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믈렛에 넣을까요?」 : Taste good or Taste f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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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6. 6. 10.
맛시모 몬타나리는 「Food is Culture」에서 요리를 언어적 체계로 비유한다. 각 재료는 어휘소로 기능하고, 조리법은 문법이 되어 최종적으로 의미체계(요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직접 요리를 해보면 이 서술의 그럴싸함을 느낄 수 있다. 진간장인지 양조간장인지, 물로 어느 정도 비율로 희석하는지에 따라 간장의 용도가 달라지는 그 감각은 확실히 동의 어휘의 용례와 배치에 따른 의미 변화와 닮아있다. 맛의 체계라는 것은 그만큼의 복잡함을 담지한다. 최근 전세계 요리들의 관계를 고작 2mb에 담았다며 화제를 모은 KAIKAKU.AI에서 발표한 「Epicure: Navigating the Emergent Geometry of Food Ingredient Embeddings」에서도 각 재료를 어휘(vocabulary)와 토큰(token)으로 규정해 관계의 의미론적 해석을 진행했다는 것을 보면, 몬타나리의 사유는 상당히 앞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비디오게임이 미각의 재현에 언제나 주춤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이중적이다. 먼저 미각을 전달할 ‘출력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치명적이다. 물론 비디오게임이 사실의 재현매체도 아니거니와, 아직까지 맛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음식 그 자체밖에 없다는 점에서 크게 문제될 만한 사유는 아니다. 그러니 또 다른 문제 쪽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맛’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게임 메커닉적으로 재현하는 문제가 말이다. 몬타나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게임 내부에 늘어선 어휘소들이 그 조립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문제가 된다. 그런데 차라리 언어인 쪽이 더 편할 지도 모른다. 언어는 발화 그 자체로 그 맥락을 짚을 수 있다는 점에서 최종 출력의 형식이 상대적으로 투명하다. 하지만 미각은 그 본질적인 전달 불능성 덕분에 더 곤란한 상태다. 어휘소의 맥락적 차이가 다른 ‘맛’으로 발현되는 것을 어떻게 수치화된 세계에 투영할 것인가.
사실 이는 영 가망이 없는 일이다. 요리 메커닉을 가진 여러 게임들이 적용하고 있는 ‘능력치 버프’ 같은 건 솔직히 궁여지책일 뿐이다. 냉면에 만두를 곁들인다고 지능이 상승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고향만두 게임」처럼 고정된 레시피가 아니면 다 틀렸다고 길길이 날뛰는 사장님이 등장하게 된 것 아닐까 싶다.
문법적이라고 전제할 때 이에 수반하는 부침은 그 연계의 복잡성에 있다. 김치와 에이스 크래커를 같이 먹으면 김치전의 맛이 난다(실제로 난다!)는 사실은, 김치와 에이스 크래커를 분리해 먹을 때와는 다른 의미화, 그러니까 다른 ‘풍미’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에 야채 크래커를 같이 씹으면 야채전의 느낌이 날까? 해물향이 강한 과자와 함께 먹는다면? 개별화된 재료가 가지는 의미소가 ‘더하거나 빠짐으로써’ 그 최종적 의미를 좌우한다는 감각은 무엇보다 ‘적당히 예상치 못한 의미 창출의 인과관계’라는 점에서 재현이 쉽지 않다. 재차 재현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인과관계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의미 자체는 개별 요소들의 조합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변용성이 있지만, 하나의 법칙(=레시피)으로 결정되면 그 결과는 재현가능한 영역에 오른다. 지금껏 요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오히려 이 구조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게임은 다름아닌 단어를 직접 타이핑해 게임 오브젝트를 생성, 퍼즐을 푸는 5th cell의 「스크리블너츠」 시리즈다. 결국 몬타나리가 이겼다. 요리는 언어가 맞는 것 같다.

* 「스크리블너츠 언리미티드」
이제 「오믈렛에 넣을까요?」(이하 「오믈렛」)의 이야기를 할 시간이다. 물론 이 게임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요리’를 다룬다고 하긴 어렵다. 오믈렛은 이미 잘 만들어져 있고, 플레이어는 그저 토핑을 올릴 뿐이다. 하지만 앞서 김치와 에이스 크래커의 사례는 이 「오믈렛」의 게임플레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종의 재료가 배치되는 방식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본래 이 게임은 2024 GMTK 게임잼에서 4일만에 기본이 완성된 게임으로, 초기에는 배치라는 역학이 들어간 유사 「발라트로」같은 느낌의 게임이었다. 현장에서 호평을 받아 곧 얼리액세스로 출시 했으며, 이후 여러 의견들을 받아 재료의 종류, 태그에 의한 분류, 인접과 비인접에 따른 판정 차이, 끈적임/매움(불탐)/상함/포장됨 등의 재료 상태 같은 것들이 끼어들며 더 복잡한 연결 방식을 다루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발매된 게임은 무엇을 배치하느냐에 국한된 플레이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제는 어떤 태그의 재료를 어떤 재료에 인접시키거나 떨어뜨려 놓느냐, 특정 재료가 어떤 방향을 향하느냐, 오믈렛 위에 특정 태그의 재료가 몇개나 있느냐… 같은 복잡한 조합들을 고려해야한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오믈렛」은 현존하는 게임 중 가장 다이내믹하게 식재료의 조합과 조합 효과를 가진 게임이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그래서, 「오믈렛」이 만들어낸 이 콤비네이션이 실제로 풍미를 작동시킬 수 있을까? 지금껏 요리의 가능성, 식재료의 조합에 의한 의미화의 가능성 따위를 말했지만 이런 가능성의 추적은 그저 비디오게임을 다시금 ‘시뮬레이션’으로 만들려는 욕망일 뿐이다. 애초에 맛을 출력할 수 없는 이 매체가 맛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든 어차피 수치화된 세계에 가상적으로 부여된 출력물에 불과하다. 재료의 조합에 다양성은 줄 수 있더라도 그 결과물을 ‘그럴싸하게’ 세계에 입히는 건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그리고 「오믈렛」은 이 불가능성을 너무 잘 아는 게임이다.

* 랍스터 꼬리가 아무 채소나 붙여 먹는다고 뛰어난 풍미를 낼 수 있을까?
이 게임이 재료의 조합과 맛의 창출을 진지하게 다뤘다면 지금만큼 즐거운 게임이 되진 못했을 것이다. 「오믈렛」의 테마, 그러니까 동물 교직원에게 지급하는 급식이라는 설정과 ‘하나만 삐끗해도’ 해고되어버린다는 우스꽝스러운 설정은 이미 요리라는 행위를 그다지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따라서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한 재료의 교직을 만들어내는 시스템 역시도 그다지 진지한 시스템이 아니다. 이런 태도는 테마를 뛰어넘는다. 이 게임의 요리는, 그야말로 엉망이다. 식재료라고 하는 것은 정갈하게 내려오지 않는다. 자른 당근이나 프렌치 프라이가 포장도 벗기지 않은 채 그대로 눈 앞에 떨어진다. 이 정도는 약과다. 통조림이 깡통 그대로 레일 위로 올라온다. 매운 음식은 너무 매운 나머지 불타고 있으며 가만히 놔두면 새카맣게 타버린다. 심지어는 다른 재료가 붙어있다면 그 재료에 불이 옮겨붙기까지 한다. 물론 이 설정들은 게임에 유쾌한 퍼즐의 요소를 부여한다. 불붙은 재료는 빠르게 흔들어서 불을 끌 수 있다(물론 불이 붙은 동안 음식을 내면 +3이라는 꽤 높은 점수를 준다!). 종이나 비닐 포장 정도는 매운 음식의 불을 붙여서 태우면 벗겨낼 수 있다. 아니면 식재료(!)로 제공되는 가위를 이용해 잘라내도 된다. 통조림 역시 식재료로 제공되는 렌치를 이용해 뚜껑을 떼고 흔들면 내부의 물건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요소에 대한 상찬은 시뮬레이션으로의 회귀나 다름없다. 「오믈렛」은 오히려 이러한 ‘요리 시뮬레이션’으로의 가능성으로부터 이탈하려고 애쓴다. 「발라트로」의 ‘조커’처럼 상시적으로 효과를 주는 ‘도우미’는 게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관계와 효과를 뒤집는다. 곰팡이 핀 식재료에 오히려 보너스를 주는 ‘향상된 곰팡이’가 대표적이다. 이 도우미를 선택하면 오믈렛 위에 곰팡이 가득한 식재료를 가득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된다. 영양학이나 안전, 아니 하다못해 맛의 문제는 여기서 완전히 배제된다. 어차피 만족도는 점수로 체크되고 점수가 높다면 만사형통이기 때문이다.

* 이렇게 곰팡이 투성이라도 점수만 높다면 상관없다.
그렇다면 「오믈렛」이라는 게임은 바로 맛(또는 요리)과 비디오게임의 충돌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껏 맛의 재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했지만, 결국 비디오게임이 맛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맛이라는 것의 효용을 어떻게 수치화와 결부시킬 수 있을까? 맛있음의 정도를 수치화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시장이 반찬’이라는 통속적인 잠언처럼 맛이 기능하는 바는 식재료 자체가 아니라 상황과 인식, 감정 등에 따라서 복잡하게 요동친다. 또한 설령 동일한 조건을 부여하더라도 맛 그 자체의 수치적 치환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상한 던전」 시리즈의 ‘만복도’처럼 배부름의 정도야 표기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오믈렛」이라는 게임이 가진 유쾌함은 이 충돌에서 발생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수치를 부여해야하는 게 숙명이라면 오히려 현실로부터 이탈해버리자. 「오믈렛」은 상대적으로 정교한 시뮬레이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도 그곳으로부터 가장 멀리 이탈하려고 애쓴다. 애초에 ‘가장 정교한 시뮬레이터’ 따위가 환상이며 오독이지 않겠는가. 다양한 가능성과 시뮬레이션의 정도는 어차피 다른 문제다. 완전한 현실이 될 수 없다면 비현실의 힘을 가능한 한 유쾌하게 증가시켜버리자.
따라서 「오믈렛」은 비디오게임의 양가적 논제, 약점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탄탄한 기반인 부분을 드러낸다. 그것은 현실 시뮬레이션의 근본적 불가능성이다. 「오믈렛」은 정말 과감한 메타적인 농담이나 다름없다. 그래, 비디오게임은 리얼리티의 시뮬레이션을 목적하지도 않고 실현하더라도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다. 맛을 어떻게 현실에 가깝게 재현할 것인가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몰입해봐야 그다지 효용이 없다는 의미다. 플레이어들이 현실에서 곰팡이 덩어리 오믈렛을 누군가의 입에 처넣을 게 아니고서야, ‘어차피 이정도의 효과입니다’라며 적당히 타협시키면 그만이다. 실제로 랍스터 꼬리에 채소를 얹으면 맛있으니까 배치하는 게 아니다. 그저 규칙이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먹여선 안된다는 것을 구태여 먹도록 만들고 그 맛을 음미하는 모습(=점수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며 일탈의 쾌감을 느끼는 게 더 의미있는 일 아닐까. 그래, 비디오게임은 종종 일탈의 쾌락을 시도할 수 있도록 놔둔다는 점, 아니 때로는 그것을 매우 긍정해준다는 지점에서 즐길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바보같은 긍정을 받을 때에는, 비디오게임과 시뮬레이션을 동음이의어의 위치로 슬쩍 바꿔치기하고 싶어진다. 그래야 나의 바보같은 일에 대한 긍정이 현실화되는 기분이 드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