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트로닉스’라는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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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2. 10. 10.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이라는 것이 있다. 호기심의 방은 말 그대로 호기심을 자아내는 진귀하고 이국적인 것들, 때로는 괴이한 것들로 가득찬 공간이었다. 주로 16-17세기 영국에서 개인 컬렉터들에 의해 만들어진 호기심의 방은 박물관의 기원 중 하나라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 공간이 단순히 수집품을 모아두는 곳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수집 공간’은 대중에게 공개되어 보여졌다. 당대에 가치있던 고미술품이나 유물, 또는 명망있는 화가의 작품이 아니었더라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상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호기심의 방의 주인들은 때로는 수집품의 특정 주제를 선정하여 출판물을 펴내거나, 수집물을 통한 연구를 독려하기도 했다. 이런 수집과 보여주기가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현상들―컬렉션의 형성과 보존 및 복원, 그리고 전시―이 갖는 의의를 간과할 수 없다.
부천 신중동의 한 번화가 건물 3층에서도 캐비닛(cabinet)들로 채워진 호기심의 방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2018년 레트로 아케이드 게임센터, 특히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슈팅 게임 전문이라는 슬로건으로 2018년 개업한 아카트로닉스다. 이곳을 들어서는 순간 소위 아케이드 게임을 좀 안다는 사람들이라면 돈파치(首領蜂, どんぱち), 케츠이(ケツイ ~絆地獄たち~), 트윈비(Twin Bee, ツインビー) 등의 슈팅게임 기판들이 가동되는 있는 모습에 놀랄 것이다. 게임 자체가 아니더라도 3개 스크린을 가로로 연결해 서비스되는 다라이어스(Darius, ダライアス) 기체의 생경한 위엄과 같은 걸 접할 수 있는 아카트로닉스란 누구에게든 호기심을 자아낼 수 있는 곳임이 분명할 것이다.
아카트로닉스(Akatronics)라는 이름은 현역 플레이어인 이곳 점장의 플레이네임인 ‘Akatian’의 ‘Aka’와 ‘electronics’의 ‘tronics’를 합쳐 만들어졌다. 이름에서도 어렴풋이 알 수 있듯 이 공간은 점장 개인의 취향과 기준에 의해 만들어지고 운영된다. 아카트로닉스의 최수권 점장은 일산의 한 오락실에서 스탭으로 근무하며 휴가 때마다 일본에 방문해 게임센터를 둘러보고 슈팅게임과 국내에서는 찾기 힘든 몇몇 레트로 게임들에 매력을 느끼면서 아케이드 게임 기판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아카트로닉스 오픈으로 이어지게 됐다. 여기서 그가 기판을 수집할 때에는 몇 가지 기준이 있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기준은 일본의 각종 아케이드 게임 관련 회사들이 모여 설립한 일본 어뮤즈먼트 머신 공업협회(Japan Amusement Machinery Manufacturers Association)에서 지정하는 통칭 ‘JAMMA’ 규격이다. 이 규격을 위주로 기판을 매입 및 수집하는 것은 ‘현역 플레이어’로서 조작의 반응 속도와 화면 출력까지를 고려하기 때문이다1) 여기에 추가로 점장으로서의 취향이 반영되어 아카트로닉스만의 아케이드 게임 컬렉션이 만들어져나간다.
이 수집가의 공간에서 길게는 30년 이상 된 레트로 아케이드 게임들이 가동, 또는 ‘보존’되어 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아카트로닉스의 컬렉션은 현재 약 50개 정도의 기판으로 이루어져있다. 기판과 캐비닛의 수가 상이하기에 가동되는 게임은 수시로 바뀌는데, 최수권 점장은 나름의 노하우로 게임을 가동시키기 적합한지 기체 컨디션을 판단해 기판을 교체한다. 조이스틱과 버튼 상태 등 게임을 쾌적하게 플레이할 수 있는 최적화된 상태를 계속 점검하며 게임을 교체해 내놓는 것이다. 또 CRT 모니터를 확보해두고 매일 같이 점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2)
올해 초 세가(SEGA)가 아케이드 운영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한다는 뉴스를 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의 유명 오락실들이 폐업한다는 소식 또한 계속해서 들려온다. 모바일 디바이스로 언제 어디에서든 바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고, PC와 콘솔에서도 특정 플랫폼이나 구독 서비스를 통해 원하는 게임을 바로 내려받아 해볼 수 있는 이 시점에서, 한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오프라인의 특정 장소로 가야한다는 것은 이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오락실 세대’라 하기 힘든 90년대생 필자는 이런 상황에서 우연히–아마도 알고리즘에 이끌려–사라만다(沙羅曼蛇, Salamander)와 다라이어스의 플레이 영상을 접한 후 80-90년대 아케이드 게임에 매료되어 ‘현역으로 가동되고 있는 기판'3)을 찾아 나섰고, 아카트로닉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필자는 그저 예전 게임을 해보기 위해 아카트로닉스를 찾아 집을 나섰을지 몰라도, 돌아오는 길에는 아카트로닉스라는 공간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 다시금 고민해보게 되었다.
* 아카트로닉스의 하이스코어 보드
* 케츠이를 플레이하고 있는 최수권 점장
아카트로닉스에서 레트로 아케이드 게임은 과거의 것으로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점수가 경신될 수 있는 것으로서 현재에도 유효하게 존재한다. 최수권 점장은 아케이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혼자하는 카드놀이의 총칭인 솔리테어(solitaire)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가 아카트로닉스를 통해 제안하는 방법들은 각 게임의 솔리테어로서의 재미를 풍부하게 만들어준다.4) 동전 하나로 게임을 클리어하는 ‘원 코인 클리어’는 아카트로닉스에서 가장 장려하는 것이다. 과거 오락실에서는 동전 하나로 오랜 시간 플레이하는 것을 보다못한 사장님들이 게임을 강제로 꺼버렸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기도 하지만, 아카트로닉스에서 원 코인 클리어는 이곳을 방문하는 플레이어들의 목표로 추천된다. 또 여기엔 국내에서 유일하게 집계되는 ‘하이스코어’가 있는데, 일본 하이스코어 협회(日本ハイスコア協会, Japan Highscore Association)의 룰에 기반하여 아카트로닉스에서 집계되는 하이스코어는 플레이어들에게 스코어러(scorer)로서 점수를 격파하는 즐거움을 선물한다. 덧붙여 최수권 점장은 아카트로닉스를 일종의 ‘도장(道場)’이라고도 표현하는데, 마치 도장에서 무술을 수련하고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듯, 플레이어들이 아카트로닉스라는 “정해진 장소에서 어디까지 (플레이)할 수 있을지”5) 시험해보길 원하기 때문이다. 모든 게임은 녹화 가능하고 중계될 수 있으며, 플레이어는 일종의 수련자로서 스스로 플레이의 한계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돌파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즐거움과 수련의 방식들은 나름의 자취를 남긴다. 매일 같이 집계되고 발표되는 하이스코어, 기록되고 스트리밍되는 플레이들…. 이처럼 아카트로닉스라는 공간에서 ‘레트로’ 아케이드 게임은 단순한 과거를 넘어 ‘경기’로서 영원한 현재성을 발휘해야 하는 무엇처럼 제시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카트로닉스가 궁극적으로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과거란, 어쩌면 수련자로서의 아케이드 게이머라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고. 나아가, 최수권 점장의 아카트로닉스 자체가 하나의 수련이자 도전인 것은 아닐까? 과거 유럽에서의 호기심의 방이 박물관의 원형처럼 기억되듯, 아카트로닉스와 같은 실천을 미래는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아카트로닉스라는 새로운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에서, 진귀한 캐비닛(cabinet)들은 지금도 당신의 플레이를 기다리고 있다.
[아카트로닉스 점장님의 추천] 아카트로닉스에 방문한다면 아카트로닉스의 자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3화면의 다라이어스와 테트리스 더 그랜드마스터 3를 꼭 플레이 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