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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 시뮬레이션 그리고 구현이라는 꼭짓점의 버뮤다 삼각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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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6. 10.

* SAM이 보는 세계

찬호께이의 소설 <망내인>은 여느 추리소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자살로 여동생을 잃은 주인공이 은둔 해커이자 탐정인 또 다른 주인공을 찾아 나선다. 장르의 문법에 친숙한 독자라면 결말의 깜짝 반전과 같은 세부적인 디테일은 차치하고라도 이 소설이 나아가는 대략적인 방향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는 익숙한 ‘국밥’의 맛으로만 수렴되지 않는 돌출된 부분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홍콩이라는 배경이 그렇다. 일반적인 경제특구와는 다르게 특별행정구이기도 한 홍콩은 복잡한 역사적인 맥락과 민감한 정치적인 상황들이 맞물려서, 쉽사리 다른 지역으로 번역될 수 없는 특수한 지역성을 제공한다.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의 핵심 요소인 해킹에 대한 묘사이다. 매체를 불문하고 픽션 내에서 특정한 기술을 재현한다는 것은 까다로운 문제일 수밖에 없다. 특히 해킹의 경우는 악명이 높은데, 어두운 방 안에 있는 여러 대의 모니터에서 알 수 없는 코드들이 마구 지나가는 동시에 해커가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식의 클리셰는 이미 다수의 밈을 통해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다. <망내인>은 마치 해커 입문 수업을 듣는 듯한 현실적이고도 상세한 해킹의 전개 과정과 그 과정 전체가 추리와 직접적으로 결부되는 영리한 플롯을 통해 그러한 함정을 피해 가는 드문 사례이다.


그렇다면 재현보다도 (유저의 인풋에서 비롯된 무수히 많은 결괏값에 의거한) 시뮬레이션에 훨씬 방점이 찍힌 미디어인 게임은 이와 같이 특정한 기술을 ‘구현 materialization’하는 문제에서도 어떤 독보적인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제나 그렇지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뚜렷하게 ‘당연한’ 방향으로 직진하지 않는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사실은 게임이 의도적으로 심각하게 제한된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다. 하이테크의 사이버펑크 도시를 매우 밀도 높게 구현한 <사이버펑크 2077>의 경우를 봐도 V 가 자신의 몸에 이식하는 사이버웨어는 사이버 사이코라는 도식적인 한계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 다를 뿐, 근본적으로 여타의 판타지 게임들에서 등장하는 마법이 부여된 장비와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 플레이어는 사이버웨어가 사실은 살과 뼈를 찢고 들어가서 기존의 신체와 불안정하게 접합하는 매우 고어(?)한 포스트 휴머니즘적 장치라는 것과, 그것을 계속해서 추가하다 보면 통제가 완전히 불가능한 사이버 사이코에 이른다는 실존적인 불안을 체감하지 못한다.[1] 결과적으로 이 게임의 주요한 모티프이기도 한 사이버웨어 테크놀로지는 ‘간지 나는’ 성능템으로 납작하게 요약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의 경우를 두고 앞선 해킹의 사례처럼 다시금 재현의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것 또한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사이버웨어는 단순히 재현된 것이 아니라 시뮬레이션 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V 의 팔에 고릴라 암즈를 장착할지 투사체 발사 시스템을 장착할지에 따라서 플레이 스타일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며, 이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선택(인풋)에 달렸다. 그 선택 이후에도 투사체 발사 시스템을 어떤 조합으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무수히 많은 다른 결과들로 이어질 수 있다.


관건은 게임이 제공하는 시뮬레이션의 정교함이 반드시 게임 내 기술의 적절한 구현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복잡한 시뮬레이션과의 상호작용은 (그 촉각적 ‘리얼함’으로 인해서) 그것이 실제의 기술과 부합한다는 환상을 오히려 강화한다. 그러므로 시뮬레이션과 재현이 중첩된 게임 미디어는 기술 구현의 욕망과 닿을 듯 말 듯한 기묘한 평행선을 달린다.


사려 깊은 레벨 디자인과 다양한 종류의 현실적인 제약들(일회용인 방독면 필터와 깨진 방독면을 덕 테이프로 임시로 처리하는 디테일, 제때 청소해 주지 않으면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총기, 에어건과 손전등을 계속해서 수동으로 펌프질해야 하는 수고로움 등등), 그리고 대부분의 HUD 를 제거한 다이어제틱한 UI 디자인이 잘 어우러져서 상당한 수준의 시뮬레이션을 가동하는 <메트로: 엑소더스>는 게임이 위치하는 미묘하게 어정쩡한 지점을 잘 드러내는 사례이다.


이 게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꽤 비현실적인 배경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총기 전문가[2]가 나서서 다양한 총기들의 모양과 기능을 매우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고 평가할 만큼 ‘전통적인’ 재현에도 충실하다. 다시 말해 시뮬레이션과 재현 모두 해상도 측면에서 별달리 아쉬운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정확히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 작품은 게임이라는 특정한 매체가 지닌 아포리아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한다.


총만큼 게임의 역사를 관통하는 기술도 없을 것이다. 게임 업계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극초창기의 슈팅 게임[3] 이야기는 제외하고, 세부 장르인 FPS로만 한정해서 생각해 봐도 그 기원을 따져 올라가면 1973 년으로 가야 한다.[4] <메트로: 엑소더스>의 시점에 이르면 총을 다루는 캐릭터의 애니메이션과 총기의 반동, 총알의 궤적, 그에 따르는 부가적인 특수 효과와 음향, 총성과 총상에 반응하는 적의 움직임 등 총기의 시뮬레이션과 재현의 모든 면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몰입감을 플레이어에게 선사한다. 그렇다면 이로써 게임에서 총을 구현하는 작업은 특이점에 다가가고 있는 것일까? 햅틱 피드백과 적응형 트리거처럼 게임 컨트롤러에 한 스푼의 리얼함을 추가하거나 아예 VR 게임을 통해 답답한 직육면체의 모니터를 벗어난다면 언젠가는 완벽한 해상도에 (그러니까 완벽한 총싸움의 경험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여기서 총과 같은 기술을 구현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 총을 쏘는 사람이 방아쇠를 당기면 내부에 있는 공이가 화약이 든 총알을 타격한다. 그렇게 발생한 작은 폭발은 고막이 찢어질 듯한 (음 소거 버튼으로 없앨 수도 없는) 굉음과 어깨가 시큰할 정도의 반동, 매캐한 화약 냄새와 뜨겁게 달아오른 총신, 그리고 땀에 젖은 손을 남긴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원래 없었다는 듯이 유령처럼 작동하는 총 모양의 어떤 것을 우리는 과연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운이 좋게 주요 부위를 피해서 맞는다고 해도 과다 출혈과 쇼크로 사망할 수 있는 위력적인 무기를 들고 서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총싸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즉 기술은 단순히 진공 상태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의 사용자와 작동하는 환경, 역사적인 맥락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유저를 끝없는 피드 속에 가두기 위한 욕망으로 추동되는 알고리즘의 구조만큼이나 2024년 옥스퍼드 사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뇌 썩음 brain rot’ 또한 소셜 미디어라는 기술의 핵심 요소인 셈이다.[5]


결과적으로 시뮬레이션과 재현이 정교해질수록 기술적 구현의 욕망이 대두되지만 동시에 이는 비디오 게임이라는 매체의 틀 안에서 선택적으로 제한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한 총싸움 게임’은 영화 <배틀로얄>이나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비슷한 상황을 현실로 구현해 낸 생지옥에서나 가능한 ‘실재the real’로서의 한계 지점인 것이다.


따라서 기술의 구현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미래적 게임이라는 방향성은 ‘블랙 미러’적인 미래와도 다소 불안하게 겹친다. 다만 꼭 그런 방향이 아니더라도 비교적 간단(?)하게 특정한 기술을 높은 수준으로 구현할 방법이 있다. 바로 컴퓨터를 (더 구체적으로는 그것의 UI를) 재현하고,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경찰의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는 컴퓨터라는 설정으로 오래된 데스크톱 OS 바탕화면의 미학과 기능을 적극 활용한 <허스토리>나 픽셀로 구현한 스마트폰의 UI 내에서만 게임이 진행되는 <레플리카> 같은 게임들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게임들은 기술의 구현이 매체에 의해서 제약받는 정도가 훨씬 덜한데, 왜냐하면 비디오 게임 자체가 컴퓨터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비슷한 포맷의 다양한 게임들이 존재하지만 내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작품은 <옵저베이션Observation>이다. 전작 <스토리즈 언톨드Stories Untold>에서도 컴퓨터를 직접적으로 구현해서 텍스트 어드벤쳐 게임에 대한 일종의 메타픽션을 만들어 냈던 개발사 No Code는 이 작품으로 게임에서 컴퓨터를 구현한다는 것의 의미를 한층 더 확장한다.


AI 시스템인 SAM을 조종하는 플레이어는 매우 다양한 전자적 인터페이스를 경유해서 우주 정거장의 물리적 내/외부뿐만 아니라 버려진 랩탑들의 데이터, 정거장의 모듈 시스템, 그리고 자가 진단을 할 수 있는 내부 시스템까지 도달한다. 그러는 와중에 마이크와 카메라를 통해 계속되는 유일한 인간 생존자인 엠마 피셔 박사와의 대화에 이르면 우리가 에이전틱Agentic AI라고 부르기 시작한 어떤 기술적 흐름의 코스믹 호러적 완성형을 제시하는 듯이 보일 정도다.


다만 이 작품에서 AI가 곧 플레이어라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AI 자체를 구현하는 것이 게임의 지향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오히려 플레이어가 <옵저베이션>을 통해 경험하는 것은 SAM이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이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우리의 AI친구 샘은 고정된 UI에 머물지 않고 부산스럽게 옵저베이션 정거장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그러나 원격 드론을 조종해서 정거장 바깥의 공허한 우주를 유영하는 순간까지도 플레이어는 인터페이스로 가득 찬 스크린을 벗어나지 못한다. 즉 플레이어는 게임 내내 각기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기보다는 샘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시스템에 내재한 멀티 모달리티multi modality를 체험한 셈이 된다. 키틀러가 이야기하듯 컴퓨터가 그 이전의 미디어와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은 다양한 종류의 서로 다른 데이터를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인코딩하고 조작할 수 있는 멀티 모달리티에 있다.


물론 컴퓨터 바탕 화면의 미학을 ‘완벽히’ 구현한다면 바탕 화면에서 영상을 본다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멀티 모달리티를 선보일 수 있다. 그런데 그토록 완벽하게 구현된 컴퓨터로서의 게임이라면 나의 윈도우 기기에서 가상 머신으로 작동하는 리눅스 OS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게임 내에서 구현하는 기술의 목표는 재현과 시뮬레이션의 해상도를 최대로 올려서 매우 비슷한 모양의 거의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될 수도 없지만, 된다고 해도 종종 우스꽝스러운 결과로 이어진다. 게임은 유틸리티 소프트웨어가 아닌 것이다.


<옵저베이션>은 플레이어 가능한 캐릭터를 AI로 설정함으로써 전형적인 UI가 발산하는 모종의 피로감을 탈피하는 동시에 컴퓨터의 멀티 모달리티를 게임 전체의 플롯과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컴퓨터를 구현하는 것’에 성공한다. 게임에서의 기술 구현은 이처럼 재현과 시뮬레이션 둘 중 어느 쪽으로도 수렴되지 않으며, 둘의 합이 성공적인 구현을 담보하지도 않는다. 기술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전적으로 기술 자체의 구현에 몰두하는 것과도 다른 이야기다. 드물게 범례처럼 떠오르는 각각의 개별 작품들을 통해서 여전히 명확히 잡히지 않는 좌표를 다시 한번 확인할 따름이다.




[1] 설령 계속해서 사이버웨어를 추가하더라도 V는 디버프를 받을 뿐 사이버 사이코로 돌변하지 않는다. 장비의 무게나 숙련도에 따른 디버프가 존재하는 다수의 판타지 게임들과 더 유사해지는 지점이다.
[2] Gamology, “Firearms Expert REACTS to Post-Apocalyptic Weapons in Metro Exodus” YouTube 2021.11.19. https://www.youtube.com/watch?v=ZdgiAvc8FxE
[3] 최초의 슈팅 게임 Spacewar! 은 1962년 MIT 랩에서 세 명의 연구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https://en.wikipedia.org/wiki/Spacewar!
[4] 최초의 FPS 게임인 Maze War https://www.guinnessworldrecords.com/world-records/95409-first-first-person-shooter-fps-videogame
[5] 이동현, “영국 옥스포드 사전, 올해의 단어는 ‘뇌 썩음’(brain rot)” 한국일보 2024.12.02.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120221530000146
[6] 이 게임에서 SAM은 정확히 플레이어의 컨트롤에 의해서만 시뮬레이션 된다. 즉 현대의 AI 모델들이 기반한 확률적인 작동과는 궤를 달리한다. 직접 거대 언어 모델LLM을 실시간으로 게임에 연동해서 AI 캐릭터를 생성해 낸 <언커버 더 스모킹 건>과 같은 게임이 AI를 ‘구현’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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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입니다. 역시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게임에는 특히 관심이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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