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놓인 게임: 게임은 미술관의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까?
12
GG Vol.
23. 6. 10.
1. 미술관의 기원
한글로 모든 발음을 표기할 수 있다는 영아적 판타지가 위협받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어Μουσείον을 무세이온이라고 표기해야 할 때다. 오랜 옛날 무사이Μουσαι의 신전을 부르던 이름이다. 갱스터 근성을 타고 태어난 로마인들이 그곳을 참숯으로 만들었다. 파편처럼 흩어진 여러 기록에 따르면, 무세이온은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을 거느린 거대기관으로, 세상의 온갖 학자들이 그 안에서 먹고 자고 싸면서 각종 연구를 자행하였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보존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세이온은 오늘날의 대학과 같은 시설이 아니었을까? 아쉽게도 주변머리만 남겨놓고 머리통을 빡빡 민 수도사들은(예를 들면 에라스무스) 무세이온을 이집트 왕이 헬레니즘 세계의 온갖 이교도적인 보물을 쌓아놓은 곳쯤으로 상상했다. 그리하여 왕이나 귀족이나 교회나 메디치 가문 등등의 소장품을 쌓아놓는 공간을 뮤제움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무세이온의 이름을 따서. 그리고 나중에 일본인들은 뮤제움을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나누어 받아들였다. 그 무렵은 중세와 달리 ‘예술품인 것’과 ‘예술품이 아닌 온갖 수집품’의 구별이 생길 때였다.
일본을 통해 대부분의 근대어를 갖게 된 우리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으로, 미술관은 사실 박물관과 정확히 같고, 그것의 주 기능은 온갖 물건을 수집, 보존, 해석, 연구하는 데 있다. 전시는 그 다음이다. 그런데 오늘날 지구 위의 모든 미술관들은 대중에 개방하는 전시를 널리 일삼고 있는 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미술관은 완전히 근대의 산물, 좀 더 정확히는 대혁명의 산물이다. 이 사실을 언급하는 유명한 미술사가(예를 들면 앙리 웃세)가 지금까지 2천 명쯤은 있었을 것이다.
사실인즉 로마인의 갱스터 혈통을 물려받은 무리들이 왕을 단두대에 신나게 썰고 역대 왕들이 홀로 덕질해온 수집품들을 강탈해 공화국의 공공재로 선언했다. 이로써 최초의 근대적 미술관이 탄생했다. 공화국의 미술관Muséum de la république이 본래 명칭인 그곳은 한글로 발음을 표기할 수 없으니 간단히 루브르라고 하자. 국공립과 사립을 가리지 않고 세상의 모든 미술관들은 루브르와 같은 기능을 한다(잘 하든 못 하든). 루브르 이전에도 브장송이라든지 몇몇 동네에 공개전시를 여는 미술관이 드물게 있긴 했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겠다.
그렇다면 루브르와 같은 기능이란 무엇인가? 작품을 수집, 보존, 해석, 연구하는 일에 더해 전시도 하는 것이다. 단지 볼거리를 제공하는 차원이 아니다. 작품을 시대나 주제에 맞게 선별함으로써 사회 공통의 기억과 서사를 불러일으켜 공화국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전시다. 즉, 미술관의 원래 기능은 근대국가의 국민을 만드는 일이다. 좋은 미술관은 민주주의 발전의 경험, 여권신장의 역사, 이민자나 소수자를 대표représentation하는 기억, 변화해온 사회의 풍경 등을 담는 작품을 꾸준히 수집해 전시하고, 그럼으로써 사회구성원 모두를 통합하는 데 기여한다. 반면 영 좋지 못한 미술관은 미술 자체의 동시대적 실험 따위를 다루면서 사회구성원 모두로부터 멀어진다.
2. 미술관의 쇠퇴
그런데 위와 같은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19세기나 20세기까지의 일이다. 초강력 21세기가 도래한 지금, 미술관은 쇠퇴하고 있다. 정확히는 ‘루브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할 힘이.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는 19세기에 발명된 근대미술이 이제 과거처럼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과 200년 전, 아니 150년 전만 해도 그림과 조각이 가장 강력한 시각적 충격을 주는 매체였다. 바다를 그린 그림을 평생 내륙에서 살아온 사람이 처음 보았을 때 느꼈을 미술의 마법 같은 힘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제 미술에서 그런 힘은 완전히 사라졌다. 인터넷, 스마트폰,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통한 시각이미지가 넘쳐난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바다풍경’을 미술은 더 이상 그려낼 수 없다.
더구나 근대국민국가의 역할이 시효를 다하면서 단일한 공동체서사 또한 끝물이다. 이것이 둘째 이유다. 오늘날은 별의별 개인의 개별서사가 확산되는 시대다. 각자가 서사를 재구성하고 재전유하면서 스스로의 역사적〮문화적 정체성을 다시 써내려간다(오만가지 젠더와 인종과 종교와 문화 정체성이 탄생해온 지난 십여 년을 떠올려보라). 국가가 하나의 역사적 공동체라는 역할 대신 세금을 뜯으며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로 바뀌었듯, 미술관 또한 공동체 서사기능 대신 입장료를 뜯으며 구경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종의 관광 비즈니스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셋째는 미술관이 반드시 수장해야 하는 시대적〮지역적 작품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방자치단체가 하드웨어로서의 미술관은 지어놓았으나 이렇다 할만한 지역미술 씬 자체가 없는 지역미술관의 예를 들 수 있다. 이런 미술관은 아무런 공적 역할이 없는 짐짝일 뿐이다. 때로는 작품이 있어도 곤란하다. 예컨대 한국의 7,80년대 미술을 국립미술관은 어떻게 선별하고 배열해야 하는가? 훌륭한 작품은 웬만하면 독재에 부역하여 민주화 이후 국가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 역사적 저항의 현장에 있었던 작품은 웬만하면 훼손되어 사라졌거나 질적으로 좋지 않다. 그 시대의 삶을 증언해 줄만한 작품은 별로 없다. 미술품 생산이 일어날 만큼 여유롭지 않았고, 그나마도 웬만하면 검열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도 미술관이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넷째 이유는, 미술관에 돈이 없기 때문이다. 미술관이 쇠퇴하는 한편으로 미술의 향유는 압도적으로 시장을 경유하게 되어, 세계 미술시장에 전례 없는 거품이 발생했다. 미술품이 공예품이나 공산품에 비해 특별히 우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 가치에 비해 미술품이 너무 비싼 탓에 미술관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때로는 기업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작품을 충분히 구입할 수 없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왕을 단두대에 신나게 썰 수도 없는 노릇이다. 최근 들어 전세계 미술관에서 상설전이 축소되고 기획전과 대관전이 늘어나는 경향이 확산된 데는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미술관은 ‘루브르와 같은 기능’을 잃었다. 달라진 시대에 미술관이 어떻게 변모할지는 아직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21세기 거의 모든 미술관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 있다. 영상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의 가파른 증가다. 미술관은 본질적으로 19세기적 근대미술을 위한 공간이다. 설렁설렁 걸어 다니면서 작품을 눈으로 읽게끔 설계되어있다. 그런 곳에 반복재생되는 영상을 설치해보았자 전시지킴이의 신경증 발병확률을 효과적으로 올릴 수 있을 뿐, 영상은 미술관이 아닌 상영관에 알맞다. 지구상의 어떤 미술관도 상영관은커녕 집보다도 나은 영상시청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 여기서 집이란 TV와 소파가 있는 일반 가정집을 뜻한다.
그럼에도 영상은 이제 미술관뿐 아니라 베니스 비엔날레 등 세계의 주요 미술행사까지 사실상 장악했다. 영상미술의 성장은 시간의 예술이 현대미술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일까? 물론 흥미로운 영상작품이 많기도 하지만, 그 뒤의 이유는 비용이 싸기 때문이다. 우선 운송비와 보관비가 들지 않는다. 복제 가능하므로 원본이 훼손될 염려도 없다. 국경을 쉽게 넘을 수 있고 동시에 여러 장소에서 전시하는 일도 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적은 비용으로 현대미술 국제전을 열 수 있다. 영상을 주업 또는 부업으로 하는 미술작가가 늘어난 것도 미술관을 주 판매처로 하는 경제적 전략의 이유가 있다. 이런 현상도 미술관의 원래 기능이 쇠퇴하고 있다는 하나의 징표다.
3. 미술관에 놓인 게임
코로나 펜데믹 이전에도 프랑스인의 61%가 1년에 단 한번도 미술관과 박물관을 포함, 전시회를 방문하지 않았다. 1년에 5회 이상 방문한다는 프랑스인은 고작 8%1)에 불과했다. 인구의 다수가 미술관을 전혀 이용하지 않는다는 통계는 너무 많은 나라에 너무 많이 있어서 열거할 수 없을 지경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미술전시회에 관객이 가득 차고 미술대상 수상작이 신문 1면에 실리는 시대를 경험했지만, 우리 세대는 미술 전시란 으레 고요히 비어있는 행사라고 생각한다.
이런 변화는 현재 미술관이 처한 상황의 중핵이 아니라 곁가지에 불과하다. 미술관을 찾지 않는 비관객은 미술관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오늘날 미술관의 주요 관객은 해당 공동체의 시민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관광객이다. 나머지 소수의 관객은 전세계 어느 통계를 보아도 점점 더 점점 더 고학력〮고소득층으로 굳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입장료를 아무리 낮추어도 점점 더 소수 특수계층이 향유하는 공간이 되어간다. 달리 말하면, 현재로서는 상위계층에 복무하거나 그저 관광상품이 될 수 밖에 없는, 원래의 공적인 기능을 잃은 미술관은 존재의 이유마저 잃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미술관은 게임을 전시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파리 그랑팔레에 이어 뉴욕현대미술관,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한국국립현대미술관까지, 게임을 주제로 하는 대형 전시를 열었다. 물론 게임은 미술관에 전시할 수 있는 예술이다. 이에 대해서는 논할 마음이 없다. 그런데 미술관이 게임을 불러들이는 까닭은 게임을 예술로 승인하기 위함이 유일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지금의 구조적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미술관 나름의 절실한 필요가 있다고 해도 좋다. 새로운 관객층과 새로운 예술을 미술관에 데려오기 위해 게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미술관에 전시되는 게임은 어떻게 기능하는가? 게임은 감상의 대상인가, 체험의 대상인가? 전자라면 단지 몇 명의 플레이어만이 컨트롤러를 잡을 수 있는 게임의 특성상 게임의 미적 감상이 극소수에게만 허용된다. 후자라면 게임전시 자체가 제품시연회와 비슷한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고 만다. 그런데 애초에 감상과 체험이 나누어지는 것이기는 할까? 의문은 호기심천국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게임이 미술작품과 다르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미술관에 놓이는 것인가?
미술관으로서는 감상이든 체험이든 전시를 통해 게임을 어떻게 재정의하는지나 어떤 관객을 위해 무엇을 보이려고 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영상을 전시할 때도 그러하니까. 그러나 게임은 영상과 다르다. 미술관에서의 게임 전시는 실패가 예정된 기획일지도 모른다. 미술관 스스로 무수히 많은 게임을 수집하고, 일정 주제에 따라 분류, 선별함으로써 만들어진 전시가 아니라면 특히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게임의 예술성이나 작동방식 때문이 아니다. 게임은 영상처럼 싸지 않다. 각각의 작품에 맞는 물성이 있는 기기가 필요하다. 운반비와 보관비가 든다. 전시기간 중에도 계속해서 비용이 든다. 관객/이용자가 기기를 직접 조작하므로, 관객규모에 비례해 훼손이나 고장의 위험도 커진다.
지난 달 국립현대미술관의 〈게임사회〉 전시를 예로 들어보자. 정식오픈 전날, 기자간담회를 막 끝마친 시점에 이미 펌프기기 형태의 게임작품은 망가져 오작동하고 있었다. VR형태의 가상현실 작품은 같은 구간이 반복되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실험실에서 눈을 뜬 후 작품 속 나레이터의 안내를 듣고 나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일반에 공개하기도 전에 그랬으니, 전시 오픈 후에도 비슷한 고장이 여럿 발견되었을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처하려면 능숙한 엔지니어가 전시장에 상주하면서 매순간 모든 작품의 상태를 살펴야 한다. 미술관이 부담하기엔 너무 많은 비용이다. 그래서 본인은 미술전시로서의 게임이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4. 미술관 전시보다 상설 게임박물관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는 게임을 예술로 정의한다. 오랜 옛날에는 예술에 포함되지 않았던 그림과 조각이 르네상스를 거치며 예술이 되었듯이, 또 사진과 영화와 만화 등이 20세기에 예술로 인정받았듯이. 게임은 시각예술과 음악, 영상, 문학적 서사가 혼합된 인터렉티브한 총체예술이다. 하지만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게임에게도, 미술관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없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모든 예술이 미술관에 어울리지는 않는다. 연극이 예술이라 하여도 굳이 미술관에서 상연한다든지, 문학이 예술이라 하여도 책 페이지를 찢어 미술관 벽에 붙인다든지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드물게 있기도 하지만, 각각의 예술매체는 각각의 장르에 더 좋은 공간이 따로 있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연극을 위한 국공립극장과 문학을 위한 국공립도서관이 따로 있듯이, 게임도 게임을 위한 국공립시설이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저비용 혹은 무비용으로 게임을 할 수 있는 곳.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한 기기들을 갖춘 곳. 그런 곳을 우리는 PC방이나 게임방, 플스방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그렇다, 그런 공간을 공공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인은 주장하는 것이다. 나아가 더 필요한 것은 게임 자체만을 위한 박물관의 신설이다. 게임박물관은 방문객이 적은 비용으로 게임을 시연해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퍼진 문화적 관행 가운데 하나인 게임을 보존, 연구하면서 인류의 기억에 남겨두기 위해 필요하다.
게임박물관이 있는 나라는 이미 많다. 파리의 게임박물관, 영국 셔필드의 국립비디오게임박물관, 로마의 비디오게임박물관, 베를린의 컴퓨터게임박물관 등, 각각의 게임박물관들은 저마다 다른 주제와 테마를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게임을 수집해 공개한다. 게임과 게임기기는 물론 게임작품에 관한 여러 역사적 자료들도 끌어 모으는 중이다. 모든 게임박물관은 방문객이 직접 게임을 해볼 수 있게끔 신〮구형 PC와 게임기기들을 갖추고 있다. 일부 게임박물관은 교육 프로그램이나 지역연계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일부는 그렇지 않다. 아직까지 게임박물관들은 소규모에 불과하지만, 21세기의 남은 3/4을 지나면서 크게 확장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아직까지 게임박물관이 없다. 문체부가 3년 전부터 게임박물관 설치를 추진했으나 아직까지 기본계획조차 제대로 수립되지 않았다. 게임박물관이 없다는 말은 문방구 앞에 쪼그려 앉아 플레이하던 게임기기(과자가 덤으로 나왔다)라든지 오락실에서도 밀려나는 옛 게임들, 한때는 휴대폰처럼 들고 다녔던 소형게임기기 등이 그대로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옛 게임만이 아니다. 지금은 흔히 볼 수 있지만 앞으로 유행에 밀려날 게임들도 곧 사라지게 된다. 또 자가 게임기기를 가진 사람은 게임을 향유할 수 있지만 게임기기가 없는 사람은 향유할 수 없는 문화격차가 방치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제목의 질문을 던져본다. 게임은 미술관이 처한 어려움을 구제할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까? 그럴 필요가 없다. 게임은 미술관의 미술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미술관은 미술에 의해서만 지탱된다. 본인은 우리 세대가 죽기 전에 미술창작의 많은 부분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리라 예상하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미술이라는 단어는 지나간 과거의 인간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때 미술관은 다시 박물관의 역할로 돌아가, 근대미술박물관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지금 게임에 필요한 것은 미술전시를 위한 근대적 공간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예술인 그 자신을 위한 시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