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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녀 게임 속 에서의 여성 재현 문제

04

GG Vol. 

22. 2. 10.

누구에게나 이상(理想)이 있다. 거창하게는 미래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소소하게는 입고 싶은 옷이나 만나고 싶은 작품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 저마다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이상 중에서도 특히나 사람에 대한 이상은 우리 일상에서 자주 언급되고 구체화된다.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 스타일이 세련된 사람, 지적인 사람, 활발한 사람, 나보다 키가 큰 사람, 나이가 적은 사람 등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물음에 할 수 있는 대답은 무궁무진하다. 그렇다면 이것을 사람이 아닌 캐릭터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 보면 어떨까?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탓일까, 캐릭터들은 우리가 꿈꾸는 인간상을 그대로 보여주며 이상적인 이미지를 구축해나가는 선두 주자가 되곤 한다. 게임 캐릭터로 따져보자면 미소녀 게임의 히로인들이 여기에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그중에서도 예시를 들만한 캐릭터가 누군고 했을 때, 최근에 출시된 게임까지 갈 것도 없다. 90년대 초반에 나와 지금까지 회자하고 있는 〈동급생 同級生〉이나 〈도키메키 메모리얼 ときめきメモリアル〉 시리즈만 봐도 게임을 소비하는 이들이 추구하는 이상, 환상의 미소녀 상은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다. 바로 ‘가와이’한 미소녀 상이다.


일본은 어린아이처럼 미숙하고 귀여운 걸 추구하는 가와이(かわいい·귀여운, 사랑스러운) 문화가 1980년대 이후 정착되었는데, 이 가와이 문화는 ‘귀여움’이라는 말 아래 미성숙함과 성숙함의 경계를 불명확하게 만든다.  귀엽고 순진하면서도 성적으로 성숙한 캐릭터들의 유형은 미소녀 게임과 가와이 문화가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시사하는 듯하다. 동시에 미성숙과 성숙이라는 정반대의 요소들이 병치 되면서 이용자들의 모순된 욕망이 드러난다. 한마디로 미소녀 게임은 가와이 문화의 정수라고도 볼 수 있는 거다.


* 〈동급생〉과 〈도키메키 메모리얼〉.

돌이켜보면 게임 속 첫사랑이었던 그녀들은 소꿉친구, 같은 반 친구, 아는 누나, 체육계 유망주, 보건교사 등 다양한 타입으로 나타나곤 했다. 각자가 떠올리는 그녀들의 모습이나 직업은 아마 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를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미소녀 유형이 없던 건 아니다. 〈동급생〉의 사쿠라기 마이와 〈도키메키 메모리얼〉의 후지사키 시오리는 빼어난 미모, 우수한 성적을 가져 모두가 동경하는 교내 아이돌로 그려졌다. 게임 밖의 아이돌이기도 했던 두 소녀는 그들이 등장했던 게임만큼이나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이들의 특징은 훗날 등장한 미소녀 캐릭터들에게 그대로 답습되었다. 사쿠라기 마이, 후지사키 시오리라는 조상의 복제가 이루어진 셈이다. 학교를 무대로 한 미소녀 게임일수록 이들의 존재감은 더욱 짙게 드리워진다. 이 외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새롭게 태어난 소녀들의 유형은 학교가 배경이 되지 않아도 어딘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미소녀 게임의 캐릭터들은 성격, 외모, 직업, 주인공과의 관계 면에서 설득력 있게 구성된 ‘척’하며 소비자가 바라는 이상적인 여성의 틀을 계승한다.


틀을 갖고 태어난 히로인들의 행복은 오로지 플레이어, 즉 주인공인 남성만이 줄 수 있다. 과거 여성이 남성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림하는 걸 당연한 행복으로 여겼듯 가상의 미소녀들도 그러한 모습을 보인다. 마치 당신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모든 미소녀 게임이 결혼은 곧 해피엔딩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소녀들의 존재의의가 주인공 남성이라는 건 언제나 변함이 없다.


보통 미소녀 게임은 평범하디 평범하기 그지없던 주인공이 여러 미소녀와 갑작스레 얽히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플레이어는 자신을 위협하는 다른 남성이 없는 이 세계를 만끽하며 소녀를 고른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몇 가지 선택지를 지나고 그녀와의 엔딩을 향해 나아간다. 공략이 진행되는 동안 소녀들은 수줍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주인공에 대한 흥미는 거두지 않는다. 특히나 풋풋한 첫사랑이 키워드가 되는 게임 속 그녀들은 플레이 기간 내내 꿈 같은 나날을 선사한다. 첫 만남, 첫 데이트, 첫 키스, 첫 경험에 이르도록 모든 과정이 이벤트의 연속이다. 크고 작은 고난을 겪은 후 CG로 공개되는 이 장면들은 그동안 키워온 사랑을 증명한다. 소녀들은 자신의 몸을 주인공에게만 내비치고 공유하면서 행복한 엔딩에 가까워진다.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잘 가꾸어진 몸과 속옷을 보여주는 서비스신은 덤이다.


여성의 몸은 목적을 달성하면 받을 수 있는 보상으로 간주되곤 하는데, 그 시선은 게임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하여 공략 캐릭터는 주인공에게 보호받음과 동시에 침범당한다. 정서적으로 보호받는 것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시로 몸의 침범을 허락하는 거다. 남성을 따뜻한 손길로 보듬어주며 성적인 부분도 해결해주는 미소녀의 모습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성녀와도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야말로 환상이다. 기억에 남는 첫 만남부터 아픈 과거, 그를 딛고 행복을 거머쥐기까지 플레이어의 클릭은 소녀들의 운명을 좌우한다. 그렇게 해서 쥐게 된 엔딩은 소녀들의 존재에 대한 의문마저 낳게 만든다. 자신의 모든 ‘처음’을 플레이어와 공유하지 않은 소녀는 히로인이라는 자리에서 실격하게 되는 건가, 하는.


어쨌거나 서술한 히로인들은 게임이기에 맛볼 수 있는 환상적 여성의 결정체다. 예쁘고 어딘지 순진하면서 순결한, 그렇지만 플레이하는 ‘나’에 한해서만큼은 개방적인. 그럼 이런 이상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소녀들은 어떨까?


 * 〈여자교도소〉. 출처: 스팀 공식 페이지.

최근 스팀을 살펴보면, 선정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 게임일수록 특정 카테고리 인기 군에 머무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여자교도소 Woman’s Prison〉는 앞서 이야기한 게임들과 다르게 사랑보다는 육체적 관계를 부각해 보여준다. 캐릭터들은 욕망에 매우 충실하여 처음 본 남성과의 접촉에도 거리낌이 없다. 애초부터 포르노 이미지를 목적으로 설계된 미소녀들은 첫사랑의 그녀들과는 다르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남성을 유혹하고 이용하는, 마녀와도 같은 측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설거지론이 생각났다는 리뷰가 달리기도 한 이 게임은 이상적인 여성상에서 탈락한 미소녀들의 집합소다. 이들은 진정한 행복처럼 여겨지는 연애, 결혼은 제쳐두고 성적 자극만을 탐닉한다.


모든 처음을 함께 한 미소녀들과 만나기 전부터 닳고 닳아있던 미소녀들. 두 부류의 소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결국 포르노 이미지로의 귀화다. 그런데도 둘은 상반된 운명을 맞는다. 육체적 관계를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소녀들은 가정적이고 화목한 것과는 다른 결의 엔딩을 보게 되는 거다.


 * 〈당신과 그녀와 그녀의 사랑〉과 〈두근두근 문예부!〉. 출처: 스팀 공식 페이지.

일반적인 가와이함과 마녀 같은 성질을 동시에 지닌 미소녀들도 존재한다. 〈당신과 그녀와 그녀의 사랑 君と彼女と彼女の恋〉이나 〈두근두근 문예부! Doki Doki Literature Club!〉 같은 작품에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폭력적인 일도 마다치 않는 소녀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초반부의 이들은 여느 미소녀들처럼 귀여운 면모만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원하는 엔딩에 방해되는 인물을 없애버리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이 목도된다. 성인가 게임인 전자의 경우에는 소녀가 플레이어를 사로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몸을 이용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이런 극단을 달리는 행위들은 예상할 수 있듯 주인공 남성과의 사랑을 이유로 한다. 폭력적인 행위의 이유도 남성, 그것을 멈출 수 있는 열쇠도 남성. 그들에게 남성은 맹목적인 삶의 원동력이다. 앞서 말한 ‘마녀’들과는 다른 사유지만, 어떻게 보면 이들도 플레이어의 선택지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마녀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폭력적 행위는 진짜 마녀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가져온다. 상상도 못 한 전개에 공포는 생길지언정, 거부감이나 분노 이전에 이해를 불러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게임 서사에 따른 차이인가? 아니면 캐릭터 메이킹의 차이인가?


사실 이런 포르노 이미지 속 여성은 여성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포르노 안의 신체는 특정한 맥락에서 과장되며 보는 이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것이 실재하는 몸이라고 인식하게끔 한다.  과장된 이미지는 사회 갈등의 접점에 서 있는 걸 이따금 목격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게임 내 여성 이미지, 포르노 이미지도 사회의 한 면을 보여주는 코드가 된다. 실재한다고 인식된 몸은 어느덧 ‘이상적인 형태’라는 이름 아래 자리 잡는다. 우리가 ‘여성’ 하면 긴 생머리, 뽀얀 피부, 큰 가슴, 가느다란 팔다리, 잘록한 허리 등 외적 요소를 주로 떠올리는 것도 그래서일 거다. 이처럼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해온 이미지들은 게임 안에서 재생산되고 어떨 땐 게임 밖으로도 확대된다. 이는 외적인 이미지에 그치지 않고 관념의 영역까지 포함한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등 공주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판 중 하나가 바로 고전적인 여성상을 재현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주들은 이야기를 주도해나가는 주인공이라는 부분에서 완전한 주체처럼 보이나, 그들의 서사를 완성해주는 건 늘 구원자인 왕자였다. 완벽하게 다른 장르지만 미소녀 게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소녀 게임’이라고 이름 붙어있어도 극을 끌어나가는 건 소녀가 아닌 남성이고 소녀의 서사를 완성하는 것도 당연히 남성이다. 왕자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공주 이야기가 남성에 대한 환상을 불어넣었다면, 주 소비층이 남성인 미소녀 게임은 역으로 여성에 대한 환상을 부추긴다. 귀여운 외모, 부족한 남성 자신을 보듬어 줄 사랑, 성에 관련된 거라면 뭐든 들어주는 여성에 대한 환상을 말이다. 그렇게 미소녀는 가와이 문화에, 포르노 이미지에, 고전적인 여성상의 답습에 사로잡히게 된다.


누군가는 ‘그것이 이런 게임의 의의 아니겠느냐’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미소녀 게임은 미소녀와 즐기면 그게 다인 게임이라고. 하지만 판타지가 판타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그를 방해하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특정한 여성상이 요구되는 사회 안에서, 과연 미소녀 게임은 아무 생각 없이 즐겨도 될 이미지와 서사의 집합체일 뿐인가? 미소녀 게임과 현실의 여성상이 어떤 방식으로 맞닿아 있는지, 판타지로 만들어진 게임이 어째서 판타지 그 자체로만 즐겨지지 않는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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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문화연구자)

융합예술과 문화연구를 공부했습니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관해 관심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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