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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선 매체 : “콘솔 게임은 대중매체인가?”

25

GG Vol. 

25. 8. 10.

손 안의 세계에서 모두의 거실로

     

지난 GG 23호에서 나는 지하철에서 스팀덱을 꺼내는 것을 주저했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640그램의 무게감과 함께 느꼈던 그 미묘한 시선들, 그리고 "저 사람 게임에 진심인가보다"라는 상상 속 목소리들. 그런데 최근 콘솔 게임을 둘러싼 여러 변화들을 관찰하면서, 그때의 경험이 단순히 개인적인 민감함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게임이라는 매체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 그리고 그 위상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였던 것이다.


이런 의문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과연 콘솔 게임을 대중매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중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대중매체의 조건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많은 사람이 즐긴다고 해서 대중매체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대중매체는 몇 가지 핵심적 특징을 갖는다. 첫째는 광범위한 접근성이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는 공유 가능한 경험이다. 개인적 소비를 넘어서 사회적 담론과 공통의 문화적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일상적 통합성이다. 특별한 경우에만 접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넷째는 문화적 영향력이다. 사회의 가치관, 담론, 정체성 형성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준으로 20세기 대중매체들을 살펴보면 명확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신문은 19세기 후반부터 대량 인쇄 기술과 배급 시스템의 발달로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했고, 공통의 뉴스와 담론을 제공하며 근대 사회의 공동체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라디오는 1920년대부터 가정으로 침투하여 일상의 배경이 되었고, 동시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 TV는 1950년대부터 시각적 요소를 추가하여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거실의 중심에 자리잡으며 가족 단위의 공유 경험을 만들어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들 매체가 모두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속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라디오나 TV가 귀하던 시절에는, 한 가족이나 이웃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함께 청취하고 시청했다. 책의 경우에도 개인적인 경험 매체로 보이지만, 잡지나 만화책 한 권을 여러 명이 돌려가며 읽는 방식으로 집단적 경험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런 집단적 경험의 공유가 이들 매체를 진정한 대중매체로 만드는 핵심 요소였다.


하지만 대중매체의 소비 패턴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매체를 접하게 되는 공간도 모두 상이하다. 누군가는 방 안에서, 대중교통에서, 점심시간에 짬을 내 회사에서 등, 사람들의 이동이 증가한 것처럼 매체도 사람과 함께 이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스마트폰이 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선 스마트폰을 통해 접하게 되는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와 같은 OTT 콘텐츠 뿐만 아니라, 숏츠나 릴스와 같은 숏폼 콘텐츠도 "함께, 한 공간에서 보는" 것이 아님에도 "함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요소를 갖고, 전세계적인 콘텐츠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시공간의 장벽 없이 매체와 콘텐츠에 대한 접근이 전세계 어디에서든 가능해지고 이를 통한 경험의 공유와 소통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제 한국 드라마를 미국에서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고, 일본의 게임을 유럽에서 동시에 플레이할 수 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콘텐츠를 거의 같은 시점에 접하게 되면서, 그러한 경험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통용되는 새로운 패턴이 형성된 것이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이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 같은 콘텐츠는 전세계에서 동시에 화제가 되었고, 각국의 소셜미디어에서 동일한 장면과 대사들이 밈으로 확산되었다. 유튜브의 바이럴 영상이나 틱톡의 챌린지도 마찬가지다. 물리적으로는 각자의 공간에서 개별적으로 소비하지만,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전지구적 규모의 공유 경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 콘솔 게임의 위치를 ‘휴대성’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콘솔 게임의 휴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휴대 가능한 미디어'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항상 정보와 문화 콘텐츠를 이동하면서 소비하려 했고, 기술은 이런 욕구에 부응하여 발전해왔다. 하지만 게임기의 경우는 다른 미디어와 구별되는 독특한 발전 경로를 보여준다.


1970년대 초기 콘솔들은 완전히 고정된 기기였다.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나 '아타리 2600'은 TV에 연결되어야만 작동했고, 거실이라는 특정 공간에 설치되는 것이 당연했다. 이는 당시 가전제품의 일반적 특성이기도 했다. TV, 라디오, 턴테이블 모두 무겁고 부피가 커서 한 번 설치하면 쉽게 옮기기 어려운 물건들이었다.


1980년대 후반 닌텐도 게임보이의 등장은 이런 패러다임에 균열을 가했다. 처음으로 게임이 거실을 벗어나 개인의 손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초기 휴대용 콘솔의 휴대성은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배터리 수명이 짧았고, 화면이 작고 흐릿했으며, 무엇보다 거실 콘솔과는 완전히 다른 게임들만 플레이할 수 있었다. 이는 '휴대용'과 '거실용'이 서로 다른 카테고리의 제품이라는 인식을 만들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구분은 점차 의미를 잃기 시작했다. 닌텐도 DS와 소니 PSP는 거실 콘솔에 근접한 성능과 복잡성을 휴대용 기기에서 구현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은 '축소된' 경험을 제공하는 보조적 기기로 여겨졌다. 진정한 비디오 게임 경험은 거실의 대형 TV와 강력한 콘솔에서만 가능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2017년 닌텐도 스위치의 등장은 이런 이분법을 근본적으로 해체했다. 처음으로 거실 콘솔과 휴대용 콘솔이 하나의 기기에서 완전히 통합된 것이다. 같은 게임을 집에서는 대형 TV로, 밖에서는 휴대용으로 끊김 없이 플레이할 수 있게 되었다. 게임 경험이 더 이상 특정 장소에 종속되지 않게 된 것이다. 현대인은 하루종일 여러 공간을 이동하며, 각 공간에서 서로 다른 활동을 한다. 집에서는 휴식을, 대중교통에서는 개인적 시간을, 직장에서는 업무를, 카페에서는 사교적 만남을 갖는다. 하이브리드 콘솔은 이런 다양한 맥락에 자연스럽게 적응한다.


전통적으로 게임은 매우 개인적인 매체로 여겨져 왔다. 혼자서 즐기는 오락, 특정 계층이나 세대만의 취미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의 변화들을 살펴보면 이런 인식이 과연 여전히 유효한지 의문이 든다. 콘솔 게임도 개별적 경험과 사회적 공유를 결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실천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여전히 경제적 접근성이나 기술적 진입장벽 같은 한계들이 존재한다. 또한 게임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콘솔 게임이 제공하는 새로운 형태의 상호작용성, 사회적 연결성, 문화적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복합적 상황에서 우리는 콘솔 게임의 매체적 지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콘솔 게임의 단순한 기술적 기능이나 시장 규모의 확장만을 살펴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콘솔 게임이 우리의 일상과 사회적 관계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경험을 종합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현대 콘솔의 기술적 진화가 열어가는 새로운 문화적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동하는 경험(Mobility)과 투명해지는 도구(Readiness-to-hand)

     

망치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목수를 떠올려보자. 그에게 망치는 더 이상 '무거운 금속 덩어리'가 아니다. 손목의 미묘한 움직임이 망치 머리의 정확한 타격으로 이어지고, 못이 박히는 소리만으로도 작업의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이때 망치는 목수의 의식에서 사라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망치는 목수의 손과 팔의 자연스러운 연장이 되어 '투명'해진다. 20세기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런 현상을 '용재성'(Zuhandenheit, readiness-to-hand)이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도구와 맺는 관계에는 두 가지 모드가 있다. 하나는 '현전성'(Vorhandenheit, present-at-hand)으로, 도구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는 상태다. 망치의 무게가 몇 그램인지, 손잡이의 재질이 무엇인지를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용재성'으로, 도구가 우리의 의도와 목적을 실현하는 투명한 매개체가 되는 상태다. 이때 우리는 도구를 통해 세계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하이데거의 ‘현전성’과 ‘용재성’ 개념을 게임에 접목한 흥미로운 논의가 있다. 게임을 처음 접하는 사람을 관찰해보면 이 두 모드의 차이를 명확히 볼 수 있다. 초보자는 컨트롤러의 각 버튼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의식적으로 기억하려 애쓴다. 이때 컨트롤러는 복잡하고 낯선 기계장치일 뿐이다. 하지만 수십 시간의 플레이를 거친 숙련된 게이머에게 컨트롤러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 그들은 버튼의 위치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게임 속 캐릭터를 움직이고 싶다는 의도가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즉시 번역되고, 그 결과가 화면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된다. 컨트롤러는 '투명'해졌고, 플레이어의 신체는 게임 세계까지 확장되었다.  이 논의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플레이어는 게임 속 적이 나타나면 즉시 공격 버튼을 누르고, 절벽이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점프한다. 이때 플레이어들은 "지금 X버튼을 눌러야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점프해야겠다"는 의도가 바로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번역되고, 화면에서 캐릭터가 점프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컨트롤러는 완전히 '투명'해져서, 플레이어의 신체와 게임 세계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용재성은 게임 컨트롤러와 마찬가지로, 콘솔 게임의 도구로써의 특성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하지만 현대 콘솔 게임의 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도구적 관점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서 영국의 사회학자 존 어리(John Urry, 2007)의 모빌리티 이론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어리는 현대 사회를 "어느 때든, 어느 장소에서든 네트워크화된" 모빌리티 사회로 규정했다. 그는 현대인의 정체성이 고정된 장소나 단일한 기술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술적 환경과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는 다섯 가지 서로 다른 형태의 모빌리티가 존재한다. 첫째는 사람의 신체적 이동, 둘째는 사물의 물리적 이동, 셋째는 상상적 여행(책이나 영화를 통한 정신적 이동), 넷째는 가상 여행(인터넷이나 전화를 통한 실시간 소통), 다섯째는 소통적 이동(사람 간의 메시지 교환)이다.  흥미롭게도 현대 콘솔 게임은 이 모든 형태의 모빌리티를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


TV에 연결하던 전통적인 거실 기반 콘솔은 주로 세 번째 모빌리티, 즉 상상적 여행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플레이어는 소파에 앉아 게임 속 가상 세계로 '상상적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최근의 닌텐도 스위치와 같은 하이브리드 콘솔은 게임을 이용하는 공간의 제한을 완전히 뛰어넘는다. 사용자가 물리적으로 이동할 때 게임기도 함께 이동하며, 동시에 게임 진행 상황과 세이브 데이터라는 '디지털 객체'도 끊김 없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집에서 대형 TV로 즐기던 게임을 지하철에서 휴대 모드로 이어갈 수 있고, 다시 친구 집에 가서 그곳의 TV에 연결해 함께 플레이할 수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용재성’과 어리의 ‘모빌리티’가 만난다. 콘솔이 진정으로 '투명한 도구'가 되려면 단순히 조작이 쉬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다양한 모빌리티 욕구에 자연스럽게 부응해야 한다. 현대인은 고정된 장소에서만 게임을 즐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동 중에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혼자 있을 때도 게임 경험이 끊김없이 이어지기를 원한다. 이런 욕구가 충족될 때 콘솔은 비로소 진정한 용재적 도구가 될 수 있다. 어리(2007)는 또한 현대 사회에서 "이동하는(mobile) 기계"와 "체류(inhabit)하는 기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이동하는 기계는 자동차, 기차처럼 물리적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들이고, 체류하는 기계는 전화, 인터넷처럼 한 장소에 머물면서도 다른 곳과 연결되게 해주는 기술들이다. 현대 콘솔은 이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휴대 모드에서는 '이동하는 기계'로 작동하고, 도킹 모드(독 모드)에서는 '체류하는 기계'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콘솔 게임의 이중적 특성은 용재성을 한층 더 정교하게 만든다. 과거에는 게임을 하기 위해 특정 장소(거실, 방)에 가야 했고, 특정 자세(소파에 앉기, 책상 앞에 앉기)를 취해야 했다. 이는 게임 경험에 공간적, 신체적 제약을 가했다. 하지만 현대 콘솔은 이런 제약을 제거한다. 어떤 장소에서든, 어떤 자세에서든 자연스럽게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투명성'을 실현한다.


또한 콘솔의 모빌리티는 우리가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도 바꾸고 있다. 전통적인 거실 콘솔에서는 게임을 위해 별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게임은 여가 시간의 활동이었고, 다른 일상적 활동들과는 분리된 영역에 속했다. 하지만 휴대 가능한 콘솔은 게임을 일상의 틈새 시간으로 침투시켰다. 버스를 기다리는 5분, 점심시간의 30분, 잠들기 전의 1시간이 모두 게임 시간이 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게임 플레이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게임 경험이 파편화되면서도 동시에 연속성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아침에 집에서 시작한 게임을 지하철에서 잠깐 이어가고, 점심시간에 다시 진행하며,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마무리하는 식으로 하나의 게임 경험이 하루종일에 걸쳐 분산되지만 통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시간 경험의 변화는 어리가 분석한 현대 사회의 "시간-공간 압축" 현상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기술의 발달로 물리적 거리는 의미를 잃어가고, 대신 시간의 활용 방식이 더욱 중요해진다. 콘솔의 모빌리티는 이런 압축된 시간-공간에서 게임 경험을 최적화하는 도구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어리가 제시한 "용재적인 기계, 이미지, 통신장치가 그득한"  현대 사회에서 콘솔은 다른 기기들과 연결되면서 더욱 복합적인 용재성을 구현한다. 예를 들면, 콘솔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동시에 스마트폰으로 친구의 온라인 상태를 확인하고, 태블릿으로 게임 공략을 검색하며, PC에 연결된 디스코드로는 채팅을 한다. 이때 각 기기는 고유한 역할을 하면서도 하나의 통합된 경험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다.


이런 통합적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각 기기 간의 전환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사용자는 어떤 기기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경험을 추구하고, 기술은 배경으로 물러난다. 이것이야말로 하이데거가 말한 용재성의 본질이며, 어리가 예견한 모빌리티의 이상적 사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기술적 발전이 단순히 '더 많은 감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진정한 용재성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적절한 정보'를 '적절한 때'에 제공할 때 달성된다. 하이데거식으로 해석하자면, 망치를 사용할 때 우리가 망치의 재질이나 소재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잘 설계된 콘솔은 플레이어가 그 기술 자체를 의식하지 않게 만든다.


결국 현대 콘솔 게임의 진화는 기술의 진화이면서 동시에 기술의 소거 과정이기도 하다. 더 정교한 기술을 통해 기술을 덜 의식하게 만드는 것, 더 복잡한 시스템을 통해 더 편리하고 단순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사용자의 다양한 모빌리티 욕구를 자연스럽게 충족시키는 것. 이것이 21세기 콘솔이 달성한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손 안의 작은 기기가 거대한 게임 세계로의 투명한 창이 되고, 동시에 언제 어디서나 접근 가능한 문화적 매개체가 되는 것. 여기서 우리는 기술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이상적인 관계의 한 모습을 발견한다. 기술은 다시 한번 투명해지고, 사람들은 온전히 함께 게임하는 즐거움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런 변화는 개인적 경험의 차원을 넘어선다. 하이데거는 용재성이 단순히 개인과 도구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맺는 근본적인 관계 방식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도구를 통해 세계에 개입하고, 도구가 투명해질 때 비로소 세계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게임의 맥락에서 보면, 콘솔이 투명해질 때, 기술적 매개는 사라지고 플레이어는 게임 세계와 직접적 관계를 맺으며, 다른 플레이어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연결된 개인들의 새로운 ‘디지털 놀이터’

     

1980년대, 누군가 스트리트 파이터를 플레이하고 있으면, 그 뒤로 서너 명이 모여들고 "어퍼컷!", "가드해!", "콤보 넣어!"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흔한 오락실 풍경이었다. 플레이어가 어려운 기술을 성공시키면 함께 환호하고, 실패하면 함께 아쉬워한다. 때로는 게임을 직접 하지 않는 사람이 더 흥미진진하게 경험을 즐기기도 한다. 이는 2000년대 PC방에서의 풍경도 비슷했다. 이런 집단적 게임 경험은 단순히 한 사람의 플레이를 여러 명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유된 사건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개인 PC의 보급이 증가하면서 오락실이나 PC방보다는 집에서 혼자 게임을 하는 것이 기본이 되었고, 멀티플레이어 게임이 있다 해도 각자 자신의 화면만 보며 플레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온라인 게임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었지만, 그 연결은 주로 기능적이고 목적 지향적이었다. 게임을 이기기 위해,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협력하는 것이지, '함께 있는 즐거움'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PC 게임 환경에서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외부 도구들이 발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디스코드(Discord)다. 2015년 출시된 디스코드는 게이머들이 음성 채팅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게임 화면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했다. 이를 통해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마치 같은 공간에서 게임을 하는 듯한 경험이 가능해졌다. 디스코드의 화면 공유 기능이 게이머들에게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혁명적이었다. 온라인상으로도 친구가 어려운 보스와 싸우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응원하거나 조언할 수 있게 되었고, 복잡한 퍼즐 게임을 함께 풀어나가거나, 새로운 게임의 조작법을 가르쳐주는 것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위해서는 게임과는 별도의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해야 했고, 특히 콘솔 게임의 경우 종종 복잡한 설정이나 세팅으로 인해 원활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콘솔 사용자들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생태계 안에서 제한된 소통 수단만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음성 채팅은 가능했지만 화면 공유는 불가능했고, 디스코드 같은 외부 애플리케이션과의 연동도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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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 스위치2

     

그런데 최근 닌텐도 스위치2가 화면 공유와 통합 음성 채팅 기능을 자체적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기능 추가를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이제 콘솔 사용자들도 별도의 외부 도구나 복잡한 설정 과정 없이 게임 화면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음성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하이데거의 투명성 개념과 연결할 수 있다. 소통을 위한 기술적 복잡성이 사라지고, 순수한 게임 경험과 사회적 상호작용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런 기능이 서로 다른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작동한다는 점이다. 즉, 멀티 플레이를 위한 화면 공유와 채팅 뿐만 아니라, 이제는 콘솔 게임 중에 각자 다른 게임을 하면서도 서로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명은 복잡한 RPG의 스토리를 진행하고, 다른 한 명은 액션 게임의 보스전을 벌이면서도 서로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며 대화할 수 있다. 이는 콘솔 게임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게임 경험이다.


이런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20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한 게임 실황 방송 문화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트위치, 유튜브, 아프리카TV 등의 플랫폼을 통해 "게임 보기"는 하나의 독립적인 엔터테인먼트 장르로 자리잡았다. 수백만 명이 다른 사람의 게임 플레이를 시청하며, 채팅을 통해 실시간으로 소통한다. 이는 과거 아케이드의 "구경하는 재미"가 디지털 환경에서 대규모로 재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청자들은 스트리머의 뛰어난 실력에 감탄하거나, 실패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거나, 어려운 구간을 함께 고민한다. 때로는 채팅을 통해 힌트를 주거나 응원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이는 일방향적 시청이 아니라 쌍방향적 참여다.


콘솔의 내장 화면 공유 기능은 이런 게임 실황 문화를 개인적이고 친밀한 차원으로 가져온 것이다. 수만 명의 시청자가 아니라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하는 소규모 실황인 셈이다. 하지만 규모가 작다고 해서 그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화면 공유는 더욱 자연스럽고 깊이 있는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변화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놀이터'다. 전통적인 놀이터는 명확한 물리적 경계를 가진 공간이었다. 학교 운동장, 동네 공원,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등이 그 예다. 이런 공간에서 아이들은 함께 뛰어놀고, 게임을 만들어내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놀이가 단순히 개별적인 활동들의 합이 아니라는 점이다. 놀이터에서는 각자 다른 놀이를 하면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네를 타는 아이, 미끄럼틀을 오르내리는 아이, 모래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하나의 역동적인 놀이터 생태계를 만들어낸다.


기존 콘솔 환경에서는 어려웠던 화면 공유 기능이 새롭게 만들어내는 디지털 놀이터도 비슷한 특성을 갖는다. 각자 다른 게임을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공유된 소통 공간에서 함께 있다. 이는 물리적 놀이터와 여러 면에서 유사한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는 특성도 갖는다. 우선 공간의 제약이 없다. 전 세계 어디에 있든, 언제든지 접속만 할 수 있으면 이 디지털 놀이터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놀이의 다양성도 무한하다. 물리적 놀이터에서는 그 공간이 제공하는 시설의 한계가 있지만, 디지털 놀이터에서는 수천 가지의 서로 다른 게임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런 디지털 놀이터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경계를 흐린다는 점이다. 나는 내 집 침실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게임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친구들과 연결된 반공적 공간에도 존재한다. 내 게임 화면은 나만의 것이면서 동시에 친구들과 공유된다. 이는 전통적인 공간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공간성이다.


이런 공간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예의와 규범도 생겨난다. 예를 들어, 친구가 중요한 게임 장면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대화를 자제하는 암묵적 규칙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적절한 조언을 제공하는 방식, 게임의 스포일러를 피하는 방법 등이 자연스로운 규범으로 형성된다. 이는 아케이드나 PC방에서 발달했던 집단적 게임 문화의 디지털 버전처럼 보인다. 물론 디지털 환경이라는 점에서 나타나는 고유한 특성도 있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 주고받는 기존의 음성 채팅이나 텍스트 메시지는 주로 언어적 소통에 의존했다. 하지만 화면을 공유하면 비언어적 소통이 가능해진다. 친구가 게임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말해주지 않아도 화면을 통해 직접 관찰할 수 있다.


아케이드 시대, PC방 세대의 집단적 게임 문화가 콘솔 게임으로 이어져 다시 현대적으로 재해석된다. 결국 콘솔의 이러한 발전은 단순한 기술적 기능 추가가 아니라, 게임이라는 매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공간의 근본적 재편, 개인적 경험과 집단적 경험,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연결된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이 새로운 놀이터에서, 게임은 더 이상 혼자 즐기는 오락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적 경험이 되고 있다.

     


경계에 선 매체: 콘솔 게임의 대중매체적 가능성

     

지금까지 우리는 콘솔 게임의 진화를 철학적, 사회학적 렌즈를 통해 다각도로 분석해왔다. 하이데거의 용재성 개념을 통해 콘솔이 어떻게 투명한 도구가 되어가는지를 살펴보았고, 존 어리의 모빌리티 이론으로 현대 콘솔이 구현하는 새로운 형태의 이동성을 탐구했다. 화면 공유와 음성 채팅 기능이 만들어내는 디지털 소통 공간의 확장을 분석했고, 다중 기기 생태계에서 콘솔이 차지하는 복합적 위치를 조명했다. 이 모든 논의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질문은 하나다. 과연 콘솔 게임을 새로운 형식의 대중매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콘솔 게임이 고정된 거실에서 벗어나 개인의 일상 어디에나 스며들 수 있게 된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개선이 아니라 매체적 존재 방식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과거 콘솔 게임이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서 하는 특별한 활동"이었다면,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적 매체"로 변모했다. 이는 20세기 대중매체들이 거쳐온 전형적인 진화 경로와 정확히 일치한다. 라디오가 거실의 대형 가구에서 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TV가 가족 중심의 고정 기기에서 개인화된 시청 도구로 발전한 것과 같은 궤적이다.


하이데거의 용재성 개념으로 분석할 때, 현대 콘솔의 가장 중요한 성취는 기술적 복잡성을 점차 보이지 않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순수한 게임 경험만이 전면에 나서는 것이다. 동시에 어리의 모빌리티 이론은 이런 투명성이 어떻게 현대인의 복합적 일상과 조화를 이루는지를 보여준다. 콘솔은 "이동하는 기계"와 "체류하는 기계"의 이중적 특성을 완벽하게 구현하면서, 사용자의 다섯 가지 모빌리티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킨다. 신체적 이동과 함께 이동하고, 디지털 콘텐츠를 전송하며, 가상 세계로의 상상적 여행을 제공하고, 실시간 소통을 가능하게 하며, 지속적인 메시지 교환을 지원한다. 이런 모빌리티의 구현은 콘솔 게임을 단순한 오락 도구에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익숙하게 등장하는 매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 주목할 점은 콘솔 게임이 글로벌하면서도 동시에 로컬한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같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전세계에서 사용되지만, 각 지역의 문화적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사용 패턴과 사회적 의미를 생성한다. 이는 주로 서구에서 개발되어 전세계로 일방향적으로 확산되던 기존의 대중매체 패턴과는 다른 양상이다.


하지만 이런 매체적 진화에도 불구하고, 콘솔 게임이 진정한 '대중' 매체라고 단언하기에는 여전히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문제는 경제적 진입장벽이다. 콘솔 기기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구매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은 콘솔 유저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현실이다.


최근 도입된 닌텐도 스위치 2의 '나눔 통신', 플레이스테이션의 '셰어 플레이', Xbox의 '홈 공유' 등은 분명히 혁신적인 시도다. 이런 기능들은 게임 소프트웨어의 공유를 통해 경제적 부담을 일정 정도 완화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내재되어 있다. 콘솔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하드웨어 판매량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기기 자체의 개별 소유는 여전히 필수적이다. 결국 '나눔'이 가능한 것은 소프트웨어에 국한되며, 하드웨어라는 물리적 기반은 여전히 개별적 구매를 요구한다.


이런 경제적 구조는 콘솔 게임을 "특별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로 만드는 근본적 요인으로 여전히 작용한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접근성이 향상되고 사회적 기능이 확장되어도, 수십만원에 달하는 초기 투자 비용은 상당한 계층을 배제한다. 이는 라디오나 TV가 점차 가격이 하락하면서 진정한 대중화를 이룬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콘솔 게임이 갖는 고유한 매체적 특성 자체도 대중매체로서의 보편성에 제약을 가한다. 콘솔 게임은 본질적으로 능동적 참여를 요구하는 매체다. TV나 라디오처럼 수동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매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갖는다. 이는 한편으로는 상호작용성이라는 고유한 가치를 제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참여를 위한 학습 비용과 시간 투자를 요구한다. 이러한 비용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높은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더욱이 게임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기성세대나 특정 문화권에서는 게임을 여전히 시간 낭비나 유해한 활동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인식적 장벽은 기술적 발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화적 차원의 문제다.


그렇다면 이런 한계들이 콘솔 게임의 매체적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이런 한계들은 콘솔 게임이 갖는 독특한 매체적 특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이해해야 한다. 책이 영화와 다르고, 영화가 TV와 다르듯, 콘솔 게임도 기존 매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중과 관계를 맺는다. 각 매체는 고유한 진입장벽과 특성을 가지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결국 콘솔 게임이 대중매체인가 하는 질문은 현재 시점에서 대답하자면, 그렇다, 아니다, 단정지어 말하기 어렵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기능이나 시장 점유율의 문제가 아니라, 게임이 우리 사회에서 수행하는 복합적 역할과 사람들이 게임을 통해 연결되고 소통하는 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콘솔 게임은 현재 대중매체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매체라고 규정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콘솔 게임을 "경계에 선 매체"라는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

     

     

Tags:

콘솔, 스팀덱, PSP, 미디어, 하드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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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콘텐츠연구자)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닌텐도 게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몇 개월 전 스팀덱을 할부로 구매하여 열심히 즐기고 있습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선 문화매개를 전공했고, 현재는 일본의 리츠메이칸 대학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박사과정에 재학중 입니다. 게임과 웹툰 등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와 문화를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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