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화된 기억은 무슨 꿈을 꾸는가?- 사이버펑크를 통해 본 게임에서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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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6. 8. 10.
SF 장르와 데이터화된 기억의 등장
사이버네틱스(1948)의 저자인 노버트 위너(Nobert Wienner)는 그의 저서를 통해 인간의 두뇌와 기계가 질료적으로만 차이를 보일 뿐 구조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가설을 토대로 인간 뇌의 신경계의 작용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이 그대로 기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토대로 1980년대 미국에서는 인간의 두뇌와 기계가 적극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를 상상의 기반으로 하는 ‘사이버펑크(Cyberpunk)’ 장르가 유행했다. 그리고 사이버펑크 장르에서는 데이터로 치환되어 네트워크나 다양한 형태의 신체로 옮겨가는 ‘기억’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는 사이버펑크 장르의 대표작이라 일컬어지는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의 뉴로맨서(1984)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기억의 데이터화라는 사이버네틱스 적인 구체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SF 장르에서 기억의 문제는 꽤 오랫동안 다뤄졌다. 미국의 유명한 SF 소설가인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대표작인 페이첵(1953),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1966),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1968) 등에서 보여주는 기억에 대한 문제는 기존의 사실주의 서사에서의 기억의 문제와는 조금 다르게, 기억을 물성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기존에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다루던 기억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다루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연관되었다. 사이버네틱스 이론뿐만 아니라 뇌과학에 대한 발전이 거듭되면서 유기체인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억에도 기억 삭제나 이식이 가능할 것이라는 사실들이 밝혀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포스트휴머니즘 담론과 맞물려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다양한 상상력들을 발생시켰고, SF 소설과 영화에서 ‘지워진 기억(erased memory)’, ‘이식된 기억(implanted memory)’, ‘거짓 기억(false memory)’이라는 핵심적인 모티프를 만들어 냈다. 그 결과 다양한 SF 콘텐츠들을 통해 기억의 문제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에서 데이터라는 일정한 형태와 물성을 가지는 일종의 장치가 된다. 이를 통해 기존에 인간의 정체성을 정의하는데 핵심적인 요소로 여겨졌던 영혼이나, 신체, 뇌가 아닌 기억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요소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게임에서의 기억과 정체성 문제
이와같이 SF 장르로부터 시작된 데이터화 된 기억의 문제는 캐릭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준다. 지워진 기억 혹은 잃어버린 기억은 다양한 콘텐츠에서 주인공 캐릭터에게 사용되었던 것인데,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그것이 데이터화를 통해 물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정이 부가되면 기억이 단순히 스토리의 배경이나 결과에만 머무르지 않고, 명확하게 드러나는 목표나 소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게임에서는 플레이어의 수행 결과에 따라 특정한 보상을 얻게 되고, 그것 자체가 게임성 자체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게임에서 기억을 잃은 캐릭터들이 꼭 SF적인 하이테크놀로지의 오브제가 아니라 마법과 같은 형태라고 할지라도 마치 저장되어 있던 데이터를 불러오는 형식으로 기억들을 확인하는 형태를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이론들이 게임 내에서 형상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게임에서의 기억은 곧 정체성과 동일시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러기 때문에 단순히 기억이라는 데이터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정체성 확립에 문제가 없는가에 대한 질문들 역시 가능해진다. <소마>(2015)와 같은 게임은 이러한 재질문을 던지는 대표적인 예이다. 게임에서 주인공은 뇌 스캐닝을 통해 미래에 다른 신체에 이식된 채 깨어난다. 하지만 게임이 진행되면서 인류가 자신의 존속을 위해 수행했던 뇌 스캐닝과 신체 이식이라는 방법들이 결국 기존의 인간이 가지고 있었던 정체성과 존재론적 의미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가에 대한 회의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기억만으로 존재를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으며, 특히 그것이 데이터화되었다고 했을 때 가지게 되는 고유성에 대한 비판적 관점들을 플레이하는 과정을 통해 사고하게 만들어 준다.

*<소마>에는 데이터화된 기억이 옮겨지는 경험을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정체성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사고한다.
반대로 데이터가 누적되는 것 자체가 기억이며, 기억을 통해 인간이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처럼 비인간 개체들 역시 인간과 같이 데이터의 누적을 통해 독립된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포스트휴머니즘적 질문들 역시 가능하다. 이러한 사고실험을 형상화한 것은 SF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와 이를 영화화한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안드로이드들인 레플리컨트들의 사용연한을 4년으로 제한한 설정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사용연한이 4년으로 제한된 것은 일정기간 동안의 기억과 수행에 대한 경험들이 쌓이면 인간과 같은 감정이 생겨날 수 있고, 이는 곧 인간과 같이 독립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들을 통해 기억이 데이터화 된다면 비인간 개체들 역시 자신들 만의 고유한 기억을 지닌 독립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설정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같은 게임에 그대로 적용된다. 게임에서 안드로이드들은 인간이 하는 행위들을 대신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를 수행하면서 발생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발생하는 기억들이 안드로이드들과 플레이어들에게 동시에 경험된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통해 생과 사가 오고가는 사건의 해결부터 가사일과 같은 사소해 보이는 일들까지 두루 수행하는 것은 그러한 기억들이 데이터화되어 누적되는 것이 개체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존재의 의미를 확립하는 것을 체현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게임을 통해서 체험하게 되는 사소해 보이는 행위들을 통해 우리는 기억이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고, 그것이 인간과 비인간은 가리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과정인 것이다.
반면 데이터화된 기억은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인식되어 게임에서의 문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 나타난 것처럼 데이터는 국가 권력이 아니라 ‘사이버라이프’와 같은 기업에서 통제하는데, 이는 <블레이드 러너>(1982)와 같은 영화에서 안드로이들에 대한 관리를 ‘타이렐 코퍼레이션’에서 하고있는 것과 같이 전형적인 사이버펑크적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억의 통제는 특정한 목적을 가졌을 경우 더 문제시 되는 형태를 보인다. 전투를 수행하는 안드로이드들이 등장하는 <니어: 오토마타>(2017)나 <승리의 여신: 니케>(2022)에서는 병기로서의 수행성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기억을 조작하고, 소거하여 효율성을 확보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같이 기억을 통제하는 것으로 존재 자체를 통제하는 형태에 대한 비판적 사고실험들은 데이터화 된 기억이 현실화되고 있는 시대적 흐름에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감각들을 경험하게 한다.
데이터화된 기억 그 자체가 게임이 된다
데이터화된 기억이 캐릭터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설정에서부터 이야기의 진행까지 영향을 미치는 게임들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는 캡콤에서 제작한 게임 <리멤버 미>(2013)가 있다. 이 게임은 디지털화를 통해 물성을 지니게 된 기억에 대한 거래가 가능해진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캐릭터 ‘닐린(Nilin)’은 타인의 정신에 침투해 기억을 훔치거나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던 존재인데, 통치 기관에서 그 능력을 문제시하여 기억을 지워버렸다는 설정에서 게임이 시작한다. 게임은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주인공 캐릭터가 그 기억을 되찾고 기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것을 되찾는 과정 역시, 게임에서 등장하는 다른 이들의 기억으로 침투해 그것을 훔치고 재조합(Memory Remix)하여 자신이 잃어버렸던 기억, 곧 자신의 온전한 기능을 되찾는데 활용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게임에서는 SF에서 등장했던 기억에 대한 활용들이 그대로 재현된다. 기억에 대한 삭제에서 시작해서 타인의 기억을 수집하고 특히 기억에 침투하여 단서를 얻어내고,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인물들의 기억을 재조합해 스토리의 진행에 유리하게 변형시킨다는 것은 거짓된 기억을 이식한다는 형태가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는 흥미로운 예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게임은 기억의 조작과 재조합 형태를 퍼즐의 형태로 풀어내서 플레이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시킨다. 이러한 재조합 과정을 통해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단서들이 생겨나고, 인물들의 관계 바뀌며, 대적하는 이들의 약점이 생겨나게 된다. 더욱이 게임에서 적을 타격할 수 있는 기술과 콤보 역시 이러한 기억에 대한 수집과 재조합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와같이 <리멤버 미>에서의 데이터화 된 기억은 단순히 인과 관계를 추론하는 단서에서 머무르지 않고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가 된다.

*<리멤버 미>에서의 데이터화 된 기억은 그 자체로 게임을 구성하는 설정이자, 진행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이다.
<타코마>(2017)와 같은 게임에서 보여주는 데이터화된 기억 역시 게임성 그 자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위기 상황에 처한 주인공은 제한된 상황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다양한 문제해결 방법들을 저장되어있는 다양한 행동 데이터들을 습득하면서 해결해 나간다. 이는 결과적으로 게임에서 습득하는 스킬과 동일한 요소라고 할 수 있지만, 누군가의 행동 데이터를 습득한다는 흥미로운 설정으로 변형시킨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기억은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데이터화되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받는다. 문제는 그것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시로 기록되고 수집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임에서는 그것이 주인공의 위기 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되지만, 현실의 우리에게 해당 사실들을 대입해 보면 그 의미들을 비판적으로 사고해 볼 수 있게 된다.

*<타코마>에서 등장하는 기억은 타인들의 행동 데이터이다. 이를 시각적으로 처리해 문제 해결에 활용한다.
데이터화되어 물성을 지니게 된 기억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에 대한 문제는 소설이나 영화, 게임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기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현대인들은 이미 스마트 디바이스를 비롯한 다양한 기술들과 뒤엉킨 채 형성되었다. 가족과 친구들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정보부터, 일상을 기록하는 소셜미디어와 같은 형태들로 우리의 기억은 이미 충분히 데이터화되어있다. 그리고 그것이 연결되어있는 사회에서 우리의 기억은 소샤나 주보프(Shoshana Zuboff)가 지적했던 것처럼 이미 ‘행동예측시장(Prediction Market)’에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다. 데이터화된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게임에서 지적된 것처럼 나를 통제하고 제약할 수 있다 사실이 현실에서도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에서 우리가 체험한 기억의 문제들은 그 어떤 형태들보다 현실의 우리들을 향하고 있는걸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