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예술: 게임 플레이 경험을 깊이있게 만드는 것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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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3.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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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match=id:229
‘게임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은, 그 질문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합리적인 대답을 기대한다면 생산적일 수 없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하고,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얻게 되는 “미적 경험(aesthetic experience)”에 대한 사유가 게임을 예술 또는 비예술로 분류하는 것보다 더 나은 접근 방법임을 주장하려고 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적 작품이란 곧 미적 경험의 주입과 같은 것이 아닌가요?” 이에 대한 대답은 ‘당연하다’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와 같은 ‘경험’의 유형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게임이 다양한 감정을 지닌 주인공이 겪게 되는 복잡다단한 내면의 상태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면, 우리는 게임을 문학이나 철학적 작품과 비교(하고 또 그에 따라 판단)하고자 할 것이다. 나의 제안은 (게임의) 예술적 지위 여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그 경험을 조망함으로써 관심의 초점을 (기껏해야 미심쩍을 뿐인 목표인) 게임의 고급 문화로의 편입으로부터 보다 심오한 게임플레이 경험으로 옮기자는 것이다. 이처럼 게임플레이 경험 깊이의 심화라는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그 경험에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면서 게임이 기존의 경험적 한계를 넘어서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미학’ 그리고 ‘경험’
게임은 멀티미디어 작업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게임은 숙련된 개인들의 협업으로 만들어져 단일 매체의 경계를 가뿐히 넘어서는 종합예술(Gesamstkunstwerks)라 부를 수 있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 우리는 그 초점을 전체적인 경험에 맞추거나, 또는 시각적 재현이나 애니메이션, 레벨 디자인, 대사, 음악 등 보다 협소한 부분에 맞출 수 있다. 여기서 내가 ‘경험’이라 칭한 것의 개념은 ‘미학(또는 미적인 것)’의 개념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통해 드러날 수 있는데, 그 의미는 다원적이다. 서양 미학은 일반적으로 아이스테시스(aísthēsis, 감각 및 그로부터 얻는 분별력)과 노에시스(noesis, 순수하게 지적인 이해 또는 이성의 적용)을 구분해왔다. ‘미학’은 종종 ‘감각(sensation)’, ‘지각(perception)’ 및 ‘판단(judgement)’의 개념이 중첩되어 확장된 방식으로 이해되곤 하는데, 여기서 감각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얻는 것이고, 지각에서는 관찰자의 활동이 대상을 인식하거나 인지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며, 판단의 경우 미학적 판단이 개념이나 이성의 적용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닌다. ‘게임 미학’이란 컴퓨터게임, 디지털게임 또는 비디오게임이 지니는 특별한 독특성을 함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게임 미학은 ‘게임의 플레이란 어떤 느낌인가’와 같은 게임플레이 경험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감각을 통해 특정한 유형의 경험이나 인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데, 미학적 관점에서 연구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는 지속적으로 소위 ‘고급’ 문화(high culture)와 대중문화(popular culture)간의 연속성을 주장해왔다. 듀이의 생각은 인간이 분열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와 같은 분열은 우리의 (감정적, 지적, 감각적) 능력이 서로 자연스럽게 상호작용하지 못하도록 구획되거나 분리될 때 발생한다. 이 분열은 ‘예술’의 영역이 ‘생활’의 영역과 분리된 것으로 여겨지는 순간에 발생하는데, 예컨대 미술 갤러리나 오페라 하우스 같은 지정된 공간에 진입할 때에만 미적 경험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그리고 그 외부에서는 미적 경험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그 순간에 발생한다. 이러한 인식은 결국 그 외의 다른 모든 경험들을 비(非)미적인 것으로 방치하는 것이자, 심지어는 임금을 벌거나 집 청소하기, 건강 유지, 친구와의 대화 등 다양한 여타의 경험들을 직접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거기에는 다른 어떤 가치도 없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즉각적인 경험(immediate experiences)이 향상되면서 미적 경험이 개인의 주요 관심사와 삶에 통합될 때 가능한 풍요로움을 놓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가, 큐레이터, 비평가들을 탓하자는 뜻은 아니며, 예술세계에 우리의 경험을 깊이 있게 발전시킨 작품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 그러한 작품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예술세계를 분리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원하는 금전적 이해관계가 실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비/예술의 구분을 짓는 권력을 공고히 하고 ‘이것이 예술이다’라는 상징적 지위를 부여하는 권능은 현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게임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에는 다양한 중요 가정들이 내재하는데, 이러한 가정들이 게임 플레이 경험에 대한 세밀한 주의력을 발전시키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우선 어떤 것이 예술 작품인지 아닌지를 추정할 때 적용되는 ‘예술’의 개념에 대한 가정이 있다. 이러한 가정은 이분법적으로 분류함으로써 질문의 확장을 억압할 수 있다. 둘째, ‘게임’을 단일한 카테고리로 묶는 가정이 있다. 이는 단일한 장르에서도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 게임플레이를 분석하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게임을 (대부분의) 다른 예술 작품들의 방식을 통해 식별이 가능한 객체 또는 작품이라고 보는 가정이 있다. 이러한 인식틀에서 (게임의 미적) 가치는, 게임플레이의 경험을 최대한 활성화하기 위해 플레이어가 게임플레이에 들여오는 과정보다는, 개발자의 예술적 통찰이 담긴 표현에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다크 소울(Dark Souls, 2011, From Software)〉 같은 게임이 우울증에 대해 도움이 된다는 보고가 있는데, 그와 같은 플레이어의 경험적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긴 과정 동안 형성된 플레이어와 게임 간의 연결 속에서 플레이어가 가지게 된 심리적 상태(와 게임플레이에 대한 전념)였다.
비평가의 미학적 기준
지난 2005년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Roger Ebert)는 저자의 통제를 필요로 하는 문학이나 영화 등의 진지한 예술과는 달리, 본래적 속성상 플레이어의 선택을 요하는 게임은 예술의 위상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후에 이와 같은 발언이 바보같은 짓이었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에버트의 주장은 게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 - 게임은 유치하고, 세련되지 못하며, 즉각적인 만족을 충족시킬 뿐이며, 화려한 시각효과만 가득하고, 모호성을 배제하기 위해 정량화되고, 저속한 감정에 영합하는 것이라는 - 에 부합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수행했던) 로저 에버트의 주장에 대한 해체나 반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의 본질을 강조하려 한다. 그 주장이란 예술의 지위를 진지하게 다투려면 게임이 다른 예술 형식들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이와 같은 주장은 논쟁의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며, 심지어 일부 게임 철학연구자들조차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예술 철학자인 그랜트 태비노어(Grant Tabinor)는 주로 게임을 예술로 간주할 수 있을지와 같은 존재론적 문제를 연구해왔다. 이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음에도, 그는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일부 비디오게임만이 예술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접근 방식은 예술에 대한 기존의 정의에 기반하여, 게임이 해당 조건을 충족시키는지 여부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어떤 단일한 이론에만 의존하는 접근은 피하는 대신, 미적인 속성이 목록화된 ‘클러스터 이론(cluster theory)’의 방식을 취했다. 즉 목록의 미적인 속성 중 충분한 수를 충족시킨 게임은 예술작품이라 간주되는 것이다. 2009년의 저작 〈The Art of Videogames〉의 177페이지에서 태비노어는 미학자 베리스 거트(Berys Gaut)가 제시했던 클러스터의 정의를 언급하는데, 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속성들에 부합하는 것을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것들은 예술 작품이 아니다:
(1) 아름다움이나 우아함 등(감각적인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속성)과 같은 긍정적인 미적 속성을 지닐 것, (2) 감정을 표현할 것, (3) 지적으로 도전적인 것(예를 들어 기존의 견해나 사고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질 것), (4) 형식적으로 복합적이되 일관될 것, (5) 복잡다단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것, (6) 개별적인 관점을 보여줄 것, (7) 창의적인 상상력을 수행할 것(독창적일 것), (8) 숙련된 고도의 기술로 생산된 인공물 또는 퍼포먼스일 것, (9) 기존 예술 형식(음악, 회화, 영화 등)에 속할 것, (10) 예술작품을 만들겠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산물일 것
태비노어는 베리스 거트가 예술 작품이라면 이와 같은 10개의 조건을 전부 충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군집적인 정의를 구성하는 조건을 제시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태비노어가 기존의 클러스터 이론이 제시한 이와 같은 조건들이 광범위하게 옳다는데 동의하는 것 - 그러한 이론이 세부 사항에 대한 수정 권한을 보유하고 있을지라도 - 은 명백해 보인다. 이러한 접근 방식에 따라 그는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 1978, Taito)〉나 〈레드 데드 리뎀션(Red Dead Redemption, 2010, Rockstar San Diego)〉 등 게임계에서 클래식으로 인정받은 게임들을 예술적 지위에서 배제했는데, 왜냐하면 이 게임들은 클러스터 이론과 매우 부분적으로만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Routledge Companion to Game Studies(p. 60)〉의 한 챕터에서 태비노어는 〈레드 데드 리뎀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레드 데드 리뎀션〉은 최신 게임 예술의 정점으로서 자주 거론되지만, 게임의 드라마나 내러티브는 섣부르게 흉내낸 파생적인 서부극에 가깝다. 영화로 치면 단호하게 B급이다. 많은 경우 게임의 서사나 캐릭터, 연기, 각본 등에서 낮은 수준이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승인된 예술에서 나타나는 세련됨의 정도에 도달하는 경우를 게임 중에서 찾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상기의 글은 결국 〈레드 데드 리뎀션〉에 대해 ‘내러티브, 캐릭터, 연기, 각본’에 따라 판단했음을 보여준다. 그와 같은 요소들은, ‘상호작용(또는 그 고유한 속성을 지칭하는 다른 프레임)’에 의해 생성되는 게임플레이 경험의 리듬이나 느낌보다는, 클러스터 이론에 더 부합하는 것들이다. 결국 태비노어는 게임이 단순히 기존 예술형식의 파생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하나의 예술 형식이라고 보는 입장임에도, 클러스터 이론을 적용한 그의 주장은 기존의 예술 이론에서 나온 (미적) 속성의 목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러한 속성들은 게임이 예술로서의 자격 - 심지어는 게임이 미학적으로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는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 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고려가 이루어지지 않은 문화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수립된 것들이다. 결국 태비노어의 철학적 방법론은 이와 같은 결과로 이어져 버렸다.
게임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들은 게임플레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기존의 철학 분야만 게임플레이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계는 중립적인 역사적 맥락 내에서 게임을 소개함으로써 게임플레이의 속성에 관한 문제를 우회하는 경향이 있다. 영국에서 최초로 열렸던 게임 전시는 2002년 바비칸 아트 갤러리(the Barbican Art Gallery)에서 열렸던 〈Game on: the History and Culture of Video Games〉였다. 미국의 스미소니언 미술관(The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또한 2012년 The Art of Video Games 전시를 통해 〈컴뱃(Combat, 1977)〉에서부터 〈리틀 빅 플래닛(Little Big Planet, 2011)〉까지의 과정을 역사적으로 접근했다. 또 다른 (우회) 전략으로는 게임의 아바타나 가상세계 거주의 개념, 게임의 표상적 측면 등 게임에 대한 이해에 있어 보편적인 측면들을 앞세우는 것이 있다. 미국의 아티스트 코리 아켄젤(Cory Arcangel)은 게임의 시각적 측면에 관념적으로 접근하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게임-관련 예술(game-related art)’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현대미술 박물관, 휘트니 박물관, 시카고 현대 미술 박물관 등지에서 전시되었다.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1983년의 게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모딩하여 푸른 하늘과 8비트의 하얀 구름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없앤 비디오 설치 작품 〈슈퍼마리오 클라우드(Super Mario Clouds)〉가 있다. 여기에는 마리오도, 쿠파도, 굼바도 없다. 이 작품에서 게임플레이는 시각적 명상(visual contemplation)을 위해 퇴치되었다.
아켄젤은 또한 2011년 바비칸에서 〈Beat the Champ〉라는 전시를 선보였는데,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간 순서대로 14개의 볼링 게임을 정렬한 이 설치 작품에서도 게임플레이는 배제되었다 . 전시 공간을 걸어가면서 관객은 볼링공이 핀에 부딪히는 소리가 아닌 거터볼(gutter ball) 소리를 듣게 되는데, 이는 점수를 낼 수 없도록 아켄젤이 볼링 게임들을 프로그래밍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갤러리의 관객들은 로저 에버트가 찬양했던 작가적 통제(authorial control)와 조우하게 된다. 연이어 발생하는 상황(실패)에 대한 사유를 유도하기 위해 디자인된 실패한 볼링 게임의 상황을 관객들이 오디오-비주얼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플레이의 경험적 측면에서 볼 때 이는 실패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사회적 및 게임의 맥락이 거세된 (미리) 결정된 실패다. 전시회장에 전시된 콘솔의 존재는 - 해당 전시에서 게임 플레이는 단순한 녹화본이 아니었다 - 관객이 게임을 직접 플레이할 수 없다는 불능성(inability)을 강조한다. 이 불능성은 게임플레이와 연계되어 발생하는 긴장과 불안, 춤을 추듯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의 움직임, 게임 리듬에 적응해가는 과정, 피할 수 없는 좌절, 그리고 어떤 게임이 가장 매력적인 게임플레이를 제공했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판단을 경험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아켄젤은 게임을 가지고 이 작품을 만들었으며, 이는 또한 그가 게임을 전시한 방식이기도 하다. 〈수퍼마리오 클라우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예술성은 전시의 개념적이고 시각적인 측면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예술 세계에서 익숙한 언어다. 하지만 이는 분명 게임이 아니다. 하나의 경험으로서 게임플레이의 신체적 도전 또한 다뤄지지 않았다.
* Image from: https://coryarcangel.com/shows/beat-the-champ
한편, 로비 쿠퍼(Robbie Cooper)의 설치작품 〈Immersion(2008)〉은 게임플레이를 핵심적인 관심사로 둔다. 이 작품은 전세계 디지털 미디어 이용자들의 신체적인 반응을 기록한 것 인데, 아이들의 게임 플레이로 구성된 부분이 눈에 띈다. 플레이어 얼굴의 고화질 캡쳐는 플레이어들의 순간적인 마음 상태를 우리가 엿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이 작품에서 카메라는 마치 플레이어들이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는 듯한 위치에 놓여있다). 비록 바뀌는 게임 화면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대신 게임에서 들려오는 사운드와 플레이어의 얼굴 표정 및 신체 자세 간의 대응을 볼 수 있다. 한 소녀가 격투 게임인 〈철권5: 다크 레저렉션(Tekken 5: Dark Resurrection)〉을 플레이하고 있다. 타격이 이어지면서 캐릭터들의 신음소리나 고함소리 등과 함께 특수 효과가 곁들어 진 사운드가 들린다. 우리는 게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맞출 수 있는데, 왜냐하면 〈철권〉을 플레이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움직임이 어떤 사운드를 내는지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쿠퍼의 주체들이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인지적으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볼 수 있으며, 또한 플레이어에 의해 어떤 행동이 수행되었으며 이후 그러한 행위가 플레이어-게임 간의 장치적 루프(machinic loop) - 즉 게임플레이 - 내에서 플레이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겪는 경험의 복잡성 및 그러한 경험이 플레이어의 신체적 존재감과 어떤 식으로 엮여들어가는지에 대해 우리가 주의를 집중시키는 데 성공한 쿠퍼지만, 그 너머를 밝히는 것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거울을 들어 보여주기는 했지만 관련해서 주석은 달지 못한 셈이다.
* Image from: https://robbiecooper.com/project/immersion
게임 경험을 발전시키기 위해 기존의 게임플레이 규범에 도전하는 인디 게임개발자들은 플레이어와 개발자들이 ‘좋은 게임플레이’ 모델로서 수용하여 일반화된 장르 경험을 인식시킴으로써 우리의 게임 경험을 발전시켜왔다. 그에 따라 그들은 현재의 게임 디자인에 있어서 진부해진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다른 대안적인 경험은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해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해왔다. 물론 보다 규모가 큰 개발사들도 이러한 시도를 해왔다. 나는 여기서 그와 같은 혁신의 역사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와 연관된 인디 게임의 사례들은 수없이 많고, 이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도 많이 논의가 되어왔으므로, 여기서는 간결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려 한다. 우선 〈언더테일(Under Tale, 2015, Toby Fox)〉은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유일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그리고 그것이 게임플레이가 생성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플레이어로 하여금 RPG라는 장르가 지녀온 가정을 대면하도록 만들었다. 〈브레이드(Braid, 2008, Number None)〉는 시간-기반 메카닉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면서 많은 게임들에 영향을 미쳐왔던 인과성에 대한 생각을 재고토록 했다. 〈스탠리 패러블(Stanley Parable, 2013, Galactic Cafe)〉는 게임 내 반복성의 한계를 통해 선택과 자유의 문제를 다루면서 게임 속 자유가 궁극적으로 제한적이라는 문제를 다뤘다. 〈항아리 게임(Getting Over It with Bennett Foddy, 2017, Bennett Foddy)〉는 플레이어가 ‘(스스로를) 이겨내는 것’이 가능한지, 아니면 그 자신의 자아 또는 ‘하드코어 게이머’로서의 정체성을 위해 자신에 대한 가혹한 기대 속에 갇히게 되는지를 통해 플레이어와 그 자신 간의 관계를 시험하게 한다. 그 밖에도 다양한 게임들이 게임플레이 경험에 대한 성찰을 유발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신중한 제안들을 기다려야 한다거나 게임의 예술로서의 지위나 미학적 경험을 그러한 게임들에 온전히 의지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깊이 있는 게임플레이 경험을 위해
일상의 삶과 예술을 통합하자는 존 듀이적 프로젝트는 우리가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루어 예술적인 관심을 일상으로 가져올 때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는 결코 쉬운 도전이 아니다. 이번 글에서 나는 게임플레이 ‘경험’ 및 그 경험을 깊이 있게 만들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각 개인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게임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그러한 능력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규범에 맞춰 자신들의 능력을 구획하지 않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듀이적 이념과 부합한다. 다양한 범주의 게임들이 공유하는 게임플레이 경험이 지니는 보편적인 측면들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와 같은 기술적인 일반화(descriptive generalization)는 개인들이 특정 상황에서 겪게 되는 특정한 경험들에 대한 희미한 그림자일 뿐임을 인정해야 한다. (게임 플레이 경험에는) 게임의 메카닉을 내재화하고, (게임에) 적응해가면서 추론해낸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대응하면서 점진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기술이 발전하는 것에는 기쁨이 존재한다. 또한 다양한 선택에 대한 전략적 평가와 그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한 추측이 존재한다. 관련성 여부에 따라 정보의 조각들이 선택적으로 기억되거나 잊혀지는 긴장이 존재한다. 또한 (게임플레이 경험에는) 움직이는 특정 자극에 대해서 지적이지만 무의식적인 주의 집중 - 다른 것에는 향하지 않는 - 이 존재하는데, 이는 복잡다단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회와 위협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휴식과 패배 또는 승리가 걸린 순간들이 흘러들어왔다가 나가는 흐름에 대한 감상도 존재한다. 일부 레벨 같은 특정 맥락에서는 찰나의 행동이 일부 가능성을 응축시키고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예리한 인식이 존재한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으로, 콘트롤이 포기되면서도 행사되는 고요한 순간에 자동적이고, 직관적으로, 그리고 원숙하게(능수능란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에서 느껴지는 즐거움이 존재한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게임플레이 경험과 관련해서 기억상실을 겪곤 한다. 게임을 플레이한 경험을 우리 자신의 머리 속에서 단순한 '재미'의 경험으로 치부하고는 나중에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예술’이라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해 미학적 관점을 적용하지 않는 탓이다. 그렇지 않으면, 게임을 보다 나아지거나 도전을 이기는 유형의 훈련으로 여겨, 그 진척의 정도에 따라 가치를 측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 대신, 게임플레이의 윤곽과 질감에 대해 곰곰히 곱씹어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게임플레이가 어떤 식으로 펼쳐졌고, 어떻게 발전해갔으며, 어떤 부분이 다를 수 있었을지,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를 매료시켰던 점 또는 그렇지 못했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물론 게임플레이 중에는 수행해야 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플레이하는 그 순간에 그와 같은 성찰을 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게임에 능숙해질수록 그와 같은 성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월해질 것이다. 그와 같은 성취(게임 내에서의 성취와 게임플레이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 대한 성취 모두)를 이루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습관의 철학자인 클레어 칼라일(Clare Carlisle)은 생각, 신체적 감각 및 감정적 반응에 대한 우리의 주의력이 행동을 통해 습관화할 수 있으며 감정적 감수성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복잡다단한 게임플레이 경험 속에서 우리는 그 경험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고양시킬 수 있을 것이며, 그에 따라 우리의 경험에 깊이를 더함으로써 게임이 잠재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포용성을 키울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