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려진 힘, 그리는 힘, 그림의 힘: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와 이미지, 그리고 리얼리즘
24
GG Vol.
25. 6. 10.
*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이하 〈클레르 옵스퀴르〉) 스포일러 주의
“현실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 〈클레르 옵스퀴르〉 르누아르, 베르소의 대사
그려진 힘
게임 〈클레르 옵스퀴르〉는 그 제목부터 미술과 연관성이 명확하다. 잘 알려져 있듯 클레르 옵스퀴르(Clair-obscur)는 이탈리아어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키아로스쿠로는 chiaro(밝은)와 oscuro(어두운)의 합성어로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적으로 사용하는 미술 기법을 말한다. 이탈리아 맥락에서는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로 대표되는 바로크 양식의 연출을 꼽을 수 있고, 프랑스어인 클레르 옵스퀴르로 번역해서는 촛불 그림으로 유명한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같은 경우를 떠올릴 수 있다. 클레르 옵스퀴르는 독특한 기법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는 모든 재현적 이미지에서 항상 중요한 문제다. 밝음과 어두움을 통해서 배경과 형상은 분간되고, 빛과 어둠의 균형과 불균형은 매번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의 모습을 드러낸다. 더 나아가 완전히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빛과 어둠의 존재가 서로 얽혀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빛을 통해서 어둠을, 어둠을 통해서 빛을 감각한다. 이러한 문제는 〈클레르 옵스퀴르〉를 관통하는 주제와도 연결된다. 삶과 죽음, 현실과 가상, 과거와 현재, 진짜와 가짜, 그리는 이와 그려진 것, 그림 밖과 그림 속 등등 서로 전혀 다른 것들 사이에서.

* Caravaggio,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1610.

* Georges de La Tour, Magdalene with the Smoking Flame, c. 1640.
〈클레르 옵스퀴르〉에서 플레이어가 탐험하게 되는 세계는 그림 속이다.[1] 플레이어는 게임의 중반 이후인 2막을 끝내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고, 그때까지의 스토리는 반전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돌이켜보면 일반적인 판타지 세계관에서 마나에 해당하는 마법적 에너지를 크로마(Chroma, 색채)라고 부르는 등 곳곳에서 여기가 그림 속이라는 세계관 설정이 드러난다.
캐릭터 설정은 이러한 세계관 문제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지점이 특히나 많은데, 르누아르는 당연히 그 유명한 화가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를 연상시키고, 페인트리스이자 르누아르의 아내, 베르소의 어머니인 알린은 실제 르누아르의 모델이었던 알린(Aline Charigot, 1859–1915)과 또 다른 화가인 알린(Aline Réveillaud de Lens, 1881–1925)이 겹쳐 보인다. 초반부 주인공 역할을 하는 귀스타브 역시, 게임 속에서도 중요한 건축물로 등장하는 에펠탑을 건축한 에펠(Gustave Eiffel, 1832-1923)과 이 글의 맥락에서 중요한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가 겹쳐 읽히는 캐릭터다. 연상되는 인물들 모두 게임 속 설정과 같은 19세기 프랑스의 벨 에포크 시대의 예술가들이라는 점은 이러한 접근에 개연성을 확보해 주기도 한다.
주인공 중 한 명인 마엘은 이 세계가 그림 속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 각성하여 엄청난 힘을 얻는다.[2] 플레이어는 마엘을 통해 게임 초반부에 원정을 떠나게 한 원인인 고마주(Gommage, 프랑스어로 ‘지우다’는 뜻)를 직접 사용할 수도 있게 된다. 그의 아버지인 르누아르처럼 캔버스 세계에서 존재를 지워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각성 이후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기술인 스탕달은 너무 높은 버그성 데미지 때문에 결국 핫픽스로 너프까지 당했다. 그 기술은 작가 스탕달(Stendhal, 1783-1842)의 이름에서 따온 것일 텐데, 스탕달의 문학 작품보다는 이른바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불리는 현상과 더욱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스탕달은 『로마, 나폴리, 피렌체』에서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을 방문했을 때, 그 숭고한 아름다움에 푹 빠져 심장이 마구 뛰고 결국에는 생명이 고갈되는 것 같은 엄청난 황홀경에 빠졌던 경험을 묘사한다. 그 이야기에서 비롯하여 뛰어난 예술 작품의 영향으로 심신에 충격을 받는 것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부른다. 예술 작품 때문에 실신하는 현상을 뜻하는 그 기술의 이름을 생각하면, 스탕달이 긴급 너프를 당할 정도로 높은 데미지 계수를 가지고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지금껏 모험한 세계가 모두 그림 속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 얻는 픽토스의 이름이 ‘그려진 힘’(painted power)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전까지 최대 데미지의 상한선이었던 9999를 돌파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 중의 핵심 아이템으로, 이 아이템을 얻은 이전과 이후의 게임 경험은 말 그대로 차원이 달라진다. 단지 스토리의 맥락뿐 아니라, 플레이어의 게임적 경험에서도 각성과 한계 돌파를 직접 체감할 수 있게 해주는 탁월한 장치인 것이다.
여기에서 또 중요한 논점은 이 세계가 단지 그림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각성을 하게 되는 서사 구조에 있다. 물론 이 세계는 아들 베르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데상드르 가족이 그림 속으로 현실 도피하여 만들어진 곳이지만, 점점 현실을 자각하며 회복하는 단선적인 서사를 그리지 않고, 오히려 캔버스 속 세계에서 만난, 사실 한낱 그림에 불과한 친구들에게 입체적인 서사를 부여한다. 귀스타브, 루네, 시엘과 같은 그림 속 동료들 모두 각각 고유의 이야기를 가지고 플레이어와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 데상드르 가족이 키우던 개가 의인화된 캐릭터 모노코, 현실에선 잘 때 안고 자는 인형인 에스키에도 그림 속 세상에선 주체성을 가진 인물이 된다.
최종적으로 엔딩 분기점은 그림 속에 남을 것인지, 현실로 돌아갈 것인지를 플레이어가 선택하게 만든다. 캔버스 속 가짜 친구들과 현실의 진짜 가족들 사이의 선택이지만,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선택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플레이어가 세계관에 몰입하여 그림 속 가짜 친구들과 진짜 관계를 맺게 되는 문제도 있지만, 필자가 중요하게 짚어내는 부분은 게임의 서사와 플레이의 경험이 겹쳐지며 드러나는 두 층위의 그림이다. 게임 속 세계가 단지 그림일 뿐이었다는 층위,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플레이어가 보고 있는 모니터 속 그림일 뿐이라는, 게임 그 자체의 층위. 여기에서 실제로 스탕달 신드롬을 겪는 것은 우리 플레이어라는 말이다. 〈클레르 옵스퀴르〉를 통해서 근본적으로 데이터 쪼가리와 픽셀에 불과한 이 그림들에 대해 생각한다. 아니 그림이, 게임이 대체 무엇이길래?
그리는 힘
엔딩 분기점은 마엘을 선택하여 그림 속 세계에 머물 것인지, 베르소를 선택하여 캔버스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갈 것인지를 플레이어에게 묻는다. 만약, 마엘을 선택하여 그림 속 동료들과 모험을 계속하기를 선택한다면, ‘그리는 삶’이라는 제목의 에필로그가 이어진다.[3] 그림 속 세상에서 페인트리스의 힘을 각성한 마엘은 죽은 동료들을 모두 살려낸다. 베르소가 연주를 준비하고 있는 콘서트장에 친구들이 하나 둘 모이고 이제 연주가 막 시작되는 순간, 화면은 마엘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여 담는다. 친구들이 모두 모였지만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 공허한 표정의 얼굴이다. 심지어 마엘의 얼굴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곧이어 암전. 이 게임의 세계관에서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현실과 연동된 존재들은 모두 얼굴이 깨져 있다. 페인트리스(알린), 큐레이터(르누아르), 소년(베르소), 그리고 에필로그의 마엘까지.
얼굴 없는 존재는 곧, 거울을 볼 수 없는 존재이다. 돌이켜보면 플레이어는 게임 곳곳에서 거울을 마주하지만, 기술적인 문제인지 거울은 그 어떤 이미지도 반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거울은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곳이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을 가장 명확하게 알려주는 장치인 알리시아의 편지에도 이 세상은 “거울에 비친 모습”이라고 쓰여 있다. 세계 곳곳에는 거울이 비밀 통로로 등장하고, 캔버스의 프레임과 거울의 프레임이 구분되지 않게 그려진다.
게임 속 세계에서 캔버스와 거울은 겹쳐 있다. 마침 위에서 언급했던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에는 예술 작업이 “길 위를 따라다니는 거울”이라고 쓰는 구절이 나온다.[4] 거울은 세계와 예술 작업의 관계를 드러내는 비유이자 장치이다. 거울과 그림은 모두 세계를 반영한다. 게임 속 르누아르도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며 “현실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고 말하는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관점은 귀스타브 쿠르베의 리얼리즘을 연상시킨다. 쿠르베는 “회화란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예술이며, 실재하고 존재하는 사물들의 재현 외에는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다.”라며 세계와 그림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5]
물론 쿠르베의 말은 역사화나 종교화와 비교하여 현실을 담아내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리얼리즘이라는 문제는 지금 맥락에서 한번 더 생각해 볼 점이 있다. 리얼리즘이라는 태도로 만들어내는 것은 언제나 가짜, 픽션, 매개, 그리고 그림이라는 점이다. 가짜에 진짜를 담으려는 시도 자체가 리얼리즘인 것일까. 아무리 리얼리즘을 강조해도 세계는 그대로 담기지 않는다. 예술적 매개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현실 세계가 어떻게 매개되어 있는지이다. 현실에서 맨눈으로 볼 수 없던 이데올로기적 장막이 그림에서는 거두어지는 경우가 있다. 쿠르베는 그 이전엔 결코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노동자들을 그렸다. 현실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재현되지는 않았던 존재들이 그림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그림을 통해 현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 Gustave Courbet, The Stone Breakers, 1849.
마엘 엔딩의 에필로그 ‘그려진 삶’은 마치 배드 엔딩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림 속에 남기를 택했기 때문에 플레이어와 동료들은 엔딩 이후에도 세계를 계속 탐험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이른바 엔드 게임 콘텐츠라고 할 수 있는 클레아와의 전투, 0원정대의 일원인 시몽과의 전투 등 다양한 모험을 통해 이 캔버스 세계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를 더 발견한다. 세계관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적인 시몽을 만나기 위해 ‘뤼미에르의 밑그림’에 들어가면, 현실의 르누아르와 연결된 얼굴 없는 빛바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는 “창조에는 행동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날 움직인다”고 말한다. 물론 그는 그림 속에 매몰된 알린을 비판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실천 자체의 힘에 대해 이야기 한다. 현실 도피도 현실 반영도 아닌, 현실 속 존재에게 힘을 주는 실천으로서의 그리기.
그림의 힘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의 『자연사』에는 그림의 기원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 부타데스라는 어떤 도공의 딸이 사랑하던 사람과 떨어지게 되어 등불에 비친 실루엣을 따라 벽에 그림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 흔적이 최초의 그림이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전설은 그림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부재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림과 현실이 맺는 관계, 그리고 실천으로서의 애도. 게임 속 페인트리스가 했던 일도 정확히 같은 것이다. 이미지는 가짜이지만, 우리를 움직인다. 바르트는 “죽음은 사진의 본질(eïdos)”이라고 쓰면서 우리를 찌르는 이미지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6]
픽션이라는 관점에서도 다시 생각해 볼 것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픽션은 실재와 대비되는 허구의 것을 의미하지만, 자크 랑시에르는 픽션(fiction)의 어원인 라틴어 fingere의 뜻이 “-인 체하다”가 아니라 “벼려 만들다”라는 점을 짚어내면서 다른 사유의 경로를 열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픽션은 사건과 형태, 기호의 체계를 구축하고 재조직하는 것이다. 픽션은 상상적 세계의 발명이 아니다. 오히려 주체, 사물, 상황이 공통 세계에 공존하는 것으로서 지각될 수 있는 틀, 사건이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사고되고 연결될 수 있는 틀을 조직하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실재와 픽션 사이의 유사성이나 진위를 문제 삼지 않고, 심지어 예술의 바깥으로서의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실재는 늘 픽션의 대상이다. 즉, 볼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이 맺어지는 공간을 구축하는 행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7] 픽션이라는 문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픽션이 구축해 낸 실재라는 대상이 아니라, 구축하는 작업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랑시에르는 실재를 가장하지 않고 실재를 대상으로 삼는 바로 이 픽션의 작업이 예술과 정치를 매개한다고 주장한다.[8]
다시 게임 담론으로 돌아와서 필자는 여기에서 “안에 사람들이 있잖아!”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게임이 온라인으로 실제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더라도, 모니터 안의 그림들이 정말로 그저 데이터 쪼가리, 픽셀일 뿐이더라도 우리는 그것과 진짜 관계를 맺는다. 그림들은 우리를 웃기고, 울리고, 찌르고, 무엇보다도 변화시킨다. 〈클레르 옵스퀴르〉의 엔딩 분기점은 마치 〈매트릭스〉의 빨간약과 파란약을 연상시키는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른 점이 많다. 〈매트릭스〉에서는 빨간약을 먹고 현실을 자각하는 것이 각성이고, 파란약을 먹고 가상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 우매한 상태로 남는 것이지만, 〈클레르 옵스퀴르〉에서는 이 세계가 가상임을 알면서도 각성된 상태로 이곳에 머무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 〈클레르 옵스퀴르〉 ‘그리는 삶’ 에필로그 마지막 장면.
여기에서 깨어 있는 상태로 가상에 머무는 존재는 사실 플레이어 그 자체가 아닐까. 마엘 엔딩 에필로그의 마지막 장면, 마엘의 얼굴이 화면 가득 담기는 상태에서 엔딩 크레딧으로 넘어가며 화면은 온통 검은색이 된다. 그 순간, 검은 화면이 블랙미러가 되면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다. 취해 있으면서 동시에 깨어 있는 존재, 몰입과 각성 사이에 놓인 존재인 플레이어. 플레이어는 진짜를 통해서 가짜를, 가짜를 통해서 진짜를 사유한다.
매개된 현실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세계를 비추어 본다. 리얼리즘의 근본적인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클레르 옵스퀴르〉의 세계관에서 페인터들은 마치 마법적 능력을 지닌 사람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것은 가상의 설정이 아니라,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상상을 형식으로 매개하는 일. 그 일은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게임이라는 매개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생각한다. 그림의 힘, 픽션의 힘, 게임의 힘, 그리고 플레이어의 역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