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Back

미겔 시카트의 <플레이: 호모 루덴스를 위한 인문학> 리뷰

32

GG Vol. 

26. 10. 10.

1.

     

가벼워 보이는 책이었다. 두께만이 아니고 내용도 그런 듯했다. 논다는 건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둥, 우리가 게임만이 아니라 장난감과 함께 놀이터에서 기술과 디자인을 가지고도 논다는 둥 게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동안 숱하게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들이 곳곳에 등장해서 더욱 그랬다. 하위징아 이후 놀이를 예찬하는 인문서는 적잖이 나왔고,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말은 요즘 기업 연수 자료나 심지어 육아서에서도 심심찮게 보일 정도가 아닌가.

     

한국어판은 1장부터 8장까지 다 합쳐도 150쪽이 채 안 되고, 형식 역시 “놀이는 ~이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해 사례 몇 개를 거쳐 다시 선언으로 돌아오는 구성을 취하는 문단이 많다. 원서가 나온 MIT 프레스의 ‘플레이풀 싱킹(Playful Thinking)’ 시리즈부터가 짧고 읽기 쉬운 책을 내겠다는 기획에서 비롯된 것이라, 간결함은 애초에 의도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플레이: 호모 루덴스를 위한 인문학(이하 ‘플레이’)>이 가볍게 넘길 책은 아니다. 본문 앞의 ‘책 읽는 법’에서 저자 시카트는 주석이 수백 개에 이르지만 절망하지는 말라고, 주석을 하나도 읽지 않아도 책을 읽는 데는 문제가 없다 말한다. 본문을 편하게 읽어 나가면서, 궁금한 개념이 생기면 서른 쪽이 넘는 주석을 뒤지면 된다. 추천사에서 연세대학교 윤태진 교수가 이 책을 이론적 선언문에 가깝다고 하면서도 ‘에세이형 교양서’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고 덧붙인 것도 그래서일 터다. 여기서 플레이풀 싱킹 시리즈가 대중성만이 아니라 전문성까지 추구한다는 점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플레이>는 여러 입장을 고르게 늘어놓기보다, 놀이에 관한 한 가지 관점을 힘줘 밀고 나가는 책이다.

     

문장이 쉽다 해서 생각까지 평범하진 않다. 이 책이 나왔을 시기 “게임이 21세기의 가장 지배적인 문화 형식이 될 것”은 이미 익숙한 말이었지만, 시카트는 이런 이야기에 동조하지 않는 편이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쳐다보는 옛 우화처럼, 게임은 손가락이고 놀이가 바로 달이라고 그는 말한다. 옮긴이 나보라가 원제 ‘Play Matters’ 뒤에 ‘not games’, 그러니까 게임이 아니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읽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시카트 역시 게임이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오늘날 가장 강력한 놀이 형식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여기서 게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못 박는다. 그래서인지, 책을 다 읽고 나니 게임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은 확장 혹은 이동해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2.

     

게임을 설명하는 이론들은 대개 규칙에서 출발한다. 예스퍼 율의 <하프 리얼>처럼 게임이 규칙과 허구로 어떻게 짜여 있는지 따지는 식이다. 이런 구성이 나쁘다거나 가볍다는 것은 아니나, 논의의 첫 단추를 게임 쪽에서 끼워왔다는 점에서는 대부분이 비슷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카트는 첫 단추를 놀이 쪽으로 끼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는 2012년 가을과 겨울 키보드를 광적으로 두들기며 이 책을 썼다고 돌아본다. 당시 학계에서는 게임을 규칙에 따라 돌아가는 절차로 다루는 이른바 절차주의 담론이 대세였고, 사람들이 실제 게임을 할 때 규칙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관찰한 논의들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놀이 논의와 게임 논의가 따로 놀던 시절, 둘을 잇는 다리로 쓴 책이 바로 <플레이>다.

     

그래서 <플레이>에서는 게임이 놀이가 취하는 여러 형식 중 하나가 된다. 시카트는 놀이를 전쟁, 의례, 게임 같은 특정 활동에 묶어 두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꺼내 쓸 수 있는 휴대용 도구처럼 이해하자며, 이에 ‘놀이의 수사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놀이는 일상의 물건과 상황,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우리가 세상 속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식이기도 하다.

     

시카트가 꼽는 놀이의 성격은 일곱 가지다. ①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가지고 노느냐에 따라 달라지고(맥락적), ② 그럴듯한 제도나 권위를 조롱하며 뒤집기도 하며(카니발적), ③ 주어진 것을 제 것으로 만들뿐 아니라(전유적), ④ 기존 질서를 흔들어 놓는다(교란적). ⑤ 노는 것 자체가 목적이면서(자기목적적), ⑥ 노는 사람에게 제 방식대로 표현할 자유를 줌은 물론(창조적), ⑦ 여럿이 함께 놀아도 경험은 저마다의 기억으로 남기 마련이다(개인적). 일곱 가지를 어떤 활동이 놀이인지 아닌지 가려내는 기준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시카트가 공들이는 건 놀이의 범위를 정하는 일만큼이나, 놀이가 사람과 세상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곱 가지 중 핵심은 ‘전유’다. 말은 어려워 보여도 내용은 간단하다. 주어진 물건이나 공간을 원래 쓰임새와 다르게, 내 놀이에 맞게 써먹는다는 것이다. 시카트가 놀이터 장에서 드는 예를 빌리면, 스케이트 보더에게는 도시의 난간과 계단이 모두 놀이 대상이 되고, 파쿠르를 하는 트레이서에게 도시의 건축물은 장애물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물건을 엉뚱하게 가지고 놀아 본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놀이는 자기가 놓인 맥락을 차지해 버리기 때문에, 맥락이 놀이를 완전히 미리 정해둘 수는 없다. 놀이는 현실 한복판에서, 현실의 재료를 잠시 다르게 쓰는 일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시카트와 오랜 전통이 구분된다. 그는 놀이를 “명확한 규칙에 기반하는 별도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공정한 경쟁”으로 보는 하위징아식 전통은 따르지 않겠다고 밝힌다. 놀이가 현실과 떨어진 마법의 원 안에서 벌어진다는 매직 서클의 생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시카트에게 놀이는 세상과 분리되지 않은 채 세상 안에서 번성하는 활동이며, 자기목적적 놀이조차 경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아 게임의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선은 늘 협상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고 규칙을 내다 버리자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규칙은 놀이가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긴 해도 충분조건은 못 되고, 노는 동안 얼마든지 따져 보고 고치고 바꿀 수 있기에 소품에 가깝다.

     

놀이가 현실을 바꾼다 하지만, 늘 좋은 쪽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즐거움을 준다 해서 반드시 재미있거나 기쁘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아프거나 불쾌하거나 놀림을 받을 때조차 즐거울 수 있다. 놀이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중독되거나 파괴적으로 흐르기도 하고, 몸을 다치게 하거나 친구와 절교하게 만들거나 마음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책은 이어서 놀이성, 장난감, 놀이터, 아름다움, 정치, 건축가를 한 장씩 다루고, 마지막 8장에서 컴퓨팅 기계와 놀이의 관계를 살핀다. 놀이성은 노는 태도를 놀이 아닌 일에까지 가져가는 걸 말하고, 장난감과 놀이터는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물건과 공간이다. 같은 관점을 장별 새로운 사례에 대보는 식이라,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게임에서 나선형 플레이를 하듯 저자의 주장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흘러 들어온다. 물론 때로 특정 독자에게 이런 논리 전개 방식은 같은 말의 되풀이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

     


3.

     

이 책이 갖는 차별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책을 집필하던 당시 게임 연구에서 지배적이었던 절차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옮긴이 서문에 따르면 이안 보고스트가 예인데, 그는 게임이 규칙과 절차를 통해 의미를 전달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규칙만으로 의미를 설명하면 플레이어는 디자이너가 미리 넣어 둔 의미를 꺼내 쓰는 사람쯤으로 쪼그라들고, 규칙을 넘나들며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잘 보이지 않게 된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규칙 분석을 그만두자는 말은 아니다. 규칙에, 사람들이 실제로 노는 경험까지 더해 논의를 보완·확장해 가자는 것이다.

     

<플레이>는 같은 문제의식을 게임 바깥으로 열어젖힌다. 달리기 선수나 축구 선수, <스타크래프트> 거장의 경기를 보며 감탄해 본 적이 있다면, ‘아름다움’ 장이 반가울 듯하다. 다만 시카트가 내세우는 건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놀이 미학으로, 잘 만든 규칙 너머 사람들이 무언가를 제 것으로 만들고 표현하는 행위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참가자들이 직접 인물 역할을 맡아 몸으로 연기하는 라이브 액션 롤플레잉 게임이나 플레이어를 일부러 괴롭히는 불쾌한 게임이 예로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건축가’ 장에서 디자이너에게 하는 주문은 더 단호하다. 게임 디자이너는 맥락 외의 것들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놀이를 활성화시키는 촉매로서 소품 담당자나 무대 감독처럼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고 배치할 뿐이다. 게임 디자이너라는 말에 담긴 작가의 권위도 문제다. 당연히 이러한 주장 또한 아무것도 정하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 플레이어의 해석과 표현을 설계자 의도 아래 묶어 둬서는 안 된다는 요구로 읽으면 어떨까 싶다.

     

다른 하나는 놀이를 효율과 성과만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서 게이미피케이션을 떠올리기 쉽지만, 옮긴이가 서문에서 일러두듯 저자는 게이미피케이션을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본문에는 그 말이 아예 안 나오고, 딱 한 번 등장하는 주석에서도 상업적으로는 두루 비판받았되 놀이 바깥에서 놀이성을 생각하는 데는 여전히 희망적인 개념이라 적어 두었을 뿐이다. 시카트는 게이미피케이션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대신 보다 큰 관점에서 논의를 펼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이론을 놀이를 도구화하여 기계처럼 효율만 따지는 사고방식에 대한 반발로 설명하면서, 한국어판 서문에서는 생산성과 목표와 수량화로 규정되는 삶 대신 다른 존재 방식을 고민하자고 말하는 것이 그 증거다.

     

다만 여기서 놀이성과 도구화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시카트에게 놀이성은 노는 태도를 가져오되 원래 활동의 목적은 존중하는 것이라서, 일하면서도 놀 듯이 할 수 있다. 문제는 놀이의 겉모양만 빌려 와 정해진 성과를 내라고 다그치면서 참여하는 사람이 제 방식대로 움직일 여지를 없애는 경우인데, 이때 남는 것은 놀이성이 빠진 놀이의 형식, 곧 도구화된 놀이다.

     


4.

     

한국어판에는 ‘호모 루덴스를 위한 인문학’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이는 시카트를 하위징아, 그리고 하위징아를 잇는 놀이-게임 연구자들과 연결한다. 그 연결을 통해 시카트를 기존 놀이 이론에 대보고, 또 대어지지 않는 부분을 찾아보라고 주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카트는 자신의 놀이 이론이 명백히 포스트 하위징아적이지만 여전히 그의 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밝힌다. 그 영향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는 본문이 넌지시 알려 준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놀며,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진화론적이거나 인지적인 방식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방식이어야 한다는 대목이 그렇다. 놀이를 인간다움의 핵심에 둔 하위징아의 문제의식을, 부제의 말 그대로 인문학의 방식으로 이은 셈이다. 다만 놀이를 현실과 분리된 가장(假裝)으로 보는 고전적 이론이나, 명확한 규칙에 기반한 별도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공정한 경쟁으로 보는 하위징아식 전통과는 선을 긋는다.

     

로제 카이와와 견주면 시카트의 차이가 더 또렷해진다. 옮긴이 서문은 카이와의 놀이 분류인 아곤(경쟁), 알레아(우연), 미미크리(흉내), 일링크스(현기증)를 소개한다. 시카트가 이 책에서 주로 살피는 것은 놀이의 유형보다 놀이가 여러 맥락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사람과 세상의 관계를 바꾸는가이다. 그는 주석에서 카이와가 놀이의 타락과 잠재적 위험성을 논했다고 소개하며, 자신도 놀이가 중독적이거나 파괴적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놀이를 일상과 분리하기보다, 일상 속에서 전유와 표현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Play Anything>(2016)의 이안 보고스트 논의와도 비교할 만하다. 앞서 옮긴이 서문이 절차주의의 예로 든 보고스트지만, 이 책에서는 게임 바깥 놀이를 다루고, 놀이를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도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카트와 유사하다. 다만 보고스트는 사물이 주는 제약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주의를 기울이는 경험에, 시카트는 주어진 맥락을 자신의 것으로 바꿔 표현하는 과정에 더 무게중심을 둔다. 우리가 실제로 놀 때는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나기 마련이기에, 두 책을 같이 읽으면 그 얽힘이 좀 더 구체적으로 보일 듯하다.

     

<플레이>를 읽으면서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이동휘 옮김, 2022)도 떠올랐다. 응우옌에게 게임은 목표와 능력, 행동방식을 설계하는 예술이고, 그가 ‘분투형 플레이’라 부르는 경험은 우리가 게임 속 (자신이 정한) 목표에 진지하게 매달리다가도 게임이 끝나면 그것을 미련 없이 내려놓을 수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게임의 단순하고 명확한 가치가 삶의 복잡한 판단을 대신해 버릴 위험을 다룬 대목은, 시카트의 도구화 비판과도 맞닿아 있다. 규칙을 받아들이고 목표에 몰입하는 즐거움이 궁금하다면 응우옌 책이, 놀이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물건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놀이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시카트가 더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한국에서도 놀이와 플레이를 다룬 작업은 꾸준히 있어 왔다. 당장 <게임, 게이머, 플레이>(이상우, 2012), <게임의 이론>(이동연 등, 2019), <사이버 루덴스>(이동연 등, 2024) 등의 책들이 떠오르는데, 실제로는 더 많다. 그럼에도 옮긴이가 게임 연구에서 놀이 이론의 계보가 특히 한국의 경우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진단하는 데 상당 부분 동의한다. <플레이>가 반가운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데, 앞서도 언급했듯 놀이 이론으로 게임을 설명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게임을 여러 놀이 가운데 하나로 다시 보고 생각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5.

     

한국어판에는 원서에 없는 것들이 있다. 저자가 새로 쓴 서문, 옮긴이의 서문, 그리고 옮긴이가 여러 개념을 한국어로 옮기며 내린 선택들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가 원서를 훨씬 더 풍부하고 입체적인 텍스트로 만들어준다.

     

저자 서문에서 시카트는 이 책이 2008년 경제 위기와 중동에서 끝없이 이어진 전쟁들에 분노하면서도 세상이 바뀔 거라 믿었던 시절, 격분의 낙관주의 속에서 쓰였다고 돌아본다. 월가 점령 운동부터 어나니머스까지 세상을 놀이하듯 제 것으로 만드는 움직임에 기대를 건, 낙관적인 시대에 쓰인 낙관적인 책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낙관이 군데군데 지나쳤고 희망이 섞인 생각에 가까웠을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정치를 다룬 6장과 마지막 8장이 특히 그렇다고 털어놓는다. 그래도 핵심 생각은 지금 더 절실해졌다며, 놀이가 상품이 되어 시장에서 사고파는 아이템으로 전락하면 우리에게 남는 건 자유 없는 세상뿐이라고 경고한다. 덕분에 독자로서는 저자가 말하는 본문의 주장과 한계를 함께 놓고, 자신의 생각을 비교해가며 읽을 수 있게 된다.

     

옮긴이 서문은 이 이야기를 한국의 맥락으로 가져온다. 2010년대 초반 서구 분위기와 당시 게임 산업의 사정, 게이미피케이션을 둘러싼 논쟁까지 독자가 알아 두면 좋을 배경을 차근차근 정리한다. 책에서의 주장이 한국 게임 연구에서 갖는 의미도 빼놓지 않는다. 그리고 2024년 계엄 사태 당시 K팝과 응원봉 시위를 통해 절망적인 상황을 연대와 축제의 장으로 전유하며 헤쳐 나갔던 우리 경험을 떠올리면, 놀이의 정치에 대한 낙관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괄호 속에 슬쩍 덧붙이기도 한다. 시카트가 말한 놀이의 정치적 가능성을 우리 경험에 비춰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이 부분이 꽤 인상적이었다.

     

번역 곳곳에 게임 연구자로서의 흔적도 배어 있다. 추천사에서 윤태진 교수는 옮긴이 나보라를 드문 게임문화 연구자이자 번역가로 소개하는데, 실제로 나보라는 한국 전자오락의 역사를 게임성 개념으로 풀어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추천사에 따르면 ‘play’를 ‘놀이’로, ‘playfulness’를 ‘놀이성’으로 옮긴 것도 고민 끝의 선택이었다 한다. 본문은 이 원칙을 바탕에 두면서, 게임을 하는 행위에는 ‘플레이’를 사용하고 ‘다크 플레이’ 같은 말도 살려 둔다. ‘ludic’을 왜 ‘루두스’로 옮겼는지, ‘컴퓨팅 기계’가 왜 그냥 컴퓨터가 아닌지를 풀어주는 역주, 인용된 책의 국내 번역 여부와 원서가 안내하는 웹사이트의 접속 여부까지 챙긴 주석을 읽다 보면, <플레이> 번역 작업이 문장만이 아니라 책이 읽힐 지금 여기의 맥락까지 함께 옮겨오는 작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6.

     

무엇보다 <플레이>의 가장 큰 장점은 게임을 읽고 말할 때 두고두고 꺼내 쓸 수 있는 개념들을 간명하게 건넨다는 데 있다. 시카트는 ‘장난감’ 장에서, 공은 그저 둥근 물체일 뿐이지만, 그 안에 무한한 수의 게임이 담겨 있다고 쓴다. 책에서 소개하는 개념들도 공처럼, 이리저리 굴려 보면 좋겠다. 이야기가 얼마나 깊은지, 시스템은 얼마나 정교한지, 매출이 얼마인지 따지는 질문 옆에, 플레이어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놀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나 더 놓아 보자는 것이다.

     

시카트 말대로 놀이는 게임보다 넓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게임의 목표와 보상과 경쟁 방식이 방송으로, 일터로, 연애로, 공부로 번져 간다. 게임이 놀이보다 커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임의 형식이 여기저기 쓰인다고 노는 자유까지 함께 늘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놀이가 일상을 관리하고 성과를 끌어올리는 데 동원되기 쉽다. 이 책을 오늘의 현실에 갖다 대본다면, 모든 것이 게임이 된다 했을 때 놀이는 어디에 있는가.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놀이는 우리에게 세상을 주고, 우리는 놀이를 통해 세상을 우리의 것으로 만든다.”(168쪽) 이 말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그걸 가로막는지 따지는 일은 독자에게 맡겨진다. 이처럼 <플레이>는 잘 설계된 시스템과 성과 너머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놀고 무엇을 표현하는지 게임 비평이 다시 묻게 만든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이경혁.jpg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게임, 방송,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저서로 <흔들리는 팬덤: 놀이에서 노동으로, 현실에서 가상으로>(2024), <서브컬처 비평>(2020), <아이피, 모든 이야기의 시작>(2021, 공저), <서드 라이프: 기술혁명 시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2020, 공저),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게임까지>(2019, 공저) 등이, 논문으로 ‘<체인소 맨>의 한국적 수용과 문화적 증폭’(2026), ‘극사실주의의 게임적 재구성: <나는 SOLO>의 상호/텍스트성과 수용구조’(2026), ‘이기지 않아도 재미있다: 부모-자녀 게임 플레이의 사회성과 행위성, 그리고 분투형 플레이’(2024), ‘커뮤니케이션을 소비하는 팬덤: 아이돌 팬 플랫폼과 팬덤의 재구성’(2022) 등이 있다.

이경혁.jpg

​

​

​게임세대의 문화담론 플랫폼 게임제너레이션은 크래프톤의 후원으로 게임문화재단이 만들고 있습니다.

gg로고
게임문화재단
KRAFTON_Horizontal_Logo_Black.jpg
드래곤랩 로고

Powered by 

발행처 : (재)게임문화재단  I  발행인 : 유병한  I  편집인 : 조수현

주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로 114, 2층(방배동)  I  등록번호 : 서초마00115호  I  등록일 : 2021.6.28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