korea was the Otron TV Sports. It was a console with built-in games, just like the American "Pong" console, and was initially priced at 29,500 won, and later reduced to 198,000 won. In comparison, in 1977, the average monthly salary of a worker was 69,000 won. It was a price that was far from market formation or popularization, so it didn’t mean much apart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first of its kind. Due to the price, console gaming in Korea never really took off in the era of the family Pong and Atari, and in the '80s, Nintendo was brought to the forefront. However, the idea of Nintendo being imported into South Korea, a country with strong anti-Japanese sentiment at the time, was out of the question. Instead, PC games on the 8-bit MSX platform were imported in the early 80s as a substitute. Even then, they were a luxury, and as of 1982, less than a thousand units were imported into Korea. By the late 80s, South Korea had succeeded in hosting the Asian Games and the Olympics, and the pride from those achievements were through the roof. Naturally, the anti-Japanese sentiment had subsided somewhat, and with Daewoo Electronics releasing its own console called the Zemmix in 1985, much of the unfamiliarity with the new culture that was gaming had dissipated. Still, public sentiment made it difficult for Japanese companies to set up local subsidiaries, so domestic corporations imported consoles under different names. Only then did relevant gaming consoles begin emerging. Samsung imported and marketed the SEGA Master System under the name “Game Boy” which became a hit. Hyundai then imported Nintendo's NES, the North American version of the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and released it as the “Hyundai Comboy”. Thus, the pioneering of the Zemmix, Game Boy, and Combo formed the market. However, this market was not large-scale enough to be called a mass market. While it was a huge success, and was well-known enough for the masses to be aware of its existence, it was a market centered around enthusiasts. This much was evident based on the individual price of each console. * Daewoo’s Zemmix advertisement, priced at 70,000 KRW. (approx. 53 USD today) * Samsung’s Game Boy advertisement, priced at 119,000 KRW. (approx. 91 USD today) * Hyundai’s Comboy advertisement, priced at 139,000 KRW. (approx. 106 USD today) * The prices of console game titles in the latter half of 1992. Therefore, the cost of console games also had to be accounted for on top of the cost of the gaming console itself. With the year 1990 as the standard, these were times when the starting salaries for secondary school teachers and businessmen for large companies were less than 600,000 won. The wealth gap grew from this point on, making it a bit difficult to use 1.5 million won as the benchmark for the average monthly wage of the working class. Nevertheless, unlike with the Otron from a decade earlier, these prices were ‘a bit overwhelming but still manageable.’ In addition, the hegemony of the gaming market was slowly but surely shifting from arcades to PCs. The PC was actually a competitor to the gaming console, despite costing anywhere from 1 million KRW up to 2 million KRW at the time. In fact, they were actually holding their own weight in the competition against gaming consoles priced under 200,000 won. PCs held the advantage with the context that they were ‘preparing for the technological future’ and could be used in various ways for ‘education.’ Unlike the multifunctional PCs, consoles only offered the gaming feature, rendering even the relatively lower cost to be pointless. Furthermore, the biggest difference between consoles and PCs was the space that they took up. In general, a console belonged in the living room, and a PC in the bedroom. Gaming consoles require to be connected to a TV. The TV is a family-shared media, and so belongs in the living room. Usage of the living room TV was determined by the parents, so the children had to fight for the right to play their console games in the living room. In addition, students of that time had to study late in the night, and thus were often unable to spend time in the living room at all. On the off chance that they could, it was difficult to negotiate for TV time in the living room when their parents had just gotten home from work. But with a PC, the space becomes the room, and you don't have to contend with the usage of the living room. Once you were done studying at night, or if your parents were watching TV, you could just head into your own room. The fact that copying and distributing game software was much easier than copying console ROM packs probably also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spread of PC gaming. In the narrative of the transition from playing games in arcades to playing games at home, North America and Europe were different. The distribution rate of the PC was much faster than it was in Korea, so the perception that PCs were multifunctional rather than just used for gaming was already widespread. Essentially, the PC was already a part of the parents’ generation. Their children did not have after-school study programs nor late-night studying, and the parents already had the PC as one of their leisurely options, meaning they could afford to cede some of the power of the living room to their children. Plus, parents became cognizant of the role that consoles played as caretakers. They figured, if they gathered a few of the neighborhood kids in the living room, ordered them a pizza and gave them the game console, they could sneak out for a night at the movies downtown. Korean parents, on the other hand, had their grandparents, other parents, or late-night studying to be the caretaker, and so had no reason to give console games a glance. However, this is less the case in Europe than in North America, which can be explained by the average living space. In North America, where the residential space is much larger, having a console in the living room was no problem; but in Europe, you had to consider it first before making that change. Eastern Europe, in particular, is a former communist region with a high threshold for importing game consoles, a product of the capitalist camp. It also had a smaller living space than the rest of Europe did, which is why it has the lowest console market share. The only exception to this interpretation is the United Kingdom, where English is the native language and so is less mentally distant in regard to American culture. * While from 2014, this data helps us gather that the average residential space in North America and Australia is greater than that of Europe (especially in Russia, the eastern part of Europe.) In 1990, South Korea had an average of 62.94 square feet of living space per household, similar to Denmark in this graph, but for the cultural reasons mentioned above, they did not take advantage of this space. Therefore, we can say that North America and Western Europe saw a shift in gaming hegemony from arcades to consoles to PCs, while Korea and Eastern Europe went straight from arcades to PCs. Given the status of gaming arcades in these countries, we can summarize the narrative in terms of space. In North America and Western Europe, it's downtown to the living room, then the living room to the personal room. In Korea and Eastern Europe, it’s straight from neighborhoods to personal rooms. The narrative of these spaces is now shifting to being ‘directly in your hands’ with the concept of ‘mobile’ platforms, but the context of these spaces goes beyond that. Whether it's a glitzy downtown gaming center in North America and Europe or a dingy neighborhood arcade in Korea, arcades are public spaces built for gaming, so they naturally build a sense of community. Think of all the times you went to your local arcade to watch your friends play and play against other players from other neighborhoods. We could describe arcades as being "socially-friendly gaming spaces". When this gaming space transitions into the private space of the living room, the social aspect fades, but it doesn't disappear. Someone can watch you play games, you can converse with someone while playing, and/or you can play together, all in the living room. Console gaming is a solitary medium, but it's also a great offline social medium. When the gaming space shifted to the personal room, the social aspect became much less important. The room is a strictly private space, which is why it's possible for Korean parents to have their kids playing PC games while the parents can watch TV. The word PC stands for personal computer, after all. So, before the advent of online gaming, gaming in Korea was a one-person media, back when "playing games together" meant each person held a joystick/pad at a separate arcade/console cabinet. You could describe this as both offline anti-socialization + online socialization. The antisocial nature of PC gaming has been brought down to console levels due to the proliferation of the internet. In the case of internet cafes, it was like reverting the room’s space back to an arcade, and the “arcadeification” of StarCraft was an especially huge historical pivot in Korea. It was socially offline when you went to play StarCraft at an internet cafe with a group of friends, but it could also be done online as well. In other words, Korea’s internet cafe culture has diluted the offline, antisocial nature of PC games, but has also developed the social, online nature due to the expansion of infrastructure, and the result is no more than a reinforcement: You do not have to meet people in-person to play MMORPGs together. And so, society’s perception of games changes. In North America and Europe, where the market share is close to 40%, the offline-social view of gaming is still somewhat alive, such as when you invite friends over to play Halo. The fact that one of the slang terms for video games in American English is “nintendo games” is a testament to Nintendo's historical influence, but it also indirectly demonstrates that the social aspect of consoles is deeply woven into the perception of gaming in English-speaking societies. In Korea, on the other hand, after exiting the arcade, you go straight to your room. The perception of offline socialization is almost non-existent. Two characters that illustrate a stark difference are Thor and Koo Kyung. In the movie, Avengers: Endgame, Thor is presented as a gaming addict who plays Fortnite together in the living room with his friends. On the other hand, Koo Kyung, the main character in the Korean drama Inspector Koo, is a gaming addict, but plays MMORPGs alone in her own home. She interacts with her guildmates through the game, but is a reclusive loner otherwise in the world outside. The difference between Thor’s living room and Fortnite, and Koo Kyung’s own room and MMO role-playing game, is the distinct characteristic of Korean gaming – the lack of consoles. * Thor has become disconnected from society, but he still plays his games together with his friends. This can be seen as a remnant of the faintly offline social nature of consoles. * Koo Kyung has also become distanced from society, but unlike Thor, only she exists in her offline space. This can be seen as society’s perception of online, socially-oriented PC games. This historical context, or difference in experience, is where the difference between the social perception from outside of gaming and the gaming that consumers experience looking out from the inside comes from. The number of Korean console games being extremely low does not simply and one-dimensionally mean that fewer games are made for this platform, but also that fewer games that can be used for offline socialization are produced and consumed. Another way to put it is that games made or distributed in South Korea are made with online socialization as the primary, or even sole assumption. And now, we approach the year of 2022. The hegemony of gaming has progressed in the order of arcade, console, then PC, and is currently transitioning into mobile platforms. The offline space for mobile is incredibly narrow because that space is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it's more offline-antisocial than PCs are. Looking at this transition, you can imagine a graph where offline socialization continues to fade and online socialization grows in importance. So, are the weight of the times shifting to be completely online-social? This is a memory from a few years ago. One of my exes was hooked on the augmented reality game, Pokémon GO. They had to meet up with people in order to capture and trade for more Pokémon, and would even occasionally meet up with people from the community near their house to move in groups together around the neighborhood. This was the point where online socialization became offline socialization. Despite having the “look and feel” of a traditional online game, Pokémon GO was bringing people together to play, leaving plenty of room for interpretation as a mobile arcade or mobile internet cafe on the streets. Looking back, I remember seeing celebrities traveling from city to city to play Pokémon GO, with fans chasing them along the way. This was one of the marketing points of the Nintendo Switch. It's a console that's both stationary and portable, so two players who meet offline can play together by connecting their consoles. This proves that the mobile platform actually hides an aspect of offline-socialization. It's a paradox that makes it the first platform to facilitate offline contact because it's portable. It's phenomenally convenient compared to lugging a game console or PC to a friend's house to play together offline. Throw in the possibility of augmented reality (AR) games, and the social aspect of mobile gaming has the potential to guarantee a solid place in society. But can the offline-social aspect of Korean games, which has been missing since the arcade era due to the absence of console games, make a dramatic comeback? Can something beyond the social activities that Pokemon GO fostered be created? That answer lies in the imagination of developers and how users utilize it.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Freelancer Journalist) Sung Gap Hong a freelance journalist. I suspect that this occupational name is synonymous with 'unemployed'. Starting his journalist career at the Ddanji Ilbo, he was the first to report on the manipulation of NIS comments. Recently, I succeeded in losing weight through exercise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and I fell ill praising the trainers who coach the exercise. (Translator) Esther Yum
- 먹지 않으면 죽는다 – 게임에서의 음식과 먹는 행위
유난히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으레 나오는 말들이다. 하지만 이 말 안에는 단순히 맛이 좋다는 것을 뛰어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입에 맞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피곤했던 하루가 풀리는 감각, 살아 있길 잘했다는 감각, 그러니 아직은 견딜 만하다는 감각.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감각이 바로 ‘살맛’이다. 무엇을 먹는가는 곧 어떻게 사느냐와 연결되고, 인간다운 삶의 기준으로도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음식은 인간에게 영양 섭취 이상의 의미로 자리 잡혀있다. < Back 먹지 않으면 죽는다 – 게임에서의 음식과 먹는 행위 30 GG Vol. 26. 6. 10. ‘이게 사는 맛이지!’, ‘살맛 난다!’ 유난히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으레 나오는 말들이다. 하지만 이 말 안에는 단순히 맛이 좋다는 것을 뛰어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입에 맞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피곤했던 하루가 풀리는 감각, 살아 있길 잘했다는 감각, 그러니 아직은 견딜 만하다는 감각.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감각이 바로 ‘살맛’이다. 무엇을 먹는가는 곧 어떻게 사느냐와 연결되고, 인간다운 삶의 기준으로도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음식은 인간에게 영양 섭취 이상의 의미로 자리 잡혀있다. 먹는 행위는 게임 안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삶의 다양한 부분을 표현하는 매체답게, 게임은 요리와 음식, 먹는 행위를 계속해서 재현해 왔다. 플레이어들이 게임에서 음식을 찾는 이유가 각양각색인 것도 여러 재현 방식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삶에서의 ‘식(食)’이 그러하듯, 게임에서의 ‘식(食)’도 단순히 먹는 행위를 넘어선 지 오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음식은 초창기 게임에서부터 현재와 같은 모습이었을까? 게임 안에서 먹는 행위란 장르 별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먹는 것이 유독 중요한 장르가 있다면 무엇이고, 왜 그렇게 되었을까? 1. 게임 속 음식의 계보 게임 속 음식의 역할을 떠올려봤을 때 크게 연상되는 건 세 가지다. 회복과 생존을 위한 소비재, 버프를 위한 보조 아이템, 거래 물품. 이 외에 음식과 연계해 즐길 수 있는 콘텐츠까지 생각해 본다면, 아마 몇 가지 말하는 정도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싶다. * <버블보블>. 출처: 닌텐도 스토어 이런 음식은 초창기 아케이드 게임에서 점수로 기능했다. <버블보블 Bubble Bobble >과 같은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버블보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애초에 굶지 않았고, 음식은 플레이를 진행하다 보면 자연히 튀어나왔다. 이 안에서 음식은 플레이 성과를 시각적으로 환산하는 기호나 마찬가지였다. 현실 값어치나 포만감의 정도를 따라, 과일 한 알보다는 케이크 한 접시나 라멘 한 그릇이 더 큰 점수를 주는 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 <파이널 파이트>. 출처: Game Informer ( https://gameinformer.com/2020/08/25/the-top-10-health-items-in-gaming ) 이렇게 가격과 포만감을 점수 기준으로 삼던 음식은 점차 체력을 회복시키는 장치로 나아가게 되었다. <파이널 파이트 Final Fight >에서 쓰레기통이나 상자를 부수고 등장하는 음식들이 그러하다. 위스키, 과일, 초밥, 바비큐 등 종류도 다양한 이 음식들은 캐릭터들이 다시 싸울 체력이 되어준다. 이 음식들의 회복량은 앞서 점수로 기능하던 음식들의 법칙과 동일하게 적용됐다. 만복감이 큰 음식일수록 회복 비율이 높아지고, 끼니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음식은 회복 비율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먹고 몸과 마음을 충전하는 방식은 이러한 상징과 함께 나타나, 플레이어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끔 한다. 다만 위의 사례들을 두고 게임 안의 음식이 완벽하게 재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쓰레기통과 상자 안에서 튀어나오는 음식은 조리 과정이 생략되어 있으며, 상하지도 않은 채 온전하다.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는 음식이 몸을 회복시키는 건 사실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안에서는 소화되는 무언가에 대한 경계도 불안도 없다. 이 시기의 게임 음식들이 완벽한 재현 요소가 될 수 없는 까닭은 음식이 평범한 먹거리로 기능하지 않는 탓이다. 이 음식들에 요구되는 것은 폭력을 지속시키는 연료 역할이다. * <마비노기>의 캠프파이어와 페스티벌 푸드. 이런 음식의 기능은 온라인 게임 시대에 접어들면서 변화를 맞이한다. 이제 음식은 점수나 회복의 역할을 넘어, 플레이어 간 유대를 다지는 장치가 된다. <마비노기>의 캠프파이어는 악기를 연주하며 음식을 쉐어링하는, 낭만적 모험의 표본을 재현해 낸 것으로 유명하다. 밥을 먹으며 친해진다는 말도 있듯이, 모닥불 앞에서 서로가 가진 음식을 나눠 먹는 행위는 새로운 친목의 형태로 작용했다. 여기서 음식은 플레이어를 게임 세계 속 주민으로 정착시킨다고도 할 수 있다. 동시에 온라인 게임 속 음식은 능력치를 강화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마비노기>의 ‘페스티벌 푸드’가 버프로 기능하는 음식의 한 예다. 재료의 품질이 좋을수록 축제요리의 효과도 강력해지는데, 여기서 보정된 능력치를 통해 더욱 수월한 전투를 할 수 있게 된다. 축제요리를 먹는 것은 성공적인 사냥을 기원하는, 일종의 의식으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발전해온 게임 내 음식의 역할은 점수-회복-교감과 버프라는 계보를 형성한다. 이러한 계보는 게임으로 재현할 수 있는 음식의 요소를 모두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음식은 서바이벌 게임에 이르러, 한 단계 더 다른 측면으로 나아가게 된다. 2. 음식에서 식량으로: 서바이벌 게임 안의 음식 앞서 말한 것처럼 게임 속 음식은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한 지표이자, 플레이를 지속해 나가기 위한 회복 아이템이었고, 공동체 경험과 능력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보조 아이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속성은 대부분 서바이벌 게임으로 계승되는데, 여기서 음식은 플레이어의 몸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제목부터 노골적인 <굶지마 Don't Starve >는 그야말로 매 순간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게임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걱정거리는 몬스터를 비롯하여 여럿 나타나지만, 플레이어에게 가장 큰 불안으로 다가오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굶주림이다. 동일 제작사 게임인 <산소미포함 Oxygen Not Included >에서도 이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식량자원이 귀한 이 세계관은 칼로리마저 중요하게 따져야 한다. 열량은 수명이나 다름없고, 식량의 존재 여부는 곧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이게 만든다. * <프로젝트 좀보이드>. 좀비가 창궐한 세상이 배경인 <프로젝트 좀보이드 Project Zomboid >도 비슷한 방식으로 생존해야 한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 피우는 법을 익히고, 씨앗을 찾아 농사를 지으며, 음식을 만들 수 있는 도구를 준비해야 한다. 동시에 팀원들에게 적절한 자원을 분배하고, 남은 음식이 어느 정도로 부패했는지 확인하는 것도 필수다.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는 식량인 통조림은 그것을 뜯을 도구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이는 <더 롱 다크 The Long Dark >도 동일하다. 심지어 <더 롱 다크>는 제대로 된 도구를 사용하지 않을 시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는 부분마저 현실감 있게 재현해 놓았다. 플레이어는 이런 극한 상황에서 음식을 먹고, 보존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 세계에 더 오랫동안 발을 붙여두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에서 서바이벌 게임 속 음식은 소비재인 동시에 투자 대상으로도 볼 수 있게 된다. 사실 서바이벌 게임에서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도 남겨두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먹는 행위는 생산과 저장, 분배를 전제하게 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당장의 허기를 해결하는 동시에 미래의 허기까지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액션 게임에서 죽음은 적이 가져오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서바이벌 게임에서 나타나는 죽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생한다. 그러므로 서바이벌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상대하는 것은 적만이 아니다. 시간 역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며,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변수는 플레이어 자신의 몸이 된다. 이 지점에서 음식은 이전 장르들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점수, 회복, 교감과 버프의 수단이었던 음식은 생존을 유지하는 필수 조건으로 변화한다. 음식의 조리법과 효과는 구체화되고, 상황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플레이어는 다가올 겨울과 재난, 이동 불가능한 상황까지 대비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도 허기는 반드시 찾아오고, 그에 따라 몸도 소모된다. 여기서 서바이벌 게임 내 음식의 속성이 마지막으로 드러나는데, 맛과 향은 구현되지 못해도 배고픔만큼은 집요하리만치 재현된다는 점이다. 식량이 줄어들수록 플레이어를 옥죄어오는 건 허기의 압박감이다. 허기는 곧 게임 오버와 연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서바이벌 게임은 오관(五官)보다 섭생의 감각을 전달하는 데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3. 먹음으로써 재현되는 것 게임 속 음식은 점수와 회복 수단에서 시작해, 공동체 경험과 생존의 조건으로까지 확장됐다. 이 계보는 인간의 삶과 몸에 대해 상상해 온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왜 게임은 이러한 요소들을 끊임없이 재현하고자 하는가? 그리고 왜 이것은 서바이벌 장르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재현되는가? 요리하고 먹는다는 것은 우리 일상에서 너무나 당연해진 행위다. 늘 무언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실제로 먹고 있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먹는 행위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먹고 사는 문제란 원래 어렵다는 것. 그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게 서바이벌 게임이 아닐까 한다. 서바이벌 게임은 원초적인 긴장감으로 이 감각을 복원시킨다. 그러나 이 복원에는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바로 현실의 굶주림은 사회적인 문제이지만, 서바이벌 게임의 굶주림은 개인 관리에 관한다는 점이다. 플레이어는 식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죽지만, 그 죽음은 사회적 비극이 아닌 실패한 플레이일 뿐이다. 이는 게임이라는 매체가 사회 그 자체를 다루는 듯해도, 개인의 행위를 보다 중심에 놓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게임이 무언가를 다루는 방식에는 언제나 일정 부분의 공백이 남는다. 음식에 관한 문제도 그러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게임 속에서 어떠한 ‘살맛’을 느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게임에서 살아남은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실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살아있길 잘했다고 생각하듯, 게임에서 느낀 즐거움과 만족감은 우리에게 사는 보람을 선사한다. 맛과 향은 전달할 수 없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희망만큼은 느끼게 해주는 셈이다. 이런 부분에서 게임이 음식을 통해 재현하는 것은 살아간다는 감각, 또 하나의 ‘살맛’일지도 모른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다흰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관해 관심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모 온라인 게임에 복귀했습니다.
- What’s fair price for video games?
In Korean gamer communities, there's this saying about playing games from the Steam library: "Back then, we never paid to play the game. Nowadays, we never play despite paying the game." The phrase sarcastically highlights the contrast between the game market back in the 80s-90s, when no one actually paid a fair price for video games with the abundance of pirated and copied games in Korea, compared to now with digital game distribution channels when people do not play the game despite after purchase. < Back What’s fair price for video games? 17 GG Vol. 24. 4. 10. You can see the Korean version of this article at: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34e447be-d2b1-48f0-85e6-eb63ee2f907b In Korean gamer communities, there's this saying about playing games from the Steam library: "Back then, we never paid to play the game. Nowadays, we never play despite paying the game." The phrase sarcastically highlights the contrast between the game market back in the 80s-90s, when no one actually paid a fair price for video games with the abundance of pirated and copied games in Korea, compared to now with digital game distribution channels when people do not play the game despite after purchase. The internet is flooded with countless games available to play at any time. We are living in an era where people can purchase more game easily through online digital game distribution channels than what humans could possibly play in a lifetime. The normalization of digital distribution, like Steam, has certainly contributed to lowering the entry price of a video game. But coming up with a fair amount of price tag in reality is a bit more complex than that, and it is difficult to say whether the game prices have truly become affordable than before. The regular release price of so-called “AAA” game titles has been steadily on the rise, not to mention all those excessive special editions (e.g., deluxe packages, limited editions) that cost well over ₩100k (approximately $80). As such, in some degree games are affordable form of entertainment, but at the same time, they deemed as expensive. To fully comprehend this contradictory situation, we must start asking ourselves: what is actually a fair price for video games? We do know that a considerable amount of manpower and resources go into video game production. So, being able to come up with a mutual range of fair prices would contribute to the industry in terms of securing sufficient profits for the creator and, thus, the necessary funds for the development of a better game. It would also contribute to its users that fair price can contribute to a continuation of a good product that offer enjoyable and enriching virtual experiences. Challenges in Determining Regular Prices of Video GamesHistorical records suggests that the pricing of video games was not never really calculated based on systematic business forecasts but often by arbitrary guesswork. The normative rules of game prices have frequently changed as well. For example, early arcades operated on fixed-price coin-op business model, where the playable time per coin heavily depended on how the player is good at that particular game. Ironically speaking, the more skilled players play longer while spending less, resulting in fewer profits for arcade operators. (This led to instances where skilled arcade-players in Korean arcades were occasionally kicked out from the premises, with a coin refund, to make way for the next player in line.) As such, the cost of complete gameplay experiences varied from person to person, largely contingent on their gaming proficiency. Of course, it not all gamers back then expected to achieve complete gameplay experiences in every arcades. The emergence of console and PC “package” games introduced the concept of fixed prices in the game industry, which meant people could pay the same price regardless of the amount of gameplay hours of each user. Each cartridge, disk, or CD was sold at a fixed price, gradually forming an average price range for games. But with the rise of online digital distribution channels and their mass-scale discount systems, real-time price controls, and game subscription schemes, the range of regular prices for package-type games has begun fluctuating again. Determining the fair price of a game has become even more complicated with the rise of the micro-transactions in games, which has become increasingly prevalent in the online/mobile game era. Now the cost of a game is not only about the gaming proficiency but also the total amount spent in-game. The gameplay experience of a heavy user who spends $1,000 on micro-transactions in a free-to-play game like Uma Musume: Pretty Derby (Cygames, 2021) would vastly differ from that of someone who didn't spend a dime in that game. In such a vastly different player-base, coming up with a mutual ‘fair’ price is certainly not an easy task. What I would like to note here is that the topic of regular price of a game and the appropriate cost (i.e., what is deemed as appropriate amount of money that one can spend in games) are a different thing. Because, to put it simple, the amount of coins that a player bring to arcade shop is not just about how much each session of a gameplay in that particular arcade cost. Rather, it’s about how many sessions of gameplay that the player is going to (or willing to) pay, multiplied by the cost of each gameplay session. As such, answering the question of 'what is a fair price for a game' is not solely about the determining the sales price tag of a game product, but also about finding a mutual balance between producers and consumers – in a way to maintain a sustainable cycle of production, distribution, and consumption. While individual purchasing power is certainly an important indicator to look at, but the primary concern lies here is about how goods (in this case games,) can be fairly exchanged between producers and users. Then another thing that needs to be addressed is the issue of today’s digital game distribution method, specifically, its pluralistic nature of game as both a product and a service. In the arcade era, games were primarily operated as a rental business. Then, gradually, they transitioned into owning the game (or game machines) as goods in the home console and PC game era. However, with the normalization of online/mobile games, there has been a shift back to rental services – games that are channeled through server-based, internet-connected platforms. Therefore, we are now living in an era where games cannot be explained by a single value; rather, they are both products and services that intersect and coexist. So there cannot be a simple answer regarding the fair price of games. And this is not even considering all those numerous discounts deals and subscription services. So it is evidently clear that there is no magic number about ‘what is the fair price’ in a game – we cannot do simple math by ticking checkboxes. One ideal approach is perhaps to first examine the amount of money spent on game production and then propose a range of unit prices that could potentially recoup those production costs for its creators within a reasonable timeframe. Then whether that price range is acceptable are ultimately determined consumers, by finding just the right balance between the market’s natural supply and demand. Clearly, it’s not an easy task. But a tasks that must be done. Why should we talk about the fair price of games? The Korean Consumer Price Index (CPI) is calculated based on the cost of 480 essential goods and services, served as a common indicator to determine South Korea’s regular living cost and inflation rate. Among these, 47 fall under the category of “entertainment and cultural activities”, which include activities such as purchasing musical instruments, computers, film tickets, and books, and the costs of travelling and even repairing digital devices. However, game-related expenditures are not included in Korean CPI. Despite numerous reports about the significant increase in South Koreans' usage of games, and despite all those provocative media coverage of somebody ‘spending tens of thousands of dollars on video games in micro-transaction instead of doing something productive’. Some easily solution is to add already existing collectable data such as PC-bang hourly fees and average of online entertainment purchases. Even if so, there are clear limitations; as they do not fully capture the overall game-related spending patterns of general South Korean players. This call for thorough actions in order for us to truly able to say that games have become one of the mainstream media – regarded as one popular media and enjoyed as any other daily leisure activity. This would include polishing our societal system and facilitating infrastructures to finally acknowledge gaming as an act of leisure and cultural fulfillment in contemporary society, and economic analysis on game-related consumptions. For instance, Korea do have basic reports on how much money people spend on games per month and what the highest and lowest prices are – such as the Game User Census Report conducted annually by the Korean Creative Contents Agency. However, there are still rooms for improvement as those numbers are isolated from the overall economic index, such as other consumable indexes in Korean CPI. While the cost of watching films, television shows, and portable multimedia devices is accepted as a ‘valid’ indicator of the livelihood of South Korean households, the cost of playing games is still missing. Now is the time when we should finally acknowledge the significance of the cost of software that is called video games. And not just the price tag of the game itself but also the significance of games in the overall socioeconomic context. This then leads to my question, “What is the fair price of games?” In this complex, ever-connected era of gameplay, the question shouldn’t be limited to “how much should the game product cost” but rather should target the fundamental question of “what games mean” – the value of game-related consumptions intersect with other means of our entertainment, social, and leisure activities. Instead of fixated by the price tag of a game itself, we should start asking ourselves how the game-related expenditures are compared to other leisure and cultural activities. Why do people choose to spend money on games rather than other means of media? What’s unique about games? It is now time to surface these questions that are currently encapsulated within gamers' communities and web forums, further into mainstream societal discourse. Lastly, perhaps we now need to start asking the very fundamental question of “What is the (means of) fair price of games?” Because, controversial topic such as the toxicity of impulsive or excessive game micro-transactions, or the irony of free-to-play (that, there’s no such thing as free to play anything), eventually leads to the fundamental question; what could account for the price of gameplay? What are the fair means of purchasable in gameplay? What can be quantified and what cannot? And how to measure them? We must realize that we no longer live in the era of a simple supply and demand market that can determine the simple one-for-all price of games. Instead, now is the time to embrace this ever-complicated question even to video games as medium itself.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KyungHyuk Lee He has been close to games since childhood, but it was not until 2015 that he started talking about games in earnest. After living as an ordinary office worker, he entered the life of a full-time game columnist, critic, and researcher through a series of opportunities. Books such as "Game, Another Window to View the World" (2016), "Mario Born in 1981" (2017), "The Theory of Game" (2018), "Wise Media Life" (2019), and "The Birth of Reality" (2022); papers such as "Is purchasing game items part of play?" (2019); "Dakyu Prime" (EBS, 2022), Gamer (KBS), "The Game Law", 2019 BC) and "Economy of Game", etc.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institute 'Dragon Lab'. (Doctoral researcher at Aalto University, Finland) Solip Park Born and raised in Korea and now in Finland, Solip’s current research interest focused on immigrant and expatriates in the video game industry and game development cultures around the world. She is also the author and artist of "Game Expats Story" comic series. www.parksolip.com
- 『중국 학부모』의 과잉 경험과 리얼리즘의 신화
‘리얼리즘 게임’이라 불리는 『중국 학부모(中国式家长)』는 서민적인(接地气)1) 콘텐츠 덕분에 “매우 현실적”이고 “삶에 근접해 있다”는 등 일관된 평가를 받았다. 이 게임은 현장 조사에서 얻은 실제 경험을 제시함으로써 실제 경험을 과잉 경험으로, ‘현실감’을 ‘현장감’으로, 실제 상황을 ‘공감(感同身受)’으로 대체하며, 궁극적으로 사회구조 문제를 가족윤리 문제로 축소한다. 또, “부모를 용서하라”는 감정주의적 결말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게임의 기초적인 설정 - 세대속성의 대물림(다음 세대 아이가 윗세대의 우세속성을 물려받는다) - 이 모든 ‘리얼리즘’ 게임에서도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이란 점이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게임의 ‘리얼리즘’은 바로 계급 상승의 신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과잉 경험과 그 이면에 깔린 리얼리즘의 신화는 『중국 학부모』로 하여금 진짜 문제를 은폐하는 동시에 폭로자가 되도록 한다. < Back 11 GG Vol. 23.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저우스위, 周思妤 난카이대학 문학대학원 석사과정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Inside BIC 2021- 감염병 시대의 인디게임페스티벌 참관기
부산행 전날, 병원에 들러 코로나 PCR 진단검사를 받았다. 부산인디커넥트 페스티벌(BIC Festival)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PCR 음성 확인증(혹은 백신 접종 완료증)을 제시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작년 BIC-2020은 전 세계적인 코로나감염병 상황으로 인해 온라인으로만 진행되었지만, 올해는 철저한 방역 절차 아래 오프라인에서도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렇듯,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의 대표적인 정서를 하나 꼽아보자면 ‘불안’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감염자가 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혹은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다닐 수 있다는 불안감이 어딜 가든 짙게 깔려 있다. < Back Inside BIC 2021- 감염병 시대의 인디게임페스티벌 참관기 02 GG Vol. 21. 8. 10. 부산행 전날, 병원에 들러 코로나 PCR 진단검사를 받았다. 부산인디커넥트 페스티벌(BIC Festival)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PCR 음성 확인증(혹은 백신 접종 완료증)을 제시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작년 BIC-2020은 전 세계적인 코로나감염병 상황으로 인해 온라인으로만 진행되었지만, 올해는 철저한 방역 절차 아래 오프라인에서도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렇듯,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의 대표적인 정서를 하나 꼽아보자면 ‘불안’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감염자가 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혹은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다닐 수 있다는 불안감이 어딜 가든 짙게 깔려 있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에 게임은, 그 중에서도 인디 게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떠안은 채 9월 9일 부산으로 향했다. 서면 e스포츠 경기장에 도착해 PCR 확인 스티커를 받고, 온도체크와 QR 체크인을 완료한 후, 전시장의 게임 부스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이 모든 과정이 올해 BIC-2021 행사의 일부로 기억되었다. BIC 페스티벌은 전 세계 40여개국에서 참여하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글로벌 인디게임 축제다. 2015년에 처음 개최된 이후, BIC 참가작들은 창의적인 게임 메커니즘을 시도 하거나 더 이상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요소를 과감하게 도입하면서 게임의 표현양식을 확장시켜 왔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상업적인 요소를 추구하는 참가작도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다양한 실험적인 게임들이 선보여지는 자리다. 안전한 성공의 공식만을 답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디 게임은 불안을 기꺼이 감내하는 사람들의 게임이기도 하다. 나아가 불안은 게임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한 필연적인 요소다. 게임 연구자 예스퍼 율(Jesper Juul)은 플레이어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게임은 지루한 게임이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든지 실패할 수 있다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게임을 플레이한다. 성공 여부를 알 수 없다는 불안함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게임인 것이다. 물론 게임에서 우리는 실패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게임에서의 실패는 그다지 무겁지 않다. 많은 경우, 사람은 게임에서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금방 털어낼 수 있다. (당신이 가챠 게임에 엄청난 액수를 낭비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게임은 실패와 불안에 대한 면역을 길러주는 백신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이번 BIC-2021의 참가작 들 중 일부를 현재의 코로나 상황과 연관 속에서 리뷰해보고자 한다. 전세계적인 감염병 유행이라는 초유의 상황 속에 이번 BIC-2021 참가작들을 맥락화해서 기록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게임 페스티벌의 특성상 완성된 게임이 아닌 데모버전의 게임들을 짧은 시간동안 플레이 해 보았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건택틱스〉 -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과거에는 사람이었던 존재가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고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 공격받은 사람은 또 다시 감염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다. 좀비 감염병이 창궐한 상황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아군과 적군이 뚜렷하게 나뉘지 않는다. 누구나 좀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포 더 던〉, 〈배틀LIVE〉, 〈페이티드 얼라이브〉, 등, 감염에 대한 공포를 형상화하는 좀비가 등장하는 게임을 올해 참가작 중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귀여운 캐릭터 디자인의 〈건택틱스〉가 눈길을 끌었다. 3*3의 사각형 안에서 캐릭터 카드를 이동시키며 좀비와 싸우거나 피하거나를 매 순간 선택해야 하는 좀비 서바이벌 카드 게임이다. 제한된 칸 안에서만 이동해야하기 때문에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전략적인 사고가 중요하다. 사실 이 게임에서 ‘좀비’는 끝없이 몰려오는 적을 상징할 뿐, 아무리 많은 좀비를 처치하더라도 좀비 아포칼립스 상황이 해결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좀비를 없애면 새로운 좀비 카드가 생산되어 필드에 나타나고, 다음 스테이지를 해금하면 더 강력한 좀비들이 나타난다. 게임 속 상황은 일견 절망적으로 보인다. 몇 달이면 코로나가 없었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믿었지만 1년 넘게 확진자 수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금 우리의 상황 같기도 하다. 하지만 〈건택틱스〉를 플레이하다보면 불안과 긴장 속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하고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스테이지에서 패배하더라도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필드에서 주은 코인으로 캐릭터의 능력을 향상시켜 더 나은 조건으로 다시 도전할 수 있다. 어쩔 때는 좀비에게 포위당해 맨몸으로 싸워야 하는 일도 생기지만, 그런 불안함 또한 이 게임을 스릴 있는 것으로 만드는 즐거움 중 하나다. * 〈건택틱스〉 플레이 화면. 〈디바이스0101〉 - 고립의 공포 낯선 방에서 눈을 뜬다. 모든 문은 잠겨있다. 플레이어는 숨겨진 아이템을 찾고 퍼즐을 풀어서 방을 탈출해야 한다. 복고풍 도트 그래픽과 퍼즐요소가 가미된 미스터리 어드벤처 게임이다. RPG메이커 제작툴을 이용해 만들어진 〈디바이스0101〉은 과거에 유행하던 방 탈출 게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주인공이 기억을 잃은 이유, 다른 가족들의 행방,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등, 초반부 스토리가 흡입력이 있어 완성이 기대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편, 외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로 표상되는 위험이 존재하며 별장 내부에 고립되어 있는 게임 속 상황은, 오늘날 바이러스의 전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집에 머무르는 요즘 우리의 모습과도 맞닿아있는 것도 같다. * 〈디바이스0101〉 플레이 화면. 〈셔터냥〉, 너와 나를 이어주는 카메라 〈셔터냥〉은 길을 잃은 고양이가 카메라를 이용해 소녀에게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따뜻한 분위기의 플랫포머 게임이다. 마우스 왼쪽 클릭을 하면 고양이가 머리에 쓴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오른쪽 클릭을 눌러 찍은 사진을 맵에 배치할 수 있다. 다양한 오브젝트들을 복제해 그 위를 점프하고 이동하는, 제작자들이 ‘카메라 액션’이라고 이름 붙인 창의적인 게임 메커니즘이 돋보인다. 마찬가지로 카메라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게임으로 이 있다. 플레이어는 액션 영화를 촬영하는 배우이자 카메라가 되어, 건물들 사이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배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 혼자 플레이할 때는 왼손 키보드로 배우를 이동하는 동시에 오른손 마우스로는 카메라를 조종하고, 두 사람이 플레이하는 경우에는 각각 키보드-배우와 마우스-카메라를 담당해 플레이하면 된다. 카메라 화면 밖으로 배우의 모습이 완전히 벗어나면 게임 오버다. 왼손과 오른손의 조화, 배우를 조종하는 사람과 카메라를 조종하는 사람의 협동이 요구되는, 창의적이면서도 컨트롤 난이도가 있는 게임이다. 두 게임에서 게임 화면 속 ‘카메라’ 화면이 등장한다는 점이 인상 깊다. 모니터 속에 또 다른 화면이라는 점에서 두 게임 모두 메타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그것이 독특한 게임 컨트롤 메커니즘과도 연관되어 있어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이 때 각각의 카메라는 두 존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셔터냥〉에서는 소녀와 고양이가 만날 수 있도록 매개해주는 역할을, 에서는 카메라와 배우의 협동을 이끌어낸다. 교실문이 잠기고, 많은 기업들은 비대면 출근을 시행하는 비대면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영상 통화나 화상 채팅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을 유지하고 있다. 〈셔터냥〉과 은 이 같은 매개된 연결감각이 반영된 게임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셔터냥〉 플레이 화면. * 〈Ready Action〉 플레이 화면. 〈더웨이크〉 -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혼수상태에 빠진 한 남자가 일기장을 남겼다. 일기장은 남자의 거짓말을 암호로 바꾸어 기록해주었다. 〈레플리카〉와 〈리갈던전〉에 이어 ‘죄책감 3부작’을 마무리하는 개발자 소미(Somi)의 신작 〈더웨이크〉이다. 플레이어는 일기장의 암호를 해독해 나가며 남자의 과거 기억들을 따라가게 된다. 일기장의 주인인 남자는 어린 시절 형제와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혐오하면서도 연민하며, 자신이 아버지와 같은 전철을 밟을까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런 모순된 감정을 남자는 “거짓”되었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어쩌면 내 삶은, 이 한 문장이 전부였구나, 싶다. ‘내가 하는 말은 거짓말이다.’“ 게임은 언뜻 한 남자의 개인적인 일생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기록’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도 하다. 진실은 때로는 모순되며 논리적이지도 않다. 사건은 생략되고, 누락되거나, 혹은 강조되면서 여러 방식으로 비춰질 수 있다. 누락되어서 읽히지 않았던 암호가 해독된 후, 일기는 조금 더 복합적인 진실을 보여준다. 먼 훗날 우리는 코로나19 판데믹을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하게 될까? 배달 플랫폼, 게임, 메타버스 산업의 성장을 촉진했지만, 동시에 청소년들의 학업 성취도를 낮추고 소중한 학창 시절 추억을 쌓을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렸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성공적인 방역 관리 체계를 보여주었지만, 사람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 주거 격차가 문제로 떠올랐다. 이런 2021년을 우리는 나중에 어떻게 떠올리게 될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김지윤 연세대학교에서 언론홍보영상학과 인류학을 공부하고,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했다. 부족한 실력으로 게임을 하다가 게임의 신체적 퍼포먼스에 관심을 갖게 되어 게임 연구를 시작했다. 여성 게이머의 게임 플레이 경험을 분석한 석사학위 논문을 써서 2020년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우수 학위논문상을 받았다. 현재 미국 시카고대학 영화·미디어학과 (Cinema and Media Studies) 박사 과정에서 게임문화를 전공하고 있다.
- 게임에 대한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의 문화 코드화
트랜스페미닌 (transfeminine)은 논바이너리부터 트랜스여성까지, 트랜스젠더 중에 상대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젠더 표현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논바이너리 중에 스스로를 여성 젠더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 이들 (she/they)이 여기 속하고 트랜스여성 (she/her)이 가장 확실하게 속하는 계열이다. 그리고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라고 하면 다양한 SNS 및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를 기반으로 산발적으로 발생한 정체성 기반 네트워크를 이른다. < Back 게임에 대한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의 문화 코드화 21 GG Vol. 24. 12. 10. 트랜스페미닌 (transfeminine)은 논바이너리부터 트랜스여성까지, 트랜스젠더 중에 상대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젠더 표현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논바이너리 중에 스스로를 여성 젠더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 이들 (she/they)이 여기 속하고 트랜스여성 (she/her)이 가장 확실하게 속하는 계열이다. 그리고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라고 하면 다양한 SNS 및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를 기반으로 산발적으로 발생한 정체성 기반 네트워크를 이른다. 정체성 기반 네트워크들이 으레 그러듯이 젠더 정체성만을 구심점으로 삼고 모이다 보니 사실상 소속원들끼리 정체성 외에 딱히 공통항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오히려 당연하게도 개개인 각자가 서로 전혀 다른 고유하고 개별적인 특질들을 가지고 있는 만큼 더더욱 그나마 공유되고 있는 조그마한 지표라도 발견하면 그것들을 중심으로 문화 코드를 형성하고 향유한다. 특히 최근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에서 반복적으로 호명되는 게임들이 있다. <울트라킬> (2020), <시그널리스> (2022), <폴아웃: 뉴 베가스> (2010), <셀레스트> (2018), 그리고 <길티 기어 스트라이브> (2021)는 각자가 트랜스펨들을 중심으로 하는 탄탄한 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양식의 밈들에서도 유난히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 게임들은 어째서 트랜스펨 [1] 들에게 선택된 것일까? 이 게임들이 트랜스페미닌 정체성과 따로 특별히 공모하는 지점이라도 있는 걸까? <울트라킬>: 천사의 자기탐색과 CCTV 플레이어 [2] <울트라킬>은 아직 얼리 액세스 상태인 인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상당한 크기의 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초고속-초폭력 고옥탄가의 FPS 게임이다. 미래에 모든 인류가 전쟁으로 인해 멸망한 뒤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울트라킬>의 세계관에서 오직 남은 것은 피를 연료로 삼아 작동하는 전쟁 기계들 뿐이다. 그리고 게임은 더 많은 피를 찾아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기계 “V1”의 이야기를 다룬다. 플레이어가 V1의 눈을 통해 경험하는 세계는 지옥을 지배하는 천사들의 고압적이고 수직적인 위계가 모든 영혼을 억압하고 있다. 딱히 V1에게 저항적이거나 혁명적인 정신이 있어서 천계와 맞서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더 많은 피를 흘리기 위한 여정 속에서 천계 의회를 대표해 검을 휘두르는 “지옥의 심판자” 가브리엘과 싸우게 된다.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한 명의 주인공이 한 명 이상의 여러 적수들, 혹은 체제 전체에 부딪히고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무너뜨리는 구조는 액션 게임에서 상당히 보편적이다. 그러나 (심지어 아직 완결이 안 났음에도) <울트라킬>의 주요 적대 인물인 가브리엘이 지금까지 굳게 믿고 있었던 천국에 대한 믿음을 주인공과의 만남을 통해 뿌리부터 의심하게 되고 당연하게 믿고 있었던 세계관이 뒤집히는 경험을 하며 스스로의 생의 목적, 나아가서는 정체성을 찾아가게 되는 여정은 액션 게임의 문법 속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정작 주인공 V1은 단 한 줄의 대사도 갖지 않고 그 스스로가 고유하고 특별한 인격을 가지지도, 당연히 존재의 변화를 겪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울트라킬>의 서사는 주인공의 성장이 아니라 적의 성장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울트라킬>의 1막 마지막 장면의 보스전에서 가브리엘은 주인공과 첫 전투 이후 난생 처음으로 삶 전체에서 패배라는 것을 경험한다. 이때 대답 없는 신과 천국, 천사의 완전함에 대해 가브리엘이 가지고 있던 굳은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실패로 말미암아 천계에서 파면당한 가브리엘은 실패의 경험을 증오로 돌려 2막 보스전에서 다시 한번 주인공과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게임 내 주인공의 적수라는 운명에 이기지 못하고 당연히 연거푸 패배하고 만다. 이 두 번째 패배 직후 가브리엘은 주인공으로 인해 피어올랐던 증오를 자기 존재 변화의 연료로 삼는다. 즉, 가브리엘은 절대적이며 운명적이어야 했을 신의 의지가 그대로 이뤄지지 않고 신의 가호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고는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해서 살아온 것이며 이 모든 게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의문하게 된 것이다. “완벽해야 했을 조각은 처음부터 맞지 않는다 (The pieces never fit together to begin with.)” 찾아온 현현顯現에 따라 가브리엘은 처음으로 검을 다른 누구의 의지도 아닌 순수한 자기 자신의 의지로 휘둘러 지금까지 스스로 명령을 따라왔던 천국 의회를 직접 몰살한다. 총 3막으로 예정된 전체 서사 중에 현재 2막까지 완성되어 있는 <울트라킬>에서 플레이어에겐 별다른 서사가 주어지지 않고 주인공은 적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촉매 역할을 담당한다. 즉, 오히려 서사는 적대 인물이 경험하고 플레이어는 스스로가 인물의 변화 원인이 되어 적이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을 상대적 시선에서 목격하는 것이다. 가브리엘이 겪는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감정도 인격도 서사도 없는 V1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가브리엘과 정반대로 V1은 플레이어에게 오로지 게임 화면으로 송출되는 1인칭 시선만을 제공한다. V1은 스스로의 의지라고는 없이 철저히 플레이어의 의지에 따라서만 움직일 뿐이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플레이어의 의지를 완벽하게 운반하는 그릇이 된다. 말하자면 주인공 캐릭터가 개별적 인물로서 존재하지 않고 플레이어의 의지에 개입하지도, 플레이어를 방해하지도, 가리지도 않으며 분리 없이 플레이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눈앞의 가브리엘이 자기 자신의 의지를 찾으며 점점 독자적 존재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소격 효과를 일으킨다. 플레이어 자신도 스스로 삶과 존재의 목적에 대해,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미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충분히 겪어온 트랜스젠더들은 이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기보단 경험적 공감을 느끼는 일이 더 잦을 것이다. 나아가 <울트라킬>의 게임플레이는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이 매우 다채롭고 자유롭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팬 커뮤니티 형성에 용이한 조건을 가진다. 특히 게임 내 물리 엔진 및 총알 발사 메커니즘 등을 농락하며 수직 가속도를 수평 가속도로 전환해 맵을 눈 깜짝할 사이에 횡단하고 공중에 던진 동전에 총알을 420574331번 튕긴다든지 (아무렇게나 쓴 숫자가 아니라 실제 기록된 횟수이다) 하는 기행들이 가능한 환경은 플레이어들의 창의력과 집중력, 도전 의식을 자극한다. <울트라킬>의 제작자 하키타 (Hakita)는 본인이 바이섹슈얼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그 외에도 3D 디자이너 겸 그래픽 프로그래머인 빅토리아 홀랜드 (Victoria Holland)와 컨셉 및 텍스처 디자이너 프랜시스 시에 (Francis Xie)는 본격적으로 각각 트랜스여성과 트랜스남성 당사자이기도 하다. 즉, 작품 자체가 성소수자 당사자들에 의해 제작된 만큼 팬 커뮤니티 또한 성소수자들을 기반으로 구성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나아가 하키타는 기계 로봇인 주인공 V1에게는 어떤 젠더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냐는 팬들의 논의에 V1은 기계이기 때문에 젠더가 없으나 he/him 대명사를 사용한다고 답변했으며, 그럼에도 <울트라킬>에는 동시에 기계“임에도” 젠더가 존재하는 개체들마저 있다. “마인드플레이어” (Mindflayer)라는 적이 대표적인데, 게임 내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로 그녀는 머리 부분만이 기계 본체임에도 그 아래로 인간의 신체 형태와 유사한 플라스틱 외피를 굳이 스스로 형성해 활동한다. 플라스틱 신체 부분은 실질적으로 별다른 기능이 없이 오직 미적인 목적만을 지니고 있음에도 마인드플레이어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파괴되는 일이 있더라도 모든 힘을 다해 이 플라스틱 신체를 보호하려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필연적으로 주어진 신체가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여 형성한 몸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마인드플레이어의 습성은 현실 속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단적인 비유로 읽힐 수밖에 없다. <시그널리스>: 몸과 시간, 인식의 비명 <시그널리스>는 엄밀한 의미에서 올해 출시된 <사일런트 힐 2>의 공식 리메이크보다도 더욱더 충실하게 <사일런트 힐> 시리즈를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서바이벌 호러 인디 게임이다. 즉, 게임플레이 측면에선 기본적으로 탑다운 형식의 2.5D 그래픽을 기용하며 때때로 1인칭과 3인칭을 오가고 라디오를 비롯한 퍼즐을 적극적인 사용하며 의도적으로 불친절한 인벤토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시그널리스>를 독립적인 걸작으로 만드는 면모는 극단적일 만치 비선형적이며 표현주의적인, 언뜻 난해하기까지 한 연출 방식이다. <시그널리스>가 한계까지 실험한 표현주의적 연출은 바로 시간과 인식의 비선형성, 존재의 분열 등을 다루는 서사와 운명적으로 맞물리며 빛을 발한다. 다시 말해 최근 인디 게임 중 <사일런트 힐>을 제대로 계승하는 또 다른 작품 <피어 앤 헝거> 시리즈가 그 계보 상의 공포와 끔찍한 그로테스크를 이어 나가고 있다면 <시그널리스>는 실질적으로 존재론적 비애와 절망의 측면에서 서바이벌 호러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먼 미래의 전체주의 사회 “유산 (Eusan)”은 성간 단위로 통치가 이루어지고 우주 개발을 진행 중이다. <시그널리스>의 세계관에서 “생체 공명”이라는 일종의 텔레파시 능력을 지닌 자들은 타인의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의 유기체 조직에까지 간섭할 수 있고, 나아가 집단의 의식을 변형하는 형태로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재의 유산 당국은 기존의 제국 체제에 대한 반란을 통해 세워졌는데, 이 제국의 여왕이 바로 강력한 생체 공명 능력을 통해 인류를 다스리던 자였다. 즉, 전 제국은 인식론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이루고 있었고 현 당국은 제국 통치에 대한 반발로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이 유물론적 통치 사회가 탐험이라는 명목을 뒤집어쓴 기약 없는 우주 항해를 통해 한 생체 공명자 “아리안느 양”을 사실상 사형이나 마찬가지인 추방 조치에 처하자 인식론적 공포가 물질세계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플레이어는 생체 공명으로 인해 변이되고 있는 세계를 헤치고 아리안느를 다시 찾아야만 하는 복제-인조인간 “엘스터”를 조종한다. <시그널리스>의 세계 속엔 두 유형의 인간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엘스터와 같은 “레플리카”이고 다른 하나는 레플리카의 원형이라는 의미로 레플리카가 아닌 인간을 이르는 “게슈탈트”이다. 레플리카는 뛰어난 개인들의 신경패턴을 복사해, 인공내골격에 생물학적인 배양물을 채워넣은 뒤 외골격으로 둘러싼 신체에 이식한 복제품들이다. 같은 판본을 기반으로 복제된 개체들이므로 예측 가능한 일꾼으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심산인 것이다. 그러나 복사 과정에서 기억은 전부 삭제하고 오로지 능력과 성격만을 남김에도 게슈탈트 생전의 중추 기억을 자극하는 외부 자극이 주어지면 기억의 편린이 재구성되고 만다. 또는 한정적이고 반복적인 임무 바깥의 새로운 상황을 접하게 된다면 독자적인 개인으로서 자아가 형성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레플리카가 게슈탈트의 기억을 되찾는 낌새를 보이거나 명확한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을 들킨다면 그 즉시 “폐기”당한다. 즉, 게슈탈트와 레플리카 모두 억압적이고 통제적인 사회 안에서 고유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내쫓기고 학대당한다. 특히 아리안느의 영향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킨 많은 레플리카들은 그전까지 탄압당한 욕망과 트라우마 등을 고통스러운 형태로 드러낸다. 아리안느의 생체 공명은 단순히 현재 인식되는 공간적 물질계에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 기억과 시간까지 변이시키는데, 이로 인해 플레이어가 엘스터의 눈을 빌려 인지하는 세계엔 엘스터가 아닌 다양한 개인들의 경험 또한 섞여 들어온다. 특히 이 지점이 <시그널리스>의 서사와 연출을 난해하게 만드는 최전방이다. 현재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경험이 정확히 누구의 시공간이었는지 유추하기가 극도로 어려우며, 시퀀스마다 불규칙하게 게임은 1인칭과 3인칭 관점을 오가는데 플레이어는 관점 변경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 이렇게 플레이어가 엘스터를 통해 경험하는 타인의 기억 중 하나는 아리안느가 유물론적 기치를 바탕으로 한 유산 당국에서 경시되는 예술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 그리고 하얀 머리와 붉은 눈 등 남들과 다른 외모로 인해 성장 과정 속에서도 괴롭힘을 당해오던 것이었다. 규범 사회에서 예외적 존재로 배제당하고 항상 폭력의 최전방에서 사는 트랜스젠더에게 <시그널리스> 속 유산 사회와 그 시민들 사이의 고통스럽고 불합리한 관계는 먼 얘기가 아니다. 특히 유기체적, 즉, “생물학적” 인간이 아닌 존재인 레플리카는 트랜스젠더에게 비유 이상의 즉물적인 개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게임 내에선 레플리카의 피와 살은 언뜻 인간의 평범한 살점과 구분되지 않는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생체공학으로 가공된 조직이기에 표류한 우주선 안에서 게슈탈트가 배고프다고 레플리카의 살을 뜯어 먹어 봤자 소화를 시킬 수 없다는 지침을 찾을 수 있다. 레플리카라는 이름에서부터 이미 그들은 고유한 인간 존재로 인정받는 게 아니라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자원”, 보급형, 모조품으로 취급되고 있다. 하지만 기존에 존재하던 인간 도식의 모방이자 게슈탈트의 복제, 변주에 불과한 개체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레플리카는 단독적 인격과 자아가 필연적으로 깨어날 수밖에 없는 비극적 판형들인 것이다. 무엇보다 <시그널리스> 작중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게슈탈트, 레플리카를 막론하고 절대 대다수가 여성이다. 따라서 레플리카의 경우 그 키가 최대 260cm에 달하는 거대한 강철로 이루어진 “여성”들이라는 점에서 많은 트랜스펨에게 공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생체 공명의 영향으로 개인들이 몸의 물질적 차원과 몸에 대한 인식 사이의 경합을 겪어 변이하는 과정은 트랜스성의 관점에선 그저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시그널리스>에서는 인간 존재뿐만 아니라 함선이나 우주정거장 등 세계 전체의 물질적 차원이 인식의 변화에 의해 피와 살점, 내장 등으로 점차 침식되어 간다. 마치 트랜스적 신체 인지 방식이 바깥 세계로까지 확장된 듯이 말이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세계 관찰 관점의 자유를 제공하지 않고 1인칭 시각과 3인칭 시각을 임의로 강제하는 것 또한 매체의 폭력이라는 점에서 몸이 존재에게 가하는 폭력, 유물론적 유산 사회가 시민 개인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공명한다. 즉, 언뜻 호러 장르라는 특징 때문에 변이하는 신체가 존재들에게 고통이나 폭력인 것처럼 오인될 수 있지만 <시그널리스>에선 오히려 그전까지 개개인의 존재를 가두고 각자의 의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신체에 대한 인식의 반항이자 탈출이다. 그리고 인간 존재는 공간을 물질적 차원에서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시간 또한 신체를 통해 인식하고 몸에 직접 기록되기 때문에 트랜스 당사자들은 시간과 관계 맺는 방식도 비규범적인 경우가 많다. <시그널리스>에서 아리안느는 우주 속으로의 기약 없는 망명 속에서 결국 시간 감각을 잃어버리고, 그녀의 왜곡된 시간은 그녀가 생체 공명으로 영향을 끼치는 게임 내 세계에까지 직접적으로 반영된다. 이는 트랜스젠더들이 반드시 고유한 트랜스성으로서는 아니지만 현실의 조건으로 인해 흔히 처할 수밖에 되는 트라우마적 경험들로 인해 직조당하는 시간의 영원성과 동일하다. 마치 전쟁 경험자들이 흐르지 않는 특정 시간 속에 갇혀 평생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이들에게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도, 일정하게 작동하지도 않는다. <시그널리스>는 서사의 비선형성 뿐만 아니라 사건들의 공시성 (synchronizität)을 통해서도 인과적이지 않은 세계 인식을 드러낸다. 즉, 직접 연관되어 있지 않은 전혀 다른 시공간 속에서 동일하거나 유사한, “공명하는”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 말이다. 끝으로 블랙홀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건의 지평선 바깥에서는 알 수 없다는 우주 검열 가설을 제창한 로저 펜로즈의 이름이 아리안느가 탑승한 우주선에 붙어 있듯이 억압당하는 개인들의 이야기는 바깥에서는 알 수 없다. 분명 다양한 현실의 시공간 속에서 실재해 왔음에도 스스로의 목소리가 주어지지 않은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제대로 남아 있지 않고 당장 현재 또한 트랜스젠더들의 삶은 당사자가 아닌 바깥의 시스젠더들에겐 전혀 미지의 영역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우주에선, 누구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다.” [3] 바깥을 향한 언어의 갈망 따라서 <시그널리스>는 <울트라킬>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밀착된 방식으로 트랜스성과 관계하기에 게임 외적 측면에서 살펴보지 않아도 어째서 트랜스펨 커뮤니티가 형성됐는지는 의문의 영역조차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쯤 되면 안 봐도 뻔하다고까지 할 수 있겠지만 2인 제작 게임인 <시그널리스>는 전적으로 트랜스 당사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제작자 유리 스턴 (Yuri Stern)은 논바이너리이고, 디자이너 바바라 비트만 (Barbara Wittmann)은 트랜스여성이다. 그러므로 <울트라킬>과 <시그널리스> 모두 작품 내외 양면으로 트랜스 정체성과 관계한다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극도의 고난이도 플랫포머 게임 <셀레스트> 또한 말 그대로 게임 안팎으로 스스로와 싸우며 산에 올라가는 고난과 역경을 감수하면서 자신을 찾는 과정을 그리며 트랜스젠더로서 정체화와 트랜지션 과정을 그려냈다. 역시 제작자 매디 소슨 (Maddy Thorson) 본인이 게임 출시 이후에 커밍아웃하였기도 하다. 그러나 <폴아웃: 뉴 베가스>와 같은 경우는 커뮤니티 상에서 다른 게임들보다도 특별히 사랑받고 있고 거의 트랜스펨의 상징과도 같은 지위에 올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작품 자체가 직접적으로 트랜스성과 관계하고 있지도, 작품 제작 차원에 트랜스 당사자가 개입되어 있지도 않다. <길티 기어 스트라이브>도 전반적으로 <폴아웃: 뉴 베가스>와 크게 다르지 않고, <길티 기어> 시리즈 내에서 이미 2002년에 처음으로 출시되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역사를 가지고 존재해 왔던 “브리짓”이라는 캐릭터가 비교적 최근에 들어 와서야 본작에서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을 한 이후로 해당 캐릭터에게 초점을 맞춘 팬덤 문화가 형성된 바가 있지만, 이 한 명의 매우 국소적인 캐릭터를 제외하고 전체 게임 차원에서는 특별히 트랜스적 주제를 다루고 있지도, 트랜스적 게임성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길티 기어> 커뮤니티에서 게임과 가장 충실하고 긴밀하게 관계하고 있는 트랜스펨들은 브리짓을 기점으로 유입층이 늘어난 팬덤 영역에서가 아니라 그 바깥의 전체적이고 실질적인 게임 영역에 자신을 투여하는 실제 격투 게임 대회를 중심으로 <길티 기어> 커뮤니티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애초에 트랜스펨 개인들이 게임 영역에 대거 투입되고 전문적인 수준까지 훈련되는 일이 많은 것은 현실의 물리적 사회 공간에 참여가 허락되지 않고 자리가 주어지지 않으며 아주 철저히 배제되어 온 지금 이 순간도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는 오랜 역사에서 오직 접근할 수 있는 취미라고는 외부의 공공장소로 나가지 않고 방 안에서 즐길 수 있는 게임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유가 크다. 따라서 이미 트랜스펨들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게임들을 즐겨왔고 그저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좋은” 게임을 즐겨왔기 때문에 우연히 플레이 경험이 겹친 사례의 대표가 <폴아웃: 뉴 베가스>이다. 복잡하고 흥미로운 선택지와 플레이어 행동에 대한 예상치 못한 치밀하고 구체적인 결과들, 대화의 풍요로운 문체 등 현대적 RPG 게임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폴아웃: 뉴 베가스>에 대한 트랜스펨들의 선호는 단지 자기 탐색의 시간을 불가피하게 많이 가질 수밖에 없는 트랜스 당사자들이 비교적 고상한 취향을 획득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는 반농담 반진담으로 설명하는 것이 용이할 것이다. 따라서 트랜스펨 커뮤니티가 문화 코드로 정체화하는 게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트랜스 정체성과 관계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필요 조건인 것만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그저 트랜스펨 당사자들이 실제로 지금까지 각자가 시간을 많이 투여해 온 게임들이라는 것만이 약분 불가능한 최소한의 정수다. 애초에 트랜스 정체성 자체가 하나로 압축될 수 있는 단일한 결정이 아니라 수없이 다양하고 고유한 개인들의 사실상 임의적인 집합체이기 때문에 당연한 사실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동일한 구심점을 축으로 공전하며 조직된 코드의 궤적들을 따라 문화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으로 주변적 존재들은 삶을 느낄 수 있는 자리를,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정체성을 공유하는 개인들끼리 같은 작품을 향유했다는 사실만으로 연결감을 느끼고 만연한 소외와 고독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당 작품을 매개 삼아 존재할 수마저 있다. 즉, 자신의 향유에 설명을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증명을 이루고 작품을 자기 정체성의 코드로 기입해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기존에 존재하던 기성 규범 사회의 문화 코드를 대여하거나 그것에 편입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탈취해 고유하고 독자적인 맥락을 발생시키고 새로운 의미를 덧씌우는 과정이다. 그리고 개별적 언어, 방언을 만들어 냄으로써 소수자들은 스스로 설명 가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또한 밖으로 내쫓긴 이들에게 기존 사회와 언어 안에는 자신들을 위한 자리가 없으므로 대안적 관점을 창조해 내는 것이지만 이를 통해 역으로 작품 자체 또한 확장하고 그 의미를 다양화하며 그 질료를 풍요히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즉, 트랜스펨 커뮤니티의 문화 코드 구성 과정은 정체성과 게임이 상호적으로 재조직하는 교차 전이이다. 참조할 계보가 없는 돌연변이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인공 고향은 말라붙은 터전에 다시 양분을 불어넣는다. 추신 트랜스펨들이 실제로 아주 오랫동안 게임을 즐겨왔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최근에서야 이러한 온라인 커뮤니티 상의 연결과 공유가 적극적으로 활성화된 측면이 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맥락은 기존에 “여자”는 게임 따위를 하지 않는다는 말 같지도 않은 편견이 생각보다 꽤 널리 퍼져 있었기에 트랜스펨들 또한 자신의 취미가 충분히 “여성적”이지 않게 인식될까 봐 자랑스럽게 드러내기를 꺼리고 수치심에 부인하고 감추며 억눌러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게이머에 대한 오명이 점점 벗겨지며 오히려 스포츠 게임과 같은 남성 위주 게임을 “캐주얼”한, 비전문적 게임의 영역으로 밀어 넣어 버리고 역으로 여성 게이머를 “코어”하며 전문적인, 집요한 플레이어들로 재조명하는 관점이 유통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트랜스펨들도 수치심과 열등감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게임에 대한 취미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서로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1] transfem. 트랜스페미닌(지정성별상의 남성이 젠더 스펙트럼상 여성에 좀더 가까운 경우)의 줄임말. 트랜스페미닌함을 지닌 개인들을 이를 때 자주 사용된다. [2] <울트라킬>의 주인공 V1은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닮은 머리로 인해 팬 커뮤니티 내에서 CCTV라는 별명을 얻었다. [3] In space, no one can hear you scream. 리들리 스콧, 에이리언 (1979).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벼개가 된 사나히>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와 『게임 코러스』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 [Interview] A journey towards the next step of Korean game research, Prof. Tae-jin Yoon, the president of DiGRA-K
In March 2024, the South Korean regional chapter of the Digital Games Research Association (DiGRA) was established. DiGRA is one of the world's largest international associations for academics and professionals who research digital games and associated phenomena. Its Korean chapter, named “DiGRA-K”, is now the latest new regional hub followed by the ones in Europe, Asia, and North and South America. DiGRA-K aims to promote an interdisciplinary approach to game research, strengthen connections with industry and academia, and support the next generation through international collaborations. Notably, DiGRA-K aims to overcome the gap between academic disciplines in Korea when it comes to research games, while seeking to encompass both industry practitioners and academia. < Back 26 GG Vol. 25.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수 문화와 지식, 공간과 학술 장 등 다양한 영역을 공부합니다. 게임의 역사와 게이머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Doctoral researcher at Aalto University, Finland) Solip Park Born and raised in Korea and now in Finland, Solip’s current research interest focused on immigrant and expatriates in the video game industry and game development cultures around the world. She is also the author and artist of "Game Expats Story" comic series. www.parksolip.com
- [공모전] 레벨 디자인을 넘어서
게임 관계자들에게는 상식적인 이야기겠지만, 게임에서 레벨 디자인은 게임이 담고자 하는 세계를 디자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저가 어떻게 게임을 경험하고 반응할지 예측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세계가 어떤 주제를 담고 있는지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가령, 수많은 논쟁과 악습을 생산했음에도 <리니지2>(엔씨소프트, 2003~)의 레벨 디자인을 비난할 방법은 많지 않다. 물론 일부 플레이어로부터 <리지니2>의 레벨 디자인은 오늘날까지 게임업계의 악습으로 고착된 사행성 기반의 ‘착취적 BM’이 자라나는 초석을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되려 엔씨소프트가 지난 10년간 ‘BM 연구’라는 그럴싸한 미명 아래에 범해온 운영 권력의 남용을 호도하는 지적에 가깝다. 그만큼 레벨 디자인은 게임 콘텐츠의 성패를 넘어, 게임 자체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 Back [공모전] 레벨 디자인을 넘어서 13 GG Vol. 23. 8. 10. 게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레벨 디자인’ 게임 관계자들에게는 상식적인 이야기겠지만, 게임에서 레벨 디자인은 게임이 담고자 하는 세계를 디자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저가 어떻게 게임을 경험하고 반응할지 예측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세계가 어떤 주제를 담고 있는지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가령, 수많은 논쟁과 악습을 생산했음에도 <리니지2>(엔씨소프트, 2003~)의 레벨 디자인을 비난할 방법은 많지 않다. 물론 일부 플레이어로부터 <리지니2>의 레벨 디자인은 오늘날까지 게임업계의 악습으로 고착된 사행성 기반의 ‘착취적 BM’이 자라나는 초석을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되려 엔씨소프트가 지난 10년간 ‘BM 연구’라는 그럴싸한 미명 아래에 범해온 운영 권력의 남용을 호도하는 지적에 가깝다. 그만큼 레벨 디자인은 게임 콘텐츠의 성패를 넘어, 게임 자체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레벨 시스템이 게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리니지>가 플레이어를 공성전까지 이끄는 경위를 간단하게 풀어보자. <리니지>를 기반하고 있는 바탕은 말 그대로 던전, 즉 맵이다. <리니지>는 로그라이크의 유산을 계승하며 ‘방’과 함께 콘텐츠들의 격리 수준을 꽤 높게 설정했다. 동시에 여기에 PvP 시스템을 함께 적용시켜 무작위성과 우연성을 겹쳐놓았다. 이렇게 급격히 상승한 무작위성과 우연성은 플레이어에게 행위의 결과에 대한 다양한 이유를 만들어준다. 다만, 그 이유는 ‘플레이어가 끼어드는 바람에 파밍을 망쳤다’와 같은 스트레스 요인으로 귀결된다. 이 스트레스들은 PvP 시스템과 얽혀있는 것으로서, “지면 복종해야 하고, 이기면 지배한다”는 강력한 행동 원리를 플레이어에게 쥐여준다. 이는 곧 <리니지>의 정체성이 된다. 예나 지금이나 <리니지>를 규정하는 건 공성전, 즉 “쟁”이다. <리니지>의 “쟁”은 단순한 부족 간의 전쟁이 아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나름의 사연을 쌓아온 플레이어가 플레이 내내 게임으로부터 부여받은 갈등과 스트레스를 폭발시키는 장에 가깝다. “쟁”의 레벨 디자인이야말로 <리니지>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결정 짓는 요소다. RPG로서 <리니지>에서 가장 유별나고 정체성이 강한 시스템은 캐릭터가 중첩되지 않는다는 현상이다. 이는 캐릭터가 픽셀을 잡아먹어 공간을 하나의 자원으로 삼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수백명의 플레이어가 한 공간에서 전략을 짜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처럼 <리니지>의 레벨 디자인에는 ‘하나의 자원을 둔 플레이어의 갈등’을 테마로, 멜서스적 위기를 구체적으로 재현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는 ‘리니지 라이크’라는 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오픈 월드, 그리고 개입과 자기효능감 이처럼 레벨 디자인은 하나의 게임 장르를 탄생시킬 수도 있는 게임의 핵심 요소다. 레벨 디자인에 있어 최근 일어나고 있는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오픈 월드(Open World)의 적극적인 적용일 것이다. 말 그대로 ‘열린 세계’인 오픈 월드는 흔히 “플레이어가 갈 수 없는 곳이 없는 게임” 정도로 일컬어진다. 장소의 이동에 대한 자율성이 오픈 월드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불리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오픈 월드의 가장 큰 특징은 오브젝트(object)에 대한 접근(Enter) 권한이 절차적이지 않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게임의 구성 요소에 접근하기 위해 게임의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는 상태를 구현한 것이 오픈 월드 게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여기에는 게임이 설정해놓은 다양한 미션 등을 통과해야 하는 과정들이 있지만, 오픈 월드를 적용하는 이유는 플레이어가 게임 내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을 만끽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자기효능감이란 자율도를 사회학습이론의 거장인 알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가 제시한 개념으로서, 어떤 상황에서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기대와 신념을 말한다. 한 마디로 많은 스튜디오가 오픈 월드를 게임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유는 플레이어가 게임이 결정해준 요소가 아닌 스스로 적절한 결정을 수행하고 있다는 믿음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다. 게임의 구성 요소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플레이 권한은 스스로 결정한다는 믿음, 즉 자기효능감을 반드시 수반하는가? 얼핏 생각하면 이는 맞는 이야기다. 플레이어는 게임이 정한 규칙 등 다양한 구성 요소와 상호작용하며 상황들을 마주하고 그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상호작용을 거부하는 플레이를 통해 자기효능감을 충전하는 플레이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트롤링(Trolling)이다. 트롤링은 공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게임이 금지한 행동을 플레이함으로써 플레이어에게 부여된 사회적 역할을 무시하고 반사회적 행동을 수행하는 플레이를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트롤링 중 하나가 <리그 오브 레전드>(라이엇 게임즈, 2009~)에서 종종 일어나는 ‘그리핑’(Griefing)이다. 그리핑이란 고의로 팀의 승리에 이바지하지 않는 플레이로, 그리핑의 동기는 다양하나 궁극적인 목적은 게임이 정해놓은 협력 시스템을 고의로 어겨서 자기만족, 즉 자기효능감을 취하는 것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가장 대표적인 그리핑 유형으로 뽑히는 ‘피딩’(Feeding)은 고의로 상대에게 죽임을 당해 팀의 패배를 견인하는 것이다. 혹 <리그 오브 레전드>가 협력 플레이라는 것을 근거로 피딩이 시위의 일종이 아닌가 싶은 추측도 분명 있을 텐데, 피딩은 그런 숭고한 사례가 없진 않겠으나(?), 대게는 그러한 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피딩을 하는 경우는 단순하다. 레벨업 혹은 승급이 필요하지 않은 플레이어가 다른 플레이어의 성장을 막기 위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피더(Feeder)들은 다른 플레이어의 성장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전능감(Omnipotence)을 느끼게 되며, 이는 트롤링을 통해 자기효능감을 획득할 수 있는 직접적인 요인이 된다. 닷 말해, 협력 시스템을 활용해 왠만한 실력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타인의 게임 구성에 직접 개입(Access)하는 데에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있다는 감각이 자기효능감의 중핵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 선형적 오픈 월드, 혹은 레벨 디자인을 넘어서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오픈 월드는 직접 게임 요소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듦으로써 플레이어에게 자기효능감을 수반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플레이어가 게임 요소에 직접 진입(Enter)할 수 있게만 한다면, 게임 요소에 개입(Access)한 것인가? <엘든 링>(프롬 소프트웨어, 2022)은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좋은 예다. <엘든 링>은 소울라이크 장르로서 튜토리얼부터 극악한 난이도의 미션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장르적 특징이다. 플레이어는 튜토리얼부터 차례대로 플레이 공략을 쌓아야만 엔딩에 이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난이도를 해결해나가는 성취감으로부터 자기효능감을 얻는다. 그러나 오픈 월드는 이러한 절차적 요소를 복잡하게 만들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된다면 플레이어는 고난이도 캐릭터를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마주쳐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절차적 요소의 핵심은 마디와 순서다. 어떤 진행에 있어 진행과 진행 사이가 구분되어 있고, 그 구분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순서를 만들 수 있다면 절차로 볼 수 있는 정황이 충분하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마디와 순서에서 플레이어가 얻는 것은 예측과 기대이며, 플레이어는 이 예측과 기대를 바탕으로 대응 방안을 모색한다. <엘든 링>이 오픈 월드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소울 라이크 팬들이 기대했던 것은 바로 이 진행과 진행 사이의 절차 구조상의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보스 콘텐츠까지 이르는 과정의 변화에 대한 기대가 컸다. 문제는 소울 라이크가 쌓아놓은 절차적 요소 자체가 워낙 단순하고, 그 단순함이 재미를 보장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프롬 소프트웨어는 <엘든 링>에 있어 새로운 구조적 변화를 설계하기보단 비주얼 요소들에 집중했다. 그 결과, <엘든 링>은 충분히 잘 만든 게임임에도, 게임이 기획했던 바와 같이 오픈 월드를 플레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가 쉽지 않다. 물론, 보스까지 직통으로 연결되는 루트를 찾아 ‘길뚫 플레이’를 할 수 있지만, 이것이 게임 요소에 개입했다는 믿음을 주지는 않는다. 보스 콘텐츠라는 마디로 진입하는 것 자체가 <엘든 링>의 절차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마디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엘든 링>은 접근은 허락할지언정, 게임의 핵심적인 요소 자체에는 개입을 어느 정도 차단하는 일종의 절차적인 레벨 디자인을 꾸민 것과 같다. 이는 오픈 월드더라도 플레이어는 게임이 디자인한 특정한 순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과 같다. 오픈 월드라고 하더라도 플레이어와 레벨 디자인의 적극적인 상호작용, 그리고 플레이어의 온전한 주체성을 통해 게임 요소에 개입하여 얻어지는 자기효능감은 약한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플레이어에게 하지만 여기에는 강력한 장점이 있다. 오픈 월드이고,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플레이했기 때문에 체험을 통해 습득한 서사는 비선형적이지만 꽤 괜찮은 세계관을 완결적으로 경험했다는 감각이다. <엘든 링>이 가진 독특하고 진중한 아트 디자인과 비주얼, 스테이지 간의 통일감과 앙상블이 세계관에 대한 플레이어의 체험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엘든 링>이 오픈 월드인 척하는 ‘반쪽짜리 오픈 월드’를 구현해놓았음에도 수많은 평론가가 <엘든 링>을 고티(GOTY, Game Of The Year)의 영역에 올려놓는 이유이기도 하다. 복잡하고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이야기에서 하나의 완결된 세계관 체험을 통해 선형적인 서사로 경험되는 것은 흔치 않은 플레이다. 그리고 이러한 콘텐츠 체험은 무엇보다 소울 라이크 장르 팬이 아닌 장르 저관여 게이머도 유입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를 통해 <엘든 링>은 소울 라이크 장르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했다. 오픈 월드로서 선형적인 서사를 제공하는 <엘든 링>의 장점은 ‘디아블로’ 시리즈의 최신작 <디아블로 4>(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2023~)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디아블로 4>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가장 큰 장기인 압도적인 시네마틱 시퀀스를 통해 적절한 지점에 일종의 랜드마크를 세워놓는 효과를 본다. <디아블로 4>가 게임 내에서 보여준 핵앤슬래시 요소의 미성숙한 기술적 완성도와 많은 단점을 가진 게임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디아블로 4>의 시네마틱 시퀀스들은 레벨 디자인이 수행해야 하는 바로 그것, 게임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정당화할 수 있는 요인을 마련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디아블로 4>의 시네마틱 시퀀스들이 오픈 월드의 요소를 마모시켰더라도, 게임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지킨 것은 최소한 나에게는 <디아블로>를 속칭 ‘고인물 밭’으로 남겨두지 않겠다는 절치부심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는, <디아블로M>이 던져놓았던 <디아블로> 시리즈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들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출시 5일 만에 글로벌 매출 6억6600만달러(약 8476억원)를 찍으며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역사상 최대 출시 판매액을 기록한 점은 그 반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러한 사례들은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얻는 자기효능감이란 결국 반두라가 정의한 바와 같이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기대와 신념”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기대를 하게 한다. 게임의 레벨 디자인을 넘어서 게임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구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어떤 특정한 요소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즐기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플레이어에게 모든 접근 혹은 개입 권한을 줄 필요가 없을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게임에 있어 자기효능감을 느끼게 만든다는 건 어쩌면 플레이어에게 스스로 결정한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완성도 있는 세계관과 그 세계관을 구현한 게임의 명확한 존재 이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레벨 디자인 너머에 있는 것 글을 열며 <리니지>를 언급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리니지>의 레벨 디자인을 비판하는 건 대단히 복잡하고 힘든 일이다. 엔씨소프트의 <리니지> 레벨 디자인은 게임사에서도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리니지 라이크’는 자기효능감과 거리가 먼, ‘착취적 BM’과 같은 악습으로 통한다. 나는 <리니지>의 레벨 디자인이 악습으로 받아들여 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더욱이 앞에서 밝혔든 <리니지>의 레벨 디자인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엔씨소프트가 범해온 운영 권력의 남용을 호도하는 일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되물어야 할 것이다. 높은 수준의 레벨 디자인을 구현하고, 대체 불가능한 재미를 통해 플레이어를 게임 안에 가두리(Lock-In) 시키는 일은 또 다른 ‘착취적 BM’을 양산하는 바탕이 되는 것일까? 나는 게임에는 죄가 없다고 믿는다. 악습을 결정하는 것은 스튜디오와 디플로이어들의 선택이며 태도라고 생각한다. <엘든 링>이 소울 라이크를 재탕하지 않고 반쪽짜리라도 오픈 월드를 선택한 점,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디아블로M>보다 시네마틱 시퀀스를 우선시 한 점은 모두 레벨 디자인을 넘어서는 일이다. 거기에는 게임을 사업 혹은 놀이 이상의 업(業)으로 대하는 태도가 있다. 이처럼 게임의 레벨 디자인을 완성하는 것은 레벨 디자인 그 자체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레벨 디자인의 궁극적 목적, 즉 게임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스튜디의 선택이자 태도다. 그리고 한편으로 게임의 명확한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구하는 일은 플레이어에게 최선의 재미를 서비스하는 기본적인 책무를 넘어, 게임을 통해 플레이어의 플레이를 책임지겠다는 게임 개발의 윤리적 태도이기도 하다. 게임과 재미는 진지한 비즈니스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원) 이현재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콘텐츠와 IT 산업의 동향과 정책을 연구하며, 콘텐츠 전반에 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국 AI 및 디지털 정책 동향 조사·분석」(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디지털 보안 동향 조사 및 분석」(한국인터넷진흥원)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한국콘텐츠진흥원) 등에 참여했으며,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 신인상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 재현, 시뮬레이션 그리고 구현이라는 꼭짓점의 버뮤다 삼각지대
게임에서의 기술 구현은 이처럼 재현과 시뮬레이션 둘 중 어느 쪽으로도 수렴되지 않으며, 둘의 합이 성공적인 구현을 담보하지도 않는다. 기술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전적으로 기술 자체의 구현에 몰두하는 것과도 다른 이야기다. 드물게 범례처럼 떠오르는 각각의 개별 작품들을 통해서 여전히 명확히 잡히지 않는 좌표를 다시 한번 확인할 따름이다. < Back 재현, 시뮬레이션 그리고 구현이라는 꼭짓점의 버뮤다 삼각지대 24 GG Vol. 25. 6. 10. * SAM이 보는 세계 찬호께이의 소설 <망내인>은 여느 추리소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자살로 여동생을 잃은 주인공이 은둔 해커이자 탐정인 또 다른 주인공을 찾아 나선다. 장르의 문법에 친숙한 독자라면 결말의 깜짝 반전과 같은 세부적인 디테일은 차치하고라도 이 소설이 나아가는 대략적인 방향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는 익숙한 ‘국밥’의 맛으로만 수렴되지 않는 돌출된 부분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홍콩이라는 배경이 그렇다. 일반적인 경제특구와는 다르게 특별행정구이기도 한 홍콩은 복잡한 역사적인 맥락과 민감한 정치적인 상황들이 맞물려서, 쉽사리 다른 지역으로 번역될 수 없는 특수한 지역성을 제공한다.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의 핵심 요소인 해킹에 대한 묘사이다. 매체를 불문하고 픽션 내에서 특정한 기술을 재현한다는 것은 까다로운 문제일 수밖에 없다. 특히 해킹의 경우는 악명이 높은데, 어두운 방 안에 있는 여러 대의 모니터에서 알 수 없는 코드들이 마구 지나가는 동시에 해커가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식의 클리셰는 이미 다수의 밈을 통해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다. <망내인>은 마치 해커 입문 수업을 듣는 듯한 현실적이고도 상세한 해킹의 전개 과정과 그 과정 전체가 추리와 직접적으로 결부되는 영리한 플롯을 통해 그러한 함정을 피해 가는 드문 사례이다. 그렇다면 재현보다도 (유저의 인풋에서 비롯된 무수히 많은 결괏값에 의거한) 시뮬레이션에 훨씬 방점이 찍힌 미디어인 게임은 이와 같이 특정한 기술을 ‘구현 materialization’하는 문제에서도 어떤 독보적인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제나 그렇지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뚜렷하게 ‘당연한’ 방향으로 직진하지 않는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사실은 게임이 의도적으로 심각하게 제한된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다. 하이테크의 사이버펑크 도시를 매우 밀도 높게 구현한 <사이버펑크 2077>의 경우를 봐도 V 가 자신의 몸에 이식하는 사이버웨어는 사이버 사이코라는 도식적인 한계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 다를 뿐, 근본적으로 여타의 판타지 게임들에서 등장하는 마법이 부여된 장비와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 플레이어는 사이버웨어가 사실은 살과 뼈를 찢고 들어가서 기존의 신체와 불안정하게 접합하는 매우 고어(?)한 포스트 휴머니즘적 장치라는 것과, 그것을 계속해서 추가하다 보면 통제가 완전히 불가능한 사이버 사이코에 이른다는 실존적인 불안을 체감하지 못한다. [1] 결과적으로 이 게임의 주요한 모티프이기도 한 사이버웨어 테크놀로지는 ‘간지 나는’ 성능템으로 납작하게 요약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의 경우를 두고 앞선 해킹의 사례처럼 다시금 재현의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것 또한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사이버웨어는 단순히 재현된 것이 아니라 시뮬레이션 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V 의 팔에 고릴라 암즈를 장착할지 투사체 발사 시스템을 장착할지에 따라서 플레이 스타일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며, 이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선택(인풋)에 달렸다. 그 선택 이후에도 투사체 발사 시스템을 어떤 조합으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무수히 많은 다른 결과들로 이어질 수 있다. 관건은 게임이 제공하는 시뮬레이션의 정교함이 반드시 게임 내 기술의 적절한 구현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복잡한 시뮬레이션과의 상호작용은 (그 촉각적 ‘리얼함’으로 인해서) 그것이 실제의 기술과 부합한다는 환상을 오히려 강화한다. 그러므로 시뮬레이션과 재현이 중첩된 게임 미디어는 기술 구현의 욕망과 닿을 듯 말 듯한 기묘한 평행선을 달린다. 사려 깊은 레벨 디자인과 다양한 종류의 현실적인 제약들(일회용인 방독면 필터와 깨진 방독면을 덕 테이프로 임시로 처리하는 디테일, 제때 청소해 주지 않으면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총기, 에어건과 손전등을 계속해서 수동으로 펌프질해야 하는 수고로움 등등), 그리고 대부분의 HUD 를 제거한 다이어제틱한 UI 디자인이 잘 어우러져서 상당한 수준의 시뮬레이션을 가동하는 <메트로: 엑소더스>는 게임이 위치하는 미묘하게 어정쩡한 지점을 잘 드러내는 사례이다. 이 게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꽤 비현실적인 배경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총기 전문가 [2] 가 나서서 다양한 총기들의 모양과 기능을 매우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고 평가할 만큼 ‘전통적인’ 재현에도 충실하다. 다시 말해 시뮬레이션과 재현 모두 해상도 측면에서 별달리 아쉬운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정확히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 작품은 게임이라는 특정한 매체가 지닌 아포리아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한다. 총만큼 게임의 역사를 관통하는 기술도 없을 것이다. 게임 업계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극초창기의 슈팅 게임 [3] 이야기는 제외하고, 세부 장르인 FPS로만 한정해서 생각해 봐도 그 기원을 따져 올라가면 1973 년으로 가야 한다. [4] <메트로: 엑소더스>의 시점에 이르면 총을 다루는 캐릭터의 애니메이션과 총기의 반동, 총알의 궤적, 그에 따르는 부가적인 특수 효과와 음향, 총성과 총상에 반응하는 적의 움직임 등 총기의 시뮬레이션과 재현의 모든 면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몰입감을 플레이어에게 선사한다. 그렇다면 이로써 게임에서 총을 구현하는 작업은 특이점에 다가가고 있는 것일까? 햅틱 피드백과 적응형 트리거처럼 게임 컨트롤러에 한 스푼의 리얼함을 추가하거나 아예 VR 게임을 통해 답답한 직육면체의 모니터를 벗어난다면 언젠가는 완벽한 해상도에 (그러니까 완벽한 총싸움의 경험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여기서 총과 같은 기술을 구현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 총을 쏘는 사람이 방아쇠를 당기면 내부에 있는 공이가 화약이 든 총알을 타격한다. 그렇게 발생한 작은 폭발은 고막이 찢어질 듯한 (음 소거 버튼으로 없앨 수도 없는) 굉음과 어깨가 시큰할 정도의 반동, 매캐한 화약 냄새와 뜨겁게 달아오른 총신, 그리고 땀에 젖은 손을 남긴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원래 없었다는 듯이 유령처럼 작동하는 총 모양의 어떤 것을 우리는 과연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운이 좋게 주요 부위를 피해서 맞는다고 해도 과다 출혈과 쇼크로 사망할 수 있는 위력적인 무기를 들고 서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총싸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즉 기술은 단순히 진공 상태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의 사용자와 작동하는 환경, 역사적인 맥락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유저를 끝없는 피드 속에 가두기 위한 욕망으로 추동되는 알고리즘의 구조만큼이나 2024년 옥스퍼드 사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뇌 썩음 brain rot’ 또한 소셜 미디어라는 기술의 핵심 요소인 셈이다. [5] 결과적으로 시뮬레이션과 재현이 정교해질수록 기술적 구현의 욕망이 대두되지만 동시에 이는 비디오 게임이라는 매체의 틀 안에서 선택적으로 제한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한 총싸움 게임’은 영화 <배틀로얄>이나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비슷한 상황을 현실로 구현해 낸 생지옥에서나 가능한 ‘실재the real’로서의 한계 지점인 것이다. 따라서 기술의 구현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미래적 게임이라는 방향성은 ‘블랙 미러’적인 미래와도 다소 불안하게 겹친다. 다만 꼭 그런 방향이 아니더라도 비교적 간단(?)하게 특정한 기술을 높은 수준으로 구현할 방법이 있다. 바로 컴퓨터를 (더 구체적으로는 그것의 UI를) 재현하고,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경찰의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는 컴퓨터라는 설정으로 오래된 데스크톱 OS 바탕화면의 미학과 기능을 적극 활용한 <허스토리>나 픽셀로 구현한 스마트폰의 UI 내에서만 게임이 진행되는 <레플리카> 같은 게임들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게임들은 기술의 구현이 매체에 의해서 제약받는 정도가 훨씬 덜한데, 왜냐하면 비디오 게임 자체가 컴퓨터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비슷한 포맷의 다양한 게임들이 존재하지만 내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작품은 <옵저베이션Observation>이다. 전작 <스토리즈 언톨드Stories Untold>에서도 컴퓨터를 직접적으로 구현해서 텍스트 어드벤쳐 게임에 대한 일종의 메타픽션을 만들어 냈던 개발사 No Code는 이 작품으로 게임에서 컴퓨터를 구현한다는 것의 의미를 한층 더 확장한다. AI 시스템인 SAM을 조종하는 플레이어는 매우 다양한 전자적 인터페이스를 경유해서 우주 정거장의 물리적 내/외부뿐만 아니라 버려진 랩탑들의 데이터, 정거장의 모듈 시스템, 그리고 자가 진단을 할 수 있는 내부 시스템까지 도달한다. 그러는 와중에 마이크와 카메라를 통해 계속되는 유일한 인간 생존자인 엠마 피셔 박사와의 대화에 이르면 우리가 에이전틱Agentic AI라고 부르기 시작한 어떤 기술적 흐름의 코스믹 호러적 완성형을 제시하는 듯이 보일 정도다. 다만 이 작품에서 AI가 곧 플레이어라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AI 자체를 구현하는 것이 게임의 지향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오히려 플레이어가 <옵저베이션>을 통해 경험하는 것은 SAM이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이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우리의 AI친구 샘은 고정된 UI에 머물지 않고 부산스럽게 옵저베이션 정거장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그러나 원격 드론을 조종해서 정거장 바깥의 공허한 우주를 유영하는 순간까지도 플레이어는 인터페이스로 가득 찬 스크린을 벗어나지 못한다. 즉 플레이어는 게임 내내 각기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기보다는 샘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시스템에 내재한 멀티 모달리티multi modality를 체험한 셈이 된다. 키틀러가 이야기하듯 컴퓨터가 그 이전의 미디어와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은 다양한 종류의 서로 다른 데이터를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인코딩하고 조작할 수 있는 멀티 모달리티에 있다. 물론 컴퓨터 바탕 화면의 미학을 ‘완벽히’ 구현한다면 바탕 화면에서 영상을 본다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멀티 모달리티를 선보일 수 있다. 그런데 그토록 완벽하게 구현된 컴퓨터로서의 게임이라면 나의 윈도우 기기에서 가상 머신으로 작동하는 리눅스 OS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게임 내에서 구현하는 기술의 목표는 재현과 시뮬레이션의 해상도를 최대로 올려서 매우 비슷한 모양의 거의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될 수도 없지만, 된다고 해도 종종 우스꽝스러운 결과로 이어진다. 게임은 유틸리티 소프트웨어가 아닌 것이다. <옵저베이션>은 플레이어 가능한 캐릭터를 AI로 설정함으로써 전형적인 UI가 발산하는 모종의 피로감을 탈피하는 동시에 컴퓨터의 멀티 모달리티를 게임 전체의 플롯과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컴퓨터를 구현하는 것’에 성공한다. 게임에서의 기술 구현은 이처럼 재현과 시뮬레이션 둘 중 어느 쪽으로도 수렴되지 않으며, 둘의 합이 성공적인 구현을 담보하지도 않는다. 기술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전적으로 기술 자체의 구현에 몰두하는 것과도 다른 이야기다. 드물게 범례처럼 떠오르는 각각의 개별 작품들을 통해서 여전히 명확히 잡히지 않는 좌표를 다시 한번 확인할 따름이다. [1] 설령 계속해서 사이버웨어를 추가하더라도 V는 디버프를 받을 뿐 사이버 사이코로 돌변하지 않는다. 장비의 무게나 숙련도에 따른 디버프가 존재하는 다수의 판타지 게임들과 더 유사해지는 지점이다. [2] Gamology, “Firearms Expert REACTS to Post-Apocalyptic Weapons in Metro Exodus” YouTube 2021.11.19. https://www.youtube.com/watch?v=ZdgiAvc8FxE [3] 최초의 슈팅 게임 Spacewar! 은 1962년 MIT 랩에서 세 명의 연구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https://en.wikipedia.org/wiki/Spacewar! [4] 최초의 FPS 게임인 Maze War https://www.guinnessworldrecords.com/world-records/95409-first-first-person-shooter-fps-videogame [5] 이동현, “영국 옥스포드 사전, 올해의 단어는 ‘뇌 썩음’(brain rot)” 한국일보 2024.12.02.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120221530000146 [6] 이 게임에서 SAM은 정확히 플레이어의 컨트롤에 의해서만 시뮬레이션 된다. 즉 현대의 AI 모델들이 기반한 확률적인 작동과는 궤를 달리한다. 직접 거대 언어 모델LLM을 실시간으로 게임에 연동해서 AI 캐릭터를 생성해 낸 <언커버 더 스모킹 건>과 같은 게임이 AI를 ‘구현’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웜뱃 잡다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입니다. 역시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게임에는 특히 관심이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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