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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미배 천하제일 와갤요리 대회에 어서 오세요

30

GG Vol. 

26. 6. 10.

1. 케이크는 거짓말이‘었’다

     

 케이크는 거짓말이다. 〈포털〉을 해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문장이다. 게임 속 인공지능 글라도스는 플레이어에게 모든 테스트 챔버를 통과하면 케이크를 보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제안은 거짓이었다. 정확히는 케이크는 있다. 다만 플레이어가 들어갈 수 없는 방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 짓궂은 장면 이후 플레이어 중 누군가는 화면 너머 케이크, 블랙 포레스트를 진짜로 굽기 시작했다. 모니터에 잠깐 스쳐 지나간 레시피 조각을 짜맞춰 베이킹하고 사진을 올렸다. 글라도스의 케이크는 거짓말이긴 했지만 영원한 거짓말이 되지는 않았다.


 〈포털〉만의 에피소드에 국한할 것도 아니다. 게임 속 음식은 늘 조금은 이상한 자리에 있다. 〈디아블로〉의 빨간 물약은 체력 회복이라는 숫자로 환원되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빵 한 조각은 일정 시간 동안 능력치를 올려주는 효용 아이콘이며, 〈젤다의 전설〉에서 링크가 솥에 재료를 던질 때 화면을 가득 채우는 요리 컷씬조차 영양 정보를 담은 인벤토리 칸으로 정리된다. 어느 경우든 게임 속 음식은 보이지만 먹을 수 없다. 이 어긋남이 게임 요리책이라는 출판 장르를 발생시킨 동력이다.


 지난 십 년 사이 영미권 출판 시장에는 이런 책들이 꽤 많이 출간되었다. 〈폴아웃〉 요리책, 〈파이널 판타지〉 요리책, 〈어쌔신 크리드〉 요리책, 〈원신〉 요리책. 표지마다 게임의 로고가 박혀 있고, 사진은 게임 속 음식을 진짜 음식처럼 보이게 찍어두었으며, 안에는 레시피가 빼곡하다. 이 장르에 표준은 첼시 먼로 카셀이 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공식 요리책: 진짜 맛있는 아제로스 요리 백과』다. 책의 실물은 일단 묵직하다. 표지는 와우 특유의 짙은 황금색과 푸른색의 게임 로고가 박혀 있다. 누가 봐도 게임 굿즈처럼 보이는 책이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다 보면 단순한 굿즈가 아니라, <와우> 세계관을 좋아해서 음식을 만들고 그것을 묶은 결과물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미디어 연구자 니콜 라메리히스는 팬이 게임 속 음식을 부엌에서 만들어 먹는 과정을 “글라도스를 진짜로 이기는 행위”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진짜 맛있는 아제로스 요리 백과』는 그 일을 한 권의 출판물로 정리한 결과다.

     


2. 헤드노트가 만드는 세계

     

 이 책을 다른 요리책과 가르는 결정적인 장치는 레시피가 아니라 그 위에 붙은 짧은 헤드노트들이다. 보통의 요리책에서 헤드노트는 음식의 유래, 저자의 회상, 조리할 때 유의할 점 같은 것을 적어두는 자리다. 그런데 이 책의 헤드노트는 <와우>를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생소한 이름들을 슬쩍슬쩍 호명한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이런 문장들과 마주치게 된다.

     

“호잰의 위핑 스프만은 건드리지 말 것.”

“단팥빵이 리리 스톰스타우트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염소 치즈라면 사족을 못 쓰는 제이나 프라우드무어 역시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볶음의 대가인 안시아 아이언 포우가 직접 지도한 조리법 중에 가장 간단한 요리가 바로 당근 볶음이다.”

“이 언더시티의 스낵은 호드 종족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와우>를 해본 독자라면 이 이름들이 누군지 곧장 알아챌 것이다. 리리 스톰스타우트는 미스트 오브 판다리아 확장팩의 핵심 인물이고, 제이나 프라우드무어는 얼라이언스의 가장 유명한 영웅 중 한 명이다. 안시아 아이언 포우와 아비가일 쉬일은 게임 안에서 요리 스킬을 가르쳐주는 트레이너 NPC다. 헤드노트들은 <와우> 세계 안에 실재하는 인물들을 부엌의 우스갯소리에 호명하고 있다.


 캐릭터 피규어, 일러스트 아트북, 사운드트랙과 같은 게임 굿즈는 현실 세계에서 게임 세계의 사물을 보여준다. 보는 사람은 분명히 현실 세계에 서 있고, 게임은 그 너머의 어딘가에 있다. 그런데 이 책의 헤드노트는 그 거리를 묘하게 흐트러뜨린다. “제이나도 동의할 것이다”라고 쓰는 순간, 책의 화자는 제이나를 마치 독자가 아는 누군가처럼 혹은 잘 알려진 미식가 친구처럼 호명한다. 화자는 현실 세계의 안내자가 아니라 제이나가 누구인지 자연스럽게 아는 <와우> 세계 안의 누군가다. 다른 헤드노트들이 이 감상을 강화한다.

     

“이 조리법은 칼림도어의 먼지진흙 습지대에서 비롯된 원조 조리법과는 다르게 용을 해칠 필요가 전혀 없다.”— 용숨결 칠리

“서부 몰락지대의 낚시꾼들의 원조 조리법이 명실상부 최고다.” — 조개 스프

“한때 멀고어 지역의 타우렌 부족만이 먹던 주식이었다.” — 옥수수 만나빵

“한때 고대 모구 종족이 즐겨 먹던 속 채운 싱싱버섯은 현재 판다렌 대표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 속 채운 싱싱버섯

     

 “원조 조리법”, “한때 어느 종족만이 먹던”, “현재 누구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이런 표현들은 요리책이 아니라 식문화사 연구자의 어조에 가깝다. 음식 하나하나에 발생지가 있고, 종족 간 전파의 역사가 있으며, 지금의 위상이 있다. 헤드노트는 <와우>라는 세계에 진짜 식문화사가 있는 것처럼 발화한다. 마치 그 세계의 어느 학자가 혹은 어느 부지런한 여관 주인이 자기 세계의 음식들을 정리한 책이 있고, 독자가 지금 그 책을 읽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새콤달콤 덩굴월귤 소스의 헤드노트에 이르면 이 인상은 확실히 굳어진다

     

“󰡔푸짐한 요리책에 조리법이 실려 있던 순례자의 감사절 전통 소스이다. 과거에는 아제로스 이외에서는 이 조리법을 구할 수 없었다.”

     

 책은 자기 안에 다른 책을 인용하고 있다. <푸짐한 요리책>이라는 책이 아제로스 안에 존재하고, 거기에 이 소스의 조리법이 실려 있었다는 진술. 그러니까 독자가 지금 읽고 있는 <와우> 요리책은 아제로스 안의 다른 요리책들과 같은 계보에 속한 책이다. “과거에는 아제로스 이외에서는 이 조리법을 구할 수 없었다”라는 진술은 그 가장(假裝)의 증거다. 이 책 자체가 그 이외의 어딘가로 조리법을 처음 전한다는 함의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런 가장은 일관되게 유지된다. 추적자 과자의 헤드노트는 “다루기 힘든 반려동물을 찾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쓴다. <와우>의 사냥꾼 캐릭터가 펫을 부리는 인게임 메커닉에 대한 농담이지만, 농담의 화자는 그 메커닉을 마치 상식인 것처럼 다룬다. 알 약초구이의 헤드노트는 “꽤 쉽고 빠르게 만들 수 있어서 요리 실력을 높이고 싶은 요리사에게 연습용으로 안성맞춤이다”이다. <와우> 안에서 요리 스킬을 레벨업할 때 만드는 연습용 음식이라는 점을 그것이 일반적인 요리 학습의 상식인 것처럼 진술한다. 꿀이끼의 헤드노트는 “보통 버섯장수들에게서 살 수 있는데, 이제는 당신도 직접 만들 수 있게 되었다”라고 적는다. “보통 버섯장수들에게서 살 수 있다”는 진술은 아제로스의 상식이고, “이제는 당신도 직접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진술은 책의 존재 의미를 설명한다. 해당 요리책은 아제로스의 음식을 아제로스 바깥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가르쳐주는 책인 척한다.


 이 가장은 독자의 위치를 미묘하게 옮긴다. 독자는 한국어판 양장본을 손에 들고 부엌에 서 있다. 그런데 책을 펼치는 순간, 잠깐 동안 아제로스의 어느 여관 주인이 막 펴낸 요리책을 들춰보는 사람이 된다. 호잰의 위핑 스프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듣고, 제이나가 어떤 치즈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고, 모구 종족이 먹던 버섯이 어떻게 판다렌 음식이 되었는지를 배운다. 그 짧은 순간 동안, 부엌은 독자 집이지만 동시에 아제로스의 어딘가다.


     

3. 수습생 요리사의 부엌

     

 헤드노트가 독자를 아제로스 안으로 데려간다면, 책의 형식과 시각 디자인은 그 안에서 독자에게 어떤 자리를 부여하는가.


 먼저 책의 구성을 살펴보자. 챕터는 음식 종류로 나뉘어 있다. 사이드, 빵, 수프와 스튜, 메인, 디저트, 음료. 어느 서양 요리책에서나 볼 법한 익숙한 분류다. 호드와 얼라이언스라는 진영은 앞서 본 헤드노트들 속으로 흩어져 들어가 있다. 칼도레이 잣 빵은 나이트엘프(얼라이언스)의 음식이고, 멀고어 향신료 빵은 타우렌(호드)의 음식이며, 판다렌 자두주는 진영을 떠난 중립 종족의 음식이다. 와인의 원산지 표시처럼, 진영은 풍미와 산지의 표지로 남아 있다.


 대신 책의 구조를 지배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각 챕터에는 부제가 하나씩 붙어 있다. 사이드는 “간식의 길”, “빵의 길”, 수프와 스튜는 “국물 요리의 길”, 메인은 “본식의 길”, 디저트는 “후식의 길”, “음료의 길”이다. 이 명명법은 미스트 오브 판다리아 확장팩에서 도입된 인게임 요리 전문화 시스템의 차용이다. 게임 안에서 캐릭터의 요리 스킬을 어느 방향으로 전문화할지 선택하던 체계가, 책 안에서는 독자가 어떤 종류의 요리부터 시작할지 선택하는 체계가 된다.


 조금 더 책장을 넘기면 더 많은 게임 인터페이스가 인쇄되어 있다. 모든 레시피 상단에는 숙련도 항목이 있고, 수습생, 전문가, 대가 중 하나가 표시되어 있다. 인게임 요리 스킬 등급을 본뜬 분류다. 챕터 시작 부분에는 친절하게도 업적 안내가 있어서, 각 길에서 다섯 개의 레시피를 만들면 업적이 해금된다는, 게임 시스템을 그대로 옮긴 표시가 박혀 있다. 레시피마다 “어울리는 음식” 항목이 붙어서 어떤 다른 요리와 짝지을지 알려주고, 일부 레시피에는 “사용 가능한 요리” 항목이 더해져서 그 음식이 어떤 다른 음식의 재료가 되는지를 알려준다. <와우>의 제작 시스템이 작은 활자로 책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셈이다.


 책이 모방하는 것은 <와우>의 세계관만이 아니라 <와우>의 시스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양파를 다지는 일은 수습생 단계의 행위가 되고, 다섯 개의 빵 레시피를 완성하는 일은 “빵 의 길”의 업적이 된다. 헤드노트가 독자에게 아제로스 안에 들어왔다고 속삭인다면, 인터페이스는 그 안에서 독자가 수습생 요리사라는 직책을 받았다고 알려준다.


 사진은 또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작업을 수행한다. 모든 레시피에는 한 면을 가득 채우는 사진이 따라오는데, 그 사진들은 자연광에 가깝다. 한쪽에서 부드럽게 떨어지는 빛이 음식의 표면을 살짝 그늘지게 만들고, 따뜻한 황색조가 전체 화면을 감싼다. 음식 옆에 놓인 것은 나무 도마, 무쇠 팬, 도자기 그릇과 같은 평범한 부엌 도구들이고, 거기에 거친 마, 구리 주전자, 가죽으로 묶인 양피지과 같은 중세풍 소품이 더해진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사진 안에 살짝 숨어 있는 것들이 있다. 음식 뒤로 흐릿하게 처리된 무기 한 자루가 놓여 있거나, 주석으로 만든 맥주잔이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양념 육포의 사진을 예로 들면, 음식 옆에 야영을 연상시키는 덩굴이 놓이고, 나무 도마와 칼, 그리고 숫돌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 이 작은 디테일들이 사진의 의미를 바꾼다. 양념 육포는 단순히 잘 찍힌 음식이 아니라, 누군가가 야영지에서 무기를 손질하면서 함께 먹었을 법한 음식이 된다. <와우>를 해본 독자라면 그 야영지를 어렵지 않게 떠올린다. 칼림도어의 어느 황량한 평원, 혹은 동부 왕국의 어느 숲속.


음식 사진 옆 페이지의 펜화도 같은 작업을 한다. 펜화에는 음식 자체가 아니라, 그 음식과 연상되는 풍경이 그려진다. 해산물 요리 옆에는 항구의 선박이, 고기 요리 옆에는 전사가 놓이는 식이다. 음식이 어느 세계의 누구의 식탁에 놓이는지를, 펜화가 옆에서 거든다. 사진이 음식의 현실감을 만들고, 펜화가 그 음식이 속한 세계를 환기한다.


 이 사진들이 일반적인 푸드 포토그래피와 약간 다른 자리에 있다는 점은 짚어둘 만하다. 보통 푸드 포토그래피는 식욕을 자극하기 위해 찍힌다. 음식을 매혹적으로, 윤기 있게, 먹고 싶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와우> 요리책의 사진은 식욕보다는 정황에 충실하다. <와우>라는 세계에 속한 음식이 그 세계의 어느 자리에서 어떤 사람의 손과 무기와 야영지 곁에 놓이는가 하는 정황과 같은. 사진이 게임 화면의 색감을 흉내내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약 사진이 게임 화면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여전히 화면 너머의 음식일 뿐이다. 사진이 자연광과 평범한 부엌 도구를 채택하되 그 옆에 흐릿한 무기를 두는 순간, 비로소 그 음식은 당신의 부엌에서 만들 수 있는, 그러나 동시에 아제로스의 야영지에서 누군가가 먹었을 법한 음식이 된다.


 책은 세 가지 장치를 동시에 작동시키고 있는 셈이다. 헤드노트는 독자를 아제로스 안의 누군가가 된 듯한 자리에 앉히고, 인터페이스는 그 자리에 수습생 요리사라는 직책을 부여하며, 사진과 펜화는 그 직책으로 만드는 음식이 어떤 정황에 놓이는지를 보여준다. 세 가지가 한 페이지 안에서 함께 작동할 때, 책은 단순한 요리책이 아니라 한 세계 전체를 부엌으로 가져오는 장치가 된다.

     


4. 생존자가 첨삭한 폴아웃 요리책

     

 이 가장은 <와우> 요리책만의 것이 아니다. 게임 요리책이라는 장르는 비슷한 가장의 회로를 공유한다. 그중 빅토리아 로젠탈이 쓴 『폴아웃: 볼트 거주자의 공식 요리책』은 <와우> 요리책과 묘하게 비슷하면서도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다.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된다. “볼트텍 라이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독자는 당신이 알던 세계가 — 이 글을 읽고 계신다면 — 분명 종말을 맞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전환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폴아웃> 세계관에서 볼트텍은 핵전쟁을 대비해 거대한 지하 방공호 시설을 운영하는 회사다. 게임의 플레이어 캐릭터는 그 방공호에서 깨어나 핵전쟁 이후의 황무지로 나와 모험을 시작한다. 책은 볼트텍이 방공호 거주자들에게 입주 안내서로 발간한 요리책처럼 가장한다. <와우> 요리책이 아제로스의 어느 식문화 연구자가 펴낸 책인 척한다면, <폴아웃> 요리책은 핵전쟁 직전 어느 미국 기업이 자기 고객들에게 나눠준 라이프스타일 책자인 척하는 것이다.


 이 가장은 책 곳곳에서 일관되게 유지된다. 도입부 뒤에는 “볼트텍 방식의 손님 접대” “식이 제한 안내” 같은 절들이 이어진다. 손님 접대 절은 이렇게 적혀 있다. “여덟 명을 초과하는 모임은 별도의 서류 작업이 필요합니다. 부엌 사용은 언제든 박탈될 수 있는 특권임을 유념하십시오.” 식이 제한 절은 채식, 글루텐 알레르기, 유당불내증 대응 가이드를 회사 사보의 어조로 알려준다. “마가린이 너무 많이 비축되어 있습니다 — 부디 가져가 주십시오! 산소 탱크를 둘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농담들이 책의 맥락과 뉘앙스를 만든다. 거주자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권위주의적 회사의 매뉴얼이라는 <폴아웃> 세계의 분위기가, 한 권의 요리책으로 압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정교함은 그다음에 있다. 책 안에는 두 번째 화자가 손글씨로 끼어든다. 회사 공식 텍스트로 인쇄된 레시피 옆에, 마치 누군가가 책에 연필로 끄적인 듯한 메모가 곳곳에 추가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닭 육수 레시피 옆에는 손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방사능 닭은 잡기 쉽지만, 매우 빠를 수 있으니 조심해서 접근해야 한다.” 핵전쟁 이후의 황무지에서는 일반 닭이 없으니, 방사능에 노출된 변종 닭을 사냥해서 잡아야 한다는 메모다. 베이컨으로 감싼 관자 레시피 위에는 누군가가 제목을 “미스터리 미트 누카럴크”로 고쳐 쓰고, 그 옆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누카-월드의 미저들에게서 미스터리 베이컨을 구했다. 그곳에서 돼지를 한 마리도 못 봤다.” 데스클로 달걀말이 레시피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닭 알이 그냥 굴러다니지는 않는다. 그런데 데스클로 둥지는 어디에나 있다. 데스클로 알 두 개로 일반 달걀 여섯 개를 대체할 것.”    


 이 손글씨 메모의 화자는 회사의 매뉴얼 위에 자기 경험을 덧붙이는 핵전쟁 이후 황무지를 떠도는 한 명의 생존자다. 그는 볼트텍이 알려준 닭 육수 레시피를 받아두되, 핵전쟁 이후에는 닭이 없으니 <폴아웃> 세계의 거대 도마뱀형 괴물의 알로 대체해야 한다는 현실을 메모로 남긴다. 회사의 권위적 어조 위에 생존자의 실용적 어조가 겹쳐지는 셈이다. 한 권의 책 안에 두 개의 화자, 두 개의 시간대, 두 개의 어조가 공존한다.



 이 이중 화자 구조가 만드는 효과는 강력하다. <와우> 요리책이 단일한 가장을 일관되게 유지한다면, <폴아웃> 요리책은 두 개의 가장을 동시에 가동한다. 핵전쟁 이전의 권위적 회사와 핵전쟁 이후의 외로운 생존자. 책을 펼치는 독자는 이 두 시간대 사이에 끼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회사가 약속한 안온한 가정생활과 그 약속이 무너진 자리에서 데스클로 알을 깨는 생존자의 현실. <폴아웃>이 다루는 전쟁 이전 미국의 1950년대적 낙관주의와 그것이 폐허로 변한 이후의 디스토피아가 한 권의 요리책에 두 화자로 압축되어 있다.


 이 책 역시 인게임 시스템을 그대로 옮겨온다. 레시피마다 그 음식을 먹으면 얻는 S.P.E.C.I.A.L. 스탯 효과가 적혀 있다. <폴아웃> 게임 안에서 캐릭터의 능력치를 결정하는 힘, 인내, 지각, 매력, 지능, 민첩, 행운의 머리글자다. 데스클로 달걀말이를 만들어 먹으면 한 시간 동안 지능 +1, 누카콜라 한 잔을 곁들이면 30분 동안 인내 +1 같은 식이다. <와우> 요리책의 수습생/대가 등급이 요리 행위를 게임화한다면, <폴아웃> 요리책의 스페셜 효과는 음식 자체를 게임 아이템화한다. 부엌에서 만드는 모든 요리가 자기 능력치를 어딘가에서 약간씩 올려주는 음식이 되는 것이다.


 <와우> 요리책과 <폴아웃> 요리책을 함께 놓고 보면 두 책이 같은 회로 안에서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가장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와우> 요리책의 가장은 따뜻하다. 호잰의 위핑 스프를 건드리지 말라는 호명, 제이나가 좋아하는 치즈에 대한 농담, 모구 종족에서 판다렌으로 전파된 버섯 요리의 역사. 그 가장 안의 아제로스는 살기에 나쁘지 않은 세계처럼 보인다. 반면 <폴아웃> 요리책의 가장은 차갑다. 거주자를 감시하는 회사의 매뉴얼, 핵전쟁 이후 데스클로 알로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생존자의 메모. 그 가장 안의 <폴아웃> 세계는 살아남기 어려운 세계다. 두 책 모두 부엌을 다른 세계로 옮기지만, 그 결은 반대 방향이다.

     


5. 『또다요』를 계승하는 노미의 레시피

     

 <와우> 요리책에는 후속작이 있다. 첼시 먼로 카셀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공식 요리책 2: 아제로스의 새로운 맛』는 70여 개의 레시피가 수록된 시리즈의 두 번째 권이다. 이 2권을 1권과 함께 펼쳐놓고 보면, 카셀이 1권에서 시작한 가장(假裝)을 어디까지 밀어붙였는지가 드러난다.


 2권의 결정적인 변화는 화자다. 1권의 화자가 <와우> 세계를 아는 어느 식문화 연구자처럼 음식을 소개했다면, 2권에는 그 자리에 분명한 이름이 붙는다. 판다렌 셰프 노미. 노미는 판다리아 확장팩의 도시 언덕골에서 작은 요리 학교를 운영하는 NPC인데, 게임 안에서는 재료를 받아두고 자꾸 태워먹는 것으로 유명한 캐릭터다. 그 노미가 “판다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때, 나는 요리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우고 싶었다.”는 회고로 시작하는 한 권의 책을 펴낸 것이다.


 변화의 의미는 카셀도 개인 블로그에서 설명한 적이 있다. 1권과 달리 2권은 게임 세계관 내의 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게임 안에서 어떤 퀘스트의 일부로 주워올 법한 책으로 의도되었다는 말이다. 1권에서 헤드노트들이 슬쩍슬쩍 흩뿌렸던 이 책이 아제로스 안의 어느 식문화 연구자가 펴낸 책인 것처럼 발화하는 가장은 2권에서는 명시적이고 일관된 책의 전제가 된 셈이다. 책의 표지를 펼치면 거기서부터 독자는 노미의 책을 들고 있다.


 가장은 책 안에서 곳곳에서 발화된다. 챕터 구분도 달라졌다. 1권이 사이드와 메인과 디저트 같은 음식 종류로 나뉘었다면, 2권은 지역으로 나뉜다. 칼림도어, 부서진 섬, 동부 왕국, 쿨 티라스, 줄다자르, 판다리아, 어둠땅, 나즈자타, 노스랜드, 아웃랜드 그리고 그 너머. 노미가 여행한 곳들이다. 헤드노트들은 노미의 1인칭 회상으로 발화되고, 책 곳곳에 “노미의 메모”라는 작은 박스가 끼어들어 본문에 부연을 덧붙인다. 다크문 도넛 항목 옆에는 “달콤한 게 당긴다면?”이라는 노미의 메모가 따라붙는 식이다. 책 본문도 그 위의 메모도 노미가 쓴 것인 셈인데, 이 한 권 안에서 노미는 본문을 쓰는 셰프이자 그 본문 위에 친근한 부연을 끼적이는 친구의 자리를 동시에 차지한다. 게임 안에서 노미가 가졌던 평판을 카셀은 농담거리로 살리기도 한다. 책 곳곳에서 노미는 “음식을 태우지 않는 법”에 대한 팁들을 강조하기도 한다.


 2권에서 또 한 가지 작은 변화는 숙련도 등급이 더 세분화되었다는 점이다. 1권에서 수습생, 전문가, 대가의 세 단계로만 나뉘던 것은, 2권에서는 기초 요리, 수습 요리, 숙련 요리, 전문 요리, 요리의 대가라는 다섯 단계로 펼쳐진다. 게임 세계관 내부의 책이라는 2권의 위치가 등급 분류의 두께까지 영향을 미친 셈이다.


 2권의 목차 앞부분에 들어 있는 한 절의 제목은 특히 흥미롭다. “또 다른 요리책에 대해.” 노미가 자기 책 안에서 이전에 출간된 다른 요리책을 직접 호명한다. 자기 책이 시리즈의 두 번째 권임을 알고 있고, 1권의 존재를 자기 세계 안의 사물로 호명하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1권에서 새콤달콤 덩굴월귤 소스의 헤드노트가 “푸짐한 요리책에 조리법이 실려 있던” 한 줄로 슬쩍 열어두었던 책 안에 다른 책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2권에서는 책 자체의 전제가 된다.


 자기 참조는 단순한 호명에 그치지 않는다. 2권은 1권의 레시피와 자기 레시피를 같은 식탁 위에 함께 놓는다. 본문의 어느 저녁 메뉴 추천을 보자. “아이스크림을 얹은 스테이크(141쪽), 땅콩 맥주빵(115쪽), 저민 장가르 양송이(또다요), 당근 볶음(또다요).” 페이지 번호와 함께 적혀 있는 두 요리는 책 안의 레시피이고, “또다요”라고 약칭이 붙은 두 요리는 1권에 실린 레시피다. 칼럼의 앞부분에서 인용했던 “볶음의 대가인 안시아 아이언 포우가 직접 지도한” 그 당근 볶음이 여기서 다시 호명된다. 1권과 2권은 따로 서 있는 책이 아니다. 같은 식탁에서 함께 펼쳐지는 두 권의 자매 책이고, 노미는 자신의 식탁에서 두 책의 요리를 함께 차려낸다.


 축제 관련 절도 가장의 일부다. 2권 앞부분에는 “축제를 버프하라”라는 절이 있는데, 그 절 안에서 노미는 핼러윈 축제와 죽은 자들의 날, 해적의 날 같은 <와우>의 계절 이벤트를 호명한다. 그러면서 두 번 구운 고구마 레시피의 헤드노트는 이렇게 쓴다. “아제로스나 그 주변에서 순례자의 감사절 절반만큼이나 축제 가치가 있는 휴일은 없다.” “아제로스나 그 주변에서”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와우> 세계 속에서 옆 동네의 휴일 풍경을 진술하고 있다. 1권에서 인터페이스가 책의 형식으로 차용되었다면, 2권에서 그 차용은 노미라는 화자의 인격적 발화로 변환된다. 노미가 자기가 사는 세계의 축제와 음식 효과를 생활의 일부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권은 1권의 단순한 후속작이 아니라 1권이 시작한 가장을 완성하는 책이다. 1권에서 독자는 헤드노트의 농담을 따라가며 아제로스의 어딘가에 잠깐씩 머물렀지만, 책의 표지에는 여전히 현실 세계의 저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2권에서 독자는 노미라는 분명한 화자의 책 한 권을 통째로 들게 된다. 시리즈가 한 권에서 두 권으로 늘어나면서, 카셀의 작업은 게임 굿즈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아제로스의 출판물을 현실 세계로 옮겨오는 일에 가까워진다.


 글라도스는 케이크가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케이크를 굽기 시작했고, 그 누군가가 책을 쓰기 시작했고, 그 책은 시리즈가 되었고, 시리즈의 두 번째 권은 아제로스 안의 어느 판다렌 셰프가 쓴 책이라고 자기를 소개한다. 거짓말이었던 케이크가 진짜 케이크가 되고, 진짜 케이크가 책이 되고, 책이 두 권의 시리즈가 되고, 그 시리즈가 한국어로 옮겨져 누군가의 부엌에 도착하는 그 회로의 한 끝에, 독자는 노미와 함께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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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강사)

패미콤을 화목한 가족 구성원의 필수품으로 광고한 덕분에 게임의 세계에 입문했다. <저스트댄서> 꾸준러. 『81년생 마리오』, 『게임의 이론』, 『미디어와 젠더』 등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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