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스트레인지 리얼’한 토요일 – 탑승형 시뮬레이터 게임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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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12. 10.

반다이 남코의 <에이스 컴뱃> 시리즈는 간명한 골자를 지닌다. 우수한 파일럿으로 내정된 주인공-플레이어가 전투기를 우수하게 조종하고 적을 사격하여 미션을 완수한다는 내용이다. 전개는 시네마틱과 게임 플레이가 번갈아 제시되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한편 시리즈의 브랜드 디렉터 코노 카즈토키는 플라이트 시뮬레이션이 아닌, 어디까지나 플라이트 슈팅으로서의 <에이스 컴뱃>을 강조한다[1]. 그와 같은 방점 찍기는 시뮬레이션이라고 천명했을 때의 어떤 경직성이나 엄격함을 다소 우회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슈팅이라는 표현은 어떻게 이를 우회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게임에서의 슈팅 장르가 무엇을 축약할지 관습적으로 합의해 온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HP로 일반화되는 피격, 단순화된 반동, 와중에 귓가를 멍멍하게 울리는 에픽한 사운드트랙 기타 등등… 물론 디지털 게임이 입력과 출력 사이의 복잡한 관계 맺기로 이루어진 만큼, 축약의 논리가 오직 슈팅 장르에서만 유달리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슈팅의 경우 그것이 차용해오는 이미지는 현실의 아우라를 끌어들임과 동시에 조작에서는 편의를 추구해야 했다(현대전을 재연하려 애쓰는 <콜 오브 듀티> 시리즈조차 훨씬 간결해진 조작을 제공한다). 그렇게 정립된 슈팅은 실상 재연이 아닌 형식에 가깝다.
<에이스 컴뱃>도 그와 같은 문법에 동조한다. 일인칭의 카메라 안에 구현된 콕핏 내부에서 조종간이나 계기판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를 제대로 읽어내지 않더라도 조작에 불편함이 없다. 기체가 구름을 통과하면 캐노피에 물방울이 맺히는 것과 같은 디테일이 있지만, 그 사실이 전투기의 작전 수행에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이 지점에서 <에이스 컴뱃>은 그들 스스로를 시뮬레이션으로 부르길 겸연쩍어하는 듯하다. 요컨대 코노 카즈토키의 말을 통해 상대적으로 시뮬레이터 장르의 위치를 헤아려봤을 때, 비약하지 않은 현실적인 무언가와 같은 인상이 환기된다. 팬들 역시도 시뮬레이터가 아닌 아케이드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 모사를 향한 <에이스 컴뱃>의 시도와 곤혹이 완전히 축소되지는 않는다. 2025년 지스타 컨퍼런스의 세션에서 청중 질의를 소화하던 코노 카즈토키는 시리즈의 근본적인 제약을 쓰게 웃으며 인정한다. 30년 간의 진보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 게임이 구름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구현했는지 거듭 되풀이하는 이유는, 실상 그 외에 발전사를 검토할 만한 인상적인 요소가 부족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RPG에서 관습적으로 유형화된 전투를 펼쳐놓을 수 있을 전장을 <에이스 컴뱃>은 채택할 수 없다. 게임이 스스로 의식하는 특유의 제약은 허황되지 않은 것, 현실적인 것을 구현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자신의 신체를 실제적으로 감각할 곳은 일인칭의 조종실인 만큼, 얼마나 조종 환경을 감각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가가 곧 몰입과 직결되기도 한다. 이는 탑승형 시뮬레이터에 대한 일반적 인식과도 어딘가 유사해 보인다.
한번 시뮬레이션이라는 용어 자체가 환기하는 범박한 인상을 그려볼 필요가 있다. 시뮬레이션이라고 하면 흔히 재현의 외피를 하나둘 벗겨낸 끝에 남는 순수한 조작의 모델을 떠올리게 된다. 탑승형 시뮬레이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탑승형 시뮬레이터는 현실에 적응하는 것을 목표로 엄격하게 설계되었다. 사용자가 어떤 환경에 투입되더라도 적절한 조작을 수행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세계 2차대전 당시 50만이 넘는 조종사를 훈련시켰다고도 추정되는 링크 트레이너는 훈련생의 조종석과 평가를 위한 외부 교관용 기록을 연동시킨 것과 더불어, 오르간의 공기 펌프를 응용해 비행 역학에서의 스핀이나 윈드 버펫팅을 인위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다[2]. 즉 시뮬레이터에서는 “현실의 가정에 기초하며, 사용 전에 반드시 검증 과정을 거쳐 현실 시스템의 행동을 예측하거나 재현할 수 있는지”가 주요한 화두가 된다. 이런 점에서 탑승형 시뮬레이터에 관해 이야기할 때 지속적으로 현실과의 모델 사이의 관계가 위계적으로 소환된다. 시뮬레이터가 가닿고자 하는 현실과, 시뮬레이터가 재현하는 모델 사이를 지속적으로 가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이 위계는 때때로 재미와 같은 가치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재생성된다. 2000년대 초에 제출된 한 연구는 시뮬레이션 게임과 훈련용 시뮬레이터를 구분하려 시도한다[3]. 개발자적 관점에서 저자들은 둘을 나누는 핵심적인 기준이 재미라고 주장한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재미를 발생시키기 위해 설계되지만, 시뮬레이터에서는 설령 재미가 발생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전자는 재미를 다하기 위해 특수한 목표나 가상적인 환경을 설정하여 플레이어로 하여금 이를 추구하게 만든다.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에서 플레이어는 트럭을 운전한다는 일차적인 조작 외에도 기업을 경영해야 하며, <월드 오브 워쉽>은 1차대전부터 냉전기에 이르는 20세기의 역사적 맥락을 결합한다. <마리오 카트>는 아예 <슈퍼 마리오>의 캐릭터들을 기수로 삼아 테마파크로서의 닌텐도를 재가공하고 단단하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게임들에는 종결 상태가 존재한다. 종결 상태란 적 진영을 말살하는 지령일 수도, 레이스에서 높은 순위를 갱신하는 도전일 수도 있다. 이는 (간접적인 형태로라도) 승리와 패배를 감각하게 만들며, 게임의 재미와도 깊숙하게 연동된다. 시뮬레이션 게임과 달리 훈련용 시뮬레이터의 전개는 시나리오에 기반한다. 현용 운전 시뮬레이터에서 제공하는 장내 기능 시험 주행이 대표적이다. 구체적인 기능시험장 환경을 조성하고 출발부터 도착까지의 상세한 요소를 구현한다. 사용자는 경사로, 직각 주차, 돌발과 같은 주요 항목을 올바르게 수행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사용자의 입장에서 재미란 언제든지 전도될 수 있는 것이다. 1994년 손갑철은 플라이트 시뮬레이션 입문서인 『컴퓨터 파일럿』을 출판한다. 서문에서 그는 비행 시뮬레이션이 어디까지나 “재미있는 게임”과 다르며, 숙달에 일종의 인고를 요한다고 밝힌다. 하이텔 시뮬레이션 게시판에서의 활동을 바탕으로 저술된, A4판형에 382페이지에 달하는 가이드라인인 이 책의 존재 자체가 “독자들 모두 비행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후술을 피상적인 격려로만은 읽히지 않게 만든다[4].
시뮬레이터가 지향하는 목적인 조작의 숙달 그 자체가 자아내는 재미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시스템 일체와 완전히 동기화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환희는 마치 소울라이크 게임에서 눈과 손의 협응이 완벽히 맞아떨어졌을 때 환기되는 쾌감과 흡사하다. 그리고 이 숙달을 둘러싸고 동원되는 맥락, 외피, 픽션은 결국 플레이와 함께 얽히며 서로의 경계를 뒤흔든다.
더불어 조작에 숙달한 플레이어가 매개될 수 있는 가상적 환경이 점점 정교해질 때, 뒤얽힘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한국이나 인도와 같은 지역을 구현한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2>의 모드는 유럽이 아닌 장소 맥락을 정교하게 부연한다. 비크나쉬바란 나라야나사미의 연구는 가정용 컴퓨터의 연산력이 훨씬 향상됨에 따라 전문화된 영역에서나 활용되던 시뮬레이션이 보다 친숙한 외피를 쓰고 가정용 컴퓨터에서 구동하게 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개인용 PC의 연산력이 강화함에 따라 더 이상 둘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발흥한 것이다. 하지만 연구가 제출된 시점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시차를 둔 현재의 시점에서, 혹은 그보다 더 멀리, 자원에 구애받지 않고 무언가를 제한 없이 시뮬레이트할 수 있는 일종의 특이점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듀나의 소설 『제저벨』은 위의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이다. 이 소설집에서 구체화된 ‘링커 우주 세계관’은 온 우주에 퍼진 링커 바이러스로 인해 생물 개체의 유전적 안정성이 마구 뒤흔들린다는 설정이다. 그 불안정성을 토대로 후천적으로 습득한 형질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을 독특하게 만든다. 문화적 형질 역시 재생산될 수 있는 탓이다. 작중 토요일이라는 이름의 대륙은 흥미로운 장소로 격상된다. “은하계 곳곳에서 몰려온 밀리터리광들”이 토요일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 전차전을 재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로 여기며 “당시 무기들을 생산하는 자궁들을 들여”왔다. 마치 탑승형 시뮬레이션의 가상성을 극대화한 것처럼 읽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작품의 소설이 단언하듯, “오로지 놀이만을 하는 자들에게 놀이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삶이다. 역사이다. 우주이다.” 어느 순간 놀이와 현실의 관계는 도치된다. 사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일어났던 실제 역사적 사건을 충실하게 재현”한다는 토요일 대륙의 제1의 목표부터 이미 유희적 목적에 포섭되어 있지 않은가?[5] 토요일에서 벌어지는 모의전의 참가자들이 “진짜 전쟁”을 원했다고 하지만 그게 “놀이일 수만은 없는” 바로 그 “놀이” 그 자체가 아닐 이유도 없지 않은가? 자궁들은 실제 전쟁이 흘러간 달력에 맞추어 고증에 알맞은 무기를 뽑아냄으로써 특정한 플레이 행위 양식을 창출한다. 여기에 참가자들의 몰입에의 의지, 역사적 감수성 따위가 한 데 결합해 반복과 지연을 일삼는다. 되풀이되는 전쟁-놀이의 사이클 안에서 사람들은 자기 진영의 자궁에 사료라고 불릴 법한 고철들을 되먹인다. 최종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사료의 디테일로 침잠한 ‘역덕’들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대체 역사적 감각이다. 이처럼 『제저벨』에서는 게임과 현실의 도치가 직접적으로 이뤄지는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여기 작용자의 심상과 현실을 매개해 주는 지렛대로 기능하는 것이 전차-자궁이라는 시뮬레이터다.
시뮬레이터는 단지 메커닉의 정교함만을 향해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픽션 그 자체를 향해 수렴하기도 한다. <에이스 컴뱃>이 그들의 가상 세계관을 ‘스트레인지 리얼’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퍽 흥미롭다. 나름의 설득력 있는 현실감 있는 조종은 슈팅의 형식 안에 놓아둔 반면, 픽션 세계관을 ‘리얼’로 명명하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도치는 아무리 사실적인 시뮬레이터라 하더라도 어느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밧심이나 이바오 같은 가상 항공 네트워크에서 트래픽이 활발하게 교환되듯 이미 모델화된 현실이 픽션으로 치닫는 순간들, 거기에서 탑승형 시뮬레이터의 고유한 재미가 발생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