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를 위한 게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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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6. 10.
도발적인 제목을 들고 왔지만, 놀랍게도 필자는 어린이가 아니다. 더 놀랍게도 필자는 아직 2세가 없다. 당사자성이 없는 사람이 어린이와 게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게임제너레이션(GG) 편집장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가정에 어린이가 있는 필자를 새로 구해보시는 게 어떠냐'라고 완곡하게 돌려 말했다. 편집장은 '어린이가 없는 입장이 보다 객관적'이라고 답했다. GG 편집진의 고약한 취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필자는 과거에 어린이였던 적이 있다. 필자는 그 유명한 PC방의 초글링 출신이다. <카트라이더>가 국민게임이던 시절, '놀토'만 되면 기자는 같은 반 친구들과 PC방으로 달려갔다. 매캐한 담배 연기 속에서 시프트(드리프트) 버튼을 열심히 눌렀던 기억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무렵 PC방에는 <리니지>라든가 <뮤> 같은 게임이 인기가 있었지만, <메이플스토리>, <큐플레이>, <마비노기> 등등 어린이들이 즐길 만한 게임도 대단히 많았다. 개중에는 FPS나 '성인풍' MMORPG로 월반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모두가 <카트라이더>를 플레이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 한때 <카트라이더>는 명실상부 국민게임이었다. 그리고 그 인기의 중심에는 어린이들이 있었다.
<카트라이더>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당대 단순 영화 잡지를 넘어 문화비평지의 기능을 수행하던 주간지 <씨네 21>은 "국민 배우 안성기에 국민 간식 떡볶이에 국민 여동생 문근영까지, 조금이라도 인기 있는 상품에는 ‘국민’이라는 딱지가 붙는다"며 "요즈음 국민 게임 칭호는 <카트라이더>에 돌아간 모양"이라고 썼다.[1] 그리고 그 인기의 비결을 "유아적 놀이 경험"이라고 분석했다. 이 "유아적 놀이 경험"이란, 만화적 캐릭터들을 통해 기존의 레이싱게임보다 간편한 게임플레이를 담은 것을 의미한다.
일각에서는 꾸준히 이 게임과 닌텐도 <마리오카트>와의 유사성 문제를 지적했다. 하지만, 당대 이용자들에게 <마리오카트>와 <카트라이더>를 둘러싼 시비는 그다지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어린이 시절의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카트라이더>는 최고 동시접속자 20만 명, PC방 점유율 1위, 출시 1년 만의 등록회원 1,000만 명의 금자탑을 쌓으며 넥슨의 역사를 썼다. <카트라이더>는 2023년 출시 18년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고, 후속작 <카트라이더: 드리프트>을 출시됐다. 하지만 새 게임은 국민게임이었던 전작의 아성을 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넥슨의 창업자인 고 김정주 회장은 "아이들과 부모들이 스스로 돈을 싸 들고 와서 한참 줄 서서 기다리며 디즈니 콘텐츠를 즐긴다"며 "디즈니가 부러운 건 아이들을 쥐어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2] 넥슨의 방향성을 아이들과 부모를 "쥐어짜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오게 만드는 것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넥슨이 2000년대 초중반 서비스했던 게임들은 실로 그런 면모를 보이고 있었고, 그 선두에는 <카트라이더>가 있었다. 이 쯤에 <카트라이더>의 옆자리에 설 게임은 단연 <메이플스토리>겠지만, 이 게임이 겪은 풍파에 대해서는 굳이 이 글에서는 구구절절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넥슨은 현재 <메이플스토리>의 블록체인게임 버전을 연구개발 중이다.[3]
아무튼 국민OO의 시절은 지났다. 국민OO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존재는 국민OO가 먹히던 시절에 그 지위를 획득한 이들에게 한정된다. 2020년대의 국민MC는 아직 우리 머릿속에 있는 그 사람이다. 이렇게 취향의 파편화가 세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서로가 무엇을 좋아하고 사는지 알기 어렵다. 새로운 국민배우, 국민간식, 국민여동생은 없다. 할머니는 빠니보틀과 곽튜브를 모르고, 손자는 종편방송에 쏟아지는 트로트 예능을 모른다. 독자 여러분께도 퀴즈 하나. 이 중에 혹시 '흔남'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혹시 구글링을 시도하려고 했나? 흔한남매는 구독자 277만 명을 보유한 유튜브 채널이다. 요즘 어린이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흔남의 존재를 모르는 초등학생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전 세대를 아우르는 '매스'미디어는 사라졌다고 해도 무방하다. 특정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 일찌감치 집에 들어가는 시대는 지났다. 더구나 인구절벽으로 가파르게 줄어들고 있는 어린이를 위한 콘텐츠가 어떤 것이 있는지는 더욱 알기 어렵다. 어린이와 함께 살고 있거나, 어린이와 교류하지 않는 이상 어린이의 취향을 진단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다행히 필자에겐 조카가 있다. 조카를 '취재'한 결과, 필자와 조카 사이에 그나마 말이 통했던 것은 <포켓몬스터> 정도였다. 조카가 '1세대 포켓몬'을 알고 있다고 대답할 때, 필자는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그 외의 콘텐츠로 조카들과 대화를 시도해보았을 때 필자는 좌절했다. 한 번 시도해보라. "삼촌 <신비아파트> 옛날 건데요", "<뽀로로>는 애들(네 녀석도 애면서!)이나 보는 건데요"와 같은 답변을 들을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게임을 찾는 일은 더 어렵다. 가장 참고할 만한 데이터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발간한 '2023 아동청소년 게임행동 종합 실태조사'다. 아동청소년의 65.2%는 이미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 가장 많이 하는 게임은 <마인크래프트>, <로블록스>와 같은 샌드박스 게임(23.7%)으로 나타났다. 그 뒤는 <브롤스타즈>, <발로란트>, <서든어택>과 같은 슈팅게임(23.5%)이 차지했다.[4]
* 청소년이 가장 많이 즐기는 게임 장르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샌드박스 게임은 정의 그대로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세계를 창조하는 모래상자와 같다. 매달 1억 5천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접속하는 <로블록스>는 플랫폼이다. 즉, 그 플랫폼에 접속해 직접 관찰하지 않으면, 무엇이 인기를 끌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유튜브를 들여다 보지 않으면 요즘 뜨는 '인급동'(인기 급상승 동영상)을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린이들은 <로블록스> 플랫폼 안에서 이 게임 저 게임을 탐험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로블록스>가 곧 게임과 같을 수 있다. 참고로 조카의 날카로운 분석에 의하면 <로블록스> 안에서 가장 인기있는 게임은 <입양하세요!>다. 본인은 <입양하세요!>에 '애들'이 너무 많아서 슈팅경쟁 게임 <머더>를 즐기고 있다고 한다. 그 말을 옆에서 같이 들은 조카의 친권자는 <머더>의 폭력성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고, 필자는 대뜸 게임의 폭력성에 대한 심판관이 되었지만, 취재원 보호를 위해서 '에이,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답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즐기는 게임에 <서든어택>이 이름을 올린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들은 더이상 TV나 잡지로부터 게임에 대한 정보를 얻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구독 중인 인플루언서가 특정 게임을 플레이하고, 학교 같은 내집단에서 두루 공감대를 얻었을 때 그 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관찰된다. 재미만 있어 보인다면, 2005년에 나온 FPS도 서슴없이 즐기는 것이다. 필자의 유일한 취재원인 조카는 15세 미만이기 때문에 <서든어택>을 즐길 수 없었다. 주변에서도 <서든어택>을 하지 않기 때문에 꼭 그 게임을 플레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이뿐 아니라 각 게임 포털은 2차 인증 과정을 강화했기 때문에 예전에 필자가 그러했듯이 부모의 주민등록번호로 게임을 즐기는 것이 쉽지 않아진 모양이다.
한국갤럽 발표에 따르면, 10대 남성의 44%, 여성의 13%가 게임을 가장 즐겨하는 취미로 꼽았다.[5] 어린이들은 여전히 게임을 즐기고 있지만, 그 자리에 한국 신작 게임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인용한 표의 예시에 올라온 한국 게임 신작은 3년 전에 나온 <쿠키런 킹덤> 뿐이다. 고객의 모수 자체가 줄어드는 만큼 어린이 취향의 게임을 만드는 것이 수지타산이 안 맞는 일이 되는 듯하다. 임원을 설득하기 좋은 기획은 '10대들이 즐기는 게임'보다는 '40대 직장인들이 즐기는 게임'일 것이다.
한때 게임은 '어린이들이나' 즐기는 매체로 여겨졌다. 오락실에나 PC방에나 어린이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찾아보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게 됐다. 애초에 그들의 인구가 감소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케이드와 PC방 산업의 규모가 줄어들었을 수도 있다.
스마트폰으로 가보자. 앱스토어의 게임 - 어린이 탭으로 가면 인기 차트의 1위는 <유튜브 키즈>가 차지하고 있다. 2위는 색칠놀이 게임 <퀴버>, 3위는 샌드박스 게임 <토카보카 월드>, 4위와 5위는 <밴드 키즈>와 <아이들나라>이다. 온전한 의미의 게임은 2번과 3번이고, 4번은 학교 모임, 5번은 '학습'을 위한 앱이다.
구글 플레이스토어 '키즈' 란의 '삶이 풍성해지는 게임' 코너에서도 <유투브 키즈>가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스마트폰 양대 마켓의 상위 차트는 보호자가 어린이로 하여금 건전하고 학습적인 콘텐츠를 학습시키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듯하다. 정작 어린이에게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로블록스>가 순위에는 빠져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로블록스>는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이 제공하고 있지만, 그 안의 게임들은 비슷한 또래의 창작자들이 직접 만들고 있다.
그리하여 필자는 가정의 달의 그믐에 생각한다. 어린이를 위한 게임은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걸까?
* 5월 31일 앱스토어 게임 분야의 ‘어린이’ 코너 인기 순위. 게임이 거의 없다.
[1] 박상우, 「<카트라이더>는 어떻게 국민 게임이 되었나」, 씨네21, 2005.09.16.
[2] 김재훈, 신기주, 「플레이: 게임 키드들이 모여 글로벌 기업을 만들기까지, 넥슨 사람들 이야기」, 민음사, 2015.12.7.
[3] 김재석, 「넥슨이 그리는 블록체인 메이플스토리의 꿈」, 디스이즈게임, 2024.03.23.
[4] 「2023 아동청소년 게임행동 종합 실태조사」, 한국콘텐츠진흥원, 2024.03.05.
[5] 「한국인이 좋아하는 50가지 [문화편]」, 한국갤럽, 2024.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