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지는 몸, 나뒹구는 몸 - <스케이트 스토리>와 퀴어한 실패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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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6. 4. 10.

죽음과 성장의 이분법 바깥에서
“You Died.”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한 번 이상은 보게 되는 문구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사망에 다다르면 화면은 까맣게 암전되고, 중앙에 붉은 글씨가 떠오르며 죽음을 알린다. 단정적인 선언과 형식은 게임 오버 화면을 밈으로 기능하게 했다. 이는 다시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에 관해 떠올리는 정의와 끈끈한 관계를 맺기도 한다. 어려운 난이도에 대한 성토는 곧장 ‘유다이’라는 표현으로 수렴되고, 반복되는 죽음의 경험은 어려운 게임이라는 평판과 동의어처럼 엮인다. 어떠한 게임에 관한 이해는 그 게임이 형상화하는 죽음과 연결된다. 일반적으로 게임 속 죽음은 플레이어가 과업 수행에 실패했을 때, 그에 대한 반응으로 부과되는 일종의 처벌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피격되거나, 낭떠러지로 떨어지거나,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맞는 죽음은 실패의 가장 직접적인 피드백으로 작동한다. 이는 단순한 패배의 신호를 넘어, 플레이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구축해 온 세계를 일시적으로 상실하게 각인시키는 경험이다[1].
그러므로 플레이어는 게임 경험을 최적화하기 위하여 죽음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죽음은 무엇이 올바른 플레이인지,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얼마나 성취하고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가늠하게 하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무수한 죽음을 거듭한 끝에 도달한 승리는 더욱 각별하게 느껴진다. 수백 번의 사망 끝에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의 보스를 쓰러뜨리는 유튜버의 영상을 관람하던 시청자들이, 그의 고투에 찬탄을 보내는 광경은 게임 스트리밍계에서 전율을 이끌어내는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플레이어의 여러 번의 죽음은 하나의 극적인 성공 장면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겪으며 성장한 플레이어는 고투를 이겨낸 실존적 주체로 긍정된다. <엘든 링>의 스토리텔링과 플레이를 결합해서 논의하려 한 장순호와 최지원은 파편적으로 주어진 세계와, 동시에 여러 죽음으로 산산조각 났던 경험을 수습하는 플레이어 주체를 실존적 인간 영웅으로 호명하기도 한다[2]. 더 강해진 플레이어, 더 숙련된 조작, 더 큰 보상으로 이어지는 속에서 죽음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순간의 죽음이 다음 플레이에서의 개선이라는 약속 아래 배치된다. 단적으로 ‘You Died’는 한국어권에서 여성 인명인 ‘유다희’를 환기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을 ‘유다희 양과의 데이트’라는 수식어로 소화하려는 충동을 인터넷 곳곳에서 포착해볼 수 있다. 이러한 수사는 죽음을 여성화된 대상으로 상정하고, 그와 데이트하는 남성적 주체로 플레이어를 위치시켜, 결국 죽음을 친숙하고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재현한다.

<The Dark Queen of Mortholme> - 2인칭의 ‘유다희’
이러한 서사를 반복적으로 마주하다 보면 게임에서의 죽음 자체를 좀 더 긍정해볼 수 없을까, 하는 물음이 남는다. 축적되는 죽음을 성장 자원으로 삼는다는 골조를 비트는 흥미로운 시도로 <The Dark Queen of Mortholme>를 꼽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게임은 소울라이크 게임에서 공략당하는 보스의 시점을 전면으로 배치해, 반복적인 살해와 피살의 구도를 뒤집어 본다. 보스를 조종하게 된 플레이어는, 아무리 죽여도 끝없이 돌아오는 용사를 계속해서 마주해야 한다. 용사는 죽음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장비, 파훼법, 스킬 따위를 들고 오며 플레이어를 압박한다. 이때 게임은 보스라는 2인칭 화자를 통해 1인칭의 용사를 시니컬하게 응시하는 구도를 택한다. 보스로서의 플레이어가 가질 수 있는 공격 패턴은 한정적이지만, 수없이 죽더라도 끝내 승리할 운명이 정해진 용사 사이의 권력관계는 비대칭적이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보스-플레이어의 구도를 다소 기계적으로 반전시키는 데에 머무른다. 아마도 플레이어를 가차 없이 살해하던 그 모든 매력적인 살해자들에게 끝끝내 품게 되고 마는 기이한 열락과 애착에서 착상되었을 이 게임의 기획은, 보스와 플레이어가 로맨스 가능한 관계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유다희 양과의 데이트’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구현한 게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The Dark Queen of Mortholme>에서 보스가 용사에게 유효한 죽음을 끌어낼 수 없게 되듯, 프롬 소프트웨어에서 죽음을 유도하는 주요한 방식들 또한 장르가 안착됨에 따라 익숙해져 갔다. 독 늪, 화염 피해, 즉사 기믹 등은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소울라이크 게임이라면 으레 있을 만한 것으로 예측 가능한 패턴이 된다. 이런 맥락 속에서 죽음은 더 잘 대응하고, 효율적으로 공략하기 위한 반복 자극으로 수렴되고 만다. 그런 한편으로는 미야자키 히데타카가 <다크소울1>을 만든 이후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려보게 된다. 그는 자사의 게임을 두고 ‘마조히즘적’이라고 표현한다[3]. 그 말에는 자사 게임이 고통을 주고 플레이어를 괴롭힌다는 의식뿐만 아니라, 죽음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틀리고도 기묘한 쾌감의 뉘앙스가 들어 있다. 그렇다면 숙달과 파훼의 문법 바깥, 실패와 파괴 자체에 조금 더 오래 머무를 수는 없을까?
이에 이번 글에서 삼 엥(Sam Eng)의 게임 <스케이트 스토리>를, 파괴되고 망가지는 경험을 즐기는 여정으로 재구성해 보려 한다. 유리와 고통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된 플레이어가 매 순간 넘어지고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그 경험을 성장의 내러티브로 환원하지 않는 방식에 주목해 보고 싶다. 그렇게 ‘퀴어한 실패’를 다루는 게임인 <스케이트 스토리>를 바라볼 것이다.
유리와 고통으로 이루어진 몸
“당신은 유리와 고통으로 만들어진 언더월드의 마귀입니다. 악마가 당신에게 스케이트보드를 주며 한 가지 거래를 했습니다. 보드를 타고 달로 가서 그것을 삼키면 자유를 주리라는 거래를 말입니다. ...필요한 건 오직 스케이트보드 뿐입니다.”[4]
<스케이트 스토리>의 진행 자체는 상당히 단순하다. 제목에 포함된 ‘스토리’라는 단어가 드러내듯, 이 게임은 플레이어를 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비교적 선형적인 어드벤처 게임이다. 사건의 연속체로서의 스토리는 특정한 방향성을 전제하고[5] 지옥에서 달로 향하는 운동 역시 단테적 상승의 메타포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구조는 구원과 도달, 위로의 상승이라는 지배적 가치와 잘 맞물린다. 가능한 한 넘어지지 않고 콤보를 최적화하여 피날레를 향해 부드럽게 전진한다면 이 게임의 엔딩을 쉬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플레이는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스케이트 스토리>의 후기를 보면, 영 어색한 좌우 조작감과 커맨드의 밋밋한 활용처에 대한 비판을 볼 수 있다. 많은 리뷰어들이 지적하듯 조작감은 어딘가 미끄럽게 느껴지고, 스케이트 운전의 감각은 끝내 손에 익지 않는다. 테크닉 커맨드를 익힌 뒤에도 그 사용처는 분명하게 요청되지 않는다. 모든 챕터의 피날레에서 플레이어는 달과 경주를 벌이지만, 이 구간은 3~5분 동안 연속 점수만 채우면 되는 단순한 구조에 가깝기에 숙련의 정점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체현하지 못한다.
그 결과 피날레는 종종 허탈한 감상으로 귀결된다. 이처럼 완벽히 통제되지 않는 조작감은 플레이어를 실패를 극복하는 주체로 영웅화하기보다, 언제나 다시 넘어지고, 산산이 부서질 수밖에 없는 유리 신체의 상태 속에 머무르게 한다. 더불어 사실적인 중력 구현은 스케이트보드의 조작을 한층 어렵게 만든다. 현실에 가까운 물리감이 몰입을 높이기도 하지만, 난해한 조작감으로 받아들여질 위험 또한 안고 있다. 속도가 올라갈수록 코너링의 난도가 함께 상승하며, 그 상태에서 킥플립이나 그라인드와 같은 다양한 기술 커맨드를 수행해야 하기에 이중의 도전이 된다[6]. 이렇게 중력에 밀착된 관계는 게임이 형상화하는 넘어짐–파괴의 경험을 극적으로 빚는다.
<스케이트 스토리>와 <사요나라 와일드 하츠>(2019)가 게임 오버를 어떻게 형상화하는지 비교한다면, 전자가 플레이어블 아바타가 파괴되는 감각을 극대화한다는 사실이 두드러진다. 두 작품은 인상적인 사운드트랙을 활용해 리듬 게임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플레이 메커니즘을 지닌다. 게임의 주인공들은 고정된 캐릭터로, 이들은 방이나 침대와 같은 내밀한 실내에서 외부로 뻗어가는 여정을 소화한다. 스테이지화된 시공간을 거쳐 가며 내면과 외면을 넘나드는 기행문적 체험을 공유한다.
한편 <사요나라 와일드 하츠>가 비행, 유영, 오토바이 운전 등 다양한 이동 방식을 통해 음악과 동기화되는 감정의 궤적을 그려낸다면, <스케이트 스토리>는 중력에 밀착된 감각, 즉 보드에서 미끄러지고 박살 나는 느낌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사요나라 와일드 하츠>에서 죽음은 장애물과 부딪히거나 투사체에 맞았을 때 화면을 암전시키고는 곧장 리셋하는 방식으로 처리된다. 반면 <스케이트 스토리>에서 죽음이 구현되는 방식은 복합적이다. 주인공인 유리 스케이터가 바닥을 구르는 연출은 훨씬 복잡하게 구현되었다. 일반적으로 카메라는 삼인칭의 시점에서 보드를 타는 스케이터의 등 뒤를 따라간다. 그러다 넘어지는 순간, 일인칭에 가깝게 급격히 당겨지고, 시야는 회전하며 바닥을 스친다.
제작자인 삼 엥은 이러한 연출이 스케이트보드 영상을 시청하다 보드에 탄 사람이 넘어질 때 카메라와 함께 시야가 튀고 회전하는 장면에서 영감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7]. 그는 이러한 움직임이 실제로 넘어졌을 때 느꼈던 순간적 감각과 겹친다고 말하며, 게임에서 이 시차적 충돌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디볼버 디지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개발 당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오피스로 이동하다 넘어진 탓에 한 손으로 코딩했던 일화를 나누기도 한다[8]. 이처럼 가상의 지옥이 빚어내는 낙상은 제작자의 일상과 유리되지 않은 채, 신체와 작업의 질감으로 녹아 있다.
이러한 대목을 마주하다 보면 앨리슨 케이퍼가 고안한 ‘불구의 시간’ 개념을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퀴어 시간성을 규범적 생애 리듬에서 벗어나, 어긋나고 비동시적으로 시간을 살아내는 경험의 양식이라고 할 때, 케이퍼는 그와 불구의 시간 사이 “잠재적으로 연결되거나 중첩되는 지점”을 추적하려 한다. 탈골과 같은 신체적 비유는 온전하게 배열된 몸으로부터 어긋난, 몸을 가로질러 나타나는 시간을 상상하게끔 한다[9]. 보드에서 떨어진 스케이터의 관절을 어긋나게 만들다 못해 산산이 깨트리는 <스케이트 스토리>는 탈골된 시간을 잠시 시각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닥을 나뒹구는 카메라의 시선은 넘어짐이라는 조건 속에서 새롭게 생성된 후천적 일인칭으로 전환된다. 그리하여 본래 쭉 뻗어나가야 할 삼인칭의 도로와 몸의 시야가 잠시 포개어지며, 게임 속 몸과 시간의 어긋남이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스케이터의 죽음은 우발적인 미끄러짐이 아니라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거듭 보는 장면이기도 하다. 유리와 고통으로 이루어진 언더월드의 마귀는 매끄럽고 반짝이며, 동시에 언제든 깨질 위기에 놓여 있다. 균형이 조금만 흐트러지거나 스킬 커맨드의 타이밍을 놓칠 경우 몸에는 금이 가고 부서진다. 애초부터 망가지게끔 설계된 존재에게 넘어지는 것은 예외적인 사고가 아니다. 오히려 항상-이미 스케이터에게 주어진 조건에 가깝다. 통상적으로 취약성은 다치지 않고 무사히 완주해야 한다는, 방어적인 플레이와 직결된다. 상처는 피해야 할 실패로, 파손은 잘못된 플레이의 결과다. 그러나 〈스케이트 스토리〉에서 유리 신체의 취약성은 되레 그 규범이 얼마나 달성 불가능한지 폭로하는 듯하다. 부서지도록 설계된 몸 위에서 ‘넘어져서는 안 된다’는 요구는 허약한 이상에 가깝다. 취약한 몸은 정상성의 기준을 추락시키고, 기준 자체의 깨지기 쉬운 성질을 드러낸다. 직선으로 순항해야 할 스토리의 시간은 전진을 종용하지만, 몸은 중력에 붙들린 채 미끄러지고 회전하며 흐름에서 이탈한다. 그렇게 구현된, 박살 난 유리 조각들이 큐빅의 파도처럼 바닥을 뒤덮으며 반짝이는 광경은 실패의 시각적 형상화이며 그 자체로 매혹적인 풍경이 된다.
게임이 구현하는 미성숙과 좌절의 경험은 바로 이러한 퀴어한 실패의 감각과 연결된다. 핼버스탬은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에서 퀴어한 실패를 통해 성공/실패의 이분법과 성장 서사, 완결과 성취를 향한 강박 자체를 무너뜨리자고 제안한다. 분명 실패는 불쾌한 경험이며, 핼버스탬은 그와 같은 지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바로 그 일련의 부정적 정동을 이용해 “우리 삶에서 해로운 긍정주의toxic positivity가 지닌 허점을 찾아”내자는 것이 이론의 정치적 기획이다. 실패는 “어둠, 무지, 미완성, 비능력, 파편성”에 머무르려는 선택이며, 이 선택이 “더 창조적이고, 더 협력적이며, 더 놀라운 존재 방식”을 열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10]. 보 루버그는 잭 핼버스탬의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 그리고 에스퍼 율의 『The Art of Failure』가 제목부터 상호 텍스트적 독서의 흥미를 자아냄에도 불구하고 두 저자가 서로를 전혀 참조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루버그는 둘을 연결하여 게임이 어떻게 실패를 유희적이고 즐거운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11]. 실패를 퀴어한 놀이의 양식으로 제안하는 루버그의 관점에서 보면 완벽한 숙련에 도달하지 못한 채, 어딘가 붕 떠 있는 <스케이트 스토리>의 플레이 경험은 퀴어한 실패의 감각을 조작과 진행의 과정에 걸쳐 퀴어한 실패의 감각을 조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패를 긍정하는 활기
플레이어는 유리 스케이터의 취약한 몸을 하나의 렌즈 삼아 그 파편이 흩뿌려진 바닥, 지저 세계를 더듬어 나가게 된다. 데굴데굴 구르며 바라보는 언더월드는 텅 비고 공허한 듯하면서도 기이한 활기가 가득한 공간이다. 핼버스탬은 미술 콜라주 작업을 독해하며 파편성에 대한 헌신을 강조한다. 깨뜨리고 자해하는 퍼포먼스는 반사회적 페미니즘의 미학을 구현하는데, 여기서 신체는 치유와 복구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부서져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신체는 부서지는 것을 통해 다른 관계와 정동을 여는 재료로 등장한다[12]. <스케이트 스토리>의 유리 신체는 깨짐을 통해 비둘기와 개구리, 철학자의 머리 따위가 NPC로 출현하는 언더월드와 친밀히 접속하는 매개가 된다. 그렇게 게임 속 뉴욕은, 그리고 실제 뉴욕과 그곳의 스케이트보딩 문화까지도 겹치며 읽히게 된다[13].

게임의 후반부에 이르면 <스케이트 스토리>는 스스로의 구성적 성질을 노출한다. 사탄의 계약이 영원히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없음을 깨달은 스케이터는 붕괴하고 만다. 플레이어는 온 사방에 흩날린 스케이터의 육신 조각을 하나둘씩 그러모으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도 스케이트보드는 못처럼 붙박인 이동기다. 분명 스케이트보드는 그를 지옥의 여정에 묶어 두는 규율 장치이자 애증의 대상이지만, 끝내 놓지 못하는 이동 수단이자 쾌락의 매개로 남아 있다. 파편난 육신이 점차 형태를 되찾아가는 동안, 스케이터는 지금까지 지나온 맵을 요약본처럼 다시 미끄러져 지나간다. 이어서 게임은 아예 프로그램이 세계를 렌더링하는 장면을 일종의 맵처럼 제시해 그 위를 달리게끔 한다. 이러한 자기 응시는 플레이 화면을 매끄러운 연속체가 아닌, 구성 요소를 이어붙인 콜라주처럼 이해하게 만든다. 깨진 유리 육신과 이미 플레이한 여정의 파편들을 재편집해 엮어내는 것이다. 파편성의 미학에 기대어, 이러한 연출을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재료로 배치해 보면 어떨까.
“어떻게 이 어렵고도 어이없는 일, 달을 먹는 짓을 할 수 있을까요? 왜 굳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려 할까요,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당신은 유리로 만들어졌는데,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요? 왜 굳이 그런 짓을 하려는 걸까요?” 삼 엥은 <스케이트 스토리>를 “어떻게 인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온 지난한 게임들의 역사 안에 배치한다[14]. 그에 대한 답을 성장 문법으로 재차 회수하고 싶진 않다. 되레 그러한 게임 속에서 붙들고 싶은 것은 ‘굳이’ 하는 ‘그런 짓’에 몰두하는, 그리고 몰두하게 하는 몸이다.
핼버스탬은 마조히스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마조히스트는 쾌락과 죽음 간의 해소될 수 없다고 가정된 긴장을 해소시키며 자아에 대한 관념을 고통과 상처의 소용돌이에 묶는다. 그는 일관성을 유지하길 거부하고, 죽음에 관한 지식에 맞서 스스로를 무장시키길 거부하고, 그 대신 완패당해 시공간과 욕망에 매인 몸이 되기를 자처한다.[15]”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언더월드를 배회하는 게임의 마지막 장면은, 완패를 수락하고서 지옥에 매인 몸이 되기를 자발적으로 택하는 것처럼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스케이트 스토리>의 나뒹구는 몸은, 일련의 게임들이 제공해 온 영웅적 회복의 판타지 바깥에서, 깨어진 상태에 머무르려는 몸의 고집을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서 긍정해 보도록 유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