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라는 기억, 죽음이라는 기록 : 『리턴 오브 디 오브라 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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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6. 8. 10.
시각 매체와 기억은 좀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관계를 가진다. 시각 매체에는 ‘보여준다’는 명백한 전제가 있다. 하지만 기억은 ‘떠올릴’ 뿐 명백한 형태로 ‘본다’고 말하지는 못하는 대상이다. 기억은 언제나 어렴풋한 형태, 몽글몽글한 이미지가 되어 머릿속을 잠시 스쳐갈 뿐이다. 이 관계는 단순히 감각의 문제만이 아니다. 기억과 정확성의 관계 역시도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우리의 기억은 물리 매체의 형식처럼 단정히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은 섞이고, 풍화되고, 왜곡된다. ‘명백한 기억’이란 단어는 그렇게 쉽게 발화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기억은 구체성이 있는 ‘단단한 물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이 (비디오 게임을 포함한) 시각 매체가 기억의 작동을 혼동시키는 근거가 된다. 영화의 ‘플래시백’이라는 형식은 기억의 작동이 마치 ‘있는 그대로 시각적으로 재현되는 것’인양 받아들이게 만든다. 특별한 첨언이 없는 한, 플래시백이 재생되는 그 순간부터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영상은 당위적으로 사실인 것이 된다. 그리고 이 관계에는 장치적 맥락이 들어서 있다. 시각 매체의 기억의 작동은 마치 우리의 기억이 그들의 장치 구조와 동위에 있다는 듯이 구는 측면이 있다. 기억을 불러일으킬 만한 장치가 스위치를 넣으면, 재생되듯 눈 앞에 펼쳐진다. 이 방식의 기억은 기록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 이는 기억과 기록을 구분하지 않는 태도다.
루카스 포프의 『리턴 오브 디 오브라 딘』(이하 『오브라 딘』)은 이런 현상을 보이는 가장 대표적인 비디오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은 19세기 초의 보험조사원이 생존자 없이 돌아온 배 ‘오브라 딘 호’의 조사를 맡으며 시작된다. 의뢰주인 헨리 에반스로부터 비어있는 일지와 함께 회중시계 ‘메멘토 모르템(Memento Mortem)’을 받은 주인공은 죽음의 흔적으로부터 ‘죽음의 순간’을 살펴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를 통해 각 선원들의 죽음을 살피고, 그들의 이름과 사망 원인으로 일지를 채우는 것이 목표가 된다.

* 메멘토 모르템(Memento Mortem)은 ‘죽음이라는 사건을 기억하라’에 가까운 의미다.
이 회중시계는 기억의 재생에 대한 명백한 장치적 매개물이다. 포프의 이 구상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기억을 일종의 재생되고 고정된 단단한 무언가로 인식하도록 만든다. 『오브라 딘』이 재생하는 기억은 전적으로 시공간적으로 고정된 디오라마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플레이어는 고정된 기억의 세계 사이를 제약없이 거닐며 ‘사건의 한복판(in media res)’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다. 마치 밀랍인형관이나 생활사 박물관처럼 보이는 이 형식에선 ‘기억’이 가진 본질적 물렁함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억과 결부되어 명백히 거론되어야 하는 질문이 있음에도, 플레이어들은 좀처럼 접촉하지 못한다. 과연 이 도구가 재현하는 이 기억은 진실인가? 장치의 기능이 어떠한 왜곡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없는가? 왜 이러한 질문을 금세 건너뛰며 이 풍경을 명백한 것으로 이해하도록 만드는가?
비디오게임의 ‘단단한 기억’은 영화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단언된 명백함을 가진다. 요는 기억을 식별하는 과정에 있다. 예를 들어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처럼, 영화 전체를 거대한 플래시백으로 구성하는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영화가 투사하는 기억들을 전부 부정해보자. 물론 그렇게 받아들이는 순간 감상으로부터 획득한 감동이나 주제 따위는 모두 해체되어버리긴 할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불쾌함을 느낄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시도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 않을까? 실제로는 잭과 로즈가 심각하게 대립하는 사이였고 로즈가 잭을 밀치고 배에 탔다고 한들, 누가 그것을 확인시켜줄 것인가? 『타이타닉』을 사랑하는 다른 관객과 언쟁은 발생할지언정 그 누구도 이 ‘오도된 기억의 가능성’에 대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선언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방식의 주장이 가능한 것은 팀 버튼의 『빅 피쉬』나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플래시백 자체가 호도되었을 가능성을 전제하는 영화들이 있기 때문이다. 앞선 영화들과 이들 사이에는 의심의 가능성이 서사적으로 제시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 플래시백 자체의 편집 방식에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1].
하지만 『오브라 딘』은 ‘명백한 정답의 진실’을 전제한다. 플레이어는 획득한 단서를 기반으로 선원의 이름과 사인을 일지에 적어넣으며, 게임 메커닉은 이 기술의 정답 여부를 판별한다. (정답이 3개 누적될 때마다 판정이 이루어지며 확정된 정답은 수정이 불가능하다.) 즉 게임은 진실에 대한 의문으로 빠지기 전에 이미 그 여부를 선험적으로 확정시켜주고 있는 셈이다. 답이 있는 과거라는 측면에서 『오브라딘』은 기억의 단단함을 여전히 추종한다. 기억은 재생 가능한 것이며, 그 안에 오류의 가능성은 없다.
특히 『오브라 딘』의 이러한 기억-재생 메커니즘과 유사한 메커닉을 가진 게임들 사이에서 나오는 공통점은 이 기억의 단단함에 더 깊은 의문을 제시한다. 풀브라이트의 『타코마』와 KeokeN 인터랙티브의 『딜리버 어스 더 문』은 『오브라 딘』과 유사한 기억-재생 메커니즘을 다룬다. 두 SF 테마의 게임은 공교롭게도 ‘홀로그램식 녹화-재생 장치’라는 같은 설정을 공유한다. 이를 통해 이미 비어버린 우주 스테이션과 달기지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다시금 구축해나가게 된다. 이 때, 이 두 게임의 주인공은 『오브라 딘』의 주인공과 유사한 위치에 선다. 『타코마』는 타코마 스테이션의 소유주인 ‘벤투리스 사’에서 파견된 사원으로 스테이션의 미응답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 『딜리버 어스 더 문』 역시 마찬가지로 세계 우주 위원회의 조사 요원이 되어 연락이 끊긴 달 기지의 상황을 확인해야 한다. 세 게임은 모두 특정한 기업 혹은 기관으로부터 조사의 명령을 받고 파견된 존재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전적으로 (자본 또는 에너지라는) 경제적 맥락을 등에 안고서 투입된다. 게임들의 목표는 이들이 재현하는 기억의 구체성, 그러니까 ‘단단함’과 모종의 연결을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물렁한 기억의 게임들
잠시 이 단단함과 차별된 기억의 게임들을 체크해봐도 좋을듯 하다. 대표적으로 돈노드 엔터테인먼트의 『텔 미 와이』와 자이언트 스패로우의 『왓 리메인즈 오브 에디스 핀치』(이하 『에디스 핀치』)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이 두 게임은 앞서 제시한 게임들과 달리 기억이 가진 ‘물렁함’을 상당히 다룬다. 『텔 미 와이』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오랜만에 방문한 집에서 어머니와의 기억의 잔류를 본다. 이 환영은 주인공인 두 쌍둥이(타일러와 알리슨)가 가지고 있는 초자연적 감각의 결과물로 제시된다. 타일러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던 어머니에 대한 나쁜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만,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그 기억이 정확하지 않음을 깨달아간다. 물론 『텔 미 와이』가 재생하는 기억의 환영은 여전히 일정량 ‘단단함’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게임이 가지고 있는 태도는 기억이라는 형식 자체가 가진 불완전함이다. 기억은 그것을 둘러싼 환경과의 복잡한 관계에서 진실을 생성해낸다. 타일러의 여정은 어떤 면에선 『오브라 딘』의 명제에 대한 재고와도 같다. 기억은 그 자체로 진실을 수반하는가? 타일러의 여정은 그것이 점진적으로 파괴되어가는 과정과 다름이 없다.

* 『텔 미 와이』
『에디스 핀치』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주인공 에디스 핀치는 어머니가 남긴 기록을 따라 어머니가 어릴 적 살던 집을 찾아간다. 각 가족 구성원이 기묘한 죽음을 맞이한 이 집에서, 에디스는 가족들이 겪었던 일들을 다양한 감각적 방식으로 회상한다. 『에디스 핀치』의 감각은 마술적 리얼리즘과도 같다. 주인공 에디스는 가족들의 기록을 통해 그들이 겪은 ‘사건’을 비현실적인 논조로 재체험한다. 동물이 되거나 만화책의 주인공이 되거나, 혹은 당사자가 겪은 상상 그대로의 동화적인 세계를 경험하기도 한다. 『에디스 핀치』의 경험에서 진실은 감각적이다. 에디스는 그들의 과거를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감각의 정수만을 우회해 체험한다. 에디스의 몸을 경유해 플레이어가 인식하는 것은 기록된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느꼈을 자유, 혼란, 고통, 외로움 등으로 갈무리된 무언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게임 내부에 명백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표현은 기록된 감각에 대한 에디스의 상상적 전이일 뿐이다.
이 두 게임에서 기억을 추종하는 두 인물은 모두 가족사의 문제들과 결부된다. 이들의 문제는 전적으로 사적이며, 기억이 생성하는 가치는 앞으로의 삶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이들에게 있어서 과거는 기록이 되지 않고 온전한 ‘기억’으로 보존된다. 이 ‘기억’이란 기록의 구체성을 가지지 않은 과거를 말한다. 앞서 제시한 물렁함을 담지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 ‘기억’들이 우리 경험의 기억과 더 가깝지 않은가? 마이클 알메레이다는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할 때, 우리는 그 원본이 아니라 가장 최근의 기억을 떠올린다.”라는 대사를 삽입하기도 했다. 기억의 가치는 그것을 떠올리는 시기의 주관적 렌즈를 통해 전회로 수용됨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다.
왜 그 기억은 기록이 되는가?
그렇다면 다시 『오브라 딘』의 경우로 되돌아가보자. 이 게임은 왜 ‘단단한 기억’을 그 매개로 사용하고 있는가? 이는 앞서 설명했듯 이 게임의 전제가 필요로 하는 것이 ‘기록이 되어야 할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코마』와 『딜리버 어스 더 문』 모두 (『텔 미 와이』나 『에디스 핀치』와 달리) 기록을 통해서 달성해야 하는 ‘공적인’ 의무가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공적인 의무란 전적으로 경제적-또는 생산적 문제와 결부된다. 올바른 값을 책정하기 위해, 생산성의 정상화를 위해.
『오브라 딘』과 기억의 관계에는 결국 계산 가능성이라는 구체성의 매개가 끼어든다. 기록은 기억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 바꾼 변질된 포맷이며, 계산 가능성은 비디오 게임의 운명론적 도달지점이다. 이 조건은 『오브라 딘』의 아트가 왜 1비트 디더링 이미지여야만 했는지를 말해준다. 비트는 컴퓨팅의 가장 미시적인 단위다. 『오브라 딘』의 배경인 죽음의 선상은 처음부터 Y/N이라는 비트로 결정지어진 ‘셈할 수 있는(digitable)’ 공간으로 제시된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논의가 끝날리가 없다. 『오브라 딘』을 냉정한 보험사 시뮬레이션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니까. 흥미로운 사실은 『오브라 딘』을 비롯해 『타코마』와 『딜리버 어스 더 문』은 모두 이러한 ‘셈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의문과 저항을 남기며 끝낸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 세계 내부에서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추종을 그리는 『타코마』, 『딜리버 어스 더 문』과 달리 『오브라 딘』은 훨씬 더 냉정한 태도를 취한다. 이 게임에는 ‘주인공’으로 제시된 인물의 상황에 대한 해석과 태도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주인공이라는 껍데기를 통해 결국 이 모든 불온한 죽음을 그저 보험료로 책정해 보고서로 올리는 건조한 결말을 지켜보게 된다. 《A.V. Club》의 단테 더글라스(Dante Douglas)는 이러한 엔딩을 두고 ‘의미가 소거된 폭력(violence cleansed of meaning)’이라고 말한다[2]. 플레이어가 직접 목도한 참혹한 죽음에 대해 추모도, 애도도 시도하지 못한 채 그저 건조한 보고서로 환원시키는 구조 자체가 (동인도회사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적 냉혹함을 체감시킨다는 것이 더글라스의 논지다. 멜리사 케이건(Mellisa Kagen) 역시도 자신의 저서 『원더링 게임즈』에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이 최종 집계는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지만, 플레이어들은 각 기록이 담고 있는 제한적인 진실 앞에서 움찔하게 된다. 각자의 운명과 행동에 대해 쓰인 몇 마디 말로는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각각의 죽음에 부여된 금전적 가치 역시 완전히 틀린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듯 이례적이고 환상적인 사건들을 그토록 차가운 계산과 제한적인 표기법으로 회계 처리한다는 개념 자체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부정확해 보인다[3]"

* 결국 모든 죽음은 건조한 배상 청구액으로 환원될 뿐이다.
『오브라 딘』은 장치적으로 재현되는 단단한 기억의 문제로 시작한다. 게임의 유려한 플레이 구조는 이 오도된 기억 규정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깊게 몰입시킨다. 그 과정에서 ‘왜 이 기억을 진실이라 단언할 수 있는가’라는 가장 보편적인 질문으로부터 강하게 차단된다. 하지만 그것이 훨씬 더 단단한 ‘기록물’로 환원될 때, 플레이어는 기억과 기록 사이의 가혹한 단차에 강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이, ‘기록으로서의 기억’이라는 근간 자체에 대한 미묘한 뉘앙스를 인지시킨다. 그저 단단하게 고정된 기억의 디오라마를 무감하게 돌아다니는 조사원의 시선은 대체 뭐였던 것인가?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은 채, 그저 장부에 올바른 수치를 적어낼 뿐인 것인가? 결국 게임을 플레이하며 감각한 나(=플레이어)의 ‘기억’은 게임 세계 내부에선 그저 보고서라는 냉정한 ‘기록’으로 축소되어 버릴 뿐인가?
발터 벤야민은 「발굴과 기억」에서 기억을 ‘지나간 것을 알아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저 매개물(medium)’이라고 했다[4]. 이것이 우리가 현실에서 느끼는 기억에 대한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현실은 벤야민의 의도를 역전해 기억을 도구화해버리곤 한다. 그 가혹함 또는 냉정함은 공유된 목적주의를 통해 쉽게 완화되어버린다. 때로 그렇게 사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당위의 언어’로서의 기억. 하지만 그 당위가 지속적으로 세계를 축소해나갈 때, 그러니까 Y냐 N이냐라는 비트의 문제까지 좁혀져버리고 나서야,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되어감을 느끼게 된다. 『오브라 딘』은 결국 기억의 게임이다. 그야말로 ‘죽음이라는 사건을 기억하라(memento mortem)’는 그 단어 그대로다. 그렇게 죽음이라는 사건(mortem)이 축소 불가능할만치 건조해지면, 그제서야 그 디오라마같던 장면으로부터 그 생동을 상상하고 역체감하길 바라게된다. 그런 측면에서 『오브라 딘』이 기억을 이용하는 방법은 물렁한 기억의 『텔 미 와이』와 유사하지 않은가? 다만 『오브라 딘』이 동원하는 건 디제이시스 내부의 다른 조건들이 아닌 것 뿐이다. 그보다는 수많은 죽음의 풍광들 사이를 거닐며 욕망과 열망과 음울함을 느낀 플레이어 자신의 감각을 기억의 여타 조건으로 삼는다.
따라서 회중시계의 이름은 플레이어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령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기억하라(memento mortem). 그리고 기억하기 위해, 죽음이라는 개념을 상상하라. ‘기록’될 죽음 위에서 죽음의 ‘기억’을 상기하라. 그러므로 결국, 죽음의 장면(mortem)이 아닌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이 명령은 게임 밖 우리 세계를 지향하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세계에 흩뿌려진 모든 죽음의 기록으로부터도, 기억을 되새기라는 의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