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함만으로 정말 충분할 수 있을까 - 디스이즈 더 폴리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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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12. 10.
유능함만으로 정말 충분할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 노동이 진정 인간의 것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우리는 창조력과 주체성을 가지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노동이라는 행위를 스스로 찾아내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 손을 떠나게 된 노동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저 먹고살기 위해 피치 못하게 행하는, 지루하고 소모적인 근로로 전락했다. 게임, 특히 시뮬레이션 게임의 가장 큰 위업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 소외의 좌절을 벗어나 인간에게 다시금 창조력과 주체성을 가진 노동의 유희를 되찾아줬다는 것이다. 호모 루덴스는 온갖 분야를 망라하는 노동의 과정을 (심지어 본인의 돈을 주고) 쾌락으로 치환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를 가능케하는 주된 요인은 아무래도 성취감이다. 나의 노력과 노동을 통해 실제로 무언가가 이뤄진다는 감각.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가 덕담으로 쓰이는 우리의 현실은, 헌신이 보상받는다는 확신이 없는 사회,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이 결국 자본뿐인 사회다. 그러나 게임 속에서는 다르다. 잘 설계된 안정적인 시스템은 우리가 노력한 만큼 보상으로 돌려준다. 자본일 수도, 사람과의 관계일 수도, 자원일 수도, 아니면 그저 만족감일 수도 있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근심 없이 살 수 있고,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임 속 현실에서는 예기치 못한 재난과 위기도 감당할 만한, 언젠가는 회복할 수 있다는 기대가 가능한 해프닝으로 만든다.
이 합리적이고 친절한 세계에서 우리는 성장의 기쁨을 맛본다. 게임이 제공하는 규칙에 익숙해지고, 능숙해진다. 가게를 경영하는 법, 농작물을 재배하는 법, 자동차를 조립하는 법, 화물을 국경 너머로 운송하는 법...... 규칙에 능숙하면 능숙할수록 달콤한 과실은 더욱 늘어난다. 숙련-발전-번영이라는 전반적 흐름은 플레이어에게 미래의 상승곡선을 약속한다. 점차 일을 잘하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 상황이 나아질 것이고, 이에 따라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디스 이즈 더 폴리스This is the Police>는 여기에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작품이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
어떤 배반적인 시뮬레이션
사실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대단한 내러티브가 필요치 않다. 으레 (얼굴도 본 적 없는) 삼촌의 편지 한 통에서 시작하는 초보 사장의 하루하루는 그 자체로 게임의 내러티브가 된다. 어느 날은 매출이 좋을 수도 있고, 어느 날은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운이 좋거나 실수를 연발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기복을 견딘 끝에 결국 폐업 직전의 허름한 가게가 크고 화려하게 변해가는 모습이야말로 드라마 자체다. 그러니 <디스 이즈 더 폴리스>를 시작할 때는 어떤 드라마를 기대해야겠는가? 부패한 시장에게 탄압을 받으며 6개월 뒤 해직을 앞둔 끈 떨어진 경찰서장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 주인공 잭이 자신의 퇴임을 직접 발표하는 기자회견이 작품의 첫 장면이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잭 보이드의 스완 송이다. 그(플레이어)는 앞으로 180일간 헌신적으로 일한 뒤 해고될 것이고, 그 자리는 시장의 낙하산 친인척으로 채워질 것이다. 일에 애착을 가진 잭에게 이는 노후를 위한 즐거운 은퇴가 아니라, 정치적 패배이자 사회적 죽음이다. 직장부터 가정까지 노골적이고 적대적인 환경으로 둘러싸인 채 이러한 상황을 맞이한 잭에게, 많은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볼 수 있는 발전적인 미래와 약속된 보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잭의 미래는 이미 내리막을 걷고 있고, 플레이어는 그의 ‘마지막 180일’을 함께하는 여정에 던져지며,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점진적인 성취와 번영이라는 확실성보다, 180일이 다 지났을 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이 더욱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180일이라는 시간 동안에는 많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매일매일이 규칙적인 일상의 연속성은 플레이 도중 여러 차례 고의로 깨진다. 다양한 사고로 수십일씩 공백을 겪은 뒤 돌아오면, 성실하게 꾸려왔던 경찰서가 또다시 엉망이 되어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이런 불연속성 속에서 꾸준한 성과와 보상의 축적을 경험하긴 힘들다. 플레이어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시스템에 대한 자기 자신의 이해와 숙련도 뿐이며, 이 위기를 마치 새로운 캠페인을 플레이하는 경험처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디스 이즈 더 폴리스>가 보여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반복적인 불연속성은 꾸준하게 발전적인 미래를 그리며 나아가는 여타 시뮬레이션 게임의 내러티브에서는 잘 드러내지 않는 특성들이다. 그러나 이 특성들은 종국엔 <디스 이즈 더 폴리스>가 던지는 질문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불필요한 요소를 최대한 제거한 뒤, 오직 믿을 구석이 플레이어 본인의 숙련도뿐이라고 했을 때, 이 숙련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능하게 무너지다
50만 달러. 180일 뒤 경찰서를 떠날 때 50만 달러를 들고나가는 것이 잭의 유일한 목표다. 하지만 그것도 생존해있을 때의 이야기다. 180일간 살아남아 50만 달러를 모으고 은퇴하기. 프리버그는 위험한 도시다. 세력을 다투는 마피아들과 제멋대로 구는 시장, 테러를 꿈꾸는 반정부 인사가 자의식을 마음껏 뽐내는 이곳에서, 처신을 잘못했다가는 부엌 창문을 뚫고 날아오는 총알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경 속에서 50만 달러를 모으기 위해서는, 주어지는 봉급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디스 이스 더 폴리스>의 플레이는 근본적으로 경영 시뮬레이션에 가깝다. 인력을 관리하고, 재정과 자원을 관리하고, 신고가 접수되면 경관을 파견하고, 사건이 발생하면 형사를 파견해 수사를 진두지휘한다. 아마 이렇게 하루를 열흘 정도 반복하다 보면, 이러한 ‘경영’이 대강 손에 익게 될 것이다. 새로 발생할 신고에 몇 명을 파견할지, 살인사건 형사 교대조를 어떻게 편성할지, 출동 타이밍을 어느 정도 잡아야 할지. 그러나 경영할 사업장이 ‘경찰서’요, 경영자가 ‘경찰서장’이라는 요소는, 이러한 경영 행위를 판단할 새로운 관점을 더해준다. 플레이어가 익숙해지는 또 다른 일상에는 부두에서 벌어지는 마피아 총격 신고를 고의로 무시하고, 압수한 장물을 처분해 현금을 빼돌리고, 특정 세력과 결탁해 새로운 자원을 확보하는 일이 포함된다.

* 신고뿐 아니라 다양한 세력의 요청에도 응답하는 것이 필수적인 업무가 된다.
경찰서장 시뮬레이터라는 이유로 플레이를 하면서 나의 양심과 공익성을 성찰할만하다는 이야기는 다소 고리타분한 지적이 아닐까? 그러나 한 도시의 치안과 시민들의 안전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지녔다는 롤플레잉의 관점에서 봤을 때도 이 미묘한 아이러니는 분명 흥미로운 요소다. 사실상 이러한 (직업) 윤리적 해이가 선택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씩이라도 마피아의 범죄를 눈감아주지 않으면 사망해 게임이 끝날 수도 있다. 평화적인 시위를 ‘진압’하라는 시장의 명령을 거절하면 봉급이 깎이고 지원을 받지 못하거나 직원을 해고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잭의 생명과 서의 자원을 보호하며 슬기롭게 경찰서를 운영한다는 것은, 어느샌가 플레이어의 책상 위에서 마피아들은 협력업체, 시청은 끊임없이 비위를 맞춰야 하는 까탈스러운 후원자, 휘하 경관들은 사설 용역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잭은 모두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다. 사람들은 그가 신뢰할만하며 정직한 경찰이라고 생각하고, 이 위험한 도시에 안전을 가져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모든 시민의 사랑을 받는 경찰서장 잭 보이드는, 이 180일 동안 경력에서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불가역적인 타락을 겪게 된다. 플레이어가 이 시스템에 적응할수록, 규칙을 잘 다루게 될수록, 효율적이고 능률적으로 일할수록 잭은 종국에는 청산되어야 할 부패의 엄연한 일부가 된다. 플레이어가 일을 잘하면 잘 할수록 작품의 내러티브는 필연적인 쇠락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부재로써 비로소 감각되는 것들
어떤 형태로든 노동을 경험해 봤거나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일잘러’를 꿈꾼다. 센스 있고, 스마트하고, 능률적이고, 빠르고, 그리고 어쩌면 융통성 있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런 현대인의 미덕은 무엇이든 간에 ‘원칙’이라는 단어와는 다소 어색한 관계가 된다. 센스 있게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원칙을 지키는데에 센스가 필요한가? 융통성 있게 원칙을 지킨다는 문장은 성립 가능한가?

* 마지막 근무일의 잭은 하루동안 자신 없이 굴러가는 현장을 지켜볼 뿐이다.
작품의 규칙에 익숙해지고 능숙해지는 동안, 플레이어(잭)는 센스 있고, 스마트하고, 능률적이고, 빠르고, 융통성 있게 일을 해낸다. 그렇게 점차 ‘일잘러’가 되어갈수록, 잭(플레이어)은 경찰서장으로서의 원칙으로부터 눈을 감는 것에도 익숙해지고 능숙해진다. 그렇게 지위를 잃는 것도 모자라 도시의 가장 부패한 인물 중 하나가 되어, 젊고 신념 있는 신임 검사장의 타깃이 된다. 플레이어는 이 시뮬레이터를 플레이하면서 점차 성취를 쌓아가고 목표를 이뤄내는 여정이 아닌, 잭이 모든 것을 잃고 혼자 남겨질 때까지 삶의 내리막길을 걷는 여정을 함께한다. 시뮬레이션을 플레이하며 쌓아가는 노력을 배반하다 못해 거역하는 이 쇠락의 과정을 플레이어는 왜 즐기는가? 만약 잭이 영광스러운 승리의 결말을 맞더라도 지금과 같은 즐거움이 남을 수 있었을까?
마피아나 시청이 단순히 적대관계가 아닌 복잡한 이해관계로 설정된 정치적 지형의 형성은 시뮬레이션의 규칙을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유용한 선택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때문에 이 규칙에 동의하고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발로 이 윤리적 타락의 구렁텅이에 걸어 들어가고 있음을 이해하며, 그 길의 끝에 점차 선명해지는 최후를 어느 정도 짐작해가고, 그 비릿함을 즐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플레이어는 원칙에서 멀어질 것을 요구받으면서 오히려 스스로에게 원칙이 있음을 감각해가는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여기서 이러한 질문이 유효해진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