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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그 오브 레전드의 유동적 원근법에 관한 노트
변화하는 원근법과 그에 맞추어 재편되는 게임 내 공간감, 플레이어의 시각성은 앞으로 우리의 시각 문화에서 더욱 중요한 위상을 차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각성은 과연 우리의 눈에 어떤 변화들을 불러들일까? 복수 개의 원근법, 회전하는 원근법이 구성하는 세계는 어떤 풍경일까? 우리의 눈은 그런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 더 많고 풍성한 논의가 이 글 위에 쌓여 가기를 기대해 본다. < Back 리그 오브 레전드의 유동적 원근법에 관한 노트 01 GG Vol. 21. 6. 10. 미술과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원근법(遠近法, perspective)에 관해서는 들어 본 적 있을 것이다. 아주 짧게 정리하자면 원근법은 3차원 세계를 2차원 평면에 재현할 때 필요한 방법으로, 입체인 3차원 세계를 실제로는 입체가 아닌 2차원 평면 위에 재현하면서 마치 입체인 것처럼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기술이기도 하다. 화면 안에 적용된 원근법은 화면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드(grid)로 분할한다. 그리고 이 그리드를 기반으로 대상의 크기나 비율, 선명도, 색상, 명암의 방향 같은 요소들이 ‘자동적으로’ 결정된다. 원근법은 무엇이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 관객의 눈은 어디에 어떻게 참여할지 같은 질문들, 더 나아가 화면의 전체적인 풍경을 결정하는 기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원근법은 단순히 멀리 있는 것은 작고 흐리게, 가까이 있는 것은 크고 선명하게 그린다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화면 안의 모든 것이 배치되는 규칙, 어떤 것이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를 결정하는 화면 구성의 내적 논리의 설계 방법론이다. 우리의 눈과 뇌는 화면이 제공하는 원근법에 의거하여 화면 내부를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인식하고 그 내부의 공간감에 우리의 신체를 동기화한다. 따라서 그 자체로는 입체감을 가지지 않는 평면 매체에서 원근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1] 회화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원근법을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은 언제나 기묘하거나 이상하거나 놀라운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렇다면 모니터라는 평면을 사용하는 게임에서는 어떨까? 게임 내 원근법과 캐릭터의 이동, 크기, 비율 문제는 우리의 플레이 경험에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 MMORPG 게임의 경우 몬스터가 아닌 이상 혹은 몬스터조차도 배경 세계의 원근법에 착실히 순종한다.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기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게임이 설정한 휴먼 스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며 캐릭터를 제외한 인게임 요소들, 예컨대 건축물, 아이템, 탈 것, 펫, 배경 같은 것들도 캐릭터의 크기에 맞추어 하나의 완결되고 고정된 원근법을 구축하는 데에 집중한다. 반면 1인칭 FPS 게임에서는 이 원근법이 더욱 강화된 형태로 드러난다. 서든어택이나 오버워치 같은 게임들에서는 주로 화면 정 가운데에 십자 모양이나 원, 탄젠트형의 에임(aim)이라고 부르는 조준점이 있다. 이 에임에 맞추어 1인칭 플레이어의 무기를 든 손이 정렬되는 모양을 보고 있으면, 1점 투시 원근법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화면 중앙에 소실점(vanishing point) 하나가 놓이는 1점 투시 원근법의 제1규칙, 가장 중요한 것을 소실점에 놓는다는 규칙은 회화에서 수차례 변용되었고, (프레임이라는 천성 때문에 회화에서보다는 그 정도가 약하지만)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관객의 시선이 쏠리는 곳에 무엇을 둘지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였다. 어느 쪽이든 이런 게임들이 상정하는 게임 내 원근법은 우리의 실재와 최대한 유사하게 조성한다는 하나의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게임들의 카메라가 얼마나 인간 같지 않은 시야로 날뛸 수 있느냐에 상관없이, X축과 Y축은 고정되어 있다. 아주 잠시 이색적인 뷰로 한 장면을 비춘다고 하여도 플레이의 기본 전제는 변하지 않는 X축과 Y축이다. 그러나 AOS 게임의 경우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도타나 카오스(CHAOS),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 같은 게임들이 포함되는 AOS 게임의 경우 축약되고 매우 인위적으로 가공된 세계를 배경으로 사용하며 이미 우리의 실재로부터 벗어나 있는 원근법, 그러므로 쉽게 도식화하기가 곤란한 형태의 원근법이 화면을 구성한다. 내가 가장 많이 플레이 해 본 리그 오브 레전드를 두고 논의를 좁혀 보자. 일반적으로 2차원 평면을 사선으로 기울인 쿼터 뷰(Quater View)를 사용하는 2.5차원 게임에서 X축과 Y축은 마름모 모양의 면을 구축하고 그 위에 캐릭터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쿠키런 킹덤과 리그 오브 레전드의 맵을 비교해 보면 전자의 맵은 다이아몬드형, 후자의 맵은 정사각형으로 보기에 약간 다르지만 쿼터 뷰 게임이 설정하는 X축과 Y축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그림 1). (그림 1) 쿠키런 킹덤과 리그 오브 레전드의 소환사의 협곡 지도 (출처: 좌-쿠키런 킹덤 공식 유투브 채널 https://www.youtube.com/watch?v=VUIy7RaHcL4, 우-리그오브레전드 나무위키 https://namu.wiki/w/소환사의%20협곡)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특히 더 흥미로운 것은 이 Y축이 Y축이 아니라 X축으로 인식된다는 점에 있다. 퀸의 ‘후방지원’이나 자야의 ‘저항의 비상’ 같은 특정 챔피언의 특정 스킬은 X축 면에서 도약하며 (미니)맵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인게임 Y축을 가시화한다. 아예 Y축의 패러미터를 벗어났다가 돌아오는 형식의 스킬을 사용하는 갈리오나 판테온 같은 챔피언들도 있다. 아주 얕은 수준이지만 렉사이 같은 챔피언은 X축 평면 아래, 즉 -Y축의 공간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리그 오브 레전드가 플레이어의 시점을 2차원도 3차원도 아닌 2.5차원 쿼터 뷰로 설정하면서, 앞서 언급한 챔피언들이 스킬 사용으로 지면을 도약하면서 인 게임 원근법을 떠받치는 X축과 Y축이, 그리고 숨겨져 있던 Z축이 등장하며 서로 뒤엉키게된다. (좌, 그림 2) 쿼터 뷰 게임이 상정하는 공간의 구성 원리 (우, 그림 3) 리그오브레전드 게임이 상정하는 공간의 구성 원리 챔피언이 지면을 도약하면 지면 위에서 이동 시 Y축이 자연스럽게 Z축으로 변하고, 챔피언이 도약하는 방향은 Y축으로 새롭게 등장한다. 챔피언은 X축의 연장된 면 위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는데, 이동하는 방향에 따라 X축의 방향이 달라지고, 여러 개의 방향이 이어지면서 X축은 (그림 2의 Y축이었던) Z축까지 가 닿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원근법에 상관없이, 각 라인은 미니맵에서 보여지는 순서대로 탑-미드-바텀이다.) 즉, 리그 오브 레전드의 원근법은 고정된 축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게임의 원근법은 캐릭터의 이동과 도약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축들을 뒤섞는다. 플레이어는 평균 20분의 플레이 타임 안에서 끊임없이 재배치되는 유동적인 축들에 놀랍도록 매끄럽고 빠르게 적응하는데, 이는 이전의 초지일관(初志一貫)적 시각성과는 물론 다른 양상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하나의 세계가 제공하는 원근법이 이것에서 저것으로, 다시 저것에서 이것으로 전환되는 유동적인 원근법으로 구성되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무런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우리의 변화된 시각성이기도 하다. 이에 덧붙여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스킨이나 캐릭터의 크기가 스킬의 적중 여부를 좌우하기도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챔피언 스킨 때문에 게임 내에서 챔피언의 크기와 부피, 모양, 그리고 스킬의 크기와 부피가 달라지면 조준의 방법도 미세하게 바뀌게 된다. 최근 추가된 서리불꽃 건틀릿(Frostfire Gauntlet) 같은 아이템에는 챔피언 크기를 키우는 옵션이 달려 있다. 인터넷에서 롤 챔피언 크기라고 검색하면 이 옵션이 도대체 왜 있는 거냐는 플레이어들의 의문과 위엄을 위하여, 재미를 위하여, 논타킷 공격을 대신 맞아 아군 보호, 사거리 증가 등의 답변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플레이어는 자신의 기존 캐릭터에 맞추어져 있던 원근법의 축 변화와 그로 인해 재구성된 시각성에 기반하는 공간감에 시시각각 적응하고야 만다. 이는 리그 오브 레전드가 플레이어에게 요구하는 시각성이 기존과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이 글의 주장을 보완하며,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번 캐릭터의 비율, 스케일, 거리감, 공간감 등 원근법에 관여된 여러 문제들이 관건에 오르게 된다. 많은 경우의 수가 있겠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 플레이어라면 한 번쯤 “이걸 맞는다고?” 혹은 “이걸 안 맞는다고?” 같은 말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떨 때는 내 캐릭터에 스킬이 닿지 않았는데도 맞았다는 판정, 닿았는데도 맞지 않았다는 판정이 의아하기도 하다. 이처럼 이해되지 않는 판정의 순간은 오히려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이 형성하는 공간감, 하나의 원근법에서 다른 원근법으로 교체되는 과정, 그리고 그로 인해 변화할 시각성에 관하여 고민하기에 더 없이 적절한 출발점이다. 모니터 평면 안의 크기와 비율, 스케일과 동기화되어 있던 우리 신체의 공간감이 끊기고 기존 원근법의 축이 변화하는 지점, 플레이 시간 내내 계속해서 눈의 새로운 적응을 요구하는 리그 오브 레전드의 인 게임 원근법의 변화무쌍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현한다. 변화하는 원근법과 그에 맞추어 재편되는 게임 내 공간감, 플레이어의 시각성은 앞으로 우리의 시각 문화에서 더욱 중요한 위상을 차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각성은 과연 우리의 눈에 어떤 변화들을 불러들일까? 복수 개의 원근법, 회전하는 원근법이 구성하는 세계는 어떤 풍경일까? 우리의 눈은 그런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 더 많고 풍성한 논의가 이 글 위에 쌓여 가기를 기대해 본다. [1] 물론 입체 매체, 예를 들자면 조각에서도 원근법은 중요한 문제다. 휴먼 스케일을 벗어나는 고대 그리스 조각들은 사람의 실제 몸과 비교하자면 머리가 훨씬 더 크게 제작되었다고 한다. 조각을 주로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기 때문인데, 실제 사람의 비율대로 제작하면 멀리 있는 머리가 더 작게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원근법은 크기와 비율의 문제에 관여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김얼터 리얼리티, 리얼리즘, 픽션, 그리고 매체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시험에 들게 만들거나 시험하는 사물을 좋아한다. 미술 전시와 전시에 관여하는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으로 일하고 있다.
- [인터뷰] 게임연구학회의 새로운 도전, DiGRA-K 윤태진 학회장
024년 3월, 세계 최대 게임 연구 단체인 '디그라(DiGRA; Digital Games Research Association)'의 한국지회(디그라 한국학회)가 설립되었다. 디그라 한국학회는 영미권과 유럽, 남미 등에 이어 18번째로 설립된 지회로서, 게임 연구의 학제적 접근과 현장과의 연결성을 지향하고 후속세대 지원, 국제교류 및 협력연구 등의 활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분과를 뛰어넘는 학술교류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상대적으로 미진했던 국내 게임 연구 분야에 있어, 다양한 업계 현장과 학계를 포괄하고자 하는 새로운 형태의 학회가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Back [인터뷰] 게임연구학회의 새로운 도전, DiGRA-K 윤태진 학회장 21 GG Vol. 24. 12. 10. 2024년 3월, 세계 최대 게임 연구 단체인 '디그라(DiGRA; Digital Games Research Association)'의 한국지회(디그라 한국학회)가 설립되었다. 디그라 한국학회는 영미권과 유럽, 남미 등에 이어 18번째로 설립된 지회로서, 게임 연구의 학제적 접근과 현장과의 연결성을 지향하고 후속세대 지원, 국제교류 및 협력연구 등의 활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분과를 뛰어넘는 학술교류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상대적으로 미진했던 국내 게임 연구 분야에 있어, 다양한 업계 현장과 학계를 포괄하고자 하는 새로운 형태의 학회가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호 GG에서는 디그라 한국학회(이하 디그라-K)의 초대 회장인 연세대학교 윤태진 교수를 만나 디그라 한국학회의 지향성과 중점 사업 및 한국의 게임문화에 대한 진단 등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강신규 편집위원: GG의 인터뷰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비평지를 읽는 사람들을 위한 인터뷰이기도 하기에, 오늘 인터뷰에서는 게임 관련 학계의 흐름과 함께 게임 문화나 산업에 대한 연구나 비평으로서 학회가 하는 시도들을 말씀해 주시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회장님께서 디그라-K에 초대 학회장으로 출마하실 당시 취임 맥락과 포부를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윤태진 디그라-K 학회장: 사담이 될 수도 있지만 편히 얘기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제가 귀차니스트라 조직의 요직 일을 하기 어려워하다 보니 나서서 회장을 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게임 학회의 경우 사실은 아주 성격이 다른 상황이었다고 생각을 해요. 기존 학회와 달리 게임계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같은 상황이라, 학회를 통해 조그마한 오두막이라도 하나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마침 주위에 도와주는 분들이 나이와 경력 상으로 주니어였기 때문에 내가 조금만 시작해놓으면 이분들이 굉장히 잘해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겸손하게 하는 말이 아니라 ‘땅만 조금 파면 될 것 같다’라는 생각으로 학회를 시작했어요. 강신규 편집위원: 그렇다면 게임 관련하여 다른 여러 공동체의 유형이 있었을 텐데 왜 학회를 선택하셨는지 궁금하구요. 말씀하신 대로 새로운 학회를 만든다고 했을 때, 다른 국가에 여러 개의 지회가 있는 학회를 선택하여 한국에 지부를 만들기로 결정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윤태진 디그라-K 학회장: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이기도 한데, 제가 위와 같은 막연한 고민을 하던 차에 디그라 학회 쪽에서 먼저 제안이 왔습니다. 일단 한국은 문화, 경제, 산업, 정치 분야를 막론하고 게임 분야가 세계적으로 굉장히 앞서 나가는 나라이기도 한데요. 디그라 학회가 16개 나라에 지회를 가졌지만 한국 지회는 없는 상황이었고 한국 학자가 디그라 학회에 참석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보니 헤드쿼터 입장에서 고민이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이 게임과 관련한 학술영역 개척을 적극적으로 해줬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지회 제안과 함께 수년 내로 한국에서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해주면 어떻겠느냐는 오퍼가 있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 학회를 설립하게 됐어요. 강신규 편집위원: 기존에 국내에 있는 다른 여러 게임 관련 학회들이 있고, 최근에 생긴 곳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기존의 학회들과 비교했을 때 디그라 학회가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셨는지요? 윤태진 디그라-K 학회장: 우선 기존의 학회들은 몇 번 참여 경험이 있었지만 학문적인 입장이나 백그라운드가 제가 추구하는 바와 굉장히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연구 주제들이나 학회 진행 스타일 등이 낯설다 보니 내가 거기서 뭔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게 게임 연구 커뮤니티를 만들자라는 마음을 먹었을 때 제일 먼저 했던 생각이기도 해요. 컴퓨터나 정책 분야와 관련된 게임학회 같은 경우는 제가 만들자 하는 학회와 성격이 다르고 굉장히 특수한 분야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구요. 물론 그런 곳에서 일을 맡고 계신 선생님들과는 오히려 학회 설립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했었고, 학회 조직에 고문 등으로 모시기도 하면서 진행을 했습니다. 강신규 편집위원: 사실 저 또한 기존의 게임학회들이 경영 쪽이나 공학 쪽 베이스가 많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회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낯설었는데, 한편으로 그런 학회들이 일종의 모학회 같다는 느낌은 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디그라-K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면, 디그라-K 역시 여러 분야의 이사진들이 있지만 밖에서 보면 신문방송학이나 문화연구로 치우쳐 있지 않냐고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혹시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요? 윤태진 디그라-K 학회장: 저는 학회의 성향 문제는 시간이 가면 자연스럽게 줄기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많이 해요. 오히려 설립 당시에 내가 특정한 방향을 정한다고 해서 그렇게 가지 않더라구요.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디그라-K 학회를 시작할 때 어떻게 보면 모순적인 두 가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법과 정책, 공학에 포커스를 맞춘 게임 학회가 있듯이 게임 문화에 포커스를 맞춘 좁고 깊은 학회를 만들면 색깔이 분명하고 추진력이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동시에 다른 하나는, 우리가 디그라 지회로서 세계 게임 학술대회 조직과 더불어 업계 사람들과 교류하며 현실 필드와의 관련성을 갖는 학회를 원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게임 문화에만 집중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어요. 학회 운영에 있어 특별한 개성을 갖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더 제너럴리스트로 가는 게 좋을지에 대해 고민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제가 논문 지도할 때 ‘깔때기’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깔때기 윗부분처럼 처음에 관심을 넓게 갖되 점점 좁혀 들어가며 자기만의 특별함을 가져야 된다고 얘기하거든요. 저는 우리 학회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학회가 시작 단계이기 때문에 포괄할 수 있는 분야가 넓어야 하고 게임 프로그래밍이나 디자인, 개발과 마케팅 관련 관계자들도 들어올 수 있는 영역을 만들어 놔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아예 모든 걸 다루는 학회를 지향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학회에서 우리가 좀더 강점을 갖고 있거나 더 하고 싶은 부분에 무게가 실리는 건 불가피하고 또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봅니다. 이 상태에서 학회를 운영하다 보면 성격이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그런데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자유도를 높여놓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강신규 편집위원: 사실 저도 최근엔 학회들이 누가 회장이 되든 변하지 않고 대부분 비슷하게 간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를테면 윗부분에 다양한 사람들을 크게 담아놓고 깔때기를 모으는 방향이 각자 다른 분들이 회장을 하신다면, 그때그때 어떤 회장이 하느냐에 따라 보편성과 구체성을 다 가지고 갈 수 있는 학회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말씀하신 바에 동의하구요. 그럼 어쨌든 여러 모순적인 포지션을 유지하고 계시다고는 했지만 지금 디그라-K가 지난 3월 발족 후 조금씩 사업을 해나가고 있잖아요. 현재 학회에서 어떤 사업들을 하고 있으며, 그중에 특히 애정이 가거나 중점을 두고 있는 사업이 무엇인지를 여쭤봐도 될까요? 윤태진 디그라-K 학회장: 학회를 시작할 때부터 저는 그냥 터만 잘 파놓고 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터를 파는데 있어 몇 가지 강조점이 있었어요. 가장 중요한 두 개는 학문 후속세대와의 연결과 국제적인 학술 교류입니다. 그 다음엔 학회와 현장과의 연결성을 잊지 말고 계속 필드로부터 정보를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는 걸 기본적인 자세로 지향하고자 했어요. 우선 우리가 디그라 세계학회의 지회라는 성격이 있다보니 국제적인 교류는 계속하고 싶어요. 우리나라 학계의 문제이기도 한데, 학회에서 많은 비용을 대어 해외 학자를 데려오고 언론 보도에 크게 소식을 내는 것이 국제 교류로 오도되는 경향이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게임 쪽도 그렇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국제교류를 일상적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 한국에 자비로 관광오는 사람도 많고, 제가 있는 대학의 경우 자비로 와서 연구를 하는데 소속만 빌려달라는 해외 학생들도 대단히 많아요. 그런 분들을 되도록이면 다 받고 싶고, 그들이 한국에 오면 혼자 연구만 하다 가는 게 아니라 이런 자리에서 사람들과 교류할 기회를 활성화시키고 싶어요. 디그라-K에서 진행했던 두 건의 국제 발표 또한 이런 취지에서 개최한 행사였어요. 학생들이나 업계 관련자, 연구자들이 뭔가 외국의 누군가가 와서 영어로 발표하고 그들과 교류하는 게 ‘대단한 일’이 아니고 매우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느끼게 했으면 좋겠다는 게 하나가 있구요. 그 다음 학문 후속세대 얘기는 당연히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학문 분야를 막론하고 후속세대 양성에 욕심을 갖지요. 그런데 강조하고 싶은 건 게임 연구 분야는 독립된 학제라 보기 어렵다 보니 연구자들이 대부분 이탈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사회학이나 심리학에서 게임을 연구하던 분들이 시간이 지나면 취업이나 연구비를 위해 게임이 아닌 다른 분야를 하는 식으로 바뀐다는 거죠. 이런 걸 피하기 위해서는 게임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을 위해 자리를 만들거나 지원하고 북돋아줘서 누군가가 그들의 작업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요. 강신규 편집위원: 말씀을 들으니 국제교류와 후속세대 양성 모두 거창한 형태로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해야 되는 일로 연결하신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저는 게임 쪽은 후속세대 뿐 아니라 기성 연구자 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반부터 게임을 다루던 미디어 연구자들 중 지금 게임 분야에 남아계신 분이 아마 회장님밖에 안 계실 거예요. 신진연구자든 기성연구자든 게임 연구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회장님은 어떠신가요? 회장님은 대중문화 전반, 특히 TV쪽을 많이 하시다가 게임 분야로 관심을 구체화시켜 현재까지 계속 하고 계시는데요. 스스로를 어떤 연구자로 정체화하시나요? 윤태진 디그라-K 학회장: 저는 스스로를 대중문화 연구자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의 100분의 1만큼도 웹툰을 안 보는 사람이지만 웹툰 갖고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잘 나가는 걸그룹 멤버의 얼굴과 이름 매치도 못하지만 케이팝에 대해서 연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게임 전문 연구자라는 생각은 사실은 안 해요. 연구의 비중으로 보자면 제 연구는 2010년까지는 게임 연구의 비중이 컸고 그 이후에는 한류 연구를 오래 했고, 2017-18년부터 다시 게임 연구를 많이 한 셈입니다. 이제 은퇴가 얼마 안 남았다 보니 제 연구나 교육 생활 중 마지막 10년 정도는 게임 문화 연구를 주 전공으로 삼는다고 생각은 해요. 하지만 진짜 ‘게임 연구자’는 우리 후속 연구자들이 그 역할을 맡아줬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강신규 편집위원: 그런 말씀을 들으니 진짜 게임 연구를 하는 사람이 누구이며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라는 의문점이 듭니다. 이건 GG를 보는 사람들이 궁금해할 이슈일 수도 있는데, 사실 저도 대학의 게임 강의 등에서 ‘내가 너희보다 잘 하는 게임이 있다’고 해야 제 말을 좀 더 잘 들어줄 것 같다고 느끼곤 합니다. 게임이란 분야가 누구나 ‘자기가 잘하는 게임에 대해서는 자기가 제일 잘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강하다 보니, 게임 연구자들에 대해 게임 플레이어들이 던지는 좋지 않은 시선 같은 것도 있는 것 같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분들에게 이를테면 회장님이 플레이어에게 연구자로서 전하고 싶은 메세지가 있으실까요? 윤태진 디그라-K 학회장: 솔직히 굉장히 흔하고 보편적인 질문인데, 저는 그런 질문에 정면으로 대답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게임 연구자들의 교과서적인 답은 ‘게임 좋아하고 잘 한다고 좋은 학자는 아니다’, ‘내가 게임은 못 해도 학자로서 훈련과 트레이닝은 많이 받았다’ 이런 게 교과서적인 답일텐데. 저는 그걸로 그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비유처럼 얘기하는 건, 저는 제가 일종의 우리나라 70년대 텔레비전 연구자라고 생각을 해요. 제가 80년대 대학을 다닐 때, 당시 텔레비전에 관해 가르치던 강사들은 산업이나 제작과정을 잘 모르거나 실제로 TV프로그램을 많이 보지 않는데 우리한테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기에 동료 교수나 지식인들에게도 비판을 듣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들의 강의가 아주 무의미했냐면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분들의 가장 큰 업적은 ‘텔레비전 드라마도 독립적인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준 것이고, 그런 신념 하에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그들이 조금 더 발전시킨 논문과 책을 쓰게 한 역할이 컸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젠킨스가 얘기한 대로 결국 팬들이 공부를 하는 것이 대중문화 연구에 옳은 방향이라고 봅니다. 학자가 팬이 되는 것보다 팬이 학자가 되는 게 더 정확한 학문의 발전 방향인 것이죠. 근데 이제 그러기에는 저는 늦었다고 생각하고요. 따라서 저는 그런 질문이 나온다면, ‘당신들이 훨씬 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고 나는 당신들한테 길을 만들어 주겠다’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학회를 일종의 오두막처럼 만들고 그분들이 어떤 주인이 되는 때가 오면 훨씬 학술적으로도 성숙된 커뮤니티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신규 편집위원: 해외에서도 조금 나이가 있고 학문에 익숙한 학자와, 젊지만 어떤 감각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만나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런 점에 있어 회장님께서 지도교수로서 게임을 좋아하는 학생들과 교류하고 코워킹을 하는 과정 또한 중요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학생들과의 만남이나 마주침이 학문적으로 회장님한테도 역으로 자극이 좀 되셨을까요? 윤태진 디그라-K 학회장: 그럼요. 너무 진부한 표현이지만 학생들에게 훨씬 실질적으로 많이 배웁니다. 학생들의 페이퍼를 내가 평가자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재미가 없는데 실은 제가 요즘 공부하는 것의 한 70%는 학생들 논문 읽으면서 배우는 것 같거든요. 학생들의 페이퍼를 보다가 재밌는 거 있으면 조금 더 찾아보고 이런 식으로 배우기 때문에 게임 연구도 사실은 저는 그런 식으로 해온 것 같아요. 강신규 편집위원: 비슷한 질문일 수 있겠는데요, 그렇다면 게임 연구가 게임 플레이어들한테 해줄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이 있을까요? 디그라-K 학회가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 업계 및 연구자와의 교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플레이어와의 교류 또한 매우 중요한 최종 도달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게임 연구자가 플레이어들에게는 어떻게 말을 건넬 수 있을까요? 윤태진 디그라-K 학회장: 저는 지금 질문을 듣자마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영화 팬들이 생각났습니다. 지금은 아마 게임 평론가보다 영화 평론가가 훨씬 많겠지만, 조금 좁혀서 ‘시네필’들을 얘기한다면 그 많던 시네필들 중 일부는 감독이나 제작자가 된 사람도 있고 유학 가서 학자가 된 사람도 있죠. 만약 우리나라의 영화학이 당시 굉장히 풍성했더라면 그런 사람들을 굉장히 잘 소화할 수 있었을 거에요. 계속 인터랙션이나 학습이나 교류를 통해 보람을 주면서 영화에 대한 그들의 에너지를 결국 학계건 업계건 연결을 시켰을 겁니다. 저는 우리나라 게임 평론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성격과 규모는 좀 다르겠지만 게임과 관련해 그런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GG의 게임 평론 공모전도 훌륭한 일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자리를 만들고 교류하는 일을 학계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임을 많이 알거나 막연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이 꼭 학자가 되지 않더라도 게임에 대한 다른 시각이나 개념, 타국의 게임 현황을 배우면서 게임에 대한 애정이나 에너지가 더 커지면 당장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차츰 쌓여서 게임 업계나 학계에 굉장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강신규 편집위원: 한편으로 저는 그간 대중문화나 영화를 연구하던 사람들이 게임 쪽을 자연스럽게 연구하고 비평하는 게 장르의 저변을 넓히고 경계가 사라진다는 의미에서 좋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럼 게임만의 고유한 무엇이 남아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도 듭니다. 디그라-K의 지향점을 말씀해 주시기도 했지만 게임과 관련한 (고유한) 이론과 방법론이 없는 상황에서 게임이 어떻게 나아가야 될 것인가를 저희가 굉장히 오래 논의했었죠. 대중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상으로서 게임을 한 번쯤 이야기할 수 있다는 분위기인데, 한편으로 그게 약간 공허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혹시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신지요? 윤태진 디그라-K 학회장: 그 부분은 저와 좀 생각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데, 저는 게임이 독립된 학문적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독립적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 독립된 이론과 방법론이 꼭 필요하다는 의견에도 반대합니다. 질적 연구방법론을 예시로 들면, 분과별로 질방이 각자 있지만 주제와 소재만 바뀌고 내용이 크게 차이가 없죠. 분과적인 것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각자 방법론적 노력을 하는거라고 생각하고 이론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학회를 만든 것도 형식적이거나 제도적인 문제를 고려한 것이지 그 안의 내용물이 사회학회나 언론학회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구요. 저는 오히려 우리 학회도 많은 사람들이 ‘잠깐 와보는 곳’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아요. 같은 이유로 아마추어 평론가나 업계에서 열심히 뛰는 현장 인력들도 학회에 한 번쯤 와서 기여도 잠깐 하고 그러다 재미없으면 가고 하는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숏폼, 메타버스, VR, AR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현재 게임의 경계도 굉장히 애매해지고 있습니다. 이럴 땐, 그럼 빨리 게임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만들어 제도화시켜서 뿌리를 내리자는 의견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게임의 영역과 경계를 아주 흐릿한 채로 오히려 넓혀서 다양한 주제를 게임 연구에서 할 수 있고 또 게임 연구에서 그런 쪽에 기여도 할 수 있게 만들자는 의견이 있을 텐데요. 저는 그 둘 중에 압도적으로 후자로 가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강신규 편집위원: 학회의 방향과 관련된 질문을 좀더 드려보자면, 게임 산업이나 문화에 대해 학회가 실천적으로 참여나 개입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혹시 생각하고 계신 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를테면 게임 관련 규제 개선이나 WHO의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국내 도입과 관련된 부분이라던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윤태진 디그라-K 학회장: 두 가지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저는 학회가 그런 의제를 적극적으로 전면에 내거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보고 있어요. 왜냐면 학회가 지향하는 것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토론을 하는 곳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어떤 게임이용장애의 질병화를 찬성하거나 반대한다던지, 게임의 확률형 아이템을 어떻게 해야 된다던지에 대해 학회 이름을 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건 대전제로 하는 얘기구요. 그렇지만 둘째로 개별적인 사안에서는 사실 기민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게임이용장애와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내년 초에 세미나 하나를 계획 중이에요. 외국 사례를 참조해 이게 정말 법령화가 되고 있는지,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를 그동안과는 좀 다른 시각에서 세미나를 해보면 어떨까 하고 추진 중에 있습니다. 즉 학회의 방향이 이를테면 산업 친화적이거나 정책 지향적으로 가야 한다는 것에는 반대하며 이건 저는 굉장히 분명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단지 산업이나 정치, 국제관계 등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특정 이슈가 있다면, 이와 관련한 자리를 학회가 기민하게 만들어서 전문가들이 토론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강신규 편집위원: 오늘 회장님이 학회와 관련하여 말씀해 주신 부분들, 여기저기 있는 사람들이 그런 부분들을 알고 학회에 와서 편히 들을 수 있도록 널리 알리는 일도 굉장히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윤태진 디그라-K 학회장: 인터뷰가 GG에 실린다고 하니, 질문과 무관하게 한 가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우선 이 글의 독자가 대학원생 등의 연구자가 아니라 그냥 게임을 좋아하는 아마추어 평론가나 게이머일 가능성이나 비율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체감상 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게임 관련 조직이 생기거나 책이 출판되고 행사가 만들어질 때 일종의 ‘정치적 판단’을 하려고 하는 것 같다는 우려가 들어요. 정치적 판단이라 함은, 진보와 보수의 얘기가 아니라, ‘이거는 업계가 돈 벌려고 하는 일이야’, ‘저 사람은 페미니스트니깐 이거는 개판일 거야’ ‘이거는 누가 특정한 의도로 뭘 해보려고 만든거야’ 등의 어떤 냉소적인 반응의 문화랄까요? GG의 비평 콘테스트에 나온 글에 대해서도 저 글은 잘못 알고 쓴 글이라는 방식의 비방도 많았구요. 이런 걸 보면 텔레비전이나 케이팝 등 다양한 여러 대중문화 영역 중에 게임 쪽이 어떻게 보면 가장 긍정적 리액션이 적은 곳 같고, 무언가를 지지하거나 기여하는 발전지향적 태도를 제일 발견하기 어려운 곳이 게임 판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문화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있고, 그런 문화가 사라지는 건 어려워도 어떻게 완화될 수 있을까를 고민을 많이 하는데 사실 방법은 없거든요. 어떤 캠페인을 벌여서 될 것도 아니고 한편으로 이런 태도가 전세계적 트렌드이기도 하기에 어렵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기회가 될 때마다 이런 얘기는 해보고 싶어요. 게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매일 욕하고 냉소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조금은 긍정적으로, ‘게임을 사랑하는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어떤 특정 게임사가 분명히 누군가에게 잘못한 일도 많겠지만, 사실 게임 산업이 망하지 않고 잘 되어야 하는 거니까요. 저는 산업이나 정책, 경영에 참 관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게임 판이 쇠락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생각을 하고, 이 부분은 학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계에 어떤 연구결과물이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냉소적으로 ‘교수들이 또 대학원생 시켜서 아무거나 쓰고 책이나 낸다’는 식의 반응이 많은데요. 거기서도 본인들이 재미있게 느낄 수 있는 것이나 자극이 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찾아 좀더 긍정적인 리액션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강신규 편집위원: 저희가 오늘 굉장히 많은 것을 여쭤봤고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요, 편집장님께서 꼭 질문을 해달라고 하셔서 넣은 것입니다만 학회장으로서 ‘최애 게임’이 무엇이신지요? 윤태진 디그라-K 학회장: 우선 저는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온라인에서 싸우거나 협력하는 등 모르는 사람과 부딪혀야 하는 게임은 못하겠더라구요. 기본적으로는 제가 잘 못하는 걸 들키기 싫은 본능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웃음). 그러다 보니 네트워크가 없는 콘솔 게임이나, 혼자 할 수 있는 모바일 게임 위주로 하게 되네요. 그리고 저는 게임을 다른 일을 하다가 기분 전환용으로 잠깐 하는 것이기에 빨리 끝날 수 있는 아케이드류가 많아요. 보통은 간단한 크로스워드 퍼즐이나 3매치 류의 게임을 많이 해요. 참고로 제 게임 역사에서 제일 오래 했던 게임은 유학 초기에 했던 <동키콩>입니다. 유학 가서 말도 안 통하고 심심하고 해서 그거를 맨날 하다보니 잘하게 돼서 오락실에 제가 들어가면 사람들이 길을 열어주기도 했어요. 집에 아이가 좀 크고 나서는 <크레이지 아케이드>나 <위닝>도 많이 했구요. 최근엔 <대항해시대>나 <우마무스메> 등이 워낙 많이들 하니까 의무감에서 했었는데 <대항해시대>는 좀 재밌게 했었네요. 원하는 장르가 아니지만 사람들이 말이 많으면 맛이나 보자는 마음에 플레이하는 게임도 꽤 많은 편이에요. 이상입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수 문화와 지식, 공간과 학술 장 등 다양한 영역을 공부합니다. 게임의 역사와 게이머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인터뷰] 근대에서 현대로의 궤적을 따르다,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 아로코트 개발자
작년 8월 열린 부산인디게임페스티벌(BIC)에 출품된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The Fire Nobody Started)는 흔히 접할 수 있는 게임들과는 다른 내러티브와 아트의 독창성을 자랑하는 게임이다.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형식의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각각 특정 시대로 대변되는 기차 칸들을 오가며 유럽 근세사의 질곡을 체험하게 된다. 산업혁명기부터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사회의 다양한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는 이 게임에는 인류로부터 비롯되는 발전과 폭력이라는 양가적 주제가 녹아나 있다. < Back [인터뷰] 근대에서 현대로의 궤적을 따르다,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 아로코트 개발자 23 GG Vol. 25. 4. 10. 작년 8월 열린 부산인디게임페스티벌(BIC)에 출품된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The Fire Nobody Started)는 흔히 접할 수 있는 게임들과는 다른 내러티브와 아트의 독창성을 자랑하는 게임이다.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형식의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각각 특정 시대로 대변되는 기차 칸들을 오가며 유럽 근세사의 질곡을 체험하게 된다. 산업혁명기부터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사회의 다양한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는 이 게임에는 인류로부터 비롯되는 발전과 폭력이라는 양가적 주제가 녹아나 있다. GG에서는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이하 <더 파이어>)>를 제작한 ‘팀 스핏파이어’의 개발자 아로코트를 만나 서양 근세사라는 게임의 테마와 작가로서 개발자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들을 들어보고자 했다. 이경혁 편집장: GG의 인터뷰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더 파이어>를 만드시게 된 계기를 여쭙고 싶습니다. 아로코트: 원래 이 게임은 무한히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모티프였지만 아무래도 게임의 배경으로 쓰기에는 좁은 감이 있어 기차로 바꾸었어요. 어딘가를 향해서 끝없이 질주하는데 어딘가로 향하는지는 모르는 기차 안에서 대화하는 게임을 만들고 싶어서 친구랑 이야기를 했어요. 메타 판타지 느낌으로 우로보로스처럼 세상 밖을 도는 열차로서 다양한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임을 할까, 아니면 좀더 현실에 가까운 얘기를 할까 하다가 친구가 아무래도 기차라면 산업혁명이 떠오르니 산업혁명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했어요. 그렇게 친구와 얘기하며 한 2시간 만에 스토리 개요가 짜인 거죠. 이경혁 편집장: 기차로 시작할 수 있는 여러 맥락 중에 산업 혁명이라는 주제를 타고 가셨다는 거죠. 말씀하신 개발 동기로서의 기차가 이 콘텐츠의 외피라면 이 게임의 알맹이 자체는 근대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혹시 관련 전공자이신지도 궁금했습니다. 아로코트: 사실 저는 컴퓨터공학이 전공이라 역사 쪽 전공자는 전혀 아니에요. 다만 평소에 그 친구나 저희 아버지와 관련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러면서 뭔가 제 안에서 관련 지식이나 고찰이 쌓여 갔던 거죠. 그렇게 쌓여왔던 것들이 그 날의 대화로 일종의 촉매가 되어서 게임으로서 형태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이경혁 편집장: <더 파이어>에서 하고 싶으셨던 이야기 자체는 그림이나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의 방식, 혹은 영화로도 만들어볼 수 있었을 텐데 여러 방식 중 게임을 고르셨습니다. 이 작품이 혹시 아로코트님께 첫 작품이신지요? 아로코트: 대중에 제 이름을 공개한 게임으로는 <더 파이어>가 처음입니다. 저는 정말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게임으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어떤 사람은 영화로 만들고 어떤 사람은 소설을 쓰듯이 저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그게 게임의 형식으로 구체화되는 거죠. 이경혁 편집장: 첫 게임의 주제로 서구 근대사를 다루게 된 이유가 있으셨을까요? 게임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세지가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아로코트: 사실 대중에게 공개하는 첫 게임이긴 하지만, 제가 이제껏 기획해 왔던 게임의 성격이 굉장히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심리적 고찰에 가까웠다 보니 <더 파이어>가 특이한 사례긴 해요. 학생 시절까지는 정말 저에 대해서만 집중했는데, 어른 되고 나서 보니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조금 더 눈길이 가더라고요. 물론 다른 사람보다는 서구 근대사에 대한 관심이 좀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아버지가 이런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어요. '세상에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이나 정책은 없다. 내가 무언가를 선택을 하면 누군가는 이득을 보고 또 누군가는 어떻게든 고통을 받는다. 그렇게 보면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선택을 해야 되는 사회구조 자체가 원죄처럼 느껴진다'. 그게 굉장히 뇌리에 남았어요. 사회 구조 자체가 아무에게도 상처 입히지 않거나 피해 주지 않는 삶을 만들 수 없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어떤 행위 자체는 필연적으로 또 어떠한 착취로 이어지는 것 같다. 근데 그런 걸 인식을 해봐야 이 세상은 너무 거대하고 저는 너무나도 작잖아요. 제가 그렇다고 혁명을 할 인물상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그래서 저는 게임을 통해 어떤 대답 대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하고자 했어요. 이 세상의 구조와 그 안에서 맞닥뜨리는 부조리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이라면, 사실 해답은 개개인의 삶과 경험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로 정해질 수는 없고 개별적인 것이겠죠. 하지만 각자의 해답에 대해서 서로 논의하고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해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모두 한번 이 질문을 생각해 보자라는 느낌으로, 어떻게 보면 그게 이 게임을 만들게 된 동기인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저는 <더 파이어>에 실제로 사용된 문구나 글을 보면 피상적인 인용이 아니고 레퍼런스를 참조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마르크시즘에 대한 언설들도 나오는데 그것도 나름의 공부를 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혹시 이 주제와 관련해 책이나 자료 같은 소위 말한 레퍼런스로 볼 만한 것들이 있으셨을까요? 아로코트: 사실 처음부터 특정한 레퍼런스를 잡고 진행했다기보다는 작업을 하면서 참고한 것들이 많다 보니 딱 어느 것이 레퍼런스라고 짚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마르크시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이 있었긴 했지만 추가로 정보가 필요하면 그때그때 여러 가지 문헌들을 찾아봤어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에서 관련된 사항들을 읽고 가져올 수 있는 정보를 메모해두기도 했구요. 이경혁 편집장: 제작 과정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더 파이어>의 마지막 크레딧에 한 명이 더 들어가 있는 걸 보긴 했는데, 완전히 혼자 게임을 제작하신 것인지요? 전공은 개발자신데 그림도 그렇고 사실 글 쓰는 것도 굉장히 힘드셨을 것 같아요. 아로코트: 마지막 크레딧에 나온 분은 아까 말씀드렸던 제 친구입니다. 게임 자체는 사실상 1인 개발로 이루어졌지만, 내용적인 부분에서는 친구가 초반에 등장하는 1차 세계대전 시기까지의 고증 작업을 도와주었어요. 예를 들어 챕터 3에서는 막스 베버의 책을 어떤 노동자가 읽었다는 설정을 만들었다가 고증을 통해 그걸 수정한다던지. 챕터 5에서 대공황 시대에 나오는 볼스테드 법의 허점에 대해 알려준다던지. 고증이 세게 들어간 부분은 제 친구가 써준 것도 있고, 그걸 기반으로 제가 다듬은 것도 있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거의 다 제가 썼어요. 이경혁 편집장: 게임의 전체 플레이 타임이 1시간 정도로 그렇게 길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위 말하는 기존의 게임 팬들 사이에서 '이건 게임이 아니야'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만약 이런 질문이 나오면 어떻게 답을 하시겠어요? 아로코트: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이건 사실 게임의 정의에 대한 문제이긴 한데, 흔히 게임도 예술이다라는 얘기를 하잖아요. 무엇이 게임이라는 매체를 예술로 만드는가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대중들이 그 매체를 예술로서 다룰 수 있어야 하고 가장 단순하게는 다른 예술들이 할 수 있는 걸 이 매체도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게임이 예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안에서 정말 다양한 시도를 할 수도 있고 다른 매체들이 다룰 수 있는 주제를 게임도 다룰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요. 이 게임이 인기가 없을 거라는 건 짐작했어도 스스로 이 게임은 게임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네요. 이경혁 편집장: 인디게임의 1인 개발자로서 BIC(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에 참석하시게 된 계기와 현장 부스의 분위기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아로코트: BIC는 처음에 게임 만들 때, 되든 안 되든 게임쇼 같은 데 작품을 내고 싶다는 제 로망이 있어서 직접 참여하게 됐어요. 현장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런 전시가 처음이었고 실은 돈이 없어서 장비도 못 빌렸거든요. 개발하던 걸 그대로 갖고 가서 동생 노트북과 제 노트북으로 전시를 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고 저는 그 정도면 만족이라고 생각해요. 또 현장에서는 그런 한계도 있었어요. 데모판 플레이 타임이 아무리 짧게 잡아도 한 10-15분은 걸리는데 저는 한 30분 정도로 상정했었으니까 게임쇼 내내 <더 파이어>를 돌린다고 해도 직접 경험시켜 드리는 데는 한계가 있더라구요. 이경혁 편집장: 저도 뒤쪽에서 봤습니다. 게임쇼의 안타까운 점이기도 하죠. <더 파이어>도 그렇지만 플레이타임이 긴 게임들은 사실상 거기서 시연이 어렵다 보니까요. 아로코트: 아무래도 게임 쇼에서는 뭔가 짧고 메커니즘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종류의 게임이 부스로서 사람들에게 강점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좀 많이 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국내에서 <더 파이어>와 비슷한 시도를 하는 분으로 저는 소미(SOMI) 님이 생각나기도 했어요. 혹시 소미님 작품은 플레이 해보셨을까요? 아로코트: 네, 소미님은 항상 존경하는 분이에요. 스토리랑 게임의 시스템을 잘 맞물리게 하는 방법을 잘 아시는 것 같고 사실 그게 그분의 강점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사실 그래서 저도 원래는 어느 정도 게임에 퍼즐 요소를 넣어서 인물들의 이야기가 퍼즐로 표현이 되었으면 했는데, 프로그래밍을 그렇게 잘 못했던 건 아쉬운 점이에요. 이경혁 편집장: <더 파이어> 중간에 알파벳 맞추기라던가 퍼즐을 시도하시는 것도 느껴졌는데 확실히 게임에서 퍼즐 요소가 적긴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로코트: 원래는 시대별로 보드 게임을 반영해서 첫 번째 챕터에서는 틱택토, 두 번째 챕터는 체스 이런 식으로 반영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제 경우에는 아트까지 다 담당을 하다 보니 무엇 하나는 포기를 해야만 했었어요. 아트는 약간 (이 게임의) 정체성 같은 거라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림과 퍼즐 사이에서 퍼즐을 포기했던 거죠. 그래서 팀원을 되게 절실하게 원하긴 했어요. 저 스스로도 개인적으로 개발 쪽으로는 욕심이 많이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사소하게 작동하는 메카닉 하나도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여된다는 걸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더 파이어>에서는 아트도 상당히 눈에 띄는데요. 아트에 비중을 많이 두고 싶으셨던 이유와 구성하기까지의 과정들이 궁금합니다. 아로코트: 전공자도 아니고 그림은 초등학생 때 이후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게임과 관련된 퍼즐 요소에는 확신이 없어도 아트는 이걸 해내면 정말 대단할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원래는 <더 파이어>에서 아트를 칸마다 다양화할 생각이 없었는데, 아까 저를 어드바이스해준 친구와 얘기하면서 시대에 맞춰 아트를 각자 그리자는 얘기가 나와서 하게 됐어요. 결국 제가 제 무덤을 팠던 거지만요(웃음). 이경혁 편집장: 각 시대별로 예술 사조를 다 맞추신 거잖아요. 마지막엔 팝아트랑 컨템포러리까지 가셨던 것 같아요. 아로코트: 실은 후반으로 갈수록 각 시대에 아트 스타일이 명확하게 들어맞지는 않아요. 예를 들면 1950년대 매카시즘이 나오는 시대의 아트 스타일로 바우하우스를 선택했는데 사실 바우하우스는 1930년대거든요. 점차 사조들이 갈래가 다양해지기도 하고, 그보다 후반으로 가면 저작권 문제도 있습니다. 이전 시대까지는 각자 모티프로 삼은 작가들이 있었어요. 첫 챕터인 산업혁명 시대 같은 경우에는 신문에 나오는 단색 리소그래피 판화를 택했고, 두 번째 챕터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 세 번째 챕터에서는 툴루즈 로트랙, 네 번째 챕터에서는 몽고메리 플래그 이런 식으로 명확한 작가들을 정했어요. 그런데 후반부로 가니 그렇게 하면 법적인 문제에 걸릴 가능성이 있어 그보다는 시대별 분위기에 맞춰서 선정하고자 했어요. 개인적인 느낌인데 그래서 후반으로 갈수록 제 취향이나 경향성이 조금 더 많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이경혁 편집장: 콘텐츠에 대한 질문으로 저는 이 얘기를 꼭 여쭤봐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제작자이자 창작자로서 인류의 근대라는 걸 어떻게 보시나요? 아로코트: 저희가 <더 파이어>를 만들 때 명확하게 합의하고 넘어간 게 있었어요. 우리가 볼 때 인류의 근대는 실패의 역사다. 지금도 보세요, 이 게임을 완성할 때까지만 해도 세상이 이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지만 계엄령도 내려지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지금보다 조금 더 이전 시대 사람들은 그래도 자신만의 이상이나 최선을 상상하고 꿈꾸지 않았나 싶거든요. 근데 지금의 세상은 더 이상 최선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최악을 고르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경혁 편집장: 작품에서 불이라는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셨지요. 처음에는 남포등에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그것이 나중에는 원자폭탄이 되고 최종에는 불이 타오르는 쪽으로 계속 걸어가면서, 마지막쯤에 ‘우리가 불이다’ 라는 선언을 하는 모습도 나오고요. 하지만 기술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도 사실이라는 이야기도 살짝 나오잖아요. 그래서 저는 <더 파이어>에서 불이 갖는 의미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게 아닌가 했어요. 아로코트: 맞아요, 이중적이에요. ‘우리가 불이다’는 아까 말씀드린 인류의 사회와 구조 자체가 원죄라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피우지 않은 불에 의해서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세상을 잘 살펴봤을 때 고통받고 있는 우리도 이 부조리의 일부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게임 후반부로 갔을 때 그렇게 산발적으로 그려놓은 불이라는 이미지와 상징을 하나하나 다 끌어모아서 하나로 통합하지는 않았어요. 이 게임을 대답이 아니라 질문으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그 상징들을 보면서 플레이어가 그 상징들과 제가 대략적으로 잡아놓은 형태를 보면서 플레이어가 불꽃이란 무언가에 대해서 스스로 결론을 내렸으면 했어요. 이경혁 편집장: 산업혁명이나 원자 폭탄 등으로부터 출발해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쟁 등의 서사를 보면, 물질적으로 생명이 죽어나가는 순간들을 포착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완전히 근현대까지는 안 오셨고 사실상 베트남 전쟁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로코트: 사실 후반에 소련 붕괴나 911, 서브프라임 사태 이런 것들이 짧게 짧게 지나가잖아요. 원래는 그 사이에 이라크 전쟁을 넣어서 그 문제를 부각하려 했어요. 그랬지만 저한테도 두려움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웃음)... 저는 그래서 사실 계엄령이 내려왔을 때 정말 무서웠거든요. 이성적으로는 게임 창작자로서 역사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이게 정치 사회적으로 짚고 넘어갈 만한 이야기인 것도 맞는데 왜 이런 부분에서 두려워해야 되나 생각하며 현타도 많이 오더라구요. 이경혁 편집장: <더 파이어>가 언어를 그래도 꽤 많이 지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번역은 어떻게 처리하셨을까요? 아로코트: 번역의 경우 제 친구가 영어 부분을 해줬고, 그걸 기반으로 BIC에서 마사케이라는 분을 만나서 그분이 일본어 번역해 주셨고 나머지는 itch.io (해외 인디게임 커뮤니티)에서 번역 자원봉사자 분들을 구해서 했었어요. 이경혁 편집장: 역시 개발자들은 itch.io에서 시작하시는군요. 게임의 판매수익은 얼마 정도 될까요? 그동안 들어간 공수가 있으니, 그와 대비해서 이 정도는 회수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기대가 있으셨을 것 같아요. 이런 물질적 기반이나 상업적 성과가 창작자가 다음 작품으로 가는 데 또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해서 여쭤봤습니다. 아로코트: 저는 이 게임에 정말 (상업적으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돈을 벌면 좋으니까 최대한 게임을 알리기는 하는데,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이 게임이 해외에서도 되게 마이너한 분야이고 얼마만큼의 수요를 낼지 장담할 수 없는데 한국에서는 어떻겠어요.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시장의 크기가 있다 보니 그만큼 마이너 장르도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걸 많이 느껴요. 그래도 그런 것 치고는 제 기대보다는 잘 됐다의 느낌이구요. 하지만 조금 더 잘 됐으면 좋겠다고 항상 느끼고 있어요. 이경혁 편집장: <더 파이어>의 경우 국내보다도 해외 쪽 반응이 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해외 반응들은 좀 보신 게 있으세요? 아로코트: <더 파이어>도 사실 국내보다는 해외 쪽에서 뭔가 조금 이제 힘을 낼 수 있는 작품 같은데, 해외 반응을 살피기 전에 게임이 애초에 해외로 잘 퍼져 나가야 되는데 그러기가 사실 쉽지는 않아요. 인디 게임 홍보에 가장 난점이고 가장 필요한 부분이 네트워크인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사회적인 인간이 아니기도 하지만 예전에 학생일 때는 그런 걸 모르고 살았다가 이제야 그것들을 체감하기 시작하니까, 이걸 앞으로 어떻게 홍보를 하고 알릴지가 정말 힘들더라구요. 우선은 비트 서밋(일본 국제 인디게임 페스티벌)에 내보긴 했습니다. 아무래도 <더 파이어>가 아트라는 명확한 장점이 있으니까 이걸로 어떤 수상을 하면 관심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요. 이경혁 편집장: 개발자 본인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다가가 보면, 게이머로서는 또 어떤 분이신가 궁금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게임들을 두세개 정도 꼽아주시면 어떤 건가요? 아로코트: 쯔꾸르 게임 중에서 08년도에 나온 <오프>라는 RPG 게임이 있어요. 서양권에서는 많이 유명한 메타픽션 게임의 계보에 있는데. <오프>는 RPG 쯔꾸르라고 하면 보통 생각하는 일반적인 이미지를 전혀 따르지 않는 게임이었어요. 이렇게 게임을 만들어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저에게 있어 게임이란 시스템 이전에 이야기가 먼저 존재하고 게임은 그 이야기를 표현하는 수단인데요. 쯔꾸르 게임들, 특히 <헬로우 샤를로테>라는 게임을 하면서 그런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에반게리온 같은 느낌의 우울증 걸린 게임인데(웃음). 제가 고등학생 때 정말 힘들었고, 저한테 학교라는 공간은 단 한 번도 좋게 기억된 적이 없었는데 <헬로우 샤를로테>가 그러한 감성들을 정말 명확하게 풀어낸 거예요. 게임을 하면서 개발자가 겪었을 그 고통들이 정말 생생하게 느껴졌어요. 그 게임을 통해 저도 제가 가지고 있는 이 기억들을 언젠가 게임으로 다시 풀어내고 싶다, 자기 표현 욕구의 수단으로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 외에는 <이브>나 <마녀의 집> <원샷> 같은 이야기를 표현하는 게임과 메타적인 연출들을 많이 좋아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기획부터 완성까지 여러 고충이 있었습니다만, 결국 스스로 이 게임을 만들 때 재미있으셨을까요? 아로코트: 정말 솔직히 난점이 많았죠. 특히 아트 스타일을 만들 때는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요(웃음). 고쳐도 별로고 안 고쳐도 별로고, 진짜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거랑 너무 다르고. 그런데 재미있었냐라고 묻는다면 정말 재미있어요. 하는 시간만 놓고 봤을 때는 사실 힘들고 고민도 많이 해야 되고 특히 저는 주변에 아무도 없이 그냥 집에서 이것만 개발했거든요. 속으로는 내가 이렇게 시대별로 고생을 해봐야 누가 알아줄 거라는 보상도 확신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그게 재밌었던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개발자로서 아로코트님의 향후 진로나 창업에 대한 생각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아로코트: 언젠가는 회사를 세워서 제가 생각한 이야기들을 더 만들고 싶은 게 목표고, 제가 생각하는 것들을 일종의 IP나 프랜차이즈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해요. 제가 원하는 게임을 만드는 것 외에도 어느 정도 수익성이 나는 그런 것들을 많이 고려하지만 특별히 현실에 타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제 게임 스타일이 이런 걸로 고정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제 개발 능력의 모자람이기도 해서(웃음) 지금은 저보다 훨씬 더 능력이 있으신 분들과 협업을 할 기회가 생겼는데, 앞으로는 그럴 수 있다면 훨씬 더 적극적이고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고 싶어요. 이경혁 편집장: 마지막으로 후속작 계획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간단한 컨셉트 같은 걸 공개해 주실 수 있으면 그것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로코트: 후속작으로는 지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어요. <더 파이어>를 보고 같이 작업하자고 연락 주신 분들이 계셔서 그분들과 하는게 있고 개인적으로도 기획 중인 게임들이 있습니다. 먼저 팀으로 제작중인 게임으로 한국 도깨비가 등장하는 뱀서가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제작하는 스토리 게임 중에서는 우선 브로맨스 요소가 들어간 대화 형식의 게임을 만들고 있구요. 도시에서 괴물을 키우는 텍스트 어드벤처 계열 게임도 기획 중인데, 사이키델릭한 심리적 요소를 많이 곁들인 게임으로 계획하고 있어요. Tags: 근대, 인디게임, 역사, 1인개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수 문화와 지식, 공간과 학술 장 등 다양한 영역을 공부합니다. 게임의 역사와 게이머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캣스모폴리틱스(Catsmopolitics): 고양이와 기계가 자본세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
인종차별, 여성혐오, 소수자 차별, 장기화된 실업, 투기와 불평등, 전쟁과 극우정치가 만연한 오늘날 유일하게 아무에게도 미움 받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고양이일 것이다. 좌파도 우파도, 남성도 여성도, 베이비부머도 청년도, 무슬림도 카톨릭도 고양이를 사랑한다. 사람들은 기꺼이 골목길에 사료와 물그릇을 갖다놓으며, 고양이와의 사랑스런 일상을 촬영해 공유한다.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인간이 아닌 고양이다. < Back 캣스모폴리틱스(Catsmopolitics): 고양이와 기계가 자본세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 08 GG Vol. 22. 10. 10.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인종차별, 여성혐오, 소수자 차별, 장기화된 실업, 투기와 불평등, 전쟁과 극우정치가 만연한 오늘날 유일하게 아무에게도 미움 받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고양이일 것이다. 좌파도 우파도, 남성도 여성도, 베이비부머도 청년도, 무슬림도 카톨릭도 고양이를 사랑한다. 사람들은 기꺼이 골목길에 사료와 물그릇을 갖다놓으며, 고양이와의 사랑스런 일상을 촬영해 공유한다.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인간이 아닌 고양이다. 자연을 정복하고, 기계문명과 산업도시를 건설해 지구의 지배자로 거듭난 인간이지만 고양이 앞에서는 애정결핍 노예가 돼버린다. 오늘날 고양이는 신성불가침이라 할 수 있으며, 어쩌면 지구 역사상 유일하게 인간을 굴복시킨 생명체일지도 모른다. * 필자와 7년간 삶을 함께하고 떠난 고양이, 제리입니다. 이처럼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 존재인 만큼, 고양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정도 남다르다. 고양이는 왜 고롱거리는 걸까? 고양이는 왜 발치를 맴돌며 머리를 비비는 것일까? 쥐나 벌레를 선물로 바치는 고양이의 심리는 무엇일까? 동물행동학자가 아닌 일반 사람(집사)들이 고양이의 언어를 이토록 이해하려고 애쓴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우화 속에서 의인화되지만, 고양이는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쉽사리 의인화되지 않는 존재다. 사람들은 고양이 행동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고, 재해석하며, 고양이의 시각에서 사고하려고 든다. 고양이를 의인화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을 의묘화한다. 고양이의 시점에서 스스로를 굽신거리는 집사로 희화화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을 만났을 때 있는 힘껏 몸짓 발짓을 동원하는 노력과 비슷한 맥락이다.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나로부터 벗어나서 타자처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먼 곳에서 왔지만 가까워지고 싶은 존재, 친족이 되고 싶은 반려종으로서 고양이의 사회적 의미는 요즘 아주 의미심장하다. 〈스트레이〉는 이처럼 ‘고양이와 함께 되기’를 꿈꾸는 기묘한 심리를 투영한 게임이다. 고양이를 대상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고양이가 되어보는 것이다. 고양이를 묘사한 문학·영화는 항상 있어왔고, 인기도 많았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고양이〉는 고양이의 시점에서 인간 사회를 묘사하며, 영화 〈내 어깨 위 고양이 밥〉은 진창에서 벗어나는 노숙자 ‘밥’과 가족이 된 길고양이의 실화를 다룬다. 이슬람 성전 쿠란에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예배 중 자신의 품에 기어들어와 잠든 고양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자신의 옷소매를 자른 일화가 담겨 있다. 그러나 실제 고양이가 되어 발톱을 긁고, 점프하는 게이밍 경험은 그 이상이다. 〈스트레이〉는 고양이를 인간과 동등한 행위자의 관점에 위치시키면서, 객체라고 생각되는 비인간(고양이, 기계, 도시)들이 자아내는 사회적 관계를 SF의 형식 속에서 재배치한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고양이에게는 이름이 없다. 어디에서 왔는지, 가족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름이나 가족은 인간중심주의적 개념이며 비인간에게는 불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고양이의 관점에서 인간 세계관을 비평하고자 했던 나쓰메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생동하는 비인간의 세계 게임은 폐허가 된 도시를 기웃거리다 지하로 떨어진 고양이의 탈출 여정을 그린다. 플레이어는 철저히 고양이의 시점에서 공간을 탐색하고 길을 만들어 나가야한다. 인간의 감각, 인간적인 사고방식은 통용되지 않는다. 문을 지나가기 위해서 문고리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문을 긁어서 누군가가 열게 만들어야 하며, 거리의 평면적 공간이 아닌 건물의 수직적 공간을 이동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어디든 네 발로 착지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 받은 고양이에게 인간의 2차원적 운동은 고루할 뿐이다. 이 이름 없는 고양이로 가장 빈번하게 발 디디는 곳은 환풍구, 파이프라인, 테라스 난간이다. 스파이더맨이 아닌 이상 인간은 이런 식으로 공간을 인식하지도, 이동하지도 않는다. 〈스트레이〉에서는 인간적인 감각을 최대한 제쳐놓고 사고해야 한다. 게임은 매우 정교한 레벨링을 통해 지하에서 지상으로 이어지는 수직 도시 스테이지를 설계했으며, 각 페이즈들은 철저히 고양이의 동선에 최적화되어 있다. * 〈스트레이〉에서 인간 지각 요소인 미니맵, 위치표시기, 체력바, 마커 등은 등장하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고양이의 시점에서 공간을 인식해야 하며, 사물과의 상호작용과 좌표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다소 불편하지만 이러한 비인간 감각에의 연동은 고양이만 갈 수 있는 경로와 퍼즐풀이를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이 공간 이동 경험은 낯설고 신비롭다. 기존의 게임 문법과 다르게, 우리는 고양이의 눈높이에서 사물들을 바라봐야 한다. 시선을 넓게 던지고, 어딘가를 항상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내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미니맵이나 지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적 좌표계가 공간 인식의 준거가 되지 않으므로, 플레이어는 도시 곳곳의 후미진 공간까지 아주 면밀히 검토하고, 반복적으로 탐색하면서 고양이의 감각으로 경로들을 확보해야 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게임들에서, 소실점은 언제나 인간의 눈높이(혹은 총의 조준선)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낯선 이물감이 든다. 길을 헤매고, 화면을 올려다보느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탓에 울렁거림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공간 디자인은 단순히 플레이어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함이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로서의 경험을 재조직화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인간이라면 떠올리기 어려운 비밀 장소들을 발견하거나 문틈, 창살 사이를 비집고 다닐 수 있으며 수백 미터 아래를 가뿐히 뛰어내려 옆 건물로 이동할 수도 있다. 고양이의 입체적이고 아크로바틱한 운동 속에서 우리가 재발견하는 것은 탈인간적인 물질 감각이다. 무심히 지나친 타이어, 녹슨 드럼통, 콘크리트 쓰레기들은 역설적이게도 고양이가 유유히 지나다니는 길을 열어준다. 이를 통해 〈스트레이〉는 산업문명의 기초가 되는 기계와 도시를 반생태적인 독성 공간이면서 동시에 보잘 것 없는 쓰레기더미로 묘사하는 중의 문법을 도입한다. 미디어학자인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의 말을 빌린다면, 상징과 해석을 강조하는 문학과 다르게 탐색과 항해를 강조하는 게이밍의 ‘절차적 수사학(procedural rhetoric)’이 고양이의 행위성과 입체적인 도시 이동 경험을 중개하고 있는 것이다. 〈스트레이〉의 독창적인 디자인은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고양이와 함께 되기’ 경험을 극적으로 증폭시킨다. 수직적이고 기하학적인 공간으로 직조되어 있지만, 고양이가 자유롭게 도시 공간을 누비고 다니듯 플레이어는 손쉽게 고양이의 신체 행동과 동기화될 수 있다.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 난해한 기믹이 동원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몇 가지 버튼만 적절한 타이밍에 누를 줄 안다면, 그리고 고양이의 관점에서 사고할 줄 안다면 누구든 이 생동하는 비인간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트레이〉는 과거 수많은 사람들이 즐겼던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예컨대 인디아나 존스 게임 시리즈같은)의 담담한 재해석으로 여겨진다. 그렇다. 〈스트레이〉의 세계에는 오로지 비인간 행위자들만 존재한다. 인간은 기후 재앙으로 멸종한 지 오래고, 인간의 하인 노릇을 하던 로봇종인 ‘컴패니언’과 주인공인 고양이만이 살아남았다. 인간의 흔적은 폐허가 된 지하도시에 즐비한 기계장치들에 검붉은 녹으로만 남아 있다. 인공지능에서 개성을 획득한 ‘컴패니언’ 들은 인간의 사고와 관습을 흉내내기는 하지만 인간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말 그대로 새로운 생명체다. 읽을 수 없는 기계 언어로 쓰여진 간판들, 쓰러지고 부서진 건물들, 우스꽝스러운 복장에 외골수 행동을 하는 컴패니언들 속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명쾌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무엇인가?’ 이다. 함께-되기의 캣스모폴리틱스(catsmopolitics) 비인간 존재들에 대한 실존적 질문은 인간의 실존을 묻는 까뮈의 〈이방인〉이나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처럼 난해하지 않다. 〈스트레이〉의 로봇종과 고양이, 그리고 고양이보그(catborg)인공지능 드론은 서로 돌보고 협생하는 관계다. 이 설정이야말로 게이밍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지적이고 영리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소형 드론 B-12는 플레이어(즉 고양이)에게 계속 자신을 깨우라는 신호를 보내며, 나중에는 플레이어를 돕는 보철물로 합류한다. 고양이 전용 웨어러블에 탑재된 B-12는 생동하는 비인간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고안된 기계신 같은 존재다. 어두운 공간을 비추고, 고양이가 수집한 아이템을 디지털화해서 저장하며, 컴패니언-고양이 간 소통이 가능하도록 기계언어 번역을 제공한다. 플레이어는 B-12로부터 지상으로 나갈 수 있는 퍼즐풀이 단서를 제공받지만, B-12가 위기에 처했을 때(과부하로 전원이 꺼지거나 기능이 정지되었을 때)는 거꾸로 구해내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 고양이, 컴패니언(로봇종), 인공지능 드론은 협생 관계이다. 드론은 웨어러블 디바이스로 고양이와 합체, 고양이보그(catborg)가 되어 플레이어의 진행을 돕는다. 게임 속 오브젝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라이트를 비출 뿐 아니라 컴패니언의 기계언어와 고양이의 야옹 소리를 번역해 소통이 가능하도록 만든다. 인간이 떠난 지하도시의 거주자 컴패니언은 고양이에게 다양한 도구를 제공하거나 이야기를 들려주며 고양이가 지면으로 나가도록 돕는다. 한편 고양이(플레이어)는 컴패니언의 생존을 위협하는 박테리아 균체 저크(zurk)를 물리치도록 도움을 주게 된다. 비인간 행위자들 간의 ‘함께-되기(becoming with)’의 경험을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인간이 야기한 자본주의와 기술의 문제들을 탈인간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상상력을 펼친다. 고양이와 드론, 모든 유기체를 갉아먹는 균체인 저크(zurk)로부터 지하도시에 격리된 로봇종인 컴패니언들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 협력한다. 이 비인간-행위자들의 끈끈한 네트워크는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 바깥에서도 객체들만의 정치가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스트레이〉에서 이들의 실존을 위협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와 발명품들이다. 고양이와 드론, 그리고 로봇종의 여정을 가로막는 위협은 멸망한 인간이 고안해낸 것들이다. 기후재앙을 맞이한 인류는 탄소배출을 중단하는 대신 탄소를 먹어치우는 박테리아를 개발한다. 요즘의 기후위기 국면에 대응하는 각국 정부들을 보면 정말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다. 물론 이 선택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박테리아는 처음에는 플라스틱과 탄소를 먹어치우지만, 유기체를 다 먹어치운 다음에는 금속까지 먹어치우는 방향으로 진화해버린다. 저크(zurk) 균체가 된 박테리아는, 동물과 인간 뿐 아니라 기계생명체인 컴패니언들까지 집어삼키고, 그 결과 식량난으로 멸종한 인간에 이어 컴패니언들도 지하 방공호에 긴 세월 격리된다. 이들을 격리하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규율하는 존재는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경찰 로봇, 센티넬(sentinel) 들이다. 센티넬은 격리를 해제하자고 주장하는 인간들을 감시하고 훈육하는 용도로 개발된 로봇들이지만, 인간이 사라진 후에는 밖으로 나가려는 컴패니언들을 억압하는 권력-기계가 된다. 포스트휴먼니즘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가 비평하는 것처럼, 인간 중심주의가 자아낸 트러블(기후위기, 계급갈등, 프랑켄슈타인 과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비인간의 존재를 가로지르는 ‘함께-되기(becoming with)’가 전제되어야 한다. 〈스트레이〉는 그 방법들을 플레이어들의 퍼즐 풀이 속에 아주 적절히 풀어놓는다. 인류가 처한 트러블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옵션은 ‘어떻게 인간을 구할 것인가’ 라는 고전적인 휴머니즘이 아니라 포스트휴머니즘, 즉 어떻게 ‘비인간과 함께할 것인가’의 주제의식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이 게임에서 고양이의 시각에서 사고해야만 했듯이, 사물의 관점에서 상호작용을 재구성해야 한다. 고양이, 로봇, 인공지능 뿐 아니라 균체, 건물, 뗏목, 전기, 라디오, 악기, 금고에 이르기까지 유기체와 무기체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함께-되기’가 요청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객체(비인간 행위자)가 되어 상호작용하는 경험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브뤼노 라투르가 지적하듯이, 중요한 것은 끈끈하게 연결된 이 비인간 행위성들 속에서 가능한 정치, 즉 인간과 사물이 동등하게 객체이자 행위자임을 상정하는 가운데 그 네트워크가 창발할 수 있는 잠재적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를 발견하는 것이다. 내가 이 게임의 매커닉을 두고 캣스모폴리틱스(catsmopolitics)라고 부르는 맥락은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 이념으로서의 코스모폴리틱스는 아주 난해하고 사변적이다. 그런데 〈스트레이〉는 비인간인 동시에 인간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고양이의 행위성을 투사해, 함께-되기의 경험들을 퍼즐풀이 문법으로 수사하면서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선언한다. ‘캣스모폴리틱스’는 시네마나 문학에서는 달성되기 어렵겠지만, 〈스트레이〉 같은 게임에서는 고풍스럽고 위트넘치는 방식으로 플레이어들을 설득하게 된다. 그루브, 하모니, 에코, 고양이...펑크!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 게임이 사이버펑크의 외형을 하고는 있으되 사이버펑크의 문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어원 자체가 다르다. 사이버펑크(cyberpunk)의 펑크는 거칠고, 단순하며 반항적인 하위문화인 펑크(punk, 메탈과 록)에서 온 것이지만 펑크(funk)는 깊이 있고 은은한 냄새, 그루브, 전자음과 리듬과 결부된 재즈적 무드에서 비롯된 것이다. 휘황찬란한 네온싸인의 거리와 녹슨 기계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가운데 고양이가 뛰노는 풍경은 아주 흥미롭지만, 〈스트레이〉는 권력의 감시와 대안적인 자유, 증강인간과 넷러너 등 사이버펑크의 전형적인 주제의식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맹신하는 트랜스휴머니즘과 기후재앙 시나리오를 비판적으로 소묘한다. * 사이버펑크(cyberpunk)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본질은 그루브와 조화가 강조되는 에코펑크(echofunk)이다. 부드러운 플로우와 애시드 재즈, 기계와 고양이 간의 따뜻한 상호작용 속에서 생태적인 감각이 되살아난다. 버스킹을 하고, 식물을 키우고, 테크노 음악을 발굴하는 로봇종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황폐한 지구를 떠날 궁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가 살고 있는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 캣스모폴리틱스를 배우게 된다. 그런데 이 붓터치는 punk가 추구하는 강함(중독, 환각, 메탈, 가죽)이 아니라 funk의 부드러운 플로우 속에서 구현된다. 플레이어는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는 공간, 혹은 이벤트가 벌어지는 페이즈에 들어설 때마다 펑키한 애시드 재즈를 접하게 되는데, 이는 급박한 긴장의 폭발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꾀하는 기존 대중문화의 문법과는 정 반대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감미로운 펑키 무드는 오히려 긴장을 이완시키고 공간의 사물들을 여유있게 살펴보도록 만드는데, 이 때문에 플레이어는 오히려 느긋하게 고양이와 공간의 하모니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음악 뿐 아니라 펑크가 집약되는 공간은 아주 힙하고 히피스러운 소품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플로우에 몸을 맡긴 채, 고양이를 움직여 이 사랑스러운 프랑스 애니메이션풍 미장센을 하나하나 음미하기 시작한다. 소파에 누워 잠을 잘 수도, 카펫 위에 꾹꾹이를 할 수도 있으며 TV와 라디오를 켜거나 끌 수도 있고, 냥점프와 냥펀치로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 모든 행동은 느긋함을 유도하는 게임 매커닉과 펑키한 요소들(음악, 미장센)을 통해 조화되며, 느긋하게 진정된 상태가 아니면 좀처럼 되돌아보기 어려운 주제, 생태과 기술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의 친애하는 고양이가 가로되, 기술의 진보는 문명의 진보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스트레이〉는 고양이펑크인 동시에 에코펑크이며, 펑크가 구사하는 모든 느긋함의 미학을 플레이에 조화시키는 게임이다. 무엇보다, 〈스트레이〉의 캣스모폴리틱스 펑크는 인간의 자본주의 기술문명 자체가 프랑켄슈타인이 되어가는 현실, 즉 자본이 지구 지층을 뒤헤집는 자본세(capitalocene) 시대에 대한 가장 비판적이고 사변적인 우화다. 집도, 이름도 없는 고양이가 되어 귀여운 잔꾀를 펼치는 체험을 통해 우리는 지구에 안전하게 착륙하는 방법을 불현듯 깨닫게 될 것이다. 일론 머스크나 제프 베조스 같은 억만장자들은 화성으로 인류를 이주시키자, 태양계에 우주 콜로니를 만들자는 식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 하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고양이들이 있는 지구를 어떻게 떠난단 말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지구를 떠나는 방법이 아니라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이고, 고양이-기계-로봇이 서로 환대하는 모습에서 스스로와 타인을 돌보는 방법일 테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는 이렇게 말한다. “태연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깨달은 듯해도 사람의 두 발은 여전히 지면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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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모전] 모바일 리듬 게임에서 ‘엄지러’를 선택하기-‘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하츠네 미쿠’를 중심으로
‘엄지족’이라는 신조어가 있었다. 2000년대 폭발적으로 보급된 스마트폰이 사회 전 분야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을 때였다. 엄지를 이용해 스마트폰의 화면을 누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청년을 일컬어 ‘엄지족’이라 불렀다. M으로 시작하는 것에 착안해 이들 세대를 모바일 세대, M 세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모두가 ‘엄지족’이자 모바일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 Back [공모전] 모바일 리듬 게임에서 ‘엄지러’를 선택하기-‘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하츠네 미쿠’를 중심으로 13 GG Vol. 23. 8. 10. ‘엄지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엄지족’이라는 신조어가 있었다. 2000년대 폭발적으로 보급된 스마트폰이 사회 전 분야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을 때였다. 엄지를 이용해 스마트폰의 화면을 누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청년을 일컬어 ‘엄지족’이라 불렀다. M으로 시작하는 것에 착안해 이들 세대를 모바일 세대, M 세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모두가 ‘엄지족’이자 모바일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바일 리듬 게임의 세계에서 ‘엄지족’, 다른 말로 ‘엄지러’는 여전히 실존한다. 스마트폰 리듬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0년대 후반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모두가 ‘엄지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바일 리듬 게임의 세계에서 ‘엄지러’의 위치는 다소 미묘하다. 노트를 정확한 타이밍에 터치해야 하는 일반적인 포맷의 모바일 리듬 게임을 상상했을 때, 분명히 모바일 리듬 게임의 유저 대다수는 엄지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엄지러’다. 그러나 노트가 더 많이, 빨리 등장하며 고난도의 플레이가 요구될수록 뚱뚱한 엄지 두 개만을 움직이는 플레이는 명확한 한계를 가진다. 이론상 발로도 플레이할 수 있는 <지오메트리 대시Geometry Dash>나 엄지가 누비기 비교적 수월한 세로형 인터페이스의 <피아노 타일 2Piano Tiles 2>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기에 모바일 리듬 게임의 ‘엄지러’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한계가 있음을 알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엄지로 플레이하거나, 지금부터라도 낮은 레벨부터 다른 손가락을 사용하는 연습을 하며 플레이 스타일을 ‘교정’하는 방법이다. 전자를 선택한 이용자라도 이걸 엄지로 하라고 만든 것이 맞는지 의심되는 곡을 만나면 다시 갈등을 시작한다. 이 필연적인 고민은 하나의 의문을 낳는다. 리듬 게임의 ‘엄지러’는 바뀌어야만 하는가? 인터페이스의 전환과 ‘엄지러’의 탄생 ‘엄지러’는 원래 리듬 게임에 존재하지 않는 계층이었다. 리듬 게임은 이전까지 감각적인 콘트롤러를 탑재한 아케이드 기기를 무기로 이용자를 매혹시켰다. 이용자는 강렬한 음악이 귓가를 때리는 오락실에서 버튼을 누르고, 돌리고, 발판을 밟고, 북을 치고, 기타를 치는 식으로 리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2000년대부터 오락실이 쇠퇴함에 따라 온라인과 콘솔, 모바일 등 각각의 형태를 기반으로 리듬 게임이 분화되었다. 모바일 리듬 게임으로 넘어오며 리듬 게임은 기존의 무기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각양각색의 감각적인 콘트롤러 대신 게임사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은 피처폰의 조악한 버튼, 조금 더 나아가서는 스마트폰의 작은 터치스크린뿐이었다. 이 터치스크린 속에서 특정한 버튼을 누르면 여전히 소프트웨어는 우리의 입력에 반응하지만, 과거와 같이 게임 소프트웨어 바깥에서 주어지는 ‘눌렸음’의 촉각적 신호는 사라진다.1) 이 물리적 제약은 감각적인 콘트롤러를 내세웠던 리듬 게임에 엄청난 도전이었다. 대신 스마트폰은 리듬 게임에게 휴대성과 대중성을 가져다주었다. 게임사는 모바일 환경에 맞춰 ‘엄지족’이 엄지로 간편하게 플레이할 수 있게끔 리듬 게임을 설계했고, ‘엄지족’은 엄지로 플레이를 했다. ‘엄지러’의 탄생이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리듬스타 등의 피처폰 모바일 리듬 게임이 인기를 끌었으며, 2010년부터는 고사양의 스마트폰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아이폰, 안드로이드와 같은 스마트폰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한 리듬 게임들이 개발되었다.2) 형태의 전환은 새로운 규범을 만들었다. 스마트폰으로 리듬 게임을 한다는 것은 게임사가 더는 이용자가 리듬 게임을 하는 방법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케이드 리듬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정해진 장소로 가 정해진 콘트롤러를 정해진 방식으로 조작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모바일 리듬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용자들에게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그들은 불특정한 장소에서 불특정한 기기를 불특정한 방식으로 조작한다. 이용자는 카페에서 태블릿을 눕혀놓고 모든 손가락을 활용해 게임을 플레이할 수도 있고, 핸드폰을 들고 집에 누워서 엄지로 플레이할 수도 있으며 최신형 접히는 핸드폰을 산 것을 후회하며 접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검지로 플레이할 수도 있다. 이 새롭고 다양한 사용자 경험 위에서 이전과 다른 플레이 문화가 축적됐다. 인터페이스의 전환이 새로운 장르적 전통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바일 리듬 게임에게 ‘어느 정도 엄지 플레이를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은 필수적인 동시에 중요하다. 이 질문에 어떤 답을 내리느냐에 따라 해당 리듬 게임의 방향성이 결정된다. 캐릭터 IP를 내세운 대중적인 모바일 리듬 게임인 처럼 이론상 엄지로만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있는 한편, 아예 어려운 리듬 게임을 테마로 한 <다이나믹스Dynamix>처럼 엄지 플레이가 거의 불가능한 게임도 있다. <칼파KALPA>처럼 엄지 플레이 난이도와 다지 플레이 난이도를 이원화하는 선택을 하거나, 특정 레벨 이상부터 다지 플레이를 필수로 만드는 등의 절충안을 내놓은 경우도 존재한다. “모든 곡은 두 손가락으로 풀 콤보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중 ‘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하츠네미쿠’(이하 프로세카) 또한 이론상 엄지로만 플레이가 가능한 모바일 리듬 게임이었다. 주식회사 세가와 컬러풀 파레트, 크립톤 퓨처 미디어가 공동 개발한 프로세카는 보컬로이드 IP를 이용한 캐릭터 수집 요소를 결합해 만든 대표적인 모바일 리듬 게임 중 하나다. 이 리듬 게임이 호명된 이유는 이 게임이 더 이상 엄지로만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서버에서 개최된 창작 콘테스트 ‘초고난이도 프로세카 ULTIMATE’의 당선작 3곡이 게임 내 최고 레벨을 경신하는 37레벨로 수록되며 이 명제가 깨진 것이다. 이는 게임의 프로듀서인 콘도 유이치로의 “모든 곡은 두 손가락으로 풀 콤보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과거 발언을 번복하는 문제로써 이용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었다. 이에 게임사는 37레벨은 번외 레벨로 예외적인 경우이며, 이하의 레벨에서는 앞서 말한 원칙을 지키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사실 프로세카가 이론상으로 엄지로만 플레이가 가능했을 때에도 높은 난이도의 곡들은 거의 엄지로 플레이하기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프로세카에는 엄지만 사용하여 올 퍼펙트를 달성한 것이 확인되지 않은 곡이 다수 존재하며, 같은 난이도의 곡이라도 엄지로 플레이할 때 압도적으로 어려운 곡도 존재한다. 높은 난이도의 곡을 엄지로 플레이하는 이용자가 있더라도 그것은 극히 소수일 뿐이다. 그리고 가능과 불가능의 영역을 넘어, 여러 손가락으로 플레이하는 것은 엄지로만 플레이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런데 왜 ‘엄지러’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물론 여러 손가락을 사용하려면 태블릿과 같은 일정 크기 이상의 터치스크린을 눕혀야 한다는 제약이 존재한다. 하지만 높은 난이도의 곡을 시도할 정도로 열성적인 이용자가 단지 그것 때문에 엄지를 고수한다는 점은 이상하다. 더 이상한 점은 여러 손가락으로 플레이하는 이용자조차 37레벨 곡 업데이트에 대하여 ‘엄지 배려’를 하라고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다. 높은 난이도의 곡 플레이가 가능한 ‘엄지러’는 원래도 거의 없었는데,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이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는가? ‘엄지러’라는 전통 이 모든 반응은 ‘엄지 플레이’와 ‘다지 플레이’의 구분이 단순한 플레이 방식의 차이 그 이상을 함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이 구분이 단순한 플레이 방식의 차이였다면 엄지로 32레벨까지 클리어하고 막히면 33레벨부터는 다지로 플레이 해 클리어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용자들은 33레벨 ‘엄지’ 클리어와 33레벨 ‘다지’ 클리어를 다른 것으로 구분한다. 게임 내적 시스템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클리어하든 아무 구분 없이 표기되는 데도 말이다. 이용자들은 대신 게임 외적으로 엄지로 특정 레벨까지 클리어 한 사실을 자랑한다거나, 엄지로 특정 곡을 클리어 한 영상을 공유하며 그들만의 전통을 축적한다. ‘엄지러’를 기준으로 한 비공식 곡 난이도 표를 만들고, ‘다지러’가 엄지로 어디까지 플레이가 가능한지 도전하기도 한다. 이렇게 축적된 전통 위에서 ‘엄지러’의 높은 난이도 도전은 몇몇 이용자의 기행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런 모습은 플레이 방식의 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여러 직업이 있는 RPG 게임에서 상이한 난이도의 직업 루트를 선택하는 것과 더욱 유사해 보인다. 하나의 직업으로 최종 보스를 처치했다는 사실이 인정받으면서도 그것이 곧 다른 직업의 성취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다른 매체와 구분되는 게임의 특징을 논할 때 공통적으로 거론되는 점이 바로 게임과 이용자 간의 상호작용으로 생성되는 새로운 맥락과 이용자의 창조성이다. 이경혁3)은 게임 매체의 수용이 일종의 창조 행위라는 것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로 오락실의 <펌프 잇 업> 고수가 펼치는 두 발 외의 몸을 사용하는 펌프 퍼포먼스를 들었다. 이런 예시는 개별 이용자의 창조적 수용을 보여준다. ‘엄지러’의 전통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게임사를 포함한 모바일 리듬 게임이라는 장르의 구성원은 모두 이 암묵적인 장르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게임 외적으로 구축된 전통은 개별적인 창조적 행위가 아닌 인터페이스의 특징에서 촉발되어 장르의 구성원이 새롭게 창조한 ‘규범’에 가깝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앞선 프로세카 같은 리듬 게임은 특히 게임 내적 시스템의 영향으로 다른 모바일 리듬 게임보다 ‘엄지러’의 규범이 강하게 작용한다. 실제로 엄지 플레이를 염두에 두고 설계된 것뿐만 아니라, 대중성을 위해 양적 랭킹 시스템을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프로세카에는 일정 기간 동안의 플레이 횟수에 따른 양적 랭크인 이벤트 랭킹과 실력을 겨루는 질적 랭크인 랭크 매치가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양적으로 순위를 매길 때 더 유리한 플레이 방법은 당연히 엄지를 이용한 플레이다. 이러한 이원화는 엄지 플레이에 확실한 효용을 부여함으로써 엄지 플레이의 지위를 보장한다. ‘엄지러’를 선택하기 단순한 플레이 방식 이상의 ‘엄지러’ 전통을 고려했을 때, 프로듀서의 발언을 차치하고서라도 이론상 엄지로만 칠 수 없는 곡의 등장이 강한 논란을 불러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RPG 게임의 비유를 다시 가져오면,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지 여부와 별개로 하나의 직업 루트에만 번외 콘텐츠가 개방된 셈이니 말이다. 혹여 ‘다지러’로 전직하더라도, 모바일 리듬 게임을 하는 한 ‘엄지러’의 전통은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 다시 질문해보자. 리듬 게임의 ‘엄지러’는 바뀌어야만 하는가? 무의미한 질문이다. 바꾼다 해도 내가 선택해 키운 ‘엄지러’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1) 이경혁 (2023.04.05.), 플레이어의 숙련도가 머물렀던 곳은 어디였을까: 터치스크린 시대의 숙련도, <게임제너레이션>, URL: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152d8082-f4a1-486d-875d-a05088a28625 2) 강현구 (2019), 스마트폰을 위한 리듬게임 User Interface Design 연구, 석사학위,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3) 이경혁 (2019), <(놀이에서 디지털 게임까지) 게임의 이론>, 문화과학사.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대학원생) 손민정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현대문학과 문화를 공부 중입니다. 글과 함께한 만큼 게임과 늘 함께 해왔습니다. 별별 게임 다 합니다.
- [논문세미나] Time War: Paul Virilio and the Potential Educational Impacts of Real-Time Strategy Videogames
이번 논문 세미나는 하나의 사진과 함께 시작해 보려고 한다. 2011년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백악관 상황실에서 찍힌 이 사진에서 오바마를 비롯한 현장의 인물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시선을 한데 모으고 있다. 회의를 하면서 띄워둔 자료가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 심각한 문제 발언을 했던 걸까? 여러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사진은 사실 빈 라덴 급습 작전Operation Neptune Spear을 지켜보고 있는 현장을 포착한 것이다. 이들은 빈 라덴이 사살되기 전까지 작전이 진행되는 상황을 모두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 Back [논문세미나] Time War: Paul Virilio and the Potential Educational Impacts of Real-Time Strategy Videogames 18 GG Vol. 24. 6. 10. 들어가며 이번 논문 세미나는 하나의 사진과 함께 시작해 보려고 한다. 2011년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백악관 상황실에서 찍힌 이 사진에서 오바마를 비롯한 현장의 인물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시선을 한데 모으고 있다. 회의를 하면서 띄워둔 자료가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 심각한 문제 발언을 했던 걸까? 여러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사진은 사실 빈 라덴 급습 작전Operation Neptune Spear을 지켜보고 있는 현장을 포착한 것이다. 이들은 빈 라덴이 사살되기 전까지 작전이 진행되는 상황을 모두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이 사진이 보여주는 건 두 가지다. 첫째, 이제는 그 어떤 전투(또는 전쟁)든 원격으로 지켜보는 것이 가능하다. 둘째, 지금 내 눈앞에서 전투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그 존재는 우리 일상에 스며들어있다. 이제 전투는 우리 눈에 굳이 보이지 않아도 될 만큼 빨라지고, 또 효율적이 되었다. 그리고 일찍이 이에 관한 것을 이론화한 인물이 프랑스의 정치 이론가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다. 오늘 보게 될 데이비드 웨딩턴(David I. Waddington)의 논문은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Vitesse et Politique)> 및 <소멸의 미학(Esthetique de la disparition)>을 통해 실시간 전략 게임(Real-time strategy, 이하 RTS 게임)을 살핀다. 교육철학 연구자인 웨딩턴은 비릴리오의 이론을 RTS 게임과 아울러 보고, 해당 게임이 가진 교육적 가능성을 발굴해 내고자 한다. 비릴리오의 ‘속도’ 개념 비릴리오(Virilio, 2004)는 <속도와 정치>에서 정치 및 전쟁을 ‘속도’에 연관 지어 바라보았다. 그는 해당 저작을 통해 속도는 곧 시간과 같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런 비릴리오의 사유는 고대부터 1900년대까지 다양한 시대를 넘나들며 진행된다. 비릴리오 연구자인 존 아미티지(John Armitage)는 그의 사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본디 도시는 요새화된 형태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그 자체로 정치적인 공간이자 토대였다. 하지만 시대가 발전하면서 요새화된 도시는 점차 사라졌고, 비릴리오는 이 같은 변화에 집중했다. 그 안에서 비릴리오가 주요하게 보고자 한 것은 요새화된 도시가 사라지게 된 이유였다. 아미티지(Armitage, 2003)는 비릴리오가 쉽게 운반할 수 있고 가속화된 무기체계가 등장한 것을 원인으로 지목했다고 설명한다. 쉽게 운반할 수 있다는 건 운반 시간을 감소할 수 있다는 것이며 가속화된 무기체계가 등장했다는 건 이전보다 더욱 빠른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비릴리오가 정치와 전쟁을 속도와 연결 지어 보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다. 그래서 비릴리오가 볼 때 전쟁은 속도의 문제이며, 속도는 시간이나 마찬가지다. 즉 군사적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속도에 관한 요소들이 나타나면서 요새화된 도시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게 비릴리오의 주장이다. 이런 비릴리오의 의견은 맑스와는 대조적이다. “맑스가 유물론적인 역사 개념을 쓴 곳에서 비릴리오는 군사적 역사 개념”(Armitage, 2003, 10쪽)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논문의 연구자인 웨딩턴도 비릴리오의 속도 개념을 몇 가지 핵심 요소로 설명한다. 첫 번째는 에른스트 윙거(Ernst Jünger)에게서 따온 ‘총동원’이라는 용어다. 총동원은 전시 상황/비전시 상황을 가리지 않고 사회에서 활용되는 것들을 함축한 말이다. 이것은 경찰의 군사화, 신식민주의와 신자유주의, 감시의 증가 등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두 번째는 ‘병참’이다. 병참은 비전시 상황에도 사회의 에너지를 군대에 모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병참은 총동원이 보이는 형태들과 연결되며, 세 번째 요소인 ‘공간의 붕괴’로도 통한다. 과거에는 좋은 지형(공간)을 선점하고, 그 지형을 감시와 위협에 활용하는 것이 전쟁에서 유리해지는 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쟁은 그 성격이 바뀌었다. 컴퓨터와 드론, 미사일, 핵무기가 공간의 의미를 잃게 만든 것이다. 이제 공간을 선점하는 것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끄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 전쟁을 벌이던 공간은 붕괴하였으며, 유리함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활용해야만 한다. 네 번째 요소는 ‘사라짐’이다. 그동안 전쟁의 이미지는 탱크, 전투기 등으로 대표되었지만, 오늘날의 전쟁에서 탱크와 전투기는 이전만큼 보이지 않는다. 사실 탱크와 전투기의 사라짐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일련의 단계가 존재한다. 지금은 위장하기 용이한 색과 무늬를 띠고 있으나, 이전의 군복은 눈에 띄는 밝은 색상이었다. 이런 군복은 점점 사라져,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그럼, 거기서 끝일까? 아니다. 위장된 군복을 입은 군인은 탱크와 전투기 속으로 사라졌다. 맨몸으로 치고받으며 행해지던 전투는 차체와 기체를 이용하여 행해졌다. 그리고 이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보이지 않게 된’ 전쟁은 최종적으로 사회 구조에서도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전쟁은 일상 어디서든 함께하고 있다. 이렇게 비릴리오의 이론을 정리한 웨딩턴은 그러한 관점을 토대로 RTS 게임을 바라본다. 그는 총동원, 병참, 공간의 붕괴를 발견할 수 있는 일상적인 장소 중 하나로 게임, 그중에서도 RTS 게임을 지목한다. 속도: 게임의 이름 이 연구는 RTS 게임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실 웨딩턴은 FPS 게임과 MMORPG 게임 또한 비릴리오의 이론에 적합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웨딩턴이 RTS 게임만을 본 건, 해당 게임이 총동원과 병참, 공간의 붕괴, 시간이 중요해진 전쟁을 제대로 이미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웨딩턴은 <스타크래프트(StarCraft)>를 예로 들어 RTS 게임의 작업 단계를 설명한다. 첫 번째는 자원 채집이다. <스타크래프트>의 자원이라면 광물과 가스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실시간 전투 여부에 상관없이 꾸준히 축적해야 하는 것이다. 자원을 채집하기 위해서는 유닛의 쓰임새를 구분할 줄 알고, 자원 채집 장소를 탐색하는 등 여러 관리가 필요하다. 이 자원채집은 ‘총동원’에 해당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총동원이 떠오르는 작업이 있다면 ‘병참’에 걸맞은 작업도 있기 마련이다. 바로 건물 건설과 군사 유닛 생성이다. <스타크래프트>에서는 유닛을 생성하고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건물을 건설해야만 한다. 건물은 곧 강력한 유닛 생성과 연관되며, 이는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승리를 위한 밑 작업인 건물 건설과 유닛 생성은 총동원 격인 자원채집과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병참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공간의 붕괴’로 대표되는 건 본거지를 방어하면서 적군을 제거하고, 적의 기지까지 파괴하는 행위이다. 특히나 강력한 군사 유닛은 혼자서도 밝혀지지 않은 맵을 탐험하고 적 기지를 감시하며, 원거리 급습을 효과적으로 이뤄낼 수 있게 한다. 테란의 유닛인 고스트로 적 기지를 조사하고 핵탄두를 떨어트리는 게 이에 해당할 것이다. ‘실시간 전략 게임’이라는 그 의미처럼 RTS 게임은 속도가 중요한 환경에서 펼쳐진다. 일꾼 유닛과 군사 유닛을 신속하게 배치하고 생산과 탐사를 효율적으로 할수록 승리 확률이 높아진다. 플레이어는 재빠르게 마우스를 움직여, 속도에 따라 모든 것을 통제해야만 한다. 이러한 이유로 웨딩턴은 RTS 게임이 시간을 활용한 전쟁 게임이라고 본다. 학습과 RTS 게임: 긍정적인 관점 앞서 이야기했듯이 웨딩턴은 교육학 연구자이다. 그래서인지 웨딩턴은 이번 장에서 비릴리오의 개념을 잠시 내려두고, 다른 연구를 인용하며 RTS 게임이 가지는 학습 효과를 살핀다. 먼저 웨딩턴이 인용한 지(Gee, 2003)의 글은 RTS 게임을 하면서 느낀 압박감을 서술하고 있다. 지는 RTS 게임에 미숙하여, 게임이 요구하는 것보다 느린 속도를 가진 플레이어였다. 이런 지는 <라이즈 오브 네이션스(Rise of Nations)>를 통해 게임을 학습하는 방식에 대해 풀어낸다. 이를테면 지는 게임 내 일시 정지 버튼에 관심을 보였다. 일시 정지 버튼은 빠르게 진행되는 게임을 잠시 멈추게 하여, 플레이어가 화면 내 기능들을 살피고 전략을 생각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 외에도 해당 게임에는 조작 숙달을 돕는 각종 테스트가 존재했다. 지는 그를 통해 일종의 단련을 할 수 있었다. 일시 정지와 테스트로 나타나는 시스템의 배려는 게이머가 언제든 전투에 참여할 수 있게 대비시켜 준다. 웨딩턴이 지의 이야기를 끌어온 건 느린 속도의 게이머가 ‘실시간’으로 넘어갈 수 있게끔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위해서다. 그러면 웨딩턴이 이 주장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그 후에 인용된 블레어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블레어(Blair, 2013)는 <스타크래프트 2(StarCraft 2)>를 비롯한 RTS 게임의 플레이어 주도적인 통제 환경이 실생활 업무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사실 여기에는 다양한 반박이 가능하다. 한 분야에서 획득한 전문성을 곧장 다른 영역에 적용하기 어렵다는(Thorndike & Woodsworth, 1901) 의견을 이 반박에 포함할 수 있겠다. 하지만 웨딩턴은 그를 인지하면서도, 블레어의 말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에 더 주목하였다. 학습에 활용될 수 있는 RTS 게임의 가능성을 보려고 한 것이다. 학습 속도: RTS 게임과 경험의 아치 지와 블레어 두 사람은 RTS 게임에서 획득할 수 있는 학습 효과를 서술하였다. 지의 경우에는 게임이 어떻게 플레이어를 그 안으로 이끌 수 있을지 말하고, 블레어는 게임으로 습득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해 얘기한다. 이에 웨딩턴은 그들의 주장에서 도출해 낸 생각을 밝힌다. 하나는 게임을 속도와 효율성을 단련하는 훈련으로 본 자신과 저들의 이야기가 일치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게임에서 학습되는 요소가 눈에 띄는 만큼, 그 안의 문제성도 관심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웨딩턴은 특히 후자를 유의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게임을 통한 학습이 가지는 문제점은 너무나도 전형적이고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훈련 시킨다는 데에 있다. 이 사고방식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활용 가능한 것으로만 보는 시선(Heidegger, 1977: Ellul, 1964: Dreyfus, 2002: Borgmann, 1984, 1992 재인용)을 의미한다. 이런 부분에서 웨딩턴이 전유하는 속도 개념은 RTS 게임을 비롯하여 여타 게임으로 학습할 수 있는 요소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게임 경험은 우리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나쁜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 사회에 좋은 방향으로 성장했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개인의 시선이 무미건조해지지는 않겠는가? 교육학자인 듀이(Dewey, 1938)는 “모든 경험은 이전에 있었던 경험으로부터 무언가를 흡수하는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이후에 오는 경험의 질을 수정”(12쪽)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모든 경험은 아치’와 같다는 시를 인용하여, 경험에 차별을 둘 근거는 없다고도 이야기했다. 이번 장 제목 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 듀이의 글은 RTS 게임 경험과 학습에 대한 웨딩턴의 생각을 어느 정도 대변하는 듯하다. 주요 이의 제기 경험을 아치에 빗댄 듀이의 글은 사실 게임 내 폭력적인 경험이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 웨딩턴은 게임에서 행해지는 폭력적인 행위가 단순 놀이로만 해석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시카트(Sicart, 2009)의 주장은 게임의 폭력성에 주목하는 주류 의견에 반대된다. 시카트는 플레이어가 즉각적인 입력과 출력을 따르므로 그러한 행동이 나온다고 말한다. 이때 즉각적인 입력과 출력은 몬스터를 죽이고 골드를 얻는 것과 같은 행위를 뜻한다. 이런 시카트는 플레이어 개인의 가치와 판단 능력이 게임 시스템과 결합하여 새로운 해석을 낳을 수 있다고 본다. 시카트의 주장은 <맨헌트(Manhunt)> 분석을 통해 심화한다. <맨헌트>는 사람을 쇠지레로 때려죽이거나 비닐봉지로 목 졸라 죽이는 등 실제 살인이 연상되는 잔인함으로 유명한 게임이다. <맨헌트>는 내용상 무조건 살인을 저질러야만 하는데, 시카트는 이렇게 강제된 상황이 오히려 윤리에 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준다고 설명한다. 웨딩턴은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그런 반성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표하지만, 시카트의 지적 자체는 옳다고 말한다. 게이머가 게임을 하면서 벌이는 행동과 게임 자체에 대한 평가는 분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웨딩턴은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RTS 게임에서 속도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 가상의 폭력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보다, 가상의 속도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 예를 들면 <맨헌트>에서 가상의 살인을 저질러도 현실의 내가 살인자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게임 도중 재빠른 판단을 내리는 이는 이후에도 판단력 좋은 사람으로 인식된다. 한 마디로 게임을 하면서 나타난 속도는 현실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둘째, RTS 게이머는 플레이 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속도와 효율을 꼽는다. <스타크래프트> 플레이어가 자신의 속도를 높이는 것에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한다는 연구 결과(Kow and Young, 2013: Yan, Huang, & Cheung, 2015 재인용)를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만큼 속도는 RTS 게임 한 판 한 판을 책임지는 필수 요소다. 웨딩턴의 서술 흐름이 시카트에서 속도 개념으로 흐르게 된 것은 게임과 속도에 관련된 담론이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반영된 게 크다. 웨딩턴이 보는 RTS 게임은 모든 것을 자원으로 보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효율성에 관해 학습할 수 있는 장소다. 또한 전쟁이 일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 전쟁 체험의 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게임을 속도와 연결해 바라보는 시도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웨딩턴은 게임이 실제 폭력성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것처럼 속도에 관한 것도 주시해 보기를 제언한다. 나가며 웨딩턴이 속도 개념을 이용해 궁극적으로 역설하고자 한 건 게임을 통해 효율적인 학습, 내지는 훈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웨딩턴의 주장은 자칫 효율 중심적인 사고로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존재한다. 이는 웨딩턴 그 자신 또한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더군다나 비릴리오의 속도 이론은 웨딩턴이 전개한 것과는 달리, 비판적인 입장에서 작성된 것이었다. 물론 비릴리오가 기술의 긍정적인 부분을 완전히 배제한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의 글에 기술에 대한 경계가 서려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웨딩턴의 주장은 교육학 연구자라는 그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지만, 비릴리오의 속도가 왜곡되게 이해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움이 남는다. 그래도 웨딩턴의 이야기 자체에만 집중해 보자면, 효율성이 게임의 인상에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낙관적인 생각도 든다. 게임을 통해 학습 효과를 증진시키고,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그건 그 자체로 상당한 이점이다. 즉 그동안 지배적이었던 폭력성이나 중독에 관한 담론을 탈피할 가능성도 생긴다는 소리다. 그러나 몇 가지 질문도 함께 남는다. 게임은 오직 효율성을 입증해야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가? 게임에서 효율성과 학습을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최근 게임을 이용한 교육이 조명받기 시작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할까? 이는 앞으로의 게임과 우리의 인식에 남겨진 숙제가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 Armitage, J. (2003). 폴 비릴리오의 정치 이론-<속도와 정치>를 중심으로 (서문), <속도와 정치> (7-42쪽). 이재원 (역) 서울: 도서출판 그린비 Blair, M. (2013). Real-time strategy video games; a new ‘drosophila’ for the cognitive sciences. [Online video]. Retrieved from https://www.sfu.ca/cognitive-science/defining-cognitive-scienceseries/dcs-archive/2013/spring/blair-rts-games-expertise.html (현재 이용 불가) Borgmann, A. (1984). Technology and the character of contemporary life. Illinoi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Dewey, J. (1938). Experience and education, Free Press. Gee, J. P. (2003a). What video games have to teach us about learning and literacy. London: Palgrave-MacMillan. Gee, J. P. (2003b). Learning about learning from a video game: Rise of nations. Wisconsin: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Sicart, M. (2009). The ethics of computer games. Massachusetts: MIT Press. Thorndike, E. L., & Woodsworth, R. S. (1901). The influence of improvement in one mental function upon the efficiency of other functions. Psychological Review, 8(6), 247-261. Virilio, P. (1977). Vitesse et Politique. 이재원 (역) (2004). <속도와 정치>. 서울: 도서출판 그린비. Yan, E. Q., Huang, J., & Cheung, G. K. (2015). Masters of control: Behavioral patterns of simultaneous unit group manipulation in StarCraft 2. Paper presented at the Proceedings of the ACM CHI Conference on Human Factors in Computing Systems, Seoul. Tags: 비릴리오, 가속, 속도의정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다흰 융합예술과 문화연구를 공부했습니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관해 관심 갖고 있습니다.
- [인터뷰] e스포츠의 현장감은 어디서 오는가: 라이엇게임즈 함영승 PD
그런데 따지고 보면 뭔가 이상하다. ‘현장 중계를 가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말은,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 경기를 보는 것이 아쉽다는 의미인데, 게임의 배경은 이미 온라인 세계가 아니던가? 그러면 e스포츠에서 현장감은 무엇을 의미할까? 팬들이 경기장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소환사의 협곡’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인데, 대체 팬들은 어떠한 지점에서 현장감을 느끼는 것일까? 전통적인 스포츠에서 이야기하는 현장감과 e스포츠의 현장감은 그 성질이 다를까? 이러한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이번 호에서는 MBC에서 전통 스포츠를 중계하다가 지금은 LCK 중계를 하고 있는 라이엇게임즈의 함영승 PD를 만나고 왔다. < Back [인터뷰] e스포츠의 현장감은 어디서 오는가: 라이엇게임즈 함영승 PD 08 GG Vol. 22. 10. 10. 직관의 묘미. 전통적인 스포츠에서는 이를 현장감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오늘날에는 통신 기술이 발달해서 누구나 집에서도 스포츠 경기를 시청할 수 있지만, 현장이 아니고서는 경기장의 열기와 습도, 환호와 희열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실제로 야구나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다가 경기장을 가보고 팬이 되었다는 사례도 많다. 이러한 맥락에서 e스포츠에서도 코로나 19로 현장 중계를 할 수 없었던 기간에 많은 팬들이 경기장을 그리워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뭔가 이상하다. ‘현장 중계를 가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말은,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 경기를 보는 것이 아쉽다는 의미인데, 게임의 배경은 이미 온라인 세계가 아니던가? 그러면 e스포츠에서 현장감은 무엇을 의미할까? 팬들이 경기장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소환사의 협곡’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인데, 대체 팬들은 어떠한 지점에서 현장감을 느끼는 것일까? 전통적인 스포츠에서 이야기하는 현장감과 e스포츠의 현장감은 그 성질이 다를까? 이러한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이번 호에서는 MBC에서 전통 스포츠를 중계하다가 지금은 LCK 중계를 하고 있는 라이엇게임즈의 함영승 PD를 만나고 왔다. 편집장: 먼저 간단한 소개와 짧게나마 걸어오신 행보를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함영승 PD: 네. 저는 라이엇 게임즈에서 방송 총괄을 맡고있는 함영승이라고 합니다. 4년 반 전에는 MBC에 있었고, 스포츠국에서 다양한 종목의 중계와 콘텐츠를 제작했었습니다. 편집장: MBC 스포츠국에 계셨으면 다양한 종목들을 다루셨을 것 같은데, 스포츠 PD 시절에 중계하셨던 것 중에 어떤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으시나요? 함영승 PD: 인천 아시안게임 농구 제작을 담당했었는데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이후 처음으로 남자 농구 대표팀이 금메달을 따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진행했던 평창 올림픽도 기억에 남고요.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비인기 종목인 모터스포츠 중계를 했던 경험도 기억이 많이 납니다. 일반 시청자분들이 잘 모르는 종목이다보니 스토리 라인을 살려주고 싶어서 다큐, 예능과 같은 사이드 콘텐츠도 만들고 기술적으로도 국내 최초로 차량 내부에 설치한 카메라를 생중계로 보여주며 다양한 재미를 드리고자 노력했었어요. 편집장: 스포츠 PD를 하다가 게임 쪽으로 넘어오셨는데, e스포츠를 중계하시면서 ‘기존의 스포츠와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좀 더 특별하다.’ 이런 점이 있으신가요? 함영승 PD: 일단 (e스포츠는) 한국에 있는 그 어떤 방송보다도 실시간 피드백이 매서운 그런 장르입니다. 이 지점에서 분명한 장점이 있어요. 그러니까 저희가 ‘시청자들이 원하는 어떤 부분을 놓쳤구나’라는 것을 아주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겠죠. 다만, 그 노력이 즉각적으로 반영돼서 고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렇지 않은 것도 꽤 있어요. 예를 들어서 한 번 만든 타이틀이 너무 별로라는 평을 받아도, 그 타이틀을 다시 찍을 수는 없는 거죠. 선수단과의 약속이 있으니까요. 저희는 1년에 타이틀 찍는 날이 딱 정해져 있는 수준이에요. 그래서 처음에 만들었던 방향성이 틀렸다는 거를 깨달아도, 적어도 한 시즌은 지나야하는 아쉬움이 있을 때가 있고요. 마찬가지로 그래픽 같은 경우도 처음에는 되게 많은 비판을 받았어요. 예를 들면 “보라색투성이다”는 비판이 있었죠. '잘못됐다면 다음 시즌에라도 보강하자' 이런 마음가짐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바로 고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즉각적으로 반영하려 노력하고 있고요. 그런 부분이 기존 스포츠 방송 대비 차이점으로 와닿았었습니다. 편집장: 그런데 야구도 보면 시청자 문자 참여가 있지 않나요? 야구 중계하실 때 받으셨던 피드백과는 차이가 있나요? 함영승 PD: 제가 주말에 MBC에서 메이저리그를 정규 방송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가 언제였냐면, 류현진뿐만 아니라 추신수, 박병호, 김현수, 오승환, 강정호 이렇게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이 대거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해였어요. 당시에는 그 선수들을 동시에 중계했거든요. 왜냐하면 시청자분들 중에서 1회부터 9회까지 즐기는 코어(core)한 야구 팬들도 계시지만, 한국 선수 플레이만 보고 싶은 팬들도 물론 계시거든요. 하지만 채널 숫자의 한계상 모든 한국 선수의 플레이를 동시에 보여드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실험적으로 모든 한국선수들이 뛰고 있는 경기의 피드를 다 받아서 마치 올림픽 중계처럼 우리 선수가 타석에 서거나 투구를 할 때 마다 옮겨가며 중계를 했습니다. 심지어 그때 박병호 선수가 마이너리그에 내려갔었거든요. 그래서 마이너리그 피드를 인터넷으로 따가지고 그것까지도 보여줬어요. 실시간으로. 그러면서 그때 어떤 걸 동시에 했냐면, 그 당시에 MBC에서 유행했던 프로 중의 하나가 마리텔이었어요. 그러니까 저희가 실시간 댓글 서비스까지 같이 넣은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이런 반응이 보이죠. 근데 그때는(전통 스포츠에서는) 보통 응원이 많아요. 선수에 포커스가 되어있죠. 그런 응원이 있는데, 여기는 응원 못지않게 다른 피드백도 많거든요. 이것도 어떻게 보면 큰 특징 중 하나인데, 야구나 축구, 농구는 그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그런데 리그오브레전드(이하 LoL)는 기업이 만들어낸 종목이라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 버그가 있다고 해보죠. 또는 버그가 아니어도 어떤 챔피언이 OP(Overpowered)이면 라이엇을 욕하게 되죠. 그런데 저희는 단순히 방송 생산자가 아니라, 라이엇의 구성원이다 보니까. 일단 게임 욕을 해도, 라코(라이엇 코리아)가 욕을 먹고, 방송하다 심판 판정에 이슈가 생겨도 라코가 욕을 먹고, 저희가 잘못을 해도 당연히 라코가 욕을 먹고, 그 모든 게 하나가 되어서 돌아오다 보니까 그런 지점들이 복합적으로 와 닿는 게 있습니다. 다만, 그래서 더 능동적으로 고민하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물론 시청자분들께 실망감을 드리는 부분들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편 방송국처럼 거대한 인프라를 갖고 있는 방송사들도 개국하고 몇 년 간은 크고 작은 방송 사고가 꽤 있었지만 현재 자리를 잡았듯이 저희도 시청자분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내부적으로도 꾸준히 인력 및 인프라를 늘려가며 성장해가고 있으니 앞으로도 많은 질타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장: e스포츠의 현장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은데, 여기는 이제 스타디움이 있는 공간이지만 경기는 온라인상에서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현장을 중계하는 PD님의 입장에서 e스포츠의 현장 무대를 다른 스포츠의 현장과 비교한다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요? 함영승 PD: 일단 같은 점은 관객분들이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흥분감이 있어요. 열기나 이런 특유의 현장감이 분명히 존재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경기가 펼쳐지는 무대 자체는 온라인상에 있지만, (그럼에도) 실제로 실존하는 선수들은 눈앞에 있잖아요. 그리고 저희 경기장이 부스가 아니라 오픈 무대잖아요. 그래서 선수들의 육성이 막 들려요. 막 ‘빨리 어디 가자’, ‘뭐 하자’ 이런 다급한 목소리도 들리기 때문에 현장감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서 차이점은, 어떻게 보면 e스포츠의 되게 큰 특징인데, 캐스터, 해설가의 육성이 현장에 울려 퍼진다는 거죠. 야구장이나 축구장 가보시면 팬들의 웅성거림과 응원 소리, 응원가 이런 것들이 가득한 게 현장감을 주죠. 대신 거기에는 캐스터, 해설가가 없어요. 소거돼 있어요. 그거(해설가의 목소리)는 오직 방송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죠. 그러니까 기존 스포츠는 굉장히 오프라인적 이벤트이지만, 완성체로 만들어지는 것은 온라인인 거예요. 반대로 e스포츠 현장에서는, 경기 자체는 온라인에서 진행되는 것 같지만, 어쨌든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크게 보이고 거기에 캐스터, 해설가의 보이스까지 더해져요. 그래서 현장 관람객 입장에서는 오히려 e스포츠가 더 박진감 넘치게 느낄 수도 있어요. 그리고 현장감을 더 가미시켜주기 위한 장치들로 저희 같은 경우는 원소용을 잡으면 해당 원소의 조명으로 바뀐다거나, 바론을 잡으면 바론 조명으로 바뀐다거나 이런 방법들을 쓰고 있거든요. 결과적으로 저는 캐스터와 해설가가 e스포츠 현장감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해요. 제 개인적 견해로는 중계진분들은 장내 흥을 띄우는 역할까지 해오셨다고 봅니다. 축구나 야구, 농구 어느 종목과 비교해도 우리 중계진처럼 높은 텐션을 유지하며 중계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해요. 솔로킬, 한타 순간순간마다 역전 홈런 수준의 텐션을 뿜어내시거든요. 장내 분위기를 고조시켜야하는 장내 아나운서의 역할까지 같이 하고 계신 거라고 봅니다. 편집장: e스포츠가 가지는 현장감의 특징으로 캐스터와 해설가의 목소리를 언급해주셨는데요. 그러면 이런 상상이 듭니다. 선수가 굳이 무대에 서지 않고, 캐스팅만 하면 어떨까요? 관객들이 현장감을 느낄 수 있을까요? 함영승 PD: 일단 먼저 말씀드릴 것은, 이미 그런 문화가 저희 안에서는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에요. 아시겠지만 CGV 상영이 그런 건데요. 이번 결승 같은 경우에는 전국 CGV 상영관에서 예매율이 90% 이상 되어서, 거의 한 8천 명이 결승을 CGV에서 보셨어요. 편집장: 저도 그 현장을 보고 싶어서 갔는데 너무 놀랐어요. 함영승 PD: 진짜 생각보다 엄청 많은 분들이 그렇게 즐겨주고 계세요. (CGV에서) 선수는 없었어요. 선수는 없지만, 대형 스크린이 주는 느낌, 사운드, 어떤 장면이 나왔을 때 함께 환호할 수 있는 유대감 이런 것들을 이미 즐기고 계신 것 같아요. 뷰잉 파티(viewing party)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하는 다른 종목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얼마 전에 플레이오프 기간에는 경기장 안에 못 들어가신 팬들도 꽤 많았어요. 근데 매진이 됐는데도 여기에(롤파크) 오세요. 롤파크라는 공간이 그런 문화를 제공하는 거죠. LoL을 좋아하고 LCK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와서 즐길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이 만들어져 있잖아요. 그래서 표를 못 구해서도 오신 거예요. 함성이 안에서 막 새어 나오죠. 그때 저희가 롤파크 입장공간 쪽에도 경기를 틀어놓거든요. 그날 상당히 많은 분이 경기장 바깥 공간에 함께 모여 보시면서 응원을 하시는 모습에서 놀랐습니다. 편집장: 그런 지점들은 직관 스포츠와 방송 콘텐츠 사이의 새로운 점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데요. 스포츠펍에서 프리미어리그를 다 같이 본다던가 그런 것과 유사한 걸까요? 함영승 PD: 월드컵 거리 응원이랑 동일한 거긴 합니다. 같이 보는 게 더 재밌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LoL이 더 잘 성장하면, ‘언젠가는 롤드컵 결승으로도 광화문 거리 응원이 가능한 시대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제가 LCS 결승 중계 현장을 갔다가 되게 인상적이었던 게, 결승을 미식 축구장에서 했어요. 휴스턴에 있는 대형 미식 축구장 NRG 스타디움에서 했는데, 경기장이 개폐식 돔이라서 닫고 반으로 가르더라구요. 반을 갈라서 한쪽에서는 저희가 이번에 강릉에서 했던 일종의 팬페스타(Fan Festa) 같은 걸 하는 거예요. 안에 스폰서존도 만들고 각종 이벤트도 하고 그러는데, 개폐식 돔이고 반을 막으니 얼마나 깜깜하겠어요. 거기서 사람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문화를 향유하는 거죠. 아시다시피 LoL을 만들어서 서비스하고, e스포츠를 하고, 아케인을 만들고 하는 이 모든 행위가, ‘게임으로 오프라인에서도 유저분들께 유의미한 경험을 제공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이 현장에 갔을 때 강하게 느껴졌어요. 거기 오신 분들은 어떤 팀을 응원하고 거기에서 다양한 즐길 거리들을 체험하면서 더 깊이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문화에 대한 동질감, 연대감 이런 걸 갖고 돌아가시는 거죠. 그래서 저희도 이번에 ‘1박 2일간 팬페스타의 형태로 행사를 진행해보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가 나왔고요. 물론, 기획을 하면서는 팬페스타 담당자 두 분이 ‘우리 둘만 손잡고 이 넓은 경기장에 서 있는 거 아닐까’하는 악몽을 꾸실 정도로 압박감이 있었는데, 실제로는 거의 7천 명 정도의 관객분들이 오셨어요. 이런 문화 행사, 축제 현장을 만들 수 있었다는 점이 저희에게도 큰 의미였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접점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온라인 콘텐츠임에도 현장을 통해 유대감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편집장: 사실 e스포츠라고 표현은 하지만, 결승전은 일종의 피날레로서 반드시 오프라인으로 진행을 해야 하는 문화가 있죠. 그건 말씀하신 것처럼 몇만 명에 달하는 팬들이 와서 함께 함성을 지르고, 열광하면서 만들어지는 동질감과 유대감 때문일 것 같은데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아무리 온라인 시대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온라인이 미처 채우지 못하는 뭔가가 있지 않나는 생각도 드네요. 그러면 e스포츠의 현장감을 이야기할 때, 말씀해주신 부분들이 첫 번째는 아나운서의 캐스팅이었고, 두 번째는 오프라인에서 팬들이 가지는 유대감이라고 한다면 다른 요인은 없을까요? 함영승 PD: 선수들과의 상호작용이요. 저희가 공교롭게도 코로나가 터지면서 온라인 중계를 좀 했었어요. 그런데 온라인 중계를 진행하는 동안에 오프라인에 대한 갈증을 느꼈던 게 비단 저희나 팬분들만은 아니었어요. 선수들도 느꼈어요. 선수들도 ‘롤파크 와서 경기하고 싶다.’, ‘관중들이 있는 곳에서 게임하고 싶다.’, ‘관중들의 그 열기를 느끼고 싶다.’ 선수들도 똑같은 얘기를 했어요. 그런 게 뭐 때문이냐면, 관객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진짜 멋진 플레이가 나왔을 때 순간적으로 환호성이 확 터지잖아요. 그런 걸 선수들도 느끼는 거예요. 그 울림이 느껴지는 거죠. 그때 선수들도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거예요. 특히 발로란트 같은 FPS 장르는 그런 지점에서 매력이 있는 게, 라운드가 명확하잖아요? 그러면 킬을 냈을 때 바로 함성이 빵빵 터져요. 멋진 플레이가 나오면. 그럴 때 선수들의 액션도 다른 게임에 비해 되게 크더라고요. 그런 것이 현장에 챈트(chant)를 유도해요. 편집장: 그러니까 선수의 플레이가 관객의 챈트 같은 새로운 인터렉션을 만들고, 거기에 또 선수가 반응을 하는. 그게 현장성이네요. 그것도 굉장히 핵심적인 지점이군요. 함영승 PD: 네. 선수들이 경기장 안에 들어왔을 때 관객의 함성이 주는 웅장함, 그건 저도 많이 느껴봤어요. 저는 팬으로서도 많은 경기장을 다녀봤는데요. 텅 빈 데 가면 선수의 목소리가 다 들려요. 그런데 선수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도 긴장감이 별로 없어요. 반면에 관중이 꽉 들어찬 데서 울려 퍼지는 함성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있거든요. 그게 스포츠를 보는 재미를 한껏 배가시켜주는 거죠. 그러니까 그냥 선수들과 관중이 함께 한다는 것이 아니라, 관중들과 선수의 상호작용이 현장감을 만드는 것 같아요. 코로나 시기에 팬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서 “하나, 둘, 셋, OO 파이팅!” 이게 그리운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어떻게 했냐면, 경기 시작 전에 직원들이랑 관계사, 외주사 직원까지 롤파크에 다 모여서 오디오 녹음을 한 적이 있어요. “하나, 둘, 셋, OO 파이팅!”, “하나, 둘, 셋, OO 파이팅!”. 그리고 결승전 앞두고 그걸 틀어본 적이 있었어요. 팬들이 오글거린다고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중에는 ‘저거 그립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결국은 많은 관객들이 주는 전율 같은 걸 느끼고 싶은 거고, 내가 좋아하는 이 문화에 대한 연대감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선수들이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앞에 와서 인사를 하고, 끝나고 나서 팬 미팅을 하고 이런 접점이 있죠. 마치 아이돌 팬 미팅이랑 비슷한 형태의 문화가 있거든요. 전통 스포츠는 경기 끝나고 선수들 퇴장 동선에 서 있다가 사인을 받거나 사진을 찍는 경우는 있지만 매 경기 직후에 팬 미팅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제가 보기에 e스포츠만의 독특한 문화 같아요. 편집장: 상호작용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그 지점에서는 특히나 퍼즈(pause) 걸린 상황도 핵심적일 것 같네요. 다른 스포츠의 경우에는 오류가 나거나 우천 취소가 나거나 했을 때, 그냥 대기 상태로 오히려 현장감이 식는 분위기인데, LCK 중계에서 퍼즈는 본격적으로 캐스터와 팬들이 소통하고 상호작용이 가시화되는 게 아닐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함영승 PD: 일단 퍼즈 상황이 없어야 하는데 이번 시즌 게임 이슈 등으로 특히 자주 발생해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퍼즈 시 상호작용 같은 경우는 중계진 분들의 노고가 담겨있는데 아무래도 실시간으로 시청자 반응을 모니터링한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 덕분에 좀 더 시청자들이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지 파악을 할 수 있죠. 그리고 성캐(성승헌 캐스터)님이나 해설자분들도 ‘어떻게 보면 부정적일 수 있는 분위기를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계세요. 이런 지점이 캐스터님이나 해설자분들께 부담이 되기도 하죠. 그래도 실시간 댓글 반응을 알 수 있고, 많은 분들이 노력해주시는 덕분에 그 시간을 치어플(응원 메시지)이나 영상 등으로 소통하면서 대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편집장: 현장성이라는 게 참 정의하기는 어려운데,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힌트가 곳곳에 많은 것 같습니다. 이제 그러면 결론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e스포츠를 현장에서 만드시는 입장에서, 관객이 꽉 차고 시끌벅적했던 경기가 끝나고 빈 경기장을 보시면 집에 가기 전에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함영승 PD: 코로나 시기에 선수들도 숙소, 관중들은 무관중 저희만 이 현장을 지켰어요. 그러면 그 텅 빈 경기장에서 주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때는 저희가 항상 출퇴근할 때마다 약간 우울한 마음을 살짝 갖고 있었거든요. 이 텅 빈 극장을 지키는 관리인 같은 느낌이었어요. 경기가 끝나고 난 다음에도 딱 그런 느낌이에요. 연극 공연이 끝난 뒤에 텅 빈 무대를 보는 느낌. 그러니까 관중들이 오시면, 극장에 손님들이 와서 영화 보기 전에 팝콘 사고 기다리면서 설레는 그런 현장. 그거를 보면 그 에너지가 여기 있는 제작진들한테도 느껴지고, 선수들한테도 전달되는 것 같아요. 경기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은 팬 미팅이 있고, 웅성웅성하지만, 그분들 다 떠나고 나면 3층 롤파크는 무섭습니다. (웃음) 상당히 어둡고 그 생명력이 싹 빠져나간 공간이 돼서 그런 느낌을 받아요. *시즌이 끝나서 텅 빈 롤파크. 함영승 PD의 말처럼 어둡고 외로운 느낌이 든다. 편집장: 그러면 마지막으로 아주 선택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 PD님은 방송 제작자이신가요? e스포츠 운영자이신가요? 방송 제작과 현장성이라는 두 영역 모두 걸쳐 있으신 것 같은데요. 함영승 PD: 저는 하는 역할이 그래도 아직은 방송 제작자에 가깝죠. 편집장: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감상들을 굉장히 많이 이야기해주셨잖아요? 스포츠 중계 때랑은 좀 다른 현장성인 거죠. 함영승 PD: 그게 어떻게 보면 제가 이쪽으로 옮기게 된 가장 큰 계기이기도 한데요. 저희가 경기장을 갖고 있는 거잖아요. 그 차이가 큰 겁니다. 그러니까 경기장을 갖고, 경기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면서 방송을 하고 있는 거죠. 기존에는 전국에 있는 모든 경기장에 중계차를 갖다 대고 중계를 해도, 저희 경기장이 아니었어요. 그저 차려져 있는 경기장에 카메라를 대고 담아오는 거예요. 근데 여기는 밥상 자체를 차려야 해요. 그리고 차린 것을 관객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게끔 고민하고, 이를 위해서 이벤트 팀이나 리그 운영이나 사업팀 모두의 행위들이 종합되어서 현장을 만들어내는 거죠. 그래서 저희는 KBO이자, 스포츠방송 제작사이자, 잠실 야구장이에요. 이 3개가 결합되어 있는 구조인 거죠.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제가 이쪽으로 옮기게 된 것이에요. 편집장: 현장에서 고민하는 방송 제작자의 길을 걷고 계시는군요.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논문세미나] “Sexuality does not belong to the game” - Discourses in Overwatch Community and the Privilege of Belonging
한때 전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AAA급 게임 〈오버워치(OVERWATCH)〉. 〈오버워치〉는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 내 다양한 논쟁이 오갔던 2010년대 후반을 상징하는 게임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 인기를 입증하듯, 〈오버워치〉에는 늘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쏟아져나왔고 이를 통해 드러난 현상과 논의들이 논문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기를 풍미한 〈오버워치〉는 작년 10월, 서비스를 종료해 후속작인 〈오버워치 2(OVERWATCH 2)〉로 재탄생했다. 이 글은 Triple A!라는 주제를 맞아, 2010년대 후반을 대표한 AAA급 게임 〈오버워치〉에 관한 한 논문을 다루고자 한다. 바로 오버워치 속 ‘퀴어’를 다룬 논문이다. < Back [논문세미나] “Sexuality does not belong to the game” - Discourses in Overwatch Community and the Privilege of Belonging 10 GG Vol. 23. 2. 10. - 게임제너레이션은 새 연재로 '논문세미나'를 오픈합니다. 디지털게임을 다룬 국내외의 주요한 논문들을 간략하게 정리, 소개함으로써 디지털게임 연구의 결과들이 대중적으로 손쉽게 유통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합니다. 새 연재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1. 들어가며 한때 전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AAA급 게임 〈오버워치(OVERWATCH)〉. 〈오버워치〉는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 내 다양한 논쟁이 오갔던 2010년대 후반을 상징하는 게임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 인기를 입증하듯, 〈오버워치〉에는 늘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쏟아져나왔고 이를 통해 드러난 현상과 논의들이 논문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기를 풍미한 〈오버워치〉는 작년 10월, 서비스를 종료해 후속작인 〈오버워치 2(OVERWATCH 2)〉로 재탄생했다. 이 글은 Triple A!라는 주제를 맞아, 2010년대 후반을 대표한 AAA급 게임 〈오버워치〉에 관한 한 논문을 다루고자 한다. 바로 오버워치 속 ‘퀴어’를 다룬 논문이다. 트랜스미디어, 팬덤, e스포츠 등 게임문화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타냐 발리살로(Tanja Välisalo)와 마리아 루오살라이넨(Maria Ruotsalaine)은 오버워치 관련 글을 이미 몇 차례 내놓은 적 있는 연구자들이다. 두 연구자는 이번 텍스트로 〈오버워치〉 속 퀴어 캐릭터들을 둘러싼 커뮤니티 의견들을 분석하고, 소속·비소속의 구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오버워치〉 연구자들이 분류한 데이터들을 따라가며, 퀴어 캐릭터들을 둘러싼 커뮤니티 의견이 어떻게 나뉘고 현실 정치와 이어지는지 살피고자 한다. 그 후 소수자 표현이나 한국적 맥락에 대한 고민을 나눌 생각이다. 덧붙여서 이 논문은 2022년에 등록되었지만, 2016년에서 2020년까지의 데이터를 토대로 하므로 현재에 맞지 않는 상황이 보일 수 있다. 그 점을 고려하면서 봐주길 바란다. 2. 커뮤니티에 소속된다는 것 〈오버워치〉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Blizzard Entertainment)가 2016년에 런칭한 팀 기반 FPS 게임이다. 〈오버워치〉는 슈팅 게임이라는 본질 외에도 각각의 캐릭터에게 서사가 부여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오버워치〉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으로 캐릭터들의 설정을 풀어내는데, 2016년에는 트레이서, 2019년에는 솔저: 76가 퀴어라는 사실이 공개돼 화제가 됐었다. 캐릭터들을 향한 플레이어들의 입장은 둘로 나뉘었다. 게임과 섹슈얼리티의 연결을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과 게임을 통해 드러난 다양성을 기쁘게 생각하는 입장이 그것이었다. 연구자들은 이런 입장 차이에서 발생한 토론을 살피며 소속·비소속 장소로써의 〈오버워치〉 트랜스미디어 세계를 분석한다. 어딘가에 소속될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협상과 투쟁이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소속감이 정체성이라는 개념과 유사하게 이해될수록 더욱 그렇다. 그럼 '소속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연구자들은 '(소속감이)애착 욕구 및 개인이나 그룹이 소속되길 바라는 방식을 포착하게 만든다'는 프로빈(Probyn, 1996)의 말을 인용해 이를 설명한다. 정서적인 영역으로 이해되기도 하는 '소속감'은 끊임없이 변화하거나 경쟁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예를 들어, 북미 게임 커뮤니티의 권력은 여전히 백인 이성애자 남성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들에게 주어진 권력은 커뮤니티에 소속되기 용이하고 편안하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유저들은 커뮤니티에 소속되기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다. '게이머의 싸움'은 보통 게이머 대 게임 회사·개발자의 대립을 연상시키지만, 사실 이 대립은 커뮤니티 내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3. 게임문화 속 LGBTQ 게임문화 속 LGBTQ는 그동안 다양한 층위에서 혐오를 접해왔다. 이를테면 게임의 LGBTQ 캐릭터 자체는 〈오버워치〉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게임 세계 안에서 퀴어 캐릭터의 존재는 대체로 한 명이었고, 그마저도 이성애자 캐릭터들에 의해 온갖 혐오적인 태도와 마주해야 했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 이하 WoW〉 운영 도중 LGBTQ와 관련해 비판받은 과거가 존재한다. 2006년에 있었던 이 일은 블리자드가 퀴어 친화적인 한 WoW 길드의 홍보를 금지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블리자드는 차별적 괴롭힘이 조장될 수 있는 상황을 막은 거라 발표했지만, 플레이어들의 반발에 의해 이 규정을 곧 철회하였다. 이런 과거들이 있었지만 2010년대에 이르러서는 퀴어 콘텐츠도 게임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는 퀴어 친화적으로 입장을 바꾸었고 여러 게임사에서 다양한 모습의 성소수자 캐릭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The Last of Us)〉의 주인공 엘리를 포함해,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 〈에이펙스 레전드(Apex Legends)〉, 〈발로란트(VALORANT)〉 등, AAA급 게임에서 퀴어 캐릭터를 찾는 일은 이제 그리 어렵지 않아졌다. 〈언더테일(Undertale)〉도 이 사례에 들어가는 게임 중 하나다. 논 바이너리(non-binary) 젠더인 주인공이 등장하고 성 중립적 대명사(they/them)를 사용하며 퀴어 스토리라인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요소들이 있더라도 〈언더테일〉이 LGBTQ 게임으로 소개될 수 있느냐는 다른 영역의 이야기다. 연구자들은 〈언더테일〉이 메커니즘 측면에서 게이머들의 향수를 자극했고, 그로 인해 '게이머들의 게임'으로 정의되었다는 루버그(Ruberg, 2018)의 말을 옮긴다. 루버그(Ruberg, 2018)는 〈언더테일〉의 이런 인기가 퀴어 요소를 삭제하고 게임적 부분에만 초점 맞추는, 일종의 스트레이트워싱(straightwashing)으로 이어진다고 분석하였다. 이처럼 게임문화 속 퀴어는 여러 사건 및 논의와 함께 해왔다. 연구자들은 ‘정치적 담론과 대중문화 토론은 새로운 형태의 시민권이며, 이것이 대중문화 텍스트에 참여하게끔 강조한다’는 샌드보스(Sandvoss, 2014)의 말을 인용한다. 거기에 플레이어 커뮤니티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소속을 둘러싼 투쟁으로 인해 정치화되기도 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이 안에서 투쟁의 수단이자 중심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4. 〈오버워치〉 속 데이터들 연구자들은 2019년에 진행했던 연구로 캐릭터들의 성적지향이 플레이어에게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거기서 더 나아가, 플레이어가 〈오버워치〉에 어떤 식으로 연결되고 소속되는지 알아보기로 한 것이 이번 연구다. 이를 위해 연구자들은 오버워치 공식 포럼과 레딧(Reddit)에서 정보를 수집하였다. 수집된 데이터는 다음의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는 트레이서다. 〈오버워치〉의 상징과도 같은 트레이서는 2016년에 퀴어 캐릭터라는 정보가 공개됐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오버워치〉의 설정들은 게임이 아닌 트랜스미디어로 전달된다. 그래서 트레이서의 퀴어 설정도 단편 만화 '성찰(Reflections)'에서 밝혀지게 되었다. 이후 수석 작가인 마이클 추(Michael Chu)도 트위터로 그녀가 레즈비언임을 공식 인정했다. 이렇듯 오버워치의 첫 퀴어 영웅인 트레이서에 관한 것이 첫 번째 주요 데이터다. 두 번째 는 솔저: 76이다. 2019년에는 솔저: 76도 퀴어 캐릭터라고 드러났다. 그가 게이라는 사실은 트레이서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나타났다. 빈센트라는 이전 애인이 언급되는 단편소설, '바스테트(Bastet)'와 마이클 추의 트윗으로 퀴어라는 게 확정된 것이다. 레즈비언인 트레이서에 이어, 게이인 솔저: 76에 대한 토론이 두 번째 주요 데이터다. 마지막 세 번째 주인공은 시메트라다. 시메트라는 퀴어 캐릭터가 아님에도 게이 아이콘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시메트라의 이런 ‘게이 아이콘화’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구성됐기 때문에 특이점을 보인다. 연구자들은 플레이어들의 성적지향과 시메트라가 어떻게 관계되는지 해석을 시도한다. 연구자들은 수집된 자료를 수사적-수행적 담론 분석(rhetoric-performative discourse analysis)을 통해 살핀다. 이 분석법은 원래 포퓰리즘 및 정치 연구를 위해 개발됐지만, 이 연구에서는 서로 다른 담론 사이의 관계와 역학, 구성을 살피기 위해 사용한다. 다음으로 연구자들은 포럼 내 토론을 분석하며, 이를 소비자 담론, 진정성 담론, 작가 담론, LGBTQ 재현 담론, 저항 담론, 총 다섯 가지 범주로 설정한다. 이 범주들은 주요 데이터인 트레이서, 솔저: 76, 시메트라와 함께 설명된다. 5. 〈오버워치〉 데이터 분석 1) 소비자 담론 소비자 담론은 퀴어 캐릭터가 게임에 드러나게 된 전말을 추측하고 평가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퀴어 설정에 불만을 가진 유저들은 블리자드가 관련 플레이어들을 달래고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 한 것이며, 게임사는 게임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당 의견에서 게임을 즐기는 방식이 다른 두 그룹, 게임 플레이에만 집중하는 유저들과 설정에 더 관심 두는 유저들 간 계층구조가 형성된다. 특히 전자는 이상적인 커뮤니티 구성원의 범주를 설정하는 축이 된다. 이들의 불만은 '팬덤'이라는 용어에 관해서도 찾을 수 있었다. 〈오버워치〉 커뮤니티의 '팬', '팬덤'은 특정 담론 맥락에서 부정적으로 사용되는데, 팬덤이 캐릭터들의 뒷이야기만 상상할 뿐, 게임은 하지 않는다는 게 그 근거다. 누군가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퀴어 캐릭터 공개가 마케팅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퀴어 캐릭터가 미디어에서의 화제성이나 신규 플레이어 확보를 위한 도구로 이용됐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내러티브 콘텐츠가 다른 게임 콘텐츠들보다 열등한 것으로 판단하고 계층 구조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퀴어 콘텐츠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데 일조한다. 2) 작가 담론 게임은 다인원 작업물이기 때문에 저작자 개념이 모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작가 담론은 영화가 감독을 내세우듯 〈오버워치〉의 수석 작가 마이클 추를 주로 앞세운다. 마이클 추는 게임을 예술작품으로 접근하는 작가 담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작가 담론은 퀴어 설정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등장했다. 이 담론은 게임에 대한 권한이 디자이너, 개발자, 작가에게 있으므로 플레이어가 불평할 수 있는 건 없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검열과도 연결되어, 게임에 변경을 요구하는 의견들을 ‘비난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포럼의 한 유저는 '퀴어 설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팬 픽션을 쓰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는데, 연구자들은 ‘주류 콘텐츠에서 LGBTQ를 배제하던 일이 역전된 것’이라 분석한다. 하지만 작가 담론 측이 이러한 의견을 내놓는 건 LGBTQ를 지지해서가 아니다. 작가 담론 측은 퀴어 캐릭터에 대한 찬반 의견을 표명하기보다 도리어 토론 자체가 끝나길 바란다. 더 이상의 논의가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이들의 태도는 작가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작가 담론은 〈오버워치〉 커뮤니티 소속 권한을 작가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이 권한은 〈오버워치〉의 흐름을 반대하는 토론에 한해, 작가 담론 지지자에게도 주어지게 된다. 3) 진정성 담론 대중문화와 그 수용을 다룰 때 되풀이되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진정성이다. 〈오버워치〉 퀴어 캐릭터들 또한 '진정성'을 가리기 위해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여기에는 〈오버워치〉 세계관과 이미 알려져 있던 캐릭터에 대한 사실이 근거로 활용된다. 솔저: 76의 경우, 그의 다른 설정은 공개되지 않고 오직 성소수자라는 사실만 밝혀진 것에 불만을 내비치는 유저가 상당했다. 이들은 대체로 이성애적이고 남성적인 이미지의 솔저: 76가 동성애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후술할 트레이서의 데이터와 조금 다른 이 반응은 남성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가 다르게 판단되는 지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솔저: 76의 퀴어 설정이 타 캐릭터 스토리에서 공개된 것에 의문을 제기한 유저도 있었다. 솔저: 76에 집중된 콘텐츠가 아니었기 때문에 진정성이 덜하다고 여겨진 것이다. 일부는 솔저: 76의 퀴어 설정을 부정하며 스트레이트워싱하기도 했다. 솔저의 사례만 언급됐지만 진정성에 대한 이 의심은 트레이서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렇듯 진정성 담론은 캐릭터나 스토리 상의 타당성을 비판하고 〈오버워치〉 전체 맥락과 연관 지어 평가한다. 그 탓에 진정성 담론은 세계관이나 설정 등, 텍스트와 관계된 것들이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담론이 진정으로 권위를 부여하는 건 자신이 〈오버워치〉를 가장 잘 안다고 주장하는 커뮤니티 유저들이다. 연구자들은 이들이 "품질 컨트롤러"처럼 위치 지어진다고 말한다. 4) LGBTQ 재현 담론 LGBTQ 재현은 이 연구에서 분석된 모든 논의 안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연구자들은 이 단락의 첫 사례로, 트레이서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한 성소수자 유저의 글을 가져온다. 이 유저는 트레이서 같은 캐릭터들이 공감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역설한다. 연구자들은 해당 사례를 들어, 퀴어 캐릭터가 소수자를 재현하는 수단으로 간주된다고 설명한다. 언뜻 소비자 담론과 유사해 보이는 이 담론은 게임이 사회적 기능을 가진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따라서 퀴어 캐릭터의 존재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데, 몇몇 성소수자 유저는 '공격적이거나 혐오적인 태도를 조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반면 LGBTQ 재현에 항의한 이들은 캐릭터들의 섹슈얼리티가 드러났다는 데 초점을 맞춰 비난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트레이서와 그 애인의 키스였다. 항의 측은 이성애를 중립적이며 비성애적인 것으로, 동성애는 '너무' 성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게다가 (동성)섹슈얼리티를 제하는 것이 해석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거라 주장한다. 한 마디로 섹슈얼리티가 게임에 속하지 않길 바란 것이다. 이에 연구자들은 ‘캐릭터들의 섹슈얼리티와 그 의미를 부정하는 건 또 다른 형태의 스트레이트워싱’이라는 루버그(Ruberg, 2018)의 말을 인용한다. 이렇듯 게임과 섹슈얼리티의 연결을 불만스러워 하는 유저도 상당했지만, 이보다 많았던 건 '무관심' 측이었다. 한 유저는 '캐릭터는 캐릭터일 뿐, 트레이서의 애인이 왜 그렇게 관심받는지 모르겠다'고 밝힌다. 이것은 대중문화에 깊이 빠진 사람이 미성숙하고 불안정하다고 여기는 고정관념의 반영이다. 캐릭터에 관심 갖는 플레이어는 순수하게 게임만 즐기는 이들에 비해 부정적인 시선을 받는다. LGBTQ 담론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의견은 '현실의 문제를 게임에서까지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특히 섹슈얼리티 문제는 동성애를 정치적인 주제로 보는 시선이 많기 때문에 게임에서 논하기 예민한 부분이 있다. 그 탓에 트레이서의 성적지향이 공개됐을 때, 그를 반기는 사람들을 일컬어 리버럴, 사회 정의 전사(social justice warriors), 눈송이(snowflakes)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민감하고 미성숙한 사람을 뜻하며,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공격하기 위해 쓰는 이 용어들은 게이머게이트(Gamergate) 당시 확산됐다. 트레이서의 설정 공개와 게이머게이트는 사실상 다른 맥락이지만, 해당 용어는 〈오버워치〉 커뮤니티에까지 계승되었다. 5) 저항 담론 솔저: 76과 트레이서는 작가에 의해 퀴어로 설정됐다. 반면 시메트라는 퀴어 설정이 없음에도 ‘게이 아이콘’으로 환영받는다. 시메트라가 ‘게이 아이콘’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첫째로 그녀의 조작성이 큰 이유를 차지했다. 시메트라는 전통적인 FPS 메커니즘을 따르지 않았고, 이것이 ‘게이머 자본’을 획득하지 못한 이들에게 좋은 대안이 된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를 ‘퀴어 게임 메커니즘’이라 칭한 엔글(Engle, 2017)의 말을 가져오며, 시메트라가 대안적 존재이므로 퀴어에 친숙해질 수밖에 없다고 역설한다. 물론 시메트라가 플레이 메커니즘만으로 퀴어에 친숙해질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시메트라가 게이 아이콘으로 불리는 데에는 게임적 특성 말고도 다른 이유가 함께한다. 그에 앞서, 시메트라가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것을 설명해두어야겠다. 이를 설명한 이유는 시메트라가 약자라는 사실에 마음이 간다고 밝힌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여왕’으로 불리는 시메트라의 당당한 모습에서 마돈나(Madonna)나 주디 갈런드(Judy Garland) 같은 게이 아이콘을 연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저항 담론은 소비자 담론과 반대된다. 소비자 담론은 플레이어가 다양한 서비스를 기대하는 고객으로 위치 지어지지만, 저항 담론의 시메트라 플레이어는 커뮤니티 바깥쪽에 자리 잡는다. 하지만 개발자의 의도와는 다르다며 시메트라의 게이 아이콘화를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트레이서와 솔저: 76의 퀴어 설정을 지지했던 작가 담론이 비공식 퀴어 독해를 반대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이 반대는 퀴어 관련 게시글과 공간을 규제하며 이루어진다. 이렇듯 시메트라 플레이는 소속을 위한 투쟁이 어렵다는 걸 보여준다. 그럼에도 시메트라를 플레이하고 게이 아이콘이라 칭하는 건 게임 문화 내 이성애적 남성성에 저항하는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5. 〈오버워치〉 커뮤니티를 넘어 소속감은 각 그룹의 플레이어 및 게임 제작자, 사회와의 상호작용, 생산과 소비 사이의 역학에서 구성된다. 그를 추적한 이 연구는 퀴어 영웅의 도입을 둘러싼 논의와 권리를 정의한다. 연구자들은 〈오버워치〉 커뮤니티 내 개개인의 소속이 다양한 문화권과 투쟁에 연결된 점에서 착안해, 미국의 정치적 상황과도 연결 짓는다. 캐릭터들은 〈오버워치〉를 이해하도록 돕는 동시에 논쟁의 연결점이 된다. 그러나 스트레이트워싱 사례 등, 〈오버워치〉 트랜스미디어 표현의 한계는 존재한다. 연구자들은 게임문화의 포용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트랜스미디어 내러티브에 섹슈얼리티, 젠더, 민족성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소수자 집단을 위해 커뮤니티 의견에 귀 기울일 것을 제언한다. 6. 나가며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게일 루빈(Gayle Rubin)은 그의 저작 〈일탈〉에서 미국의 성 정치 역사를 풀어낸다. 루빈(2011)에 따르면, 2차대전 이후인 1950년대 미국 사회는 ‘성범죄자’와 ‘동성애자’에 대한 불안이 집중된 시기라고 한다. ‘성범죄자’라는 용어는 강간범, 더 나아가 아동 성추행범을 의미하게 만들었고 이는 곧 동성애자를 상징하는 기호가 되었다(Rubin, 2011). 서술한 사례 속 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퀴어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고 지금까지 100년의 세월도 채 흐르지 않았다. 이후 동성애자 탄압의 역사는 몇십 년간 이어졌다. 루빈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풀어낸 뒤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법적 형태, 사회적 관습, 이데올로기에 흔적을 남긴 싸움과 투쟁의 잔여물은 목전의 갈등이 사라지고 난 먼 훗날에도 섹슈얼리티를 체득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가 성 정치의 중요한 분기점이라는 사실을 이런 모든 신호가 말해주고 있다.”(Rubin, 2011, 293p) 사실 루빈의 글은 미국 성 정치 역사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게임과는 접점이 없어 보이는, 갑작스럽고 거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도 발제자가 이 글을 〈오버워치〉 논문 끝에 연결한 이유는 역사 서술 뒤에 이어지는 루빈의 말 때문이었다. 루빈은 섹슈얼리티가 먼 미래에까지 끼칠 영향을 파악해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사실 이 말 자체는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미국의 퀴어 탄압 역사를 살피고 지금의 게임문화를 살피면 그 무게가 조금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과연 이 역사가 게임 문화 내 섹슈얼리티 문제에 단 하나의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초기 디지털 스페이스는 인종, 젠더,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어울릴 수 있는 희망적 공간으로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이 연구가 〈오버워치〉를 통해 보여주었듯, 오늘날 게임 커뮤니티는 다양한 문화와 투쟁으로 소속·비소속의 여부가 얽히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루빈의 논의를 끌고 와서 한국 게임 문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어진다. 연구자들이 〈오버워치〉 커뮤니티 내 소속을 분석하고 미국의 정치적 상황과 연결 지은 것처럼, 우리도 이를 한국적 맥락과 함께 보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과거 성소수자의 미디어 표현이 중요했던 이유는 미디어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었던 게 크다(Gross, 2001: Shaw, 2014 재인용). 그랬던 미디어는 이제 소수자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거기에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수용과 경계가 뒤엉키기 때문에 재현의 문제가 더더욱 복잡해졌다. 그러면 여기서 앞으로의 AAA 게임에 대해서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몇 년간, 영향력 있는 AAA 게임 스튜디오들이 LGBTQ 표현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고(Makuch, 2015: Ruberg, 재인용 2018) 그에 따라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게임은 여전히 남성성 중심으로 돌아간다. 캐릭터가 미디어 표현의 책임을 플레이어에게 전가하거나 다양성이 미적 다원주의로 환원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Shaw, 2014). 이런 상황 속에서 AAA 게임은 어떻게 다양성을 표현해나갈 것인가? 플레이어들의 소속·비소속은 어떤 식으로 변화할 것인가? 큰 힘에 따르는 큰 책임을 지게 된 AAA 게임의 추이를 지켜봐야 할듯하다. 참고문헌 Ruberg, B. (2018). Straightwashing Undertale: Video games and the limits of LGBTQ representation. Journal of Transformative Works and Cultures, 28. Rubin, G. (2011) Deviations: A Gayle Rubin Reader. 임옥희·조혜영·신혜수·허윤 (역) (2015). 〈일탈: 게일 루빈 선집〉. 서울: 현실문화. Shaw, A. (2015). Gaming at the Edge: Sexuality and Gender at the Margins of Gamer Culture. Minnesota University Pres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다흰 융합예술과 문화연구를 공부했습니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관해 관심 갖고 있습니다.
- 박물관/미술관 속의 게임들과 그 역사
최근 들어 미술관에 게임이 전시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게임사회” 전시나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와 같이 게임을 소재로 한 전시가 늘고 있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전시되는 유물들은 단순히 그 오브제의 집합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작품들이 연계되어 만드는 다양한 맥락을 통해 그 작품의 의미는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 Back 박물관/미술관 속의 게임들과 그 역사 12 GG Vol. 23. 6. 10. 최근 들어 미술관에 게임이 전시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게임사회” 전시나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와 같이 게임을 소재로 한 전시가 늘고 있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전시되는 유물들은 단순히 그 오브제의 집합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작품들이 연계되어 만드는 다양한 맥락을 통해 그 작품의 의미는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임이 미술관에 전시되었다는 사실의 이면에는 우리 사회에서 게임을 바라보는 시각이 재편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술적인 차원에서 볼 때 게임은 종래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채우고 있는 유물이나 회화 등의 작품과 비교할 때 동적일뿐더러 상호작용적으로 작동된다. 어렸을 때부터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로 무장한 젊은 세대에게 이러한 동적인 행위성 덕분에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다소 수동적이었던 기존의 작품 관람 패턴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게임이 게임만을 소재로 한 박물관을 갖게 되고, 다른 미술관에서 당당하게 전시를 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이처럼 게임이 독자적인 박물관을 가지게 되고, 사회적인 편견을 넘어 미술관에 전시되게 된 역사를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 사례를 소개하려고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최초의 게임들 * MoMI에서 최초로 박물관에 전시된 아케이드 게임들 비디오 게임이 본격적으로 산업의 태동을 맞이한 시점을 1972년 아타리의 〈퐁〉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1989년에 이르러서야 게임은 처음으로 박물관에 전시될 기회를 갖게 된다. 미국 뉴욕의 Museum of the Moving Image (MoMI)는 “Hot Circuits: A Video Arcade”라는 이름의 전시에서 아케이드 게임들을 전시했다. 이 박물관의 창립 이사였던 로셸 슬로빈(Rochelle Slovin)은 비디오 게임이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고 물리적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컴퓨터 스페이스(1971)〉나 〈퐁(1972)〉 같은 초기 아케이드 게임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아스테로이드〉, 〈스페이스 인베이더〉, 〈슈퍼 브레이크 아웃〉, 〈트론〉 등 14종의 아케이드 게임이 전시되었다. MoMI의 이 초기 전시들은 이 박물관이 수집하고 있는 ‘동영상(moving image)’라는 개념에 부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움직이는 영상 이상의 인터랙션을 안겨주었기에 이러한 게임들을 전시할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본질적으로 게임은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운 좋게 게임에 호의적인 큐레이터를 만나 전시하게 된 새로운 매체 정도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위의 사진처럼 MoMI의 전시는 단순히 기존에 존재하던 아케이드 게임을 그대로 수집하여 가져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집된 게임의 예술적인 특질을 추출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 해당 게임을 만든 개발자들에게도 본인들이 예술적인 작품을 만든다는 작가적 정체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로셸 슬로빈은 이러한 아케이드 게임들의 기술적인 특징이나 게임이 소비되는 사회적인 맥락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는 이 전시에 관한 에세이에서 “비디오 게임을 평가한다는 것은 TV과 영화, 그리고 현재의 뉴미디어를 지배하는 비디오-컴퓨터의 혼합 사이에서 구미디어와 뉴미디어 사이의 첫 번째 연결 고리를 만드는 중요한 단계”라고 썼다.1) 그는 1989년의 전시 이후 20년이 지난 2009년의 시점에서 당시의 전시들이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처럼 하나의 트렌드나 유행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무언가의 시작”이었으며, “비디오 게임이 전 세대의 젊은 미국인들을 컴퓨터에 적응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평가했다. 특히 그는 당대의 아케이드 게임이 가진 기술적인 시각화가 다른 매체와 다른 비디오 게임 고유의 독자적인 미학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초기 비디오 게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게임이 컴퓨터의 사고방식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게임이 탄도학이나 군사 시뮬레이션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초기 형태의 컴퓨터와 칩은 힘과 벡터라는 순수한 수학만을 다루도록 설계되었다. 그들이 비디오 게임으로 재현되었을 때, 여기에는 순수한 수학의 강한 흔적이 여전히 존재했다. 이는 시각적 엔터테인먼트의 독특한 순간이었다. 기술이 게임의 원동력이자 콘텐츠가 되었다. 이것은 내가 본 것처럼 기술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내용과 기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기 위한 의미였기 때문에 이것은 박물관에 유용한 오리엔테이션이었다. 비디오 게임은 물리 법칙을 거의 감각적으로 시각화하고 느끼는 방식을 혁신 했다. 힘과 벡터 같은 물리적 법칙을 수학 공식을 통해 기술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초기의 비디오 게임은 박물관에 전시될만한 맥락을 처음으로 획득하게 된 것이다. 특히 젋은 미국인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식을 게임이 적응시키고 있다는 사회적인 맥락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그는 주목했던 것이다. 이는 이 때를 즈음하여 게임이 단순히 아케이드만을 통해 소비되지 않고, 가정용 게임기나 개인용 컴퓨터를 통해 다양한 플랫폼으로 소비되고 있음에 착안하여, 초기의 아케이드 게임이 가질 희소성과 보존 가치에 주목했다. 이 때부터 MoMI는 초기 아케이드 게임뿐만 아니라 랄프 베어로부터 기증받은 인류 최초의 가정용 게임 콘솔인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의 프로토타입 버전인 ‘브라운 박스’ 등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는 현재에도 MoMI의 주요 컬렉션을 이루고 있다. 미디어 아트 옆에 놓인 게임 MoMI의 이 전시 이후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비디오 게임의 박물관과 미술관 전시는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1998년 미국 미네소타 주에 위치한 워커 아트 센터(Walker Art Center)에서 열린 “Beyond Interface” 전시나 2000년 UC 얼바인 대학에서 열린 “Shift-Ctrl”전, 2001년 뉴욕 Museum of Modern Art (MoMA)에서 열린 “010101: Art for our Times”, 그리고 같은 2001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Bitstreams”전이 그것이다. 이 당시 전시의 특징은 게임을 독자적으로 전시하기보다 게임과 디지털 미디어아트를 동일선 상에 놓고 병렬적인 차원에서 이들의 유사성을 더듬어 나가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 휘트니 미술관 Bitstreams에 전시된 제레미 블레이크의 미디어 아트 Station to Station (2001)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이르면 게임은 미국과 유럽, 일본과 한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에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나름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당시였다. 〈스타크래프트〉를 위시하여 e스포츠의 가능성이 시작되었고, 3D 그래픽 카드의 출시를 통해 게임의 시각적인 표현력도 우수해지던 때였다. 물론 막 시작된 3D 그래픽의 표현 수준은 아직 언캐니 밸리의 위험한 구간을 통과하기 어렵던 때였지만, 도트나 벡터 그래픽을 바탕으로 한 2D 그래픽의 표현 수준은 슈퍼패미컴이나 PC엔진과 같은 4세대 가정용 콘솔에서 절정에 이르러 하나의 스타일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미 그 이전부터 몇몇 작가들은 컴퓨터 그래픽과 인터랙션을 하나의 표현 도구로 삼고 이를 통해 뉴미디어 아트를 선보이고 있었다. 이 당시 미술관에 전시된 게임은 독자적인 전시로 구성하기는 어렵지만, 디지털 아트라는 범주를 새롭게 설정하면서 그 맥락에 묻어가면서 전시 맥락을 획득한 경우라 볼 수 있다. 도구로서의 디지털은 쉬운 복제와 편집 가능성을 바탕으로 기존 작품의 권위를 쉽게 패러디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당시에 나왔던 리디아 와초프스카의 〈브레이크 아웃〉 패러디는 기존의 비디오 게임 매커닉을 패러디하여 디지털 아트가 재구성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 Lidia Wachowska, Breakout Animation Steal, 2002. 문제는 이처럼 게임이 디지털 아트와 더불어서 미술관에 점차 전시되면서 ‘예술 게임(art game)’과 ‘예술적 형식으로서의 게임(games as a art form)’이 구분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예술가나 미디어아트 작가들이 게임적 요소를 하나의 도구로 삼아 예술가적 자의식을 가지고 제작한 예술 게임과 상업적 게임 중 예술성이 뛰어난 게임인 ‘예술적 형식으로서의 게임’은 지향하는 바가 분명히 다르다. 전자의 경우 2000년대 전후를 위시하여 지속적으로 미디어 아트 포맷 형태로 미술관에 숱하게 전시되었으나, 예술적 형식으로서의 게임은 상업적 속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도 하거니와 이를 제작한 개발자의 예술적 자의식이 없거나 크게 도드라지지 않기 때문에 미술관에 전시되기 위해서는 별도의 다른 맥락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이란 게임이 소비되는 사회적인 맥락에 있어서 흔히 게임의 본질적인 매체 효과로 간주되는 ‘재미’를 넘어 게임이 영감(inspiration)을 줄 수 있는 미학적 자질을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석파정 서울미술관, “안봐도사는데지장없는전시” (2019) 2019년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렸던 “안봐도사는데지장없는전시”는 게임만을 다룬 것은 아니었지만, 작품 중 여러 예술적 형식으로서의 게임을 전시한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호주의 게임 개발사 Mountains에서 개발하고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에서 퍼블리싱한 모바일 게임 〈플로렌스(Florence)〉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이 전시는 게임이 우리 사회 속에 어느새 미적 감각을 전달해줄 수 있는 주요 매체로 자리매김했음을 일깨워준다. 독자적인 게임 박물관을 향하여 필자 역시 2010년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열린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전시를 기획하면서 게임을 미술관에 넣어보려 노력한 적이 있다. 놀공발전소와 함께 준비했던 이 전시에서 우리는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출시된 주요 게임 콘솔과 애플 II, MSX 등 한국에서 주요한 의미를 가진 개인용 컴퓨터들을 플레이 가능한 형태로 비치했고, 그 중 예술적으로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게임들을 게임 역사 순서대로 전시한 바 있다. 물론 이 때에도 게임만으로 미술관 전시를 진행하는 것에 대한 미술관 내외의 반감이 상당하여 상당수의 전시를 디지털 중심의 미디어 아트로 채워야 했었다. 때문에 필자는 전시 시작 입구 쪽에 백남준의 〈TV 촛불〉을 초를 켠 채로 세워놓았다. 백남준의 〈TV 촛불〉은 TV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게임이든 미디어아트이든 그 뿌리는 같으며, 이를 어떻게 채울지가 더 중요하다는 선불교 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으로 나에게는 다가왔던 것이다. 이 작품의 선정은 미디어아트 없이는 게임만의 독자적인 미술관 전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편견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일종의 소극적 저항이었던 셈이다. * 백남준, TV 촛불 이는 현재 제주도에 위치한 넥슨 컴퓨터 박물관이 오픈 수장고를 통해 선보이고 있는 방식과 유사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폭넓은 게임 콜렉션을 자랑하는 미국 뉴욕 주 로체스터에 위치한 The Strong Museum이나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Computerspielmuseum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오픈 수장고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물론 이 박물관들은 모두 전시된 게임 이상의 수많은 콜렉션을 보유하고 있고, The Strong Museum만 게임업계나 학계 관계자들에게 폐가식 형태로 이를 공개하고 있다. The Strong Museum 내에 위치한 International Center for the History of Electronic Games는 게임 그 자체를 수집, 보존, 전시하는 것을 넘어 실제 게임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를 최대한 존중하여 보관하고자 하는 곳이다. * 〈페르시아의 왕자〉 디렉터인 조던 메크너의 스토리보드와 모션 캡쳐 노트 필자가 이 박물관의 센터를 방문했을 때 놀런 부슈넬, 윌 라이트, 조던 메크너, 시드 마이어 등 유명 게임 개발자들의 다양한 게임 메커닉 스케치와 아타리 2600 등과 같은 올드 게임 콘솔의 디자인 설계도 등을 열람할 수 있었으며, 이를 분류하는 체계 역시 이미 규정이 확립되어 있었다. 게임을 보존해야 할 미디어로 간주하고 이를 철저하게 시행하고 있는 사회적 인식이 확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The Strong Museum의 사례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해준다. 1) Rochelle Slovin, “Hot Circuits: Reflection on the first museum retrospective of the video arcade game”, 2009. http://www.movingimagesource.us/articles/hot-circuits-20090115 Tags: 아카이빙, 박물관, 전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한국 게임비평의 궤적과 방향
세계 최초의 게임잡지는 1981년 영국에서 발간된 <컴퓨터와 비디오게임(Computer & Video Games: CVG)>이다. 2004년부터 온라인으로만 발행되다, 2015년에는 온라인사이트까지 폐쇄하고, (www.gamesradar.com)로 리디렉션됐다. Gamesradar+는 여전히 기대작이나 신작 리뷰, 업계동향뿐 아니라 알찬 내용의 작품비평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한국에서 게임잡지가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뒤인 1990년대 초반이다. 1980년대 PC 보급시기와 맞물려 닌텐도(Nintendo)의 ‘패미콤(Famicom)’을 국산화한 ‘현대 컴보이’가 소개됐다. 이후 세가(Sega)의 16비트 ‘메가 드라이브(Mega Drive)’를 삼성전자가 국내버전으로 바꾼 ‘수퍼 겜보이’가 발매되고, 콘솔게임에 대한 관심 급증이 게임전문잡지의 탄생을 추동했다. < Back 한국 게임비평의 궤적과 방향 01 GG Vol. 21. 6. 10. 1. 세계와 한국 최초의 게임잡지 세계 최초의 게임잡지는 1981년 영국에서 발간된 <컴퓨터와 비디오게임(Computer & Video Games: CVG)>이다. 2004년부터 온라인으로만 발행되다, 2015년에는 온라인사이트까지 폐쇄하고, ( www.gamesradar.com )로 리디렉션됐다. Gamesradar+는 여전히 기대작이나 신작 리뷰, 업계동향뿐 아니라 알찬 내용의 작품비평을 제공해 주고 있다. * 〈CVG〉(왼쪽)와 〈Gamesradar+〉(오른쪽) 한국에서 게임잡지가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뒤인 1990년대 초반이다. 1980년대 PC 보급시기와 맞물려 닌텐도(Nintendo)의 ‘패미콤(Famicom)’을 국산화한 ‘현대 컴보이’가 소개됐다. 이후 세가(Sega)의 16비트 ‘메가 드라이브(Mega Drive)’를 삼성전자가 국내버전으로 바꾼 ‘수퍼 겜보이’가 발매되고, 콘솔게임에 대한 관심 급증이 게임전문잡지의 탄생을 추동했다. * <게임월드> 창간호 한국 최초의 게임잡지는 1990년 8월에 발간된 <게임월드>로 알려져 있다(조기현, 2012, 58쪽). 이어 <게임뉴스>(1991), <겜통>(1992), <게임챔프>(1992), <게임정보>(1993) 등이 발간되면서 게임잡지들의 각축전이 시작됐다. 당시 플레이어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정보는 신작소개나 발매일정, 공략이었지만, 게임잡지는 게임의 긍정적 면모나 문화적 성격을 부각하는 기사를 싣는 등 게임 인식전환에도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게임을 분석할 필자를 모집해 그들의 글을 싣거나(1992년 <게임월드>, 1993년 <게임정보> 등), 미국이나 일본 게임저널의 기사를 번역하거나(1994년 <게임채널> 등), 게임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글들을 연재(1996년 박병호의 <경향신문> 연재, 1999년 박상우의 <시네21> 연재 등)하는 등, 유사비평 혹은 비평의 초기형태라 할 수 있는 시도들이 다양하게 이뤄진 것 역시 특기할 부분이다. 2. 번들 CD에 집중했던 PC게임 잡지들 1990년대 중반부터 PC게임이 급격히 성장함에 따라 대부분의 게임잡지들도 PC게임에 집중했다. 당시 잡지들의 대표적 특징으로 번들(bundle) CD 제공을 들 수 있다. 초기 번들 CD는 시류지난 게임의 재고털이를 위해 제공된 것으로, 플레이어들에게 호응을 얻고 산업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게임잡지의 판매부수를 결정하는 주된 변수로 자리매김했다. 경쟁심화 속에서 잡지사들은 고전 명작게임 위주로 제공하던 번들 CD에 조금씩 최신작을 담게 됐다. 1980년대 게임잡지들이 차별화된 게임정보와 공략을 내세워 고정 독자층을 확보·유지했다면, 1990년대 게임잡지들은 번들 CD로 독자층을 나눠 먹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신작을 유치하기 위한 잡지사들의 과도한 경쟁은 번들 CD 구매비용의 증가로 이어졌고, 이는 잡지사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후 PC게임 복사가 확산되고, 네트워크 환경발달과 함께 온라인게임이 태동하면서 PC게임 시장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동시에 게임잡지에도 시련이 찾아왔다(김득렬, 2012. 1. 4.). 3. 종이잡지에서 웹진으로 종이잡지에서 웹진으로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약 10년간 이어온 게임잡지 역사는 2000년대 들어 비디오게임 및 PC게임 산업과 함께 쇠퇴했다. 게임잡지는 힘을 잃어 갔지만 게임 산업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얻게 되는데, 온라인게임의 인기가 그것이다. 게임잡지들도 이에 편승해 온라인 기반 게임관련 잡지들로 변모해 갔다. 그러나 전문적인 게임비평보다는 상대적으로 다소 가벼운 비평, 게임 자체와 공략에 대한 정보제공, 부록 중심이었던 게임잡지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자리를 내주면서 대부분 폐간됐다. 인터넷의 발달은 기존 출판잡지에 좌절과 시련을 부여했지만, 플레이어들에게는 오히려 정보 공유와 전달을 가속화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물론 플레이어들이 게임정보를 걸러내 원하는 것만 소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보다 전문적인 접근에 대한 수요도 모두 채울 수는 없었다. 이는 방대한 게임정보를 체계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채널을 찾는 계기로 작용했고, 게임웹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김득렬, 2012. 1. 4). 2021년 6월 기준 오프라인을 통해 발간되고 있는 게임전문지로는 <게이머즈(Gamer’z)>가 유일하다. 물론 온라인상으로는 <인벤>, <게임메카>, <디스이즈게임>, <포모스>, <게임조선>, <게임포커스>, <데일리게임>, <게임어바웃>, <게임동아>, <경향게임스>, <더게임스> 등 많은 게임웹진이 존재한다. 하지만 <게이머즈>뿐 아니라 다른 웹진들도 여전히 전문적인 비평보다는 리뷰와 공략 중심의 정보제공에 치중하고 있다. 4. 게임비평 확산을 위한 여러 시도들 오히려 게임의 안과 밖을 보다 꼼꼼히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게임전문지가 아닌 다른 공간을 통해 더 활발히 이뤄져 왔다. 물론 그조차도 전문성과 안정성을 가진 것이라 보긴 어렵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런 시도가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문, 영화 잡지나 기타 대중문화 잡지, 컴퓨터 잡지 등이 게임비평에 종종 지면을 할애하긴 했지만, 단편적인 기획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민간재단인 게임문화재단에서 2012년 3월부터 월간지 <게임컬처(Game Culture)>를 발간, 업계나 학계 등에서 활동하는 편집진들을 활용해 양질의 게임 관련기사와 비평을 게재했으나, 2012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 수순을 밟았다. 한편, 게임비평의 궤적을 살핌에 있어 ‘게임비평공모전’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게임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관심을 증대시켜 문화적·학술적 가치를 제고한다는 취지 아래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콘텐츠진흥원, NHN(주), 더게임스가 공동 주관하여 2008년부터 ‘게임비평상’을 제정했다. 전경란(2013)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게임비평공모전에서 가작 이상의 상을 받은 30편의 비평들을 분석, 비평들이 게임의 다양한 측면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그 영역 및 접근방식은 제한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한 바 있다. 게임의 내용과 형식적 특징, 즉 게임 플레이에서부터 게임 구조, 게임 세계 등을 중심으로 고루 비평을 행한 반면, 기존의 문화 장르를 분석하기 위한 이론과 방법론을 적용한 탓에 제반 게임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공모전은 아마추어 게임비평가들을 발굴하고 게임비평 저변을 확대한 국내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2012년 제5회를 끝으로 더 이상 개최되지 않고 있다. * 제1회 게임 비평상 공모전 포스터 비평가들의 단행본 작업도 의미가 적지 않다. 박상우의 <게임, 세계를 혁명하는 힘(2000)>과 <게임이 말을 걸어올 때(2005)>, 이상우의 <게임, 게이머, 플레이: 인문학으로 읽는 게임(2012)>, 이경혁의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인문학협동조합 조합원들의 <81년생 마리오: 추억의 게임은 어떻게 세상물정의 공부가 되었나?(2017)>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경유해 게임이 우리 일상과 사회·문화에서 갖는 의미를 비교적 새롭게, 다각도로 포착했다는 장점을 갖는다. 하지만 상호참조 없이 본격 비평서임을 자처하며 게임인문학에 대한 다분히 기초적인 논의(특히, 내러톨로지나 루돌로지와의 연관 속에서)를 유사하게 반복하고 있다는 점, 이후 보다 발전적이면서 지속적인 작업으로 연결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 (왼쪽부터) 박상우, 이상우, 이경혁, 인문합협동조합의 게임비평서 현재진행형이라 아직 그 성과를 말하기엔 이른 감이 있지만, 게임비평에 대한 주목할 만한 시도들이 있다. 이경혁은 2014년 11월 미디어 비평지 <미디어스>에 게임비평 ‘Play the Game’의 연재를 시작으로, 여러 온라인신문, 게임사 블로그, 잡지 그리고 <국방일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비평작업을 하고 있다. 개별 게임 텍스트에서부터 한국 게임문화의 역사적 유물로서의 오락실과 e스포츠(e-Sports), 게임산업, 플레이/어, 게임을 둘러싼 부정적인 담론, 그리고 게임 텍스트에 담긴 사회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논의범위 또한 넓다. 2021년 6월 기준 비슷하게 활동하는 비평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가 보일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5. 게임비평의 문제점 한국 게임비평의 외재적 문제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게임에 대한 강한 규제와 부정적 담론 확산으로 산업이 위축됨에 따라 게임비평이 활성화될 수 있는 토대도 척박해졌다. 강한 규제와 부정담론은 게임을 ‘나쁜 것’,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다. 둘째, 게임전문지가 다수 존재함에도 전문적인 비평을 행하고 있지 못하다. 해외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 영국의 ( www.pcgamer.com )나 미국의 <컴퓨터 게이밍 월드(Computer Gaming World)>( computergamingworld.com )과 같은 게임전문지는 단순한 리뷰나 공략보다 심층적인 정보나 비평을 제공한다. 게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이뤄지는 웹진 <코타쿠(Kotaku, kotaku.com )>, 개발자와 연구자들이 게임 제작취지와 게임에 대한 비평, 연구결과 등을 게재하는 <가마수트라(gamasutra)>( www.gamasutra.com )등도 전문적인 게임비평공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물론 국내외의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플레이어의 성향, 게임에 대한 비평토양 등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한국 게임전문지들이 보이는 리뷰나 공략에의 지나친 집중은 전문지들이 주된 광고주인 게임 퍼블리셔나 게임사들의 홍보매체로 전락한 것 아니냐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게 만든다. 내재적 측면의 문제점으로는 게임만이 가진 텍스트적 특징으로 인한 비평의 어려움을 꼽을 수 있다. 기호와 서사로 구성되기 때문에 다른 문화장르와 유사한 것 같지만, 게임은 독특한 향유구조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향유구조가 텍스트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게임은 사전에 모두 제작된 상태로 향유자에게 제공되는 다른 문화장르와 달리 플레이어가 그것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불완전한 텍스트인 채로 남는다. 플레이어는 불완전한 게임 텍스트에 참여해 게임과 상호작용하는 주체이며, 플레이어의 참여는 곧 완전한 텍스트로서의 게임을 가능하게 만드는 필요조건이다. 때문에 게임에서는 창작주체와 수용주체의 구분이 애매해진다. 게임 텍스트는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게임이 단순히 알고리즘의 구현물이 아니라 플레이어에게 스토리 및 허구적 상황을 경험하게 하는 서사 환경을 지님을 의미한다(강신규, 2016). 따라서 게임비평은 텍스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어떤 경험이 제공되는지, 경험이 이뤄지고 나면 다음 플레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등까지를 논의 범위에 포함(김연희, 2012. 12. 12)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게임은 플랫폼별·장르별로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갖는 경우가 많아 그것을 비평하는 데 하나로 모으기 어려운 다양한 관점과 방법들이 요구된다. 다른 문화장르들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게임은 ‘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게임전문가나 수준급의 플레이어라 해도 접해 보지 않은 게임을 비평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게임은 전문가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가진 향유자들이 너무 많은 문화 장르이기도 하다. 게임을 하려면 대체로 같이 즐길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크게는 장르나 플랫폼, 작게는 개별 타이틀에 따라 향유 공동체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경험 제공’이라는 특성은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정보를 공유하고 평가하는 것이 게임 플레이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한다. 요컨대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들은 다른 사람의 플레이나 관련 정보를 ‘접하고’ 그것을 다시 게임‘하는’ 데 활용한다(강신규·채희상, 2011). 직접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정보와 경험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 정보와 경험 바깥에 위치하거나 안으로 깊이 들어와 있지 못한 게임비평 주체가 그것을 온전히 읽어 내기 어려운 이유다. 6. 게임비평의 조건들 ‘게임비평’이란 게임의 가치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말한다. 이 때 ‘비평’은 기존의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연극, 영화 등의 비평에서 사용하는 개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각 비평이 그런 것처럼, 게임비평 역시 다른 비평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비평의 대상과 조건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게임비평의 조건을 살피기 위해서는 비평 일반조건과 게임의 변별적 특성을 반영한 조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또, 비평의 조건은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비평대상의 형질변화와 비평에 요구되는 역할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는 것이다. 비평하는 사람에 따라 비평조건에 대한 인식이 다를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그 조건에 대해 최소한의 합의 가능한 지점들을 모색하는 일은 가능할 듯하다. 1) 비평의 일반조건 기본적으로 비평은 비평주체(비평가), 비평대상(넓은 의미의 작품), 창작주체(제작자/창작자/작가), 수용주체(향유자/수용자/독자)라는 네 요소를 필요로 한다. 창작주체에게는 창작에 피드백을 주는 반응으로 작용하고, 수용주체에는 수용 선택여부나 수용방법 등을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 비평이다. 비평주체는 비평을 통해 비평대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확인해볼 기회를 얻는다. 비평주체/대상, 창작/수용주체가 비평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들이라면, 비평의 조건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비평은 감상문 수준을 넘어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둘째, 비평가에 대한 공인절차고 요구된다. 셋째, 전문학술지, 일간지, 잡지, 웹진 등 비평이 발표될 매체가 필요하다. 매체는 비평활동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신뢰할만한 것이어야 한다(김봉석·박정숙·박기수·한상정, 2015. 5. 8). 세 조건은 각각 비평의 전문성, 안정성, 지속성과 관련된다. 이를 종합했을 때, 비평이란 ‘비평주체가 신뢰할 만한 매체를 발표공간으로 삼아, 비평대상과 관련된 사안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한 뒤 평가를 내리는 전문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비평의 힘은, 대상이 지닌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열어주는 수준을 넘어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닌 사회적 함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해나가는 과정에서 나온다. 게임비평도 마찬가지다. 게임이 주는 단순한 즐거움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과 게임이 보일 수 있는 비전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그것을 통해 일상의 변화와 시대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비평은 비평대상의 성취를 읽어내고, 그런 읽기를 통한 생생한 인식을 사회로 확산하는 작업인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전제들이 요구된다. 먼저, 게임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토론을 위한 비판적 풍토를 조성한다. 다음으로, 게임과 게임비평을 지지하고 체계화한다. 마지막으로, 개인 혹은 사회의 게임 향유경험을 이해할 수 있도록 비판적 도구·해석·평가를 제공한다. 2) 변화의 고리와 게임비평 하지만 비평의 일반조건은 게임비평이 당면한 상황과는 꽤 거리가 있다. 특히, 한국에서 게임비평은 느슨하게 형성돼 있고, 기존의 예술·문화장르에서처럼 고정된 형태로 제도화돼 있는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비평은 대상이 무엇이 됐든 본질적으로 유연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게임과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게임비평이라면, 그것은 게임의 변화, 그리고 사회의 변화에 따라 출렁거리는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게임 개념도 계속 재구성된다. 메타버스(metaverse) 시대 게임은 온라인게임 태동 이전 게임과 다를 수밖에 없다. 기존 예술이나 문화장르에 비해 접근성이 높고 폐쇄성이 강한 게임문화의 경우, 전문가 집단의 체계적인 비평이 형성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개별 게임의 향유가 향유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된다는 점도 게임비평의 제도적 형성을 어렵게 하는 큰 요인 중 하나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게임비평은 없는 게 아니라 어쩌면 너무 많은 곳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도화된 비평이 미미할 뿐, 제도 바깥의 비평열기는 그야말로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전통적 관점에서 제도화된 비평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게임비평은 그야말로 ‘넘쳐난다’. 블로그,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 소셜 미디어 등 온라인 공간을 기반으로 게임비평을 자처하는 작업들이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 다양한 플랫폼과 디바이스를 통해 게임 향유경험이 축적되고 그로 인한 일정 수준의 커뮤니티가 형성됨으로써 플레이어들은 이제 전문가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갖게 됐다. 이는 플레이어들을 준 비평가로 만드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플레이어들을 골고루 만족시킬 만한 고유의 비평체계가 이뤄지기 어려운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적극적인 향유=비평을 통해 비평의 저변이 넓어졌다거나 비평이 민주화됐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상황은 게임비평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그 정체를 모호하게 만든다. 기존 예술·문화 장르의 비평 장(場)이 이미 제도화된 전문적 비평영역과 온라인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된 아마추어 비평영역 사이의 갈등과 연대가 교차하는 역동적 공간이 되고 있다면, 제도화된 비평영역의 부재로 인해 가뜩이나 분명하지 않았던 게임비평의 정체는 더욱 불분명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게임비평의 조건과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연결된다. 기존의 비평개념으로는 작금의 현상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과연 전문적인 비평을 위한 체계를 마련하는 일이 게임담론의 생산주체가 되는 일, 그리고 게임발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능동성을 발휘하는 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제도화돼 있지 않다면 그 자체로 가능성이 될 수는 없을까? 비평의 민주화를 통해 제도권 내 비평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낯선 상상력을 발굴할 여지가 열리게 된 것은 아닐까? 이 질문들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도화되지 않은 비평의 장에서 쏟아지는, 이른바 ‘중심 없는 주변부’의 비평들을 규정하는 조건이 새롭게 구성돼야 한다. 비평의 장 자체를 흔드는 변화 속에서 비평과 비평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보다, 새로운 조건 마련을 통해 비평의 외연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게임 향유자는 수동적으로 비평을 소비하던 역할에서 벗어나, 온라인 공간을 통해 능동적으로 비평을 생산·배포·공유하는 새로운 비평주체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그들이 비평을 행하는 온라인 공간 역시 해당 공간에 들어오는 비평독자들이 비평을 읽고 소감을 밝히는 새로운 비평의 장이자 역동적인 비평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남은 것은 그들의 비평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비평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냐의 문제다. 하지만 애초에 ‘고급/좋은’ 비평과 ‘저급/나쁜’ 비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 비평이 추구해온 것처럼 고급독자만을 위한 전문적 의미의 비평만이 비평은 아니다. 게임의 특성, 그리고 그 향유자를 감안한다면 전통적 비평개념의 수정 혹은 확장은 필연적이다. 그 명확한 기준과 범위를 제시하는 일은 더 이상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을 지니며, 비평주체와 독자 간 갈등과 연대 속에서 성립한다. 물론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비평 고유의 목적과 역할은 지켜져야만 한다. 그것이 아니면 비평이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강신규, 2016). 7. 게임비평이 나아갈 방향 그렇다면, 게임비평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첫째, 독창적인 이론과 방법론의 발굴이다. 게임비평만을 위한 이론과 방법론을 찾는 일이 쉽지 않음에도, 게임이 처한 현실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 맥락에 가 닿을 수 있도록 하는 비평이론과 방법론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비평대상이 다르면 비평의 언어도 달라져야 한다. 게임이 가진 고유속성에의 천착을 통하 스스로의 정체와 역할을 구성했을 때, 비로소 게임비평의 변별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 비평, 마르크스주의 비평, 여성주의 비평, 신비평, 독자반응 비평, 구조주의 비평, 해체 비평, 신역사주의와 문화 비평, 레즈비언·게이·퀴어 비평 등 텍스트를 풍성하고도 심도 깊게 살필 수 있는 기존의 비평이론과 방법론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게임의 미학 안에서 통합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함께 이뤄져야 함은 물론이다. 게임 플랫폼이나 장르에 따라 비평을 세분화·전문화함으로써 전체 비평의 틀을 다지는 일도 고려해볼 만하다. 매체전환(media transformation)과 미디어믹스(media mix)가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비평의 양식이나 형식을 발굴하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하다. 둘째, 비평의 역할 재/정립이다. 흔히 발견되는 비평의 자의식 부재, 해설이나 주례사 비평으로의 쏠림은 비평의 역할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데 기인한다. 비평은 비평대상을 흡수하거나 투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시선과 함께 배출하거나 반사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평의 주된 역할은 ‘먹음’이 아니라 ‘되먹임’이다. 비평주체와 대상 사이에 이뤄지는 되먹임의 반복을 통해 비평을 둘러싼 주체가 공진화(coevolution)하는 것이 비평의 효과다. 하지만 게임비평의 역할은 여기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특정 텍스트에 대한 치밀한 해독에서, 장 내 주요 행위자들이 직면한 문제들, 그리고 해당 장에 제기되는 도전과 응전의 방향성들을 보다 긴 호흡으로 치밀하게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향후 게임비평이 창작주체와 수용주체가 형성하는 문화의 변화를 탐구하는 동시에, 기민하게 변화하는 텍스트들의 정립상과 사회적 활용, 그리고 산업으로서 게임이 당면하고 있는 변화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구체적인 전망과 대비책을 마련하고, 이를 두껍게 읽어내는 역량까지 배양해야 함을 시사한다. 비평이 이차적인 글쓰기로서의 지위에 만족하는 한, 비평이 비평대상을 이끌어가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게임비평은 텍스트를 넘어 텍스트화되지 않은 현실에까지도(물론 게임과의 관계 속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게임비평의 역할은, 비평으로서 타개해나가야 할 문제와 게임적 사회와 삶에 대한 반성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문제까지 폭넓게 다루는 것이다. 셋째, 제도권/비제도권을 막론하고 이제 비평논의에 대해 있어 요구되는 것은 ‘총체적’ 통합의 불가능성 혹은 불필요성에 대한 인식이다. 비평과 비평 아닌 것, 비평공간과 비평공간 아닌 곳, 비평가와 비평가 아닌 사람 사이를 구분하는 선은 수명을 다했다. 전문가 수준의 향유자, 전문가에게 없는 경험치를 지닌 향유자, 어디서나 격전이 벌어지는 비평공간, 기존의 정형화된 비평을 넘어서는 비평이 넘쳐난다. 더 이상 서로를 구분하는 선 자체가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임비평이 나아갈 방향 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돼야 한다(강신규, 2021). 하지만 문제는 게임비평에 잘 된 비평과 그렇지 못한 비평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게임비평을 할 줄 모른다는 말은, 더 정확히 지적하자면 잘된 비평을 쓸 줄 모른다는 말이다. 비평을 할 바에야 잘 된 비평을 쓰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처음부터 그런 비평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처음부터 잘 된 비평을 쓰려고 하는 욕망은 내내 문제가 된다. 하나의 창조적 작업임에도 창조하는 즐거움보다 결과만 탐하게 되어, 남의 것을 모방하게 되고, 얻어들은 지식을 체계없이 나열하게 되고, 허황되게 꾸미게 되는 것이다. 나만의 게임경험과 그 경험과정에서 얻게 된 지식들이 잘된 비평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비평이 잘된 비평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전통적인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먼저 나름의 체계와 전문성을 갖춰야만 한다. 다른 비평에 대한 필요이상의 냉소함도 지양할 필요가 있다. 비평의 총체적 통합이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비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어디서든, 그리고 그게 누구든) 타인의 비평을 주의 깊게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관점이 지닌 타당성을 물으면서, 타인과 자신의 비평에 새로운 의미를 덧입히려는 노력이다. * 이 글은 저자의 저서 <서브컬처 비평(2021)> 내용을 중심으로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참고문헌 강신규 (2016). 하위문화 비평의 궤적과 방향: 만화·애니메이션·게임비평을 중심으로. <문화과학>, 85호, 128~158. 강신규 (2021). <서브컬처 비평>. 커뮤니케이션북스. 강신규·채희상 (2011). 문화적 수행으로서의 e스포츠 팬덤에 관한 연구: 팬 심층인터뷰 분석을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 & 문화>, 18호, 5~39쪽. 김득렬 (2012. 1. 4). 게임잡지 연대기 2부–게임잡지 몰락에서 웹진탄생까지. <게임메카>. URL: http://www.gamemeca.com/feature/view.php?gid=125137 김봉석·박정숙·박기수·한상정 (2015. 5. 8). [좌담회] 우리 만화 비평을 말한다: 만화 담론의 현재와 비평의 길찾기. <크리틱엠>. URL: http://criticm.com/?p=734 김연희 (2012. 12. 12). 게임의 러브레터, 게임비평. <사이언스타임즈>. URL: http://www.sciencetimes.co.kr/?p=110623&post_type=news&news-tag= 박상우 (2000). <게임, 세계를 혁명하는 힘>. 씨엔씨미디어. 박상우 (2005). <게임이 말을 걸어올 때>. 루비박스. 이경혁 (2016).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 로고폴리스. 이상우 (2012). <게임, 게이머, 플레이: 인문학으로 읽는 게임>. 자음과모음. 인문학협동조합 (2017). <81년생 마리오: 추억의 게임은 어떻게 세상물정의 공부가 되었나?>. 요다. 조기현 (2012). 해외 게임기의 한국 상륙. 윤형섭·강지웅·박수영·오영욱·전홍식·조기현. <한국 게임의 역사> (52∼63쪽). 북코리아. 전경란 (2013). 게임비평에 대한 연구: 게임비평 텍스트의 메타분석적 접근. <한국게임학회 논문지>, 13권 3호, 19~30쪽. <미디어스> ‘Play the Game’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431) (computergamingworld.com) (www.gamasutra.com) (www.gamesradar.com) (kotaku.com) (www.pcgamer.com)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강신규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게임, 방송,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저서로 <흔들리는 팬덤: 놀이에서 노동으로, 현실에서 가상으로>(2024), <서브컬처 비평>(2020), <아이피, 모든 이야기의 시작>(2021, 공저), <서드 라이프: 기술혁명 시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2020, 공저),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게임까지>(2019, 공저) 등이, 논문으로 ‘이기지 않아도 재미있다: 부모-자녀 게임 플레이의 사회성과 행위성, 그리고 분투형 플레이’(2024), ‘커뮤니케이션을 소비하는 팬덤: 아이돌 팬 플랫폼과 팬덤의 재구성’(2022), ‘‘현질’은 어떻게 플레이가 되는가: 핵납금 게임 플레이어 심층인터뷰를 중심으로’(2022, 공저), ‘게임화하는 방송: 생산자적 텍스트에서 플레이어적 텍스트로’(2019) 등이 있다.
- 소수자들의 게임에 대한 세 가지 소고
디지털게임은 한때 ‘소수자’들의 매체이기도 했다. 소수자라는 개념이 단순히 적은 숫자를 가진 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디지털게임 초창기에 한국에서 게이머는 소수자에 가까웠다. 전자오락실은 불량한 이들이나 다니는 곳으로 낙인찍혔고,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엄연한 자영업장인 오락실에 학교 교사들이 들이닥쳐 ‘손님’인 학생 게이머들을 강제로 끌고나가는 영업방해 행위도 자연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뉴스와 신문에서는 연일 불량한 오락실과 게임 때문에 망가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쏟아냈고(이 부분은 아직도 유지되는 바 또한 있다) 게임은 눈치보면서 해야 하는, 말그대로 여가오락 문화 부문에서의 소수자 포지션이었다. < Back 소수자들의 게임에 대한 세 가지 소고 04 GG Vol. 22. 2. 10. 디지털게임은 한때 ‘소수자’들의 매체이기도 했다. 소수자라는 개념이 단순히 적은 숫자를 가진 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디지털게임 초창기에 한국에서 게이머는 소수자에 가까웠다. 전자오락실은 불량한 이들이나 다니는 곳으로 낙인찍혔고,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엄연한 자영업장인 오락실에 학교 교사들이 들이닥쳐 ‘손님’인 학생 게이머들을 강제로 끌고나가는 영업방해 행위도 자연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뉴스와 신문에서는 연일 불량한 오락실과 게임 때문에 망가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쏟아냈고(이 부분은 아직도 유지되는 바 또한 있다) 게임은 눈치보면서 해야 하는, 말그대로 여가오락 문화 부문에서의 소수자 포지션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디지털게임을 소수자들의 매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콘솔게임 같은, 한국에서 수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소수자라는 개념은 단지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분류하는 말은 아니다. 특히 급격히 게이머 범주가 넓어지기 시작한 모바일 시대 이후를 생각한다면 게임은 오히려 대중문화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 위상을 바꿔온 바 있었다. 대중문화콘텐츠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면서 디지털게임과 소수자의 문제는 좀더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대중문화라는 이름과 함께 하는 디지털게임의 이야기를 할 때 크게 세 맥락의 소수자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이 매체에 접근가능한 매체이용자로서의 접근성 관점에서 바라보는 소수자 문제이고, 두 번째는 이 매체가 콘텐츠 안에서 재현하고 재구성해내는 대상으로서의 소수자 문제다. 그리고 온라인게임이라는 특성에 따른, 게임 안에서 게이머들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재현을 통해 나타나는 소수자 문제가 마지막으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은 대중문화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단지 ‘모두가 즐긴다’는 말로 그 의미를 뭉뚱그려선 안된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등에서도 지속적으로 시도되었던,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매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실천과 개선의 방향까지를 대중문화로서의 매체는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더욱 넓어지는 게이머 저변 안에서 커진 덩치만큼 우리의 디지털게임은 대중문화로서 갖춰야 할 지향을 제대로 가지고 있는지, 또 그 실천이 얼마만큼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지를 고찰해 볼 때다. 접근성 관점에서의 소수자 이슈들 서구권의 게임연구들에서는 오랫동안 ‘비디오게임’의 주이용자층을 ‘젊은 백인 남성’이라는 그룹 안에서 살피며 게이머집단에서의 주류화와 그에 따른 마이너리티의 발생을 논의해온 바 있었다. 그러나 이용자집단의 문제는 게임 저변이 점차 넓어지면서 과거와는 사뭇 다른 형태로 게이머집단의 구성이 변화하는 흐름이 존재한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서구의 ‘젊은 백인 남성’에서 ‘백인’은 빠지게 되며, ‘젊은’ 또한 게이머집단이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에서 점차 희미한 정체성이 되어가는 중이다. 콘텐츠가 타겟으로 삼는 소비자집단이 호응하는 피드백 속에서 남성 중심의 게임콘텐츠와 게이머집단이라는 점은 여전히 주류집단의 존재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게임 플랫폼의 다양화와 모바일기기를 통한 대중화 속에서 남성중심적인 게임이라는 말도 과거만큼의 집중도를 보인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지는 추세다. 전반적인 대중화의 과정에서 오히려 두드러지는 것은 특유의 인터페이스로 인해 접근성 자체가 제한되는 경우인 장애인 게이밍, 혹은 노화나 미디어 리터러시 문제로 인해 접근이 어려워진 노년 게이밍과 같은 영역일 것이다. 여전히 손쉽게 게임에 접근할 수 없는 여러 환경들이 존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난 호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게임 접근성에 대한 고민들이 점차 누적되면서 아주 조금이나마 대중문화로서의 게임이 가져야 할 범용성의 위상에 대한 변화들도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매체의 재현에서 드러나는 소수자 문제 오랫동안 디지털게임이 주류 게이머가 아닌 대상을 향해 만들어낸 대상화된 재현의 문제는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받아온 주제였다. 수동적 대상이나 트로피처럼 등장하는 게임 속 여성의 문제, 존재 자체가 지워진 성소수자 문제, 비서구권 캐릭터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의 반복과 같은 문제들이 꾸준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고, 이는 2000년대 이후 디지털게임 시장이 소비자 확장의 상황을 맞이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오버워치>의 저격수 캐릭터 ‘아나’는 그런 변화를 상징할 만한 캐릭터다. 60대 노년 여성에 장애를 가진 비서구 아랍권 출신의 캐릭터는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라기보다는 마치 과거 인종차별과 대상화에 적극적이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변화한 양상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욱 넓어진 시장에서 대중문화콘텐츠로 어필하기 위해 이뤄진 시장적 조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의도가 어떤 것이건간에 게임에서의 소수자 재현 문제에 변화가 일어나는 확인 가능하다. <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가 리부트되면서 변화한 캐릭터나, 가 게임 내 NPC들의 인종적 다양성을 컴퓨터 사양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옵션을 추가하는 것과 같은 변화는 분명 소수자 재현 문제에 있어 유의미한 변화다.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변하지 않는 부분들도 적지 않다는 점 또한 공존한다. 게이머 저변의 확대로부터 비롯되는 시장의 압박에 의한 변화가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는 글로벌 릴리즈가 중심인 AAA급 대형 게임들에 한정된 변화이며, 대중문화로서의 게임콘텐츠 전반에 걸친 변화라고 이야기하기엔 이제 겨우 첫 발을 뗀 수준이라는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게이머 속에서의 소수자 문제 콘텐츠 내부에서 발생하는 소수자 이슈보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불거지는 이슈는 게이머 스스로로부터 발생하는 이슈들이다. 온라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멀티플레이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디지털게임은 생산자로부터 소비자로 이어지는 메시징 이상으로 게이머간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나타나는 맥락이 더욱 높은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게임에서 수시로 나타나는 여성, 성소수자, 인종, 장애인에 대한 비하들부터 게임 캐릭터 등을 활용한 2차창작에 이르기까지 게이머들이 직접 생산하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폭넓게 나타난다. 게임 규칙 내적으로서의 트롤링이나 일반적인 욕설, 모욕이 아니라면 아직까지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발언이나 혐오발언 등이 별도로 제재받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는 않다. 현실의 현행법상에서도 차별금지법 등이 입법에서 난항을 겪는 것을 생각하면 게임 속에서의 소수자 차별 문제는 더 험난한 과정을 거칠 것이라는 예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된 콘텐츠 이상으로 이용자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소수자에 대한 대상화, 혐오 문제는 디지털게임과 소수자 문제를 다룰 때 더욱 큰 영향력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전망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다. 왜 게임이 소수자 문제를 신경써야 하는가 접근성, 콘텐츠, 상호작용 세 측면 모두에 걸쳐 디지털게임과 소수자 문제를 살펴보는 이유는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결국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모두의 게임’이라는 대중문화로서의 디지털게임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소수집단에 의해 향유되는 것이 아닌, 이름 그대로 ‘대중’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매체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대중 전반에 끼치는 영향력과 그에 따라 해당 매체가 짊어져야 할 사회적 책무가 요구된다. ‘게임은 문화다’ 라는 말은 실제 한국사회를 이루는 대중문화의 일각으로 디지털게임이 자리하고자 할 때 요구되는 최소한의 윤리와 공공성을 갖추고자 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대중화 시대를 맞아 게임이 갖게 된 영향력은 기존에 비할 바 없을 정도로 커졌다. 영향력이 커질수록 이 매체가 짊어져야 할 책임과 부담 또한 막중해질 수 밖에 없다. 디지털게임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한 장벽 허물기, 게임 콘텐츠 안에서 사회적으로 소수자인 이들을 향한 부당한 표현을 줄이기, 그리고 게이머들 스스로가 이 매체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나와 다른 누군가에게 무례가 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기. 이런 여러 요소들이 함께 할 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당당하게 ‘게임은 문화다’라는 말을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실천이 따라가지 않는 한, 디지털게임은 적어도 좋은 의미로의 문화에 다다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산업계와 이용자 모두 이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인터뷰] TRPG로 미술하기: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제작자 인터뷰
지난 6월과 7월, 전시장 ‘팩션’에서는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라는 게임의 형식과 관객 참여형 예술을 결합한 전시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이 열렸다. 전시장을 활용해 약 한시간 반 동안 진행되는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TRPG 게임 마스터가 되고 게임의 참여자인 관객들은 재난이 닥친 고향에 돌아왔다는 설정의 캐릭터가 되어 함께 이야기를 구성한다. < Back [인터뷰] TRPG로 미술하기: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제작자 인터뷰 19 GG Vol. 24. 8. 10.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게임 사회> 전시가 보여주듯, 현재 예술 장 내에서는 ‘전시로서의 게임’이라는 새로운 실험들이 다양한 기획을 통해 펼쳐지고 있다. 지난 6월과 7월, 전시장 ‘팩션’에서는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라는 게임의 형식과 관객 참여형 예술을 결합한 전시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이 열렸다. 전시장을 활용해 약 한시간 반 동안 진행되는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TRPG 게임 마스터가 되고 게임의 참여자인 관객들은 재난이 닥친 고향에 돌아왔다는 설정의 캐릭터가 되어 함께 이야기를 구성한다. 모든 플레이어들의 활동은 전시장 벽에 설치된 지도(게임 맵)를 통해 기록된다. 전시 초기에 텅 비어있었던 지도는 게임의 참여자이자 전시의 또다른 생산자인 관객들의 경험들로 채워지고, 이후 회차를 플레이하는 새로운 관객들에게 다시 영향을 주었다. GG에서는 이와 같은 기획을 꾸린 작가 상희와 성훈을 만나 ‘대화형 게임’이라는 전시의 기획의도와 진행과정, 의미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경혁 편집장 :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우선 작가님들 본인에 대한 소개를 해주시고요, 전시 제목과 전시의 의의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상희: 저는 상희라는 이름으로 작업하는 미디어 아티스트입니다. 2023년에 만들었던 <원룸바벨>이라는 VR 작업을 계기로, 게임 형식을 차용하는 작업을 계속해서 만들었습니다.. 게임의 디자인적 요소를 작업에서 활용할 때 제가 만들려는 이야기나 전하고 싶은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가상의 내러티브를 경험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게임같은 매체가 없다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제 작업에서도 그런 식으로 관객들에게 경험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성훈: 저는 성훈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면서, 상희님 작업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역시 게임의 시나리오를 맡았습니다. 게임 속에 나타나는 공간의 특수성에 특히 관심을 두고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상희: 본 전시의 제목은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이며,구요. 지금 전시장에 설치되어 있고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이 거대한 지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만나게 되는 이벤트를 저희가 ‘조우’라고 지칭하는데, 그 조우들의 결과가 (지도에) 계속해서 축적되고 기록되는 형식이어서 그걸 전시의 메인 이름으로 하게 됐어요. 전시를 준비할 때 기획자들과 논의하면서 ‘지도’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지도에서 대화가 일어나는 과정이나 이야기가 기록된다는 것이 제일 중요했기 때문에 전시회의 메인 제목이 되었고, 부제인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은 이 지도를 무대로 사용해서 플레이하게 되는 대화형 게임의 이름입니다. 성훈 작가님과 저, 김지연 디자이너가 함께 만든 게임이고요. TRPG의 형식을 차용해서 만든 게임이라 디지털적인 요소가 부재한 ‘오프라인 보드게임’을 지향했습니다. 퍼포머와 대화를 하면서 플레이하게 되는 게임입니다. 이경혁 편집장: 어떻게 보면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은 전시에서 사용하는 게임의 이름인 거고, 이 전시 자체는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군요. 제가 첫 회차에 플레이어로 참여를 하고, 지금 두 번째 방문을 하면서 비교해 보니 흥미로웠던 게 지도의 변화였습니다. 제가 처음 왔을 때는 이쪽(벽면)이 썰렁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상희: 맞아요. 그때만 해도 게임을 끝까지 가신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경혁님과 일행분들이 바다로 처음으로 탈출하셨었죠. 이경혁 편집장: 그런 걸 보면 결국 이 전시가 끝나고 가장 강렬하게 남는 건 이 지도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지도와 관련된 이야기는 조금 뒤에 하기로 하고요, 우선 이 게임의 배경이 일종의 재난 상황에 처한 지방 도시에서, 흰개미라는 인간 외적 존재와의 만남과 분투를 테마로 하고 있는데요. 게임의 장르적 특성을 논의하기에 앞서 이런 배경 상황을 구성하셨던 맥락이 궁금합니다. 상희: 우선, 일단은 저희 둘 다 같은 부산 출신인데요. 그러다 보니 작업을 할 때 항상 관심이 가는 주제가 ‘고향'과 고향을 떠나와서 다른 도시에서 살게 되는 사람들의 정서였어요. 제가 작업했던 <원룸바벨>도 서울 원룸에서 살고 있는 2-30대 청년들의 공간과 정서를 VR로 번안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런 얘기들이 계속 주제로 선택되는 것 같아요. 또 한편으로는 성훈 작가가 게임의 배경으로 지방 소도시와 벌레라는 주제를 선택했던 맥락도 있었어요. 성훈: 얼마 전에도 러브버그나 빈대가 서울에 등장했다는 뉴스들이 막 나왔다가 사라진 일이 있었잖아요. 도시 공간에서 벌레들이 철저히 방역의 대상으로 나타나고, ‘도시’와 ‘벌레’가 서로 적대적으로 묘사되는 방식에 흥미가 있었어요. 도시 공간에 빈대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21세기 서울에서 이게 말이 되냐, 서울이 빈대가 나오는 도시로 전락했다는 식의 반응들이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빈대를 모두 무서워했죠. 관련해서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던 르포 기사가 있는데요. 그 기사의 핵심은 빈대가 쪽방촌 등 주거 환경이 열악한 지역에 예전부터 항상 있었다는 점이에요. 빈대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도시 빈민의 공간에 항상 공존하고 있었는데 도시의 주요 거리에 출몰하면서 갑자기 조명을 받게 되었다는 얘기였어요. 그런 반응을 보면서, 도시와 벌레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경혁 편집장: 사실 이 게임에 나오는 벌레들은 (인간 플레이어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나요? 상희: 맞아요. 물론 게임 속에서는 기존의 문명을 완전히 파괴하고 소진시키며, 그 폐허 속에 자신들의 도시를 세우지만, 한편으로는 흰개미라는 종 자체가 공생을 추구하기에 자신들이 만든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을 공격하지는 않아요.. 자신의 집이 그들의 집이기도 함을 받아들인다면, 살게 내버려 둡니다. 성훈: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 전개에 따라 흰개미는 어떤 플레이어들을 다른 존재로 바꿔놓을 수도 있습니다. 이 다름이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의 판단은 생각하기에 달린 것 같아요. 인간에게 이질적인 어떤 생물에게 우리가 보기에 인간적인 방식으로 행동해주기를, 인간적인 방식으로 호의를 표현해주기를 요구할 수는 없지요. 그들은 자기들만의 어떤 논리가 있고, 인간들은 그게 우리한테 호의적이냐 아니면 적대적이냐 이런 종류의 판단 기준들을 각자 제멋대로 갖고 있을 뿐인거고요. 그래서 퍼포먼스를 계속하면서 인간의 이해 범주를 넘어선 일들이 다른 생물 종에 의해 일어날 때 어떤 식으로 사람들이 반응할지 이런 것들을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전시와 게임의 형식과 장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TRPG를 이용한 대화형 게임’이라는 형식을 구상하셨는데요, 원래부터 TRPG를 플레이하신 경험이 있었나요? 상희: TRPG 자체는 작년 초쯤에 시작했어요. 저도 보드게임을 많이 하니까 그런 게임이 있다는 거는 알고 있었는데, 작년에 <발더스 게이트 3>을 길게 플레이하면서 DND(던전 앤 드래곤) 장르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발더스 게이트>가 특히 TRPG 시스템의 UI 구현이 잘 되어 있고, 저에게는 저희가 지금 즐기고 있는 RPG 같은 게임들이 어떤 역사 속에서 발전해 왔는지를 알게 된 게임이었어요. TRPG도 원래는 RPG라고 불리다가 디지털 RPG 게임들이 등장하면서 앞에 T가 붙었다고 하더라고요. 제일 초창기의 게임들을 찾아보고 싶었고, ‘초기의 RPG'로서 어떤 근원적인 경험이 있을 것 같아서 그때 리서치 개념으로 TRPG 플레이를 시작했어요. TRPG 자체는 숙련도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사실 진입하기가 되게 어려운 장르였어요. 처음에는 (TRPG 커뮤니티에) 가서 ‘저희 좀 시켜주십시오’ 했어요. 사실 이분들도 넓은 아량으로 해주시는 거거든요, 왜냐면 저희가 초보라서 못 하고 저희랑 하면 재미없기 때문인데(웃음). 다행히 저희가 갔던 커뮤니티는 소위 뉴비들을 끌어주는 분위기가 있었고. 커뮤니티 자체가 포용적인 분위기여서 좋다고 느껴졌어요. ‘대화’를 하는 게임이다 보니 그런 (포용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모이는 걸까 싶었어요. 이경혁 편집장: 사실 <발더스 게이트> 이후로 TRPG 커뮤니티들에 굉장히 많은 유입이 있었죠. 그래서 그렇다면 원조는 뭘까 하고 궁금해지기 시작하신 거네요.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의 출발이 된 게임이 <발더스 게이트>였다면 ‘나레이터’의 존재도 꽤 큰 역할을 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다른 게임과 달리 <발더스 게이트>에서는 계속 나레이터가 나오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전시에서 나레이터 역할을 하시잖아요? 그 역할을 TRPG를 특별히 오래 해오신 게 아니라면 사실 하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 그걸 하면서 어떠셨어요? 상희: 저는 일단 제 자신이 부끄러움이 많은 타입이라서. 근데 사실 마스터가 부끄러움이 많으면 안 되고 뻔뻔해야 되고, 거의 <발더스 게이트>의 나레이터 같은 연극적인 태도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렇게 해야 참여자들이 따라오고 몰입을 해요. 저희 전시에서 주요 타겟으로 삼고 전달 방식을 고민했던 관객들은 TRPG를 처음 해보거나 이러한 형식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미술 전시를 보러 오는 일반 관객들이었어요. 왜냐하면 이런 류의 게임에 익숙하신 분들은 금방 잘 따라와 주실 테니까요. 이런 작업에 익숙치 않은 일반 관객분들과 함께 하려면 저희의 역량이 또 되게 중요했어요. 저희가 잘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시거든요. 그래서 테스팅 플레이를 하면서 많이 연습했고, 성훈 작가가 진짜 잘 하셔서 제가 이 분을 보면서 많이 배웠어요. 저 같은 경우는 대사를 말하고 뒤에서 묘사하는 방식의 관찰을 하는 편인데, 성훈 작가는 굉장히 캐릭터처럼 연기도 하고 말을 하더라고요. 제가 플레이어로 참여했을 때 훨씬 경험이 좋았어요. 재밌고 잘 따라가게 되고, 저도 이런 식으로 배워서 시도해 보고. 성훈: 연기를 하지 않고 오히려 플레이어들의 이야기를 더 끌어내려고 하는 스타일의 마스터도 있어요. 그런 마스터 개개인의 특성이 달라진다는 것도 TRPG의 큰 매력인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이 전시회 같은 경우에는 한 사람이 마스터를 고정으로 쭉 이어나가셨던 건가요? 상희: 저랑 (성훈 작가가) 번갈아서 마스터를 했어요. 중간중간 지도가 변화하는 과정도 메모로 업데이트 하고, 저희가 대개 플레이할 때 둘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되는지 서로 체크했구요. 이경혁 편집장: 말씀하셨던 것처럼 사실 이 전시에 오시는 분들 중에 TRPG를 처음 해보는 사람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분들은 이 문법 자체를 모르셨을 것 같아요. 상희: 네, TRPG에 관심이 있어서 오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과연 TRPG라는 게 뭔지 궁금해서 오신 분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저희가 보여드리고 싶었던 건, 이게 ‘TRPG 전시’가 아니잖아요. TRPG를 차용한 ‘대화형 게임’이라는 걸 플레이하며 ‘대화형 지도’를 만들어 나가는 거니까. 일반 관객들에게 경험되었을 때도 저는 이게 분명히 재밌는 형식이 될 거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한편으로는 ‘이게 그래서 진짜 재밌을까, 사람들이 이걸 금방 캐치해서 따라올 수 있을까’, 이런 걱정도 컸었는데요. 생각보다 정말 다들 재밌게 하셨어요. 이런 대화라는 형식 자체가 정말 직관적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디지털 게임은 항상 어떤 조작을 익혀야 하는 일종의 ‘배리어’가 느껴지는 형식이잖아요. 이번 전시는 같이 천천히 얘기하면서 만들어 나가는 성격이다 보니 곧잘 잘 하셨던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전시를 진행하면서 들어오는 사람들도 너무 제각각이었을 것 같은데요. 퍼포먼스를 같이 한 관객 중에 기억에 남는 관객이 좀 있으셨나요? 상희: 최근에 플레이하셔서 기억이 나는 분이 있는데요. 지금 보시는 지도에 있는 이 표시는 이전 회차 플레이어를 뜻하거든요. 이 사람이 마지막에 (플레이가) 끝나면 이런 마크를 남기면서 마지막 말을 남기고, 여기에 이 사람의 유해와 같은 육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는데. 다음 회차 플레이어가 이걸 확인하면 저희가 알려 드려요. 이 사람은 지금 이런 상태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가지고 갈 수 있다고 했는데 아무도 그렇게 하신 분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떤 분이 ‘저 이 사람 머리를 잘라갈게요’ 하시는 거예요(웃음). 실제 시체가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시신(이라는 설정)이니까 사람들이 일단 그대로 두거나 건드리더라도 조심스럽게 하는데, 그분은 도시에 이 사람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니까 잘라간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 결정이 굉장히 재미있는 전개였어요. 그리고 성훈 작가가 이 전시의 전체적인 스토리라인과 세계관을 구축했는데요, 게임 내 NPC들 중에 같이 데리고 도시를 나가거나 고립 상태에서 구출할 수 있는 NPC들도 있거든요. 예를 들면 지금 (지도의 동쪽) 연립주택에 아이 NPC가 있는데, 이게 이 쪽(서쪽)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 머무는 엄마의 아들이에요. 여기서 만나면 우리 아들을 구해 와달라고 부탁을 하거든요. 근데 아무도 저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으시더라구요. 아이를 데리고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지 않거나, 돌아 가다가 게임 오버가 되기도 하구요. 그런데 언젠가 소방관으로 플레이하셨던 분이 그 아이 NPC와 같이 탈출했던 게 기억에 남았어요. 다들 저 아이는 못 나가겠다고 반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구해주시더라고요. 그 아이를 구하려면 소지품 란을 아이가 가지고 있는 공룡 인형으로 가득 채워야 해서, 자기 물건과 장비를 다 버려야 되는데 그래도 그 패널티를 안고 가시는 게 좋았어요. 이경혁 편집장: 살다 보면 참 커뮤니케이션이 원하는 대로 안 될 때도 많잖아요. 전시에서 관객들과 서로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한 난점들은 없으셨나요? 상희: 이 퍼포먼스에 오시는 분들 자체가 어느 정도 이 게임을 하고 싶어하거나 관심이 있는 분들이다 보니까, 그래도 적극적으로 개입과 참여를 하려고 하시는 편이에요. 성훈: 어떤 분들의 경우 캐릭터가 독특하신 경우도 있었어요. 자체적인 캐릭터가 사람들과 만나기를 피하고 굉장히 과묵하다는 설정이었거든요. 이 세계는 사람들과 많이 만나고, 어떤 이벤트를 적극적으로 겪으면서 더 재미를 찾아갈 수 있는 구조인데, 그분은 '은신 플레이'처럼 게임 진행을 하셨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가 마스터로서 어떤 방식으로 재미를 제공을 해야 되는지, 그 분의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저도 이 전시에 참여해서 세 명이서 팀 플레이를 했었잖아요? 그때 약간 짜증 났던 건(웃음), 우리 멤버가 클리어를 목적으로 하려고 (게임 내 상호작용을) 전부 피하는 거에요. 그때 저희가 한 명이 플레이를 하고 한 명이 조수고, 저는 ‘마음의 목소리’를 담당하는 구조였죠. 상호작용을 안 하려고 할 때마다 저는 ‘앉아봐’, ‘그 상자 제발 열어봐’ ‘말좀 걸어봐’ 그랬던 기억이 나는데(웃음). 근데 그걸 보면서 저는, 만약에 어떤 사람들이라면 전시의 본래 목적과는 다르게, 일종의 하이스코어 경쟁처럼 게임을 최단 시간으로 돌파하려고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 경우는 다행히 안 겪으신 것 같아요. 상희: 네, 맞아요. 그리고 게임 관련 설명과 안내를 드릴 때, 이 게임이 승리라던가 패배라는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 참여자와 마스터 둘이 되게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씀을 드리니까 다들 게임 내에서 자기 캐릭터만의 얘기를 구축하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아까 편집장님 팀의 멤버 분도, ‘살아나갈 것이다’라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집념’이라는 캐릭터를 갖추신 거죠. *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에서 전시 참여자이자 게임의 플레이어들이 채워나갔던 지도. 회차가 반복될수록 지도의 내용은 풍부해지고 이후 회차의 플레이에 영향을 준다. 이경혁 편집장: 그런 걸 보면 게임 기획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준비해야 하는 거네요. 1시간 반의 플레이로는 사실 지도의 모든 영역을 다 볼 수는 없고, 플레이가 계속 누적되다 보면 사람들이 지도 안에서 절대 안 가는 어떤 영역이 생기게 될 텐데요. 기획자 입장에선 정말 정성을 다해 준비한 거라 조바심이 나실 것 같기도 해요. 상희: 맞아요. 전시 처음에 지도가 많이 안 밝혀졌을 때는 끝까지 못 가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지만, 오픈 월드 류의 게임을 할 때 그동안 가보지 못한 영역, 지도 상에서 안개 혹은 어둠으로 표현되는 영역을 빛으로 밝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이 ‘여기 아무도 안 갔네요’, 하면서 가시기도 하고, 결국에는 그런 식으로 맵이 다 밝혀졌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결국 이 지도 데이터의 누적이라는 게, 그냥 지도에만 추가되는 게 아니라 다음 번 플레이에도 영향을 주는 형태인 것이고. 앞선 세계의 변화가 뒷 세계의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는 형태로 설계가 되는거네요. 상희: 맞아요. 예를 들어서 아까 말씀드린 퀘스트에서 아들을 구하게 되면 패스트푸드점의 엄마가 같이 도시를 떠나가게 되는데, 그 이후에 이곳에 온 사람은 이 엄마가 남기고 간 쪽지만 읽을 수 있는 거예요. ‘아이를 구해줘서 고마워요. 혹시 못 보셨을까 봐 여기 쪽지를 두고 갑니다.' 이렇게요. 그리고 이 엄마의 아이가 원래는 강박이 있는 아이여서 재료별로 햄버거를 계속 분류하고 있었는데, (이후 회차에서는) 분류하던 흔적만 남아 있고 그걸 했던 사람이 누구였고 이걸 왜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게 되는 거죠. 이경혁 편집장: 그러면 혹시 관객 중에 2회차 플레이를 해본 분들은 좀 있으신가요? 상희: 있긴 있었지만 전부 테스트 플레이(참여자)였구요. 다만 저희가 한 이틀 정도는 오픈 세션이란 걸 열어서 아예 플레이를 공개적으로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거든요. 그때 관람객 한 분이 두 회차를 연달아 보고 가셨어요. 두 번을 관람하니까, 이를테면 (첫 회차에) 어느 길이 무너졌는데, 그 다음 회차에 같은 길목에 도착한 사람은 그 무너진 길을 파헤쳐서 건너가야 되는 이런 연속된 사건들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부분이 좋았다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이경혁 편집장: 그걸 기록하는 것도 두 분이 굉장히 노고를 들이셨을 것 같은데요. 상희: 게임상의 큰 변화는 지도상의 기호로 계속 표시를 하기 때문에 기억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희 책상에 지도를 붙인 판넬이 있어요., 지금까지의 정보를 기록하고 새로운 변화를 써놓는 (마스터 전용) 판넬입니다.. 거기에 기억해야 되는 정보들, 예를 들면 특정 물건 3개를 요구하는데 그 3개를 다 갖다 줘야 떠나는 어떤 NPC의 경우에,. 누가 무엇을 주었다, 이런 식으로 업데이트해 놓고. 쪽지나 포스트잇 같은 걸로 표시하기도 해요. 이경혁 편집장: 보통은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면 이렇게 손을 뗄 수가 있는데, 이거는 (지속적으로 참여해야 된다는 점에서) 작가가 일종의 오브제가 아닌가 싶네요. 상희: 그렇죠. 작가도 자꾸 작업에 참여해야 되고, 전시기간에 계속 상주하게 되고요. 근데 그런 작업이 저한테는 계속 관객들과 참여적으로 연계된다는 점에서 재미있는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저는 이 작품의 의미를 생각할 때 이런 점을 흥미롭게 짚어볼 것 같아요. ‘전시를 시작할 때와 전시를 닫고 나서 작가에게는 무엇이 변했을까’ 그게 굉장히 궁금하거든요. 아직 완전히 전시가 닫힌 것은 아니지만, 막바지에 달하고 있는 입장에서 작가님 스스로가 자신을 성찰했을 때, 무엇이 변화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상희: 일단 저에게 있어선 관객들과의 관계가 많이 변화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저는 기존에 해온 작업들도 인터렉티브한 성격이 있다보니, 관객들이 와서 직접 플레이하셔야 하는 작업들이 많아요. 전시장에는 언제나 제가 있었어요. 제가 (프로그램) 개발을 했다 보니까, 갑자기 오류가 나면 고쳐드리거나 플레이 방식에 대해 안내를 드려야 하다보니 전시장에 있게 되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관객분들이 전시를 끝내고 나서 감상을 나눠주는 걸 어려워하시는 편이에요. 전시장이란 공간 자체가 그런 걸 어렵게 만들다 보니 당연하긴 해요. (작가와 관객 사이의) 어떤 권위적인 분위기가 있고. 제가 궁금하다고 해서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거죠. ‘어떠셨어요?’ 하면 ‘아, 재밌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이러고 바로 도망치듯 하시고(웃음). 그런게 항상 저도 아쉽고, 관객들도 당시 말을 못해서 아쉬우신 게 있을 것 같고요. 그런데 이 작업을 하면서 제일 좋았던 건, 1시간 반 동안 계속 플레이를 하면서 (관객과) 단독적으로 관계를 맺잖아요. 그 안에서 생성되는 라포(rapport)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게임이 끝나고 나면 너무 자연스럽게 이게 어땠는지 감상을 남기시는 거예요. 어떤 게 재밌었는지에 대해서도 서로 얘기를 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여기 섹션(전시장 한 쪽의 공간)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나서 관객들끼리 소회를 공유하는 목적으로 만들어둔 거거든요. 이 공간의 모티브가 된 게, TRPG 하시는 분들이 게임이 끝나고 나면 그 게임이 어땠다고 합평회처럼 얘기를 하세요. 그런 문화가 매우 좋았어서 저희도 전시에 도입했어요. 관객분들이랑 더욱 깊게 관계 맺는 형식이다 보니 저에게도 굉장히 큰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어떻게 보면 이 전시가, 메인 게임의 앞에 프리(pre-) 단계가 있고 포스트(post-) 단계가 있는 것 같아요. 프리 단계에서는 게임 참여자들에게 전날 설문을 한번 하시잖아요. 이렇게 전시 앞뒤로 프리 단계와 포스트 단계를 두고 보면, 작가 입장에서는 관객 개개인을 좀 더 보게 되지 않습니까? 어떤가요? 관객분들의 전시 관람 전과 관람 후의 변화 같은 것도 좀 느끼시는지요? 상희: 일단 관람 전에는 (게임을 플레이할) 사람들의 플레이 성향을 알고 싶어서 설문을 조사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게임 내 어떤 캐릭터가 어울릴지를 골라드리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질문에 답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실제로 이 ‘고향’이라는 곳에 돌아와서 플레이하게 되는지를 지켜보는 과정이 즐거웠고. 그 사람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던 감정들이 (플레이를 하면서) 카타르시스가 되어서 다 풀리고, 후반부에는 또 같이 정리하면서 얘기하는 과정들이 좋았던 것 같아요. * 게임에 참여하는 플레이어들은 사전 설문을 통해 캐릭터를 구성하고, 플레이 종료 후에는 각자의 개인적 경험과 소회를 집단적 궤적으로 모아 나간다. 이경혁 편집장: 사실 어떻게 보면 장르적으로는 굉장히 큰 도전을 하신 것 같아요. 말씀하신 대로 이 전시의 게임이 TRPG를 베이스로 했지만, TRPG를 하려면 아까 말씀하셨듯 보통 TRPG 카페를 가잖아요. 실제 작업을 준비하시면서, TRPG를 모티브로 했지만 이게 ‘퍼포먼스’로서 나오기 위해서는 어떤 특징이 있어야 된다라는 생각을 아마 하셨을 것 같은데. 무엇을 더 강조하려고 하셨을까요? 상희: 우선은 현실적인 완결성이 중요했어요.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만들다가도, 1시간 반의 러닝타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무조건 끝나야 되는 형식을 만들고자 했고요. 그리고 퍼포먼스 형식이니까 플레이함에 있어서 ‘룰’을 최소화하고자 했어요. 룰이 너무 많아서 생길 이해의 어려움을 줄였고, 룰에 대해서도 실제로 설명을 많이 안 드립니다. 참여자들이 행동을 하나씩 할 때마다 조금씩 알려드려요. 어떤 분께서 ‘저 이렇게 하고 싶어요’, 행동을 제안하시면 그것을 주사위를 굴려서 확인해 봅시다 라고 하면서, 점진적으로 계속 룰을 알려드리고 있어요. 그렇게 해도 다 알려드릴 수 있는 룰이어서. 원래 보드게임들은 룰 설명만 1시간 하고 난 뒤 플레이를 시작하는 느낌이잖아요. 이 전시에서는 그런 게 없이, 어떤 장벽 없이 관객들이 바로 플레이할 수 있는 그런 직관적인 플레이를 만들려고 신경을 썼습니다. 성훈: 저는 이 전시를 퍼포먼스 차원에서도 얘기해보고 싶은데요. 공연예술의 경우 똑같은 공연을 10번씩 보러 가는 문화도 있잖아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항상 매번 공연이 다 조금씩 다르다라는 얘기를 듣는데. 그런 것처럼 이 전시도 어떤 의미에서 ‘공연’이라고 할까요? 이 전시가 그 공연의 매번 다른 특성을 극대화한 걸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매번 갈 때마다 실제 인간이 진행하고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용이) 조금씩 다르고. 절대 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가 없고, 매번 지도가 바뀌어 나가고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고, 스티커이기 때문에 뗄 수가 없잖아요. 그런 형식에서 퍼포먼스적 측면이 접목되었다고 생각해요 이경혁 편집장: TRPG라는 것을 상징하는 게 일종의 ‘룰 북’이기도 하잖아요. 룰 북의 두께만 봐도 이걸 언제 읽나 고민이 되긴 하더라구요. 상희: 맞아요. 저희 게임도 일종의 가제본처럼 룰 북을 만든 게 있거든요. 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도 이 정도 두께가 금방 나오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장벽이 좀 있는 것 같아요. 룰 북은 일단 가제로 만든 거고요, 저희가 좀더 정리해서 아예 보드게임으로 출시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이 전시의 지도 형식 자체도 보드게임에서 착용을 했거든요. '레거시 보드게임'이라고 해서 한 번만 플레이하는 보드게임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마이 시티> 같은 게임의 경우 플레이어별로 맵을 밟으면 그걸 스티커를 붙이면서 계속 변형시키는 형식이거든요. 많은 레거시 보드게임이 그런 일회적 형식을 따릅니다. 이 작업도 결국에 맵을 변형시켜서 똑같은 게임 플레이의 반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거잖아요. 근데 한편으로는 그게 참여한 플레이어와 저희만 알 수 있는 경험이라는 점에서 플레이어들에게 특별한 경험이기도 해요. 이 맵을 보면 '아, 이때 내가 이렇게 해서 맵을 바꿨었지',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런 형식을 따와서 뭔가를 붙이면서 계속 흔적을 남기는 형태로 이 전시를 만들고 싶었는데요. 정말 보드게임을 출시하면 그런 레거시 보드게임의 형태로 출간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 이경혁 편집장: 이 전시는 굳이 미술과 음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 본다면, 음악에 가깝지 않나 싶은데요. 고정된 악보가 있고, 매번 연주마다 애드립과 카덴차가 나오는 거죠. 심지어 플레이리스트는 이미 정해져 있고. 그러니까 이건 그냥 콘서트라고 불러야 되는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아까 듣다가 생각난 질문인데요, 원래 (작가님이) 디지털 개발을 하셨었지요. 첫 작품도 디지털로 시작을 하셨는데, 언-디지털로 넘어온 작품을 택하시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아까 간단하게는 TRPG에 관심이 생겼다고 해주셨는데요. 실제로 게임을 만들어보면, 같은 게임 제작 방법론이라고는 하지만 어딘가부터는 서로 완전히 다른 부분들도 있잖아요. 상희: 처음에 했던 디지털 작업들은 3D 그래픽을 기반으로 하고, 게임 엔진을 사용해서 만들어야 하는 작업이잖아요. 이걸 만들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요새 대형 제작사에서 나오는 게임들을 보면, 그래픽이 나날이 발전되는 정도가 차원을 달리 하잖아요. 현실과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지고 정교해지고, 엄청 많은 자본을 투여해서 만들어지는 형식이지요. 그런 그래픽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한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런 그래픽들이 공허하다는 감각도 있었어요. 거기에 어떤 이야기들이 더 있을 수 있을까 고민도 들었고요. 저희도 게임을 만들다 보면 어떤 그래픽적인 스펙타클에 게임을 조응하게끔 만들어야 하고, 화려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압박이 있기도 한데요. 그런데 그게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의 형식은 아니었어요. 반면, TRPG라는 장르는 뭔가 그래픽적인 게 거의 없는 상태에서 그냥 이야기를 만들면서 플레이하는 형식이라는 점이 재밌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 전시를 담당했던 김지연 디자이너와 초기에 같이 작업을 하면서 플레이 테스팅을 정말 많이 했어요. 이 작업에서 저에게 제일 중요했던 건 지도였기 때문에, 저는 초기엔 일종의 게임 월드처럼 지도를 자세한 형식으로 만들고 싶어했어요. 그때 김지연 디자이너가 되게 중요한 지점을 짚어줬던 게, ‘지도는 오히려 훨씬 더 단순해야 된다’는 거였어요. 요소가 많이 없어야 된다. 왜냐하면 TRPG를 플레이할 때 우리가 어떤 시각적인 게 많이 없어야 상상을 더 할 수 있고 그게 더 재미있기 때문에.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서, 김지연 디자이너가 시각화를 해줘서 만든 게 지금 개미굴 같은 이 지도의 형식이에요. 그래서 게임이 어떤 시각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외하더라도 참여자의 상상력을 이용한다면 오히려 더 재밌게 플레이할 수 있구나 싶었어요. 예전에 김지연 디자이너가 토크 때 ‘우리의 최고의 GPU는 인간의 뇌다’라는 얘기를 했었는데요. 결국에 저희가 상상했을 때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고 얘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에서는 시각적인 부분은 오히려 (과거로) 회귀해서 굉장히 아날로그적인 작업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 작가님들이 이 작업을 준비하시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뭘까를 생각해 봤는데요. 시간적인 제약도 있고, 공간적인 제약도 있죠. 제가 궁금해지는 건 굉장히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이러한 전시도 공짜는 아니에요. 이 작업의 물리적 베이스, 다시 말해 소요 비용이나, 펀딩이나 후원이 어떻게 들어왔었는지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상희: 우선, 지금 이 공간은 <팩션>이라는 전시공간이고 이 전시는 여기서 열린 공모를 통해 지원을 받았어요. 그리고 저는 여기서 제일 큰 비용이 뭐였냐 하면 결국 ‘저희’였다고 생각하거든요(웃음). 저희의 몸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걸 때우는 방식이었고. 그래서 (전시 공간은) 무조건 집에서 가까워야 되고, 자주 와서 이곳을 계속 보수할 수 있고, 공간을 관리하고 관객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여야 해서 이곳 삼선동에서 전시를 하기로 결정했구요. 비용 같은 경우에는 다 자비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원래 펀딩을 받으려고 했지만, 제가 다른 작업 펀딩을 받고 싶은 게 있어서 그걸 먼저 냈었고. 이 전시는 저희 생각으로는 기획이 대박이기 때문에 무엇을 내도 다 뽑힐 것이라 기대를 했지만(웃음) 제작비를 따오겠다 했는데 못 딴 거죠. 그래서 저희 돈으로 했는데 또 생각보다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들지는 않았어요. 저희가 다 직접 만들고 한 게 있어서. 이경혁 편집장: 저는 당연히 이 전시도 다른 곳에서 펀딩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상희: 그렇죠, 그래서 저희는 후속 지원을 고려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저희의 기획이 이런 형식을 잘 이해하시는 분들께는 신선하고 재밌게 느껴졌겠지만, 한편으로 펀딩을 해 주시는 분들이나 지원 프로그램 심사위원들에게는, 특히 TRPG 자체를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래픽이 없는데 대화로 게임을 한다고? 도대체 무슨 소리지?’ 이렇게 난해하게 들리셨을 것 같기도 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저는 지금처럼 (전시를 통해) 결과가 완전히 다 나왔고 우리 기획이 어떤 건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마련된 상태에서, 후속 지원을 요청하거나 이 전시를 완전히 대중적인 퍼블리시를 할 수 있는 포맷으로 지원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해요. 지금은 미술 전시회 형식으로만 하고 있는데, 저희가 추후 하고 싶은 건 아예 ‘게임’으로 출시하는 것이에요. 일례로 여기 붙어 있는 지도도 보드게임 컴포넌트처럼 다 들어 있는 것이고. 이 보드게임 패키지를 사시면 플레이를 어디서든 직접 할 수 있게 되고 그때는 어떤 물리적인 제약도 거의 없어지는 거죠. 엄청 긴 세션을 하셔도 되는 것이고, 각자의 플레이 방식대로 맞춰서 게임하실 수 있게 될 거에요. 다른 한편으로는 기획이 맞는다면 지역에 가서 일종의 팝업으로 해볼 생각도 했었어요. 이 게임이 설치형이잖아요, 그리고 광주라든가 부산에서는 요새 그런 형식의 전시를 많이 하니까. 그렇게 팝업을 통해 지방에서 TRPG 하시는 분들과 협업해서, 계속해서 더 큰 지도를 설치하고 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성훈: 전시에 와주셨던 큐레이터 중 한 분이 재밌는 얘기를 해 주셨는데요. 이 게임이 한국의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굉장히 지역적인 맥락을 가지고 오려고 하니까, 차라리 실제로 어떤 도시에 가서 그 도시의 랜드마크 등을 반영해서 만들어도 재미있겠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실제 매핑을 통해 굉장히 퍼블릭한 게임으로 만드는 거죠. 이경혁 편집장: 물리적 제약이 워낙 지금 크게 느껴지다 보니까 계속 이 게임의 물리적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뭘까를 생각을 하는데 그중에 가장 큰 부분이 펀딩인 것 같네요. 제일 좋은 것은 지자체의 예산을 가져오는 것 같은데요(웃음). 혹시, 미술계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상희: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고, 아무래도 완전히 모르는 이야기이다 보니 신선하다는 반응도 많았어요. 게임 디자인이라는 형식이나 게임 메카닉을 갖고 와서 기획한다는 것을 재밌어 하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고. 그리고 이 전시가 또 주목을 받는 게, 결국에는 지금의 어떤 (예술 관련) 이론이나 담론이 게임과 연관되어 있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행위성 같은 개념들은 굉장히 게임적이거든요, 한편으로 게임에 익숙한 사람들한테는 굉장히 당연한 얘기죠. 그런 것들이 미술적인 개념들과 이렇게 영합하면서 시너지가 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경혁 편집장: 최근 들어 확실히 미술계에서 게임을 베이스로 작업하는 경우가 정말 많아졌다고 느낍니다. 주변에 미술하는 분들이 게임 갖고 작업하시는 걸 보면 좀 어떠세요? 본인의 세대 근처에서, ‘게임’을 미술의 주요 소재로 쓰겠다라는 경향이 좀 있다고 느끼시는지요? 상희: 네, 그런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저희는 PC통신이 당연한 시대였고 초등학생 때부터 컴퓨터가 집에 있는 세대여서 디지털 게임을 많이 하기도 하고. 어떤 정서라든가 감성이 게임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세대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 기존에도 게임을 주제로 하는 작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싶어요. ‘게임을 사용한 작업이 예술의 형식이구나’(라는 인식이 생겼다). 그 전에 작업했던 사람들은 게임 제작자라는 인식이 좀 강했는데 최근에 ‘아트 게임’이라는 용어도 나오면서, 이게 예술 작업으로 보이게 된 건 최근의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경혁 편집장: 이제 (전시가) 거의 마무리가 됐지 않습니까? 전시가 끝나고 나면 지도는 향후에 어떻게 될까요? 상희: 일단 전시가 끝나고 나면 이 지도 자체는 철거를 잘 해서 손상 없이 떼갈 예정이고요. 그 전에 확대 촬영이라고 해서 사진이나 그림을 스캐너에 넣는 것처럼 촬영하는 기법이 있는데, 그걸로 지도 자체의 아카이빙을 잘 하려고 해요. 그때 (경혁님이) 오셨을 때도 이 게임이 되게 오프라인한 경험인데, 이걸 어떻게 디지털로 남길 것이고 이후 사람들이 여기에 어떻게 접근해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될 것 같다는 말씀을 해 주신 기억이 나요. 저희도 그래서 이 지도를 웹에 아카이빙하거나 이후에 이 게임을 어떤 식으로 퍼블리시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갖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사이즈를 보면 기존의 도록이나 영인본처럼 남길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은 들어요. 마지막으로, 이 기획 이후에 후속작처럼 기획하고 싶은 게임의 형태는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상희: <언-리얼리스트의 유럽>이라고 11월에 작업하려는 작품이 있어요. 유가가 더 비싸지고 환경세 등이 부과되는 근미래에 일반인이 해외여행을 가는 게 불가능해졌다는 설정이에요. 실제로도 그런 일들이 점점 일어나고 있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이제는 메타버스로 유럽 여행을 해야 되는 거죠. 그 여행을 실제로 VR 같은 기계, 실제 VR은 아니지만 VR이라 부르는 오락실 기계 같은 것에 앉아서 플레이하게 되는 형식의 게임인데요. 그래픽적 요소가 많이 없고 플레이어가 뭔가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하게 하면서 참여하는 그런 형식의 게임을 상상하고 있어요. 이번 작업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게 최소한의 그래픽을 가지고 (참여자들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어서 후속작에서도 그런 견지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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