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에서 협력은 어떻게 장르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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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6. 2. 10.
비디오게임에 아케이드 코옵, 카우치 코옵, 온라인 코옵 등 다양한 형태의 협력 게임이 존재하듯, 보드게임에도 많은 협력 게임이 있다. 그러나 보드게임을 가볍게 접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보드게임에도 협력 장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한편, 보드게임 영역에서 협력 게임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 이후의 일이다. 그만큼 협력 보드게임은 보드게임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혁신이라 할 수 있다.
협력 보드게임의 역사: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전 세계 보드게임 데이터베이스 보드게임긱에 따르면, 협력 보드게임의 기원은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데니스 휘틀리의 <마이애미 살인 사건>과 <말린세이 대학살>은 문서를 읽고 살인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는 게임으로, 현대 ‘머더 미스터리’ 장르의 시초라 할 수 있다. 1967년에 출시된 <캡틴 스칼렛 게임>은 팀 전체가 공동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구조를 갖춘, 현대적인 협력 보드게임에 가장 가까운 초기 사례로 꼽힌다[1].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최초의 협력 보드게임으로는 1981년에 출시된 <셜록 홈즈 컨설팅 디텍티브>를 들 수 있다. 플레이어는 각종 증거물, 증인과 용의자의 진술, 신문 기사, 런던 시내 지도 등을 종합해 사건을 해결한다. 이전에도 문서 추리 게임은 존재했지만, 이 작품은 꾸준한 재판과 다수의 속편이 출시되며 장수했고, 한국어판도 발매되었다. 이후 <사건의 재구성>, <디텍티브: 모던 크라임> 등 수많은 협력 추리 게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87년에는 TRPG <크툴루의 부름>을 보드게임으로 구현한 <아컴 호러>가 출시되었다. 이 게임은 2판(2005년), 3판(2018년)으로 개정되며 지금까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훗날 크툴루 테마는 2016년 ‘LCG(Living Card Game)’ 형식의 <아컴 호러: 카드게임>으로도 변주되어, 협력 게임의 또 다른 흐름을 만들어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중반까지 협력 보드게임은 오랫동안 주변부에 머물렀다. 현대 협력 보드게임의 기틀을 정립한 작품은 2008년 맷 리콕이 디자인한 <팬데믹>이다. 플레이어들은 각기 다른 역할을 맡아 전 세계로 확산되는 감염병을 막아야 한다. <팬데믹>은 공동 목표와 역할 분담, 가중되는 위기 같은 협력 게임의 표준을 제시했다. 이 작품 이후 협력 보드게임은 물밀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팬데믹> (출처: 보드게임긱 @HexEncounter)
리콕은 2015년 <팬데믹 레거시: 시즌 1>을 통해 다시 한 번 보드게임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롭 다비오가 2011년 <리스크 레거시>에서 선보인 ‘레거시 메커니즘’(한 번의 플레이가 이후 게임에 영구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협력 게임에 결합한 결과물이다. <팬데믹 레거시: 시즌 1>은 한때 보드게임긱 전체 순위 1위를 차지했으며, 지금까지도 3위에 머물러 있고, 시퀄 시즌 2와 프리퀄 시즌 0도 인기를 끌었다. 이후 <글룸헤이븐>을 비롯해 다양한 캠페인형 레거시 협력 게임들이 등장했다.
2010년대 이후 <팬데믹 레거시> 시리즈, <글룸헤이븐>과 함께 가장 주목받는 협력 게임으로 2017년에 출시된 <정령섬>을 꼽을 수 있다. 플레이어는 섬에 깃든 정령이 되어, 외부에서 침략해 들어오는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 이 게임은 <팬데믹>처럼 입문자에게 친절한 작품은 아니지만, 이른바 ‘게이머스 게임’ 영역에서도 협력 게임이 충분히 깊고 복잡한 전략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2026년 현재를 기준으로, 보드게임긱에 등록된 전체 게임 가운데 협력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2.5%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보드게임긱 상위 1000위 게임 중 16.7%가 협력 게임이다. 상위 100위로 범위를 좁히면 23%가 협력 게임이다. 매년 출시되는 게임 중 협력 게임의 절대적인 수는 많지 않지만, 그중 상당수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협력 게임이 단순한 유행을 넘어 중심 장르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협력 보드게임의 테마: 함께 맞서는 세계
협력 게임은 단순히 모든 플레이어가 승패를 공유하는 게임이 아니다. 협력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만이 아니라, 플레이어들이 공동의 문제에 도전하는 과정에 있다. 그 문제가 판타지 세계의 마왕일 때도 있지만, 많은 협력 게임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적 위기를 설정하고, 그 위기를 어떻게 함께 관리하고 감당할 것인지를 플레이어에게 묻는다.
<팬데믹>에서 플레이어들은 감염병 확산을 막고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개인의 활약보다 팀 전체의 조율을 우선시해야 한다. 패배의 원인은 그저 운이 나빴기 때문이 아니라, 소통이 부족했거나 역할 분담이 어긋났거나 단기적 성과에 집착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정령섬>은 협력 보드게임이 다룰 수 있는 정치적 주제의 범위를 한층 확장했다. 여기에는 탐험과 건설,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침략이 전제되어 있다. 이 게임은 협력 게임이 단지 위기를 관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위기 자체가 무엇이며, 누가 위기를 만들어냈는가를 질문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정령섬> (출처: 전쟁없는세상)
전쟁을 다룬 많은 게임이 전투와 승리에 집중하는 반면, <병사들의 귀향>과 <디스 워 오브 마인: 보드게임>은 오직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플레이어는 1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한 마을 출신의 병사들 내지 내전 중인 도시에서 살아가는 민간인이 되어 역경을 견뎌야 한다. 이 게임들의 목표는 적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버려지지 않도록 책임을 나누는 것이다.
기후위기를 다룬 협력 보드게임 <CO2: 두 번째 기회>와 <데이브레이크>에서 모든 선택에는 비용이 따른다. 어느 한 국가나 플레이어가 앞서 나가도, 전체가 따라오지 못하면 실패한다. 이는 기후위기가 협력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규칙 차원에서 체화하게 만든다. 협력 게임은 여기서 단순한 오락을 넘어, 집단적 무력감과 제한된 선택지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 도구가 된다.
<자유: 지하철도>는 19세기 미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과 비밀 탈출망을 협력 게임으로 구현한다. 노예 사냥꾼은 끊임없이 탈주 노예를 추적하고, 자원은 늘 부족하며,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게임에서 협력은 위험을 분산하는 선택이자, 실패를 감수하는 연대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협력 게임이 저항과 연대의 역사를 표현하는 데에도 효과적인 매체임을 보여준다.

* <자유: 지하철도> (출처: 보드게임긱 @kilroy_locke)
이처럼 협력 보드게임은 특정한 사회 현상이나 문제의 해결 과정을 모사하고 재현하는 데 탁월하다. 이는 협력 게임이 본질적으로 단일한 승자를 전제하지 않고, 구조적 문제를 시스템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규칙 안에서 선택을 반복하며, 문제의 복잡성과 집단적 책임을 몸소 이해하게 된다.
협력 보드게임의 물성: 손에 잡히는 연대
협력 보드게임의 경험은 디지털 협력 게임과도 구분되는 측면이 있다. 보드 위에 쌓여가는 큐브, 줄어드는 덱, 공개된 정보와 숨길 수 없는 불안은 플레이어에게 물리적인 압박으로 다가온다. 이 물성은 위기를 단순한 추상적인 수치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관리해야 할 무언가로 체감하게 만든다.
많은 보드게이머가 PC나 모바일 플랫폼에 구현된 디지털 보드게임이 있음에도, 여전히 얼굴을 맞대고 테이블에 앉아 구성물의 ‘손맛’을 느끼며 플레이하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협력 게임에서 이러한 물성은 긴장과 연대의 감각을 증폭시키며, 플레이어 간의 소통을 더욱 직접적인 경험으로 만든다.
협력 게임에서 소통은 말로 이루어지는 대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카드를 내려놓는 타이밍, 토큰을 집는 방식, 시선과 표정, 찰나의 멈칫거림 같은 몸의 모든 움직임이 의미를 갖는다. ‘눈치 게임’을 전면에 내세운 <더 마인드>를 비롯해 다양한 파티게임을 플레이해보면, 실물 보드게임과 온라인 게임이 가장 크게 갈리는 지점이 같은 바로 같은 물리적 공간을 점유한다는 사실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협력 게임에서 소통이 언제나 긍정적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특히 모든 정보가 공개된 협력 게임에서 목소리가 큰 한 사람이 게임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이른바 ‘알파 플레이어’ 현상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팬데믹> 같은 초기 협력 게임에서 이런 문제가 두드러졌고, 이 때문에 협력 게임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 플레이어들도 적지 않았다.
협력 보드게임의 진화: 제약이 만드는 재미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최근의 협력 보드게임들은 의도적으로 소통에 제약을 두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일반적인 카드게임과 반대로, 각 플레이어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플레이어의 손패를 보면서 게임을 진행하는 <하나비>가 대표적이다. 플레이어는 직접적인 대화 대신 제한된 신호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의도를 추론해야 한다.
‘트릭테이킹’ 카드게임 장르를 경쟁이 아닌 협력 시나리오 게임으로 재해석한 <크루> 시리즈와 여기서 파생된 <반지의 제왕 - 트릭테이킹 게임>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기장과 부기장이 역할을 나눠 비행기를 무사히 착륙시키는 <스카이 팀>은 제한된 대화 속에서 역할 분담과 신뢰를 전면에 내세운 협력 게임이다.

* <스카이 팀> (출처: 보드게임긱 @Tabletopping_Games)
협력 메커니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양한 방향으로 분화되었다. <듄: 임페리움 – 봉기> 6인 모드나 <캡틴 소나> 같은 팀 기반 게임은 상대 팀과의 경쟁을 위해 팀 내부의 협력을 요구한다. <네메시스> 시리즈나 <데드 오브 윈터> 같은 반협력(세미코옵) 게임은 협력과 불신, 연대와 대립이 공존하는 불안정한 관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반협력 게임에서 협력은 전제가 아니라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선택이다. 플레이어 개인의 이익을 위해 동맹은 언제든 흔들리고, 신뢰는 지속적으로 시험받는다. 이는 정치, 기후위기, 사회운동 등에서 나타나는 현실의 협력과도 닮아 있다. 이 점에서 반협력 메커니즘은 보드게임의 외연을 넓히며, 장르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한편, <언락> 시리즈나 <광기의 저택> 2판처럼 디지털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한 협력 보드게임이 늘어나고, VR/AR 기술을 통해 온라인에서도 물리적 상호작용을 모사하려는 시도가 이어지면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 역시 점점 흐려지고 있다. 그럼에도 협력 보드게임의 핵심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함께 실패하고 함께 책임지는 경험에 있다.
앞으로의 협력 보드게임은 더 다양하고 더 복잡한 사회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며, 동시에 ‘함께 하는 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질 것이다.
[1] Matt Montgomery(2024), A brief history of cooperative board games, Don’t Eat the Meeples, https://www.donteatthemeeples.com/history-cooperative-board-gam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