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성이란 농담? :『코지마 히데오의 게임론』을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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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6. 6. 10.

브라이언 히카리 하츠하임의 『코지마 히데오의 게임론』은 코지마 히데오가 감독하거나 제작 과정에 참여한 게임을 다양한 매체 이론을 따라 살펴본다. 반전, 반핵의 주제 의식을 일관적으로 지켜나가는 스토리텔러이자 ‘모든 것을 감독하는 책임자’, 게임 업계의 유명 인사 등으로 읽혀 온, 혹은 그렇게 읽히고자 유도해 온 코지마의 행적 역시 집중적으로 비춘다. 하츠하임은 주로 코지마의 인터뷰와 서적, 그가 출연한 다큐멘터리와 출시 당시의 리뷰를 제시하며 그가 자신의 의도를 어떻게 관철하려고 했으며 제작 과정에 어떤 식으로 개입했는지를 도해한다.
서적의 제목에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듯이, 하츠하임은 게임 디자이너를 게임 속 “작가 의식”의 출처로 읽고자 하는 의도성 짙은 기획을 갖고 있다. 나는 <데스 스트랜딩>을 통해 코지마 게임을 접한, 비교적 오래되지 않은 팬이었고, 대규모 공동 작업이 이뤄지는 상업 게임에서 게임 디자이너의 권한이 작동하는 방식에 직접적인 경험이 없기에 이 기획이 어떤 식으로 풀려나올지 호기심을 갖고 책을 접했다. 80년대부터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코지마 게임을 시계열로 살피기 때문에, 이 책을 읽어 나감으로써 콘솔 장치의 역사와 더불어 코지마의 공동 작업에 대한 통제력이 어떻게 확대되는지 그 과정 역시 살필 수 있다. 하츠하임은 공동 작업에 대한 코지마의 통제력이 어떻게 작가 의식과 연계되는지 보이는 이론으로서 특히 196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를 필두로 한 작가주의 영화 비평 흐름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며 자신의 기획에 토대로 삼는다. 영화 비평의 특정 흐름을 참고해 게임을 논하는 구도에 의문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는 코지마 자신이 영화로부터 강한 영감을 받는다거나 게임 내 시네마틱 컷씬의 활용이 특징적이라는 이유보다는 게임 산업 내의 제작 관행을 영화 제작과 비교하기 위함이다.
저자의 정리에 따르면, 작가주의 이론의 기여자들은 할리우드 시스템 내 영화 제작 관행에 맞서는 “상업 영화의 반체제성, 특이성”이 일관된 시각적 스타일과 내적 의미를 형성하는 감독으로부터 기원한다고 보았다. 영화 이론으로부터 차용해 게임을 설명하는 도약은 게임과 영화 모두 대규모 공동 작업으로 진행되면서 제작자를 익명화하고 상품성을 지향하는 압력을 받는 매체였다는 공통점에 근거한다. 비밀의 방에 “이스터에그”로 숨겨져 있는 게임 디자이너의 이름은 옛 비디오 게임 업계와 영화 업계에서 크리에이터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던 관습을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되새기게 만든다. 하츠하임은 작가주의로 일컬어진 비평적 흐름이 “감독의 주체성을 과도하게 중시하며 제작의 특정 문맥과 창작 프로세스에 관여하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경시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는 한계를 밝히지만, 여전히 그 저자성이 공동 작업 상에 나타나는 비관습성을 지목하고 식별하는 데 유효하고 전략적인 도구라고 본다 (하츠하임 25-26).
이와 더불어 저자가 활용하는 ‘파열disruption’의 개념은 영화 비평의 언어보다는 메리 플래너건의 비판적 플레이(Critical Play) 개념을 가져온 것으로, 체제를 전복하거나 약체화하는 경향성이 있는 게임 디자인의 혁신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장르의 발명을 포괄한다. 저자의 접근법은 “현 상황을 개혁하려는 게임, 예술적인 게임, 그리고 그들이 일으키는 비판적 자아 성찰에 대해서만, 즉 상업 게임에 대해 강한 반발과 비판적인 입장을 지닌 게임에만” 적용되는 경향이 있는 ‘비판적 플레이’의 개념이 “상업 게임” 그 자체, 혹은 상업 게임 업계에서 일하는 게임 디자이너에게 역시 적용될 수 있도록 확대한다는 목표를 띠고 있다 (하츠하임 31). 코지마 히데오가 기획으로서 참여한 <스내처>, <폴리스너츠>와 <메탈 기어> 시리즈의 제작 과정, 반응, 장르적 문법의 재발명, 시스템과 스토리라인 분석을 통해서 저자는 코지마 게임 디자인을 크게 네 가지 요소로 정리하고, 이 요소들로 “기존 게임의 관습”에 파열을 일으키는 코지마 게임의 비판적 플레이를 특징 짓는다. “선형적 서사에 픽션과 현실 세계의 요소”를 혼합함으로써 현대에 대한 장르적 우화를 만들어내고, 애니메이션, 실사 영화나 모션 그래픽과 같은 시청각 지향 미디어의 “재매개화”를 시도한다. “창발적인 플레이”의 축이 되는 “규칙화된 시스템”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메타적인 목적을 위한 공간”의 삽입을 시도한다 (하츠하임 73). 저자는 여기서 작가로서 게임 디자이너가 갖는 사회적 의식의 표현과 플레이의 경계선을 재정의하고자 하는 형식적 메커니즘의 창조라는 두 가지 방향성을 확인한다.
형식적 관습성을 해체하고 그와 단절하는 방향성에서 어떠한 반체제적 고집을 발견하려는 태도는 소위 “프로그래시브한 텍스트”를 고전적 텍스트의 반대 항에서 규정해 온 담론 속에서 비평가가 의지할 자리였던 저자성을 게임으로 번안해 보려 한 시도이기도 하다. 상업적 제약과 질료 내에서 비판적, 실험적 작업을 하는 주체, 영화감독의 자리로서 게임 디자이너를 둘 수 있다면, 그 실험적 작업의 속성 역시 게임 디자이너에 귀속된 일관성으로서 규명될 수 있으리란 믿음이다. 하츠하임은 바바라 클링거(Barbara Klinger)가 “이데올로기 면에서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영화 형식과 구조 내에 단절을 추구하는 진보적인 비평가들의 말에 의해 형성”된 걸로 지목한 “프로그래시브한 영화 장르”란 표현을 빌려와 “프로그래시브한 게임 디자인”이란 개념을 형성한다. 이를 진보적인 게임 디자인, 변혁적인 게임 디자인으로 봐도 이해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하츠하임 28).
『코지마 히데오의 게임론』은 코지마 히데오의 게임 내 시스템과 그 게임을 생산하는 데 있어서 필요했던 제반 조건, 제작사 및 플레이어의 수용 양상을 살펴보면서 저자가 정의한 프로그래시브한 게임 디자인의 여러 양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한 가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대목은 “프로그래시브한 영화 장르”란 표현이 클링거의 원전 「‘시네마/이념/비평’ 재방문: 변혁적 텍스트Cinema/Ideology/Criticism’ Revisited: The Progressive Text」에서 사용된 맥락이다. 클링거는 변혁적 텍스트에 반대항으로 존재하는 “고전적 텍스트”란 사실 “고전적 텍스트 시스템”으로 불리는 게 알맞다고 본다. 클링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시스템은 “불균형(과잉, 차이)과 균형(견제, 반복)의 불안정한 조합으로부터” 생산되는 것이다. 장르는 “변주와 규제의 유희 위에서 번성하는” 시스템의 “긴박한 순열”이자 “규칙화된 다양성”의 제공자이다. 단절이 아닌 변주의 경제를 선보이는 장르는 “과잉의 (규제된) 형식들과 그 과정의 (규제된) 전시 형식들”을 허용하며 자기 안에 과잉을 길들이고 포위한다 (Klinger 43).
고전적 텍스트 시스템의 “긴박한 순열”로서 장르를 설명하고자 클링거가 파열, 단절, 분절과 같은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훨씬 더 연속적인 “변주variety”를 제안하는 까닭은 규범화의 강력한 힘을 눙치지 않기 위함이다. 클링거는 기존 규범으로부터 단절을 구성하는 듯한 기표를 전복성의 측면에서 지나치게 강조하는 독해가 “심지어 가장 전면화되고, 변혁적이고 변형된 경향들에까지 규범적 기능을 협상해 내는” 체제의 수단을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진보성과 변혁성이 텍스트 내부에 고립된 기표로 결정된다는 관점과 그러한 관점을 강화할 수 있는 독해를 향한 애착 앞에서 클링거는 비판적 거리감을 지키고자 한다. “프로그래시브한 영화 장르”를 형성하는 비평 관점이 텍스트 내 기표의 변혁성만으로 분절되고 파열될 수 있는 ‘고전적 텍스트’라는 상대 항을 전제함을 지적하고, 이로써 그는 고전적, 규범적인 것으로 지목된 항이 그토록 균질하고 동종적인 대상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코지마 히데오의 게임론』에서 “프로그래시브한 게임 디자인”의 분석 틀을 빌려 올 때, 이 태초의 호명에 잠재된 비판적 함의는 아쉽게도 깊이 다루지 않는다. 물론 저자는 일방적이거나 고정되지 않는, 언제나 플레이어와 수용 환경, 기술적 조건을 매개하는 인터랙티브 미디어로서 게임의 역량을 검토한다. 당대에 코지마 게임이 수용된 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아카이브 자료에 힘입어, 텍스트의 내적 의미와 형식적 분절에 고립된 분석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어떻게 자신의 행위를 유도하는 시스템 상의 개성 및 기술적 제반 조건과 상호작용을 행하며 의미를 형성해 나가는지 살펴 나간다. 다만, 코지마가 상업 비디오 게임 업계의 확립된 수법으로부터 분기해 나가면서 일관된 작가적 주제를 표현하고, 작가적 주제가 이러한 창발적 분기를 만들어 나간다는 분석 구도 하에서, 변혁이란 그 반대 항의 획일화된 ‘본질’을 가정하는 수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아래와 같은 대목이 그 예시가 될 것이다.
격파나 승리로 스코어를 쌓아나가는 것이 좋은 것으로 여겨졌던 게이밍 문화에서 비폭력적인 선택지 검토를 장려하는 시스템은 특히 획기적인 발명이지만, 동시에 전쟁 게임의 로직, 그것이 본질적으로 품고 있는 인명 경시, 어려운 목표의 해결책으로서 무력 충돌을 긍정하는 입장에 의문을 제시함으로써 도덕적인 설명으로도 기능한다.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외교나 비폭력은 달성하기 어렵지만, 인간(과 플레이어)의 목숨, 그리고 사회 질서 면에서 훨씬 커다란 대가를 얻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하츠하임 88)
더 나아가 변혁이나 이탈로 나타났던 개성들조차 상업 논리나 장르적 관성으로 흡수될 수 있다면, ‘변혁적’ 장르 독해에 대한 주의는 다시 한번 들를 필요가 있을 터다. 특히 영화에 비해 동시대의 게임 수용, 창작, 반응 커뮤니티는 보편적인 정전화, 고전화를 추동하는 제도적 동력은 불분명해 보이게 만들면서 거의 동시다발적인 상호 참조를 촉발하는 측면을 갖기 때문에 ‘기존 게임’과 ‘변혁적 게임’의 구분과 그 구분에 근거한 ‘저자성’ 식별이란 더욱 복잡미묘한 문제가 된다.
하지만 나는 게임에서 저자성이란 개념 일체를 폐기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 위계화를 기반으로 성립되는 게 아닌 종류의 저자성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에 임가영의 「게임과 작가」를 참조하고 싶은데, 본 글 역시 게임 디자이너가 게임 플레이가 아닌 게임을 만들기에 생기는 작가의 “물러남”, “플레이어들의 소비자 중심주의, 그리고 게임을 산업 및 기술적 생산물이자 단순한 오락거리로 보는 통념”으로 인해서 저자성이 줄곧 취약한 자리에 놓여 있음을 주목한다. 그렇게 “취약하고 의존적인 존재로서 작가를 다시 발견”하고 플레이어와 작가의 “대화”가 되는 자리로 게임을 돌려놓으며 작가와 플레이어가 맺는 관계를 재발견하기를 바란다. 그의 글은 작가를 ‘행위적 거리’ 속으로 물러나 “몸을 숨기고” 있다가 플레이어를 “맞이하러 나서는” 목소리에서 발견한다. 이 물러남과 맞이함의 제스처가 플레이어에게 “직접적인 목소리”로 말을 거는 작가를 구성하는 장면이 내게는 사랑스럽고 또 중요하게 다가왔다. 이는 엔터테인먼트와 서비스에 뿌리를 두라는 훈계와 그 뿌리로 인해 해롭다는 오명 사이에 포획된 매체에서, 오히려 상품 이상 혹은 상품 미만이고자 하는 아집, 이렇게 되어야만 했다는 식의 대책 없는 필연성을 더욱 강렬하게 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 서적이 꾸준히 다루는 ‘파라텍스트paratext’의 과잉에 대해서 언급하며 이 글을 마무리 짓고 싶다. 코지마 게임에서 파라텍스트란 당대의 기술적 가능성과 메모리 제한, 패키징 관행, 그리고 콘솔과 입력장치와 같은 물리적 인터페이스 기능들을 경유해 나타나는데, 저자는 제라르 주네트와 조나단 그레이를 인용하며 파라텍스트의 정의와 기능을 설명한다.
문학이론가인 제라르 주네트는 파라텍스트를 텍스트와 그것을 구성하는 것들 사이에 있는 문지방이라 정의했다. 여기에는 표지, 타이틀, 주석 등 형식적인 틀 외에도 신문의 평론이나 잡지 인터뷰 등 설명적인 틀도 포함된다. 조나단 그레이는 이것을 영화나 TV 등의 미디어에도 적용해, 장난감, 게임, 스핀오프, 소설, 웹사이트 등의 파라텍스트가 ‘최초의 인터랙션 후에 텍스트에 영향을 미치거나, 방향을 전환하게 만들기도 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하츠하임 91-92)
조나단 그레이의 말은 서사 외부의 물질이 서사 내부로 흘러넘치는 상황과 상호작용성 사이의 깊은 연계를 암시하고 있다. 파라텍스트의 범람을 두고 저자는 <메탈기어 솔리드 2>에서 게임의 물리적인 패키지가 세계관에 대한 다양한 설정 자료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게임 플레이에도 영향을 미침을 언급한다. 게임 플레이 내에서 게임 설명서에 기재된 해독표를 사용하라고 지시하는 장면, 무전에서 맞출 주파수를 “게임 소프트웨어 패키지 뒷면의 사진”에서 찾으라고 언급하는 등의 상호작용 등이 그 예이다 (하츠하임 93). 이는 물리적인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보드게임에서도 예상치 못한 발견의 국면에서 자주 활용되는 전략이기도 하다. <스내처>에서 피해자의 시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집을 찾아라!’는 메모 역시 흥미롭다. 이는 “피해자의 집 그 자체” 혹은 “피해자의 집의 다이닝 룸에 있는 ‘집 모형’을 조사하라는 의미”처럼 읽히지만 실은 키보드의 ‘홈Home’키를 눌러 암호를 해독할 수 있다는 말 그대로의 해답이다 (149).
이같은 파라텍스트의 묘사를 통해서 책은 그 당시의 게임 기기를 쓰거나 패키징을 접해보지 않고 에뮬레이션이나 리메이크 판 등을 통해서 대부분의 코지마 게임에 접근하게 된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거나 그 맥락이 빠져 있던 농담을 복구해 주었다. 플레이 외부의 플레이어를 매개하고 초대하면서 플레이 영역을 확장하는 게임 디자인의 측면에서, “사람을 웃게 만들어주는 매체가 영화라면, 게임은 자신의 행위가 웃음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코지마의 말을 저자는 인용한다. “플레이어를 그 자신의 행위로 웃게 만들기“는 플레이어가 ”관객임과 동시에 연기자“란 걸 일깨운다 (하츠하임 148). 하츠하임은 이 겹쳐짐이 일상생활 속에서 플레이어의 행위를 촉구하는 소격 효과의 확장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나는 여기서 “그 자신의 행위로 웃게” 될 때의 순전하고 승화되지 않는 실소, 피치 못한 슬랩스틱 코미디언 되기의 층위를 추가하고 싶다. 이때 플레이어는 작가주의적 피규어, 그러니까 이데올로기적 산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두게끔 게임의 총체와 스타일을 고안하는 통제력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저자성을 물리적으로 먼저 마주한다. 어떠한 의미도 없이 돌연 가설무대의 바닥과 코를 박고 인사하게 만드는 짓궂은 돌부리, 돌출된 문지방과 같은 것으로서 말이다. 무엇이 게임 플레이 외부에 있고, 무엇이 가상의 의미 연쇄와 무관하고 유관한 것인지 구분 일체가 갑자기 시덥잖아지나 싶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몰입적인 게임 플레이로 돌아가게끔 한다. 이는 자기성찰로 포섭되는 “메타”가 아니라 금방 몸을 일으켜 다시 연기로 돌아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는 시트콤의 계기를 선명하게 내보인다. 허술한 종이 상자를 거꾸로 뒤집어쓰고 중무장한 군인들 사이를 뻔뻔하게 가로지르거나 플레이어가 주권을 쥔 카메라로 고간을 확대하면 화면을 향해 주먹질하기 시작하는 우리의 주인공들. 통용되는 농담의 펀치라인이나 밈적 기호로 이 커뮤니티를 떠돌면서 출몰하는 코지마의 얼굴이 표시하는 저자성이란 아무래도 내게 이런 종류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