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을 가진 신의 손』,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 감추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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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6. 8. 10.

들어가며: 육성 시뮬레이션 장르의 기억
『프린세스 메이커』를 플레이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경험이 있다. 시간을 들여서 정성껏 딸을 키웠는데, 마지막에 도착한 엔딩이 기대와 전혀 다른 것이었던 경험이다. 게임자체에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어느 수치가 모자랐는지, 어느 계절의 일정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무심코 고른 선택지 하나가 모든 것을 갈랐는지에 대해 게임은 침묵한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의 몇 년, 현실의 몇 시간이었던 자신의 플레이를 스스로 되짚어야 하고, 혼자서 얻지 못한 답은 공략 게시판과 친구의 플레이 경험담 같은 것으로 채워진다. 육성 시뮬레이션은 처음부터 그런 장르였던 셈이다. 게임이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기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플레이어의 기억이, 나아가 플레이어들의 기억이 메워온 장르 말이다.
그런데 이 익숙한 감각을 유독 극단까지, 그리고 유독 정교하게 밀어붙인 게임이 있다. 『관을 가진 신의 손(冠を持つ神の手)』, 통칭 ‘카모카테’라고 불리는 이 게임은 2009년 일본의 동인 서클 ‘코무기바타케(小麦畑)’가 발표한 육성 시뮬레이션 무료 동인 게임다. 시골에서 자라 어머니를 여읜 주인공은 어느 날 이마에 새겨져 있던 인장, ‘선정인’으로 인해 신의 선택을 받은 차기 왕 후보임이 드러나고, 왕성으로 강제로 옮겨진다. 제목의 '관(冠)'은 바로 이 왕관을 가리킨다. 프린세스 메이커의 플레이어가 아버지가 되어 딸을 키웠다면, 카모카테의 플레이어는 1년이라는 기한 안에 왕 후보가 되어 성장하고 왕성 안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나가야 한다. 오랫동안 아는 사람만 아는 게임으로 남아 있던 이 작품은 2026년 6월 스팀을 통해 리메이크판이 정식 발매되면서 다시 조명받고 있다.
이 게임을 이번 호의 주제인 ‘기억’ 앞에 세운 이유는, 육성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가 플레이어의 기억에 무엇을 맡기고 무엇을 대리 기억해왔는지를 이 게임만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이 게임에는 호감도 게이지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호감도는 존재하지만, 게임은 그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공략 캐릭터가 주인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게임 시스템 내부 어딘가에 숫자로 정확히 기록되어 있으나 플레이어는 그 숫자에 접근할 수 없고, 대신 캐릭터에 대한 '인상'을 스스로 판단하여 입력하고 저장과 불러오기를 반복해야 한다. 게임이 기억하는 것과 플레이어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이토록 선명하게 갈라지는 게임은 흔치 않다.
그렇다면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은 플레이어의 기억 중 무엇을 대신 기억해주고, 무엇을 플레이어의 몫으로 남겨두는가. 이 글은 ‘카모카테’ 라는 하나의 사례를 통해 따라가보고자 한다.
인상 시스템, 공략 캐릭터는 어떤 인상으로 남았는가?
이 게임을 처음 플레이했을 때, 호감도가 어디쯤 와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캐릭터에게 말을 걸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벤트를 겪어도 그 결과로 상대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감으로 이벤트의 선택지를 누르고, 감으로 인상도를 입력했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각 캐릭터와의 만남과 이벤트를 겪은 뒤, 그 캐릭터에 대한 '인상(印象)'을 직접 입력한다. 『도키메키 메모리얼』처럼 호감도 확인이 시스템의 일부로 설계된 일반적인 연애/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면 시스템이 알아서 호감도 수치를 올리거나 내리고 그 결과를 게이지로 보여주었을 자리에서, 이 게임은 반대로 플레이어에게 묻는 것이다.
방금의 만남은 어떤 인상으로 남았는가. 조금 전 캐릭터와의 대화는 주인공 캐릭터에게 어떤 감정을 남겼는가. 그리고 이렇게 입력되어 누적된 인상도는 이후 어떤 이벤트가 발생할지, 이야기가 어느 분기로 흘러갈지를 결정하는 실질적인 변수로 작동한다. 말하자면 이 게임에서 관계의 기록을 담당하는 것은 게임이 아니라 플레이어 자신이다. 게임은 입력된 기록을 받아 계산할 뿐, 그 기록이 실제 관계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첫 플레이는 이벤트를 줄줄이 놓친 채, 그 누구와도 이렇다 할 결말을 맺지 못하고 끝나는 게 대부분이다. 게임 내에 각 공략 캐릭터 당 애정, 우정, 증오, 배반, 살해 5가지의 루트나 존재하는데도 말이다.

* 동인판 시절의 인상도 입력창
그 대신 발견하게 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동안 올려온 인상도를 단 한 번에 정반대로 뒤집어버리는 버튼이다. 그 버튼을 누르면, 캐릭터가 공략 캐릭터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애정에서 증오로, 증오에서 애정으로 돌변한다. 이 ‘반전’ 시스템은 한 회차에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기능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인상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호의로 쌓아온 관계를 순식간에 적의로, 적의로 쌓아온 관계를 순식간에 호의로 바꾸어 놓는 이 장치는 그 자체로 극적인 장치이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버튼을 사용하는 플레이어의 상황, 이유다. 호감도가 얼마나 쌓여 있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신중하게, 또는 감각에 따라, 그게 아니라면 그냥 누르는 것이다. 뒤집힌 결과가 어디에 도달할지는 결과를 보지 않고선 알 수 없다. 게임은 끝내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캐릭터와 무엇을 쌓아왔는지를 스스로 얼마나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가에 따라, 이 시스템은 정교한 한 수가 되기도 하고 무모한 선택이 되기도 한다.

* '반전' 시스템
게임 시스템으로서의 대리 기억
그렇다면 게임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이는 플레이어에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사실은 게임 내부에는 정확한 숫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호감도는 플레이어가 화면에서 확인할 수 없을 뿐, 게임 엔진 안에서는 캐릭터마다 하나의 변수로 계산되고 저장된다. 플레이어가 감으로 입력한 인상도와, 게임이 실제로 들고 있는 호감도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각자의 숫자를 유지하는 셈이다. 플레이어의 기억이 흐릿하고 주관적인 인상으로 남는 동안, 게임의 기억은 숫자 하나까지 정확하다.
세이브 파일이 보존하는 것도 이와 같은 층위에 있다. 육성 파라미터, 캐릭터별 호감도와인상도, 이후 분기의 조건, 도달 가능한 엔딩의 판정 조건 등, 이 모든 것은 저장되며, 그 기억은 게임의 몫이 된다. 다시 게임을 켜면 이 값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무엇을 몇 번 선택했는지, 어떤 이벤트를 몇 주차에 봤는지는 플레이어가 잊어도 게임은 잊지 않는다.
다만 게임이 기억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다. 어떤 선택을 거쳐 지금의 상태에 도달했는지, 그 선택의 과정 자체는 저장되지 않는다. 세이브 파일에는 인상도 몇이라는 최종값만 남을 뿐, 플레이어가 어떤 대화와 어떤 장면에서 느낀 점을 통해 이 값을 만들었는지는 기록되지 않는다.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의 기억은 과정을 소거한 결과값의 기억이다.
물론, 숫자만이 이 게임이 기억하는 전부는 아니다. 카모카테는 공략 캐릭터마다 고유한 테마곡을 두고, 해당 캐릭터의 이벤트가 시작되면 그 곡을 재생한다. 몇 마디만 들어도 곧 누구의 이야기가 시작될지 알 수 있게 하는 장치다. 이 설계는 유료 음원을 쓸 수 없었던 동인판 시절부터 자체 음원을 갖춘 스팀판에 이르기까지 형태를 바꾸지 않고 이어져왔다. 숫자가 아닌 소리로 이루어진 이 기억은, 인상도만큼 정밀하지는 않아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기억을 정확히 짚어낸다.
플레이어의 몫으로 남겨진 기억
게임이 기억하는 것은 결과값이라고 앞서 말했다. 그렇다면 그 결과값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어떤 대사와 어떤 나레이션과 어떤 표정이 플레이어의 인상도를 움직였는가는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주인공이 캐릭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감각, 관계가 지금 얼마나 따뜻한지 혹은 얼마나 서늘한지에 대한 체감은 세이브 파일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이것은 저장되지 않기에, 전적으로 플레이어 자신의 기억에 맡겨진다. 게임을 다시 켜면 스탯과 인상도는 그대로 이어지지만, 그 관계가 어떤 감정의 궤적을 그리며 여기까지 왔는지는 플레이어가 스스로 복기해야만 이어진다.
그것은 공략 캐릭터가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갖는 호감도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게임이 호감도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완전히 감춘다기보다는, 근사치로만 짐작하게 하는 쪽에 가깝다. 게임 안에는 두 가지 방법이 마련되어 있다. 하나는 시장에 방문해 '점을 보는' 것이다. 점술사는 공략 대상 캐릭터들 중 주인공에게 느끼는 호애도와 호우도가 가장 높은 인물과 가장 낮은 인물을 알려준다. 정확한 수치도, 중간에 위치한 캐릭터들의 순위도 아니다. 오직 양 극단만이 게임 세계 안의 언어로 플레이어에게 전달된다.
다른 하나는 인상도를 입력하는 화면 자체에 있다. 인상도를 입력할 때마다 화면의 배경색이 노란색, 초록색, 보라색으로 바뀌는데, 이 색은 플레이어가 방금 입력한 인상과 실제 호감도 사이의 간격을 나타낸다. 노란색이면 그 간격이 거의 없다는 뜻이고, 보라색이면 그 간격이 크다는 뜻이다. 정확한 수치는 여전히 주어지지 않지만, 플레이어는 이 색을 단서 삼아 자신의 인상도가 공략 캐릭터의 호감도와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를 가늠하며 다음 선택을 이어가게 된다.

* 인상도와 호감도 격차에 따른 배경색 변화
점보기가 게임 세계 안에 놓인 장치라면, 배경색은 화면이라는 인터페이스 층위에 놓인 장치다. 두 장치는 형식은 다르지만 하는 일은 같다. 정확한 답을 주는 대신, 플레이어의 기억이 놓인 위치를 어림잡게 해주는 것이다. 완전히 보여주지도, 완전히 감추지도 않는 그 중간의 자리에서 플레이어는 계속 짐작하고 기억하며 플레이를 이어가야 한다.
저장되는 기억과 해금되는 기억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은 분명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이 게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상도와 호감도라는 숫자는 게임 내부 어딘가에 정확히 존재하며, 세이브 파일은 그 숫자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보존한다. 그런데도 카모카테는 그 기억을 플레이어에게 온전히 넘겨주지 않는다. 저장되지 않아서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저장되어 있음에도 접근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부재의 문제가 아니라 은폐의 문제라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육성 시뮬레이션은 처음부터 정보를 얼마나 보여줄 것인가를 설계의 중요한 축으로 삼아온 장르였다. 수치를 전부 공개하고 그 위에서 최적의 육성을 계산하게 하는 게임이 있는가 하면, 일부만 보여주거나 특정 조건에서만 확인하게 하는 게임도 있다. 카모카테는 이 스펙트럼에서 은폐 쪽으로 가장 기울어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은폐는 플레이의 감각을 특정한 방향으로 밀어붙인다. 관계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확신할 수 없기에, 플레이어는 매 순간 가늠하고, 불안해하고, 스스로의 기억을 의심하며 다음 선택을 고른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이 불확실성이 공략 캐릭터와의 관계를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수치로 확인되지 않는 마음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실제 사람의 마음처럼 종잡을 수 없는 채로 남는다.
이 역설을 게임 디자인의 언어로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스팀판의 도전과제 체계다. 제작자는 스팀 리메이크의 초회 플레이를 원래보다 어려운 조건에서 시작하도록 설계했다고 밝혔다. 호감도는 보이지 않고, 육성에 대한 보정도 없으며, 주인공의 능력치를 올리는 것부터 쉽지 않은 상태에서 플레이가 시작된다. 그런데 엔딩을 하나씩 보고 도전과제를 하나씩 달성할 때마다, 그동안 잠겨 있던 기능이 하나씩 열린다. 이벤트명 표시, 이벤트 회상, 능력치 지원, 호감도 표시, 무효 선택지 표시, 그리고 반전을 주차당 한 번이 아니라 무제한으로 쓸 수 있게 해주는 기능까지. 이 기능들은 원래 동인판 시절 유료 공략지원판에서 제공되던 것들이었으나, 스팀판에서는 플레이 자체를 통해 도달해야 하는 보상으로 재배치되었다.

* 업적 달성으로 해금되는 공략지원기능
이 설계가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이 글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게임 시스템의 형태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되 접근이 제한된 기억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잠겨 있다가 플레이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열리는 기능으로 이 게임 안에 구체화되어 있다. 플레이어가 쌓아가는 것은 인상도만이 아니다. 그 인상도에 접근할 권한 자체도, 플레이를 통해 함께 쌓여간다.
나오며
결국 이 게임의 인상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던지는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관계란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모른 채로 계속 마주하는 것인가. 대부분의 게임은 전자를 택한다. 호감도는 게이지로 표시되고, 플레이어는 그 게이지를 보며 다음 선택을 계산한다. 카모카테는 후자를 택했다. 숫자는 존재하지만 감춰져 있고, 플레이어는 확신 없이 다음 대화를 건네야 한다.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이것은 프린세스 메이커가 이미 던져두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엔딩에 도달할 때까지 자신이 무엇을 쌓아왔는지 알 수 없었던 그 경험은, 육성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가 처음부터 플레이어의 기억에 무언가를 떠넘겨온 역사와 맞닿아 있다. 카모카테는 그 역사를 계승하되, 감춰진 것과 드러난 것의 경계를 인상 시스템이라는 형태로 훨씬 더 정교하게 다듬은 사례다.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 무엇을 대신 기억해주고 무엇을 끝내 플레이어의 몫으로 남겨두는가는, 결국 그 게임이 관계를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카모카테의 답은 인상 시스템의 구조 그 자체에 이미 들어 있다. 게임은 정답을 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채점표로 내밀지 않고, 플레이어가 스스로 적어낸 인상과 감춰진 숫자 사이의 어긋남을 안은 채 다음 플레이로 나아가게 한다. 반전 버튼 앞에서 망설이던 순간을 다시 떠올려보면, 그때 고려했던 것은 게임 내부의 숫자가 아니라 이벤트나 지금까지 골라온 선택지, 공략 캐릭터와의 관계에 대한 스스로의 기억이었다. 게임은 숫자를 기억하고, 플레이어는 시간과 관계를 기억한다. 다음 플레이를 시작할 때, 인상도와 호감도는 처음으로 돌아가지만 그 관계를 기억하는 플레이어의 감각은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