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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레이티드 셀프: 놀이하는 인간이 시뮬레이션을 작동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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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3. 10. 10.

불확정성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현미경


세계는 불확정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생동하는 물리적 실재를 파악할 수 없으며, 단지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가정법에 따른 결과론, 혹은 결정론은 입자들의 불확정한 위치에 선형성을 부여하는 매력적인 시뮬레이션이다. ‘만약 ~라면 어땠을까?’ ‘만약 ~한다면 어떨까?’는 확률의 세계에서 확고한 인과관계를 부여할 뿐 아니라 대안적인 실재를 상상하도록 어떤 유희의 프레임을 제공한다. 만약 조선이 자생적 근대화에 성공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와 같은 질문을 통해 우리는 지적인 유희를 즐길 뿐 아니라 구체적인 시뮬레이션 절차들을 상정함으로써 확률의 시공간을 결과의 시공간으로 바꿔놓게 된다.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주사위 놀이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즐긴다. 놀이는 언제나 불확정성을 데카르트 좌표계로 옮겨놓는 과정이다. ‘시뮬레이션’은 모의실험인 동시에 유희의 근원이며, 인간은 오래 전부터 시뮬레이션과 유희를 접목시켰다. 가장 오래된 게임인 바둑과 장기는 전쟁에 대한 각기 시뮬레이션이었다. 그러나 전장은 현실과 마찬가지로 불확정성으로 가득하다. 날씨, 사기, 진군 속도, 무기, 영양상태, 파발마의 속도, 말의 종자 등 무수히 많은 변수들이 승패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최초의 전쟁 시뮬레이션은 전장의 요소들을 극도로 추상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폰은 앞으로만 전진하고, 나이트는 뛰어넘으며, 승패는 킹을 잡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킹을 쓰러트리는 순간 결정된다. 그러나 놀이하는 인간은 어두운 방 안의 헬륨 풍선의 위치를 찾는 사람처럼 좌표에 도달하기까지의 복잡한 과정을 즐긴다. 시뮬레이션은 추상화 될수록 명료해지지만, 명료함은 복잡성을 제거하므로 역설적이게도 유희를 완성하는 동시에 방해한다.


* H.G. 웰스가 1913년에 제작한 워게임 <Little Wars>(좌)와 게임즈 워크숍의 워해머 40K(우)

대안적인 현실 또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선지자이자 미래의 고고학자이기도 했던 H.G. 웰스가 전쟁 게임에 광적으로 집착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전장의 요소들을 바꿔가며 놀이를 즐기는 워게임 매니아였고, 스스로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제작했을 정도였다. 게티스버그 전투를 묘사한 웰스의 워게임 <리틀 워즈>는 단순히 모형을 가지고 하는 병정놀이가 아니라 엄격하고 복잡한 규칙에 따라 부대를 이동시키고, 포 구경에 따라 성냥개비 또는 몽당연필을 실제로 발사할 수 있는 장치와 태엽으로 움직이는 기관차 등이 구현된 ‘워게임 시뮬레이션’ 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병정놀이를 빙자한 워게임을 즐기는데, <워해머> 시리즈의 매니아들은 직접 제작하거나 구매한 피규어를 갖고 며칠 내내 광적인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문제는 워게임이 시뮬레이션과 놀이 사이에서 교묘히 표류한다는 것이다. 웰스와 같은 편집광은 혼자만의 세계에서 재미있게 게임을 즐길 수 있지만, 모든 놀이는 동료와 상대, 그리고 공동체를 동반한다. 공통으로 적용되는 룰이 없다면 놀이가 될 수 없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시뮬레이션이 명료화되는 과정, 즉 연성화된 규칙과 단순한 절차들의 발명은 시뮬레이션이 놀이로 전화하는 필연적인 의례다. 동료, 또는 상대방과 담소를 나누며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절차는 무엇일까? 순서대로 한 번씩, 한 수씩 주고받는 것이다. 불확정성의 시공간을 일시 정지하고, 그 안에 깊이 들어가 불확정성의 요소들을 조작함으로써 어떤 ‘배치(assemblage)’를 만들어내는 것이 게임의 주된 목표가 된다. 이제 워게임은 역동적인 동시에 정주적인 것이 되었다. 전장에서 정지는 곧 죽음이지만, 워게임에서 정지는 더 복잡한 시뮬레이션을 작동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다. ‘턴제’가 된 시뮬레이션은, 불확정성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현미경이자 놀이를 구조화하는 프레임이 된다.

 


시뮬레이션의 재배치: 시뮬라시옹에서 에르고딕으로


* 헥스타일로 명료화된 시뮬레이션의 지도학. 전쟁을 소재로 하는 보드게임을 넘어 문명, 경영, TRPG등 게이밍 전체를 떠받드는 프레임이 된다.
 

프레임은 단순하면서 단단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소재를 버틸 수 있는 강도를 지녀야 한다. 전자게임이 등장하기 전 단계의 보드게임은 워게임 시뮬레이션이 주조했던 추상적 시공간, 즉 타일 중심의 규칙을 연성화해 다방면에 도입했다. 따라서 입자(atom) 세계의 시뮬레이션이 비트(bit) 세계의 시뮬레이션으로 재편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주사위를 인간이 직접 손으로 굴리느냐, 혹은 컴퓨터가 대신 굴려주고 계산해주느냐의 차이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결과 시뮬레이션을 둘러싼 많은 결과들이 이전보다 훨씬 복잡한 방식으로 대두되게 되었다. 시뮬레이션의 가장 큰 장벽인 자연 연산 부문이 기계 연산으로 대체되면서, 워게임의 딜레마였던 복잡성과 명료성이 교집합을 이룰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디지털 게이밍에서는 불확정성과 결정성의 요소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 확률론적 결정론, 혹은 인과율과 양자얽힘이 공존하는 세계가 곧 디지털 게임의 시뮬레이션이다.

 

*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앤 매직3(좌상), 문명2(우상), 듄2(좌하), 워크래프트2(우하) 시뮬레이션이라는 건축물의 형태가 턴제에서 실시간으로 바뀌어도, 그 프레임인 ‘타일’에 의한 공간직조는 변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원본없는 실재, 초월적 실재인 시뮬라시옹이 물자체로 이뤄진 실재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소비자본주의의 풍경을 두고 ‘실재의 폐허’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 영토에 경계를 긋고 유희의 공간을 창출하는 게이밍의 세계에서 실재의 폐허는 거꾸로 시뮬레이션의 천년왕국이 된다. 시뮬라크르가 더 정교해질수록, 그것들의 어셈블리지가 불확정성과 인과성을 더 광범위하게 포섭할수록 근사한 에르고딕(ergodic)은 골계미를 더해간다. 왜 골계미인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닌 차이의 반복을 통해 프레임의 강도를 더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와 달리 게이밍에서는 아무리 강도 높은 프레임이라 해도 마음대로 형태를 바꾸거나 심지어 재설계할 수 있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은 파도의 강도를 상상하며 모래성을 쌓는 아이처럼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가동시킨다. 그들은 육면 주사위를 던질 뿐 아니라 즐기며, 평균 3에 수렴할 때까지 반복적으로 던진다. 어제는 중국 문명을, 오늘은 영국 문명을, 내일은 인도 문명을 즐길 것이다. 오전에는 외교를 통한 승리를, 오후에는 전쟁을 통한 승리를 추구할 것이며 똑같이 게임을 즐기는 ‘시뮬레이티드 셀프(simulated self)’ 들과 이런 전략을 토론하고, 공유하고, 경쟁할지도 모른다.

 


시뮬레이티드 셀프, 혹은 시뮬레이티드 리얼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웰스의 워게임에서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실시간 전술 시뮬레이션에 이르기까지 시뮬레이션은 패러다임 전환이라 부를만한 변화를 겪은 적이 없다. 웰스가 고안해낸 타일과 턴 기반의 규칙들은 불변하기 때문이다. ‘실시간’은 결국 윤곽선을 가린 타일 위에서 동시에 기물을 움직이는 워게임에 다름아니다. 느긋하게 식사하거나 담소를 나눌 턴이 사라졌기 때문에 전장의 안개(fog of war)가 치열함을 더한 새 요소로 가미되었을 뿐이다. 오히려 실시간 전술 게임은 ‘시뮬레이션’이란 관면에서 보면 인지와 반응속도에 더 의존하는 형식이다. 커맨드 앤 컨커, 스타크래프트 등의 게임은 점점 도태되고 즐기는 플레이어도 점점 줄어드는 반면, 턴 기반의 시뮬레이션 게임은 다양한 변주를 통해 재탄생되고 있는 현실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의 젊은 게이머들은 치열한 실시간 경쟁과 화려한 그래픽보다 오히려 도트 그래픽으로 잘 짜여진 정적인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예컨대 <데이브 더 다이버>), 턴제 시뮬레이션 방식의 게이밍에서 더 큰 새로움을 만끽한다.


* <발더스 게이트3> 와 <재기드 얼라이언스 3>와 같은 전통적인 턴제 시뮬레이션 기반 게임의 선풍적인 인기는 레트로(retro)라기보단 재매개(remediation)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게이밍이 다양한 형식적 실험과 편향을 넘어 고유한 시공간적 프레임을 자아내는 의례로서 시뮬레이션이 대두되고 있다.
 

요컨대 워게임에 열광했던 웰스나, 전설적인 <X-COM> 시리즈, <재기드 얼라이언스> 시리즈, <문명>과 <심시티>를 즐기는 플레이어, 그리고 최근 전대미문의 비평적 성공을 거둔 <발더스 게이트>를 즐기는 플레이어들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보드판 위에서 기물을 움직인다 할 수 있으며, 각자의 컨셉과 설정을 구조화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천년왕국은 더욱 진화할 것이다.


아마도 시뮬레이션의 패러다임 전환은 ‘시뮬레이티드 셀프’에서 ‘시뮬레이티드 리얼’로의 이행으로 이뤄질 것인데, 이는 형식이 아닌 기술을 통해서 성취될 가능성이 크다. 생성 인공지능의 도입은 우리가 게임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비인간 요소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뿐 아니라(예컨대 NPC, 몬스터등이 생성 인공지능을 탑재해 비인간 인격체가 된다고 생각해보라) 함께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들 속에 인게임-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인공지능이 뒤섞이면 어떻게 될까? 핍진성은 실재에 근접하거나 보드리야르가 우려했던 실재의 폐허로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고, 우리는 이를 피할 수는 없다. 엔비디아를 위시한 많은 빅테크가 시뮬레이션 내에서의 비인간 행위자의 가능성을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비트의 밀도가 높아지는 것은 그래픽의 평면이 매끄러워 지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들이 매끄러워지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발더스 게이트>의 몬스터와 동료들이 비인간 인격체라면 우리는 어떤 시뮬레이션을 작동시킬수 있을까? 생성 인공지능과 게이밍의 절합을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의 친애하는 웰스 경은 어쩌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시뮬레이티드 리얼’을 목격하고 돌아와, 투명인간이 된 채 홀로 워게임을 즐기기로 마음먹었을 수도 있다. 앞으로 게이밍과 시뮬레이션에서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시뮬라크르들을 조작하는 주체가 누가 될 것인지, 주도권을 누가 쥘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술미학적 상상력일 것이다.


Tags:

에르고딕, 시뮬레이션, 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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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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