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서 재현과 미학적 아우라: <1979 레볼루션: 블랙 프라이데이>와 <믹스테이프>의 고체적 서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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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6. 6. 10.
정렬된 선택과 결과, 그리고 강제된 수동성
실재에 가까운 재현은 매체가 태어난 이래로, 매체를 만드는 창작자와 그것을 소비하는 이용자가 오랫동안 간직해 온 이상이자 욕망이었다. 게임 또한 ‘실재에 가까운 재현’이라는 이상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행동을 조작하고 결정하게 하며 그 결과를 다시 확인시키는 일련의 모달리티를 통해, 게임은 다른 매체가 좀처럼 도달하지 못한 실감을 구현해왔으며, 플레이어가 게임을 통해 느끼는 실감은, 게임이 실재에 다가서는 고유한 방식이었다.
게임은 실재에 가까워지려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선택과 결과라는 두 개의 연결된 사건을 만들어 낸다. 둘 가운데 선택은 이용자가 자신의 의지로 조작하거나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용자의 의지와 감각을 결과에 정렬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게임이 주는 핵심적 쾌락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 정렬에서 온다. 내가 누른 입력이 화면 위의 사건으로 되돌아오고, 그 결과를 다시 다음 입력의 근거로 삼는 회로야말로 게임이 이용자에게 부여하는 행위주체성(agency)의 실체[1]로 보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선택'이라는 말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버튼을 누르는 조작(operation)이 곧 의미 있는 선택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조작은 무수히 일어나지만, 그 조작이 결과의 분기점으로 이어져 이용자의 의지가 세계에 흔적을 남길 때 비로소 선택은 의미를 얻는다.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것은 단지 이야기를 보는 일이 아니라 시스템의 논리를 몸소 수행하는 일이며, 그런 의미에서 게임의 작동은 언제나 하나의 행위[2]다.
그런데 이용자가 선택을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동시에 이용자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감각을 결과로부터 이탈시킬 가능성까지 품는다. 정해진 루트를 고의적으로 이탈하여, 의도된 결말을 비틀어 보며, 시스템의 빈틈을 의도적으로 겨냥하는 어긋남의 여지야말로 게임이라는 매체가 이용자에게 허락한 자유이며, 게임이 구현한 플레이가 플레이어가 선택이라는 근거다. 반면 어떤 게임들은 선택과 결과가 정렬되는지 여부를 이용자가 결정할 수 없도록 설계한다. 무엇을 누르든 이야기는 정해진 방향으로 흘러가고, 어긋남의 여지는 사전에 봉쇄된다.
선택과 결과의 정렬을 강제한다는 것은, 게임이 제공하는 세계의 이야기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일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정렬을 강제하는 게임은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띠게 된다. 게임은 서사나 이미지의 차원에서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과 시스템의 작동 그 자체로 주장이 되기도[3] 한다.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무엇이 보상받고 무엇이 처벌받는지를 정하는 규칙의 배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설득 요소다. 다만, 선택과 결과의 정렬이 일어날 때 플레이어는 수동성의 영역에 놓인다. 게임이 이용자에게 강제하는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야기를 강제하는 일이 단순히 메시지를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은 이용자가 결과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피드백의 기능 자체를 부전시켜, 게임의 고유한 매체적 특성을 회로가 훼손[4]하기도 한다. 따라서 정렬의 강제는 자칫 게임이 가진 매체적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개발자와 창작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메시지 혹은 재현을 전달하기 위해 선택과 결과의 정렬을 강제하는 길을 택한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 혹은 자본의 한계나 문제가 아니다. 분기점을 구현할 역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분기하지 않는 편이 전달하려는 무언가에 더 충실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매체가 오랫동안 간직해 온 실재 재현의 이상을 향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게임이 피드백을 포기하고 얻은 것
게임이 피드백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포기해가면서까지 실재의 재현에 매달리는 이유를 가늠하려면, 먼저 재현이란 무엇인가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스튜어트 홀은 재현이 사회 아래에 놓인 현상임을 지적하며, 사회적 약속과 권력관계에 따라 동일한 대상조차 완전히 다르게 재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홀은 지식과 권력의 결합을 설명하기 위해 푸코가 꺼내 든 ‘담론(Discourse)’ 개념을 빌려와, 미디어에 의해 의미가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사물 자체에 고정된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의미는 대상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담론적 실천 안에서 비로소 생산된다는 것이다.

* 스튜어트 홀 (출처: 위키피디아)
이를 바탕으로 홀은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규칙과 담론을 형성한다고 본다. 그 증거로 그는 서구 미디어가 동양을 재현할 때 오리엔탈리즘을 경유해 묘사하는 사례들을 들면서,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가 상호 결탁하여 의미를 창출하는 과정을 역설한다. 동양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가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타자로서 거듭 그려진다.
홀은 이러한 미디어의 이미지 결탁하는 과정을, 대항적 독해(oppositional reading)를 통해 극복해야하는 대상으로 보았다. 생산과 소비의 결탁 이면에 숨은 의도를 파악함으로써 대중은 미디어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아이러니가 있다. 홀이 묘사한 대항적 독해와 대안 담론의 중심에는 언제나 보편과 주류라는 공리적 기준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대항적 독해란 결국 무언가 지배적인 코드에 맞서는 독해이며, 그 지배적 코드는 대중이 공유하는 공통의 감각을 전제한다.
문제는 이 전제가 오늘날의 파편화된 미디어 환경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옴니채널과 같은 초개인화된 경험이 일반화된 오늘의 유통환경에서, 주류적 세력을 형성하는 것은 더 이상 정규분포의 중앙값처럼 범용적인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아니다. 알고리즘이 각자에게 다른 세계를 전파하는 환경에서는, 모두가 맞서야 할 단일한 지배적 코드라는 것 자체가 흐려진다. 오히려 극단적인 주장을 통해 강한 배타성과 폐쇄적 정체성을 추구하는 작고 단단한 집단 여러 개가 모여 주류를 이룬다. 대항과 지배의 경계는 무너지고, 누군가의 대항 담론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배 담론이 된다. 이것은 미셸 마페졸리가 그렸던 부족주의(neo-tribalism) 사회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페졸리에 따르면 부족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지금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제공하는 정서적 공명이 사람들을 뭉치게 만든다는 점이다. 합리적 계약이나 거대 이념이 아니라 함께 있음 그 자체의 정서가 결속의 근거가 된다. 마페졸리는 제도화된 권력(pouvoir)과 구별되는, 일상의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사회적 활력(puissance)에 주목하면서, 이 활력이 ‘미학적 아우라’를 통해 표출된다고 보았다. 미학적 아우라란 그 부족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나 은어와 같은 일상적 의례와 미학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미학적 아우라의 시원은 그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 내거나 향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학적 아우라의 형식 그 자체라는 점이다.
마페졸리가 지적한 미학적 아우라는 발터 벤야민이 지적한 것처럼 유일무이한 원본에 깃드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복제되고 공유되는 형식 그 자체에 깃든다. 벤야민의 아우라가 진정성의 아우라라면, 마페졸리의 아우라는 형식의 아우라다. 게임이 실재의 재현에 매달리는 풍경은 바로 이 두 아우라 사이의 긴장 위에 있다. 게임은 실재의 현존이라는 벤야민적 진정성을 좇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게임이 플레이어의 손에 쥐여주는 것은 마페졸리가 지적한 미학적 아우라, 즉 형식의 아우라다. 다시 말해, 게임이 피드백을 포기하면서까지 실재의 재현에 매달리는 이유는, 전달하려는 메시지 자체보다 차라리 특정한 형식 그 자체에 있을지 모른다.

* 미셸 마페졸리 (출처: 위키피디아)
서사에서 시스템으로: 게임의 미학적 아우라는 어떻게 변해왔나?
많은 이들이 마페졸리의 '미학적 아우라'를 떠올릴 때, 그 향유성과 현전성 때문에 탈정치적이고 프로파간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표현이나 양식을 상상하곤 한다. 그러나 미학적 아우라 그 자체는 얼마든지 정치적으로 활용될 수 있으며, 원하지 않더라도 프로파간다처럼 작동할 수 있다. 가령, FPS의 역사를 새롭게 정립한 <콜 오브 듀티 4: 모던 워페어>(이하 <모던 워페어>)를 떠올려 보자. <모던 워페어>의 가장 큰 특징은 △비교적 작은 볼륨 안에 담긴 미니멀하면서도 완성도 높은 전투 △짧은 내러티브 드라이븐 △선형적 스토리를 활용한 시네마틱한 연출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살펴야 할 것은 <모던 워페어>가 가진 특징들을 통해 구현한 속도감이다. 이 속도감은 빠르게 다음 캠페인으로 넘어가고 싶어 하는 이용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공략 이상의 피드백을 지양한다. 플레이어가 <모던 워페어>에서 얻는 쾌감은 명확한 적의의 대상인 적들을 돌파해나가는 슈터로서의 재미다. 다만 이 재미가 중동이나 러시아처럼 내전으로 병든 타국의 땅에서 교전을 벌이며 세계를 구한다는, 지극히 서구 중심적인 관점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전쟁을 명료한 선악 구도의 오락으로 소비 가능하게 만드는 이 감각은 이미 충분히 정치적[5]이다.
마페졸리가 지목한 '미학적 아우라'란 바로 <모던 워페어>가 속도감의 바탕으로 두고 있는 뚜렷한 선악 구도의 서사적 명확성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서사적 명확성이란 갈등의 뚜렷함, 즉 작품의 세계와 캐릭터 사이의 관계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과 결과의 선명함, 다시 말해 원인과 결과의 선명성을 뜻한다. 가령, <모던 워페어>에서 질주감을 형성하는 엄폐와 사격이라는 규칙은 플레이어에게 실패 상태에 선명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선명성은 복잡한 인물의 관계를 다루는 서사적 세계관 속에서도, 행위에 따른 결과라는 형식을 통해 미학적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 <1979 레볼루션: 블랙 프라이데이>의 카메라 시스템... 카메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스팟에 캐릭터가 도착하면 하단에 카메라 표시가 뜬다. 그 중, 역사적 사료와 병치되는 자료를 띄울 수 있는 상호작용이 있으면 카메라 포커스가 초록색으로 변한다 (출처: 플레이 캡처)
<1979 레볼루션: 블랙 프라이데이>(이하 <1979 레볼루션>)는 복잡한 세계관 속에서도 선택과 결과의 선명성을 통해 미학적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사례로 지목할만하다. 주인공 레자가 들고 다니는 사진기를 통해 상호작용하는 시스템은 ‘미학적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모달리티로 주목할 만하다.
<1979 레볼루션>은 인터랙티브 무비로, 실제로 모든 엔딩을 보더라도 세 시간 남짓한 짧은 플레이 타임을 가진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어떤 선택을 하든, <1979 레볼루션>은 이란 혁명을 비극으로 평가한다. 주인공이 새 정권에 붙잡혀 심문받는 액자 구조 안에서 과거가 회상되는 만큼, 결말의 정서는 시작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다. 더불어 게임은 특정한 지점에서 실제 이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를 제시함으로써, 주인공이 이란에서 어떤 비극이 있었는지를 찾아다니는 형식을 띠게 된다.
여기서 핵심은 사진기 메커니즘이다. 플레이어가 게임 안에서 촬영한 장면은, 혁명기에 실제로 찍힌 역사적 사진과 나란히 병치된다. 가상의 이미지가 다큐멘터리의 이미지 위에 포개지는 순간, 게임은 자신이 재현한 것이 허구가 아니라 실재였다고 선언한다. 이는 실재의 재현을 메커니즘으로 구현한 사례이며, 동시에 플레이어에게 이란 혁명을 비극으로 기억하라는 강력하고 반복적인 학습 효과를 가져온다.
물론 <1979 레볼루션>이 전시하듯 이란 혁명은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며, 그 희생자들 역시 마땅히 애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비평적으로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실제 이란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자료를 제시하는 방식이 실제의 재현을 강조하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이 효과는 플레이어에게 이란 혁명을 비극으로 각인시키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혁명에 원인을 제공한 권력이라는 대범주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만드는 미학적 아우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미학적 아우라의 형성은 양가적이다. 그것은 홀이 바랐던 것처럼 작품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촉진해 대항적 독해를 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플레이어가 권력을 지양하는 미학적 아우라 그 자체를 추종하게 만들어, 질서와 같은 공리적 상식마저 거부하게 만드는 힘을 가질 수도 있다. 아우라가 형식 그 자체를 근거로 삼을 때, 비판의 대상이었던 권력에 대한 거부는 어느새 형식에 대한 맹목적 충성으로 미끄러질 수 있다. 권력 일반을 부정하는 정서가 미학으로 굳어질 때,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강제가 된다.

[사진7. <믹스테이프> 포스터 (출처: 스팀)]
최근 각종 게임 커뮤니티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믹스테이프>는 이 미학적 아우라가 얼마나 위태롭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되새기게 만든다. <믹스테이프> 역시 <1979 레볼루션>처럼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인터랙티브 무비이며, 1990년대를 향한 노스탤지어적 텍스처를 플레이의 소구점으로 겨냥한 작품이다. 세 친구가 고교 시절의 마지막 밤을 향해 가며 추억을 되짚는 동안, 특정한 곡들이 플레이 가능한 회상의 장면을 불러낸다.
특이한 것은, <믹스테이프>에는 실패 상태(failed state)로 구현될 만한 캠페인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믹스테이프>에서 플레이어는 그 어느 것도 실패하지 않으며 어떤 결과로도 분기하지 않는다. 이는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제공해야 할 최소한의 선택 요건조차 구현하지 않았다는 비난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실패의 가능성이야말로 플레이어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실패할 수 없다면 성공도 없고, 결과가 갈리지 않는다면 선택도 없다.[6] <믹스테이프>의 상호작용은 결과가 아니라 정서를 위해 존재하는, 텍스처로서의 기능적 상호작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믹스테이프>가 무리해 가며 선택의 영역을 제거한 선택이 어떻게 글로벌 흥행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믹스테이프>가 플레이어의 선택을 구현하지 않음으로써 얻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플레이어가 소비의 방향을 정할 수 없는 고체적 시스템이고, 다른 하나는 일회적 플레이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미학적 휘발성이다. 즉, 한 번 플레이하고 나면 버려지는 일종의 인스턴트 시뮬레이션 이상의 의미를 거둘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소구의 방향을 제시한다면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가능성은 오히려 높아진다. 선택지를 지운 대가로 <믹스테이프>가 얻은 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도착하는 매끄러운 정서의 패키지다.
여기서 우리는 ‘판매고’와 같은 성취의 언어가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의구심을 품고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믹스테이프>가 지향하는 '미학적 아우라'와 프로파간다 그 자체가, 쓰고 버리는 소비주의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모던 워페어>가 서사적 명확성을, <1979 레볼루션>이 권력에 대한 평가를 통해 최소한의 실재를 마련했다면, <믹스테이프>의 아우라는 어떤 메시지도 아닌 소비의 형식 그 자체를 향한다.
이렇듯 미학적 아우라는 점차 내용을 비우고 형식만을 남긴다. 전쟁이 가져오는 적의의 명료함에서, 권력에 대한 단죄를 부추기는 페스티쉬를 거쳐, 마침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노스탤지어의 질감에 이르는 과정은, 아우라가 메시지로부터 풀려나 형식 그 자체가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고체적 가상과 유동적 실재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세 작품의 공통된 특징은, 서사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선택과 결과는 정렬되도록 강제되었고, 어긋남의 여지는 닫혔으며, 이야기는 단단하게 굳어 있다.
일찍이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의 특징을 유동성(liquidity)이라 지적한 바 있다. 바우만이 유동성의 대상으로 바라본 것은 다름 아닌 정체성과 의미였다. 정체성은 더 이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끊임없이 짊어지고 갱신해야 할 과제가 되었고, 그 과제는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 소비사회에서 정체성마저 사고 버리는 상품이 될 때, 사람들은 어디에도 오래 머무르지 못한 채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그렇다면 유동성의 시대에 우리는 왜 굳이 고정된 서사를 소비하는가. 어쩌면 우리는 미학적 아우라라는 가상 속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려 정체성이 발붙일 곳 없는 유동성의 실재를 피해, 고체화된 가상으로 이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택이 사라진 자리, 결과가 미리 정해져 딱딱하게 굳어버린 세계는, 무엇 하나 단단히 붙잡을 것 없는 현실에 지친 이들에게 차라리 안식처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믹스테이프>가 되살리는 1990년대가 그토록 강력하게 소구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마치 온전히 복원할 수 있는 고향인 양 제시하는 경험한 적 없는 노스탤지어이며, 흘러내리는 현재에 맞서 굳어 버린 과거를 내미는 몸짓[7]이다.
그러나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과연 고체화된 가상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정체성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잠시의 피난처에 불과한, 또 하나의 쓰고 버리는 인스턴트일 뿐인가. 벤야민의 아우라가 복제 속에서 시들었듯, 형식의 아우라에 기댄 이 고체적 가상 역시 한 번의 소비로 휘발해 버린다면,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안식처가 아니라 더 매끄러운 유동성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