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퍼즐 상자: 〈애니멀 웰〉과 〈리프 이어〉의 세계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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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6. 10.
다시 들어가며
이 글은 《게임제너레이션》 20호에 실린 「기계장치의 우주: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의 불능감에 대해」의 후속편으로, 지난 글의 결론부에서 언급만 하고 넘어갔던 장르명인 ‘메트로브레이니아(metroidbrainia)’에 대한 논지를 심화해 〈애니멀 웰 (Animal Well, 2024)〉과 〈리프 이어 (Leap Year, 2024)〉를 뜯어보는 것이 목표다. 그러므로 우선 곧장, 메트로브레이니아가 무엇인지를 정리하며 글을 열겠다.
지난번에 잠시 언급했듯, 이 단어는 선구적인 《슈퍼 메트로이드 (Super Metroid, 1994)》와 그 영향을 받은 《악마성 드라큘라 X 월하의 야상곡 (Castlevania: Symphony of the Night, 1997)》의 합성어인 ‘메트로배니아(metroidvania)’에 ‘브레인(brain)’을 집어넣은 말장난이다. 일종의 내부자용 농담 같은 이 단어에 대해 게임 저널리스트 케이트 그레이는 「대관절 메트로브레이니아가 뭐야?」라고 물어보는 글[1]에서 《메트로이드》가 뭐고 《캐슬배니아》란 또 무엇인지부터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이런 작명이 “기이할 정도로 도움이 되지 않고, 기계적이고 자기 참조적”이라고 비판한다. 대신에, 그는 자신과 동료가 고안한 ‘지식 노드 퍼즐(knowledge node puzzle)’과 ‘정보 게임(information game)’이라는 훨씬 직관적인 표현을 통해 “정보의 획득이 목표고, 이미 얻은 정보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이를 해내”며 그를 위해 “정보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감춰서, 세계와 그 구조에 대한 플레이어 본인의 이해력을 통해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내는” 유형의 게임들을 묶고자 한다.
이렇게 지식·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레이의 접근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런 유형을 정의 내리며 플레이어의 경험과 그에 딸려 오는 (고고학자나 탐정 같은) 어떠한 기분 또한 중대하게 언급한다는 것이다: “게임은 (마치 역사처럼) 당신보다 앞서서 펼쳐져 있고, 당신은 정말 무엇도 바꿀 수 없을 뿐, 그저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다.” 이런 설명을 지난 글과 연결 짓자면, 〈아우터 와일즈〉와 〈레인 월드〉는 각각 태양계와 생태계의 법칙을 그 임의성까지도 어느 정도 포함해 모의하며 플레이어에게 “우리-없는-세계”[2]한복판에 떨어진 기분을 제공했을 테다.
비밀스러운 세계와 그 벽들[3]: 메트로배니아와 메트로브레이니아에 대해
그렇지만, 나는 메트로브레이니아에서 플레이어가 숨겨진 지식·정보를 차근차근 연결 짓고 이해하도록 하는 진행이 중요한 만큼 메트로배니아적인 특성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레이의 문장대로 “게임이 거의 마치 당신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당신은 그저 이를 발견했을 뿐”인, 세계에 대한 플레이어의 불능(감)을 고전적인 메트로배니아 장르를 활용하면서도 충분히 추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메트로배니아의 ‘불변하는 매력’이 대관절 무엇인지를 여러 게임 제작자에게 물어보는 인터뷰[4]에서, 많은 이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맵 속에서 필요한 아이템을 찾거나 역추적을 해야만 극복할 수 있는 방해물로 이뤄진 사이드 스크롤링 액션-어드벤처”의 구조가 특정한 플레이 경험을 생성한다고 밝힌다.
이 경험은 대개 새로운 이동기나 공격기를 얻으며 성장하는 플레이어의 주체적인 행위성과 관련되어 있다. 플레이어가 주어진 세계를 익혀나가고 그에 익숙해지는 분투가 그 세계를 무대 삼은 서사로 이어지는 진행 과정의 등치를 통해 “그저 사건들의 정해진 순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그 사건들을 (어떤 경우에는 항상 같은 순서도 아니게) 일으키는 기분”과 “다수의 방식으로 탐험 준비를 마친 거대한 맥락 속에 플레이어가 들어간 인상을 (심지어 그 인상이 거짓일지라도) 선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술한 메트로배니아 고전들의 주동 인물이자 플레이어 캐릭터인 사무스와 알루카드부터 플레이어의 숙련에 따라 각종 파워 업을 얻고 장비 세트를 되찾으며 강해지고, 결국엔 제베스 행성에서 마더 브레인을 또 악마성에서 드라큘라를 물리친다.
그러니 아무리 거대한 맵을 헤매거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밀리더라도, 끝에 가면 이들을 제어하는 플레이어가 작중 서사의 중심이 된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할 테다[5]. 다시 말해, 메트로배니아는 거대하게 연결된 세계를 탐험하며 성장하는 플레이를 작중 서사의 전반적인 진행과 일치시켜, 플레이어가 주어진 사건과 맥락 속에서 인과나 행위력을 출중히 발휘하는 전능(감)을 고양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메트로배니아의 전제에서 출발해,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비인격적이고 무심한 우리-없는-세계에 직면하려는 시도”[6]를 상상해 본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플레이어가 세계의 구조나 비밀을 알아가는 과정이 그 상위의 맥락이나 사건에 직접적인 인과를 발휘하지 않으면서 등치가 어긋나는 식으로 말이다. (다시 지난 글을 되짚자면, 〈아우터 와일즈〉의 결말은 화로인의 ‘관측’이 가히 우주적인 힘을 발휘하도록 인과를 극적으로 연결 짓는 한편, 〈레인 월드〉의 결말은 슬러그캣의 귀결이 그가 뒤로 한 세계에 큰 인과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스킬 및 아이템의 해금이나 레벨·파워 업 같은 중대한 게임적 요소를 그보다 덜 게임적일 지식·정보의 획득 및 연결로 치환할 때,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진행의 감각은 모호하게 흐트러지면서 전능(감)에 불능(감)이 흘러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는다. 그렇다면, 메트로브레이니아를 규칙이 고정된 장르보다는 플레이어가 지식·정보를 매개로 게임 속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으로 이해해 보자. 주어진 지식과 정보를 알맞은 방식으로 연결 짓자 “필연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으며, 숨겨지고 은닉된 채 남겨진”[7]듯한 세계의 비밀이 드러나는 메트로브레이니아적인 작동법은 플레이어의 진행을 쉽게 수량화하거나 가시화할 수 없도록 하며, 세계의 인과가 오로지 플레이어의 행위성에만 연동되지 않는다는 점도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메트로브레이니아 유형의 게임들은 다른 경우들보다 불능(감)이 우선 두드러질 수도 있겠지만,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해 플레이어에게 모르는 의미나 숨은 비밀을 알아차릴 때의 짜릿한 전능(감)을 효과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 메트로브레이니아를 메트로배니아에서 구분 짓는 특성이 바로 이것이라고 둘 수도 있겠고 말이다.
이와 더불어, 앞서 인용한 메트로배니아의 정의에서 특히나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연속적으로 이어진 맵’이라는 특성이다. 유기적으로 짜여 역추적과 그를 통한 새로운 지역의 개방이 가능한 메트로배니아의 세계가 여타의 2D 플랫포머가 제시하는 세계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성훈의 논의[8]를 빌려오자면, 각 스테이지가 선형적으로 진행되고 스테이지끼리도 선형적으로 연계되곤 하는 2D 플랫포머들은 “이차원적인 움직임으로서의 전진에 대한 비평을 게임 내적인 논리에서 마련한다. 그 비평은 특히 게임이 제공하는 최후의 조우와 최후의 공간을 중첩하는 방식에 따라서 특유의 완결된 형식미를 갖춘다.” 곧 일반적인 2D 플랫포머에서 제시되는 세계란 시작에서 끝으로 향하는 경로 자체로, 그 일직선 구조를 반영하듯 “명쾌하고 명료하며 직선적인 이야기는 한편으로 스테이지 간의 근원적인 단절을 숨기고, 좌우로 길게 봉합된 스테이지의 연쇄를 통과하며 전진하고 있단 환상을 유지한다.”
이러한 2D 플랫포머의 세계에서 일직선 공간의 끄트머리는 ‘최종장’이라 비유되듯 플레이 전반의 마무리와도 자연스레 겹친다. 선형적인 경로의 마지막 칸에 닿으면, 그 세계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완결이 나는 셈이다. 이에 비해 메트로배니아가 제시하는 세계는 플레이어의 방문 순서가 느슨하게 짜이는 등 다른 2D 플랫포머에 비해 훨씬 비선형적이고, 그런 만큼 주어진 세계의 ‘최종장’이 아니라 중심부에서부터 훨씬 더 멀리 떨어진 ‘변방’을 향해 탐험하며 이동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나가는 플레이를 제공한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주어진 세계의 끄트머리에 닿더라도, 이는 서사 전반의 마무리로 직결되며 플레이의 공간과 시간을 겹치지는 않는다.
이런 특성을 통해 다른 2D 플랫포머에 비해 메트로배니아에서는 세계가 자기 완결적으로 닫혀 있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할 수가 있다. 「최종장과 변방」에서 3D 오픈 월드의 세계로 설명하듯, “이곳이 곧 끝이지만, 게임 내적으로 이곳이 곧 끝이라고 선언되어서는 안 된다는 역설. 경계 부근은 열린 세계의 닫힌 지역이라는 점에서 오픈 월드의 모순이 격화되는 장소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본론에서는 기본적으론 2D 플랫포머인 〈애니멀 웰〉과 〈리프 이어〉를 중심으로, 퍼즐 상자 같은 세계가 제 비밀을 드러내는 메트로배니아적인 동시에 메트로브레이니아적인 특성을 짚겠다.
닫힌 세계와 그 겹들: 〈애니멀 웰〉에 대해
〈애니멀 웰〉의 1인 제작자 빌리 배쏘(Billy Basso)는 비밀이 겹겹(layer)으로 숨겨져 있다는 단골 문구로 이 게임을 소개하곤 하는데, 이 겹겹의 비밀은 크고 작은 플랫포밍 퍼즐과 얼기설기 엮인 채 가로세로 16칸씩으로 이뤄진 세계의 전반적인 형상과 함께 차차 밝혀지도록 짜여있다. 첫 겹에서는 평범한 2D 플랫포머에 가깝게 진행하며 결말을 보았다면, 두 번째 겹에서는 세계 곳곳에 숨어 있는 듯한 달걀들을 전부 찾아내고, 심지어 그보다도 더 숨겨진 겹을 향해 토끼 굴을 파고 내려가는 식으로.
이 세계를 돌아다니는 자그마한 덩어리인 플레이어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얻은 장난감들을 통해 이 세계에 주어진 다양한 퍼즐 및 겹겹의 비밀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익혀나간다. 〈애니멀 웰〉의 핵심이라 할만한 이 장난감들은 거의 다 둘 이상의 쓰임새를 가지는데, 이는 종종 플레이어가 세계를 좀 더 능숙히 이동하도록 돕는 동시에 각종 지식·정보를 제시하며 전능(감)의 조건들을 짜맞춘다. 이를테면 원반으로 개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한편 원거리에서 날려 레버를 조작하거나 몇 오브젝트를 부술 수도 있고, 심지어는 플레이어 캐릭터가 올라타 방을 가로질러 날아갈 수도 있는 식으로.
이런 유용한 장난감들을 도구 삼아 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식이 늘어날수록, 플레이어가 돌아다닐 수 있는 스테이지의 범위 또한 넓어진다. 중앙에서부터 출발하는 지도를 (첫 번째 겹의 공략 목표인 네 개의 불빛이 위치한) 변방으로 밝혀가면서 이 세계를 구석구석 탐험하는 진행은 방마다 주어진 플랫포밍 퍼즐 외에도 더 큰 규모의 퍼즐로 향하는 단서나 그보다도 훨씬 깊숙하게 숨겨진 비밀의 존재를 알아차려 가는 공략 전반과 자연스레 겹친다. 그렇게 자신이 획득한 지식·정보가 장난감들이 그렇듯 복수의 의미와 용도를 지닌다는 점을 깨달은 플레이어는 단서들을 알맞게 연결하며 이 퍼즐 상자 같은 세계의 조작법을 익히고 그에 익숙해지는 전능감을 얻는다.
(배경에 서 있는 동상이나 측면으로 난 동물 머리 같은 시각적 요소에서도 〈슈퍼 메트로이드〉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듯) 메트로배니아의 기본 공식에 꽤 충실한 만큼, 〈애니멀 웰〉은 관습적인 장르 공식을 뒤틀어 제 나름의 메트로브레이니아적인 특성들을 덧붙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게임의 또 다른 홍보 문구인 ‘전투 없는 메트로배니아’가 지시하듯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공격기 자체를 제거했다는 점이 그렇다.
플레이어에게 기초적인 행위성과 그에 따른 전능(감)을 부여하곤 하는 전투가 없다는 점에서 〈애니멀 웰〉은 무시무시한 타조나 캥거루 등에 맞서지 못하는 불능(감)을 키우는 편이며, 그외에도 우물 곳곳에 거주하는 수많은 동물이 이 자그마한 덩어리에 종종 호전적이거나 대개 무심하다는 점 또한 다시금 이 세계가 플레이어 당신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는 ‘우리-없는-세계’의 기분을 가중한다. 그러나 〈애니멀 웰〉의 세계는 (〈아우터 와일즈〉의 태양계나 〈레인 월드〉의 생태계가 시험하는 만큼의)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그가 온갖 지식·정보와 비밀을 수집해 해결하도록 만들어진 퍼즐 상자에 가까운 만큼, 여전히 어느 정도는 대개의 게임이 그런 만큼 “우리에-대한-세계”[9]이기도 하다. 플레이어가 세계에 관한 일정한 지식·정보를 획득하고 이해하면 충분히 퍼즐을 풀고 비밀을 찾을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막막하고 이해 불가능하게 느껴지듯이, 메트로브레이니아의 플레이에 잠재된 전능함은 플레이어가 겪는 불능감과 늘 충돌하며 그렇게 플레이어 ‘당신’과 세계 사이에 당연한 듯 싶었던 인과는 어긋난다.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먹을 때야, 플레이어는 비로소 전능(감)과 행위성을 얻을 수 있고 어쩌면 그제야 세계에 나름의 인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메트로배니아의 불능한 이면을 적극 활용하는 메트로브레이니아의 역설적인 작동법일 테다.
메트로배니아가 생경한 세계에 익숙해지는 플레이어의 행위성을 변방까지 지도를 구석구석 밝히는 탐험이나 플레이어 캐릭터의 인과에 반응하는 서사 등으로 반영해 ‘우리에-대한-세계’를 제작할 때, 메트로브레이니아는 그러한 세계에 대한 지식·정보만을 전략적으로 숨겨 플레이어가 마치 ‘우리-없는-세계’에 떨어진 것만 기분이 들게끔 한다.
앞서 인용한 메트로배니아 인터뷰에서 “제가 플레이 중인 게임의 세계가 제 존재와 무관한 척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치 제가 이 세계의 손님일 뿐이고, 게임이 제가 발을 딛거나 말거나 계속 거기서 존재하고 있을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고 싶었어요.”라는 발언을 끌어오자면, 여기서 중요한 건 플레이어에게 실제로 지극히 무심하거나 그와 완전히 무관한 세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러한 ‘척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화면 밖에서 입력을 집어넣는 당신이 그리 중요치 않다고 떵떵대더라도, 게임은 결국 플레이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 묘한 인력 관계 속에서, 〈애니멀 웰〉과 같은 메트로브레이니아 유형의 게임들은 전략적이고 효과적으로 무관하거나 무심한 ‘척’을 하다가 자신의 불능을 받아들이고 이 세계의 지식·정보를 파고드는 플레이어에게 비밀과 전능을 향한 길목을 열어 보인다. 이 넓고 낯선 세계 속 네 귀퉁이에서 얻은 불빛으로 중앙 허브의 기둥들을 밝히자, 우물 속의 우물이 어둑한 아가리를 의미심장하게 벌리는 것처럼.
자그마한 세계와 그 점프들: 〈리프 이어〉에 대해
「기계장치의 우주」를 작성할 때만 하더라도 메트로브레이니아 유형 게임으로 자주 호명되던 〈튜닉 (TUNIC, 2023)〉을 내정하고 있다가, 그보다 덜 알려지고 더 조그만 게임인 다니엘 린센(Daniel Linssen)의 〈리프 이어〉를 선택한 이유는 어느 정도 『폴리곤』에 올라온 글[10] 때문이다. 이 게임이 “메트로브레이니아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메트로브레이니아”라는 제목을 단 그레이슨 몰리의 리뷰는 자신이 퍼즐 상자를 뜯어 볼 끈기가 없어 〈애니멀 웰〉을 그리 좋아하지 못했던 것에 비해 〈리프 이어〉가 “〈애니멀 웰〉을 알아먹은 사람들이 느낀 기분을 상상하게 해준 작은 모사품”이라고 밝힌다. 이때 그가 말하는 ‘기분’이 앞서 다뤘듯 불능감과 전능감의 오묘한 조합이라 한다면, 〈리프 이어〉는 정말로 그저 가벼운 메트로브레이니아의 경험만을 제공하는 것일까? 〈애니멀 웰〉의 빽빽한 256칸에 비해 〈리프 이어〉는 2024년의 본편과 올 초 발매된 DLC 모두 약간 헐렁한 40~50칸짜리 세계를 제시하기에 상대적으로는 작다고 둘 순 있겠지만, 〈리프 이어〉가 2D 플랫포머의 문법을 통해 제시하는 메트로브레이니아적인 특성과 기분은 〈애니멀 웰〉의 축소판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와 사뭇 다르기도 하다.
〈애니멀 웰〉에 숨겨진 겹겹의 비밀이 배쏘가 공언한 대로 어둑하고 깊숙하게 숨겨진 여러 지식·정보의 배치라면, 〈리프 이어〉에 숨겨진 겹겹의 비밀이란 다름 아니라 플레이어 캐릭터가 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상호작용하는 이동법 자체와 연관되어 있다. 린센이 게임을 ‘서투른(clumsy)’ 플랫포머라고 소개하듯, 플레이어는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자신의 캐릭터가 점프하고 땅바닥에 닿으면 바로 시뻘겋게 바뀌며 죽어버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플랫포머에서 가장 중요한 움직임일 점프에 굉장한 제약을 걸면서, 〈리프 이어〉는 우선적으론 플레이어의 이동 자체를 퍼즐로 만들어버리는 플랫포머가 된다. 다른 게임이라면 간단한 점프 한 방으로 이동할 수 있을 만한 곳들마저도 이런 규칙의 세계에서는 위험천만할 뿐이며, 이에 따라 게임의 메트로배니아적인 특성은 플레이어 캐릭터가 지금의 점프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공간들을 여럿 제시하는 데에서 나타난다. 〈리프 이어〉의 겹겹의 비밀은 바로 이러한 제약 덕에 비로소 빛날 수가 있는데, 플레이어 캐릭터가 점프해 떨어지는 높이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세계와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차차 밝혀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두세 칸 높이로 떨어져 죽지 않게 주의해야만 했던 점프가, 그보다 더 깊게 너덧 칸 높이로 떨어지면 플레이어 캐릭터를 빨강이 아닌 분홍으로 바꾸며 다시 튕겨 오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프란 일반적인 메트로배니아에서처럼 플레이어가 진행 과정에서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메트로브레이니아에 가깝게 게임 속에서 언제나 실행할 수 있고 단지 플레이어가 모르고 있었을 뿐인 능력이기도 하다. 이렇게 〈리프 이어〉는 플랫포머로서 플레이의 핵심인 점프를 중심으로 이동 자체를 퍼즐로 만들어 둘을 합쳤을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지식·정보마저도 일종의 비밀로 숨겨두며 여기에 또 다른 겹을 덧붙인다. 까다로운 플랫포밍 자체를 아예 메트로배니아이자 메트로브레이니아적인 경험으로 바꿔버린 셈이다.
〈애니멀 웰〉의 장난감들이 어떠한 의미에서는 파워 업을 위한 아이템으로서 전통적인 메트로배니아의 구성 요소에 더욱 가깝다면, 〈리프 이어〉는 이보다 좀 더 대담하게 그 어떤 아이템도 없이 오로지 플레이어가 이미 ‘파워 업’이 된 점프의 비밀을 언제 알아차리고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시험하도록 이끌며 메트로브레이니아에 훨씬 더 가까워진다. 플레이어가 28개의 달력 조각을 찾으러 조심스레 돌아다니는 이 세계는 화면에 한 칸씩 들어오는 스테이지를 어떠한 유형의 점프로 접근할 수 있는지에 따라 작더라도 꽤 유기적인 플랫포밍으로 짜여있고, 이런 구성은 자연스레 메트로배니아적인 진행처럼 새로운 점프 활용법을 익히기 전까지는 갈 수 없었던 곳들에 도달할 수 있도록 플레이어를 유도한다. 새롭게 알아차린 점프의 비밀을 어떻게 익혀서 적용할 수 있을지를 궁리하며 이 자그마한 세계를 몇 번씩이고 돌고 도는 동안, 플레이어는 자연스레 〈리프 이어〉의 플랫포밍 퍼즐 상자 같은 세계에 익숙해진다.
겹겹의 비밀로 이뤄진 점프에 전능하게 익숙해질수록 그와 상호작용하는 세계 또한 마치 비밀 통로처럼 드러나는 듯한 지름길들 또한, 점프와 마찬가지로 게임에서 가장 처음부터 완결된 상태로 주어져 있었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자신보다 ‘앞서서 펼쳐진’ 퍼즐 상자 안으로 들어온 플레이어가 이를 풀어내는 방법만 알아차리면 될 뿐. 그런 의미에서 〈리프 이어〉는 〈애니멀 웰〉보다 훨씬 작게 압축된 세계임에도 어쩌면 그보다 능숙하게 메트로배니아의 기본적인 전제와 공식을 메트로브레이니아적으로 변환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떨어지는 높이를 더욱 키워서 점프하면 무엇이 가능할지를 파고들수록, 〈리프 이어〉의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방법은 더욱 뒤집히며, 이곳 또한 마침내 숨겨져 있던 변방을 드러내 보인다.
다시 나가며
그렇다면 이제 두 게임의 마지막 구간들을 얘기해 볼 수 있겠는데, 흥미롭게도 양쪽 모두 주어진 세계의 밖으로 나가버리는 순간을 제공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애니멀 웰〉에서는 두 번째 맨티코어를 타고 (그 자체도 새로운 겹의 퍼즐이긴 한) 공중을 날아다니는 엔딩에서, 〈리프 이어〉에서는 (올 초에 나온 DLC까지 포함해) 외벽이나 외곽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지역으로 빠져나오는 후반부에서. 이런 공간적인 비약은 게임 내 지도에 표시마저 되지 않은 바깥을 향하는 만큼 플레이어에게 무척 강렬한 감흥을 전달하는 한편, 다시금 메트로배니아에서 종종 실감할 수 있는 ‘자기 완결적으로 닫힌’ 느낌 또한 넘어선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먼저 〈애니멀 웰〉의 자기 완결적으로 닫힌 성질은 플레이어가 상하좌우 중 한 방향으로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반대쪽으로 나오는 순환적이고 폐쇄적인 구조에서 나타난다. 곧 이 세계에서는 아무리 각종 장난감 도구를 활용하며 전능하게 이동하더라도 그저 거대한 퍼즐 상자의 폐쇄적인 안쪽만을 뱅뱅 돌 뿐이지 아예 밖으로 나가는 출구는 없다. 게다가 그 구조가 순환적인 만큼 적어도 경계 너머의 바깥을 암시하기라도 하는 ‘변방’마저도 없다.
그런 만큼 철저하게 닫힌 세계의 바깥으로 나가버리는 결말은 게임에서 가장 깊숙이 숨겨진 비밀까지는 아닐지라도, 플레이어에게 가장 해방적으로 전능한 기분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런 지라 개인적으로는 그 이후에 한두 겹의 비밀이 남아 있더라도 이 엔딩을 〈애니멀 웰〉이 제공하는 일종의 ‘최종장’으로서 의미화할 수 있겠다. 그와 동시에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사항이란, 게임의 거의 모든 퍼즐과 겹겹의 비밀이 ARG에 혈안이 된 플레이어 집단의 협동 덕에 사나흘 만에 거의 다 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닿을 수 없는 채 새까맣게 남은 영역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게임 내에서 제공되는 도구나 경로, 방법 등으로는 절대 갈 수 없고 오직 치트 키나 개발자 도구로 이동해야지만 확인할 수 있는 이 공간들은 공식적이거나 적법한 플레이에서는 아예 완벽하게 은폐된 ‘비밀’로서 숨어 있다. 그럴싸하게 말이 되지 조차 않는 이 ‘비밀’들은 게임이 제공하는 무대 너머를 어떻게든 엿보려는 이들을 골려 먹기 위한 이스터 에그일까, 아니면 여태까지의 대규모 보물찾기에서마저도 플레이어들이 찾아내지 못한 더욱 깊은 겹으로 향하는 단서인 걸까? 어쩌면 〈애니멀 웰〉의 세계 안팎으로 여전히 숨겨진 채 남아 있는 이런 비밀들은 비디오 게임의 세계가 아무리 전능(감)이 뚜렷한 ‘우리에-대한-세계’처럼 느껴지더라도, 어느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불능(감)이 도사리는 ‘우리-없는-세계’가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리프 이어〉의 바깥이란 맵 최하단에 위치해 바닥이 없는 채로 바람이 몰아치는 지역일 테다. 여기서 게임은 다시금 점프의 변주를 통해 플레이어 캐릭터가 이 변방과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한다. 플레이어의 점프가 두세 칸이나 너덧 칸 높이도 심지어 (파란색이 되어 말 그대로 땅을 뚫고 들어가게 해주는) 예닐곱 칸 높이까지도 지나서 떨어지면, 캐릭터가 노란색으로 뒤집히며 바닥이 아닌 천장에 붙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점프는 곧 〈애니멀 웰〉의 장난감과 유사하게 점프 높이만으로도 세계와 다양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복수의 용도를 제시하며, 플레이어는 다시금 메트로브레이니아적인 플레이로 익힌 몇 유형의 점프를 다양하게 짜맞추는 플랫포밍을 통해 메트로배니아적인 세계를 이동할 수가 있다. 이렇게 점프 하나에 겹친 다양한 플레이를 반영하듯, 게임은 반전된 상태로 최하단 변방으로 이동했을 때 지도에서 숨겨져 있던 마지막 퍼즐 지역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플레이어가 시작 위치로 되돌아가게끔 이끌며 여태까지 익숙해졌던 자그마한 세계를 반전된 관점으로 제법 낯설게 재맥락화하기까지 한다.
이런 식으로 〈리프 이어〉가 자그마한 세계 속에서의 점프 안에 비밀을 가득 숨겨 넣으며 풍부한 플레이 경험을 만들어 냈다면, 올 초 발매된 DLC인 〈리프 이어: 3월 (Leap Year: March)〉은 본편에서 점프와 얽힌 비밀들을 플레이어가 이미 꿰차고 있다는 전제하에 플랫포밍 자체부터 맵의 유기성과 퍼즐의 유형과 난이도까지 고루 보강된 세계를 제시한다. 이번에는 밖에 위치한 해변에서 시작되는 게임은 본격적인 플레이가 벌어지는 안쪽으로 들어가도록 플레이어를 이끈 뒤 후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 세계를 뛰어넘도록 한다.
플랫폼을 켰다 끄는 버튼이 새로운 규칙으로 추가되고 뒤집어진 상태로 닿을 수 있는 최하단 변방의 플랫포밍 퍼즐들을 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달력 조각을 전부 얻었을 때 개방되는 세계의 옆구리에서는 플랫포머의 점프 관습을 일찌감치 비튼 〈VVVVVV (2010)〉의 악명 높은 스테이지 (이른바 ‘고통을 즐기는 자’)와 유사한 도약을 선보이기도 한다. 전례 없는 높이로 점프하고 떨어지며 세계의 변방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플레이어 캐릭터는 마침내 빨강에서 분홍, 파랑, 노랑을 지나 초록색이 되며 땅바닥에 닿는데… 그 이후의 마지막 구간은 나마저도 이 글에서만큼은 좀 치사하게 숨겨두고 싶다. 퍼즐 상자 속의 모든 걸 밖으로 꺼내 보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
[1] Kate Gray, “What The Heck Is A ‘MetroidBrainia’? Introducing The Newest Genre On The Block”, Nintendo Life, 2022.05.21.
[2] 유진 새커,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 김태한 옮김, 필로소픽, 2022, 13쪽.
[3] 이후 소제목들은 한나 렌,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이영미 옮김, 엘리, 2020의 제목을 변형.
[4] Christian Nutt, “The undying allure of the Metroidvania”, Game Designer, 2015.02.13. (https://www.gamedeveloper.com/design/the-undying-allure-of-the-metroidvania)
[5] 제작자들 또한 이를 인지하듯, 여러 발언에서 행위 주체로서의 플레이어인 ‘당신’을 강조한다: “당신이 이야기고, 당신이 바로 모험입니다. 어디로 갈지를 발견하고 당신이 갇힌 세계의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건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 “당신 스스로 자신만의 플레이 방식을 생각하고, 느끼고, 탐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새커, 같은 책, 18쪽.
[7] 새커, 같은 책, 15쪽.
[8] 성훈, “최종장과 변방_비디오 게임 속 공간적 한계의 실감”, 『게임 제너레이션』 13호, 2023.08.10.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2783c2df-7cc1-45bf-bbed-4b34c153d7e3)
[9] 새커, 같은 책, 18쪽.
[10] Grayson Morley, “Leap Year is a Metroidbrainia for people who hate Metroidbrainias”, Polygon, 2024.09.21. (https://www.polygon.com/gaming/453137/leap-year-metroidbrainia-you-jump-you-d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