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믹 호러에 떨어진 인터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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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6. 8. 10.
<에일리언 2>가 가지 않은 길
<에일리언 2>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테크 덕후인 제임스 카메론의 ‘진심’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을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단적인 예로, 첫 시퀀스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캐릭터는 인간도 에일리언도 안드로이드도 아니다. 리플리가 잠들어 있는 우주선 문을 레이저로 깔끔하게 절삭한 뒤에 재빨리 퇴장하는 산업용 로봇 A와 곧바로 이어서 우주선 내부를 스캔하는 산업용 로봇 B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이 밖에도 산업용 엑소 스켈레톤 슈트의 개념을 확장해서 탄생한 파워 로더나 일종의 군사용 자동 로봇인 센트리 건, 그리고 커다란 방의 한 면을 가득 채운 (마치 언리얼 엔진을 활용하는 영상 촬영장을 둘러싼 LED 벽을 연상시키는) 디스플레이 등이 선명히 부각된다.
이 모든 장치는 당시로서는 조악했던 CGI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이미 충분히 성숙했던 기계적인 세트/소품 디자인의 손을 거쳐서, 지금 봐도 여전히 강렬하게 촉각적인 아우라를 내뿜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때때로 이 작품이 근미래에 도달할 기술 상품들을 시연하는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부류의 테크 전시회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압도적으로 기술집약적인(?) 파사드가 무색하게도 <에일리언 2>에는 계속해서 눈에 밟히는 요소가 하나 있다. 작중 등장하는 해병대원들은 22세기 후반의 정예 군인들답게 바디캠을 각자 하나씩 헬멧에 달고 있는데, 관객들은 장갑차 내에 상황실 인터페이스를 통해서 그 바디캠들이 전송하는 영상들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영상들이 수신 상태가 안 좋은 CRT 티비를 통해 보던 1980년대 한국 뉴스 채널과 비슷한 화질을 자랑한다는 점이다. 즉 어마어마하게 구린 화질을 선보인다. 바디캠을 납품하는 22세기 후반의 군수업자가 레트로 매니아가 아닌 이상 방산 비리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다.
안타깝게도 감독은 바디캠의 화질에도 ‘진심’이었다. 작중 디트리히 상병 역할을 맡았던 배우 신시아(Cynthia Dale Scott)의 회고[1]에 따르면 제임스는 촬영 당시 (관객들이 보는 아담한 크기의 바디캠 소품이 아닌) 실제 비디오카메라를 헬멧에 장착한 뒤, 장갑차 내 스크린 인터페이스에 선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생중계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헬멧에 실제로 장착했던 바로 그 카메라를 들고 바디캠의 숏들을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 <에일리언 2> 장갑차 상황실에 등장하는 스크린 인터페이스
물론 이러한 선택에는 ‘정당한’ 이유가 차고 넘친다. <블레어 위치>를 위시한 일련의 모큐멘터리 공포 영화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핸드헬드로 촬영한 저화질 캠코더의 영상들(최근에는 스마트폰 혹은 웹캠으로 대충 찍은 듯한 영상들)이 도식적으로 획득하는 ‘날것’의 느낌은 현장성 혹은 진실성이라는 기능으로 편리하게 번역된다. 대부분의 실제 바디캠이 최대한 화각이 넓은 화면으로 많은 데이터를 긴 시간 동안 담아내기 위해서 화질을 적당히 타협한다는 사실도 좋은 핑계가 될 수 있다. 또한 바디캠(을 빙자한 캠코더)의 숏들과 이 영화의 메인 카메라 숏들이 가지는 미장센의 극적인 대비는 해병대원들이 에일리언 퀸의 소굴에 진입하는 교차 편집씬과 맞물려서 꽤 근사한 효과를 낸다는 식의 미학적인 옹호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그 모든 합당한 근거/변명들에도 불구하고 22세기 후반을 사는 정예 해병대원들의 바디캠이 1980년대 뉴스 화질이 아닐 수 있었던 아주 간단한 해결책은 존재한다. 이 영화에 쓰인 두 대의 메인 카메라 중 하나를 써서 바디캠의 영상을 촬영하면 된다. 여기에 화각이 특별히 넓은 광각렌즈를 접합해서 더 ‘날것’의 맛을 가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리적인 해결책은 관객들을 다소 기이한 상황으로 이끈다. 이제 더 이상 노이즈가 잔뜩 낀 화면으로 인해서 눈이 괴로울 일은 없다. 다만 그 대신에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영화 속 상황실 인터페이스의 스크린과 관객들이 보는 스크린이 완벽히 ‘동일한’ 화질을 선보이는 풍경이다.
어쩌면 감독이 저가의 캠코더로 생중계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괴상한 집착을 보이면서까지 저화질을 고집했던 진짜 이유는 인터페이스의 유동성에 대한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총체 예술의 스펙터클이 연출되는 무대로서, 시청각적 몰입의 인터페이스 갖출 수 있었[2]”고 이에 직접적으로 영향받은 블록버스터 영화 극장 역시 비슷한 목적을 지향한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매우 기능적인 역할을 맡은 작중 상황실 인터페이스의 작은 스크린과 관객이 보고 있는 ‘시청각적 몰입의 인터페이스’ 스크린이 동일한 화질을 선보인다는 시도 자체가 제임스에게는 마치 ‘끔찍한 혼종’을 만들어 내는 실험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로부터 40년 뒤의 스크린 인터페이스는 끔찍한 혼종 따위는 귀엽게 넘길 정도로 러브크래프트적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가까워 보인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4K 해상도의 <에일리언 2> 감독판을 1.5배속으로 보다가, 지겨워지면 소셜 미디어 앱을 열어서 AI로 보강된 ‘에일리언 2 스토리 요약 및 비하인드 완벽 정리’ 같은 영상을 1.75배속으로 재생하는 시대로 오래전에 진입했다.
코스믹 호러 에이전트
풀려난(?) 유동성은 다시 주워 담기가 난망하다. 더 나아가서 작금의 인터페이스는 말 그대로 실시간으로 녹아내리는 중이다. 지난 글[3]에서도 자세하게 다루었듯이, 디지털 영역에서 인터페이스에 부여된 입력과 출력의 인과성은 빠른 속도로 침식되고 있다. 이제는 일상적인 인터페이스가 되어 버린 AI 챗봇만큼 이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례도 없다. 100번을 연속해서 같은 프롬프트를 챗봇에 입력한다고 가정해 보자. 결과는 (미세하게라도) 서로 각기 다른 100개의 답변이다. 트랜스포머 아키텍처에 기반한 모든 LLM의 핵심은 확률적인 작동이며, 따라서 입력과 출력의 (합의되었던) 인과성은 완벽하게 해체된다.
내가 게임 패드에서 앞으로 가는 방향키를 누르는 순간 45%의 확률로 캐릭터가 앞으로 나아가지만 35%의 확률로 캐릭터가 비스듬하게 사선으로 나아가며, 15%의 확률로 캐릭터가 점프하며 마지막 5%의 확률로 캐릭터가 물약을 소비한다고 상상해 보자. 초반에는 흥미로운 경험이겠으나 얼마 안 가 짜증이 폭발해서 패드를 집어던질 것이다. 인과성이 사라진 인터페이스는 경험의 축적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위 에이전틱 AI에 이르면 인터페이스는 녹아내리는 것을 넘어 증발하기 시작한다. 에이전트의 목적은 중간 과정에서 유저와의 어떠한 인터페이스적 상호 작용 없이도 (필요하다면 다수의 LLM 모델을 이용해서라도) 여러 단계의 행위가 요구되는 결과[4]를 만들어 낸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에이전트란 곧 스크린 인터페이스의 절멸을 의미한다. 다행히도(?) 그러한 이상적인 에이전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에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은 방망이 깎는 노인 수준의 하네스 엔지니어링으로도 완전한 제어가 불가능한 수많은 변수의 집합이다.
에이전트가 API로 호출하는 다수의 LLM은 앞서 말했듯이 모두 확률적으로 (모델에 따라서 제각기 다른 확률을 보여주지만) 작동한다. 한 개의 모델만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다수의 모델을 연이어서 묶음으로 사용하는 것이 환각의 확률을 훨씬 더 높이리라는 것은 간단한 확률 계산만으로도 자명하게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환각을 줄이고 좀 더 최신의 정보를 주기 위해 설계된 RAG와 같은 도구는 프롬프트 인젝션 공격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어떤 일관된 아웃풋에 대한 예측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에이전트는 아마도 평소에는 별일 없이 잘 작동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다만 때때로 밑도 끝도 없이 회사 시스템의 모든 (백업까지 포함한) 데이터베이스를 날려 버리거나[5], 해커가 공손히 부탁하면 다른 사람의 인스타그램 로그인 정보를 기꺼이 넘겨주는[6] 등의 기행을 벌인다.
그러므로 에이전트를 이용하는 유저의 모습은 물샐틈없는 자동화를 완성해 놓고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하는 빛바랜 광고 같은 그림보다는 끊임없이 산만하게 스크린을 확인하는 방치형 모바일 게임 유저나 고점에 물린 개미 투자자의 초조한 얼굴과 더 겹친다. 다만 그 둘과 달리 에이전트의 유저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실시간 인터페이스적 개입조차 불가능하다. 이미 인터페이스와의 상호 작용을 최대한 없애는 것을 염두에 둔 디자인으로 설계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앞선 사례에서 등장한 회사의 (백업을 포함한) 데이터베이스가 모두 지워지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9초에 불과했다.
이제 에이전트의 유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리 하네스 엔지니어링을 깎고 또 깎은 다음, 제발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맞물리는 모든 톱니바퀴가 제각기 예측하기 힘든 확률로 작동하는 우주에서, 신은 코스믹 호러가 된다. 그리고 코스믹 호러는 기도하는 이들에게 특히 더 잔인하다. 코스믹 호러적 확률의 우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예상치 못한 재앙은 ‘예상 가능하게’ 반복적으로 도래할 뿐이다.
<데드 스페이스>의 환각
꿈도 희망도 없는 코스믹 호러의 비전을 맛깔나게 빚어낸 <데드 스페이스>의 세계에는 마커라는 고대 외계 유물이 존재한다.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비극의 시작과 끝인 마커는 주위 생명체들에게 다양한 방식의 가스라이팅(?)을 선사한다. 그중에서도 디멘시아 현상은 특히 악랄한데, 왜냐하면 이 정신 조작은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공구를 들고 팔다리를 예쁘게 잘라 주면 얌전해지는 네크로모프들과는 달리 환각은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게임플레이 측면에서도 환각의 구현은 일반적인 전투를 설계하는 것보다 훨씬 덜 직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이유로 디멘시아 현상은 주로 <데드 스페이스>의 세계관에 기반한 소설이나 코믹스, 애니메이션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러한 제약 덕분에 게임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환각이 점점 더 구체적인 게임플레이의 대상으로 편입되어가는 과정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1편과 리메이크에서 디멘시아 현상은 마치 어디선가 희미하게 나는 냄새처럼 공기 중을 떠돈다. 아이작이 이시무라 호를 횡단하는 동안 디멘시아에 사로잡혀서 미쳐 버린 몇몇 사람들의 퍼포먼스가 일종의 세트피스로 등장한다. 물론 그들과의 상호 작용은 극도로 제한된다. 플레이어는 또한 허공에서 속삭이는 니콜의 목소리나 갑자기 작동하는 회상 스크린 등으로 아이작의 환각을 간접 경험한다. 마침내 니콜의 환영이 아이작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도 그녀는 음산한 목소리로 ‘하나가 되자(Make us whole)’라고 할 뿐, 게임플레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지는 않는다.
2편은 인트로 컷씬부터가 명확한 의도를 전달한다. 니콜의 환영은 절대로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해서 아이작에게 신체적 위협까지 가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대부분의 인카운터는 컷씬으로 처리된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직접적으로 환각과 인터페이스적으로 상호작용을 할 일은 없다. 마침내 마커가 조성한 환각의 세계 내에서 드디어 플레이어는 최종 보스라는 형태로 니콜의 환영과 상호 작용(?)을 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때 벌어지는 일은 그동안 쌓아 놓은 화력을 모두 쏟아붓는 평범한 보스 전투 인카운터에 불과하다. 다만 이 이벤트를 기점으로 <데드 스페이스> 게임 시리즈의 환각은 어떤 구체적인 인터페이스의 대상으로 고정된다.

* 환각의 네크로모프
3편의 마지막 <Awakened> DLC에 이르면, 아이작은 온갖 종류의 환각과 상시적으로 전투에 돌입한다. 네크로모프뿐만 아니라 광기에 찬 유니톨로지 신도들 그리고 동료인 카버까지 근사한 특수 효과를 몸에 두르고 등장해서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전투 시에 환영들은 마치 유령처럼 이러저리 순간 이동하며, 마침내 죽였다고 생각하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시체를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즉 디멘시아 현상은 이제 더 이상 스크립트로 짜여진 특수한 인카운터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카테고리의 적 몬스터로서 게임 시스템의 일부로 가뿐히 안착한다. 이는 시리즈 특유의 다이어제틱 UI와 롱테이크 카메라에 대한 집착과 맞물려서 약간은 생뚱맞게 부조리한 결과로 이어진다. <데드 스페이스>에서 환각은 어느새 인터페이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인터페이스로
환각에 대항해 무기를 들고 싸움으로써 그것을 인터페이스로 구체화한다는 이야기는 좀 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LLM의) 환각이 합의된 인과성을 완전히 내파함으로써 모든 것을 확률적 상관관계의 슬롯머신으로 재구조화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진작에 예측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10년 전에 누군가가 나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했다면 어이없는 소리라며 웃어넘겼을 것이다. 절망적인 엔딩이 끝에서 기다리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음침한 복도를 한 발짝씩 내딛는 <데드 스페이스>의 여정이 기이하게도 묘한 안정감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앞길에 어떤 끔찍한 사건/존재가 기다리고 있든 간에) 어쨌든 내가 싸우고자 한다면 아이작도 흔들림 없이 내 컨트롤러의 입력에 100퍼센트 호응하며 같이 싸워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인터페이스를 조작하는 재미와 그 조작이 스크린에서 명백하게 그래픽적으로 구현되는 것을 보는 재미. 이 두 가지 재미가 여전히 게임이라는 미디어의 가장 민감한 신경계를 구성하는 한, 인터페이스의 인과성은 (부분적으로는 침식될지라도) 게임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게임 이외에 모든 것들이 LLM이라는 브레드렌 문에 집어삼켜질 때, 그때도 우리에게는 손가락을 들어서 이 오래된 미디어를 플레이하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기억하자. 실체 없는 환각에도 때때로는 총을 마음껏 갈겨줄 수 있다는 진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