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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의 보드게임: 원조국가의 또다른 면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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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2. 10. 10.

십수년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낯설던 단어는 비디오 게임이었다.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자라온 나에게는 ‘게임’이라고 하면 컴퓨터나 콘솔을 이용해서 하는 게임을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미국에서는 달랐다. 테이블탑 혹은 보드 게임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매우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내가 아는 게임은 반드시 비디오 게임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걸 알게됐다. 


한국에서는 보드게임 카페에서 조금 해본 것이 내 보드게임 경험의 전부였지만 게임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동료 중에서 보드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료의 초대로 본격적으로 보드게임을 해보았다. 사실 처음에는 의아했다. 기술적인 최첨단을 달리는 상품인 비디오 게임을 제작하고 마케팅하는 사람들이 굳이 보드게임을 하다니. 뭔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씩 보드게임을 하다보니 왜 일부 사람들이 보드게임이야 말로 정말로 궁극적인 게임의 형태라고 부르는 지 알 것도 같았다. 


웨이트니 유로니 하는 생소한 용어들을 알아갈 정도가 되자 보드게임에 관련된 문화적 요소들이 의외로 대중문화에도 많이 침투해있는 것을 알게 됐다. 가장 즐겁게 본 미국 드라마 중 하나인 ‘커뮤니티’에서  Dungeons & Dragons (D&D)을 하는 멤버들을 아주 즐겁게 봤던 기억이 났다. 미국에 사는 동안은 보드게임이 항상 내 곁에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여러 리서치를 하게 됐다. 



코로나가 이끈 성장


한국에도 잠시 보드게임 카페 등의 유행이 분 적이 있지만 말그대로 잠시 유행에 지나지 않았고 이후에는 주로 매니아들의 취미로 여겨졌다. 물론 미국도 보드게임이 대중화되서 누구나 즐기는 취미라고는 말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최소한 미국에서는 하나의 산업으로 인정을 받을 정도의 큰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리서치기관 스태티스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보드게임은 2023년까지 120억 달러의 시장규모에 도달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현재 환율로 17조가 넘는 엄청난 규모다. 


보드게임은 미국에서 코로나를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장이기도 하다. 물론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그 성장세가 꾸준하긴 했지만 2019년에 한해에만 무려 4000개가 넘는 보드게임이 쏟아진 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 업계의 팽창은 누구라도 주목할 만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이유는 우리가 따로 조사를 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이 양식있는 시민의 행동으로 불리던 나날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았고 종류에 따라서는 8시간도 후딱 가버리는 보드게임은 당연히 아주 좋은 선택지였다. 


보드게임이 또 하나 빛을 발하는 시장은 크라우드 펀딩이다. 보통 크라우드 펀딩이라고 하면 아이디어 상품이나 전자제품을 쉽게 떠올리지만 보드게임은 크라우드 펀딩 시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카테고리다. 북미에서 가장 큰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킥스타터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가장 큰 돈을 모은 킥스타터 프로젝트 순위를 살펴보면 이 중 네개가 보드게임이다. 역대 순위에서 6위를 기록하고 보드 게임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Kingdom Death는 무려 12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끌어모았다. 14위에는 보드게임을 위한 테이블이 8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펀딩 받으며 자리 했으니 전체 순위의 13 이 보드게임 관련임 셈. 펀딩의 규모가 아닌 아닌 프로젝트의 갯수로 봐도 놀랍다. 2021년 킥스타터를 통해서 펀딩을 시도해서 목표치를 달성한 보드게임은 3500개가 넘는다. 



뉴미디어에서 보드게임


물론 세상의 모든 문화상품들이 그렇듯이 뉴미디어에서 노출이 시장의 성장을 돕기도 했다. 특히나 유튜브에서 보드게임과 관련한 여러 채널들은 크게 성장을 해왔다. 대표적으로는 배우 윌 휘튼이 진행하고 있는 ‘테이블탑’이라는 유튜브 컨텐츠는 여러 셀러브러티들을 초청해서 보드게임을 즐기는 단순한 구성이지만 5년 이상 에피소드에 따라서는 300만 조횟수를 기록하는 등 엄청난 인기다. 빅뱅 이론과 스타 트랙에 출연하는 등 서브 컬쳐계에서 인기있는 작품마다 역할을 해온 윌 휘튼의 대표작이 테이틀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이미 오래 전부터 10대와 20대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왔던 소셜미디어 플랫폼 틱톡에서도 보드게임에 관련한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온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컨텐츠는 ‘샌드위치를 위한 주사위 던지기’(Roll for Sandwich)다. 룰은 간단하다. 가장 대표적인 보드게임 중 하나이자 가장 열광적 지지자를 거느리고 있는 게임 D&D에서 사용되는 주사위를 가지고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이다. 샌드위치를 만들 때 필요한 재료들을 다채롭게 준비한다. 그리고 이런 재료들에 번호를 붙여서 종이 위에 쓴다. 예를 들면 식빵은 1번, 베이글은 2번과 같은 식이다. 


주사위를 던지고 나온 번호대로 재료를 가져온다. 샌드위치에 사용되는 모든 재료들은 맛이나 서로 간의 궁합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주사위가 정해주는 우연에 따라서 결정된다. 너무나 간단한 포맷이지만 20면체 주사위를 굴려서 소스를 결정할 때는 나도 모르게 제발 다른 내용물과 어울리는 소스가 나오길 간절히 빌게 된다. 작가가 본업이지만 D&D 매니아인 틱톡커 제이크 포웰스가 영상시리즈를 시작한 것은 올해 4월 말. 그가 140만명이 넘는 팔로워를 모으고 2500만회가 넘는 좋아요를 받기까지는 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보드게임이라는 소재가 플랫폼에 따라서 전혀 다른 컨텐츠와 융합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증거다.



다양성이라는 과제


상업적인 성공을 제외하고 현재 보드게임업계에서 제일 유의미하게 논의가 되고 있는 주제는 도대체 왜 보드게임은 백인남성의 전유물이냐는 내부적인 질문이다. 보드게임 전문 사이트 보드게임 긱에 올라온 게임 중 상위 400위에 오른 게임을 대상으로 2018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게임 디자이너 중 92.6%가 백인 남성이었다. 유색인종 남성은 4.1%였고 백인 여성은 2.7%였다. 유색인종 여성 게임 디자이너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캐나다에서 이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는 타냐 포부다는 보드게임 시장이 상정하고 있는 타깃 자체가 이성애자, 비장애인, 중산층 백인 남성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경향은 보드게임의 표지에서도 보인다. 보드게임 표지에 나온 인물 중 남자는 52.7%에 달했고 여성이 나온 경우는 동물이나 외계인보다 적은 19.2%였다. 인종으로 오면 이 문제는 더 도드라진다. 표지에 백인이 나온 경우는 60.2%였고 비백인이 나온 경우는 11.7%에 불과했다. 


산업적인 이유로 특정한 성별이나 인종을 타깃으로 해서 상품을 만드는 것 자체를 윤리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보드게임 산업이 이런 제약으로 인해서 성장동력을 놓치고 있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만드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이성애자 백인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보드게임 커뮤니티는 다양성을 받아드리고 있다. 


보드게임 커뮤니티를 통해서 그가 진행한 설문에 따르면 응답자 중 74.9%가 백인이었고 20.4%는 유색인종이었다.  여전히 백인이 압도적인 비율이지만 게임 디자이너의 90% 이상이 백인 남성임을 고려하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성별로 가면 더 의외의 결과가 나온다. 설문에 답한 사람 중 50% 이상이 본인을 여성이라고 답했다. 커뮤니티의 경우 여성이 더 많지만 제작자는 남성인 상황이다. 한 마디로 다양성이 게임을 제작하는 쪽에서 필요한 때다. 


흔히 할리우드라고 불리는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양성을 부르짖는 이유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이 특별히 윤리적이고 신념에 가득차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보다는 상업적인 이유가 더 크다. 단순하게 영화업계만 봐도 다양성은 돈이 된다. 블랙 팬서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것이 너무나 명징한 증거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성이란 키워드는 엔터테인먼트 업계 전반에서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다. 


보드게임 업계 또한 더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다양성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뉴미디어의 발전과 맞물려서 폭발적 성장을 기록해온 그들은 이제 본인들의 커뮤니티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준비를 할 것으로 예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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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인)

캘리포니아에서 살면서 게임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에 출연하고 매체에 기고를 하며 많은 분들에게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패션부터 게임까지 분야에 상관없이 재밌는 글을 평생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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